01.
“야. 이놈아 해가 중천인디 아직 쳐 자빠져 자고 있어야? 눈 안 뜨냐!”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차진 욕설에 아랑은 이불을 끌어 머리 위로 덮었다. 화가 난 할머니의 호통이었지만,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그의 입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갔다.
“얼렁 일어나지 못해?”
“할매. 또 거짓말. 중천은 무슨 중천이야. 아직 밖에 시꺼멓잖아.”
독촉하는 말을 몇 번이나 더 듣고서야 미적미적 침대를 빠져나온 아랑은 투덜거리며 흐릿한 거울 앞에 섰다.
“새끼 해가 떴음 중천이지.”
약효가 다 되어 가는지 바깥 테두리 부분이 유독 검어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보다 그 옆으로 거슬리게 달린 눈곱을 떼어냈다.
“오늘은 날래날래 가서 풀 좀 잘 뜯어 오니라. 거 눈알 색깔 바꾸는 것으로 단디 보고. 열 내리는 것도 좀 뜯어오고. 또 독초 뜯어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방에서 나온 아랑은 제 앞으로 불쑥 내밀어지는 쑥색의 환과 나무 물컵을 받아들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 할매. 이거 진짜 쓰다고. 맛있게 꿀도 좀 넣고 그러지.”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작은 환에서는 벌써 꼬릿꼬릿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지랄방구 뀌고 앉아있네. 얼른 처먹고 안 나가?”
하지만 이런 투정을 들어줄 리 없는 로엔을 보며 아랑은 환을 입에 털어 넣자마자 급히 물을 들이켰다.
젠장. 최대한 빨리 삼켜서 맛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는 계획은 오늘도 실패했다.
몸서리치게 만드는 쓰고 떫은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비틀어도 돌아오는 건 로엔이 건네는 망태기였다.
느린 걸음으로 산 입구까지 오른 아랑은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태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늘 좋은 나무 아래에서 푸르른 산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내리쬐던 뜨거운 햇살이 싱그런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은돌아!”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은돌을 부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메아리가 끝나자 두어 번 더 부르고는 선 채로 숲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리 있었을까? 산 초입까지 걸어오느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마를 때쯤 멀리서부터 희멀건 것이 날 듯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랑은 내려놓았던 망태기를 열어 제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빵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몸길이는 4m 정도에 발에서 어깨까지 높이만 해도 1.5m는 됨직한 은회색 늑대가 푹신한 털을 휘날리며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태연한 아랑은 손을 높이 들어 빵을 흔들어댔다.
“후욱. 후욱.”
입을 약간 벌린 채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늑대에게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은 빵을 넣어준 아랑은 내려 놓은 망태기를 어깨에 걸치고 익숙하게 늑대에 올라탔다.
“할매가 약초 캐 오래. 산 중턱쯤 가서 내려줘.”
겨우 빵 하나 얻어먹고 좋다고 산을 오르는 늑대의 목갈기털을 꽉 잡은 아랑은 눈을 꼭 감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즐겼다.
불과 4년 전이었다면,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랑은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생활에 익숙해졌다.
보통 사람의 발걸음으로 두 시간은 족히 올라가야 할 거리를 단번에 올라온 은돌의 등에서 내린 아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보석처럼 빛났다. 조금 더 넓은 공간을 두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을 보던 아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나도 아니고 둘. 지금도 한 번씩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두 개의 태양이 보였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두 개의 태양이 조화를 이루었지만 아랑은 팩하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은돌을 향해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뭐하냐? 안가냐?”
아랑이 편하게 은돌이라 부르고, 키우는 개처럼 부리는 이 늑대는 실상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무시무시한 동물이었다. 동물원에서 본 호랑이보다 훨씬 큰 이놈도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 중 하나였다.
‘설아랑. 어서 일어나, 학교 늦겠다.’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들리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아랑은 여태 가지 않고 앉아있는 은돌의 콧등을 손바닥으로 느리게 쓸었다.
평범하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더 자고 싶어서 엄마와 실랑이하던 것도 반찬 투정하다가 밥그릇 뺏겼던 것도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었다.
엄마가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고생으로 그리 살았을까?
아랑이 세상에 나오기 전 그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16년을 홀로 아랑을 키우며 갖은 고생을 하던 엄마가 떠오르자 그는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그 기억의 시작은 단칸방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늘 어두웠고, 엄마를 기다리며 홀로 잠든 낡고 추웠던 방에 온기가 생겼다. 어느덧 자신만의 방이 생겼을 때 엄마의 차도 TV에서나 보던 그런 고급 차로 바뀌었다.
엄마에게 번듯한 사무실이 생기고 개업식에 참여해 축하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는 일이 잘되어 늘 바쁘던 엄마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그놈이 나타났다.
엄마로 사업자로만 살아오던 그녀를 여자로 본 남자.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본 아랑은 그를 반겼다. 그가 엄마에게 프러포즈하는 걸 도와주며,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평범한 가족으로 산 건 단 1년이지만, 처음으로 가져본 아빠라는 존재는 아랑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주말이면 셋이 여행을 다니고, 다 같이 근사한 음식점에서 외식하고, 스케이트를 타지 못하던 아랑을 아이스 링크에 데려가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 무엇보다 늘 꼬리처럼 따라다니던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날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엄마의 발인 일이었다. 산 중턱 바다가 보이는 멋진 나무 아래 엄마를 모시고 돌아오던 길. 울다 지친 아랑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와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머리는 멍했고, 가슴엔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듯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무리 양지바른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차가운 땅에 엄마를 두고 오는 막막하고 답답한 그의 마음을 아는지, 화창하던 날씨는 점차 어두워졌고 곧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문제였는지 구불거리던 길이 문제였는지 결국 지친 몸은 버티지 못했다. 속이 불편해진 아랑은 새아빠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고 비를 뚫고 차에서 내려섰다.
“역시 하늘은 내 편이네. 뒈지려면 같이 뒈지지. 똑같이 먹였는데 어린놈이라고 역시 어미보다 명이 끈질겨. 네 놈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했는데 고맙다, 진짜.”
지나가는 차도 없는 산속에 있는 갓길. 차가 멈추자마자 급히 뛰어내려 아무 나무나 짚고 헛구역질하던 그의 귀에 새아빠가 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놀라 몸을 바로 하고 뒤돌아서려던 아랑은 강한 힘에 떠밀렸고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멍하니 기억을 더듬으며 은돌의 콧등을 쓸던 아랑은 찬찬히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엔 떠올리기만 해도 분하고 화가 나 미칠 것 같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자, 쓰다듬어 줬으니까 가서 놀다가 부르면 또 와줘.”
은돌이 있으면 안전하고 든든했지만, 은돌이 덕분에 작은 동물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원하는 약초가 어딨는지 알려주는 건 작은 동물들인데…….
가기 싫다는 듯 애교 부리며 아랑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는 은돌의 힘에 절로 옆으로 밀려났다. 애교를 부릴 거면 힘 조절을 하던가, 한번 비빌 때마다 아랑은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옆으로 몇 걸음씩 옮겨야 했다.
“나 약초 캐야 한다고, 너 있으면 우리 꼬마들 못 오잖아. 그리고 내가 부를 때까지 마석이나 하나 주워 와줘. 알겠지?”
진짜 가기 싫은 듯 무거운 엉덩이를 들 생각이 없는 은돌을 보며 아랑은 망태기에서 빵 하나를 더 꺼내 그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자. 먹었으니 다녀와.”
뚱한 표정으로 미적거리며 은돌이 사라지자 어느새 자신의 옆에 몰려든 작은 다람쥐와 토끼를 보며 아랑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기들. 간식 먹고, 오늘도 일해 볼까요?”
망태기에서 나온 맛없는 빵은 부스러기가 되어 주위에 흩뿌려졌고, 삼삼오오 모여 열심히 먹는 동물들을 보며 아랑도 나무 그늘에 앉았다.
불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우유와 동물들에게 나눠 준 것과 똑같은 빵 하나. 이곳에 오기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이 초라한 음식이 이젠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한 끼 식사가 되어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빵을 주워 먹는 동물들을 둘러보던 아랑은 다람쥐 두 마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만고만한 놈 세 마리가 늘 오더니.
“하…… 늘 보던 놈이 안 보이니 그렇네.”
약한 동물들은 당연히 큰 동물들의 먹이가 되는 법. 늘 자신을 도와 약초 찾는 걸 도와주는 동물들은 한결같을 수가 없었다. 빈자리가 있으면, 머지않아 귀여운 새끼 동물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었다.
“아기들아. 오늘은 해열 약초랑 색 변환 약초 찾아야 해. 다 먹고 좀 도와줘.”
열심히 부스러기를 먹는 동물들의 귀가 팔랑거리고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한쪽으로 뛰어가자 아랑은 망태기를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바람 치던 숲속을 마지막으로, 아랑이 눈을 떴을 땐 로엔이 자신의 옆에 있었다.
빗자루처럼 뻣뻣한 붉은 머리카락과 살짝 등이 굽은, 자글자글한 주름을 가진 욕쟁이 할머니. 산속 초입의 작은 산장에 홀로 살며 약초를 캐어 팔던 로엔은 숲속 연못 근처에서 아랑을 발견했다고 했다.
아랑에게 이곳은 심심할 때면 읽던 판타지 같은 세계였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로 제게 말하는 로엔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배운 적도 없는 언어를 제가 알아듣는 건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지금도 믿을 수 없지만, 마법과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이곳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들리는 그놈의 마지막 말과 등을 떠밀던 손길이 느껴져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을 감으면 가위에 눌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시간이 몇 달이나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작고 말랐던 아랑의 몸은 볼 수 없을 만큼 비루해졌다.
그렇게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누운 채 밤낮으로 가위에 눌려 뻣뻣해진 몸으로 흐느낄 때마다 나타난 건 로엔이었다.
“아이고 불쌍한 놈. 왜 이렇게 울어 싸. 울면 네놈만 힘들지. 이거라도 먹고 한잠 더 자보자. 자야 잊지. 잊어야 살지. 이놈아.”
로엔은 아랑의 굳은 몸을 주무르고, 열이 올라 앓을 때면 옆자리에서 부채질하며 같이 밤을 지새웠다. 살 의지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이 공허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며 어둠에 갇힌 아랑을 끌어낸 건 없는 살림을 털어 고깃국을 끓이고 지극정성으로 그 옆을 지켜준 로엔이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득 생긴 아랑의 마음을 깬 새로운 세계의 낯선 사람. 자신을 위해 지극정성의 노력을 해 준 로엔을 위해 아랑은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아랑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끔찍한 맛의 작은 환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괜찮지만, 검은 눈동자는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 태어나자마자 죽이는 것이 이곳의 관습이라 했다. 처음에는 로엔도 그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손주처럼 감싸주었다. 그랬기에 로엔은 매일 아침이면 아랑에게 눈동자 색을 바꿔 주는 약초를 먹였다.
고위급 마법사라면 마법으로 눈동자 색을 바꿔 줄 수도 있다지만, 이런 산골에서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수습마법사조차 만날 수 없으니 이것으로라도 감춰야 한다고 했다.
‘그냥 이러고 다니면 안 되나? 여기선 할매랑 나뿐이잖아. 그리고 마을에 내려갈 때만 챙겨 먹으면 되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내 너를 어찌 살려놨는데. 그라고 싸댕기다가 누구라도 만나서 악마로 오해받고 칼 맞고 뒈져버리면 어쩌려고.’
로엔의 말에 아랑은 두 번 다시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동화 속 마녀라고 오해할 만큼 끔찍한 외모를 가진 로엔은 평생을 떠돌며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그나마 아는 것이 약초 다루는 것이라 이렇게 외딴곳에 혼자 살며 연명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가슴이 먹먹해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이 마을에 정착한 것도 수십 년이 됐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약초를 팔고 생필품을 사러 갈 때면 로엔은 최대한 제 외모를 가렸다. 그런 그녀와 사는 제가 검은 눈동자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도 그녀도 살 곳은 물론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로엔과 아랑. 둘은 서로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깡충거리며 앞서가던 토끼를 따라 걷던 아랑은 멈춰 선 토끼 옆에 소담하게 모여 있는 노란 꽃들을 보곤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망태기에서 호미를 꺼낸 후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해열 약초를 열심히 캐서 담았다.
한 무더기로 자라는 노란 꽃들을 캐면서도 번식을 위해 몇 개를 남겨둔 후 여전히 제 옆에 앉아 그가 약초를 다 캐기만을 얌전히 기다린 토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색깔 꽃 가자. 지난번에 따 놓은 거 내가 잘못 보관해서 상해 버렸어.”
이번엔 어느새 따라온 다람쥐들이 앞다투어 뛰어가자 아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열심히 동물들을 따라다니며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약초를 캐던 아랑은 느리게 일어나서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허리에 걸려있는 구름은 보송보송한 하얀색이 아닌 짙은 회색이었고, 그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엔 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비 올 거 같지? 오늘은 다들 일찍 집에 돌아가고, 다음에 또 만나자. 도와줘서 고마워.”
쫄랑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다니던 동물들이 흩어지는 걸 지켜보며 아랑은 휘파람을 불었다.
“하나라도 더 캐야 할매가 좋아하지.”
뿔뿔이 흩어진 동물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걸 지켜보던 그의 눈에 키 낮은 나무 아래 피어 있는 노란 꽃 보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망태기를 열고 앉았다.
망태기 가득 조심해서 담은 약초들 위로 노란 꽃이 올려지고, 그사이 더 짙어진 먹구름에서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은돌아!”
오늘 길이 편했으면, 궂은 날씨에 내려가는 길은 더 편해야지.
배에 힘을 가득 넣어 은돌이를 부르는 아랑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장대비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고, 은돌이를 타고 빠르게 내려오는 사이 홀딱 젖은 아랑은 잰걸음으로 마당으로 들어섰다.
“너희는 비도 오는데 왜 아직도 나와 있어? 할매는?”
천지도 모르고 비 맞으며 마당을 돌아다니는 닭들을 본 아랑은 빠르게 움직였다. 닭들을 닭장에 몰아넣고 문을 잠그는 아랑의 손길에 성급함이 묻어났다.
비가 오거나 날이 궂으면 마당에서 노는 닭들을 닭장으로 넣는 건 당연했다. 비가 내린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돌아다니는 그 모습에 로엔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걱정이 앞섰다.
“할매! 할매 어디 갔어? 할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문을 벌컥 열며 소리치고 들어선 아랑은 눈을 깜박이며 어두침침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급히 둘러보아도 로엔이 보이지 않자, 아랑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씨부럴 놈. 귀청 떨어지겠네. 어디서 소리를 빽빽 질러 싸!”
약초방에서 나오던 로엔은 아랑이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자마자 짚고 있던 지팡이를 위로 들었다.
“이놈이. 비를 맞더니 미쳤나. 어디서 망태기를 내팽개쳐! 산에서 주신 귀한 거라고 고이 모시라고 했어? 안 했어? 이 빌어먹을 새끼야.”
힘이 없어 지팡이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다는 걸 알지만 어느 때보다 빠르게 욕실로 도망친 아랑은 문고리를 잡은 채 긴 한숨을 쉬었다.
로엔에게 별일이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급히 욕실로 도망치느라 뜨거운 물을 가져오지 못한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나가 그녀에게 욕을 얻어먹느니 찬물에 샤워하기로 결심한 아랑은 씻는 내내 이를 달달 떨어야만 했다.
“돌 새끼도 아니고, 요고요고 노란 꽃. 꽃잎 끝이 하나로 쪽 빠진 거 캐오랬지. 누가 요로코롬 두 개로 헤벌떡 벌어진 걸 캐오랬어? 열이 펄펄 끓어서 해열 약초 찾는 사람 콱 뒈져불게 만들고 싶으냐!”
차가운 물에 겨우 씻고 머리를 털며 나오던 아랑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로엔의 잔소리에 큰 눈을 껌벅거렸다.
노환으로 허리가 굽은 로엔이 조금 다른 노란 꽃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다그치는 걸 본 아랑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16살 어린 나이의 아랑과 쇠약한 노파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나날이 건강이 나빠지는 로엔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아랑에게 남겨 주려 했다. 이 험한 세상에 먹고 살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한다고, 로엔은 그 누구보다 엄격하게 아랑을 가르쳤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늘 노력한다고 노력하고, 열심히 했지만 작은 실수는 종종 이어졌다. 아마도 동물에게 도움받지 않고 마지막에 제멋대로 캐 온 노란 꽃이 문제가 된 것이겠지.
수의사가 꿈이었던 아랑은 로엔과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배우던 중 동물들이 자신에게 유독 친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물들은 아랑이 로엔과 멀어지면 늘 가까이 다가왔고, 말을 걸거나 만지는 것도 유하게 받아 주었다.
어느 날 그들이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다는 걸 알게 된 아랑은 자신의 식사를 나눠 주고는 원하는 약초를 대신 찾아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제가 원하는 것들을 바로바로 찾아주는 동물들 덕분에 아랑은 로엔이 시키는 약초를 구해 왔고, 그 모습에 로엔과 동네 사람들은 그를 타고난 신동이라고 여겼다. 뒤늦게 동물들이 제 말을 알아듣는다고 말했지만, 그 누구도 아랑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좋은 것이 좋은 거라며 여긴 아랑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1여 년을 함께 산을 다니며 약초를 가르쳐 주던 로엔이 더 이상 같이 나갈 수 없게 되자, 혼자가 된 아랑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나게 늑대를 타고 다니고 동물들의 도움으로 희귀약초까지 쉽게 구하며 희희낙락할 뿐이었다.
“어따 또 정신을 빼놓고 다닌 게야? 또 토끼 새끼랑 다람쥐인가 뭐시긴가 핑계 댈껴?”
물끄러미 로엔을 내려다보던 아랑은 그녀의 재촉에 대답 대신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울 할매 생각하다가 그랬나 부다.”
아랑은 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훌쩍 큰 자신과 역으로 작아진 로엔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로엔도 아랑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할매 그만 떠들고 거기 좀 앉아 있어. 내 후딱 불 지피고 밥해 줄게.”
“입 안의 혀처럼 군다고 내 넘어갈 줄 알아? 이게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인데 네 놈이 정신머리 빼놓고 다니다가 송장 잡고 사과하면. 뒈진 놈이 알았다! 할 거 같은겨?”
“알았어. 알았어. 할매 좋아하는 버섯도 따왔으니까. 버섯 수프 해 먹자.”
아랑은 서둘러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4년, 오늘 내린 비가 겨울을 알리는 비라는 것쯤은 쉽게 알았다. 지독히도 길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기 전 겨울맞이를 준비할 시기가 된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약초를 캘 것이 아니라 장작을 주워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라고 요것은 뿌리를 살살 애새끼 궁뎅이 만지듯이 말캉말캉 고리 곱게 파오라고 했는데. 요고 봐라, 요고. 죄다 끊어 먹었어야?”
아랑이 캐 온 약초를 약초방에 가져가지도 않고 식탁 위에 털어 살피는 로엔의 잔소리를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배경으로 아랑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작은 집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밝히고, 난롯불 위에 걸어 놓는 솥단지에 물이 끓기 전에 서둘러 버섯과 채소를 손질했다. 헛간에 들어간 아랑은 한 줌 남은 오트밀을 긁어 손에 쥐었다.
“할매. 내일은 아침 일찍 후딱 산 다녀올게. 오후에는 마을 다녀오자.”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은돌이가 마석을 안 주워 왔다. 무언가 허전하다 했는데. 아랑은 내일 은돌이를 만나면 닦달해서 마석을 꼭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은돌이가 주는 마석이 있어야 없는 집 살림에 고기라도 살 수 있었다
“망할 놈.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더니. 쯧.”
멀건 죽을 마주하고 앉은 로엔의 한마디에 아랑은 훌쩍이며 코를 들이마셨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이해할 수 없지만 툭 내뱉은 그 말이 자신에 대한 칭찬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죽을 이따위로 끓였냐. 오트밀이 아깝다’는 잔소리에 아랑은 새초롬히 로엔을 쳐다보다 숟가락으로 기어이 이마를 한 대 맞고 말았다.
* * *
“다들 오늘따라 왜 그래? 조심해. 조심하고 있잖아.”
늘 메고 다니는 망태기 대신 긴 끈들을 잔뜩 들고 나온 아랑은 유독 뒤를 따라다니는 동물들을 보고는 주머니에 든 빵을 조금씩 떼서 주었다.
어차피 약초를 캘 것이 아니기에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얼른 땔감만 줍고 내려갈 생각이라 한가하게 앉아서 아침을 챙겨 먹을 시간도 없었다.
“나도 어제 비 와서 산길 미끄러운 거 아니까. 조심해서 다닐게. 너희도 날 궂은 데 따라다니지 말고 어서 집에 들어가.”
빠진 녀석 없이 모두에게 빵 조각을 다 나눠 줬는지 확인한 아랑은 주위에 떨어져 있는 긴 나뭇가지 몇 개를 집어 늘어놓은 끈 위로 더 쌓아 올렸다.
도끼질엔 소질 없는지라 작은 손도끼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죽은 나무의 가지를 치거나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주위를 둘러보고 더 주울 것이 없자, 아랑은 긴 끈을 추슬러 그동안 모은 것들을 잘 묶고는 허리를 펴고 목을 쭉 빼 주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아침에 자신을 데리러 온 은돌이 알아서 죽은 나무가 많은 공터에 저를 데려다줬기에 제법 많은 양의 땔감이 모아진 것이었다.
일단 은돌이가 오면 그의 등에 긴 끈을 올려 은돌이가 지고 가게 할 테지만, 그 이후엔 자신이 들고 옮겨야 하기에 추슬러 들어보는 그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 내 인생 진짜 어디로 가냐? 지금쯤이면 수능 치고 미친 듯이 술 마시고 클럽을 쏘다닐 시기에 내일 먹을 식량 걱정이라니. 책 보니 주인공들은 빙의? 차원 이동? 이런 거 해도 팔자 좋던데 역시 소설과 현실은 다르지. 고생한다 해도 당장 내일 먹을 끼니 걱정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지금 무게로 봤을 때, 더 주웠다가는 돌아가는 길이 험난할 것 같아 오늘은 이쯤하고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위에 모여 있던 작은 동물들이 돌려보낸 아랑은 숲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은돌을 불렀다.
“헉……. 젠장. 이 미친.”
부르면 3분 안에 도착하는 은돌이 바람처럼 나타나는 순간 아랑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방금까지 뭘 잡아먹다가 온 것인지 고운 은빛 털에 피칠갑을 하여 유독 붉어진 주둥이를 한 채 피 냄새를 잔뜩 묻히고 나타난 것이었다.
앞에 떡하니 앉아서 길게 하품을 하며 길고 붉은 혀로 입가를 핥는 은돌을 보는 눈동자에 공포감이 서렸다.
“야 이씨. 어서 하품질이야. 입 안 닫아? 양치도 안 하는 새끼가.”
“킹…….”
공포를 느낀 것도 잠시, 아랑은 주먹으로 은돌이의 코끝을 후려쳤다. 진짜 아픈 것인지 아니면 아픈 척을 하는 것인지, 납작 엎드려서 앞발로 코를 덮는 은돌이를 보면서도 콧방귀를 낀 아랑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밥을 먹었으면 뒤처리를 잘하고 오던가. 와, 진짜 애 떨어질 뻔. 거기다 어디서 아픈 척이야. 그 가죽에 웬만한 칼은 들어가지도 않는 거 다 알거든? 내 주먹보다 코도 큰 주제에 엄살은. 이거 빨리 들고 내려가야 해. 오늘 마을에 갈 거라서.”
느슨하게 둔 끈을 끌어 은돌이의 등에 땔감을 양쪽으로 묶은 아랑은 냉큼 그의 넓은 등에 올라탔다. 언제였더라, 은돌이를 처음 만났던 것이.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약초를 잘못 캤다는 이유로 로엔에게 거하게 욕을 얻어먹고 쫓겨난 날이었다. 아랑은 그날, 이전에 키우던 시베리안 허스키와 비슷한 외형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냇가에 쓰러져 있는 동물을 발견했다.
흐느끼는 듯 낑낑거리는 그 소리에 발이 잡힌 아랑은 거의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려갔다.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로엔을 불렀고, 그녀는 은돌을 보자마자 싸리빗자루부터 집어 들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저 큰 개나 조금 더 넓게 보아 늑대 정도라고 생각했던 은돌이 몬스터로 분류되는 다이어 울프라고 했다. 이놈이 정신 차리고 우리를 다 잡아먹으면 어쩌려고 이런 걸 주워왔냐고 타박하면서도, 치료를 도와준 로엔을 생각하자 아랑은 작게 웃고 말았다.
진짜 그때는 이렇게 무식하게 커질지 몰랐지. 그때만 해도 조금 크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 개를 벌벌 떨면서 치료하던 로엔을 보고 왜 그런가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었다.
다 나으면 집에서 키우겠다고 말했다고 같이 쫓겨나고 싶냐는 말에 은돌을 치료한 후 숲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냥 작은 동물들도 아니고 몬스터인 은돌이 따르는 것이 어린 시절 저를 치료하고 구해줘서인지, 아니면 아랑에게 동물 친화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은돌은 아랑이 산을 오를 때면 나타났고,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친구가 되었다.
이제는 성체가 되어 다이어 울프 수장으로 숲의 한쪽을 도맡아 지키고 있는 늠름한 은돌이지만 그래도 아랑에게는 그저 귀여운 강아지일 뿐이었다. 험난한 숲을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이동 도구이자, 귀한 마석을 주워다 주는 강아지.
“그런데 은돌아, 마석은?”
열심히 산길을 뛰어 내려가던 은돌이 주춤하자, 아랑은 있는 쥐고 있던 갈기털을 슬쩍 비틀어버렸다.
“너 고기 처먹다가, 마석도 같이 먹어 버렸지? 뱉어. 뱉어!”
숲에 사는 몬스터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마석은 마법사들의 마법 재료의 필수품이었다. 또한 섭취 시 전체적인 체력향상 효과가 있어 노약자들에겐 건강식, 용병이나 기사에겐 체력향상을 위해 찾는 고급 식재료가 되기도 했다.
은돌이의 주식이 숲에 사는 큰 동물이나 몬스터였으니 간간이 물어다 주긴 했는데, 대부분은 오늘처럼 신나게 먹다가 같이 먹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물이나 몬스터 역시 마석을 섭취함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기에 어쩌면 아랑에게 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홀라당 먹었을 수도 있었다.
은돌은 등 위에서 앙탈을 부리는 아랑을 둔 채 그저 그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열심히 달렸다. ‘오늘도 생각 없이 먹어 버려서 미안, 내일은 꼭 안 먹고 가져올게.’ 아랑에게 전해지지 않는 미안함을 읊조리며.
“으악!”
꽤 안정적으로 열심히 산에서 내려가던 은돌이 급작스럽게 멈췄다. 그로 인해 몸이 앞으로 쏠린 아랑은 은돌의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 작은 나무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너무 정신없는 상황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외마디 비명이 전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휘감은 충격에, 바닥에 대자로 누운 아랑은 큰 눈만 느리게 깜박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뭇잎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져 다시 눈을 꾹 감아야 했다.
저 미친 늑대 새끼가 날 죽이려고, 거기 딱! 기다려봐.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얼마나 바닥에 누워 있었을까? 어제 내린 비가 채 마르지 않은 땅에서 습기가 스멀스멀 올라오자 뒤쪽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멍하니 누운 채 발가락을 꼬물꼬물,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자체적으로 몸에 이상을 확인하던 아랑은 몸을 휘감은 충격이 사라지자 딱히 아픈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나마 푹신한 곳으로 굴렀으니 망정이지, 그곳에 험한 돌이라도 있었으면 대형사고가 분명했다.
벌떡 일어나기엔 아직 여기저기 놀란 근육들이 진정되지 않아 몸을 바로 일으킨 아랑은 은돌을 향해 거하게 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슬금슬금 옆으로 걸어 은돌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편안하게 약초를 캐러 다니고 내 집처럼 돌아다니는 숲이라고 하지만, 실상 이곳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짐승들과 몬스터가 뒤섞인 곳에서 아랑이 돌아다니는 곳들은 주로 은돌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침입자가 있다면 당연히 사납게 쫓아내야 하는 것이 은돌의 일이었고, 그가 상황을 보며 긴장을 한다는 건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뜻했다.
은돌의 옆에 바짝 붙어 한 손으로 그 푹신한 털을 한껏 쥐어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아랑의 시선이 바로 앞 개울가로 향했다.
“뭐야! 사람이잖아.”
개울가 옆 나무에 기대 있는 것이 사람임을 확인한 아랑은 털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을 뺐다. 그들이 있는 곳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외딴곳이었다.
그렇다고 로엔과 아랑이 자주 다니며 물을 긷거나 사용하는 산 초입의 개울도 아니고, 깊은 산과 초입 사이 어중간한 위치였다.
개울가 옆이라 제법 다양한 종류의 약초가 있어 정기적으로 들르긴 하지만, 만약 제가 약초를 확인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오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은돌이 멈춰 서서 아랑에게 발견하게 되지 않았다면……. 이 산속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은색 갑옷을 입은 남자를 보는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아직 아랑에게 낯선 사람은 말 그대로 낯선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이물질이 잔뜩 묻은 은색 갑옷과 힘겹게 나무에 기대앉은 듯한 자세…… 그렇게 기대 있는 허니 블론드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눈이 감겨있지 않았다면, 그 길로 뒤돌아 도망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죽었나?”
아랑의 기준으로 5-6걸음 정도의 폭을 가진 개울을 사이에 둔 채 그가 속삭이듯 은돌에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고개를 가로젓는 행동뿐이었다.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지?”
은색의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기사임이 분명한데,……. 머뭇거리며 개울을 건넌 아랑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제법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기요.”
지저귀는 새소리에 묻혀 버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랑이 손끝을 움직이자 나뭇가지가 상대의 목 근처에 닿았다. 온몸이 갑옷에 둘러싸여 있으니, 건드려 볼 수 있을 만한 곳이 목과 얼굴뿐이었다.
두어 번 더 찔러 보아도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아랑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쪼그리고 앉아 축 처져 있는 남자의 손을 받쳐 잡고 다른 손으로 맥을 짚어 보았다.
손끝을 타고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나 불안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저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둘러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열었다.
깊은 산속을 홀로 다니는 아랑은 꼭 필요한 것들을 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자잘하게 나뭇가지에 긁힐 때도 많고 가끔 잘못 넘어지면 돌에 찢기는 일도 있기에 상비약으로 챙겨 다니는 것이었다.
진흙과 오물이 엉겨 묻은 금빛 머리카락의 한쪽이 유독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본 아랑의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살짝 치워낸 머리카락 아래로 찢어진 이마를 확인한 아랑은 서둘러 옆 냇가로 가 천에 물을 적셔 왔다.
“은돌이 너. 가만히 있어.”
이마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 어떻게든 치료해 주려 움직이는 걸 알아챈 은돌이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겼지만 그걸 뿌리친 아랑은 남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처와 그 주위를 물을 적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내고 그 위로 지혈과 항염에 좋은 가루를 꺼내서 살살 뿌렸다. 더 살펴보려면 갑옷을 벗겨야 하는데, 갑옷을 태어나서 처음 보니 도대체 어떻게 입고 벗는 것인지 원…….
어디 부러진 것이라면 여기서 부목을 대어 고정하고 집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상체를 더듬던 아랑의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딸깍”하는 소리를 들은 아랑은 조심스럽게 상의 갑옷을 벗겼다.
“이게……. 사람이야?”
대충 기대 있는 상태에서도 그의 키나 체격이 크다고 느꼈지만, 갑옷이 몸을 더 크게 보이게 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저 커다란 갑옷을 다 채울 정도의 체격이라니.
대체로 이 세계 사람들은 아랑의 기준으로 키와 체격이 컸다. 기본적으로 여성 성인의 평균 신장은 178cm 정도였고 남성들은 190cm를 넘었다. 거기다 뼈대나 골격도 큰 편이었다.
16살에 이곳에 흘러들어와 20살까지 자란 아랑의 키는 175cm 정도로, 한국인 기준으로 평균에 가까웠지만 이곳 사람들 기준으로는 여성 평균 키와 비슷한 정도였다.
골격조차 가녀린 아랑을 보며 로엔은 가끔 눈가를 붉히곤 했다. 한창 클 나이에 자신이 제대로 못 먹여서 그리 키우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지는 것이었다.
기절한 기사의 건장한 체격에 놀라는 것도 잠시, 우여곡절 끝에 입고 있던 갑옷 하의까지 다 벗긴 아랑은 간간이 자신의 옷깃을 물며 행동을 방해하던 은돌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좀 있어 봐. 다행히 어디 부러진 거 같진 않고, 머리를 어디 부딪치면서 기절한 것 같으니까. 이제 이 사람 네가 업어.”
2m는 족히 될 것 같은 키에 넓은 어깨와 큰 체격까지 갖춘 기절한 남자를 집으로 데려가기는커녕 제대로 일으켜 세울 자신이 없었다. 대신 아랑은 혀를 빼물고 앉아있는 은돌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사람이 무서웠다. 자신의 앞에서 환한 얼굴로 친절하고 다정하던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하지만 다친 사람을 숲에 버리고 갈 만큼 모질지 못한 아랑은 결국 발을 들어 못 들은 척하는 은돌의 다리를 퍽 하니 찼다.
“야! 어디 가냐고!”
아랑의 소리에 은돌은 결국 지금껏 짊어지고 있던 땔감들을 풀어놓고 남자를 업었다.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솜 주먹을 마구 휘두르고, 작은 발로 저를 퍽퍽 차는 아랑이었다. 그가 때리는 것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려 놓고 아파서 낑낑거리는 것이 지켜보기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위험한 사내를 아랑의 집으로 데려갈 수 없던 은돌은 오히려 산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랑은 산 안쪽으로 향하는 은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평소엔 좀 굼뜨고 미련한 것 같지만 말은 잘 듣더니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아픈 사람을 데리고 산으로 더 들어가서 어쩌자고.
잰걸음으로 따라가는 아랑이 소리치고 툭툭 건드려도 은돌은 묵묵히 숲으로만 들어갈 뿐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제가 사는 동굴이었다.
“하, 그래. 일단 어디로 들어오긴 했으니까.”
어떤 것으로도 은돌을 이길 수 없었던 아랑은 동굴 한쪽 편평한 돌 위에 몸을 흔들어 남자를 툭 떨어뜨리는 은돌의 행태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 못 하고 손도 못 쓰는 동물에게 조심히 다루라고 해 봤자 소용없기에 허리 한쪽에 대롱거리고 매달려 있는 물통을 풀었다.
세상에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어딨겠어. 은돌이 먹거나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한 아랑은 수건에 물을 적셔 엉망인 남자의 얼굴부터 천천히 닦아냈다. 큰 체격에 비해 작은 얼굴. 잔뜩 묻은 오물들을 닦을수록 드러나는 반듯한 외모에 아랑의 입술이 점점 앞으로 튀어 나왔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유복자로 자라며 사람들의 이유 없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하물며 다른 세계에 떨어져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그런 곳에 떨어졌다. 그래서 갖은 고생 다 하고 사는데.
이 키에, 이 비율에 이 외모라니. 거기다 기사 직급이면 이 세계 최고 신랑감이 아니던가? 그리고 분명히 일부러 건든 건 아니지만 갑옷을 벗기면서 본의 아니게 더듬게 된 거기……. 그래, 거시기. 그러니까 죽어 있는 그곳의 사이즈가, 그게 확실한 건가요?
그럼 그게 살아나면……. 헛된 생각이 들자 아랑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물이 모두 닦여나가자, 각자의 자리에서 선명하게 자기주장 잘하고 있는 완벽한 이목구비를 감상하듯 한 번 더 본 아랑은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그의 팔다리를 주물러 보았다.
약초꾼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아픈 곳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했다. 그랬기에 로엔은 약초와 함께 이곳의 기본적인 의술도 아랑에게 가르쳤다.
“이 형님, 근육도 죽이네.”
살집도 없고 단단하게 잘 짜여 있는 근육과 무거워서 그 자리에 버리고 온 갑옷이 확실히 몸을 잘 보호해 주긴 한 것 같았다.
“진짜 머리 찢어지고 기절한 것 같은데 어쩌나……. 먹는 약 같은 건 집에 있는데.”
아랑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동굴 입구에 앉아 있는 은돌을 바라보았다.
“너 가서 그거 갑옷 다 물어와. 보아하니 네가 이 사람 집으로 데려다줄 거 같지는 않고. 여기 모닥불이라도 하나 피울 동안 다녀와. 알겠지?”
무거운 엉덩이가 들썩이고 늘 기분 좋게 한들한들 흔들리던 꼬리가 바짝 아래로 내려간 것이 좀 찜찜했으나 은돌이 다시 산을 내려가는 걸 본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로엔과 마을에 갔다 와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동굴 근처를 돌아 나뭇가지를 주워 온 아랑은 부지런히 모닥불을 피워 냈다. 아직 춥진 않지만, 밤이 되면 자연히 온도가 더 떨어질 테고 아픈 사람은 몸을 따뜻이 하는 게 먼저였다.
“이봐요, 약까지 은돌이를 시킬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가서 약 좀 가져올게요. 잠시만 혼자 있어요. 적어도 걔가 잡아먹거나 해치진 않을 거예요. 나 없는 동안 은돌이 보고 놀라…… 헉!”
안정적으로 모닥불이 피워지자 누워 있는 사람의 옆에 앉은 아랑은 그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조용히 말을 했다. 손바닥 아래로 일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을 확인하고 손을 떼려던 순간, 그는 덜컥 잡힌 손목에 놀라 하던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까지 곱게 감겨 있던 눈이 떠졌고, 청록색의 눈동자가 아랑을 응시하고 있었다. 묘한 빛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청색과 녹색이 교묘하게 섞인 눈동자는 홀리듯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였다.
상대도 자신만큼이나 놀랐는지, 미처 떼지 못한 손을 통해 안정적이던 심박 수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안녕하세요. 그게 개울가 근처에 제가 쓰러진 걸 모시고 와서……. 어디 크게 다친 건 아닌…….”
잡힌 손목이 너무 아파 뿌리치고 싶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더듬더듬 말하던 아랑은 다시금 스르륵 감긴 눈과 함께 사라진 손목의 고통에 눈을 깜박거렸다.
또 기절한 건가.
아픈 손목을 내려다본 아랑은 선명하게 남는 손자국을 보고 혀를 차며 반대편 손으로 아픈 손목을 매만졌다. 이거 분명히 멍들겠네.
때마침 갑옷을 물어온 것인지 철그렁거리는 소리에 뒤돌아본 아랑은 터덜거리며 은돌에게 다가갔다.
“수고했어. 일단 나 좀 집에 데려다줘.”
로엔에게 오후 약속을 변경하자고 말하고, 약과 먹거리를 가지고 다시 올라와야 할 것 같았다. 한번 깨어난 거 봤으니 잠시 혼자 둬도 괜찮겠지.
안정적으로 평소보다 느리게 내려가는 은돌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지친 아랑은 넓은 은돌의 등에 철퍼덕 엎드려 눈을 감았다. 편히 엎드린 아랑은 눈을 감은 채,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자신을 보던 눈동자…….
로엔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로엔은 귀가 따갑도록 계급 사회에 대해서 말해 줬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을 했다가 들었던 욕이 뭐더라? 철저한 신분·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아랑은 천민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그저 풀이나 뜯어 파는 약초꾼.
“높은 사람을 보면 절대 눈을 맞춰서는 안 되는겨. 그날로 눈깔 파이고 목 날아가니께. 걍 밖에 나가면 땅 만 보고 다닌다. 그리 생각하라고.”
아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한번 쓸어 보았다. 기사라면 귀족임이 분명했다.
만약 다시 기절하지 않았다면 불경스럽게 눈을 빤히 보았다는 이유로 절 죽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선명하게 올라온 멍 자국을 본 아랑은 뼛속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 손힘이라면 단번에 제 목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꼬이고 이상하게 되는 날.
이제 반나절이 지났는데 진이 빠진 아랑은 은돌이 더 내려올 수 없는 숲 초입에 내려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굴러떨어진 충격이 이제 나타나는 것인지,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냥 따뜻한 이불 덮고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차가운 돌 위에 눕혀 놓고 온 사람이 떠오른 아랑은 머리를 잘게 흔들어 스멀스멀 파고들던 귀차니즘을 쫓아냈다.
“할매! 할매, 오늘 마을 못 가. 나 산에 또 갔다가…….”
집에 다다르기도 전 엉성하게 얼기설기 둘러진 낮은 나무담장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모퉁이를 돈 아랑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마을에 내려가야지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왜 우리 집 앞에 모여 있는 거지?
좁은 마당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길가에 서 있을 정도로 적잖은 이들이 아랑의 집을 감쌌다. 웅성거리던 많은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아랑은 다시 뒤돌아 산으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알겠는데, 차마 앞으로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서 있는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손길이 끔찍한 소식을 가져다주는 악마의 손처럼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들어가 봐.”
늘 아랑과 로엔을 불쌍히 여기며, 같은 가격이라도 덤을 잔뜩 올려주던 식료품 가게 아줌마의 낮은 목소리에도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양쪽으로 갈라선 사람들의 시선과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아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누군가가 삐걱 소리를 내며 열어주는 문을 통해 흘러나온 퀴퀴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자 아랑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초 냄새에 찌들어 있는 이 묘한 느낌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물기가 아른거려 아랑은 팔을 들어 거칠게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아무리 문질러도 물기가 사라지지 않자, 아랑은 닦아내는 걸 포기했다.
“어서.”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밀며 재촉하자 무거운 아랑의 발걸음이 집으로 향했다.
“왔누?”
이게 아니잖아, 할매. 걸걸하고 더 크게 버럭 소리 질러야지. 애새끼, 일찍 다녀오라니까 해가 중천이 되도록 어딜 그리 싸돌아댕기다가 이제야 기어들어 오냐고 욕해야지.
제가 들어오는 걸 알았는지, 작은 오두막에 들어서자마자 힘 빠진 로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랑의 턱에 힘이 들어갔고, 질끈 깨물고 있던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까지 온 아랑은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힘없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로엔의 손이 볼에 닿았다. 아랑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겹쳐 자신의 볼에 더 가까이했고, 다른 손으로는 거칠고 앙상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쿨럭. 박복한 년이 그래도 말년에 복 있다더니. 내 새끼 얼굴은 보고 가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로엔이 힘겹게 기침을 하자 울컥 쏟아져 나온 피를 보면서 아랑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벌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고, 계속 눈앞이 흐려져 로엔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마법사 프레데릭…… 베르…….”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에 아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널 원래 세계로…….”
몇 마디 내뱉는 것도 힘겨웠는지 로엔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고……맙다.”
“할매, 사랑해. 고마워. 나 진짜 잘살 거야. 내 걱정하지 마. 진짜 멋진 놈 될게. ”
잡고 있던 로엔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지자 아랑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참고 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아침을 먹다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엄마를 보고 놀라 아무것도 못 했었다. 급하게 119를 부르고 하얗게 질려 가는 엄마의 옆에서 울기만 했던 것이 가슴에 맺혔었다. 날 두고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원치 않게 자신을 떠나게 된 엄마에게 해 주고 싶던 말들…….
“가서 나 지켜 봐줘. 나 진짜……. 잘 살 거니까. 할매, 이제 편안해도 돼.”
이번에는 소중한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었기에 울부짖으면서도 아랑은 소리쳤다. 그러나 목소리를 크고 작게 조절할 수도 없고, 울음을 참을 수도 없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흘러내리는 로엔의 손을 끌어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대며 소리치던 아랑의 눈에 로엔의 흐린 미소가 보였다. 자신의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힘없이 쳐지고, 로엔이 다시 눈을 뜨지도 않았지만 아랑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전할 때도 아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 손을 놓으면 영영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으니까.
“이제 보내드려야지. 아랑아.”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아랑은 누군가가 건네주는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왜……. 왜.”
오두막에 몰려 있었던 마을 사람, 힘겹게 말을 잇던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이유를 알 수 없는 각혈.
자신이 없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가슴이 먹먹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해 주는 걸 들으면서 아랑은 수건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노환으로 죽었다면, 놓아주기 쉬웠으리라.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던 엄마에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복된 같은 상황에서, 두서없지만 아랑은 로엔에게 이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은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았다.
그들의 설명을 다 들은 아랑은 숲을 향해 뛰었다.
“은……. 은…… 은돌…….”
은돌이를 큰 소리로 불러야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소리치려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헛바람 소리였다.
멀리 가지 않았던 걸까? 옆 풀숲에서 느리게 걸어 나오는 은돌을 본 아랑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푹신한 털에 얼굴을 묻어 버린 채 은돌이 어딘가로 열심히 뛰는 걸 느끼면서도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건가?
저를 내려준 곳이 동굴 앞임을 안 아랑은 손을 뻗어 은돌의 콧등을 툭툭 두드렸다. 정신이 없어서 다친 사람을 위한 약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태로 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었기에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애써 힘을 낸 아랑의 어깨는 곧바로 아래로 쳐졌다.
비어 있는 돌. 누군가 의도적으로 짓밟아 끈 것을 보이는 모닥불.
“흑……. 흐읍. 흐……앙!”
누르고 눌러서 참고 있던 울음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하늘 아래 또 혼자가 되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너무 허망하게 자신을 떠나고,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아랑은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감추지 않은 채 모두 뱉어냈다.
정기적으로 마을을 돌며 가가호호 확인을 하는 세관들이 아랑이 없는 사이 집에 들이닥쳤다고 했다. 겉으로는 집 상황을 확인하며 올해 세금 추징금을 측정하기 위해 다닌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그 이상 무언가를 찾는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마을을 거칠게 뒤집은 세관들이 외딴곳에 떨어진 아랑의 집으로 가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왔다고 했다. 그냥 둘러보았던 다른 집과 다르게 아랑의 집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찾는 듯 난장판으로 뒤엎었다.
그걸 보다 못한 로엔은 분명 갖은 욕을 하며 그들을 말렸을 것이 뻔했다. 한낱 가진 것 없는 천민 주제에 관공서에서 일하는 세관들에게 악을 쓰고 대들었으니. 거기다 로엔이라면 그들에게 악담을 퍼부었을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욕설과 구타였다고 했다.
집을 완전히 뒤엎은 후에야 아무것도 찾지 못한 세관들이 떠났다. 쓰러진 로엔을 추스른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드리운 죽음을 그림자를 읽었다고 했다.
얼마나 울었을까? 더는 울 힘도 없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 있던 아랑은 자신의 옆으로 몸을 붙여 엎드려 온기를 나눠 주고 있는 은돌을 툭 쳤다. 소리는 나오지 않는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세관원. 사라진 다친 기사.
느리게 몸을 일으킨 아랑의 시선은 동굴 밖으로 향했다. 어두운 동굴 안과 다르게 확 트인 시야에 붉은 노을과 푸르른 어둠이 섞여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점점 짙어지는 푸른색과 함께 하늘에 보석들 박은 듯 빛나는 별들이 피어나고 두 개의 달이 완전히 떠올랐다.
“프레데릭…… 베르.”
정신없는 그 상황에도 다행히 한 사람의 이름이 정확히 뇌리에 박혀 있었다.
‘망할눔. 그리 돌아가고 싶으냐.’
‘당연하지, 할매. 피자, 햄버거, 스파게티, 치킨, 휴대전화, PC방, 코인노래방, 만화책. 하-. 진짜 여기서 무슨 재미로 사냐.’
‘네 놈이 그리 가고 싶다는데, 이 할매가 알아보마. 가고 싶으면 가야지.’
대마법사라고? 그래서 그 사람 찾아가면 나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런데 할매. 나 돌아가서 뭐해? 거긴 죽여 버리고 싶은 사람만 있어. 가서 그 사람 죽여 버릴까? 고생만 하던 우리 엄마. 약 먹여서 죽이고, 난 벼랑 끝으로 밀어버린 그 사람 찾아서 벌 받게 할까?
그런데 그리고 나면? 한국에도 여기에도 난 혼자인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과 달을 보는 아랑의 얼굴은 여전히 눈물로 가득 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