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5)

02.

“더 챙길 건 없고?”

아랑은 다정하게 물어주는 사람들의 말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로엔과의 추억이 가득한 이곳엔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대로 프레데릭 베르를 찾으러 떠날 생각이었다.

멀리 떠나는 길이었지만 아랑이 챙길 것이라고는 옷 두어 벌과 귀한 약초 몇 가지, 은돌이 물어다 준 몇 개의 마석이 전부였다.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이 멈추자, 아랑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집에 불을 놓았다. 나무로 지은 작은 집은 금세 불에 휩싸였다. 로엔이 누워 있는 방까지 불이 옮겨붙는 것을 보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담담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불길에 집이 무너져 내렸다. 아랑은 모든 것이 검은 잿더미로 변해 작은 불씨마저 사그라질 때까지 지켜봐 준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어디로 가는 거야?”

“라이엔부르크로 가려고요.”

“거긴 너무 춥고 험하잖니. 산세도 여기보다 험하고. 수시로 토벌하지 않으면 마을까지 습격할 만큼 몬스터가 있는 위험한 곳이야.”

“로엔이 남기고 간 일 하려고요.”

저를 안쓰럽게 보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아랑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 했다.

정말 프레데릭 베르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반대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이곳에 영원히 덩그러니 남겨질 수도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와서 겨우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로엔도, 다 쓰러져가는 집도 검은 재와 하얀 연기로 사라진 지금 이제 아랑에게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곧 닥쳐올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몰랐지만. 아랑은 로엔의 말을 듣고 싶었다. 뭐가 됐든 일단 그 사람을 찾아야 했다.

라이엔부르크는 매년 겨울이면 마을을 습격하는 험한 동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토벌대가 움직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돕기 위해 마법사들이 상주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아랑의 그곳이 아랑의 첫 목적지가 된 것이었다.

바로 대마법사를 만날 순 없으니, 수습마법사라도 만나서 조금씩 정보를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아랑은 다시 숲으로 향했다. 삯을 내고 마차를 얻어 타고도 돌고 돌아 1달은 족히 걸리는 라이엔부르크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 아랑은 은돌을 타고 알페른 산맥을 넘을 생각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어설프고, 서럽고 짜증 나는 게 지금 같은 상황일까?

아랑은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려 있는 은돌의 품 안에서 몸을 꼬물거리고 움직여,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 노력했다.

늘 은돌을 타고 다녔으니, 산 하나 넘는 것도 별 것 아니라 여겼다. 은돌이 돌아다니면서 가꿔 놓은 집 앞의 산과 무법천지 깊은 숲은 아랑이 생각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준비해 온 빵도 떨어지고, 약초에 대해 배우면서 알게 된 식용 가능한 과일만 따서 먹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무엇보다 밤이 깊어지자 위협하는 듯 주변을 울리는 알 수 없는 날짐승과 몬스터의 울음소리는 그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 금세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 햇살이 눈을 비추자 머리끝까지 짜증이 올라왔다. 커다란 앞발로 자신을 감싸고 몸을 움직여 그가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따뜻하게 지내게 해 주려는 은돌이 고마워 아랑은 푹신한 털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고민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알페른 산맥을 건너 라이엔부르크에 도착한다고 해도 마땅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병도 아니고, 기사 수업이라는 건 말로만 들어본 아랑이 토벌대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라이엔부르크에 대한 정보라고는 겨울이 엄청나게 길고 미친 듯이 춥다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려고 노력하던 아랑은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려고 노력할수록 달아나는 잠에 이러고 누워 있느니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 빨리 라이엔부르크에 도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넌 어떡하지?”

잠자리를 정리한 아랑은 자신을 태우고 천천히 걷는 은돌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쓰다듬었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쩍 뒤돌아보는 그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어릴 때 구해줬다는 이유만으로 떠나는 아랑과 동행해 준 은돌이었다.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그 지역 대장으로 살라고 해야 하는지, 자신이 머물게 되는 곳 근처에 새 터전을 잡으라고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식한 놈. 뭐 믿고 좋다고 또 따라와서 이 고생이야.

아랑은 부드러운 털을 한번 쭉 잡아당겼지만, 조심스럽게 산길을 헤치고 걷는 발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꼬박 사흘을 달려 알페른 산맥을 넘은 아랑은 산 아래 냇가에 도착하자 은돌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나름 편안하려고 가지고 온 옷가지들을 죄다 은돌의 등 위에 올려 안장 아닌 안장을 만들었지만, 오랜 시간 그 위에 앉아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이 말랐는지 허겁지겁 내려가 물을 마시는 은돌을 보며 제 자리에서 맨손 체조를 간단히 하던 아랑의 몸이 한순간 딱 멈췄다. 어둑하게 해가 지는 시간,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그런 낮은 수풀 속에서 검은 형체가 아랑의 눈에 들어왔다.

검고 둥근 것 같은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검은 돌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그것은 아랑의 시선을 끌었다. 산 초입이니 험한 몬스터는 없을 것이기에 아랑은 여전히 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은돌을 한번 보고는 발소리를 죽여 그곳으로 다가갔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푹신한 나뭇잎 아래 마른 나뭇가지가 깔려 있었던 듯, “빠작” 하는 파열음에 검은 형체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아랑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수풀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작은 동물일수록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강하기에 큰 체격과 큰 소리를 내는 건 그들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아랑의 목소리를 들은 듯 검은 형체가 더 크게 움직이며 옆으로 가자 급히 두 손을 수풀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

동글동글 공도 아니고, 매끄럽고 차가운 피부 아래로 단단한 것이 만져지자 아랑은 손을 들어 그것을 풀숲에서 꺼냈다.

짧은 두 팔과 볼록 튀어나와 귀여운 배, 짧은 다리에 앙증맞게 달려 있는 날개까지 본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거 아무리 봐도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드래곤이랑 똑같이 생겼네.

아랑이 아는 드래곤이란 존재는 산맥 하나를 아지트로 삼았다.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성격이 포악하다고 했다. 드워프를 닦달해 으리으리한 레어를 짓고 그 안엔 금은보화를 잔뜩 쌓아 놓고 사는, 전 세계 통틀어 넘사벽 짱먹는 생명체였다.

그런데 얜 왜 이렇게 하찮고 귀엽지? 두 손에 좀 넘칠 듯 꽉 찬 미니멀한 사이즈에 짧은 주둥이를 꼭 닫고 까만 눈동자만 또록거리고 있는 걸 본 아랑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손을 높이 들어 눈앞으로 가져와 구경하던 아랑의 눈동자와 갈 곳을 읽고 방황하던 까만 눈동자가 마주쳤다. 순간 “켈록” 작은 주둥이가 열리고, 새끼손톱보다 작은 불길이 살짝 일었다 사그라드는 걸 본 아랑은 거침없이 입술을 쭉 내밀고 작은 생명체의 볼에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까망아. 넌 까망이 하자.”

짧은 앞발이 버둥거렸지만, 마음껏 뽀뽀를 퍼붓고 얼굴을 비비던 아랑은 그사이 이름까지 마음대로 지어버렸다.

“은돌아! 친구 생겼어. 친구.”

손으로만 받치고 있던 까망을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 냇가에 있는 은돌에게 다가간 아랑은 은돌의 앞에 까망이를 불쑥 내밀었다.

“크엉.”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라고 정말 바닥에서 1m는 넘을 듯 확! 뛰어올라 뒤로 물러나는 은돌을 보며 아랑은 깔깔거리며 웃어 버렸다. 덩치는 산만한 게 동네 강아지만 한 애를 보고 놀라냐.

“덩칫값 좀 해라. 아! 그런데. 너 혹시 엄마 잃어버렸다거나 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저 좋다고 덜컥 이름 짓고 데리고 가려고 했던 아랑은 머뭇거리며 옆에 까망이를 내려놓았다.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보더라도 절대 덥석 줍지 말라던 것이 떠올랐다. 어미가 이곳에 두고 먹이를 구하러 갔을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까망이도 그런 걸지도 몰랐다.

“삐이-.”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까망이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자신 쪽으로 걸어와 바짓단에 얼굴을 문지르는 것을 본 아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귀여워! 귀여워! 

처음 만났을 때 은돌이도 귀여웠지만, 이제는 성체가 되어 늠름하거나 멋지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바짓단에 얼굴을 문지르다 발아래 있던 까만 돌이 움직여 휘청이다 발랑 뒤집어진 그 하찮은 모습에 아랑은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엄마 없으면 나 따라갈래? 그런데 너도 나중에 저렇게 커지는 건 아니지?”

누워서 바동거리는 것을 바로 세워준 아랑은 손끝으로 매끈한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손바닥을 뭉툭한 주둥이로 미는 까망을 주워 든 아랑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은돌을 바라보았다. 

“너 가서 애 엄마 있는지 찾아보고 와. 엄마 없음 우리가 데리고 가자. 이제 밤도 되고, 겨울도 오는데 혼자서 지내다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잖아.”

해가 지고 기온이 떨어지기에 추위에 떨 것을 걱정한 아랑은 상의 안으로 까망을 밀어 넣고 받쳐 안았다. 날렵한 목선 옆으로 까망의 얼굴이 쏙 올라왔고, 그 까만 눈은 어느새 은돌을 향하고 있었다.

은돌은 얼른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는 뒷걸음질 쳤다. 멍청한 아랑은 지금 숲의 주인에게 어떤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냐고. 그가 당장 여기서 본체의 기운을 조금만 흘려도 아랑은 즉사였다.

은돌이 아랑을 지켜주고 싶어도 그건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 바퀴 돌고 오너라.’

이도 저도 못 하던 은돌은 뇌로 파고드는 음성에 망설임 없이 뒤돌아 미친 듯이 산을 뛰어 올라갔다. 숲의 주인님이 왜 이곳에 저런 모습으로 있는지 은돌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랑을 지켜줄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무서운 숲의 주인 앞에서 벗어난 것과 함께 그분이 아랑을 선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은돌은 신이 나 날뛰었다. 마구 뛰어다니다 발을 헛디뎌 쭉 미끄러져 내렸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다. 

한참을 숲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런데 언제 돌아가지? 언제 돌아오라는 말은 듣지 못한 은돌이었다.

산으로 들어간 은돌이 돌아오지 않자, 아랑은 까망이를 내려놓고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해가 졌기에 오늘 하루 더 노숙하고 내일 마을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냇가의 돌을 둥글게 모아 놓고 그 안으로 마른 장작과 나뭇가지들을 주워 넣은 아랑은 머리에 찬 주머니를 열어 부싯돌을 꺼냈다.

호기롭게 부싯돌을 집어든 아랑은 쌓아 놓은 장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불이 붙지 않자 아랑은 조금 뒤로 물러서 아픈 두 손을 털었다.

“후욱-.”

옆에서 아랑이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까망의 입에서 반짝이는 불길이 잠깐 치솟았다. 그와 함께 마른 장작에 불이 붙고 이내 활활 타오르는 걸 보는 아랑의 눈에 환희가 일렁였다. 이제 어디에서 살든 불붙이는 것으로 고생할 필요는 없겠구나. 아랑은 망설임 없이 까망이를 잡아들고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그런데 넌 뭐 먹어?”

먹거리라고는 은돌과 산을 내려오면서 보이는 대로 따온 과일이 전부였다. 은돌은 알아서 산에 올라 배를 채우고 내려왔지만, 자신의 하는 행동을 내내 지켜보던 까망이 신경 쓰였다.

과일들을 까망의 앞에 내려놓아도 그가 냄새를 맡기는커녕 신경도 안 쓰자 아랑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래곤의 미니어처처럼 생겨서는, 식성이 뭔지 몰랐지만 일단 과일에 관심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문득 아랑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가던 잠자리 한 마리를 낚아챘다.

“이건가?”

언제 돌아가야 할지 몰라 결국 배를 채우고 슬렁슬렁 냇가로 내려온 은돌의 발걸음이 멈췄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과일을 먹고 있는 아랑 옆에 앉아 있는 숲의 주인을 보자 절로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려들었다.

굳이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드는 아랑을 못 본 척할 수 없기에 슬금슬금 최대한 멀리 돌아 까망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엎드린 은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숲의 주인 앞에 놓여 있는 각종 과일 옆에 있는 각종 벌레.

“까망아. 밥 먹어야지. 그래야 쑥쑥 큰다. 혹시 고기 좋아해? 은돌이 보고 고기 가지고 오라고 할까?”

아랑은 몰랐지만, 은돌은 보고 말았다. 

숲의 주인이 한숨을 쉬며 느리게 움직여 작은 과일 하나를 먹는 것을. 

“오! 까망아. 옆에 잠자리도 있잖아. 골고루 먹어야 해.”

숲의 주인의 눈동자가 떨리며 쌓인 작은 곤충들을 보자 은돌은 벌떡 일어나 실수인 척 모아놓은 곤충들을 발로 헤쳐 버렸다.

“야 이, 미친. 내가 그걸 얼마나 힘들게 잡았는데. 이 새끼! 당장 이리와!”

로엔과 살면서 늘어난 건 거한 욕인 아랑이 육두문자와 함께 과일을 은돌에게 날아들자, 은돌은 훌쩍 숲으로 몸을 날렸다.

‘수고했다. 한쪽에 자리 잡거라.’

머릿속으로 파고든 짧은 한마디에 은돌은 소리 내어 웃으며 숲을 굴렀다. 아랑을 태우고 숲 아래로 내려올수록 은돌은 초조했다. 이미 다양한 짐승과 몬스터들의 영역 표시가 가득한 이곳에서 좋은 자리는 쉽게 넘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랑이 마을로 돌아가면 목숨 걸고 영역 다툼에 들어가야 하던 은돌이 먹거리가 넘쳐나는 황금 구역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늦은 밤 돌아온 은돌과 까망을 꼭 끌어안은 채 아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 옆에 사람은 없지만 이런 동물 친구들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아침 이슬을 맞으며 일어난 아랑은 가슴팍을 더듬어 안쪽에 있는 비밀 주머니를 꺼냈다. 눈 뜨자마자 영양제를 챙겨 먹는 현대인처럼 잊지 않고 눈동자 색 변형을 해 주는 쓰디쓴 환을 먹은 아랑은 비틀거리며 냇가로 가 차가운 냇물에 머리를 푹 집어넣었다.

“아으!”

많이 서늘한 날씨였지만, 생각 없이 물속에 머리를 거꾸로 처박은 아랑은 순간 파고드는 냉기에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잠을 화끈하게 날리는 것과 더불어 비누도 없으니 세수와 머리 감기를 3초도 안 된 시간에 끝낸 것이었다.

그 모든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까망의 시선이 은돌에게 향하자 은돌은 모른 척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약간 모자라는 놈인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냥 생명의 은인이라 모시고 지냈을 뿐.

“으. 춥다. 은돌이는 근처 숲에서 잘 지낼 수 있겠어? 한동안 여기서 지낼 생각이라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괜찮아.”

손을 머리카락 속으로 넣어 맺힌 물방울을 털어낸 아랑은 앉아 있는 은돌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담담하게 말한 아랑은 긴 주둥이를 자신에게 내밀고 목덜미며 볼이며 얼굴에 푹신한 털을 가져다 대는 은돌의 행동에 작게 웃었다.

어릴 땐 혀로 핥는 것도 좋다고 뒀지만, 어느 순간 커버린 은돌이 한번 핥을 때마다 얼굴 전체가 침 범벅이었다. 거기다 머리카락을 쩝쩝거릴 때면, 방금 씻고 나온 머리카락에서 피어나는 꼬릿한 냄새를 참을 수 없어 호되게 혼냈었다.

그 뒤로는 이렇게 마구 비비는 것이 인사가 되었으니, 아랑은 두 팔로 은돌을 안고 그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생각나면 여기 와서 이름 불러볼게. 혹시 들리는 곳이면 와주면 좋겠어. 까망이는 여기 들어가. 같이 마을에 가자.”

짧은 인사를 나눈 아랑은 작은 날개로 자신의 눈높이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까망이를 보았다. 그리곤 메고 온 망태기를 열어 보였다. 동물을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대충 여기라도 들어가 조용히 있으면 되지 않을까? 설마 이것까지 열어 보라고 하겠니?

아! 외부인이라 그럴지도 모르니, 그럼. 옷가지 밑에라도 들어가는 게……. 분명 들어가라고 말했는데 왜 갑자기 하늘 위로 날아가는 거니? 까망아? 어디 가니? 집에 가니? 날 버리는 거니?

“들어가.”

재촉하듯 말하자 까망은 자신을 향해 작은 불꽃을 쏘고 망태기로 들어갔다. 그것을 아랑은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딱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까망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투덜대면서 찡찡거렸을 것 같았다. 까망이 불편하지 않게 옷을 살짝 덮은 아랑은 자신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는 은돌을 보았다.

“얼른 가. 잘 먹고 잘살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혹시 내가 대마법사님 못 만나고 한국으로 못 돌아가더라도 나 진짜 성공할 테니까! 나중에 으리으리한 집 사서 너 들어갈 만한 우리 지으면 그때 꼭 같이 살자.”

마을 쪽으로 걸어가는 아랑이 메고 있는 망태기 위가 살짝 들썩이더니, 까망의 머리가 쏙 나왔다. 아랑의 뒷모습을 보며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던 은돌의 꼬리가 대번에 다리 사이로 쏙 말려들었다.

‘숲 잘 지키거라.’

“컹!”

갑자기 뒤에서 짖는 은돌의 소리에 아랑은 뒤돌아보고는 제자리에 서 있는 은돌을 보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식, 그래도 내가 간다고 지켜봐 주고 확실히 의리는 있어. 숲의 주인 명령에 대답한 은돌은 아랑에게 즐거운 오해를 안겨주었다.

“우와, 대박.”

설렁설렁 걸어 마을 입구에 다다른 아랑은 높은 방벽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분명 제가 살던 집도 짐승들이 내려오는 숲 초입에 있었다. 하지만 있는 거라고는 아랑이 툭 건들기만 해도 살짝 기우는 나무담장이 전부였다.

두 팔로 안을 수 없을 만큼 크고 튼튼한 목재로 만든, 높이가 3m 이상인 든든한 방벽을 두 손으로 밀던 아랑은 머쓱해져 조금 물러섰다.

제가 민다고 밀리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랑은 왼손으로 방벽을 만지며 천천히 걸어 출입문을 찾았다.

“신분증.”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 너비의 출입문에 도착한 아랑은 묵뚝뚝한 경비병의 말에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21세기의 한국과 다르게 이곳은 참 단순했다. 이들이 말하는 출입증이라는 것은 작은 나무판에 이름과 출신지, 생년월일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큰 대도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랑이 살던 작은 마을은 관리에게 돈 몇 푼만 쥐여 주면 새로운 신분증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와 국가 간의 거래나 상인들의 거래에서는 마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고위 귀족들의 신분증은 위조 방지 마법이 걸려있고, 중요한 계약을 할 때면 위조 방지 마법을 걸기 위해 마법사가 동행한다고 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돈 주고 산 신분증이 들통날까 조마조마하던 아랑은 들려오는 질문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토벌대에 지원하려고요.”

경비병의 질문에 아랑은 최대한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대답하려 노력했다. 일단 신분증은 무사히 통과된 것 같았지만, 기사나 귀족들의 눈을 마주 보지 말라는 로엔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태생이 한국인으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눈을 보고 말하는 버릇이 들었는데, 어찌 사람의 눈을 보면 안 된단 말인가? 

“뭐 할 줄 아는 건 있고?”

“약초 좀 다룰 줄 압니다. 그런데 토벌대 가면 진짜 마법사님들 계세요?”

경비병을 보지 않은 채 그의 어깨 너머 어딘가 멍하니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대답하던 아랑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그의 행동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와 함께 애써 그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체격이 곰만 한 아저씨. 눈이 참 푸르르고 이쁘시네요.

“쯧. 진짜 사시인 줄 알았네. 이상한 데를 쳐다보니 원. 토벌대에 마법사님들이 같이 하실 때도 있긴 하지. 어이, 어딜 보는 거야?”

경비병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다, 다시금 조그만 꼬마 녀석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향하는 것에 혀를 찼다.

“우리 할매가 높은 분들이랑 눈 마주치면 눈깔 파인다고.”

“이거 모지리 아니야? 그건 기사님이나 진짜 귀족 분들이나 그렇고. 어디 가서 그리 행동했다가는 매를 버는 짓이야. 길 따라 쭉 들어가서 3번째 골목에서 오른쪽 끝. 거기가 토벌대 신청 장소니까 그리 가보고. 토벌대에서도 그러면 말도 못 꺼내고 쫓겨난다.”

걸걸한 목소리 말하며 어깨를 툭툭 쳐 안으로 들여보내는 그의 손길에 아랑은 비틀거리며 겨우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으……. 아프다.”

그냥 치는데도 이리 아프면 작정하고 치면 골로 가겠구나. 경비병 수준이 이 정도라면 기사들은 책에서 보던 대로 막 칼에서 색을 내뿜고, 하늘도 날 것 같았다. 혹시나 기사와 친해지게 되면 오러인가, 오라인가 하여튼 칼에서 색을 뿜어낸다는 걸 꼭 보고 싶은 아랑이었다.

하지만 길을 따라 걷는 아랑은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과연 산에서 들어오는 길의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이 그냥 경비병일까?

지금껏 살던 로카 마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화한 거리에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마을 사람이 100명도 채 안 되는 로카 마을과 다르게 이곳은 늘 토벌대와 용병들이 드나들고, 산에서 잡은 짐승과 몬스터의 부속물과 마석까지 판매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언제 짐승과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지만,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커진 마을은 크기만으로 따졌을 땐 소국의 수도만 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길거리에 넘쳐난 먹거리를 보는 초롱초롱한 아랑의 눈빛이 한 곳에 멈추었다. 가게 입구마다 현란한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자연스럽게 언어를 알아듣고 말을 했지만, 산골에 살면서 책이나 글자를 딱히 접한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망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글도 볼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입을 떡 벌리고 섰던 아랑은 다행히 간판 옆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용기를 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적당히 사람이 있어서 점원의 시선을 벗어나면 좋았겠지만, 넓은 공간에는 손님은커녕 상품 진열대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은행처럼 긴 테이블과 그 앞으로 의자가 하나씩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는 점원이 보이자, 아랑은 발을 터덜거리면서 그 앞으로 걸어갔다.

“손님. 뭘 도와드릴까요?”

“마석…….”

“아! 마법 견습생이세요? 이번에 나간 토벌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마석 가격이 좀 올랐어요. 오늘 시세로 g당 1실버입니다.”

‘혹시 마을에서 물건을 살 거면 부르는 가격에서 무조건 반으로 깎고, 팔 때는 저 짝에서 부르는 것에서 2배부터 부르는 것이여. 네놈은 히마리가 없는 것이 애새끼가 사기 치기 딱 좋게 생겼응께.’

문득 로엔이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오른 아랑은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의 끈을 움켜쥐고 말했다.

“g당 2실버에 팔겠습니다.”

1실버는 기본적으로 1명이 1달을 쓸 수 있는 금액이었다. 자급자족에 가까웠던 로엔과의 삶에선 1실버로 2~3달을 살기도 했지만, 자급자족이 아닌 여관부터 잡아야 하는 그에게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물건부터 보여주시죠.”

망태기를 살짝 내려놓고 그 안으로 손을 넣은 아랑은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는 무언가에 움찔 놀랐다. 마을 구경에 정신이 팔려 까망이를 완전히 잊고 있던 것이었다.

망태기 안에 있던 까망이가 알아듣고 안에서 굴러다니던 마석을 준 건가? 그런데 이렇게 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망태기에서 손을 꺼낸 아랑은 직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며 뒷문으로 뛰어나가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자, 손님. g당 1.8실버는 어떠실는지요?”

딱 보기에도 번드르르 좋아 보이는 화려한 옷에 후덕하게 나온 뱃살과 이중 턱을 가진 중년 남자의 제안에 당장 팔겠다는 말을 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갑자기 누군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느낌에 급히 벌린 입을 다물었다.

“허, 거참. 어리신 분이 참 신중도 하시지. 그럼 1.9로…….”

아랑이 어떤 이유로 입을 다물었는지 모르는 사장은 허허실실 웃으며 이마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아랑은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자신의 옆에 놓아둔 망태기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은돌이가 주워 줬던 그 어떤 마석보다 크고 영롱한 초록색을 띤 마석을 꺼내게 될 줄이야. 거기다 분명 거래하는 것에는 까망이도 관여하고 있었다.

“2.5!”

자고로 사내는 배포가 커야지. 눈 딱 감고 부른 아랑은 망태기가 잠잠하자 안도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거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오셔서 바로 저 ‘빌런’을 찾아주십시오.”

200g의 마석을 500실버. 즉 5골드에 파는 성공적인 거래를 마친 아랑은 머리 숙여 인사하는 빌런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랑의 주머니에는 10쿠퍼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작은 집 정도는 바로 구매할 수 있는 부자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빌런 씨. 여기서 제일 좋은 여관이 어딘가요?”

아랑은 직접 여관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나선 빌런을 따라 걸으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불안하고 초조했던 발걸음이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순간, 절로 빌런 같은 느린 팔자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왜 토벌대에 지원하려고? 토벌대 허드레 뒷일 봐주는 게 1달에 50쿠퍼라고 하던데, 자네는 방금 나와의 거래로 지갑도 두둑해지지 않았나?”

처음엔 애송이를 보는 듯하던 빌런은 어느새 아랑을 자네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뒤를 따라 걷던 아랑은 모든 가게의 상호명 옆으로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음의 여유로 인해 세세한 것까지 하나씩 보이는 것이었다. 상인이나 기사, 마법사 등 귀족과 생업에 필요한 사람들을 글을 익혔지만, 아랑처럼 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

알록달록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오가는 복작복작한 길을 걸으니 절로 엄마 생각이 났다. 고등학생이 되는 기념으로 엄마와 다녀왔던 유럽이 떠오른 것이었다. 번화한 도심이 아닌, 와인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으로 인해 포도밭을 구경 갔다가 들른 작은 마을의 시장 같았다.

“어이 존. 내가 손님 데려왔어.”

여관 주인과 친분이 있는지, 들어서면서부터 큰 목소리로 빌런은 누군가를 불렀다.

“토벌대 다 나가고 조용한데 무슨 손님이야?”

카운터 뒤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는 남자를 본 순간 아랑은 슬쩍 빌런 뒤로 가 몸을 숨기며 섰다.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보다 더 큰,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가 나타난 것이었다.

“혼자 와 놓고, 실없기는. 온 김에 한잔하려나? 오늘 맥주가 좋더라고.”

“뭔 소리야. 여기 이 꼬마 손님 잘 받으라고, 약초꾼인데 토벌대에 지원하러 왔다네. 자네가 용병들에게 말 좀 잘해줘 봐. 50쿠퍼 받아서 누구 코에 붙이고 살어. 용병 쪽으로 비벼서 무슨 말인지 알지?”

아랑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불쑥 내미는 빌런의 행동에 어색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여관에 묵는 손님들 중엔 용병이 많을 테고, 가게 주인이라면 그들과 잘 알 테니 빌런은 아랑이 부탁하기도 전에 미리 그의 앞길을 뚫어주고 있었다.

“거. 비리비리한 게 한 대치면 꼬꾸라질 거 같은 놈이. 무슨 토벌대야. 그 손이 야무지게 보이는데, 요리사는 어떤가?”

“저. 토벌대 출발할 때까지 묵고 싶은데요. 욕실이 붙어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끝쪽 방이면 좋겠습니다.”

당황스러운 제안에 아랑이 머뭇거리는 사이 망태기가 출렁이자 내도록 생각했던 말을 얼른 내뱉었다. 

“빌런이 데리고 왔으니, 2층 끝 방으로 해서 내 하루에 10쿠퍼만 받겠네. 아침은 2쿠퍼. 점심, 저녁은 메뉴 보고 주문하고. 또 궁금한 게 있나?”

셈을 하고 여관방으로 들어선 아랑은 제일 먼저 망태기부터 열었다.

“쁏!”

“너 아까 그거 뭐야? 마석. 분명히 난 그런 마석이 없었다고.”

망태기를 열자마자 튀어나온 까망이를 보는 순간 아랑은 궁금했던 걸 말했다. 하지만 까망이는 작은 여관방을 한 바퀴 날더니 열린 창문으로 나가버렸다. 

“어! 야. 어디가!”

황급히 창가로 가 밖을 보았지만, 까망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오기 싫었나? 하……. 기다리면 돌아오려나…….”

어디로 날아갔는지도 모를 까망이를 찾는 것보다 휴식을 먼저 선택한 아랑은 가지고 온 짐들을 정리하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목욕 한번 할라치면 냄비에 물을 끓여 욕실로 들고 들어가 찬물과 섞어 씻던 지난날의 슬픔은 현대식 시스템처럼 구비 된 여관 세면대의 레버를 돌리는 순간 사라졌다.

“으……. 좋다. 이게 인간다운 삶이지.”

적당한 온도의 물이 욕조에 차오르자 아랑은 욕조에 편히 몸을 눕혔다.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온 아랑은 솜을 채워 넣은 듯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살짝 흔들리지만 부드러운 매트 위를 뒹군 아랑은 어느새 2인용 침대 가운데 누워 있었다.

높은 천장에 있는 실링팬을 멀뚱히 올려다보는 아랑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날아가 버린 까망이도 찾아봐야 하고, 토벌대 모집한다는 곳도 가 봐야 하고, 은행이 있댔으니까 은행 가서 돈도 맡겨…….

생각이 많던 아랑의 눈꺼풀이 가물가물하더니 곧 무겁게 내려앉고, 고른 숨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 * *

“이제 갓 15살이나 됐으려나? 쬐깐한 어린앤데, 약초를 다룰 줄 안다고. 아니, 어디 가십니까?”

여관 주인장 존은 빌런의 부탁대로 식사를 하러 들어온 용병에게 아랑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피죽도 못 먹고 산 것 같은 아이인지라 용병대에서 관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맘때 토벌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빴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딨지? 직접 봐야 알 거 아니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병장이 직접 찾아와서 하는 말에 놀란 존은 그가 묻는 대로 답하고 있었다.

큰 키에 연갈색 머리카락과 백옥같이 하얀 피부, 속을 뚫어볼 듯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는 용병이나 기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용병 길드장이면서 정보를 사고파는 어둠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라이엔부르크의 주인 카일 폰 아덴 공작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래도 손님이신…….”

존은 묻지도 않고, 2층 끝 방으로 가는 카젠을 따라가다 잠긴 문을 태연하게 열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을 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든 아랑을 보는 카젠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파란 눈동자는 거친 파도라도 일렁이는 듯 미세하게 색이 바뀌었다. 

붉은 입술을 움직여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잠든 아랑의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얀 손에서 초록빛이 반짝이며 일렁이고, 카젠의 눈이 나른하게 감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눈을 뜨는 카젠은 눈동자 빛의 동요는 어느새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제자리를 찾게 도와줘야겠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속삭인 카젠은 여전히 잠들어있는 아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깨어나거든 3일 뒤, 오전 9시 토벌대 출발장소로 보내. 그날 보급대가 출발하니까.”

카젠이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던 존은 그의 말에 그저 머리만 조아렸다.

* * *

눈 뜨는 대로 까망이를 찾고, 토벌대 길드에 가려던 아랑의 계획은 너무 쉽게 풀렸다. 잠에서 깨니 자신의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잠든 까망이 있었고, 토벌대 길드로 찾아가려던 일은 여관 주인 존이 해결해 준 것이었다.

“3일 뒤 오전 9시까지 토벌대 출발 장소로 가면 되도록 말해 놨으니까, 따라갈 준비나 착실하게 해.”

“네?”

“임금은 그대로 50쿠퍼일 것 같긴 한데, 괜찮나?”

다음 추가 토벌대 일정은 존도 모른다고 하였기에 아랑은 이번에 따라가기로 했다.

“이거면 되려나?”

아랑은 토벌대에 따라가기 위해 준비한 가죽 가방을 열어보았다. 추울지 모르니 하나 챙겨둔 모포와 갈아입을 옷에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약초, 배고플 때 몰래 먹을 수 있게 넉넉히 넣어 둔 육포도 눈에 들어왔다.

“내가 토벌대 따라가면 까망이는 산으로 가서 은돌이 찾아가.”

옆에 앉아서 같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까망이의 매끈한 이마를 살살 쓸어주던 아랑은 갑자기 가방에 들어가 앉는 그의 행동에 얼른 그를 꺼내려 손을 뻗었다.

“후욱.”

이건 또 뭐야? 지금껏 얌전하게 자신의 말을 잘 듣던 까망의 입에서 작은 불길이 솟자 황급히 손을 뒤로 물렀다.

“안 된다니까.”

꺼내려 할 때마다 화르륵 이는 불길에 까망을 꺼내는 걸 포기한 아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까망이 다치지 않게 가죽 가방을 잘 여민 후 묵직한 가방을 등에 메었다. 같이 다니다 여차하고 위험하거나 그러면 어디든 알아서 가겠지, 뭐.

“이게 아닌데.”

아랑은 자신이 배정받은 곳을 보고는 허망하게 서 있었다. 토벌대에 마법사도 동행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 근처로 가서 비벼볼까 했는데……. 아랑은 산더미처럼 쌓인 보급물자 수레 뒤를 느린 걸음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존, 토벌대가 아니라 보급대라고 말을 해 주셨어야죠. 일단 도착하면 토벌대와 만나긴 하겠지만, 가는 길에 마법사와 기사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찼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내가 이러려고 산 넘고 물 건너 라이엔부르크까지 온 게 아닌데…….”

토벌대의 가장 뒤쪽, 안전한 곳에 있는 보급대에서도 허드레 잡일을 맡게 된 아랑은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 보급대에 들어가는 것도 나름의 뒷돈과 줄이 필요하다고 한다.

키나 체력이나 이곳 기준으로 평균 미달인 어린 아랑은 보급대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는커녕 온종일 눈뜨는 순간부터 토벌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채소들을 다듬고 씻고 허드렛일을 했다.

식사시간엔 배급을 했고, 그 뒤엔 설거지로 이어졌다. 잠깐 쉬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다친 사람을 보고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아랑은 그들에게 간단한 약초를 나눠 주거나 직접 상처에 약을 발라주기도 했다.

말 그대로 가장 기본적이고 고된 잡일만 하느라, 눈 뜨면 일하고 일이 끝나서 어디 머리라도 붙이면 바로 기절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흘을 씻지 못했고, 이제 숨만 쉬어도 자신의 몸에서 나는 꼬릿한 냄새를 참다못한 아랑은 과감히 잠을 포기하고 근처 냇가로 향했다.

냇가라고 해도 정착지에서 그리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아랑은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휘영청 청승맞게 뜬 달 아래서 옷을 홀딱 벗었다. 발끝에 닿는 차가움에 부들거리면서도 꿋꿋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허리쯤 오는 곳에 멈춰 손을 들어 홀짝홀짝 몸을 문질렀다.

추위보다 드디어 씻는다는 기쁨에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쏙 들어갔다 올라왔다. 그러자 한 줄기 바람이 상체로 스쳤고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흐, 춥다. 지금 이게 무슨 삽질이냐. 존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림자 길드인가 가서 정보를 돈 주고 사는 건데. 돈 있는데 이게 무슨……. 진짜 어디든 정보가 생명이고만.”

실컷 고생하며 친해진 주위 사람들에게 마법사를 만나는 법을 물어봤던 아랑은 긴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라이엔부르크에는 작은 마탑이 있었고, 그곳에는 늘 마법사들이 상주한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런 곳에서 생고생하지 않고 마탑으로 바로 찾아갔을 것이었다.

투덜거리며 씻고 물가로 올라온 아랑은 제 옆을 날아다니며 호록거리는 불길 대신 뜨거운 바람을 불어 몸을 말려주는 까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시키, 이렇게 뜨거운 바람만 부니까 드라이기 같네그려.

제 위를 날아다니며 진짜 드라이기처럼 젖은 머리를 말려 주는 그 따스함에 눈을 감고 서 있던 아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상황에서 절대 맡을 수 없는 고소한 탄 냄새가 난 것이었다.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투덕거리며 만진 아랑의 눈꼬리가 세모꼴로 위로 치켜 올라갔고, 그와 동시에 근처에 있던 까망이 멀리 날아갔다.

“야 이! 미친……. 너까지 이럴래?”

뜨거운 바람만 불던 까망이 실수로 불을 내뿜었고, 덕분에 아랑의 머리끝이 조금 그을린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는지, 조금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온 까망이 빨아 놓은 옷 옆에 앉아 이번엔 옷을 말리고 있었다.

“그거까지 태우면 알지? 나 옷 없다. 그럼 홀랑 벗고 다녀야 해.”

옷을 말리는 까망이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이는 걸 본 후 아랑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흙색의 고운 가루가 든 유리병을 연 후 보송하고 깨끗한 새 옷 위로 가루들을 치덕치덕 뿌렸다.

향기로운 꽃냄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햇볕에 바싹 마른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옷에서는 곧 구린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옅은 미색으로 밝던 상의도 흙이라도 묻은 듯 더러워졌다.

‘할매. 오래오래 살아서 나 장가가는 거 봐야 해. 알겠지?’

‘미친놈. 어디서 좆질하고 살라고. 네 놈은 허리를 쓰고 사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먹고 살껴.’

‘할매. 뭔 소리야? 목소리도 어여쁘고 참하고 귀여운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보고 사는 게 내 꿈인데!’

‘지랄방구 뀌기는……. 든든한 기둥서방 만나서 사랑받고 살어. 그게 최고여.’

처음엔 그게 그냥 로엔이 하는 헛소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동성애도 인정받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연애해서 결혼까지 할 수 있는 곳임을 안 후 구시렁거리는 걸 멈췄지만 평범한 아랑에게는 그저 남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없는 토벌대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남자들의 관계를 목격한 아랑은 꽤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보급대에는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남자들이 있었고, 허드렛일을 하는 도중에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보수의 제의를 받았다.

국을 퍼주는데 왜 갑자기 손을 잡으며 손바닥에 은밀하게 쿠퍼를 쥐여 주냐고! 

깔끔하게 무시하거나,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아랑과 친해진 사람들은 어느새 그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차라리 대놓고 제안을 하는 사람은 괜찮은 편이라고. 

야밤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곳이 이곳이었다. 토벌대의 일이 거친 만큼 전 세계를 떠도는 용병이나 험상궂은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칼을 쓰는 법도, 제 몸을 지키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아랑이 선택한 것은 이것이었다. 묘하게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식물을 곱게 말려 빻아 만든 가루를 매 목욕 후 바르는 이 심정을 누가 알까?

방금 씻고 나왔음에도 역시 3일은 안 씻은 듯한 그 냄새를 폴폴 풍기며 아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짝은 어디 가서 찾나.”

이런 시커먼 남자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 불가능하니, 이제 아랑의 꿈은 이곳에서 마법사님을 만나서 사연을 풀어놓기보다 무사히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운이 좋아 마법사님을 만나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마을에서 편하게 그림자 길드에서 정보를 사거나 마탑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이쁜 처자와 알콩달콩 연애도 해 보고 싶었다. 스무 살 제대로 연애 한 번 못해 본 숫총각 아랑의 마음이 살랑였다.

까망의 도움으로 바삭하게 마른 옷을 잘 개어 품에 안고 보급대 숙소로 돌아가는 아랑의 발걸음은 느릿하기만 했다. 겨우 3일 여관에서 지냈을 뿐인데, 여관의 푹신한 매트과 보송한 이불이 그리웠다.

로엔과 지내던 작은 오두막의 짚으로 채운 딱딱한 매트도 노숙보다는 나았다. 겨우 큰 돌만 거른 딱딱한 바닥에 얇은 모포 하나로 자는 건 아랑에겐 고문 같은 일이었다.

“까망아. 이 길로 마을로 돌아가면 그거 탈영인가?”

머리 옆에서 날고 있는 까망을 보며 중얼거리던 아랑은 바닥에서 빛나는 식물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전에는 동물들의 도움이 있으면 더 빨리 정확하게 필요한 식물들을 찾아냈었다. 그래도 약초꾼 아니랄까 봐 그냥 지나가면서 봐도 로엔이 강요했던 돈 되는 식물들은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밤에 빛나는 건 딱 하나 아니던가? 

“심 봤다. 심 봤다.”

손끝으로 흙을 살살 파는 아랑의 입에서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엇이냐. 시대가 바뀌고 세계가 다르다 한들, 전체를 아울러 가장 잘 팔리고 고가를 자랑하는 것은 정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정력과 체력을 올려주기로 유명하고, 무엇보다 24시간에 달하는 지속력과 부작용이 없는 식물이었다. 거기다 인공 양식은 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나 캘 수 있는 것이라 수요에 비해 공급은 늘 부족했다.

“요게요게 애새끼 궁뎅이 만지듯이 소중히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러면 주머니에 돈이 굴러 들어오지요.”

거친 흙에 손끝이 상하지만 아랑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음정 박자 무시하고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허리가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끼고서야 몸을 일으키던 아랑은 다리가 쥐가 나서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어두운 밤, 뿌리 끝까지 상하지 않게 캐낸 식물에서는 여전히 영롱한 빛이 나고 있었다.

“까망아. 아무래도 탈영을 해야 할 것 같아.”

“탈영이라…….”

두 손으로 곱게 받쳐 든 것을 까망을 향해 들어 보이던 아랑의 눈동자가 응시할 곳을 잃고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들린 것도 놀랍지만, 문제는 탈영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그가 들었다는 것이었다. 

인기척도 없이 어둠 속에 사신처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기에 아랑의 눈에 들어온 건 반짝이는 은색 갑옷에 둘러싸인 사람의 다리였다. 긴 칼을 쓰는 기사인지 화려한 문양이 잔뜩 들어간 칼집 끝도 같이 보였다.

“꽤 귀한 걸 가지고 있군.”

여기가 동굴이었나요? 주위를 울리는 깊은 목소리를 감상하듯 듣던 아랑은 이내 그가 한 말을 이해하고는 상대를 올려다보는 걸 포기한 채 자신의 손을 보았다.

“이, 이게 그러니까.”

꿀……꺽. 달빛에 빛나는 갑옷만 보아도 최소 기사 이상일 것 같기에 이걸 상대방에게 건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눈앞에서 순식간에 수십 골드가 날아가는 환영이 보이자 아랑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식물을 입 안에 넣고 꿀떡 삼키고 말았다.

늦은 밤일수록 동물들의 소리로 시끄러운 숲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쓰네요.”

아랑의 작은 목소리가 끝없는 침묵을 깼고,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된 듯 작은 풀벌레 소리부터 울부짖은 동물들의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보급대인가?”

목소리엔 처음과 같이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랑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눈은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바로 칼을 뽑아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따라와.”

상대방의 의견은 중요치 않은 듯한 명령과 함께 풀을 즈려밟고 걸어가는 소리에 아랑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이 떠 있는 방향으로 걷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걷는 아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만졌다.

아, 근데 이거 나 따라가도 되는 건가? 어딜 가길래 막 따라오라고 하고. 고민하던 아랑의 눈에 달빛에 반짝거리는 검 손잡이가 들어왔다. 안 따라가면? 혹시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여기서 저 칼로. 아니야. 아니야.

설마 약초를 먹어 버려서 화났나? 아오, 근데 이거 그냥 먹어도 되는 거 맞나?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아랑은 기사를 따라 산길을 걸어야만 했다.

방금 씻고 나온 연못 근처에 멈춰 선 기사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갑옷을 벗었다. 기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벗은 갑옷을 아랑에게 내밀었고, 그에 아랑은 재깍재깍 받아 갑옷이 상하지 않게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어, 그러니까요. 저기요!?

무거운 갑옷들이 사라지자 편안한 면 옷이 드러났다.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상의를 휙 벗어 아랑에게 건네는 그의 벗은 등을 본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미 기사는 상의 다음으로 하의마저 탈의하고 있었다.

직접 본 다비드상보다 더 화려한 나체의 근육이 눈앞에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역삼각형이 뭐인지 제대로 보여 주는 균형 잡힌 상체, 한껏 올라간 엉덩이와 그 아래로 길게 쭉 빠진 다리까지 아랑이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다비드상을 보면서 인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이건 살아있는 신의 작품 같았다. 신이 있다면 저 기사를 만들 때는 3일 밤을 지새우면서 정성스럽게 만들고, 자신을 만들 때는 발가락으로 대충 문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의와 하의를 받아 든 채로 연못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감상하던 아랑은 그가 갑자기 뒤돌아보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푹 숙여 그를 마주 보는 무례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뭐 하나? 들어오지 않고.”

제가요. 그러니까 방금 씻고 나왔는데요.

“내가 있으면 안전하니 어서 들어오도록.”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한 아랑은 홀린 듯 연못으로 들어가려다 ‘옷은 벗고’라는 말을 듣자 연못 앞에 멈춰 섰다.

제가 지금 기사님과 달밤에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한국에 쭉 살면서 남탕에도 다니고 친구들과 찜질방도 좀 다녔습니다만, 이곳이 그러니까 거시기한 동네이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네요.

기사님께서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아야…… 생전 처음 보는 제게 왜 이런 일을 시키시는지도 궁금하고, 그게 단순히 들어가서 등만 밀어드리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절대 믿고 싶지 않지만, 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시는지요? 

“하나하나 다 말해 줘야 하나? 거기 옷 벗고 들어와, 구린내 풀풀 풍기며 돌아다니지 말고.”

“잘 빠, 빨겠습니다!”

“…….”

살아남기 위해서 한 말인데 또 한 번의 침묵이 내려앉자, 아랑은 급히 품에 안고 있던 그의 옷가지를 번쩍 들어 보이고는 얼른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밤에 갑자기 자기를 불러내 혼욕을 권하는 기사의 생각이 이상한 것일 거라는 결론을 낸 아랑은 얼른 빨래 핑계를 댔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입었던 옷도 빨아야지. 암, 그럼.

더는 말을 걸 생각이 없는지, 찰랑거리는 물소리만 들리자 아랑은 커다란 옷을 냇가에 넣었다 꺼내 빨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하려고 보급대에 들어온 것이긴 한데……. 살짝 고개를 든 아랑은 연못 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달 밝은 밤, 허리까지 물에 담근 채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이성, 동성을 떠나 무언가 몽환적이 느낌의 잡지 화보를 보는 기분이었다.

“딸꾹.”

달빛에 비친 머리카락은 은백색으로 반짝였다. 달빛을 받은 기사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아랑의 온몸이 들썩였다. 잊을 수 없는 자기주장 강하던 그 완벽한 이목구비와 초록빛이 가득한 눈동자. 

“딸꾹.”

그 먹튀 기사님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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