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따뜻하다. 오직 그 감각 하나만을 쫓는 아랑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따스함의 근원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따스한 모닥불도 숨이 죽는 새벽이면 찾아오는 추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불을 꼭꼭 덮고 잤었다.
그럴 때면 버튼만 누르면 집안이 따뜻해지는 보일러와 밤새도록 자신의 침대를 뜨끈하게 데워주던 온열매트가 그리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따스함에 아랑은 더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가까이 몸을 맞대었다.
단단하지만 따스함을 내뿜은 정체 모를 무엇과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자신의 앞머리가 살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옅은 바람 속에 익히 아는 누군가의 체취가 맡아지자 아랑의 눈꺼풀이 느리게 올라갔다.
보통 눈을 뜨면 짙은 갈색 가죽 천장이 먼저 보였다. 하지만 눈을 떴음에도 눈앞이 어두컴컴하게 막힌 것 같고 초점이 쉽게 맞춰지지 않자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미색 계열의 투박한 천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점차 선명해지자 아랑은 은근슬쩍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들었다.
“…….”
“아직 새벽이다. 그만 꼬물거리고 자.”
“으어.”
제대로 된 단어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랑은 뒤로 확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곧 등을 감싸 당기는 힘에 오히려 앞으로 쭉 딸려 들어가고 말았다.
허둥거리며 몸을 어떻게든 빼려던 아랑은 자신의 볼에 닿는 천의 느낌과 함께 힘차고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소리에 몸에 힘을 쭉 뺐다. 잠시 상황파악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지난 밤.
토벌을 나갔던 카일이 다쳐서 들어왔고, 그래서 약초로 응급 처치했던 것이 떠올랐다. 치료 후엔 저녁도 먹였고, 약도 먹이고 엎드려서 자도록 유도했다.
아……. 열이 올라 고생하는 그를 일으켜 앉혀서 몸을 닦아주고, 앉혀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뒤로 기댈 수 없는 그를 배려해 자신이 안았던 것이었다.
아프고 열이 오를 때면 엄마가 자신을 돌봤던 것을 떠올리며 그의 몸을 닦아줬다.
온몸이 펄펄 끓는 것 같은 자신의 몸에 닿는 엄마의 서늘한 품과 숨을 쉴 때마다 코끝에 걸리는 단내가 좋았다. 이마를 쓸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자신을 괴롭히던 열도 고통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밤새도록 돌봐줄 만큼 카일이 소중한 사람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다만 허무하게 떠난 엄마나 로엔처럼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고 아픈 것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같이 지낸 것이 전부지만, 자신과 인연을 맺고 한솥밥 먹은 카일이 아픈 걸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숲을 떠나면서 다짐했던 것 중 하나가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연애하겠다고 은돌에게 큰소리쳤지만 아랑은 두려웠다.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아랑에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은 그의 곁을 너무 빨리 떠났다.
거기다 자신은 대마법사를 만나면 이곳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몸이 아닌가. 이곳에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는데.
“등은……?”
“괜찮다.”
아랑은 카일의 허리 사이로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등에 만져보았다. 처음에 따갑고 열감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고 약효가 돌기 시작하면 오히려 서늘한 기운을 내는 약초였다. 만약 제대로 치료가 되는 것이라면 지금쯤 등이 서늘해야 했다.
자신을 안고 있는 카일의 품에서 열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밤새 그를 괴롭히던 열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은 붕대 위로 싸한 냉기가 느껴지자 아랑은 작게 한숨을 폭 쉬었다.
소드 마스터라고 하더니 빈말은 아닌지, 상처가 덧나거나 큰 고생 없이 상처가 잘 나을 것 같았다. 카일에게 별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아랑은 조금 더 자려고 했다.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않아 막사 안은 어둑했고, 새벽의 찬 기운도 없이 따뜻하고 좋았다. 좋은데…….
좋은데…….
참 좋은데…….
아랑은 자려고 감았던 눈을 뜨고는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했다. 자신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이 움직이고, 커다란 손이 후진하려던 제 엉덩이를 턱 하니 잡은 것이었다.
“흡.”
순간 반쯤 뜨고 있던 아랑의 눈이 번쩍 떠지고 입에서 단발성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도 아니고, 한 3cm쯤 뒤로 물러났다가 오히려 10cm는 더 끌려간 아랑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이거 아니잖아. 카일. 이거 아니라고! 아니야!
“건강하네.”
하필 가슴에 볼을 대고 있었기 때문인지 몸을 통해 울려 들어오는 그 한마디에 아랑의 부릅뜬 눈이 꾹 감겼다.
스무 살. 연애는커녕 혼자서 몇 번 쪼물락거린 것이 전부인 아랑의 소중한 곳은 그저 아침이었기에 지극히 생리적인 현상으로 어쩔 수 없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랬을 뿐이었다.
마주 보고 누워 있어 가지고! 왜 또 옆으로 안고 있냐고……!
애국가를 부를 것도 없이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 한순간 푸쉬식 식어버린 것에 감사하던 아랑의 눈이 다시 번쩍 떠졌다.
그냥 턱 하니 잡고 당겼던 카일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쥔 것이었다. 카일의 손이 큰 것인지 자신의 엉덩이가 작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만지는 그 대범한 행동에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카일?”
혹시 지난밤 열이 올라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요? 아무리 내가 이곳 여성분들과 체격이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방금 “건강하네” 이 말은 같은 남자로서 다 알고 한 말 아닙니까?
“왜?”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손은 여전히 아랑의 것을 제 것인 것처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와 함께 푸쉬식 식은 아랫도리가 비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그거 제 엉덩이인데요.”
가장 무덤덤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평범하게 할 수 있는 말을 고르던 아랑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무덤덤한 질문이어서 그랬을까? 돌아오는 무덤덤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아랑은 두 손으로 카일의 가슴을 밀면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남의 거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거 아시죠?”
고개를 들고 카일의 턱을 올려다보던 아랑은 그가 자신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리자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말하고 보니 지금 감히 귀족 영주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한 건가 싶은 것이 ‘눈깔 파여!’ 로엔의 경고성 짙은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아랑이 눈동자를 밑으로 내리깐 채 얌전히 있자 제 엉덩이를 주무르던 카일의 손짓이 멈췄다. 그 순간을 노려 아랑은 그의 가슴을 세게 밀었고 덕분에 침대 아래로 보기 좋게 나뒹굴어야만 했다.
“아랑?”
카일이 나뒹구는 것도 잠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 아랑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는 귀족 나으리를 보았다. 내 엉덩이를 막 만지고. 어쩜 저리 태연할 수가.
상처가 불편한지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는 카일을 지켜보면서도 선뜻 나서서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밤새도록 간호해 준 사람한테 말이야. 모욕감을 안겨줘?
문득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린 아랑의 시선은 의도치 않게 카일의 신체 어딘가로 향했다. 그런데 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지? 너도 남자잖아. 그럼 아침에 너도 나처럼 그래야 하잖아!
아침이니까 너도 그러니까 뭐 여기는 남자, 여자 상관없으니까 날 만만하게 봐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잠잠해?
뻐근한 몸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기 힘든 카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랑을 바라보았다. 작은 것이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았고, 자는 도중 중얼거리는 잠꼬대도 재밌었다.
누군가와 같이 잔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단순히 쾌락을 즐기기 위한 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지만 그것도 관계를 맺을 때뿐 행위가 끝나면 상대를 늘 돌려보냈다. 그랬기에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잠자리를 공유해 본 적이 없던 카일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말랑한 엉덩이를 만진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촉감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주물렀고, 그와 함께 느껴지던 아랑의 것이 재밌었다. 거기다 제 것이라니. 그래 그 엉덩이는 아랑의 것이 맞긴 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뒹굴었다 일어난 아랑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카일은 묵묵히 그를 바라본 것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제멋대로 뻗쳐나가는 생각을 급히 멈춘 아랑은 초록빛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자 내밀고 있던 입술을 쏙 집어넣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머리가 백짓장이 되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떠한 표정도 없이 웅크린 짐승처럼 앉아있는 카일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아랑은 괜스레 나무토막 하나를 들어 모닥불 위에 툭 던지고는 막사 입구로 향했다.
아침부터 묘한 분위기에 기운을 뺀 아랑은 밖으로 나가려 막사 천을 걷었다.
이제 마을로 돌아가면 카일을 만날 일이 없었다. 자신과 소드마스터 공작님과 만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게 있으면 갚아줘야지.
해가 뜨기 시작해 어스름히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아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열과 성을 다해 다시 약을 만들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만 약초를 바꿔도 되지만 내 친히 하루에 세 번 갈아주리다. 그 불타는 고통을 네게 안겨줄 것이다. 절대 그를 해하려는 것이 아닌 아끼는 마음으로 열심히 치료해드리겠어요.
치료법을 자신만 아는 상황에서 하루에 몇 번 약초를 바꾸든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자 아랑은 씩 웃으며 당당히 한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헉-.”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그를 낫게 해주려는 갸륵한 마음으로 신나게 걸으려던 아랑의 발걸음이 이상하게 꼬였다. 아침부터 난리 치느라 느슨해진 허리끈과 몇 번 접어놓은 바짓단이 문제였다.
카일의 긴 바지를 빌려 입었을 때 접어놓은 헐렁한 바짓단이 풀어져 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 없이 걷던 아랑의 발끝이 바짓단을 밟았고, 균형을 잡지 못한 사이 앞으로 몸이 앞으로 쏠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허리끈마저 풀려 헐렁한 바지는 발목까지 죽 흘러내렸다. 카일은 갑자기 앞으로 철퍼덕 넘어지려는 아랑은 향해 팔을 뻗으며 일어났고, 다행히 그가 완전히 고꾸라지기 전에 한 팔로 받쳐 안을 수 있었다.
“으아!”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아랑은 발목에 걸린 바지를 추켜올리고 뛰어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막사에 혼자 겨진 카일은 모처럼 큰 소리로 웃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 * *
아랑은 들고 온 큰 가죽가방에 자신의 짐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망태기엔 손질한 약초들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처음 올 때보다 늘어난 약초들을 만지는 아랑의 손길은 섬세했다. 꽉 닫혀버리는 가죽가방보다 설렁설렁 바람이 통하는 망태기가 더 좋기에 다 담지 못한 약초들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두고 가자니 아깝고 다 챙겨 가자니 망태기와 가방이 부족한 상황에 아랑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아랑. 어디 갈 곳 있어?”
아무도 없는 막사에서 자신의 옆을 날아다니는 까망과 함께 짐을 싸던 아랑은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몸을 날려 까망을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끄윽.”
잘 날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아랑에게 덮침을 당해 그 품에 마구잡이로 꼭 안기게 된 까망의 입에서 숨 막히는 소리가 났지만 그런 것은 아랑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잠깐. 지금 그거…….”
어떻게든 까망을 숨기려 했지만, 닉의 파란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반짝거리며 아랑의 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닉의 시선을 느꼈는지 품으로 더 파고드는 까망을 감싼 아랑은 얼른 막사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닫힌 막사 안에는 닉과 자신 둘뿐이었다.
닉에게만 까망을 들킨 것이니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거기다 지금은 토벌대가 철수하는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마법사님. 이거 모른 척해 주셔야 해요.”
빨리 보여주고 뒷정리를 시작할 생각에 아랑을 살짝 팔을 풀어 까망을 닉 쪽으로 내밀었다.
“너 이거 어디서 찾았어?”
선뜻 까망을 만질 용기가 나지 않는지 눈으로만 보면서 말을 건네는 닉을 보며 아랑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아랑의 손끝은 까망의 맨질맨질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산에서 만났는데, 정말 말도 잘 듣고 착하고 좋은 애예요.”
“드래곤 같은데.”
닉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유심히 검은색의 동물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마법 동물 수업시간에 본 드래곤을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었다. 꼼꼼히 살펴보는 닉의 파란 눈은 짙게 가라앉았다.
까망은 아랑의 품에 편안하게 안겨있었다. 이마를 쓰다듬는 아랑의 손길을 즐기는 듯 그것은 두 눈을 감고, 편하게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닉은 홀린 듯 저도 모르게 까망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두 눈이 꼭 감겨 있었음에도 까망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길을 느꼈다. 탁, 유심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몰랐을 짧은 까망이의 앞발이 매섭게 닉의 손을 쳐냈다. 아랑이에게 모든 것을 맡겼던 것과 달리 까망이는 자신의 몸에 닿으려는 닉의 손을 거부했다.
“아하. 하하…하……. 애가…낯을 좀 가리나 봅니다.”
얼마나 세게 친 것인지 내밀고 있던 닉의 손등이 그 작은 손바닥 모양으로 붉게 올라왔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까망을 보는 아랑은 난감함에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작은 놈이 손이 참 맵네. 아랑이는 마을로 돌아가면 갈 곳이 있어?”
난감해하는 아랑 앞에서 닉은 까망을 유심히 보며 처음 물으려 했던 말을 꺼냈다.
“아뇨. 일단 마을 여관에 좀 머무르면서 이것저것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디를 정착할지 아니면 뭘 할지 이런 것들도 생각하고요.”
“그래? 그럼. 아랑 나와 함…….”
“굳이 여관에서 지낼 필요 있나? 내 성에 남아도는 방이 많은데.”
아랑에게 자신을 따라 수도 라이나로 가지 않겠냐는 말을 하려던 닉은 갑자기 자신의 말을 끊는 목소리에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내가 아랑과 대화 중인데, 왜 네가 끼어드는 거냐.”
인기척조차 없이 들어온 카일이었기에 아랑은 다급하게 안고 있던 까망을 자신의 망토 안으로 후다닥 밀어 넣었다.
상처에 좋은, 그렇지만 아주 따끔한 약초를 하루에 3번씩 갈면서 좋은 뜻으로 과잉진료를 해 주겠다던 다짐을 하는 되김하던 아랑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잊고 싶은 그 망측한 상황이 떠올랐다.
소드 마스터에 대한 정보라고는 칼에서 오러가 일렁이고 단칼에 적을 무찌르며, 강철 체력이라는 것이 아랑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것도 이곳에서 알게 됐다기보다 한국에서 보던 소설책에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자가치유도 가능한 것이 소드 마스터란 말입니까? 아침의 정신없던 사건 사고 후 붕대를 풀고 더덕더덕 붙어 있는 약초를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게 살살 털어내던 아랑은 덧난 곳 하나 없이 잘 아물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었다.
일반적으로는 곪고 덧나서 며칠을 드러누워야 할 만큼 깊은 상처였다. 그러고 보니 그날 밤 카일은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거기다 아침에 대자로 앞으로 퍽 하니 넘어지려는 것도 잡아챈 그였다.
침대에서 막사 입구까지 열 발자국이 넘는 거리를 순식간에 다가와 다친 몸으로, 그것도 한팔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서 당겼던 힘이 떠올랐다. 그 순간 아랑은 카일을 괴물 같은 존재로 각인하였다.
절대 덤벼서도 안 되고, 개겨서도 안 될 존재. 자신의 목숨은 그에게 한낱 먼지같이 하찮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그의 손에 순식간에 제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랑 나랑 수도 라이나에 갈 거지?”
“넌 가서 네 짐이나 마저 싸.”
추워진 날씨에 망토를 걸친 배가 까망으로 인해 유독 불룩해 보였지만, 일단 까망의 모습을 감춘 것에 안도했다. 일단 닉과 카일은 티격태격하느라 자신과 까망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 것이었다.
그 어느 쪽도 갈 생각이 없는데, 두 분이 그러시면 제가 대답할 말이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대마법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거 못 들었어? 그러니 정보가 많은 수도로 가야지. 가서 다른 마법사들도 만나보고, 만나기 힘든 대마법사님보다 내가 마탑주를 소개해 줄게.”
“날씨도 추워지는데 수도까지는 어떻게 가려고? 여기 위험한 곳이라 워프 여는 것도 까다롭잖아. 거기다 네 놈은 워프 열 줄도 모르는 반푼이 마법사고. 그 대마법사 찾는 거면 내가 좀 알아봐줄 수도 있고.”
망토 안에서 꼬물거리는 까망을 다독거리던 아랑은 갑자기 두 남자의 시선을 향하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절할 때는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그냥 저 바다 건너 서쪽 대륙으로 가면…….”
“안돼!”
“가지 마!”
서쪽 대륙으로 모험을 떠나고 싶은 아랑의 작은 바람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남자에 의해 단칼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망토 안에서 꼬물거리긴 했지만, 잘 있던 까망의 작은 머리가 망토 단추 사이로 쏘옥 밖으로 삐져나왔다. 아랑은 급히 까망의 머리를 집어넣으려 했지만, 꿈쩍도 앉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숨기려 몸을 틀어 앉으려고 했다.
“……그건 또.”
갑자기 튀어나온 까망을 숨기는 것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아랑을 보던 카일은 망토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까망을 보고는 혀를 찼다. 드래곤 집안의 수치도 아니고, 지금 여기서 새파랗게 어린애 등쳐먹으면서 귀염을 떨고 싶은 건가?
차가운 눈빛으로 까망을 쏘아보던 카일의 입술이 살짝 실룩이다 점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카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랑. 나를 따라 성으로 가면 대마법사님을 어떻게든 만나게 해주지. 그건 내 소드 마스터의 명예와 내 성을 걸고 약속하겠다.”
갑자기 튀어나온 까망을 가리려 하던 아랑은 카일의 말에 큰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토벌대에 대마법사님이 같이 오시기도 했고, 친분이 있는 것처럼 지난번에 말한 카일의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조합.
막판 보스 같은 느낌에 역시 끼리끼리 노니까 서로 연락이 된다거나 그런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지만, 조용히 카일과 대화를 할 시간이 없어서 묻지 못했었다.
“진짜요?”
홀린 듯 까만 동공이 확장되며 작게 되묻는 아랑을 보며 닉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돈으로도 안 되고, 외모로도 안될 것 같고. 그래도 집안은 비슷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카일을 누르고 아랑을 꼬실 만한 것을 떠올리던 닉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랑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이겨? 거기다 아까부터 볼이 따끔거리는 것 같아 두리번거리던 닉의 시선이 망토 사이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까망과 마주쳤다.
저 생명체는 갑자기 왜 자신을 쏘아보듯 보는 거지? 조금 전에 난데없이 손등을 얻어맞은 것은 자신이었기에 닉은 슬쩍 마나를 흘려보냈다. 대충 파악이라도 해 보겠다는 심산으로 마나를 보내던 닉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일반적으로 그냥 짐승들에게는 마나를 흘려봤자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몬스터가 된다면, 예민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마나를 즐기는 듯 슥 빼가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가나 하는 심정으로 조금 더 흘려보내자 또 홀라당 가져가 버리는 행태에 장난으로 시작했던 일이 점차 커졌고, 마나 흘리기에 집중한 닉의 입술에 주름이 잘게 잡혔다.
“진짜 약속하는 거죠? 카일. 내년 겨울 되기 전에 대마법사 만나게 해주시는 거죠?”
“그래. 약속하지. 원한다면 성에 가서 계약서라도 써 줄까?”
“네! 써 주세요.”
“약속할 테니, 짐은 다 챙긴 건가?”
“네네. 그런데 이거…….”
“데리고 가.”
한창 집중하다 쌓아놓은 마나를 홀랑 뺏기고서야 넋을 놓은 닉의 귀로 카일과 아랑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백날 해 봐라. 네가 이기는가. 남아 있는 마나마저 다 뺏기기 전에 가서 출발 준비나 끝내.”
카일이 큰 손으로 닉의 등을 툭 치고 나서야, 닉은 비틀거리며 막사를 벗어났다.
* * *
아랑은 토벌대 끄트머리에서 열심히 걸으며 따라갔던 것과 달리 둘러매고 왔던 가죽 가방도 약초를 잔뜩 넣은 망태기도 짐 마차에 실어 보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산들산들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을 타고 다가온 카일의 손이 자신 쪽으로 뻗어지자 아랑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팔 아프다.”
아니 팔을 위로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래로 내리고 있으시면서 왜 팔이 아프다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 상황은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상황인데요. 지금 내민 그 손을 잡으면 나 잡아당겨서 말에 태울 거잖아요.
그리고 이거 동물 학대입니다. 카일 체격만 봐도 이미 말에겐 심각한 무리가 가는 것 같은데 왜 거기 굳이 제 몸무게까지 더해서 말을 혹사시킬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으쌰.”
바닥에 서서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던 아랑은 갑자기 뒤에서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리는 행동에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이 말 위에서 손을 뻗은 카일이 자신을 들어 앞에 태우자 아랑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말 갈퀴를 덥석 쥐었다.
“히이잉-.”
가만히 서 있던 말 입장에서도 갑자기 갈퀴가 쥐어뜯기니 놀라서 투레질하며 이리저리 어수선해졌다. 그때 아랑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당기는 힘에 뒤로 기대야만 했다.
“자. 출발하지.”
등 뒤에 든든한 벽이 있는 것 같고, 분명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이 안전벨트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아랑은 갈퀴를 잡은 손에서 쉽게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이 미친놈아. 난 태어나서 말을 처음 타본다고. 은돌이처럼 푹신한 것도 아니고 딱딱한 말 안장이 불편했다. 위험한 산길을 그 가느다란 다리로 내려가는 걸 지켜보던 아랑은 숨을 얕게 호닥거리면서 쉬었다.
“나와 전장을 누볐던 놈이니 널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다. 긴장 풀어도 된다.”
분명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지만, 전혀 위로받지 못한 아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프다. 엉덩이가.
불편하다. 궁뎅이가.
고로 아래가 불편하니 심히 기분이 좋지 않다. 이리저리 불편한 아랑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설마 지금…….”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말을 몰며 산을 내려온 카일은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토벌대 천막에서 나간 이후로 보이지 않더니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닉의 시선이 아랑에게 향하자 카일은 걸치고 있던 망토를 약간 펄럭거렸다.
“잔다고?”
처음 말에 탔을 때만 해도 온몸에 빳빳이 힘이 들어가 어떻게든 자신의 몸에 몸이 닿지 않게 하려고 기를 쓰던 아랑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곤하게 풀렸다. 자신의 가슴에 등이 닿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그곳에 푹 기댄 아랑의 코에선 도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에 한 팔을 감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던 카일이 망토로 아랑은 감싸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말의 움직임에 따라 작은 머리가 살짝 흔들렸고, 그때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대마법사 만나게 해 준다는 거 거짓말이지? 너 인간적으로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만나게 해달라고 그리 부탁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그러지 말고, 아랑이 나한테 넘겨. 내가…….”
토벌대 일이 끝났으면 냉큼 제가 좋아하는 수도로 갈 것이지, 성으로 가는 외길에 따라붙은 닉이 못마땅했다.
“조용히 해라.”
“가끔 놀러 온다면, 아랑에게 부침개인지 뭔지 그거 준비해달라고 하지.”
“너희 집에서 놀다 갈 건데?”
카일은 고개를 쭉 빼서 이쪽을 보려고 하는 닉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망토로 아랑을 더 감싸안았다. 내 시동을 왜 이렇게 넘보는지 닉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수도에 있는 닉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만 해도 수십이 넘었다. 집사 역시 최근에 잘한다고 소문난 인물을 일부러 초빙했다고 들었던 것이었다.
“아랑을 왜 데리고 가려는 거지?”
성으로 이어지는 긴 길을 앞장서 걸으며 카일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겨울은 평소보다 더 혹독할 것 같았다. 먼 하늘에 있는 흰 띠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 놓았다.
“수석 요리사로 딱 맞을 거 같지 않아? 약초도 잘 알고. 그 차 말이야. 진짜 서쪽에서 수입한 것보다 더 맛있다고. 거기다 전에 아랑이 그랬어. 자기한테 그보다 더 맛있는 게 많다고 말이야. 재료만 있다면 다 만들 수 있다잖아.”
겨우 거기까지 데리고 가서 집안의 요리사로 쓰겠다고? 카일은 입 안이 씁쓸해지자, 고개를 숙여 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늘 나던 쿰쿰하고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식충이냐.”
“…….”
중얼거리듯 혼자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닉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카일은 느리게 걷던 말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멀어진 뒤에서 익히 아는 욕설이 들렸지만, 카일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갔다.
눈치가 꽤 빠르고 마법까지 쓰는 놈이라 알아챌 것이라 생각했으나, 아직 닉은 아랑을 정확히 보지 못한 듯했다. 마법을 배운 이후 닉은 초면의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그 사람을 훑곤 했다. 그랬기에 아랑도 마나로 훑었을 텐데, 그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분명 지난 아침 자신의 품에서 난리 치던 아랑의 눈동자는 어두운 수렁처럼 빨려들 것 같은 검은색이었다.
닉의 마력으로도 눈 색깔이 변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어떤 경우 변색이 되는 것일까?
분명 그날은 검은색이었지만, 지금은 짙은 갈색에 햇빛이 비칠 때면 연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변해 있었고, 그것은 카일을 혼란스럽게 했다.
설마 아침마다 먹던 그것 때문일까?
아침이면 아랑은 혼자 무언가를 먹고 꽤 고통스러워했다. 그리 고통스러우면 먹지 말 것을 온몸을 비틀고 힘겨워하면서도 아침이면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을 때 아랑이 했던 말이…….
‘제가……. 이거 안 먹으면 죽어요.’ 였던가?
하지만 어디서도 무언가를 먹고 눈동자 색이 바뀐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카일이었기에, 일단 아랑을 자신의 성에 두고 싶었다. 과거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쳐 날뛰면서 세계는 암흑천지의 전쟁에 휘말렸고, 수백 년에 이른 전쟁의 끝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혹자는 그들을 마족이라 칭했고, 어떤 이는 흑마법을 익힌 자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잊혀진 지난 이야기가 된 지금, 사람들에게 검은 머리카락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는 그들의 후예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또다시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만연했다.
아랑의 검은 눈동자를 본 사람이 광신도, 혹은 미신을 신봉하는 자였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죽은 아랑의 눈동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오히려 그자는 성자로 칭송받을 것이었다.
어떤 경우 아랑의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보이는지 알아내야 하는 카일은 긴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날 본 것이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 진짜 검은색이라면 아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람에 하늘거리며 날린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히자 카일을 조금 더 얼굴을 숙여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입술로 꾹 눌렀다.
* * *
코끝에 스며드는 은은한 꽃향기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폭신하게 몸을 감싸는 이불에 아랑의 입꼬리가 슬쩍 올렸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두 번의 노크 후 들어와 일어나서 학교 가라고 하겠지? 그리고 계속 잠든 척하면 엄마는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출 것이었다.
엄마가 오기 전부터 잠에서 깬 아랑은 이불 안에서 길게 기지개 켜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면서도 꿋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엄마가 노크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살짝 한쪽 눈만 뜨고 문을 보려던 아랑의 두 눈이 동시에 번쩍 떠졌다.
침대에 편하게 누운 채 오른쪽을 바라보면 나무색 문에 보이고 그 문에는 아랑이 좋아하는 보이그룹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니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엄마와 유럽여행 중에 들른 성에서나 보던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과 그 너머 알록달록 곱게 물든 나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아랑은 천천히 자신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벼랑 끝에서 떨어지고는 노숙시키더니 이번에는 유럽 공주가 살 것 같은 호화로운 방이냐.
침대 가운데에서 덩그러니 일어난 아랑은 푹신하고 두툼한 이불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다시금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데굴데굴 굴러 침대 끝에 딱 떨어지기 직전에 멈추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서던 아랑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백발의 중년 노신사가 검은 정장 같은 것을 단정히 입고, 한 팔에는 흰 수건 같을 것은 걸치고 서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아덴 성의 집사 한스입니다.”
도대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하늘이 있다면 저에게 설명 좀 해 주세요. 갑자기 도련님이라니요?
자신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노신사를 보고 후다닥 똑바로 선 아랑은 허리가 구십 도로 꺾이도록 인사했다.
한스와 맞절 같은 인사를 나눈 아랑은 폭신한 일인용 소파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 안은 아랑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럼 여기가 카일의 성이라는 거예요? 성 이름이 아덴이구요? 그럼 이 방은 누구 방이에요?”
“카일. 음, 영주님께서 그리 불러도 된다고 하셨습니까?”
대대로 한스의 집안은 아덴 성의 집사로 살아왔기에, 그가 자연스럽게 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덴 성으로 들어온 것도 벌써 50년 전 일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한스는 손주를 보는 듯한 따뜻한 눈빛으로 아랑을 보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네. 카일이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진짜 앞에 앉으시면 안 돼요?”
아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석처럼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 있는 한스를 보며 한 번 더 권했지만, 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있는 방은 본래 공작부인이 쓰는 방이라고 했다. 오른쪽 창가 옆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카일이 쓰는 방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와 결혼을 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방이라는 말에 아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가 그럼 왜 이 방에 있는 거죠?”
“영주님께서 허락하셨으니까요. 곧 저녁 시간이라 다과를 많이 드시면 속이 불편하실 겁니다. 혹시 시종이 필요하면 붙여드릴까요?”
아랑은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하나 집으려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리는 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머그잔도 슬그머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종이 필요하냐니요. 제가 카일의 시동인데요. 시동에게 시종을 붙이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욕실은 왼쪽이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침대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기십시오. 도움을 줄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리고 약 1시간 후 저녁 식사가 있을 예정이니, 도련님을 모시러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끝까지 인자한 미소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한스가 살짝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큰 방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아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보았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카일이 공작이라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공작이라는 계급이 이렇게 호화스럽게 사는 부자였다고? 그럼 국왕은 진짜 넘사벽이란 거네. 그나저나 카일 이렇게 부자면서 나 월급 고작 2실버 준거야? 와, 짜다. 진짜 짜다.
그런데 까망이는 또 어디 가서 안 보이는 거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복잡한 머릿속과 다르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아랑은 머리를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씻고, 밥도 먹고, 카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일단 내년 가을까지는 대마법사님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는데, 그럼 그때까지 나 뭐 하라고? 남의 집에서 객식구처럼 얹혀살면서 빈둥거릴 성격이 못 되는 아랑은 머릿속으로 마을 은행에 맡겨놓은 자신의 돈을 떠올렸다.
확실히 여기서 월세나 뭐 그런 걸 조금 내고 지내는 게 집을 사거나 여관에서 머무는 것보다 저렴하고 안전했다. 그래도 일단 돈을 더 벌어야 하는데, 작은 점포를 얻어서 약초 가게라고 작게 차릴까? 아니면 여기도 가판에서 물건을 팔 수 있나? 세금은? 가게 내려고 하면 관공서 같은데 가서 허가 받아야 하나?
수영해도 될 만큼 넓은 욕조에 이미 따뜻한 물이 한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본 아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욕조에 들어앉은 아랑은 욕조 옆으로 나 있는 큰 창 너머 잘 손질된 정원을 보며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현실감 없는 풍경과 호사스러운 목욕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이 달콤한 초콜릿 같은 순간 뒤에 어떤 비정한 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가장 비정한 현실은 카일이 내년 가을까지 대마법사를 찾지 못 하고 이곳에 자신이 감금되는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카일과 잘 이야기해보자.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되지. 할매가 두 눈 똑띠 잘 뜨고 살라고 했으니까. 그럼.”
“호랑이 굴이 뭐?”
목욕 후 침실로 들어온 아랑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속옷을 집어 다리를 꿰고 입었다. 혼자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들려온 타인의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이야. 아랑이는 진짜 피부도 아기같이 뽀얗네. 맨날 산에 약초 캐러 다녔다더니, 어떻게 해 한번 안 보고 온종일 마탑에 있는 나보다 더 하얗지?”
연이어 들리는 말에 아랑은 후다닥 속옷을 치켜 올려 입고 손을 뻗어 상의부터 후다닥 입었다.
“누, 누가 마음대로…….”
“한스 영감이 밥 먹을 때 너 데리고 오라고 해서. 사람 좋아 보이지? 근데 완전 원칙주의자에 얼마나 꼬장꼬장한지 말 안 들으면 혼나요.”
뽀얗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아랑의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앞으로 다가온 닉이 능숙하게 옷깃을 만지며 입는 것을 도와주자 아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냥 무명 바지에 셔츠를 입으면 그만일 텐데 여기 옷은 장신구도 많고 과하게 화려했다. 전체적으로 아랑에게 조금 어벙하게 컸지만, 길이는 그럭저럭 맞았다.
“혹시 밥 먹는데도 뭐 따라야 하는 예도가 있다거나 하면 말해 주시면 안 돼요?”
순서대로 몇 개를 입히는 것인지, 차곡차곡 닉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다 입은 아랑은 맨몸인 저를 보고도 덤덤한 그의 눈길에 궁금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그렇지. 같은 남자끼리 뒷모습 좀 보였다고 부끄럽고 민망해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한스 영감은 못마땅해하겠지만, 네가 두 손으로 스테이크를 잡고 이로 뜯어먹는다고 해도 딱히 뭐라고 말을 할 사람은 없을걸. 아니구나. 샬럿 공주님이 싫어하시려나?”
닉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공주님요? 누구는 영주님에 소드 마스터, 마탑의 수석마법사, 대마법사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들도 아직 어색한데. 공주님이라 하면 국왕의 따님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분이 왜 여기 계십니까?
“아! 넌 뵌 적이 없겠구나. 왕국의 네 번째 공주님이신데, 카일이랑 결혼할 거라고 여기 와 계신다네.”
그렇지 않아도 놀랐던 아랑의 입이 쩍 하니 벌어지고 말았다.
엄마야. 이건 또 무슨 동화 속 이야기입니까? 왕자와 공주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거예요?
“이런 것밖에 없어? 라이나에 주문한 건?”
샬럿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헤르시나는 얼른 3단으로 된 보석함을 넓게 펼쳤다. 그리고는 새파란 아쿠아마린 브로치를 두 손으로 받쳐 샬럿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니? 넌 내 밑에서 지낸 것이 몇 년인데 이렇게 색감도 없고. 지금 분홍장미와 튤립을 섞어놓은 것 같은 내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런 시퍼런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커팅은 이미 지난봄에 유행했던 거잖아.”
“수도 라이나에서 보낸 것들은 내일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덴 공작님께서 푸른색을 좋아하셔서 이번에 침실도 다 푸른 계열로 바꾸셨다니…….”
늘 들고 다니는 샬럿의 부채가 헤르시나의 볼에 맞고 떨어지면서 하얀 피부에 붉은 선을 그렸다.
“흠. 그래? 그럼 이번에 주문한 물건 받으면 푸른색 것들로 추가 주문하고. 지금 공작님은 뭐하고 계셔?”
헤르시나의 말을 자른 샬럿은 브로치를 들어 자신의 머리와 어깨 근처에 가져다 대고는 거울을 통해 보았다.
“휴식을 취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놈의 휴식. 휴식. 토벌 끝나고 돌아온 게 언제인데 아직도 쉰다는 거야? 저녁 식사 시간에나 보자니. 하- 진짜. 일단 옷장 다시 열어봐.”
자신의 눈동자 색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샬럿의 의상을 고르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그녀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그 눈동자와의 조화를 중시했기에 붉은 계열을 선호했다. 하지만 카일 폰 아덴이 푸른색을 좋아한다면 얼마든 그의 취향에 맞출 생각도 있었다.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커다란 옷장 앞에 선 헤르시나가 옷장 문을 열자 샬럿의 눈꼬리가 위로 날카롭게 올라갔다.
“짜증 나.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이런 추운 시골에 있는 것도 화가 나는데, 드레스 하나 제대로 사 입을 가게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어느 세월에 주문하고 받냐고. 내일 당장 재봉사보고 유행하는 옷감들 가지고 이곳으로 출발하라고 그래. 영주님과 같이 고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옷장 안을 가득 채운 옷들이 죄다 붉은 계열인 것을 확인한 샬럿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대충 말아 올려 올림머리 형태로 만들어 거울을 보았다.
“옷에 달 순 없으니. 머리 장신구로 해봐.”
식사 시간이 아직 1시간이나 남았지만 긴 시간 이어지는 치장에도 헤르시나는 군소리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왕국의 네 번째 공주.
올해 스무 살의 샬럿 드 안느의 취미는 외모 치장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인생 목표는 왕궁 무도회에서 딱 한 번 본 카일 폰 아덴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왕국의 끝 가장 척박한 땅 라이엔부르크로 온 것이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당시, 카일은 토벌로 아덴성을 비운 상태였기에 귀인 신분으로 머물고 있었다.
* * *
아랑은 숟가락으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서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을 훔쳐보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울려 자신의 귀 바로 옆에서 뛰는 것 같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은수저를 잡았던 손바닥에 땀이 차자 얼른 무릎에 올려둔 냅킨에 문질렀다.
어떻게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어릴 때 여자 친구들이 가지고 놀던 바비인형보다 더 인형같이 생긴 사람이 우아하게 수프를 먹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곳도 아닌데 빛나는 옅은 노란색을 띠는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다. 그 덕분에 하얗고 가는 목덜미가 훤히 보였다.
노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자신의 주먹 크기는 됨직한 푸른 보석도. 깊게 파인 연분홍 드레스를 입어 풍만한 가슴을 거의 반절 드러내 놓은 것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아랑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곧 추워질 텐데, 그만 라이나로 돌아가심이 어떠십니까?”
어떤 대화도 없이 식기와 숟가락이 살짝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던 적막한 식당에 낮은 카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라이엔부르크의 겨울이 그렇게 아름답다면서요. 드넓게 펼쳐진 눈밭에서 썰매를 타는 것도 참 재밌다고 들었습니다.”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정말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목소리가 샬럿에게서 흘러나오자 아랑은 저도 모르게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손가락 하나 까닥이는 작은 움직임, 립스틱이라도 칠했는지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조그마한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말을 하는 것 모두 아랑을 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 심하게 앓는 법이지요. 이곳은 공주님이 좋아하는 무도회나 오후의 티파티도 없는 곳입니다.”
간들거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이어 듣기만 해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카일에게서 나오자 아랑의 시선이 절로 그를 향해 돌아갔다.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수염이 늘 까칠하게 올라와 있고, 흐트러진 머리에 평범한 면 옷이나 갑옷을 입고 있던 토벌대에서의 덩치 큰 사내는 없었다.
삐져나온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백금발 머리카락과 실내인지라 짙어진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호감형의 남자가 이곳에 있었다. 자신의 옷처럼 과한 장식이 있긴 하지만, 그 역시 모두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옷의 화려함의 오히려 그의 선이 굵은 남성적인 외모를 더 강조하는 것 같았다.
“대신 공작님이 계시지요.”
수줍은 듯한 손으로 살짝 자신의 입을 가린 샬럿의 피부에 홍조가 오르자 아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키고 말았다.
이거 봐. 이거 봐. 지금 공주님이 이렇게 나오면 카일 너는 좋다고 어! 그래야지. 사내놈이 빼기는……선남선녀가 지금 할 일 없는 산골짜기 성에서 긴긴 겨울을 뭐 해야겠어! 거기다 저런 외모라면 2세는 아주 그냥.
“조만간 닉이 돌아갈 테니, 그편으로 같이 돌아가시지요.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 시작되면 돌아가시고 싶으셔도 그리할 수 없습니다. 한스에게 일러 곧 단풍이 좋은 곳으로 나들이 다녀오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저렇게 아름다운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외모를 가지신 공주님을 왜 자꾸 돌아가라고 그래? 네가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대빵은 결국 왕이잖아. 그리고 넷째 공주님이랬나? 하여튼 원래 동맹국 왕자랑 공주가 결혼해야 하는 건데, 뭐 넌 외모도 되고 또 공주가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내 특별히 허해주겠다는데 왜 계속 보내려고 하는 거야?
샬럿과 카일의 대화에 따라 그 둘을 바라보던 아랑은 중간중간 수프를 떠먹다 시종이 수프 그릇을 가져가자 둘 곳 없는 스푼을 결국 입에 물고는 샬럿을 바라보았다.
가면 안 돼요. 공주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어요. 그리고 저놈이 말은 이상하게 하지만, 내가 대충 확인해 보니까 물건도 아주 실해, 그냥. 거기다 몸은 지방도 없고 근육이 얼마나 탄탄하지. 저런 놈 없다니까. 잔소리도 안 하고, 말도 그다지 많이 편이 아니라서 조용히 지내기 좋더라고요.
“공작님께서 직접 안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진한 핑크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렌지색이라고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보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고운 눈이 반달로 접혔다. 수줍게 미소 짓는 샬럿의 얼굴을 본 아랑의 오른쪽 다리가 덜덜 떨렸다.
아 세상에서 남의 연애 구경이 젤 재밌다더니. 여기가 맛집이네. 드라마가 필요 없어. 내가 내 눈으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보게 되다니. 그래서요? 이쯤 튕겼으면, 공작님 많이 튕겼어. 콜 해야죠, 콜.
“아랑. 심심할 텐데 공주님과 나들이 다녀오는 건 어때?”
쨍그랑-
아랑의 입에 물려있던 숟가락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성함이 아랑이라고 했나요?”
커다란 소리에 놀란 아랑이 허둥거리는 사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한스가 조용히 음식이 담겨 있던 그릇과 숟가락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어 똑같은 새 음식이 올라오는 것을 멍하니 보던 아랑은 자신을 향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딸…꾹.”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봐준 적이 어디 있었는가? 이상하게 숨이 꼬이는 바람에 딸꾹질이 나오자 아랑은 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공작부인의 방에 계신다고…….”
“히끅- 아. 네. 네.”
급히 말하려다 튀어나오는 딸꾹질을 겨우 삼킨 아랑의 눈물겨운 대답이었다.
“공작님께서 많이 아끼는 시동인가 보군요.”
아랑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큰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냥 쳐다본다기보다 왜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지?
“괜찮으시다면, 메인 요리 올리겠습니다.”
자신을 향한 질문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확실할 수 없는 말에 아랑이 머뭇거리는 사이 한스의 목소리가 이상한 분위기를 바꿔 주었다.
옭아매는 것 같던 샬럿의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고, 그제야 제대로 숨을 내쉰 아랑은 손을 들어 목덜미를 대충 문질렀다.
뭐지. 방금 사마귀에게 잡힌 메뚜기 같은 기분을 느꼈어.
겨우 상황이 수습되자 아랑은 카일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절 왜 공주님과 밖으로 보내는지, 아! 무표정의 카일을 보던 아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카일은 바쁘다거나 개인적인 다른 용무가 있으니까 시동인 자신보고 대신 가라는 것 같았다.
뭐 집주인이 시키면 그게 뭐 어렵겠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과 같이 있으라는데 어차피 넘볼 수 없는 사람이니 옆에서 구경이라도 할 수 있다면 아랑에겐 이득이다. 거기다 혹시 공주님 친구들이면 다들 귀족일 테고 또래가 비슷하면 어떻게 이쁜 처자 한 명 소개 받으면…….
짐짓 심각하던 아랑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밝아졌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닉, 이곳 지리는 네가 잘 아니까 공주님 편하게 모시고 원하시는 곳을 다녀와.”
아니, 카일 이게 또 무슨 말입니까? 방금 나보고 가라며. 나도 단풍놀이 좀 가보자. 환하게 미소를 띠던 아랑은 금세 표정을 굳히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샬럿의 의견도, 아랑의 의견도 듣지 않는 카일의 독단적 결정에 조용히 식사하던 닉의 시선까지 카일을 향했다.
“공작님 편한 시간에 같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바쁘신 분께 괜한 시간 뺏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누가 봐도 공주의 대접을 아랑이나 닉에게 미루는 카일의 행동에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샬럿이었다. 우아한 자태로 천천히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살짝 인사를 하고 나가는 샬럿의 뒤로 아랑의 시선이 애잔하게 붙었다.
공주님은 정말 환상처럼 아름답고 품위 있고, 고귀하신데. 싹퉁머리 없는 카일. 눈치가 그리 없나? 연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자신도 지금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겠는데. 카일, 너 눈새니?
“카일. 너 그런 식으로 공주님 대하다가 작위 뺏긴다.”
닉은 무심히 스테이크 옆에 있는 잘 익은 채소를 먹으며, 한마디 툭 뱉었다.
“억지로 안겨준 거 다시 들고 가라 그래. 작위 가지고 가는 김에 라이엔부르크도 다시 갖고 가고.”
아랑은 스테이크를 썰며 카일을 흘긋 바라보았다. 남들은 갖지 못해서 안달인 작위에, 영토에. 하물며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물으면 ‘샬럿 공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미모의 여인까지 어떻게 다 마다할 수 있지?
혹시 카일의 취향…….
아랑은 카일의 옆에 있는 닉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늘 붙어서 티격태격하지만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나, 친구 집을 제집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거리는 것까지…… 참 격조 없어 보이네. 거기다 둘을 놓고 보면 어딜 봐도 선남선남이 따로 없기까지.
이러든 저러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아랑은 크게 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역시 부자 공작님 댁이라서 그런가, 고기 육질이 좋은 것이 카일만 허락한다면 부엌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적당한 재료만 있다면, 상추 위에 연기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올리고 그 위로 쌈장 듬뿍 찍은 삼겹살에 구운 마늘 한점, 겉절이까지 살짝 올려서 한 쌈 크게 싸 먹고 싶었다.
* * *
매일 아침이면 하는 경건한 행사. 아랑은 방 한쪽 자신의 약초들 사이에 같이 둔 녹색환을 꺼냈다. 이제 꿀떡 삼키고 물을 마시면 되지만, 오늘은 특별히 물 대신 한스에게 부탁해서 받은 꿀을 넣은 따듯한 우유가 아랑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아! 맞네. 닉이 마법사네.”
할매의 말에 의하면 마법으로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거기다 닉은 늘 자랑하며 말하는 마탑의 수석마법사니까 그 정도는 가능할 테고. 그럼 아침마다 이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검은 눈동자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아랑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닉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만, 확신할 수 없는 법.
문득 처음으로 할매랑 마을에 갔던 것이 떠올랐다. 갑자기 할매랑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도 있지만, 그들에게 화두가 된 것은 아랑의 검은 머리칼이었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같은 검은 머리카락도 다양했다. 검은색이지만 햇빛 비치면 초콜릿 빛을 띠는 친구도 있고, 혹시 혼혈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만큼 가늘고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친구도 있었다.
그에 반해 아랑은 진한 검은색으로 유명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완전 검은색이라고 했던가? 거기다 유독 하얀 피부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인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 온전한 검은 빛 머리카락도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야. 이놈들아. 멜라닌 색소가 진해서 그런 거라고! 너희들은 그게 부족한 거고.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눈동자. 머리카락 색을 확인한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아랑의 눈동자로 향했고, 할매의 약초로 인해 초콜릿색 정도로 옅어진 눈동자는 때마침 햇살까지 비쳐 밝은 갈색 정도로 보였기에 그들은 별말 없이 뒤돌아 각자 제 할 일을 하러 흩어졌던 것이었다.
과연 닉은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리고 유들거리는 말투로 장난치면서 색을 바꿔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아랑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마법사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 그리고 그 미친 새끼를 응징하는 것.
아침부터 분노가 치솟자 아랑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환을 하나 잡고, 왼손으로 꿀이 잔뜩 들어간 우유가 담겨 있는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자자, 환을 입 안에 집어넣고 0.1초 만에 우유를 마시고 꿀떡 삼키는 거야. 맹물도 아니고 우유면 맛이 괜찮을 거야. 그래, 설아랑. 넌 할 수 있어.
창을 보고 선 아랑은 최대한 빨리 환을 입에 넣고 우유를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도련님.”
“푸아……. 쿨럭…컥…….”
한스 왜 하필 그 타이밍인가요? 이제 입 안 가득 들어온 우유를 목구멍 열고 삼켜서 곧장 위로 보내면 되는 단계에 들려온 목소리에 아랑의 입에 들어간 것들이 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우으…크…….”
늘 팔뚝에 걸고 다니는 수건 같은 것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건가요? 급히 한스가 내민 것을 받아 입을 가렸지만, 사레들려 기침을 쏟아내는 아랑의 눈에서 눈물이 쏙 나왔다.
거기다 최악인 것은 기도를 타고 아래로 쭉 내려가야 하는 환까지 역류해 그 쓰고 매콤하며 짜기까지 한 묘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운 것이었다.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한스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랑의 등을 토닥이고는 기침이 좀 멎은 듯하자, 잰걸음으로 침대 옆줄을 잡아당겼다.
“아니 괜찮아요. 제가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영주님께서 오늘부터는 원치 않으시면 꼭 식사 시간을 맞추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편안한 시간에 식사하시고, 부엌 출입도 허하셨으니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들러도 좋습니다.”
아랑은 기다렸던 소식이 반가웠지만 여전히 괴로움에 그 반가움을 표현하지 못하며, 고개만 끄덕이다 시선을 들어 한스를 휙- 쳐다보았다.
“오늘 공주님과 같이 가시기로 한 마을 탐방은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날씨가 좋지 않습니다. 공주님께서도 양해를 해 주셨으니, 다시 날을 잡아보겠습니다.”
샬럿은 카일과 단둘의 시간을 원했지만, 결국 결정된 것은 이곳을 잘 아는 닉이 아랑과 샬럿, 둘을 데리고 마을 구경을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늘로 예정돼 있었다. 두어 번의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에게 꿀이 잔뜩 든 우유를 다시 가져오라 말하는 한스의 팔뚝을 아랑은 얼른 잡았다.
“그럼 나 이제 부엌에 마음대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단풍놀이 가는 것도 취소됐으면, 오늘 할 일도 없네요. 그럼 우리 맛있는 거나 해 먹어요.”
부엌 출입도 허가 받았는데, 겨우 꿀 든 우유가 웬 말이냐. 한스 할배요. 우리 진짜 맛있는 거 해 먹읍시다. 내가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맛난 거 해 드릴게요.
아랑의 의도를 모르고 그를 내려다보던 한스는 자신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이상한 행동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사레가 심하게 들리셨는데, 눈을 편하게 못 뜨시는 걸 보니 눈에도 이상이 생기신 건가?
“그래서 지금 부엌에 가도 되는 건가요?”
“네. 도련님께 부엌은 늘 오픈되어 있고, 음식 재료 또한 원하시는 만큼 사용하셔도 됩니다.”
한스는 자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꾸벅 머리를 숙여 보이고, 방을 뛰어나가는 아랑의 뒷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깊은 산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편히 살아온 분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다 큰 어른이 어린애처럼 실내를 이렇게 뛰어다니시다니.
“넘어지십니다. 천천히 가시면…….”
서둘러 아랑을 뒤따르던 한스의 목소리는 이미 복도 중간 중앙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아랑에게 닿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