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6화 (6/15)

06.

천국이다. 천국.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니지만, 너무 들뜬 나머지 헐렁한 바지에 헐렁한 상의의 잠옷 바람으로 눈에 붙은 눈곱도 떼지 않고 부엌으로 쳐들어간 아랑은 부엌일 하는 하인들에게 대충 인사만 하고 주방과 이어져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한가득 쌓여 있는 음식 재료에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눈에 빛을 내는 아랑은 손에 잡히는 것을 죄다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뭐 만들어 먹지? 이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것이……. 한바탕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는 뭐가 좋을까? 일단 군고구마에 김치는 불가능하고. 김치전도 안 되고. 설아랑 생각해. 네가 젤 먹고 싶은 게 뭐야?

갑자기 잠옷 바람으로 뛰어들어 와 식자재 창고 가운데 서서 눈을 꼭 감고 코를 킁킁거리는 아랑을 보던 하인들은 한스의 등장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자신이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아랑은 눈을 번쩍 뜸과 동시에 옆에 있는 바구니 하나를 집어 들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식자재를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제일 중요한 게 없지?

“무엇을 찾으십니까?”

이것저것 많이 들어서 묵직해진 바구니를 든 채 두리번거리던 아랑은 한스의 질문에 씩- 웃으면서 대답했고, 한스는 그의 대답에 식자재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오늘 아침 준비는 여기서 멈추고.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부엌에 들어오지 말거라.”

한창 아침 준비에 바쁘던 하인들을 몰아내던 한스는 그중 가장 어린 하인을 잡아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귓가에 살짝 영주님을 모셔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부엌 출입문 앞을 지키고 섰다.

“아랑. 아침부터 이게…….”

카일은 급히 부엌으로 오셔야 한다는 작은 시종의 말에 갈아입던 옷도 다 챙겨입지 못하고 풀린 단추만 겨우 채우며, 급히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조용히 자신이 캐온 약초를 손질하고 성안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구석구석 숨어 있는 약초를 찾는 것에 열을 올리던 아랑이었다. 한스를 통해 부엌을 쓰고 싶다는 말을 전하기에 부엌 출입을 허했고,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아침부터 그곳으로 간 아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성에 있는 요리사의 실력은 왕궁 요리사와 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였다. 아랑도 매끼 식사에 만족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카일. 왔어요?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요.”

깊고 커다란 통에 제대로 손질한 것 같지 않은, 그저 껍질을 벗기고 씻기만 한 것으로 보이는 재료들을 넣던 아랑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한스. 눈치챈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아랑. 괜찮은 것이냐?”

아랑은 마늘과 통후추로 보이는 조미료와 허브잎까지 물이 한가득 든 통에 넣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은 것이냐니. 지금부터 한 1시간만 기다리시면 모두가 아주 괜찮을걸요.

그리고는 자신의 앞으로 일렬종대로 주루룩 누워 있는, 뽀얀 몸을 드러내고 있는 털 뽑힌 닭들을 흡족하게 내려다보았다. 가장 손이 가지 않으면서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음식. 우리 날도 이러니 닭백숙 먹고 힘내보자고요.

황기도 대추도 인삼도 없지만, 뭐 비슷하게 마늘 있고, 후추에 허브잎까지 넣었으니 대충 비린내 잡히고. 찹쌀 없어서 쌀뿐이지만, 그래도 갖은 재료들을 닭의 배 안으로 밀어 넣어서 1시간 정도 푹 끓이면 됩니다요. 그런데 양이 많아서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어요.

“네. 조금만 기다리면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혹시 배고프셔도 참으세요.”

닭 한 마리와 가위를 든 아랑은 누린내가 나기 쉬운 닭의 아래쪽 껍질과 부분들을 도려내려고 했다.

“어…….”

분명 부엌 입구에 한스와 서 있던 카일인데. 어느 순간 여기까지 온 것인지 자신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게 하는 카일의 행동에 아랑은 눈을 깜박거렸다.

칼이 아니라 가위를 들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런 거 들고 있는 사람 막 건들고 그러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언제부터 이런 것이냐.”

아랑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일의 반짝이는 옐로우 다이아몬드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카일이 틀어쥔 턱이 아프고, 쏘아보는 듯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아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중얼거리듯 나지막이 하는 말이 ‘언제부터 이런 것이냐.’라니. 그의 말의 뜻을 확실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러다니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는데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요. 거기다 분명히 한스 할배가 부엌 써도 된다고 했는데, 지금 설마 닭 몇 마리랑 마늘이랑 재료 좀 썼다고 이러는 건 아니시겠죠?

“언제부터 이런 것이냐고 물었는데.”

다시 한 번 대답을 강요하는 카일의 말에 아랑은 눈을 깜박였다. 부엌을 쓸 수 있고, 닭백숙을 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놓친 것이 떠올랐다. 사레 걸려 기침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먹은 것으로 여겼고. 보통 환의 유지시간은 24시간. 어제 아침에 먹은 걸 떠올려도 본 색으로 온연히 돌아올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아랑의 손은 절로 위로 올라가 두 눈을 가렸다.

“너도 네 문제를 알고 있는 거군.”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리숙한 아랑의 행동만으로 그가 가진 생각이 모두 드러났기에 카일은 지금껏 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한스를 바라보았다.

“아랑의 방에서 그 약을 찾아와.”

전용 하인이 필요 없다는 그의 말에 아랑을 돕는 건 한스였다. 돕는다기보다 아침마다 깨우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 아랑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한스였고 동시에 이 집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카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랑은 잡힌 턱이 아파 살짝 몸을 뒤로 빼면서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그가 알아챘다는 걸 알았기에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사선으로 시선을 내렸다.

“원래 색이…….”

역시 검은색이냐는 말을 잇지 못하는 카일을 대신해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눈을 뜬 자신을 보고 엉덩방아를 찧고 놀라던 로엔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벌 떨면서 뭐라고 욕을 뱉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는 로엔이 주는 환을 먹었고 사람들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았기에 잊고 지냈던 것이었다.

잊고 지냈다기보다 로엔의 협박 같은 경고가 절대 조심해야 한다는 그 당부가 와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카일의 심각한 표정과 낮은 목소리에 잘못한 것이 전혀 없지만,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위축되었다.

“그 환. 직접 설명해.”

지금껏 아랑에게 말을 할 때 카일의 목소리를 평범하고 편했으며, 오히려 부드럽고 밝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날 선 목소리는 당황하고 놀란 아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 제 눈은 검은색입니다.”

이게 무슨 죽을죄라고, 한국 가면 아니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사람 눈이 검은색인 것을 떠올린 아랑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곳의 말도 안 되는 미신대로라면 지구인의 1/3이 다 악마이고 저주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중간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날 때부터 검은색입니다.”

무덤덤하게 사실을 말하는 아랑에게 돌아온 건 무거운 분위기와 침묵. 카일의 긴 한숨이었다.

“영주님. 가지고 왔습니다.”

아랑은 이곳에 도착한 뒤 한스에게 부탁해서 받은 손바닥만 한 목각함을 들고 나타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게 보관했던 것이 환이었으니, 당연히 그곳에 넣어뒀던 것이었다.

“몇 개 없군. 일단 먹도록 해.”

한스에게 목각함을 넘겨받은 카일은 손수 함을 열고는 굴러다니는 10개 남짓한 환 중 하나를 집어 아랑에게 내밀었다.

카일이 건네는 환을 받을 생각조차 못 하던 아랑은 직접 자신의 손목을 잡고, 제가 들고 있던 닭과 가위를 놓게 하는 그를 쳐다보았다.

카일의 옆으로 나타난 한스가 내민 머그잔에 든 것이 우유인 것을 본 아랑은 이 상황에서도 작게 미소 짓고 말았다.

이 동네 나이 드신 분들은 죄다 날 좋아하는 것 같지? 매일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자신을 살펴주던 로엔의 모습이 한스에게 겹쳐 보였다. 무엇보다 현재 카일이나 한스가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카일과 한스를 번갈아 보던 아랑은 갑자기 입 안으로 무언가 쓱 들어오자 눈을 치켜뜨고 한스가 들고 있는 머그잔을 낚아챘다. 서둘러 우유를 마셨지만, 밀려오는 독한 맛에 절로 몸을 살짝 비틀고는 최대한 그것조차 표시하지 않으려 했지만 꿀떡 삼키는 순간 부르르 떨었다.

“아프십니까?”

괴로움에 몸을 비틀자 한스가 걱정스러운 물음을 건넸다. 그의 말에 입 안에 든 우유를 마시고, 그가 내민 머그잔에 담긴 우유까지 다 마신 아랑은 작게 머리를 흔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미친. 말을 하고 입에 넣던지, 아니면 손 닦을 시간을 주고 내가 받아먹게 기다려야지. 그걸 그리 입 안에 밀어 넣어? 너 지금 나 죽이려고 한 거지?

“쓰고 맛이 없어서 그래요.”

“크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솔직하게 대답한 아랑은 살짝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는 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노려보았다.

“아직 검은색이군.”

팔짱 끼고 서서 자신의 눈동자를 확인하는 카일의 진지한 모습에 아랑은 이를 악문 채로 말을 꺼냈다. 

“아. 이거 약효가 돌려면 1시간 정도 걸려요. 1번 먹으면 24시간. 하루 정도 갈색으로 눈동자 색을 변하게 해 줘요. 그래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먹고 공복으로 1시간 정도 있다가 밥 먹어요. 이게 먹고 바로 뭘 많이 먹으니까 약효가 떨어지고, 그렇더라고요……어?”

아랑은 갑자기 자신의 환을 집어먹는 카일의 행동에 놀라 그의 팔뚝을 급히 잡았다. 아니, 님이 그걸 왜 드세요? 내가 맛없다고 말했는데, 설마 맛있는 거 나 혼자 먹는 거 같아서 그런 건가요? 그거 피 같은 제 환인데, 그거 만드는 게 얼마나 시간과 정성이 드는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 몇 개 안 남아서, 부랴부랴 만들어 말리고 있긴 합니다만.

“특이한데 맛이 없긴 하군.”

그 맛을 느끼지 않으려, 후다닥 삼키는 자신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꼭꼭 씹어먹는 카일을 보며 아랑은 입을 떡 벌렸다. 이 사람 혹시 고통은 남보다 못 느낀다던가, 아니면 고통을 즐기는 사람인가? 잡았던 카일의 팔뚝을 슬쩍 놓고 몇 걸음 위로 물러났다.

“1시간?”

진짜 다 씹어 삼키고, 물을 마신 카일이 하는 말에 아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놈. 그래. 그러니 소드 마스터인지 뭔지도 됐겠지. 다이어트 성공한 놈이랑 담배 끊은 놈은 독한 사람이라 상종하지 말라더니. 아니야. 이거 씹어 먹은 저놈이 더 독한 놈이야.

“보통 그 정도 걸려요.”

“그런데 지금은 뭐 만드는 중이지?”

아랑은 그제야 뒤돌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사이 큰 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물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다시 닭과 가위를 집어 들었다.

“닭백숙이요. 원래 닭튀김 만들고 싶었는데, 기름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이거라도요. 솔직히 맛은 닭튀김이 더 좋은데, 아. 이거 찬물일 때 넣고 같이 푹 끓어야 맛있는데 뭐 어쩔 수 없긴 하네요.”

아랑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후다닥 닭을 손질해 끓는 물 속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넣었다. 원래 계획이면 닭을 쌀로 채우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기에 그냥 닭부터 먹고 남은 육수에 채소를 다져 넣고, 밥을 넣고 끓여 죽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줄 수 있나?”

넓은 부엌에 덩그렇게 있는 남자 셋. 그리고 이 닭백숙이라는 요리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그저 푹 끓이기만 하는 요리였기에 할 일이 없어진 아랑은 카일의 질문에 부엌 안 한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 넓은 성에서 호화로운 응접실과 집중하기 좋은 서재를 두고, 부엌에서 등받이도 없는 작은 의자에 앉은 두 남자를 보며 한스는 뭐라 말을 꺼내려다 조금 떨어져 서는 것을 선택했다.

“대마법사를 만나야 하는 이유부터.”

로엔과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던 이야기만 하던 아랑은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든 카일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자신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도 자신을 악마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은 한스와 카일이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새아버지의 배신. 그리고 예상치 못한 로엔의 죽음으로 생긴 사람에 대한 불신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싹싹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아랑이 내어주는 건 자신이 허락한 그 선까지일 뿐. 그 선 안으로 들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그 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힘들어하는 자신의 옆을 지켜주고 품어준 이는 로엔이 전부였다.

“…….”

“말하기 싫은 것인가?”

한창 나불거리며 숲에서 이상한 약초를 캐와서 할머니에게 혼났던 이야기와 산길을 헤매다가 작은 동물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하던 아랑의 입술이 더는 움직이지 않자 카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전부터 코 안으로 파고드는 요상한 냄새와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카일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한창 끓고 있는 솥 앞에 선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밀크티는?”

한편 샬럿은 헤르시나가 내민 거울을 받아 들고는 자신의 얼굴과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꼼꼼히 살폈다. 

“오전에 한스님께서 부엌에 있는 하인들을 모두 나가라고 하셨기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나 아침에 밀크티 먹는 거 몰라? 그럼 어떻게든 준비해야지. 그리고 부엌을 다 비웠으면, 오늘 브런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고운 샬럿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히고, 목소리가 앙칼지게 올라가자 헤르시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주인. 샬럿은 딱 그런 주인이었다.

자신이 기분이 좋고 행복할 때는 너그럽고 온화했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폭언이나 폭력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그런 여자였다.

“지금 내려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됐어. 내가 직접 내려갈게. 넌 또 내려가봤자.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돌아와서 고개를 숙이며 촌스러운 빨간 머리를 내게 보일 거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샬럿이 문가로 향하자 헤르시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재빨리 뛰어 문을 열었다.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는 그녀의 입술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핑계를 대도 그런 식으로 대나? 부엌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주님의 서재를 지나야 했기에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그녀의 속셈이 눈에 선했다.

자신에게 그렇게 짜증을 내더니 우아하게 복도를 걷는 그녀에게서 희미한 콧노래라 들리자 헤르시나는 슬쩍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미워하고 싶어도, 이제 스무 살 첫사랑에 빠진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던 것이었다. 당차게 집을 나와 이곳으로 올 때까지도 샬럿에게 무심했던 왕과 왕비를 떠올리자, 오히려 이곳에서 제멋대로 굴고 사는 것이 그녀에겐 행복일 것이었다.

* * *

“이게 뭐라고?”

“닭백숙이요. 이게 몸에 얼마나 좋은데요. 보기 좀 그래요? 일단…….”

아랑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지켜보는 한스와 카스 앞에서 커다란 삼지창 같은 도구로 닭 한 마리를 찍어 꺼냈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제법 되었기에 삼지창이 푹 들어가는 것이 잘 익은 것 같았다.

넓은 접시에 내려놓은 닭의 다리 끝을 집게로 슬쩍 잡아당기자 먹기 좋게 뜯겨 나온 양쪽 다리를 내려다본 아랑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그냥 잡고 먹으면 뜨거울 것 같은데, 적당히 잡을 만한 게……. 뭐 언제 도구 따지고 먹었다고. 김이 모락모락 나던 다리 끝은 검지와 엄지로 잡자 차가운 이곳 기온에 금세 식었는지 잡을 만했다.

“자. 이제 뜯어요.”

양손으로 각기 한쪽씩 잡아 카일과 한스에게 내밀자, 무덤덤한 카일과 다르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한스의 표정에 아랑은 작게 웃어버렸다. 아니 이렇게 맛있는 걸 주는데 그 표정 뭐야? 

“이거 이렇게 먹어야 맛난데.”

보란 듯이 그들 앞에서 통통한 허벅지살을 덥석 깨물어 죽 뜯어낸 아랑의 두 눈이 절로 감겼다. 그래 이 맛이지. 양계장의 좁디좁은 철창 안에서 사료만 쪼아먹고 겨우 한 달쯤 자라나 사람들을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닌, 넓은 초원을 뛰어놀며 자연 방목으로 키운 닭의 맛이란. 

쫄깃하게 씹히는 그 식감과 풍부한 육즙. 한입에 쏙 넣고 발골할 수 있는 작은 크기가 아니라 아랑의 얼굴만 한 엄청난 크기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명 그들을 향해 내밀었지만, 순식간에 양쪽 다리를 제가 해치워버린 아랑은 앙상해진 닭다리 뼈만 든 채 저를 집중해 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헤- 하고 웃어 보였다.

“도련님. 도구를 쓰심이…….”

침묵을 깬 건 정중한 한스의 말이었지만, 아랑은 망설이지 않고 열심히 끓고 있는 솥 안으로 삼지창을 집어넣어 새로운 닭을 한 마리 꺼냈다. 어차피 퍽퍽한 가슴살은 죽 끓일 때 쓰면 되니까, 맛있는 부위만 쏙쏙 골라 먹자는 심산인 것이었다.

“할배. 이건 이렇게 먹어야 맛있는 거예요. 접시에 옮기고 포크에 나이프 들고 우아 떠는 순간 확 식어서 맛이 없다고요. 원하시면 그렇게 드셔도 되지만요.”

다시 식은 다리를 확 뜯어낸 아랑은 한번 더 그들에게 닭 다리를 권했다. 여전히 머뭇거리는 한스와 달리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순순히 받아드는 카일을 보며 아랑은 싱긋 웃었다. 

그래. 어설프게 불에 구워 먹는 것도 좋지만, 이건 또 이 나름의 맛이 있다고. 아랑은 닭의 허벅다리를 무는 카일을 보고는 서둘러 푹 삼긴 닭을 건져냈다.

“음…….”

“맛……있으십니까?”

한입 베어 물더니, 어느새 해치우고 아랑이 닭을 꺼내느라 내려놓은 다른 쪽 다리를 슬그머니 집어 드는 카일을 보는 한스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아랑보다 더 빨리 닭 다리 2개를 해치운 카일의 시선이 온전히 다리를 붙이고 누워 있는 다른 닭으로 향했다.

“아. 다리만 뜯어먹어요. 다른 건 죽 해야 해요.”

어느새 한스의 손에도 닭 다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 이럴 때 일회용 비닐장갑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아랑은 가장 먼저 꺼내 이제는 완전히 식은 닭을 맨손으로 발라내면서 빠르게 닭 다리를 해치우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카일과 같이 지낸 시간이 있기에 이미 그의 엄청난 식사량을 알고 있어 놀랍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한스였다.

체통과 규율. 체계를 중시하시던 분 아니셨나요? 너무 열심히 드시기에 목이 메일까 봐 걱정된 아랑은 구수하게 우러난 육수 위에 동동 떠 있는 기름은 싹 걷어버리고 아래부터 깊게 국자를 넣고 휘저은 후 맑은 육수를 컵에 따라 주었다.

아예 한 손에는 닭 다리, 다른 손으로 육수를 마시는 그 모습은 마치 복날 삼계탕집에서 영계 한 마리를 다 드신 후 국물까지 싹 비워내는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배가 뜨끈하니 좋으시죠? 날 추울 때는 이만한 게 또 없다니까요. 몸에도 얼마나 좋은데요. 이거 싹 발라서 죽 끓여 드릴 테니까 그것도 드셔야 하니까 닭 다리는 적당히 드세요.”

“재밌는 환이군.”

닭가슴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쫙쫙 자르던 아랑은 닭 다리와 제가 준 육수를 다 마시고 서 있는 카일에게 닭 날개를 건넸다.

“네?”

“갈색.”

짧은 카일의 말에 아랑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닭고기가 익는 시간이면 1시간은 충분히 지났을 테고, 그럼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문득 카일도 환을 먹었던 것이 생각난 아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일은요?”

대답 대신 순식간에 닭 날개마저 뜯어 먹고 손을 닦고 있는 카일의 눈을 보려 아랑은 목을 쭉 뺐다. 일단 손으로는 닭가슴살을 찢고 있고, 이미 엉덩이는 따뜻한 부뚜막에 붙이고 앉았으니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이었다.

한껏 고개를 젖힌 아랑의 얼굴 앞으로 카일의 얼굴이 슥 다가오자 그는 급히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우와. 완전 대박.”

분명 싱그런 풀잎같이 초록빛을 띠던 카일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카일이 눈을 깜박일 때마다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보석 같은 그 눈동자를 더 반짝이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 바뀌었나?”

“네. 완전 이뻐요. 노랗고 주황색 같은 호박색이요”

“…….”

호들갑을 떠는 아랑의 옆에서 진중하게 육수를 마시던 한스의 눈도 카일의 바뀐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크게 뜨였다.

“일단 환은 꾸준히 복용하도록 하고. 한스는…….”

샬럿은 부엌 앞에 선 채로 드레스 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하찮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부엌에 카일이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 집사 한스와 굴러 들어온 아랑인가 뭔가 하는 시종까지 셋이 있는 것이었다.

어울리기 어려울 것 같은 셋이 다른 곳도 아닌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가 폴폴 나는 부엌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불편하고 품위 없게 손으로 음식을 잡고 이로 물어뜯어 먹는 원시적인 행동에 기가 찼다. 거친 북쪽 사람들이 예의도 없고 거칠다고는 들어왔지만, 이리도 무식할 줄이야.

무엇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카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왕궁 무도회장에서도 식사를 같이 할 때도, 가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카일의 얼굴은 단 한 가지 표정만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살짝 접힌 눈가. 이야기의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지만, 잔잔하게 웅성거리는 목소리는 편하게 그녀의 귓바퀴에 머물렀다.

저렇게 매력적으로 웃을 수 있는 분이셨……. 카일을 훔쳐보던 샬럿의 입술이 살짝 떨리면서 벌어졌다.

“헤르시나. 네 눈에도 보여?”

“영주님 눈동자 색이 노란색이셨어요?”

“그럴 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살짝 굳은 표정으로 카일의 얼굴을, 그중에서도 노란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를 보고 있던 샬럿은 저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뒤 음식을 집어 먹었던 손을 닦는 그 행동까지 지켜보던 샬럿과 헤르시나 앞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카일의 손이 아랑의 턱을 받쳐 들었고, 둘은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서 있던 그가 상체를 숙이고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샬럿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급히 막았다.

한스의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설마설마 그건 아니리라 생각했는데.

아랑이 카일의 시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찜찜했지만 토벌대나 그런 곳을 다닐 때 시동을 데리고 다니는 건 익히 있는 일이었다. 토벌에서 돌아온 후 카일의 옆방을 쓴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밤하늘보다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분이라도 바른 듯 하얗고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스무 살이라고 하더니 어느 쪽 출신인지 몰라도 평균 남자 체격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 그 짧은 머리만 아니었다면 얼핏 여자라고 생각할 만큼 여린 체격이었다.

가까이서 봤을 때, 분조차 발려있지 않은 얼굴임에도 주근깨조차 없는 투명한 피부, 거기에 초콜릿색의 눈동자와 선명한 붉은 입술까지.

남녀 가리지 않고 홀릴 만큼 선이 가는 여려 보이는 미남자와 카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애써 부인하고 이해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봐버리면, 평범한 시동이 아니란 걸 깨달은 샬럿을 팩하니 몸을 돌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헤르시나. 저것 좀 없앨 방법 없을까?”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샬럿은 입술을 달싹이지 않은 채 복화술로 중얼거렸다. 귀가 많고 눈이 많고 입이 많은 왕궁 생활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이런 기술이 전부인 게 한심스럽지만, 이 순간엔 가장 유용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헤스티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는 슬쩍 고개를 틀어 부엌을 바라보았다. 우선 샬럿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기보다 아랑과 카일에 대한 정보를 좀 얻어야 할 것 같았다. 그저 주인과 시종의 관계인지. 정말 샬럿의 라이벌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대인지부터 알아야 어떻게든 행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후에 공주에게 문제가 생길 만한 일이 아닌, 모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야했다.

* * *

“영주님?”

카일은 아랑의 턱을 받쳐 잡고 이리저리 돌려 햇빛에 그 눈동자를 비춰본 뒤 자신이 익히 아는 그 색임을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켜 부엌을 벗어나려 했다.

그 환을 먹은 건 지극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맛이 없으면 먹을 때마다 그 수선을 피는지,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진심으로 몸서리쳐질 만큼 자신이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 처참한 환은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맛을 느끼기 위해 씹어먹은 자신이 저주스러운 그런 맛.

다른 방법을 찾을 때까지 매일 환을 먹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 매일 먹어야 하는 아랑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그걸 확인한 사람이 자신과 한스였으니, 조용히 넘어갔지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카일이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

“아니. 어떻게 고기만 먹고 가요? 닭죽을 먹어야 제대로 된 한 끼라고요.”

고기 다 먹었으면 식사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랑이 나가려던 한스와 자신을 붙잡아놓고, 시킨 것은 칼질이었다.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는데.”

집안을 능률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적합한 곳에 적합한 사람을 고용할 줄 알았지. 한스는 직접 빗자루 들고 쓸고, 닦고, 제대로 된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할배는 그거 밥 다 된 거니까 퍼서 옆에 있는 끓는 솥에 넣어요. 카일은 소드 마스터잖아요. 평생 칼 잡고 휘둘렀으면서 왜 칼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 말해요? 그냥 여기 있는 거 죄다 잘게 다져버리면 돼요.”

롱소드 대신 짧은 식칼을 양손에 잡은 카일은 아랑이 건네는 각종 야채들을 잘게 다져야 했고, 그 과정에서 빠른 효율을 위해 오러까지 뽑아내야 했다.

“와! 진짜 이뻐. 칼이 파란색으로 반짝거리고 다지기보다 성능 좋은데요.”

순수한 감탄인지 일을 더 시키기 위함인지 알 수 없는 아랑의 칭찬을 들은 카일의 어깨가 조금 올라갔던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한두 명이 먹을 적은 분량이 아니고, 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한 분량을 원했던 아랑은 맛있다고 호로록거리며 신나게 마셔버린 두 사람을 흘깃 노려보았다.

잘 익은 밥을 바로 넣으면 국물이 부족할 것 같기에 아랑은 다 된 밥에 그저 물과 소금을 부어 한스에게 열심히 저어 죽을 만들게 시키고는 신이 나서 칼질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바본가. 그냥 좀 잘한다고 칭찬해줬더니, 여기 있는 채소는 다 다져버릴 것 같은 카일을 보며 아랑은 슬쩍 당근 2개를 그의 옆에 더 두었다.

열심히 한스가 젓고 있는 죽을 본 아랑은 카일이 잔뜩 썬 채소를 넣고 자신이 찢은 닭살들도 넣었다. 마지막으로 힘 좋은 카일을 시켜 끓여놓은 육수까지 한곳으로 합쳤다.

이제부터는 뭐 채소가 익고, 소금으로 간만 하면 되는 시간만 남았다.

“이제 안 도와주셔도 되니까 부엌에서 나가시는 걸 허락해 드리지요.”

죽은 맛있게 끓도록 기다리면 끝이고, 그사이 아랑은 이곳 말로는 샐러드 그러나 한국에서는 익히 겉절이로 알고 있는 것을 만들기 위해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난 게 아닙니까?”

“아. 이제 이건 보글보글 끓으면, 소금으로 간하면 되고요. 어차피 간장 없으니까 방법이 없어요. 저는 같이 먹을 샐러드 만들려고요. 빨간 고추랑 비슷하게 매운 맛 나는 채소도 찾았거든요.”

아랑은 활짝 웃으면서 자신의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길고 큰 파란색 채소를 집어 들었다. 색이 파래서 뭔가 한번 씹어먹었다가 그 매콤함에 한참을 부산을 떨었던 것이었다.

“아이고. 도련님. 그건 먹는 게 아니고, 벌레나 작은 동물들 퇴치용으로 쓰는 겁니다. 벌레가 들어올 만한 곳에 빻아서 두면 쥐나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거든요.”

“어. 그것도 좋은 방법인데, 일단 만들어 드릴 테니 기다려봐요. 이게 벌건 색이어야 확 눈길을 끌고 더 맛있어 보일 텐데, 파란색이 좀 찝찝하긴 해요. 그죠? 그럼 이미 갈아놓은 것도 있어요?”

갈아서 쓴다는 말에 아랑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왕이면 바짝 말려서 갈아놓은 거면 더 좋겠는데. 

“진심 이걸 음식에 쓰신다고요?”

아랑은 몇 번이나 확인하는 한스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사람들이야 이것을 그런 용도로 쓰겠지만, 다시 먹어봐도 아랑에겐 너무 친숙한 고추맛이었다.

파란 고추를 든 아랑의 눈엔 희망이 가득했다. 됐다. 이제 비록 파란색이겠지만 떡볶이를 해 먹을 수 있겠다. 파란 매운탕도 끓이고, 파란 깍두기도 담고, 파란…… 젠장. 여기가 파란 나라냐.

“이 음식 이름이 뭐라고?”

아랑은 넓은 테이블에 앉아 파란 겉절이를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이게 색깔이 이래서 그렇지. 진짜 신선하고 맛있는 겉절이라고.

“그건 닭죽이고요. 이건 겉절이요. 부추겉절이가 최고인데, 그걸 구할 수가 없어서.”

닭죽이긴 한데 맛있는 닭 다리는 죄다 한스와 카일이 뜯어먹어 퍽퍽 살만 넣을 수 있었고, 더 진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었는데 그 역시 그 두 사람이 다 마셔버려서 좀 밍밍한 느낌이 났다. 그러나 아랑의 입은 귓가에 걸려 있었다.

“이, 이게 진심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아랑은 닉이 혀를 빼물고 헉헉거리며 물을 들이켜는 걸 보고는 일부러 보란 듯이 겉절이를 또 한가득 먹었다.

“나 먹고 있잖아요.”

매운 음식이 없는 곳에서 매콤한 게 당기고, 솔직히 이게 얼마나 매운지 잘 가늠이 안 되어 넉넉히 넣은 것이 문제의 시작인 것 같았지만 아랑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많지 않고,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카일이 이마에 촉촉이 솟아난 땀을 닦으며 닭죽을 한입 머금고는 겉절이를 아주 조금 집어먹는 걸 보며 아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먹기 싫음 닭죽만 먹어도 돼요. 같이 먹으면 더 맛난 게 문제지.”

오랜만에 먹고 싶은 음식을 제대로 먹은 아랑의 머릿속은 행복한 상상들로 가득했다. 다음엔 뭐 먹지. 아침 눈뜨자마자 환만 제대로 챙겨 먹으면, 이제 부엌 뒤 창고까지 이 성안 어디든 다 갈 수 있는 프리패스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겉절이도 만들어 놨고, 돼지고기도 있으니까 바로 삼겹살 구이로 가? 아. 그러기엔 쌈장이 없네. 쌈장이 필수인데 된장, 간장, 고추장을 담을 수도 없잖아. 아니지. 왜 없어? 시간이 없고, 문제는 장은 담아본 적도 없고, 담는 법도 모르는 아랑이었다.

“그런데 오늘 취소된 나들이는 언제 가요?”

“날씨니 뭐니 신경 쓰면 못 가고 단풍 다 떨어지니까, 그냥 내일 갔다 오면 되겠지. 마을 한 바퀴 돌고 숲 초입까지만 다녀오면 되잖아.”

아랑은 겉절이에 붙은 파란 양념을 죄다 털고 먹는 닉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숲 초입에 가면, 자신을 버리고 연애질인 은돌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지내는 곳이 좋지 않다면 넓은 카일의 성으로 데리고 와도 될 것 같았다.

“카일. 혹시 성에서 동물 키워도 돼요?”

“갑자기 웬 동물? 그 까망이? 해츨링 작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그러고 보니 요즘 안 보이네.”

아랑은 닉의 호들갑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까망이도 된다고 했으니, 은돌이도 되지 않을까?

“어떤 피해만 생기지 않는다면 상관없지.”

무덤덤한 카일의 말에 아랑의 눈꼬리가 반달로 휘었다. 

* * *

이제 찬기가 스며든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사방으로 휘날리는 낙엽을 보며 아랑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숲에서 야영하고 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푹신한 단풍잎이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그 와중에 아랑은 몸을 휙 굽혔다.

“요기 또 있네.”

마을 구경부터 하자니까, 마을도 오후나 돼야 활기를 띠고 볼 게 많다는 닉의 말에 모두 아침부터 부지런히 숲 초입에 올라 자리 잡고 단풍 구경에 간식을 먹기 바쁘지만 아랑은 아랑대로 또 바빴다.

“밤이다. 밤이다. 군밤. 화롯불에 군밤이요.”

살짝 벌어진 밤송이 양쪽은 신발 바닥으로 슬쩍 밀어 벌리자, 잘 익은 밤이 송글송글. 그것들을 주워 망태기에 담는 아랑의 입에서 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부터 해서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뜯고 담다 보니 아래로 축 처져 묵직해진 망태기를 들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내려간 아랑은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샬럿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선녀도 저리 이쁘진 않겠지. 그저 바라만 봐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이 저런 사람이 아닐까?

아랑은 망태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따온 꽃들을 잘 수습해 잡았다. 그냥 보기에도 이쁘지만, 그 안에 든 꿀을 쪽 빨아 먹는 재미가 있기에 샬럿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엄마와 할매가 늘 그랬다.

세상에 꽃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고, 비염 때문에 미친 듯이 괴로워도 꽃은 좋다고.

“공주님.”

줄기 쪽을 잘 말아쥔 아랑은 어딘가를 보고 있는 샬럿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타고나길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급히 숨을 들이켰다.

평소 식사시간이나 지나치다 마주쳐도, 자신에게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는 샬럿의 시선을 오롯이 받게 된 것이었다.

“뭐죠?”

“들꽃이 이뻐서 꺾어왔어요. 이게 보기에만 이쁜 게 아니라…….”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지만, 아랑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꽃을 꽃받침에서 똑 떼어 꿀을 먹는 법은 직접 보여드리려 했다.

“치워요.”

꽃을 똑 따서 입가로 가져가던 아랑은 냉혹한 한마디에 살짝 굳었다.

“꽃꿀이…….”

“보기 흉하니까 치우라고요. 정원에서 기른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것이 뭐가 이쁘다고. 벌레나 병균들이 있으면 어쩔 거예요?”

벌레나 병균이 있지만, 인간의 침과 위액이 그에 못지않게 독하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장미엔 가시가 있다더니. 쏘아붙이는 샬럿의 말투에 아랑은 꽃을 입에 물고 쪽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입 안으로 쏙 들어오는 달달함이란.

먹기 싫으면 말라지. 네가 못 먹어봐서 튕기는 거지. 먹어봤음. 달라고 매달릴걸?

차가운 샬럿의 말에 상처를 받기보다 꽃꿀에 위로받은 아랑은 인사만 꾸벅하고 돌아섰다.

“아랑. 그거 제가 한번 먹어봐도 되나요?”

잔뜩 따온 꽃꿀을 아무도 안 주고 혼자 다 먹겠다고 꿍얼거리던 아랑은 언제 옆에 온 것인지 말을 거는 헤르시나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런 주인 모신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을지. 안쓰러움에 아랑은 꽃 하나를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

“음. 이거 정말 달콤하네요. 산을 다니다 왔으면 목이 마를 텐데,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잔 마실래요?”

아랑이 가르쳐주는 대로 꽃꿀을 먹은 헤르시나는 꿀보다 달콤한 맛에 놀라며 준비해 온 음식 바구니에서 레모네이드를 찾았다.

“주시면 감사하죠. 이거 좀 더 드실래요?”

헤르시나가 건네는 레모네이드와 꽃을 맞바꾼 아랑은 샬럿에게서 좀 떨어져 앉아 망태기를 정리했다. 

“이것들은 다 뭐야.”

“뭐 이것저것 다 먹는 거요. 닉, 괜찮다면 이것들 제가 나눠둔 대로 담아서 보관 좀 해 주실래요? 산에 한 번 더 다녀오려고요.”

열심히 바닥에 채집한 것들을 분류하던 아랑은 닉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뭐 그건 어렵지 않은데. 혼자 또 숲에 들어간다고? 위험한데 나라도 같이 가줘?”

“아뇨. 이제 친구 데리고 와야죠. 제 애완동물.”

숲에서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사도 아니고, 방해될 것이 분명한 닉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아랑은 빈 망태기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은돌이를 불러올 차례였다.

여기 숲은 제가 살던 곳보다 훨씬 춥고 길다고 하니까, 늘 구박하고 신세만 졌던 은돌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인 것이었다. 저를 제대로 된 주인으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 힘들 때나 어려울 때 늘 같이 해줬으니.

은돌을 곧 만난다는 생각에 숲을 오르는 아랑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더 가벼웠다.

“그게 무슨 소리지?”

카일은 갑자기 뛰어 들어온 기사의 말에 보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아랑 님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같이 나간 호위기사들과 마법사 닉 님께서는 남으셔서 찾고 계시고, 공주님과 하인들은 돌아오고 계시답니다.”

“어디서.”

“숲 초입에서 단풍놀이 중이었는데, 약초를 더 따고 애완동물인지 친구인지 데리러 간다고 숲에 들어간 이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답니다. 해지기 전까지 어떻게든 더 찾아본다고 남아 있긴 하지만, 어두워지면 더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카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가을, 겨울에 접어들면서 짧아진 낮의 길이로 인해 오후지만 하는 많이 기울어있었다. 무엇보다 산의 밤은 다른 곳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말 준비시켜.”

편안한 옷을 입고 있던 카일은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 갑옷을 챙겨입었다. 어쩌면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고 긴 밤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정예기사들만 데리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나 있는 출입문으로 향하는 카일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아랑은 밥 잘하고, 집안일 잘하고, 웃음이 헤픈, 그냥 그런 하인이었다. 처음엔 시동으로 들였지만, 요즘엔 부엌에 들어앉아서 노는 시간이 더 많으니. 자연스럽게 그는 하인 무리에 어울려 있었다.

늘 새롭고 이상한 음식들을 내놓지만, 그 맛이 뛰어나기에 아랑은 집안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그리고 새 음식을 자신의 앞에 내놓고 그 동그란 눈동자로 저의 평가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여운 아이였는데.

“어디까지 수색했지?”

마을 벗어나자마자 거의 전속력으로 달린 말들의 입에서 후욱거리는 거친 숨이 나오고 있었다. 겁많은 말들을 어두운 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어렵기에, 말에서 내린 기사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숲에서 용맹하게 몬스터를 때려잡는 그들이지만, 안전을 위해서 해가 있을 때만 숲을 돌아다녔지, 밤엔 모두 야영지에 모여 지냈기에 숲의 밤은 그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숲 초입 기준으로 1km 정도까지 들어갔지만, 일단은 다 내려온 상태입니다.”

“닉은?”

“마법사님께서는 지금 플라잉으로 위에서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숲을 한차례 수색하고 내려온 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카일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그스름하던 노을에 이제 푸른 밤의 색이 입혀지고 있었다. 길어봐야 30분. 그 시각이 지나고 나면 숲은 어둠에 잠길 것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할 것을. 자기들끼리 찾는다고 해 보다가 중요한 시간을 놓친 것이 분명했지만, 카일에겐 그것으로 화를 낼 만한 시간도 없었다.

“기본 3명씩 뭉쳐서 다니고, 길이 없거나 짐승 소리가 날 경우 다들 되돌아오는 것으로 한다. 그리고 불은 최대한 밝히지 말도록. 다 알겠지만 불을 밝히고 큰소리를 내는 것은 스스로 몬스터의 밥이 되도록 자처하는 일이니까.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싸우기보다 도망을 선택해 내려오도록 한다.”

흩어져 숲을 오르는 기사를 보고 카일은 긴 칼을 꺼내 손에 쥔 채, 숲으로 향해 걸었다. 전쟁이나 토벌로 사람이 죽는 건 흔한 일이었다. 등을 대고 서서 서로를 지켜주던 동지가 죽고, 어제 자신의 밥을 해 주던 토벌대 시동이 죽고, 카일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익숙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잘 넘어지던데. 왜 그렇게 뛰어다니지?”

언젠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니거나, 잘 뛰어다니는 아랑을 보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카일을 조금 더 빨리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음식은 덜 식어서 더 맛있고요.”

“왜 날 빨리 보고 싶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같이 성에서 지내는데 그게 뭐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요.”

역시 아랑다운 대답이라 그냥 넘어갔었는데, 카일은 숲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뛰어가고 싶었다. 심장이 터지도록 미치게, 어디 있는지만 안다면. 그럼 아랑을 빨리 볼 수 있을 테니까. 왜 빨리 보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냥 헤- 하고 웃는 그 멍청한 얼굴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용 새끼. 꼭 필요할 때만 없지.”

집중해 주변 기운을 느껴보려 해도 감지되는 것이 몬스터밖에 없자 카일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드래곤이라면 아랑을 찾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은돌은 긴 혀를 내밀어 아랑의 볼을 할짝거렸다. 지금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더럽게 어디에 침 바르냐고 자신의 코를 솜 주먹으로 퍽하고 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랑의 눈은 몇 시간째 꼭 감겨 있었다.

쌀쌀하다 못해 추워지는 밤이 찾아오자, 은돌은 아랑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그러자 옆에서 서성이던 예쁘니가 긴 주둥이로 아랑을 굴려 은돌의 위로 올라가게 했다. 이리저리 몸을 마구 굴려대는 순간에도 아랑은 고른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은돌의 위에 살짝 올려서 괜찮겠지만 위에서 부는 찬 바람에 혹시나 아랑이 추울까 예쁘니는 그 옆에 몸을 바짝 붙이고 엎드려 자신의 풍성한 털로 아랑을 조심스럽게 가렸다.

“무슨 일이지?”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야? 내가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올까?”

한참 숲을 뛰어다니며 낙엽들을 모아와 동굴을 따뜻하게 꾸미던 은돌이 아랑의 냄새를 맡은 건 한낮이었다. 요즘 통 나타나지 않기에 숲의 주인님과 마을에 지낼 곳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힘들고 위험하게 산을 타고 약초를 캐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사람에게 그보다 좋은 일은 없으니까. 그랬기에 예쁘니 만나고 알콩달콩 살면서도 아랑은 솔직히 좀 잊고 지냈다.

숲에 들어왔으면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을 알기에 은돌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가끔은 그가 불러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바람에 옅게 실려 오는 반가운 체취에 인내심은 곧 바닥나버렸고 예쁘니도 인사시켜줄 겸 그곳으로 뛰어간 그들을 반긴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랑이었다. 그는 귓가에 소리도 내보고, 핥아도 보고 다 해도 깨어나지 않았다.

예쁘니가 옷깃을 물고 은돌의 등에 아랑을 태워 동굴로 데려왔지만 해가 지고 깊은 밤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그가 슬슬 걱정되었다.

“밤에 내려가면 사냥당하잖아. 차라리 내일 아침에 데려다주는 게 어때? 숨소리나 그런 건 괜찮은 거 같으니까”

은돌은 예쁘니의 말에 얌전히 아랑이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몸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아랑 주변에서 묘하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결국 은돌은 자신의 코앞에 놓여 있는 아랑의 망태기를 주둥이로 벌렸다. 그리고 망태기 안엔 은돌이 좋아하는 칡뿌리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은돌은 주둥이만 최대한 까딱거리고 움직여 칡뿌리 하나를 입 안에 물고 으득 깨물었다. 입 안에 그 싸함과 씁쓸함이 밀려들자, 지금의 심각했던 상황들이 잊힌 은돌은 아삭거리며 열심히 칡뿌리를 씹었다.

“아랑이 것을 네가 왜 먹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열심히 먹던 은돌은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커다란 앞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눈치챈 것인지 자신을 노려보며 망태기를 물고 멀어진 예쁘니가 그 안에 든 칡뿌리 하나를 꺼내 아삭하며 무는 걸 보는 은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맛있는데, 그거 그런데 예쁘니가 다 먹을 거야? 나 한 입만 더 주면 안 될까?

“흠. 이거 맛있네.”

간 보듯 조금씩 먹던 예쁘니가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자, 은돌은 입을 쩍 벌리고는 혀로 주둥이를 훑었다. 나도 잘 먹을 줄 아는데, 내일이라도 아랑이가 깨어나면 좀 더 캐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눈물을 머금은 채 예쁘니가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던 은돌의 귀 끝이 파닥거리며 쫑긋 섰다. 그러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흉흉한 기세에 털끝이 쭈뼛 서는 걸 느끼자 열심히 칡뿌리를 먹던 예쁘니도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둑하게 깊은 밤. 이 깊은 숲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자신들의 동굴 앞까지 다다른 그가 내뿜은 기에 은돌의 꼬리가 절로 안으로 말려들려고 했다

“또 보는군.”

달빛을 등지고 동굴 입구에 선 사람의 그림자에 은돌은 하얀 이를 드러내려던 입술을 얌전히 내렸다. 옆에서 있던 예쁘니도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뛰어들어 와 있었다.

카일은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던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어두운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처음 숲으로 들어서면서 떠올린 말은 아랑이 숲으로 들어가기 전 친구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애완동물을 데려와도 되냐고 물었고, 오늘 날 잡아서 친구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는 건 그 친구인지 애완동물이 하는 것이 숲에 산다는 뜻일 것이다. 산을 오를수록 불안했던 카일의 마음은 어느새 진정되고 있었다.

얼마 전, 늑대 동굴에서 눈을 뜬 적이 있었다. 토벌 중 만난 몬스터를 쫓던 중이었다. 위험한 놈이었기에 밤낮없이 이어진 추적에 같이 동행하던 기사들은 뒤처지고 혼자 끝까지 쫓았던 것이었다.

겨우 몬스터를 처치하고 안전한 곳이 없는 숲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헤매던 중 방심하던 찰나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늑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자신의 찢어진 이마에 붙어 있던 이상한 것과 혼자 벗기 힘든 갑옷이 벗겨져 있던 점. 거기다 자신을 보고도 헤치거나 위협하지 않고 멀뚱히 있던 늑대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상황상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은인일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곳을 떠나는 걸 선택했다. 머뭇거린다면 해가 질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곳은 카일의 기준으로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금껏 그것이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기억나는 건 검은 눈동자와 어두운 동굴뿐이었다. 분명 악마에게 홀린 것이라 여겼다.

약초를 쓸 줄 아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 그와 친한 동물. 생각을 끝낸 카일은 고민도 하지 않고 늑대의 흔적을 찾았다. 늑대라 부르지만, 성체의 경우 1:1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기사가 없었다. 거기다 무리의 수장이라면 몬스터 급으로 나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의심을 가진 채 도착한 늑대 동굴에서 자신을 보고 이를 드러내지 않는 늑대를 보고 카일은 확신하며 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섰다.

“크릉.”

얌전히 엎드려 있는 짙은 회색 늑대 뒤로 선 하얀 늑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달빛에 빛나는 긴 어금니를 보았지만, 카일의 시선은 한 곳을 향했다. 늑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아랑. 

자신이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늑대와 다르게 뒤에선 늑대의 입에서 위협적인 소리가 이어졌지만 카일은 망설이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족…발. 쓰읍…….”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뒤척이는 아랑의 이마에 카일의 손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손바닥에 가려지는 작은 얼굴 그 어디에도 고통스러운 표정이나 열, 식은땀 같은 것이 없었다. 서둘러 이마에서 목으로 손을 옮겨 맥을 확인한 카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성을 발칵 뒤집어 놓고는, 여기서 태평하게 자고 있다고?

허탈함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카일은 갑갑하게 느껴지는 갑옷들을 대충 벗어 던지고 엎드려 있는 늑대 뒷다리 허벅지 부근을 베고 누워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은돌은 이를 세우던 예쁘니가 묻는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살기를 풀풀 풍기던 인간이 아랑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신의 다리를 턱 하니 베고 눕는 순간 숨이 막힌 것이었다. 지난번에 봤던 위험한 인간이 아랑이를 데리러 왔다고?

처음 강가에 쓰러진 그를 보고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에 그에게서 나는 피 냄새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과연 아랑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 것인지, 그를 위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인지 확실할 수 없는 은돌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예쁘니를 바라보았다.

“나도 몰라. 그런데 덤비면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아. 개새끼들 낑낑거리는 거 시끄럽네. 닥쳐.”

늑대들의 언어로 대화하던 예쁘니와 은돌은 카일의 한마디에 주둥이를 꼭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도 여기서 잘 분위기이니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 *

“영주님은?”

샬럿은 거울에 비친 헤르시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그녀의 표정엔 초조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같이 나간 기사님들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그런 일을…….”

헤르시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늘 숲에서 얼핏 들은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때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았고, 어수선한 분위기라 그냥 넘겼던 것이었다.

“왜? 뭐 아는 것이라도 있어?”

샬럿은 들고 있던 빗을 소리 나게 화장대에 내려놓고는 급히 일어나 문가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일은 아닐 거예요.”

당황한 헤르시나를 보는 샬럿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결국 그녀의 입이 열렸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샬럿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솔직히 아랑이 자신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긴 했다.

버젓이 안주인이 쓰는 방을 사용하고, 카일과 붙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민 출신인 그가 카일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그놈이 뭐라고 영주님은 기사들까지 이끌고 숲으로 들어간 것이지? 요리 좀 잘하는 건 인정해 주겠지만 요리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가 원한다면 왕실 요리사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수면제를 먹인다고?”

“네. 그런 천한 것이 영주님 옆에 있는 걸 볼 수 없다는 말을 한 후에 이어진 말이 그랬어요. 수면제를 먹여서 조용히 재워버려야겠다고. 하지만 설마 그게 진짜 숲에서 그에게 수면제를 먹일 줄은.”

헤르시나의 말끝이 또 흐려졌다. 아랑은 약초바구니를 들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던가? 아니 애완동물 이야기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만약 정말 숲에서 누군가가 그가 먹는 음식에 수면제를 탔다면?

약초꾼이라면 그 누구보다 산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수면제를 먹였다면 숲속을 돌아다니던 중 잠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숲속에서 약에 취해 잠이 들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몬스터가 그를 헤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추운 밤을 온전히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

“헤르시나. 입 조심해. 그렇게 말한 사람 얼굴은 기억해?”

샬럿은 그녀들의 말을 엿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헤르시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든 공주의 잠자리를 봐주고 옆에 붙은 작은 방으로 들어간 헤르시나는 창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모두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각. 성은 낮보다 더 밝았고, 모든 사람의 염원이 하늘로 향해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디. 무사히 찾아서 데리고 와주십시오, 영주님. 전 공주님이 오해를 사는 건 원치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 비록 철이 없고 제멋대로에 안하무인 성격이지만 그런 나쁜 일을 하실 심성은 못 되십니다. 영주님께서 공주님을 여자로 봐주시지 않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냥 철없는 공주님이 마음 붙일 곳 없는 분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주십시오.”

헤르시나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모두 무사하기를. 만약 아랑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오해를 살 사람은 공주와 자신이었다. 이곳에 어떤 목적으로 있는지 모두 알기에 그런 그녀에게 가장 큰 경쟁상대는 아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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