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5)

07.

아랑은 몸을 뒤척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를 받치고 있는 베개가 딱딱해 이리저리 움직여보아도 여전히 불편했다.

그리고 늘 가볍고 포근하게 몸을 덮어주는 이불은 또 어디 간 거야? 자다가 또 발로 차버린 건가 싶어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거렸다.

잡혀야 하는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이나, 손바닥으로 아래를 내리쳐도 쏙쏙 들어가는 푹신한 침대 패드 대신 어딜 건드려도 딱딱한 것만 느껴졌다.

거기다 익숙하지만 맡아져서는 안 되는 은돌이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 불편한 꿈은 별로인데…….

몸을 뒤척여 옆으로 누운 아랑은 딱딱한 베개에 신경질적으로 마구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이거 노숙할 때 그 불편함 그대로네.

“적당히 해.”

어떻게 해도 불편한 상황에 눈을 감은 채 한숨을 푹 쉬던 아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끔벅끔벅. 쾌적한 침실은 온데간데없이 어두침침한 곳과 발아래 쪽에서부터 빛이 들어오는 상황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등 뒤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스함과 등에 맞닿아있는 것이 규칙적으로 나왔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옆으로 누워 있는 엉덩이 사이쯤에 단단하고 두껍고 따끈한 뭐가 껴있는 것 같은데, 이건 또 뭐야.

“숨 쉬어. 그런 것도 까먹나?”

옆구리와 팔 사이로 무언가가 쓱 들어와 자신을 배를 톡톡 치는 아주 친숙한 사이에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을 당한 아랑은 숨을 쉬는 것보다 오히려 숨을 훅 들이마셨다.

“흡!”

살짝 볼록하게 나와 있던 아랑의 배가 안으로 쏙 들어가자 큰 손바닥으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행동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분명히 어제 은돌이 만나러 망태기에 칡뿌리 잔뜩 캐고 숲으로 들어가던 것이 떠올랐다. 작은 머리를 소리가 날 정도로 휙휙 돌리던 아랑의 시선이 털 뭉치들이 보이는 곳에 멈췄다.

분명 은돌이의 털 색은 은회색으로 햇빛 받으면 반짝반짝해서 있어 보이지만, 이런 어둠 속에 들어오면 영 칙칙한 색이 되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순백의 푹신하고 결 좋아 보이는 털뭉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살짝 들리는 고개에 까만 점을 박아놓은 듯한 점 세 개. 또렷이 보이는 눈과 그만큼 새까만 코. 위로 쫑긋 선 귀가 낯설게 다가왔다.

“일어난 거 같으니, 그만 내려가지.”

잠시 홀린 듯 하얀 늑대를 보던 아랑은 부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에 피곤한 듯 마른세수하고 있는 카일과 그 뒤로 입 찢어져라 하품하는 은돌이 현실성 없게 다가왔다.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눈 안 깔아?”

산 중턱.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환상적인 뷰가 있는 자리에 있는 은돌의 동굴에서 마을까지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성한 산길을 걸어가기 싫은 아랑은 버티고 서 있는 은돌의 양 볼을 손으로 턱 하니 잡았다.

“그럼 네 짝한테 카일 태우라고 할까? 딱 봐도 각 나오지 않아? 카일이 나보다 두 배는 무거울 건데? 솔직히 말해봐. 너 쟤 안 사랑하지? 쟤 너 꼬봉이지?”

산 아래까지 데려다 달라는 말에 못 들은 척하던 은돌의 눈동자가 여리게 떨렸다.

“맞네. 나는 또 저 하얀 애가 네 소중한 반려라거나,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던가 뭐 그런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구나. 거기 너, 하얀 애. 엎드려.”

아랑에게 잡혀 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은돌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도로록 굴러 예쁘니를 보려 했지만, 이미 예쁘니는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일. 거기 하얗고 조그맣고 뭔가 가녀려 보이는 늑대 타세요. 마침 엎드려 있네.”

멀뚱히 서서 한 입거리도 안되는 인간에게 뺨을 맞고 있는 은돌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예쁘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는 인간에게서 숲의 주인님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절로 복종심이 솟아났다. 반면 한 손으로 은돌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따박따박 반대쪽 볼을 때리고 있는 인간을 보자 속이 후련하면서도 뭔가 갑갑해졌다.

“아웅. 아우……. 아우웅.”

변명하는 듯 꿍얼거리는 소리가 은돌의 입에서 나오고 슬쩍 그가 엎드리자 그제야 아랑의 협박이 끝을 맺었다.

“쯧. 꼭 내가 네 맘에 상처 되는 말을 해야 알아듣는 거니? 이러면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잖아.”

이건 또 무슨 협박인 거지? 분명히 들었지만, 이해 안 되는 아랑의 말에 은돌은 자유로워진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한심한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예쁘니의 눈빛에 은돌은 울고 싶었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이럴 시간 없어. 사람들 걱정하잖아. 대신에 성에 가면 은돌이 너 좋아할 만한 거 많이 해줄게. 하양아. 너도 같이 갈 거지?”

어느새 예쁘니의 옆으로 간 아랑이 제멋대로 하양이라는 이름까지 부르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걸을 때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인간에게 등을 내주는 은돌이를 보며 예쁘니는 얼른 몸을 덥석 엎드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일 해야지.

“카일. 그런데 진짜 얘들 데리고 성에 가도 되는 거죠? 좀 덩치가 커서 많이 먹을 거 같죠? 성이랑 마을을 좀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면 지들 먹을 건 산에 가서 알아서 먹고 올 거예요.”

숲의 한 구역을 지배하는 몬스터에 가까운 늑대 우두머리와 그의 반려를 타고 산을 내려가는 아랑의 입에서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카일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아랑을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애완동물 삼는 것도 어이없지만, 그건 까망이 암묵적 동의하에 그렇게 지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큰 늑대까지 집에서 키우는 개처럼 대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늑대를 길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거기다 조금 전 삐딱하게 서서 은돌을 협박한 모습을 다 지켜본 카일을 자신을 향해 해맑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며 왠지 모를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

“아우……. 아우……우웅.”

아랑은 은돌을 따라 내려가는 하양이가 웅얼거리고 말하는 걸 들으며 부드러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도 참……. 어쩌자고 저런 멍청한 놈을 만나서는. 내가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건데, 한번 다시 생각해 봐. 재보다 멋지고 좋은 놈이 또 있을지도 몰라.”

“크엉. 컥컹…….”

아랑은 자신의 말을 들었는지 급하게 컹컹거리는 은돌의 목소리에 혀를 찼다.

“귀신같이 알아듣고 난리 치기는. 내가 틀린 말 했어? 좆도 작은 게.”

“아우웅. 아웅……아우!”

“킥. 키잉-”

아랑은 걸어 내려가는 하양이의 몸이 들썩이며 묘한 소리가 나자 같이 신나게 웃었다.

“그지? 쟤 실좆이지.”

카일은 은돌을 탄 채 편하게 산을 내려가며, 한 손을 머리를 짚었다.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분명 아랑 혼자 제멋대로 떠들고 있지만 마치 늑대들과 대화를 같이 나누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손을 들어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기는 늑대 털을 쓰다듬는 카일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숲에서 말은 거의 쓸모없는 동물에 가까웠다. 보급품을 나르는 용도로 쓰긴 하지만, 전투에 익숙한 말도 우거진 숲에서는 오히려 짐이었다. 

그런데 이런 늑대를 잘 길들일 수만 있다면…….

“뭐? 봤냐고? 그래. 봤다 어쩔래? 너 기억 안 나? 내가 너 픽 하고 쓰러진 거 주워서 먹여줘, 재워줘, 살려놓은 게 누군데?”

“크어어엉.”

“어릴 때였다고 우긴다고 달라질 게 아니야. 타고난 게 뭐 거기서 거기지.”

이상한 것에 꽂혀서 아랑이 하는 이상한 말을 들으며 진심 억울한 게 느껴지는 은돌의 소리에 카일은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누가 누굴 놀리는 상황인 거지?

토벌대에서 저를 간호했을 당시에 필사적으로 옷깃을 잡고 있던 아랑이 떠오른 것이었다. 사내놈 같지 않게, 털도 없이 맨숭맨숭한 다리라고 생각했지만 슬쩍 본 아랑의 아랫도리도 휑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가리려고 노력하던 작은 손 뒤에 숨어있는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발그스름하던 것이 참 귀여웠었다.

“다 온 것 같으니 내려서 걸어가지.”

순식간에 산 아래에 다다르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많이 느껴지자, 카일은 은돌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똑같이 서 있는 늑대의 등에서 내리는 것이지만, 높은 등에서 쉽게 내려온 카일과 다르게 아랑은 아직 사람을 태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멀뚱히 서 있는 하양이의 털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바둥거리며 겨우 내려섰다.

“그런데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묻는 카일의 질문에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고 말고 할 게 어딨는가? 그냥 칡뿌리 캐서 망태기 담고 은돌이 부르려고 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것을. 아마도 자신의 냄새를 맡고 내려온 은돌이 제가 잠들어 있으니 안전하게 지키려고 동굴로 데리고 간 것이 분명했다.

“네. 칡뿌리 캐고 잠든 거 같은데 은돌이가 위험하니까 저 보호한다고 동굴에 데려간 거겠죠.”

“그러니까 잠이 든 이유도 모른다?”

잠이 든 이유야 졸려서가 아닐까요? 은돌의 풍성한 털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아랑은 잠시 보던 카일은 말없이 먼저 기사들을 향해 걸었다. 아랑은 진심으로 기억나는 것이 없는 듯했으니, 정확히 이 일이 순전히 숲에서 잠든 아랑의 잘못인지. 누구의 음모인지 밝히기 어려울 것 같았다.

* * *

아랑은 자신들을 보자마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칼을 꺼내 드는 기사들을 보고는 은돌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주군과 함께 내려오는 동물들의 뭐가 무섭다고 저러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거느리고 산속에서 걸어 나왔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라고, 이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업고 뛰어 내려오느라 힘들어서 혀 빼물고 있는 애들인데.

“칼 거둬. 늑대들도 같이 성으로 간다.”

그때 카일은 은돌과 하양을 향하는 기사의 칼끝을 옆으로 밀쳤다. 하지만 그의 명을 듣고도 기사들은 쉽게 칼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을 탓하기보다 먼저 몸을 움직여 철수준비를 시키는 것이 나았다.

깊은 숲에서 무사히 밤을 보내고 나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몬스터 급으로 분류해도 될 것 같은 늑대가 친구라는 아랑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칼을 집어넣으면 당장 무서운 이를 드러내며 자신들을 갈가리 찢을 것 같은 공포에 머뭇거리는 기사들은 곁눈질로 카일과 아랑을 번갈아 보았다.

기사들이 쉽게 경계심을 풀지 못하는 모습에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며 어깨에 매고 있던 망태기에서 칡뿌리를 꺼냈다.

“너희가 무서워서 그런 거 같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조금 기다리자.”

얌전히 앉아 있는 은돌와 하양이의 입에 칡뿌리를 넣어준 아랑은 그들이 아삭거리며 칡뿌리를 다 먹는 동안 옆에 서서 털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제법 큰 걸 줬는데도 다 먹었는지 금세 혀로 입가를 훑는 은돌을 본 아랑은 말없이 칡뿌리를 하나를 더 먹였다. 

기사들은 얌전히 엎드린 채 있는 늑대들을 훔쳐보며 임시로 만들어 놓은 야영장을 정리했다.

“은돌아. 너희는 막 작아지고, 이런 거 안 되지?”

안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번 말을 꺼내 본 아랑은 앞발 위에 턱을 괴고 있는 하양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은돌이가 늑대처럼…… 아니구나, 진짜 늑대구나. 

갑자기 은돌의 연애 상대를 자세히 보게 된 아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는 봄이구나. 난 겨울인데, 그러고 보니 마을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어서 참한 아가씨는 만나 보지도 못했다. 성에 엄청나게 따가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 공주님을 떠올린 아랑은 작게 혀를 찼다.

예쁘면 뭐해. 성질머리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예쁜 것보다는 고운 심성이 우선이었다. 어디 천사처럼 고운 심성을 가진 아가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나?

“아랑. 임시로라도 일단 늑대들에게 목줄을 매야 할 것 같은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보며 심성 고운 아가씨를 찾던 아랑은 갑자기 불쑥 하늘을 가리고 나타난 카일의 얼굴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니, 갑자기 그 순간에 왜 나타나는 겁니까? 사람 놀라게……

“끈 같은 것으로 느슨하게 묶는 건 괜찮을 것 같아요. 나중에 성에 가면 제가 애들 목걸이 하나씩 해 둘게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아랑은 카일이 건네주는 끈을 어설프게나마 은돌이와 하양이의 목에 둘러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성에도 미리 공간을 만들어 두라고 하겠지만.”

카일은 큰 체격의 둘을 물끄러미 보았다. 기사 연무장 옆 공터면 괜찮을까? 이 두 녀석이 다 들어갈 만한 공간은 성에도 딱히 많지 않았다. 추운 겨울만 지낸다고 해도, 우리도 새로 지어주어야 했다.

“제 방 넓던데요.”

칡뿌리도 다 씹었고, 할 일이 없어 옆에 있던 하양이의 털을 혀로 쓸어주던 은돌의 행동이 딱 멈췄다.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 얘들 더러울 것 같아서 그러세요? 제가 도착하는 대로 싹 씻기고 밖에 못 나가게 할게요. 이제 추워지는데 밖에 두는 건 그렇잖아요.”

지금껏 아랑이 어떠한 말을 해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하양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일단 그 성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이 아랑이 있는 곳인 건 알겠다. 그런데 셋이 같이 지내자니?

둘이 붙어있을 시간도 부족한 신혼부부에게 웬 타인과의 합방?

“늑대들은 추운 겨울에도 동굴에서 잘 지내는 것으로 안다만?”

“에이. 집에까지 같이 갔는데, 야속하게 어떻게 둘만 덩그러니 밖에서 지내라고 해요. 그럴 거면 왜 데리고 가요. 성 밖에서 지내는 것과 동굴에서 지내는 게 큰 차이가 없잖아요.”

은돌은 카일과 아랑이 주고받는 대화를 따라 그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앞발이 밟히자 얼른 옆에 있는 예쁘니, 아니 이젠 아랑이 강제로 하양이라고 이름 지어버린 제 여자 친구를 바라보았다.

“…….”

하양의 따가운 무언의 눈빛을 받은 은돌은 아랑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야. 설아랑.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르냐? 아까 실좆이라고 깐 것도 좋게 넘어가 줬는데. 그건 그거고 나 신혼이라고. 이럴 거면, 너 안 따라가! 

“그건 가서 생각하지. 은돌이와 하양이라고 했나? 이 아이들 의견도 있을 테니까.”

임시 야영지가 철거되고 기사들이 먼저 마을로 향하자, 카일은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는 하양이 목에 걸려있는 줄을 아랑에게 넘겨받았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은돌과 하양이의 등장으로 마을과 성이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오히려 기사단과 카일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몬스터 급 늑대도 수족으로 부리게 된 카일을 향한 예찬이었다.

그와 반대로 아랑은 넓은 욕실에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카일과의 긴 대화로 늑대들이 지낼 우리가 지어질 동안만 성안에서 같이 지내는 걸로 합의를 봤고, 급한 대로 마구 내뱉었던 말 중 하나를 실천해야 했다. 바로 은돌과 하양의 목욕.

대중목욕탕만큼 넓은 카일의 욕실을 참 좋아했는데, 그 가운데 넓은 욕조 옆에 앉아 있는 은돌을 보니 숨이 턱 막혀왔다. 내가 왜 이놈들을 씻겨 놓는다고 한 거지?

“자. 해 보자. 설마 너 씻기다 내가 죽기야 하겠니?”

차마 자신과 카일이 들락거리는 욕조에 은돌을 들어가라고 할 수 없던 아랑은 바가지로 물을 퍼 은돌에게 부었다.

“마법을 배울까? 제일 먼저 그거 배워야지. 작게 만드는 거. 네가 똥강아지만 했어도……”

말을 씻길 때 쓴다는 솔로 은돌의 몸을 벅벅 문질러 거품을 내던 아랑의 손이 뒷다리 사이로 향했다.

물컹.

“응?”

이상한 촉감이었지만 이내 무시한 아랑은 꼼꼼히 솔로 문질렀다. 은돌의 몸을 만지며 쓰다듬던 아랑의 손에 또다시 묵직한 것이 닿자 아랑은 생각 없이 그것을 움켜쥐었다. 이거 뭐니? 물컹한데 뭐가 한 손에 잡히지도 않고 뭐가 이게……

“아. 미친……”

은돌의 가랑이 사이로 손이 들어가 있던 아랑은 잡으려고 더듬거리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화들짝 놀라 손을 털면서 몸을 뒤로 뺐다.

“컹-”

아, 젠장. 그래, 너 위너다. 실좆이라고 놀렸을 때,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거 같더니. 이 세상 왜 이래? 이거나 저거나 죄다 달고 있는 게 무기 급이야.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분명히 오늘 아침 제 엉덩이에 자리 잡고 있던 그것이 떠오른 것이었다.

“젠장. 그럼 내가……”

아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로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참한 처자 찾지 말고, 듬직한 놈으로 찾어.”

“아니 할매는 왜 맨날 그리 말해? 나는 진짜 참한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 낳고 알콩달콩 살 거라고. 방금 그 말 취소해!”

“꼴에 좆 달린 사내놈이라고 발끈하기는. 애 새끼 마냥 요만한 거 갖고 유세는.”

그때 할매가 들어 보였던 게 뭐더라. 실파였던가……

놀라면서 벌떡 몸을 일으키느라 내팽개친 목욕 솔을 챙겨 드는 아랑의 등이 유난히 축 처졌다.

 * * *

“같이 산으로 간 사람들 명단이라는데, 네가 직접 확인해 봐.”

카일은 자신이 넘겨준 리스트를 굳은 표정으로 훑어보는 닉을 지켜보았다. 아랑은 그냥 어쩌다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냥 넘기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약초꾼이 산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아랑은 자신이 어떻게 은돌과 재회를 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약초를 캐다 졸려서 잠시 눈을 감았더니 아침이었다고 했다.

가장 기본적인 가설은 누군가가 아랑에게 수면제 성분이 있는 무언가를 먹인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약초꾼이라는 아랑의 특이한 직업을 생각해도 찜찜했다. 약초꾼들은 웬만한 독에는 조금씩 내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수집하는 약초들에 대한 성분을 정확히 알고 혹시 모를 일이 대비해 조금씩 먹는다고 들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수면제 성분의 것이 아닌 극악한 독을 썼을지도 몰랐다. 내성이 있는 성분이었다면 운이 좋아 극히 나빠지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는 가설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맞아. 같이 나간 기사들 이름도 맞고, 수도 정확하고. 이상한 게 플라잉으로 위에서 내려다봐도 없었단 말이야.”

“수면제?”

창가에 서서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는 카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위험에 빠트리고 싶다면, 그냥 수면제를 썼을 것 같기도 하고.

외부의 누군가가 아랑을 죽이려 했다면 그들이 밖으로 나온 순간을 노렸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편안한 것이 독일 텐데, 카일이 발견했을 때 아랑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잠든 그를 늑대들이 물고 동굴로 옮기는 동안에도 깨지 않았고, 자신이 깨우려고 했을 때도 비몽사몽 헛소리를 할지언정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독이었다면 내성이 있다고 해도 고통스러워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았을까?

“수면제? 아랑이 약초를 캐러 가거나 늑대들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면 들킬 게 뻔한 수면제를 쓴다고? 수면제였다면 같이 있다가 혼자 픽 쓰러져 잠들었을 거잖아. 그날 나갔던 사람 중에 갑자기 잠들거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단순히 잠만 든 거라면, 왜 내가 플라잉으로 봤을 때 보이지 않았지?”

닉의 시선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가다 샬럿과 헤르시나 이름 앞에 멈췄다.

그리고 카일과 아랑이 돌아왔을 때, 백지장처럼 하얀 샬럿의 얼굴과 울먹거리던 헤르시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들이 왜 아랑을?

어둠을 응시하던 카일은 몸을 틀어 한쪽에 인기척조차 없이 서 있는 한스를 응시했다.

“한스. 아랑을 잘 부탁하지. 일단 늑대들이 있는 동안 그 옆에 아무도 얼씬 못하겠지만.”

“그런데 진짜 그 늑대들 뭐야?”

닉의 진지한 물음에 카일은 피식- 웃어버렸다.

“꼬……? 꼬봉? 꼬봉이라더군.”

“그게 뭔데?”

“부하.”

그 날 이후. 웃음을 거의 잃은 카일의 얼굴에서 피어난 미소에 한스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아랑은 은돌과 하양이에 이어 자신의 몸까지 씻고는 샤워가운만 걸친 채 비틀거리면서 욕실을 걸어 나갔다.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로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간 아랑은 그대로 픽 하니 침대 위로 엎드렸다.

다 됐다는 말에 두 녀석이 똑같이 푸르르 떨면서 물기를 털어내고 나가더니 곧바로 커다란 벽난로 앞에 얌전히 엎드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털이 어느 정도 보송하게 마른 걸 보자 뒤척거려 바로 누웠다.

대충 마른 것 같으니 굳이 더 말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저놈들 털까지 다 말려야 했으면, 진짜 죽었겠네. 내가 앞으로 저놈들 씻겨주나 봐라.

등에 닿은 푹신한 이불의 촉감에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지만, 눈이 점점 감겨왔다. 이곳에서의 삶은 왜 이렇게 파란만장한지. 옷도 챙겨 입어야 하고, 머리도 말려야 감기에 걸리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던 아랑의 가물거리던 눈꺼풀이 결국 살포시 내려앉았다.

“……”

노크 후 인기척을 기다리던 카일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 많이 늦은 시각은 아닌데, 벌써 잠든 건가? 문 열리는 소리에 깬 건지 벽난로 앞에 엎드린 두 녀석의 고개가 살짝 들리다 카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아랑을 지키는 것처럼 방에 들어온 이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성이었기에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늑대 두 마리의 호위라. 오히려 이곳이 드래곤레어보다 더 안전한 곳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내일 불러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카일의 눈에 침대에 편히 잠든 아랑이 들어왔다. 추위도 많이 타는 놈이 이불이라도 제대로 덮고 자지. 씻고 나오자마자 잠든 것인가? 침대 옆으로 다가간 카일의 눈이 붉은 벽난로 빛에 반사되어 불과 같이 타오르는 것처럼 빛이 났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제대로 여미지도 않아 벌어져 있는 샤워가운 아래로 아랑의 여린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옷이라도 제대로……”

샤워 가운을 대충 추슬러 주려던 카일의 손이 아랑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온전히 마르지 않아 촉촉함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자 단정한 이마가 드러났다.

늘 똘망똘망 눈을 뜨고 바삐 다니는 모습만 보았는데, 누군가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본 적이 없는 카일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카락과 눈썹. 감겨 있는 눈 끝을 장식하듯 있는 촘촘하고 긴 속눈썹까지 어둠을 나타내는 검은색이었다. 

아랑이 진정 고대 문헌에서 말하는 악마란 말인가? 

문헌에 의하면 악마는 화려하게 아름답지 않지만 묘하게 사람을 홀리고 저에게 필요한 자를 현혹시켜 제 수족처럼 부린다 했다. 

카일은 자신의 주먹보다 작을 것 같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랑의 눈에서 제법 오뚝하고 끝이 동그란 코로 이어진 시선이 어느새 그 아래 닿아 있었다. 매일 산과 들을 돌아다녔을 텐데, 티끌 없이 하얀 피부와 검은 눈동자나 체모도 신기했지만 혼자 산딸기라도 따 먹은 듯 붉은 입술이 그곳에 있었다.

살짝 가는 듯한 윗입술과 다르게 도톰하고 촉촉한 아랫입술. 깊게 잠들어서 살짝 벌어진 입술과 그 사이로 보이는 발간 혀끝을 보는 카일의 눈이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커다란 손이 움직이고 아랑의 얼굴에 긴 그림자가 졌다. 허공을 맴돌던 그의 손끝은 어느새 동그란 아랑의 코끝에 닿았다. 그리고 느리게 움직여 입술의 아래쪽을 살짝 누르자 타액으로 촉촉이 젖은 속살이 조금 더 드러났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옅은 숨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카일의 손은 이내 아랑의 턱선을 스치고 지나가 가슴 쪽에서 한껏 벌어져 있는 샤워 가운 깃을 잡으려 했다. 그저 추울까 봐 옷깃을 여며주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스치듯 닿은 그 여린 살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열기와 부드러운 촉감은 카일의 손길을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못하는 사이 어느새 카일의 손바닥이 아랑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사내이기에 단단하기는 하지만 여인의 살결보다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자신의 손바닥 가운데에 눌린 동글동글한 것에 집중하자 굳어있던 카일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아랑……”

그를 깨울 생각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러면서 가슴에 맴돌던 손바닥은 조금 더 내려다가 얇은 피부 아래로 갈비뼈가 느꼈다. 이어 누워 있느라 들어가 있는 아랫배에 손을 올린 카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편평한 아랫배에 자리 잡은 귀여운 배꼽을 본 카일은 검지 손끝을 그 안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아응.”

깊은숨을 내쉬며 곱게 잠들었던 아랑이 몸을 뒤척이며 웅얼거렸다. 마치 물건을 훔치다 걸린 도둑처럼 손을 떼고 굳어 있던 카일은 아랑이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자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뭐 하는 짓인지. 아랑의 작은 행동에 혹시나 그가 깰까 소리죽이며 굳었던 자신이 한심했다. 이제 갓 스물이 됐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사내를 몰래 더듬기나 하는 제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아랑은 향한 묘한 감정과 불편한 생각만 늘어날 것 같았기에 카일은 이곳을 벗어나는 걸 선택했다.

다시금 아랑에게도 뻗고 싶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 일어서던 카일의 시선이 뒤척이느라 훤히 드러난 아랑의 고간에 닿았다. 그리고는 자느라 한껏 쪼그라든 아랑의 잘 붙어있는 고간과 엎드려 있는 은돌이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아랑을 찾기 위해 숲을 뒤지는 동안 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불안함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에서 은돌의 위에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을 봤을 때의 기분은 선명히 느껴졌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였다.

언젠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기사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마음이면 그리 되냐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화살에 맞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와 여기저기 쓸리고 베여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신관들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하급기사는 보급대의 열악한 약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영양가도 없는 멀건 죽을 먹고 있었다.

“포기하는 게 편하지 않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몸으로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것을.”

신관의 손길이면 그의 상처는 말끔히 나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치료받을 수 없는 계급이다. 거기다 화살을 맞았던 다리는 이미 상처가 덧나 있었고, 멀건 죽을 뜨는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야 하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겁니다.”

“왜?”

“죽는 게 싫은 것이 아니라 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제 소중한 사람이 우는 것이 싫습니다.”

“그 사람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지요.”

그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막사로 돌아온 카일은 신관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때 생각했다. 그를 기다린다는 사람은 그의 약점이었다. 전쟁터에서 불사조처럼 늘 살아남는 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약점. 그래서 카일은 그런 것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자신이 없었다.

“네가 악마여서 날 홀린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스스로 약점을 만들게 된 것일까?”

더 손을 대었다가는 지금처럼 쉽게 거둘 자신이 없는 카일은 아랑의 샤워가운을 여미는 것보다 이불을 끌어 덮어주는 걸 선택했다. 

“너희들은 최대한 빨리 우리를 지어주도록 하지.”

사이좋게 코를 맞대고 잠든 늑대를 보고 중얼거린 카일은 은돌의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았다.

“그래. 은돌. 너와 나를 위해서.”

곤히 잠든 하양이와 아랑은 전혀 모를 수컷들만 공감하는 말이었다.

 * * *

“오늘은 뭘 하려고?”

카일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상체만 겨우 일으켜 힘없이 앉아 있는 아랑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한스가 들고 있는 트레이에서 환을 집어 들었다.

“몰라요. 뭐 하지. 뭐 하지….”

고개를 들 생각도 없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던 아랑은 머리를 푸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다시 얼굴을 위로 들어 카일을 쳐다보자 그는 망설임 없이 아랑의 입에 환을 넣었다.

“우읍.”

이보다 더한 테러가 어디 있다고. 자다가 봉변을 당해도 유분수지.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뜬 아랑은 자신의 입술에 따스한 컵이 닿자 허겁지겁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쥐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환의 쓴맛은 최대한 잊고 꿀이 들어가 달큼하고 따뜻한 우유의 맛만을 느끼려 노력하는 아랑은 매섭게 카일을 노려보았다.

“다른 방법을 찾긴 해야 하는데.”

내 눈을 보라고,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게 보이지 않아? 이건 내가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먹는 거지. 이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자신에게 극한의 고통을 안겨 주고는 태연한 카일을 노려보던 아랑은 한스에게 컵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소매로 쓰디쓴 환을 먹느라 흘러나온 눈물을 찍어냈다. 

“마법사님께…….”

“쯧.”

조심스러운 한스의 말을 잘라버리는 단호한 카일의 소리에 아랑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침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카일과 한스의 앞에서 환을 먹는 것을 시작으로 아랑의 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자신이 검은 눈동자를 보고 한숨을 쉬는 한스나 꼭 턱을 잡아 들고 시선을 맞추어 색을 확인하는 카일의 손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자신이 이방인인 건 맞지만, 매일 그렇게 확인당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오늘은 뭘 하고 놀지?”

아랑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일단 대마법사님은 카일이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고, 이전에 따온 약초들은 이미 잘 손질해서 말리는 중이었다. 

한동안 카일과 동행하지 않는 이상 외출도 불가하다는 말은 들은 아랑의 눈에 줄 맞춰 걸어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카일의 성안에서는 정예기사를 양성할 뿐 아니라, 훈련까지 한다는 말을 떠올리자, 아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뭘 해도 상관없다는 카일의 허락이 떠오른 것이었다.

급하게 부엌으로 뛰어 들어간 아랑은 커다란 솥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밥을 태우거나 설익게 해 고생했지만, 이젠 어마어마한 양의 솥밥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달인이 되었다. 입맛을 돋우는 구수한 밥 냄새를 맡은 아랑은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할배. 기사님들이 보통 어느 정도까지 들 수 있죠?”

부엌에서 커다란 솥 2개에 밥을 짓는 아랑은 보며 또 무슨 일을 저지르나 기대하던 한스와 부엌 식구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의문표가 생겨났다. 부엌에서 밥하는데 왜 밖에서 훈련 중인 기사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잠시 후, 모든 사람은 기사들이 필요하다는 아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그게 딱딱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 둘. 쫙! 하나. 둘. 쫙!”

따끈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 2개를 연무장으로 나르게 한 아랑은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부탁한 것이 떡 치기인데. 이게 왜 안 돼?

날도 추워지고 어묵까지 만들 능력은 안 되니. 쌀떡을 만들 생각이었다. 팔팔 끓인 육수에 퐁당 넣어 물 떡도 해 먹고, 찰기가 생긴 쌀에 쑥을 넣으면 쑥떡이요, 콩고물 묻히면 콩가루 떡이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살짝 꼬들꼬들 말린 가래떡을 송송 썰어 떡국도 만들어 먹으면 더 좋고.

부엌 옆 창고를 뒤지다 떡 치기에 좋은 넓은 돌도 발견했고, 이 세계도 사람 사는 세계라고 나무로 된 긴 망치 같은 것도 있으니 챙겨 나와 기사들에게 쥐여 줬다. 밥이 될 동안 영문도 모르는 채 넓적한 돌과 도구를 깨끗이 씻고 따라 나온 부엌 하인들의 시선도 망치를 들고 있는 기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내가 다시 말하면 해 봐요. 거기 오른쪽 분부터 치고 빠지고. 다음 왼쪽 분이 치고 빠지고. 마지막 거기 앞에 분은 넓게 퍼진 걸 얼른 모아 봐요.”

“하나.”

“둘.”

“으악!”

“쯧…….”

하나. 둘까지는 좋은데 왜 마지막에 떡을 모아주는 분들이 매번 손을 얻어맞고 나자빠지는 것일까? 떡메에 얻어맞은 아픈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고 있는 기사들이 늘어나자 아랑은 혀를 차며 자신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번에 제대로 해요.”

방금까지 태연하게 떡을 찧던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같은 기사 손이야 내리치고, 술 한 잔 사주면 넘어갈 일이지만 지금 영주님이 아끼는 사람의 손을 치면? 그건 돌이킬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자. 시작합니다.”

“하나.”

“둘.”

“촥!”

“우와!”

혹시나 아랑이 손을 다칠까 모두 긴장한 상황 속에서 사건 사고 없이 떡을 모으고 빠져나온 그를 보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알알이 부스러지던 쌀알이 찰기를 가지며 뭉쳐지자 사람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더 솟아났다.

“아, 나 힘들어. 거기 기사님. 지금까지 봤으니까, 잘할 수 있죠? 저기 있는 솥 2개 분량 다 해야 하니까. 떡메 치시던 기사님들도 힘들면 서로서로 교대하고. 어서어서.”

떡메를 치는 것은 온몸을 써야 하는 힘든 일인데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떡 때문에 휘두르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기사들도 지치고, 그 앞에 앉아서 떡을 모으던 아랑도 지쳤다.

무엇보다 셋의 호흡이 가장 중요한 일. 치고 빠지고 섞고 하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서로 딱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정신노동이기도 했다.

아랑이 제대로 선보인 이후 본격적으로 3인 1조가 정해지고, 아랑과 부엌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본격적인 떡 치기가 시작되었다. 간간이 얻어맞은 손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기사가 보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역시 힘 좋은 사람들이 쳐서 그런지, 쫄깃한 게 참 맛있어 보이네.

잘 뭉쳐진 떡을 옆으로 덜어내고 새 밥을 올린 아랑은 이번엔 주머니를 꺼내 녹색 가루를 그 위로 솔솔 뿌렸다.

“아니 그건 또 뭡니까?”

이제 아랑이 요리할 때면 옆에 딱 붙어서 메모까지 하는 요리사가 급히 물어보자 아랑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쑥 가루요.”

쑥 가루를 넣고 조물조물 만진 아랑은 떡을 한 점 떼어 요리사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지금. 훈련은 안 하고 뭐 하는 거지?”

토벌하러 다녀오든 어딜 다녀오든 카일을 기다리는 건 잔뜩 쌓인 서류들이었다. 더군다나 가을이 된 이 시기는 올해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취합해서 통계를 내는 것이 많았기에 진득하게 서재에 붙어 있어야 했다.

책상에 오래 앉아 몸이 찌뿌둥하면 종종 창가에 서서 서류를 보는 것을 낙으로 삼던 카일은 연무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상황에 시선을 뺏겼다.

“떡? 떡이란 걸 만든다는데?”

닉의 대답에 카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먹는 것을 만드는 거면 부엌에서 부엌 하인들과 하면 될 일이지, 연무장까지 다 나와서 기사들을 시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가자. 가자. 우리도 구경 가자.”

밀린 일 앞에서 군식구로 있을 거면 밥 값하라는 카일의 말에 그의 일을 돕고 있던 닉은 지긋지긋한 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닉의 손에 끌려 나온 카일은 눈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웬만한 훈련에도 끄떡없는 기사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힘들어하고 있고, 몇은 손에 붕대까지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희희낙락 아랑은 웃고 있었다.

“카일. 왔어요? 이거 진짜 맛있게 됐어.”

자신을 본 것인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아랑이 희멀건 덩어리를 자신의 입에 쑥 집어넣을 때까지도 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닉도. 이거 일단 이렇게 먹고 있다가 꿀 발라 먹으면 더 맛있거든요. 밥이 모자랄 거 같아서 지금 밥 더하러 갔으니까 양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끈적한 것을 우물거리던 카일은 호기심이 동해 아랑이 내미는 것을 날름 받아먹는 닉을 마주 보았다. 맛이 있다고 하기에도, 없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맛이지만 무언가 고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기사들은 왜?”

“떡 치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부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체력이 안 되실 것 같아서 기사님들께 부탁했는데,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봐요. 앞으로 자주 해 먹지는 못하겠어요.”

“응?”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닉은 슬쩍 마법을 흘려 떡메를 허공으로 들어 번갈아 내리치게 했다. 그리고 알아서 퍼진 떡이 안으로 모이게 하고.

“……”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연무장에 모인 사람 중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리 간단한 일을 지금 몇 시간째 몇 명이 붙어서 했단 말인가.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닉의 두 손은 어느새 아랑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난 것은 덤이었다.

“닉.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마법사님은 위대하세요.”

성을 뒤집어 놓을 만큼 난리를 쳤지만, 아랑이 굳이 힘들게 떡국이니 물 떡을 끓일 새도 없이 그날의 떡은 모두 꿀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이러려고 마법을 그리 열심히 배웠던가? 여긴 어디이고, 난 누구인가. 

부엌 한쪽 따뜻한 아궁이 옆에 앉은 닉은 무릎에 팔을 괴고 그 위로 턱을 괸 채 다른 손끝을 살짝 까딱거렸다. 

“닉. 이거 잘 되면, 떡국 끓여드릴게요.”

닉의 뒤에 서서 그의 어깨를 조물거리며 씩- 웃는 아랑이 있었다. 

* * *

샬럿은 화려한 모자를 살짝 눌러 쓰고 화려한 부채를 활짝 펼친 채, 마주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벌써 몇 분째 이어진 침묵과 차갑게 얽힌 두 사람의 시선에 옆에 서 있던 헤르시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샬럿 공주님.”

침묵을 깬 건 그림자 길드장 카젠이었다. 어둠의 길드장이면서 용병 길드장을 겸하는 그는 예전에 존의 여관에서 아랑을 토벌대로 합류시킨 사내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금발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동자에 눈먼 장님까지 홀릴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신 분이 이 왕국에 또 있으십니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꺼낸 카젠을 보는 샬럿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지만. 이내 웃음 대신 거만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림자 길드의 정보가 제일 정확하고 빠르다고 하니 한번 믿어보죠. 아랑. 설아랑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오세요.”

하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는 샬럿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둘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로 1골드가 놓였다.

“재밌는 정보를 원하시는군요.”

1골드와 샬럿을 번갈아 본 카젠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으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지만, 그 말을 끝으로 카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샬럿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테이블 위에 놓은 골드가 10개로 늘어났지만, 카젠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아이가 뭐라고.”

돈이 아까운 것보다 그깟 하인의 정보를 이런 가격까지 지급해야 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 샬럿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치려다 입 안 여린 살을 살짝 깨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빼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처리해 드릴까요?”

분명 정보를 달라고 말했지만 돌아온 카젠의 대답에 샬럿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듯 카젠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100골드.”

샬럿의 마음을 떠보려는 듯 흘러나온 카젠의 말에 헤르시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아랑 때문에 지금 그녀의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성사실화 되지 않은 일로 100골드나 써 가며 추후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미리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사라지게 하는 건가요?”

평소보다 한층 낮아진 샬럿의 목소리가 얼굴을 가린 부채 너머로 흘러나왔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

“남쪽 지방에 곧 전쟁이 터질 것 같다지요.”

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10골드와 반지를 끌어당겨 자신의 앞에 두었다. 

“헤르시나.”

샬럿의 말에 그때까지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헤르시나는 손을 내리고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 묶음을 꺼냈다.

“100골드. 확실하게 처리된 게 확인되면, 50골드 더 드리죠. 그 이유는 아시죠?”

화려한 필체로 빈 칸을 채운 헤르시나의 말에 카젠의 머리가 작게 끄덕였다. 모두 자신을 찾아온 걸 숨기고 싶어 했고, 자신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얻고 어떤 일을 했는지 철저하게 비밀로 숨기고 싶어 했다. 그리고 카젠은 그 일을 그 누구보다 잘 수행하고 있었다.

“쯧. 헤르시나 제대로 알아본 거 아니었어? 여긴 뭐 하는 곳이래? 이번에 수도에서 들어온 드레스를 보고 싶다고 했잖아.”

의자에서 일어난 샬럿의 짜증 섞인 투덜거림이 헤르시나에 향했다.

“분명 이 근처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혹시 이 근처에 새로 생긴 드레스샵이 어딘지 아시나요?”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있습니다.”

어이없도록 태평스러운 셋의 대화와 함께 샬럿과 헤르시나는 그림자 길드를 벗어났다.

 * * *

“한스. 작년 자료들 좀 찾아주세요. 올해 식량 생산량이 준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랑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스와 대화 중인 카일을 보고는 테이블 위로 차와 다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몇 날 며칠 동안 카일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 주위를 알짱거렸지만. 마땅히 그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던 것이었다.

늘 아침이면 자신을 깨우고 환만 먹이고 사라지니 말을 꺼낼 수 없었고, 식사 시간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올봄 가뭄으로 곡물들 씨앗 뿌리는 부분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 풍년이라 비축해 놓은 식량들이 있어 올해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둘의 심각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아랑은 차와 다과를 세팅해 놓고도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며 서재를 걸어 다녔다.

 말은 할 수 있지만, 글자는 볼 수 없는 까막눈 아랑에겐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일 뿐이니. 책상 옆으로 가 펼쳐진 종이를 보면서 아랑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매와 지낼 때 마을에 내려가서 글을 좀 배워두는 건데. 글자와 다르게 숫자로 보이는 것에 아랑은 손끝으로 종이를 만져보았다.

이래 봬도 소싯적 한국에서는 공부 좀 했는데. 여기선 그냥 맹탕 바보 수준이구나 싶기에 아랑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글자와 숫자는 구분되는 거 같군.”

언제 옆으로 왔는지 들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던 아랑은 괜히 종이를 만진 것이 무안해 얼른 손을 떼었다.

“글을 배워 보는 건 어때?”

카일의 한마디에 아랑은 자신이 그를 찾아온 이유를 잊었고, 어느새 한스는 깨끗한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아니죠. 아니 산수를 왜 이렇게 못해요? 여기 곱해서 나누면 끝인데. 이건 수학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라고요.”

분명 글을 가르쳐 주기로 한 것은 카일인데, 몇 시간이 흐르자 그 대상은 아랑으로 바뀌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카일을 다그쳤다. 아직 글은 읽을 수 없지만, 숫자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일단 숫자를 읽을 수 있으니 아랑은 자연스럽게 처음 카일이 보던 서류의 내용을 물었던 것이었다. 그에 카일은 작년 생산량과 올해의 생산량을 비교하는 중이라는 설명을 친절하게 해 주었다.

처음부터 느낀 것이지만, 마법이 있다고는 하나 아랑은 이곳이 지구의 중세시대와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수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고, 그들만의 방법으로 해결하고는 있지만 아랑의 눈에는 단순하게 풀어지는 식들을 어렵게 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해결되는 거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곳에 묶어놓고 미친 듯이 주입하면 누구든 이 정도는 하거든요.”

어느새 카일의 넓은 책상엔 아랑이 종이와 펜을 들고 앉아 있고, 책상에 걸터앉은 카일은 자신이 숫자를 이용해 통계를 내야 하는 것들을 아랑에게 읽어주고 있었다.

“딱히 성에서 할 게 없는 것 같던데, 내 일을 도와주는 건 어때?”

“아! 맞네. 나 그거 말하러 왔는데.”

진지한 카일의 제안에 아랑은 계산을 끝내다 말고, 얼른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마법사님은 언제 만날 수 있어요?”

“그건……. 베르의 마음이겠지.”

“여기서 이렇게 허송세월하면서 보내기보다 수도로 가서 그분 있는지 알아보고, 직접 찾으러 갈까 봐요. 뭐 여기저기서 정보도 듣고 그러다 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긴 전화기도 없고, 우편도 보내면 마차로 달려서 가고. 뭐가 죄다 불편해요.”

“전화기?”

“아. 그냥 내가 원할 때 대화하고 싶은 상대랑 바로 얼굴 보고 말할 수 있는 거 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마법이 없어도 항상 집을 시원하게 하고, 따뜻하게도 하고. 뜨거운 물은 4계절 언제든 콸콸 나오고. 심심할 겨를 없이 영화도 보고 티비도 보고, 게임도 하고. 그쵸?”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아랑은 카일의 굳은 표정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제일 빠르게 연락하는 게 전서구를 통하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그거 쓰려면 마법사가 있어야 하고. 전서구도 있어야 하는데, 전서구가 엄청 비싼 거라고 하던데요.”

“여기도 전서구가 있긴 하지. 마석이 박혀 있어서 원할 때 쓸 수 있기도 하고.”

듣던 중 반가운 말에 아랑은 저도 모르게 카일의 팔뚝을 잡았다.

“그럼 수도에 연락 좀 넣어 봐요. 대마법사님 본 사람 있는지…… 아. 그런데 그건 수도에 사는 누구한테 물어 봐야 하죠?”

“좋아. 누구한테든 물어봐서 어디 있는지 알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카일이지만 아랑은 그의 기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해맑게 대답했다.

“일단 대마법사님께 전서구가 있으시다면, 그쪽 연락처를 알아서 바로 연락을 넣어보는 거죠. 그래서 만날 수 있는지 약속을 잡고. 이곳까지 못 오신다면 제가 찾아가서 봬야죠.”

“혼자서?”

“그럼 혼자 가지. 누구랑 가요? 울 할매가 그랬는데 원래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했어요.”

“어떻게든 그놈을 잡아다 네 앞에 데려다 놓을 테니까. 계산하던 거나 마저 하지.”

눈에 빛을 내며 말하던 아랑은 냉정하게 잘라버리는 카일의 말에 얼른 입을 깨물었다. 제가 여기서 이런 거 계산하려고 나온 거 아니거든요. 진짜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차마 그에게 속 시원하게 말을 못하고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펜을 든 아랑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카일의 손길에 멈칫거렸다. 엄마와 할매를 제외하고 자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닉. 아랑의 눈동자 색이 어떻게 보이지?”

카일이 잔뜩 내어준 계산을 빠르게 하던 아랑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없던 닉이 들어온 것을 보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서재에 올 때 있던 해는 이미 사라지고 푸르른 어둠이 덮고 있었다. 

“아랑.”

한번 집중하면 다른 건 생각지도 못하고 그것에 푹 빠지는 버릇이 있던 아랑에게 오랜만에 주어진 단순 사칙연산은 지겹다기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기 싫어서 도망치던 단순 연산이 이렇게 하면 재밌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해 놓은 것을 확인하던 아랑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제대로 고개를 들었다.

“갈색.”

닉 역시 카일에게 일을 받은 것인지 들고 있던 종이에서 슬쩍 고개만 들어 아랑과 눈을 마주치고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말에 카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아랑의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으로, 눈동자는 푸른 계열로 바꿔 봐.”

“뭐?”

아랑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당황한 듯 되묻는 닉의 말에 그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한쪽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이제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지 어두워지는 상황에도 확실히 갈색으로 보였다. 머리카락 색이야 상관없다고 했으니, 아랑이 매사 조심하는 건 눈동자 색이었다.

분명히 한스가 닉을 언급했을 때는 단칼에 거절했던 카일이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아랑은 거울 너머로 그를 보았다. 바꾸려면 눈동자만 바꾸면 되지, 머리카락 색까지 바꿀 이유가 있나?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만 대답해.”

거울을 통해 카일을 훔쳐보던 아랑은 거울 안에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도 시선이 얽힐 수 있구나, 이상한 기분에 거울을 통해 마주친 시선을 피한 아랑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와 얼굴을 만져보았다.

흠, 바꾼다면 무슨 색이 좋을까? 머리는 연핑크 색으로 하고, 눈동자는 에메랄드 빛. 색에 대한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랑은 그저 제가 좋아하는 색들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사약 같은 환을 통해 눈동자 색을 바꾸고 있었지만, 분명 로엔은 마법으로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진짜 바꾼다고? 그 환을 더는 안 먹을 수 있을까? 부푼 마음에 아랑의 심장이 콩닥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능은 하지. 그런데 아랑이는 지금 색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바꿔.”

“네?”

아니, 카일 이건 확실히 하자고요. 환을 먹지 않고도 눈동자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저도 바꾸고 싶고, 염색을 하지 않아도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것도 좋지만 둘 다 제 건데요.

“바꿨을 경우, 부작용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거나 그럴 확률은 얼마나 돼?”

그러나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화가 흘러가고,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닉이 제 몸을 돌려세우고는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자 아랑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뭐. 현 상황에서는 마탑주나 드래곤이 아닌 이상 마법으로 추가 바꿨다는 걸 알아낼 사람은 없지. 늘 말하지만 난 마법으로는 천재에 가깝다고. 그리고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싶으면 그땐 나에게 말하면 되고. 그전까지는 잘 유지될 거야.”

“쓸데없는 소리한다. 바꾸는데 뭐 필요하거나 그런 건?”

지금 당장 바꾸기로 마음먹은 것 같은 카일을 보며 아랑은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그럼 진짜 이제 매일 아침 강제로 카일에게 깨워져 환을 먹고 다시 잠드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없어. 아랑 눈이나 감아.”

“아니 잠깐…….”

이건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인데! 컬러 선택을 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아랑이 다급하게 원하는 색상을 말하려는 순간. 이미 닉의 입에선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어떠한 고통이나 이상함을 감지할 새도 없이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이상한 주문이 끝나자마자 눈을 뜨라는 말에 아랑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닉.”

자신을 모습을 보지 못한 아랑이 눈에 한껏 가라앉은 카일의 목소리와 함께 당황한 닉의 얼굴이 들어왔다.

“뭐, 어때? 예쁘잖아.”

급하게 자신에게서 멀어지며 문가로 도망가는 것 같은 닉을 보며 아랑은 황급히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카일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말했지만, 거울 속에 있는 아랑은 연보랏빛 눈동자에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제 얼굴을 빤히 보며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흔들자 빛을 받은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내었다.

어, 머리카락 색이 갈색인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거 눈동자 색 좋은데요. 가라앉은 카일과 다르게 닉이 뽑아낸 색은 의외로 아랑의 마음을 저격했다.

“……반짝반짝 예쁘긴……. 하네요.”

“닉. 이 새끼를……”

넋을 놓고 자신의 눈동자를 감상하던 아랑은 갑자기 자신을 돌려세우는 카일의 행동에 놀라는 건 둘째 치고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오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서로의 숨결이 마주 닿을 만큼 가까워진 얼굴 간격에 불빛이 일렁이는 것까지 비치는 카일의 눈동자에 자신이 비쳐보이자 아랑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나가 봐.”

심각한 카일의 표정에 차마 잡힌 턱이 아프다는 말을 못 하던 아랑은 저를 놓아주고 뒤돌아서며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슬쩍 자신을 등지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착각이 맞겠지만, 저를 놓아주던 그의 얼굴이 유독 붉어보였다.

놓아줄 거면 그냥 놓아주지. 왜 남의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고 난리야. 쯧. 카일 너 아까부터 여기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결국 손 씻은 지 오래됐다는 거잖아. 드럽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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