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5)

08.

쫓겨난 것인지 제 발로 나온 것인지 모르게 서재를 나온 아랑은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 제자리에 앉아서 종이만 들여다보고 들여다본 탓에 뻐근해진 목을 돌리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도 오랜만에 하니 힘드네. 저녁은 서재에서 먹었지만 그래도 출출하니까 부엌에 가서 대충 뭐라도 먹을까. 아, 이럴 때는 라면인데. 야식으로 먹을 만한 걸 떠올리던 아랑은 라면이 없는 걸 아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화롯불에 고구마나 던졌다가 꺼내 먹어야 하나.

아, 그전에 한스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그에게 머리랑 눈 색깔 바뀐 거 자랑하고, 우리 은돌이랑 하양이한테도 자랑해야지. 축져서 터덜거리던 아랑의 발걸음에 생기가 돌았다.

“아. 진짜 쓸데없이 크기만 커 가지고 은돌이 보러 다녀오는 것만 해도 한참이겠네.”

창으로 달빛이 비치고 간간이 있는 조명이 긴 복도를 밝혀주고 있었지만, 공포영화를 즐겨봤던 아랑에겐 별거 아니라는 듯 그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일하는 하인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침실로 갔기에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는 아랑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경보하듯 부엌까지 들어온 아랑은 뒤쪽 창고에서 육포 몇 개를 챙겨 들었다. 자신이 돌아다니면 항상 어디선가 나타나던 한스도 나오지 않자, 아랑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창고 뒤 쪽문으로 향했다.

좀 춥더라도 자연에서 뛰놀도록 두는 게 나은 건지, 지금처럼 데려와서 지내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기에 최대한 은돌과 하양을 배려하고 싶었다. 아랑에겐 한없이 넓은 성이지만 산속을 뛰놀던 그들에겐 좁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기사들이 훈련할 때면 좋다고 연무장 뛰어 들어가서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성 뒤에 있는 텃밭에 들어가 다 파헤쳐 놓아 한스 할배에게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처음엔 은돌이나 하양이의 털끝만 봐도 기겁하고 도망가던 하인들도 어느새 그들을 가족처럼 대해 주긴 했지만, 늑대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랑과 카인, 한스가 고작이었다.

뒷마당으로 나간 아랑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자, 그의 코와 입에서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흘러나왔다.

“겨울이 오긴 오는구나.”

시린 바람과 환한 달빛을 벗 삼아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는 아랑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일단 머리색이랑 눈동자 색이 바뀌었으니 다른 사람들 의식하고 살 필요도 없고. 진짜 카일만 믿고 있어도 되려나.”

이곳에서 빈둥거리면서 먹고 싶은 것 다 만들어 먹고, 은돌이와 하양이와 뛰어 노는 것도 좋지만 문득 로엔을 떠올린 아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곳을 떠나오면서 유일하면서도 확실하게 세운 목표가 대마법사 베르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를 만날 때 뭐라 해야 할지 정해놓지는 않았다. 베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로엔처럼 자신이 다른 곳에서 왔다는 걸 믿어줄는지. 닉보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했으니 당장 바꿔 놓은 제 눈동자 색을 보고 단번에 제거해 버릴지도 몰랐다.

“아씽. 그럼 환도 미리 챙겨갔다가 먹어야 되나? 아니지. 마법도 꿰뚫으면 환도 알아챌 텐데. 그런데 분명히 카일이 파란 눈 해 주라고 했는데, 왜 보라색인거지? 그래서 닉이 그래서 도망갔나? 이거 잘못된 거 아니야?”

서재에 있는 동안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자, 아랑은 제자리에 서서 마구 발을 굴렀다. 

늦은 밤. 인기척에 슬쩍 우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은돌은 달밤의 체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길 중간에 서서는 혼자 난리치고 있는 아랑을 보다가 다시 하양의 옆으로 돌아갔다.

“누구야?”

“어…… 그냥 모른 척하고 자자.”

누군지 물어보는 하양의 질문에 차마 제 주인 격인 아랑이 달밤에 지랄발광 하는 것 같다고 말을 하지 못한 은돌은 그의 발걸음이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것 게 느껴지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추운 날씨에 풀벌레들도 사라졌는지, 적막함이 가득한 밤이었다. 휑한 바람 소리와 함께 제가 걷는 자박거리는 소리만 들리자 작은 등이 절로 살짝 굽어들었다.

“십오야 밝은 둥근 달이 둥실둥실 떠 오면 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 울렁~ 울렁~ 울렁거리네~”

생각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랑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바람이나 좀 쐴 겸 은돌이와 하양이를 보러 오려고 나온 것이었다. 

가을 단풍조차 다 진 휑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그림자가 뒤숭숭하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아랑의 발걸음이 멈추고 작은 머리가 휙휙 주위를 다시금 둘러보았다.

“아씨. 왜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도 없어.”

아마 지나가는 고양이를 봤다면, 더 놀랐을 아랑은 괜히 두근거리는 왼쪽 가슴을 오른쪽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은돌이네야 날 밝으면 보면 된다는 핑계를 대며 다시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서움에 잰걸음으로 돌아가는 아랑의 손끝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은돌이와 하양이에게 변한 모습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던 아랑이었다.

 * * *

“진짜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진짜 나가도 돼요?”

카일은 보고 있던 글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능숙하게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다.

“그래.”

“거짓말 아니고 진짜죠?”

“해지기 전에 들어와야 하고, 기사 단장과 같이 다녀와야 해.”

인장이 마른 종이를 봉투에 넣고 양초를 녹여 밀랍 인장으로 완전한 봉합한 카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랑은 보았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하고, 빛을 받아 연보랏빛이 아닌 연분홍빛으로까지 보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게 출발하면 손해 아닌가? 뭐 지금 당장 출발하든 오후에 출발하든 난 상관없지만, 돌아오는 시간은 정해져……”

카일은 제 말을 다 맺기도 전에 후다닥 뛰어나가는 작은 뒷모습을 보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닉은 자신의 마법이 잘못된 것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지난밤부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은 성공인데, 눈동자 색을 제대로 바꾸지 못한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다. 최고 마법사라는 자부심이 꺾인 것이다. 그러나 자책하면 뭣 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카일은 아랑이 복용한 환에 문제가 있다고 합리적인 답을 내놓았다.

이미 환으로 바꾼 색 위에 닉의 마법이 들어갔다면, 원하는 색이 아닌 다른 색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순순히 말해줄 리 없는 카일 덕분에 닉만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랑은 자신을 보고 눈을 깜박이고 있는 기사단장 제임스를 향해 밝게 인사를 했다.

“……”

“저. 아랑이요. 아랑이. 그때 같이 떡 치던 아랑이.”

자신을 보며 눈이 가늘어지던 걸 본 아랑은 얼른 먼저 대답했다. 지난밤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바꾼 후, 보는 사람마다 당황하기에 아예 입에 붙은 말을 꺼냈다.

“……”

“마법사님이 예뻐지라고 바꿔 주셨어요. 이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요. 오늘 수도에서 물건 들어오는 날이라면서요? 음식 재료 사려면 서둘러야 해요. 어떤 게 있는지 구경도 하고.”

앞서가던 아랑은 살짝 뒤돌아서는 손짓을 했다. 어떻게 받아낸 외출인데,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발걸음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런데 단장님, 우리 설마 저거 타고 가는 거 아니죠?”

성문 가까이 준비를 마치고 서 있는 두 마리의 말을 본 아랑은 제임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왜?”

“음식 재료 사러 가는데, 그거 어디 실어 와요? 말이 다 실을 수 있어요? 아니면, 마차가 따로 오나요? 음, 여기도 배달되거나 해요?”

들뜬 마음에 제임스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말을 꺼낸 아랑이었다.

“뭘 그렇게 많이 사려고……”

결국, 마차에 나란히 오른 제임스는 잘 손질된 자신의 턱수염을 만지며,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아랑을 바라보았다.

이 마차에 종이와 펜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무엇보다 종이에 써내려가는 글자는 그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기사단장의 직책에 오른 50살의 제임스는 지금껏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릴 적엔 수행한답시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녔고, 용병이 되어서는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떠돌아다닌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터에서 카일을 만나, 그의 제안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그랬기에 대륙의 공용어는 물론 제법 많은 언어를 하는 그였지만, 이런 글자는 처음이었다.

“그건…… 처음 보는.”

“우리 세종대왕님께서 만들어 주신 한글인데요.”

처음 들어보는 말에 제임스는 더 묻기보다는 그냥 마차에 편히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세계는 넓고 오지는 많으니까. 이미 다양한 문화를 접한 그에게 새로운 문화와 글자는 그리 큰 호기심 대상이 아니었다.

[떡갈비. 갈비찜. 소갈비탕. 떡볶이……. 아, 결국 장이냐. 된장. 고추장. 간장! 미치고 환장하겠네. 이걸 담을 수나 있냐고. 내가……]

제임스가 기웃거린 종이엔 아랑의 푸념이 잔뜩 적혀 있었다.

제임스는 날개 달린 듯 뛰어다니는 아랑을 쫓아다니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조그만 녀석이 날다람쥐라도 되는 듯 어찌나 사람들 사이를 잘 비집고 다니는지 몇 번이나 놓칠 뻔한 것이었다.

방금 여기서 물건 값으로 실랑이는 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다른 곳에 가는 걸 발견한 제임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랑. 도대체 이걸 다 뭐에 쓰려고.”

마을에 도착한 후 아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은행에 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돈 쓰는 재미를 느꼈다. 처음 보는 음식 재료들은 죄다 먹어보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막 사들이는 등 돈을 물 쓰듯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모님 얼마에 해 주실 거예요?”

“아니 이걸 다 사신다고요?”

집 텃밭에서 정성스럽게 기른 것들을 마을 장이 설 때마다 가지고 나와 노상에서 팔던 아주머니는 저를 보고 쪼그리고 앉는 모습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온종일 팔아도 대부분 다 팔지 못하고, 해 질 녘 떨이나 하고 가는 물건은 보자마자 다 사겠다니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던 것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생김새로 봐서는 귀족 도련님 같은 분이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러 쪼그리고 앉아 있기에 최대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었다.

“네. 무가 실한 게 딱 이맘때 무김치 담으면 얼마나 좋은데요. 하- 색이 시퍼레서 먹고 싶은 생각은 딱히 안 들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좋잖아요.”

“아니 이게…… 그러니까.”

평범한 농민이 귀족을 보지 못해서 망설이는 것이지만, 물건을 팔지 않으려 저를 피한다고 생각한 아랑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모님. 그럼 이거 다 해서 20실버 어때요? 지금 다 사는 조건으로.”

“네에?”

여기 있는 것 다해봐야 2실버 정도가 고작인데, 열 배나 되는 가격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중년 부인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그리고 제 눈앞에는 살포시 반달로 접힌 예쁜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예쁜 소년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건 그리 비싼 게 아니니……”

“아! 다 파신다고요? 아이 참 고맙구로. 여기 20실버 있어요.”

놀라서 버벅거리는 아주머니의 손을 쭉 잡아당긴 아랑은 그녀의 손에 20실버를 얼른 쥐여 주었다. 힘든 농사일로 거칠거칠한 그녀의 손과 손톱 밑의 거뭇한 흙 때가 아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임스. 이거 마차에 다 실어줘요!”

짧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끝낸 아랑은 얼른 일어나 바로 옆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제가…… 이리 많이 받아서는, 기사님 여기 있습니다.”

짐을 싣는 일은 홀랑 제게 넘겨버리고 가는 아랑이 자리 잡고 앉는 가판대를 확인한 제임스는 말을 거는 아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아랑이 쥐여 준 실버를 반절 이상 다시 제게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됐습니다. 물건 사는 사람이 만족하면 된 거니, 오늘을 일찍 들어가셔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시지요. 겨울 준비도 단단히 하시고요.”

처음엔 정식 상점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길가에 널린 가판대만 돌아다니는 아랑을 보며 표정을 굳혔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시장에 도착해 은행을 들른 아랑은 정식 매장을 돌아보고장터를 얼추 돌아보고 난 후에야 빈손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아 온 가격에 기본 8~12배 정도로 가판의 물건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처음엔 아랑이 셈을 못 하는 건가 고민했다. 상인들이 돌려주는 돈을 다시 받을까 생각하던 제임스는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서너 번 이 일이 반복되자 일부러 그가 이런 식으로 물건을 사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제임스! 이분 것도 실어주세요.”

생각에 빠진 사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아랑의 말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랑이 원하는 건 뭐든 사주라고 영주님께 넉넉히 돈을 받아왔지만, 차마 그에게 건네줄 수 없었다.

영주님께 받은 돈은 고스란히 돌려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금전적인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럽시다. 손 큰 꼬마 총각.”

벌써 가득 찬 마차를 보며, 제임스는 혀를 찼다. 도대체 뭘 얼마나 해 먹겠다고……

“제임스. 이것도!”

“잠깐! 실을 수 있는 만큼만 사고……”

잰걸음으로 아랑의 옆으로 간 제임스는 자신을 찾기 쉽도록 위로 한껏 들고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손목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를 한 대 더 빌리는 건 어떨까요?”

저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랑의 말에 제임스는 입을 꾹 닫았다. 

“뭘 만들려고 하는 겁니까?”

음식 한번 하려면 온 성을 들썩여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만큼 하는 아랑이었지만, 오늘 구매하는 것으로 보아 이건 한두 끼 정도가 아니었다.

“두고두고 먹을 거요. 우리 가사님들이 이번에도 좀 도와주셔야 할 거예요.”

생글생글 웃는 아랑의 얼굴 뒤로 왠지 음험하게 웃고 있는 악마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사잰 아랑은 허리에 손을 짚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쾌청한 늦가을 하늘을 보자 왜 따끈한 국물이 떠오르는 것일까?

멸치와 채소들을 넣고 우린 국물에 반쯤 몸을 담그고 긴 꼬챙이에 몸이 꿴 채로 오동통하게 불어있는 어묵이 아른거렸다. 저 구름은 물 떡같이 생겼고, 쟨 사각 어묵, 쟨 동그란 어묵. 

푸르고 높은 하늘에 간간이 있는 구름을 보며 따끈한 어묵과 떡을 떠올리던 아랑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바로 했다.

떡은 이제 닉에게 부탁하면 된다지만, 어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배 타고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라도 잡아 와야 하나? 제 능력 밖의 일까지 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망상을 끝낸 아랑은 사람들을 통솔하며 마차에 짐을 싣고 있는 제임스를 보았다.

“제임스. 잠시 후에 저기 앞 동상 있는 사거리에서 만나요.”

큰 소리로 말한 아랑은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어주는 제임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느린 발걸음으로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가판에서 파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건 샀기에 이번엔 상점을 들어갈 생각이었다.

가판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온종일 추위에 떨면서 남은 약초 하나까지 다 팔려고 노력하던 자신과 로엔이 떠올랐다. 그랬기에 망설임 없이 그들의 물건을 사고, 계산까지 넉넉하게 한 것이었다.

가벼워진 주머니에 내심 허전했지만, 아랑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피어있었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된 이른 시각. 오늘 팔 물건이 없는 이들은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이른 귀가를 할 것이었다. 셈도 여유 있게 해 드렸으니, 아마도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을 위한 간식거리도 많지 않을까?

“나 착한 일 제대로 한 거 맞지? 아이고 착하다, 설아랑.”

혼자 깨방정을 떨며 큼지막한 고기 그림이 그려진 상점으로 들어간 아랑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찬해 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칭찬하지 뭐.

차마 고기까지 웃돈을 주고 살 수 없었던 아랑은 이번에는 정확하게 계산을 하고 나와 동상이 있는 중앙 사거리로 향했다. 이곳 사람들의 외형이 아랑에게 낯설고, 언어가 아직도 어색하게 들렸지만 활기 넘치는 분위기만큼은 어릴 적 엄마와 다니던 장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저기 흥정하는 사람과 엄마 손을 잡고 군것질거리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아랑의 향수를 자극했다.

마침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매대에 선 아랑은 고기와 채소를 번갈아 끼워 화롯불에 구운 꼬치구이를 하나 샀다.

“역시 길거리 음식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먹는 게 제일 맛있지.”

순식간에 꼬치구이 하나를 다 먹은 아랑은 옆에 있는 갓 구운 빵도 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거리 한쪽에 세워둔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올랐다. 처음엔 이 마차에 짐을 실었지만 물건을 과하게 사는 아랑 때문에 제임스가 마차를 한 대 더 빌린 것이었다. 

아마도 짐 마차에 짐을 다 싣고 나서야 제임스가 올 것 같아, 푹신한 마차 의자에 반쯤 기대앉은 아랑은 빵 하나를 베어 물었다.

“오! 이 집도 맛집이네.”

제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빵을 야금야금 다 먹은 아랑은 크게 하품을 하고 아예 드러누웠다. 어차피 집으로만 돌아가면 되는 일. 낮잠 좀 잔다고 여기서 제게 뭐라고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 * *

“……다시 말해 봐.”

밀린 서류를 읽고 있던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보고 있던 서류가 그의 손에 처참하게 구겨졌다.

“아랑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달싹이며 제임스는 힘겹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어떻게?”

“분명히 정육점으로 들어가는 걸 봤고, 동상 있는 사거리에서 만나 뵙기로 했는데……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마차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마차를 타지 않으셔서…….”

“이상한 낌새는?”

“전혀 그런 건 없었습니다.”

평소엔 발걸음 소리조차 없이 걸어 다니는 카일의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 소리만으로도 제임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순식간에 사라진 아랑의 흔적은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가 꼬치구이에 이어 빵을 산 것까지 알아냈지만 그 다음 행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마치 그 사람 많은 사거리 한가운데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닉.”

“여기선 내가 알 방법이 없지……”

옆에 같이 있던 닉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일의 손안에서 펜 하나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부서져 내렸다. 

“일단 마을 경비대과 출입문에 모두 연락을 넣었고, 마을을 드나드는 모든 마차와 사람들은 검문하고 있습니다.”

카일과 함께 한 이후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거의 본 적 없었다. 전시에 극악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카일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말을 따른 병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부상자도 극소화되었다. 하지만 지금 방을 가득 채운 무거운 기운은 분명 카일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카일. 지금 날 죽일 셈이야? 아랑은 또 찾으면 되는 거고. 당장 기운 거둬!”

짜증 섞인 닉의 목소리가 있고서야 어깨를 짓누르던 기운은 덜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난 마탑 쪽으로 연락 넣어서, 알아볼 테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나가 보던지. 아랑이 성격이면 지옥에 홀로 떨어뜨려 놔도 마왕에게 맛난 음식 바치면서 잘 살아남을 놈이니까…….”

닉은 음습하고 무거운 기운이 자신에게로 몰려오자, 얼른 서재를 빠져나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제임스와 카일의 정예기사들도 못 찾아낸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다른 지역도 아니고 바로 그의 코앞에서 아랑이 실종된 것이었다.

“납치한 거면, 누군지는 몰라도 진짜 대범한 놈일세. 걸리면 사지가 가루가 되어 날릴 텐데.”

헤르시나는 복도 장식물 뒤로 몸을 숨긴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가 성안을 돌고 있었다. 아랑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변했다는 말은 있었지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색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머리카락은 허니블론드, 옅은 갈색, 갈색 계열의 색상으로 말했다. 그리고 눈동자는 붉은색 계열과 보라계열로 말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확실하게 어떤 색상으로 단정지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들 그저 바뀐 색이 정말 원래 자신의 색상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고,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진 것 같다는 이야기만 나눌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랑이 이번에는 사라졌다고?

오늘 아침에 아랑이 나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헤르시나는 급히 그림자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을 넣었다. 좀처럼 밖으로 외출을 하지 않던 아랑이 성을 나갔을 때가 그들이 기다린 순간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의 성에 침입하여, 소드 마스터의 침실 바로 옆에서 지내는 아랑을 납치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래곤 외엔 전무했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급하게 그림자 길드 마스터에게 연락을 넣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 아랑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급히 수정연락을 넣긴 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르시나로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가는 닉이 사라질 때까지 헤르시나는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사실을 샬럿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망설여졌다. 더군다나 돌아가는 대로 그림자 길드에 연락을 넣을 걸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어쩌면 이 실종이 그들이 성공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샬럿의 방으로 향하는 헤르시나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이로 깨물었다. 뭐가 됐든, 부디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아- 지금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헤르시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샬럿은 망설임 없이 연락구를 꺼내 그림자 길드로 직접 연락을 넣었다. 

“처음에 주신 정보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체구가 작고 마른 소년이었습니다.”

“네. 그래서 바로 정정해 드렸잖아요. 밝은 갈색 계열의 머리카락에 붉거나 보랏빛 계열의 눈동자라고.”

“……저희가 한 일은 아닙니다.”

짧은 침묵 후 돌아온 대답에 샬럿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긴 샬럿은 제 옆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헤르시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하게 사라진 거 맞아?”

“네. 마법사님은 마탑으로 연락 넣으신다고 했고, 기사들은 현재 라이엔부르크를 오가는 모든 사람과 마차, 짐을 다 확인한다고 합니다.”

샬럿의 천사 같은 고운 얼굴에 표독스럽게 올라왔던 짜증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하늘이 날 도와주는구나.”

오월의 따스한 햇살처럼 밝게 미소 지은 샬럿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빠르게 오가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급히 나가는 기사를 보며 그녀의 얼굴에 더 진한 미소가 걸렸다.

“공주님.”

“헤르시나. 뭘 걱정하는 거지?”

“네?”

“우린 아무 일도 안 했어. 굴러 들어온 돌이 알아서 굴러나갔을 뿐이잖아. 참, 수도에서 오기로 한 디자이너들은 언제 도착한다고 했어?”

“빠르면 이틀 안에…….”

“유행하는 장신구들도 다 가지고 오는 거 확인했어?”

“네. 물론이죠.”

“우리 영주님. 기분이 울적하실 텐데. 내가 기분 풀어드려야겠다. 원래 기르던 개가 집을 나가면 슬프거든.”

콧노래를 부르며 긴 머리를 빗는 샬럿을 보며 헤르시나는 굳히고 있던 표정을 조금씩 풀었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은 공주님만 모시면 되었다. 그리고 모시는 공주님이 행복한 것이 그녀에겐 가장 좋은 일이었다.

 * * *

‘아…… 내 마카롱.’

천연색의 화려한 색감과 쫀든쫀득 바사삭거리는 두 개의 시트. 그 사이로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크림이 잔뜩 들어있는 마카롱이 아랑의 눈앞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하나만 먹어도 일주일 한 다이어트를 날려버리는 마카롱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일단 초코 마카롱을 먼저 먹고, 다음에 저 오렌지 빛 도는 걸 먹겠다는 심정으로 양쪽으로 두 손을 뻗었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몸을 강타하는 충격에 눈을 뜬 아랑은 서둘러 나자빠진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 혼자 덩그러니 있는 흔들리는 마차 안임을 확인한 아랑은 네발로 기어 창가에 쳐진 커튼을 젖혔다.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 덜컹거리는 흙길 위를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창 너머로 텅 빈 밭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붉게 노을을 그리며 지는 태양까지 확인한 아랑은 편하게 바닥에 앉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꼬치구이와 빵을 먹고 제임스를 기다리다 잠든 것 같았다. 모처럼 쇼핑에 신이 나 과소비 후 든든하게 군것질까지 하고 눈 좀 붙였다고 오후가 다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제가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고 출발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제이……”

제임스를 부르려던 아랑의 살짝 벌어진 입도 머리를 긁적이던 손도 모두 한순간 멈추었다. 아침에 성에서 나올 때, 허허벌판같이 휑한 밭을 본 적이 있던가? 거기다 길이 이렇게 울퉁불퉁 마구 흔들렸던 기억도 없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자신이 제임스와 타고 온 마차 같은데, 뭐가 달라진 거지? 혹시 실수로 자신이 마차를 잘못 탄 것이라면 이 마차 주인이 자신을 깨워 내보내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탄 걸 모르고 출발했다면?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고민하던 아랑의 생각이 마지막에 멈추자 입 안에 고인 침이 절로 꿀떡 삼켜졌다. 그럼 이 마차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난 어디? 어디로 가는가?

방금까지 내 집이다 생각하고 있던 마차 안이 불편해진 아랑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마차 창을 열었고 작은 머리를 창밖으로 쏘옥 내밀었다.

“저기…… 저기요.”

개미 소리보다 작은 아랑의 목소리는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거칠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에 묻혀버렸다.

“으윽”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큰 돌을 넘으면서 심하게 덜컹거린 관계로 차창에 목을 세게 부딪친 아랑은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마차 바닥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든 돈을 떠올렸다. 일단 마차가 멈추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근처 마을에라도 내려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는 마차 편이야 구하면 되지.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아랑은 마차 바닥에 다시 편하게 누웠다. 마차 의자에 앉아 봤자 덜컹거려 떨어지느니 처음부터 바닥에 있는 걸 선택했다.

불규칙하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편하게 누운 아랑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이다 이내 살포시 내려앉았다.

“죽은 거 아니야?”

“죽긴 왜 죽어? 숨 쉬는 소리 들리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혹시 귀가 안 들린다거나? 그런 하자 있는 놈은 아니겠지?”

“귀 안 들리고, 말 못 하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생길 걸 봐라. 완전 최상품이잖아. 귀족 놈들 좋아하는 작고 뽀얀 거. 이거 누구한테 먼저 연락을 넣지?”

“그렇긴 해. 무슨 사내놈이 여자처럼 저래. 미성년자면 어떡하지?”

“야,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썼어? 그리고 귀족놈들 어린놈 좋아하잖아. 쓸데없는 말 말고, 일단 묶을까?”

“묶다가 깨면 어쩌지?”

아랑은 잠결에 들리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오랜만에 달게 자는데 이야기를 나눌 거면 좀 조용히 하던지, 아니면 다른 데서 할 것이지. 꼭 사람 자는데 그 옆에서 해야 하나?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대화에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된 아랑의 귀 끝이 살짝 움직였다. 자신을 두고 이어지는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묶다가 깨면 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치? 그럼 어떻게 설명하지?”

“일단 우리 목적지 말하고, 거기까지 가야 한다고 하는 건 어때? 가는 길에 들릴 마을도 없잖아.”

“그렇지. 괜히 묶고 그러다가 최상품에 흠집 나면 우리만 손해잖아. 그거 있지?”

아랑은 최대한 자신이 깨어난 걸 티 내지 않으며, 속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저것들 모지리 아니야? 바보도 저렇게 하지 않겠다. 저런 모의할 거면 둘이서 조용한 곳에서 하던지. 사람이 자는지 깼는지 확인도 안 한 상태에서 옆에서 대놓고 자신들의 계획을 다 말하는 건 어디서 배운 것일까? 

“어. 있어. 이따가 우리 밥 나눠주면서 물에 타줄까?”

“그럼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푹 자겠지?”

어. 그래. 나 수면제 성분 있는 약초라도 먹여서 푹 재우려고? 마차 많이 흔들리던데 뭐 머고 푹 자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그리고 이거 수도로 가는 거였어? 그럼 그냥 모른 척하고 편하게 타고 갈까? 원스톱으로 수도까지 가서 마탑도 다녀오고. 오! 이거 괜찮은 생각이야.

둘의 대화를 들으며 편하게 눈을 감은 채,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끝낸 아랑은 그냥 계속 자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이 띨띨한 두 놈은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을 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애 왜 안 일어나지? 흔들어 볼까? 나 배고픈데, 우리 마차 세우고 잠시 밥부터 먹고 가는 건 어때?”

“아니야. 지금 자니까 최대한 멀리 가자. 혹시 누가 찾으러 오면 어떡해?”

“아! 나 너무 앉아 있어서, 엉덩이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미친놈아. 수도로 가서 쟤만 넘기면 우리도 이런 생활 끝이야. 네가 봐도 최상품이잖아. 잘 부르면 수십 골드도 가능해.”

이 모지리들아. 그냥 출발해. 난 누워서 가니 편하기만 하고 좋네. 그리고 노숙하는 것보다 아늑하고 따뜻한 실내. 난 딱 좋아.

“으으음……”

아랑은 일부러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크게 뒤척거렸다.

“야! 깨려나 봐! 빨리 문 닫고, 밖에서 걸쇠 걸어.”

황급히 문이 닫히고, 철컥거리는 소리에 이어 마차가 출발했다. 그제야 눈을 뜬 아랑은 늘어지게 기지개 켜며 입을 쩍 벌려 참고 있던 하품까지 시원하게 이어 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본 아랑은 긴 하품으로 인해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대충 손등으로 문질렀다. 

수도로 가면 뭘 할까? 제일 먼저 마탑을 찾아가고, 수도에는 분명 라이엔부르크보다 먹거리나 놀거리가 넘쳐날 것이 분명했다. 오늘 먹었던 꼬치구이와 빵이 떠오른 아랑은 텁텁한 입을 쩝쩝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나저나 우리 까망이는 어디 가서 이리 보이지 않을까? 수도로 간 김에 까망이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닉은 드래곤 축소판이라고 말했고, 제가 보아도 그림책에서 보던 드래곤과 똑같았던 것이었다.

가끔 캘록 거리며 기침을 할 때, 입에서 작게 나오는 불이나 앙증맞게 달려 있는 까망의 앞발을 떠올린 아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 작은 손바닥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아 만지작거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까망을 떠올리던 아랑의 생각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자신을 걱정할 사람들로 이어졌다. 한스의 이마에 주름이 더 질 것 같고, 자신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한 제임스도 난감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해지기 전에 들어오라고 했던 카일이 떠오르자 아랑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상한 놈,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지 않나. 그러고 보니 내 입술은 드럽게 왜 만졌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챙겨주고, 성에서 편하게 지내게 해 준 카일이었다. 가끔 반짝이는 예쁜 초록 눈동자로 자신을 물끄러미 보던 그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에효.”

마차 창 쪽으로 바짝 붙어 앉은 아랑은 알 수 없는 갑갑한 마음에 생각 없이 창을 열었다. 어디든 도착하는 대로 마탑으로 가 대마법사님도 찾고, 카일에게 연락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수도에서 좀 놀다 간다고 잘 설명해야 다들 걱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찬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에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날렸다. 이제는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 휘영청 밝은 두 개의 달과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 보였다.

아…… 이 띨띨한 모지리 놈들. 창문은 왜 안 잠갔냐? 이거 조금만 노력하면 나 여기 창문으로 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짜 생각 없는 놈들.

찬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자, 창문을 닫으며 아랑은 혀를 찼다. 아니, 지금 내가 왜 납치범? 인신매매범들을 걱정해야 하지?

좀 출출하긴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마차 바닥에 누운 아랑은 두 눈이 곱게 감겼다.  흔들흔들 적당히 흔들리는 마차가 아기 요람처럼 아랑의 잠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아. 목마르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아랑은 편하게 앉은 채 목을 긁적였다. 대충 기어가 차창 커튼을 걷자 먼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다시 잠들었을 때가 밤이었으니, 저기 지평선에서 조금 솟아올라 오고 있는 것은 새끼 해가 분명했다.

“우아. 저 미친놈들 진짜 밤새 달렸어? 밖에 추웠을 건데.”

새벽이 되면서 떨어진 온도에 마차 안도 제법 싸한 기운이 돌았다. 그렇다면 밖에서 그 바람 다 맞으면서 달렸으면, 이쯤 되니 자신을 납치한 놈들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지극 정성이다. 나야 수도에 빨리 데려다주면 좋긴 한데, 너희 밤새 아무것도 안 먹고 달린 거냐.”

빵을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랑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현듯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처럼 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부를까 고민하던 아랑은 그냥 먼저 세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찌질한 덤 앤 더머 같은데. 문으로 다가간 아랑은 두 발로 힘껏 마차 문을 차버렸다.

덜컹. 아랑의 힘에 마차가 휘청이고 정말 문은 무언가로 막은 것이 맞는지 조금 열리려다가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바깥 상황을 파악하려 멈추고 있다가 마차가 멈추지 않자, 어린아이가 앙탈 부리듯 두 발로 마구 문을 뻥뻥 차버렸다.

덜커덕…….

어, 이게 아닌데. 마차 문이 원래 이렇게 부실한 건가요? 자동차처럼 쇳덩이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발로 몇 번 찼다고 부서질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요? 덤 앤 더머. 너희들 문에 제대로 된 자물쇠를 채워 잠근 건이 아니라, 그냥 굴러다니는 각목 하나 끼워 놓은 거니? 정말 그런 거니? 나 기물 파손죄 지은 거니?

양쪽으로 열리는 마차 문 중 하나가 밖으로 향해 활짝 열린 채 너덜거렸다. 찬바람이 휑하니 들어옴과 동시에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뭐…… 뭐. 뭐야!”

“문이 왜 이래?”

허둥거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랑은 쭉 뻗고 있던 다리를 슬그머니 모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을 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 녕하세요.”

지은 죄가 있기에 입 안에서 웅얼거리듯 말하던 아랑은 슬쩍 허리춤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어. 음……. 일단 저 화장실이.”

참 난감한 상황이지만, 생리적 현상이 먼저였기에 당황하고 놀라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지나쳐 밭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야. 이거 어떡해.”

“아니 어떻게 문을 부숴? 설마 기사수련생?”

“……”

갈 곳 잃고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로 부서진 문을 만지던 남자의 손이 기사수련생이라는 말에 멈추었다. 겉모습이 연약한 어린 소년 같다고 하지만, 실상 진짜 기사수련생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법사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마차 문을 부술 정도의 실력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이었다.

“어떡하지?”

부서진 마차 문을 둘째 치고, 지금 자신들이 건드린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주친 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냥 몰랐다고 잡아뗄까? 타고 있는지 몰랐다고 우겨.”

“그치? 수도에서 내려주면 되잖아. 어차피 가는 길에 들릴 마을도 없고, 밤새 달려서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되는데.”

“진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싶었어. 내 팔자에…… 젠장.”

“그냥 모셔다만 주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치?”

“……마차는 어떡하지?”

아랑을 납치해서 수도에 귀족들에게 팔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은 이제 살아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냥 보내드려야……”

“이거 고칠 돈이 어딨어?”

아랑은 밭 아래서 시원하게 소변을 보면서 한쪽 귀를 후비적거렸다. 어제부터 느꼈는데, 너희들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거니? 너무 급해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그저 몸만 가릴 곳에서 볼일을 보는 아랑의 귀에 그들의 말이 쏙쏙 들어왔다.

어제는 열심히 팔아치워서 돈 벌 생각으로 꿈에 부풀어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 부실한 마차 문을 발로 좀 부쉈다고, 갑자기 자신이 기사나 마법사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수도에 가서 적당히 협상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어슬렁거리면서 밭에서 올라온 아랑은 자신을 보자마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두 남자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배짱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지 궁금했다. 납치하려고 했으면 자신의 손이나 발을 좀 묶어놓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를 말았어야 했다.

“저 그런데 여기가 어디……”

“저희가 수도로 가던 길이었는데, 그게 마차에 계신지 몰라 가지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묻고 대화를 이어가려던 아랑은 저를 보자마자 말을 끊어버리고 다급히 하는 변명에 입을 앙다물었다.

“가는 길에 마을이 없는데, 이게 또 돌아가기도 그래 가지고. 그냥 수도로 가시면 안 되시나요?”

“네, 뭐. 돌아가기도 멀리오긴 했……”

“어서 타시지요. 이왕 갈 거 빨리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또 말이 먹힌 아랑은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그런데 혹시 먹을 거가……”

“여기 있습니다.”

배가 고파 먹을 것 좀 나눠달라고 말을 하려던 아랑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지는 봉투 하나를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어서 마차에 타라는 듯 자신을 몰아넣는 두 사람에 의해 마차에 올라야 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너덜거리는 문을 잘 맞춰 두 문을 동시에 닫으니 다시 열리지 않고 문이 잘 닫혔다.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하자, 아랑은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보았다. 식은 빵 한 덩이와 물을 본 그의 입술이 아래로 축 처졌다.

쟤들 왜 이렇게 짠하니? 하는 행동을 봐서는 문 수리비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 나쁜 마음을 먹은 건 괘씸하지만, 어리바리한 것이 꽤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역시나 마차 바닥에 앉아 의자에 기댄 아랑은 마차 창 너머로 빠르게 바뀌는 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로엔과 먹던 그 뻑뻑한 빵을 떠올리게 하는 맛없고 딱딱한 빵을 먹으며 간간이 물을 들이켰다.

잠시 잠깐 가라앉았던 아랑의 기분은 바깥 풍경이 변하자 두둥실 떠올랐다. 아무것도 볼 것 없던 휑한 땅에서 작은 마을들이 보이고 덜컹거리던 비포장도로가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원래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더니,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소리가 커지고 마차 속도가 늦어지자 아랑은 창을 열었다.

“우와.”

겨우 싸리 담장이었던 아랑의 집에서 튼튼한 나무로 만든 라이엔부르크의 담이 있었다면 이곳은 무려 돌로 쌓은 담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처럼 아늑하고 고즈넉한 느낌이 아닌 하늘을 가릴 듯 쭉 뻗어 올라간 높고 튼튼한 담을 보는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또 다른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설렘이 아랑의 가슴 가득 솟아났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걱정할 사람들도, 자신을 납치하려 했던 덤 앤 더머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점차 느려지던 마차가 멈추자 아랑은 얼른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라이엔부르크를 통과할 때도 신분증이 필요했는데,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랑은 급히 마차 창밖으로 머리를 빼 덤 앤 더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 보이자, 두 눈을 깜박였다. 쟤들 바보인 거 같은데 그런 게 또 아닌가? 수도로 들어가는데 이렇게 허술할 수 있는 거야? 어쨌거나 성안으로 무사히 들어간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닫혀 있던 마차 문이 열렸다.

“빨리 도착했네요.”

딱히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망설이던 아랑이 먼저 말을 꺼내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게 저희가 누군지 알아뵙지 못해서……”

“안녕히 가십시오.”

무언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사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을 가로챈 다른 사람이 딱 잘라 인사의 말을 했다.

“네. 네. 그러니까……”

부순 문 값이라도 주려고 머뭇거리며 바지춤으로 손을 넣으려던 아랑은 갑자기 사색이 되어 도망가 버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 아랑의 눈에 바쁘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허리띠와 그 아래 달려 있는 칼집이 들어왔다.

님들아. 나 칼 같은 거 없어. 그냥 미안해서 마차 문 수리비 주려던 거야. 

자신이 어떠한 오해를 샀는지 알게 된 아랑은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는 그들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한껏 당당히 펼쳤다.

사는 게 뭐 있어?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 라이엔부르크에 갈 때까지만 해도 소심하고 걱정이 앞서던 아랑은 없었다.

“또 은행부터 가야 하나?”

아랑의 눈은 이제 익숙하게 상점 간판 한쪽에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화려한 복장의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를 둘러보는 아랑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분명히 어제 장보기 전 은행에서 잔액 확인했을 때보다 딱 2배로 돈이 더 들어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추가로 입금한 사람은 카일. 아마도 어제 먹거리들을 잔뜩 산 그 금액을 제 통장으로 넣어준 것 같았다.

“딴 건 몰라도 돈복은 있네. 뭐 돌아가서 맛있는 거 많이 해 줄 거니까. 받아도 되는 거겠지.”

길거리에서 파는 과자를 사서 오독오독 먹는 아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풍성한 드레스와 연미복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대로변을 벗어나자 아랑이 찾던 시장이 나타났다.

“요기는 또 뭐가 맛있는 게 있을까요.”

분명 마탑을 찾아서 자신의 무사안전과 대마법사를 찾는 것이 먼저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먹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어제 실컷 장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음식은 감칠맛, 향신료가 많을수록 더 맛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거기다 수도의 시장은 라이엔부르크 시장에서 느꼈던 것과 달랐다.

“……대박.”

두리번거리며 놓여 있는 채소류를 만지던 아랑의 코끝으로 비릿한 바다 내음이 스며들었다. 거기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향은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물고기와 해조류 등 해산물에 아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거는 새우고, 요고는 조개고, 저것은…… 또 뭐지?”

그래도 지구와 아주 틀린 것은 아닌지, 이것저것 대체할 것들이 많은 곳이라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었던 아랑이었다.

생김새가 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딱 보니 새우, 조개, 굴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었다.

“이거만 다 사가면. 으히힛.”

멀건 동치미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아랑의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거기다 그곳엔 힘든 일을 도와줄 기사님들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 이것들을 상하지 않게 어떻게 들고 돌아가지?

“이것들 다 해서 얼마예요? 라이엔부르크까지 배달 되려나?”

이미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새우를 꾹 누르는 그의 입에서 엄청난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아, 말을 말어. 거기까지 어떻게 들고 가. 가는 길에 다 상하지. 그 동네야 뭐 선들하고 춥다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안돼, 안돼. 나야 이거 다 팔면 좋지만, 그래도 다 버릴 거 뻔한데 어쩌려고.”

손사래 치며 물건을 팔지 않는다는 상인의 말에 아랑의 눈꼬리라 아래로 축 내려갔다. 대충 시간을 계산했을 때, 어제 낮에 마차에 탑승 후 밤새 꼬박 달려 다음날 낮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렇다면 24시간을 이동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얼음도, 아이스팩도, 아이스박스도 없는 곳에서 가지고 갈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어디 실어갈 거야? 짐 마차는 있고?”

아랑의 작은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리자, 상인도 혀를 차며 손을 휘휘 저었다. 팔고 모른 척 해도 되는 일이지만, 그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시장을 벗어나는 아랑의 시야에 이상하게 생긴 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2~3층 높이의 건물이 가득한 이곳에서 유독 높고 삐죽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저기가 마탑인가?”

해산물은 해산물이고, 이내 호기심이 동한 아랑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뭐 딱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온 김에 겸사겸사 생각나는 것들 다 하는 거지.

 * * *

“평안히 잘 지내고 계신지요.”

카일은 마주 앉은 샬럿을 보며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영주님께서 신경 써 주셔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렇게 자주 담소도 나누고 티타임도 가진다면 좋겠는데, 늘 바쁘시더군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긋나긋한 샬럿의 대답에 그의 눈썹 한쪽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더 계시고 싶으신지 궁금하군요. 왕실에서 딱히 연락이 오는 것도 없어서 공주님을 뵙자고 연락드린 겁니다.”

“하, 영주님은 절 보내고 싶으신가 봐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곳은 공주님이 지내시기에 적적한 곳이니까요.”

서로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실내정원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랑이 사라지고 난리가 난 바로 다음날 오전에 갖는 티타임이었다. 지금껏 먼저 만나자는 연락조차 없이, 카일이 외출하지 않는 경우 저녁 식사만 같이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그런데 이 정신 없는 상황에 먼저 연락한 것은 결국 공주인 자신을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전혀 책잡힐 일이 없는 샬럿은 몸에 깃든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제 제안 거부하기 힘드실 텐데요.”

“그 마음 감사하지만, 거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영지 상황이 공주님을 모실 만큼 충분치 못합니다.”

“후회하실 거예요.”

“공주님의 뜻대로 하신다면, 따르겠지만 외로우실 겁니다.”

샬럿은 카일이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에 있는 창밖으로 향하고 있음에 잇몸 안쪽 여린 살을 질끈 씹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도에서 불러온 재봉사에게 웃돈까지 줘가며 만든 드레스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디자인에 요즘 남자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향수까지 뿌렸건만 그는 지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왕국이 보이지 않으신가요?”

“혹시…… 아니십니까?”

단도직입적인 카일의 말에 샬럿은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언행이 무례하시네요.”

“아니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카일 공작님. 제 제안 깊게 생각하셔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 대답 빨리 주시는 게 좋을 거고요.”

카일은 자신이 대답하기도 전, 먼저 일어나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리는 샬럿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속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몇 없는 소드 마스터를 이런 식으로 묶어놓으려는 왕국의 속셈도 뻔했다.

“영주님!”

카일은 헐레벌떡 뛰어와 노크도 없이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힌 이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온종일 영지 안을 쥐 잡듯 뒤졌지만, 아랑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어제 드나든 마차 중 아랑이 타고 나간 마차와 똑같은 것이 있었고, 그 마차가 점심때쯤 수도로 향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지금 추적대가 그 마차를 쫓고 있었다. 그랬기에 불편하지만, 샬럿까지 직접 불러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이리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급히 숨을 몰아쉬는 기사의 말에 카일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성 한쪽에 있는 워프 장소였다.

“이게 다 뭐지?”

“방금 다 보내진 것인데, 발신인이 없습니다. 발신 장소는 라이나 워프 센터이고요.”

워프가 이루어지는 마법인 안에 가득 쌓인 상자엔 싱싱한 해산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어느 미친놈이 최소 1회당 1골드가 드는 워프로 음식물을 나른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정도 양을 한 번에 보낸 것이라면 적어도 5골드는 족히 썼을 것 같았다. 사방이 산과 대지로 이루어져 있어 해산물을 즐기는 이가 없는 이곳으로 그런 돈을 써가며 워프를 보낼 사람은……

“아랑이군.”

턱을 어루만지는 카일의 입술에서 허탈한 말이 흘러나왔다. 워프 센터에서 물건을 보낼 정도로 돈을 썼다면, 그곳에서 이곳으로 연락구를 통해 연락도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연락 한 통 없이 이것만 보냈다고?

“도련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 라이나 은행에서 연갈색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를 한 소년이 설아랑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납치가 아니라, 제 발로 갔다는 건가?”

속속 도착하는 정보에 허탈한 표정은 카일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풍기는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말도 안 하고 혼자 수도로 가서 먹거리들을 사서 붙였다? 왜 말을 안 한 거지? 말했다면 기사를 붙이던 자신이 동행하던 그가 어딜 가든지 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단 닉 불러서 이것들 상하지 않게 동결마법 걸어서 식품 창고에 보관하라고 하고. 워프 준비해. 직접 수도로 가야겠으니까.”

아랑의 실종으로 한바탕 난리가 나고 뒤숭숭하던 성안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해산물과 함께 또 다시 발칵 뒤집어 졌다.

“흠, 도련님께서 어떤 음식을 하시려고……”

워프 이동을 위해 준비한다고 사라진 카일의 뒤에서 한스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어제 들어온 짐 마차는 1대가 아닌 2대였고, 그 안엔 익히 그들이 잘 아는 채소가 잔뜩 실려 있었다.

문제는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성안 사람이 거의 몇 달을 먹을 분량의 음식을 단번에 산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곳이 겨울이 길고 춥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채소들을 쌓아줘야 할 만큼 극악한 곳도 아니었고, 오히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양을 보관하다가 버리는 것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거기다 채소를 그렇다 치고, 이 해산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야 닉이 있었기에 동결마법으로 보관 기간을 늘릴 수 있지만, 마법사가 없었다면 오늘 밤이면 죄다 상해서 버려야 했다.

“거참. 속을 알 수 없는 도련님이지. 여기 더 두지 말고, 다 식자재 창고로 옮기고 마법사님을 그리 모셔오게.”

칠십 평생을 살아온 한스에게 요즘같이 변화무쌍한 나날은 처음이었다.

* * *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복식까지 이곳의 상류층 사람과 엇비슷한 아랑은 이제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닉의 마법 덕분에 꼬박꼬박 쓴 환을 먹은 눈동자가 혹시나 실수로라도 검은색으로 돌아왔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허름한 복장이 아닌 귀족 도련님들이 입는 복장을 한 아랑을 훔쳐보는 눈길에는 동경이 담겨 있었다.

한 손에는 음료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핫도그 같은 간식을 든 아랑은 화려한 쇼윈도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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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상품이 그대로 보인 덕분에 그 안에서 파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우와, 전기가 없으니까 여긴 마법으로 다 하는구나?”

허공에 떠서 세팅된 음식물을 빠르게 난도질하는 혼자 춤추는 칼을 보는 아랑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홀린 듯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즐거움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주 고객이 여성층이던 매니저는 들어오자마자 꼼꼼히 물건을 살피는 어린 꼬마 손님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10대 소년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단 말인가? 거기다 마석을 사용해서 만든 마법 요리 도구들의 가격은 만만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랑의 복색이 워낙 고급져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네에.”

아랑은 옆에서 질문하는 매니저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신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적혀 있는 금액을 확인할 때면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켜야 했다.

원래 좋고 이쁜 건 비싸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금액들이 적혀 있었다. 기본적으로 적혀 있는 단위가 골드인 건 어떻게 이해해 보겠지만 일반인들을 평생을 벌어도 살 수 없는 금액대였다.

“오늘부터 할인 기간 시작인데 잘 오셨어요. 총금액이 20골드가 넘을 경우, 추가 5% 할인받으실 수 있고요. 지금 보고 계신 그릇은 마법 그릇이랍니다. 원하는 크기만큼 커지기도 하고 평소 보관할 때는 지금 보시는 그 크기거든요. 어떤 음식이든 많이 담을 수 있답니다. 고객님께서 관심 두셔서 하는 말인데, 현재 5개밖에 안 남았어요. 올가을 최신 히트작인데, 어우. 인기가 그냥 어마어마……”

설명을 들을수록 아랑의 귀가 팔랑이고, 그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리고 손은 어느새 주머니로 들어가 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 그릇만 사면 김장도 할 수 있고, 보관도 할 수 있고.

“마법 그릇이 마음에 드세요? 그럼 또 여기 세트로 판매하는 게 있죠. 이 장갑으로 말하면, 손에 착 붙는 게 계속 빨아서 쓸 수 있어서 반영구적이에요. 거기다 착용하는 사람의 손 크기에 따라 늘어나고 줄어든 답니다. 절대 손에 물 묻힐 일이 없는 거죠.”

“네에?”

지금껏 이 세계의 불편함을 저주하던 아랑은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돈만 있다면 한국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 이곳이 아닐까? 아닌가, 돈만 있다면 저 우주 끝에서도 편하게 살긴 할 것 같았다.

“보시는 안목이 높으셔요. 부엌살림이 그냥 허투루 보이는 것 같아도 이게 준비하려면 한도 끝도 없잖아요. 이리 와 보세요. 관심이 있으시면 제대로 둘러봐야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랑을 훑어본 매니저는 이미 그의 옷과 가치를 금액적 환산을 마친 상태였다. 최신 유행하는 고급 디자인의 옷을 입은 귀족이거나 부잣집 도련님. 그녀의 안목이 맞다면 지금 그의 목 끝에 채워진 보석 단추는 사파이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20골드 이상이면 5% 추가 할인이라는 거죠?”

“그럼요. 거기다 제가 서비스로 좀 더 챙겨드릴 수 있답니다.”

아랑은 손에 들어오는 골드를 꾹 쥐었다. 눈 딱 감고 다 질러버려? 그럼 통장 잔고는 0원일 텐데. 그렇게 되면…… 다시 은돌에게 마석을 주워오라고 시켜야 하나? 지름신이 몰려온 아랑은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좋아요. 뭐가 고민이신지 말해 보세요. 제가 가격 한번 최대한 뽑아볼게요.”

수완 좋은 매니저에게 홀랑 넘어간 아랑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골드를 움켜쥔 손을 드디어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이거……”

“설아랑.”

이거 다 주세요. 라는 말을 하려던 아랑의 말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오는 누군가의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카일?”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보았나. 무려 하루를 꼬박 마차를 타고 온 거리였다. 자신이 출발하고 바로 따라왔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카일을 만난 아랑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어깨가 꽉 잡혀 그의 한 품에 쏙 들어간 아랑이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다른 걸 다 떠나 그가 우연히 수도 라이나에 있었다고 해도, 이 상점에 제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들어왔는지도 궁금했다.

“일단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할까?”

카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 안에서 묘한 기운을 읽은 아랑은 호기롭게 골드를 쥔 채 들었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머나. 결혼 준비하시는 거였구나. 어쩐지 전체적으로 다 관심 있으셔서 혹시나 했는데, 너무 동안이셔서…… 이게 결혼 준비하려면 볼 게 또 다르죠. 있어 봐. 이렇게 서서 이야기 할 게 아니라 앉아서 하나씩 설명드릴까요? 이런 건 또 두 분 같이 설명 듣고 조율해야지. 혼자 결정하면 괜히 뒷말 나오잖아요.”

아랑은 당장이라도 자신이 어깨를 제법 세게 움켜쥔 카일이 저를 이곳에서 끌고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연락도 안 하고 나와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카일이 화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조금 전 워프 센터를 통해 해산물을 보내긴 했지만, 이곳 글자를 아직 깨우치지 못해 편지를 남기기도 어려웠던 것이었다. 거기다 통신구를 통해서 1번 연락하는데 50실버라는 말을 듣자마자 선뜻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 돈이면 지금 음식 재료가 됐든, 뭐가 됐든 큰돈인데. 겨우 ‘나 잘 있어요. 곧 돌아갈게요.’ 이 말 잠시 하는데, 그리 큰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거기다 음식 재료 상하는 것도 신경 쓰여서, 오늘 하루만 여기 둘러보고, 마탑에서 대마법사에 대한 정보만 듣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일단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사과의 말을 하고, 무슨 일로 이곳에 왔냐는 것도 질문하면서 그와 대화를 할 생각에 아랑은 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카일이 제 어깨를 감싼 채 매니저를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어……”

밖으로 나가자고 말을 한 사람은 카일이 아니었던가요? 행선지를 변경한 카일 때문에 그가 가는 곳으로 따라 걷게 된 아랑은 어느 순간 테이블을 두고 매니저와 마주앉아 있었다.

“사고 싶은 게 있나?”

“어머. 좋으시겠어요. 이런 자상하고 멋지신 분과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일단 부엌 크기가 어떻게 되실까요?”

아니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일 뿐인데요! 거기다 성의 부엌 크기는 왜 물으세요? 거기 제가 원래 엄마랑 살던 집보다 크던데요. 워워, 순간 혹할 뻔했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신혼살림 사는 거 그런 거 절대 절대 아니에요.

“흐음. 이게 최신상이라고?”

아랑은 자신이 옆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매니저가 내미는 전단지를 보는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님, 요리에 관심이 1도 없고 먹는 것에만 관심 있는 거 제가 아는데요. 본다고 알 것 같지도 않지만,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런 오해를 받으면서 이러고 있는 걸까요?

“아랑. 이거 있으면 요리하는 데 편하겠어?”

친근한 말투로 카일이 관심 갖는 것마다 설명을 덧붙이는 매니저와 가끔 궁금한 걸 물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의 시선이 아랑에게 쏠려 있었다.

“에…… 아니 카일. 우리 지금 할 이야기가……”

“일단 금액은 생각하지 마시고. 원하시는 제품만 말씀하시면 제가 가격은 라이나 전체 통틀어 최대한 잘 맞춰드릴게요.”

두 분 언제 그런 이야기까지 나누셨을까요? 

아랑은 보기 좋은 필체로 서명하는 카일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많은 일이 휘몰아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매니저와 둘이서 속닥속닥 말하는 것 같더니 눈앞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오간 것이었다.

“주소 확인할게요. 라이엔부르크 아덴……성?”

함박웃음을 지은 채 배송할 주소지를 확인하던 매니저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앞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카일과 옆에서 볼을 긁적이고 있는 아랑에게 닿았다.

“혹시 카일 폰 아덴 백작님……”

점차 말끝이 흐려지는 그녀의 말에 카일의 고개가 살짝 까딱였다. 결제는 카일이 했지만, 쓰는 사람은 아랑이었기에 기본적인 인적사항 기입을 아랑의 것으로 했다. 하지만 주소지를 확인한 눈치 빠른 매니저는 이미 그 너머를 알아채고 있었다.

많은 소문과 가십이 넘쳐나는 수도에서 아덴가의 이야기는 최고의 이슈였다. 척박한 땅에 사는 몰락한 공작가의 외동아들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았다. 

촉망받던 기사에서 몰락한 가문의 가식으로 수업비조차 감당하지 못한 자퇴생이었다. 그리고 전장을 돌며 소드 마스터로 돌아온 그는 당당히 백작의 직위를 하사받아 라이엔부르크로 돌아간 것이었다. 물론 그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도 있었다.

사교계에 얼굴을 제대로 비춘 적이 없는 그였지만, 백작 직위를 받는 동안 왕궁에 머물면서 파티에 참여했던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인 흉악하고 끔찍한 상처투성이의 괴물 같은 사람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반면 완벽한 외모와 젠틀함으로 여심을 녹여 네 번째 공주님이 한눈에 사랑에 빠져 그의 성에 머물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한 마디로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을 목도한 것이다.

“더 필요한 건 없지?”

“아, 네. 일단은……”

허례허식과 과한 치장을 좋아하는 다른 귀족과 다르게 잠시 편하게 외출을 나온 것 같은 복장으로 부드럽게 미소 지은 카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의 허리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다.

“정해진 날짜 안에 잘 준비해 보내드리겠습니다.”

매니저는 호기심이 잔뜩 일어난 자신의 눈빛을 최대한 숨기며 얼른 고개를 숙여 그들을 배웅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리고 싶은 그녀의 촉새 같은 입이 벌써 근질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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