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5)

09.

카일에게 허리가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점을 나선 아랑은 흘깃거리며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많이 걱정했을까 아주 잠시 잠깐 고민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음에 서운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나 찾으러 온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요.”

“찾으러 온 거 맞아.”

“뭐 화를 낸다거나. 혼을 낸다거나 그런 거……”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덤덤히 대화하던 아랑은 카일의 질문에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친 것처럼 멍해졌다. 

카일과 자신의 사이가 뭐라고 그가 걱정하리라 생각했을까? 진짜 좀 전에 생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고용주일 뿐이었다. 갑자기 직원이 무단결근을 하거나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사장이 몇 명이나 있을까? 오히려 짜증과 화내는 게 먼저일 것이었다. 그런 제가 뭐라고 그가 걱정하고 있을 거라도 단정했는지 부끄러워졌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거 해산물 보낸 거 저 맞는데요. 오늘 저녁에 돌아가서 다 맛있는 걸로 장만할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오늘 돌아올 생각이 있긴 했고?”

왼쪽 가슴이 먹먹한 것 같기도 하고 한껏 들떴던 가슴이 푸쉬쉬 식는 느낌에 아랑은 고개를 숙인 채 대충 끄덕거렸다. 사람에게 기대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는 일도 없게 하려고 했는데, 잠시 또 생각을 놓고 살았던 것 같았다.

물론 상대방은 저에게 어떤 감정이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듬직한 카일에게 기대고 의지한 걸 알아버린 것이었다. 

“그럼 된 거야.”

느슨하게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움직이자, 절로 그의 품에 안겨 버린 아랑의 얼굴이 카일의 가슴이 닿았다. 꼭 맞닿은 온기 가득한 품에서 일정하게 뛰고 있는 그의 가슴의 울림이 몸으로 전해졌다.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돌아올 생각이 있으면 된 거지.”

소란스러운 길 한가운데서 유독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아랑의 귀에 파고들었다. 허리에 감긴 그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면서 자신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아랑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자, 오늘 한정 특가 판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라이나 최고의 보석세공사 잔 마르코의 최신 디자인 제품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갑자기 훅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아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다 큰 남자 둘이 껴안고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화끈하게 볼과 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 아랑은 두 손으로 카일을 밀어냈다. 

“아, 덥다. 날씨가 참 덥죠?”

아랑은 쉽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서는 손 부채질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 물기를 머금은 짙은 회색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둘 사이를 휑하니 지나갔다.

파닥거리며 손 부채질을 하는 손이 아닌 아래 축 늘어져 있던 손이 턱 하니 카일의 손에 잡히자 아랑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커다란 손이 제 손을 감싸 쥐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굵고 긴 손가락이 얽혔다. 불그스름하던 아랑의 귀 끝이 순식간에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색으로 바뀌었다.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원할 때 나가도 돼. 찾아오면 되니까.”

마치 아랑에게 하는 말이지만, 카일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막 호객행위를 시작한 사람을 지나쳐 온통 빛나는, 도저히 눈부셔서 눈을 뜨기 두려운 보석 상점으로 들어섰다.

들러서 구경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제대로 된 수익을 내지 못했던 주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남자를 보며 눈에 빛을 내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어떻게 보나 지금 들어오는 커플은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온 것이 분명했다. 주인은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핑크 다이아몬드 3캐럿이에요. 가운데 1캐럿 크기의 최고급 붉은 마석이 들어있어서 원하는 마법 1개 각인할 수 있고요. 대신 한번 각인된 마법은 재각인이 불가능하니까 신중히 고르셔야 합니다.”

“재각인을 원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저희 기술로는 다이아몬드 안에 마석을 주입하는 것까지는 되지만, 역으로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요. 마석을 분해해야 마석에 재각인이 가능한데 그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원하시는 마법을 각인할 수 있는 마석이 들어간 보석을 재구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매니저와 카일을 번갈아 보는 아랑의 눈이 껌벅거렸다. 방금 엄청나게 신기한 마법으로 움직이는 조리도구를 잔뜩 사고 나왔는데, 이번에는 보석 상점에서 목걸이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군청색 벨벳 같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천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보석 목걸이는 뭣 모르는 아랑이 보아도 아름다웠다. 

굳이 여성스러운 느낌도, 남성스러운 느낌도 나지 않는 깔끔한 은색 목걸이에 다른 장신구 없이 잘 커팅된 보석만 달려있었다. 갑자기 보석 상점에서 왜 이런 걸 보는지 궁금한 아랑은 심각한 표정의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께 선물할 보석을 나랑 사러 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마도 앞에 제가 갖고 싶은 부엌살림을 사 줬으니 괜찮다고 생각한 건가? 샬럿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떠올린 아랑은 그녀의 흰 피부까지 떠올리고 가녀린 그녀의 목에 이 목걸이가 걸려 있는 걸 상상했다.

젠장. 이쁘네.

대충 상상만 해도 기품 어린 그 외모에 이런 우아한 보석은 완벽한 한 쌍처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목걸이 길이는 조금 짧게.”

커다란 눈망울을 도록도록 굴리며 상상을 하던 아랑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목에 목걸이를 두르는 그의 행동에 목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 그래 걸어라. 걸어. 대충 눈으로 보는 것보다 사람한테 대보는 게 좋긴 하지.

그가 편하게 보라는 심정으로 목을 살짝 들어 길게 빼주는 아랑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삐죽거렸다. 나름 태연하려고 해도 심정을 완전히 숨길 수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줄은 이것보다 조금 더 굵은 것으로.”

아랑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목걸이 줄을 잡고 진지하게 말하는 카일과 그 옆에서 그가 하는 마을 메모하는 매니저를 곁눈질로 흘깃거리며 보았다.

네네. 공주님이 사슴처럼 영롱한 눈과 백조같이 우아하고 긴 목선을 가지셨더랬죠.

카일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무언가 살짝 엇나가는 듯 행동하는 아랑을 진지하게 내려다보았다. 어떤 착각을 하는지 알기에 딱히 수정해 줄 생각도 없었지만, 이런 행동은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불만을 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가는 목을 길게 빼고 그가 보기 편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게 문제였다.

닉의 마법으로 바뀐 보랏빛 눈동자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하고, 저와 마주치지 않는 눈동자는 이리저리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거기다 살짝 튀어나온 도톰하고 촉촉한 붉은 입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아랑. 입술 집어넣어.”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도록 바라면서 혼자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아랑은 이제 제 입술까지 단속하려는 카일의 말에 혀끝을 쏙 내밀어보았다. 내 입술이다. 안 집어넣으면 어쩔 건데.

“딱-”

정말 정확하게 나는 소리에 카일이 말하는 대로 수정사항을 적던 매니저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목걸이 줄의 굵기나 길이를 맞춰보던 커플은 사라지고 없었다.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체격 좋은 남자와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게 아련해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우아, 진짜…… 아!”

입에서 단발성 신음과 함께 이마를 문지르던 남성이 뒤로 주춤거리면서 물러났다.

“지금 그 조건에 맞는 목걸이 줄이 있습니까?”

정말 아픈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매장을 돌아다니는 남자를 보던 매니저는 태연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 있는데, 저 분……”

“괜찮습니다. 그럼 준비해 주시죠.”

아랑은 한 손으로 툭 튀어 올라와 열감이 있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무리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의 이마에 딱밤을 놓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거기다 소드 마스터라며? 그 손으로 사람도 쉽게 죽이면서 내 이마는…… 내 이마.

정말 머리통이 깨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느낀 아랑은 멀찍이 서서 카일을 노려보았다.

“왜! 왜 때려요!”

“그러게. 입술 집어넣으랬잖아.”

“아니 내 입술 내가 넣든 말든. 하여튼 때리는 건 아니죠.”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얌전히 있다가 이마를 얻어맞은 아랑의 입술을 처음보다 더 튀어나와 구시렁거렸다.

“또. 입술.”

짐짓 엄하게 느껴지는 그 말에 얼른 나와 있던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제 내 입술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인가?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쉰 아랑은 이마에 열감과 고통이 조금 사그라지자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매장 한쪽에 있는 의자에 몸을 틀고 앉았다. 말해서 뭣하리? 지금 이곳에서 아랑은 철저한 약자였다. 

“고객님. 그럼 각인은 어떻게 할까요? 원하시는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3일 정도 소요됩니다.”

“아뇨. 각인은 직접 하면 되니, 그냥 주시고. 거기 그것 좀 보여주시죠.”

“이건 마나를 사용하실 수 있는 마법사님이나 오러 사용이 가능하신 기사님들이 주로 이용하는……”

뭘 또 더 사는지 매니저와 카일의 대화가 길어지자, 아랑은 여전히 아린 이마를 손끝으로 살살 만졌다. 만질 때마다 짜릿한 것이 내일이면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내 입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는 널 배려해서 네가 다른 사람 장신구 살 때 모델도 되어 줬는데. 카일,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내가 너에게 뭘 먹일지 모르는 거다. 네 음식에만 소금을 잔뜩 넣어줄 거라고.

“설아랑.”

소파에 달랑 올라가 앉아 카일을 등지고 앉아있던 아랑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느릿하게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이리로.”

집에서 부르는 강아지 부릅니까?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아랑의 두 다리는 착실하게 카일의 옆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검은색. 은색.”

검은색과 은색의 두 종류의 커플링까지 꺼내 놓고 고르라는 그의 행동에 아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너랑 샬럿 공주님이랑 둘이 나눠 낄 반지를 내가 왜 골라? 거기다 아무 무늬도 보석도 박혀 있지 않은 말 그대로 심플한 링이었다.

“검은색이요.”

대충 생각해도 샬럿에겐 은색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아랑은 삐뚜름해진 마음에 반대로 골랐다.

“그럼 이건 은색으로 하죠.”

기껏 물어놓고 딱 반대로 주문하는 행태에 아랑의 입이 쩍 하니 벌어졌다. 지금 자신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검은색이요.”

아랑은 한 번 더 자신이 원하는 색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 은색.”

“아니, 물어봐서 내가 검은색이라고 대답했잖아요.”

“거짓말은 좋지 않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 훈육하듯 하는 카일의 말에 아랑은 그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 들어올 때부터 저조했던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난 분명 검은색이라고 말하는데, 왜 내가 은색을 좋아하고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제야 몸을 틀어 자신을 보는 초록 눈동자에 아랑은 슬쩍 눈동자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차마 저 눈을 보면서까지 거짓을 말할 순 없었다. 순간 카일의 한 손이 자신의 턱과 볼을 감쌌다.

“네 눈동자가 은색 반지를 보고 있었잖아. 그리고 지금 넌 내게 화가 났고.”

그래, 네가 갑자기 딱밤 때려서 진짜 화가 났다. 이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던 아랑은 딱히 눈을 둘 곳이 없어 아래로 내리깔았다.

“촉-”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화끈한 열감이 아직 남아있는 이마에 촉촉하고 시원한 무언가가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진 것은. 그리고 자신의 볼을 감싼 손이 움직였고, 이내 엄지로 느껴지는 것이 자신의 입술을 진득하게 문지르더니 볼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객님. 포장이 다 되었습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귓가에 파고드는 매니저의 말에 아랑은 멍하니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건들면 살짝 아리고 열감도 있었다.

잘 포장된 종이봉투를 들고 먼저 걸어가는 카일의 뒷모습에 아랑은 주춤거리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이마를 만지고 있던 손끝은 그의 손길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떨어진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입술 타령하더니, 내 입술이 그렇게 마음이 안 드나? 그런데 이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시키 또 안 씻은 손으로…… 드릅구로. 카일의 뒤따르던 아랑은 손등에 제 입술을 마구 비볐다.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라 걷던 아랑은 어느새 앤티크한 느낌이 가득한 카페의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앉아있었다. 침묵만 흐르는 둘 사이로 아기자기 화려한 모양의 다과가 놓이고, 그와 함께 따뜻한 차가 세팅되었다.

“빨갛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카일의 한마디였다. 그럼요. 그렇게 세게 때려놨는데, 빨갛게 부풀어 오르지 멀쩡할 거 같았나요? 

아랑은 대답이나 어떤 반응을 보이는 대신 작은 쿠키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나마 달콤한 것이 입 안으로 들어오자 꽁해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쿠키에 이어 마신 따스하고 부드러운 차에 아랑은 눈이 살짝 감겼다.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홀짝거리며 조금 더 마신 아랑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왼손을 다시 다과 접시로 뻗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하고.”

쿠키를 잡으려던 손이 카일의 손에 잡히자 그제야 지금껏 애써 무시하고 있던 카일에게 아랑의 시선이 닿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카일의 손끝이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자 어색함과 간지러움이 밀려왔다. 

“……”

손을 빼내려 하자 한 손으로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그 행태에 아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름 조절한 건데……”

변명 같은 말이 카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사과하는 거예요?”

“음.”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어물쩍 넘어가는 듯한 분위기와 함께 아랑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매장에서 산 은색 반지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애써 합리화시켜보려고 했지만, 아랑의 손가락을 만지던 카일의 손끝이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반지는 어느새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졌다.

“역시 은색이 잘 어울리네.”

반지가 끼워진 왼손 약지를 어루만지던 카일의 손길이 사라지고 지금껏 빼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손목을 잡고 있던 손도 사라졌다.

“이거…… 그러니까.”

이걸 왜 내 손에 이 자리에 끼웠냐는 말을 하기도 전 카일은 남은 반지 하나를 집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곳은 커플링이나 결혼반지를 다른 곳에 끼는 건가? 아니지. 애당초 카일과 자신 사이에는 커플 반지로 보이는 이런 것을 나눠 낄 만한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이제 마음껏 가고 싶은데 다 가도 돼.”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어버버 거리는 아랑은 짧은 자신의 반지에서 빛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짧게 반짝였는데, 다시 보았을 땐 원래의 은색으로 보여 그 빛은 마치 착각처럼 느껴졌다.

“이걸 왜 내가 이걸……”

얼른 정신을 차리고 끼워진 반지를 빼려 아랑은 반지를 손끝으로 잡았다.

“위치 추적.”

카일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다시 아랑이 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짧게 빛났다. 허망한 표정으로 또 잠시 잠깐 빛을 내고 사그라드는 반지를 보는 아랑의 입술이 아래위로 삐죽거렸다.

카일을 떠올리며 그가 자신을 걱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를 크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며 나타난 카일을 보는 순간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에게 들켜서 놀라서 빨리 뛴 것인지, 어떤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를 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란히 앉아서 눈앞에서 시연되는 각종 마법 조리기구들을 보고 그가 선뜻 나서서 제가 원하는 것을 권하고 결제까지 해줄 땐 그가 조금 아주 조금 멋있어 보였다.

자신의 손에 손깍지를 낄 때만 해도 간질간질한 마음이었는데, 그런 그가 보석 상점에서 떡하니 대놓고 다른 사람의 선물을 고를 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병 주고 약 주고.

그래놓고는 카페에서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약지에 반지까지 끼워주는 카일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배려하고 생각해 주는 것 같기도 한데, 한편으로 엿 먹이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상황이 이어졌다.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반지를 빼려던 손끝에 힘이 빠졌다.

“위치 추적?”

허탈한 단어가 아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뛰다가 멈추다를 반복한 심장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럼 나도 카일 위치 추적 되는 거예요?”

아랑의 시선이 카일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에 멈추었다.

“상대가 반지를 끼고 있다는 조건에서 마나나 오러를 주입하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지.”

덤덤한 카일의 대답에 아랑은 눈을 부라렸다. 결국 자신은 못 한다는 것이었다. 오러인가 뭐시긴가를 쓰는 카일이 저를 감시하려는 용도로 끼워 놓은 것이었다.

내가 도비도 아니고, 아무리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이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도비는 더러운 양말이라도 받으면 자유지만, 자신은 반지를 빼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살짝 힘이 빠졌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아랑은 이를 악물고 반지를 빼려고 했다.

“아…… 빼는 것도 마나나 오러를 주입해야.”

하얀 얼굴이 빨개지도록 노력하는 아랑의 손 위로 카일의 손이 겹쳐졌다. 뭐 이런 개나리 신발장 쌈 싸먹는 것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겁니까?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서 정식 고용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이전에도 말 한마디 툭 뱉어서 고용하더니 이젠 아예 노예 족쇄까지 채워 버렸다.

억울하고 분통하고 화나고, 이게 과연 로엔이 말하던 귀족들의 갑질인가 싶었다. 겨우 마법 식기 도구 몇 개 던져 주고는 자신을 완전한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빼려고 노력하던 것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 아랑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리고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아랑의 손을 덮고 있던 카일의 손등으로 투두둑 떨어졌다.

“……”

그건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들썩이지도 않았고, 흐느끼는 소리도 없었지만 카일의 손등은 뜨거운 눈물로 덮이고 있었다.

“아랑?”

카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작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덮고 있는 손에서 자신의 손을 치워야 할지 우는 걸 달래줘야 할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늘 빠르게 돌아가던 그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처럼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너, 너무 하잖아.”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표정조차 살필 수 없는 카일은 숨을 죽인 채, 작은 머리통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무슨 이유로 갑자기 아랑이 우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사람 애간장 다 녹여 놓고 한가롭게 쇼핑 중인 아랑은 보는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펄펄 끓어오르던 피가 한순간에 진정되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눈에 빛을 내며 조리도구를 보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귀여웠다. 설명에 따라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보는 순간 카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카일이 제 감정을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말 그대로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사람이나 몬스터를 고통 없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죽이는 법은 수천 가지를 알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감정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들을 사주었다. 가늘고 한들거리는 손가락도 제 손가락을 끼워보고, 머뭇거리는 아랑은 껴안았을 때 카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제 욕심이겠지만, 이 아이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직 세계에 대해 동경과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인데, 자신에게 어떠한 특별한 감정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제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제 것을 사는 것도 모르고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미는 것을 보는 순간, 옆에 상점 매니저가 없었다면 욕심껏 탐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딱밤을 주었는데, 정말 최대한 힘 빼고 조심스럽게 한 것이 그 고운 이마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닉에게 말해 목걸이에 원하는 마법을 넣을 생각이던 그의 눈에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반지가 들어온 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것이라면 아랑이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게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조금이나마 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늘고 하얀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지고, 스스로 반지를 끼면서 카일은 허둥거리는 아랑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킬 만한 핑계를 가져와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랑은 당장 이 자리에서 반지를 빼버릴 테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위치 추적마법이 걸려 있는 걸 말한 것이었다.

“왜……”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고, 울어서 발개진 눈가와 코끝이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또 또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도비도 아니고!”

아랑은 카일의 손을 치워내고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아무리 내가 천민 급이고 귀족들이 막 다룰 수 있는 인간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아니야. 

사람 애간장 녹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 작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모습에 카일은 얼른 아랑의 두 주먹을 감싸 잡았다.

“난 도비 아니라고요. 이거 당장 빼! 빼라고!”

지금껏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던 아랑이 들어본 적 없는 언어로 외치는 말에 카일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정확히 들리는 단어는 ‘도비’라는 것뿐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어떻게 대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랑. 설아랑.”

처음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엉엉 소리 내면서 우는 행동에 카일은 한 손으로 아랑의 젖은 볼을 감쌌다.

“도대체 도비가 뭐길래……”

“도비는…… 자유예요.”

카일의 손을 치워낸 아랑은 자신의 손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순간 폭발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난리 치고 보니, 자신들을 흘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이 한 일을 감당하지 못한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그대로 카페를 달려 나갔고 카일은 멋쩍은 얼굴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저 사람. 라이엔부르크 영주 맞지? 그 소드 마스터. 나 전에 왕궁 무도회에서 본 거 같아.”

“진짜? 그럼 방금 그 사람이 소드 마스터에 백작 작위를 갖고 있는 라이엔부르크 영주를 찼다고?”

“에이. 설마 부끄러워서 도망간 거겠지.”

“그런데 도비는 자유? 뭐? 그건 무슨 말이지?”

그들에게 집중하느라 조용했던 카페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날 수도 라이나엔 엄청난 소문이 퍼져나갔다. 비밀에 싸인 최고의 신랑감으로 불리는 라이엔부르크의 영주가 카페에서 멋들어지게 차였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주방용품 상점에서 다정하게 고가의 마법 조리도구들을 사고, 손깍지를 낀 채 메인 거리에서 끌어안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석 상점에서 고가의 목걸이와 커플링을 샀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마지막으로 근처 카페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는 건 이미 많은 사람이 보았다고 증언했다.

영주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연인에게 반지를 끼워줬고, 연인은 무척 행복해 감동에 젖어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로맨틱한 고백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비는…… 자유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연인은 뛰쳐나가며 그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람들의 주장은 둘로 나뉘어졌다. 그가 보기 좋게 차였다는 것과 그의 연인이 공개 고백에 부끄러워 자리를 피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도비는 자유라는 외침은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승낙 같은 말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카일과 아랑이 샀다는 마법 조리도구는 순식간에 품절이 되었고, 위치 추적기능이 있는 마법 반지는 커플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거기다 으레 그렇듯 발 없는 소문은 천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그 소문은 영주의 피앙세라 공공연히 알려진 샬럿의 귀에 닿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뛰어가던 아랑은 숨이 가빠 발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거리 한가운데 멈춰선 채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은색의 가느다란 반지. 자신을 강제로 이곳에 묶어버린 원흉을 보는 눈빛은 한없이 우울했다.

돌아가면 닉에게 빼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지, 아니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카일에게 빼달라고 다시 요구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와중에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의 손길이 떠오르자, 아랑은 자신의 손으로 그의 손길이 머물렀던 뺨을 툭 쳤다.

“재수 없어.”

그래. 자고로 사람은 얼굴값 한다고 했다. 거기다 그는 지위도 있었다. 그와 잠시 잠깐 있었지만 많은 사람의 시선이 카일에게 머물렀다. 스쳐 지나치다가도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이건 절대 그를 좋아한다거나 이성적인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서 외롭고 쓸쓸한 차에 자신에게 머물 곳을 내어주고 신경 써 준 이에 저도 모르게 의지해서 생긴 감정일 것이었다.

“좋아. 카일 네가 이렇게 나온다고, 내가 순순히 도비가 되어줄 줄 알고? 눈 딱 감고 1년이라고, 1년. 1년 안에 네가 대마법사님을 찾아주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떠나겠어. 이게 위치 추적이 있다고 했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냥 내 위치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는 거면, 뭐. 억울하면 지가 따라오겠지.”

혼자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제멋대로 나대던 심장이 차분해지면서 아랑의 기분도 점차 조용히 가라앉았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조금만 생각을 바꿔서 하자 어둠이 가득했던 아랑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제가 길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는 걸 안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일방적으로 카일에게 화를 내고 오긴 했지만, 아랑이 돌아갈 곳은 아덴 성뿐이었다. 그곳에 은돌이와 하양이는 물론, 아랑의 모든 것이 있었다.

“아, 모르겠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설마 나 버리고 가겠어?”

길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은 아랑은 분주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이 손을 잡고 바삐 움직이는 엄마, 환한 미소를 짓고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연인,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아이들이 몰려 지나갔다.

얼마나 멍하니 지나치는 사람을 보고 있었을까? 아랑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슬쩍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 순간 자신의 앞으로 먹음직스러운 알록달록한 색상의 음식이 내밀어졌다.

“……”

음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아랑은 자신이 잘 아는 얼굴이 보이자 말없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똑같은 것을 들고 있는 카일을 흘기고는 아랑의 붉은 혀가 쏙 나왔다. 

혀끝에 닿는 그 촉감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리고 더 느끼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아랑은 한 번 더 혀를 가져다 대었다. 무더운 날이면 아랑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울부짖었던 아이스크림과의 재회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둘은 평행선처럼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보았고,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기분은?”

역시나 먼저 침묵을 깬 건 카일이었다.

“나빠요.”

아랑은 순식간에 사라진 아이스크림이 아쉬워 짭짭거리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 반지는 못 빼줘, 아랑.”

단호한 카일의 목소리에 아랑은 자그마한 주먹을 들어올렸다. 옆에 앉은 카일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그 주먹이 제법 매섭게 내려앉으며, 큰소리를 냈다.

“아오. 씨. 뭔 사람이 이래.”

무슨 고무공을 친 것도 아니고, 그를 때림과 동시에 튕겨 난 손이 아파 아랑은 허공에 손을 털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카일의 얼굴엔 미묘한 미안함이 깃들었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아랑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도비? 그게 진짜 뭐길래……”

“그게 궁금해요?”

아랑은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뾰로통한 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말을 툭 내뱉었다.

“그럼 도비가 뭔지 가르쳐 줄 테니까, 나도 그거 위치 추적 할 수 있게 해 줘요.”

카일은 아랑의 제안에 여전히 그의 손에 잘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았다. 좀 전에 말했지만, 마나나 오러를 사용할 수 있어야 위치 추적이 가능했다. 그러기에 마나를 다룰 줄도, 오러를 사용할 줄도 모르는 아랑은 추적 기능을 이용할 수 없었다.

“아, 천하의 소드 마스터 백작님도 못하는 게 있구나. 도비가 얼마나 엄청난 건지 알면, 진짜 깜짝 놀랄 텐데…… 가르쳐 드리고 싶어도 못 가르쳐 드리는구나.”

대답이 없자, 아랑은 일부러 말끝을 살짝 늘이면서 틀고 있던 몸을 슬쩍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카일만 자신을 추적하는 것이 억울하니, 자신도 그를 추적하고 싶었다. 거기다 제대로 된 방법만 알면 언제든 제가 원할 때 반지를 끼고 빼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랑. 마나나 오러를 다루려면, 마법을 배우거나 기사수련을 통해……”

카일은 그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그리고 가장 쉽게 설명하려 했다. 그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아랑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내었다.

“기사만 되면 오러를 쓸 수 있고, 이 반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거죠?”

방금까지 기죽고 삐져 있던 아랑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더 바짝 몸을 붙이는 그 행동에 카일은 은근슬쩍 뒤로 물러났다.

“나도 칼 휙휙하고, 칼에서 불이 번쩍번쩍하고 그런 거……”

마법을 배우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아랑이 마법은 배울 수 없었다. 반면 기사수련을 통해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다 보면 기를 느끼고 오러를 다룰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아랑의 기본 골격이나 뼈대와 그것과 아주 멀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아마 네가 그렇게 되기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하지만, 꿈에 부푼 밝은 얼굴에 냉혹한 현실을 말할 수 없던 카일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뭐해요? 안 일어나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랑은 여전히 앉아있는 카일을 재촉했다.

“아랑?”

“어서 돌아가야죠. 그래서 기사수련도 하고, 그래야지. 나도 오러 쓰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오러요. 진짜 막 10년씩 수련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니죠? 내가 아는 어설픈 지식으로는 디게 어려운 거던데요.”

마음이 급한지 아예 자신의 손까지 잡아끌며, 일으켜 세우려는 아랑의 행동에 카일은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지금 기사단에 있는 단원 중 1/4는 오러를 쓰지 못한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짜 도비가……”

“도비는 제가 오러를 쓰게 되면, 그날 말해 줄게요.”

곱게 눈웃음치며 대답하는 아랑에게 카일은 더는 도비에 관해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평생 도비가 무엇인지 자신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카일의 손을 먼저 잡고 앞장서서 걷는 아랑을 따라 걷는 카일의 입꼬리는 연신 실룩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랑의 기분이 다 풀린 것이었다. 

“설아랑.”

“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맑고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 있어.”

진심을 담아 카일은 말을 꺼냈다.

“응? 뭐라고요?”

아랑은 중요한 이야기를 확실히 듣는 순간 홧홧해진 감정에 애써 못 들은 척 조금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작은 목소리쯤은 흘려들을 수 있지 않은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워프센터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꼭 맞잡고 있던 손을 슬쩍 당기는 카일 쪽으로 아랑은 쉽게 끌려갔다.

“내가 여기 길을 아는 것도 아니고.”

구시렁거리며 어느새 카일과 발맞춰 걷는 아랑의 두 볼은 어느 때보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한스는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아랑에게 따뜻한 차가 든 머그잔을 내밀었다.

“없어요. 할배 나 걱정 많이 했구나. 천하의 설아랑이 설마 무슨 일 있었겠어요. 그리고 카일이 나 데리러 와줬으니까 괜찮아요.”

아랑은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고는 전해지는 온기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저 이곳의 객식구이려니 했다. 그랬기에 모두 자신을 늘 출퇴근하는 다른 하인들처럼 생각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워프 게이트에서 눈을 뜬 순간 본 사람들의 표정은 아랑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겨우 하루인데 더 늙어 보이는 한스와 얼굴 가득 근심을 담고 있는 제임스. 거기에 같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던 사람들까지 보였던 것이었다.

아마 카일이 어서 가서 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처럼 손을 잡고 부둥켜안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수도는 어찌 가셨습니까?”

“아! 그거 제가 마차를 잘못 탔는데, 그 마차가 수도로 가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뭐 돌아가 달라고도 못 하고 간 거죠.”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아랑의 머리를 수건으로 닦던 한스의 시선이 그의 왼손에 멈추었다.

“아오. 이런 건 제가 한다니까요. 제가 혼자 머리도 못 말릴 거 같아요?”

난로 앞 푹신한 의자에 앉은 아랑은 제 머리를 닦는 그를 만류하려 왼손을 들어 허공을 휘적거렸다. 머리 닦는 걸 방해하면 하지 않겠지.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아! 맞다. 내일 기사님들 훈련 많으실까요? 제가 좀 도움을 부탁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랑은 보기 좋게 열기를 내보내며 타오르는 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미 장 봐 놓은 것들이 떠오른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진짜 그것들을 다 샀을까?

이미 산 많은 음식 재료를 버릴 수 없었다. 상하기 전에 해치우려면 내일 당장 조리를 시작해야 했다.

“그건 기사단장인 제임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한스의 시선은 여전히 아랑의 왼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이곳을 떠날 때까지는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떡하니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있었다.

그리고 눈썰미 좋은 한스는 이미 카일의 왼손 약지에서도 같은 반지가 있는 것을 떠올렸다. 두 분 모두 이곳을 떠날 때까지 없던 것을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에 나타났던 그들의 자세가 떠올랐다.

꼭 마주 안고 서 있던 모습. 아랑은 아예 카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옷깃을 꼭 쥐고 있었다. 반면 카일은 한 팔은 아랑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손으로 그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진척된 것이 분명했다. 토벌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 낯선 아랑을 시동이라고 데리고 나타날 때부터 한스는 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반지를 나눠 꼈음에도 오늘 카일은 자신에게 어떠한 언질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런데 할배도 혹시 마나나 오러 쓸 수 있어요?”

혼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한스는 아랑의 말에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이거요. 카일이 노예 계약하면서 준 거거든요. 그런데 마나나 오러가 없으면 빼지도 못한대요. 진짜 이런 게 어딨어? 거기다 위치 추적까지 된다나? 하- 나참. 내가 어디 도망갈까 봐? 아니 내가 뭘 훔쳐 간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리고 도망갈 이유가 어딨어요? 도망가면 추노라도 찍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한스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일반적으로 왼손 약지는 연인과 사랑을 약속하는 증표로 반지를 나눠 끼는 곳이었다. 그런데 노예계약이라니? 오랜 시간 전쟁터를 지낸 카일은 노예를 싫어했다.

그랬기에 이곳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노예로 묶인 것이 아닌 정당한 계약으로 이루어져 합리적인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카일이 노예계약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가 노예에게 비싼 돈까지 들이며 위치 추적을 한단 말인가? 일반적인 반지도 아니고 그런 기능까지 있다면 그 가격은 상상 이상일 것이었다.

“영주님께서 그리 말하셨습니까?”

“뭐요? 노예요?”

“네.”

“아니 그럼 이게 노예한테 족쇄 채우는 거랑 뭐가 달라요? 내가 어디서 뭘 하려는지 다 알려고 도망 못 가게 하려고 위치 추적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말을 하시진 않으셨나요?”

아랑은 진지하게 묻는 한스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해? 딱밤 맞고 입술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 타령도 좀 들었다. 거기다 뜬금없이 이거 끼워놓고 “위치 추적” 한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안 했는데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중인지 한참 있다 나온 아랑의 대답에 한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랑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문제의 영주님은 딱히 아랑에게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설명은 모두 빼고 멋대로 반지를 끼워준 것 같았다.

아랑이 두 번이나 사라져서 속을 끓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위치 추적이 들어있는 반지부터 끼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영주님께 왜 그랬는지 직접 물어보시죠.”

“물어보면 대답해 줄까요?”

아랑은 왼팔을 쭉 내밀고는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어보신다면 답을 알게 되겠지요.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하고 잠자리 드시죠.”

한스가 준 따뜻한 차를 다 마신 아랑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매번 잠자리 봐줘서 감사합니다.”

처음엔 한스가 자신의 잠자리를 봐주고 아침마다 깨워주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온갖 만류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일이라며 하는 한스를 말리는 것을 포기한 아랑은 늘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말로 표현했다.

“좋은 꿈 꾸십시오.”

나갈 때까지도 부드러운 말을 해 주는 한스에게 아랑은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스가 나가고 혼자 남겨지자 아랑은 그제야 입고 있던 샤워가운 끈을 풀며 방 한쪽에 있는 서랍장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모든 생활을 도와주는 것에 익숙한 이곳 사람들이야 제가 부리는 하인 앞에서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고 모든 일을 했다. 하지만 아랑에겐 그런 일들은 너무나 불편했다. 결국, 한스가 나갈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그가 나가면 속옷과 상의 하나를 꺼내 입었다.

“으아, 춥다.”

벽난로에서 따스한 열기가 나오고 있지만, 넓은 방을 모두 따듯하게 유지할 수는 없었다.

호들갑을 떨며 이불속으로 파고든 아랑은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맸다.

“일단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사님들에게 배추랑 무 좀 다듬어 달라고 하고. 여기 소금은 어떤가 모르겠네.”

머릿속으로 내일부터 시작할 어마어마한 일을 생각하던 아랑의 두 눈이 곱게 내려앉았다.

 * * *

잠들었던 카일은 미세하게 느껴지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을 해할 사람이 없는 아덴 성의 침실에서도 그의 예민한 감각은 늘 깨어있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배인 버릇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눈을 뜸과 동시에 침대 옆 테이블 뒤쪽에 있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둠 속에 비틀거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전혀 조심성 없이 자신의 침대로 곧장 돌진했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는 행동에 카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지점에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보는 카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와 함께 단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에 힘이 풀리며 검은 그대로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당황한 카일과 다르게 그의 침대를 파고드는 사람의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와 태연하게 눕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일의 무게로 인해 생긴 기울기를 따라 또르르 굴러와 그의 옆에 편하게 자리 잡았다.

“아랑?”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곱게 감긴 눈을 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일의 왼팔을 베개 삼아 베고, 그의 가슴과 허벅지 위에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턱하니 올렸다.

“……”

잠을 자다 누군가의 침입으로 팽팽히 섰던 신경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카일은 편하게 누운 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왼쪽 팔을 베고 자신의 옆구리에 꼭 붙어 이내 깊은 잠에 빠진 아랑과 다르게 옅게나마 스며있던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렸다.

어색하게 펼치고 있던 왼팔을 움직여 아랑의 어깨를 감싸며 조금 더 끌어당겨 보았다. 

“무…… 파란 고……추…… 시러……”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색색거리는 고운 숨소리가 카일의 귓가에 맴돌았다.

카일에겐 불면의 밤이 아랑에겐 숙면의 밤이 이어졌다.

이른 아침 한스와 평소와 똑같이 따뜻한 꿀 차를 준비했다. 단 하루 차이지만 성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제 아침 무겁고 어둡게 축 늘어진 듯한 분위기가 경쾌하고 밝게 바뀌어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출근한 하인들은 밝은 얼굴로 한스에게 인사를 건넸고, 한스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을 맞은 것이었다. 단지 아랑이 있고 없고 차이지만 그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아랑과 약속한 대로 두 번의 노크를 한 한스를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처음 그의 아침과 저녁을 챙겨준다고 했을 때 아랑이 부탁한 것이었다. 분명히 자신이 깨지 않고 자고 있겠지만, 아침에 깨우러 올 때면 노크 2번 후 약 5초 정도 후 들어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속으로 5까지 센 한스는 문을 열고 들어가 따뜻한 꿀차가 올려진 트레이를 창가 쪽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환한 햇살을 가리고 있는 커튼부터 활짝 걷었다. 

창 너머로 온전히 단풍색으로 물든 정원이 펼쳐지고, 냉기를 품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알록달록한 단풍잎들이 비처럼 날리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한스를 몸을 돌려 침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로 다가갔다. 지난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랑을 위해 다른 곳보다 넉넉하게 쌓아둔 장작은 여전히 따스한 온기를 내며 잘 타고 있었다.

불씨가 많이 죽었다면 장작을 더 넣었겠지만, 이 정도면 아랑이 일어나고 나간 후 재를 정리하고 다시 불을 피워도 될 것 같았다.

“도련님.”

아침이면 아랑의 침실에서 하는 기본적인 절차가 끝나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불룩한 이불 옆에 선 한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자는 아랑이었기에 한스는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두 번 정도 이름을 부르면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툼한 이불 위로 연갈색 머리가 쏙 나왔다. 잠시 기다리던 한스는 이불 끝자락을 잡고 살짝 내려다보았다.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자, 평정심을 잃은 한스의 손이 거칠게 이불을 젖혔다.

빈 침대 위를 손으로 짚은 한스는 침구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에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다가 사라졌다기보다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좀처럼 서두르거나 뛰는 일이 없는 한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군가의 아침을 챙기는 건 한스의 일이 아니었다. 아덴 성 전체를 관리하는 일이었지만, 아랑의 검은 눈동자와 그걸 가리기 위해 환을 먹는다는 건 아랑, 카일, 한스 셋의 비밀이었다.

그랬기에 혹시나 환을 먹는 것을 챙길 겸, 닉의 도움으로 색상 변경은 했지만 혹여나 그것이 풀렸을 것을 대비해 한스가 제일 먼저 아랑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아랑의 아침까지 챙기게 되었는데, 불과 이틀 전 유령처럼 사라졌던 아랑이었기에 한스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랑의 방을 나간 한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갈 곳을 잃어 복도를 방황했다. 당장 카일을 찾아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서재로 향하던 한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 아침엔 카일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덴 성에서 지낼 때 카일의 일과는 규칙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잠이 적은 카일이었기에 해가 뜨기 전 일어나 운동 겸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성 전체를 가볍게 뛰며 둘러보았다. 그 후, 간단히 씻고 아침 식사 전까지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든 한스는 일찍 출근하는 하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문을 열었다. 요즘처럼 밤이 길어졌을 때는 성안을 돌며 밤새 불이 꺼진 곳을 확인하고 꺼져 있는 곳엔 불을 밝히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뛰고 있는 카일을 보거나, 성안 복도에서라도 그를 만났던 것이었다.

발걸음을 멈췄던 한스는 서재로 향하던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아랑의 침실로 향했다. 아랑의 방에 도착한 한스의 눈은 늘 굳게 잠겨 있던 방의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불안함에 빠르게 뛰고 있던 그의 심장도 안정을 찾았다.

“크흠.”

조금 열린 문을 통해 카일의 방으로 들어간 한스는 문 옆에 선 채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리 됐나?”

한스의 시선은 침대가 아닌 침대 발치에 있는 벽난로로 향했다. 아랑의 방과 달리 추위를 그리 타지 않는 카일의 방 장작은 이제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불을 조금 더 피우겠습니다.”

벽난로 앞으로 간 한스는 몸을 굽혀 장작을 더 쌓고 옆에 있는 부지깽이를 들어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뒤적거렸다.

“아랑.”

이불이 들썩이는 소리와 카일이 아랑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한스의 귀가 움찔거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아랑이 이곳에 있는 걸 확신한 한스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랑은 품 안에 꼭 안고 있던 따뜻한 난로가 사라지고 찬기가 느껴지자 팔을 더 뻗었다. 밤새 뜨끈한 걸 끌어안고 오랜만에 추위를 느끼지 않고 숙면을 취한 것이었다.

“아니…….”

눈을 감은 채 자신을 향해 팔을 뻗으며, 웅얼거리는 아랑을 보던 카일은 손을 내려 제멋대로 삐죽거리며 솟아난 아랑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오늘 바쁘다고 한 것 같은데.”

“으응?”

허공을 휘적거리던 팔이 침대 매트 위로 떨어지고, 감겨있던 눈이 느리게 꿈벅거리는 동안에도 카일의 손은 아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어……. 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랑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휑하니 드러난 상체에 느껴지는 찬기에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안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아랑은 한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쓸었다.

“나. 왜 여기 있어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자느라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아랑은 길게 하품을 했다. 침대 옆에 가운을 입고 서 있는 카일과 침대 아래 있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는 한스가 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은 카일의 방이었다.

“내가 이리 왔어요?”

“적어도 내가 데리고 오진 않았지.”

아마도 자다가 추워서 이리 온 것 같은데, 아랑은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놓고 침대에서 기어나갔다. 그리고 침대 옆에 바로 서서는 공손히 카일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잘 자고 갑니다.”

예상치 못한 아랑의 말에 그와 카일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려 그쪽으로는 보지 않으려던 한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고개를 돌린 한스의 눈에 커다란 면 상의 하나만 입고 얄쌍한 다리를 훤히 내놓은 채 서 있는 아랑이 보였다. 그리고 아랑은 카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터덜거리며 이어져 있는 방문을 통해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불은 더 피우지 않아도 될 거 같군.”

아랑이 나가고 남겨진 자들을 감싼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카일의 머뭇거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스는 말없이 뒤적거리고 있던 부지깽이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랑이 떠난 주인의 침실이 갑자기 넓고 초라해 보였음은 속으로 몰래 삼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랑은 창가 옆 테이블에 놓인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평소보다 식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난로 앞 의자에 앉은 아랑은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눈을 껌벅거렸다.

“모처럼 따뜻하니 푹 잤네. 카일에게 진지하게 물어볼까? 겨울 동안만 같이 자면 안 되냐고.”

카일이 들으면 기감 할 말은 한 아랑은 활활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오늘 김장 잘할 수 있을까? 아랑의 머릿속에는 일 년 농사라 일컬을 수 있는 김장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 * *

“자. 그럼 이제 설명할게요.”

은색 갑옷을 갖춰 입은 정예기사단을 내려다보며 아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잘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시켜도 되는 건가?

“일단 그 갑옷부터 좀 벗어주시고요. 칼을 잘 쓰시는 분들은 오른쪽으로, 힘이 세시거나 다른 걸 잘하시는 분들은 왼쪽으로 자리 이동 부탁드립니다.”

아랑은 옆에 서 있는 기사단장 제임스 눈치를 슬쩍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행동에 아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거 너무 굵어요. 가로, 세로, 높이 0.5cm, 길이는 5cm 정도로 부탁드립니다. 배추 속 버무릴 건데 가늘수록 좋아요.”

잠시 후, 여러 팀으로 나뉜 기사들 옆을 지나가는 아랑의 입에서 엄격한 기준이 흘러나왔다. 평생 칼을 들고 수련하고, 사나운 몬스터를 단칼에 베어내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식칼을 들고 무를 빠르게 썰고 있었다.

“후…… 내가 이러려고.”

산처럼 쌓여있는 뽀얀 무를 흘깃 본 한 기사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고, 여기저기서 긴 한숨이 이어졌다.

바로 그 옆으로는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기사들이 있었다. 황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우락부락한 팔 근육을 자랑하는 기사들이 배추를 네 쪽으로 잘랐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기사들은 그 배추에 소금을 쳤다.

마지막으로 정예기사가 되지 못한 수습 기사들은 막 소금을 먹은 배추들을 날라 한곳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아니 이걸 왜?”

아랑은 황당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닉의 시선에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이것만큼은 안 되는 것인가? 일부러 젓갈 담기 좋은 잔 새우들을 잔뜩 산 것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대답해 주세요. 지금 아니면 못 하거든요. 원래는 이 새우들을 소금에 절이고 실온보관기준으로 3~4일 정도 숙성시켜야 하거든요. 그리고 냉장고에서 더 숙성해도 되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이거 지금 조금에 절이면 딱 3일 정도 시간 빨리 가게 해서 숙성시켜줄 수 있어요?”

아랑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닉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시간 마법을 걸어 달리는 건가?

“아! 하지 마. 하지 마. 무슨 마법사가 이해력이 이렇게 달려서는. 여기는 숙성해서 먹는 음식 없어요? 있잖아. 치즈 같은 거! 오래 묵혀도 되는 거. 김장할 때도 젓갈이 생명인데, 뛰어난 마법사라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다 구라였어.”

처음에 이 해산물들이 왔을 때, 카일이 보관마법을 걸라고 했을 때만 해도 큰 불만이 없던 닉이었다. 하지만 20년 넘게 틀어박혀서 연구하고 연습해서 쌓은 커리어를 겨우 새우 절이고 삭히는 것에 써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하면 될 거 아냐. 못할 게 뭐 있어.”

자존심에 오기로 대답한 닉은 곧바로 깊은 후회를 했다. 겨우 음식 재료 삭히는 것에 자신의 마나가 부족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닉. 정말 천재 마법사예요. 어쩜 이렇게 잘 삭혔지? 그럼 하는 김에 이거 색깔도 바꿔 주세요. 눈동자 색도 바꾸는데 이건 껌이죠?”

겨우 마나를 통제하며 아랑이 시킨 일을 끝낸 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음으로 데리고 간 곳에는 파란색 고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파란 김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으니까, 이 고추들 다 빨간색으로 태양초처럼 불타오를 것 같은 이쁜 빨간색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랑은 기진맥진해 의자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는 닉을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고는 앞에 쌓인 고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닉 덕분에 파란 고추가 빨간 고추로 변하자, 거기다 아랑은 이어 바짝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잘 마른 빨간 고추가 눈앞에 쌓여있었다. 문제는 이걸 다 빻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돌아!”

식품 창고에서 나온 아랑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큰 소리로 은돌을 불렀다. 아침부터 식품 창고에 있던 음식 재료들을 넓은 연무장으로 옮긴다고 고생한 은돌이 저 멀리서 수레를 끈 채 터덜거리며 걸어왔다.

“이거 실어 줄 테니까, 연무장으로 또 옮겨.”

은돌이 도착하자마자 옆에 있던 부엌일 전담 하인들이 말린 고추를 싣는 것을 본 아랑은 급히 2층 서재로 향했다. 대대적으로 김장을 하려다 보니 감독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카일! 카일. 여기 있어요?”

모두 아랑이 만드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를 하는 기사들과 달리 카일은 코빼기도 안 보인 것이었다. 평소보다 부쩍 피곤해 보이는 카일의 얼굴을 보면서도 아랑은 그에게 휴식을 줄 수 없었다. 이 많은 사람이 고생하는데 영주로서 그도 조금은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랑과 함께 연무장으로 온 카일을 보는 기사들의 눈초리엔 원망이 가득했다. 그냥 처음엔 부엌일 조금 돕는다고 한 것 같은데, 분명 끝날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일에 지쳐가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한다며 몇 명의 기사를 데리고 외출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며 기사들의 칼놀림이 현저히 늦어졌다.

“지금 나가셔서 해 지기 전에 멧돼지 15마리만 잡아다 주세요. 음식으로 먹을 거니까, 상처 많이 나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엄마 멧돼지, 아기 멧돼지 안돼요. 아빠 멧돼지도 곤란하니까 늙은 돼지들로 알겠죠?”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뒤에 따라붙는 아랑의 조건에 기사들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하고 있던 일에 집중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 더군다나 토벌까지 끝내고 온 산에 올라가서 멧돼지를 한두 마리도 아니고 15마리를 잡아 오라고? 거기다 거기 달린 조건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잡아 오세요!”

밝은 목소리로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는 아랑을 보던 기사들은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한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칼질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차라리 단속을 헤매며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이 훨씬 편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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