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10/15)

10.

“아, 힘들다.”

아랑은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여기저기 쌓여있는 김장 재료들을 둘러보았다. 김치 속으로 들어갈 채소들 손질도 끝났고. 배추 절이는 일도 끝난 것이었다. 문제는 은돌이 끌고 온 수레에 들어있는 말린 고추들이었다.

“훌쩍……”

“킁……”

“팽-.”

넓은 연무장은 이상한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입에 커다란 식빵을 하나씩 문 기사들은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매운 음식 재료를 만질 때 식빵을 물고 있으면 매운 것이 덜하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아랑이 물려 놓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넓은 공간에서 해야 덜 매울 것 같아 단체로 고추 좀 빻으려고 한 건데, 맷돌이 없는 이곳에서 아랑이 선택한 건 절구였다.

조를 나눈 기사들이 절구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번갈아 찧을 때마다 고추는 곱게 빻아졌지만, 그로 인해 고춧가루가 풀풀 날리는 건 방법이 없었다. 

닉에게 마법으로 부탁하려 했지만, 오전에 새우 삭히고, 고추 색 바꾸는 것에 마나를 다 쓴 닉은 내일까지 쉬어야 한다는 말만 하고 뻗어버렸다.

“킁. 이거. 좀만 더 곱게……”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아랑은 흐르는 코를 풀며 고추를 빻는 기사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너도 울고, 나도 울고, 한바탕 울음의 시간이 아덴 성을 휩쓸고 지나갔다.

통곡의 시간이 끝나고 원하는 만큼 곱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빻아진 고춧가루까지 날리지 않게 포대에 담게 한 아랑의 시선은 붉은 노을에 닿아있었다. 

아랑의 엄마는 없어도 늘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랬기에 10살이 넘은 이후 그는 매년 엄마와 함께 불우한 이웃을 위해 김장을 하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하면서 힘들다고 투덜거렸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그리고 내일도 새벽 일찍 시작해야 하니까, 오늘 집에 돌아가시면 무조건 푹 쉬세요.”

갑자기 앓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는 사람들을 보며 아랑은 손끝으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힘들어하는 그들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속으로 떠올렸다.

오늘 김장 재료 준비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일은 푹 절인 배추를 세 번 정도 물에 씻고 물기를 빼야 했다. 한 팀이 그걸 할 동안 다른 팀은 오늘 준비한 재료를 고춧가루와 닉이 담은 새우젓, 풀죽 등을 넣고 버무려야 했다.

마지막은 다 같이 사이좋게 둘러앉아, 절인 배추에 속을 채워서 보관인데…… 아! 땅도 파야하는구나. 

남은 일을 떠올리던 아랑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다들 돌아가고 나면, 성을 둘러보면서 김치를 묻을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김치 묻는 일까지 끝나면, 오늘 카일이 잡아 올 멧돼지로 수육도 하고, 통돼지 바비큐까지 할 생각에 아랑의 입꼬리가 살랑살랑 올라갔다.

“한스. 술 좀 넉넉히 사 주세요. 내일 저녁에 다 같이 먹어야 하니. 충분히 많이요.”

온종일 분주한 아랑을 따라다니던 한스는 그가 하는 엄청난 일을 말리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른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아랑은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어제는 멋모르고 모였지만 그들이 하는 노동이 보통일이 아닌 것을 안 그들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던 것이었다.

“오늘 하루만 더 고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게 일이 고되긴 하지만 끝내놓고 막 버무린 아삭아삭한 김치에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수육의 맛을 몰라서 그런 것이기에 아랑은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양해를 구한 아랑은 순식간에 일을 분담시켰다.

한쪽에서 튼튼한 기사들이 온종일 소금에 푹 절여놓은 배추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배추를 헹구는 팀이 셋. 마지막으로 배추에 물기를 빼는 작업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역시 김장 날은 좀 추워야 맛이지.

아랑은 열심히 배추를 씻는 팀을 등지고는 다른 팀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열심히 해야겠죠?”

활기차게 말하는 아랑은 보는 사람들의 눈빛엔 이미 불신이 가득했다. 늘 특이하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주고 살가운 아랑이지만 이건 그들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노동이었다.

각종 훈련으로 단련되어 무거운 갑옷을 입고 산을 뛰어다니며 몬스터를 사냥하던 기사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두 손 크기에 맞게 변하는 마법 장갑을 끼고 굳건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에 아랑은 작게 웃어버렸다. 우락부락한 기사님들이 앞치마에 고무장갑이라니.

이내 굳건한 표정의 기사들은 어제 미리 준비해놓은 배추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닉이 만들어 놓은 새우젓에 이제 붉은색으로 변한 고춧가루, 한 김 식힌 풀죽까지 들어가자 아랑이 원하는 색이 나왔다.

“으…… 이 맛이지.”

조물조물 잘 버무려진 배추 속을 집어 먹은 아랑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좀 더 매콤해도 될 것 같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과 같이 먹기엔 이 정도가 딱이었다.

“이제 다 같이 파티를 즐겨봅시다!”

분명 아랑은 파티라고 말했지만, 다들 무리 지어 앉은 기사들의 입에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장의 절정이자 제일 지긋지긋하고, 허리가 아프며, 다리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배추 속 채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여긴 잘되고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불만이 가득 솟아오르자, 아랑은 얼른 연무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이게……”

돌아온 건 제임스의 흐릿한 말이었다.

멧돼지를 잡으러 나간 팀은 지난밤 늦게야 14마리를 잡아 돌아왔고, 1마리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아랑에게 잔소리를 좀 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들에게 주어진 일은 잡아 온 멧돼지를 손질 후, 통돼지 바비큐를 만드는 일이었다.

일반 집돼지도 아니고 크기부터 남다른 멧돼지를 꼬치에 꿰어 불에 타지 않게 골고루 굽기 위해 한 마리당 두 명씩 붙어서 골고루 익도록 돌리고 있었다.

“은돌아. 다 된 거 같아? 아직 멀었어?”

제임스의 확신 없는 말을 뒤로한 아랑은 커다란 솥 옆에 엎드려 있는 은돌과 하양에게 다가갔다. 아랑은 그들에게 미리 절대 끓고 있는 솥에 덤비는 건 안 된다고 경고했다. 대신 지켜보다 넘칠 것 같으면 짖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 일을 잘한다면 커다란 돼지 뒷다리를 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조금 전부터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이 바비큐 속까지 익히는 동안 수육으로 지친 기사님들을 달래줄 생각이었다. 12마리는 이들에게 익숙한 통 바비큐로, 2마리는 야들야들한 수육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살짝 고개를 들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은돌의 입이 슬쩍 올라가는 걸 본 아랑은 작게 웃으며 그 갈기털을 쓰다듬었다.

“오늘 말 잘 들었으니까, 돼지 뒷다리 포함 다른 뼈다귀 잔뜩 줄게.”

“아! 맞다. 그거 멧돼지 계속 안 돌려도 되죠? 두 분만 남고 다른 분들은 땅 좀 파주세요.”

그나마 멧돼지를 잡아 온 팀의 일이 쉽다고 생각하던 기사들은 해맑게 말하는 아랑은 보며 모든 일은 공평하다는 걸 느꼈다.

 * * *

1박 2일의 대장정이 끝난 기사들은 다들 연무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느낀 것이었다.

“……”

열심히 몸을 불사르고 장렬히 전사한 기사들을 본 아랑은 아무 말 없이 수육을 삶고 있던 솥의 뚜껑을 열었다. 한차례 찬바람이 불어오고 구수하게 삶기던 수육의 냄새가 널리 퍼져나갔다. 아랑은 팔팔 끓어오르는 뽀얀 국물 사이로 야들야들해 보이는 잘 삶긴 멧돼지 살 한 덩이를 꺼냈다.

“자. 이렇게 수육 한 점에다가……”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썰어낸 아랑은 옆에 있는 김치를 담아 놓은 그릇에서 하나를 집어 쭉 찢었다.

수육 솥을 열었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려있기에 아랑의 행동 손을 따라 수많은 눈동자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갓 담근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올려서 둘둘 말아 입으로 쏙!”

고기 한 점을 들고 그 위로 김치를 둘둘 마는 장면에서 이미 사람들의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보쌈이 아랑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들 그와 같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왁자지껄한 음식 파티가 시작되었다.

한쪽에서는 수육과 통구이 바비큐를 열심히 썰어서 접시에 담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막 담근 김치를 적당량씩 그릇에 옮겼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로 고기와 김치가 놓였다. 아랑이 말한 대로 쌈으로 먹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매운 김치만 먹고 물을 찾는 사람. 갖가지 사람들이 모였다. 흡사 장날의 시장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곧이어 음식들 사이로 술병이 놓이자 다들 김장 날만 먹을 수 있는 막 담은 김치와 수육을 즐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걸 왜 시키나 했는데……”

아랑은 입 안 가득 수육을 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하는 닉을 보고는 혀를 찼다. 어제 마나 고갈로 그렇게 드러누워 다 끝나갈 때에 일어난 사람이 제일 열심히 먹는 것이었다.

“이 김치가 이렇게 막 담아서 먹는 것도 막이지만, 적당히 익으면 또 익은 맛. 시큼하게 묵은지가 되면 다른 맛이 난다니까요. 거기가 김치전도 해 먹고, 김치찌개도……”

김치 찬양을 하던 아랑은 목을 쭉 빼서는 한쪽에 쌓여있는 김장김치들을 바라보았다. 2/3는 땅에 묻었고, 한동안 먹을 분량은 따로 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라지는 속도로 보아서는 오늘 다 먹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아랑이 가르쳐 준대로 먹는 사람들을 두고 새우젓을 조금 올린 고기를 먹은 아랑은 일어나 쌓여있는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자자. 이거 먹고.”

언제 다가온 것인지 술잔을 입에 대주는 닉의 행동에 아랑은 날름 술을 마셨다. 첫맛은 달콤하고 끝 맛은 싸한 술이 입 안을 맴돌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따끈한 느낌이 올라오자 아랑은 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랑이 인생의 첫 술판이자, 이 세계 술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래가지고오요! 내가…… 어! 저 은돌이를 주웠다는 거 아닙니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잔 되고, 14마리의 멧돼지가 뼈만 남기도 사라졌을 땐, 이미 해도 지고 어두운 밤이 되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아랑은 자신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가는 닉을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 노려보려고 했다. 분명히 닉은 한사람인데 언제부터 분신술을 써서 둘 셋으로 늘어날 수 있었을까? 살짝 머리를 가로 젓고 눈에 힘을 주자 4개까지 늘어났던 닉이 하나로 서서히 합쳐져 보였다.

“어. 그거 내꺼……”

닉의 손으로 완전히 건너간 술잔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랑의 손을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드시고, 들어가서 쉬시지요.”

모였던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지고,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자 한스 역시 닉의 편에 서서 허우적거리는 아랑의 팔을 잡았다.

“아닌데! 나 괜찮은데.”

“늦었으니 들어가서 주무시고, 술이고 고기는 언제든 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어. 그런데 우리 카일이는요?”

한스와 닉의 손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랑은 조금 전까지 있던 카일이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렸다.

“영주님은 기사님들 잠시 둘러보신다고 먼저 가셨습니다.”

“아, 바쁘지. 참…… 바쁜 사람. 도비…… 주인.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자신을 부축하려는 닉과 한스에게 꾸벅 인사를 한 아랑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쩌자고 저렇게 취하게 두셨어요. 마법사님께서 보시고 적당히 끊어주셨어야지.”

한스는 자신의 옆에서 여전히 술잔을 들고 있는 닉에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놓았다. 그러나 한스의 말을 듣고 있는 닉 역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이 기분에 술 마시는구나.”

헤죽헤죽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고, 기분이 뭉게구름처럼 두리둥실 떠올랐다. 뿌옇게 흔들려 보이는 세상은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또 먹고 싶다.”

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방으로 들어간 아랑은 서슴없이 옷을 하나씩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딱히 힘든 육체노동을 하진 않았지만, 온종일 밖에 있었으니 당연히 씻고 자야 한다는 생각이 아랑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욕실 문 앞에서 속옷까지 홀라당 벗은 아랑은 거침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이미 해가 완연히 진 밤. 은은하게 밝혀진 욕실 입구에 선 채, 아랑은 눈을 비볐다. 뽀얗게 차오른 따뜻한 습기가 몸을 감싸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

느리게 눈을 껌벅거린 아랑은 넓은 욕조에 검은 형체가 보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취해서 욕실을 잘못 들어온 건가? 

“……아랑?”

창가 옆 욕실 입구에 선 채 혼자 두리번거리고 웅얼거리는 인영에 카일은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처음 한 김장이라는 이상한 음식 앞에 지쳐 쓰러진 기사들을 추스르고 간만에 뻐근함을 느끼며 욕조에 물을 담그고 있던 참이었다. 살짝 취한 것 같은 아랑은 한스가 챙긴다고 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왜 지금 자신의 욕실에 들어와서는……

아랑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창가 바로 옆에 있는 문 앞에 서 있었기에 달빛에 그의 새하얀 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작은 머리에서 목선으로 각지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둥근 어깨를 따라 카일의 시선이 따라갔다. 이미 몇 번이나 아랑을 끌어안고 잤기에 그가 작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아는 것과 자신의 두 손으로 잡힐 것 같은 가는 허리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얄쌍한 다리를 본 카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일어나서 돌려보내야 할지, 태연하게 같이 씻어야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 카일이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아랑이 점차 다가오고 서슴없이 욕조 맞은편으로 다가오는 그 모습에 카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랑. 네 욕실은 반대편인……”

술 취한 아이를 상대로 이미 머릿속에 불순한 생각이 가득한 카일은 일단 뒤쪽으로 살짝 물러났다.

“뭐, 어때요. 같은 남자끼리. 그냥 같이 씻자요.”

살짝 불안하게 흔들리는 발걸음과 평소와 다르게 느리면서 웅얼거리는 느낌이 강한 말투에 카일은 욕조에서 일어나 나가려 했다. 욕조로 들어오던 아랑이 갑자기 휘청거리며 자신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아…… 죄송. 죄송함돠.”

사람 마음 쓰이게 하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술 취한 채 입욕하겠다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었다.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채 넘어진 아랑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달랑 든 카일은 아랑을 옆자리에 내려놓으려 했다.

“카일이네. 카일.”

갑작스럽게 두 뺨을 양손으로 잡고는 눈을 맞추며 생글거리는 아랑의 얼굴에 어느새 카일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피가 몰렸다.

“나는 도비…… 카일은 주인.”

어린아이가 장난치듯 카일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과 함께 아랑은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편히 앉았다.

“설아랑. 이런 장난은 그만하지.”

짐짓 엄하게 말을 했지만 카일은 혹여나 아랑이 다시 휘청일까 봐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 받쳤다.

“도비는 슬퍼요. 이거 빼 주세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알까?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카일을 앞에 보이며 아랑은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돼.”

“왜요? 이거 여기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반지 끼는 곳이니까, 그럼 다른 손가락에 끼면 안 돼요?”

술에 취해 살짝 달아올라 홍조를 띤 얼굴과 살짝 풀린 아랑인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자, 카일은 여전히 흔들고 있는 그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반지는 그 손가락에 끼고 있어야지.”

“아닌데. 카일은 나 안 사랑하는데.”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하는 아랑의 말에 작게 웃어버렸다.

“그건 네 착각이고.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을 끌어안고 자거나, 자는 동안 팔을 베어줄 만큼 난 너그럽지 않거든. 물론 이런 반지를 선물하지도 않고.”

“반칙이야.”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잘생긴 얼굴로 달콤한 말을 카일의 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짜 카일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헤실헤실 아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따뜻한 물속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솔솔 잠이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방방 뛸 것 같이 날아오른 기분에 아랑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붉은 카일의 입술로 돌진했다.

간들간들 몸을 흔들고 예쁘게 반달눈이 되어 배시시 웃던 아랑의 돌진을 카일은 피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말랑한 것이 분명 자신의 입술도 아니고, 볼 언저리에 닿았다. 그리고 작은 몸이 옆으로 스르륵 넘어가기에 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도롱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달큼한 술 냄새를 풍기는 아랑은 이미 깊은 잠속에 빠져있었다.

“후-.”

급히 끌어안느라 빈틈없이 맞닿은 여리고 부드러운 살결을 느낀 카일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미 한껏 피가 쏠린 아랫도리가 아랑의 말랑한 아랫배에 눌리자 카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젠장……”

어느 순간 카일은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나지막이 읊고 있었다.

 * * *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잠을 맛있게 자고 일어난 아랑은 역시나 자신에게 따스함을 가져다주는 것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는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은 채 작게 하품을 했다.

그런데 등을 쓰다듬던 손이 왜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거지? 거기다 엉덩이를 움켜쥐는 이 익숙한 느낌이 이미 아랑이 한번 겪어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카일……”

“이제 일어났군.”

아직 잠이 다 달아나지 않은 아랑은 선명하게 들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꼭 감겨있던 눈을 겨우 떴다.

숙취는 없을 거라고 하더니, 특별히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었다. 단지 그냥 추운 겨울 이불속의 따뜻하고 포근한 이 기분을 더 느끼고 싶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일 때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카일의 얼굴이 선명히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엉덩이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손길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 순간이었다.

참 차지게 마음껏 만지시는 것 같습니다만? 왜 그대의 손과 내 엉덩이 사이에 있어야 할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착용하는 무언가가 없는 것 같죠?

“……”

“혼자 자면 좋은가?”

아랑은 슬쩍 카일을 밀어내려고 했다. 한번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자, 이미 완전히 잠에서 깬 아랑의 뇌는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왜 알몸이며, 맞닿아있는 카일의 몸에서도 어떠한 기본적 예의를 갖추기 위한 천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헉……”

그러니까, 지난밤 술에 취했고. 욕실에 씻으러 들어갔는데, 카일이 있었다. 그리고 제법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고, 마지막에…….

모든 것을 기억해낸 아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아버렸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홀딱 벗고 남자 무릎에 앉아서 먼저 주둥이 박치기를. 그건 정말 실수이고, 술에 취해서 그런 거니까 그냥 개에게 물린 셈 치시면 안 될까요?

“이제 다 기억났으면, 제대로 이야기 해볼까?”

잘게 흔들리는 아랑의 동공과 자신의 입을 막는 돌발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카일이 나른한 맹수처럼 움직였다.

서로 마주 보고 끌어안는 자세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푹신한 침대와 카일의 사이에 끼여버린 아랑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필요할……”

“반지부터 이야기할까?”

“어. 음…… 그러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어제 제가 실수를 좀 해서.”

아랑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러 카일의 시선을 피한 채,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실수로 날 덮쳤다?”

카일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자 아랑은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요. 아직 제가 제 머릿속에서 정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시간을 좀 주시면 생각 정리는 마치고 문명인답게 옷도 좀 갖춰 입고, 토론을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이건 내 실수라고 하지.”

이마에 스치듯 닿는 무언가에 긴장하고 있던 아랑의 몸에 힘이 풀어졌다. 깃털처럼 이마를 스친 것은 눈썹, 꼭 감은 눈, 콧방울, 볼. 어디 가릴 것 없이 무작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이것도……”

잠시 뜸을 들이듯 시간차를 둔 카일의 입에서 나지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황해 살짝 벌어져 있던 아랑의 입술 위로 지금껏 얼굴을 스치며 날아다니던 깃털이 내려앉았다.

“……?”

진득하게 꾹 내려앉았던 깃털이 사라지자, 아랑은 지금껏 꼭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짙은 초록빛이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방금까지와 다른 뜨거움이 아랑은 덮쳤다. 

솜사탕 같았는데, 방금까지 달콤한 솜사탕을 먹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아랑은 지금껏 자신의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둘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카일의 혀가 들어오고, 둘의 혀가 천천히 엉켜 들었다. 

“하아……”

카일의 패턴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아랑이 숨이 부쳐 카일의 어깨를 밀어내는 사이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투명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가쁜 숨을 내쉬던 아랑은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은 채 입술을 내밀어 가볍게 입 맞췄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시 입맞춤이 짙어지려는 순간 들려온 한스의 목소리에 아랑도 카일도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 * *

아주 짧은 침묵 후, 소리 없이 문이 닫혔지만 카일은 자신의 품으로 휑한 찬바람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보통의 사람보다 주위 상황에 대한 인지와 청각, 시각까지 모두 예민한 소드 마스터였다. 그런데 밖에서 나는 한스의 인기척을 몰랐냐고 묻는다면 카일은 대답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몰랐다고. 저를 홀리는 아랑에게 온전히 몰두하고 취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 날다람쥐같이 빠릿빠릿 움직이던 아랑이 순식간에 저를 밀고 도망가 버리는 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카일을 뒤로 하고 아랑은 자신의 방으로 줄행랑쳤다. 안전하게 문까지 닫은 아랑의 몸이 물먹은 종이처럼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펄떡거리며 뛰는 심장은 입 밖으로 뛰어나올 것 같고, 아직도 입술이 뜨거운 것 같았다. 아랑은 머뭇거리며 반지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니까…… 어……”

연애해 본 적도 없고 그쪽으로 눈치가 무디다고 해고 이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차마 자신과 카일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아랑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그 간질거림에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고는 두툼한 카펫 위를 마구 굴러다녔다. 그러다 한순간 구르던 몸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옷부터 입고.”

머리가 복잡해지자 아랑은 옷장으로 걸어가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었다. 자신의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고 뻗친 머리도 꾹꾹 눌러 내렸다. 이제 나가서 아침도 먹고 하루를 시작해야했지만 아랑은 문고리를 잡은 채 한숨만 쉬며 선뜻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어 문고리만 잡고 있던 아랑은 갑작스러운 힘에 얼떨결에 딸려나가고 말았다.

“식사는 해야지.”

“아, 아하하하하……”

강한 힘에 끌려 나간 아랑의 눈에 들어온 건 카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는 그에게 아랑은 어색하게 웃으며 두 볼을 붉혔다.

상석에 카일을 두고 얼떨결에 샬럿과 마주 앉게 된 아랑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스프를 뒤적거렸다. 오늘도 눈부신 아름다움을 발하는 샬럿의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아직도 꿈만 같지만 카일과 한 침대에서 입맞춤을 한 것이었다. 거기다 완벽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는 그녀와 다르게 자신은 겨우 고양이 세수만 했고, 꾹꾹 눌러둔 머리도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왕궁에서 전갈이 왔어요.”

나긋나긋한 샬럿의 말에 아랑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카일에게로 향했다.

“네. 뭐라고 왔던가요?”

“……왕궁무도회 초대장이에요.”

머뭇거리던 샬럿의 말에 카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영주님도 같이.”

아랑은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고 차가운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꽃밭이 되어 떠올리지 못한 현실을 목도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대마법사를 찾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과 공주님과 결혼하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카일의 현실.

“잘 먹었습니다.”

침묵.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던 식당엔 아랑의 작은 인사 소리만 울렸다. 남들은 그저 좋다고 불장난을 하고 가볍게 즐기고 살지 몰라도 아랑은 아니었다. 

카일과 샬럿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지만, 아랑은 짧게 목례를 하고 테이블을 돌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내용이 아닐 텐데요.”

카일의 옆을 지나치던 아랑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힘에 움찔거렸다.

“왕궁 무도회 정식 초대장이에요.”

“그리고 공주의 소환명령장이기도 하겠지요.”

표정도, 목소리의 변화도 없이 공주와 대화를 나누는 카일의 손에서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다시 공문을 보낼까요?”

“영주님.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샬럿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면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부터 카일이 자신을 그저 귀빈 정도로 대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믿었다. 하루에 최소 한번, 아침이나 저녁은 늘 같이 식사를 했다.

가끔 오후 시간에 티타임을 갖기도 했고, 좋아하는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의 추운 겨울에 대해서도 말했고, 수도 라이나의 생활에 대해서도 말했다. 늘 정중하고 온화한 태도로 행동하는 카일은 분명 자신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이상한 녀석만 없었다면 더욱 완벽했을 텐데. 

“제 대답은 늘 하나였지요.”

카일은 바스락거리며 제 손을 떼어내려는 아랑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붉어진 눈가와 앙다문 입술이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왕실과 척을…….”

늘 자분자분 다정하던 샬럿의 목소리가 조금 날이 선 채 튀어나왔지만, 그녀의 말을 매듭을 짓지 못했다.

카일과 아랑이 어떤 관계인지는 익히 떠도는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때서? 정부 한, 둘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영주 자리에 앉아서 후손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오히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 후계자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여자보다는 남자가 나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카일의 집중력이 제게서 멀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들을 지나치던 아랑이 어느새 카일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버둥거리는 아랑의 손목을 잡은 카일의 손과 겹쳐진 둘의 얼굴이 샬럿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자신과 진지한 얘기 중에도 카일의 시선은 아랑에게 머물러 있었다. 최대한 태연하려 했지만 샬럿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했다.

“흠. 괜찮으시다면, 정원에서 브런치를 즐기시는 건 어떠실까요?”

늘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집사가 샬럿의 앞을 막아서자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듯한 묘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난 지금 영주님과.”

“영주님께서 개인적이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헤르시나, 공주님을 모시고 실내정원으로 가도록 하세요.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로 브런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온화하고 정중하지만, 정확히는 축객령을 내리는 한스의 말에 샬럿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부에 눈이 돌아가 정인을 멀리하는 경우는 흔하디흔했다.

“그러죠.”

식당을 나가던 샬럿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실내정원으로 향했다. 도도한 걸음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실핏줄까지 도드라지도록 꽉 쥔 주먹만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카일이 그런 일까지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감히 왕궁에 먼저 서신을 보내? 자신이 받은 전갈에 따르면 그가 보낸 내용은 단 하나였다.

한동안 자신의 성에 머문 공주를 다시 수도로 불러들여 달라는 것이었다. 아주 좋게 돌리고 돌려서 추운 겨울을 이런 척박하고 위험한 곳에서 보내는 건 옳지 않다. 그리고 이곳의 날씨는 공주의 건강에 위협될 정도로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곳에까지 퍼진 그의 연애 소식은 왕궁에도 들어갔을 것이 뻔했고, 왕궁에서는 태연하게 연말 무도회 초대장을 보낸 것이었다.

양쪽 다 체면 차리며 보낸 서신이지만, 아덴 공작은 이곳에서 그녀를 강제 추방한 것이고 왕궁에서는 무도회 초대를 빌미로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말을 전했다.

“헤르시나.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 그리고 왕궁에 연락 넣어. 일단 돌아간다고.”

늘 봄같이 따뜻하고 화려한 꽃이 가득한 실내정원에 들어선 샬럿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붉디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삼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 * *

카일과 공주의 대화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자리를 벗어나려던 아랑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무릎에 앉히는 그의 행동에 두 눈을 부릅떴다.

넓은 식당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카일, 공주, 자신과 한스, 헤르시나가 전부였지만 이미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복도를 오가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다급하게 그의 품을 벗어나려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한 손으로 자신의 양 손목을 잡아챈 카일의 손은 어떻게 힘을 주어도 풀어낼 수가 없었다.

공주님 안기 같은 부끄러운 자세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것도 부끄러운데 자신을 너무나도 쉽게 힘으로 제압해 버리는 그의 행동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만하면 알 것 같은데, 더 확실히 말해 줘야 하나?”

여전히 잔뜩 화가 난 고양이처럼 버둥거리며 자신을 쏘아보는 아랑의 눈빛에 카일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속상했잖아.”

예의 없게, 더군다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려던 아랑은 자신의 말을 끊어버린 카일의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상처받은 듯한 아랑의 눈을 보는 순간 카일은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오해가 쌓이게 내버려 두고, 그런 것으로 상대가 힘들어하게끔 둘 수 있는 성격이 아닌 것이었다. 더불어 말이 통하지 않는 공주에 직접적으로 날리는 통보이기도 했다.

왕궁에 자신이 보낸 전달의 내용을 알고도, 우아한 척 고상한 척 가식을 떠는 건 더 봐주기 어려웠다. 아랑을 알게 된 이후부터 쌓인 욕구불만은 오늘 아침에 최고조를 달렸고, 그것으로 인해 꽤 곤란해 하던 카일을 먼저 건드린 건 공주였다.

거기에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가던 아랑은 결국 카일의 인내심을 부숴버렸다.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쯧. 조절한다고 조절했는데……”

잠시 버둥거리는 아랑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잡은 그의 손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본 카일은 붉어진 흔적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카일. 여기 식당인데요.”

따스하고 촉촉한 혀가 손목 안쪽에 닿는 느낌에 흠칫거린 아랑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카일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샬럿도, 헤르시나도 아침부터 계속 피하던 한스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손목에 입술을 댄 채 시선만 슬쩍 옮겨 눈을 마주치는 카일의 행동에 아랑은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몰라요 할 만큼 순진하지 않은 아랑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 밥 먹죠.”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다고. 내가 생각한 연애는 말이야. 같이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가 가끔 뽀뽀도 좀 하고…….

“꼬르륵-”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딴 척하던 아랑의 배에서 울려 나온 배꼽시계 소리에 카일은 잡고 있던 그를 놓아주었다.

“그래, 밥. 먹어야지.”

제멋대로 굴기에 자신의 연인은 너무 연약했고, 어렸다.

특별한 것 없이 아침식사를 잘하고 카일은 서재로, 아랑은 큰 성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부엌도 기웃거렸고, 나뭇가지 하나 들고 은돌이, 하양이와 던지고 주워오기 놀이도 했다. 그렇게 배회하는 사이 하늘을 밝히고 있던 해가 서서히 사라지고 은은한 빛을 발하는 달 두 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결국 아랑은 온종일 카일과 샬럿 공주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면 가슴이 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미쳤구나. 미쳤어. 설아랑이 미쳤어.”

하양이와 은돌이 사이에 앉아 그들의 온기를 나눠받고 있던 아랑의 입에서 긴 한숨과 허망한 말이 흘러나왔다. 밤이 되면서 부쩍 심해진 추위에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흘러나왔다.

“들어가야겠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은돌의 털을 쓰다듬던 아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늘 아래 두려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는 태평스러운 아랑의 심장이 잘게 떨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성으로 향하는 아랑의 발걸음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한 난로라고 끌어안고 자던 카일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싸한 냉기에 몸을 웅크린 채 큰 침대에 혼자 자는 것도 싫었다.

“아씨.”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는 하늘을 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얗게 올라가는 입김이 아롱거리며 사라지자 아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피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카일과 공주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카일과 자신의 사이에 문제가 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러다 문득 본의 아니게 제가 확인했던 그 실한 물건이 떠오르자 눈을 감아버렸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적어도 키스하는 건 좋았잖아.

늦은 시각. 혼자 성안을 돌아다니던 아랑은 평소보다 조용하고, 하인들도 눈에 띄지 않자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높여 터벅거리며 걸었다. 하인들은커녕 늦은 시간까지 성을 돌아다니기를 잘하던 한스가 보이지 않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아랑은 정갈하게 목욕을 끝내고는 샤워가운만 걸친 채 가슴을 쫙 폈다. 그리고 당당히 카일의 방으로 들어갔다.

“늦었네.”

“은돌이랑 놀다가요.”

손끝으로 볼을 긁적거린 아랑은 이 이상한 분위기에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하- 한스…… 나도 그렇게 들킬 줄은 몰랐는데.”

카일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평소와 똑같다면 좋았을 것을…… 늘 그렇듯 벽난로에 쌓인 장작들을 활활 타오르며 따뜻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샤워가운만 입고 창가에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카일이 있었다. 

문제는 창가 앞에 있는 테이블에 준비되어있는 술과 간단한 음식. 침대 위에 뿌려져 있는 꽃잎. 곳곳에 놓여 있는 쓰러졌다가는 대형화재로 이어질 촛대들이었다.

“……분위기가 참……”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꼭 첫날밤이라는 강조한 듯한 그런 어색한 연출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익히 이런 분위기면 나오는 끈적한 색소폰 음악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앞에 있는 술잔을 비출 것이었다. 카일과 자신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있고,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이 확실한 눈빛 교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만약 이 드라마가 전체 연령가라면 슬쩍 침대든 어디든 키스하는 모습을 비추다가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텐데. 문제는 이 상황은 드라마가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일단 초부터 끄고.”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만의 상상을 펼치던 아랑은 카일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그냥 손을 슬쩍 들었을 뿐이었지만,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외 모든 촛불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무슨 도술을 부린 것도 아니고.

“이것들도 치우고.”

카일을 도와 어색한 상황을 극한으로 어색하게 만드는 모든 장치를 없애기 위해 아랑은 서둘러 침대로 걸어가 시트를 잡고 펄럭거렸다. 시트 위에 있던 꽃잎들이 날아올랐다가 사방으로 흩어진 걸 확인하고는 침대 옆에 선 채로 아랑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과 음식은 안 먹으면 되고, 그 이상의 행동만 무시하면 평소 자는 것과 같은 환경이 되었다. 

“이제 자면 되는 거겠죠?”

어색하다, 불편하다, 미친 듯이 닭살이 돋고, 쿵쾅거리는 심장은 온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손끝이 달달 떨리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한 아랑은 손끝으로 잡은 시트를 무심하게 툭 놓았다.

그래. 늘 내가 왼쪽에 잤으니까, 이 자리가 왼쪽이니까. 그냥 들어가서 누워서 눈 꼭 감고 자면 되는 것이야. 자, 설아랑 움직여.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시크하고, 쿨하게 움직이는 거야.

분명히 머리는 당장 시트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누우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발은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분명 창가에 있을 카일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다가오는 기색이나 인기척조차 없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아랑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쪽 자는 곳은 오른쪽이니까, 침대 반대편으로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륵거리는 옷이 쓸리는 소리에 아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꼭 감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방금까지 또 느껴지던 따스한 기운이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머리에 꽃잎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손끝으로 꽃잎을 잡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카일을 보는 순간 아랑은 울고 싶어졌다.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데, 결국 자신 혼자 이 난리를 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는 아랑의 입술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온종일 고민하고 걱정하고 피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신나게 드링킹했다.

“설아랑.”

미적거리며 뒤돌아서 진짜 순수하게 잠을 잘 생각으로 시트를 든 아랑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카일의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색에 멈칫거렸다. 곧 단단한 팔이 자신의 허리에 감기고, 이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이건 벗어야지.”

바로 옆에서 속삭이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와 함께 따스하고 촉촉한 것이 귀 뒤쪽에 닿았다. 허리 옆으로 꼭 묶어 두었던 샤워 끈이 카일의 손에서 느리게 풀리자 아랑은 잡고 있던 시트를 움켜쥐었다.

“혹시 도망가고 싶으면, 지금 가야 할 거야.”

귀 뒤에서 목을 타고 이어지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아랑의 솜털이 바짝 일어났다. 온몸이 간지러우면서도 아렸고, 아랫배 깊은 곳이 단단히 뭉치는 것 같았다.

목 근처를 지분거리고 맴돌던 카일의 입술이 어깨로 이어졌다. 어색한 분위기에 어깨를 움츠리던 아랑은 갑자기 이를 세워 살짝 깨무는 그의 행동에 몸을 굳혔다.

“아-.”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어 살짝 벌어져 있던 아랑의 입에서 옅은 소리와 함께 지금껏 참고 있던 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하고 풀려 버린 허리끈과 느슨하게 벌어진 샤워가운 사이로 카일의 손이 들어왔고 아슬아슬하게 아랑의 몸에 걸려 있던 가운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카, 카일.”

얇은 천 하나였지만, 지금껏 제 몸을 가려주고 어떤 방어막이라도 되는 듯 지켜줄 것 같던 가운이 사라지자 아랑은 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뚝을 두 손으로 잡았다. 뜨겁고 커다란 손이 허리 라인을 쓰다듬고 방금 깨물었던 자리를 혀로 핥는 그의 행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카일의 입술엔 자비 따위는 없었다. 뽀얗고 여린 살엔 울긋불긋한 흔적이 새겨졌다. 팔을 잡은 아랑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자 카일은 천천히 아랑의 몸을 돌려세웠다.

자신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행동에 카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한 손으로 그의 턱을 받쳐 잡았다. 천천히 세워지는 고개에 아래로 내리깐 눈과 살짝 말아 물고 있는 아랫입술이 아랑의 기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진득하게 누르자 피가 몰려 붉어진 입술이 촉촉이 젖은 채 제 모습을 찾았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아랑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높게 든 카일은 그제야 제 눈을 피하던 분홍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네 기분이 좋도록 노력해 볼게.”

“거짓말.”

흥분으로 코끝과 눈가가 발개진 아랑은 깊게 가라앉은 초록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달콤한 말로 자신을 홀린 카일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난번처럼 시트와 카일의 사이에 갇혀 버린 아랑은 웅얼거렸다.

“이, 이상하잖아.”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온몸의 세포가 제멋대로 날뛰고,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손등에서 느껴지던 카일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낀 아랑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스스로 시각을 차단해 버렸기에 더욱 예민해진 촉각과 청각은 카일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랑의 뽀얀 살결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고, 아른거리는 밝은 주황색 불빛에 더 매끈해 보였다.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작은 손으로 보고 싶은 얼굴을 가려버렸지만,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일의 시선은 가슴에 앙증맞게 달려있는 유두와 마른 살결에 도드라져 보이는 갈비뼈를 지나 숨 쉴 때마다 알랑거리는 말랑한 복부로 향했다. 그리고 체모가 없는 아랑의 다리 사이에 멈췄다. 말갛게 드러나 있는 귀여운 것은 반쯤 서 있었다.

거기다 꼭 붙이고 있는 얇은 다리를 훑어 내려갈수록 카일의 얼굴엔 짙은 음욕이 서렸다.  지금쯤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아랑은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내가 누구지?”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한 초록 눈동자는 한껏 어둡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용히 자신이 누군지 묻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카일.”

작게 숨을 쉰 아랑은 느리게 대답하고는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만져보았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카일의 얼굴을 넋 놓고 보던 아랑은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싸늘하게 식은 몸에 따스한 손이 닿자 흠칫 떨었다.

옆구리와 복부를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올라오며 긴장감과 추위에 오소소 솟아 있던 유두가 큰 손바닥에서 빙그르르 굴려졌다.

“이제 눈은 가리지 마.”

손이 쓸고 지나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듯 붉게 달아오르는 여린 피부를 어루만지던 카일의 입술이 유두에 닿았다.

온몸의 피가 카일의 손과 입술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에 아랑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 겪어보는 낯선 감각에 그의 손길을 피하고 싶으면서도, 더한 것을 원하는 모순적인 감정에 성기가 단단히 일어섰다.

편평한 가슴을 진득하게 빨아 대던 카일의 이가 유두를 살짝 깨물자 아랑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카일의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빨린 유두과 젖꽃판이 한껏 붉어진 채 더 솟아올랐다. 앵두처럼 달아오른 유두를 입술 사이로 물어 한껏 당기자 아랑의 손끝은 카일의 머리를 헤집었다.

“흣……”

양쪽 가슴을 마음껏 유린한 카일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자, 아랑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제 아래를 가리고 싶은 충동에 카일을 밀어내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랑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잘생긴 얼굴과 함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솟아 있는 성기가 같이 보였다.

지금껏 움켜쥐고 있던 카일의 머리카락을 놓은 아랑은 분명 자신의 것을 가리려 했다. 자신보다 빠른 카일의 혀끝이 기둥을 느리게 핥았고, 그 순간 흘러나온 쿠퍼액이 귀두 끝에 맺혔다.

“하…… 더러……”

더럽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붉디붉은 카일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천천히 그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것에 아랑은 두 손으로 한껏 벌어진 입을 가렸다.

“……”

뜨겁고 축축한 혀가 기둥을 핥고, 입천장의 우둘투둘한 곳에 귀두가 쓸리는 생소한 감각에 아랑의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사정하고 싶은 충동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갔다.

이미 통제를 벗어나 버린 몸은 카일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입술을 비비고 기둥을 물고 빠는 매 순간 사정감이 몰려왔다.

“하…… 그, 아흐흣!”

엉덩이를 들썩이고, 그의 입술을 피하려 했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에 아랑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 안에 흘러나오는 건 신음이었다.

그 순간 카일의 두 손은 자신의 엉덩이를 받쳐 잡아 움켜쥐며 강하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어떻게든 참으려 하던 아랑의 아랫배가 떨리고 그와 함께 결국 그의 입 안에 자신의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

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을 이끌어 낼 듯 흡입하던 카일의 입술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가픈 숨을 내쉬는 아랑의 눈가가 젖은 걸 보면서 카일의 입술을 살짝 수그러든 성기에 이어 귀엽게 달린 음낭을 살짝 깨물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랑의 모든 행동이 카일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신이 편하도록 엉덩이를 더 받쳐 든 카일의 손끝은 말랑한 회음부를 지나 애널에 닿았다.

작은 손을 들며 거부하는 아랑의 몸짓과 다르게 붉어진 애널을 확인한 카일은 한스가 미리 준비해 놓은 유액을 손에 질척하게 발랐다.

“큰일인데.”

아랑이 자신에 비해 작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모든 곳이 다 작은 아랑이 자신의 것을 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질척한 손끝으로 누르자 작은 길을 내주며 손가락 한마디가 빨려 들어갔다. 

“하읏. 이, 이상해.”

손등을 깨문 채로 웅얼거리는 아랑과 시선을 맞춘 카일은 느리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좁은 공간이 빠듯하게 길을 내어주자 카일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가락이 들락거리며 손끝은 매끈한 내벽을 따라 이곳저곳을 짚을 때마다 허공에 뜬 아랑의 다리가 흔들렸다.

평소에 털털하고 둔감하게 행동하는 것과 다르게 민감한 몸은 카일이 원하는 대로 충실하게 반응했다. 처음 겪는 쾌락에 빠진 아랑의 입에선 그를 만족시키는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손가락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유액을 더 들이부은 카일의 행동에 아래에서 시작된 음란한 소리와 한껏 올라간 아랑의 신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흐으…… 읏.”

아랑의 안을 파고든 두 개의 손가락이 각기 다른 곳을 짚으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펌프질 하듯 강하게 안으로 들락거릴 때마다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꽉꽉 물어대는 내벽을 느끼는 카일의 눈빛이 깊어졌다.

“괜찮아?”

손가락이 빠져나오자 아주 작은 틈을 만든 채 오물거리는 애널에 최대한 작게 모은 손가락 세 개가 느리게 파고들었다. 어느새 다시 발기한 아랑의 귀두 끝에서 흐른 체액이 아랑의 복부를 적시고 있었다.

빠듯하게 안으로 밀고 들어간 채 안에서 벌어진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였고,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으응!”

아랑은 신음을 숨기지 않으며 토해냈다. 뻐근하게 벌어지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안에 움직이는 손길이 버겁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집중하려는 생각이라던가, 노력하려던 감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군.”

카일은 생각보다 더 깊은 그의 긴 손가락을 온전히 다 집어넣어야 닿을 수 있는 지점에 숨어 있는 포인트를 다시금 진득하게 눌렀다.

“아!”

둥글게 벌어진 입술과 꽉 감긴 두 눈.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 강하게 죄는 내벽에 카일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리저리 휘청이던 아랑의 귀두 끝에서 희뿌연 액체가 피핏 거리며 나와 아랑의 복부와 가슴을 적셨다.

이미 한계에 다다라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피를 키운 카일의 성기 끝은 지금껏 흘린 쿠퍼액으로 음란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빠져나온 애널이 잘게 떨리며 크기를 줄여나가자, 급히 그곳에 자신의 것을 가져다 대었다.

삽입이 수월하게 아랑의 엉덩이를 벌린 채 꼭 맞붙은 곳을 내려다보며 카일은 뭉근하게 허리릴 밀어붙였다. 그 짧은 사이 닫힌 곳은 쉽사리 그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았기에 살짝 물렀던 카일이 조금 더 허리에 힘을 실을 때였다.

“쾅!”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큰 소음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방 안에 휘몰아쳤다.

“쿠쿵……”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무언가가 바닥을 강하게 치는 진동이 이어졌다.

“헉…… 허헉…….”

카일의 시선이 향한 곳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은돌이 바닥을 뒹굴다 급히 몸을 바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중한 카일의 방문 한 짝은 너덜거리며 힘겹게 벽에 붙어 있었고, 남은 하나는 카펫 위에 누운 채 먼지를 일으켰다.

멀리서부터 계속해서 들리는 아랑의 소리에 은돌은 미친 듯이 뛰었다. 많이 아픈 듯 끙끙 앓는 아랑의 목소리에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까지 들리자 눈에 뵈는 것이 없던 은돌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은돌의 머릿속에는 아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괴로워하기는커녕 벌거벗은 아랑과 카일의 뒹구는 모습이 아닌가. 저건 흡사 내가 하양이와…… 

“……은돌.”

온몸을 털을 삐쭉 서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에 한껏 위로 올라가 있던 은돌의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렸다. 갈 곳을 잃고 파르르 떨리는 은돌은 눈동자는 이미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은돌은 지금까지 달려온 것보다 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은돌은 도주를 선택했다.

침묵만 내려앉은 공간에서 주섬주섬 시트를 끌어 몸을 가리고 있던 아랑과 카일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딸, 꾹”

흥분으로 은은하게 달아오른 것과는 달리 놀람과 당황스러움으로 홍당무처럼 붉어진 아랑이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한번 터져 나온 딸꾹질은 쉽게 멈출 수 없었다.

움켜쥐고 있던 아랑의 엉덩이를 놓은 카일은 말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는 청각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잡아낸 것이었다.

“곧 사람들 오겠네.”

침대 아래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가운을 걸친 카일은 이내 아랑에게 가운을 입히고는 앞섶을 잘 여며 매듭까지 지어주었다.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는 아랑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카일은 방으로 몰려든 기사와 한스의 모습에 긴 한숨을 쉬었다.

“허허. 은돌이가…… 아이고. 고 놈이……”

급히 아랑의 침대를 손보고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는 한스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미 자신이 한번 깨먹은 분위기 어떻게든 만들어 드리려고 노력했던 것이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창가에 있는 소파에서 따스한 차를 마시는 아랑을 흘깃거리던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태연하게 뒷정리를 하는 카일과 다르게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조금의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쇄골까지 가운이 가리고 있었다. 허나 차를 마시기 위해 아랑이 고개를 숙일 때면 드러나는 목덜미의 얼룩덜룩한 자국이 한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래 가지고서는…… 허허…… 이를 어쩔꼬.”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들고 새로 넣은 장작에도 불이 붙자 한스는 아랑의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도련님.”

자신이 더 손볼 것이 없을 것 같아,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한스는 자신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랑에게로 다가갔다.

“예쁜 꽃 꿈……”

“아닌데요!”

빨간 장미처럼 붉어진 채 자신의 말을 끊고 손사래까지 치는 그 모습에 한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허둥거리는 아랑은 두고 이어진 문을 통해 옆의 방으로 들어간 한스는 창가에 서서 밖을 보는 카일의 등에 대고 간단히 목례를 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리오.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

카일은 빠르게 이동하는 두 개의 점이 어둠 속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뭐라고 말할 상황도 아닌데, 이미 하양이까지 대동하고 줄행랑을 칠 줄이야.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긴 카일은 부서진 문을 치워버려 휑하니 바람이 들어오는 문 쪽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일단 이 성을 벗어나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만한 곳이 필요할 것 같았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