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일반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적당한 스킨쉽을 나눈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은 다디단 초콜릿 같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시간에 빠지는 건 기본. 시도 때도 없이 둘만의 시그널을 주고받으며 주위를 꽃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한스는 제 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던 아랑이 갑자기 복도 장식물 뒤로 숨는 행동에 주위를 다시 보았다. 침침한 눈에 힘을 주고 보자니 아무 멀리 끝에서 카일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재로 가는 길은 이 길이 가장 빠를 터인데, 갑자기 옆 복도로 빠지는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벌써 며칠째 이 두 사람은 숨바꼭질 중인 것이었다.
아침 식사시간에는 아랑이 나타나지 않았고 카일은 점심과 저녁을 서재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따뜻하고 좋다고 카일의 품에서 자던 아랑은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혼자 자는 걸 선택하고 있었다.
카일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며 사라지자 살금살금 장식물 뒤에서 나온 아랑은 까치발을 한 채로 빠르게 부엌으로 향했다.
“한스.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그리고 그 모습을 다 지켜본 한스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작게 속삭이는 닉의 보며 평소와 똑같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라이나에 잠시 다녀온 그 날.”
“네.”
“그러니까 카일이랑 아랑이 야밤에 으쌰으쌰 하는데, 은돌이가 문 부수고 하양이랑 둘이 야반도주하고. 그러니까 쟤네는 결국 별도 못 보고 어색하게 저리됐다는 거죠?”
“참, 대마법사님 소식은 어떻게 됐습니까?”
한스는 배를 잡고는 소리죽여 웃고 있는 닉의 앞으로 따뜻한 차를 놓아주었다.
“아이고…… 하하. 아. 내 배…… 그러니까. 천하의 카일이…… 으하하하……”
다시 한번 상황을 확인한 닉은 웃다가 소파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닦았다. 그때 자신이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평생을 카일을 놀려 먹었을 텐데.
“마법사님?”
좀 엄한 목소리로 혼내듯 자신을 부르는 한스의 말투에 닉은 손을 들어 대충 흔들면서 알겠다는 표시를 하고는 소파에 다시 앉았다.
“흠…… 흐음. 그러니까. 푸읍. 하아, 후. 대마법사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으려는 닉은 몇 번이나 말을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한스는 조용히 그의 앞에 앉은 채 대답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 확실히 서쪽 대륙에 있다는 건가?”
닉은 한스에게 자신이 마탑에 알아본 바로는 대마법사가 서쪽 대륙으로 간다는 말을 했고, 바로 지난 주 서쪽 대륙에서 그를 봤다는 마법사까지 만났다는 말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던 닉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참았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제멋대로 실룩거리는 광대뼈와 올라가는 입술을 가리려 닉은 얼른 한 손으로 자신의 하관을 가렸다. 입을 열면 웃음이 튀어나올까 봐 닉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분명 자신보다 카일과 친목이 더 있을 터인데, 자신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닉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마법사가 아무하고나 막 그렇게 쉽게 연락되는 사람이었다면, 다들 목 빠져라 그를 기다리고 찾지도 않을 것이었다.
당장 수도의 마탑에서도 한참 연구하던 것들을 내버려두고 가버렸기에 그것을 수습할 마법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닉 역시 그 연구에 참여했기에 알고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대마법사였기에 가능한 연구였지 자신도 마나 부족으로 실험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었다.
“쯧……”
닉의 대답이 영 못마땅한지 결국 혀를 차며 자리에 앉는 카일을 보며 닉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서 잘못 웃었다가는 말 그대로 한순간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랑이 안 보이네.”
“연무장에.”
닉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랑이 어딨는지 바로 말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연무장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던 닉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지금 한창 라이나를 달군 아덴 공작의 러브스토리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바뀌어 길거리 공연에까지 소재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심 에피소드로 자리 잡은 것 중 하나가 위치추적이 되는 반지였다.
“이 추운 날에 거긴 왜 나갔대?”
“기사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고 있더군. 그건 그렇고 온 김에 이거나 하고 가지.”
덤덤하게 말하는 카일이 내민 작은 상자를 열어본 닉은 또 다시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문제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핑크 다이아 목걸이었다.
카일이 살 때만 해도 꽤 고가였던 이 목걸이의 가격이 2배는 족히 뛴 건 둘째 치고 지금 다들 이 목걸이에 들어 있는 마법이 무엇인지 추리하는 중이었다.
“이게 뭔데.”
“안에 마석이 있는데 마법 1개만 각인이 가능하다니까, 네가 하라고.”
“뭘 하려고?”
닉은 목걸이 줄을 잡고 햇빛에 비춰 반짝이는 핑크색 다이아 안에 들어간 연노란 색의 마석을 확인했다.
“소환”
“풉.”
시큰둥한 카일의 대답에 닉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지로 위치 추적하는 것도 모자라 소환으로 불러들이겠다고? 그게 집착, 감금이랑 뭐가 다른 건데? 언제 어디서 뭘 하는지 감시하는 거잖아. 이거 범죄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닉은 다행히 입 밖으로 생각을 꺼내진 않았다.
“가능해?”
“가능은 한데…… 마석 크기가 작아서 횟수 제한은 걸릴 거야.”
“몇 번?”
“하루 24시간 기준으로 4번 정도”
“소환 가능 거리는?”
“이 목걸이를 기준으로 반경 500km 정도. 단 깊은 지하나 동굴 같은 곳은 예외. 넓은 들판이나 마을 기준으로.”
카일의 질문에 닉은 자신의 실력으로 가능한 범위로 설명해 주었다.
“겨우?”
“……하지 말까? 대마법사님 쯤 되시면 동대륙 전체. 서대륙 전체 이런 식이겠지만. 대부분 100km 내외라고.”
닉은 목걸이를 다시 케이스에 내려놓으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시동 방법은?”
“기본으로 들어가는 건 목걸이 착용자가 목걸이를 만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곳을 떠올리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거. 그런데 넌 지금 착용자가 어디 있던 네 옆으로 부르고 싶은 거 아니야?”
닉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일을 향해 말을 툭 내뱉었다. 아닌 척하고 있겠지만, 이미 음흉한 네 마음은 다 읽었다고. 이 친구야.
“제대로 알고 있네.”
분명히 적당히 비꼬면서 놀림을 담아서 말을 했건만 돌아오는 건 카일의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의 얼굴엔 여유 있는 미소까지 피어났다.
“100골드.”
“……죽여줄까?”
진심을 담았는지 닉은 자신의 주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급히 베리어 마법을 시전 했다.
“이게 그냥 간단히 되는 건 줄 알아? 기본적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건 쉽지만. 이건 네가 소환하는 거잖아. 결국 마법 2개를 걸어야하는 건데!”
“……그래서 죽고 싶다는 거지?”
“아, 이 미친……. 아랑이 너 성격 이런 거 알아?”
분명히 자신이 아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베리어를 쳤건만, 가장 바깥 부분부터 자잘하게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5, 50골드.”
“무료로 해 준다니 고맙군. 결혼 축하 선물로 기꺼이 받아주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법각인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석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부재료들이 필요했다. 부재료 및 인건비를 생각해서 딱 2배를 불렀다가 인건비는 싹 빼고 재료비만 말한 닉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태연한 대답과 베리어를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지자 닉의 꼭 다물렸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결혼?
“아, 내일까지 된다고?”
이쪽에서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혼자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친구를 보며 닉은 속으로 거친 육두문자를 마구 내뱉었다. 지금 당장 마을에 있는 마법 상점으로 나가 필요한 재료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없다면 라이나로 주문을 해야 하고…… 주문한 물건을 받고 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아…… 아.”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던 닉은 자신의 어깨를 큰 손으로 꾹 쥐면서 격려의 행동을 하는 카일을 보며 하고 싶던 말을 삼켰다. 친구도 좋고 일도 좋고 뭐든 다 좋지만, 닉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그리고 카일의 이런 제멋대로인 성격을 아직 모를 것 같은 아랑을 향해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아랑은 테이블에 다과와 차를 내려놓고 나가려는 한스의 소매를 황급히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애잔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기 카일과 저, 둘만 두고 가실 건가요? 그럼 전 숨 막혀서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부디 제발 옆에 있어 주세요.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걸 눈동자에 녹여낸 아랑은 한스가 알아주기만을 바라며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날씨가 추워져서 기사단장 제임스가 오늘은 훈련이 없다고 전해 달랍니다. 그럼.”
아랑의 긴급한 시그널을 읽지 못한 한스가 담담히 말은 전하자 아랑은 한 번 더 그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결국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서재를 나가버린 한스의 뒤를 보던 아랑은 카일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랑, 베르를 왜 찾는 거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일인용 소파에 앉고, 긴 다리를 꼬고 앉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랑의 시선이 그의 손에 멈추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드는 것에 이어 붉은 입술에 닿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입술이 열리고 찻잔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릿하게 구경하던 아랑은 황급히 시선을 알록달록한 과자 접시로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 입술이 자신의 어디에 닿았는지 머릿속에 엄청난 것들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볼은 두 손으로 감싼 아랑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랑. 아랑?”
“네?”
카일의 질문에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아랑은 자신의 이름이 몇 번이나 불리고 나서야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베르. 대마법사.”
“아! 대마법사님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혼란스럽게 머릿속에 떠다니는 환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몇 번 흔든 아랑은 얼른 대답했다.
“뭘?”
“……워프요.”
카일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아랑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을 꺼냈다. 이미 자신의 검은색 머리카락도 검은색 눈동자로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엔의 걱정처럼 그 자리에서 눈알을 뽑는다거나, 죽인다거나, 악마로 모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랑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게 했고,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차원 이동부터 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했을 때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거기다 벼랑 끝에서 밀려서 이곳에 떨어졌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누가 믿어줄까? 처음에 로엔도 믿지 못했었다. 그리고 나중엔 그걸 진실로 믿는다기보다 그냥 아랑이 하는 말이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지금도 대부분 지역은 워프로 갈 수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이 있나?”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은 곳이면서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로엔의 집을 떠난 이후 악몽은커녕 그 일에 대해서 잊고 지냈었다. 다시금 하나씩 떠올린 아랑의 입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가고 싶은데, 가고 싶지도 않기도 하고, 그냥 그런 곳이요.”
“그곳이 어딘데.”
“아주 아주 먼 곳.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에요.”
카일은 수수께끼 같은 아랑의 대답에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았다. 며칠 만에 본 아랑은 여전히 귀여웠고, 당장이라도 그에게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카일은 소파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 말을 이어하길 기다리던 카일은 지금껏 자신의 눈을 피하던 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훔쳐보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말할 테니까, 죽이지 말아주세요.”
작은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말에 카일은 꼬고 있던 다리를 천천히 풀었다. 그 어떠한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지만, 끔찍한 설화에 얽힌 이야기만 아니길 바랐다. 부디 자신의 손으로 그를 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누가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죽이지 말아 달라는 말부터 한단 말인가? 그것부터가 지금부터 그가 꺼낼 말이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내 손으로 널 해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드 마스터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
제법 긴 침묵 후, 카일은 느리게 대답했다. 아랑이 악마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자신과 한스만 입을 다물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수 있었다. 이미 연로한 한스가 죽고 나면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자신뿐이었다. 만약 살아가면서 그 비밀을 알게 되는 자가 있다면 제 손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아랑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꼭꼭 깨물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말을 해야 할지. 한국이라는 다른 차원의 나라부터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난 엄마를 잃었어요.”
마주한 손끝을 꼬물거리던 아랑의 입에선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슬쩍 카일의 눈치를 본 아랑은 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것부터 여유는 없었지만 엄마와의 행복한 시간, 그리고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미친놈까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냈다.
“……그놈은 아직 살아있고?”
엄마를 묻던 날 이야기를 하고, 잠시 차를 마시는 사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카일이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완전히 식어버린 차를 단번에 마신 아랑은 생긋 웃었다. 적어도 새 아빠에 대해서 분노를 표출해 주었으니 자신편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
얘기가 끝난 후 카일에게선 침묵만이 흘렀다. 생각에 잠긴 눈동자로 카일은 까칠하게 수염이 올라온 턱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아랑은 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다 했기에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건 카일의 몫이었다. 바삭거리는 과자를 먹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랑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하얀 눈이 하늘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눈이다.”
창틀에 걸터앉은 아랑은 폭신해 보이는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처음엔 간간이 떨어지는 눈송이가 점차 굵어지고 함박눈으로 변하자 아랑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을 치워야 하는 끔찍한 일이 있겠지만, 적어도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카일은 이제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지, 하염없이 창밖을 보는 아랑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중간 중간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밝고 맑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다니는 아랑이 꺼내 놓은 이야기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나마 늘 만들어내는 이상한 음식이 아랑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신 역시 평탄하게 살아온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랑의 경우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꺼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낯선 곳에서 밤마다 악몽과 고통에 시달렸을 아랑이 떠오르자, 카일의 손끝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런데 돌아가면 뭘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 새 아빠를 찾아가서 그를 벌하고 싶지만, 이미 화장해 버린 엄마의 유골에서 독극물을 찾을 순 없잖아요. 그리고 그가 날 벼랑 끝으로 밀어버린 것도 물증이 없으니까. 그런데 갈 수 있다면 한번은 돌아가 보고 싶어요. 그곳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엄마…… 제사상 한번 못 받을 거잖아. 외롭게 내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엄마한테 나 잘살고 이렇게 잘 자랐다고 인사하고 싶어요.”
아랑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같이 갈까?”
창밖을 보던 아랑이 카일을 돌아보았다.
“돌아갈 수 있다면 나도 같이 가자고.”
카일은 다시금 정확하게 말을 했다.
“카일도 같이 한국으로 가겠다고요?”
“그곳에 어떤 곳인지 궁금하니까.”
새 아빠라는 그 미친놈을 찾아 자신의 손으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과 아랑의 어머님 묘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같이 가요. 내가 진짜 맛있는 음식도 많이 사주고, 신기한 것들도 많이 보여줄게요.”
창틀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면서 환하게 웃는 아랑은 보며 카일은 같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지옥의 끝이라도 따라가겠다 마음먹었는데, 다른 차원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길드장 나오라고 해.”
딱히 많은 사람이 오가지 않는 그림자 길드의 카운터에서 졸던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뜬금없이 길드장부터 찾는 이는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가 아덴 영주인 것을 본 그는 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 침을 닦았다.
“……길드장.”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운터에 묵직한 주머니가 놓이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뒷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카일은 자신과 마주 앉은 남자는 쳐다보지 않은 채, 앞에 놓인 찻잔을 집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가진 카젠 역시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꽤 긴 시간 뜨겁던 차가 다 식고, 그 찻잔이 빌 때까지 둘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워프 좀 여시죠.”
“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필요한 정보라면 최대한 구해 보도록 하지요.”
달각거리는 소리는 내며 도자기 찻잔이 제 자리는 찾자 카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에 있는 책장을 뒤적거렸다.
“보자. 샬럿 공주님과 궁중의 현재 상황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영주님의 결혼 이야기로 떠들썩하던데 좋은 결혼식 장소라도 추천해 드릴까요.”
“서대륙 정도도 아니고 좀 많이 멀고 그런 곳인데, 딱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더군요. 이 세상에는.”
카일은 창밖을 보면서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 역시 마법의 힘일까? 밤새 내린 눈은 무릎이 빠질 정도로 많이 쌓였지만, 그림자 길드 주변만큼은 다른 곳과 다르게 완벽히 제설작업이 끝나 있었다.
“대마법사 베르의 정보가 필요하신 거군요.”
이것저것 책과 종이를 팔락거리던 카젠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손끝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며 밝게 말했다.
“그러니까 좀 열죠, 워프.”
“최신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지금 서대륙에서 마법재료를 구한다고……”
“닥치고 워프 열자. 까망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카젠의 말을 끊어버린 카일의 손끝이 조금 세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순간 통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신기루처럼 작은 가루가 되어 풀썩 아래로 내려앉았다.
“이거 비싼 거라고. 서쪽 대륙에서 얼마나 힘들게 찾은 고대 도자기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는데도 태연한 카젠은 혀를 차며 슬쩍 손을 뻗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테이블과 함께 추락하던 도자기 세트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여기 이렇게 들어앉아서는 계속 헛된 소문만 퍼트리고 있으니, 긴말할 것 없고. 워프나 엽시다.”
“아니 서쪽 대륙도 아니면, 어디에 갈 참이길래 대뜸 나한테 와서 워프를 열라고 하는 건데? 닉, 걔도 나름 소질 있고 괜찮더만.”
이제 더 숨길 생각도 없는지 잔뜩 잡고 있던 무게를 버리고 틱틱 거리며 말을 하는 베르를 보며 카일은 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아랑에게는 그를 찾아주겠다고 말했지만, 카일은 딱히 베르를 찾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고 있지 않았다.
대마법사 베르가 그림자길드장 카젠이면서, 동시에 아랑이 키우는 애완용 까망이었다. 아랑이 베르를 찾아달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그림자 길드였다. 이미 까망이라는 모습으로 맴돌던 베르는 어느순간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느 순간 마을에 나타나 엄청난 정보력으로 수도 라이나보다 더 커진 그림자 길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엔 그림자 길드만 운영하는 것 같더니 최근에 토벌대 인원 조달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차원.”
닉에게 시키면 될 일을 왜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고 조용히 유희를 즐기는 사람을 괴롭히냐는 웅얼거림을 듣던 카일은 단번에 그 말을 잘라버렸다.
“……”
“이 세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보내 줘야겠습니다.”
“못해.”
명령조의 담백한 카일의 말에 베르는 얼른 두 팔을 내저었다. 아랑이 평범한 아이가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숲에서 자신을 만났을 때 확인했고, 여관에서 잠든 그의 머리를 짚었을 때 넘겨받는 정보들은 자신이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카일의 옆에 붙여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카일이라면 아랑에게 충분히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너무 정확히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고 왕국을 들썩거릴 정도의 연애를 할 줄은 몰랐지만.
“다른 도마뱀을 찾아야겠군요.”
난색을 표하는 베르를 보고는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세상에 드래곤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드래곤 레어를 찾아 수면기에 든 드래곤을 찾던지 유희 중인 드래곤을 만나면 되는 것이었다.
“아, 왜! 잠깐. 잠깐. 왜. 갑자기 왜 간다고 그러는 건데?”
여러번 묻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일의 손을 황급히 잡은 베르는 얼른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이곳에서 둘이 행복하게 잘 살면 될 터인데, 아랑에게 그리 큰 고통을 준 곳에 돌아간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친 새끼 찢어 죽이려고.”
자세한 설명 없이 그저 툭 내뱉은 카일의 말에 베르는 한 번에 알아들었다. 베르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냥 워프도 아니고 차원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성공한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차원의 틈에 영원히 갇힐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네가 행복하게 해 주면 되잖아.”
카일의 손을 놓은 베르는 책장으로 가 고대어로 써진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내들었다. 이미 사라진 고대어인지라 현 시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읽은 수 없는 책이지만, 베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는 건 어떻게 간다고 하더라도 돌아오는 것도 문제야.”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팔랑거리며 넘기던 베르의 손끝이 느려지고 천천히 앞뒤로 뒤적거리는 부분이 카일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얼핏 보아도 복잡한 수식과 마법진의 그림이 몇 장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소환마법 있잖아.”
“진짜 갈 거야?”
베르의 질문에 카일은 아예 등을 돌리고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준비되면 연락해.”
“이거…… 재료비만 해도……”
“……”
대충 적혀 있는 수식과 함께 그 옆에 나열된 부재료들을 훑던 베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스산한 초록눈동자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일에 시큰둥하고 큰 관심 없이 긍정적으로 좋게 넘어가는 카일 같지만 그의 아래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악독한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 색깔이 뭡니까?”
그대로 나갈 것 같던 카일의 말에 베르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 연갈색 머리카락이 뭐가 어때서?
“블랙드래곤이면 검은색을 하던지…… 쯧.”
이미 문이 닫히고 뚜벅거리며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카일의 말에 베르의 손바닥에서 불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요즘 유행이다. 이 무식한 소드 마스터 놈아!”
긴 한숨을 쉰 베르는 의자에 앉아 펼쳐놓은 부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수천 년 전 신마 전쟁 때 써진 책이기에 악마의 마법진부터 다양한 것이 나열되어 있었다. 신계와 마계를 오가는 마법진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베르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나타난 종이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그것을 따라다니는 펜이 급히 무언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보자보자. 일단 안정적인 마법진 설치를 위해 토지부터 작업해야 하니 그 필요한 재료가……”
그가 중얼거릴 때마다 고대어가 적히고 그 옆으로 금액이 적히기 시작했다.
“아, 저 도둑놈. 내 레어도 털어가 놓고는……”
상상 이상의 금액이 이어지자 베르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가 팔자에도 없는 그림자 길드장이 된 이유는 합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또 더 벌고 싶어서. 용병 쪽도 손을 대서 이제야 좀 안정적인 수익으로 등 따시고 배부른 것 같았는데……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 책장을 넘기던 베르의 눈에 손가락에 감긴 연갈색 머리카락 한올이 들어왔다.
“연갈색…… 연갈색…… 이거 유행 맞다고!”
갑자기 울컥한 베르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그의 머리카락은 참 다양한 색으로 빠르게 변했고, 결국 온연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 * *
아랑은 햇빛이 잘 드는 실내정원 한쪽에서 손질하고 있던 약초를 내려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집 나간 은돌이와 하양이도 걱정되고 이 성에 들어온 이후 보이지 않는 까망이도 생각이 난 것이었다.
눈이 쌓이기 무섭게 치워내는 기사와 마법으로 녹여버리는 닉 덕분에 성안은 평온해 보였지만 밖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눈을 치워낸 길을 제외하고는 1m는 넘는 눈들이 쌓여있고, 그 위로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잠시만 그 바람을 맞고 서 있어도, 노출된 볼과 귀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손끝은 발갛게 얼어붙었다.
“날도 추운데 다들 집에 돌아오지.”
좋으니 싫으니 해도 집이 최고인데, 잠시 손을 놓고 있던 아랑은 바삭하게 마른 약초를 집어 들었다.
주황색 고운 꽃잎을 가진 풀은 약초이지만 약초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아랑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마른 것들을 곱게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한 스푼을 먹으면 그 어떠한 변비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마법 같은 약초였다. 문제는 적정량 이상은 먹는 순간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냥 화장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지 일어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약초였다.
학명 : bae–a-po
닉과 카일에서 글을 배우면서 서재를 들락거린 아랑이 찾아낸 식물도감은 그에게 식물에 눈을 뜨게 해준 것이었다. 로엔에게서 듣고 배운 대로 암기한 것이 전부인 아랑은 자신이 아는 약초들의 부작용이나 학명들을 보며 배를 잡고 웃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도 네이밍에 센스가 없다는 걸 인정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더한 것이었다.
곱게 간 배아포(Bae-a-po)를 작은 유리병에 담고 뚜껑까지 잘 덮은 아랑은 손은 보라색 약초를 집었다.
학명 : Ssot-a-nae
이건 곱게 갈아서 곧바로 먹는 것이 아닌, 뜨거운 물에 잘 우려내 차처럼 마시는 꽃봉오리를 말린 것이었다. 우려낸 색이 투명한 보라색이라 보기에도 좋고 향긋한 꽃을 먹는 것처럼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거기다 손톱만큼 작은 꽃송이가 뜨거운 물속에서 천천히 펴지는 걸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 꽃봉오리의 효력은 하루 종일 속을 더부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속을 불편하게 하고 온종일 트림을 하게 했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구역감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속에 있는 것을 시원하게 쏟아낸다면 괜찮아질 것 같지만, 문제는 절대 구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온종일 구역감과 트림. 소화불량 같은 불편함이 지속되게 했다.
“또 챙길 것이…… 오!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뻔 했네.”
비쩍 마른 시커먼 나뭇가지를 찾아낸 아랑은 작은 강판에 나뭇가지를 갈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학명 : gol-a-po
약초가 아닌 독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랑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는 아랑의 엉덩이까지 실룩거리고 있었다.
무향 무취. 대신 색이 검은색이긴 했지만 어떠한 음식에도 넣을 수 있고, 그냥 먹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대신 1g이든, 100g이든 용량도 상관없이 일단 먹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엄청난 두통이 효력이었다.
어떠한 진통제도 해독제도 없이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고 뇌를 잡고 흔드는 것 같은 고통이 8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통이 싹 사라졌다. 한마디로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독초랄까?
아랑은 테이블에 놓여있는 크고 작은 유리병들을 하나하나 들어 확인하고는 한글로 학명을 적었다.
“그게 다 뭐지?”
마지막 유리병에 학명을 적던 아랑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말을 거는 카일을 슬쩍 보았다. 이제는 이렇게 등장하는 것도 익숙했다. 아랑은 들고 있는 gol-a-po병을 가장 뒤쪽에 숨기듯 내려놓았다.
“혹시 한국에 가게 되면 챙겨 가려구요.”
아랑은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카일은 그가 내려놓는 마지막 병에 적힌 학명을 읽은 뒤였다. 가장 쓸모없는 약초이자 독초인 gol-a-po는 일반인들에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짓궂은 장난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기에 공식적으로 유통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8시간 후 두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다 어떠한 방법으로 그 약초를 썼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기에 공공연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었다.
“흠. 거기 의술이 여기보다 좋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병들을 하나씩 보던 카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일반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지만, 힐링 마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죠.”
카일의 더 많은 것을 보기 전에 아랑은 서둘러 병들을 가방에 정리해 넣었다.
“베르를 찾았어.”
테이블에 걸터앉은 카일은 고개를 숙인 채 유리병을 정리하던 아랑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걸 지켜보았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그들을 위로하는 능력이 없는 카일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있대요? 지금 만나러 갈 수 있어요? 어…… 혹시 차원 이동 뭐, 그런 부탁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까요?”
바닥을 보던 고개가 들리고 아랑은 카일에게 시선을 맞춘 채 두서없는 말을 꺼냈다. 대마법사님을 찾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랑은 한국에 돌아갈지 어쩔지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했다.
“일단은 원래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달라고 했어.”
카일은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일렁이는 걸 보며 아랑의 한쪽 볼에 손을 댔다. 큰 눈동자에 다채롭게 나타나는 수많은 감정과 함께 아랑의 고운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입꼬리가 삐죽거렸다.
“……”
“가고 싶잖아. 단지 그곳에 어떻게 변했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것이지. 가고 싶은 거잖아.”
“응.”
입술을 꼭 다문 아랑의 고개가 작게 끄덕이고 목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햇살에 비친 말간 얼굴을 감상하듯 보던 카일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같이 갈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랑의 큰 눈동자에 가랑가랑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툭툭 떨어져 내렸다.
“넌 아무것도 하지 마. 친구가 보고 싶으면, 친구를 만나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영화? 게임? 또 뭐였지? 아무튼 그런 거 할 생각만 해.”
작게 속삭이던 카일의 얼굴이 점차 아랑과 가까워졌다. 이내 두 입술은 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붙어있었다.
“……”
대마법사를 찾으면 뭐든 다 될 것 같았다. 그랬지만 대마법사를 만나는 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라는 말을 늘 들어온 것이었다. 평생을 마법 수련을 하고 같은 마탑에서 지냈지만 닉 역시도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늘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였기에 쉽게 했다. 그런데 진짜로 그 분을 만날 줄이야. 그리고 미친 듯이 그리우면서도 가슴 아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현실로 다가오자 뒤엉켜버린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기쁘면서도 슬펐고, 행복하면서도 아팠다. 좋다는 말을 할 수도,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한 아랑은 입술을 꼭 다문 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했다.
이 와중에 자신의 볼에 닿은 카일의 따스한 손이 좋았고, 옆에 있어주겠다는 그의 말이 가슴을 뛰게 했다.
“대답.”
아랑은 느린 걸음으로 테이블에 걸터앉은 카일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까치발을 들었다. 자신의 입술에 뭉클하게 닿는 촉감을 느끼며 아랑의 두 눈이 곱게 내려앉았다.
“아……”
갑작스럽게 자신의 허리를 감싸며 끌어안는 강한 힘과 함께 맞닿은 카일에게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아랑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밀려들어 오는 카일의 혀가 입 안을 거칠게 헤집자 그의 목에 감은 아랑의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틀어지는 목선이 이리저리 움직이자 부딪치는 코끝에 아랑과 카일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설아랑. 대답은?”
“하아-. 걱정…… 안……”
간간히 입술이 떨어지는 사이 숨을 몰아쉬던 아랑은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대답에 웅얼거리며 대답하려했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야.”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랑은 파드득거리며 카일의 목에 감은 팔을 내려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한껏 눈을 동그랗게 키운 채 정원을 둘러보던 아랑은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나한테 일 시켜놓고 둘이 이러고 있다 이거지?”
갑자기 나타난 까만색 작은 용이 주위를 날아다니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랑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카일의 어깨를 밀다 지쳐 툭툭 쳤다. 그러면서도 제 눈앞에 동동 떠 있는 까망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원래 갑자기 나타나고 잘 사라지는 까망이라 큰 걱정은 없었다. 거기다 추운 날 스스로 찾아와준 것도 참 고마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들은 말은 까망이 한 말 같았다.
“하-. 알고 온 겁니까?”
카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으르렁거리듯이 단어를 으깨면서 말을 꺼냈다. 처음엔 한스. 그 다음엔 은돌이더니 마지막엔 까망이냐? 그럼 또 다음번에 방해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당연한 거 아냐?”
시큰둥한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아랑은 눈을 깜박였다. 이 상황에 말을 할 사람은 까망이밖에 없는데 날아다니는 그의 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뭐야, 까망이 말할 수 있어?”
“아, 이제 아랑이 좀 놔주지 그래? 그냥 뒀다간 여기 자리를 깔 것 같아서 말이지. 날도 추운데 침실도 아니고 온실은 좀 아니지 않아? 그게 인간이 할 짓이야?”
카일은 아직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입술을 벌린 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까망을 보고 있는 아랑의 양쪽 귀를 손으로 덮었다. 저 미친 용 새끼가 지금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거기다 내가 여기서 자리를 깔든 어디서 깔든 무슨 상관이야!
“됐고. 갈 수는 있어?”
그나마 반 존대를 해 주던 카일은 아예 반말을 하며, 귀를 막은 손을 치워달라고 투닥거리는 아랑을 내려다보았다.
“흠. 내가 누구냐 하면 블랙드래곤 중에서 최연소로……”
카일은 한껏 거드름 피며 말을 꺼내는 까망을 무시하며 여전히 아랑의 귀를 막은 채 그 입술에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야! 지금 너 나 안 보여?”
“보기 싫음 네가 꺼져.”
카일은 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까망의 눈치를 보는 아랑의 입술에 수십 번 가벼운 뽀뽀를 한 후에야 아랑을 놓아주었다.
“헐…… 뭐야! 둘이 서로 말도 텄어요?”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고,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아랑은 할 말이 없었다. 약초와 유리병이 잔뜩 놓여 있는 책상에 앉은 까망은 약초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그냥 우연히 주운 드래곤의 축소판으로 생긴 까망이가 진짜 유희중인 드래곤이었으며, 그가 바로 대마법사 베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자신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라는 드래곤을 애완동물 취급하고, 벌레를 먹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까망이 앞에서 험한 꼴은 얼마나 많이 보였고, 해서는 안 될 말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카일은 그럼 자신이 대마법사 베르를 찾는다는 걸 알면서 왜 모른 척했을까? 카일 역시 까망이가 베르임을 알면서 모른 척한 것이었다. 까망의 존재를 알면서 대마법사를 소개시켜준다고 이 성에 끌어들인 것도 카일. 말로는 찾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찾고 있지 않다가 자신의 사정을 듣고서야 그가 까망을 찾았다는 것까지 상황이 정리되었다.
“와…….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와 진짜. 내가……”
까망이 짧은 앞발로 만지작거리던 약초가 딱 쓰기 좋은 굵기의 가루가 되어 뚜껑을 열지도 않은 유리병에 사르륵 들어가고 있었다.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일에게로 아랑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래서 한국 갈 수 있는 건가요?”
아랑은 카일의 두 눈을 똑똑히 보면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나를 또 설명하자면.”
“까망이…… 아니 대마법사님 간단히 말해 주시죠.”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드래곤 계에 한 획을 그은 최연소 천재 드래곤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던 까망은 자신의 말을 잘라버리는 아랑의 차가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내주세요. 나 혼. 자. 만.”
늘 무덤덤하거나 거만하거나 어떤 일에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던 카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랑?”
“저 혼자 온 곳이니까, 저 혼자 가야죠. 가능하죠?”
아랑은 자신의 손을 붙잡으려는 카일의 손을 소리나게 탁- 쳐냈다. 그리고는 그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선을 떼어내어 약초로 장난치고 있는 까망에게로 향했다.
까망은 한국으로 가져갈 생각인지, 각 약초에 알맞게 잘 손질해서 유리병에 담아 놓은 아랑의 실력에 감탄하던 중이었다. 그러면서 도와줄 생각으로 옆에 있던 약초들을 손질해 유리병에 넣으면서 카일과 아랑의 사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어. 그, 그건 가능한데.”
어둠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카일을 훔쳐보았다. 아직까지 사람들의 감정을 읽는 것에 서툴고 미묘한 그들의 정신세계까지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무척이나 불리하다는 건 확실하게 느껴졌다.
눈빛으로 사람을 찢어죽일 수 있다면 수천 번은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카일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베르. 그 모습은 좀 아니지 않나?”
카일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아랑의 행동에 대한 불똥은 까망에게 날아왔다. 카일의 말을 들은 아랑 역시 까망을 보면서 그를 대마법사 베르로 연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자신의 품에 안고 뒹굴거리고, 제 옆에 조용히 앉아있거나 맴돌던 귀여운 동물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직도 까망이라고 인지하고 있기에 그를 대하는 것도 묘해졌다.
지금도 버릇대로 까망의 맨질맨질한 이마를 만지고 있었다. 그런 아랑에게 맞춰 까망은 그가 제 이마를 만지기 편한 자세를 취해 주었다.
“아!”
까망이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아랑은 그의 이마를 만지던 손을 살짝 움츠렸다. 그러자 오히려 까망이 다가와 그의 손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싫어. 난 이게 좋아. 아랑이도 이걸 더 좋아하잖아.”
눈빛으로 사람을 제압하고 차갑고 묵뚝뚝하며 냉철하다고 소문난 그림자 길드 카젠이나 위대한 대마법사 베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대마법사님?”
오히려 만져달라고 더 들이대는 행동에 난처해진 아랑은 어색하게 까망이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카일을 쳐다보았다.
“……”
아랑의 품안에 편안하게 안착한 까망은 분홍색 혀를 쏙 내밀어 카일을 약올렸지만, 그걸 모르는 아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표정을 굳히고 있는 카일을 흘겨보았다.
“베르. 나중에 따로 이야기 좀 합시다. 그리고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것이면 빨리 하고 가고.”
카일과 까망이 사이에 뜨거운 불꽃이 튀는 걸 읽지 못한 아랑의 손은 또다시 익숙하게 까망의 머리와 등을 쓸고 있었다.
* * *
목걸이에 각인을 넣으려 분주하게 움직이던 닉은 갑작스러운 카일의 호출에 목걸이를 챙겼다.
“한스. 지하에 뭐가 있다고 오라는 거예요?”
각인을 끝내기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더니 갑작스러운 호출에 앞장서는 한스에게 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껏 만나던 곳은 서재였는데, 갑작스럽게 지하라니? 더군다나 이곳의 지하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다 아는 것이었다.
외딴곳에 있는 철옹성의 지하라고 하면 다들 떠올리는 것이 비슷했다. 지하 감옥 같은 어두운 느낌. 더군다나 지역 특성상 몬스터도 많았기에 이곳 지하실에 대한 소문은 더 부풀려졌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분이 오셔서 그곳에서 몇 가지 마법 실험을 하시려고 준비 중이랍니다. 마법사님도 같이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되실 것 같다고 꼭 참여해 달라고 하셔서요.”
“마법 실험이요?”
마법 실험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닉의 눈앞에는 수많은 환영이 떠다녔다. 흑마법사들의 어둠의 주술 중에는 사체를 가지고 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주로 그 대상들이 포악한 몬스터였다. 지하. 마법실험. 몬스터가 이어지자 닉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마법사님?”
자신을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한스는 뒤돌아보았다.
“서재! 서재에서 만나자고 전해 주시면 안될까요?”
“흠. 지하에는 몬스터도 흑마법도 없답니다.”
한스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닉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이곳의 오랜 집사답게 한스 역시 이곳 지하실에 대한 소문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카일의 부모님이 세력 확장을 목표로 지하에서 흑마법을 연구했다는 것으로 소문은 시작했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몬스터의 사체를 가지고 흑마법을 연구했고, 그 힘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더 많은 힘을 가지려 금단의 마법까지 넘을 본 카일의 부모님은 흑마법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궁에서 급히 뒷수습을 할 자를 보냈다.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영토를 넓히던 라이엔부르크는 몬스터 토벌쪽으로 무지한 임지 관리자가 오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금단의 흑마법까지 손을 댔다는 억울만 누명을 쓰게 되었지만 이미 이 세상을 뜬 그의 부모님은 그들의 무고를 증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라이엔부르크의 유일한 후계자 카일은 자연스럽게 왕궁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전쟁터를 떠돌았다.
그나마 그가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소드 마스터가 되자 왕궁에서 골칫거리인 라이엔부르크을 다시 그에게 내어주었다. 그제야 공작이라는 작위를 주고 네 번째 공주인 샬럿과 결혼을 시킴으로써 왕권 강화 및 그를 견제하려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을 뒷받침하듯 샬럿 공주가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기에 이 소문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카일이 애인과 수도 라이나에서 달콤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목격되면서 지금 이 소문은 요동치고 있었다.
“마법사님은 영주님의 오랜 친우이니 아시지 않습니까?”
선뜻 한스를 따라가지 못하던 닉은 친우라는 말에 느리게 발걸음을 떼었다. 지하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닉은 한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떠 있는 작은 불빛이 내려가는 길을 밝히고 있었다. 불빛은 손 한마디 정도로 작았지만 그 밝기는 그 어떤 불빛보다 밝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조명에 호기심이 일었다.
“한스. 저건 뭐죠?”
“대마법사님께서 밝혀놓으신 겁니다.”
“아…… 네?”
평소와 똑같은 한스의 대답에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닉은 저도 모르게 앞서 걷는 한스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대마법사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대마법사님은 한 명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보에 의하면 대마법사 베르를 서쪽대륙에 있었다. 그런데 언제 카일의 성으로 온 것이지? 무엇보다 며칠째 목걸이에 각인을 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자신도 몰랐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이곳에 왔다면 어째서 성이 들썩거리지 않았을까?
“마법사님? 왜 그러십니까?”
한스는 겨우 균형을 잡고 돌아보았다.
“대마법사님요? 제가 아는 그 베르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놀란 닉의 표정과 몇 번이나 되묻는 말에 한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 베르 대마법사님이 지하에 계십……”
한스는 갑자기 자신을 밀치고 뛰어 내려가는 닉의 행동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닉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 같았다. 따라오지 않으려고 엉뚱한 말을 해대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먼저 간 닉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려던 한스는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내려오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오늘은 무슨 날인 겐가.”
부지런히 다시 올라온 그는 정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두 마리를 늑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빤히 보는 경비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느릿하게 들어오는 은돌과 하양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만지며 그들이 돌아온 걸 반겨주었다.
성 지하에 있는 넓은 공터에 다다른 닉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하에 연무장보다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안에 있는 구성원 때문이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카일과 상기된 얼굴로 바삐 돌아다니는 아랑. 그리고 가운데는 작고 까만 용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분명히 한스는 대마법사님이 계시다고 했는데,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 공간에 있는 구성원은 똑같다. 대신 까망이 이리저리 날아다닐 때마다 바닥에 그려진 식의 문양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바뀌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 너. 옆에 책 보고 벽에 마법진 구성 수식 좀 적어.”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표정을 구긴 채 있던 닉은 머릿속에서 울리며 들리는 말에 퍼뜩 고개를 털었다. 분명 귀를 통해서 들은 것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 들린 것이었다.
“쯧. 마법사 중에 제법 똑똑하다는 놈도 어쩔 수 없네.”
다시금 울린 목소리에 닉의 시선은 까망이에게 향했다. 두어 번 눈을 껌벅이던 닉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물러섰다. 이곳에서 대마법사라고 칭할 수 있는 건 까망이뿐이었던 것이었다.
죽기 전에 자신이 그동안 해 왔던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말이 있다더니. 지금 닉의 눈앞엔 자신이 토벌대에서 까망에게 했던 짓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의 생각은 끝은 까망이를 알아보려 마나를 흘려 넣었던 장면에 멈췄다. 마나를 보낼 때마다 오히려 그것보다 조금 많은 양을 쏙쏙 빼내가던 것이…… 감히 인간이 드래곤에게 마나대결을 걸었던 것이었다.
“죽, 죽을죄를……”
황급히 바닥에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린 닉의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됐고. 빨리 이거나 하라고.”
카일에게는 무시와 핍박과 협박을 듣고, 아랑에게는 스스로 애완동물임을 자처했던 까망이지만 기본적으로 드래곤의 성격은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카일에게 당한 것을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틱틱거리는 까망의 말에 닉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명한 대마법사님이 드래곤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안 것을 떠나서 이곳에 왜 계신지 이 마법진은 어떤 용도로 쓰는 것인지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닉은 질문을 하기보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책 앞으로 다가가 복잡한 마법진을 훑어보았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네놈 마나를 받아갈 거니까 각오하고.”
카일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닉에게 푸는 까망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까망……아. 나도 그리면 안돼? 요?”
아직 까망에 대한 호칭 정리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아랑의 입에서 어색한 말이 흘러나왔다.
“정신 사납게 용 새끼로 돌아다니지 말고, 사람으로 변해서 하면 안 됩니까?”
“이건 마나를 주입하면서 써야 해서. 아랑이는 돕고 싶어도 못 도와. 그러니까 옆에 편히 앉아나 있고. 카일, 난 날아다니면서 그리는 게 더 빠르다고 아까도 말했을 텐데. 인간보다 이 모습이 능력 발휘하기도 좋다고.”
마법진을 그리는 마법붓을 집어든 닉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는 상황에 눈치를 보며 집중해서 책을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수식과 미묘하게 달랐지만 감히 드래곤에게 질문을 할 용기가 없는 닉은 슬쩍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접시를 보았다.
금색의 일렁이는 액체의 재료가 무척 궁금했지만, 역시나 질문을 삼킨 닉은 마법붓 끝에 액체를 조심스럽게 묻히고 벽에 보이는 대로 정성스럽게 수식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갈 수 있어? 요?”
닉까지 마법진을 쓰기 시작하자 아랑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 카일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일단 다 그리고 실험부터 해 봐야지. 이게 고대 마법이라 어찌될지는 나도 몰라.”
무책임한 까망의 말에 카일은 혀를 차며 옆에 앉은 아랑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알 수 없는 선들의 연속이었지만, 점차 복잡한 문양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법진 자체에서 은은하게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와. 트리같아.”
한 가지 색상이 아닌 알록달록한 색이 은은하게 깔리면서 일렁거리자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그 위로 손을 가져가 보았다. 손바닥에 색이 비치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는 빛이 트리장식같이 보였다.
밖에는 하얀 눈이 잔뜩 쌓인 겨울에 이런 것을 보자 아랑은 저도 모르게 캐롤을 흥얼거렸다.
“아랑. 그만하고 이리 와.”
아랑은 카일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랑이가 돌아다닌다고 마법진이 지워지거나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어차피 제대로 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야 뭐든 되니까 그냥 내버려 둬.”
까망은 잘 놀고 있는 아랑의 행동을 저지하려는 카일에서 톡 쏘아붙였다.
“흠. 전해 드릴……”
“크엉.”
한스는 은돌와 하양이가 왔다는 말을 전하려다 자신을 옆으로 밀고 뛰어나가는 두 마리 늑대에 의해 강제로 한쪽 벽으로 밀려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마리의 늑대가 아직 완성되지 않는 마법진 위로 뛰어다니는 상황에 지하실은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까망은 말없이 날아가 아랑의 머리 위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저……”
카일은 입 안에서 맴도는 육두문자를 참으려 두 손을 불끈 쥐었기에 아랑의 앞에서 험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뭐야, 너희들 어떻게 왔어?”
아랑은 자신에게 다가와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은돌의 힘에 옆으로 밀리면서도 환한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비록 민망한 모습을 마지막에 보이긴 했지만, 어색하고 부끄러운 건 잠시였다. 추운 겨울에 숲에서 추위를 떠는 것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이곳에서 지내길 바랬던 것이었다.
“내가 불렀지. 내 새끼들 왜 추운데 밖에서 떨고 지내는 거야?”
툴툴거리는 까망의 말에 아랑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그를 잡아 품에 안았다. 벽에 마법진을 새기던 닉도 다가와 얌전히 있는 하양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다들 다시 만난 것을 즐거워하는 와중에도 잔뜩 힘이 들어간 카일의 주먹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은돌도 하양도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다들 늦은 시간인데 그만하시고, 내일 다시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한스의 말에 우르르 몰려 올라가는 사람과 동물을 보며 카일은 긴 한숨을 쉬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렸던 손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