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5)

12.

느린 걸음으로 올라온 카일은 아랑의 침실 벽난로 앞에 엎드려 있는 두 마리 늑대와 아랑의 침대 위에 같이 앉아 있는 까망을 보고 말없이 가운데 문을 닫았다.

아마도 저 방은 오늘 밤 무척이나 따뜻하고 화기애애할 것 같았다. 반대로 자신의 방은 어둠과 냉기만이 가득했다. 아랑의 밝은 웃음소리가 울리는 그의 방으로 차마 가지 못한 카일은 조용히 차가운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까망이가 대마법사 베르인 걸 안 이후 아랑의 행동이 눈에 띄게 변했다. 혼자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부터 이상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호흡을 나눠도 미묘하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끔 마주 끌어안기도 하고, 입맞춤도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궁금한 것은 바로바로 해소해야 하는 그였기에 아랑의 방으로 갈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여전히 화기애애한 소리가 들리는 방문을 벌컥 연 카일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왜? 당당하게 궁금한 것을 물으러 가는 것이었으니까.

“어? 카일 왔어요? 이리 와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 커다란 카펫 위에 편하게 엎드린 하양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아예 배를 내놓고 누워 있는 은돌과 그렇게 드러난 배를 쓸어주며 편하게 앉아 있는 아랑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편안 옷을 입고 푹신한 카펫에 앉아 침대에 기댄 채 은돌의 배를 쓸어주는 아랑의 허벅지 위에는 까망이 앉아 있었다. 자신의 옆으로 빈 카펫을 툭툭 치는 그 손길에 카일은 어느새 얌전히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뭐 이쁘다고 쟬 옆에 앉혀?”

틱틱거리는 까망의 말에 카일은 말없이 원래 제 것이었던 것처럼 아랑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묵으라고 준 방이 여기가 아닐 텐데.”

“내가 뭐? 뭐? 여기 아랑이가 먼저 오라고 한 건데.”

체통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드래곤이 어린아이처럼 바락바락 대답하자, 카일은 옆에 있는 아랑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으하-암.”

까망과 카일은 투닥거리는 사이 큰 입을 쩍 벌리며 긴 하품을 하는 은돌을 본 아랑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행복하지만 무언가 허전하던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면 혼자가 되겠지만, 조금의 걱정도 되지 않았다. 힘들고 지칠 때 이 장면을 떠올릴 테니까, 한국에서의 일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은돌이 졸려? 하양이는 벌써 자는 거 같은데.”

푹신하고 부드러운 은돌의 배를 슥슥 쓸어주는 아랑의 시선은 눈을 꼭 감은 채 큰 움직임이 없는 하양에게 향했다. 추운데 나가지 말고 여기서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에도 카일과 까망은 계속해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아니, 네가 왜 따라가냐고. 마법진 그리는 게 쉬운 줄 알아? 아랑이 혼자 무사히 잘 보냈다가 잘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든데.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아랑은 혼자 보내라는 겁니까? 거기다 차원 이동하는 과정에 문제라도 생기면.”

“네가 그곳 세계에 대해서 뭘 안다고 따라간다고 난리야? 갔다가 오히려 아랑에게 짐만 되면 어쩔 건데?”

“그럴 일 없습니다.”

반말하다 존댓말을 하다 반존대를 섞어하는 카일과 여전히 시큰둥하게 틱틱거리는 까망의 말에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혼자 조용히 다녀온다는데, 왜 이렇게 사공이 많다. 이러다 배가 산으로 가겠네.

“잠시만요. 일단 한번 갔다 오면, 다음에 계속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저 혼자 다녀오고, 다음에 가고 싶으면 같이 가면 되죠.”

까망이와 카일을 말리려던 아랑은 자신을 향한 두 쌍의 눈동자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르지만 말리려고 한 말이 오히려 그들을 부추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계속 다닐 거라고?”

“한번 가동하는데 마나가 얼마나 드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새초롬하게 치켜뜬 까망의 눈동자와 그와 반대로 어둡게 가라앉은 초록 눈동자에 아랑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밤이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 그만 이제 자면 안 될까요?

 * * *

커다란 문 앞에서 서성거리길 5분. 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한 것도 한 5분쯤 지난 한스는 일부러 헛기침했다. 그리고도 입고 있는 옷을 점검한 후 노크를 2번 하고 문을 열었다.

어젯밤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더해 주고 있는 벽난로 덕분에 따뜻한 방안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지어졌다.

난로 앞바닥에 엎드려있던 두 마리 늑대는 슬쩍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춰 인사를 하고는 각자 편한 자세로 바닥을 여전히 뒹굴었다.

그리고 커다란 침대를 흘깃 본 한스는 창가 테이블에 들고 온 트레이스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한스는 따스한 차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일어나셨습니까?”

커다란 침대 가운데 아랑을 끌어안고 자던 카일과 시선을 맞춘 한스는 무겁게 쳐진 한쪽 커튼을 조금 걷었다.

밝은 햇살 한줄기가 어두운 방을 밝히자, 카일은 자신의 품으로 더 파고드는 아랑의 행동에 낮게 한숨을 쉬며 작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아랑의 머리 위에 배를 들어낸 채 낮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여전히 작은 드래곤의 모습으로 있는 베르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밤늦도록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듣던 까망까지 결국 모두 한방에 옹기종기 다정하게 모여 잔 것이었다.

“닉은?”

카일은 밤새 아랑에게 내어주었던 팔을 조심스럽게 빼고는 베개를 베어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지하에서 올라오지 않으셨습니다.”

“적당히 하고 잘 것이지. 얼마나 그려졌지?”

“베르님께서 시킨 벽 쪽에 들어가는 도안은 다 그렸다고 합니다.”

창가로 간 카일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아랑의 방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 집에서 느꼈던 그 따스함이 가득한 방의 기운에 그의 눈썹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다들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둬.”

한스가 조금 걷어낸 커튼을 다시 쳐 방안을 어둡게 만든 카일은 발소리를 죽여 자신의 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처음에 닉에게 부탁했지만 까망이 오고 난 후 그에게 넘겨졌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어제 건네받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카일의 눈빛이 짧게 반짝였다.

“언제 어디서든 아랑이가 손으로 만지면서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면 갈 수 있어. 대신 하루에 3번만 가능. 네가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이거 주인이 아랑이니까 아랑이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지.”

자신에게 목걸이를 넘겨주던 까망의 표정을 카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본 계획은 언제든 자신이 아랑을 자신의 옆으로 부르는 것이었지만, 베르는 그것을 엎어버린 것이었다. 모든 것은 아랑의 의지였다.

위치추적 마법으로 아랑을 찾고 언제든 자신의 옆으로 부르려돈 카일의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 아랑의 위치를 안다면, 자신이 직접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아가기 전에 아랑이 스스로 자신의 옆으로 와준다면 가장 좋겠지만.

“분명 내가 소환하는 걸 넣어달라고 했을 텐데.”

“아랑이가 물건이야? 네 마음대로 하게? 애 닳는 사람이 원래 먼저 움직이는 거야.”

한마디 툭 내뱉고 날아가 버리던 까망을 떠올리던 카일은 손으로 다이아몬드를 천천히 만져보았다. 지금은 특별히 티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목걸이를 아랑의 목에 걸어줄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어제 어수선한 분위기가 엮여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도 묻지 못했다.

왜 혼자 가려 하는지, 조금 어색 미묘한 둘 사이에 관한 그런 것들은 전혀 꺼낼 수 없는 안건이었다.

“오늘 특별히 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카일은 자신의 일정을 물어오는 한스를 보고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

“아니, 한스. 아무것도 하지 마. 절대 모른 척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목걸이를 보자마자 말을 꺼내려는 한스의 말을 잘라버린 카일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말을 하려는 그를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이미 한스가 만들어 놓은 사람 간지럽게 하는 이벤트를 겪어본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어색하고 이상했던 분위기가 떠오른 것이었다. 분명 한스는 또 도와준답시고 무릎 꿇고 아랑의 앞에서 목걸이를 보여주며 이상한 말을 하라고 시킬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알아서 해. 한스. 이걸 봤다고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목걸이를 다시 협탁 서랍에 넣고 욕실로 들어가며 카일은 한번 더 신신당부했다. 일단 적당한 시간에 아랑을 서재로 불러내 목걸이를 걸어줄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 묻지 못한 것을 묻고 진지하게 대화를 할 생각이었다. 불과 몇 분 뒤 일어날 일은 알지 못한 채.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놀다 잠든 아랑은 느지막이 일어나 대충 세수와 양치만 하고 방을 나섰다. 오늘도 역시나 까망이와 닉은 지하에서 마법진을 그릴 것이고, 카일은 평소와 같이 서재에 있거나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이미 손질한 약초들은 적당량씩 나눠서 포장해두었기에 할 일 없는 아랑은 부엌으로 들어섰다. 

쌀쌀한 날씨에 군것질 생각난 아랑은 창고로 들어가 여기저기 재료들을 뒤적거렸다. 이곳의 주전부리들도 맛있지만 겨울하면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따끈한 어묵 국물에 떡볶이도 먹고 싶고, 떡볶이 국물에 순대와 튀김을 찍어 먹고 싶지만, 그것들을 하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갔다.

“뭐 먹고 싶은 것 있어요?”

자신을 따라와 묻는 하인에게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던 아랑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리고 슬쩍 창고 밖으로 고개를 빼고는 현재 부엌에 있는 하인의 수를 가늠했다.

“우리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만한 거 먹을까요?”

두 팔을 걷어붙이며 싱긋 웃는 아랑은 보는 하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만드는 음식들이 맛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과정이 만만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빵으로 만든 음식이 주식인 이곳에 호떡이 없는 것이 말이 되냐! 아랑은 밀가루와 찹쌀가루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재료들을 빠르게 찾아냈다. 지금까지 만든 음식 중 가장 쉬운 것이 닭백숙이었고, 최고난이도가 김장이었다면 호떡은 그 중간 정도였다.

중간이라고 말한 이유도 재료준비나 반죽까지는 쉬운데, 기름을 넉넉히 두른 뜨거운 불판 앞에서 하나하나 일일이 눌러가면서 부치는 것이 고생이기 때문이다.

반죽을 부풀게 하는 재료까지 넣고 반죽을 만들어 휴지시키는 동안 아랑은 설탕과 계피가루, 각종 견과류를 큰 통에 넣었다.

“빵을 만드시는 건가요?”

호떡에 넣을 속을 만든 아랑은 씩- 웃었다. 빵이죠. 빵! 

“네. 호떡이요.”

“호……떡?”

떡이라는 단어를 들은 부엌 하인들이 일순간 모두 굳어버렸다. 기사들이 떡을 치던 것이 떠오르고 힘 좋고 체력 좋은 기사들도 나뒹구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제 떡이야 마법사님 도움으로 아랑이 먹고 싶을 때마다 편히 만들어 먹고 있지만, 떡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겐 그렇게 인식되어 있었다.

“떡?”

“네. 호떡!”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아랑은 해맑게 웃으면서 먹기 좋게 부풀어 오른 반죽을 손으로 꾹 눌러보았다.

“이제 다들 준비됐나요?”

손에 반질반질 기름을 바른 팀은 열심히 반죽을 떼어 아랑이 시킨 대로 속을 넣어 삐져나오지 않도록 동글동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준비하고 있던 팀은 달아오른 팬 위에서 열심히 호떡을 구워야만 했다.

부엌에서 시작된 호떡 굽는 냄새가 복도를 타고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성안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이게 이름이……”

카일은 서재로 우유와 함께 배달되어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둥그스름한 것과 한스를 번갈아 보았다.

“호떡이라고 합니다. 뜨거울 때 먹어야 더 맛있다는데, 이게 또 너무 뜨거워서 혀를 데지 않도록 주의하시라고도 하더군요.”

한스는 포크와 나이프를 주지 않고 이렇게 먹어야 한다고 했다며 뜨거운 음식 아래 작은 종이 같은 것을 감싸 카일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익숙하게 자신의 것도 하나 집어 들었다. 이미 부엌에서 두 개나 먹고 왔지만 계속해서 먹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참에 조금 쉬어야 겠다 생각하며 호떡을 들고 창가에 선 카일의 눈이 커졌다. 기름이 잘 베여있으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쫄깃하게 씹히는 반죽과 함께 달달하고 진득하며 고소한 소스의 맛은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뜨거움에 살짝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열기를 식혀야 했지만 순식간에 그의 입 안으로 호떡 하나가 사라졌다.

“여기……”

카일이 그렇게 빨리 먹을 걸 알았다는 듯 한스가 새것을 건네주자 얼른 받아들었다. 이번엔 처음과 다르게 조금 여유를 가지고 먹던 카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열심히 부엌에서 이걸 만들고 있을 줄 알았던 아랑이 종종거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은돌이와 하양이를 데리고 평소보다 옷도 많이 두툼하게 입은 데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연못밖에 없었다. 계속 된 추위에 얼음이 두껍게 얼었을 것이 분명한 연못은 겨울이면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곳이었다.

“도련님이 어디 가시는 걸까요?”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온 한스의 질문에 카일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연못 주위를 서성거리는 것도 잠시 아랑이 먼저 얼음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위험을 알리려는 듯 연못가에서 몇 번 짖던 하양이와 은돌이도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이리저리 나뒹구는 두 마리 늑대와 다르게 아랑은 차분하게 걸어 연못 한가운데 챙겨온 것들을 내려놓고 앉았다.

“낚시?”

호떡을 구워 성안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어 놓은 아랑은 꽁꽁 언 연못 위에서 낚시하고 있었다.

“지금 연못에 얼음이 얼마나 두껍게 얼었지?”

“글쎄요. 제법 얼긴 했겠지만, 굳이 이런 날씨에 연못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어서……”

누구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카일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지하로 향했다.

“지금 당장 연못의 얼음을 단단히 얼려.”

까망은 열심히 날아다니며 마법진을 그리다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 비틀거렸다. 조용한 공간에서 닉과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는데, 카일의 큰 목소리에 이어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연못 얼음?”

까망보다 먼저 반응한 닉은 열심히 놀리고 있던 붓을 잠시 내렸다.

“지금 아랑이가 연못에서 놀고 있으니까 혹시나 빠지면 다 니들 책임이니 알아서 잘 얼려.”

“……내가 네 전속 마법사냐?”

카일의 옆으로 날아간 까망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처음 보는 음식을 날름 먹고는 구시렁거렸다. 아랑이 연못 위에서 위험하게 놀고 있다는 사실에 먹던 음식을 그대로 들고 서재에서 지하실까지 내려올 만큼 카일은 급했다는 것이었다. 

퉁명스럽게 말하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도 구시렁거리는 것과 다르게 까망은 이미 두툼하게 얼어 있는 얼음을 조금 더 얼렸다. 그 정도쯤은 보지 않고도 가능할 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거 뭐야?”

“아……”

카일은 자신의 손에서 사라진 호떡을 보고는 잠시 망연자실했다. 

“마법사님. 잠시 쉬시지요.”

트레이에 호떡이 잔뜩 쌓인 접시와 우유를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던 한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까망의 행동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뜨거운 것 하나를 물고 가는 걸 보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호떡을 급하게 먹어치운 까망이 입을 열고 입김을 불자 뜨거운 불이 잠깐 솟았다 꺼졌다.

“얼음은?”

“했어. 했다고!”

재차 얼음에 대해 묻는 카일을 향해 퉁명스럽게 대답한 까망은 얼른 호떡을 하나 더 물었다. 

 * * *

“야. 그만 좀 미끄러져. 발톱 없어? 발톱 세워서 얼음을 콱콱 짚고 걸으면 안 미끄러지잖아.”

아랑은 열심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뒹굴고 있는 두 늑대에게 한마디 하고는 챙겨온 연장으로 조심스럽게 얼음에 구멍을 뚫었다. 따끈따끈한 호떡으로 배를 채운 아랑의 눈에 연못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배도 채웠고 또 다른 할 일을 찾던 아랑에게 꽁꽁 얼어붙은 연못은 새로운 놀잇감이었다. 대충 썰매를 만들어 탈까, 아니면 추운데 그냥 성안에 웅크리고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보인 것이었다. 자신의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하인들의 말에 아랑의 귀가 팔랑거렸다.

“연못에 물고기 진짜 많은데 겨울엔 걔들 다 어떻게 지내는가 몰라.”

“얼어 죽지는 않는 게 신기하지. 겨울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얼음 녹고 나면 또 잔뜩 몰려다니는 게 보이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겨울 내도록 뭐 먹고 물도 차가워지는데 어떻게 사냐고.”

“연못에 물고기들이 많다고요?”

빙어 낚시해서 고것들을 기름에 바짝 튀기면 이게 또 별미인데, 이곳에 있는 것이 빙어인지 커다란 붕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많지. 새끼 손가락만 한 것부터 내 팔뚝보다 큰놈까지 다양해.”

대화를 들은 아랑은 고민도 없이 겨울엔 빙어낚시라며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잡히면 뭐 잡히는 대로 땡큐고, 안 잡히면 말고. 잡히면 오늘은 생선튀김이다!”

낚시 바늘에 미끼를 걸어 줄낚시에 도전하는 아랑의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추운 날씨에 콧물이 흘러 훌쩍거리긴 했지만, 멍하니 안에만 있는 것보다 나았다. 덤으로 커다란 늑대 두 마리가 어떻게든 얼음 위에서 걸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컹-.”

때마침 가까스로 자신 쪽으로 좀 가까이 오는 듯하던 은돌이 헛바람을 내면서 반대편으로 죽 미끄러져 내려갔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심심해서 시작한 낚시로 인해 아랑의 입에서는 흥겨운 노래가 연신 이어져 나왔다. 낚싯줄을 넣기만 하면 줄줄이 엮여 나오다 보니 처음에 들고 온 바구니엔 물고기가 가득했다. 그리고도 얼음 위에 이리저리 펄떡이다 죽은 큰 물고기들은 은돌과 하양이의 간식이 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강태공이 아니라 설태공이다. 설태공. 내가 설 씨라 추위에 강하다 이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또 물고기를 끌어 올린 아랑은 얼음판 위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낚아채는 하양을 바라보았다. 벌써 먼 하늘이 불그스름해지고 먼저 뜬 새끼 해는 종적을 감추고 보이지도 않았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일부러 일을 찾아다니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아랑이었다. 따뜻한 방안에서 온종일 뒹굴면서 잠을 자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걸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몸이 편하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이 너무 버거웠다. 차라리 몸을 바삐 움직이고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게 편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부엌을 들락거리며 번거로운 요리들을 생각해서 만들었고, 이렇게 추운 날씨에 콧물 줄줄 흘리면서 오후 시간을 낚시로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려한 마법진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차 다가왔다.

한국으로 다녀오는 것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시간의 공간에 갇힐 수도 있고 영원히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안전하게 갔다가 원할 때 다시 돌아오는 것이지만, 차선은 무사히 도착하기라도 하는 것. 최악은 시간의 틈에서 미아가 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시간을 주면 까망이 다시 찾아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이미 카일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자신과 같이 가는 것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다.

해서 마법진 역시 일인용이 아닌 여러 사람이나 많은 것을 이동시킬 수 있는 크기로 만들기에 시간이 더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아랑은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를 위험한 곳에 카일과 같이 갈 생각이 없기에, 그의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눈만 마주하면 마법이라고 걸린 듯 그의 말이 다 맞는 것 같고, 그와 모든 것을 같이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지금은 혼자 다녀오고,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와 한국을 재방문할 의사는 있었다.

“은돌아. 카일이는 여기 두고 가는 게 맞겠지?”

이제 얼음에 익숙해져 제법 잘 돌아다니다 펄떡 뛰어오른 물고기를 낚아챈 은돌은 아랑의 말보다는 물고기를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사히 한국에 간다면 상황을 파악이 먼저였다. 여기만큼 시간이 흘렀을지, 아니면 수백 년이 지났을지. 자신이 사고당한 그날에 시간이 멈춰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 상황에 맞춰 그 놈을 처벌을 하든 어떤 결론을 낸 후엔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한국에 많은 추억이 있고 그리운 것들도 있지만, 이곳에는 가족이 있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한스가 있고, 절대 드래곤이라 믿을 수 없는 귀여운 까망이 있었다. 지금도 눈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놀고 있는 두 마리 늑대가 있고, 같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성 식구들이 아른거렸다.

“그냥 가지 말까?”

멍하니 해가 지는 것을 보던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너무 위험한 모험이었다. 엄마의 묘소에 직접 만든 음식을 들고 가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기도 하고, 가끔 꿈에서 보는 그놈을 벌하고 싶지만 이제 그 일들은 아랑에겐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잡은 물고기가 든 통의 손잡이를 물고 앞서 걸어가는 은돌의 뒤를 따라가며 아랑은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을 보았다. 흐릿하게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로엔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았다.

느리게 걷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슬쩍 몸을 비비는 하양의 행동에 아랑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쓸어주었다. 

“그래. 안 갈게. 우리 여기서 다 같이 살자. 엄마도 할매도 내가 행복한 걸 원할 거야.”

어깨를 으쓱한 아랑의 얼굴에 옅게 드리워진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느리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다 못해 거의 뛰다시피 한 아랑은 망설임 없이 지하로 향했다.

“있잖아요!”

한창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간 아랑은 큰 소리로 자신이 결심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

“어. 딱 맞춰서 왔네.”

자신 쪽으로 포르르 날아온 까망을 잡아 품에 안은 아랑은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카일, 닉, 한스, 까망. 자신을 따라온 은돌과 하양까지 그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여러 번 말할 것도 없이 이곳에서 한 번에 말하면 된다.

“저……”

“저기 가운데 들어가서 서봐.”

결심한 것을 말하려는 것과 동시에 품에 안은 까망의 재촉하는 말에 아랑은 일단 마법진 가운데로 걸어갔다.

“반짝 반짝 이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 그려졌단 말이야.”

품에서 빠져나간 까망이 날아올라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하는 말에 아랑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문양들을 보았다. 며칠을 고생해서 만든 것이 자신의 한마디에 무용지물이 될 걸 깨닫자,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이 겉으로 나오지 못했다.

“자자. 이렇게 아랑이가 여기 서고. 카일 너도 이리 와서 아랑이 손잡아.”

카일이 마법진으로 걸어들어 와 아랑의 한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카일은 방금까지 밖에서 놀다 들어와 얼음장처럼 차가운 작은 손을 만지면서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꼈다.

“마법진에 걸쳐진 건 아무도 없지?”

마법진에서 떨어진 곳에 하양과 은돌이 얌전히 앉아 있고, 한스과 닉 역시 마법진 밖에 서 있었다.

“닉은 내가 말해준 주문 다 외웠고?”

까망의 말에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주문만 다 외우면……”

까망은 아랑과 카일의 머리 위를 날면서 기분 좋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한스는 평소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마법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아랑에게 목걸이를 전해줄 환상적인 이벤트를 떠올렸다. 내일 오후에 영주님 모르게 목걸이를 가지고 나올 생각이었다. 

성의 홀 가운에 만들어질 커다란 장식품의 가장 위. 커다란 별이 올라갈 그 자리에 그 목걸이를 걸까? 아니면, 축제용 케이크 속에 넣을까? 성의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청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한스의 미소는 짙어지고, 저도 모르게 아예 눈을 감고 자신이 상상하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컹컹컹!”

한창 생각에 빠졌던 한스는 갑작스러운 늑대들이 짖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은돌이와 하양이 미친 듯이 허둥거리며 짖어대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늑대들과 자신의 사이의 공간이 허전하게 느껴진 한스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 한쪽에 딱 붙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닉과 여전히 정신 사납게 짖어대는 늑대들 외 그 누구도 이 공간에 있지 않았다.

까망이와 아랑. 카일이 보이지 않았다.

“허…… 이…….”

허공을 가리키는 한스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옴과 동시에 벽에 붙어 서 있던 닉이 벽을 타고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거 맞……죠”

닉은 두 손으로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분명 까망이 주문을 다 외웠냐고 물었기에 그냥 자신이 외운 주문을 떠올리며 입 안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그 긴 주문을 다 외운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눈빛으로 마법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본 닉의 눈동자가 파리하게 떨렸다.

까망이 물었고 그냥 다 외웠다고 자신 있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그들이 워프해 버릴 줄이야. 처음 계산했던 아랑과 카일뿐 아니라 허공에 떠 있던 까망까지 사라졌다.

한국으로 가게 되면 여비로 쓰기 위해 잔뜩 준비해 놓은 바로 현금화 할 수 있다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와 자잘한 보석들. 아랑이 복수를 위해 열심히 말리고 다듬어서 준비한 약초들. 그들이 챙겨가려 했던 많은 것들이 서재에 그대로 있었다.

거기다 이 사태를 수습할 까망까지 사라진 상황에 닉과 한스는 허망하게 두 눈만 껌벅거렸다.

“……돌아올 수는 있는 겁니까?”

미친 듯이 짖던 은돌과 하양도 사태 파악이 된 듯 조용해진 사이 한스의 입에서 느리게 말이 흘러나왔다.

“대마법사님도…… 같이 가셨으니 돌아오시지 않을까요?”

닉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

아랑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이 당황스러웠지만, 깍지 끼워 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에 슬쩍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여기가 어디지?”

슬쩍 붙어오는 아랑을 품으로 끌어들이며 카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멀리서 산짐승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빛. 눈이 부셔서 뜰 수 없을 만큼 환한 빛이 갑자기 나타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자신들에게 날아왔다.

재빨리 안고 있던 아랑을 자신의 등 뒤로 세우는 사이 환한 빛은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옆을 스쳐 빠르게 사라졌다.

겨우 빛이 사라지고 무슨 상황인지 수습하려는 카일의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빛이 나타나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건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다양한 모양의 물체였고, 굉장한 빠르기와 소음을 내며 지나치고 있었으나, 그들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헐…… 대박. 미쳤네.”

여전히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던 카일은 자신의 뒤에서 앞으로 나오며 감탄사를 내뱉는 아랑을 바라보았다.

“진짜 왔어.”

아랑은 어리둥절해 서 있는 카일의 손을 잡아 찻길에서 조금 더 떨어진 풀숲으로 잡아끌었다. 그 순간에도 어두움 밤길을 운전하는 차들이 간간이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뭐?”

“콜록.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여기 한국 맞아요.”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친 카일의 얼굴엔 넋이 나간 듯 했지만, 아랑은 손끝으로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 매캐한 매연과 숨이 턱턱 막히는 탁한 공기는 이곳이 한국인을 한 번 더 알려주고 있었다.

“주문 안 외웠잖아.”

얼빠진 카일의 목소리에 아랑은 길게 한숨을 쉬며 그와 자신을 훑어보았다. 편안한 일상복을 입고 있는 카일과 역시나 일상복 위로 얼음에서 논다고 조금 더 두꺼운 옷을 받쳐 입은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럼. 우리만 온 건가?”

중얼거리는 카일의 말에 아랑은 무슨 말을 하려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자동차를 보고 적응하지 못하는 카일을 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별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엔 둥그런 달이 하나였다. 그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국에 떨어졌다.

“저게 뭐라고?”

“자동차요.”

“어떻게 저렇게 빠르지?”

“기름으로 달리니까요. 시속 100km는 넘을 거고, 그건 아마 말로 달리는 것보다 3~4배는 빠를걸요.”

아랑은 터덜거리면서 찻길을 따라 걸었다. 역시나 자신의 옆을 걷는 카일의 눈은 이제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찾기 바빴다. 

산속에서 이런 이상한 복장으로 무엇보다 덩치가 커다란 카일을 데리고 히치하이킹을 한다는 건 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길 따라 내려가면 정확히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지만, 이미 아랑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날 그가 자신을 밀었던 그 산길. 자신이 실종되었을 그 자리에 떨어진 것이었다. 일단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맞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당장 이곳의 날짜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차들이 익히 아랑이 아는 것들이었기에 어쩌면 사고 당일일 수도 있었고,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자동차는 다 다르게 생겼나?”

“네. 다 다르죠. 기본적으로 일반적으로 흔히 타는 승용차, SUV가 있고 목적에 따라 버스, 트럭, 지게차, 포크레인 등등이 있답니다. 승용차라도 말했지만 이것도 모양이 다 다르고, 또 가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니까 엄청 많다고 할 수 있죠.”

아랑은 대충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 하나를 넘자 산 아래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불빛들이 가득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해 뜰 무렵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지나가는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서…… 그런데 어디 전화해야 하지? 문득 새 아빠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지만 엄마와 자신 그리고 그의 전화번호만큼은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을까? 아니 그 번호가 그대로라고 해도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태워줘요?”

생각에 잠겨있던 아랑은 갑작스럽게 들리는 말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5톤 트럭의 운전석 창이 열려있음에 얼른 그리 달려갔다.

“네! 어디까지 가세요?”

아랑은 불안한지 자신의 옷깃을 잡아끄는 카일의 손을 뿌리치고는 최대한 밝고 착한 목소리로 명랑하게 대답했다.

“서울까지 가는데, 둘 다 복장이……”

“아! 저희 영화촬영 알바생들인데 차를 놓쳐서요.”

아랑은 얼른 떠오르는 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젊은 사람들이 고생이 많네. 그래서 이 길을 걸어내려 가려 했어? 날도 추운데, 일단 타고 이야기하지.”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밤길 운전하면서 심심하던 차였다는 아버지뻘 운전기사님의 차를 얻어탄 아랑은 말없이 카일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은 궁금해도 다 참아. 제발.

창가 쪽에 카일을 앉혀 직접 안전벨트를 매준 아랑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아저씨와 농담 따먹기처럼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의 시간이 이 세계와 똑같이 흘러있었다. 그리고 기사님의 아랑이의 실종사건을 알고 계셨다.

“진짜 그 사건을 기억하세요?”

“내 일이 일이다 보니까, 이 길을 자주 다니는데 가끔 생각나지. 갑자기 학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데. 그 아비라는 사람이 난리도 아니었잖아. 학생 찾아야 한다고. 거기다 그날 학생 엄마 묻고 온 날이랬나? 그런 날 하필 학생까지 실종이라고 방송도 엄청 나오고 그랬어.”

“그래서? 그 학생 어떻게 됐대요?”

아랑은 두 손을 꼭 쥐고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한 몇 달 경찰이랑 군인이랑 해서 이 산을 샅샅이 뒤졌는데 뭐 하나 찾은 게 있어야 말이지. 그러다 흐지부지되고 나야 모르지. 한창 떠들썩할 때나 들었지 뭐. 그런데 그 학생 집이 부자라면서? 그런 말도 있었잖아. 그 애 아비가 다 죽인 거 아니냐고. 그 엄마가 애 데리고 재혼한 거드만. 아니, 학생은 이 소식 몰라?”

아랑은 자신의 손을 감싸는 카일의 손길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입으로 듣는 자신의 소식에 태연할 수 없었다. 카일이 자신의 손을 감싸지 않았다면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던 것도 몰랐었다. 시선은 창밖에 둔 채 손등을 일정하게 토닥거려주는 그 행동에 아랑은 잠시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 그때 제가…… 잠시 외국에.”

“그건 그렇고 어디쯤 내려줄까? 나는 서초 쪽 물류창고로 가는데.”

“그럼 강남역 가능할까요?”

“뭐 조금 돌아가면 되지. 뭐 촬영하길래 복장이 그래? 사극은 아니고 저쪽 서양 쪽 건가?”

“네. 유럽 쪽 그런 느낌이죠?”

아랑은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최대한 요즘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하는 건 좋은데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까? 강남역이면 마지막까지 엄마와 살던 집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었다. 이미 그 사람은 뜨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전후사정을 다 떠나서 카일과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아저씨. 저희 가방이랑 짐도 전부 다른 팀이 들고 가서 그런데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아랑은 아저씨에게 넘겨받은 휴대전화를 손으로 천천히 만져보았다. 현대 문명의 모든 것을 집약해 놓은 이 기계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아랑은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갈 거야.]

때마침 휴대전화 시계는 새벽 4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일은 아랑의 손을 잡을 채 모든 것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자동차라는 물건은 요상하면서도 참으로 편리한 것이었다.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와 일정한 법칙을 가진 신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 무엇을 건들 때마다 따뜻해졌다가 다시 시원해지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와. 노래 좋네요.”

카일을 정신없게 만드는 희귀한 음악과 노래가 끝나자마자 아랑의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역시 젊은 애들은 다르네. 나는 하도 정신 없어가지고.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고.”

“겨울이면 한 번쯤은 흥얼거리게 되는 5인조 그룹 ‘화이트 스톤’의 ‘snow’ 였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많이들 졸리시죠. 졸음 깨시라고 신나는 음악 준비해 봤고요”

“화이트 스톤?”

이어지는 라디오 디제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아랑은 그새 자신이 모르는 그룹 이름이 나오자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4년이 넘었으니 수많은 그룹이 나오고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좋아하던 보이그룹은 어떻게 됐으려나.

긴 시간 차를 타다 보니 카일도 아랑도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랑은 진심으로 넋을 놓은 표정으로 제자리에 발이 박힌 듯 서 있는 카일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분명 한국에 대해서 그와 까망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들 신경 써서 듣는 것 같았지만, 이걸 실제로 볼 줄은 정말 몰랐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역 4번 출구 앞. 출근 시간의 교통체증과 거의 밀려다니는 것 같은 수많은 사람과 머리를 뒤로 젖혀야 끝을 볼 수 있는 높은 건물들이 가득했다.

“카일.”

“……뭐라 할 말이 없군.”

목석처럼 서서 주위를 한참을 둘러본 카일의 소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문제는 너무나도 튀는 복장으로 그곳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다들 바쁜 일정에 잠시 보고 지나쳤지만, 간간이 자신들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것을 보며 아랑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슬쩍 가렸다.

“일단 어디로든 가죠.”

아랑은 카일의 손을 잡고 뒷골목으로 그를 끌었다. 열심히 사람을 헤치며 걷던 아랑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외벽에 붙어있는 창에 비친 자신과 카일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영화를 찍다 나온 것 같은 카일은 정말 완벽하게 분장한 귀족 같았고, 자신은 영락없는 그런 귀족의 시동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연갈색 머리카락과 연보랏빛 눈동자였다.

자신이 발걸음을 멈추었기에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카일을 보던 아랑의 눈동자가 갑자기 빛을 발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들을 살려줄 것이 그곳에 있었다. 아랑은 급히 카일의 상체를 더듬었다. 

그래. 잊고 있었지만 카일은 귀족이다. 카일이 영주가 되고 몬스터의 부속물 판매로 그는 현재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였다. 그런 그의 옷값은 상상을 초월했고, 그건 일상복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 금단추. 금단추.”

여전히 사람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도 잊은 아랑은 황급히 카일의 가슴을 마구 더듬었고 드디어 그의 손에 단추가 잡혔다. 금으로 만든 단추. 그런 단추가 하나 둘, 셋, 넷. 단추를 셀 때마다 아랑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금단추가 무려 일곱 개 거기다 제일 상단에 있어 목깃을 고정하는 단추는 시퍼런 색이 번쩍거리는 것이 보석이 확실했다. 열심히 카일의 앞에 서서 그의 몸을 더듬던 아랑은 얼른 그의 팔을 끌어 소매 끝을 확인했다.

“으흐흐흐흐…… 부자다. 부자.”

카일의 소매 끝엔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아침 햇살에 미칠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랑은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못한 채. 손에 들린 흰 봉투를 잘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강남역 사거리인 만큼 없는 게 없는 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금단추 1개를 판 것이었다.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과 카일을 훑어보긴 했지만, 금은방 사장님은 특이만 문양이 들어간 단추를 기꺼이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 측정된 금단추 1개의 무게는 30g. 오늘 금 시세를 확인시켜준 금은방 사장님은 즉석에서 150만원이 넘는 현금을 5만원 지폐로 정확히 계산해 주었다.

단추 하나만 팔아도 150만 원 이상이니까 7개니까. 천만 원. 거기까지 계산이 끝난 아랑은 말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카일의 배를 툭툭 쳤다.

“이제 우리 부자니까. 일단 쇼핑부터 할까요? 그리고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 드릴게요.”

분명 카일의 옷에서 뜯어낸 단추인데 그 돈의 주인이 자신인 것처럼 아랑은 그의 손을 잡고 가까운 멀티샵으로 향했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청바지에 스웨터, 가벼운 오리털 패딩으로 바꿔 입은 아랑은 카일과 함께 가까운 삼계탕 집으로 향했다. 라이엔부르크만큼 춥진 않지만 제법 추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따끈한 것이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일단 급한 돈은 금과 보석을 파는 것으로 될 것 같고, 아랑은 어떻게 하고 싶지?”

삼계탕 두 그릇을 시킨 아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는 카일의 손을 테이블 위로 꼭 잡았다. 처음 낯선 곳에 떨어졌을 때 느낀 그 복잡한 감정을 그가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자신은 한적한 시골이라 자극이 덜했지만, 지금 카일은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이 그에겐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색색의 다양한 차부터 해서 사람들이 들고 다니며 보고 귀에 대고 말하는 휴대전화까지.

그리고 카일은 식당에 들어온 이후로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대형 TV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잠시 우리가 지낼 곳을 알아봐야겠죠. 그리고 경찰서로 가서 제 실종신고를 확인하고, 신분증부터 발급받아야 할 거고요. 그리고 그놈을 찾아야죠.”

“이곳도 여관이 있겠지?”

“여관요? 아주 어마어마한 곳이 있죠. 진짜 까무라치게 놀랄 만한 곳.”

아랑은 뜨겁게 달아오른 뚝배기 안에서 야시시하게 다리를 꼬고 뽀얀 배를 들어내고 있는 영계를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한방 삼계탕이라고 하더니 국물에 동동 떠 있는 대추와 마른 인삼 한 뿌리가 자신에게 얼른 먹고 몸보신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릇 뜨거워요.”

자신처럼 뚝배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카일에게 얼른 한마디 덧붙인 아랑은 숟가락을 들어 맑은 국물부터 떠먹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게 뭐라고?”

“그때 우리가 내가 해준 거요. 삼계탕.”

“이게 닭인가?”

카일은 말없이 자신의 주먹을 쥐어보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이 작은 것이 닭이라고? 이건 닭이라기보다 조금 큰 병아리 같이 느껴졌다.

“네. 영계라서 작은 거고……”

반계삼계탕도 아니고 영계가 한 마리 다 들어가는데다 한약재까지 추가된 한방 삼계탕을 보고 당황해하는 카일을 보며 아랑은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한 마리 더 주문했다. 

아주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 그의 한 끼 식사량은 아랑의 하루 식사량과 맞먹었다. 그러니 카일의 주먹만 한 닭은 그에겐 한입거리밖에 안되었다.

M사이즈를 넉넉하게 입는 자신과 최소 XL에서 XXL를 사야했던 카일을 떠올리며 닭의 배를 익숙하게 가위로 잘랐다.

그 안에 들어있는 찹쌀을 국물에 말고, 영계를 꺼내 편평한 그릇에 옮겨 카일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그의 그릇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닭이 작다고 놀라지 마요. 앞으로 놀랄 일들에 비하면 세 발의 피니까. 어서 먹어요. 그리고 까망이랑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무사히 잘 도착한 건 다행이지만 돌아갈 것도 걱정이고.”

잘 익은 깍두기 하나를 씹으며 아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걱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돌아갈 방법은 있는 것 같군.”

뜨끈한 국물에 녹진하게 풀린 찹쌀을 퍼먹던 아랑은 카일의 말에 씹고 있던 것을 꿀떡 삼켰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인 카일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작은 상자를 보던 아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고 작은 상자. 확실하게 무언가 있어 보이는 그 상자는 아랑이 익히 아는 것이었다. 

카일이 자신과 있을 때 같이 샀던 것이고,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저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있었다.

“……”

카일이 상자를 열어서 보여주기도 전에 낚아챈 아랑은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었고, 역시나 그 안에 마석이 들어간 목걸이가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네가 만지면서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면 워프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신 하루 3번만 가능하다고 했지.”

아랑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마주 앉아 삼계탕을 먹던 카일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목걸이를 집어 들고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 목걸이가 자신의 목에 안착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밥 먹다말고 “내 아를 낳아도”라고 청혼한다는 말이 떠돌긴 했지만, 삼계탕을 먹다말고 값비싼 목걸이가 자신의 목에 걸릴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에?”

아랑의 입에서 이상한 의성어가 튀어나왔다. 그때 이거 공주님 주려고 산 것 아니었나? 그럼 처음부터 그가 이것을 자신에게 주려고? 

“어차피 네가 만지면서 워프할 곳을 떠올려야만 이동 가능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예쁜 보석 정도겠지.”

“삼계탕 나왔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한 상황은 추가 주문한 삼계탕이 나오면서 깨끗이 정리되었다. 아랑은 손끝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얼른 니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워프 기능을 모르는 이곳에서 그냥 팔기만 한다고 해도 이게 돈이 얼마야.

“이거 나중에 실험해 봐요.”

아랑은 이제 익숙하게 삼계탕을 먹는 카일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이동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시대를 살면서 신분증이 없다는 건 굉장히 불편한 일이었다. 학생일 땐 엄마가 만들어준 휴대전화에 교통카드 한 장 들고 다녀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아랑은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흔한 휴대전화를 살 수도 없었고, 은행에서 통장 하나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후 근처 카페 창가에 앉은 아랑은 핫초코를 홀짝거리면서 옆에 앉은 카일을 흘깃거렸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카일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참 잘난 얼굴이긴 했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카일은 유독 눈에 띄었다.

거기다 환을 먹을 때 알아봤지만, 쓴 것에 강한 카일은 아메리카노가 제법 마음에 드는지 은은한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분명 밖에서도 안에서 다 보인다는 걸 알 텐데도 삼삼오오 지나가며 흘깃거리거나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이제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가 별거 아니란 거 아시겠어요?”

괜히 심통이 난 아랑은 검지 손끝으로 카일이 들고 있는 머그잔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까지 짓고 있던 은은한 미소는 사라지고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카일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것보다 저건 뭐지?”

카일이 무언가를 가리키자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카일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당기자 아랑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다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집중해서 보았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대포폰/대포통장……]

카페 밖 인도 한쪽에 있는 입간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 오…… 오…… 대박. 이거. 이거다!”

잠시 생각을 하느라 멈춰있던 아랑이 호들갑을 떨며 카일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경찰서로 찾아가 자신의 지문을 조회하고 공식적인 방법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사라진 지난 시간에 대해서 밝혀야 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나타났다는 것이 새 아빠에게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카일 진짜 대박.”

아랑은 활짝 웃으며 저도 모르게 카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돈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일단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돈을 구하고 새 아빠만 처리한 후 돌아가기 위해서는 굳이 이곳에서 많은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신이 난 아랑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카운터에서 펜과 종이를 받아와 그곳에 남겨진 전화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아랑과 카일은 늘 있어왔던 일이었기에 깨닫지 못했지만, 카페 사람들과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표정은 경악에 가까웠다. 큰 키와 체격. 외국 모델 같은 카일이 먼저 사람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오래 머물러 있는 건 그 옆에 있는 옅은 갈색 머리에 연보랏빛 눈동자를 한 아랑 때문이었다.

한국에 놀러 온 잘생긴 외국인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들의 흘깃거리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스킨쉽에 당황하며 다른 곳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와 카일의 옆에 앉아 열심히 메모하는 아랑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주던 카일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오래 머물러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랑이 휴대전화라고 설명해 주던 손바닥만 한 기계들을 들고 자신을 보고 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찰칵.”

귀를 거슬리는 기계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들에게 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기에 카일은 무심히 넘겼다. 무엇보다 지금 아랑에게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것이 뿌듯했다.

“중요한 정보였나?”

“응. 우리 이제 마음대로 연락도 하고, 그럴 수 있거든요.”

불법적인 내용을 담은 스티커들은 아래쪽에 붙어 있거나 훼손되어 있는 것이 많았기에 집중해서 그것들을 보며 하나하나 적어가던 아랑은 카일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촉.”

기분 좋은지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랑이 귀여워 카일은 짧게 그의 입술을 훔쳤다. 아랑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잠시 짓고는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필요한 연락처를 다 적은 아랑은 핫초코를 마시다 자신의 머리를 여전히 쓰다듬고 있는 카일의 손을 슬쩍 치워냈다. 아까보다 사람들이 더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문득 카일의 얼굴을 다시 보던 아랑은 그의 옆에 있는 종이봉투를 흘깃 보았다.

저 안에 있는 카일의 옷에 붙은 보석이 얼마던가? 불안한 마음에 저것을 얼른 현금화해야 할지 아니면 어딘가에 보관할지 걱정이 앞섰다.

“카일. 혹시 뭐 또 갖고 온 거 없어요?”

조금 전 그의 주머니에서 목걸이가 나왔던 것이 떠오르자 아랑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옷가게에서 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오느라 입고 온 옷에 있던 것들을 그대로 옮겨 쑤셔 넣었던 것이었다.

어떡하다 들어갔는지 [gol-a-po] 1병과 얼음판 위에서 낚시하면서 간간이 은돌과 하양에게 던져준 칡뿌리 몇 개가 나왔다. 

“……”

카일이 턱턱 올려놓는 것을 보던 아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것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일까? 작은 주머니를 열어보자 금화와 은화가 소복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그가 자주 쓰는 마법 만년필이 놓였다.

잉크를 넣어줄 필요 없이 무한대로 쓸 수 있다고 하던가? 만년필을 들고 종이에 끄적거리던 아랑은 그 옆으로 놓이는 팔찌를 유심히 보았다.

늘 카일이 하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던 것인데, 심플한 검은색 팔찌를 들어본 아랑은 그 묵직함에 놀랐다. 거기다 검은색에 수놓아진 은색의 특이한 문양이 이것 역시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

“이것도 팔면……”

“마법 각인 팔찌.”

무게를 가늠하면서 팔 생각을 하던 아랑은 마법이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아랑이 들고 있던 것을 카일이 들어 아랑의 손목에 채우자 착용자 사이즈에 맞게 자연스럽게 크기가 줄었다.

“애걔……”

겨우 착용자 기준으로 사이즈 조절되는 거? 뭐 특이해서 돈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네.

“신분 위장용.”

아랑은 카일의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없어서 팔찌를 유심히 보았다. 어떤 식으로 신분을 위장한다는 거지? 

“신분 위장?”

카일에서 팔찌의 효과를 들은 아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까 이게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굳이 경찰서를 가고 어디를 가고 해서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마법처럼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카일이 용병일을 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구매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게 있으면 저 대포폰 같은 건 필요도 없잖아.”

아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시 생각도 하고 숨을 돌릴 겸 카페에 있는 것이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경찰서에서 신분 확인을 받아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가기 전 미용실에서 검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검은색 써클 렌즈라도 사야 하나 고민하던 것들이 한 번에 날려버리는 좋은 해결책이었다.

“핸드폰 개통되었습니다.”

아랑은 친절한 직원의 말을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굳이 최신식 고가의 휴대전화는 필요 없기에 조금 구형의 것으로 선택했더니 기계는 무료에 월정액만 선택하면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랑은 얼른 팔찌를 카일의 손목에 채웠다.

잠시 후 아랑은 빨간색을 선택했기에 같은 기종의 까만색 휴대전화가 카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또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최신형 휴대전화는 아니지만 단번에 두 대나 판매 성공한 직원은 서비스라며 휴대용 충전기를 2개 챙겨주었다.

“나 왜 고민했니?”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나온 아랑은 다시 판매점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나오는 카일은 작은 휴대전화 속 세상에 푹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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