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랑? 여기는 또 어디지?”
아랑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조용히 물어오는 그를 향해 맑게 웃어보였다. 적당히 급한 일은 다 해결됐고, 이제 그들이 쉴만한 곳을 찾아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립고 그립고 그리웠던 곳에 들어왔는데, 카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우리가 지낼 곳이요. 며칠 지내기엔 큰 불편은 없을 거예요.”
카일의 손목에 숫자가 적힌 고무 밴드를 착용시킨 아랑은 신발을 벗어들고는 어서 그에게 따라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추운 날 집도 절도 없는 빈곤한 자들에게 오픈되어있는 찜질방. 수면실에 맛있는 음식에 목욕까지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었다.
열여섯. 이곳에서 이세계로 갈 당시 아랑은 미성년자였고, 집 외에는 엄마와 몇 번 가본 콘도가 전부인 그에게 가장 안정적으로 먼저 다가온 곳이 찜질방이었다. 뜨뜻한 곳에 지지는 것이 최고라며 거의 매달 엄마와 월례행사처럼 방문한 곳이었다.
“조용히 쉬는 곳이 여기라고? 여관은 없다는 건가?”
“평일이라 사람도 없고 조용하잖아요. 그리고 우리 돈도 별로 없는데 비싼 숙박업소에 어떻게 가요?”
아랑은 그에게 찜질방 옷을 안겨 주었고, 떨떠름한 카일은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얌전히 따랐다.
팔찌 덕분에 은행의 개인 보관함에 안전하게 금과 보석. 카일이 소지했던 금, 은화를 맡긴 아랑은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매점 앞에 섰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이 잔뜩 써진 걸 보자 절로 침이 삼켜졌다.
“일단 매점에서는 맥반석 계란 3개. 식혜 대자 1개로 시작하고.”
머릿속으로 먹을 걸 떠올리던 아랑은 흘깃 뒤돌아보았다. 카일에게 신세계를 밝혀주기 위해 그리고 음식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지 않게 그를 안마기계에 앉혀 놓고 온 것이었다.
2m에 체격 좋은 거구가 기계에 구겨지듯 들어간 모습에 아랑은 키득거리며 웃고 말았다. 갑자기 자신의 몸을 결박하며 움직이는 기계에 놀란 카일의 표정은 기계가 천천히 안마를 시작하자 나른하게 풀리고 있었다.
“안마 기계는 아무것도 아니지. 이따가 만화책도 좀 보고, 영화도 보고. 여기서만 있어도 한국 신문물은 다 가르쳐 줄 수 있겠다.”
안마기계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에 아랑은 맥반석 계란과 식혜부터 구매해 널널한 식당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먹을 것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미역국 1개. 쫄면 1개. 카일이는 매운 거 못 먹으니까 짜파게티 1개. 고기만두 1개면 가볍게 시작하게 좋겠지?”
음식을 주문하고 주문표를 받은 아랑은 안마가 끝나고 일어서는 카일이 자신을 알아보기 쉽게 혼을 높게 들어 흔들었다.
“여기선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능숙하게 수건을 둘둘 말아 양머리를 만든 아랑은 하나는 직접 쓰고 하나는 맞은 편 카일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감개무량하게 개통한 휴대전화를 꺼내 셀카도 찍고 카일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정말 휴대전화 중독이라고 할 만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게임을 하고 SNS를 즐기던 아랑은 오랜만에 만지는 그 감촉에 가슴이 뭉클거렸다. 그리고 아랑은 제가 가르쳐주는 대로 곧잘 따라하는 카일에게 휴대전화 사용법을 간단히 일러주었다.
카일은 자신의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에 흠뻑 심취했다. 아랑이 말로 설명했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실제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사진이라는 것도 찍을 수 있었고, 궁금한 것은 뭐든 물어보면 답이 나왔다. 복잡한 계산까지도 숫자과 모형을 조합하는 순간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었다.
딱!
한참을 휴대전화에 빠져 있던 카일은 자신의 이마에게 느껴지는 고통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이 간 삶은 계란을 들고 있는 아랑이 콧노래를 부르며 계란을 쉽게 까 자신의 입에 쏙 넣었다. 그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쉰 카일은 다시 휴대전화에 집중했다.
딱! 똑같은 곳에 똑같은 충격과 함께 똑같은 행동을 하는 아랑을 본 카일은 하나 남은 계란을 집어 들었다.
“톡……”
분명 아랑이 한 것보다는 약한 소리가 아랑의 이마에서 울렸고, 카일은 그가 했던 고대로 계란을 홀랑까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아랑이 쪽쪽 빨아먹던 빨대와 같이 꽂혀 있던 다른 빨대로 식혜를 마셨다.
계란 노른자의 텁텁함이 조금 남아있던 찰나 살얼음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원한 식혜를 마시자 카일은 여전히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아랑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맛있고 특이한 음식이 많다고 하더니…… 그리고 아랑이 몇 번 마신 게 전부인 식혜 대자가 단번에 바닥을 보였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아랑은 살짝 붉어진 자신의 이마를 만지면서 식혜까지 다 마셔버린 카일을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랑?”
카일이 잡기도 전 아랑은 매점으로 가서 외쳤다.
“식혜 대자 2개하고요. 계란 10개요.”
아랑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누워 있는 카일을 쳐다보았다. 아, 진짜 계란이 뭐라고. 오기로 카일 이마 한 대라도 더 때리려다 계란 7개를 더 먹었다. 결국 계란만 총 9개를 충동적으로 먹은 아랑은 주문한 음식들을 먹지 못했고, 만두, 짜파게티, 미역국, 매운 쫄면까지 카일이 다 먹은 것이었다.
내가 찜질방에서 다시 계란을 사면 설아랑이 아니다.
옆에 놓아둔 탄산음료를 마시며 아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뿌연 하늘과 빠르게 오가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친숙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뉴스에서 미세먼지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아랑은 작게 웃어버렸다. 카일이 처음 한 말 중에 공기가 왜 이렇냐는 말이 떠올랐다. 마석 대신 석탄, 석유 등을 찾아 썼고 그때마다 나오는 오염물질들이 결국 이렇게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그와 함께 차를 보던 카일의 눈에 흥미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차로 이동하는 곳에서 차는 혁명적인 것이 분명했다. 워프라는 더 엄청난 것이 있지만 비용으로 따졌을 때는 차를 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랑은 메시지 창을 열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충동적으로 기사님께 휴대전화를 빌려 문자를 넣긴 했지만, 과연 그가 그 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화를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그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기에 아랑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아랑은 모로 누운 채 팔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만지는 카일의 손길에 냉큼 그 옆으로 엎드렸다. 그리고 슬쩍 그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았다. 천하의 카일도 휴대전화를 쥐여 주면 게임을 하는구나.
“재밌어요?”
“이것 돌아갈 때 갖고 가도 되려나?”
“배터리 충전이 불가능하잖아요.”
아랑이 이 세계로 차원 이동을 했을 땐, 듣고 말하는 것만 가능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카일은 한글까지 완전히 알고 있었다.
카일은 하던 게임을 끄고 아랑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이곳에 온 이후 아랑은 생각이 많아졌기에 평소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길었다. 환하게 웃고 장난을 치긴 했지만, 드문드문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그의 어두운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간단하게 생각해.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베르가 어리바리 한 것 같아도 성공적으로 이곳으로 오는 방법도 알아냈잖아. 돌아갔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도 돼.”
“그 사람 만났는데 막 죽이고 싶으면 어쩌죠?”
아랑은 제가 들은 마지막 말이 착각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정말 그럴 리가 없다고,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사고이고 자신은 어쩌다 보니 스스로 발을 헛디뎌 사고가 난 것이라고도 생각해 봤다.
만약 그가 저지른 일이 사실이고, 지금 그가 엄마의 유산을 가지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힘겹게 그토록 고생하면서 이룬 엄마의 성공을 가로채고, 그 돈을 가로채기 위해 엄마뿐 아니라 자신까지 죽인 것이라면.
한편으로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도 떠올랐다. 그 아비라는 자가 정말 열심히 찾았다고.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았을까? 언젠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제 눈으로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편하게 지내겠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가 모두 사실이라면 자신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늘 불안할 것이었다.
“죽이면 되지.”
너무나도 간단한 카일의 대답에 아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게 쉬운 일인지 아나? 그리고 이곳은 이 세계가 아니었다. 인권이라는 것이 있고,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는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는 곳이었다. 그곳처럼 높은 귀족이라고 모든 법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었다.
“카일.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는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 돼요.”
“아랑. 우리 지금 재밌는 걸 해 볼까?”
아랑이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빛을 내며 일어나 앉는 카일의 행동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금 상황에 재밌는 게 뭐가 있을까? 더군다나 사람 패고 죽이는 대화를 하다가 이어진 말이라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다.
“재밌는 거?”
“지금 가보고 싶은 곳은?”
“우리 집? 나랑 엄마랑 살았던 집이요. 마지막에는 그 새끼도 같이 살긴 했지만.”
웅얼거리듯 하는 대답에 카일은 아랑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아랑이 스스로 자신의 목걸이를 잡게 했다.
“그 집, 떠올려 봐.”
“에취.”
아랑은 온몸을 휘감은 한기에 코를 훌쩍였다. 방금까지 따뜻한 찜질방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살던 집이었다.
늘 따뜻했는데, 온기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의 어둠과 지독한 냉기에 아랑은 두 팔로 상체를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사물을 구별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담한 주택 2층은 아랑의 공간이었다. 욕실과 방 2개. 작은 크기의 거실은 모두 아랑의 취향대로 꾸며졌다.
사춘기 소년의 공간답게 벽에는 그 당시 좋아하던 보이그룹 포스터와 자동차, 게임 캐릭터 포스터들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함 없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아랑이 사진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뛰다시피 욕실로 들어간 아랑은 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확인했다. 옅은 달빛에 의지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콜록거리는 카일의 기침에 자신의 손끝을 문질렀다.
벌컥 침실 문을 연 아랑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이 집은 그날 이후 버려진 것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끊긴 채, 뽀얗게 먼지가 앉은 채로 그날, 아랑이 마지막으로 지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어나면서 아무렇게나 뭉쳐놨던 이불과 책상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책이 보였다. 열려 있는 옷장 앞으로 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세계로 흘러들어 오기 전의 어느 이른 아침 늦잠을 잤던 아랑이 옷장 앞에서 허물 벗듯 벗은 잠옷이 그대로 있었고, 급하게 교복을 꺼내 입느라 떨어진 옷걸이 위로 먼지가 가득했다.
그날 엄마는 쓰러졌고, 119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떤 손을 써보기도 전에 엄마의 심장은 완전히 멈췄다. 삼 일을 영안실에서 보냈고, 엄마를 묻었다. 그리고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
“내……방인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끊임없이 흐른 눈물이 볼을 적시고,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가 내 침실이고……”
아랑은 카일이 자신을 따라오는 걸 느끼며, 2층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여기는 내 게임방인데……”
공부를 제법 잘했지만, 그 당시 아랑은 평범한 사춘기 소년이었다. 전교 5등을 한 후, 엄마가 만들어 준 게임방으로 들어가 놀기 일쑤였고 그때의 모습을 보이듯 커다란 TV와 게임기와 게임팩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공부해야 한다는 엄마를 속이고 산 최고급 사양의 게이밍용 컴퓨터도 있었고, 좋아하는 만화책이 잔뜩 꽂힌 책장도 있었다.
“……1층은 엄마가.”
아랑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닦지 않은 눈물에 앞이 아른거렸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계단 앞에서 비틀거린 아랑은 자신의 손목을 잡는 큰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카일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꼭 끌어안자,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랑은 카일의 품에서 목 놓아 울었다. 엄마가 갑작스럽게 떠난 그 날처럼. 엄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로엔이 떠난 그 날처럼.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랑이 울다 지쳐 스스로 그칠 때까지 그는 넓은 가슴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작은 머리에 입 맞춰주고, 힘들어 헐떡이는 등을 쓸어주었다.
“집에 불이 안 켜져.”
아랑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고는 무안함에 괜히 딴 곳을 쳐다봤다.
“그래.”
“물도 안 나와.”
“알고 있어.”
불만을 툭툭 내뱉는 아랑과 다르게 카일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짧게 한숨을 쉰 아랑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신음이 몇 번 들리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겨우 침착함을 찾았던 아랑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에 덜덜 떨렸다.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벙끗거리며 말이 나오지 않아 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아랑을 지켜보던 카일은 그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넘겨 들었다.
[곧 찾아가지.]
일방적인 통화를 끝낸 카일이 휴대전화 전원을 끄는 걸 보면서도 아랑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곳에서 한참을 울고 시간을 보낸 아랑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카일. 나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
카일의 팔뚝을 잡은 작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단호했다. 엄마가 쓰러지던 날 그 모습 그대로인 집을 보면서 그가 이 집을 이렇게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만약 엄마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이 사고였다면 그는 가슴 아파서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그 모든 일의 주동자라면 꺼림칙해서 못 왔겠지.
이유가 어쨌든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일들을 모두 잊었을지도 몰랐다. 짧은 시간이나마 수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랑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에겐 아니었다. 아랑이 그렇게 사라지고 언론 플레이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난리쳤지만 이미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비 오는 초겨울 날씨. 산속에서 사라진 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걸. 그리고 그 시체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 산 사람을 찾을 기대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휴대전화로 자신의 사고에 대해 검색했던 아랑이 깨달은 건 그것이었다. 기구한 운명의 소년은 약 3개월 정도 언론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었다. 사고 소식과 안타까운 아비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묻힌 사건 중 하나였다.
“……”
“정말 그가 그리 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우연인 불행인지.”
연보랏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어두운 적색으로 빛났다.
“진실을 알게 된 후엔?”
카일은 아랑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불안해 보이는 아랑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단순히 내 불행이 겹친 것이었다면 그냥 돌아가야지. 하지만 그가 저지른 일이라면 갚아주고 싶어. 내가 아팠던 것보다 더 아프게 해 주고 싶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아랑은 몸을 틀어 카일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그의 체향이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카일은 같이 해 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혼자가 아니니까. 그것이면 충분했다.
* * *
카일은 잠든 아랑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대전화라는 건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곳에서는 이것 하나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었다.
아랑에겐 게임하는 모습만 보였지만, 누구보다 습득력이 빠른 카일은 작은 휴대폰 세상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자신의 집에서 울던 아랑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늘 밝고 환한 모습만 보이던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절하게 울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랑이 선택한 것이 복수라면 카일은 기꺼이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아니 그가 용서한다고 해도 이제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다.
아랑이 사는 이 시계는 깨끗했고, 규칙적이며 모든 이가 약속한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행복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깨끗하고 청렴결백한 척하는 곳이 더 지독하고 악독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가장 최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쟁터에서 구른 카일은 망설임이 없었다. 겉으로는 아랑이 하고 싶은 대로 찜질방에서 느긋하게 뒹굴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가 이끄는 대로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즐겼다.
예상대로 아랑은 딱 법 테두리 안에서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사이 카일은 그의 방식대로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방금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잠시 나갔다 올게.]
아랑의 휴대전화 위에 짧은 메모를 올려 놓은 카일은 이른 새벽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30층의 높이의 건물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작은 크기로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쁜 사람들은 시간이 따라 이리저리 물결처럼 나부끼고, 탁한 기운 가득한 공기는 뿌옇게 흐려 있었다.
살을 에듯 추운 바깥과 달리 안은 초봄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입고 옷 패딩을 벗어 두고 얇은 니트만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덥게 느껴진 카일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고객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카일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좋은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소파와 흰색, 검은색, 금색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아덴 성으 돌아간다면 이런 식으로 방을 꾸며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저희가 다 매수하고 싶지만, 재정이 그렇게 되지 않는데. 가능한 만큼만 선지급하고 차액은 천천히 드리면 어떨까요?”
대답 대신 카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선 5억은 계약금으로 먼저 드리고, 차액은 이달 안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카일의 표정을 읽은 매니저는 급히 말을 이었다. 평범한 저가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카일이 이곳을 들어섰을 때 직원들은 딱히 그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외모와 상황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이곳의 물건들은 쉽게 살 수 있는 가격대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나마 찾아온 고객이기에 그를 첫 응대했던 직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매니저실로 들어오던 것이 떠오르자 작게 헛기침했다.
아무 말 없이 그가 꺼내놓은 보석에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당황한 그를 보고서야 그는 집안 가보라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외국인이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에서 보석을 처분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 역시 그가 최대한 빨리 현금화해 달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장물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30년째 보석경매사를 한 그는 처음 보는 독특한 커팅에 그런 생각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쉽게 볼 수 없는 크기에 독특한 커팅을 한 물건은 그의 말대로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외국인은 급전이 필요해서 가보를 팔아치우는 것이고.
결점 하나 없이 투명한 사각 모양으로 커팅 된 10캐럿 다이아몬드의 영롱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옆에 놓여 있는 20캐럿의 블루다이아몬드를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쉽게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 뒤로 놓인 금단추 역시 얼핏 보아서는 잘 가공된 금덩어리 같았지만, 그곳에 새겨진 무늬와 그 무늬는 백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금단추 6개. 커프스로 만들어진 사각으로 커팅 된 10캐럿 다이아몬드가 2개. 20캐럿 블루다이아몬드 1개 총 예측 가격은?”
여유 가득한 카일의 질문에 그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이미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 몇 번이나 보석을 들여다보았지만, 금액을 측정할 수 없었다.
일단 이 보석들을 살만한 VVIP 고객님들께 먼저 선을 보인 후, 판매되지 않는 것들은 경매로 내놓을 생각이었다. 경매는 한국에서 열리겠지만, 이 보석을 공개한다면 국제적인 경매가 될 것이 뻔했다.
“우선 10캐럿 다이아몬드는 최소 5억 선으로 경매 시작할 것 같고, 20캐럿 블루다이아몬드는 저희도 조금 알아봐야……”
“그럼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이 몇 개가 있긴 한데, 그것부터 이쪽에서 처리해 주시죠.”
“뭐든 말씀만 하세요.”
이런 거물을 놓칠 수 없었다. 이 엄청난 거래는 지금 고객의 손에 달린 것이었다. 지금 이곳을 떠난 그는 어딜 가더라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것이 뻔했다.
매니저는 고개를 숙인 채, 그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카일은 자신이 원하는 걸 이야기하다 걸려온 아랑의 전화에 옅게 미소 지었다.
늦잠꾸러기. 가만히 뒀더니 이제 일어난 건가? 12시가 다 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아, 이 건만 처리하고 전화를 해 볼 참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 알고 혼자 나갔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 서울이라는 잔소리부터 흘러나왔다.
“2시간 뒤 강남역 5번 출구.”
시계를 본 카일은 도착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아랑에게 말했다.
자신의 말은 제대로 듣기나 한 건지 어디 갔길래 2시간이나 걸리냐부터 해서, 뭐 타고 올 거냐. 택시 타고 오면 제가 지불하겠다는 둥 빠르게 이어지는 아랑의 말에 미소가 더 진해졌다. 통화를 끝낸 카일은 계약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부탁한 것은 언제 되겠습니까?”
“1시간 안으로 처리하고 메시지 남기겠습니다.”
카일은 그들이 결재까지 끝낸 모범택시에 오르며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아랑이가 하고 싶은 대로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지만, 이제 주도권을 가져올 시간이었다. 아랑이 원하는 평민 놀이는 끝났다.
“아침부터 어디 갔던 거예요? 종이 한 장 달랑 남겨 놓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서울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앞으로 어딜 가던지 나랑 같이 다녀요. 알겠어요?”
역 앞에 서 있던 카일은 자신을 보자마자 빠르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 아랑을 슬쩍 끌어 품에 안았다.
“이것 좀 놔 봐요. 나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오늘은 은행가서 금단추 찾아서 팔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좀 찾아봤는데……”
“아랑.”
“얼마나 밖에 서 있었어요? 얼굴이 차가워.”
카일을 밀어내던 아랑의 손이 차가운 그의 볼에 닿자 아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작고 따뜻한 손이 카일의 두 볼을 감싸 잡았다.
“배고픈데.”
아랑의 잔소리를 배고픈데 한마디로 끝내 버린 카일은 그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는 검은 세단으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사가 뒷문을 열자, 카일은 아랑부터 차에 타도록 하고는 그 옆으로 앉았다.
“뭐야? 이거 모범택시 아니네. 카일, 이 차 뭐예요?”
따뜻한 차 뒷좌석에 앉은 아랑은 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도착지를 말하기도 전에 차가 출발하자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대신 좀 편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지금 어디로 가는데요?”
“서울 호텔로 갑니다.”
카일이 대답하기 전 앞에서 들려온 말에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서울호텔이라니요? 혹시 자신이 알고 있는 최근에 지어졌다는 6성급 호텔을 말하는 건가요? 한창 건물을 올리고 있을 때 이 세계로 갔던 아랑은 어디서나 보이는 높은 건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곳이 제가 아는 그 하나밖에 없는 서울 호텔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서울에 있는 호텔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 오른쪽 창으로 보이는 서울호텔입니다.”
“카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아랑은 옆에 앉은 카일의 팔뚝을 잡고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간단히 말하면 보석을 다 팔았지.”
“네?”
놀란 아랑이 더 묻기도 전 차는 서울호텔 입구로 진입했다. 카일은 자신의 팔을 잡고는 슬쩍슬쩍 끌어당기는 아랑을 무시한 채 앞서 걸어가는 사람을 따라갔다.
그는 귀족이었다. 잠시 전쟁터를 돌아다녔지만, 태생이 귀족이었고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아는 자였다. 귀족이라는 지위와 영지를 운영하면서 생긴 금전적 부유함, 그리고 세계에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라는 명칭까지, 카일은 늘 그걸 익숙하게 사용했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면 드래곤 레어까지 털 정도로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얻는 그에게 아랑이 원하는 소박한 삶은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다 그깟 커프스 단추 몇 개쯤은 그에게 큰 재산도 아니었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일을 잘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던 카일은 사람을 부리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처음 찾아간 작은 보석점은 그 물건의 가치를 모르는 곳이었다. 그걸 원하는 자에게 팔기만 해도 몇 개의 차익을 남길 수 있겠지만, 그자는 그걸 녹여 이곳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었을 것이었다.
똑같은 것이라도 특이할수록 잘 팔리는 건 당연했고, 카일은 제가 가진 물건의 가치를 최대한 이용했다. 총 판매액은 수십억에 달할 것이었기에, 카일은 그들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부탁을 빙자한 명령일지도 몰랐다.
지하철, 버스를 타는 건 재밌는 일이긴 했지만 효율적이지 못했다. 아랑의 목걸이를 이용해 워프도 가능했지만 사용하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횟수 제한까지 있어 사용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지하에 있어 숨이 턱턱 막히는 지하철에 처음 보는 사람과 몸을 부딪치며 타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아니면 찬바람 맞으며 시간 맞춰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한두 번 경험해 본 것으로 충분했다.
남들이 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내가 몰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모는 차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면 마음에 드는 잠자리를 찾으면 되었다. 그리고 카일은 그 일을 처리해 줄 적임자를 찾았을 뿐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귀족 그 자체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 지낼 곳과 사용할 차가 필요한데, 준비 되겠습니까?”
카일은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네. 얼마나 계실건가요?”
“미정이긴 한데, 지내는 동안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으면 하는군요.”
보석점 매니저는 짧은 말도 잘 알아듣는 자였고, 그가 준비해 준 차도 장기투숙으로 준비했다는 숙소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 며칠은 이곳에 대해 몰랐기에 아랑이 시키는 대로 그에게 의지해야 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카일은 자신의 능력이 떨어진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오러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지금의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따진다면 등급조차 없는 수련원 수준이었다.
그런 차에 아랑이 건네준 휴대전화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손가락을 몇 번 까딱거리면 원하는 정보가 쏟아져 나왔고, 전화 몇 통이면 뭐든 가능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돈이 짙게 깔려있었다. 힘과 권력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건 돈이었고 돈을 따르는 자를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돈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다급했는지, 조금 더 팔을 세게 잡아끄는 아랑의 행동에 카일은 슬쩍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본 채 입모양만 뻥긋뻥긋 말을 하려는 모습에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아니,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거예요? 호텔가고 싶어요? 그럼 내가 다른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들을 맞으러 나온 직원을 따라 걷던 아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더 급해졌다. 지금 이 사람이 여기 1박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여기 온단 말인가? 금단추를 다 팔았다고 해도 1000만원 남짓. 물론 적은 돈이 아닌 건 알지만, 그렇다고 1박에 최소 4~50만원 하는 호텔 룸을 이용할 만큼 여유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라고 하더군.”
좀 저렴한 호텔로 알아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아랑은 자신의 말을 잘라버리는 카일의 말에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보석을 팔았다고 하더니 어디 가서 사기 당하지는 않았는지,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엄마와 여행을 다니면서 호텔도 들락거리고, 콘도도 제법 다녀본 아랑은 앞서 걷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체크인도 하기 전 직원이 1:1 안내를 해 준 적은 없었는데, 볼을 긁적거린 아랑은 카운터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크인도 안 하고 지나가는 거면, 아 호텔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배고프다더니 음식점으로 가는 것인가? 머리가 복잡한 아랑은 커다란 눈만 요리저리 굴려댔다. 하지만 앞서 걷던 직원이 능숙하게 문을 열고 자신들을 안내하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하루만 묶고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카일에서 얼마나 팔았는지 물어보고 그가 원한다면 비즈니스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런데 체크인을 하지 않고 바로 방으로 안내받을 수도 있나? 그럼 아침부터 나가서 벌써 호텔 체크인을 했나? 아닌데, 호텔 체크인 시간이 그리 빠를 리가 없는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가운데 앞에 놓인 슬리퍼로 갈아 신고 룸으로 들어선 아랑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호텔 룸이라면서요. 기껏해야 방 한가운데 침대가 있고 창이 있고, 반대편으로 TV가 있고 창가에 작은 테이블이 있는 곳이 아니던가요?
같이 들어온 직원은 카일과 자신을 데리고 간단한 사항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침실이 따로 있네요. 거실도 있고요. 우와, 옆으로 작은 서재도 있는 놀라운 곳이군요.
온통 대리석으로 도배된 욕실 한쪽으로 리버 뷰를 즐길 수 있는 전망 욕조가 있었다. 넋을 놓고 따라다니는 아랑은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닌 듯 직원은 카일에게 친절하게 호텔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 좋은데, 말로만 듣던 그 해외 셀럽들이나 한국을 방문한 대통령들이 묶을 것 같은 이 방은 1박에 얼마일까요? 막 500만원, 1000만원 이렇게 하나요? 제가 잘 모르지만 그럴 것 같아요. 비척거리며 거실로 걸어간 아랑은 소파에 앉았다. 푹신함에 체중이 뒤로 쏠리며 절로 소파에 기대졌다.
이런 저런 설명이 끝났는지, 서명을 하는 카일을 보며 아랑은 그냥 눈을 감았다. 일이 이렇게 된 거 하루정도 호텔에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이 호텔에 어떤 음식점이 있는지 확인하고, 수영장은 당연히 무료겠지.
라운지도 이용하고, 바도 있을 테니까. 바에도 가고. 비싼 가격을 지불한 만큼 모든 것을 다 누리겠다고 다짐하는 아랑이었다.
“웰컴 티를 준비해드릴까요?”
“네!”
모든 설명이 다 끝난 건지, 웰컴 티를 권하는 직원은 말에 지금까지 없는 사람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아랑이 냉큼 대답했다.
“……”
따뜻한 티와 간단한 쿠키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랑은 오랜만에 마시는 녹차의 맛에 작게 미소 지었다. 엄마가 참 좋아했는데, 그래서 제주도를 갈 때면 늘 녹차를 사오던 엄마였다.
“카일. 나에게 할 말이 많죠?”
일인용 소파에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카일은 원래부터 이곳의 주인인 것 같았다. 그의 성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지는 곳이지만 그의 얼굴에 깔린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미 예약한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서 지내고 다른 곳 좀 더 알아볼게요. 그리고 보석은 뭐 팔았어요?”
“일단 계약금으로 받았고, 경매하거나 구매자를 찾은 후 잔금을 준다고 하더군.”
“아! 참. 그 차는 뭐예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아랑은 고급 세단에 운전사가 떠오르자, 얼른 말을 이었다. 거기다 들어올 때 데스크에서 체크인하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앞으로 외출할 때 이용할 탈 것.”
“카일. 나 몰래 보석 같은 거 더 갖고 왔어요? 혹시 또 숨기는 거 있어요?”
아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김현철. 그 자 뒷조사도 시작했지.”
아…… 아랑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한국에 왔기에 자신이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오늘 보석상에서 금단추를 팔고 적당한 숙소도 찾을 생각이었다. 찜질방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았지만, 겨우 두 벌만 산 옷으로 버티는 것도 힘들었고 슬슬 아랑도 푹신한 침대가 그리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남은 금단추를 모두 팔고,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 옷도 좀 넉넉히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카일 그는 귀족이었고, 지배자였으며, 거침없는 자였다. 모두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지냈던 자가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을 파악한 그는 다시금 모든 이의 위에 서 있었다. 어느새 100층 높이의 호텔 룸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일의 넓은 등을 보는 순간 아랑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켰다.
오늘은 아랑이 보낸 많은 나날 중 특이한 날로 기억될 것 같았다. 기사가 딸린 고급 세단은 시작에 불과했다. 룸에서 쉬는 것도 잠시, 의식주 및 모든 것을 이곳에서 해결하기로 한 건지,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은 호텔과 이어진 백화점에 있었다.
“정확히 보석 판매 계약금으로 받은 돈이 얼마예요?”
아랑은 갈색 캐시미어 코트 깃을 만지다 그 아래 적힌 금액을 보고 조용히 손을 뗐다. 부드러운 컬러인지라 카일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금액대가 아니었다.
지금 그와 자신이 입고 있는 건 스파 브랜드에서 저렴하게 파는 검은색 롱패딩이었다. 원 가격은 10만원 대였지만, 이벤트 중이라 1+1이라는 말에 고민도 하지 않고 선택했었다.
“바로 입금 된 건 5억. 그리고 물건이 팔리는 대로 더 받기로 했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아랑은 앞서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아니, 보석가격이 애당초 그 정도 금액이면 어제 팔 때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지금껏 무슨 돈으로 호텔에서 지내고, 기사 딸린 차를 타고, 쇼핑하는 것인지 간을 졸이고 있던 아랑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카일의 앞으로 다가선 아랑은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보았다.
“카일. 저거 좀 입어볼래요?”
아랑은 방금 놓았던 코트를 가리켰다.
원 없이 쇼핑하고, 아랑은 원래 계획대로 라운지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복수도 하긴 해야 했지만 모처럼 주어진 여유도 놓칠 수 없던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둘이 합쳐 30만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아랑은 명품 로고가 보이는 자신의 운동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로또당첨이 꿈인 세상에서 카일 자체가 로또였다. 귀족인 걸 알고 있었지만 평상복에 있는 것들만 팔아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곳에 오기 위해 준비했던 것을 다 가지고 왔다면, 아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도 고층에서 훤히 트인 아래를 보고, 달달한 디저트와 핫초코를 마시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리고 아랑은 두 손으로 열심히 즐겨하던 게임을 했다.
이름, 전화번호, 생김새만을 알고 있던 자신의 정보로는 새 아빠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이미 살던 집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는 고아였던 데다 친구는 결혼식 날 온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때도 인사만 했었지 집을 오가며 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당장 어디서부터 그를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그랬기에 일주일을 하릴없이 맛있는 먹거리나 찾아다닌 것도 있었다.
덕분에 카일의 식성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운 걸 잘 먹지 못하지만, 맑은 탕보다는 얼큰한 것을 좋아했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에 초록 눈동자를 하고 얼큰한 선지 국밥을 맛있게 먹던 게 떠올랐다.
유명한 욕쟁이 할머니의 입도 막아버린 화려한 외모를 하고 카일은 그 자리에서 선지 국밥 두 그릇을 해치웠다. 그리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욕쟁이 할머니에게 칭찬 어린 욕도 얻어먹었다.
반면 선지 국밥을 먹지 못하는 토종 한국인 아랑은 그 옆에서 소고기 국밥을 먹어야 했고, 사내새끼가 그런 것도 못 먹냐는 욕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식당을 나온 뒤 그렇게 맛있게 먹은 것이 소 피라는 걸 안 카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어쨌거나 정보를 사고파는 것이 흔한 일인 이 세계에 잠시 살았지만 아랑은 그림자 길드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온 아랑은 누군가를 뒷조사한다는 불법적인 건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반대로 카일은 조금이 주저함도 없었다. 필요한 정보는 사고파는 것에 익숙한 곳에 살아온 것도 있었지만 그에겐 불법이라는 단어가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귀족에 소드 마스터인 그가 하면 불법인 일도 합법이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아랑이 게임을 하고 노는 동안 카일은 라운지에 비치된 책을 읽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인 걸 보고 아랑은 말을 걸지 않았다. 신분 사회에서 온 그가 그 책을 읽는 것도 신기했지만, 라운지에 구비된 책까지 읽고 있는 것이 더 놀라웠다.
겨울의 밤은 빨리 왔고, 저녁 식사까지 든든하게 하고 룸으로 들어간 아랑은 저도 모르게 카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부러 피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묘한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 할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카일과의 그 어색하지만, 생각만 해도 부끄러웠던 그 일도 솔직히 좋았다. 그 뒤로 분위기가 이상했고,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랑 역시 혈기왕성한 20살 남자였다.
먼저 씻고 나와 넓은 룸을 돌아다니던 아랑의 시선이 욕실로 향했다. 크게 숨을 들이쉰 아랑은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샤워기 물소리와 함께 열기를 품은 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머뭇거리기도 잠시 아랑은 손을 뻗어 욕실 불을 꺼버렸다.
지금 자신은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말짱한 정신으로 카일이 있는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제가 원해서 하는 것이지만 부끄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들리던 물소리가 멈췄다.
“아랑?”
기분이 이상했다. 커다란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꼬물거리고 있는 자신의 발가락이 보였다. 샤워부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분이 더욱 오묘해졌다. 이대로 몸을 돌려서 나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돌아나갈 수 없었다.
카일은 자주 자신을 쓰다듬고 끌어안긴 했지만, 그 안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순 없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괜한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지? 어디 아픈 건가?”
샤워부스에서 서둘러 카일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냥 그와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뿐인데 몸이 달아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려 머리까지 울렸다. 너무 심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카일에게 들릴 것 같았다.
여전히 꼼지락거리고 있는 자신의 발가락 옆으로 카일의 큰 발이 보였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습기가 몸을 덮쳤다.
“무슨 문제 있어?”
바닥만 본 채 가만히 있는 자신의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자신의 턱을 잡는 카일의 손엔 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천천히 그의 손에 의해 고개가 젖혀지자 아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지금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말을 해야……”
유독 낮은 목소리가 온몸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자신의 아래엔 뜨거운 피가 잔뜩 몰렸다. 그가 앞에 서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턱을 잡은 손길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
“급한 일 아니면 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천천히 눈을 뜬 아랑은 어둠 속에 짙어서 검게 보이는 카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주 서 있는 그에게서 폭발하듯 뜨거운 열기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나가라는 말과 다르게 턱을 잡고 있던 그의 엄지가 움직이며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아,”
입술을 건드리는 그 감촉에 아랑의 몸이 움찔했고, 순간 새어 나온 작은 소리가 파장이 되어 욕실을 채워나갔다.
내려다보는 카일의 젖은 머리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 하나가 아랑의 얼굴이 떨어졌다. 얽혀버린 시선을 뿌리치지도 눈을 감아 차단하지도 못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얼굴로 가득 채워졌고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두 번 말하게……”
계속 밀어내는 것 같은 그의 말에 아랑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말을 끊고 제 입술을 겹쳐버렸다. 허겁지겁 두서없이 부딪친 입술이지만 카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가져다 대는 것에 급급한 아랑의 입술은 느리게 그에게 잡아먹혔다.
열기를 가득 품은 뜨거운 입술이 아랫입술부터 물어왔고, 이내 두 혀가 엉켜들었다. 입 안으로 느껴지는 그의 질척한 혀놀림에 아랑은 서투르게 자신의 몸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처음엔 느릿한 것 같았지만 이내 카일은 자신을 잡아먹으려 달려들었다.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랑은 몰아치는 감각에 헐떡였고, 차오르는 숨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결국 살짝 고개를 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인데.”
부족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허리를 받치는 단단한 팔이 살짝 멀어지자 아랑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잠식될 것 같지만, 카일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경고도 아니었고, 충고도 아니었다. 배려였다.
“나. 하고 싶어.”
이제 부끄러운 것도 쪽팔린 것도 없었다. 그냥 카일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카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의 손이 움직이고 젖은 머리카락을 넘긴 카일은 긴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아니면 그에게 거절당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벌렸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아랑.”
“……”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 못 견디겠으면 내 뺨이라도 때려.”
쉽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랑은 눈을 깜박이며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만큼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왜 카일의 뺨을 때려…… 무언가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불난 집에 짚을 지고 들어가면 이런 기분일까?
“아랑?”
먼저 하자고 해 놓고 도망가는 거라고 말하고 싶던 아랑은 아주 짧은 시간 그의 몸에 일렁였다 사라지는 푸른빛을 보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이 도발한 사람은 일렁이는 오러만으로도 단번에 사람을 죽여 버릴 수 있는 소드 마스터였다.
“흐읏……”
진득하게 자신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행동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욕실에서 어떻게 침대로 옮겨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푹신한 이불이 등에 맞닿자 안정감이 들었고 뜨거운 입술이 차게 식은 목덜미에 닿자 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카일.”
목덜미를 입술로 비비는가 싶더니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어깨에 손을 대자 그는 아예 이를 세워 목을 물어왔다. 아프게 문 건 아니지만 생소한 감각이 온몸에 짜르르 퍼졌고, 하고 싶던 말을 다 이을 수 없었다.
깨문 자리를 혀로 핥는 행동에 숨을 쉬기 버거웠다. 이미 욕실에 들어가면서부터 피가 몰려있던 아래에서 질금거리며 액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혀놀림에 잠시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라치면 이를 세우는 행동에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랑. 불편해도 잠시……”
목과 어깨에 입을 대던 카일은 어느새 아랑의 가슴께로 내려와 있었다. 흥분감으로 솟아있던 유두에 뜨거운 그의 입김이 닫고 살결에 입술을 댄 채 말을 하는 그 행동에 아랑의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카일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이 그의 한 손에 잡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카일은 협탁에 있는 아무 천이나 가져오더니 아랑의 손을 묶기 시작했다.
“카일?”
“네가 날 만지면 더 못 참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부드러운 천에 두 손이 위로 묶인 채 침대에 결박된 아랑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아흑!”
당장 풀라고 외치고 싶던 아랑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풀어달라는 말도, 그만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을 들끓게 만드는 감각과 함께 너무 좋아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이미 단단히 서 있던 아랑의 성기에서 흐른 쿠퍼액은 그의 아랫배와 회음부까지 적시고 있었다. 편평한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유두를 희롱하는 카일의 큰 손은 어느새 허벅지 안쪽을 만지고 있었다.
그나마 살집이 있는 엉덩이와 허벅지 안의 여리고 말랑한 살이 그의 손에 잡히자 아랑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슴과 아래에서 동시에 오는 쾌감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애원하고 신음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 아읏!”
흥분감에 벌벌 떨리는 허벅지를 점차 넓게 벌리면서 안을 쓰다듬던 손에 성기가 잡히는 순간 묽은 액체가 쏘아져 나왔다.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것은 그의 손길이 닿지만 해도 한계점을 넘어 버린 것이었다.
“아랑이. 예쁘네.”
허리를 활처럼 휘며 파르르 떨며 사정하는 아랑을 지켜본 카일은 지금껏 걸치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단번에 치닫는 쾌감과 함께 한 번의 사정을 끝낸 아랑은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일의 모습이 달빛에 비쳤다. 전쟁과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넓은 어깨와 선명한 근육들이 어둑한 달빛에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안, 안될 것 같아.”
그의 물건이 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 번 별일 없었다면 제가 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는 탓에 눈을 감고 있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가 가진 것의 두께와 길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돋아 오른 핏줄까지 눈에 담은 아랑은 작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천천히……”
한껏 벌리고 있던 허벅지를 아랑이 채 모으기도 전 카일의 손이 다시 허벅지에 찾아들었다. 부드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아직 젖지 않은 것 같은 그의 성기와 반대로 이미 자신의 아래는 방금 제가 흘린 것들로 뒤덮여 있었다. 아랑의 미약한 힘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카일의 단단한 손은 어느새 엉망이 된 아래를 온전히 보여주게 했다.
그의 시선이 지금 어디 닿아있는지 알기에 부끄러움을 떠나 아랑의 몸은 더 달아올랐다. 눈을 감고 있었고 손목이 묶여 제약이 있는 상태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자신에겐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온전히 카일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했다.
“흐으……”
차갑고 미끈거리는 것이 몸을 타고 흐르는 감촉에 아랑은 허리를 작게 들썩였다. 이내 자신의 체온 때문에 찬기가 가진 액체가 아래와 허벅지를 따라 안쪽으로 흐르고 자신의 뒤쪽까지 적시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가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품고 싶었다. 차라리 이런 시간보다 아무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가 만들어주길 바랐다. 이미 그의 손끝이 가져다주는 감각을 알아서 그럴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아랑이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아!”
그가 한 것이라고는 허벅지를 벌리고 윤활액은 부은 것이 전부지만 아랑의 아래는 이미 다시 단단해졌다. 어서 나를 만져달라고 말을 하려 눈을 뜬 아랑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젖은 머리가 흐트러져있는 이마와 그 이마를 따라 내려오는 높은 콧대. 짙은 욕망을 품은 채 자신의 아래를 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도드라져 보이는 턱 선을 한 잘생긴 얼굴이 자신의 몸을 끈적하게 훑어보는 눈빛에 적응되지 않았다.
“카, 카일.”
아래를 보던 시선이 마주쳤다. 한쪽 허벅지를 움켜쥔 카일의 손길과 함께 길고 굳은 마디를 가진 그의 손가락이 느리게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라고 하지만 처음같이 생소했다. 체액과 윤활액이 섞인 아래로 굳은살이 있는 그의 손가락이 들어올 때마다 아랑은 몸을 뒤로 빼고 싶었다.
느리게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의 느낌에 아랑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아랑은 낯선 감각에 몸을 굳히고 말았다. 그의 손가락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려 쥔 그의 혓바닥이 주는 뜨거운 감각에 아랑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두 주먹은 불끈 쥐어졌고, 뜨거운 혓바닥이 안을 열고 들어오자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열기를 품은 길고 두툼한 혓바닥이 내벽을 건드리고 밀어대자 아랑의 허리가 비틀렸다.
차라리 뭘 잡을 수 있거나 그라도 만질 수 있다면, 몸 안에 쌓이는 쾌락에 다시금 일어난 아랑의 성기 끝으로 체액와 정액이 흘러나왔다.
“아흣…… 흐…… 거기……”
안 된다고 말리고 싶지만 카일의 행위는 짙어질 뿐이었다. 뜨거운 아래에서 시작된 열기에 아랫배가 당기고 아팠다. 그의 혀가 머물던 자리에 다시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자 파들거리던 아랑의 몸에 조금 힘이 빠졌다. 이제 낯익은 감각이 찾아올 것이다.
“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목이 쉬어버린 아랑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제 세 개까지 늘어난 그는 손가락을 각기 따로 놀리며 안을 벌렸고, 카일의 손끝은 아랑이 느끼는 부위를 정확히 집었다. 쾌락을 알아버린 몸은 이미 자신의 제어를 벗어났고,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도망가려 해도 자신을 잡은 카일의 손을 벗어날 순 없었다.
“앗…… 아앙!”
느리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도드라진 손가락 마디가 애널에 걸리고 쑤셔질 때마다 아랑은 울어야만 했다. 이미 몇 번의 사정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그의 손에 의해 흔들리는 몸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부끄러움이나 수치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랑의 머릿속은 이미 몇 번이나 하얗게 번졌다.
“제대로 느끼게 해 줄게.”
온몸을 휘몰아치던 감각이 잠시 멈추자 아랑은 감고 있던 눈을 겨우 떴다. 위로 들어 올려져 한껏 흔들리고 힘이 들어간 팔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천에 묶인 팔은 불그스름한 자국을 남겼지만 그마저 색정적으로 보였다. 거기다 방금 자신이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그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지자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고 있었다. 잠시 멀어진 것 같던 그가 다리 사이로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대한 두려움과 지금껏 그가 가져다준 쾌락을 알아버린 몸은 더 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위로 몸을 굽힌 카일의 성기가 아래에 부딪히고 있었다. 위로 팔을 뻗은 그가 침대에 고정된 팔과 손목을 풀어주며 입술 위로 짧게 입 맞췄다.
“흐읍!”
그의 혀와 손끝에서 녹진하게 풀려 한껏 젖어있는 안으로 그의 큰 성기가 들어오는 느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뒤가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몸이 빠듯하게 열리고 있었다.
“하아…… 흣……”
아프다는 말을 삼키고 아랑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고통은 아랑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당장 그만하라고, 하기 싫다고 외치고 싶었다. 아직 저릿저릿한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고통에 손이 절로 덜덜 떨리고 있었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랑. 설아랑.”
자신의 위로 몸을 겹친 카일의 팔이 옆에서 느껴졌다. 이마며 눈, 코,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은 다정했지만, 아랑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이미 안으로 들어온 그의 도드라진 핏줄이 빠르게 뛰는 것까지 다 느껴지는 것 같았다.
카일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치는 순간 그의 허리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한 번도 열려본 적 없는 아랑의 안으로 단번에 치받아 들어왔다.
“……”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고 해도 카일의 입에 막혀 소리가 나가지 않았겠지만, 아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아프고 아팠다. 자신의 배 안을 터질 듯 가득 채운 낯선 감각이 무서웠다. 고개를 돌려 카일의 입술을 피한 아랑은 그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힘 빠진 팔을 쉬이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을 피하자 얼굴에 카일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그의 성기가 느리게 움직였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그의 성기가 뿜어내는 열기와 녹진하게 젖어있는 내벽이 부드럽게 마찰했다. 더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밀착된 그의 것은 아랑의 포인트까지 동시에 자극했다.
아픈 것이 분명한데 그 안에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그를 완전히 품었다는 묘한 느낌과 함께 카일의 몸에 일렁이는 푸른빛이 다시 보였다. 이미 강한 자극에 눈물샘이 고장 났는지 눈물을 멈출 순 없었지만, 아랑은 두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더……”
느리게 들어왔다 나가던 성기의 크기에 맞춰진 것인지 활짝 열린 안은 이제 그의 움직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느린 것보다 빠른 게 나은 건가?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핏줄로 내벽을 긁는 카일의 귀두가 포인트를 정확히 찌르며 점차 빠르게 움직이자 아랑의 다리가 들렸다.
분명 아팠는데, 아픈 게 맞는데 갑자기 온몸의 세포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발끝이 곱아들고 머리가 젖혀졌다. 허리를 뒤틀고 싶었지만, 카일에게 잡힌 엉덩이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가져다주는 자극은 모두 생전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의 손가락과 혀가 가져다준 것은 목마른 자에게 주어진 몇 방울의 물이었다. 정말 귀하고 소중하지만 잊을 수 없는 물.
하지만 지금 그가 주는 것은 해일 같았다. 끊임없이 밀려왔고, 넘치도록 아랑을 채워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힘겹게 눈을 뜰 때마다 살짝 찌푸려진 카일의 미간과 다물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지은 그는 자신의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자신에게 이런 감각을 주는 만큼 자신도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아흣…… 아읏…… 아!”
카일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그의 목에 둘렀던 아랑의 팔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모두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아랑의 손끝이 카일의 어깨와 목덜미 등에 박혔다. 카일의 아랫배와 자신의 아랫배 사이에 끼여 있던 제 성기에서는 또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카일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침대가 흔들렸고, 아랑의 세상이 흔들렸다. 그가 강하게 깊은 곳까지 처박을 때마다 아랑은 숨이 턱턱 막혔다. 신음이 아니라 헉헉거리는 급하게 숨을 쉬는 소리와 아래에서 맞부딪히는 질퍽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랑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빠르고 강하게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던 카일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힘없이 흔들리는 아랑의 발목을 잡아 양쪽으로 넓게 벌리게 했다.
“흠. 이러면 곤란한데.”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길래 크게 숨을 들이쉬던 아랑은 심각한 카일의 목소리에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자신의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만지던 아랑은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 끌자 혀를 내밀어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카일이 잡은 손을 끌어놓은 것은 자신의 아랫배였다.
“카일?”
잠시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아랑의 얼굴이 짧은 순간 붉게 확 달아올라버렸다. 자신이 손을 치우지 못하도록 손 위엔 그의 손이 겹쳐져 있었다. 그리고 카일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살이 없는 아랫배 아래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정신없이 몸이 흔들리고 빠르게 안을 자극하고 정점을 찍어 눈앞에서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뭉근하고 느리게 내벽에 비벼지는 성기의 감각은 아랑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강제로 자신의 아랫배에 올려진 손바닥으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앗…… 아흐…… 카.카일…… 아……”
아랑이 할 수 있는 것 느끼는 새로 신음을 흘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발끝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각은 척추를 타고 올라가 머릿속을 울렸다. 복상사로 죽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쓸까?
말 그대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아서. 이미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쾌락 그 이상의 것이 전해졌다.
양쪽 발목을 잡아 활짝 벌려놓고 미친 듯이 박아대던 카일은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아랑의 다리를 걸치게 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받으며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최대한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윽! 흑.”
계속 죽을 것 같았다. 미칠 것 같고, 아랑의 손은 바르작거리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더는 그가 못 들어올 것이라 여겼지만, 체위가 바뀌자 그는 더 깊이 들어왔고, 아랑은 그의 아래 갇힌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일의 목에서 짐승 같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의 숨결이 빨라지고 그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아랑의 상체가 들썩이는 순간 몸 안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카일의 성기가 몸 안에서 꿈틀거렸고, 자신의 안으로 뜨거운 것들이 잔뜩 밀려드는 감각에 아랑은 온몸에 힘을 빼버렸다.
“……”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사정을 한 아랑의 성기는 더 이상 서지도 않은 채 질금질금 힘없이 체액을 흘릴 뿐이었다. 반면 카일은 이제야 첫 사정을 마쳤다.
아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쁜 숨만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다리가 내려지자 크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여전히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온몸은 저릿거렸다.
“아랑.”
꽉 잠긴 카일의 목소리에 아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그를 보았다. 자신의 내려다보는 카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기에 그 역시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좋은 거면 진작할 걸. 그런데 두 번은 못 할 것 같아.
카일의 손끝이 단단히 솟아있는 유두에 닿았다. 엄지와 검지로 장난스럽게 굴리다 잡아당기는 행동에 아랑은 그를 흘겨보았다.
“그만……”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힘도 없고 지치는데 가슴 속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그냥 웃음이 났다. 부끄러운데 부끄럽지 않았다.
“그만해?”
카일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고, 아랑은 자신의 가슴을 지분거리는 카일의 손을 툭 쳤다. 죽을 것 같아.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허겁지겁 카일의 손목을 잡은 아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 후 그대로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던 그의 것이 다시 단단하게 커지고 있었다. 이젠 정말 기절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