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름 : 김 현철.
나이 : 42세.
직업 : 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 & 카페 다수 소유
가족관계 : 무. 다수의 애인 있음.
거주지 : 서울……]
푹신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카일은 퀵으로 받은 파일을 찬찬히 읽어내려 갔다. 어느 세계든 돈이면 다 해결된다더니. 이곳 지리를 잘 모르기에 휴대전화를 꺼내 그의 거주지를 검색한 카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국의 화폐단위까지 완전히 꿰고 있는 카일은 한강이 보이는 최고급 빌라의 매매 가격에 혀를 찼다. 다 쓰러져가는 낡은 산골 집에서 아랑이 산을 헤매며 약초를 뜯는 동안 이놈은 아랑과 그의 어머니의 돈으로 호위호식하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자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과의 은밀한 사진이 보였다.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한다더니,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아직 인지도를 쌓지 못한 여자들이었다.
“쓰레기가 확실하군.”
나름 머리를 굴리고 돈을 더 불리려 한 것 같지만, 현재 그의 회사 재정 상황은 최악이었다. 아랑의 어머니가 갖고 있던 건물들은 죄다 저당이 잡혀 있었고, 거주하는 고급빌라 역시 처음엔 매매였지만 현재는 대여로 바뀌어 있었다. 고가 사치품과 술과 쾌락을 즐기는 자의 끝은 어디서나 최악을 향해 달려갔다.
아랑의 말대로 그의 죄를 이곳의 법으로 적용시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이미 아랑의 어머니는 화장 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를 음독했다는 건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씌울 수 있는 것이 아랑의 사건이지만, 그것 역시 증거가 없었다.
“역시 데리고 가야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지은 카일은 파일을 덮었다. 먼저 아랑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만약 이 세계로 데리고 가는 것에 동의만 한다면 카일은 그에게 지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명함을 집어 들었다. 변호사라…… 참 재밌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죄를 대신 변론해 주는 자라…… 이곳의 법으로 김현철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변호사를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들었다.
아랑은 변호사라는 이들이 법에 대해 잘 아는 자였기에 지금 상황을 상담하라고 했지만, 어느새 명함은 카일의 손에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의 범죄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지만, 이곳의 형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긴 시간 가둬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식사도 제때 제공하고 운동이며 교육까지 너무 편하게 지냈다.
그런 벌은 카일이 원하지 않았다. 만약 아랑이 이곳의 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하면 그가 모르게 납치라도 해서 이 세계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
카일은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몰라 조금 열어놓은 침실에서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렸다.
“아랑?”
암막커튼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로 들어간 카일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야……이……”
한껏 가라앉은 데다 잔뜩 쉬어버려 바람 소리 가득한 아랑의 목소리를 들은 카일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일어나서 뭐든 좀 먹어야지. 룸서비스 시킬까?”
카일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작은 손이 이불깃을 잡더니 겨우 나와 있던 머리까지 숨겨버렸다.
“설아랑.”
이불을 살짝 잡아당기자, 뺏기지 않으려는 듯 안에서 꼬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부끄러워 할 거지?”
웃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귀여운 아랑의 행동에 카일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한껏 올라갔던 이불이 휙 내려오고, 연보라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보았다. 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빛에 드러난 아랑의 상의가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들어있었다.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랑이 팩하고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어진 건 앓는 소리였다.
“조금 더 쉬는 게…….”
“밥 줘.”
조금 더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불을 다시 덮어주던 카일의 손이 멈췄다.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뜬 아랑의 배에서 꼬르륵 맑은 소리가 울렸다.
단순히 순전히 그러니까 연인 관계해서 하는 그 일을 먼저 시작했다는 이유로 며칠을 호텔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던 아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곤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호텔에 더 머물렀다가는 복상사가 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냥 씻겨 준다며! 힘드니까 도와준다며! 그런데 왜 끝이 그래? 왜 그래? 너 진짜 인간 맞니?
열선으로 따뜻한 카시트가 노곤하게 몸을 풀어주자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러니 돈이 좋은 거지, 이 추위에 또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그렇게 찾아가야 했다면 아예 나서지도 못했다. 자신의 손을 잡아 깍지 끼는 카일은 느끼면서 아랑은 옅은 잠에 빠져들었다.
“진짜 여기야?”
부자 동네로 유명한 곳이 위치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빌라 앞에 차가 멈추자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겠어?”
“안 괜찮을 것도 없잖아요.”
자신을 걱정하는 카일의 목소리에 아랑은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를 만나면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아랑은 사실 확인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마음이 흐트러졌다.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불행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에게 어떠한 죄도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건 고통스러웠다. 단지 그를 미워하는 것을 떠나 스스로를 좀먹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은 그가 범인이라고 외쳤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갈등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매일 새벽 4시 44분 예약메시지를 꼬박꼬박 보냈다. 특별히 어떠한 깊은 내용을 담지는 않았다.
[기억하나요?]
[행복하세요?]
[여긴 참 춥군요.]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날 찾고 싶어요?]
[내가 찾아갈게요.]
무엇보다 그 문자들은 카일의 휴대전화로 보냈기에 아랑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쓰는 것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외출한 카일은 휴대전화 한 대를 더 만들어 왔을 뿐이었다. 무음에 무진동으로 해 놓은 단순 문자용 휴대전화는 볼 때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지금 집에 있을까요?”
빌라로 들어가는 입구 건너편에 서서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자니, 경비원이 나왔다.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빌라 앞에 멈춰 있는 카일과 아랑이 신경 쓰이는 것이 분명했다.
“응.”
카일은 추운데 차 안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아랑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옷에 붙은 모자를 끌어 씌우고는 검은 마스크까지 착용시켰다.
“언제 나올까요?”
“5~10분 안으로 나올 것 같군.”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랑은 침묵을 선택했다. 카일이 그에 대해서 알아내는 방법이 합법적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자신을 두고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서재에서 누군가와 통화했다.
그에 대한 뒷조사에 이어 사람을 붙었고, 그의 스케줄까지 카일의 손에 꼬박꼬박 보고되고 있는 듯했다.
“카일.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냥 있어줘요. 나 아직 마음 못 정해서.”
아랑은 차에 기댄 채 서 있는 카일을 돌아보았다. 무덤덤한 그의 표정이 오히려 더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았다.
“어?”
춥다고 말하면서 어깨를 감싸는 카일의 품에 안긴 채, 손장난 치던 아랑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문이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틀었을 뿐이었다. 카일만큼 훤칠한 키에 체격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나왔다. 저 빌라에 거주하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시선을 옮기려고 했을 뿐인데……
“흠.”
놀라서 그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아랑은 카일의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 나만 본 거 아니지? 저거 진짜. 내가 본 거.
하얀색 롱패딩을 입은 남자인데 가슴께쯤까지 지퍼를 올렸는데, 왜 그 위로 까망이 얼굴이 보이는 거 같지? 뭐지? 까만 주둥이랑 금색 눈동자가 보이는데 거기 머리에는 뭘 썼니? 그 빨간 모자가 왜 산타클로스 모자처럼 보이는 거지?
아랑은 여전히 그쪽으로 손가락질 하며 급히 카일을 툭툭 쳤다.
“미쳤군.”
카일은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어이없는 말투로 한마디 했다. 까망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초록 눈동자를 애써 무시하며 얼른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미쳤군.’이라는 말과 함께 이미 카일의 눈동자는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잘한다. 하다하다 이제 여기서 애완용 놀이인가?’
애써 그 눈동자를 피하던 까망의 눈에서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저 시키가 지금 뭐라고?
‘아는 척하지 마라. 가던 길 가라.’
이를 꽉 깨물고 말하는 까망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자 카일은 작게 소리 내 웃어버렸다. 같이 이곳으로 왔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마법진을 밟고 서 있던 건 자신과 아랑뿐이었는데, 아마도 그 위를 날고 있던 까망까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우와, 우와. 대박.”
카일과 까망이 눈으로 싸우는 사이 아랑은 이미 행동하고 있었다.
“완전 귀여워.”
카일이 말릴 사이도 없이 처음 본 남자 앞으로 다가간 아랑은 고개를 살짝 숙여 까망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비록 산타클로스 모자 같은 걸 쓰고 있지만 우리 까망이었다. 거기다 슬쩍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자 아랑의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되었다.
“어, 강아지가 꼭 드래곤처럼 생겼네요. 눈도 완전 크고. 금색 눈동자라니.”
“……”
흰 패딩을 입은 남자가 뒤로 살짝 물러나자 아랑은 시선을 들어 남자를 다시 보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만 분명 잘생긴 사람이었다.
“인형? 다 큰 어른이 인형을 들고 다녀요?”
가끔 선 없이 말하는 아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수호의 표정이 굳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처음 보는 연보랏빛 눈동자는 수호의 시선을 끌었다. 렌즈를 낀 것도 아닌데 눈동자 색이 원래 저렇다고?
집에 있는 걸 갑갑해 하는 것 같아서 산책삼아 한강에 데리고 다녀오려던 수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줄이야.
“아랑. 낯선 분께 실례야.”
이건 또 뭐야. 바로 코앞에서 있던 사람이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뒤로 가는 걸 본 수호는 작게 한숨 쉬었다.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임기응변에 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백지장인 것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완전 까망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하긴 천하의 까망이가 저런 산타클로스 복장을 할 이유가 없긴 하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외국인들의 유창한 한국말을 들으며 수호는 제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하긴 살아 움직이는 드래곤도 있는데 이제 뭔들 놀랄까?
“백 배우!”
수습되지 않는 상황에 서로 시선만 교환하며 서 있는 세 사람의 사이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새로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지퍼 위로 고개를 쏙 내밀고 있던 까망의 얼굴이 패딩 안으로 사라졌다.
“같은 곳에 살면서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옆에 분들은……”
사람 좋아 보이는 목소리. 어디서나 누구와든 친해질 수 있는 활발한 성격. 카일에게 허리가 잡힌 채 그의 등에 기대있던 아랑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까망을 보고 웃고 장난치던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카일이 뒤에서 안아주고 있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아, 안녕하세요.”
품 안으로 파고든 까망이 다치지 않게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그를 받친 수호는 한숨을 삼키며 대외적인 밝은 표정을 지었다.
“조만한 계약 끝난다면서, 나랑 이야기도 좀 나누고 그럼 좀 좋아. 이렇게 훤칠하신 분들과 계실 줄은 몰랐네. 안면도 있으신데 이웃사촌 좋다는 게 뭔가? 사람도 서로 소개받고…… .안녕하십니까!”
카일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유한 외모에 유들유들한 말투 그리고 자신을 향해 명함을 뻗어오자 마다하지 않고 그의 명함을 받았다.
엔터테인먼트 상호와 함께 그의 이름과 연락처 메일주소 등이 적힌 작은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외국 분들이신가? 큼큼, 어디? 영어권?”
수호는 자신을 향해 이들의 정체에 대해 묻는 듯한 김 대표의 질문에 슬쩍 뒤로 몇 걸음 물렀다. 이 사람과는 딱히 얽히고 싶지 않았다. 신인 배우 몇을 키우고 있는 작은 규모의 엔터테인먼트를 한다는 그는 꽤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그러면서 그는 조만간 있을 자신의 재계약 건과 함께 이웃사촌을 들먹이며 상부상조하자는 말을 했다. 거기다 신인 배우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들이고 밤새 시끄러운 파티를 열기도 하고, 데리고 나타나는 여자들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의 말로는 키우는 신인이라고 하지만 모두 알면서 눈감아줄 뿐이었다. 어쩌면 딱히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 무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스크가 최고네, 최고. 내가 업계 탑으로 키워줄 수 있는데, 시간 있으면 차 한 잔 합시다. 그리고 이분은 체격이 좀 작긴 한데…… 요즘 사람들 취향이 참 다양하잖아요?”
카일에게 시선을 둔 채 능글맞게 말하던 김현철의 얼굴이 아랑에게 향했고, 곧 카일이 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그의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그러면서 ‘취향이 참 다양하잖아요?’라는 말을 하는 그의 말투가 묘하게 변했다.
자신에게 바짝 다가오는 그를 보며 뻣뻣하게 굳은 아랑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다시 만난 그는 전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카일이 씌워 놓은 모자와 마스크에 얼굴이 죄다 가려진 아랑이었기에 김현철이 볼 수 있는 건 연보랏빛 눈동자가 전부였다.
“우와. 이거 진짜…… 눈동자색이 렌즈도 아니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바쁜 거 아니면 다 같이 갑시다.”
“한번 연락드리죠.”
아예 셋을 몰아서 가려는 듯한 김현철의 행동은 카일의 차가운 말투에 멈추었다.
“이야. 이분 한국말도 잘하시네. 카메라 테스트 이런 것도 필요 없고 그냥 내가 업계 최고 대우 해드리죠. 설마, 벌써 계약한 곳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 연락드리겠습니다.”
카일은 얼어버린 아랑을 다독거리며 대기 중인 차에 태웠다. 지금 상황에서는 까망과 그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그러나 첫 방문에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차에 타던 카일이 슬쩍 뒤돌아보았을 때, 금빛 눈동자와 잠시 시선이 얽혔다.
‘좀 알아 봐.’
‘나 힘들어. 카일’
까칠한 카일의 말에 돌아온 건 힘없는 까망이의 작은 목소리였다.
“저거 까망이 맞죠?”
차가 출발하자 아랑은 몸까지 돌리면서 흰 패딩을 입은 남자를 보았다.
“맞아.”
그놈과 몇 마디 더 하는 것 같더니 몸을 돌려 빌라로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아랑은 몸을 돌려 자리에 바로 앉았다.
뒤숭숭한 기분이 정리되지 않던 아랑의 지금껏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기는 손길에 카일을 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다 문득 그가 받은 명함이 생각났다. 엔터테인먼트를 한다더니 카일을 보는 순간 다짜고짜 외모를 훑어보던 눈빛과 유들유들한 말투까지 떠올랐다.
그에게 직접 말하고 명함을 받아도 되겠지만, 아랑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가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로 들어갔다. 네모나고 각진 것을 쉽게 찾아 꺼내 물끄러미 보았다.
검은색에 은색으로 각인된 멋들어진 종이에 새겨진 김현철이라는 이름을 손끝으로 만졌다. 사람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왜 그랬을까? 돈이 그렇게 탐났을까?
카일이 건네준 파일에 그는 빈털터리였다.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을 그렇게 쉽게 날려버릴 줄은 몰랐다. 도박장과 카지노에 찍힌 사진 속 그의 벌건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자신과 엄마가 살던 그 집은 저당조차 잡혀 있지 않은 그대로였다.
“카일. 약속 잡아요.”
그는 우리가 누군지 몰랐다. 그리고 지금 그는 카일을 캐스팅하고 싶어서 안달이나 있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그를 더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떡하려고?”
“일단 다시 만나 봐요. 조용한 곳에서. 오늘은 날 알아본 것 같지 않으니까, 다음엔 마스크랑 모자 벗고 갈래.”
“네가 원한다면.”
잠시 생각하는 듯 했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은 아랑은 천천히 카일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이게 다 카일 때문이야.
“근데 그 사람. 까망이 살아있는 거 아는 거 맞죠?”
“애완용이 진짜 취향일지도 모르지.”
정말 애완동물처럼 그 품에 안겨있던 까망을 떠올린 카일은 혀를 찼다. 위대하고 뛰어난 드래곤이니 뭐니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허풍을 치더니, 결국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건가?
200살이 넘었다고 하지만, 드래곤의 수명이 무한에 가까운 걸 보면 어쩜 어린아이와 같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까망이는 어떻게 같이 온 거지? 우리는 목걸이가 있다 치고, 그럼 까망이는 어떻게 돌아가요? 우리 돌아갈 때 데리고 가야 되나?”
아랑은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카일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만나서 물어봐야겠지.”
큰 손바닥에 이리저리 그어진 손금을 보던 아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그의 손바닥을 앙- 물었다. 이 손이 문제지, 이 손이. 방금도 그가 머리를 살살 쓸어주는 바람에 잠들 뻔했다. 이 손만 몸에 닿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법 세게 물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카일이었기에 아랑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흠.”
잠시 시간차를 둔 카일의 긴 한숨에 아랑은 슬며시 물고 있던 손바닥을 놓았다. 그리고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설아랑.”
낮아진 목소리로 카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아랑은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어나 앉았다. 일단 눈을 마주치면 안 돼. 그렇지. 창밖을 보겠어. 태연하게 차창에 붙으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보던 아랑은 제 허리를 감아오는 카일의 팔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 * *
아랑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높게 올린 폴라 티셔츠에 턱을 묻었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쓰고 있던 검은 선글라스를 슬쩍 내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육중하고 아름다운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자신을 보는 제복을 입은 남자의 눈빛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한손을 흔들어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저…… 그러니까……”
“방문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제가 쓴 것보다 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의 눈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경찰을 부른다는 단호한 한마디에 아랑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다른 손까지 꺼내 얼른 내저었다.
경찰이라니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백……수호……”
한가한 시간 우연히 TV를 보던 아랑은 하마터면 먹고 있던 유자차를 쏟을 뻔 했다. 까망이를 데리고 있던 남자의 외모가 참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TV에 나올 줄이야. 그러고 보니 그놈도 그를 ‘백 배우’라고 불렀던 게 떠올랐다.
배우라며…… 분명 백 배우라고 불렀는데, 왜 지금 5인조 그룹 ‘화이트 스톤’이 되어 팔짝팔짝 뛰면서 춤과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그 자리에서 휴대전화를 들어 검색을 시작한 아랑은 그가 백수호임을 알아냈다. 5인조 보이그룹으로 데뷔했지만, 현재 발을 넓혀 드라마까지 찍은 걸 확인했다. 그러니 ‘백 배우’라 부른 거겠지.
어쨌거나 지금 까망은 백수호가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랑이 움직였다. 마침 일이 있다고 아침부터 카일이 외출을 하자, 까망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 앞으로 온 것이었다.
“쯧. 날도 추운데 그렇게 좋은가.”
자신을 한심하게 보면서 혀를 차는 중년 남자의 모습에 아랑은 벙긋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사생팬을 보는 것 같았다. 집까지 찾아와서 연예인을 괴롭히는 사생팬.
“아니오. 절대 아니고요.”
전 백수호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데리고 있는 까망이 만나러 온 건데요!
“진짜 경찰 부르기 전에 제 발로 가는 게 좋을 거야.”
경고성 짙은 경비원의 말에 아랑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볼 수 없다면 이제 그가 소속되어 있는 소속사로 가야했다. 까망이 한번 만나자고 좋아하지도 않는 연예인 사생팬으로까지 오해받을 순 없었다.
문제는 소속사로 간들 똑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 뻔하다는 것. 아니면 진짜 어디 구석에 숨어서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일단 빌라 건너편으로 간 아랑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쉽게 빌라 앞을 떠나지 않기에 경비원의 시선을 받은 채, 망설이던 아랑은 딱히 할 것도 없지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포기하고 카일이 오기 전 집으로 돌아갈까? 그러나 오늘이 아니면 또 카일이 언제 혼자 외출할지 알 수 없었다.
“또 보는군요.”
고개를 숙인 채 휴대전화를 만지던 아랑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엔 흰색 롱패딩이더니 이번엔 질 좋은 모직코트를 입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백수호였다. 그가 아랑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아!”
아랑의 눈동자는 그가 아닌 그의 주위를 훑었다. 까망이는? 까망이!
“들어갈래요?”
낯선 남자의 질문에 아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까망이? 그때 그리 부르는 것 같던데.”
당황스러워하는 경비원의 눈빛을 받으며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한 아랑은 엘리베이터를 타자 물어오는 질문에 하관을 가리고 있던 폴라 티셔츠를 끌어내렸다.
“네. 본명은 베르 프레데릭인데, 제가 까망이라고 불러서 뭐 사람들이 둘 다 섞어서 불러요. 친한 사람들은 까망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은 대마법사님이라고……”
어색한 분위기에 마주 잡은 손끝을 튕기며 순순히 대답하던 아랑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끝내 흐려졌다. 상대가 까망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대마법사님이라니. 긴장한 탓에 이것저것 말해 버리고 말았다.
“주인이 있었군요.”
자신의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문이 열리자 앞서 걷는 남자의 뒤를 따르는 아랑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까망이는 분명 말도 잘하고, 성격도 보통이 아닌데. 이 남자는 까망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 자신도 멋모르고 까망이를 애완용처럼 대하긴 했지만 진짜 그가 드래곤에 대마법사님인 걸 알았다면 받들어 모셨을 것이었다.
일정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리자 싱그러운 풀내음이 쏟아져 나왔다. 현관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꿰고 안으로 들어선 아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곳은 가정집인가요? 실내정원인가요?
처음 풀내음을 맡았을 때는 좋은 방향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내정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거실. 그리고 나무들 사이 푹신한 방석 위에 있는 까만 것을 본 아랑은 망설임 없이 그 앞으로가 무릎을 꿇었다.
“까망아!”
푹신한 방석 위에 그리고 작은 몸 위에도 따뜻해 보이는 블랭킷을 덮은 까망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고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얘 왜 이래요?”
저번에 저 사람의 품에 안겨있을 때는 상황 상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 까망이는 무언가 확실히 힘들어 보였다. 바닥에 편하게 앉은 아랑은 까망을 품에 안고 이마를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그렇게 해 주는 걸 좋아했기에, 곧 힘겹게 떠졌던 눈이 감기고 아랑이만 알아볼 수 있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났다.
“까망?”
잠시 아프고 힘겨워 보이는 까망에 빠져 있던 아랑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김이 나는 머그잔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두고 앉는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TV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또렷하게 생긴데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무엇보다 지금껏 까망을 잘 돌봐준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뭘 먹지도 않고, 온종일 잠만 자는데, 얘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동물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더군요.”
“음. 과일 줘봤어요?”
“과일, 고기, 빵, 음료?”
“마나가 없어서 힘든가? 카일은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는데.”
아랑은 까망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가져다 대었다. 특유의 차갑고 부드러운 촉감에 작게 미소 지었다.
“베르? 대마법사? 그건 무슨 말이죠?”
수호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두 번째 보는 이를 집에 들였다. 처음엔 인형인 줄 알고 주워온 블랙 드래곤은 정말 살아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힘겹게 눈을 뜨거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보아서는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주르륵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기에 이러다 뭔 큰일이라도 일어날까 수호는 안달 났다. 각종 과일에 고기에 무언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주었지만 단 한 번도 입질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공기 청정기 옆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안을 식물들로 채우고 공기 청정기도 몇 대 더 산 수호였다.
“아…… 그게 음.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아랑은 초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수호의 품으로 까망이를 넘겼다. 그리고 앞에 놓인 머그잔을 들고는 믿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천천히 설명했다.
“차원 이동으로 다른 세계에 갔다가, 우연히 돌아왔는데 그때 얘도 같이 왔다는 거네요.”
“네.”
“아! 그런데 마나 때문일지도 몰라요. 여긴 공기도 엄청 안 좋고 오러를 쓸 수 없다고 말했거든요.”
수호는 난감함에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긁적였다. 진짜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이해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존재를 생각하면 가장 타당성 있게 들렸다.
“그럼 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건가요?”
수호는 조금 전 아랑이 하던 것처럼 까망의 이마를 검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조금 꿈틀거리면서 이완되는 느낌에 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만져주는 걸 좋아하는지 몰랐다.
만지려고 할 때마다 몸을 웅크렸기에 싫어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거의 눈으로만 지켜봐왔다.
“일단 까망이 좀 많이 만져주세요. 안아보니까 싸늘한 게 추울지도 모르잖아요. 저기 방석도 따뜻하겠지만 전기장판이라도 깔아주세요.”
아랑은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까망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게 일어났다.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해가 드는 곳만 찾아다니며 빛을 쬐는 걸 좋아했다. 언젠가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누워 있는 까망이를 만졌다가 그 뜨끈함에 놀란 적이 있었다.
뜨겁다고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지만, 그날은 아예 해가 질 때까지 통통한 배를 내놓고 일광욕을 즐긴 까망이었다.
“그럼 돌아갈 때 데리고 갈 건가요?”
아랑은 대답을 망설이며 주위를 살폈다. 지금 이 남자와 있는 것이 딱히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국의 환경적인 부분이 까망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까망을 데려갔다간 카일이 도끼눈을 치켜뜰 것이고, 아랑은 그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지금 당장엔 데리고 갔다가는 혼날 거 같아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부엌 좀 써도 될까요?”
일단 한국의 공기를 다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희박하다는 마나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까망이 좋아하던 음식은 만들 수 있었다.
수호는 자신의 집인 것처럼 능숙하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는 아랑을 지켜보았다. 과일과 채소 고기가 나오더니 이내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은 채 수호의 품에 안겨있던 까망이 눈이 떠졌다.
작은 주둥이가 열리고 분홍색 작은 혀가 쏙 나왔다. 냄새를 맡는지 킁킁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따끈따끈한 수프가 만들어지자 까망보다 수호가 더 흥분했다. 처음으로 보는 드래곤의 활발한 모습이었다.
한 손으로 까망을 잘 받쳐 든 수호는 작은 티스푼으로 수프를 조금 떴다. 그리고 혹여나 뜨거울까 후후 불어 식혔다. 까망의 작은 혀가 살짝 나왔다 들어가며 어서 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어디야?]
까망이가 식사를 하려는 찰라 걸려온 전화에 아랑은 두 손으로 공손히 휴대전화를 잡았다. 들려오는 카일의 냉랭한 목소리에 아랑은 슬쩍 수호의 눈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까망이네 집.]
[어디?]
[거기 그 고급빌라. 수호 씨네 집에 까망이가 있으니까.]
[기다려.]
긴 말이 없이 자신이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끝내버린 카일이었기에 아랑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온다고 했으니 꼼짝없이 여기서 기다려야 했다.
“이거 레시피 좀 적어줘요.”
통화를 끝내고 부엌으로 들어간 아랑은 작은 티스푼을 할짝이고 있는 까망을 보았다.
“뭐든요. 까망이가 좋아하는 건 다 적어드릴게요.”
레시피 적어드리는 게 뭐가 문제겠어요? 그 재료를 한국의 것으로 대체하는 게 어렵지요. 레시피를 적기 위해 아랑은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 * *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강한 풀내음에 깊게 숨을 들이마신 카일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온 이후 이렇게 맑은 공기는 처음이었다. 지금껏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았다. 카일은 자신을 보고 얼른 나오는 아랑을 품에 끌어안았다.
“여기 혼자 온 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지.”
품으로 끌어당기자마자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말을 하려고 뻥긋거리는 아랑의 입술 위로 카일의 입술이 살짝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응?”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달콤한 솜사탕 같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리고는 언제 자신을 안고 입 맞췄냐는 듯 무심하게 저를 놓고 안으로 들어가는 카일의 뒤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 와?’
이미 안에서부터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까망의 기운을 느끼고 있던 카일은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수호의 품에 강아지처럼 안겨 있는 까망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켁.”
“뭐 하는 겁니까?”
단발성의 비명이 까망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수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제법 신경 쓴 거잖아. 마나도 희박하지만 좀 있고. 어디서 다 죽어가는 소리야.”
그걸 다 지켜본 아랑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일이 나름 신경 써서 안 아프게라는 기준으로 때리는 딱밤이 얼마나 아픈지 자신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거기다 방금 카일이 한 말은 까망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까망이와 대화가 된다는 뜻?
“까망이 왜? 아프대? 힘들대? 왜?”
아랑은 얼른 카일의 팔뚝을 잡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수호는 자신보다 키와 체격이 좋은 남자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도 굉장히 거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은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더군다나 남의 집에 와서 집 주인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랑과 입 맞추던 모습은 수호가 생각하는 범주 내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나름 개방적이 되었다고 하지만, 눈앞에서 남자들이 다정하게 끌어안고 입 맞추는 걸 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마나 없다고 징징대는 거지. 그래도 뭐 애완용 주인이 잘 해 놨으니 죽지는 않을 테고.”
앞뒤 가릴 것 없이 반말하는 거만한 남자를 쳐다보던 수호의 눈에 힘이 살짝 빠졌다. 어쨌거나 지금 드래곤의 상태를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믿어도 됩니까?”
조금 누그러졌다고 하지만 수호의 말투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카일은 쌕쌕거리며 나름 자신을 열심히 쏘아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까망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더 놓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몸을 뒤로 빼버리는 수호의 행동에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순 없었다.
“추우니까 좀 따뜻하게 해 주고 또 아……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왜? 저 사람 머릿속에서 떠드는 건 안 되나?”
카일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까랑까랑한 까망이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저 사람에게 하고 싶던 말을 지금 자신에게 다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쯧…… 그거 혼자 마시는 거. 향 좋고 검은 건 커피겠지 뭐. 자기도 먹고 싶고 한 일주일 더 있으면 마나 모이니까 그때부터는 자기와 대화할 수 있고. 좋아…… 뭐? 미쳤어?”
까망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던 카일은 혀를 차고 말았다. 저 드래곤이 진짜 정신 줄을 놓았다. 새까만 까망의 볼이 불그스름해 보이는 건 착각인가?
“푸하하하. 까망이가 수호씨 좋대요.”
카일이 다 하지 못한 말은 까르르 웃는 아랑의 입에서 완성되었다. 잠시 카일과 이야기를 하고 아랑의 품에서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추긴 했지만, 까망이 깨어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탁한 공기와 부족한 마나 때문에 카일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눌리는 느낌이나 가슴이 답답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그리고 오러는 그의 삶에 필수 요소도 아니었다.
하지만 숲의 주인이라 불리며 자연을 다스리는 신으로 불리는 까망은 이곳이 최악이라고 했다. 마나는 까망이 생활하는 필수 조건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그나마 수호가 실내정원을 만들어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 치우고 잎이 넓은 것들로 바꿔달라는 군. 습도가 높으니 낮추고……” 나름 까다로운 까망은 자기가 원하는 환경으로 바꿔 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수호의 보살핌 아래 까망이 잘 지내는 걸 확인한 아랑은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나가 희박하고 대기질이 나빠서 고생하는 것이지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언제든 까망이 궁금하면 전화하라며 입력해 준 수호의 번호를 떠올리던 아랑은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챈 카일 덕분에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윽.”
“우리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까망의 안부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지만, 현재 자신은 카일에게 말하지 않고 무단으로 밖에 나온 상태였다. 거기다 이곳은 새 아빠도 살고 있는 빌라였다.
“카일. 그러니까……”
자신은 까망이 걱정되어서 온 것이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못 만났으면 돌아갔을 것이며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네.”
아랑을 구해준 건 카일의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초록빛 눈동자로 내면까지 뚫어볼 듯 자신을 보던 시선이 거둬지고 목덜미를 잡은 것까지 놓자 아랑은 얼른 몇 걸음 떨어져 섰다.
“이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고, 지금 가아할 곳이 생겼군.”
빌리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검은 차로 다가가 이제는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현대문물을 이용하는 카일을 보았다. 그는 늘 TV를 켜놓고 휴대전화로 수시로 무언가를 찾고, 아랑이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두꺼운 책을 읽었다.
그랬기에 늘 아랑이 먼저 잠들고, 늦게 일어나기에 카일이 제대로 잠을 자기라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비밀도 많아지고, 수시로 혼자 하는 외출도 많았다.
“어디?”
“여기 속담 중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이런 게 있던데. 미친놈 제대로 보긴 해야지.”
새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아랑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얼렁뚱땅 스쳐 지나간 것과 직접 자리를 마련해서 만나는 건 다른 일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았다면 며칠 전부터 초조하고 이상한 기분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했고, 준비하고 나가면서도 얼마나 망설였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약속장소가 어딘지 모르지만 이미 그곳을 향해가고 있기에 아랑은 고개를 들어 카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바닥에 축축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가고 싶다는 말도, 가기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만 물고 있는 아랑의 눈동자에 카일의 얼굴이 가득 비췄다.
“걱정돼?”
한 손을 꼭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작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는 카일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다정했다. 느리게 쓰다듬던 손길이 아랑의 목덜미에 머무르자 천천히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자 아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같이 있는데?”
카일의 낮은 중얼거림이 끝나고 볼과 입술 근처에 내려앉는 뜨거운 입술에 아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일의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아랑은 어느새 카일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파고들어 여린 입 안을 헤집자 아랑은 혀끝으로 그를 톡 건드렸다.
장난치듯 혀가 엉켰다 떨어지자 키득거리고 웃으며 아랑은 카일의 볼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장난치지 마.”
코끝을 댄 채 아랑은 얕고 빠르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초조함이나 불안함 따위는 조금도 느낄 새가 없었다.
“제대로 해?”
잠시 떨어지는 것도 아쉬운지 카일 역시 미소를 지은 채 아랑의 얼굴 여기저기 입술을 가져다댔다.
“아니,”
분명 아니라고 말했지만, 젖은 채 살짝 벌어져 있는 카일의 입술을 먼저 덥친 것도 그의 혀를 어설픈 솜씨로 건드리고 살짝 깨문 것도 아랑이었다.
* * *
카일의 뒤를 따라 걷던 아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끝을 볼 수 있는 삐까번쩍한 높은 건물에 있는 엔터테인먼트는 사람들의 호감을 이끌어낼 만했다.
새 아빠는 늘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 무척이나 멋진 사람처럼 보였고, 엄마에게 최고급의 물건들만 선물했으며. 자신과 엄마를 데리고 간 곳도 멋지고 좋은 곳들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인간이었다.
환한 조명과 깨끗한 자동문을 지나치자 안내데스크에는 단정하게 옷을 입은 직원이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환한 사무실 상석에 앉아 있는 걸 보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자신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추스르는 걸 보자 아랑은 앞에 있는 카일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오늘 보니 더 훤칠하시고, 일단 배우보다는 모델 쪽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동차나 이런 쪽으로……”
손을 내밀어 앉을 걸 권하고 따라온 직원에게 차를 준비하라는 말을 한 현철은 자리에 앉자마자 카일의 앞으로 흰 종이뭉치부터 내밀었다. 그리고 앞뒤 가릴 것 없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몇 안 되는 연예인들 자랑과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 그런데 출신이 어느 쪽이신지. 카일 씨는 북유럽 쪽 느낌이신데, 그…… 이름이.”
지금껏 카일을 향하던 시선이 자신에게 오자, 아랑은 슬쩍 몸을 소파 쪽으로 묻으며 카일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을 더 가리려 했다.
“알렌입니다.”
아랑이라는 본명을 밝히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카일이 낯선 이름을 꺼냈다.
“알렌은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으니, 제가 대신 말하죠.”
“그 눈동자 색이 보라색 같은데, 지금 보니 또 분홍색 같기도 하고. 남성적인 외모이기보다 중성적인 것 같아서 그런데…… 올해 나이가.”
“스무살……”
아랑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작게 말했다. 자기 목소리도 잊었을까?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으로 사람의 이미지는 많이 변할 수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는 짧은 시간 성장기의 아랑을 보지 못했는지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라면.
“스무살. 아이고 좋다. 좋아. 일단 알렌은…… 알렌이라고 불러도 되지? 내가 요즘 보이그룹도 하나 해 볼까 하는데, 노래는 좀 하나?”
처음부터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카일과 아랑에게 반존대 비슷하게 말하다 이제 완전히 말을 놓아버린 현철은 몸을 좀 더 앞으로 빼 카일의 뒤에 숨은 아랑을 보려 했다.
“조, 조금요?”
“그래. 뭐 노래가 중요하겠어. 노래야 기계로 다 만지면 되고, 이미 마스크가 완성형인데. 가운데 서서 방긋방긋 웃기만 해도 되니까. 큰 고민 말고.”
아랑의 목소리를 듣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현철을 보면서 카일은 낮게 혀를 찼다. 지금 현철의 상황은 절박했다. 그나마 최근에 드라마에 출현한 남자배우가 큰 인기를 끌면서 급한 불은 끄고 있지만, 그것 역시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계약서 먼저 주시면, 저희 쪽 변호사와 검토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건……”
새 아빠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몸을 뒤로 빼고 있던 아랑은 카일이 꺼내 놓은 것을 보았다. 지금껏 몸을 뺐던 것과 다르게 테이블에 놓인 것을 자세히 보려 몸을 숙였던 아랑의 시선이 카일에게로 향했다.
“이게 뭡니까?”
“계약 여부를 떠나서, 알렌이 작은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알렌이 사는 지역특산물인데 남자에게 그렇게 좋다고.”
아랑은 뻔뻔스럽게 말을 잘하는 카일의 옆모습을 보다 다시 테이블에 놓인 작은 약병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엔 자신이 손수 채집하고, 바람이 솔솔 부는 그늘에서 잘 말렸으며 정성을 다해서 갈아 놓은 약초가 들어있었다.
자신이 구분하려 붙여 놓은 네임텍이 떨어졌지만, 한국으로 올 때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약병은 단 하나였다.
“아, 이게……”
현철은 눈에 빛을 내며 고운 검은색 가루를 바라보았다.
“무향. 무취이니 작은 티스푼으로 조금 드셔도 되고, 음식에 넣어 드셔도 됩니다.”
“남자에게 좋은?”
카일은 대답 대신 보기 좋은 미소만 지었다.
“아! 혹시 평소 몸이 안 좋은 곳이 있으시다면, 머리가 좀 아플지도 모릅니다. 꾸준히 먹다 보면 두통이 사라지고 그 뒤부터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답니다. 그럼 계약서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랑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일을 따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나오면서 아랑은 슬쩍 뒤돌아보았다. 벌써 약초가 든 병을 열고 있는 새 아빠를 보자 묘한 기분이 일었다.
“그냥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약소한 작은 선물 정도로 생각해.”
건물을 나서며 하는 카일의 말에 아랑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쩌면 본격적인 복수는 이제 시작일지도 몰랐다
“먹을까? 먹었을까?”
아랑은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뒤를 흘깃흘깃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까지 시간이 걸렸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아직 어떠한 복수를 하겠다고 확실하게 마음먹지 못한 상태에서 워밍업이 [gol-a-po] 라니.
카페에서 마주 앉아 주머니를 털면서 우연히 나왔던 [gol-a-po]를 진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조금만 먹어도 지옥을 맛본다고 했다.
“그 성격이면 먹었겠지.”
남자에게 좋다는 그 한마디에 입꼬리가 올라간 현철이었다. 사무실을 나올 때 이미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약병을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저거 진짜 두통 심해요?”
“……”
카일 역시 직접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먹은 사람을 본 적은 있었다. 학생 시절, 짓궂은 녀석들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조교에게 먹였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기억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던 사람이 진짜 바닥을 기어 다녔다.
머리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은 기본이었고, 치유 마법조차 듣지 않았기에 그가 선택했던 것은 기절이었다. 스스로 머리를 벽에 갖다 박고 기절한 후에도 끙끙 앓았다고 전해 들었는데……
“구급차! 구급차 불러요.”
갑자기 엔터테인먼트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둥거리며 뛰어다니는 직원들이 보이고 그 뒤로 희미한 울음소리도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아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안으로 안내한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단순한 성격을 가진 자가 정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지금은 아랑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저리 태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아랑이인 걸을 알아챈다면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의 외모를 가지고 아랑이라고 말해봐야 믿을 것 같지 않았다.
“머리색부터 좀 바꿔야겠네.”
포슬포슬 부드러운 아랑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방금 아랑을 보던 현철의 시선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아이돌이 무엇인지 카일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TV에 단체로 나와서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고, 노래 부르는 무리였다. 그런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도 엄청나게 많다고 했고, 무엇보다 유명해진다면 사생활 같은 건 전혀 보장받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아랑을 보는 모든 사람과 그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게끔 지켜볼 성격이 아니었다. 요즘 같아서는 같이 다니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랑이 아까워 가둬 놓고 혼자만 보고 싶은 지경인데 대놓고 내놓는다니……
“아랑. 그 보이 그룹? 아이돌이 하고 싶은 건 아니지?”
“왜요?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있고 좋잖아요. 그리고 까망이 덕분에 이런 천연 갈색 머리에 희귀한 눈동자 색도 얻었는데. 나 좀 인기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예전엔 몰랐는데, 나도 한 외모 하는 것 같은데.”
“……설아랑.”
아랑은 엘리베이터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슬쩍 쓸어 넘기고는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세계에서는 제대로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지만, 온 사방이 유리에 비춰볼 곳이 많은 한국에서는 절로 제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만하면 잘생겼지. 센터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좀 찍어 바르고, 관리 받고,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던 아랑은 카일이 이름에 성까지 붙여 부르자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왠지 그가 “설아랑” 이렇게 부를 때면 어떤 경고를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카일과 거울 안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아랑의 눈동자가 옆으로 도르륵 굴러갔다.
“하고 싶어?”
“네……니오.”
네 도 아니오도 아닌 대답을 한 아랑은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냉큼 먼저 내렸다. 아이돌이니 보이그룹이니 그런 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한국을 사는 청소년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꿈꿔 봤던 것이기에 혹했던 것이었다.
“몇 가지 더 하고 들어가지.”
바로 차를 불러 돌아갈 줄 알았던 아랑은 자신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꼬물거려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내었다.
“……”
“그냥. 이렇게 걸어도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 또 어디가요?”
그곳에서는 아무렇지 않던 행동들이 이곳에서는 조심스러워졌다.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에서 남자들이 손깍지 끼고 다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헤어숍”
아랑이 하는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 것인지, 처음엔 빠져나가는 손을 그대로 두던 카일은 이번엔 손깍지를 꼈다.
아랑을 만나러 오기 전 이미 오늘 일정을 계획했던 것인지, 헤어숍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쪽으로 안내받던 아랑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픈된 공간도 있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룸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수호를 본 것이었다.
지나친 룸을 보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선 아랑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수호를 보았다. 방금 그의 집에서 편한 복장으로 있던 모습과 촬영이라도 있는지 화장을 하고 머리까지 완벽하게 마친 그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선뜻 수호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할 수 없어 그를 보던 아랑은 슬쩍 목을 빼고는 안은 더 들여다보았다. 혹시 까망이도 데리고 나왔을까? 까망이 상태를 보았을 땐 그의 집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지만, 그의 상태를 봐서는 혼자 두는 것도 불안했던 것이었다.
“어? 아랑?”
“아!”
안을 훔쳐보던 아랑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수호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또 보네요.
언제 자신의 마음대로 상황이 돌아갔던 적이 있던가? 분명 카일이 예약해 놓은 룸이 있었지만 어느새 카일과 아랑은 수호가 사용 중이던 룸에 들어와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머리 좀 하고, 그런데 수호씨 오늘 촬영 있어요? 완전 멋있다.”
“시상식이 있어서.”
“그럼 까망이는요?”
“자고 있길래. 간단하게 음식 준비해 놓고 나왔죠.”
저녁에 있는 시상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까망을 두고 숍에 와 있던 그와 마주쳤고, 시간이 없다며 자신의 전담팀을 아랑에게 붙여주고 수호는 떠나버렸다. 엄청난 분들이니, 실수 없이 최대한 원하는 대로 해 드리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혹시 음…… 부모님이 유명하신 분이라던가?”
“아뇨. 그런 거 아닌데……”
아랑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헤어숍 직원의 말에 슬쩍 거울에 비친 카일을 훔쳐보았다. 이곳에 온 이후 둘 다 관리할 시간이 없어 더벅하던 머리를 싹 정리한 그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아무렇게나 길러서 묶거나 정기적으로 관리사에게 케어를 받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 스타일이 아닌 깔끔한 포마드의 카일과 거울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아랑은 얼른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포마드에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짙은 회색 정장을 갖춰 입은 그가 마치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사업하거나 큰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숍 내에는 떠나기 전 수호가 오해살 만한 이상한 말을 했기에 분위기가 꽤 무거웠다.
“음. 그럼 지금 모습도 좋으신데 굳이 왜?”
아랑은 자신들이 꽤 궁금한지 카일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오는 미용사의 말에 아랑은 작게 미소 지었다. 원래 검은색이었는데, 마법으로 이 색이 되었다고 어찌 말하리오.
“도수 없는 검은색 써클 렌즈는 여기 있어요.”
다른 직원분이 아랑의 앞에 작은 상자 하나를 두고 갔다. 완벽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리려는지, 아랑의 연보랏빛 눈동자까지 가릴 수 있는 것을 준비해 달라는 카일의 말에 렌즈까지 동원되었다.
“음. 그럼 두 분 사이가?”
아랑보다 헤어커트를 끝낸 카일은 뒤쪽 소파에 편히 앉아 탭을 꺼내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처음 휴대전화를 사준 건 아랑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일이 사용하는 건 나날이 늘어갔다. 호텔 서재에는 노트북이 있었고, 지금은 탭까지. 휴대전화로 게임만 하는 아랑에 비해 어쩌면 카일은 이곳 물건들을 더 잘 쓰는 것 같았다.
“아하하……”
우리 사이는 왜 물으세요?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귀족과 그를 보필하는 시종 정도겠지요.
“이거 느낌 이상하네요.”
아랑은 직원의 도움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써클 렌즈를 착용했다. 카일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아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새 아빠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뀐 외모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원래 모습을 보여야 했다.
“흠흠.”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변한 머리카락과 써클 렌즈는 아랑은 완벽하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이 모습이 본 모습인데 왜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아랑은 여전히 탭에 집중하는 카일의 앞에 서서 몇 번 헛기침했다.
탭에 집중하던 카일의 고개가 들리고 아랑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검은색 눈동자를 숨기려 어떻게든 피하려던 눈빛이 아닌 당당하게 그의 눈을 본 것이었다.
“그래. 이 모습이었지.”
아랑은 가까이 오라는 듯 까딱이는 카일의 손끝을 보고는 상체를 숙여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검은색 눈동자 봐도 악마니 뭐니 죽음이니 이런 말 안 할 거지?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 죄다 죽여야 할걸.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약간 거만한 표정을 지은 아랑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갑자기 아랑의 턱이 카일의 손에 잡히고, 입술에 무언가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슨 짓이야!
아니오. 아니오. 우리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닌데요! 오해하지 마세요!
놀란 아랑이 얼른 몸을 바로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지켜 본 헤어숍 직원들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면서도 모른 척, 봤으면서 못 본 척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