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5)

15.

따뜻한 물에 샤워를 끝낸 아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연갈색 머리에 연보라색 눈동자였다고,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이면 진짜 새아빠가 자신을 알아볼까? 솔직히 이 모습을 못 알아본다면 그게 더 문제일 것 같았다. 어떻게 복수해 줄까? 일단 그가 [gol-a-po]를 먹은 건 확실했다. 약병들을 더 가지고 왔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고통을 줬겠지만 그럴 순 없었다.

카일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사고가 났던 그날 그 장소를 지나간 차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지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이곳의 법대로 그를 처벌할 방법이 없었다. 아랑의 심증만 있지 물증은 전무했다.

“아랑.”

“응?”

샤워가운을 입은 채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던 아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른 수건을 들어 머리를 털었다.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침은 먹고 가야지.”

노크 소리도 없이 욕실로 들어온 카일은 어느새 아랑의 손에서 수건을 건네받아 그의 머리카락을 닦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드라이기를 집어 들어 젖은 아랑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아랑은 눈을 감은 채 드라이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꼈다.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이 간질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카일도 머리 말려야지.”

카일을 앞에 앉혀 놓고 그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반짝 뜨인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기어이 카일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빼낸 아랑은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앉아야지. 왜 나를 보고 있어?

“뒤돌아 앉아요.”

아랑은 드라이기를 들었다. 하지만 카일은 자신을 올려다볼 뿐이었고, 아랑은 드라이기를 켰다. 추운 곳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자신보다 더위를 많이 타고, 감기 같은 걸 걸리지도 않는 그였기에 아랑은 시원한 바람으로 그의 머리를 말렸다. 손끝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스치고, 같이 쓴 샴푸 냄새에 아랑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누군가의 머리를 말려주는데 이런 기분이구나. 

말랑말랑하고 간진간질한 느낌이 가슴에 머물렀다. 

“응?”

촉촉이 젖어 있던 카일의 머리카락이 보슬보슬해질 무렵, 아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 샤워가운 끈에 손을 대는 겁니까? 아랑이 미처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가운의 끈이 풀어지고 가운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카일의 큰 손이 그 사이로 들어왔고, 아랑의 엉덩이가 그의 양손에 들어갔다.

“미쳤어요?”

빡!

당황이고 뭐시고 이성이 작동하기 전 아랑은 들고 있던 드라이기로 카일의 머리를 때려버렸다. 우리 오늘 아침까지 뭔 일 했는지 기억 안 나? 카일…… 너 진짜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자신도 모르게 때려버린 아랑은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크게 나는 소리에 놀라 드라이기를 놓쳤다.

조용한 공간에 드라이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는 파열음이 가득했다.

“……이렇게 날 싫어하는지 몰랐군.”

작게 말하고 일어나서 나가는 카일을 보며 아랑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대형사고. 만약에 카일에게 귀와 꼬리가 있다면 아래로 축 처져 힘없이 흔들렸을 것 같았다. 천하의 카일, 소드 마스터이자 한 지역을 호령하는 영주가 삐.졌.다.

말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아랑은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는 카일을 몰래 훔쳐보았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은 엄마에게 가는 날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내줬던 길.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내버렸고, 다시 돌려 놓았던 그 외길을 달리고 있었다.

아랑은 손을 뻗어 카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랑이 먼저 그의 손에 손깍지를 끼웠다. 먼저 자신에게 손을 뻗지 않았지만, 늘 따스한 기운을 가득 품은 그는 다가온 아랑을 말없이 품어주었다. 

아랑은 엄마의 단풍나무 앞에 섰다. 자그마했던 단풍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평소 엄마가 좋아하던 꽃들로 만든 커다란 꽃다발이 그 앞에 놓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자 금세 아랑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이 사진을 둘 때도 꽤 실랑이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엄마의 증명사진과 같이 여행 중에 찍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으로.

이곳에 올 때마다 굳어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즐겁게 행복한 그 모습으로 엄마가 있길 바랐다. 

“엄마. 나 왔어.”

예를 갖춰 절을 하지 않고 아랑은 편하게 앉아 사진이 든 액정을 손끝으로 만졌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대신 좋은 사람과 같이 왔어, 작은 목소리로 아랑은 평소 하던 대로 말을 꺼냈다. 정말 아프고 힘든 일도 많았는데, 이제는 멋진 동물 친구들도 있고 친절한 할아버지 한스와 대형 사고를 친 마법사 닉 이야기도 했다.

한참을 주절거리며 이야기하던 아랑은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의 옆에 살짝 머리를 숙인 채 서 있는 카일의 손을 잡았다.

“이거 말하면 엄마가 많이 놀랄 것 같은데, 내가 엄마만큼 사랑하는 사람.”

아, 엄마. 그렇게 쏘아보지 말고. 엄마가 예쁜 손주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더라고. 아랑은 헤헤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카일과 얽힌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엄마에게 편하게 하고 싶은 말도 하고 고개를 들어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쐬었다.

눈가가 젖어들었지만, 아랑은 울지 않았다. 정말 엄마가 옆에 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한겨울의 이상기온으로 오늘은 유독 따뜻하다고 했다.

한손은 카일의 손을 잡고 스쳐가는 바람과 햇살을 즐기던 아랑은 자신의 손을 놓는 그의 행동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신은 하지도 않았던, 제대로 된 인사. 이곳의 망자에 대한 인사를 그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두 번 절을 올린 카일은 마지막으로 상체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카일 폰 아덴입니다. 아랑을 제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몸을 굽혀 앉은 카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검은 머리카락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년을 만났노라고, 그리고 어느새 그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이 이어졌다. 

제법 긴 시간 같이 했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은 제대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것이 있기에 믿고 의지했다.

카일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아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나 사랑해? 사랑해? 장난기가 올라온 아랑은 말을 하고 있는 카일의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쑥 내밀었다.

“설아랑. 어머님께 인사드리는 중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의 눈을 본 아랑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랑이 먼저 카일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엄마. 그냥 이 사람 내꺼야. 잘 생겼지? 키도 크지? 돈도 엄청 많다. 엄마 아들 사람 잘 골랐지?”

제대로 격식을 갖춘 인사는 아랑의 행동 덕분에 끝났다. 간단하게 챙겨온 음식들을 올리고 술잔을 올리고서야 아랑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 못 가겠어.”

꿈같은 시간이었다. 정말 엄마가 옆에 이는 것 같았고, 아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그녀에게 소개시켜주는 수줍은 감정도 느꼈다. 해가 짧은 겨울의 밤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따뜻하다고 해도 긴 시간 밖에 있던 아랑의 손끝은 차게 식어있었다.

“카일. 못 가겠어.”

카일의 정장 옷깃을 잡은 아랑은 흠뻑 젖은 얼굴로 그의 얼굴과 엄마의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이곳은 너무 추웠다. 여기 어떻게 엄마를 혼자 둬? 어떻게?

“다음에 오셔서 그곳으로 모셔갈까?”

카일은 아랑을 감싸 안고 작은 등을 토닥거렸다. 이곳과 다르게 자신은 부모님을 성에 모시고 있었다. 부모님뿐 아니라 조상 분들을 모셔 놓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 아랑의 어머님을 같이 모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돼?”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랑은 고개를 젖혀 카일을 올려보았다.

“원한다면 뭐든.”

엄마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울던 아랑의 눈이 반짝였다. 그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카일이 말했으니 그건 가능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울어서 눈가와 코끝이 빨개진 아랑이 씩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고 하던데.”

덤덤한 카일의 말이 이어지자 아랑은 입을 쩍 벌리고는 그의 발은 콱 밟았다. 도대체 그런 것들은 다 어디서 듣고 배우는 거야?

 * * *

현철은 딱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잘생긴 외국인들이 놓고 간 검은 가루가 문제였다. 남자에게 좋다는 말에 먹었다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급하게 119에 실려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다 했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진통제도 듣지 않던 두통은 어느 순간 언제 아팠냐는 듯 완벽히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이 아프더니 고통이 사라지고 나자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문득 카일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몸이 안 좋은 곳이 있으면 좀 아플 수도 있다는 말에 한 번 더 먹었다. 또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봤다. CT에 MRI까지 할 수 있는 검사는 다했지만 온몸을 지배했던 고통은 또 어느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느새 그들이 주고 간 작은 약병은 현철의 옷 주머니에 항상 들어 있었다. 먹으면 좋아진다는 건 알지만 그 고통을 또 겪을까봐 선뜻 먹을 수 없었다.

거기다 계약서만 받아간 그들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카일은 모델과 연기 쪽으로 밀고, 알렌은 보이그룹 센터가 딱이었다. 둘만 들어온다면 사업이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닐 것이었다. 이미 사람 보는 눈은 탁월하다고 자부했다. 그러니 연상의 여자이긴 해도 제법 고운 돈 많은 여자를 물었지.

꽤 수척해진 얼굴로 휴대전화를 꺼낸 현철은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매일 새벽 4시 44분. 어김없이 문자가 들어왔다. 발신자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대포폰이라도 되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비오는 날 산에서 누군가를 밀 때 기분은 어떠셨습니까?]

오늘 새벽에 도착한 문자였다. 비오는 날 산이라면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죽으려면 같이 죽어버리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일이 있었기에 그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명은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었고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화장처리 했기에 증거 따위는 남지 않았다. 그리고 제법 이쁘장한 놈은 절벽 끝에서 자신에게 등을 보였다. 비도 왔고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솔직히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인데 또 어떤 계획을 세워야한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사라졌다. 언론까지 끌어들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게 해 찾으려 했지만, 정말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묻혔고, 자신은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런데 5년이나 지난 지금 왜? 왜 이제 와서 이런 문자가 오는 것일까? 전화번호를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사업하는 입장에서 번호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 배우! 커피라도 하자니까 왜 이렇게 얼굴이 보기 힘들어?”

수호는 까망을 품에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무시하고 지나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끝까지 따라오면서 떠들어댈 사람이었다.

“아, 네. 연말이라 좀 바쁘네요.”

혹시나 까망이 그에게 보일까 살짝 몸을 틀면서 입고 있는 패딩 지퍼를 조금 더 올렸다.

“수호 씨.”

난감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수호는 반가운 아랑의 말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 예쁜 연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검은색으로 바꾼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랬는데, 막상 검은색으로 변한 그를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귀여운 밤톨 같다고나 할까? 신비한 느낌보다는 귀여운 동생 같아 수호의 손이 절로 앞으로 나가 질 좋은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손 떼지.”

그래. 아랑이 오면 세트로 카일이 있기 망정이지. 자신을 보고 배시시 웃으면서 유독 불룩한 자신의 패딩을 흘깃거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 만진다고 닳아요? 아랑이 머리 색 이쁘게 잘 됐네.”

“닳아.”

단호한 카일의 말과 함께 빙싯거리던 아랑이 그의 한 팔에 안겨 쑥 뒤로 달려갔다.

“준비 다 됐죠? 빨리 가요.”

“카일씨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그 알렌은?”

요즘 아랑은 이틀이 멀다 하고 엄마를 보러 다니면서 그녀의 유골함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한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곳이 서울의 복잡한 번화가보다 공기도 좋고 마나도 풍부하다는 카일의 말에 까망이를 데려가 보려 날을 잡은 것이다.

바쁜 수호가 시간을 내야했기에 조금 미뤄졌지만, 오늘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나올 생각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같이 가려했는데……

그가 사는 빌라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만난 수호에게 정신이 팔려 옆에 누가 있는지 아랑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알렌은 여기 같이 있군요.”

마음의 준비나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 아랑은 카일에게 등 떠밀려 현철의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자신을 알아볼까? 알아본다면 그가 어떻게 하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는 큰 손에 용기를 낸 아랑은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던 눈을 천천히 위로 떠 현철을 응시했다.

“……너……”

늘 자신만만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던 현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아랑에게 삿대질을 하는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랑은 불안 초조한 마음에 자신이 하고 있던 목걸이를 잡았다. 이 목걸이만 있으면 이곳에서 자신은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니까. 어떤 상황이든 도망갈 준비를 본능적으로 한 것이었다.

“……너…… 이……”

입을 벙긋거리던 현철의 손이 아랑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차갑게 식은 시체를 확인했다면 온전히 잊었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가끔 떠올랐던 얼굴. 설아랑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어?”

수호는 낯선 상황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숫자를 다섯까지 세고 눈을 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나 어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닐 때 하는 버릇이었다. 

다시 눈을 감아서 상황을 정리하려던 수호는 갑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벗어나는 베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눈은 제법 잘 뜨고 아랑이 적어준 레시피대로 만든 음식을 잘 먹긴 했지만, 몸을 혼자 움직이는 건 버거워 했는데. 지금 베르는 앙증맞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수호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오, 됐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에 초롱초롱 빛을 내며 수호의 머리 위를 빙빙 돌던 베르가 수호의 머리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영주님!”

조용하던 공간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뛰어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떨림이 심한 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배?”

아랑의 손목을 잡아 챈 현철과 아랑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카일. 당황하는 현철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묻기 위해 수호가 카일의 팔을 툭툭 치던 때였다.

갑자기 현철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손목을 잡힌 아랑은 저도 모르게 목걸이를 붙잡으며 생각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랑에게 집은 아덴성이었다.

“영주님. 도련님. 대마법사님. 모두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이 늙은이가 그간 얼마나 고생을…… 그런데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까망과 카일. 아랑이 사라진 이후 지하 마법진을 병사들이 24시간 돌아가면서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누가 훼손해서 그들이 돌아오지 못할까 봐 또는 그들이 돌아왔을 때 빨리 알아채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마법진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병사는 처음으로 노란빛이 넓은 지하실을 채우는 걸 보았다. 그리고 훈련받은 대로 마법진에서 이상함이 느껴지자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역시 내 능력은 사람 5명 정도는 가뿐하네. 역시 드래곤 역사상 최연소……”

“베르. 닥쳐. 저기 저 남자는 결박해서 지하 감옥으로 보내고, 다들 올라가지.”

“어. 여기가 어디야?”

현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과 어수선한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쪽에서 결박하듯 팔을 잡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향하면서도, 저항할 생각조차 못한 채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전혀 몸을 못 쓰던 드래곤이 날아다니자, 수호의 머리 위로 오색찬란한 가루가 날렸다. 중세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간혹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카일과 아랑을 보면서 수호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베르는 두 손으로 받았다.

“백수호. 안녕.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드래곤 종족 중 가장 똑똑하고……”

과묵할 줄 알았던 드래곤은 굉장히 수다스럽고 자기애가 강했다.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아랑이 자신에게 늘어놓았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온 수호는 쿵- 소리와 함께 나타난 두 마리의 거대한 늑대를 보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동물원에서 본 호랑이도 보다도 큰 늑대들이 육중한 문을 부수며 들어와 갑자기 배를 까고 바닥을 뒹굴거리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 늑대들 사이에 선 아랑은 큰 소리고 밝게 웃으며 늑대들과 같이 뒹굴었다.

“아덴성의 집사 한스입니다. 편하게 한스라 불러주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마도 도련님과 영주님은 바쁘실 것 같으니 조용히 쉬실 만한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건 수호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두툼한 동아줄처럼 여겨졌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시군요. 낯설고 어색하시겠지만, 곧 적응되실 겁니다. 이곳에서 편히 쉬시고 저녁 식사시간 때 사람을 보내드리고……”

“한스. 수호는 내가 챙기니까 신경 쓰지 마. 가서 진한 차와 맛있는 과자부터 가지고 오고, 또 우리 수호 씻을 수 있게 욕조에 물도 준비 해.”

허니블론드 머리카락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를 한 작고 귀여운 소년이 한스의 말을 끊고 이것저것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를 본 한스는 얼른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상황 상 대마법사 베르일 것이 분명했다. 분명 이 방엔 한스와 자신, 베르 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는 수호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네. 곧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는데, 왜 놀라지를 않아? 목례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가는 한스를 보는 수호의 얼굴에 황망함이 가득했다.

“우와. 너 심장 터질 거 같아. 여기 도착해서 놀랐을 때도 이렇게 빨리 뛰진 않았는데. 수호야. 내가 마음에 들어?”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유럽 왕자 같은 남자의 붉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지?

“나잖아. 베르. 우리 수호 취향이 진짜 이럴 줄이야.”

한쪽 눈을 찡끗하며 수호를 껴안은 남자가 웃으며 말하자, 수호의 귀가 새빨갛게 변했다. 누구에게 말해본 적이 없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유명한 연예인이었지만, 그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스캔들이 없었다.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한 언론사에서 무려 1년 동안 24시간 그를 밀착해서 따라다녔지만, 뭐 하나 걸리는 것이 없었다.

연예계에는 특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었다. 뭐 하나라도 걸리는 게 당연했다. 술을 좋아한다던지, 꼭 스캔들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그렇게 꾸며낼 만한 건덕지는 꼭 나왔다.

허나 백수호. 이 사람은 일. 운동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적이 한국에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수호는 동성을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베르의 모습대로 수호의 취향은 허니블론드 머리카락에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 새하얀 얼굴에 귀엽게 주근깨가 조금 있는 체격이 아담한 귀여운 남자였다.

 * * *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지하 깊숙한 곳. 주위를 밝히는 것이라고는 벽에 걸려있는 횃불 몇 개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횃불 몇 개는 주위를 훤히 밝히지 못했고, 그런 어둠이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두 팔을 뻗어 앞으로 더듬은 현철은 손끝에 닿는 미끄덩한 차가운 벽에 몸을 움츠렸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돌은 물기로 축축했다. 벽을 더듬어 걸은 현철의 손에 이번에는 차가운 쇠창살이 만져졌다. 점차 어둠에 익숙해진 현철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감옥.

분명 카일이 그리 말했다. 지하 감옥이라고.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건장한 남자 둘이 자신의 옆에 팔짱을 끼고 섰다. 그리고 끝없이 계단을 내려왔고. 현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건 꿈이 분명했다. 백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른 사람들이 왔고, 그의 앞에 죽은 아랑이 나타났다. 그리고 분명 백 배우는 그를 ‘아랑’이라고 불렀다. 걔는 죽었는데? 5년 전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었는데. 키가 조금 더 크고, 어린 얼굴이 영글었지만 그는 진짜 아랑이었다.

놀란 마음에 허깨비라도 본 것 같아. 황급히 그를 잡아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낯선 곳에 있었다. 백 배우의 가슴에서 검은색 드래곤이 나와서 마구 날아다녔고, 중세시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건 꿈이었다. 확실한 꿈. 꿈은 깨면 되는 법.

현철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툭 쳤다. 그리 아프지 않게 쳤기에 자신은 비릿하고 구역감 가득한 냄새가 나는 곳에 있었다. 이번엔 철썩- 소리가 나도록 세게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고개가 옆으로 팩 돌아갔고, 볼과 손바닥이 따가웠다. 하지만 여전히 꿈속이었다. 현철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이번엔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깨지 않는 꿈은 고통이었다. 허겁지겁 무릎걸음으로 창살 앞으로 걸어간 그는 두 손으로 창살을 잡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풀어! 풀라고! 거기 아무도 없어? 씨발! 미친 새끼들아. 내가 누군지 알고! 당장 풀어!”

육두문자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자 자신의 목소리가 안에서 웅웅 울렸다. 현철의 목소리를 점차 커졌고, 이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다. 그건 어떤 단어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도 아니었다. 처절한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던 현철은 힘이 빠져 철장을 잡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값비싼 명품 옷에 축축한 물기가 베어나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조용해진 공간엔 똑똑 하는 물 떨어지는 소리와 헉헉거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가득했다.

“크릉-.”

갑자기 들리는 짐승소리에 현철은 본능적으로 철장에서 떨어졌다. 이곳은 비현실인 곳이었다. 터벅거리는 소리와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터벅터벅.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소리는 점차 커졌다. 현철은 이제 자신이 있는 공간 어딘가 가장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불안과 초조함에 그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번쩍-

불그스름한 횃불이 어둠을 몰아내는 이곳에 갑자기 새파란 불빛 두 개가 나타났다.

“킁.”

어둠속에서 파란 불빛 두 개가 둥둥 떠다녔고, 자신의 숨소리가 아닌 거친 다른 존재의 숨소리가 들렸다.

쾅-.

파란 눈동자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현철은 극악한 공포에 기절하고 말았다.

“……”

크릉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은돌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카일은 한쪽 구석에 처박혀 기절한 현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런 이동은 아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목걸이를 잡았고, 현철이 자신의 손목을 잡는 순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얼떨결에 수호와 베르도 같이 넘어왔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베르는 금세 기력을 찾았고, 수호는 놀란 것 같았지만 그를 챙기는 건 베르가 알아서 할 일이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랑은 한스와 성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저녁을 만들겠다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어쩌면 아랑은 이 사람을 만나는 걸 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아랑은 서두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행이라고 우는 닉을 서재에 버려둔 카일이 선택한 것은 은돌과 함께 지하 감옥으로 가는 것이었다. 

“겨우 이딴 것이……”

혼자 난리치다 은돌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린 나약한 존재에 대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이제 당연스럽게 침실을 합친 그들이었기에 카일은 아랑의 잠버릇을 모두 알고 있었다.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그는 꼭 카일의 품안에 파고들어 자는 걸 좋아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새벽녘이면 흐느껴 우는 날이 많았다.

엄마를 부르기도 했고,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원망의 말을 뱉기도 하고, 어쩔 때는 그저 울기만 했다. 처음엔 잠든 채 힘들어 가는 아랑을 깨웠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상황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제는 그런 날이 오면 품에 안고 다독거리며 말을 건넸다. 묻는 말에 웅얼거리며 대답을 하는 아랑은 쉽게 울음을 그쳤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고통 속에 사는 아랑인데, 이 작자는……

“물어뜯고 싶나?”

카일은 옆에 서서 여전히 이를 드러내고를 그릉거리고 있는 은돌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은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말을 다 알아듣는 은돌은 이미 아랑의 고통의 시작이 어딘지 정확히 알았다. 그랬기에 지하 감옥으로 간다는 자신의 말에 앞장서서 걸었던 것이었다. 흥분한 짐승이 창살에 몸을 부딪치자 요란한 울림이 안을 채웠다.

“어떤 것이 좋을까? 사지를 잘라서 숲에 버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야. 너도 그리 생각하지.”

은돌은 주위를 서성이며 코를 킁킁거렸다.

“오랜만에 숲에서 사냥을 할까?”

부산하게 움직이던 은돌의 발걸음이 멈췄다. 추운 겨울이 되면서 성으로 돌아온 은돌과 하양은 계속해 성안에 머물고 있었다. 가끔 성 뒤쪽과 이어진 숲으로 뛰어가 놀다 오긴 했지만, 사냥감이 없는 숲은 그들에겐 재밌는 놀이터가 아녔다.

“그럼 준비하지. 은돌, 단번에 잡아서는 안 돼. 이건 놀이니까.”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지하 감옥을 벗어나는 카일을 따라가는 은돌의 꼬리가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그 꼴은 또 뭐지?”

카일은 수호의 옆에 딱 붙어 앉은 까망을 보고는 낮게 혀를 찼다. 드래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건 그의 자유이긴 했다. 엘프로 변하든, 드워프로 변하든, 하다못해 짐승으로 변하는 것도 자유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꽤 낯설었다.

매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위대한 드래곤이 어쩌고 저쩌고에 유행에는 제일 민감하게 굴었다. 요즘 유행은 작고 귀엽게 생긴 남자인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자 길드의 수장이니 뭐니 하면서 한껏 분위기 잡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내 마음.”

음식들이 나올 때마다 수호 앞으로 쏙쏙 밀어주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 카일은 제일 두툼한 닭다리 하나를 푹 찍어 아랑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나 여기 식당 하나 차릴까요? 잇 플레이스로 등급할 자신 있는데.”

아랑이 그날 저녁으로 선택한 것은 바삭바삭한 후라이드 치킨이었다. 성안엔 고소한 닭튀김 냄새가 가득 들어찼고, 생닭을 즐기던 은돌과 하양이도 어느새 후라이드를 뜯고 있었다.

“……”

“수호. 왜 안 먹어?”

수호는 태어나 처음 보는 커다란 닭다리에 침묵을 선택했다. 칠면조 다리라도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후라이드 치킨은 충분히 그의 식욕도 자극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첫날, 제대로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그는 성인 남자 5~6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넓은 욕조에서 앉아 있었다.

베르가 같이 들어온다는 걸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씻고 나왔을 땐, 화려한 복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입어보는 옷이라 어쩔 수 없이 베르의 손을 빌려야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저녁식사였다. 오늘은 스케줄이 없지만, 내일은 연기대상까지 겹쳐 스케줄이 빡빡했다. 그러나 그의 휴대전화는 먹통이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수호는 자신의 팔뚝을 잡는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베르의 얼굴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말 자신의 취향을 완전히 녹여낸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아래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배우인 덕분에 그나마 표정 관리라도 되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눈앞에서 이상형이 알짱거리는 상황에도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싫어하나? 다른 거 먹을래?”

베르는 다들 열심히 먹는 치킨을 두고 멍하니 있는 수호가 걱정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주로 먹는 것이 퍼석퍼석한 닭가슴살이라든가, 풀때기 같은 것이던 걸 떠올렸다. 

“나 돌아갈 순 있는 거지?”

“왜? 가고 싶어? 지금 갈래?”

베르는 먹고 있던 치킨을 내려놓았다. 이곳에 돌아온 이상 자신이 못 할 일은 없었다.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다. 대신 그곳에서 자신이 힘을 못 쓸것이 분명했다.

이제야 사람으로 변해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다시 힘없는 드래곤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세계 시간차가 어떻게 되지?”

“아랑이 1:1이라고 했어.”

“식사는 하고 가자.”

수호는 닭다리를 야무지게 두 손으로 들고 먹는 베르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힘겨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베르가 실컷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이었다.

반나절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같이 즐기며 저녁식사도 했다. 스케줄이 있다는 수호의 말에 까망과 그는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반면 자신의 욕실에서 씻고 나와 가운만 걸친 채 난로 앞에 앉은 아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낯설었던 이곳이 너무 그리웠었다. 지금도 하양이와 은돌이는 양쪽에 엎드려있었다.

“기분은?”

손에 부들거리는 은돌의 털을 느끼던 아랑은 카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가를 보았다. 부엌에서 바빴던 아랑과 다르게 카일은 돌아오자마자 밀려있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역시 이제야 목욕을 끝냈는지, 샤워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이상해요.”

한국에서는 당연히 그와 한 침대를 쓰고 지냈는데, 단지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왠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여기 조금 정리해 두고 가서 어머님 모셔오자.”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문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아랑이 일어나 그의 앞으로 갔다.

“한스가 정리 중.”

다정한 카일의 말에 아랑이 먼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살포시 껴안았다. 그래. 여긴 한스도 있고 사람도 많고, 저기 은돌이랑 하양이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돌아보던 아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까지 난로 앞에 서 있던 두 마리의 늑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치 빠른 것들……

아랑은 그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의 따뜻한 품에 안긴 채 먼동이 트는 걸 지켜보자 마음 한쪽이 묵직해졌다. 일부러 바쁘게 움직였고, 더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옆으로 누워 해가 뜨는 걸 지켜보던 아랑은 몸을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카일을 보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을 내쉬고 있지만, 그 역시 깨어있었다.

“있잖아.”

여전히 어떤 미동도 않는 그였기에, 아랑은 손끝으로 카일의 얼굴을 만졌다. 짙고 곧은 눈썹과 높은 코를 따라 내려가던 손이 이번에는 그의 입술에 멈췄다. 폭신한 그의 입술을 손끝으로 지분거리자, 순식간에 그가 입술로 손가락 한 마디를 물어버렸다.

“그…… 사람.”

여기 같이 도착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카일의 눈이 떠졌다. 아침이라서 그런 것인지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오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살아 있어?”

망설이던 아랑은 결국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을 꺼냈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면 좋겠군.”

카일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물고 있던 아랑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방금 그의 대답에서 새 아빠가 살아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카일은 아마 그에 대한 처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처리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어디 있어?”

“지하.”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하려던 아랑의 입술에 카일의 입술이 닿았다. 왜 말을 하려는 걸 막아. 아랑은 자신의 말을 막는 카일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어느새 그는 자신의 위에 있었다. 분명 자신의 입술을 맴돌던 카일의 입술이 쇄골에 닿았다.

“카일. 아침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랑의 손은 카일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아침이지.”

이불이 젖혀져 드러난 아랑의 몸은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카일의 입술은 그 자리를 다시 찾아 지분거렸다. 지난 밤, 카일의 품 안에서 펑펑 울었던 아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카일이 문제가 아니고 분명 자신이 문제였다.

힘들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일어나는 열기에 아랑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나오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스가 문 밖에서 노크하며, 아침을 알릴 때까지 아랑은 카일의 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랑 모르게 정리하도록.”

아랑이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자에 대한 처벌은 자신에게 맡겨주길 바랐다. 마음 약한 아랑이 그를 용서하는 것이 싫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속일 수 없어 솔직히 말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는 아랑을 다시 품에 안은 건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한국에선 다른 사람과 같았다면 이곳에서 그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힘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넘쳐나는 힘을 억누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일의 침대 헤드가 부서진 것도 침대에 드리워진 커튼이 다 찢어진 것도 다 카일이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절한 듯 다시 잠들어버린 아랑은 그의 침실로 옮겨놓은 카일은 자신의 침실 문 앞에 서서 굳어 있는 한스에게 간략하게 대답했다.

“저…… 도련님……”

평생 놀라본 적도 당황한 적도 없던 한스에게 최근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엉망이 되어버린 카일의 침실에서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아랑의 안위였다.

“그의 방에. 오늘은 어떻게든 그 방에서 못 나오도록 해.”

이어진 욕실로 들어가는 카일을 본 한스는 뛰다시피 아랑의 방으로 건너갔다. 흐트러짐 없이 어젯밤과 똑같은 아랑의 침실. 침대 가운데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스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영주님이 제 연인을 크게 해하지는 않았…… 그 순간, 아랑이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틀어 누웠다. 어깨까지 잘 덮여 있던 이불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어깨 등 가슴 가릴 것 없이 적나라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과연 이게 해하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랑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한스는 안심하며 벽난로 안으로 장작을 몇 개 더 넣었다.

치유사를 부르지 않는 이상, 아랑 스스로 침실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카일을 시중드는 것이 아닌 아랑은 선택한 한스는 빠르게 부엌으로 향했다. 아랑의 세계음식을 알지 못했기에, 이곳의 음식 중 스테미너와 체력보강에 좋은 음식으로 준비해야 했다.

 * * *

“은돌. 준비됐나?”

아랑이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이. 카일은 성 뒷문에서 이어지는 숲 앞에 은돌과 같이 서 있었다. 마을의 수의사 말로 새끼를 가졌다는 하양은 이 일을 같이 할 수 없었다.

결국, 각자의 제일 안전한 휴식처에 연인을 두고 온 두 수컷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당장 눈 덮인 숲으로 뛰어들고 싶은 은돌의 목에서 그릉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기사들에게 끌려 나오는 한 남자를 보는 카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기사단장 제임스의 말에 의하면 어제 저녁도, 오늘 아침도 주는 만큼 깨끗하게 다 먹었다고 했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만큼은 강한 자였다.

“놓아달라고 했다지? 그럼 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 가도록. 내가 못 찾을 만큼. 난 저 해가 정오에 오르면 널 찾기 시작하겠다. 행운을 빌지.”

카일은 한 손을 내려 은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산에서 움직이기 불편한 양복에 구두가 아니었다. 현철은 두툼한 방한복에 산에 오르기 좋은 신발까지 갖춰 신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서는 허기가 질 때 먹을 물과 음식이 든 주머니도 채워졌다.

그렇게 현철은 결박하고 있던 기사들이 자신을 놓아주자마자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이곳이 어딘지 중요하지 않았다. 해도 뭣도 들지 않지, 얼어 죽을 것이 분명한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더는 살 수 없었다. 세치 혀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세치 혀만 믿고 살아온 세월이 40년이 넘었고, 그는 겉으로나마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는 자였다.

현철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고, 그는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이런 곳에서 지그재그로 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한쪽으로 가다보면 무언가 나올 테고, 제자리에 빙빙 도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카일은 말없이 산으로 향하는 현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은돌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지 한곳으로 쭉 가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인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발걸음엔 힘이 있었다. 

부디 그 힘과 삶에 대한 의지가 길기를…… 그만큼 괴롭게 될 테니.

“내가 허락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 어쭙잖은 것들이 죽여 버리면 재미없잖아.”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돌은 현철이 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이 내달렸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겨울이 시작되고 숲에는 굶주린 들짐승과 몬스터들이 많았다.

그리고 비리비한 현철은 그들에게 최적의 먹잇감이고, 일부러 은돌의 체취가 잔뜩 묻은 옷을 입혔지만 굶주림은 항상 예상을 뒤엎는 일을 만들었다. 지금부터 은돌이 할 일은 다른 몬스터나 짐승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이었다.

늦은 오후. 석양을 보며 아랑은 지끈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도망간 카일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스만 열심히 자신의 방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적당히라는 단어가 그의 두뇌에는 들어있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 오늘 아침의 카일은 평소와 달랐다. 관계 중이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부서지고 찢어지는 소리도 분명히 들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뒷정리는 잘하고 이방으로 옮겨준 덕분에 한스에게 못 보일 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까지 침대에 누워있고 싶지 않은 아랑은 천천히 옷을 챙겨 입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지하에 있다고 했으니까, 지하에 가면. 그는 분명히 자신을 알아봤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엔 다급함이 잔뜩 묻었었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그게……”

“안됩니다.”

이 넓은 성에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하나일 리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 위해 1층을 서성이던 아랑은 한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할배도 알잖아요.”

“원하시면 영주님과 함께 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카일은 보여주지 않을 거예요. 지하 감옥은 어떤 곳이에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두는 곳입니다.”

“어떤 잘못이요?”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그 모든 잘못……”

“아랑. 언제 내려왔지?”

1층에서 한스와 대화 중이던 아랑은 카일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스을 보며 아랑에게 말을 했다. 한스에게 더 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카일. 해도 내가 하는 거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랑은 카일의 손을 잡았다. 온종일 서재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그의 몸은 차가웠다. 늘 따스했던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찬기에 아랑은 잡았던 손을 다시 놓았다.

“쯧……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못 일어날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체력이 좋았군.”

숲에 놓아준 그를 다시 잡아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추운 날씨 눈까지 옅게 쌓인 산을 헤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돌이 기척을 숨긴 채 옆에서 지키기도 했지만, 넘쳐나는 오러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카일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던 카일은 마지막 순간은 은돌에게 맡겼다. 그리고 먹잇감을 신나게 가지고 놀던 은돌은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않은 채로 기절시켜버렸다. 눈에 푸른빛은 내는 늑대가 사나운 이를 드러내고 덮치는 순간 현철은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기절한 그를 다시 지하 감옥에 두고 올라오던 길에 아랑은 한스를 잡고 있었다.

“보고 싶어.”

아마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아랑은 그곳에 정신을 팔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같이 가지.”

카일의 말에 한스는 옆을 지나는 하인을 시켜 두툼한 외투를 가져오게 했다. 지하로 간다는데, 아랑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슬리퍼 대신 외출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그리고 항균 효과에 완벽하게 냄새를 차단한다는 마스크까지 쓴 아랑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지하. 지하 감옥.

아랑 역시 지하 감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해가 잘 들지 않을 것이고, 습하고, 추운 곳?

불편한 허리와 다리로 카일의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가던 아랑은 결국 중간에 그에게 안겨 내려가야 했다. 끝없이 이어진 좁고 가파른 계단에 지친 것이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긴 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려가는 동안 마법이 걸려있다는 철문을 4개나 지나야 했다. 짙은 어둠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아랑은 카일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자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옆으로 횃불을 들고 있는 기사들이 서고 나서야 사물이 인지가 되었다. 

무표정한 카일과 다르게 찌푸린 채 굳은 기사들의 표정에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미약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저기 있군.”

현철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아랑은 카일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눈앞에 두꺼운 철창이 있었다. 그리고 제법 넓은 공간의 구석진 곳에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매끼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고, 딱히 다친 곳이나 그런 곳도 없어.”

카일의 간단한 설명에 기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반나절을 추운 산을 헤매다 마지막으로 은돌이 커다란 입 안에 머리가 들어갔다 나온 현철이었다. 어제 저녁, 오늘 아침. 허리에 채워 준 주머니에 든 음식까지 먹었으니 식사를 하긴 한 것도 맞았다.

“왜 저러고 있어요?”

“이런 곳에서는 깨어 있는 것보다 저렇게 자거나 쉬는 것이 더 나을 테지.”

카일의 말에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물렀지만, 온몸에 무언가 끈적하고 불쾌한 것이 잔뜩 붙는 것 같았다.

“저녁은요?”

“아직.”

“저녁은 내가 줄 거예요.”

아랑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다 넣어서 엄청 맛없는 거 만들어 줄 거야.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이곳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었으니까. 오트밀만 때려 넣은 뻑뻑한 죽도 뭣도 아닌 것을 줄 생각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당기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말리는 카일과 한스의 말에도 아랑은 굳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곱게 갈린 부드러운 오트밀 가루를 두고 일부러 창고에서 오트밀을 찾아왔다.

우유도 아니고, 물과 오트밀 소금만 들어간 뻑뻑한 음식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일부러 하루 묵은 빵도 찾아냈다. 하루 지난 빵은 모두 가루가 되어 성에서 기르는 동물들의 먹이가 되었다. 수분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퍼석퍼석하고 딱딱한 빵을 트레이에 올린 아랑은 물도 한 컵 찾았다.

뻑뻑한 오트밀 죽. 꾸덕꾸덕해서 삼키려면 물이 꼭 필요한 무미건조한 맛의 딱딱한 빵. 그것들은 아랑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먹던 주식이었다.

“도련님. 이건 제가 사람을 시켜 내려 보내겠습니다.”

트레이를 들고 선 아랑의 앞을 한스가 막아섰다.

“아냐. 할배는 저기 뒤에 거 좀 챙겨서 밑으로 내려 보내주세요.”

잠시 후, 어둠이 가득했던 지하 감옥은 대낮보다 밝아졌다. 현철이 갇혀 있는 철장 밖으로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정찬이 준비되었다. 역시나 카일의 도움을 받아 지하로 내려온 아랑의 옆엔 은돌이 있었다.

현철의 앞에서 정찬을 먹겠다고 말했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혼줄이 난 아랑의 얼굴은 예의 마법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이 성의 모든 사람이 아랑이 지하의 끔찍한 냄새를 맡는 걸 반대한 것이었다.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에 구석에 처박혀 있던 현철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어둠 속에 앞도 잘 구분되지 않는 곳은 대낮처럼 밝았고, 철창 너머로 진수성찬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손이 닿는 곳에 작은 트레이에도 음식이 있었다.

“아랑? 설아랑…… 너…… 너. 니가 이러면 안 되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현철은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철장을 잡고 섰다. 검은 머리카락이긴 했지만 아랑의 눈동자는 연보라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 자신을 덮쳤던 늑대가 아랑이 옆에 있었다.

“은돌이 배고프지?”

아랑의 한마디에 테이블에 올려진 커다란 훈제닭 한 마리가 통째로 바닥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닭은 은돌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현철은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려 트레이를 내려다보았다. 물과 죽 같은 것과 빵 하나가 있었다. 그와 반대로 건너편엔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내 너를 도와주마. 저 악마 같은 놈이 널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알잖아. 돌아가면 돌아가기만 하면……”

현철은 처음의 협박과 다르게 이번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걸로 모자라지?”

아랑의 몸통만 한 커다란 생선 튀김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졌다. 생선을 그대로 튀긴 음식은 다시 뼈 씹는 소리와 함께 은돌이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음식을 먹는 늑대의 눈은 정확히 현철을 향해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현철은 철장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분명 닭과 물고기를 먹고 있지만, 늑대의 시선이 닿는 순간 자신이 먹히는 것 같았다. 빠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등이 축축한 벽에 닿았다.

“제가 생각을 많이 해 봤어요. 왜 그랬을까?”

아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은돌에게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현철과 아랑 단 둘이었다. 하지만 현철이 있는 곳에선 볼 수 없는, 위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곳엔 카일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우리 엄마 돈이 탐났어요?”

이번엔 멧돼지 바비큐가 은돌의 앞에 놓여지고, 아랑이 말하는 것 사이로 끊임없이 쩝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내 등도 밀었죠?”

아랑은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는 검은색으로 염색했기에 그대로였지만, 검은 렌즈를 뺀 그의 눈은 여전히 연보라색이었다.

현철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곳 모든 사람이 현철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지하 감옥에 갇히는 순간도 성은 웅성거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악마의 자손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랑이야 까망이 그의 눈과 머리색을 바꿔준 것이라는 얘기가 오간 데다, 이미 그의 본 머리카락의 색이 연갈색으로 아는 시종이 본래 눈 색을 다르게 알고 있는 시종이 많았기에 괜찮았지만, 현철은 그렇지 못했다. 

수호가 손님방으로 안내되고, 그가 지하 감옥으로 옮겨지는 것에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당장 죽여야 하는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에게 어울리는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살고 싶어요?”

제법 긴 침묵 끝에 아랑이 말을 하자, 현철의 고개가 위아래로 격하게 움직였다. 비록 빚이 좀 있긴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새로 들어온 아이 하나가 스타급으로 크면서 그 빚은 곧 다 처분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어느새 잔뜩 차려진 만찬은 은돌의 뱃속으로 모두 들어갔고, 식사 시간은 끝났다.

“생각해 볼게요.”

아랑은 혀를 내밀어 주둥이를 훑고 있는 은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냥 주는 대로 먹기만 하라니까, 아쉬움이 가득한 그 입질이 가벼워 보인 것이었다. 최대한 무게 잡고 무섭게 보이라고 명령했는데. 잘하다가 마지막에 왜 이래.

이만하면 괜찮았다. 지하 감옥은 아랑의 상상보다 끔찍하지 않았다. 좀 춥고 습하긴 했지만, 철창 너머로 간이침대도 있었고, 사람이 못 살만큼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그를 어떻게 처벌할지 고민할 시간은 많았다.

은돌과 아랑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도 카일은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하로 내려간다는 아랑 때문에 오늘 닉이 큰일을 해야 했다. 닉은 서투른 솜씨로 환상마법을 꽤 재밌게 만들어냈다. 아랑이 보고 간 것은 환영이었다.

다 헤진 반팔에 반바지를 입어 손과 발에 동상을 입은 현철은 환상마법으로 인해 멀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벌레가 드글드글한 벽과 바닥은 그저 아랑이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깔끔한 감옥처럼 보이게 했다.

없는 침대도 보였다. 아랑이 위로 올라간 지금 감옥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제법 긴 시간 놓여 있던 트레이의 부실한 음식은 이곳 벌레들의 먹이가 된지 오래였다. 카일은 철문을 확인하며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왔다. 아랑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 이후 현철의 삶은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끌려 나가 산속을 헤매야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은돌에게 잡혀 지하에 갇혔다. 그리고 저녁이면 아랑이 나타나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은돌에게 먹이를 주었다.

“으헤헤헤.”

다시 풀려난 현철은 미친 듯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그냥 웃으면서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빙글거릴 뿐이었다.

 * * *

“한국 갈까?”

앞에 다과를 두고도 창밖을 보던 아랑은 카일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곳의 삶은 참 편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른 것이 착착 돌아갔다. 처음에 일이 몰려 바빴던 카일도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현철은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 사람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랑은 카일의 말에 쿠키 하나를 집어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벌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날이 퀭해지고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버거웠다. 그리고 이곳에 더 뒀다가는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죽던가. 

누군가를 길고 오래 처벌하기엔 아랑은 너무 여렸다. 벌써 지하에서 은돌이에게 먹이 주는 일을 멈춘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나마 그동안 한스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래. 하고 싶은 건 해야지.”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카일이었다. 큰 손이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쓸어주자 아랑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옆이라면 아무 걱정도 없었고,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하의 그 사람도 한국으로 보내버린다면 마음 한쪽의 무거움도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자신만큼 고생했으니까, 맛없는 음식을 먹었고. 감옥에도 갇혀 지냈으니 그걸로 되었다. 자신은 이렇게 잘 살았고, 엄마는……. 

눈을 감고 있는 아랑의 손 눈썹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어머님도 모셔오고.”

카일의 마지막 한마디에 아랑의 볼을 따라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한국에서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아랑은 카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왔을 때 입었던 옷을 갖춰 입은 현철이 마법진 위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 가면 뭘 하고 싶어?”

“수호씨 옆에 집을 살까? 까망이는 아예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그곳에서 생활은 괜찮나 몰라.”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끼는 그들을 지켜보던 닉은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자신의 허벅지에 문질렀다.

왕궁 마탑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존경어린 시선을 받으며 마법에 열중해야할 그였다. 하지만 그들을 미지의 세계로 날려버렸다는 죄 아닌 죄로 이곳에서 애를 태우며 지냈다. 그리고 무사히 그들이 돌아왔을 때의 구박과 핍박은 이무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에 기뻐 그것들도 달게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덴성의 마법사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마법진을 작동시켜 그들을 한국으로 보내줘야 했고, 카일과 아랑이 잔뜩 가져온 이상한 것들을 이 세계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가 된 것이었다.

“참. 마법사님. 이번에 가서 TV랑 게임기 가져올게요. 마석으로 전기를 발생할 수 있는 거 꼭 발명해 주세요.”

해맑게 웃으면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던 아랑은 자신의 입에서 주문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날 죽여.”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닉은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자신의 방 테이블 위에서는 휴대전화라는 이상한 것이 놓여 있었다. 아직 그것의 원리도 다 깨우치지 못했는데, 또 뭘 가져온단 말인가?

“마법사님. 따뜻한 목욕물 준비해 드릴까요?”

한스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였다.

“그리고 마법사님 계좌로 영주님께서 300골드 입금하셨답니다.”

통장이 두둑해졌다는 말에 닉의 눈물이 더 많아졌다. 카일 저 자식은 이미 그를 전용 마법사로 고용한 것이 분명했다. 말도 안 하고 통장에 돈을 밀어 넣다니, 기필코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 성에서 탈출하리라 닉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 세계에 적응 중입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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