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첫 번째 퀘스트 (2/15)

2. 첫 번째 퀘스트

길을 잃었다. 강이나 다름없는 넓이의 해자 위에 세워진 단 하나의 다리 위에 서 있던 하진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입구를 통과했다. 아직 푸른 잎이 떨어지지 않은 덩굴, 꽃양배추, 팬지로 장식된 붉은색, 노란색의 이국적인 집들이나 숙박업소로 개조한 집의 뒷마당에 놓인 야외 테이블, 예배 시간이 아니어서 잠잠한 성당 등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제의 퀘스트만 아니었다면 울타리 너머로 기웃기웃, 느긋하게 구경했을 텐데.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보아 하진이 선택한 장소의 계절 배경은 겨울일 터. 유럽의 겨울은 해가 빨리 진다. 아직은 석양이 보이고 해가 완연히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밤이 된다면 하진이 분명 불리해지리라.

“어?”

분명 석양이 보인다 싶었는데. 고작 뒤로 도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에 해가 넘어가버렸는지 하늘이 어두워졌고 시야에 보이는 건물들 색이 하나같이 거뭇거뭇했다. 게임 속이니 전기요금도 안 들 텐데 전기를 아끼고 자원을 절약하겠다는 듯 가로등도 아예 꺼버렸는지 길을 밝히는 등은 하나 없었다. 불을 켠 집도 없었다.

삽시간에 어두워지고 있는 곳에서 하진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동시에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걸었다. 짙은 회색의 매끈한 외벽이 주는 음울한 느낌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게임이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어둑하고 외딴 겨울 골목길을 걸으려니 절로 몸이 떨렸다.

까악. 멀리서 까마귀가 울었다. 현실 재현을 이렇게까지 해놓을 필요가 뭐가 있어.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까마귀 울음에 하진은 점차 속도를 빨리했다. 인기척도 하나 없으니 더 스산해서 누구라도, NPC라도 만나고 싶은데 도통 사람의 기척이 들리질 않았다.

얼마나 뛰듯이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작 10분이 흘렀는지, 아니면 30분이 흘렀는지. 이제는 하다못해 같은 곳만 뱅뱅 도는 듯 보이는 풍경은 소름 끼치도록 변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사정없이 찔리는 목구멍과 폐가 아파와도 심장을 뛰게 만드는 불안 탓에 빠른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까아악. 현실에서 들을 때는 단 한 번도 불길하게 들리지 않았던 새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순간 하진의 발목을 잡아챘다. 결국 튀어나온 돌에 걸려 넘어져버렸다.

“우왁!”

꼴사납게 뒹굴며 넘어진 하진을 비웃으며 푸드득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 떼는 까마귀가 아니라 박쥐였다. 어디 숨어 있다 무리 지어 나타났는지.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짚은 두 손바닥이 까지고 쓸렸다. 쓰라린 통증을 참고 주저앉아 있는 하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이미 캄캄해질 대로 캄캄한 밤보다도 한층 더 어둑한 그림자였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반질반질한 신발 코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와. 드디어, 사람이…….

“…….”

아니지, 잠깐.

다른 사람의 등장은 무척이나 반가웠을 일이었으나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친 불길한 생각에 하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대는 말이 없었는데 침묵이 왜인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포식자「들」이라고 했지. 피식자「들」이라고는 안 했잖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도망치는 게 낫겠지. 팔다리를 잘라서 먹는 것도 섭취로 친다며.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지 말고. 응. 본능이 속삭이는 대로 하진은 일어나자마자 젖 먹던 힘을 짜내어 뒤돌아 달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기보다 정체 모를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무조건 뛰었다. 길을 모르는 건 당장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비정상적으로 바뀌어버린 풍경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존재다. 하진과 같이 피식자 역할을 맡았다면 저리 느긋하게 접근했을 리가 없다. 뒤로 돌아보는 허튼짓 따윈 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앗!”

분명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뛰어든 그림자에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마치 쇠처럼 단단한 물건에 부딪힌 듯 욱신거리는 몸뚱이가 여과 없이 돌바닥에 한 번 더 나동그라져야 했다.

“헉, 허억.”

그를 멈추게 한 그림자가 우뚝 서서 천천히 허리를 폈다. 거대한 인영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하진의 앞을 가로막고만 있었다. 죽을 만큼 아파도 바닥에 누워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하진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이번엔 어디로, 달아나야…….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휘청이는 다리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무릎을 짚고 간신히 서서 고개를 들었다. 뒤에는 정체불명의 사람, 앞에는 무쇠 같은 그림자. 넓은 공터였지만 좌우로는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 도망칠 만한 방향이 보이지 않았다.

까아악! 까마귀가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던 하진은 간신히 잡았던 중심을 잃고 벌러덩 넘어졌다. 볼썽사나운 꼴로 나자빠진 그에게 묵직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도망은 고작 여기까지야?”

거대한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라고 해야 하나. 쓰러져 있는 하진을 툭, 툭 치는 발끝이 매서웠다. 그림자로서는 가볍게 건드리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옆구리가 차이니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와씨. 괜히 감각을 실제랑 똑같이 하는 것으로 설정했나. 이렇게 아프게 치는 게 어디 있어. 하진은 숨을 삼키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머리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피식자 역할인 하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인지 망토 사이로 굵은 팔이 튀어나왔다. 하진의 얼굴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손이 불쑥 부슬거리는 까만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악!”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혀나갈 것 같았다. 오로지 움켜쥔 머리카락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 하진을 일으켜 세운 그림자가 후드를 벗자,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 아래 건장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짐승을 연상시키는 금빛 홍채, 갈기처럼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불만을 표했던 입가는 의외로 비죽 올라가 있었다. 하진은 잠깐 아픈 두피도 잊고 남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참으로 건장하고 잘생긴 짐승일…….

“아파!”

짐승이 한 손으로는 하진의 머리카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아파서 찡그려진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하진의 턱을 잡고 세차게 좌우로 돌렸다. 고통으로 인해 순간 생리적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개…… 짐승 새……끼. 하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속으로 욕설을 주워 삼켰다. 개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저런 놈에게 개를 가져다 대는 것이 개한테 미안한 일이라, 중간에 욕의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나 잡힌 머리통이 참으로 아프고 아파서 그의 귀에 들리지 않게끔 속으로만 욕을 했다.

“흐응.”

하진을 한참을 훑던 짐승이 턱과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겨우 고통에서 벗어난 하진이 비틀거리면서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뒤에도 무언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장은 맞닿았던 짐승 놈이 무서웠다. 흥미로운 시선을 숨기지 않고 내려다보는 남자의 거대한 풍채. 굵은 허벅지를 지나 더듬더듬 올라간 두려움 가득한 눈빛이 굵은 손가락, 근육으로 빼곡한 상반신을 훑고 제 어깨너비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어깻죽지에 닿았다.

이놈, 분명히 실제보다 제 키를 20센티미터는 키웠을 거다!

압도적으로 큰 짐승이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하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뒤로 물러나는 하진을 가로막는 서늘한 기운. 하진의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보았던 신발 코다. 근육질의 사내에게 부딪혀 넘어지기 전에 그를 겁에 질리게 하고 도망가게 만든 정체불명의 무엇이 역시나 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진은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아까는 확인할 자신이 없었던 정체를 확인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대, 서늘한 눈매. 미소를 짓는 방법 따윈 모른다는 듯 굳게 다물어진 입. 매끄러운 긴 흑발을 늘어뜨린 남자의 눈은 핏빛이었다. 상대적으로 마른 체형이었지만 키는 붉은 머리의 사내와 비슷하다. 차가운 붉은 눈의 남자가 하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 참, 참으로 미인일…….

“이번에도 배나 채우겠군.”

가볍게 한숨을 쉬며 툭 내뱉었을 뿐인데 정작 하진이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배를 채운다. 배를! 피식자를 진짜로 잘라서 먹으려는 포식자. 높디높은 울타리가 되어 먹잇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앞뒤에서 가둔 두 남자 사이에 낀 하진의 머릿속에서 시스템 알림이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뒤탈 없는 섹스 라이프를 경험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첫 경험이 섹스도 아니고 인육을 먹으려 하는 미친 자들에게 잡히는 거라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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