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뉴비와 고인물 (3/15)

3. 뉴비와 고인물

거대한 체구의 금발 남자는 캐릭터 설정 때 분명 악력을 키웠으리라. 머리색과 눈도 바꾸고 키도 키우고, 근육도 늘리고. 의심은 그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 오는 내내 강하게 굳어졌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게임이었으니 현실 체격 그대로라면 하진을 이렇게 괴나리봇짐 지듯 수월하게 들 수가 없었을 테니까. 벗어나려고 발버둥도 치고 주먹으로 등도 때려봤는데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엉덩이만 짧고 강렬하게 한 대 맞았을 뿐이었다. 하진은 축 늘어진 채 터덜터덜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먹으면 안 돼요?!”

그러다 불쑥 머리를 쳐들고 외쳤다. 하진을 짊어지고 가던 남자도 놀라서 멈췄고 뒤따르던 적안의 남자도 멈춰 섰다.

“아니, 정말로. 난 퀘스트 보상 안 받아도 되는데!”

반말과 존대가 섞여 나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하진에게 반말을 쓰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조금 억울해져서 자신의 입에서도 반말이 섞였다. 물론 조금 전 엉덩이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았을 때 찌르르 울린 그 감각이 묘하게 무서워서 대놓고 강짜를 부리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매달려 있자니 피가 머리에 쏠려서 어질어질한 탓에 하진은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버텼다. 무슨 게임이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피까지 쏠리게 만들었는지. 금발 남자가 피식 웃었다.

“성공 보상이 필요 없으면 실패 페널티를 받으면 되겠네.”

“그건 더 필요 없고요! 오늘이 첫 접속인데 인간적으로 2주 접속 불가 페널티는 너무하잖아.”

“뭐야. 뉴비였어?”

“뉴비가 뭔데, 요?”

뉴비? 불만 가득한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잘은 몰라도 삐약이랑 비슷한 어감이 느껴진다. 좋은 의미인가, 놀리는 단어인가. 미간을 확 좁히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뒤따르고 있던 적안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은근슬쩍 요를 붙였다. 하진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참으로 냉랭했다.

“초보라는 뜻이야.”

“아하. 아무튼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적금 깨서 산 게임에 겨우 캐릭터 만들자마자 접속 불가는 좀 서러운데. 이렇게 유저 하나 잃으면 게임 전체를 봐서도 손해잖아.”

“흐음.”

고개를 주억거리자 허리춤이 간질간질했다. 금발 남자는 설득에 넘어가는 기미가 보였다. 하진의 안색이 조금씩 밝아졌다. 지금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당장 보답은 힘들지만, 풀어만 주면 꼭 보답하겠다고 약속해야지. 게임을 열심히 하면 게임 머니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진은 적어도 약속은 지키는 사나이였다. 내심 머릿속으로 협상을 제안할 준비도 마쳤다.

“하긴. 나메가 하도 고인물 게임이라 신선한 나린이 보기가 참 힘들긴 했어.”

고인물 게임? 나린이? 자꾸만 알 수 없는 용어가 튀어나왔다. 해석은 잘 안 되지만 그래도 분위기로 보아 희망은 보였다. 식재료에 어울릴 법한 신선하다는 표현이 살짝 걸렸지만 하진은 호응하듯 열심히 끄덕였다. 문제는 정작 긍정적인 반응의 금발 남자는 그 모습을 못 보고 적안 남자만 보고 있었지만.

“그런데 말이야, 나린아?”

“내 아이디는 나린이가 아니에요. 테스입니다.”

“그래, 그래.”

대체 나린이가 뭔지. 닉네임을 알려줘도 금발 사내는 하진을 두고 「나린아」라고 불렀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인 것 같아서 알려주자면. 우리는 퀘스트를 위해 300만 원을 썼어.”

“네. 시스템 알림으로 들었습니다.”

“그거 진짜 돈이야.”

“응?”

“나메의 플레이어는 현금을 써서 원하는 퀘스트를 만든 후 발동시킬 수가 있거든.”

“…….”

“바꿔 말하면 우리는 피식자 역할의 유저를 먹고 싶어서 퀘스트를 만들었는데, 나린이가 뉴비라는 이유로 풀어줄 이유는 없겠지?”

뭐라고 했지. 재화 300만 원이 게임 머니가 아니고 실제 현금 300만 원이라고? 하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두 놈은 사람을 먹고 싶어서 나이트메어라는 게임에 접속했고, 현금을 뿌려가며 퀘스트를 만들어서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는 소리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무지몽매한 어린이를 가르치듯 부드럽게 알려주는 음성에 경악한 하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나린이는 게임 이름 나이트메어와 뉴비를 가리키는 어린이의 합성어구나!

“자아. 그럼 우리 나린이는 아직도 봐달라는 말을 하고 싶으려나?”

“와씨, 치사한 과금러! 이 게임 과금 유도가 너무 심하잖아!”

“…….”

대답 대신 튀어나온 삿대질에 금발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하진의 표정이 변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적안의 사내도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은 억울하고 서럽고 더럽고 치사했다. 접속 전까지만 해도 나메에는 하진과 같이 섹스할 목적의 유저들만 접속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섹스는 뒷전으로 미루고 돈으로 나메 생태계를 망가트리는 유저가 존재할 줄이야. 더 서러운 건 하진이 아무리 억울해도 게임 회사는 돈을 쓴 과금러 편을 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린아.”

“네에.”

“우리 뉴비가 참 귀여워서 마음을 바꿀까 하는데.”

“네! 네! 네!”

하진을 내려준 후 금발 사내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뒤에 서 있는 적안 남자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아주 매혹적이고 친절한 제안을 해왔다. 하진은 열심히 끄덕였다. 혹시라도 식인종이 못 보고 지나칠까 봐 그의 눈앞에 대고 몇 차례 더 위아래로 흔들었다. 세상은 아직 따듯했다. 비록 세상의 구성원 중 두 명이 식인종일지라도.

“나린아. 대신 다음 퀘스트는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완료되지 않을 거야.”

상큼하게 활짝 웃은 사내의 경고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했다. 하진은 두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세상은 따뜻했는데 30초 사이에 북극보다도 더 추운 세상이 되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해하고 있는 하진의 앞에서 금발 사내가 허공에 대고 손을 몇 번 움직였다.

시스템 알림!

퀘스트를 발동한 유저의 요청에 의해 발테르케인 성주 섭취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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