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in a Nightmare!
접속이 늦어지는 이하진을 기다리던 어느 날 오후였다. 임채우에게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사진이 하나 전송되었다.
「귀엽더라고 :)
(사진)」
은발 벽안의 남자가 눈꼬리를 휘며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오메가를 홀리기로 유명한 미소였다. 같이 사진을 찍은 동글동글한 인상의 남자는 빨간 양말을 들어 올린 채 놀라 돌아본 상태였다. 순록 머리띠를 착용하고 루돌프 인형 옷을 입은 남자의 입술과 은발 벽안의 남자의 뺨은 자칫하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두 사람이 누군지는 바로 알았다. 루돌프로 분한 이는 실명 이하진, 닉네임은 테스. 그리고 옆에 있는 캐릭터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한 불행히도 아주 잘 알았다. 진유림, 닉네임 발터.
“하.”
관심을 보이는 꼴이 불안하다 싶더니만. 진유림은 끝끝내 이하진에게 접촉하고야 만 모양이었다. 이래서 혼자 놀게 두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꼬물거리는 꼴이 귀여워서 내버려두었다가 그만 벌레 하나가 붙어버렸다.
“진유림 이 자식은 하진이랑은 어떻게 만났지?”
임채우는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시고 있던 임서우의 귀에도 그냥 지나치기 힘든 이름이 들어갔다.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이 꽂히자 임채우는 휴대폰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진유림은 임서우에게도 사진을 보낸 후였다. 뒤늦게 확인한 서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딱히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속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듯한 차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서우는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허리를 고고하게 세우고 긴 시간 미동도 없이 핸드폰 속 사진을 응시했다.
“채우야.”
“응.”
“이번엔 하진이 봐주면 안 되겠다…….”
한참 만에야 내뱉은 말은 이하진이 들었다면 억울해하고 기함할 내용이었다. 진유림의 성격을 아는 그들로서는 캐묻지 않고도 자초지종이 짐작이 갔다. 그들의 멍멍이, 이하진이 원해서 찍었을 리 없었다.
“그치? 우리 멍멍이, 현실에서도 질질 못 쌀 만큼 제대로 혼쭐을 내줘야겠어.”
아주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마음은 채우 역시 없었다. 그러게 누가 연락처와 이름만 달랑 알려주고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랬나.
심지어 그들은 하진에게 선물 하나 하기가 힘든데 이 발칙한 멍멍이는 진유림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옷을 잘도 덜렁 받아서 입었다. 게다가 그동안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아주 물이란 물은 다 빼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했다.
“나 먼저 접속한다.”
진유림에게 이렇다 할 답장은 하지 않은 채로 임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이트메어에 접속할 준비를 했다.
단톡방을 잠깐 확인하니, 마침 멍멍이 이하진으로부터 30분쯤 뒤에 접속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오늘 간만에 책 냄새 좀 맡으러 서점에 들렀다가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다며 우는 이모티콘이 연달아 올라왔다.
“채우야, 잠깐만.”
“왜.”
채우는 피식 웃다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톡을 확인한 서우가 담담하게 제 형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늘은…… 하진이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듣고 싶은 말?”
“자꾸 빠져 나가니까 점점 애가 타서.”
채우의 형제는 가끔 이렇게 표정의 변화 없이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허상에 목매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아.”
“그랬다가 실체를 확인하고 실망하면 어쩌려고?”
나이트메어란 게임은 참으로 유용했다. 특히나 간혹 제어할 수 없는 러트가 다가올 때 무척 좋았다. 깔끔하게 서로의 욕구만 해결하고 헤어질 원나잇 파트너를 찾기에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었다.
다만 나이트메어 역시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다 보니 마냥 그들 형제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채우나 서우의 바람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며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더 깊은 사이로 발전하길 원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달라붙는 오메가를 싫어하는 서우는 조금이라도 페로몬 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를 칼같이 쳐냈다. 반면 채우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이런저런 선물을 챙겨주며 만났다. 때로는 상대의 끈질긴 요청으로 인해 현실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야, 임서우. 지금의 멍멍이 얼굴은 게임 속 아바타잖아. 현실에서는 하나도 안 귀여울 수도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매일 만나자고 조르면서.”
“나야 추임새지. 언제까지 새침한 척 거절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성격 좋아 보이는 호쾌한 미소를 매단 채우는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상반된 표정과 말에 서우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임서우 네가 항상 그랬잖아. 오메가는 믿을 게 못 된다고.”
“…….”
어찌 보면 두 사람은 형제가 맞았고, 쌍둥이가 맞았다.
임서우가 오메가를 만나보지도 않고 싫어한다면, 임채우는 만나는 오메가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임채우는 다가오는 오메가를 막지 않았다. 적어도 만나는 동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충실했다. 꼬박꼬박 연락하고, 다른 오메가와 일체 연락하지 않고, 캐릭터를 키워주고, 장비를 맞춰주고. 그러다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헤어지자고 하면 산뜻하게 놓아주었다.
“하진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어?”
진심을 시험하듯 임서우를 바라보았다.
이하진이라는 오메가는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 조금 달랐다. 임서우의 관심까지 끌고 있으니 확실히 다르긴 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두 사람의 흥미를 동시에 끈다고 해도 현실은 환상과 아주 많이 다를 터. 외적인 부분에서든 내면적인 부분에서든 혹은 궁합이든.
다양한 인간군상을 봐온 임채우로선 이하진의 실체를 확인해도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성미가 까다로워 많은 오메가를 만나보지 못한 임서우가 과연 깨어진 환상을 이겨낼 수 있겠냐는 의문에는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서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고 봐야겠지. 임채우는 핏 실소를 터트렸다.
“뭐. 하는 짓은 귀여우니까 게임 속에서나 실컷 즐기자고.”
지금껏 만났던 오메가에게 정을 주지 않았듯, 그리고 믿지 않았듯 임채우는 이하진이라는 오메가도 믿지 않았다. 물론 하는 짓은 귀여웠다. 어떻게 보면 직장을 다니는 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뚱하고 발랄한 점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 먼저 접한다.”
임채우는 휘휘 손을 흔들었다. 형제가 충격에서 깨어나길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사고를 치고 온 강아지를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러 가야 했다.
어디까지나 나이트메어에서 즐기고 놀기 위한 상대로서 좋다는 의미였으니, 그에 충실해야지. 임채우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어렸다.
❖
하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주인님의 접속을 기다렸다.
르칸과 제르가 나이트메어에 대한 흥미가 식었다는, 발터의 정보가 정말이었는지 두 주인님은 하진이 없을 때는 거의 접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이를 이용해 하진은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먼저 서점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며 접속하지 않은 척했다. 미리 미드나이트 던전 입장권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그동안 짬짬이 거래소에서 사둔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제르와 르칸의 성은 좋게 말하면 모던하고 깔끔했고 나쁘게 말하면 황량했다. 섹스를 하며 놀기 위한 방 몇 개를 제외하고는 둘이 지내기에는 많이 넓다 보니 아무 가구도 없이 빈 방이 대부분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성 내부를 꾸밀 수 있었을 사람들이니 애초에 채울 의지가 없었다고 봐야겠지만.
그들의 성에 얹혀살고 있는 하진은 그중 작고 아담한 방 하나를 골랐다. 벽 한 면에 거래소에서 사온 벽난로를 설치하고 장작을 넣어 불을 피웠다.
치사하기 그지없는 나이트메어는 창문마저 사야 했으므로 전면 유리창을 사서 다른 벽 한 면을 채웠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이 캄캄했던 벽이 함박눈 쌓인 호수가 보이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물론 풍경이라는 옵션 또한 돈을 내고 선택했다.
하진의 금전적 노력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넓은 양탄자도 사서 바닥에 깔았다. 테이블과 의자 세 개도 사서 반대편에 배치했다. 금색 별이 반짝이는 태피스트리도 사서 벽에 걸었다.
벽난로 옆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럭셔리 버전도 하나 샀고, 꼭대기에는 낑낑대며 아기천사를 올려두었다. 먼저 사둔 의자 중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랜드로 벽을 장식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드는 서프라이즈였으나 하진은 후회하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한 방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다음 로그아웃을 했다. 두 주인님에겐 서점 구경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30분 후에 접속하겠다고 연락을 해둔 다음 다시 접속했다.
르칸과 제르는 접속하면 알아서 하진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니까,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순서만이 남았다. 하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짠!”
문이 열렸다. 이어 나타난 인영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둘 중 한 명이리라. 하진은 두 팔을 벌리며 폴짝 앞으로 튀었다.
“서프라……이즈……?”
헤실헤실하며 서프라이즈를 외치던 하진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먼저 나타난 사람은 르칸이었다. 웃으며 들어서던 그대로 석상이라도 되었는지, 더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 멈추어 서서 당황한 낯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뒤이어 들어온 제르도 훈훈한 공기에 놀랐는지 멈칫했다.
남아도는 방 하나를 두고 집 꾸미기 놀이를 했다고 해서 화를 낼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 무엇 때문에 방을 둘러보고 하진을 돌아보기를 반복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없어 하진은 들었던 두 팔을 내렸다.
“하진아.”
항상 매달고 있는 웃음기를 지운 르칸이 하진을 불렀다. 장난스레 멍멍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왜인지 화난 것처럼 들렸다. 그럴 리는 설령 없겠지만.
“이거 언제 준비했어?”
“오늘이요.”
“오늘? 그러면 서점은 거짓말이었어?”
“네? 네…….”
굳이 따지자면 선의의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르칸의 얼굴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으로 하진을 보는 제르나 심상치 않아 보여서 차마 덧붙이진 못했다. 하진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곧 크리스마스라서요.”
크리스마스가 머지않았다. 솔로천국 커플지옥의 날이라지만 나이트메어 유저들에겐 해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놓고 매칭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게임이었으니 나이트메어만큼은 크리스마스 연휴 때 접속자의 숫자가 적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제르나 르칸이라면 크리스마스 때 만날 사람 정도는 당연히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이브에는 만나기 힘들 테니, 며칠 앞당겨서 셋만의 파티를 즐겨보자는 의도였다.
“이런. 혼내려고 단단히 벼르고 들어왔는데.”
“조금 이르지만 깜짝 파티를, 네?”
혹시라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하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변명을 하던 하진의 시야에 조금은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는 르칸이 잡혔다.
“저 또 뭐 잘못했어요?”
“아주 큰 잘못을 했지.”
“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담. 성 내부는 마음껏 휘젓고 다녀도 된다고 했고, 던전 입장권은 팔아서 과자 사 먹는 데 쓰라고 했었다. 그래서 다 같이 먹을 칠면조구이와 케이크와 샴페인도 샀다. 서프라이즈를 외쳐서라고 보기엔 장담컨대 저 둘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서점 말고.”
“앗…….”
하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기껏 찾아낸 답이 오답이란다.
“하진아.”
“네?”
지금껏 잠자코 지켜만 보던 제르가 다가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베일처럼 드리워지는 광경에 본능적으로 목을 거북이처럼 집어넣었다.
“진유림 언제 만났니?”
“네?”
주인님들 앞에서 망충한 파트너로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진유림이 누군지 알 게 무어람. 그러나 얼어붙어 있다시피 한 제르의 얼굴이 상당히 서늘해서 멍청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발터라고 하면 알겠지?”
당당하게 하진의 친구 목록 세 번째를 차지하는 유저의 닉네임이 르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확신을 가진 의문형이었다.
“알긴 아는데…….”
모른다고 거짓말할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하는 하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두 사람과는 나이트메어 세상 속에서의 파트너 관계일 뿐이며, 비록 그들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플레이에서의 호칭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접속해 있지 않은 동안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며 돌아다니든 하진의 자유였다.
더구나 발터에게 괴롭힘을 당하긴 했지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빼앗겼던 아이템도 돌려받았고 퀘스트 도움도 받았으니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르칸이 진수성찬이 차려진 테이블로 다가갔다. 의자를 빼서 앉더니 제 무릎을 툭, 툭 두드렸다.
“옷 벗고 이리로 와봐.”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에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늘은 플레이보다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겠다는 하진의 계획은 무산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하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어떤 방식이 됐든 즐겁게 보내면 그만 아니겠는가. 르칸의 지시를 플레이의 시작 신호로 알아들은 하진은 명령을 수행했다.
바지를 벗고, 입고 있는 스웨터를 벗다가 멈칫했다.
“역시 이거…… 내가 사준 옷이 아니야.”
발터가 옷을 태워버린 탓에 하진은 새 옷을 사야 했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내라고 할까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직접 샀더랬다. 그 정도 돈은 있었고, 무엇보다도 발터와의 만남을 함구하기로 한 이상 옷 이야기도 꺼내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하진이 옷을 벗기가 무섭게 제르가 스웨터를 휙 낚아채 살폈다. 나름 무늬, 재질, 색이 동일한 스웨터로 찾는다고 눈알이 빠지게 거래소를 주시했었는데.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옷이었는데 용케도 다른 점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르는 그 자리에서 스웨터를 찢었다.
“속옷도 벗어야지, 하진아.”
고생해서 찾은 옷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에 경악해야 하는지, 힐러인데 힘이 무시무시한 제르에게 경악해야 하는지. 그러나 르칸은 하진에게 놀랄 시간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하진은 바로 옆에서 차가운 눈초리로 태워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제르의 심기를 살살 살피며 속옷을 마저 벗었다. 두 사람에 비해 왜소한 체구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위축되어 축 늘어진 아담한 성기 또한 두 사람의 시야에 노출되었다.
평소라면 하진을 멍멍이라고 부르니 기어가야 맞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꼬박꼬박 이름을 부르는 중인 르칸이었다. 신체 부위를 가리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아 갈 곳을 잃은 손끼리 맞잡고 꼼지락거리던 하진은 결정을 내렸다.
엎드려 두 손바닥을 러그 위에 댔다. 무릎도 푹신한 감촉에 감싸여 아프지 않았다. 하진은 머리만 들고 르칸을 향해 기었다.
“……?”
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오른쪽 발목을 지그시 누르는 힘이 가해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움찔하여 뒤로 돌아보자 제르가 하진의 발목을 밟고 있었다.
“주……인님.”
지금껏 제르는 하진이 르칸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게 막아선 적이 없었다. 오늘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발목에 실리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하진은 뒤를 올려다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하진. 안 오고 뭐 해.”
제르가 보란 듯이 훼방을 놓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르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진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으나 이내 실패했다. 여전히 발목이 밟힌 탓이었다.
“열 셀 동안 오는 편이 좋을 거야.”
르칸의 으름장에 하진이 재차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다리는 이번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진이 애원을 하듯 제르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해봤는데, 하진아.”
“아홉.”
“주, 주인님.”
“응?”
“여덟.”
“발…….”
숫자는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하진은 봐주지 않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르칸과 뻔히 알면서도 발을 떼지 않는 제르를 번갈아보며 눈짓으로 호소했다.
“다섯.”
그러나 돌아온 대답을 더 빠르게 줄어든 숫자였다. 팔짱을 끼고 하진을 내려다보고 있던 제르는 나머지 발목에도 발을 올렸다.
“넷.”
대체 왜 이러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한쪽 주인님이 내리는 명령을 듣고 얌전히 따르고, 나머지 한 명은 잘 감상하다가 내킬 때 박으면 되는 것 아니었나.
처음 겪는 반응에 혼란스러워진 하진이 끙끙댔다. 제르는 힐러인데도 균형감각까지 좋았는지, 하진이 아무리 요동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둘.”
끝이 임박했다. 이제 르칸이 하나를 외치면 실패다. 다급한 마음에 발목을 빼내려고 열심히 잡아당겼다.
어느 순간, 발목이 쑥 빠졌다. 제르가 놓아주었는지 놓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게가 사라진 즉시 하진은 르칸에게로 뛰듯이 기어갔다.
“끝.”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 르칸의 무릎 위로 도착하기 전에 끝내 카운트다운이 종료되어 버렸다. 하진은 그의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멈추었다.
“있잖아, 하진아.”
“네, 네…….”
르칸은 피식 웃었다. 제 무릎에 각각 손을 올리고 꿇어앉아 올려다보고 있는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턱을 만지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요즘 키우는 멍멍이가 있는데. 그 강아지 보는 낙에 산단 말이야?”
“…….”
“하는 짓도 귀엽고, 자지러지게 꼬리 흔들며 울면 세상 그렇게 꼴릴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르칸의 음성이 서서히 낮아졌다. 하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또한 조금씩 느려지더니 갑작스레 머리칼을 확 움켜쥐었다.
“그 강아지가 다른 알파 새끼한테 가서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장면이 내게 전송이 됐어. 내 기분이 어떨까?”
두피가 당겼다. 고개도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하진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려 인상을 찌푸렸다. 정황상 르칸이 이를 갈면서 말하는 강아지는 하진 자신을 뜻하는 듯했다.
답은 물론 정해져 있었다. 주인은 당연히 화가 났을 테고, 그 강아지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입술이 말라붙었는지 영 떨어지질 않았다.
“이하진. 진유림이 준 누더기 꺼내렴.”
소리 없이 뒤에서 다가온 제르가 나긋나긋 속삭였다. 부드러웠지만 등과 목덜미의 솜털이 절로 설 정도로 서늘한 음성이었다.
누더기를 받은 기억은 없지만 발터라는 이름의 유저가 준 옷은 있었다. 머뭇거리며 꺼낸 루돌프 옷은 인벤토리 밖으로 나온 순간 파기되었다. 제르가 또 그 자리에서 찢어버린 탓이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파기 알림이 뜨며 사라지는 옷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두 손목이 잡혔다. 손등이 차례로 르칸이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 위로 얹혔다. 손목이 팔걸이에 끈으로 고정되었다.
손등 위에 각각 불이 붙은 양초가 올라왔다. 양초도 고정이 되어 떨어질 염려는 없었지만 자칫 세게 움직였다간 촛농이 손등에 떨어질 듯했다. 아니, 필시 촛농이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일 터였다.
다음으로는 하진의 머리가 점차 앞으로 끌려갔다. 코끝에 르칸의 성기가 닿았다. 이후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하진은 입을 벌렸다.
르칸의 물건은 언제 물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알파의 체향이 물씬 풍기는 귀두를 삼키고 혀끝을 굴렸다. 게임 속이라 해도 목구멍을 여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성기의 뿌리를 잡고 쓸 두 손이 양초에게 잡혀 있으니 입으로 최대한 애를 써야만 했다. 갈라진 틈을 꼼꼼하게 핥으며 새어 나오는 침을 살덩어리에 펴 발랐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삼키듯이 입술로 이를 감싸며 오므렸을 때였다.
“……!”
두 다리가 타의에 의해 벌어졌다.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차디찬 손이 하진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르칸의 성기를 삼킨 순간부터 반응이 오고 있던 분신에 자극이 가해지니 열기가 빠르게 몰려왔다. 제르는 하진의 물건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어허. 벌 받는 중인데 입이 쉬면 쓰나.”
페니스로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느라 빠는 힘이 소홀해지자 곧장 위에서 질책이 떨어졌다. 르칸은 뒤통수를 톡톡 두드렸다. 하진은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고 앞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흐…….”
그러나 제르의 손장난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진의 성기가 바짝 일어서 벌써부터 프리컴을 흘리자 차가운 엄지로 귀두를 틀어막았다. 그러면서도 기둥을 부드럽게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는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큼지막한 손바닥이 뒤통수를 지그시 눌렀다. 아래쪽에서 몰려오는 고양감 때문에 자꾸만 집중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이자, 하진이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눌러버린 것이었다. 르칸은 하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은 채 힘을 살짝 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르칸이 힘을 줄 때마다 머리가 밑으로 내려가고 주먹만 한 성기가 혓바닥을 누르며 입 속을 파고들었다. 웁, 우욱 간신히 물건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질척이는 물소리가 고막을 점령했다.
때때로 르칸이 하진의 머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살덩이가 약간이나마 빠져나가면 숨통이 트였다. 동시에 성기에 막혀서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던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흐, 으…….”
르칸의 손장난에 의해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며 거대한 성기를 버겁게 삼켰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는 동안, 아래쪽 역시 제르에 의해 착실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사정하면 안 돼.”
움찔움찔 벌름거리며 젖어들던 요도로 가느다란 플러그가 파고들었다. 이대로 막지 않고 하진이 사정하게 둔 다음 그 핑계로 혼을 낼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리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제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등허리를 어루만졌다. 내용과 이어지는 행동이 전혀 다정하지 않아 어깨가 절로 파들파들 튀었다. 차가운 손길이 뻗은 다음 목적지는 하진의 엉덩이 사이였다.
젤을 머금은 손가락이 좁게 닫혀 있는 입구를 문질렀다. 입구와 주변의 주름에 꼼꼼하게 젤을 펴 바르고는 후끈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갑작스럽게 닿은 바람에 화들짝 놀란 하진의 머리가 훅 앞으로 당겨졌다. 르칸의 성기는 틈을 놓치지 않고 좁은 입천장을 찔렀다.
“아, 가, 가마아, 아!”
매끈한 입천장이 계속해서 뜨거운 살덩이에 찔렸다. 여린 점막마저 성감대가 된 하진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팔과 손등을 흔들었다.
가득 고여 있던 촛농이 손등 위로 툭 투둑 떨어졌다. 화끈한 감각에 하진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돌았다. 동시에 엉덩이 사이로 차갑고 딱딱한 금속성 물체가 침입했다.
갈고리의 뭉툭한 끝이 뒷구멍으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내벽을 꾹꾹 눌러가며 더듬었다. 하진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포인트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제르는 목적지를 금세 찾아내었다. 딱딱한 끄트머리가 찾아낸 위치를 누르며 몸체를 비비자 하진의 허리가 세차게 들썩였다.
배 속부터 터진 미진한 쾌감이 하진의 하체를 조이고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로 올라갔다. 동시에 흔들린 팔로 인해 또 한 차례 촛농이 떨어져 손등을 따갑게 때렸다.
새어 나오는 신음 섞인 비명은 르칸의 성기에 막혔다. 몸부림치는 하진을 보면서도 르칸은 굳은 미소를 유지한 채 잡고 있던 머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거대한 짐승의 손에 잡힌 작은 머리통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팽팽하게 부푼 막대기를 삼켰다가 반쯤 뱉기를 반복했다. 점점 열이 몰리는 하진의 얼굴이 빨개졌다.
“채우야, 잠시만.”
입으로 하는 추삽질이 거세어진다 싶은 순간 움직임이 멈추었다. 르칸은 저를 부른 제르를 무심히 보면서 붙들고 있는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구렁이를 목젖까지 넣어 강제로 삼킨 채 버둥거리던 하진이 버둥거렸다. 촛농이 아까보다 더 많이 떨어졌다. 빨간 핏방울을 닮은 점점이 손등을 덮는 동안에도 이번에는 통증을 못 느낄 만큼, 목구멍이 막혀 괴로웠다. 눈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헉, 허억…….”
간신히 산소를 맛보자 살 것만 같았다. 잔기침을 하면서도 입가의 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헐떡였다.
이상했다. 매번 하던 구음이었으며 르칸의 성기가 제 입으로는 하기 힘든 사이즈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르칸이 거칠게 대하는 기분이었다.
“혀, 형…….”
하진은 꿇어앉은 채 르칸과 제르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실수로 그만 플레이 중의 호칭이 아닌 형으로 불러버렸다. 추측건대 두 사람이 오늘따라 내내 하진을 멍멍이가 아닌 실명으로 부른 탓에, 게임 속의 플레이가 아닌 실제 섹스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하진아, 힘드니?”
“네, 네…….”
지금보다 더한 플레이도 했을 때도 방금처럼 힘들지 않았다. 하진은 훌쩍이며 끄덕였다. 제르가 하진의 묶인 손목을 풀어주며 뒤에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러나 양초를 치우고 빨간 꽃이 핀 손등을 뒤로 둘러 묶어버리는 제르의 이어지는 행동에 플레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아직 엉덩이에 꽂혀 있는 갈고리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게 네 다리로 기면서 헤픈 구멍 흔드는 순록 흉내 내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니.”
“아, 아아…….”
땀에 젖어 흐트러진 하진의 머리에 루돌프 머리띠가 삐뚤게 쓰였다. 목에 찬 초커와 엉덩이 사이에 꽂혀 있는 갈고리가 팽팽한 가죽끈으로 연결되었다. 하진이 두 다리를 오므리고 허벅지 안쪽끼리 비비지 못하도록 금속 막대에 발목을 고정한 뒤에 하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게임을 하자, 하진아.”
“게……임이요……?”
“응.”
테이블 위를 강아지처럼 기어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제르가 하진의 목 뒤를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음식을 시간 내에 다 먹으면 오늘 벌은 여기서 끝.”
“…….”
“실패하면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
제르와 르칸의 부탁이라고 해봐야 플레이라거나 발터와 더는 연락하지 말라는 요구 정도일 터였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다 판단한 하진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둘러보았다.
게임 속이라 맛만 느끼고 포만감은 조절할 수 있었기에 분위기를 내려고 마음 놓고 한가득 사온 음식이 테이블을 꽉 채운 상태였다. 하진은 하얗게 질렸다. 부탁은 들어줄 수 있는데, 이 양이라면 시간제한까지 걸린 만큼 그가 100% 지는 게임이었다.
“너, 너무 많아요.”
“그래, 그럼.”
인간적으로 현실이어도 당연히 불가능하고 게임이어도 불가능한 진수성찬이었다. 하진이 벌을 받던 중이라는 사실도 젖혀두고 호소하자 제르가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많으면 이 정도만 먹자.”
제르가 끌어온 미션 음식은 케이크와 사탕 바구니였다. 하진은 그가 먹어야 할 양을 눈으로 훑었다. 케이크가 비록 홀케이크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대신 페널티.”
……같았는데. 역시 제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진의 입에 구멍이 뚫린 고리 형태의 개그를 채우는 것으로 페널티를 주었다.
돌발 퀘스트 알림!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공들여 준비한 깜짝 선물에 단어 그대로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란 주인님들! 강아지의 정성에 감격한 나머지 주인님들도 벼르고 별렀던 보답을 받기 위한 게임을 하고자 합니다. :<
참여 플레이어 중 30분간 먼저 사정하지 않거나 기절하지 않는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합니다.
성공 보상: 승자는 패자에게 부탁을 1회 요구할 수 있습니다.
부탁 불이행 페널티: 게임 종료 시점 기준 전 재산(아델라) 상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