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주인님들을 책임지는 펫의 자세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뛰고 입술이 말랐다. 벽에 걸린 시계로 저절로 쏠리는 시선을 애써 붙들었다. 그랬더니 시선이 절로 움직여 모니터 하단에 있는 조그만 시간을 확인해버렸다.
오후 5시 50분.
아, 미치겠네! 하진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당기며 흔들었다.
“하진 씨, 오늘 약속 없어? 다들 일찍 갔는데 왜 그러고 있어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약속이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있는데 취소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대답은 않고 머리카락만 쥐어뜯고 있는 하진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던 김 대리는 혀를 차며 스쳐 지나갔다.
이번 주는 크리스마스가 금요일인 덕분에 꿈같은 사흘간의 연휴가 생겼다. 때문에 연휴를 앞두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설렘이 회사 곳곳에 만연했다. 일찌감치 반차를 쓰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6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슬쩍 10분, 20분, 30분 일찍 퇴근한 사람도 많았다.
평소였다면 마찬가지로 신났을 하진은 오늘따라 애꿎은 머리카락을 못 살게 괴롭히며 힐끔힐끔 시계만을 훔쳐보았다. 무심코 이번에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겨버렸다. 핸드폰 화면에도 역시 톡이 와 있다는 표시와 함께 시간이 떠 있었다. 5시 52분.
안 되겠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쳐야지. 그러니까, 그 이전에 거울 좀. 하진은 벌떡 일어서 폰을 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에휴. 얼굴 꼴이 이게 뭐람.”
전투적으로 달려간 화장실의 거울 안에는 피곤에 찌든 직장인이 한 명 서 있었다. 곱슬곱슬한 기가 있는 머리칼은 부스스했고, 잦은 수면부족으로 피부는 거칠었다. 오랜만에 낀 렌즈는 맞지 않아 뻑뻑했으며 눈 밑은 퀭했다.
그나마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만한 하얀 피부도 엄밀히 따지면 우성 오메가의 백옥 피부와는 결이 달랐다. 겨울이 되니 푸석한 입술은 또 어떻고.
물론 소개팅도 아니니 외모는 신경 쓰지 말자고 자기최면을 먼저 걸어봤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초연할 수 있을까. 하물며 게임 속이라지만 몸을 섞고, 파트너까지 맺은 상대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절세가인이 될 자신은 없다지만 적어도 파트너가 실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의외로 형들이 별로일 수도 있어. 기죽지 말자, 이하진.”
우성 알파나 우성 오메가는 외모 유전자부터가 차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며 세상에 100%는 없는 법이다. 임채우, 임서우가 우성 알파라고는 해도 의외의 얼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진은 자기최면을 계속 걸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음, 약속장소까지는 지하철로 20분이면 되니까.”
7시까지만 도착하면 되니 시간은 충분했다.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와 퇴근 준비를 시작한 하진은 시계를 힐끔 훔쳐봤다. 거울을 보며 자괴감에 빠져 있다 겨우겨우 자신감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고 오니 어느새 6시였다.
“이만 퇴근하겠습니다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하진 씨도 연휴 잘 보내세요.”
“네에…….”
팀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김 대리에게 힘없는 인사를 남기며, 챙겨온 목도리를 둘둘 둘러맸다. 길이가 아주 긴 목도리를 입까지 가려지게끔 칭칭 감았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전에 장갑을 끼고 가방을 둘러멘 다음 핸드폰을 들었다.
❖
「저 도착했는데, 갈색 더플코트에 까만 바지 입고 베이지색 목도리 하고 있어요.」
서울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어디든 사람과 차가 많았다. 약속 장소에 서로 도착했다면 전화를 걸어 확인하면 되겠지만, 먼저 전화를 걸 용기가 없는 탓에 소심하게 인상착의를 알려주는 방법을 택했다. 전송을 누르고 후, 하 심호흡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허억, 깜짝이야.”
하필이면 문자도 아니고 전화였다. 발신자는 르칸(임채우).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액정을 차갑게 언 바닥과 마주치게 하는 일은 간신히 피했다. 하진은 핸드폰을 잡고 쿵쿵대는 심장을 눌렀다.
받아야 할 텐데.
「하진아. 우리 2층 카페에 있어.」
우물쭈물하는 동안 전화가 끊겼다. 하진이 당황한 채 다시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메시지가 왔다. 어쩐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다 보이거든?」
“흐억.”
반사적으로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푹 숨겼다. 눈알만 굴려 2층에 있다는 카페를 찾았다. 바로 가까이, 하진이 아주 잘 보일 법한 위치에 환한 불이 켜진 카페가 있었다. 차마 고개를 번쩍 들고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목을 뻣뻣이 한 채 눈만 슬쩍 들었는데 창가에 앉은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하진아. 전화는 왜 안 받았을까?」
“갈게요. 간다구…….”
꼼지락대면서 핸드폰 화면만 보고 안 받는 모습까지 다 봐버렸나 보다. 음성이 지원되는 것 같은 또 한 차례의 메시지에 하진은 드디어 체념을 습득했다. 여기까지 와서 부끄럽다고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앞으로 그들과의 파트너 관계를 영영 끊을 거라면 몰라도.
하진은 터덜터덜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2층으로 향했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깔린 카페에 들어서니 훈풍이 하진을 맞이했다. 하얀 입김이 보일 정도로 추웠던 바깥에서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했음에도 하진은 목도리에서 얼굴을 빼지 않은 채 가야 할 곳을 찾았다.
저기다. 조용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 없이 앉아 있었지만 존재만큼은 확 튀는 두 남자가 보였다. 하진이 서 있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하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작게 손을 흔들었다.
뻣뻣해지고 있는 다리를 움직여 창가 좌석으로 다가갔다. 가는 길은 아주 짧은 거리였지만 걸리는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졌다.
두 알파는 머리와 눈의 색 정도만 제외하면 체격이나 얼굴이 나이트메어와 똑같았다. 하진은 거의 숨을 참다시피 하며 뻣뻣한 걸음을 이어갔다. 이 두 알파는, 게임에서도 전혀 손을 볼 필요성을 당연히 못 느낄 만큼 실제로도 잘난 외모였구나…….
“이하진?”
“안녕하세요…….”
채우가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 하진의 이름을 확인하듯 불렀다. 하진은 앉지는 않고 서서 머뭇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게임 속에선 잔망스럽게 잘도 건넸던 인사가 지금은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겁먹었을까, 우리 멍멍이는?”
“제, 제가 좀 낯을 가리, 으악!”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은 두 알파 중 누구 옆에 앉아야 할까. 비록 하진을 향해 있어서 그렇지, 기운만 두고 보자면 용호상박에 가까워서 둘 다 부담스러웠다. 앉을 곳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는 사이 왼쪽에서 휙 뻗어온 팔이 하진을 끌어당겼다.
“편하게 앉아.”
“가, 감사합니다, 제르 형.”
갑자기 끌어당겨지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으나 요령 좋게 받쳐준 제르 덕에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제르의 옆에 꼼짝없이 앉게 되었다. 하진은 메고 온 가방의 끈을 두 손으로 꽉 쥔 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방은 이리 줘.”
“어? 어, 아, 아니, 괜찮은데…….”
르칸이 우람한 팔을 뻗었다. 손바닥을 내밀어 가방을 달라는 손짓에 사양을 하려 했으나, 제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하진의 가방을 스윽 빼내는 통에 졸지에 빼앗기고 말았다. 하진의 가방은 제르의 손을 거쳐 르칸에게로 넘어갔다. 가방도 르칸의 옆자리를 하나 당당하게 차지했다.
“밖에 많이 추웠나 봐. 코가 아직 빨가네.”
“네, 네. 추워서 손도 얼었고…….”
“손이 얼어서 전화도 못 받았지, 그치?”
“아하하하.”
찡긋, 윙크를 날리는 채우를 마주하며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지…….
“이미 짐작하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 난 임채우. 나이트메어에서는 르칸이라는 닉을 쓰고 있어.”
“아, 넵.”
예상대로 하진의 앞에 앉은 근육질의 남자는 르칸이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짓에 무심코 엉거주춤 일어서 팔을 내밀었다. 꽉 붙들린 손이 힘차게 흔들렸다.
“임서우.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하진아.”
“네, 넵.”
한참을 마주잡고 흔들린 다음에는 제르가 악수를 청했다. 하진은 황급히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맞은편에선 끅, 끄윽 웃음을 참는 소리가 전해졌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다감한 음성이 들리고서야 하진은 자신이 어정쩡하게 일어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며시 어깨를 누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일어난 줄도 모를 만큼 긴장한 상태라는 것조차 앉고 나서야 알았다.
“그게…….”
서우의 첫 인상은 나이트메어에서의 제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있으니 차갑게 보였다. 실내에서도 모직코트를 벗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앉아 있는 남자에게선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무나 접근하지 말라는 듯 날카롭게 날을 세운 것 같았던 사람이 순간 눈꼬리를 살포시 접었다. 멍하니 서우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하진은 부르르 떨며 시선을 돌렸다.
저를 보고 웃는데, 왜 오한이 들지…….
“이하진. 아직도 추워?”
창가 좌석은 유리에서 외부의 한기가 스며들기는 했지만, 카페의 내부는 외투를 벗어도 될 만큼 충분히 훈훈했다. 악수를 한다고 장갑만 벗었고 목도리를 풀지도 코트를 벗지도 않은 상태라 추울 리가 없었다.
“어, 음, 그게…….”
추워서가 아니라 이유 모를 오한 때문에 떨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진을 보며 싱긋 웃고 있는 채우를 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뭐랄까. 앞에 저를 노려보고 있는 늑대가 있는 것 같아서 뒤돌아 도망치려고 했더니 뒤에는 입맛을 다시고 있는 호랑이가 있는 기분이랄까.
“추우면 이리 와. 꼬옥 안아줄게.”
“괘, 괜찮습니다! 춥지 않아요!”
제게 안기라는 장난을 치는 그 역시 나이트메어의 르칸 그대로였다. 늘 봐왔던 호쾌하고 거침없는, 게임에서 알게 된 형이 바로 현실에 있었다.
다만, 게임 속에서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장난으로 응답하곤 했는데, 지금은 현실이니만큼 아무래도 쉽사리 안길 자신이 없었다. 게임에서야…… 진짜가 아니었으니 파트너라는 관계에 맞추어 놀았다지만 지금은 현실이었으니까. 하진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멍멍아. 어때? 소감이.”
“소감이요……?”
“주인님들을 실제로 본 소감.”
“그야 당연히 잘, 흠흠.”
아차차. 본심을 말할 뻔했다. 하진은 새침하게 아랫입술을 말면서 말을 아꼈다.
솔직히 이건 불공평하지.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을 외모와 키와 옷매무새를 자랑하면서 답이 뻔한 질문을 하다니.
“혀, 형들이야말로 절 실제로 본 소감이 어떤데요?”
사실 하진의 소감이라고 해봐야 잘생겼다, 주인님들이 마음에 든다는 요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기로라도 별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대였다.
살짝 태닝을 한 듯한 채우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윤기가 흘렀다. 저를 보고 짓궂게 눈을 빛낼 때마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금색의 빛이 마치 가지고 놀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보이게 했지만, 그 또한 매력이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팔짱을 끼는 동안 무스탕 너머로 고스란히 보이는 근육의 움직임은 필시 수없이 많은 오메가를 현혹했을 터였다.
물론 두 사람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나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자기최면도 걸어봤다. 아무리 알파라고 해봤자 사람이고, 아무리 게임 내에서 인기가 많다는 증언을 들어봤자 그래봤자 게임 속 인기일 뿐이라고. 그러니 괜히 만나기도 전에 기죽지 말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것뿐이니 이왕 만나기로 한 마당에 인사나 잘 나누고 오면 된다고.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정작 두 사람을 실제로 보고 나니 절로 주눅이 들었다. 과연 이렇게 잘난 외모의 알파들이 하진을 보고 성에 차기는 할까. 발터의 말대로라면 오메가들이 수없이 다가왔다는데.
“음. 솔직하게 말해줘?”
“당……연하죠.”
“뭐지, 저 목도리 안에 쏙 들어가 있는 꼬물이는? 저 옷은 당장 벗겨서 한입에 삼켜달라고 입고 온 건가? 어떡하지, 밥도 먹기 전에 엎어놓고 박아야 하나? 아니다, 쟤 배고플 텐데 참자. 뭐 이런 생각을 했지.”
“…….”
저래 봬도 공개적인 장소라서 표현의 수위가 낮아진 거겠지. 역공을 시도했다가 침몰하기 직전이 된 하진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뺐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진이는…… 실제로 만나보니까 우리가 별로여서 그래?”
그때, 서우가 짐짓 상처를 받은 양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턱을 내리고 눈만 치켜뜨는데 하진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모양새에 괜히 심장이 덜커덕했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늘어놓는 질문은 하진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아뇨! 절대!”
세상천지 그 얼굴을 가지고 자신감이 없다 하면 하진은 한강 수온을 검색하러 가야 한다.
그러나 서우의 어두워진 안색이 밝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진은 제 말이 빈말이 아닌 진심이라는 점을 피력하고자 너무 잘생겼다, 멋지다, 보는 순간 두근거렸다, 역시 내 주인님들이다 등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 주인님들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걸요!”
“오호라. 그래?”
영혼을 진심으로 열심히 차곡차곡 담아서 한 보따리씩 던지다 보니 선을 넘은 걸까. 맞은편에서 채우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모습에 하진은 제가 쏟아부었던 말들을 돌이켜보았다. 영혼을 담은 칭찬이 한 끗 차이로 고백으로 들…….
“응, 나도 좋아, 하진아.”
……렸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직접 만나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어서.”
냉기류를 풀풀 풍기는 벽을 허물어뜨리고는 봄바람처럼 화답하는 서우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하진의 위로가 고백처럼 들렸다면 서우의 대꾸는 마치 고백에 대한 답처럼 들려서.
“아하하하…….”
멋쩍게 웃으며 열이 올라 더운 뺨을 꽁꽁 여민 목도리 안으로 더욱 푸욱 집어넣었다. 카페가 워낙 따듯하다 보니 더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습 공격에 당한 얼굴을 차마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서우의 손길이 하진의 귓바퀴를 건드렸다. 둥근 모양을 따라 움직이며 내려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잡고 장난을 쳤다. 서우의 숨결이 가까워질수록 하진의 잡힌 귀는 빨개졌다.
“진작 만나자고 할 걸 그랬어. 지금까지 실체를 두고 가상에서만 만나느라 놓친 시간이 아쉽네.”
위력적인 직구 연타로 두드려 맞았더니 뺨과 귀가 열기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진은 목도리 안으로 머리를 쑥 집어넣고 테이블 아래로 슬라임처럼 흐물흐물 빠져나갈 것만 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채우는 하진의 꼴이 마냥 재밌는지 싱글거리며 보고만 있었다.
“이, 이제라도 만났으니 오늘 회포를 푸, 풀면 되지 않을까요오.”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오늘 하루 정도는 가볍게 한잔해도 된다. 알파에 대한 불신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결여 탓에 그동안 피해왔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하진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그래도 돼?”
“다, 당연하죠…….”
아예 안 만났으면 모를까. 이왕 얼굴까지 봤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적당히 가까운 식당을 찾아가 저녁 한 끼를 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왔다. 첫 만남이라 멋쩍을 테니 가볍게 술을 곁들일 각오도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회식만 열렸다 하면 벌어지는 폭탄주의 파티에서 버티는 스킬을 익힌 몸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취한 팀원들을 버스나 택시에 태워 보내는 역할을 맡곤 했으니, 가벼운 술 한 잔쯤은 문제없을 터였다.
게다가 어색한 기류를 깨기에는 술만 한 안주가 없다. 아마도.
“정말 괜찮겠어?”
익숙하지 않은 직구에 자꾸만 눈을 피하자 서우가 상체를 기울였다. 농도가 옅어 신비롭게 보이는 눈동자가 숨어 있는 하진의 시선을 기어코 찾아냈다. 비밀 이야기를 건네듯 소곤소곤 의향을 재차 물었다.
“시간이 없거나 힘들거나, 내키지 않으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괜찮아. 하진이 얼굴은 봤으니까.”
“어, 음, 아녜요!”
하진은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가볍게 한 잔이 아니라 서너 잔까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라 빨간 날이니까. 혹 숙취가 너무 심할 정도로 많이 마시게 된다 하더라도 모레도 주말이라 문제없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전망 좋기로 소문난 스카이라운지라도 예약해둘 걸 그랬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면야 같이 있는 장소가 스카이라운지든 동네 곱창집이든 무슨 상관이겠느냐마는.
사실 하진은 부담스러워하는 타입의 알파일 때를 대비해서 레스토랑 예약 따위는 하지 않고 나왔더랬다. 크리스마스이브라 어디든 만석이라는 핑계로 1차만 함께 하고 도망쳐 나올 심산이었는데.
술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얼굴 구경을 하다 보면 장담컨대 가벼운 한 잔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후회를 삼키며 하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시간도 많고…….”
“아하. 이하진, 시간 많구나?”
“네? 네. 크리스마스 연휴라 글피까지는 출근 안 해도 돼서…….”
“흐응. 그래?”
추운 바깥에 있다 따듯한 카페에 들어와 언 몸이 녹는 사이 머리도 같이 노곤해졌다. 마시지도 않은 술에 취한 것처럼 둥실둥실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먼저 식사부터 할까?”
그래서인지 훅 치고 끼어든 채우의 목소리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
“아…….”
언제 의식이 사라졌을까. 수분을 갈구하는 목 때문에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하진이 갈라진 신음을 내뱉었다.
소주가 아닌 와인이라고 방심하는 바람에 취해서 잠들 때까지 마신 모양이지. 하진은 까끌까끌한 목을 만지려 팔을 들었다.
“……어?”
두 팔은 묵직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얽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은 따듯하고 널찍하면서도 울퉁불퉁한 무언가와 닿아 있었다. 따듯한 정도가 마치 사람의 체온과 비슷했다. 하진은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다.
“읏!”
두 다리 역시 무거운 통나무에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던 하진의 입에서 듣기 흉하게 갈라진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격통과 이물감이 상당했다.
“정신이 들어?”
“하진이 깼어?”
앞뒤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고갔다. 귓가에 저음이 살랑이고, 멀리 떨어진 음성이 들렸던 방향에서는 페로몬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진은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이면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 그러니까.
오늘 르칸과 제르를 실제로 만났고, 카페에서 먼저 합류한 다음 유명한 중식당으로 갔다. 언젠가 하진이 무심코 탕수육이 먹고 싶다는 혼잣말을 기억한 서우가 예약을 해두었다 했다. 코스에 곁들여 나온 고량주를 홀짝였고…….
“아.”
2차도 갔다. 하진이 예약해둘 걸 그랬다고 후회했던 바로 그 스카이라운지였다. 듣기로는 채우가 예약했다고 했었지. 아마 그때부터 하진은 아무 준비도 없이 털레털레 온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했던 기억이 났다. 때문에 서우가 추천해준 와인을 물처럼 마셨고…….
―하진아. 앞으론 어디 가서 술 이렇게 마시지 마.
―저 말술입니다만.
나이트메어에서처럼 하진의 부슬부슬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서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안 되겠다며 얼음물을 권했다. 반사적으로 받아들여 홀짝이던 하진은 제가 원하던 단맛이 아니라는 이유로 바로 내려놓았다. 맹물보다는 달달한 술이 더 좋았다.
―이하진. 이렇게 취해서는 선언한 대로 회포 풀 수나 있겠어?
―할 수 있는데요! 절 뭘로 보고!
채우의 우악스러운 손이 치즈를 냠 물고 우물우물 녹이던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비틀린 살이 제법 아파서 하진은 한껏 찌푸리며 응수했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담소는 회포를 푼 게 아니고 뭐지? 그렇지 않아도 빈손으로 와서 내심 신경이 쓰이는 마당이었다. 채우가 쓰게 웃으며 지금까지 재미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자 하진은 속이 상했다.
―흥. 형들이 먼저 기절할 때까지 밤새도록 달릴 자신도 있거든요!
물론 하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포라는 단어에 담긴 이면의 뉘앙스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제가 도발을 하는 줄도 모르고 도발을 하고야 말았다.
―정말?
―당연하죠!
―우리보다 네가 먼저 기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책임집니다!
가슴까지 탕탕 두드리며 호언장담도 했었다. 절대 하진이 먼저 기절할 리 없다. 그러니 두 사람이 먼저 기절하면 대리를 불러 책임을 지면 된다 생각했다. 너무 취해 집주소를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숙소를 잡아주는 것 역시 자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좋아. 책임지는 거다.
―물론이죠!
“흠, 흠.”
그 후로는 이상하게 몸이 둥실둥실 떠서 기분이 조금 좋다며 배시시 웃었던 것도 같았다. 회식 때와는 다르게 형들이 너무 잘생겨서 안구가 호강한다는 둥, 걱정했는데 역시 좋은 사람들이라는 둥,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 아주 조금 졸릴 뿐이라는 둥 중얼거리다 고개를 앞으로 푹 꺾기도 했던 것 같았다. 결국 먼저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던 하진은 채우의 등에 업히면서도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고 우겼다.
“잘 잤어?”
그랬는데, 회포를 서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을 줄은 몰랐지…….
찰랑이는 금빛 액체를 담은 유리잔을 들고 온 채우가 하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매하게 입꼬리를 어설프게 올린 채로 위를 보던 하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기. 채우 혀, 흣.”
“어딜 가니.”
삐걱거리는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뒤에서 팔이 감겨온다 싶더니 그대로 뒤로 끌려갔다. 하진은 그제야 엉덩이에서 느껴지던 이물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가 품고 있는 두툼한 살덩어리가 제 존재를 알리며 슬금슬금 부피를 키웠다.
실제와 똑같이 느껴지도록 감각을 설정할 수 있었던 나이트메어와 현실은 느낌이 또 달랐다. 욱신욱신하는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하진의 뒤는 생생한 성기가 신기한지 오물오물 삼키며 놓아주려 하질 않았다.
“잠깐, 깊, 너무 깊…….”
머리맡에서 서우가 느른한 한숨을 쏟아냈다. 하진의 다리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중심부를 더 밀착시켰다. 삽입이 한층 더 깊어졌다.
후끈한 숨결이 쏟아졌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더니 아래에서는 거대한 덩어리가 하진을 위로 쳐올렸다. 흐느적거리는 하체가 기세에 밀리며 서우의 이가 닿은 귓불이 따끔했다.
“간, 간지러으, 아…… 으응!”
말캉한 혀가 따끔한 통증이 스쳐간 곳을 살살 달랬다. 서우가 다시금 귓불을 아작 깨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킬 기세의 페로몬이 덮쳤다. 알싸한 페로몬이 하진을 향할 땐 날카로운 날을 감추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그물로 화한 페로몬이 일렁이며 고막에 스며들었다. 먹먹한 가운데 엉덩이에 찰싹, 찰싹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하진아. 내일부터 사흘 쉰댔지?”
“아, 아니, 흐응! 안 쉬, 읏!”
그런 의미로 시간 많다고 한 게 아니었다고요!
그러나 역시나 문장은 채 완성이 되기도 전에 뭉개졌다.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가지고 놀던 서우가 말캉한 뺨에 쪼옥 입술을 맞췄다. 동시에 하진을 껴안고 허리를 쳐올렸다. 불시에 길쭉한 흉기에 극점을 찔린 하진이 눈을 감으며 부르르 떨었다. 쭈뼛쭈뼛 일어선 목의 솜털 위로 서우의 낮은 숨소리가 쏟아졌다.
“이하진.”
한껏 움츠리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을 때였다. 민감도가 보정되어 있는 게임과 다르게 제 몸은 어설프게 애액을 흘렸다. 극점이 짓찧어질 때마다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성기를 삼킨 입구는 서우를 서투르게 받으며 삼키는 중이었다.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나더니 상체가 훅 앞으로 끌려갔다. 제가 삼키고 있던 긴 성기가 쑤욱 빠져나가는 감각이 섬뜩했다. 마치 한껏 위로 올라갔던 바이킹이 아래로 내려갈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제 성기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부글부글 끓던 배 속이 조였다. 내부를 잔뜩 채우고 뜨겁게 달궜던 원인이 빠져나가는 순간이 못 견디게 괴로워 하진은 발가락을 말며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빠져나가던 도중에 서우가 재차 제 쪽으로 하진을 끌어당겼다. 섬찟한 똬리는 이제는 좁은 내벽을 밀어내며 위로 올라왔다. 하진은 서우의 위에 올라타 앉은 자세가 되었다. 엉덩이와 회음부로 전해지는 체온이 익숙하면서도 자못 낯선 탓에 뺨이 달아올랐다.
“잠까안, 흐으……!”
맞닿은 살이 부끄러워 엉거주춤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느라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였다. 넘어진다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저도 모르게 배를 짚었다. 서우가 하진의 허리를 잡고 단숨에 끌어 내렸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파고드는 성기를 삼킨 밑에서는 쿨쩍이는 소리가 났다. 드문드문 새어 나오는 울음이 적나라한 물소리에 섞였다.
“이하진. 목마르지?”
채우가 다가와 하진의 볼을 한 손으로 누르고 아래로 처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뻐끔대는 입을 타원형으로 벌어지게 하더니 그 위에서 유리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금색 액체 한 줄기가 쪼르르 내려와 하진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달달한 사과 맛 주스.
좋아하는 주스였으나 뺨이 눌린 탓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제때 액체를 받아내지 못하는 혀가 정처 없이 배회하는 동안 주스가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거 회복 아니, 읍!”
끈끈한 주스가 끝내 범람해 채우의 손을 적신 순간, 입술이 틀어 막혔다. 혼자서 한 번에 마시지 못할 양을 담아둔 입이라는 우물로 혀가 침범했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하여 타액이 섞인 사과 주스가 출렁이며 파도를 치다 채우의 입으로 넘어갔다. 알파의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일렁였다. 씨익 웃은 알파가 농도 짙은 페로몬을 담은 혀로 하진의 입 속 곳곳을 누볐다.
“흐읍, 으응, 응…….”
커다란 손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피하지 못하도록 두피를 누르며 동그란 머리를 한 손에 쥔 채 키스를 퍼부었다. 사과 맛 혀인지, 사과 주스 맛 타액인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혼몽해지고 있는 하진이 어깨를 느슨하게 늘어뜨렸다.
위아래로 쏟아져 들어오는 알파 페로몬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하진의 눈이 조금씩 풀리며 말간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오뚝한 콧날이 멀어지고 상큼한 체향 또한 멀어진다 싶던 순간, 하진의 시야에 하얀 별이 번쩍였다. 늘어지는 몸으로 무심코 벗어나려는 하진의 내부를 서우가 짓찧으며 치댔기 때문이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두께가 파고들자 몽롱했던 안개가 사라졌다. 이마에 맺힌 땀이 굴러 서우의 배에 떨어졌다. 서우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간질간질한 배 속을 가라앉히고자 하반신을 틀어보려고 했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진은 깊이 꿰뚫린 채 가쁜 숨을 쏟아냈다.
퍽, 퍼억 살과 살이 붙고 비벼지는 틈틈이 섞이는 물소리가 뒷덜미를 저릿하게 했다. 간지러웠던 배 속은 때론 부글부글 끓었다. 통제권을 빼앗긴 몸뚱이가 세차게 흔들렸다. 간신히 서우를 짚고 버티려 했으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면 속절없이 손이 미끄러졌다.
“사, 으읏, 조, 조금만 살사, 살…… 흐으응!”
허리를 조이는 힘이 강해졌다. 뱀을 닮은 성기가 쉬익 머리를 물리나 싶더니 기습적으로 민감해진 내벽을 밀어내며 솟구쳤다. 더듬더듬 탄탄한 가슴을 짚고 애원을 쏟아내던 하진은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위로 쳐올리는 용두질이 약점이나 다름없는 전립선을 두드렸다. 쿵, 쿠웅 얻어맞은 순간 숨이 막혔다. 꼬리뼈부터 목까지 찌르르 울리는 쾌감에 페니스가 바짝 곤두섰다. 하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껏 웅크렸다. 파들파들 떨고 있는 요도구에서 쪼륵, 쪼르륵 힘없이 물을 흘려냈다.
“살살 해달라고 했는데…….”
훌쩍이는 목소리에는 원망도 담겨 있었다. 쾌감에 절이 도통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은 아래에서 가볍게 잡아당기는 손짓에도 쉬이 끌려갔다. 하진을 끌어안은 서우는 붉어진 눈가를 핥은 후 부르튼 입술을 삼켰다.
서우의 입술이 찡그린 하진의 얼굴 곳곳을 누볐다. 품에 갇혀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은근히 괜찮았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상체가 휙 끌어당겨졌다. 채우가 하진의 겨드랑이를 짚고 상반신을 끌어 올렸다.
한계를 모르고 깊이 박혀 있던 성기가 끝도 없이 빠져나왔다. 하진은 저를 반으로 가르고 있던 불기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득했다.
오싹한 기운에 부르르 떨던 하진은 떠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푹신한 침대 위였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다만 이어서 벌어질 일을 감지한 본능에 따라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직 힘든데!
게임 속도 아닌데, 홧홧한 입구에 르칸일 때와 똑같은 페니스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현실은 사과 주스를 마시든 셀러리 주스를 마시든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까운 하진의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 채우였다.
피해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허벅지가 잡히고 몸이 뒤로 쭉 끌려갔다. 엎드린 채로 보글보글 애액이 흥건한 입구에 채우의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읏, 아으.”
마치 주먹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채우가 하진의 허리를 잡고 무게를 실어 뒤에서 쑤셔 박았다. 볼기와 채우의 고환이 찰싹찰싹 부딪혔다. 구멍이 찢어지고 엉덩이는 터질 것만 같아 등을 들썩이며 헐떡였다.
채우는 힘을 주지 못하는 하진의 다리를 들어 제 허리를 감게 하고는 위에서 찍어 누르며 몰아붙였다. 숨 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손으로 맞지 않았는데도 세찬 부딪힘에 엉덩이가 빨개졌다. 하진은 베개에 얼굴과 함께 서러운 신음을 묻었다.
“왜, 이하진.”
거대한 그림자가 하진을 덮쳤다. 흠칫 흠칫 떨고 있는 하진을 위에서 지그시 누르며 귓가에 입술을 댔다.
“책임진다며.”
하진을 가둔 어둑한 그림자가 속살거렸다. 베개에 파묻힌 동그란 머리통이 움찔했다.
“주인님 두 명 잘 키워준다며. 애정도 공평하게 줄 자신 있다며.”
서늘한 저음이 고막을 점령하고 아래에선 살덩어리가 구멍을 찢을 기세로 파고들었다. 하진의 어깨가 튀었다.
취해 있는 동안 대체 마음의 소리를 얼마나 줄줄 고백한 거지…….
“서우가 박았을 때 질질 분수 한 번 쌌으면, 그다음엔 내 생자지 물고도 한 번 싸야 공평하지 않겠어?”
“…….”
채우는 한 손으로 하진의 허리를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하진의 페니스를 감쌌다. 갇힌 페니스는 자칫했다간 순식간에 짜부라질 것만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진은 고개를 들어 서우 쪽으로 구원 요청의 시선을 애타게 보냈다.
“어허. 혼난다.”
시선을 눈치챈 채우가 한 차례 볼기를 때렸다. 현실에서 처음으로 타인의 손길에 얻어맞은 엉덩이는 꽤 따갑고 화끈화끈했다. 하진은 서둘러 시선을 거두었다.
“아, 아냐, 쌀, 쌀게요…….”
분수고 뭐고 싸라면 싸야지 별수 있나. 설움을 삼키며 흐느꼈다. 그러니까 페니스 쥐고 있는 힘 좀 풀어줬으면.
“이하진.”
“네, 네에.”
“회포 풀 거 다 풀었다고 나메 접으면 안 된다?”
“……흐, 아, 안 접어요!”
잠시 대답을 망설였더니 곧바로 응징이 가해졌다. 채우는 묵묵히 페니스를 잡고 하진을 제 쪽으로 끌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온 채우의 성기는 극점을 지그시 눌렀다. 앞뒤로 터질 것만 같은 압박에 하진은 다급하게 약속했다.
“부끄럽다고 잠수도 타면 안 돼.”
“……네, 잠수 안 탈, 읏.”
아주 짧은 주저함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하진은 제 페니스가 마치 손잡이가 된 것만 같았다. 심술궂은 손이 불알과 기둥을 한 번에 쥐고 흔들었다. 점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있었다.
잡힌 페니스가 채우의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터트릴 듯 세게 쥐었다가 슬쩍 힘을 풀어 부드럽게 매만지기를 반복했다. 사정에 도달할 때쯤에는 요도구가 막혔다. 이윽고 잘근잘근 귓불을 깨물던 채우가 하진을 단단하게 고정하고는 아래를 바짝 붙였다. 전립선을 지분거리던 살덩어리가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주인님이 둘이나 돼서 조금 힘들겠지만,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성의껏 부양해줘야 한다?”
“네, 네에, 할게요, 뭐든, 흐으…….”
“그래.”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서우가 깨물었던 방향과는 반대편에 있는 귀를 한입에 삼켰다. 후끈한 숨결이 귀를 마비시켰다. 딱딱한 이가 기습적으로 귓불을 짓씹었다.
“아으으…….”
채우가 페로몬을 풀었다. 지금까지 맡았던 페로몬 냄새 중 가장 강한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냄새만으로도 겨울 숲 한가운데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씹힌 귓불은 뜨겁고 성기가 박힌 엉덩이도 뜨거웠다. 상반된 감각이 한 번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하진의 시야가 잠깐 멀었다.
“참. 우리 멍멍이 노팅은 싫다고 그랬지. 그건 안 할게.”
반각인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해놓고 노팅은 하지 않겠다니. 어설픈 선심이지 않나.
그러나 하진은 채우의 속삭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봐주고 있었다는 듯 본격적으로 채우의 허리 짓이 거세진 탓이었다. 뒤에서, 위에서 닥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켰다.
제가 물고 있는 알파의 페로몬이 인식표처럼 등록된 상태여서 그런지 예상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놓아주지 않겠다며 성기를 휘어감은 하진의 몸이 나부꼈다. 하진은 제가 우는지도 모르고 흐느꼈다.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 쉼 없이 밀려왔다.
예고 없이 몸이 뒤집혔다. 채우는 하진을 반대로 돌려 눕혔다. 한참 만에야 초점을 찾은 하진의 시야에 성난 머리를 세우고 힘없는 물을 줄줄 흘리는 제 페니스가 들어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채우는 한껏 예민해진 하진의 물건을 손가락으로 퉁 튕겼다.
“……!”
소리 없는 비명을 꺽, 꺼억 지르던 하진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흠칫흠칫 떨면서 누워 있는 하진에게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인영이 다가왔다. 서우였다.
볼썽사나운 자세로 쓰러진 하진과 다르게 지친 기색도, 흐트러진 기색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채우는 성기를 넣고 있는 자세를 다잡으며 하진을 당겨 바투 붙었다. 그의 위로 제 그림자를 드리운 서우가 눈꼬리를 휘었다.
“형, 조, 조금만 쉬면…….”
다음 차례는 필시 서우였다. 이어질 행위를 직감한 하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몇 번이고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된 사정 한 번을 안 했으니, 휴식시간 또한 없을 터였다. 흉흉하게 존재감을 피력하며 서 있는 성기를 외면하며 애원을 했다.
“하진아.”
“이하진.”
땀에 젖은 하진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던 서우의 입술이 열렸다. 채우가 씨익 웃으며 그를 부르는 소리도 동시에 들렸다. 하진은 제 애원이 먹히지 않으리라는 미래를 직감했다.
“첫날밤이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네…….”
“이제야 12시네. 크리스마스 연휴도 즐겁게 보내자고.”
흐어엉. 살려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해.”
속으로 울면서 비명을 지르는 하진의 귀로 두 사람의 인사가 겹쳤다.
『Happy Nightmare! 2 - 크리스마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