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동
“성아!”
연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인영을 보고 서둘러 달려갔다.
“누이…….”
“어찌 이리 야위었어. 잘 지낸다더니, 일이 수월하다더니.”
연은 성을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지었고, 평소 어린 내색을 하지 않던 성 또한 제 누이의 허리춤을 잡으며 가늘게 떨었다.
“고뿔은 어때, 응? 충분히 낫고 온 거야?”
“예, 예. 누이…… 서신 받고서 훌훌 털어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뺨이 쑥 꺼지게 말랐으면서 제 누이 걱정이 먼저인 아우는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누이와 동생이 재회의 정을 나누는 동안 윤씨 일가가 저택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게 다 뭐람.”
소화를 부축해 들어온 동래 어멈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궐만큼 커다랗고, 용왕궁처럼 현란한 곳이었다. 한성에서 제법 큰 윤 참판의 집도 이처럼 호화롭진 않았다.
허씨는 반질반질한 대청 주를 매만지며 연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 연을 보고 샐쭉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인을 뵈었으면 인사가 먼저 아니니.”
주인? 주인이라고?
벽을 둘러싸고 늘어서 있던 산군의 권속들이 수군거렸다. 대가댁 아씨라지 않았어? 참판의 여식이라더니. 주인은 웬 말이람? 속삭이는 말을 듣고 황우임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백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황우임에게 다가가, 윤씨 일가한테서 들은 내막을 전했다.
“……산군께서 첩실을 들이셨다고.”
“저 아씨 몸에서 호랑이 정 냄새가 진동합니다.”
“다른 호랑이일 리는 없느냐.”
“스스로 산군이라 밝히시고 아기 마님 대신 신방에 들이시겠노라 말씀하시었다고…….”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상황을 파악한 연은 침묵했다. 본래 소화의 자리였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성이를 불러 달라 고집부린 일로 나으리께서 오만 정이 다 떨어지셨을 수도 있었다.
황우임이 여종들에게 물었다.
“한데 산군께선 어찌 함께 오지 않으시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셨답니다. 언제 오시겠다 기약하지 않으셨다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산군이 없으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웃어른이 있으면 물어나 보겠지만, 하나 있는 어른인 태부인이 별채에 갇혀 있으니 할 일을 여쭐 수도 없었다.
허씨가 연을 향해 일갈했다.
“산군을 품느라 고되었을 소화에게 어서 따스운 방을 내어주어야지. 신방이 어디냐. 산군께서 우리 소화를 신방에 들이시겠다 약조하셨단다.”
황우임을 비롯한 목멱의 영물들이 연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이…….”
성도 걱정 어린 얼굴로 제 누이를 붙들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던 연이 황우임에게 손짓했다.
“저들에겐 손님 방을 내어주고 아씨는 일단 별당에 모시세요.”
“별당?!”
허씨가 연의 말허리를 뚝 자르곤 날카롭게 소리쳤다.
“주상 전하께서 각시로 주선한 이는 우리 소화다. 산군께서도 신방에 들이시겠다 약조하시었는데 첩실이나 묵는 별당에 들어 앉힌단 말이냐!”
“아기씨 대신 신행 가마 오른 이는 접니다. 나으리께서 제게 별다른 말을 전하지 않으셨으니 제가 아직 이 집의 안주인이에요.”
허씨가 윤 참판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연을 가리켰다.
“대감 저 계집 하는 꼴을 보십시오. 은혜도 모르는 금수가 아닙니까!”
“…….”
“나서 보셔요! 우리 딸 별당에 드는 꼴을 봐야겠습니까.”
“산군이 오면 정리될 일이지 않소. 사위 집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마시오. 소화에게 친정 흉을 듣게 할 셈이오?”
“하지만 위아래는 정리되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소화가 얼마나마 저깟 것 형님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씨가 연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소화는 부모에게서 한발 앞서 나서며 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버님 말씀대로 산군께서 오시면 위아래가 정리될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지. 하지만 나도 산군의 정을 받은 몸. 산군을 사위로 두신 내 부모님을 홀대해선 아니 될 것이야. 귀빈이 묵는 곳을 내어드리고, 종을 붙여 잘 보살펴 드리렴.”
“…….”
“성이 너는 동래 어멈 도와 내 짐을 별당으로 옮기고.”
몸종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까투리가 울화를 참지 못하고 나서려 하자 백사가 황급히 손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안채 신경전을 한두 해 보았어? 괜히 끼어들면 우리 같은 것들은 목이 꺾인단 말야.”
“하지만―!”
“아서라니까.”
연은 교만한 소화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야말로.”
반질반질한 소화의 이마가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연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서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으니, 윤씨 너는 첩실이고 본부인은 나야. 성이는 정실부인의 하나뿐인 아우이니 별당에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성이는 아직 내 집 가노야!”
“그러니까. 어째서 아직도.”
연은 윤 참판을 쳐다보았다.
“제가 참판댁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한데 약조하신 속량은 어찌 지켜지지 않았는지요.”
“다 처리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
“변명하지 마십시오. 성이를 진정 속량시켜줄 셈이셨다면 더는 궂은 일을 시키지 않으셨을 거예요.”
윤 참판은 헛기침을 했고, 허씨는 “저, 저!” 하며 연을 향해 삿대질하였다.
“가엽게 여겨 거둬주었더니 은혜도 모르는 소리하고는!”
“거두신 은혜는 대신 죽기 위해 신행 가마를 탔을 적에 모두 갚아 드렸지요.”
연은 황우임을 불러 윤씨들을 별당에 두고, 성이 기거할 따뜻한 방을 내어주라 일렀다.
연이 성과 함께 들어가고 허씨는 붉은 입술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허씨가 신경질적으로 윤 참판을 돌아보았다.
“갈수록 오만한 것이 주석환을 빼닮았습니다. 그러게 제가 해충 같은 역적 새끼는 들이는 게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윤 참판이 묘한 눈으로 연과 성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방자한 년.’
속으로 삼킨 말이 쐐기처럼 날카로웠다.
그날 이후 윤씨 일가는 달이 넘도록 목멱에서 머물렀다. 여종들이 넌지시 하산을 언급해도 산군을 뵙고 딸이 안채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떠나겠다 어깃장을 놓았다.
허씨는 창고에 쌓인 패물을 들고나와 이리저리 살피며 투덜거렸다.
“이런 것을 노비 따위가 관리하다니. 얘, 소화야.”
“네, 어머니.”
“산군이 돌아오면 창고 열쇠부터 틀어쥐어라. 이리 좋은 것을 미천한 것에게 빼앗겨서야 되겠니.”
“마음에 들면 가지세요.”
“그, 그럴까?”
소화가 우후후, 웃으며 옥가락지를 허씨의 검지에 끼워주었다.
“곧 이 집의 안주인이 제가 될 터인데 먼저 드리는 것이 무에 대수겠어요?”
“중궁을 낳은 부부인도 나 같은 호사는 못 누렸을 것이다. 이 금덩이를 보렴. 이게 다 얼마야.”
깔깔거리는 모녀의 웃음소리가 별당 문을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상을 들고 문지방 앞에 서 있던 백사는 입매를 비틀었다.
산군의 종에게도 영물 대우를 잊지 않는 아기 마님과 달리 별당 아씨 윤씨와 그 친정 인간들은 지독히 교만했다.
어제는 이백 년을 넘게 산 사슴이 허씨의 혹독한 매질 때문에 본신을 드러냈고, 조반을 들이러 간 산서는 별당 아씨에게 붙들려 뺨이 터지도록 도토리를 가득 집어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산군이 각시를 위해 직접 심고 피운, 자미궁(옥황상제의 궁궐)의 청화를 별당에 옮겨 심으라 닦달했다. 까투리가 그것만은 할 수 없노라 하자, 매달아 매질하여 기어코 연이 청화를 옮겨심도록 명하게 만들었다.
“별당 아씨, 점심상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오려무나.”
반상을 들이자 허씨가 상 앞에 앉다 말고 혀를 찼다.
“수태에 좋은 잉어를 쪄오라지 않았어.”
“산중에선 잉어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민가까지 뒤졌으나 한겨울엔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영물이라는 것들이 게을러 빠졌구나. 정성이 부족해, 정성이.”
“…….”
매일 같이 억지를 부렸다. 수태에 좋은 음식이라면 계절을 고려치 않고 내오라 명했고, 가져오지 못하면 상을 뒤엎으며 패악을 부렸다.
“됐어요, 어머니.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해요.”
“너도 참. 그리 선하게 살면 손해만 보는 것이다.”
“흥분해서는 아니 될 몸이라서요.”
소화가 백사를 은근한 눈길로 보며 배를 어루만졌다. 눈을 끔뻑이던 허씨는 이내 숨을 들이켜고 상을 멀찍이 밀며 딸에게 다가섰다.
“설마…….”
“달거리가 없어요. 오늘 조반을 받았을 적엔 입덧도 한 것 같구요.”
“세상에나!”
허씨는 입을 함지박하게 벌리고 딸의 배를 매만졌다.
“효자가 들어앉았나 보다. 제 어미 고생하지 말라고 이리 이르게 신호를 보낸 게지! 거기, 너.”
허씨가 백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맥을 받아야 하니 서둘러 의원을 데려오너라.”
“…….”
“뭣하고 앉았어!”
“예, 예…….”
백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가 서둘러 별당을 나서며 입을 틀어막았다. 길을 지나던 까투리와 황우임이 후들후들 주저앉은 백사를 보고 얼른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또 별당 아씨가 너를 괴롭힌 거야?”
“……못 살아, 못 살아! 아으윽!”
“백사야?”
백사는 황우임의 치마를 더듬더듬 붙잡고 소리쳤다.
“별당 아씨가 산군의 아기씨를 수태하셨답니다.”
“뭐라고!”
일 났다. 이리되면 아기 마님은 꼼짝없이 밀려나고, 별당 아씨가 안방을 차지할 터였다. 그럼 우리는……. 까투리의 얼굴도 백사 못지않게 새파래졌다.
의원이 소화에게 감축의 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목멱의 구도는 단숨에 바뀌었다. 연을 따르던 이들이 하나둘 별당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황우임과 까투리, 백사, 산서뿐이 남지 않았다.
성은 호숫가를 거니는 연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화도 나지 않으십니까.”
“……응?”
“차라리 소리치고 열을 내세요. 보기에 안쓰럽습니다.”
누이 대신 화를 내는 동생을 보고 연은 낮게 웃었다. 그녀가 동생의 손을 붙잡고 앞서 걸었다.
“왜 속이 상하지 않겠니. 다른 여인이 낭군의 아이를 배었는데.”
“한데 어찌 그리 침착하십니까. 어제는 허씨에게 뺨도 맞아놓고선.”
성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반쯤 언 호수를 바라보았다.
“나으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흉악하다던데요. 영물도 오금이 저리는 흉포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내가 좋아지기라도 하셨어요?”
모두 입을 모아 잔혹하다고 말하지만, 제게는 그리 다정한 사내가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무엇이 먹고 싶다 중얼거리면 다음 날 아침 머리맡엔 꼭 그것이 있었다. 서책을 좋아하는 연을 위해 하품을 누르며 함께 책을 읽어주고, 거닐 적엔 혹여나 넘어질까 유심히 살펴주었다.
‘나는 각시처럼 어여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귀엽기도 하시지.’
‘그리 사랑스러우시니 낭군이 어찌 각시를 두고 나서겠습니까.’
매번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애끓는 눈으로 바라봐주었다. 온갖 풍파를 겪은 후 내내 잔잔하기만 하던 마음에 연약한 파동이 일만큼.
“누이, 날이 차요. 그만 걷고 방에 들어가세요.”
“그래야지…….”
돌아간 방 앞은 소란스러웠다. 황우임이 찢어진 이마를 붙들고 주저앉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 까투리와 백사, 산서가 꿇어앉았다.
허씨는 씩씩대며 황우임을 향해 경대를 추어올렸다. 소화가 흥, 코웃음 치며 허씨의 뒤에서 소란을 지켜보았다.
“뭐하는 거예요!”
연이 얼른 뛰어가 황우임을 끌어안았다.
“노비 계집이 집안을 관리하니 위아래가 없는 것이야. 어찌 저리 시건방지게……!”
연은 황우임이 품고 있는 꽃신을 보고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제멋대로 창고에 드나들더니만 이제는 신방까지 들어와 연의 물건을 가져가려 한 모양이었다.
“종이 주인의 물건을 지킨 것이 어떻게 시건방진 일이란 겁니까.”
“주인?”
핫! 실소를 터뜨린 허씨는 연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산군에게 안겼다고 네 신세가 달라졌다 여기지 마라. 내 딸이 품고 있는 아이가 산군의 씨야. 사위님이 돌아오시거든 쫓겨날 년이 겁도 없이.”
“그 경대 내려놓고 별당으로 돌아가세요.”
“아직 말귀를 못 알아먹고! 아아…!”
열이 뻗친다는 듯 비틀거리자 뒤에서 지켜보던 소화가 나섰다. 부풀기 시작한 배를 끌어안고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황우임을 끌어안은 연의 팔을 당겼다.
“어머니께 말버릇이 그게 뭐야. 보자 보자 하였더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구나.”
소화는 연을 거칠게 끌어내고 황우임의 머리채를 쥐었다.
“같은 신세라 마음이 동하겠으나, 종은 매로 다스려야 한단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솟았다. 마치, 마치 어린 성이에게 매질하던 그때처럼. 성이를 끌어안고 매타작을 견뎠던 날마냥 황우임을 끌어안았다.
소화의 매질이 거세지자 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뻗었다. 균형을 잃은 소화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안채로 들어서던 윤 참판이 그 꼴을 보고 서둘러 달려갔다.
“소화야!”
허씨가 허겁지겁 소화를 부축했다. 윤 참판의 눈에선 불똥이 튀었다.
딸이 품은 씨가 무엇인데!
저것은 금상 위에 오를 계단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영화였고, 뭇 사람들을 찍어누를 영예로운 검과 다름없었다.
“정신 나간 년이 감히!”
윤 참판이 두꺼운 손을 연을 향해 추어올렸을 때였다.
“나의 목멱에서 소란이라.”
휘익―!
거센 바람이 앙상한 겨울나무의 가시를 세차게 흔들고, 낮은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