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7)

[공금,타사 재업금지X]

“나으리, 나으― 아흑!”

속절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연은 황급히 장지문을 살폈다. 문 뒤로 그림자 서넛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인영 뒤로 꼬리나 우각이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점심상을 들이러 온 여종들이 틀림없으렷다. 저들이 난잡한 소리를 들었을까 봐 가슴이 벌렁거린다.

더운 혀가 질구를 따라 느른히 움직였다. 혀끝에 걸리는 얇은 피막을 가볍게 빨아올릴 때마다 질구 안에서 애액이 울컥, 울컥, 흘러나온다. 쭙, 쮸읍, 가랑이서 난잡한 마찰음이 들려올 적이면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말씀하십시오.”

말투는 고매한 선비와 다를 바 없이 점잖은 주제에 눈은 짓궂게 휘어졌다.

“아직… 아직 해가 중천입니다.”

“예.”

종아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긋했다. 속곳만 조금 밀어놓은 채로 음부를 게걸스레 탐하는 혀도 여전히 멈출 줄은 몰랐다.

“그만, 제발요.”

“야속하십니다. 각시의 음부는 이리도 벌름거리며 낭군의 자지를 애타게 하지 않습니까.”

“아닙, 아닙니― 으응…….”

쿡, 손가락 하나가 사정없이 음부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밤, 난폭한 성기에 시달렸던 음부는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붉은 속살이 좌로, 우로 모여들었다가 벌어지며 채울 것을 내어달라 채근했다. 절로 더운 숨이 터지고 눈꼬리에 눈물이 고인다.

“하나로 되시겠습니까.”

“아으으…… 흑!”

손가락이 두 개째 들어왔다. 산군의 손가락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서기 무섭게 녹진하게 녹은 음부가 애액을 울컥, 울컥, 터뜨리며 살갗에 달라붙었다. 그는 쾌감으로 달아오른 각시의 허벅다리 안쪽에 몇 번이나 다정히 입 맞추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두 개로는 아쉬우시겠지요.”

“흐…….”

“간밤엔 제 자지를 한계까지 삼키고도 잘만 허리를 흔들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밤, 그녀의 음부는 그의 말마따나 그를 뿌리까지 삼키고 쩝쩝 소리를 내며 성기를 조물조물 씹어댔다. 잔뜩 달아올라 그의 아래서 몸을 흔들던 기억이 수치를 부추겼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각시의 목덜미를 느른히 매만지며, 한 손으로는 풀무질하듯 사정없이 음부를 헤집었다. 그가 주는 쾌락을 알고 있는 음부가 눅진하게 녹아 손가락에 쩍, 쩌적,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연이 허리를 비틀곤 “아흐흑, 흑!” 애처롭게 신음했다. 단둘이 있을 적의 낭군은 놀이패 사당보다도 짓궂어서 죽는 소리가 나지 않는 한 만족시켜주는 법이 없었다.

정신 없이 신음하는 사이 어느새 그의 숨결이 가랑이 사이에서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나으리……!” 소리치려 했으나, 단어를 끝맺기도 전에 교성이 튀어나왔다.

음핵 째로 입 안 가득 젖은 살을 삼킨 그는 쯉, 츕, 츄읍, 소리가 나오도록 거세게 음부를 빨아들였다. 혓바닥의 돌기가 젖은 구멍을 거칠게 문지르자 허리가 뒤틀리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으응, 응, 으응—!”

혀를 뾰죽하게 세워 습한 구멍을 쿡, 쿡, 누르다가 애액이 흘러나오면 생명수라도 되는 양 남김없이 받아먹었다.

연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헐떡이자 그는 엉덩이를 주물러 틈을 벌렸다. 벌어진 질구에서 뭉근한 체액이 뚝, 뚝, 떨어졌다.

“나으리, 나으…… 아!”

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두터운 허벅지가 음부를 살살 짓이기는 감각에 허리가 절로 떨렸다. 손가락 사이로 유두가 살살 굴려지고, 뭉뚝한 무릎이 잔뜩 예민한 질구를 유린하니 오늘도 속절 없이 곡소리가 터진다.

“흐으응!”

“허락해주신다면 자지를 쑤셔넣겠습니다. 귀두로 음부의 주름을 짓이기고, 거칠게 잡아빼 드리지요. 그리하면 언제나 만족스럽게 애액을 쏟아내주지시 않습니까.”

무릎이 음핵을 뭉갤때마다 여린 껍데기가 위로 밀려나며 가장 예민한 덩어리가 우로, 좌로 비벼진다.

“……아흑!”

입술을 질끈 깨문 연이 달뜬 눈으로 낭군을 바라보았다.

“해, 해주세요…… 넣어주세요!”

기어코 제 입에서 해달라는 소리가 나온 후에야 산군이 그녀의 다리를 허리에 감았다. 낭창하게 휘어진 다리가 허리에 단단히 걸쳐지자 기다랗고 두꺼운 손가락 몇 개가 경련하는 음부 틈새로 들어왔다.

들어갈 곳을 가늠하듯 얕게, 때론 깊게 들어온 것이 어느 순간 쿡, 하고 예민한 질벽을 찔렀다.

“하으…….”

내내 경련한 까닭에 내벽이 부푼 생선살처럼 말랑거리고, 눅진했다. 거대하게 곧추 선 검붉은 성기가 애액을 꿀렁꿀렁 토해내는 질구에 맞붙었다. 그가 주는 감각을 알고 있는 몸이 바르륵 떨리는 것이 참을 수 없이 흥분을 고조시켰다.

“처, 천천히…… 천천히요…….”

연이 애원하듯 말하자 산군은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맞췄다.

“지난 날엔 거칠게 쑤셔박아달라, 더 세게 넣어달라 요구하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하루 종일 음부에 제 것을 물려놓겠노라 협박한 통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연이 입술을 사려 물며 그를 흘겼다.

“낭군의 것은 너무 크고, 뜨거워서 급히 들어오시면 온종일 허리가 저립…… 아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두가 좁은 틈을 비집고 난폭하게 들어왔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금의 여유가 있던 눈이 거멓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해달라고, 흐윽, 청하였…… 아아!”

탓하는 말에 산군이 사납게 웃었다.

“하면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시지요. 내가 미쳐버리잖아. 응?”

푹! 푹! 정신 없이 몰아붙여오는 뜨겁고 거대한 것에 연은 거의 혼절할 듯하였다. 장짓문 밖에 종들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날카롭게 교성을 지르며, 난폭한 기둥을 푹 젖은 음부로 꽉 끌어안았다.

산군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반쯤 일으켰다. 단숨에 그의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된 연이 헐떡이는 와중에 고개를 내저었으나, 그는 더 깊게 성기를 찔러넣었다.

“아으윽—! 하앙, 앙!”

뭉툭한 귀두가 자궁에까지 닿을 만치 깊고, 깊게 삽입되었으나 음부는 벌름거리며 성기를 남기없이 삼켰다. 색사에 몰두한 각시가 평소의 점잖음을 잊고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산군의 것은 더더욱 몸피를 불렸다. 여기서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격렬한 쾌감이 전신을 내달리고, 연과 산군은 정신 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여린 점막이 서로에 의해 뭉개지고, 혀가 거칠게 얽혀 타액이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으나, 산군은 목을 타고 흘러내린 그녀의 타액 한 방울조차 모조리 훑어마셨다.

엉겨있던 음부 내의 주름이 밀려올라갔다가 그의 성기를 따라 다시 쭉 미끌어지기 무섭게 허리부터 머리까지 번갯불 같은 감각이 내달렸다.

“아아앙!”

날카롭게 신음하며 허리를 비튼 연이 이윽고 덜덜, 신음했다. 애액과는 다른 맑은 것이 낭군의 성기를 타고 와르르 쏟아지기 무섭게 뜨거운 정액이 몸 안으로 쏟아졌다.

거무죽죽하던 마른 가지에 색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살구꽃이 만발했다. 칼바람이 유순해지고, 한파에 얼어붙은 땅 위로 자름자름한 몽우리가 피어오르는 오후, 바야흐로 봄이었다.

목멱산 복사꽃 만발하니 걸음마다 화순이 분분하여라.

산중호걸 품에 꽃물은 뉘 들였을꼬.

아이들이 한데 뭉쳐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이 장지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색사 후 산군의 품에서 나른히 늘어져 있던 연은 맑은 풍경 소리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연이 목멱에서 머문 지 오 년. 산군은 그녀가 오가기 편하도록 어귀의 삿된 영을 정화하고, 발 닿는 곳마다 유채꽃이니 진달래니 하는 것들을 잔뜩 피워놓아서, 어린 것들은 해 밝을 적엔 잔뜩 뛰어다니다가 노을 질 즈음 반찬거리를 끌어안고 하산했다.

산군의 종들은 산군이 애면글면한 까닭에 인간들이 덕을 본다고 투덜거렸으나 갓 태어난 것들이 깔깔대는 소리는 듣기에 퍽 나쁘지 않았다.

연도 산기슭에서 들리는 어린애 웃음소리를 기껍게 여겼다. 나라 안팎으로 가뭄에 허덕이는 터라 목멱을 십 리만 벗어나면 하나같이 앙상하게 말라 신음하니, 산군의 터에서나마 배부르게 먹기를 바랐던 것이다.

산군은 그의 품 안에서 무심결에 고물거리는 각시의 머리칼을 넘기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것들을 물리겠습니다. 각시께선 편히 쉬십시오.”

“아닙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듣기에 좋습니다.”

“그러십니까.”

“예. 이 다음에 아이들이 오면 감자를 나누어주려고…… 아, 그렇지.”

연이 부랴부랴 몸을 일으키자 흡족하게 미소짓고 있던 산군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쉬시지 않고요.”

“창고에 보존해놓은 감자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파종하여야 배곯은 아이가 오면 나누어 줄 수 있을 테지요.”

“인간에게 각시의 염려는 과분합니다.”

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산군을 바라보았다.

“또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시고…….”

“저를 다정하다 하시는 것은 각시께서 유일합니다. 천지가 저를 냉골 같은 괴귀라 이르지 않습니까.”

“하면 더 다정하다 말씀드리고, 선하다 등을 쓰다듬어야겠습니다.”

“어째서요?”

“낭군의 다정함과 선함을 각시만 알고 있으니, 세상천지에 자랑하여야지요.”

연이 눈을 나붓이 접으며 속삭이자 산군은 도무지 참지 못하고 힘주어 각시를 끌어안았다.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었다. 안방 마님께오선 목멱에서 지낸 지난 오 년간 세상사에 통달한 것이 틀림없다. 만인지상 영물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호령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백 년 묵은 호랑이를 이리도 속절없이 뒤흔들 순 없을 터였다.

“각시님 눈앞에 팔도의 꽃을 모두 대령할 수 없으니 올해는 필히 청유를 떠나야겠습니다.”

“예, 성이가 과거 준비로 내내 고생하였으니 청유로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좋겠지요.”

“각시님께서 좋아하시는 수과도 함께 가져가지요. 올해는 날이 선선해 달게 익을 듯합니다.”

“수과를 구할 수 있습니까? 성이가 좋아하겠네요.”

“여름에 청화가 피면 곱게 말려 향주머니를 만들어 갑시다. 여독을 풀어줄 겁니다.”

“작년엔 청화 덕에 성이가 쉬이 여름을 넘겼답니다.”

산군은 미소 지은 채 이를 악물었다.

그놈의 성이.

종들이 서당도령이라 칭하는 성은 목멱산 영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점잖고 의젓한 어린 도령은 해가 갈수록 뼈가 여물고, 얼굴이 피었다.

육 척 장신에 널따란 어깨, 춘풍 같은 미소는 다 자란 처녀애들마저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천하일색에 빙기올골이로다.’

‘청풍명월이 감히 뽐내지 아니하고 고개를 숙일 미장부로구나.’

영물들이 성이 기거하는 서당 뒤편에서 바위를 걸상삼아 탄성을 흘리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연과 우애는 얼마나 좋은지, 산군이 조금만 제 누이를 심난케 해도 서당에 데려가 문을 잠그고 누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한손에 움켜쥐어 목을 뚝 부러뜨리고 싶지만, 사모하는 각시께서 제 아우의 곁을 따를까 두려워 상상으로만 끝내는 처지였다.

재작년 소과에 합격한 성이 달포 전 대과를 보기 위해 목멱을 떠났다. 그 후에야 연은 산군을 돌아볼 짬이 났다. 성을 위해 직접 키운 온갖 채소가 산군의 밥상에 오르고, 오후엔 다리에 뉘여 귀 속을 살펴주시니 다디단 한때였다.

“각시.”

산군이 연을 다정히 부르며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쓰다듬으던 찰나.

“마님! 마님!”

장짓문 밖에서 백사가 헐레벌떡 목청을 높였다.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리자 “청마가 옵니다!” 하는 반가운 소리가 뒤어이 터져나왔다.

성을 과거장까지 안전히 실어보내기 위해 산군이 직접 상제의 창고에서 강탈해온 청마!

소식을 들은 연이 헐레벌떡 뛰쳐나갔고, 홀로 남은 산군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멀리서 청마(靑馬) 위에 걸터앉은 귀향객이 보였다. 객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인영이 분간 갈 즈음, 그가 눌러쓴 것을 확인한 까투리가 대번에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이고, 복두(幞頭)네. 복두야. 어사활세!”

과거 급제자의 복두(幞頭), 복두 아래 늘어진 것은 분명 복사꽃이렷다.

“서당 도련님께서 장원 급제하였네!”

와—!

기척 없이 문간을 에워싸고 있던 영물들이 일시에 함성을 내지르자 작은 목멱이 떠나갈 듯하였다.

까투리는 한달음에 달려갔고, 백사가 그 뒤를 쫓아가 말에게 눈을 흘기며 허리춤에 늘어진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왜 이리 늦어. 또 도련님을 꾀어내 흉물스런 곳에 기웃거린 거 아냐?”“청마, 너 참말이야?”

까투리와 산서마저 눈을 부라리자 말이 억울하다는 듯 주둥이를 쩍 벌리고 소리 높여 울었다.

말에서 내린 성이 빙긋이 웃곤 고개를 저었다.

“홍패를 받자마자 바삐 출발하였습니다. 쉬이 왔으니 백사 님께선 염려치 마십시오.”

연과 성 남매가 목멱에 오고 사계절이 댓 번을 지났다. 어질고 선한 남매는 부리는 자들에게조차 영물의 대우를 잊지 않았다.

특히 성을 근지에서 모신 연의 여종들은 의젓하게 장성한 성을 보며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황우임조차 답지 않게 저고리 매듭을 눈물에 적셨다.

영물들 사이로 나붓한 발소리가 들렸다. 눈물 바람으로 성의 양옆을 꿰어찼던 여종들이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물리자 성의 입가에 다정한 호선이 드리웠다.

“누이.”

청마에서 내린 성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연은 아우의 손을 잡지 못하고 흐느끼자 성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으며 어느 순간부터 한 뼘은 작아진 누이를 끌어안았다.

“좋은 날 어찌 눈물을 보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께서 보셨으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고마워. 고맙다, 성아.”

눈물을 보이는 누이에게 핀잔을 준 주제의 성의 눈가 역시 젖어들었다.

“저는 누이의 자랑이 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런 말 마. 어머니께서 서운해하신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윤 참판의 가노로 살며 도련님들 뒤에서 천자문을 훔쳐보고, 흙바닥에 논어를 쓰다 걸려 얻어맞고, 사계절을 쉼 없이 흘려보내며 학문에 매진한 것은 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뿐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 대신, 어린 연이 그의 부모가 되어주었다. 함께 언문을 뗀 동년배의 몸종으로 살며 숱한 구박을 받으며 사대부의 명예마저 잊었노라 자살을 강요당할 때마저 자신을 위해 그저 감내했다.

젖동냥을 위해 삯으로 나온 보리밥을 모두 동래어멈에게 바치고, 허구한 날 굶으면서 저는 아씨 곁에서 많이 먹었으니 너는 개의치 말고 먹으라며 등을 두드렸고, 저 자신은 우물물로 허기를 달랬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아서, 이제껏 표현조차 못했다. 그런 아우를 위해 한평생 희생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이 먼저인 바보 같은 누이.

영물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짓는 남매를 보며 감격하여 훌쩍였다.

그때, 대청에서부터 걸어나온 산군이 연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말했다.

“처남이 허기겠습니다. 재회의 정은 이만 나누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내 정신 좀 봐.”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낸 연이 활짝 웃으며 성을 올려다보았다.

“배고프지? 가서 기다리렴. 너 좋아하는 신선로를 내가마. 응?”

“저는 찬밥에 김치가 최곱니다.”

“너도 참.”

연과 성이 두 손을 꼭 잡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종들도 각자 할 일을 찾아 부리나케 문 앞을 떠났고, 자리에 남은 산군의 표정은 매우 흡족하였다. 무랑이 그에게 따라붙으며 빙그레 입꼬리를 늘렸다.

“서당도령이 참으로 기특합니다.”

“그렇지. 기특하지.”

“남매의 우애가 보기 좋습니다.”

웃음기 어린 말에 산군은 턱을 느른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급제, 그것도 장원이니 곧 매파가 줄을 서겠군.”

“예?”

무랑이 얼빠진 얼굴로 산군을 쳐다보자 다른 호위인 장탁이 한숨을 삼켰다. 남 일엔 모래 한 줌만큼도 관심 없는 호랑이가 제 각시와 처남의 우애라고 기쁠 리가 만무했다. 그가 기다렸던 건 처남의 급제뿐이었으리라.

정확히 말하면 급제하여 제 가정을 꾸리는 게 되는 것.

애초에 저 욕심 많은 호랑이가 각시의 관심와 애정을 처남과 나눈 것부터 기이한 일이었다. 단지 성이 혼인하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니 참아주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산어귀에 길을 놓아라. 매파가 각시를 쉬이 찾아오도록.”

무랑이 “예…….”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굽혔다.

연은 오전부터 줄을 이루는 매파 행렬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낮게는 진사댁 처자부터 높게는 우찬성 대감 댁의 고명딸까지. 봇짐에서 처자들의 사주를 적은 단자가 줄줄이 나왔다.

“오정문 대감 댁 손녀랍니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오 대감이 애지중지 기르셨지요. 어찌나 참한지 한성에서 오 대감댁 혜아 아씨라면 모르는 이가 없지요.”

“그만하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하면 역시 좌찬성 대감댁 아씨가…….”

“이리 훌륭한 처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지. 다만, 우리 성이가 처자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네. 나이가 어려 각시 살피는 법도 모를 테지.”

“어리기는요. 지학(십오세)이면 혼인하는 처녀 총각들이 수두룩합니다. 도령께선 장차 나랏님을 도와 큰일을 하실 텐데 언제까지 누이의 도움을 얻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연이 갈등하는 얼굴로 손등을 쓰다듬자 매패가 야살궂게 웃었다.

“장성한 아우를 끼고 사는 선 마님께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남들이 얼마나 흉을 보겠습—”

“어디서 감히 입을 함부로 놀려!”

백사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몸의 윤곽을 따라 흑랑이 뻗어 나왔다. 기이한 것이 등허리서부터 어깨를 따라 흘러 머리를 감자 혼절할 듯 놀란 매파가 “에구머니!” 소리치며 앉은방아를 찧었다.

“백사 님.”

연이 그녀를 점잖게 부르자 흠칫한 백사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마님.”

매파는 새하얗게 질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요— 요물……!”

“찬물이 필요하겠군. 강하류에서 냉수라도 마시게. 내 집에서 내어줄 건 없겠네.”

점잖은 축객령이 이어졌다. 까투리는 매파를 향해 흥, 콧방귀를 뀌며 문을 힘껏 열었고, 매파가 허둥지둥 안채를 나섰다.

그런 후에야 오전부터 이어진 매파 행렬이 끊어졌다.

서안에 널부러진 사주 단자를 함에 잘 넣어 보관하던 연이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군과 성이 함께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는지 두 남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연은 그 광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윽고 그녀를 발견한 산군이 창문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유심히 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러자 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닌 게 아닌 모양인데요. 그 봉투들은 다 뭡니까, 누이?”

“사주 단자다.”

“사주 단자요? 오늘 왔다던 사람들이 매파였습니까?”

미간을 좁힌 성이 방 안 벽가에 도열해있던 종들을 향해 명했다.

“치워주십시오.”

“무슨. 네 짝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저는 아직 누이와 살고 싶습니다.”

“너도 참…….”

항시 의젓한 아이가 시무룩해져서는 어리광을 부리듯 말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못내 사랑스럽기도 했다. 자식 대하는 마음으로 기른 동생은 이렇듯 언제나 부모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다.

하지만 매파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성이 급제하고 가장 큰 고민이 그것이었다. 산군의 처인 자신이 민가로 내려가 사람들과 섞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성이만 보내기엔 걱정스러운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홀로 지낼 때의 외로움을 어린 아우가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보다 더 큰 고민은 매파의 말마따나 성의 뒤를 봐줄 집안 어른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윤씨 집 가노로 산 날이 사대부 집안 여식으로 산 날보다 길다고 해서 연이 세상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성이의 출세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지지해주거나 혜안을 빌려줄 어른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다. 학문을 닦으며 세운 뜻을 펼치긴커녕, 자리부지 하는 것으로 안심해야 할 때가 올 터였다.

그때가서 성이가 오늘의 어리광을 후회할까봐, 말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할까봐 두려웠다.

“생각해보렴. 혼인한다고 해서 누이와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지 않니.”

“……예.”

누이의 말에 대꾸하는 법이 없는 아우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연이 다과거리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창문을 통해 부엌으로 향하는 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성이 산군에게 물었다.

“매형의 뜻입니까.”

제 누이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각시의 뜻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인간이 산군의 허가 없이 목멱을 드나들 수 있을 리가요. 길을 놓으신 모양입니다.”

산군이 빙그레 웃으며 성을 바라보았다.

“모를 말을 하는군.”

“과거에도 급제했겠다, 이제 다시 신혼을 보내고 싶으십니까.”

“의미를 모르겠으나 신혼이라면 언제나 간절하지.”

“제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훌륭한 데다 다정하기까지 한 매형을 보았습니다.”

빈정거리는 말에 산군은 “내 처남복만 하겠나.”하며 여상히 대꾸했다.

사내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히 부딪쳤다.

‘음흉한 놈.’

‘음험한 녀석.’

연의 생각과는 다르게 성이 수양한 것은 학문만이 아니었다. 음흉한 계략으로 번번이 누이와의 시간을 빼앗는 매형의 밑에서 억울함을 학습하고, 계략을 배웠다.

연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꽤나 잘 맞는 관계였지만, 아쉽게도 그들 사이엔 한나절이라도 빼앗길 수 없는 각시와 누이가 존재했다.

연만이 오늘도 두 사람 사이가 참으로 좋구나,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연은 산군의 무릎 위에서 민망한 얼굴로 몸을 바르작거렸다.

“아직도 이 자리가 어색하십니까.”

낮은 웃음소리가 달콤하게 귀 안으로 넘어왔다. 연이 얼굴을 붉히며 “대관절 어느 각시가 낭군의 무릎이 익숙하겠습니까.” 하며 웅얼거렸다. 그러며 무릎을 벗어나려 하니,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낭군의 즐거움을 빼앗지 마십시오.”

“무겁지도 않으십니까.”

“너무나 가벼워 날아갈까 염려됩니다.”

“민망한 말씀을 어찌 그리 잘하십니까…….”

처음 그와 배를 맞추고, 그의 품에서 아침을 맞이할 땐 그저 이 남자의 변덕으로 제가 호강하는구나 여겼을 뿐이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해, 두 해, 기어이 다섯 해를 넘길 때까지 변덕이 이어지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아직도 제가 그리 어여쁘세요?

그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놀랍게도.

“나는 각시처럼 어여쁜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듣고 싶은 말이 돌아온다.

연은 쿡쿡 웃곤, 제 손을 어루 만지는 산군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어디가 그리 예쁘십니까. 저는 낭군에 비해 보잘 것이 없는데요. 좋은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까지 있는 몸이라지 않습니까. 낭낭군처럼 아름답지도 않고요.”

“좋은 친정은 제게 필요치 않고, 각시께서 아우를 혹으로 여기지 않으시니 혹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름다우십니다.”

“마지막 말씀은 거짓이 분명합니다.”

산군의 시선이 짙어졌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는다. 그는 곧이라도 맞붙을 것처럼 입술의 지척에서 맴돌았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것이 애가 타 목구멍으로 마른 숨이 넘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각시를 원할 리 없지요.”

낮고도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의 솜털에 닿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귓바퀴에 젖은 혀가 닿았다. 유영하듯 미끌어진 혀가 곧 귓불에 닿았다. 귓불을 지분거리는 질척한 소음에 아랫배가 조여든다.

“아…….”

“아우가 떠나는 것이 아쉬우십니까.”

“성이에게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집안의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니 성이 앞날은 황무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고생길이 훤한 아우를 두고 홀로 행복하니 죄스럽습니다. 성이에게 해줄 일이 없는 제가 미련합니다.”

산군은 연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고 떨어졌다. 다정한 눈길이 얼굴 곳곳에 닿았다. 짙은 시선에 연은 어색한 얼굴로 눈을 접었다.

“각시께서 행복한 것이 어찌 죄입니까.”

연의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를 놓아준 산군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했다.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각시를 향해 산군은 손을 뻗었다. 윤 참판의 가노로 살며 얻은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눈가를 지나, 모친을 지나치게 닮은 코를 지나, 성의 뒷바라지를 하며 거슬거슬해진 입가를 지나 그녀의 쇄골에 닿았다.

“저는 각시의 손톱 밑 거스러미에도 가슴이 에입니다. 각시만이 제 삶의 기쁨이고 고통이며, 슬픔이고 즐거움이온데 어찌 각시께서 제게 이토록 귀한 당신께 마음을 주지 않으십니까. 어찌 희생을 당연히 여기십니까.”

“…….”

검은 침묵이 호롱 주변을 감싸고, 창 밖에서 오롯이 빛나는 별이 아스라이 흩날리는 밤. 흔들림 없는 낭군의 시선 속에서 연은 풍랑은 맞은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산군은 빙긋이 웃곤 손끝으로 연의 눈가를 문질렀다.

“영물의 왕을 치맛폭에 감싸셨으면 단지 행복하기만 하셔야 합니다. 더 큰 것을 바라시고, 희생 같은 것은 멀리 하십시오.”

“제가 그리 사치스럽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고작 인간의 왕을 치맛폭에 감싼 달기가 천하를 호령하고 주지육림을 즐기지 않았습니까.”

장난스러운 말에 그녀는 졌다는 듯 실소를 흘렸고, 곧이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가 해온 일들과 앞으로 할 일을 희생이라 여긴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작은 고생도 희생으로 여기며 저 힘든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민하십니다.”

산군이 저를 보며 달콤하게 미소짓는 연의 뺨에 몇 번이고 입맞췄다.

성과 연 남매는 함께 호숫가를 거닐었다. 산군의 목멱엔 언제나 달콤한 바람이 불고, 거니는 곳마다 오색찬란한 꽃이 만개했으며, 호숫가에는 민가에서는 볼 수 없는 갖가지 귀한 영물들이 존재하여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호수 위로 펄쩍 뛰어오른 팔뚝만한 인어를 본 연이 희미하게 웃자 성 또한 따라 미소지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내가 어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니?”

“조금요.”

음, 하고 작게 침음한 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고.” 하며 돌아오는 대답에 성이 물었다.

“까닭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천하를 호령하고, 주지육림을 펼쳐도 된다는 낭군이 계시니까.”

“달기가 되고 싶으십니까?”

군자의 도를 익힌 성이 일순 미간을 좁혔다. 연은 쿡쿡 웃으며 동생을 돌아보곤 “싫으니?” 되물었고, 잠시 고민하던 성은 진중한 투로 대답했다.

“누이의 원은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말리지는 않고? 군자의 도리가 아닌 듯한데.”

“제게는 누이의 기쁨이 제일입니다.”

연이 드물게 소리내서 웃자 뒤를 따르던 여종들이 눈을 꿈뻑였다. 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연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매형, 처남 간에 어쩜 이리 닮았는지. 내가 대단한 낭군과 아우를 가졌구나.”

“누이…….”

놀리는 듯한 말에 성이 골내듯 그녀를 불렀다. 연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혼례는 네 뜻대로 해라.”

성의 얼굴이 밝아지기 무섭게 연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곤 조건을 덧붙였다.

“단, 내달부터 목멱을 떠나 민가에서 지내렴. 얼마간 황우임을 붙여줄 테니, 살림을 도울 인간 종들을 구하고.”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구를 만들어. 누이의 도움 없이 네 삶이 이루어져야 해.”

성의 시선에 담긴 감정이 조용히 휘몰아쳤다. 처음엔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이 제 누이를 빤히 보다가, 농이 아니라는 말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했다. 찰나간 이제 저는 필요치 않다는 의미인가 싶어 배신감에 파르르 떨기도 하였지만, 속 깊은 누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저 없이 매형과 다투실 땐 어찌하실 겁니까. 서당을 찾아도 위로해줄 아우가 없지 않습니까…….”

“하면 네게 서신을 쓰마. 낭군을 잔뜩 흉볼 테니, 맞장구를 쳐줘.”

“밀감 껍질은 누가 벗겨드립니까. 잘 못하시잖아요…….”

“낭군께 부탁드리마.”

연은 울먹이는 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구나.’

연이 온 정성을 성에게 쏟았던 만큼, 성도 필사적으로 의젓하려 애썼던 것이다.

홀로 죽을 힘을 다해 발돋움해왔을 아우를 끌어안은 연이 다정히 그를 얼렀다.

“다시는 너를 돕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 더는 네게 정성을 쏟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야.”

“…….”

“나는 너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쳤지만, 홀로서는 법만은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희생이 너의 눈의 가리고, 너의 귀를 막아 단둘이 바다를 표류케 하였던 것이다.”

“표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세상이 누이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민가에 나가 다른 세상을 배우렴. 너는 이제 출사하였고, 나는 이곳에 새로운 가정을 꾸렸단다. 서로 이르고자 하는 곳이 다르니, 이제 네게 홀로 걷는 법을 가르쳐주마.”

한동안 침묵하던 성이 훌쩍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서운하니?”

“……누이의 말은 언제나 옳습니다. 이번에도 가르쳐주시는 대로 잘 배워 홀로 걷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연과 성이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조용히 뒤따르던 까투리와 산서는 감격하여 훌쩍훌쩍 울어 백사에게 주책이라며 핀잔을 들었지만, 백사 또한 둘 모르게 코물을 흡, 흡, 들이켰다.

연의 결단이 욕심 많은 호랑이를 기껍게 하였음은 두 말할 게 없었다. 그는 각시가 청하기도 전에 냉큼 창고 열쇠를 내어주곤 처남에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구해주라며 미소지었다. 집과 가재 도구, 사람 종을 구하기 위해 목멱을 떠난 행렬에 무랑과 장탁을 호위로 붙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속이 얼마나 유쾌하였는지 알 법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연은 쉬이 집을 결정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달까지 성이를 민가로 보내는 것은 어렵겠어요.”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습니까?”

산군이 채근하려는 마음을 숨기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하필이면 우참찬 대감께서 주인이시라…….”

“하면 구매하셔야지요.”

“사주 단자를 보내온 처녀 중에 우참찬 대감의 여식이 있습니다. 소중한 여식을 거절하여 마음이 상하신 듯합니다.”

산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으나, 각시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머리 샌 늙은이들은 고집만 늘어서 이따금 이렇듯 다른 문제로까지 얽어서 귀찮게 만들 때가 있었다.

조정의 고관들이 성에게 딸자식의 처녀단자를 보낸 것은 성이 창창한 장원 급제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누이인 연이 산군의 각시라는 것을 알고 자식을 엮어 줄을 대보려는 속셈이 틀림없다.

산군은 좋은 말로 각시를 달랬다.

“우참찬 쯤 되는 인간의 속이 그리 좁지는 않을 겁니다. 사정이 있어 팔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럴까요?”

“예.”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 우참찬이 직접 목멱에 올라와 꼭 좀 집을 구매해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연은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끔뻑였는데, 구매만 해준다면 한 냥도 후하다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마음에 꼭 들던 집이라 잘 되었다고 여기며 시세의 반절로 집을 사들였다.

집문서를 바치고 부리나케 떠나는 우참찬을 보며 성이 산군에게 물었다.

“우참찬 댁 노비이라도 물어죽이셨습니까.”

“아니.”

“하면요?”

“인간 임금에게 우참찬의 집이 아니면 네 놈의 집을 가져야겠노라 말하였을 뿐이지.”

“…….”

성은 금쪽같은 각시를 위해서 궁궐마저 빼앗겠다는 대단하신 영물의 왕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이의 걱정과 달리 제 출사길이 고생길이 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산군과 함께 있는 자신을 보는 우참찬의 눈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곧 목멱을 떠나니 아쉬울 테군.”

산군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성 또한 그와 마주 웃었다.

“자주 누이를 뵈러 올 겁니다. 또, 이제 제가 이곳을 떠나도 안심할 수 있을 듯하여.”

제 누이를 흘끔 보다 저를 향해 비릿하게 웃는 성을 보며 산군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알지 못했다. 성이 안심하고 목멱을 떠날 수 있는 이유를.

연과 자신을 반반씩 닮은 교활한 사내애가 산군의 삶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여덟 달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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