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六 章 - 變數(변수)
늦은 밤, 깊이 잠든 어린 것을 몇 번이나 돌아보고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수혈을 눌러놓은 뒤에야 홀로 다락에 찾아든 사내는 제 손에 들어온 몇 장의 암호문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은 흰색, 다음은 담황색, 그리고 적색과 녹색, 흑색의 차례로 그 위에 새겨진 점과 선을 확인한 다음, 다시 흰색과 황색을 겹쳐 곁에 놓아둔 호롱 불빛에 비쳐 새로이 만들어진 점과 선을 살폈다. 색이 짙어 비쳐도 겹친 흔적을 확인할 길이 없는 적색과 녹색, 흑색은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고 그 네 귀퉁이 중 하나에 불씨를 놓는 것으로 숨겨진 내용을 확인했다. 이리저리 오그라지며 타들어가던 세 개의 종이쪽은 몇 자 되지 않는 글자 모양의 재를 만들어내나 싶더니 그나마도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야말로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글귀이니 모르는 이가 보면 사내가 늦은 밤 색종이며 호롱불을 가지고 홀로 장난을 하는 것이려니 할 만큼 기괴하고도 쓸데없는 행위더라.
허나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저에게 전해진 수많은 보고들을 파악한 사내의 낯은 더도 말고 복잡하게 굳어든다. 이는 지금 확인한 내용들이 저가 예상한 이상으로 깊은 곳까지 닿아있음을 알아차린 탓이다.
“…거 참….”
무어가 어찌하면 이리 되누.
덕분에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튀려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일의 흐름이 절로 탄식을 자아낸다. 참말 무어가 어찌하면 이리로 튀나. 사내는 답지 않게 난처한 낯으로 제 오른쪽 눈썹 한끝을 긁적이더니 곧 짧고 가느다란 모양의 붓을 들었다. 보통은 수화(手話)나 전음을 이용해 지붕 아래 자리한 이에게 한두 마디 남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번엔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듯하였다.
내 수혈까지 짚어두고 오기를 참으로 잘했구나.
어른어른 가볍게 흔들리는 등불 아래 붓을 움직이고 있던 사내는 그리 생각하며 작게 혀를 찼다.
―찌르르… 찌르르…
때마침 원향전 들어오는 길목 풀숲에 자리를 튼 풀벌레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울기 시작하니 그 소리가 참으로 처량 맞더라.
여름을 지나 가을 언저리에 자리 잡은 어느 그믐밤, 원향전 다락의 풍경은 그러하였다.
* * *
“청아.”
“예, 마마.”
“나 등목 좀 해주어.”
“…송구하오나 그는 아니 되어요.”
“왜?! 어찌하여서?!”
“오늘은 벌써 두 번이나 등목 하시었잖아요. 아무리 날이 더워도 자꾸 그리 찬 기운을 뒤집어쓰시다 보면 고뿔드시어요.”
그러면 쓴 탕약도 잔뜩 드시고 솜이불도 가져다 덮으셔야 한답니다.
“우이이….”
“대신에 좀 있다 빙고(氷庫)에서 얻어온 얼음 담뿍 넣어 달고 맛난 냉차 만들어다 드릴게요. 조금만 참으시어요, 네?”
“더운데에….”
더워어어!!
아이코, 우리 마마 목청 한번 장하시네.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무얼 해먹어야 하나.
청은 이제 제법 익숙해진 상전의 생떼를 건성으로 넘기며 세답방 나인이 가져다 놓은 상전 옷가지를 버들고리 안에 차곡차곡 개켜 넣었다. 이미 저가 개켜 챙긴 세모시 포삼(道衫, 중국 의복. 전신을 감싸는 긴 겉옷.)이며 순면 고의 등 소소한 옷가지들이 커다란 버들고리 둘을 꽉 채웠지만 아직 개키고 챙겨야 할 것들은 한참이나 더 남아있다. 허나 놀라지 마시라. 이 많은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데는 채 사흘이 걸리지 않는다. 입추(立秋)를 지나기 무섭게 덜컥 찾아든 늦더위 탓이었다.
“에이!”
“마, 마마?!”
그러시면 아니 되어요!
…게다가 지금처럼 상전이 더 이상 더위를 참지 못하고 입고 있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기라도 하면 그 사흘이 이틀로 줄어든다. 덕분에 얼마 전부터는 침방도 모자라 세답방 나인들마저 사나운 낯으로 저를 맞이하니 그 시선이 어찌나 칼날 같던지 늦더위 속에서도 오한이 들 지경이더라.
“더워!!”
물론 해맑기가 저잣거리 뛰노는 어린 것보다 더한 제 상전이 그런 사정 알아줄 리 없다. 지금도 보아라. 청이 동동거리거나 말거나 치렁하게 감기는 겉옷은 진작 전각 앞 돌바닥에 내팽개치고 대청마루 한가운데 큰대자로 떡하니 드러누우셨다. 본격적으로 생떼를 부리시는 게다. 게다가 몹쓸 독기 빠져나가며 뒤늦게 쑥쑥 자란 풍신이 참으로 헌헌하시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대청마루가 꽉 찬다. 어이쿠, 이를 어쩌나.
“아이참, 어찌 또 이리 뿔난 망아지처럼 구시어요? 네?”
“내 덥다 하지 않았어! 너무 더워 등목 좀 해 달라 하지 않았어! 헌데 청이는 자꾸 안 된다고만 하고…, 냉차 해준다더니 해주지도 않고….”
청이 너야말로 나한테 어찌 이럴 수 있어?
게다가 참다못해 타박 한 번 흘렸더니 단박에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이거 참 기가 막히다. 진짜 복장이 엎어지고 뒤집어질 사람은 따로 있건만 풍신만 헌헌해지신 상전께서는 그저 홀로 서러워 생떼가 장하시다.
아이코, 참말 이를 어찌하나.
청은 지끈거리기 시작한 양 관자놀이를 가만히 손끝으로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지난 며칠 내내 날씨가 유별난 탓에 좋아하는 것이며 하고 싶은 것 하나 못하고 지내는 것이 불안하다 싶더니 아주 오늘 날을 잡으신 모양이다. 그저 나오느니 한숨이더라.
청이 그리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황자님 투정은 더욱 위세를 떨치는 중이다. 어느새 장부의 풍채가 무색하게도 팩하니 저를 등지고 돌아누워 토라진 티를 팍팍 풍기고 계시는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참말, 참말로 겪을수록 한숨만 나오는 상전이시라.
허나 어쩌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저에게는 하나뿐인 귀한 분이 아니던가. 당장이라도 탁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킨 청은 무릎걸음으로 대청마루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한 제 주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러 더욱 간절한 어조로 입을 뗐다.
“마마.”
다행히 겨우 그것만으로도 눈앞에 자리한 떡 벌어진 등판이 한 번 크게 요동을 친다. 예전에 저가 처음 이 전각에 들었을 무렵처럼 마냥 생떼를 부리나 했더니 그게 아니다. 그래도 제법 청의 눈치도 보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그래도 금시 끝날 모양이네.
그제야 깊은 안도를 담아 짧은 한숨을 흘린 청은 좀 전까지 펄떡인 덕에 제법 뜨끈하게 달아오른 몸 가만히 다독이며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암만 그래도 이리 계시면 안 되어요. 차가운 곳에 이리 계시다 입이 돌아가면 어쩌시려고요.”
“―으응? 무엇이 돌아가?”
아니, 살살 꾀기 시작했다.
“요기 요 입 말이어요, 입.”
“히익?!”
“그뿐이 아니어요. 찬 기운이 잘못 들면 눈, 코, 입이 제멋대로 돌아가기도 한답니다.”
“…참말로?”
“예, 참말이어요. 허니 얼른 일어나시어요, 얼른.”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전히 해맑은 영혼의 황자님이시다. 게다가 좀 허풍이 더해져서 그렇지 아주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지라 청의 낯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된 빛을 그득 담고 있더라. 그에 마주하고 있던 새카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는가 싶더니 곧 대청마루에 딱 들러붙은 것 같던 몸이 굼실굼실 움직이기 시작한다. 헌헌장부의 몸이 어울리지도 않는 굼벵이 흉내를 내니 그 모양새 참으로 우습더라. 하여 청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한참이나 애를 먹었더랬다. 기껏 꾀어놨는데 겨우 웃음 한 자락으로 산통을 깰 수는 없지 않은가?
“참말로 이리하면 입이 돌아가는 것이야?”
“참말이래도요.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어요.
청은 부러 진지한 낯을 하고는 저가 어릴 적 보았던 그 얼굴을 흉내 냈다. 늦은 밤 취중에 돌바닥 위에서 잠들었다 이목구비가 이리저리 돌아간 통에 며칠이나 물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애를 먹었던 향화루 청지기의 얼굴을 말이다.
“힉…!”
그래 봤자 흉내일 뿐이라 저가 아는 그 얼굴 반의반도 따라가지 못할 모양새였지만 황자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나보다. 반만 일어나 있던 몸이 대번에 반듯해지나 싶더니 그 새카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데굴데굴. 얼핏 봐도 꽤나 놀란 모양새다. 아아, 이만하면 더 괴롭힐 것도 없다. 사실 여기서 더 겁을 줬다가는 오늘 밤 잠자리가 작히 고단할 것이라. 어쩌면 일전에 문사가 서역의 괴담이라는 것을 들려준 날 밤처럼 더운 것도 잊고 저에게 딱 들러붙어 잠을 청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청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다행히 좋은 의원님이 계셔 달포 만에 본디 있던 자리로 돌아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달포 동안 맞은 침이 한 다발에 매일 커다란 사발로 하나 가득 탕제를 마셨답니다. 설마 마마께옵서도 그리하고 싶으셔요?”
“아아아니!”
요란한 대꾸와 함께 이어진 고갯짓이 어찌나 거세던지 그 기세에 휘둘린 기다란 머리채가 마치 채찍처럼 휙휙 휘날리더라. 덕분에 그 고갯짓 멈추니 남은 것은 망나니는 물론이요 저자의 걸인도 한 수 접을 봉두난발이라. 우습고도 막막한 그 모습에 결국 청의 입술 사이로 푸스스 맥 빠진 헛웃음이 터지고 만다. 어찌하면 이리도 한결같은 분이 계실까.
“허면 다시는 이러지 마시어요. 아셨지요?”
“으으응.”
“예, 장하십니다. 참으로 장부다우셔요.”
그에 느릿하니 고갯짓하는 황자님 덥수룩한 머리 살살 고르고 다듬으며 칭찬을 늘어놓으니 손끝에 닿은 뜨끈한 온기 위로 더욱 열이 더해진다. 덕분에 또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우리 황자님, 참으로 순진하시지. 저가 무어 대단한 말을 했다고 이리 수줍어하시나.
“자, 그럼 의관정제 하시고 장부답게 멋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그러면 제가 금시 달고 맛난 냉차 만들어 오겠습니다.”
“으으응.”
여전히 불퉁한 낯을 하고도 저가 시키는 대로 꾸물꾸물 내던져 놓은 장포자락 챙겨 드는 것이 제법 대견하다. 저런 것을 보면 확실히 자라긴 자라셨구나. 몸보다 더뎌 그렇지 그 속에 담긴 것도 몸을 따라 쑥쑥 자라고 있구나. 다행이다, 참말로 다행이야.
보스스하니 흐릿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청은 더욱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대청마루 턱에 잔뜩 남아있는 이불 홑청이며 옷가지들도 잠시 잊은 채 사뿐사뿐 가벼이 걸음을 옮겼다. 저 대견한 분께 얼른 이 더위 식힐 달고 맛난 냉차 한 잔 챙겨드려야지. 뿌듯한 마음 가득 담아 그렇게 걸음을 옮겼다.
여름의 끝물, 가을의 목전.
원향전에 자리한 두 사람의 일상은 이렇듯 매일이 그저 고즈넉하더라.
때도 잊고 마냥 뜨거울 것만 같던 공기는 허나 다행히도 해거름 무렵이 되자 선선한 바람이 되어 원향전 이곳저곳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을이 목전인지라 뜨거운 햇빛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금시 서늘하게 식어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숙수간에서 보내온 석반(夕飯)에도 어제와 다르게 오리고기 완자를 넣어 만든 전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전각 뒤 고(庫)에 넣어두었던 화로를 꺼내 준비하느라 꼬박 한 다경을 헤맨 데다 먹는 내내 의욕 넘치는 상전이 화롯불에 눈독 들이는 것을 단속해야 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뜨끈한 국물과 함께한 석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청아, 나 밥.”
“으응? 배부르지 않으세요? 벌써 세 그릇이나 자셨는데….”
“괜찮아. 이것도 맛나고, 이것도 맛나서 암만 먹어도 쑥쑥 들어간다. 그러니까 한 그릇만 더 주어.”
“후후, 숙수간 숙수들에게 상이라도 내려야겠네요. 마마께서 이렇게 맛나게 드시는 걸 보면 말이어요.”
“응, 그리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맛없는 것이 하나도 없어.”
“나중에 한 번 더 해 올리라 전하겠습니다.”
“고마워 청아.”
그리고는 벙싯 웃더니 다시 밥그릇에 코를 박는다. 밥통에 남은 밥을 박박 긁어 담은 덕에 앞의 것보다 오히려 양이 많음에도 여전히 쑥쑥 줄어드는 것이 참으로 범상치 않은 먹성이더라. 몸이 자라니 들어가는 것도 늘어난 것인지 요즘은 끼니마다 밥 한 솥은 예사로 비우고 계시는 상전이시다. 그래, 저리 잘 드시니 날이 갈수록 풍신이 헌헌해지시는 게지. 조만간 우리 마마 머리꼭지가 들보에 닿겠구나.
그 씩씩한 모습을 바라보던 청은 곧 설거지나 한 듯 말끔히 비워진 밥통이며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커다란 전골냄비를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흘리고 말았다. 어이쿠, 이래서야 한 끼 정도는 쉴 요량으로 부러 넉넉히 지은 보람이 없구나. 암만해도 내일 조반은 또 불 앞에 앉아야 할 모양이네.
그럴 만했다. 소식(小食)하는 것이 귀한 자들의 덕목 중 하나라며 잊을 만하면 원향전에 들이는 조석(朝夕)의 양부터 반토막내는 궁인들의 횡포 덕에 보모에 시종 노릇도 모자라 부엌데기 식모 노릇도 겸하고 있는 청이 아니던가. 모자라는 밥이며 간단한 찬거리는 진작 저의 손으로 만들어 먹는 중이었다. 허니 빈 밥통을 보는 순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올밖에. 게다가 몹쓸 년들 일 이후로 좀 나아지나 싶던 대우는 겨울이 지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저더러는 귀하디귀한 적통 황자시니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줄 알라더니 정작 그들 스스로는 가장 홀대를 하는 작태 참으로 볼만하다. 이러니 나오는 것은 그저 한숨뿐이다.
“우움? 어찌 그런 소리를 내어?”
“아…, 찬이 모자라는 듯하여서요. 더 내어올까요?”
“아니, 되었어. 남은 것 찻물 부어 후르르 마시면 돼.”
“…시원한 것으로 내어 올게요.”
그리고는 또 벙긋 웃어 보인다. 그 웃음이 어찌나 맑고 시원스럽던지 차마 귀한 지체께서 채신없이 그리 드시면 아니 된다 하지도 못하고 부엌 옆 찬방에다 미리 우려 차게 식혀놓은 찻물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그래, 맛나게 먹는 데 채신이 무슨 소용 있을까. 뭐든 맛나게 잘 먹으면 되는 것이지. 어수선한 제 속 그리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어?”
갑자기 제 눈앞이 크게 기울어지지만 않았다면, 청은 이미 찬방 앞에 다다랐을 것이라.
“청아?”
갑자기 턱 막히는 숨통만 아니었어도 그리했을 것이라.
“색시야!”
갑자기 제 몸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만 아니었어도, 제 서방 벼락같은 부름에 답을 하였을 것이라.
“청아!”
자꾸만 아득하니 떨어져 내리는 제 정신만 아니었다면, 진작 저는 괜찮다 그리 달랬을 것이라.
두 사람만의 공간에 때아닌 격랑이 몰아치는 순간은 그러하였다.
* * *
때아닌 흉사에 발칵 뒤집어진 원향전 공기가 다시 잠잠해진 것은 눈썹달이 하늘 한가운데 걸릴 무렵이었다. 그나마도 온전히 돌아온 것이 아니라 두 시진이 넘게 제 색시 늘어진 몸 붙들고 통곡을 하던 전각의 주인이 북받치는 심사 이기지 못하고 결국 덩달아 실기(失氣)하여 무너진 탓이었다. 덕분에 지존의 밀명을 받고 원향전으로 달려와야 했던 태의(太醫)와 의녀감(醫女監)은 황자님과 환자를 사이에 두고 씨름하다 말고 한꺼번에 사내 두 명을 감당하느라 제대로 욕을 보았더랬다. 그것도 워낙 특별한 거처인 탓에 함부로 전각 안으로 드나들 이 없다 보니 어수선한 것은 사잇문 들기 전까지가 전부다. 제대로 거드는 일손 하나 없이 온전히 전각 안에 든 노년의 남녀 둘이서만 감당하였다는 소리다. 그 고달픔 어찌 말로 다 할까.
하물며 문제의 사내들 중 하나는 존귀한 피를 타고난 제국 유일의 적통 황자요, 다른 하나는 그 귀한 존재가 더없는 귀애를 쏟아 붓는 유일한 총희(寵姬)라. 누구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이들이기에 나름 황궁에서도 닳고 닳은 두 남녀는 간만에 식은땀깨나 쏟아야 했다. 또한 하나는 격한 감정에 삼켜져 숨이 오락가락하고 다른 하나는 독에 당해 숨이 오락가락하니 덕분에 진맥을 하는 태의의 손이 발발 떨리고 처방을 받아 적는 의녀감 손길은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허나 어쩌랴. 황자님께서 탈이 나면 지존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것이고, 총희의 숨이 넘어가면 황자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할 것이니 없는 정신도 닥닥 끌어모아야 할 판인 것을.
덕분에 야심한 시간 식은땀 한 됫박 쏟아가며 생고생을 하는 두 사람이다. 당장 거드는 손 없으니 몸이 고달픈 것은 당연지사요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머릿속에 망나니 칼춤이 어른대니 정신은 더욱 고된 탓이다. 다 늙어 갓 입궁했을 적에도 겪어보지 못한 생고생을 하는 두 남녀의 심사 참으로 산란하더라.
게다가 그들의 어수선한 속 뒤섞어 놓는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기…, 태의감 어르신.”
성문이 닫힐 무렵 들어와 인시(寅時)를 넘겨서야 원향전을 벗어나게 된 의녀감 손씨는 얼른 문지방을 넘는 대신 흐릿한 호롱불 하나만 어른대는 침소 안 풍경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왜 그러나?”
“이대로 두 분만 남겨두고 나가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그녀와 태의가 다 늙어 생고생을 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이 원향전이 아무나 함부로 들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곳인 탓이 아니던가. 거드는 손 하나 없이 두 늙은이서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한 것도 모두 그런 까닭에서였다. 귀한 분의 허물 아닌 허물을 감추기 위해, 유일한 적통 황자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원향전이었다. 황궁 안에 자리한 전각이라고는 믿기 힘들만치 허름하고 궁색한 규모며 외양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당연히 전각 안에 드나드는 사람도 최대한 줄이고 고르다보니 몇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그렇게 출입을 허가받은 이들도 반은 해코지에 휘말려 사라지고 남은 반은 몹쓸 것들과 손을 잡았다 지존의 진노에 남김없이 쓸려나갔다. 덕분에 어느 날부터는 황자님과 총비 단둘이서만 도란도란 어린 것들 소꿉놀이하듯 지낸다더라. 궁인들이 하릴없이 찧어대는 입방아에 따르면 그러했다.
“아무리 그래도 병자 둘만 남겨놓고 자리를 비우면….”
헌데 암만해도 그게 그냥 입방아가 아니었나보다. 지금도 보아라. 당장 사람이 죽다 살아났음에도 제대로 간병할 이 하나가 없다. 그것도 모자라 궁에서 지존 다음으로 귀한 분이 실기하여 쓰러졌음에도 깨어날 때까지 곁에서 지킬 이가 없다. 괜히 그녀가 선뜻 전각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
“끙…. 그러지 않으면 어쩔 것이오? 폐하의 명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여기에 함부로 들지 못한다는 거 잘 알지 않소.”
“어르신.”
“어쩔 수 없소. 여기 들 때도 대전 내관이 신신당부를 하지 않습디까? 당장 숨만 돌려놓고 나와야 한다고 말이오.”
난들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사실 자리를 뜨는 것이 내키지 않기는 태의도 마찬가지다. 사람 구하는 의원이 환자를 버려두고 자리를 뜨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허나 황궁에 적을 두고 있는 자에게는 의원의 양심보다 황상의 지엄하신 명이 우선인 법이다. 특히나 당금의 지존이 어떻게 보위에 올랐는지를 기억하는 이라면 말이다.
“그래도….”
“그이가 그리 나오는 걸 보면 어련히 알아서들 하지 않을까. 되었으니 얼른 나오시오. 성문 열리는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하우.”
“예….”
하여 태의 영감 채근 작히 늘어지니 결국 트릿한 대답과 함께 미적미적 원향전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의녀감이다. 그나마도 세 걸음에 한 번씩 돌아보느라 겨우 열댓 걸음 남짓 떨어진 사잇문을 넘어서는 데만 꼬박 일각을 잡아먹었더라.
“…….”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을 실기한 자의 외양은 물론이요 그 맥까지 흉내 내어야 했던 광은 그 모양 좋은 눈썹 사이에 굵은 고랑을 몇 개나 새긴 채 눈을 떴다. 언제부터 저를 황자라고 대우하였다고 저리 유난인지 원.
허나 지금 그에게 중한 것은 아랫것들 간사한 처신에 대한 역정이 아니더라. 하여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목까지 차오른 짜증 반 절 덜어내고 느릿하니 입을 뗐다.
“풍백.”
그에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부복을 하니 이는 주종이 남몰래 밀담을 나눌 수 있는 전음이라는 수단도 내버려두고 친히 말소리로 듣고자 하는 제 상전의 심술을 짐작한 탓이라.
“어찌 이리 과하게 독을 쓴 것이야?”
내 분명 가랑비에 옷깃이 젖는 것처럼 천천히 스며들게 하라 하지 않았어?
아니나 다를까 서릿발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깊은 채근을 담아 울리니 흑의인의 머리는 이제 바닥에 착 달라붙을 지경이다. 허나 사내로서는 역정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 저가 원한 것은 이렇게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이라. 무엇이든 계책에 맞추려면 그 시기가 중요한즉 처음에는 당하는 이가 지나가는 고뿔 내지는 가벼운 몸살 정도로 여기고 쉬이 넘길 만큼만 독을 쓰되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 양을 늘려 한참이 지나서야 의원을 통해 독에 당하였음을 깨닫게 하라 명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여 그를 위해 제 곁붙이가 사용하는 수저며 찻잔, 그리고 항상 챙겨다니는 바늘쌈지에다 엷게 독을 칠해둔 것이 겨우 달포 전. 그나마도 워낙 엷게 독을 쓴 탓에 지금이라면 기껏해야 살짝 몸이 무거운 것 같구나 느낄 정도여야 했다.
“대체 무슨 독을 어찌 쓰면 이리된다 하더냐? 응?”
헌데 그랬어야 할 이가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지도 못한 때 갑자기 시커먼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황궁 태의의 손이 닿았음에도 깨어나지 못하고 여직 늘어져 있으니 그저 기가 막힐밖에. 아니, 역정이 다 무어냐. 불같이 화를 내도 모자랄 것을. 그런 것을 고작 추상같은 채근 몇 마디로 갈음하려니 될 리가 있나. 결국 사내의 잇새로 사나운 소리가 짧게 터져 나온다.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아붙인 것이다. 그렇게 잠시 씨근거리던 사내는, 그러나 곧 긴 한숨으로 진탕이 나려는 속내를 다독였다. 그리고 찰나지간에 제 어수선한 머릿속을 말끔히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소상히 고하라.”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문제는 왜 또 저의 계획이 뒤틀린 것인가 하는 것이니 말이다.
“독이 겹쳤다?”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듣게 된 사정이 참 기가 막혔다. 독이 겹쳤단다. 이미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독을 쓰는 중인 이에게 또 다른 누군가가 독을 더했단다.
“그래도 어지간한 것은 한 번 걸렀을 터인데?”
“하나만 쓰면 독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미처 잡지 못했사옵니다.”
“하나만 쓰면 독이 되지 않는다?”
“예. 몇 가지 식물이 겹쳐지면 독성을 내는 것이 있사온데 그것이 하필 미리 쓰고 있던 독과 물려 크게 터졌나이다.”
“거참…, 무어 어찌하면 또 그리 되누.”
심지어 더 파고드니 겹치려고 겹친 독도 아니다. 보아하니 쓴 놈도 한번 찔러보는 심정으로 가볍게 몇 가지 던졌는데 그게 하필 미리 처방해놓은 독과 제대로 맞물려 터진 것이다. 제 입장에서야 둘도 없을 호재가 터진 것이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저의 청수련이 딱 그 짝이로구나. 그 팔자 기박한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운이 없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쯤 되면 저잣거리 걸인도 동정을 하고 남음이라.
“허면 누가 무엇을 어찌 쓴 것이더냐?”
“겉으로 드러난 것만 따지자면 쥐 떼들 중 하나의 소행이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사내는 꽤나 방만한 자세로 침상 한 모퉁이에 걸터앉아 작게 되뇌었다. 짐작에서 크게 벗어난 답은 아니었으나 굳이 겉과 속을 나누는 것이 무언가 더 나올 게 있는 듯싶었다.
“그럼 제대로 된 속은 어떻더냐?”
“북방이옵니다.”
“무어라, 북방?”
“그러하옵니다.”
뜻밖의 답을 들은 사내의 낯이 돌덩이처럼 굳어든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방이라 하니 짚이는 곳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1황자 혁이 요양을 위해 얼마 전부터 머무르고 있는 행궁(行宮)이 자리한 곳은 제국 북편에 자리한 위왕부요, 3황자 증이 유배 아닌 유배를 받은 곳도 북방의 장벽 앞이며, 아예 그 어미가 북방 제후국 출신인 4황자 수는 보름 전부터 어린 시절부터 도타운 정 자랑하던 1황자 곁에 함께 머무르는 중이었다. 어쩌다보니 자신을 제외한 다른 세 황자들이 모두 제국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참이었던 것이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뿐이었다. 셋 다 이름만 황자일 뿐 실지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다른, 어쩌면 같은 이유로 이름뿐인 영광만 가진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내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얼크러지고 말았다. 셋 중 그나마 설칠 만한 이는 진작 저의 장기 말로 삼아 계책 속에 던져놓았고, 다른 둘은 애초부터 제 계책에 스며들 여지가 없었던 자들이 아니던가. 실은 그나마도 뱀 새끼에 대해서나 잠시 말을 나눌까, 굳이 북방에 대해 언급할 일은 없었다. 과거에야 무친왕부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누렸을지언정 3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은 몇 번의 환란 끝에 반은 죄인들의 유배지, 남은 반은 병자들의 요양처로나 쓰이는 곳이 바로 제국의 북쪽 끝자락인 탓이었다. 하물며 그의 길고도 짧은 대계가 끝을 바라보기 시작한 지금은 언급이 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곳이었다. 헌데 그런 곳이 생각지도 못한 때에 짐작도 하지 못한 일과 엮여 툭 튀어나왔다. 그것도 제 성정 잘 아는 수하의 답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뭉뚱그려진 형태로 말이다.
“셋 중 하나더냐?”
사내가 따져 물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나올 리 없는 곳의 이름이 지나치게 일찍 닥친 일의 원인이라 하는데, 그마저도 이도저도 아니다 싶을 지경으로 두루뭉술하니 스스로 똑 부러지는 답을 찾을밖에.
“셋 다 아니기도 하고, 셋 모두이기도 하옵니다.”
헌데 오늘따라 제 수하라는 놈은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무슨 대답이라고 내놓는 것들이 하나같이 뜬구름 잡는 모양새인 것이다. 덕분에 어지간하면 조급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사내의 심사 속에 다시금 역정이 스며든다. 그에 미간 사이 새겨진 고랑이 더욱 깊어질 때였다.
“들개들이 개입했나이다.”
다행히 수하의 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들개?”
“예,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내가 알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알 만하다. 요 근래 백곰 녀석이 흑마 때문에 위왕부에서 죽치기 일쑤라지? 그게 얼추 한 해를 바라볼 참이니 정신 나간 들개 떼 머릿속에 헛바람이 들어가고도 남음이로다.”
그게 다 지고지순한 단심(丹心) 탓일 줄은 짐작도 못 하고 말이지.
다시 저가 아는 대로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흐름에 마음이 놓인 사내는 약간의 진심을 담아 한탄했다. 제 형제라는 것들이 몇 년째 이어오고 있는 한심한 놀음을 떠올리고 보니 이제는 그저 안타까웠던 탓이다. 그러다 문득 저가 지나친 것을 알아차렸다.
“풍백.”
“하문하오소서.”
“백곰이 따로 들개와 만났다는 보고가 있었더냐?”
암만 생각해도 나는 들은 기억이 없다만?
“주군께서 알고 계시는 그대로이옵니다.”
“으음? 허면 만난 적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뭘 묻든 즉시 돌아오는 답이 이렇게 속을 갑갑하게 하는 것일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제 다시 아귀가 맞는구나 싶더니 아니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수하가 답하기를 셋 다 아니기도 하고 셋 모두이기도 하다 하였다. 즉, 백곰과 들개 떼만 따질 일이 아니라는 소리. 그런 중요한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여우더냐?”
“증좌는 아직 잡지 못하였나이다.”
“맞다는 소리구먼.”
“여우와 닿아있는 이들이 다시 사람을 부려 움직인 것까지만 확인했사옵니다. 하온데 그 움직인 형태가 기괴하여 들개 떼에 이어 흑마와 백곰, 뱀 새끼는 물론이요 쥐 떼들 중에서도 닿은 이가 있은즉, 그 중 정확히 누가 어떻게 엮인 것인지는 아직 제대로 드러난 것이 없나이다. 하여 확실한 증좌를 잡은 후에 고할 작정이었사옵니다.”
“흥…, 숨은 줄 노릇을 한 게로군. 그러면 북방이 배후라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독방의 말로는 사용된 독물들이 북방 들개들만이 사용법을 아는 것들이라 하옵니다.”
“들개들만이 아는 것이다?”
“하나로는 그저 식물(食物)에 불과하고 둘 이상이 있다 해도 들개가 직접 시와 때를 맞춰 차례를 정해 쓰지 않으면 역시 별난 맛의 식물로나 쓰일 것들이옵니다. 하여 독방에서도 추이를 지켜보고 알릴 작정이었사온데….”
“그 다음은 알 만하다. 뜻하지 않게 독이 겹쳐 우리는 물론이요 상대가 예정한 것보다 일찍 일이 터진 게지. 청수련에게는 횡액이요 적들에게는 악재로되 나에게는 둘도 없을 호재가 되었구나.”
거참 뭘 어찌하면 일이 이리 되누?
사내는 혀를 내둘렀다. 자꾸만 제 뜻을 벗어나려는 흐름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 우습게 되었다. 설마 그 뒤틀린 흐름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런 것일 줄 누가 알았을까. 톡톡톡…, 가만히 손가락으로 침상 한끝을 소리 나게 두들기며 고민을 이어가던 광은 곧 느릿하니 입을 뗐다.
“폐하께옵서는 무어라 하시더냐?”
“주군 뜻대로 하라 하셨나이다.”
“…거참, 이번에도 날로 드시려는 게로군.”
그리고 진작 대계를 놓아버린 지존의 심중을 다시금 확인한 백치황자는 서늘한 시선 돌려 하얗다 못해 송장마냥 시퍼렇게 변한 제 어린 내자의 낯까지 살피고 나서야 마음을 정했다.
“허면 미리 손질을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그 흐름에 어울려보기로.
후에 『삼일혈사』라 불리게 될 시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 우리 마마, 밥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정신을 차린 청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러하였다. 마지막으로 하려던 일이 그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허나 곧 저의 눈앞이 크게 기울어지던 순간이며 애타게 저를 부르던 황자님 목소리, 그리고 제 몸속에서 울컥 터져 나온 시커먼 핏덩이를 차례로 떠올리고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저가 황궁에 적을 두게 된 뒤로 오만 일을 다 겪었지만 이토록 흉악한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야.
게다가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해도 도통 기운이 돌지를 않는다. 실은 고개를 돌리는 것도 어려워 이리저리 눈만 굴리기를 한참이었다. 그나마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으니 이는 제 모자란 몸뚱이가 그마저도 버겁다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댄 탓이라. 일전에 소의 부씨에게 되게 맞았을 적에도 온몸의 뼈마디가 곡소리를 낼지언정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냥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눈만 깜빡대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니 뭘 더 말하랴.
아이코, 이를 어쩌면 좋아.
덕분에 청은 없는 정신에 근심까지 더해졌다. 이래서야 당장 황자님 끼니는 어떻게 챙겨드릴 것이며 이런저런 수발은 또 어떻게 들 것이냐. 아이고, 일 났구나. 참말로 큰일이 났어.
허나 그뿐이었다. 근심을 하는 것으로 사라진 기력이 돌아올 것도 아니었거니와 실은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탓이다. 게다가 제 근심의 근원이라 할 황자님도 보이질 않는다. 하기야 이 크고 너른 황궁에 저를 대신해 귀한 분 모실 이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기는 하구나. 하여 없는 기운에 새근새근 숨만 몰아쉬던 청은 더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눈을 감은 그대로 다시금 잠을 청했다. 내심으로야 저가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동안 황자님은 어떻게 지내셨으며 원향전 살림은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일단은 다시 잠을 청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사라진 기력이 조금이라도 돌아와 있기를 소원하며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평시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내는 저와 제 서방의 모습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다만 그 와중에도 이것이 과연 꿈이로구나 납득할 것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황자님의 번듯한 행사더라. 육체는 제 나이를 찾았으되 그에 담긴 영혼은 여전히 덜 자란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저를 웃고 울리던 이는 어디로 가고 어른스럽게 저를 이끄는 사내 중의 사내가 제 곁에 있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육신의 편함만을 놓고 따지면 오히려 아주 좋았다. 저가 챙기기도 전에 알아서 소세를 마치고 의관을 갖추는 것은 시작이었으니 황자님께서 무엇을 하든 단정하고 말끔하여 저가 두 번 손을 댈 일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저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항상 저와 황자님 둘이서만 거하던 원향전 안에 일꾼이 차고 넘쳐 뭐든 손짓이나 눈짓 한 번으로 척척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저가 할 일이 없더라. 황자님 심통에 동동거릴 일도 없고, 황자님 수발드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닐 일도 없더라. 기껏해야 시비들 챙겨온 찻잎에 더운물 받아 차 몇 잔 우리는 게 전부. 헌데 황자님께서는 그것도 고될 것이라며 기어코 빼앗으셨다. 저를 대신해 차를 우리고 제 손을 대신해 과줄 집어다 물려주시니 오가던 궁인들 낯 위로 황망함이 스치고 제 낯은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떨어질 지경이 되었더랬다.
그래서 더욱 몽중임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생생해 자칫 생시려니 헷갈린 만도 하건만 그 내용이라는 것이 저가 겪을 리 없을 호사임을 잘 알기에 골수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이래서 꿈이로구나. 아아, 이러니 꿈이로구나. 제 서방 진중한 낯을 향해 말갛게 웃는 중에도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더라. 이러다 이 꿈에 홀려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더럭 겁도 나더라. 꿈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이 자꾸만 저를 주저앉히려 들더라.
― 아아, 꿈이로구나.
하여 그 모든 것이 아득하니 멀어지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참말로 꿈이었구나싶어서, 비록 꿈으로나마 이런 호사를 겪었으니 다행이구나 싶어서.
그렇게 다시 눈을 뜨고 보니 사위가 새카맣다. 처음 눈을 떴을 적에는 눈을 굴리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것이 없더니 지금은 눈을 굴려도 보이는 것이 없다. 저가 얼마나 잠을 청한 것인지는 몰라도 제법 시간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게다가 달아난 기력이 돌아오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제법 달게 자고 일어났음에도 달라진 것이라고는 가벼워진 눈꺼풀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청은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이야…, 참말로 큰일 났구나. 대체 무얼 했다고 이리도 몸이 축난 것일까? 종일 황자님 생떼를 감당하고도 쌩쌩하던 몸이 어쩌다 이리되었담?
“……?”
그때,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저를 향해 들어친다. 무슨 일인가 싶어 데구루루 눈을 굴리니 저 멀리 활짝 열린 들창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저것을 통해 차게 식은 밤공기가 밀려든 모양이지.
헌데 저를 향해 들이친 것은 서늘한 밤공기만이 아니었으니 그 이상으로 선명한 내음이 바로 그것이라. 그 내음이라는 것이 어찌나 비리고 역한지 말로 다 못 한다. 기력이 떨어지면서 둔해진 감각으로도 자꾸만 오심이 치받을 지경이더라. 어물전 썩은 생선내도 이보다는 나을지니 그저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역하기 짝이 없는 그 내음에 청은 혼곤한 중에도 슬며시 낯을 찌푸리고 말았다. 희한타, 이 고약한 냄새는 무얼까? 어째 들창이 열려있다 했더니 이런 까닭이었구나. 어질어질, 머리가 휭하니 내둘릴 만큼 독한 내음이더라.
“청…아?”
청아, 깨어났어? 깨어난 게야?
“―?!”
허나 제 귀를 파고든 가냘픈 목소리에는 절로 번쩍 정신이 들더라. 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저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웬일로 곁에 없던 제 상전이었던 탓이라.
“아…, 깨어났구나.”
내 색시, 드디어 깨어났구나.
곧이어 어스름한 불빛과 함께 제 앞에 나타난 황자님을 향해 또 한 번 데구루루 시선을 움직인 청은, 그러나 제 눈앞에 나타난 참담한 모습에 잠시간 크게 놀라 넋을 놓고 말았다.
“이것 보아. 청이 네가 깨어나지 않으니 내가 이 꼴이지 무어야?”
나는 색시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어.
청이 그러거나 말거나 황자님께서는 응석이 늘어진다. 청이 없으니 소세도 못 하고 수욕도 못 하였다고, 하여 모양새가 엉망이어 속이 상하다고, 그래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지만 참말로 맛이 없더라고 두서없이 제 할 말을 쏟아낸다.
전신을 시뻘겋게 피로 칠갑을 하고는 그리 종알종알, 대여섯 먹은 어린아이처럼 제 할 말만 잔뜩 쏟아내었다.
“그래도 말이다, 내가 너 자는 동안 큰일은 몇 가지나 하였다지. 내 색시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지.”
나중에는 잔뜩 우쭐한 음색으로 저가 한 행사 자랑에 나서더라.
“청이 너에게 몹쓸 짓 한 악적들을 모다 도륙을 내었다지.”
헌데 그 행사라는 것이 어찌나 흉악한 내용이던지 덕분에 잠시 돌아오려던 정신이 열 길 밖으로 달아날 지경이더라.
“착하고 예쁜 우리 색시, 검은 피 토하며 자빠져 한참이나 잠들게 만든 그 악물들을 남김없이 토막 내어 치워버렸단다.”
잘하였지? 색시야, 내가 참으로 잘하였지?
그 흉악한 행사를 두고 잔뜩 뻐기며 자랑하는 서방님 음성이 그저 기가 막히더라.
“…어찌…….”
“으응?”
“어찌, 어찌 그러셨, 어요?”
덕분에 없는 기운 쥐어짜 간신히 입을 떼니 나오는 것은 황망함 가득한 타박이라.
“무엇을?”
“마, 마마…, 그러면, 그러면 아니 되어요….”
그리 참람한 행사는, 아니 되어요….
다시 입을 떼니 나오는 것은 애끓는 만류였다.
“으응? 어찌하여서?”
허나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천진하기 짝이 없는 반문이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 하였을 뿐이야.”
그것이 어찌나 천진하고 또 천진하던지 마치 여름철 매미를 잡아 날개와 다리를 조각조각 떼어내며 노는 어린 것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더라.
“내 말하지 않았어.”
그에 청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얼른 강해져서 청이 너를 지킬 것이라고.”
그럼에도 차마 상전의 형형한 시선을 외면하지 못함은 그 눈빛 안에 저를 향한 올곧은 마음이 담겨 있음을 깨달은 탓이라.
“하여 강해졌단다. 강해져서 너를 지키려 나섰단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탓에 흉신악살도 열 길 밖으로 달아날 몰골을 하고도 저를 향해 그 웃는 낯만큼은 한없이 말갛다.
“이제 누구도 너를 해치 못할 것이다.”
어찌나 말간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가슴이 달음박질을 치더라.
“청아, 내 색시.”
그래서 제 입술 위에 피비린내 가득한 숨결이 서툴게 닿았다 떨어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꽃 같은 내 색시야.”
아직도 더운 기가 다 가시지 않은 그 고약한 피비린내를 나누어 가졌더랬다.
연해제 24년 처서(處暑).
역도의 세가 또 한 번 등천을 하니 그들의 독수(毒手)가 기어코 구중심처 깊은 곳까지 닿았더라. 이에 지존께서 크게 진노하시매 2황자 광에게 친히 명을 내리시니 이는 그 독수가 향한 곳이 바로 그였던 까닭이라. 이것이 곧 『삼일혈사』의 시작이니 꼬박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황부 곳곳에서 역도들의 피가 개천이 되어 흘렀다 하더라.
제국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짧고도 참혹한 숙청은 황부 내 일곱 세가 중 둘을 지우는 것도 모자라 제국을 구성하는 18개 부 중 셋의 주인을 갈아치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겨우 사흘에 걸쳐 이루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거열(車裂)에 처해진 자가 일곱, 효수(梟首)에 처해진 자는 열하나, 교수(絞首)에 처해진 자는 스물둘에 이르렀으며 역도와 줄이 닿은 죄로 파직당한 관리만 백에 가까웠으니 이는 과거 무현 대제께서 보위에 오르실 적 감당하신 첫 혈겁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이 없더라.
게다가 역사에 남을 대혈사(大血事)인 만큼 그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았다.
멸문당한 두 개의 세가가 각각 황부의 상권 중 한 축을 맡고 있던 곳들이었다는 것은 그나마 가장 소소한 축이었다.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군벌을 자랑하는 북의 태산부는 부주 최씨는 물론이요 산하의 장수들 중 반절이 형장의 이슬이 되면서 당장 국경을 지켜야 할 병력이 반 토막이 났다. 또한 제국에서 세 번째로 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동의 만항부는 부의 운영을 맡은 관리들 중 반절이 사라지면서 주요 관청 몇 곳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남의 육도부는 부주와 그 일가가 황부로 압송당하기 무섭게 숨어있던 수적 떼가 등천하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대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허나 놀랍게도 관부는 물론이요 군부까지 모두 기다렸다는 듯 대처에 나서니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당장이라도 끓어 넘칠 것 같던 민심은 채 달포도 되지 않아 잠잠히 가라앉았다. 이는 모두 숙청에 앞서 이 모든 사태를 진작 짐작한 지존께서 친히 명을 내리시매 그를 받은 조정신료들이 착실히 대비를 해 놓은 결과였다.
이를 두고 백성들은 ‘과연 흑룡의 피를 타고난 귀인(貴人)다운 행사’라며 크게 칭송하였으나 겨자씨만 한 것이나마 권세를 쥐고 있는 자들은 은밀히 모여 ‘흑룡의 피가 아니라 귀룡의 피를 받은 모양’이라 수군대며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황제가 이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고한 권세를 자랑하게 된 탓이라. 게다가 단순한 숙청이 아니었다. 10년이 넘게 처소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2황자가 친히 칼날이 되어 움직인 것이었다.
현 황가의 유일한 적통 황자임에도 황실의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진작 황위에서 멀어진 줄 알았던 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놀라울 판에 지존을 대신해 역도들의 더운 피 뒤집어쓰기를 마다치 않으니 당연 박쥐같은 자들이 바빠졌다. 겉으로야 몸을 사리기 바빴지만 뒤로는 꽁지에 불붙은 생쥐마냥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심중을 알아내고자 발버둥 친 탓이라.
덕분에 저자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새로운 소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실 지난 숙청은 지존의 뜻이 아니라 2황자의 뜻이었다더라, 어느 이름난 기루의 밀실에 지존께서 심복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숙청을 계획하셨는데 그 대상이 2황자라 하더라, 역모는 핑계일 뿐이고 실은 지존께서 마음이 떠난 후궁들을 정리하고자 그들의 가문을 역모에 엮다보니 일이 커진 것이라 하더라, 태자 책봉을 앞두고 지존께서 시험을 내리신 것을 2황자가 해결한 것이라 하더라…. 뜬소문이라 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크고 깊고 무거운 내용들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부러 말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 마냥 그렇게 끊임없이 수많은 말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허나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그 수많은 말이라는 것들은 온전히 구중궁궐 높다란 담장 너머의 일일 뿐인 것을.
정작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되는 이의 귀에는 닿지도 못할, 그저 저자에 떠도는 수많은 뜬소문들일 뿐인 것을.
제국 경의 가을은 그렇게 순식간에 저물어가고 말았다.
* * *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도 느린 것이 무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이라.
이는 청이 머물고 있는 곳에도 한 점 틀림없이 들어맞는 진리였으니 소리 없이 떨어져 원향전 전각 주변에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한 하얀 눈송이가 그 증좌였다.
“으차!”
덕분에 청은 오늘도 잠시 짬을 내 후원에서 장작을 패는 중이다. 사실 어지간한 것은 찬바람이 불기 무섭게 한 떼의 궁인들이 사잇문 앞까지 가져다 놓은 온옥이며 만년화로, 탕파로 감당을 할 만했으나 정작 저가 평소처럼 씻고 살림을 하는 데 쓸 물을 매일 끓이려고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닌 탓이다. 게다가 날이 차가우면 좀 얌전히 지내실까 싶던 제 상전마저 도리어 추위 탓으로 온 사방에 기운이 뻗치시니 그 기세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저잣거리 거지도 울고 갈 모양새가 되었다. 덕분에 서리가 내리기 전만 해도 하루 한 번이면 족하던 상전의 수욕이 어째 찬바람 불기 시작하고는 두 번도 모자랄 지경이 된 것이다.
“으쌰!”
하여 동짓달에 들어설 즈음부터는 조그만 손도끼 하나에 단단한 망치 하나를 구해다 제 기운이 닿는 만큼 장작을 쪼개는 청이다. 이 구석진 곳까지 살림할 것을 챙겨다 주는 궁내청에서 어느 정도 쪼개어 놓은 것을 보내기는 하지만 이게 아무래도 금시 쓰고 치울 물을 끓이기에는 굵기가 과히 굵은 탓이었다. 사실 더 쪼개어 보내주시오, 청을 해보았지만 그래 봤자 저가 한 번은 더 손을 대야 할 것들이 들어오는 통에 그냥 제 몸 잠시 고달플 것을 택한 청이다. 그나마 일전에 독에 당한 뒤로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궁인 둘이 빨랫거리며 전각 소제를 대신해주니 가능한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것도 며칠 하다 보니 금시 요령이 붙은 덕에 전에는 꼬박 한 시진을 매달려야 했지만 요즘은 이리 잠시 짬을 내 한 다경만 집중해 쪼개고 나면 얼추 하루 쓸 물을 데울 정도는 나온다.
“청아, 나도 하면 아니 되어?”
헌데 그 잠시를 이기지 못해 제 뒤에 쪼그려 앉아 구경하고 있던 상전이 슬그머니 운을 뗀다. 지난밤부터 제법 쌓인 눈 덕에 당신 좋아하는 말타기도 하지 못하게 된 황자님 눈에는 청이 하는 것이 그저 재미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이럴까봐 다른 날에는 황자님께서 당신의 일과로 자리를 비울 때만 골라 하였는데…. 하여튼 이놈의 눈이 참 여러모로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네에, 아니 되어요.”
하여 냉큼 입을 떼는 청이다. 이제 제법 사내 냄새가 섞이기 시작한 소년의 답변은 그야말로 단호하다. 어찌나 단호한지 고집쟁이 상전이 뭐라 따지는 것도 잊고 잠시 놀란 낯으로 제 어린 내자의 눈치만 살살 살핀다.
“…어찌하여서?”
“위험하여요. 잘못하면 마마가 크게 다치십니다.”
그에 제대로 못을 박아둘 작정으로 더욱 엄히 답을 한 청은 부러 더욱 사납게 망치를 휘둘러 보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그리 위험한 것을 어찌 청이 네가 해?”
하지 마! 좀 있다 곰 오면 곰한테 시켜!
“……문사께 그러는 거 아니어요.”
우리 황자님, 요 몇 달 사이 얼마나 똘똘해지셨는지 이제는 제법 청에게 말로 이기신다. 그것도 제법 이치를 따져 조리 있게 따지고 드시는 통에 청의 말문이 턱하니 막히기도 몇 번.
“그리고 곰이 그랬어. 성현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든 만물에게 주어진 쓰임새가 있는 법이니 사람도 그와 같이 제 쓰임새를 찾아 항상 노력하라 하였다고. 근데 곰은 곰이잖아? 그러니까 곰한테 시키면 돼!”
…게다가 하필 오늘이 그 몇 번 중 하나가 될 모양이다. 얼핏 아무 말이나 막 하는 듯하면서도 찬찬히 들어보면 참으로 알차게도 배운 바를 행하는 것이니 청으로서는 당연 말문이 막힐밖에. 심지어 언변은 처음 만났을 때만치 앳되었다. 덕분에 청은 지금 참으로 심란하였다. 훤칠한 풍신을 따라 쑥쑥 자라나는 상전의 영혼이 참으로 반갑기는 하지만 그 자란 수준이 어설퍼도 너무나 어설퍼 오히려 제 속을 뒤집기에 딱 좋음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하필 말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수준까지만 자랄 건 또 무어람. 원래도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던 분이 이제는 말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되게 앓고 난 뒤로는 정신 차리고 보면 단잠 자다 일어나는 게 일일 만큼 기력이 떨어진 참이건만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밀려드는 이 암담함은 또 어찌하면 좋을까.
하여 청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청아…?”
청아, 또 아파? 응? 또 아파서 그래?
황자님 맑디맑은 목소리에 어쩐지 더 서글퍼져서, 그래서 입도 딱 닫고 말았다.
“청아? 청아, 내 색시?”
이분을 참말로 어찌하면 좋을까….
좀 전까지만 해도 도끼며 망치가 따악따악 소리를 내던 원향전 후원에는 이제 몸만 다 자란 서방의 울먹임과 어린 색시의 근심 가득한 한숨만 오가기 시작했다.
두 주종, 혹은 두 부부의 우습지만 웃지 못할 실랑이는 결국 시간에 맞춰 찾아온 문사가 우중충한 낯을 하고 도끼를 집어 들 때까지 이어졌다 하더라.
청이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된 것은 곰 같은 외양의 문사가 순식간에 장작 열다섯 근을 해치우고 나서도 다시 한 다경 정도를 더 잡아먹은 뒤였다. 솥뚜껑만 한 문사 양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와중에도 기어코 장작 한번 패보겠다고 버둥댄 황자님 덕분이었다.
다른 날이었으면 황자님이 서책 독송하는 소리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이라도 붙였겠으나 오늘은 그도 여의치 않다. 몸이 곤하거나 말거나 바짝 곤두선 신경이 가라앉지를 않으니 도통 편히 잠을 청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 잠시 고민하던 청은 간만에 금을 들었다. 잔잔한 것으로 몇 곡조 퉁기다보면 이 산란하다 못해 칼날처럼 곤두선 제 속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어서.
“………후우…….”
허나 제 손에 들린 금을 눈에 담기 무섭게 한숨부터 터져 나오니 그마저도 쉽지 않을 듯싶다.
처음에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전각 창고 한구석에 굴러다니는 낡은 놈을 고쳐 퉁기는 정도였지만 채 사흘도 되지 않아 귀한 재질로 만든 번쩍번쩍한 놈이 저에게 주어졌다. 제 서방 되는 이의 선물이었다. 그것이 지금 제 손에 들려있는 바로 그것이라. 부쩍 자란 몸과는 달리 여전히 앳되고 숫된 낯을 하신 상전께서 저가 무슨 곡조를 어찌 퉁기든 다 좋다며 빙긋이 웃는 낯으로 건네주신 칠현금이었다.
그를 떠올린 청은 금의 현을 조율하다 말고 씁쓸히 웃고 말았다. 어수선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이고자 다시 잡은 것이 어쩌다 이리 됐나 싶다. 하기야 제 팔자에 이리 귀한 것 잡아볼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저가 동기 시절 음률 공부를 할 때 잡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으리만큼 귀한 재질과 음색의 금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어째 가슴이 답답하다. 암만 생각해도 저가 받는 것이 하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과하다 싶은 탓이었다.
사실 당장 저가 이리 멀쩡히 다니는 것만 해도 보통 호사가 아니었다. 황족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귀한 약재 아낌없이 쓴 탕제 조석으로 챙겨 마신 덕에 겨우 나흘 만에 잃었던 기력을 되찾은 덕분이었다. 게다가 기력이 좀 돌아왔다 싶을 때부터는 약재만큼이나 귀한 재료 듬뿍 담긴 보양식이 하루 한 번 제 앞에 놓였다. 이쯤 되면 없던 기력도 알아서 새끼를 쳤을 판이라. 청이 멀쩡히 힘을 쓸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나중에 제 몸 살피러 온 태의 영감 말에 따르면 제 서방 생떼가 아주 제대로 등천을 하여 보다 못한 지존께서 태의 영감에게 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친히 약재까지 챙겨 내어주셨단다. 감히 말로 다 못할 황은까지 받은 것이니 이게 호사가 아니면 무어가 호사일 것이냐.
허나 저가 이런 호사를 받는 이유를 떠올리고 보니 나오는 것은 그저 한숨뿐이라. 저를 위해 감히 지존을 상대로 거한 생떼를 부리셨다는 제 상전이요 서방이 지금 저에게 주어진 모든 호사의 근원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이 호사를 위해 황자님께서 감당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더랬다.
― 내 색시를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지.
그 밤에, 피 칠갑을 하고 찾아온 그 밤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은 낯을 한 상전께서는 그리 말씀하셨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 하였을 뿐이야.
저에게 몹쓸 짓을 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다 못해 토막을 내었다 자랑한 것을 두고 어찌 그리하셨냐 황망히 물으니 저리 답하셨다.
― 이제 누구도 너를 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피로 칠갑을 한 그 모습 그대로 저에게 입을 맞추시니 가만히 입술만 대었다 떼는 서툴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오직 저를 위해 수많은 이를 참하며 더운 피 뒤집어쓰기를 자처하신 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숫되고 앳된 입맞춤이었다.
이제는 말로도 다스리지 못할 분인데, 앞으로 어찌하여야 하나.
그래서 청의 가슴에 다시 돌덩이 하나가 턱하니 얹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분이 아니시던가. 헌데 저가 눈을 떼기 무섭게 차마 말로 다 못할 참람한 행사 자처하셨다. 색시 다치게 한 악적들 벌하였다 자랑하시며 우쭐해하던 그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혔더랬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다 못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니 이를 어쩌나.
과연 꽃은 꽃이로되 저승꽃이시로구나.
디로롱…. 산란한 마음을 담아 손끝에 닿은 칠현금 일곱 가닥 현 훑기를 몇 번. 이리저리 멋대로 튀는 듯하던 울림은, 그러나 곧 맑고 청아한 흐름을 갖추기 시작한다. 애초에 제 산란한 심사 털어보려 잡은 칠현금이니 간만에 제대로 타려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윽고 흐르는 물과 같고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은 음색이 아기마마님 처소 꽃살문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니 원향전 주변을 지키는 금군들의 귀가 때아닌 호강을 하였더라.
“아기마마님 금 타는 솜씨가 제법이구먼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듣는 이를 편하게 만드는 음색입니다.
조금 전부터 몇 겹 장지문 너머에서부터 아른아른 울려 퍼지는 칠현금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가의는 진심으로 찬탄하였다. 명문가 출신답게 학문뿐만 아니라 서화며 음률에도 제법 조예가 깊은 그는 지금 문밖에서부터 울리는 저 음색이 실은 얼마나 많은 기교와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실은 그래서 좀 놀랐다. 암만 기루에서 동기로 키워지던 이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갖가지 기예를 익힌 이라고는 하지만 설마하니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이가 저토록 유려하고도 깊이가 느껴지는 탄주(彈奏)를 선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참 희한한 일이로세.
그래서 또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군께서 알아보신 내용이나 저가 직접 알아본 내용이나 모조리 뒤져보아도 나올 게 없다 못해 의심한 것이 미안할 만치 가진 게 없는 이가 저이였다. 어떻게 살펴보아도 가진 재주가 어린아이 돌보는 게 전부인 탓에 부씨 계집 후궁 자리를 위한 제물로 바쳐진 이가 바로 저 아기마마님이었다. 헌데 가진 재주가 없다더니 저 유려한 음색은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이상타, 역시 다시 사람을 부려서….
그렇게 막 생각이 깊어지려는 때였다.
“―그나저나 책사.”
“예, 예?”
“논다.”
“아…, 하문하옵소서.”
“결국 백곰 녀석을 불러들인다고?”
“그러하옵니다.”
“허허…, 어차피 엮일 거라고는 쥐뿔도 없을 터인데 뭘 어찌하려고?”
곰 같은 문사와 서화(書畫)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원향전 동편 별채에 틀어박힌 광은 제 앞에 펼쳐놓은 선지(宣紙) 위에다 세심히 붓을 놀리다 말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가 할 일은 다 했다 싶어 남은 일은 모두 떠넘겨 놓았더니 이건 또 이것대로 우습게 돌아가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위에서 뭐든 내놓으라며 쪼아대니 금군 쪽에서도 별수 없나봅디다.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로는 뭐든 했다고 생색이라도 내려니 남은 게 그뿐이라더군요.”
“흥, 무능도 죄라지.”
하여간 모자란 것들이 모자란 짓만 골라서 하는 게로군.
게다가 그 이유가 상부의 채근에 뭐든 결과를 내놓으려는 수사부의 발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저 한심할밖에. 덕분에 사내의 살생부는 오늘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이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할 짓 안 할 짓 구분도 못 할 위엣 것들이 문제다. 적당히 조져놓기만 할 참이었는데 이 정도로 무능하니 암만해도 치워버리는 게 더 이득이리라.
“언제라 하더냐?”
“내달 초이틀이라 하더이다.”
“……오늘이 며칠인고?”
“정월 열하루이옵니다.”
“어이쿠, 참으로 일찍도 오는구나.”
참 빨리도 불러들이는구먼.
“그러니 구색인 게지요.”
“구색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스무날 뒤에야 부를 거면 뭣 하러 따로 불러들이는 게야?”
결국 사내는 벌컥 역정을 쏟고 말았다. 그 기세에 그림 속 종달새 입에 물린 것이 꽃송이가 아니라 꽃가지가 되어버렸다. 저가 한참 화조도(花鳥圖) 그리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역정을 내다 손에 들린 붓 세차게 그어버린 탓이었다.
“이런….”
“새로 그리셔야겠네요.”
꽃가지 기세가 어찌나 등등한지 종달새를 두 쪽 내었구먼요.
“저 인사한테 이런 손바닥만 한 화조도로는 모자란 모양이지. 이왕 이리된 것 간만에 붓질 연습이나 좀 더 해 주련다.”
나중에 저이 닮은 청수련으로 12폭 병풍이나 만들어볼까….
금시 심드렁한 낯으로 돌아온 사내는 청이 들으면 기함을 하고 자빠질 이야기 태연히 흘리며 제 손에 들린 붓 이리저리 멋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매화나무 아래 꽃송이 물고 갸웃대던 종달새가 순식간에 고슴도치 꼴이 되니 덕분에 무능한 자들 덕에 목까지 차오른 역정이 한풀 꺾이는 듯하더라.
“―책사.”
“예, 주군.”
“백곰에게 연통을 넣으렴.”
“무어라 할까요?”
“뭐 별거 있나.”
같이 술 한 잔 하며 서로 뜨거운 연정에 대해 논해보자 하면 될 것을.
그날 밤.
황성 북문의 망루 중 한 곳에서 꽁지깃이 하얀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북편 하늘을 향해 사라졌더라.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