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八 章 - 落花(낙화)
“―흑…!”
소년은 치미는 열감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전신으로 번지는 잔물결과도 같은 감각에 절로 고개가 외로 틀리고 입술 사이로는 추한 헐떡임이 흘러내린다. 이제 겨우 시작이거늘, 황자님 양물은 이제야 벌떡이기 시작하였거늘 제 몸뚱이라는 놈이 말썽이다. 얼마나 음탕한 몸뚱이기에 겨우 황자님 손재간만으로 벌써 몇 번이나 씨물을 쏟아내고 있는 것일까. 절 어루만지는 것도 모자라 제법 깊은 곳까지 쑤석대는 사내의 손길이 가장 큰 문제임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제 비루한 몸뚱이 탓만 하는 청이다.
“이런….”
벌써 이리 정신을 못 차리니 이 일을 어찌할꼬.
거기에 황자님 은근한 타박까지 귓전에 더해지니 남은 것은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듯 홧홧하니 끓어오르는 열기더라. 그에 할딱할딱 연신 밭은 숨을 뱉다 말고 제 몸 아래 깔려 있는 금침 자락 잡아다 제 낯을 가리려 애를 쓰니 이는 어린 후궁이 제 육신의 천박함과 음란함이 드러남을 지극히 저어하는 탓이라.
“내 말하지 않았니.”
“…―핫…!”
허나 그런 청을 가만히 두고 볼 광이 아니다. 간신히 목덜미까지 올라간 금침 자락 단박에 잡아채는 손길이 그야말로 비호와도 같더라. 그도 모자라 청의 두 손을 단단히 나누어 쥐기까지 하니 이제 청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더없이 방만한 모습으로 널브러진 채 제 서방 진득한 시선 받아내는 게 전부였다.
“가리지 마라. 피하지도 마.”
“마, 마마…. 제발….”
“네가 그럴 때마다 내 속에 미친놈이 힘을 얻는다 하지 않더냐.”
네가 너무 곱고 예뻐 보듬다 못해 뼈째 삼키려 드는 그 미친놈 말이다.
그리고 제 어린 내자의 그런 숫된 모습마저 저를 유혹하는 교태로 받아들인 황자님 새카만 눈동자 위로 한 줄기 광기가 스치니 이는 이제 곧 닥칠 사나운 정사를 예고하는 것이라.
“그러니 열어다오.”
하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기로도 모자라 수치심까지 더해진 청에게 그를 알아차릴 정신머리 따위 남아있지 않았으니 실은 그 와중에도 제 귓속 깊숙이 파고드는 서방님 간청 알아들은 것이 용할 지경이다. 덕분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유들로 인해 촉촉하게 젖은 사지가 바르르 떨리고 그렁한 눈매가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출렁이기 시작하니 그 애처로운 교태 지켜보던 사내의 낯이 박꽃처럼 피어난다. 오늘도 제 어린 내자 홀려 잡아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는 것이다.
“내 이제 너에게 들어가련다. 네 몸속 깊이 들어가 마음껏 날뛰련다.”
허니 얼른 열어다오, 응?
어차피 잡아먹으려 마음먹은 이상 청이 싫다 해도 어떻게든 제 뜻 이루었을 게 뻔한 주제에 또 이렇게 허락을 구하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그의 몸 아래 자리한 채 달달 떨고 있는 청이 알았다면 다시금 깊은 배신감과 넘치는 서러움에 몸부림을 치고도 남을, 그러나 절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능숙한 가식이었다.
“색시야, 내 색시.”
게다가 청에게는 그의 모습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질 틈도 없었다. 당장 곤란한 청을 받아 고민을 하는 중인 것도 모자라 당과에 꿀을 끼얹어 설탕에 굴린 것을 삼킨 것보다 더 다디단 음색이 옅은 투정과 뜨끈한 숨결 함께 담아 제 몸 이곳저곳에 마구 떨어져 내린 탓이었다. 그것은 오금에서부터 시작되어 샅 어림을 지나 달막이는 아랫배를 거쳐 진작 새로운 용도로 개발된 두 개의 유실을 한참이나 지분대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청의 입술에까지 닿았다. 헌데 겨우 오금에서 입술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한 그 단순하다면 단순할 움직임이라는 것이 어설프게나마 색사의 기예를 익힌 것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수능란하지 뭔가.
덕분에 오늘도 청의 수치심은 다시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크고 넓고 깊어졌다. 황자님께서 저에게 이리 보챌 때마다 과거에 진실을 모를 적에 황자님 달뜬 몸 달래겠답시고 저가 행한 모든 것들이 실은 얼마나 하찮은 수준인지를 실감하는 탓이었다.
“얼른 열어다오, 응?”
물론 청이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더욱 집요하게 답을 청하였다. 입술에 손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몇 번의 방사로 시들한 꼴을 한 청의 양물에다 그 몇 배는 길이와 부피의 제 것 가져다 대고 슬금슬금 문질러대며 보챈다. 허락이 떨어지는 즉시 제 몸을 꿰뚫겠다는 의지가 어찌나 흉흉하던지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은 와중에도 절로 마른 침을 삼킬 지경이더라. 그에 청은 제 서방 간청 들어주는 대신 본능적으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제발, 날 받아다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제 목 아래 몸뚱이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아, 내 곱고 고운 청수련.”
저더러 꽃이라 부르는 사내의 음성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연신 제 입술 젖줄 삼아 빨아대는 그 접문에 무너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이제 너에게 들어가마.”
내 하나뿐인 꽃, 내 색시야.
다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보니 제 몸에 남은 기운이 별로 없더라.
“어여쁘다. 참으로 어여뻐서 견딜 수가 없어….”
“……아, 아아…! 아아아…!”
하여 정작 잔뜩 성이 난 황자님 양물이 좁디좁은 제 밀부로 단숨에 밀려들어오다 못해 뱃가죽을 꿰뚫을 지경으로 파고드는 순간에는 울음 반, 신음 반 어설픈 외마디 소리만 흘렸더랬다.
“이 밤이, 훅…, 이 밤이, 참으로 짧을 듯, 싶구나….”
“―흐아아…!”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색사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청이 정신을 놓을 때까지 이어지고 또 이어졌으니 이는 사내가 진작 제 어린 내자 숫된 몸 구석구석 남김없이 파악한 결과더라.
덕분에 2황자가 원향전 깊은 곳에다 꽁꽁 숨겨놓은 어린 후궁이 천하에 둘도 없는 명기요 요부라는 헛소문이 다시 한 번 황궁으로도 모자라 가까운 저자에까지 스며들었더라.
그것은 제 서방 꽃 타령에 홀려 오늘도 남김없이 내어주고 만 원향전 양원 현씨가 들었다면 억울함으로 기가 막힌 것으로도 모자라 치밀어 오르는 분기 이기지 못하고 며칠은 앓아눕고도 남을 훌륭한 헛소문이요 누명이었다.
* * *
어느 순간, 청은 잠에서 깨어났다.
실은 여전히 온몸이 쑤시고 한없이 나른해 좀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어딘지 어수선한 공기가 혼곤한 중에도 점점 더 선명히 느껴진 탓이었다. 하여 느릿느릿,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사방에 드리워진 휘장 덕에 시간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어스름한 광경이 제 시야를 파고든다.
아이코,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어?
덕분에 흐릿하던 머릿속이 단박에 맑아진다. 상전의 아침잠을 위해 드리우는 것인지라 어지간해서는 쉬이 빛이 들지 않는 휘장을 통해 뿌연 빛이 느껴진다. 이는 곧 그만큼 햇살이 강한 시간이 되었다는 소리. 못되어도 오반이 목전일 게 분명하다. 예전이라면 꿈에서도 경험하지 못했을 스스로의 나태함에 기겁을 한 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즉시 전신을 두들겨대는 묵직한 통증에 신음하며 쓰러졌다.
“양원? 양원, 기침하셨나이까?”
“양원, 소세물 대령할까요?”
“양원 자가, 괜찮으셔요?”
“양원, 휘장을 걷겠나이다.”
그러자 들릴 듯 말 듯 소곤대고 있던 목소리들이 대번에 크고 또렷한 울림을 되찾으니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임에도 민망함에 몸서리치는 청이다. 겨우 몇 마디 말만으로도 휘장 밖에 자리하고 있을 네 여인들이 저가 어찌하여 이리 맥을 못 추는 것인지 잘 알고 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를 두고 두 훈육 상궁들은 다시금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저를 향해 입을 맞추었더랬다. 본디 섬김을 받는 자는 무치(無恥)인즉슨, 모든 행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 법이라며 말이다. 청의 짧은 식견으로는 암만해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두 훈육 상궁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훈육시간 중 반절을 자기들끼리 설전을 벌이는 것으로 날리는 이들이 어째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기가 막히게 마음이 맞았던 것이다. 그것도 꼭 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골라서 맞았다.
나중에는 아예 원향전에 머무르며 저의 수발을 들게 된 네 명 상궁에게 신신당부를 하더라. 양원이 아직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니 아랫것들이 알아서 웃전을 잘 챙겨야 할 것이라며 당부, 또 당부하였다. 황자님과 꽃잠 잔 다음 날 만이라도 홀로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그놈의 당부 덕에 이제는 매번 지금과 같이 민망한 상황을 맞이하는 청이다. 귀한 분들 취향 참으로 별나다 하더니 이래서 그런 모양이다. 이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하는 것이 웃전의 본분 중 하나인 줄 누가 알았을까. 그를 생각하니 그렇지 않아도 네 여인 마주할 면목이 없어 움츠러든 몸이 이제 아예 조그맣게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아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자는 척이라도 해 볼까. 그러면 저 이들이 조용히 물러날 것도 같은데.
사방으로 몇 겹이나 길게 늘어져 있는 탓에 모두 걷으려면 제법 시간을 잡아먹는 능라 휘장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이 난처한 순간을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청이다.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
허나 갑자기 불쑥 끼어든 사내의 목소리에 그 고민마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저를 보러 돌아온 제 서방이 반가워서가 절대 아니요, 이로써 병아리 눈물만큼 남아있던 최소한의 염치마저 지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깊이 절망한 탓이라.
“청아, 내 색시.”
거기에 몇 겹 휘장을 단번에 헤집고 걷어낸 황자님께서 기어이 또 금침 자락마저 걷어내니 덕분에 지난밤의 기억들 세세히 떠올린 청의 낯은 다시금 홧홧하니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마, 마마!”
“해가 이미 중천이거늘 어찌 아직 침상인고?”
“그, 그것이, 제가 몸이 참으로 곤하여….”
“곤하다 하여 이리 움츠려만 있으면 오히려 병이 된단다. 얼른 일어나렴. 일어나서 나와 함께 나들이나 다녀오자. 내가 오늘 참으로 좋은 것을 발견하였단다.”
내 폐하께 다녀오는 길에 보니 향림전 앞 연화지(蓮華池)에 너 닮은 청수련이 만발하여 참으로 장관이더라.
청이 그러거나 말거나 제 무심한 서방께서는 말갛게 웃는 낯으로 은근한 목소리 쏟아놓기 바쁘다. 부끄러움이 지나쳐 기어코 뿔이 날 지경이 되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어느새 동그랗게 움츠러든 청의 몸 달랑 안아 들고 예의 그 다디단 음색 줄줄 흘려대신다. 그에 청의 수발을 들고자 침상 밖에 자리하고 있던 네 여인들 사이로 대번에 들뜬 공기가 오가기 시작하니 사내의 어깨너머로 그것을 확인한 청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라. 그래, 달지. 참으로 달고 달아 나중에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짝 속이 메슥거릴 지경으로 달지.
하지만 청은 안다. 이 달콤함이 어딘가 몹쓸 꿍꿍이가 담겨있는 게 분명한, 당장은 지독하게 달콤할지언정 반드시 씁쓸한 뒷맛을 남길 게 분명한 그런 것임을 안다. 차라리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안타깝게도 저가 자라는 내내 보고 배운 것이 무엇이던가. 해웃값 하나로 울고 웃고 노래하며 춤을 추는, 그리하여 가장 비싼 값에 제 몸 내어주는 것으로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말하는 꽃이 되는 법을 익힌 저였다.
그러니까 안다. 비록 그 너머 숨은 내용까지 소상히 파악할 정도는 아니어도 사내가 저를 향해 쏟아내는 달콤함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으로 그 다디단 음색 겪은 그날 홀리는 것과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오심에 시달렸던 게다.
안다. 알고 있다. 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청아, 내 청수련.”
허나 이미 알고 있으면 무엇 할 것이며 아예 모르면 또 무엇 할까.
“얼른 일어나렴. 얼른 일어나 씻고 나와 함께 나들이나 가자, 응? 나들이 준비는 내가 다 해두었으니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단다.”
지금 이토록 열정적으로 저를 홀리기에 나선 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러니 얼른 일어나 채비를 하렴. 내 이리 기다리고 있지 않니. 응?”
그래서 오히려 더욱 저를 챙기고 품으려 하는 것이니 알면 무엇 하고 모른 척하여 달라질 것은 또 무엇일까.
“내 색시, 내 곱고 고운 청수련.”
어차피 저는 이제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이라.
“…그…, 채비할 터이니 놓아주시어요.”
“오오, 참말?”
이제 저에게는 제 서방이라는 이 말고는 제 몸 하나 기댈 곳도 없음이라.
― 내 좋은 것 하나 알려주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 너는 나 같은 꽃이 되지 말거라.
영영 지워질 줄만 알았던 까마득한 과거의 그 음성 다시 떠올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더라.
― 너는 나 같은 꽃이 되지 말거라.
이미 그토록 피하려 했던 말하는 꽃의 길 위에 올라선 저로서는, 그저 그 무심한 충고만 되새길 따름이라.
― 너는 나 같은 꽃이 되지 말거라.
허니 그 말을 끝으로 기어코 한 송이 낙화가 되어 스러진 그 이를 떠올리다 말고 황자님 하자는 대로 움직일밖에.
“예, 참말이어요.”
금시 채비할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셔요. 아셨지요?
구중궁궐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채 원치도 않던 말하는 꽃이 되어버린 소년은 오늘도 말간 웃음과 함께 제 몹쓸 서방 달래기에 나섰다.
살기 위해 모두를 속였다는 거짓말도 믿어주었는데 이 정도쯤 못할 건 또 무엇이던가.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심지어 해웃값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게 된 청수련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날.
저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경사였어야 했던 그날.
색주가 동기 출신 천것 주제에 감히 천하의 지존 앞에 나아갔던 그날.
그리고 저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은 엄청난 거짓말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바로 그날.
청은 저는 물론이요 세상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그리하여 제 눈앞에서 넓디넓은 대전이 온전히 경악과 혼란으로 들어차다 못해 격하게 출렁이는 것을 목격하였다. 헌데 그다음에는 무어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저 자신이 제대로 눈에 담아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음이라. 다만 이리저리 조각나 제멋대로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둘 모아다 끼워 맞춘 덕에 그럭저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만큼은 되었더라.
그날, 저가 기억하는 그날의 시간은 참으로 희한한 것이더라.
* * *
언젠가 저에게 거짓된 모습만 보여주었던 황후마마께서는 진실로 크게 놀라 황자님 살펴보다 혼절하셨고 그 덕에 가뜩이나 술렁이던 넓디넓은 대전의 공기는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란한 가운데 홀로 동떨어져 있던 저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서방이라는 자의 품에 안겨 대전 앞 회랑을 가로지르고 있더라.
그나마도 기억에 남은 이유는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다.
“……―나요?”
“으음? 무어라 하였느냐?”
“허락을 받은 것인지 여쭈어보았어요.”
“누구에게, 무엇을 말이냐?”
“그, 폐하께 물러가도 되는지 말이어요.”
그것은 청이 지난 보름 동안 꿈에 나올까 무서울 지경으로 시달려가며 예법을 익힌 결과가 엉뚱하게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폐하를 배알할 때에 걸음은 어떻게 할 것이며 절을 할 때에 머리는 어디까지 굽혀야 할 것이며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시작하는 것도 폐하시고 파하는 것도 폐하시니 그분의 언사는 토씨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당장 기억나는 만큼만 돌이켜본 것임에도 이토록 길고 복잡한 것이 지존을 배알할 때 저가 지켜야 할 예법이더라. 헌데 없는 정신에 남은 기억 닥닥 긁어 몇 번을 살펴보아도 허락은커녕 온통 자기들 말 하느라 어수선한 와중에도 황제폐하 지엄하신 음성은 들은 바 없더라.
하여 이 황망한 중에도 따져 물은 것이다. 혹시라도 예법을 어긴 것인가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하더라.
“어찌하여서?”
“…예?”
헌데 돌아온 황자님 반문 덕에 두근대던 염통이 그대로 졸아붙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그냥 머릿속이 싹 비워진 것이다. 기가 막혀 입만 벙긋대고 있으니 황자님께서는 오히려 저보다 더 기가 막힌 낯을 하고 또 툭 던진다.
“어찌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냐?”
“그, 그는…, 어, 음…, 그, 예법이….”
“논다.”
할 말 다한 마당에 뭐가 아쉬워 그런 곳에서 더 뭉개고 있자는 게야?
그것도 참 얄밉게도 던진다. 덕분에 청은 조금 전까지 저가 겪은 폭풍과도 같은 시간마저 까맣게 잊고 이분이 지금 뭐라 하시는 것인가 고민에 빠졌더랬다.
“―읏차!”
“…?!?!”
그러다 황자님의 단단한 팔에 잡혀 쑤욱 들어 올려졌다. 갑자기 더욱 높은 곳으로 휙 솟구치는 시야에 놀라 제 앞에 자리한 것을 덥석 끌어안은 청은, 허나 곧 저가 급한 마음에 냅다 안은 것의 정체를 깨닫고 또 한 번 염통이 졸아붙었다.
“어이쿠….”
갑갑하구나, 색시야.
“아, 그, 그게….”
“농이다. 내 색시가 자청하여 날 품어주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디 있겠니. 괜찮다. 이왕 품은 김에 입이라도 맞춰주련?”
“…….”
이것도 농인가 보아.
다행히 절 가지고 노는 게 분명한 그 음성 덕에 멀리 나가려던 정신이 오히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냉정을 찾은 청은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리며 제 낯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어쩐지 먹먹해진 목청을 잔기침 몇 번으로 가다듬은 다음 황자님 향해 단호히 청하였다.
“내려주시어요.”
“으음?”
“얼른 내려주시어요.”
제 귀에도 ‘나 뿔났소!’ 하는 기색 선명히 묻어나는 목소리가 참으로 낯선 판에 황자님 귀라고 뭐가 다를까. 아니나 다를까, 얄밉도록 말갛게 웃고 있던 얼굴이 대번에 저처럼 무표정하게 돌변하나 싶더니 곧 청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어딘지 어둑하니 가라앉은 눈을 하고 가만히 저를 살피기 시작하니 희한하게도 그 모습 위로 영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황자님 얼굴이 덧씌워진다. 왜 그 있지 않은가. 무언가 일을 치거나 일을 치려고 제 눈치 살살 살피던 그 어리고 앳된, 너무나도 천진하여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안타까워지던 그 얼굴 말이다.
허나 그 덕에 머리며 가슴이 더욱 얼음장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화가 많이 났구나, 내 색시.”
그리고 익숙하지만 낯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재미있었어요?”
청은 자신이 무척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가지고 노니까,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더욱 서러워졌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뭉클뭉클 눈물이 차오를 만큼.
“마마 때문에 동동대는 거 보니까, 재미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를 향한 새까만 눈은 미동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어둑하니 깊어질 뿐이더라. 그래서 청은 더욱 서러워졌다.
당신이 왜 그런 눈을 해?
“그런데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어설피 배운 색사로 마마 달뜬 몸 달래느라 동동거리던 것? 아니면 이리 멀쩡한 분인 줄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끼고돌며 안달하던 것?
“아니면, 혹시 그것이어요?”
서럽고 또 지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미 그 창백한 뺨 위로 길게 물길이 그려지고 있었지만 청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넋두리하듯 저가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마마 지키겠다고, 이리 채이고 저리 맞던 그것?”
물어야 했다. 묻고 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듣지 않으면 그동안 저가 감당한 시간들이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알려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연신 흐득흐득 흐느끼면서도 제 할 말 모다 쏟아놓으려 애를 썼다. 들어야만 했으니까. 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저가 그 거짓에 휘말려야만 했던 이유를, 그럼에도 그 거짓 지금에서야 밝힌 이유를 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들어야만 했다.
끝까지 저를 속이는 대신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모든 것을 밝힌 이유를, 그래서 기어코 제 가슴에 대못을 박아 넣은 까닭을 들어야만 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 드디어 하나 마음 붙일 이가 생겼다 쉬이여긴 제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라도 그 대답 꼭 들어야만 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그리도 절 믿지 못하셨어요? 대체 어찌하여서?”
저는, 저는 정말 다 믿었는데…, 마마니까, 마마라서 다 믿었는데…, 그랬는데….
헌데 암만해도 제 서러움이 도를 넘은 모양이다. 저답지 않게 높아지나 싶던 음성이 결국 점점 격해지는 흐느낌에 잡아먹힌다. 저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가슴에 박힌 못이 크고 깊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 마디, 한 마디 쏟아내면 낼수록 그 말들이 모조리 저에게로 돌아와 제 폐부를 쑤시고 심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뼈저렸다.
아, 이토록 서러운 일이었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짓밟히는 것이 이토록 서러운 일이었구나. 이래서, 이래서 그이가 나에게 그리 가르쳤던 것이구나.
이래서 나더러 저와 같은 꽃은 되지 말라 하였던 것이구나.
그렇게 홀로 서러워 진저리칠 때였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흑…!
갑작스레 울린 그 목소리에, 소년은 다시금 터져 나온 흐느낌을 급히 되삼켰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저가 듣고자 한 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처절한 내용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황궁에서,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듣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에,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멀거니 넋을 놓아야 했다.
“당금 지존의 유일한 적통 황자. 그 이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너는 아느냐?”
알 리가 없다.
“오직 지존의 뜻 하나로 적통 황자가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혹시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 리 없다. 황궁에 적을 둔 지 몇 해라고 해도 결국은 원향전에만 죽치고 있던 저가 아닌가. 거기다 후궁들 몹쓸 짓에 황후마마 거짓 눈물까지 겪고 난 뒤로는 의식적으로 그런 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인네 요사라면 진작 학을 뗀 청이다 보니 혹시라도 그런 것에 휘말릴 것 같으면 부러 피해 가는 습관이 든 탓이다.
그래서 지금 제 서방 하는 소리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역시 저가 천것이라 귀한 분들 생각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것이 황자님 살고자 하는 것과 무슨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나 하나 죽여 팔자 좀 펴보겠다는 이가 어찌나 많던지 자박자박 걸음마 할 적부터 밤손님깨나 받았단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죽이겠다는 이도 있다지.”
다만 그가 얼마나 참혹한 시간을 거쳤는지 알게 되었다. 어찌하여 그가 살아남고자 한 것인지도.
“어찌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찌하면 저들이 날 모른 척할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백치 노릇이라지. 마침 독에 잘못 당해 실제로 한 보름 남짓 백치 꼴이 되기도 하였고. 그게 딱 열다섯 되는 날이었다.”
하여 황자님 구구절절한 사연에 홀리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참담함에 질린 청은 더욱더 할 말을 잃고 또르륵 눈물만 흘렸다. 참말로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싶더라. 저가 듣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왜 저를 이토록 서럽게 만든 건지만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버려졌지.”
날 죽이려 한 이들은 물론 내 어미라는 이에게까지.
“……!”
그래서 흠뻑 젖어든 제 뺨 부드럽게 감싸는 커다란 손에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몇 개나 되는 대못이 박혀 피가 철철 흘리던 가슴이 제 처지도 잊고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둑하니 가라앉은 눈으로 버려졌다 이야기하는 황자님 낯이 지나치도록 잔잔하여 또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불쑥 고개를 든 것이다.
“그런 낯 하지 마라. 덕분에 내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알면 너도 아마 깜짝 놀랄 게야.”
씁쓸하게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던지 잠시 멈추나 싶던 눈물이 또 툭 터지고 말았다.
“차마 폐하께마저 거짓을 고할 수 없었기에 나중에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사실을 밝히니 그분도 그러시더라. 이왕 이렇게 된 것 백치 노릇이나마 하며 편히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심지어 죽지 않게 지켜주겠다는 말 대신 백치 노릇하며 편히 지내는 것을 권한 지존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제 입에서 절로 곡소리가 흘러나오더라. 참담하고 또 참담하니 귀하신 분 처지가 어찌하여 저와 같은 천것만도 못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백치 노릇 자처했다지. 가끔 고단한 일은 있어도 죽을 일은 사라지니 그거 참 좋더라.”
맘 편히 자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던지….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좀 더 화를 내야 하는데 화를 낼 수가 없더라. 스스로가 참으로 모자라다 못해 병신 같다 여겨졌음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부여잡게 되더라. 머리로야 그게 아니지만 마음이 반대쪽을 향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어찌할까.
“하지만 계속 백치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참말이란다. 내 이립(而立)에 이를 즘이 되면 다 나았노라 나설 작정이었단다. 내 사실 정신은 멀쩡하여도 몸이 좀 상하였거든? 암만 기다려도 자라는 것이 더디지 무어냐? 헌데 의원 말이, 그때쯤이면 덜 자란 몸도 다 자라 있을 거라더라. 그래서 그러면 되겠구나 했지.”
게다가 그 이야기라는 것이 점점 저가 원하는 답에 가까워짐이 느껴진다. 잔뜩 졸아붙은 것도 모자라 대못까지 몇 개나 박힌 염통이 또 정신을 못 차리고 발딱이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더라.
“그런데 네가 나타났다지.”
“……예?”
이어지는 그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 부여잡고 마른침만 삼키기 바빴으리라.
“갑자기 덜 자란 나보다도 더 못 자란 조그만 것이 백치라는 내 수발들겠다며 나타났다지.”
그리고 저와 황자님 처음 만난 그날 떠올리며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저가 그날, 그 순간에 얼마나 무지하고 건방졌는지 말로 다 못할 지경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세상에, 암만 모자란 흉내를 내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그리 무엄한 행사만 골라 하였을까.
허나 저가 부끄러워 몸서리칠 일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헌데 그 조그만 것이, 날 지키겠답시고 제 몸 아낄 줄을 모르더라.”
“소, 송구하옵니다….”
“제 몸 아낄 줄 모르고 겁도 없이 나서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고 가슴에 맺히더라.”
“…그, 그것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널 이 마음에 품고 있더라.”
“…….”
참말로 이제 겨우 시작이더라.
“청아.”
“……………예에….”
“청아, 내 색시.”
어찌하여 그 고운 낯 자꾸만 가리는 게야? 응? 가리지 마라. 가리지 말고 날 좀 보아.
어쩐지 능글맞은 어조로 저를 어르기까지 하니 이제 제 낯은 달아오르다 못해 아예 녹아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었다. 허나 황자님께서 도통 그 낯 뜨거운 말 멈출 생각을 않으시니 청은 이제 사람이 너무 부끄러워도 죽을 수 있음을 체득하였다.
“내 너를 지키려 이리하였다.”
내 색시 무탈하게 내 곁에 둘 방법이 그뿐이었다 이 말이다.
“―?!”
그리고 마침내 저가 알고자 하던 답을 받으니 그 내용 참으로 희한하다 못해 망측하더라.
“백치 노릇하며 혼례를 하여도 되기는 하였지. 허나 말하지 않았니. 내 유일한 적통 황자라는 것 하나로 매일처럼 사지에 내몰렸다고 말이다.”
“그, 그는…, 그는 그렇지요.”
“백치가 된 적통 황자의 하나뿐인 내자도 딱 그만큼만 위험해진단다.”
“……네?”
“네가 전에 독에 당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지.”
“대체 어찌하여….”
희한타, 참말로 희한타. 분명 알아들을 듯하더니 이제는 또 하나도 모르겠네.
조금 알아듣겠다 싶던 이야기가 순식간에 멀어지니 청은 뭐라 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황자님 말간 낯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참이나 더 남은 듯하던 말소리 뚝 잘리나 싶더니 저가 바라보고 있던 그 낯이 돌연 제 코앞으로 훅 닥친다.
“―으븝…!”
그리고는 제 숨결 덥석 잡아먹으려 드는 황자님 행사에 기겁을 하고 두 눈을 감으니 여전히 마주 닿은 입술 틈으로 다 뭉그러진 황자님 음성 흐릿하게 새어 나오더라.
“내가 이래서 너를 귀애한다지.”
네 이런 모습이 참으로 어여뻐 귀애하지 않을 수가 없다지.
기꺼움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 그 음성에, 청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제 입술 서방에게 내어 맡기고 말았다. 헌데 생전 처음 겪는 접문이라는 것이 어찌나 짙고 농염한 것이었던지 얼마 남지 않은 청의 정신이 단숨에 열 길 밖으로 달아날 지경이더라. 덕분에 청은 제 몸이 다시 사내의 넓고 단단한 품에 가둬진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 그렇게 갇힌 모양 그대로 신방이 차려진 침전으로 향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색시, 내 청수련.”
촉, 촉…. 연이어 습하게 울리는 접문 소리에 스며든 사내의 음성은 저를 두고 꽃이라 하였다.
“우리 이제 꽃잠 자러 간단다.”
가시버시 맺었으니 제대로 꽃잠 자러 가야지.
연이은 꽃 타령에 제 정신 더욱 아득히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사내는 겹겹이 껴입은 고운 혼례복 하나둘 벗기다 못해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색시야, 내 하나뿐인 청수련. 어여쁘다, 내 색시.”
그 덕에 청이 기어코 사내의 몹쓸 속내 솜털만큼이나마 알아차렸다는 것도 모르고 발긋하게 달아오른 속살 연신 탐하며 알록달록 귀하게 꾸며놓은 신방 침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후에 제국의 사서에까지 남은 초야의 시작이었다.
꽃이 되기 싫어 잡초를 자청하였던 소년이 기어코 꽃이 되고 만 밤의 시작은 그러하였다.
그날, 그 밤에 제대로 꽃값도 받지 못하고 꽃이 되어 꺾이고 말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곱씹고 또 곱씹다가 어느 순간 홀리고 마는 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 *
“―원. 양원? 양원!”
“…어, 어? 네?”
하여 오늘도 청은 제 기억에 취하고 홀려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송구하오나, 혹여 어디 미령하신 것은 아니온지요?”
“응? 네? 저, 아니, 나요?”
그제야 또 저의 정신이 그 낯 뜨거운 순간에 닿았음을 알아차린 청은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래서 사람이 놀면 안 된다는 게다. 할 일이 없으니 자꾸만 쓸데없는 기억에 홀리고 생각에 취하는 게다. 아이코, 내가 참으로 그날 되게 놀란 모양이구나. 어찌 좀 넋을 놓았다 싶으면 그날 일부터 떠올릴 수가 있나.
이게 다 할 일이 사라진 탓이야.
차라리 예전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각 살림이라도 챙기면 좋으련만, 후궁 첩지 그게 뭐라고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는 것도 모자라 살갑게 이야기 나눌 말동무 하나도 구할 수 없더라. 예전 같으면 황자님이라도 붙들고 하루를 보내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사지는 물론이요, 정신마저 멀쩡한 것이 알려진 뒤로는 이 황궁에서 가장 바쁜 분이 2황자님이셨다. 그가 가장 귀애하는 애첩조차 아침나절에 얼굴 한 번 보면 잠들 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볼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 할 일도 없는데 말동무할 이도 없으니 이거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도 이보다는 낫지 싶다. 금을 타려 해도 들어줄 이가 없고 업으로 삼을 작정도 아닌데 매일 서화에 매진할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글줄이라도 읽을라치면 반 시진이 지나기 무섭게 궁인들이 나서서 말리기 시작하더라. 이유인즉슨 지나치게 서책에 매진하다 보면 눈이 쉬이 피로해지고 기능이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여야 하기 때문이란다. 아니, 뭘 하려고만 들면 기어코 건강 문제로 연결해 깊이 근심하며 만류하기 일쑤라 가끔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갑갑하였다.
“의원을 들이라 할까요?”
지금도 보아라. 잠시 생각 좀 깊이 하느라 그 부름 바로 못 알아들은 것을 두고 의원부터 찾는다. 할 일이 없어 이런 것을 두고 병증 취급부터 하니 참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라.
“아니, 아니어요.”
“그래도….”
“내 여직 전각 안에만 있다 보니 이런가 봅니다. 바람 좀 쐬면 나을 것이어요.”
하여 나름 열심히 제 몸이 멀쩡함을 피력하는 청이지만 그런 상전 바라보는 여인네들 시선은 그야말로 의심이 가득하다. 지금껏 저가 이들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거늘 어찌하여 이리도 신용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생각해보니 못 믿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뭐라고 저들이 믿어줄까. 그에 살짝 시무룩해진 청은 다시금 다부진 낯으로 제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참말입니다. 늘 하던 산보 한 번 다녀오면 금시 나을 것입니다.”
“양원, 그는 아닌 듯 싶…. 양원? 양원!”
그리고 잽싸게 몸을 일으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니 꽃살문 밖으로 나섰다.
그날, 저가 꽃이 된 그날의 기억에 취한 탓으로 근심 걱정 한 다발 끌어안은 낯이 된 궁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암만해도 이것이 저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더라.
저에게 주어진 양원이라는 낯선 이름을 온전히 받아들인 지도 어느덧 한 달 보름.
오늘도 청은 할 홀로 원향전 후원을 거니는 중이다. 할 일이 없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전각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셔 나선 걸음이 어느덧 일과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 등쌀 아닌 등쌀에 휩쓸려 나갈 판인 것을.
당연하지만 원치도 않은 후궁 첩지를 받은 이후로 청의 일상은 꽤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청은 새벽같이 일어나 조반 상 차릴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전각 청소며 빨랫감 정리에 오전 내내 동동거리며 움직일 일도 없다. 거기에 문사 양반 올 시간 맞춰 그저 그런 찻잎으로 그럴듯한 맛을 내기 위해 고심할 일도, 저가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주전부리로 황자님 심통 달랠 일도 없다. 무엇보다 저가 황궁에 들어와야만 했던 이유가 사라진 덕에 마음은 몰라도 몸 하나는 확실히 편하게 되었으니, 이는 저가 더 이상 2황자님의 시종이 아니요 2황자님의 하나뿐인 후궁으로 부족하나마 황가의 이름을 받게 된 결과더라.
이제 청은 마음 편히 늦잠을 즐길 수 있었다. 아니, 실은 늦잠을 잘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를 두고 눈치를 볼 일은 물론이요 눈치를 줄 이도 없더라. 게다가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손길 아래 말끔해진 원향전 이곳저곳을, 역시 다른 누군가가 손질하고 챙겨놓은 귀한 비단옷 차려입고 거니는 것으로 얼마 남지 않은 오전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손 하나 까딱 않고 남이 챙겨주는 밥상을 받는 것도 모자라 저가 우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맛의 차를 마시고 투박한 모양새의 꿀떡이며 부꾸미 같은 것을 먹겠다고 직접 만드는 대신 감히 입에 넣기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모양새를 뽐내는 떡이며 과자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주어졌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뭐든 저에게 주어졌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암만 좋은 호사라도 본인이 제 분수에 맞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호사가 아닌 법. 아니, 차라리 형벌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하필 청이 딱 그 짝이더라. 그도 그럴 것이 원래도 호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나고 자란 청이다. 거기다 하루도 빠짐없이 원향전 살림을 챙긴답시고 움직이던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다가 갑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되니 이거 참 불편하기 짝이 없더라. 몸은 편할지 몰라도 대접받는 것이 어색하고 저를 모시는 이들에게 미안해 마음이 영 불편하였다.
헌데 참다못해 불편한 티 좀 냈더니 원향전에 새로 든 궁인들이 대번에 난리가 나더라. 주인을 모시는 데 있어 부족함을 드러낸 아랫것들 벌하여 달라 청하는 소리 듣고 아주 기겁을 했더랬다. 그도 모자라 훈육 상궁 중 하나가 쫓아와서 궁인들 교육이 부족하였다며 사죄를 하는 통에 한 며칠 넋이 나갔더랬다.
불편한 티 한 번 냈다 이런 홍역까지 치르게 되었으니 별수 있나, 졸지에 전각 주인이 아랫것들 눈치 보느라 나도는 꼴이 될밖에. 그나마도 제 서방이라는 이 말고는 이렇다 할 끈도 없는 청인지라 어디 나갈 생각도 못 하고 후원 산보라는 명목 아래 처소인 원향전 안에서만 맴돌고 또 맴도는 중이다. 매일처럼 새로워지는 전각 모양새 덕에 나름 둘러보는 재미가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으리라.
여기가 이런 곳이었구나.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오늘도 전각 안 정원들을 차례로 둘러보던 청은 후원 안으로 느릿하니 걸음을 옮기다 말고 또 멍하니 전각을 바라보았다. 암만해도 희한해서 몇 번이나 확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음음, 어디 보자. 저기 저 용마루 양 끝에 똬리 튼 용신님이나 북편 처마 아래 매달려 간간이 잘랑대는 초롱꽃 모양 풍경도 그대로구나. 황자님 뿔나면 그 심술 다 받아내느라 몇 번이나 새로 만들어 달아야 했던 꽃살문들이며 볕이 좋은 날이면 둘이서 나란히 앉아 달달한 냉차며 고소한 군밤 나누어 먹던 툇마루도 여전하구나. 음음, 이리 보면 딱히 달라진 게 없는 것도 같은데 말이지.
여기가 황궁은 황궁이었네.
허나 자리를 옮겨 좀 더 찬찬히 살피기 시작하니 또 그게 아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행색이었던 과거가 믿기지 않을 수준으로 환골탈태한 원향전의 모습은 볼 때마다 새롭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였다. 하기야 당장 지금 저가 자리한 곳만 해도 얼마 전까지는 우거진 수목 사이에 가려진 탓에 있는 줄도 몰랐던 원정(園亭)이 아니던가. 이전의 원향전이 누가 봐도 음침한 은둔처의 모양새였다면 지금 제 앞에 펼쳐진 원향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황궁의 일부다웠다. 그동안 내버려두다시피 한 덕에 가려져 있던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모자라지도 않는 갖가지 치장이 드러난 덕분이었다.
이래서 사람 들고 나는 게 무서운 게야. 암, 그렇고말고.
어쩐지 황궁에 자리한 전각치고는 참으로 볼품이 없구나 했더니 그게 다 사람 손이 제대로 닿지 않아 그런 것이었나 보다. 손질하는 이가 없어 아무렇게나 마구 뻗어 자란 나무 몇 그루 치운 것만으로 자그마한 정자가 나타나고 색색의 돌 물감 삼아 그려놓은 산수화가 나타나는가 하면 잡풀이 자라다 못해 아주 숲을 이룬 곳 말끔히 손질하고 보니 그냥 돌도 아니고 옥돌로 깎아 만든 석등이 이리저리 자빠져 있더라. 그리고 또 무엇이 있더라…. 아, 궁의 시설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나왔다는 이들이 커다란 두루마리 펼쳐 들고 이리저리 다닌 다음 날에 몇몇 문과 창이 고운 색유리로 바뀌기도 하였다. 원래 그리 꾸며져야 하는데 어찌하여 같잖은 판자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냐며 크게 화를 내는 소리가 별채에 갇혀(…) 예법 공부에 매진하던 제 귀에까지 들렸더랬다. 그런 식으로 바뀐 것이 몇 번이던가.
하여튼 사람 손이 닿기 시작하니 그야말로 환골탈태가 따로 없다. 저가 예법 공부 시작할 무렵부터 뜯어고치고 쓸고 닦았으니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이거늘 이제는 알아볼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나마도 자고 일어나면 뭔가 하나 늘어나 있거나 바뀌어 있어 산보 다닐 동안 심심할 겨를이 없더라. 비록 이럴 때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가 다 먹고 나면 사라지고 없는 다과상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지만 뭐 어떠랴. 이마저도 불편하다고 했다가는 아예 원향전 궁인들이 모조리 갈릴 판인데.
“으음….”
어쨌거나 청은 이제 아예 턱까지 괴고 원향전 외양 살피기에 나섰다. 오늘은 또 무엇이 더해지고 바뀌었나 살피는 것이다. 그냥 살피기에는 또 입이 심심하니 다과로 나온 콩 강정 오독오독 씹어가며 살핀다. 다시 요리조리 개암나무 열매 같은 갈색 눈동자 굴리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어제와는 때깔부터 달라진 전각 2층(그렇다. 원향전 본채는 다락이 포함된 단층 건물이 아니라 천장 일부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2층 건물이었다)이 기다렸다는 듯 제 모습 뽐낸다. 좀 전에 후원 막 들어설 때는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던 것이 멀찍이 떨어져 앉으니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다시 찬찬히 살피고 보니 용마루 양 끝 용신님 입에 뭔가 못 보던 것이 물려 있는데 그게 암만해도 범상치 않다.
……도금…은 아니겠구나.
그것은 바로 엊저녁까지는 볼 수 없었던 크고 아름다운 모양새의 황금 여의주더라. 졸지에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금덩이 둘을 머리 위에 이고 지내게 된 것을 알게 된 양원 직분 한 달 보름 차 소년의 낯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소년은 하얗게 질린 낯으로 급히 찻물을 들이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거푸 들이켜 마시다 보니 자그마한 차호 바닥나는 건 순식간이더라. 그럼에도 두근대는 가슴 가라앉을 줄은 모르니 이는 청이 이미 고달플 대로 고달픈 밤이 더욱 고달파지게 된 것을 알아차린 탓이라.
뭘 어찌하였기에 저런 것이 둘이나 올라가 있담?
반쯤 넋이 나간 채 용마루 양 끝만 살피던 청은 결국 쿵쿵, 뭐가 떡하니 걸려 맺힌 것 마냥 갑갑한 가슴 두들기기 시작했다. 대체 양원 직첩이 무어 대단한 것이관데 자고 일어나면 온갖 귀물(貴物)들이 늘어나 있다는 말인가? 이거 참 호사가 과하다 못해 깔려 죽을 판이다. 아직 귀한 색유리 창이나 사방에 드리워진 능라비단으로도 가슴이 벌렁대는 마당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이던가. 황자님 애첩 자리가 이토록 호사스러우니 혹시라도 정궁이 되었으면 진작 저를 향한 넘치는 호사 버티다 못해 그대로 말라죽었으리라.
…해웃값인가?
그러다 곧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청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고 해도 과하기는 매한가지였던 탓이다. 암만 기생 첫머리 올리는 값이 유별나다고는 해지만 그것도 급에 따라 다른 법이다. 하물며 꽃이 되기 싫어 천덕꾸러기 짓도 모자라 제 외양 한 번 제대로 챙긴 적 없는 저가 급이 높아봤자 얼마나 높겠는가? 그러니 과하다. 과하고 넘치다 못해 아예 저가 깔려 죽을 판이라.
게다가 저에게 따로 가무화서 같은 기예나 유려한 언변으로 몸값을 올릴 겨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제대로 기생도 되지 못하였는데 몸값 올릴 만한 일을 할 건 또 무어란 말인가. 기껏 한 것이라고는 백치로 꾸민 황자님 돌보는 보모 노릇에 거기다 후궁 첩지 받은 이후로는 그나마도 못 하였다. 이제 저가 하는 일이라고는 남 보기 좋을 만큼 곱게 단장하는 것과 늦은 밤 제 서방 끓어 넘치는 정욕 감당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전부.
“…훗….”
순간 소년의 낯 위로 어둑한 웃음기가 스친다. 아니, 차라리 비웃음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그럴밖에. 지금 저를 두고 뭐라 불러야 할지 알아차린 것이다.
창기(娼妓)로구나.
그래, 맞다. 이는 누가 봐도 제 몸뚱이 하나 잘 굴려 먹고 사는 창기라 할 삶이라. 말이 좋아 부부지례에 후궁 직첩이지 하는 것만 따지면 더도 말고 창기 짓이 아니던가. 아직은 제 서방 되는 이가 저를 두고 곱다 예쁘다 물고 빨기 바쁜 덕에 아랫사람들 대접을 받는 것이지 그나마도 없었다면 진작 천대받고도 남았으리라. 아아, 어찌하여 이제야 이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내가 참말 정신을 놓고 살아도 보통 놓고 산 것이 아니야.
향화루 동기 시절을 떠올리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더욱 덩치를 키운다. 창기라는, 온전히 몸 파는 것 하나만 하는 기생들의 위치란 그런 것이었다. 기생으로 길러지는 어린 것들조차 꺼리고 천시하는, 하여 저처럼 어지간히 무던한 성격이 아니면 일단 피하고 보는 이들이 바로 몸만 파는 창기들이라. 저가 시종으로 들어갔던, 저더러 꽃이 되지 말라 가르쳤던 그이가 바로 그런 창기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이가 귀하신 분들만 상대하는 비싼 몸값의 고운 이였음에도 천대를 받았더랬다. 그러니 저처럼 가진 것 없고 추레한 자는 오죽할까.
생각하니 또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에 염통이 지끈댄다. 귀한 분 모시러 황궁에 들었을 이들이거늘, 기껏해야 밤이면 밤마다 사내의 몸으로 같은 사내를 받아들이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음란한 교성이나 쏟아내는 창부를 상전으로 모시게 된 그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할 것이냐. 그럼에도 저를 편히 모시는 데 여념이 없는 원향전 궁인들 정성을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죄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런 주제에 감히 그네들더러 불편하다 눈치를 주었으니 염치가 없는 것도 이 정도면 천하에 으뜸이라.
이 업보를 어이할꼬….
아둔한 저로 인해 여태껏 얼마나 많은 이가 불편함을 감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 소년은 잠깐 사이 바삭바삭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이다 말고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쉬이 가시지 않는 갑갑함에 또 쿵쿵, 제 가슴 두들기던 청은 결국 제 옷 앞섶 단단히 틀어쥔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리 큰 문제를 이제야 깨달은 제 아둔함이 참으로 원망스럽더라.
내 이 어마어마한 업보를 어이할꼬….
제 분에 넘치는 호사를 감당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기 짝이 없는 원향전 마마의 가슴에 또 하나의 근심이 더해지매 남은 것은 새들새들 말라드는 꽃잎뿐이더라.
“또 혼자 앓고 계신 게요?”
“예, 그러하네요.”
넷 중 가장 말석인 탓으로 매일 상전 심기 살피고 오는 일 도맡아 하고 있는 채 나인이 시무룩한 낯으로 답하니 대번에 근심 가득한 한숨 사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는 황궁답게 애기나인 시절부터 별별 상전 다 겪어본 네 여인이었지만 이런 상전은 처음이다. 설마하니 호사를 감당 못 해 속병이 나는 상전을 모시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사실 새로이 발령장을 받을 때만 해도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던 네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사람 모두 빠르면 석 달, 늦어도 열 달 안에 상궁으로 진급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상궁 직급 받는 것과 동시에 더 높은 위치로 발령받아 떠날 이들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되는 진급 예정자들을 불러 모으나 싶더니 황궁에서도 가장 깊고 외진 곳에 자리한 원향전으로 가라지 뭔가. 그것도 제 아래 아이들 중 입이 무겁고 행동이 재바른 아이 셋씩 골라 함께 움직이란다. 너무 놀라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냐 물었더니 아직 제대로 된 직첩조차 받지 못한 이를 모셔야 한다더라. 소문으로만 듣던 백치 황자의 내자 될 이가 새 상전이라더라. 알음알음 아기마마라 불리고 있다던 홍등가 동기 출신 나이 어린 사내 말이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훌륭한 유배나 다름없는 내용의 발령이었다. 당연히 반가울 리 없다. 게다가 혼자도 기가 막힌 마당에 함께 가게 될 아이들은 또 무슨 죄던가. 하여 네 여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발하려 할 때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대전 지밀이 대뜸 한 마디 날리니 그 내용 다음과 같더라.
― 자네들, 크게 출세할 모양이구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네 여인이 그대로 굳어있으니 또 그런다. 곧 알게 될 거라고, 그러니 충심을 담아 지극정성으로 상전을 상전답게 만들어두라고만 하더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궁들 중 으뜸이라는 대전 지밀이 그렇게 말하니 넷의 마음이 혹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의 지시대로 상전을 상전답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과정을 수반하는 것인지 짐작도 못 한 네 여인은 그렇게 이름도 낯선 원향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진 달포 남짓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오느니 한숨이요 돌아서니 눈물이라.
천한 출신 탓에 법도대로라면 간신히 후실 중 말석인 소훈(昭訓) 직첩이나 받았을 아기마마지만 황자님의 유별난 성화 덕에 어찌어찌 양원 직첩을 받게 되었다 들었다. 출신만 분명했어도 진작 정궁 자리 맡아놨을 만큼 황자님 총애가 남다르다 들었다. 하여 네 여인과 그 아래 열두 궁인들은 아기마마라는 이를 두고 당연히 인물이나 교태도 남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심지어 원향전 들어서자마자 추레한 꼴 마주하고도 그 믿음은 굳건하였다. 당장이야 어쨌든 유명한 기루에서 동기로 키워지던 이라 하지 않았던가. 뭐든 바탕은 있겠거니 그리 믿었더랬다.
헌데 본격적으로 단장에 나서니 이게 웬걸. 바탕이고 나발이고 보름 내로 상전다운 모양새 만들 생각하니 아득하기 짝이 없더라. 여인네보다도 가냘픈 몸으로 너른 전각 살림 홀로 감당하느라 손발은 물론이요 육색이며 머리털까지 뭐 하나 멀쩡한 게 없는 건 시작이었다. 누가 시중드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니 뭘 하든 쉽지가 않더라. 게다가 백치라 소문난 2황자께서 매일을 하루처럼 제 색시 찾으며 난동을 부리시니 퇴궐하는 걸음걸음 눈물이 아롱지더라.
아기마마께서 정식으로 양원 직첩 받은 다음 날 저녁에 넷이서만 따로 모여 축배를 든 것도 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치인 줄 알았던 2황자께서 알고 보니 지극히 멀쩡하다는 이야기부터 대전부터 원향전까지 장부 걸음으로 꼬박 이 각 거리 내내 총희 품에 끼고 그 도타운 정 만방에 드러내셨다는 이야기, 거기에 길고 뜨거운 두 분의 초야까지 더해지니 그제야 자신들이 잡은 줄이 참말로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금빛 찬란한 황금 동아줄임을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게다가 황자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손질하신 것인지 엄연히 내명부 소속인 양원임에도 친히 황명으로 다른 후궁들은 물론 황후마마의 사사로운 접근까지 막은 덕에 양원 아래 적을 둔 상궁이며 나인들까지 덩달아 편해진 것이다.
과연 대전 지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으니 이로써 한발 앞서 원향전에 든 궁인 전원의 미래는 꽃길만 이어질 터였다. 당연 축배를 들 수밖에. 하여 서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 즐거이 귀한 상전 모시게 된 기쁨 나누었더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새로이 모시게 된 상전께서는 아랫것들 속 태우는 재주가 참으로 유별난 분이시더라. 그것도 다른 후궁들처럼 악랄한 행사나 몹쓸 언사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상전 자리에 올랐음을 견디지 못해 틈만 나면 홀로 끙끙 속앓이를 하는 것이 환히 보이는 탓이라.
이에 원향전 궁인들은 물론이요 그들을 이곳에 밀어 넣은 대전 지밀까지 나서 별별 수를 다 써보았지만 뭐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불편한 기색 줄줄 흘리는 중에도 당신 할 말 다 씹어 삼키는 통에 원향전 궁인들 모두는 진지하게 독심술 공부를 배워볼까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더랬다. 다른 후궁전에서는 상전의 패악에 피가 마른다던데 이곳에서는 상전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통에 속이 썩는다. 참말이지 유별나기로는 황궁에서도 으뜸이실 상전이시라.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혼자 계실 적마다 복잡한 낯으로 속앓이 하는 치 줄줄 흘리기 시작하셨으니 원향전 궁인들은 오늘도 그 모습 바라보며 피가 마르고 속이 썩어가는 중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가지고 저리 앓고 계시는 것일까요?”
“에효…, 그를 알면 우리가 덩달아 속을 끓일 일도 없지 않겠소. 채 나인, 좀 전에 안에서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데 따로 들은 것 없어요?
“웬걸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낯빛이 불그스름한 것이 신열이 있나 싶어 여쭤보았더니 아니라며 기어코 저리 나가계십니다. 금 나인, 아침나절에는 괜찮았다면서요.”
“괜찮다마다요. 흔치 않게 머리를 어찌 빗어달라는 말까지 하셨는걸요. 양 나인도 같이 들었잖습니까?”
“예, 옳습니다. 저더러는 오늘 하루 맑은 얼굴로 있고 싶다고도 하셨지요. 눈 아래 그늘이 워낙 짙어 어쩔 수 없지 백분을 칠해야 했던 것이 어찌나 송구하던지….”
그래도 오늘 아침나절까지는 전에 없이 이리해 달라, 어느 것은 싫다 하시며 제 뜻 확실히 밝히시더니 오반 때 넘기기가 무섭게 또 저러고 계신다. 심정 같아서야 대체 무엇이 그리 고달프냐, 무어가 그리 속을 썩이느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건만 먼저 뭘 하려고만 하면 불안한 낯으로 아랫것들 눈치를 보시니 차마 말도 못 건다. 그저 몰래 다과나 챙겨드리고 알아서 털어내시기를 기다릴밖에.
“다른 아이들은요? 아무도 들은 게 없답니까?”
허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거니와 오늘따라 상전 안색 참으로 창백하다 못해 백분을 통째로 칠해놓은 것만 같으니 지켜보는 아랫것들만 바쁘다. 넷 중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먼저 상궁으로 진급한 송씨가 거듭 채근에 나서 연신 문답을 주고받던 다른 세 여인은 물론이요 말없이 자리하고 있던 궁녀들 몇까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내젓는다. 잠깐 사이 한참이나 파고들었음에도 제대로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저기 후원 정자에 홀로 근심에 빠져있는 상전처럼 제 가슴 쿵쿵 두들기는 상궁 송씨다.
“아이고…, 이러다 우리도 속병이 나겠구먼.”
그리고 원향전 공기만큼이나 우중충한 그녀의 한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깊은 한숨 몇 다발이 맞장구를 치더라.
황궁에서 가장 귀한 꽃이 되었음에도 홀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소년과 그런 소년을 상전으로 모시는 아랫것들의 근심과 고뇌는 오늘도 그 깊이를 더하였더라.
“송구하오나 그는 아직 때가 아닌 줄 아뢰옵니다.”
거참, 지랄도 풍작이로다.
몇 단 아래에서 꼬장꼬장한 낯을 하고 지절대는 늙은 너구리 낯짝이 참으로 뻔뻔하니 광의 심사가 또 한 번 비꾸러진다. 몇 번이나 정리하고 때려잡은 덕에 어지간하면 몸을 좀 사리겠거니 했더니 착각이었다. 좀 살 만하다 싶으니 대번에 기가 살아난 것도 기가 막힌데 그 기세로 대전에서 지랄 굿을 하는 것까지 보고 있노라니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가 이제는 아예 살기를 품고 들썩일 지경이다.
“2황자의 심신 무탈이 확인된 지 채 백 일도 되지 않았사옵니다. 또한 폐하께옵서도 강건하신즉 태자 책봉이 중요하기는 하나 시급하다고는 볼 수 없지 않사옵니까? 하오니 소신은 아직 때가 아니라 보옵니다.”
그래, 아직 때가 아니지.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친 듯이 굴러가는 대계의 움직임이 아니던가. 적당히 고삐를 죄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채찍질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그러니까 당장 단 아래로 몸을 날려 저 뻔뻔하게 지랄을 떨어대는 늙은 너구리놈 이빨이나 몽땅 털어버리고 싶거나 말거나 참아야 하는 것이다. 사내는 부글거리는 속 다독이며 비틀어진 속 흐릿한 미소로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
“송구하오나 폐하. 무릇 국저의 자리라는 것은 결코 본신의 자질 하나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비록 2황자님 타고난 자질과 가진 능력이 형제들 중 가장 으뜸이기는 하나 아직 부족함을 다 메울 만큼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한 번 미친놈 두 번은 못 미치랴.
허나 이어지는 막말 아닌 막말의 행렬이 사내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했다. 무엇을 노리는지 빤히 보임에도 충신의 낯을 꾸미고 지절대는 꼴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못해 대전 한가운데서 칼춤이라도 춰야 하나 고민을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저가 이 자리에 없으면 또 모를까 지존의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는 걸 뻔히 보고도 저리 미쳐 날뛰고 있다. 특히나 충심으로 간언(諫言)을 올리는 척 제 잇속 챙기려는 그 행사 참으로 가당찮더라.
아니, 백 보 양보해 너구리 두목이라는 작자야 혼기가 되었거나 곧 혼기를 맞이할 나이의 친손녀가 둘에 외손녀가 하나인 것도 모자라 첩실에게서 얻은 늦둥이 아들 미색이 남다르니 내세울 게 많아 저 지랄이라 치자. 하지만 그를 거든답시고 나선 너구리들 중 하나는 자녀들이 모두 성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손자손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식이 갓 세 돌을 지난 이였고, 다른 하나는 아예 아들만 다섯이었다. 이쯤 되니 저것들이 미친 것인지 저가 미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라.
“하물며 정궁도 없이 천출 후궁 하나만 들이지 않았습니까? 이는 분명 호사가들에게 빌미가 될 것이옵니다.”
잘들 논다.
거기에 기어코 한 발 걸치는 쥐새끼들 수장이라는 작자의 말까지 더해지니 이제 사내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웃음을 참고자 조용히 찻물을 들이켜야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오만 웃긴 꼴은 다 보았다 여겼는데 이 미친 것들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니 그도 아닌 모양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들이 이럴 때는 기가 막히도록 죽이 척척 맞는 꼬락서니 보고 있노라니 너무 웃겨 오장육부가 다 꼬일 판이라. 특히나 마지막으로 발을 걸친 자는 그 어리석음이 참으로 장하였다.
“신하된 자의 도리 이전에 조카를 아끼는 숙부의 심정을 담아 간하옵나이다. 부디 통촉하여주옵소서.”
진짜 혈육이 아닌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기도 간만이로세.
그리고 진심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멍청하면 제국의 법이 팔촌 이내의 관계는 혼인을 금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저리 헛꿈을 꾸는 것일까. 참고로 저 멍청한 이가 누구인가 하면, 지존께서 당신 편하자고 멋대로 끼워 맞춰놓은 제 출생사 덕에 대외적으로는 저와 외숙과 조카로 엮인 이였다. 즉, 저 멍청함이 지나쳐 한심한 이가 바로 여우의 동복형제요 그 뒷배라 할 산천 남가의 가주인 것이다. 쯧, 저러니 여우의 일가임에도 여우가 아니라 쥐새끼 소리를 듣는 게지.
어쨌거나 너구리 떼 컹컹, 쥐 떼 찍찍 짖어대는 것 보고 있노라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 지켜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저가 온전하다는 것이 밝혀지기 무섭게 처소와는 별개로 공무를 위한 전각이 주어진 것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하루의 대부분을 서류와 장계, 그리고 격무에 찌든 산송장 떼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실은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도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온갖 비리 관련 서류들을 장궤(長櫃)로 받아 살피는 중이었다. 온 나라에 도둑놈과 밥버러지가 창궐하고 있다는 거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손을 대려고 보니 이거 참 끝이 없더라. 게다가 백치 시절부터 물 밑에서 관리해오던 지방과 외세까지 중앙이 혼란한 틈을 노리고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사내가 할 일은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이렇듯 일각이 아쉬운 참에 같잖은 권세 하나만 보고 저 좋을 대로 설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욱기가 치밀다 못해 자리도 잊고 살심이 들끓더라.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지금 너구리며 쥐새끼들 떠들어대는 꼬락서니 보아하니 제 코밑만 본다고 주변 살피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아니면 자기들 셈이 앞서 일부러 무시를 했던가. 그게 아니고서야 변방 지역을 봉토로 하는 이들이 함께하지 못해 위세가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귀족원의 간언입네 하고 모여 있을 리가 없다.
곧 제 수족이라 믿었던 이들이, 제 뒷배가 되어 주리라 안심하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뒤통수를 치고 또 어떻게 흔적도 없이 지워질 줄도 모르고 저 지랄들을 떨 리가 없는 것이다.
하여 불편한 심기 드러내는 대신 지금 가장 상석에서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얼굴로 자리하고 계신 지존의 낯을 흉내 내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내면 저 미친 것들이 저를 향해 왈왈 짖어댈 게 뻔해 살짝 진중한 빛을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너구리와 쥐는 연합을 하여 자신들의 혈족 중 하나를 정궁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내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찬성하겠다는 개소리를 충심으로 간하는 것이라 포장하여 짖어대기 바쁘다. 덕분에 광의 머릿속에는 누구를 어떻게 솎아낼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차곡차곡 더해지는 중이다. 저 너구리는 가진 것이 많으니 국고를 채우는 데 써먹으면 될 것이고 저 쥐새끼는 남방에 사략함대를 굴리고 있다하니 그것들 정리하면서 엮으면 될 것이며….
에라이…!
허나 그도 일각을 넘기고 보니 고역이더라. 특히 저 늙은 너구리, 동관(東關) 맥가의 수장이라는 놈이 문제다. 대체 뭘 어찌하면 똑같은 내용을 저리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가만히 보니 저 와중에도 자기들끼리도 패가 갈렸다. 정작 한패라 해야 할 또 다른 너구리 수장, 서성(西成) 적가와 그에게 줄을 댄 자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양 한발 물러나 있고 오히려 입도 코도 떼지 말아야 할 쥐 떼들이 어울려 설치고 있지 뭔가. 그에 잠시 사내의 눈 위로 이채가 스친다.
분열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서로 시작점이 다른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동의 맥가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지존의 즉위 초에 정략적인 이유에 따라 후궁으로 맞아들인 여인들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들이었다. 반면 서의 적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지존이 사방에 뿌려놓은 춘정의 결과였다. 그렇다보니 근본은 확실하나 간신히 여우와 대립할 정도의 힘이 전부인 동과 근본은 없지만 지존의 총애를 받는 딸을 둔 서는 서로 시작점은 물론이요 조건이며 목적도 달랐다. 그러니 당연히 방향성도 다를 수밖에.
여우와의 대립에 무게를 두고 있는 동은 지존과 비슷한 연령대의 후궁들이 대부분인지라 제 딸들에게 세력을 더해주기 위해서라도 혈족을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존이 내키는 대로 취한 탓에 기껏해야 황자 또래나 그보다 어린 나이의 후궁의 일가가 모여 있는 서는 지금 황손을 얻어봤자 의미가 없음을 잘 알기에 아예 갈아탈 작정을 하고 발을 뺀 눈치다. 다만 굳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당장은 세력에서 벗어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이래서야 당장은 그럭저럭 한패 노릇을 할지 모르나 곧 둘로 쪼개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거 재미있게 되었구먼.
그에 사내는 잠시 상황도 잊고 제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은 살생부를 다시 한 번 뒤적이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저 중에 몇은 새로운 장기 말로 건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시끄럽구나.”
지존의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대전 공기를 가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별것도 아닌 것을 두고 참으로 시끄러워.”
누가 들어도 역정이 선명히 묻어나는 그 목소리 덕에 장날 저자의 장사치들도 울고 갈 만치 소란스럽던 공기가 단숨에 조용히 얼어붙더라.
“다 떠들었는가?”
그리고 마침내 그 입 다문 너구리 떼와 쥐 떼들을 향해 여전히 만사 귀찮은 낯을 한 지존께서 짧게 하문하시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송구하다 외치며 우르르 엎어지기 바쁘다. 그에 끌끌, 소리 내어 혀를 차시는 지존이시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만사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더니 지금은 거기에 짜증까지 더해져 있더라. 그에 엎어져 있던 이들의 낯이 희고 푸르게 물드는 것도 모자라 시커멓게 죽어들기까지 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무엄한 행사를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라. 하여 또 곧 죽을 것처럼 죄를 청한답시고 짖어대니 그 꼬락서니 내려다보는 지존의 시선은 더욱 서늘하게 얼어붙는다. 헌데 그 모습이 누가 봐도 머리끝까지 역정이 닿은 이의 것이다 보니 엎드러진 이들의 고개가 이제는 아예 바닥에 붙을 지경이 되었다.
“충심이라….”
허나 지존께서는 이제 만정이 떨어진 얼굴로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시더니 바닥에 딱 붙어 꼼짝도 않는 이들을 향해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충심, 참 가볍기 그지없구나.”
언제 역정이 났었냐는 듯 부드럽기 짝이 없는 음색이거늘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칼날과도 같다. 오죽하면 엎드러져 있는 이들 중 몇은 제 목에 그 칼날 닿은 착각에 빠졌을까. 제법 연륜이 쌓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비 맞은 새 새끼 마냥 발발 떨기까지 하더라.
“황자.”
그를 본 지존께서 만면에 해사한 미소 그려 넣으시나 싶더니 지근에 자리하고 있던 이, 곧 2황자 광을 부르신다. 그에 여직 머리 꼿꼿이 세워 지존과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광은 냉큼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하명하옵소서.”
“저들의 충심이 저토록 얕고 가벼우니 네가 신경을 쓸 것은 없는 듯하구나.”
“소자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이런 것이라면 네가 혼자 알아서 처리하고도 남을 듯하구나. 그렇지 않으냐?”
“…그렇사옵니다.”
처음부터 답을 정하고 하문하시니 광이 입에서 나올 말도 정해져 있다. 별수 있나.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며 저 알아서 하겠노라 답을 할 밖에.
“그래, 그럼 되었다. 물러가렴.”
게다가 답하기 무섭게 축객령이 돌아오니 이거 참 오묘하구나. 하기야 이게 아니었으면 저가 먼저 물러날 것을 청하였을 터. 사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비록 며칠간 고달파질 것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하나 이로써 너구리와 쥐 떼들을 정리하는 일은 온전히 저의 소관이 된 것이다. 할 일은 늘었으되 제 입맛대로 가지고 놀 생각을 하니 체통도 잊고 어깨춤을 출 판이라. 어디 보자, 그럼 누구부터 손질을 할까….
대전 밖으로 향하는 황자님 걸음이 그야말로 날아갈 듯하였다.
허나 끝난 것은 황자님 용무뿐, 지존의 용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더랬다.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 암만 난봉꾼 소리를 듣는 작자라고는 하나 정무에 소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늘….”
과인의 일도 아니고 아들놈 일로 꼬박 반 시진을 날려 먹었구먼.
그 용무 무엇인가 하면 황제 폐하 귀한 시간 쓸데없이 날려 먹게 만든 귀족이라는 이름의 버러지들 매섭게 타박하는 것이더라.
“내 두 번은 없노라.”
감히 제국 황실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에게 시퍼런 서슬 드러내는 것이더라.
당금의 지존되시는 연해제께서 그 용무 모두 마치고 정무를 위해 집무실로 돌아가니 그 때가 막 미시(未時)에서 신시(申時)로 넘어갈 무렵이라. 그렇지 않아도 일각이 아쉬운 참에 꼬박 한 시진을 허투루 흘려보낸 것을 확인한 지존께서 더욱 바삐 걸음을 옮기시니 황제와 황태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통로에 한참이나 시끄러운 발소리가 울린다. 아랫것들에게는 함부로 보일 수 없는 지존의 숨은 모습이란 이토록 비루한 것이더라.
“폐하, 한 시진 전부터 황후마마가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허나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기껏 서둘러 돌아오면 무엇 할까. 댓돌에 발 올리기 무섭게 지밀상궁 고해 올리는 내용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저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잔뜩 밀린 정무를 핑계로 돌려보내기라도 했으련만, 저 없는 사이 황후의 권세로 밀고 들어왔을 줄 누가 알았으랴.
“무슨 일로 이리 행차한 것이라더냐?”
“그는 폐하께만 이야기 드릴 일이라 하며 밝히지 않았나이다.”
“…용무도 분명치 않은 자를 과인의 집무실에 들였다는 게로군.”
“소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인지라…. 송구하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작정을 하고 온 것이 분명해 더욱 심란하다. 이러면 어떻게든 크게 부딪힐 일을 가지고 왔다는 소리인데 짐작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한 탓이다.
“되었네. 자네에게 따질 계제가 아닌 것을 내 무얼 더 말할까. 아마도 긴히 나눌 밀담이 있는 게지.”
“송구하옵니다.”
“되었으니 사람이나 물리게. 험한 꼴 보여 좋을 건 없지.”
“명 받드옵니다.”
하여 지밀상궁에게 주변을 비우라 명한 황제는 제 주변에 남은 기감이 지붕 아래 밀군과 집무실 안 황후뿐임을 확인하고서야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들어섰다.
“소첩이 참으로 희한한 소리를 들었나이다.”
음전하고 병약한 모습 꾸미고 있던 황후는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지아비뿐임을 확인하기 무섭게 독기 풀풀 날리는 낯으로 돌변하였다.
“새로이 며느리 된 아이가 어찌 된 일인지 내명부에 속한 자라면 응당 지켜야 할 예와 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더이다.”
그리고 지존께서 뭐라 답을 하시기도 전에 나직하지만 단단히 힘이 실린 목소리로 제 할 말 우르르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어째 뜬금없다. 좋게 말해 예와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지 실은 우리 며느리가 너무 버릇이 없노라 제 서방이자 시아비 되는 이에게 고자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아랫것들 시켜 그 사정 알아보니 참으로 기가 막히더군요.”
허나 돈독한 금슬 자랑하는 부부지간이라면 또 모를까 실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사이가 바로 지존과 그 정궁의 관계 아니던가. 괜히 그녀가 주인도 없는 집무실에 쳐들어와 꼬박 한 시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 아니다. 실은 지금 이러는 것도 몇 번이나 청한 독대 요청을 모조리 무시당한 탓이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황후가 무리를 한 것이었다.
“폐하.”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원향전 후궁의 소속이 내명부가 아닌 것이옵니까?”
제 영역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이상은 무리를 해야만 했다.
“어찌하여 원향전의 그 아이와 내명부의 모두를 이리 갈라놓은 것인지요?”
아니, 제 영역 안에 들었다 여긴 것이 실은 아직도 밖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한 이상은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여 주세요.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옵니까?”
그나마 지키고 있던 제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니 당연한 것이더라.
“폐하!”
하여 묻고 또 묻다 못해 무엄하게도 지존을 향해 고성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황후.”
그리고 그 무엄한 행태에 지존께서 마침내 입을 여시니 너그럽고 자애로운 음색과는 달리 용안에는 비소(誹笑)가 가득하였다.
“그 자리라도 지켜야지.”
“……?!”
“그 자리마저 없어지면 어찌하려 이러누?”
그렇지 않소, 황후?
그 능글찬 음성 마주한 황후마마 안색이 마치 백분을 몇 겹이나 칠한 것 마냥 하얗게 돌변하였다.
* * *
그날 오후, 2황자님 나랏일 살피고자 자리한 수학관(受學館) 장지문 사이로 한참이나 대소(大笑)가 이어지니 때마침 그 주변을 지나던 관리들과 궁인들이 크게 놀라 사정을 알아보고는 한참이나 근심하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