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 마음의 행방
“이번 주도 수고들 해. 서요한 검사는 잠깐 남고.”
주간 업무 회의가 끝나고 부산스럽게 자료를 챙겨 일어나는 검사들 사이에서 금테를 두른 듯 홀로 반짝거리는 남자가 심통 난 표정으로 부장 검사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 왜요.”
“왜요는 일본 요가 왜요고, 이 자식아.”
“부장님 자꾸 그런 재미없는 농담하시니까 머리카락도 듣기 싫다고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부장 검사가 위협하듯 휘두른 결재판을 잽싸게 피한 요한이 능청맞게 웃으며 부장 앞에 앉았다.
“너 인마, 내가 머리 자르고 오랬지.”
“저 주말 당직이었지 않습니까.”
“검사 대가리 꼴이 양아치 같아서 되겠어?”
“별로 안 길어요. 워낙 풍성해서 그래 보이는 겁니다. 부장님 설마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요.”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요한이 마냥 미운 건 아니었는지 피식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린 부장이 얼굴 근육을 다잡았다.
“서 검사.”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에 요한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자세를 바로 하더니 “예, 부장님.” 하고 대답했다.
“얌전히 있어. 너 중경단 때 박힌 미운털 아직 안 빠졌다. 차장님이 벼르고 계신다고.”
“안 그래도 몸 사리고 있습니다.”
“눈에 반항기가 이글이글하는데?”
정곡을 찔린 요한의 뺨이 움찔움찔 떨렸다.
“공판부로 넘기면 그때부터 네 사건 아니야. 명심해.”
“그게요, 저도 신경 딱 껐습니다. 근데 윤경록 검사가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바짓자락을 붙드는데 어떡해요. 부장님, 부장님도 초임 검사 시절은 있으셨을 거 아닙니까.”
“요한아, 서요한아. 입 좀 다물고 있어. 제발, 내 소원이다. 너 때문에 내가 아주 죽겠어.”
“진짜 마지막입니다. 약속?”
애살스럽게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요한을 향해 부장 검사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가, 요란한 한숨 소리와 함께 살짝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의기양양하게 일어난 요한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부장 검사에게 인사하고 나와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검사님, 오늘 또 머리 자르라고 혼나셨죠.”
“부장님이 자꾸 잔소리하시니까 아예 길러서 묶어 볼까 싶어요.”
“그냥 이발하세요. 검사님 삼손이세요?”
“신체발부 수지부모 모르십니까들?”
실무관에게 헤어 스타일링제를 빌려 작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만지는 요한에게 서요한 검사실 직원들이 농을 걸었다.
요한이 눈썹 아래까지 커튼처럼 드리웠던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새하얀 이마와 높게 솟은 콧날이 도드라졌다.
옆머리까지 꼼꼼하게 귀 뒤로 넘겨 붙이니 마른 뺨 덕분에 한층 우아해 보이는 날카로운 턱선이 화려한 미모에 정점을 찍었다.
서요한 검사가 딱히 멋을 부리느라 머리를 기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없으므로 제법 길게 자란 머리를 대충 내버려 둔 것뿐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한의 옷맵시는 언뜻 보면 잡지 화보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꼴이 말도 아니었다.
양복은 창고 정리 중인 할인 매장에서 구매한 저렴한 비즈니스 슈트이고 심지어 집에서 다림질하다가 태워 먹었는지 소매 쪽에 번들번들하게 눌어 버린 자국도 있다.
하얀 셔츠는 드레스셔츠가 아니라 와이셔츠라고 부르는 게 어울리는 유행 지난 떨이 상품이며, 화사한 목을 졸라맨 폭 좁은 넥타이도 길거리 지나다 가판에서 산 상품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걸쳐 입어도 근사한 그림이 되는 건 요한의 섬세한 미모 덕이다.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는 입술도, 그 볼펜을 빙빙 돌리는 길고 가는 손가락도 칙칙한 검찰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살짝 짧은 바짓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발목뼈마저 물오른 복숭아처럼 탐스럽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잠깐 법원 좀 다녀올게요.”
“검사님, 법복 안 입으세요?”
“아, 제 사건 아니고 공판부 지원하러 가는 거라 괜찮아요.”
끈끈한 양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검사실을 나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실무관과 수사관이 눈을 맞추며 쓰게 웃었다.
우리 검사님 또 사고 치러 가시는구나.
서요한 검사실 직원들에게는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화장실에서 나가려는 요한의 앞을 입구로 막 들어선 거구가 막아섰다.
요한이 왼쪽으로 몸을 피했는데 남자도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 다시 서로를 가로막은 꼴이 되어 요한이 오른쪽으로 비켜 공간을 양보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꿈쩍하지 않았다.
남자는 중앙지검 검사 중 최장신인 요한보다 머리 반 개는 더 컸다. 몸피는 두 배 정도 두툼하려나. 저런 체구에 괜스레 남을 위하는 불량한 태도라면 무슨 일로 검찰청에 왔는지 뻔했다. 십중팔구는 사회의 버러지이리라.
남자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훑는 느낌이 났다. 조금 전에 흠뻑 젖은 손을 탈탈 흔들었던지라 요한은 혹시 물이 튀었나 제 발이 저려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여 영혼 없는 사과를 던졌다.
건방진 깡패 새끼가 감히 검사 앞을 가로막고 지랄이야.
여전히 미동도 없는 남자의 옆을 비집고 나가며 요한이 실수인 척 팔꿈치를 세워 남자의 옆구리를 퍽 쳤다.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요한이 딱히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성스러운 검사의 전당에서 무적의 검사 갑옷을 입은 요한은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용맹하니까.
공무원증을 쓰다듬으며 흡연 구역으로 향하는 요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선배님, 저 쫄려서 죽겠습니다.”
“쫄릴 게 뭐가 있어.”
“선배님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전 식은땀 나서 등 다 젖었어요.”
“윤경록 이거 빠져 가지고. 천하의 검사가 조폭 앞에서 쫄면 되겠어?”
“마흔 명이잖아요. 보스까지 마흔하나. 선배님, 저기 보세요. 변호사도 조폭처럼 생겼어요.”
“조폭 시위하는 거 처음 봐? 왜 이래?”
“저 수습 뗀 지 세 달 됐습니다! 당연히 처음이죠!”
긴장에 다리를 덜덜 떠는 공판 검사의 허벅지를 매섭게 내려친 요한이 때맞춰 재판장 입장을 알리는 법정 경위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폭 새끼들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고 가느스름하게 뜬 눈은 아래로 내리깔아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연신 방청석 쪽을 흘끔거리는 후배에게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하며 퉁바리를 줬지만, 사실 요한도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살기 어린 시선이야 하루 이틀 받아 본 것도 아니고, 그 정도야 코웃음 칠 것도 없이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끈적하게 따라붙는 유독 집요한 시선 때문에 좀처럼 진정하기 어려웠다. 몸길이가 방청석에서 검사석까지 이어질 만큼 거대한 뱀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솜털이 바짝 일어날 정도로 불쾌한 감각에 요한은 몸서리쳤다.
어떤 미친 새끼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는 건지.
괘씸함에 방청석을 노려볼 뻔했지만, 요한은 지켜야 할 품위라는 것이 있는 검사가 아닌가. 작게 혀를 차고 ‘이건 돌멩이다. 되게 못생긴 돌멩이다.’ 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검사석으로 짱돌이 날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에이, 씨발. 차라리 웃자.
요한에게는 긴장하면 웃어 버리는 몹쓸 버릇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느라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던 차였는데 잘됐다.
요한은 뺨에 힘을 풀고 싱긋 웃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잘 보이도록 방청석 쪽으로 살짝 몸을 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디 이 웃음이 같잖은 위협에 대한 비웃음으로 보이기를 바라면서.
복잡한 속내와는 다르게 겉모습만은 산뜻하기 그지없는 정의의 사도, 서요한 검사였다.
“증인은 철거 공사 담당자가 건설사 임원에게 뇌물을 준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겁니까?”
“네.”
마치 용상에라도 앉아 있는 듯 한껏 거만한 표정의 증인을 바라보는 요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일개 직원이 일이백도 아니고 몇억을 회사 계좌에서 빼냈는데 대표가 그걸 몰랐다? 그런 해명을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 믿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판사님, 검사가 증인에게 과도한 인신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불도그처럼 늘어진 뺨의 변호사가 판사에게 항의했다.
“검사, 주의하세요.”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표정으로 요한이 판사석으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정말 몰랐다고요? 법인 인감을 가지고 나갔는데요. 전화 통화 내역을 증거로 제출한 이유가 있습니다. 뇌물 공여한 시기에 상무가 회장님하고 전화를 엄청나게 자주 했어요. 두 분이 내연관계도 아닌데 뭐 그리 애틋해서 하루에 열 번 넘게 통화를 했겠습니까? 그리고, 피고 측에서 자꾸 뇌물이 아니라 설계도면인 줄 알고 받았다고 해서 제가 진짜 설계도면을 출력해 왔습니다.”
요한이 둘둘 말린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설계도면을 출력하면 이런 형태가 됩니다. 이게 어떻게 5만 원 뭉치로 보입니까? 비타○백 상자에 5만 원권으로 딱 1억 들어갑니다. 2억, 아주 간단하게 주고받을 수 있죠.”
요한의 낭랑한 목소리가 법정을 가득 채웠다.
“증인. 이보세요. 경쟁사 협박해서 입찰 포기하게 했죠? 상가 세입자 강제 퇴거시키면서 폭력 썼지 않습니까. 공사 대금 과대 반영해서 리베이트 하면서 건설사 자금 세탁 공모하고, 하도급 업체로부터 상납금 받아서 비자금 조성했지요. 무탈하게 넘어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일사부재리는 내사 중단된 사건이나 기소가 좌절된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검사, 사건과 관련 없는 발언은 삼가세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2차대전 끝나고 나치 부역자 처결할 때 나온 말이죠.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관용은 무엇도 세울 수 없습니다. 증인, 지금은 증인석에 앉아 있지만, 다음에 설 곳은 피고인석입니다.”
“검사, 계속 증인 신문과 관계없는 발언 하면 퇴정시키겠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뭐가 두려워서 방청석을 하수인들로 가득 채운 겁니까?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피고인보다 변호인을 더 많이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증인 같은 사람을 좌시하지 않는 것, 그게 검찰과 법원이 할 일입니다.”
“서요한 검사!”
판사가 언성을 높여 폭주하는 요한을 멈춰 세웠다.
“법정 퇴장을 명합니다.”
요한은 종이컵에 반쯤 남아 있던 커피를 한입에 들이켜고는 재떨이에 흙탕물을 부은 것같이 고약한 맛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런 끔찍한 액체 때문에 멍텅구리가 되어 간다.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이게 없이는 정신을 못 차리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요한은 커피 가루가 거뭇거뭇하게 깔린 종이컵 바닥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커피의 쓴맛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혀끝에 맴도는 불쾌한 탄 맛을 지우려 담배를 빼 물었다. 성질대로 질러 버리기는 했지만, 요한도 사람이다. 후환이 두렵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퇴정당할 때 내내 요한을 훑던 끈질긴 시선의 주인도 따라 나왔다는 걸 눈치챘다. 놈은 딱히 숨기려는 싶은 기색도 없이 검찰청까지 요한을 따라왔다.
진짜 미친놈인가.
제 주인 욕했다고 앙심 품은 건가. 조폭 주제에 의리 있는 척하기는. 나 오늘 퇴근길에 쇠 파이프 맞고 끌려가서 며칠 뒤에 인천 앞바다에서 발견되는 거 아닐까. 아니, 그 전에 검사 노릇 계속할 수 있나?
머리가 멍했다. 우중충한 흡연 구역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 생각을 하지 마. 요한은 반도 안 피운 담배를 비벼 끄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검사가 법정에서 강제 퇴장당한 사상 초유의 사건에 검찰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덕분에 수사 검사가 공판에 나가 증인 신문을 하고, 불기소로 끝난 사건을 공론화한 일까지 발각되었다.
화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벌게진 차장 검사가 씩씩거리는 모양을 얌전하게 바라보며 요한은 조직에 대한 순종과 반발의 저울이 몸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미묘한 지점에서 간신히 멈췄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검찰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곳이라고 일갈했다며? 제대로 아는 거 같은데. 우리는 정의의 사도 같은 게 아니야.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야. 대검찰청 공무원증 걸고 있잖아. 검사는 법무부 공무원이라 이거야. 생각해 봐. 그 행정부 수반이 누구야? 대통령이잖아. 그러니까, 검찰은 원래부터 정권이랑 뜻을 같이하는 조직이야. 태생부터 목적이 정부의 변호사라고.”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 실수할 수 있어.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이제까지 잘해 왔으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시말서로 넘겨 줄 거야. 다음은 없어.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무슨 눈길을 받고 있었단 말인가.
쉽사리 생각을 정리할 수 없는 혼돈에 처박혀 요한은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서 검사. 대답 안 해?”
“시정할 것이 없는데 시말서를 왜 써야 합니까?”
“왜 이렇게 생각 없이 굴어? 똑똑한 놈이 왜 자꾸 이래. 모난 돌은 정 맞는 거 몰라?”
“아무리 정 때려 보라죠. 정만 부서지지 제 모서리 둥글어지나.”
무슨 말을 해도 지금의 요한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차장은 더는 엄포를 놓지도 호통을 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인사 쉽지 않을 거야. 마음의 준비 해라.”
요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검사실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이 없지만, 당신들은 줏대가 없지.
요한은 자기 소신대로 증인 신청을 한 것도, 공판에 난입해서 증인에게 호통친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뻔한 진실도 못 보는 검사라면 검사 자격이 없고,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검사는 인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요한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몇 번 심호흡하고 이프로스에 접속했다.
『……검찰은 권력자에게는 충성하고, 선량한 시민은 핍박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것이 우리 검찰의 민얼굴이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만 권력 비리를 수사할 수 있는가? 평범한 검사의 소박한 용기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눈에 벗어난 검사들이 함부로 쫓겨나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어야 하고, 권력에 충성하는 검사를 줄 세우는 일도 막아야 한다…….』
* * *
요한의 격정적인 성토문은 보름 넘게 검찰 조직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3주 뒤 정기 인사에서 중앙지검 공정거래수사부 엘리트였던 특수통 서요한 검사는 전국에서 제일 작은 검찰청인 성라지방검찰청 연암지청으로 전보되었다.
시골 검사도 검사다. 요한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나라의 사법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건 20%의 엘리트 검사가 아닌 나머지 80% 시골 검사의 공이라는 것 정도는.
다만 서요한 검사는 이제 20%가 아니라 80%에 속하게 되었다는 현실이 뼈아플 뿐이었다.
이프로스에 글을 올린 직후에는 영웅이 된 기분에 취해 있었다. 익명의 응원도 쏟아졌다. 그러나 막상 인사 발표가 나고, 연암으로 발령 난 요한의 옆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복 인사 당해서 좌천당한 시골 검사와 명운을 함께 해 줄 사람은 없다 이거지.
기업이나 첨단 범죄, 금융 수사를 도맡았던 특수통 서요한 검사는 지청장을 제외하면 달랑 검사 셋뿐인 연암지청 2호 검사가 되어 쓰레기 불법투기에서 양아치 구역 싸움, 전화 사기 사건을 접하며 80% 검사의 일상을 익혀 갔다.
“계장님. 여기 원래 토건 업체가 이렇게 많았습니까? 대체 뭐 때문에 고소, 고발이 만 세대 재건축 사업 수준으로 들어오죠?”
“아니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조용한 동네여서요. 한창 고속도로 얘기 나올 때는 좀 시끄러웠는데, 아시겠지만 물 건너간 지 오래고요. 산업단지에서도 멀고 요새는 이렇다 할 국책 사업도 없어서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검사님 오시고 나서 갑자기 애들이 미쳐 날뛰네요.”
“지역 업자는 맞습니까?”
“이 동네는 조폭이랄 것도 없고 그냥 동네 양아치밖에 없습니다. 이것들 다 못 보던 놈들이거든요. 큰 도시 조직에서 파견 나온 놈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요한이 턱을 쓰다듬으며 흐음, 하고 길게 침음했다.
“수상한데. 일단 이 새끼부터 소환하세요. 시범적으로 조지겠습니다.”
요한은 정의감 넘치는 열혈 검사는 아니다. 딱히 그랬던 적도 없고, 솔직히 그렇게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검사인 자신이 매 순간 가슴 벅차서 다른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자아도취형 인간이랄까. 자의식이 강한 만큼 행동거지를 신경 쓸 정도의 조심성은 갖추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검찰청으로 오라고 해서 오기는 왔는데요.”
요한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피조사인의 째진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앉은 자세부터 불량한 것이, 검사 알기를 동네 똥개만도 못하는 듯했다.
이 새끼 건방진 거 봐라.
요한은 수사관에게서 건네받은 결재판 모서리로 피조사인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아, 뭡니까!”
“모가지가 삐뚤어져서 왼쪽으로 꺾어질까 봐 오른쪽 밀어 세워 줬어. 고맙다고 안 하냐?”
“아니, 저 언제 보셨다고 반말하십니까?”
“야. 지랄하지 말고 공손하게 앉아. 제대로 처맞기 싫으면.”
“검사가 사람 패도 돼요?”
“나는 돼.”
기세 싸움에서 완패했다는 걸 깨달은 피조사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요한은 이미 속으로 깡패 새끼라 규정한 남자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모아 쥔 주먹을 책상 위로 공손하게 올리는 것을 무생물처럼 차가운 눈으로 건너다보았다.
“검사님, 그, 듣던 거랑 다르시네요.”
“뭘 들었는데? 끈 떨어진 뒤웅박이라고? 아니면 좆밥이라고? 이것들이 뒤질라고, 진짜. 나 악밖에 안 남았어. 눈에 보이는 거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저희 사장님이 검사님 오해 풀어 드리고 오라고 하셔서 임의동행 따라온 건데, 이러시면…….”
“이러시면 뭐? 너희 사장 소속이 어디야?”
“소속이요? 저희 사장님이신데 당연히 저희 회사 소속이시죠.”
“씹, 하여간 깡패 새끼들은 사람 대우해 주면 말을 안 처듣지?”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에 수사관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성질머리 고약한 검사님이 사고 치기 전에 자리를 무마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는지 눈짓으로 피조사인을 내보내고 요한을 달래기 시작했다.
“검사님, 잠깐만! 잠깐만 진정하시고.”
“저 흥분 안 했어요.”
“저놈은 바지라 아는 거 없을 겁니다. 제가 사장 불러올게요.”
그로부터 며칠 뒤, 처음 보는 청년이 막 퇴근하는 요한을 붙잡았다. 청바지에 후드 점퍼, 운동화 차림이 다소 어설픈 남자는 눈이 마주칠 새도 없이 큰 목소리로 인사부터 했다.
혹시나 요한이 제 덩치를 위협적으로 느낄까 봐 그러는지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공손하게 서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요한 검사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저희 회사가 검사님께 폐를 끼쳐서 사과 겸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쪽 회사?”
“쓰레기 매립지 건으로…….”
“사장이 보냈어?”
“보냈다기보다는…… 오해가 좀 있으신 것 같아서 짧게 말씀 올릴까 해서 왔습니다.”
어쩐지 낯익은 것도 같고 어디서 본 적 있는 것도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요한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영장 가지고 갈 테니까 할 말 있으면 그때 해. 비켜. 어디 깡패 새끼가 감히 검사한테 함부로 말을 걸어.”
“검사님, 검사님.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내일 업무 시간에 와.”
“검사님. 저희가 의욕이 좀 지나쳤습니다. 일 크게 만들 생각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상대 회사랑 화해하고, 고소도 전부 취하하겠습니다.”
요한은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남자를 지나쳐 성큼성큼 청사를 빠져나갔다.
“퇴근 늦으셨는데 혹시 저녁 드셨습니까? 배 안 고프십니까? 간단하게 식사 어떠십니까?”
“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한두 마디 받아 주니까 끝도 모르고. 야,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네 뜻 안 물어봤어.”
“죄송합니다.”
요한의 뒤를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던 남자는 요한이 버럭 성을 내자 곧바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금 더 질척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사과하고 물러서는 남자의 새하얀 운동화를 내려다보던 요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이문화입니다.”
“이문화. 이 자식아, 이름이 아깝다. 이름값 좀 하고 살아. 문화인처럼 점잖게 살란 말이야. 어디 젊은 놈이 할 게 없어서 깡패 짓이야?”
요한은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으고 자신의 꾸지람을 묵묵하게 듣는 남자를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밥은 먹었어?”
“예? 아, 아니요. 아직입니다.”
“하, 얘를 어떡하면 좋냐…….”
문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몸을 숙여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깔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어깨를 잔뜩 수그리고 몸을 숙인 문화의 자세는 그가 걸친 안 맞는 옷처럼 어색했다.
심부름하러 온 놈한테 화는 내어 무엇하리. 문화의 처량한 꼴에 요한의 마음에 동정심이 차올랐다.
“아니, 야. 접대하러 온 놈이 밥을 안 먹고 와? 그럼 너, 접대하는 자리에서 꼬르륵 소리 내고 있을 생각이었어? 아니면 내 앞에서 우걱우걱 밥 먹을 생각이었어?”
“그게, 아니…… 그,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몰라서…….”
요한이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함과 애잔함이 섞인 눈으로 문화를 나무랐다.
“따라와. 밥 사 줄게.”
“네?”
“할 줄 아는 말이 ‘네?’뿐이야? 밥 먹으러 가자고. 너 설마 가는귀까지 먹은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문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문화가 어깨를 움찔했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어? 군기 바짝 들었네. 밥 사 줄 테니까 먹고 가. 쥐어패서 쫓아낼까 하다가 예의 바르게 굴어서 봐주는 거야.”
요한이 문화를 데려간 곳은 청사 근처의 허름한 백반집이었다. 알루미늄 섀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중년의 사장이 반가운 얼굴로 요한을 맞았다.
“검사님, 어서 오세요! 오늘은 처음 보는 손님이랑 같이 오셨네? 어머. 이쪽 손님도 너무 잘생기셨다. 새로 오신 수사관님이신가? 세상에 몸이 어쩜 이렇게 좋으셔? 두 분 나란히 보니 눈이 너무 훤하다. 시력 좋아지겠어.”
비록 떨떠름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사장의 호들갑을 끝까지 들어 준 요한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바로 하나를 더 들어 “3인분이요.” 하고 주문했다.
“5인분 같은 3인분으로 드릴게.”
“사장님, 이 친구 얼굴 잘 기억해 두셨다가 혼자 와서 밥 먹으면 돈 받지 마시고 서요한 검사실로 달아 놓으세요.”
“아유, 이렇게 잘생긴 총각 얼굴을 어떻게 까먹어? 신임 수사관님 맞는가 보네?”
“아니요. 음…….”
친구도 아니고, 후배도 아니고, 지인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의자나 용의자도 아닌 오늘 처음 만난 조폭 똘마니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잠깐 뜸을 들인 요한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아는 동생이에요.”
“자주 와요. 검사님 동생이시라니까 계란 후라이 두 개씩 줄게.”
사장이 흥얼흥얼하며 주방으로 들어가자 요한이 정색하고 문화를 바라보며 문초하듯 질문을 쏟아 냈다.
“이문화. 전과 있어?”
“없습니다.”
“그러면 소년원 갔다 왔어?”
“아닙니다.”
“여기는 언제 왔어?”
“네?”
“아이, 씨. 내가 질문에 되묻기로 대답하지 말랬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왔습니다.”
손수 물잔을 채워 단숨에 마신 요한이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지르면서 신경질적으로 콧등을 구겼다.
“전과도 없고 허우대 멀쩡하고 얼굴도 잘난 놈이 왜 이러고 사냐?”
“어쩌다 보니까…….”
“차라리 연예인을 해. 너 서울 가 봤어? 옷 깨끗하게 입고 그냥 강남 이런 데 돌아다니기만 해도 기획사 명함 백 장은 받겠다. 깡패가 하고 싶으면 영화에서나 하란 말이야. 자식아. 영화에 나오는 깡패들은 다 의리 있고 남자다워 보이지? 다 개구라야. 그 새끼들 얼마나 비열한지 알아? 지 살겠다고 대장이니 부하니 안 가리고 다 팔아먹어. 영감들 고기 방패 하다가 개죽음으로 인생 마감하기 싫으면 하루라도 빨리 발 빼라.”
문화가 묘한 얼굴로 요한을 건너다보았다.
“왜, 뭘 꼬나봐? 꼰대가 잔소리해서 듣기 싫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검사님께서는 참 다정하시네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밥도 사 주시고 진지하게 조언도 해 주시고.”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
“검사님, 이시지요.”
“그래. 검사. 너 같은 어리바리가 진짜 깡패 되기 전에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도 내 일이야.”
“그러시군요.”
요한이 숟가락을 들어 문화의 반듯한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어안이 벙벙해진 문화가 살짝 입을 벌린 채 아, 하고 감탄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고. 인마, 너희 사장이 오늘 너 보낸 것만 봐도 너 취급이 어떤지 알겠다.”
“제 취급이 어떤데요?”
마침 그때 밥상이 나왔다. 좁은 탁자 가득 반찬이 깔리고 부글부글 끓는 찌개와 푸짐하게 담긴 돼지불고기, 수북이 쌓인 달걀부침을 보며 요한이 흐뭇하게 웃었다.
“오, 사장님 오늘 힘 좀 주셨네요?”
“우리 검사님 오실 때마다 힘주는데?”
“오늘은 특별히 더 힘이 들어갔는데요?”
“으응, 많이 먹으라구. 여기 총각 입에도 맞을지 모르겠네?”
“사장님 밥 먹고 맛없다는 사람 있으면 제가 다 구속할게요. 맛도 모르는 놈들, 콩밥 먹어 봐야 정신 차리지.”
일대에 귀신 검사라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처음 보는 조폭 똘마니에게 저녁을 사 주고, 거만하고 권위적으로 굴지만, 식당 사장과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문화가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대뜸 반말하며 아는 동생이라 소개하고, 막상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면서 문화에게 잘생긴 얼굴이 아까우니 연예인을 하라고 종용한다.
뭐가 서요한 검사의 진짜 얼굴일까. 과연 저 중에 그의 진짜 얼굴이 있기는 한 걸까. 그는 자신을 무어라 정의하고 있을까. 문화의 눈빛이 깊어졌다.
“먹자.”
“네. 그런데 제가 오늘 검사님 뵈러 온 게 어디 잘못되었습니까?”
“너희 상무인가. 지난주에 나한테 처맞고 간 눈 째진 인상 더러운 놈 있잖아. 내가 그 지랄을 했는데 풋사과를 보내?”
“풋, 사과…….”
“씹새끼들이 뒤질라고 사람 간을 보네? 내가 오늘 너한테 접대받았으면 좆밥 떡검이라고 우습게 봤을 거고, 너 피떡 만들어서 보냈으면 다음에 진짜로 사장이 왔겠지. 오늘 이문화가 나한테 욕을 처먹든 매를 처맞든 알 바 아니라고 보낸 거야. 하, 여기 온 지 일주일 된 놈을. 하여간 조폭 새끼들 피도 눈물도 없어요. 알겠냐, 이문화?”
“네.”
“뭘 아는데?”
“개죽음 안 당하도록 정신 차리고 살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이 새끼야. 조폭을 그만두라고.”
요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도 문화는 개의하지 않고 헤실헤실 웃었다. “너 내 말이 우습냐?”라는 윽박지름에는 세차게 고개를 젓고, “미친놈인가?”라는 욕설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문화를 이해하기 포기한 요한이 쯧쯧 혀를 차며 밥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그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난투전을 벌이던 토건 업자들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신기하기도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찜찜했던 건 검사의 촉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근거는 없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육감의 경계심.
다만 평화가 무기를 녹슬게 하듯, 안온함은 검사를 느슨하게 만든다. 나름대로 시골 검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요한은 문화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서요한 검사실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어느 미친놈이 감히 검사실 업무용 전화로 보이스피싱을 걸어온 줄 알았다. 몇 마디를 더 나누고야 전화 건너편의 남자가 요한을 접대하겠다고 나왔던 수상할 정도로 잘생긴 조폭 똘마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문화. 너 진짜 미친놈이냐?”
― 네? 네?
“이 새끼가 겁대가리가 없네? 내가 살다 살다 검사실로 전화하는 깡패는 또 처음 본다.”
― 검사님께서 할 말 있으면 검사실 와서 하라고 하셨잖아요. 직접 가는 건 좀 무섭고, 이 전화는 열려 있으니까…….
“아, 이 또라이 새끼.”
― 검사님께서 저번에 저녁 사 주셨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사 드리고 싶어서요. 제가 좀 알아보니까 이 동네가 더덕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더덕구이 정식 드셔 보셨어요?
“왜. 너희 사장이 이번에는 꼭 서요한 약점 잡아 오래?”
―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고, 계속 검사님 생각이 나서요.
“네가 내 생각을 왜 하는데.”
― 제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충고해 주신 분은 검사님께서 처음이십니다.
이문화는 요한에게 꼭 밥을 사 드리고 싶다며 요한의 윽박질에도 기죽는 기색 하나 없이 또박또박 자기 할 말을 했다.
“이문화 너, 내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매일 검사실로 전화하려고 했지?”
― 어떻게 아셨어요?
“너 좀 또라이 같더라. 그래, 내가 졌다. 한 번 모셔라, 모셔. 대신에 너희 사장이나 상무 이런 놈들 달고 나오면 죽여 버린다?”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혼자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낡아빠진 관사에 들어가 봐야 할 일도 없겠다, 어차피 내년까지는 빼도 박도 못하는 연암 생활 아닌가.
이문화 그거 허우대만 멀쩡하지 영 어리바리한 것이, 정보원으로 알차게 써먹기는 어려울 거다. 그래도 외지 조직이 왜 굳이 요 손바닥만 한 동네에 비집고 들어왔는지 쑤셔 보려면 그런 놈이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것도 그렇고, 저녁 한 끼 정도로 유난 떠는 것도 우스운 노릇 아닌가. 요한은 괜히 찔려서 이것저것 구차한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문화는 검찰청 정문 바로 앞에서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셨나요?”
“왜?”
“살짝 여위신 것 같습니다.”
“아픈 데 없는데.”
“오늘 많이 드시고 몸보신하세요.”
안부인지 아부인지 지나치게 미끈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 문화를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요한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문화는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자연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접대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구박했더니 그 사이에 배워 오기라도 한 걸까. 손놀림이 제법 그럴싸했다.
뺨이 홀쭉해질 정도로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공기를 토해 냈다. 제 입에서 빠져나온 뭉클뭉클한 기체를 바라보던 요한이 담배를 쥔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문화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이거 또 왜 이래.
요한의 대뇌피질이 정보 처리에 실패했다. 그는 살짝 벌린 입술 틈으로 담배 연기를 흘리며 문화를 흘겨보았다.
“여기다 담뱃재 터세요.”
“이 자식이 미쳤나. 야. 내가 조폭이야? 이게 어디 검사 앞에서 지들끼리 하던 개쓰레기 짓을 하려고 들어?”
“아니, 저는 그냥…….”
“새끼가 진짜.”
담배 맛이 뚝 떨어졌다. 요한은 딱 한 모금 피운 담배를 바닥으로 던지고는 발로 문질러 비벼 껐다.
무심히 앞으로 나가려다가 아차 하고 허리를 굽혀 짓이겨진 담배꽁초를 주웠다. 손끝으로 꽁초를 잡고 쓰레기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요한을 문화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게 주세요.”
“지랄 좀 하지 말랬지.”
“그게 아니라 저한테 휴대용 재떨이가 있습니다.”
문화가 요한에게서 담배꽁초를 낚아채 주머니에서 꺼낸 금속제 휴대용 재떨이에 구겨 넣었다. 물티슈는 또 언제 꺼냈는지, 한 장을 뽑아 요한에게 내밀고 또 한 장을 뽑아 제 손을 닦은 뒤 요한이 쓰고 난 물티슈를 도로 빼앗아 구기듯 뭉쳐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건 무슨 도라○몽 주머니냐. 뭐가 계속 나와?”
“하하.”
“너 그렇게 가식적으로 웃지 마. 소름 끼쳐.”
“가식 같아 보입니까?”
“장난 아냐. 야, 이문화. 흠. 아니다.”
“말씀하세요.”
“내가 분명히 너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이상하게 낯익은데 모르겠어. 뻔뻔스럽게 사람 빤히 쳐다볼 때나 가식적으로 입으로만 웃을 때 특히 익숙해. 근데 내가 너를 제대로 만났으면 기억이 안 날 리가 없거든? 나 한번 본 거나 한번 들은 건 절대 안 잊어버려. 흠. 이문화를 어디서 봤을까.”
“오.”
“비웃냐?”
“제가요? 왜요? 뭘요?”
“한번 본 거 안 잊는다는 말.”
“아니요. 역시 서요한 검사님다우시다고 감탄한 겁니다. 정말이에요. 배고프시죠?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서 가시죠.”
문화가 요한을 데려간 곳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적당히 고급스러운 고깃집이었다.
대충 가격을 가늠한 요한은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계산대로 가 제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일단 30만 원만 미리 계산해 달라 했다. 혹시 예약하면서 결제해 놓은 게 있으면 취소하고 그 카드로 다시 긁어 달라 하자 주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낮에 오셔서 현금 주고 가셨어요. 저희가 은행 마감 맞춰서 입금해서 지금 현금이 없네요. 환불은 좀 어려운데…….”
요한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검지 끝으로 계산대를 소리 나게 딱딱딱 세 번 두드린 요한이 싹 바뀐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장님. 이거 카드 결제 거절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현금이 없어 가지고…….”
“뽑아 오시면 되잖아요. ○마을금고가 바로 길 건너 있는데.”
“아니, 우리도 마감하고 그러는 시간이 있는데 지금 갑자기 그러시면…….”
자꾸 딴소리 하며 말을 돌리는 남자를 짧게 노려본 요한이 껄렁하게 기대 있던 자세를 바꿔 꼿꼿하게 서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공무원증을 꺼내 보였다.
“연암지청 서요한 검사입니다. 탈세 및 횡령 의혹이 있으므로 관할 경찰서에 즉시 수사 의뢰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검사님. 잠깐만요. 제 말 좀 끝까지 들어 보셔야지. 제가 언제 카드 결제를 거부했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저기,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고기 대금 치를 돈 따로 둔 게 있어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낮에 50만 원 주셨거든? 지금 환불해 드릴게요. 여기요. 결제는, 에이, 뭔 카드를 주세요. 아유, 됐습니다. 들어가 계시면 제가 최고 상등품으로 쫙 준비해서…….”
요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뇌물 공여 추가해야겠네.”
“아이고, 검사님!”
어수선한 소리를 들었는지 룸에 들어가 있던 문화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검사님, 화장실 다녀오신다더니.”
“받아.”
요한은 문화의 가슴을 향해 환불받은 50만 원을 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 나온 문화가 마주한 것은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너희 사장이 서요한 고기 사 주라고 50만 원 주디?”
“그게.”
“사장 달고 오지 말라고 했더니 사장 돈을 달고 왔네.”
“검사님.”
“됐다. 사장한테 그 돈 돌려줘 봐야 술값밖에 더 되겠냐. 그냥 나 고기 사 줬다고 말하고 그걸로 너 용돈이나 해라.”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검사님 저녁 사 드리려고 제가…….”
“삼겹살 먹냐?”
“네? 네.”
“냉삼집 잘하는 데 있어. 가자.”
“제가 사도 됩니까?”
“안 돼.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건방지게 내 앞에서 지갑을 열어.”
“그래도.”
“사 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처먹어라.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이 동네 고깃배들은 기름 어디서 넣어?”
“고깃배요?”
“개산항. 육지에서 기름통 가져가서 넣어? 항구에 급유기 없는 것 같던데. 아니면 바지선 띄워?”
“음…….”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문화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알지만 말할 수 없다는 건지, 아니면 몰라서 말할 수 없다는 건지.
어쨌든 요한의 질문에 어떤 답도 줄 수 없다는 것 하나는 명백했다.
“아는 게 하나도 없구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요.”
“한 달 되지 않았어?”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요한의 시선을 피하며 문화가 뺨을 긁었다.
“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문화의 약한 척에 요한이 피식 웃었다.
눈 아래 도톰한 애교살이 볼록 올라오며 시원스러운 눈초리가 살짝 휘었다. 눈매가 접히자 커다란 눈동자만 남기고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한의 새카만 눈이 흑요석처럼 반짝거렸다.
“갑자기 배 기름은 왜요?”
“순양이 그것 때문에 난리 났거든. 여기는 해상 급유 문제없나 점검 좀 할까 했지.”
“해상 급유요?”
“그런 게 있어.”
“궁금하네요.”
“깡패 그만둔다고 약속하면 가르쳐 줄게.”
“하하.”
“가식적으로 웃지 말랬지.”
양 볼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란 쌈을 우물우물 씹어 삼킨 요한이 파채를 뒤적거리는 문화를 타박했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왜 채소만 깨작거리냐. 시원스럽게 좀 먹어라.”
“많이 먹고 있습니다. 검사님께서 너무 맛있게 드셔서 저까지 입맛이 도네요.”
“내가 연비가 떨어져서 남보다 좀 많이 먹어.”
“잘 드시면 보기 좋죠.”
“별로야. 배 자주 고프고 돈 많이 들어.”
“제가 사 드리면 되죠.”
“이문화.”
“죄송합니다.”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명함을 꺼내 문화에게 내밀었다.
“할 말 있으면 검사실로 전화하지 말고 휴대 전화로 연락해.”
“아. 감사합니다.”
“깡패 그만두고 싶은데 사장이 염병하면 꼭 말해라. 내가 사장 새끼 잡아다가 반 죽여 놓을 테니까 그 틈에 도망가. 갈 데 없으면 전화해. 너 하나 거둬 줄 사람은 찾아 줄 수 있으니까.”
문화가 입술을 말아 물고 큽, 콧소리를 냈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는 모습이 역력해서 요한이 또 버럭 성을 냈다.
“이 새끼는 하여튼 사람이 생각해서 말을 해 줘도.”
“감사해서 그랬습니다. 제가 지금 정말 감동해서.”
“지랄 말고 밥이나 처먹어.”
“네.”
이문화의 연락은 시도 때도 없었다. 요한이 아무리 매몰차게 거절해도 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어도, 아예 무시하고 전화를 받지 않아도 문화는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또다시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같이 안 하시겠습니까?” 또는 “몇 시에 퇴근하십니까?” 하며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사람처럼 곰살맞게 굴었다.
퇴근이 늦어서 안 된다고 거절하면 검찰청 앞까지 찾아왔다. 만두에 김밥, 떡볶이 같은 먹을거리를 사 들고 와서 이것만 받아 가시라며 메시지 폭탄을 보냈다.
돈도 없을 녀석이 제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닐 것이지.
요한은 소박한 분식을 들고 일부러 자기를 보러 찾아온 사람을 야박하게 내치는 인사는 못 되었다. 다정도 병이라 했던가. 애초에 요한에게 사람이든 사건이든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땅끝 연암까지 쫓기듯이 내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요한이 문화에게 휘말리는 날이 늘었고, 급기야는 약간이나마 둘 간의 관계에 발전이 생겼다.
요한이 검찰청 정문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던 문화에게 만두 봉투를 건네받았던 어느 날 문득 스친 변덕으로 문화를 검사실로 데려가 검사실 직원들에게 아는 동생이라 소개한 뒤 함께 야식을 먹고, 그러다가 결국 이문화에게 서요한 검사실 문턱을 마음대로 넘을 수 있는 암묵적 권한을 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문화야. 너는 내가 안 무섭지도 않니?”
“검사님이 왜 무섭습니까?”
“그럼 내가 우습니?”
“절대 아니죠. 그런데 무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일이 너 같은 깡패 족치는 건데?”
“저도 잡아가실 건가요?”
“나쁜 짓 하다 걸리면 잡아다 조져야지.”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네요?”
“새끼가, 좀 봐줬더니 또 기어오르네.”
“조금만 더 봐주시죠.”
요한에게 문화는 가끔 성가시고 자주 귀찮았지만, 며칠 안 보이면 궁금하고 같이 술 마시다 집에 들어오면 심심한 정체불명의 상대였다.
초대한 적도 없는데 이미 안방에 들어와 자리 펴고 앉아 자기가 바리바리 싸 온 잔치 음식을 펼쳐 놓고서 먹으라 권하는, 쫓아내기에는 아주 약간 아쉬운 불청객 같달까.
문화의 입에 발린 소리나 알랑방귀에 또 말렸다는 자각이 들 때마다 요한은 문화에게 험한 소리를 하며 화풀이를 했다.
요한의 짜증을 받아 내면서도 문화는 불평 한번 하는 법이 없었다. 명랑한 목소리로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요?” 아니면 “주말에 뭐 하십니까?” 하며 제 할 말만 했다. 아무리 욕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아 성내는 요한만 더 바보처럼 느껴졌다.
“검사님께서 이렇게 저를 허물없이 대해 주실 때마다 검사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문 요한을 향해 문화는 예의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이, 씨…….
또 나만 쓰레기지.
* * *
건물 외벽 전체를 유리창으로 마감한 최신식 고층 빌딩 정문 앞에 묵직한 검은색 대형 세단이 매끄럽게 정차했다. 차가 서자마자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험상궂은 남자가 튀어나와 뒷좌석 문을 열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전쟁터의 말발굽 소리 같은 발소리를 내며 정문 안쪽에서 달려 나온 근 스무 명의 덩치들이 두 열로 정렬한 가운데 뒷좌석 탑승자는 마치 레드 카펫 앞에 선 영화배우처럼 느긋하고 우아하게 하차했다.
소재부터 남다른 고급 정장에 감싸인 긴 다리를 쭉 뻗어 반짝거리는 갈색 구두로 바닥을 디딘 뒤 문 너비와 거의 비슷한 너른 어깨를 차 밖으로 빼내고 허리를 쭉 편 남자는 진짜 영화배우처럼 근사한 외모를 자랑했다.
선 굵은 이목구비에 근육이 옹골차게 들어찬 장신은 마주한 상대를 절로 움츠리게 하기 충분했다.
차 앞에 늘어서 있던 검은 양복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안…….” 까지 외쳤을 때, 세 걸음 뒤에서 남자를 따르던 험상궂은 인사가 머리 위로 양팔을 올려 크게 X자를 만들며 입 닥치라고 경고했다.
순식간에 찾아온 적요에도 아랑곳없이 남자는 차에서 내릴 때부터 계속 뺨에 딱 붙이고 있던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 전화를 향해 귓바퀴에 들러붙을 것같이 들큼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제가 뭐 아나요? 검사님께서 정하시면 따라가는 거죠. 아, 들켰나요? 하하. 약속하신 겁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주말에 뵙겠습니다.”
훈풍이 살랑거리던 잘생긴 얼굴은 통화가 끝나고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자마자 곧장 엄동설한의 극지로 변했다.
“새끼들이 대가리에 총 처맞았나. 야, 너희들 지금 여기 조폭 본부라고 광고하냐?”
“아닙니다.”
“그럼 나한테 시위하냐?”
“저, 절대 아닙니다. 저희가 어떻게 감히 이문화 사장님께…….”
열의 제일 앞자리에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언뜻 보아도 모여 있던 덩치들의 대장인 듯한 사내를 구해 준 사람은 뜻밖에도 이문화의 뒤에서 필사적으로 X를 그리던 남자였다.
“애들이 사장님 오래간만에 뵈었더니 반가워서 오바 좀 했나 봅니다. 나쁜 뜻으로 그런 게 아니니까 한 번만 봐주시죠.”
“마 부장. 애들 교육 좀 해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뒤지게 패 놓겠습니다. 올라가시죠. 회장님 기다리십니다.”
“잘해라?”
문화는 고개와 허리를 들지 못하는 덩치들의 뒤통수를 퍽퍽 때리며 빌딩으로 들어갔다.
“이 사장, 얼굴 보기 힘들어?”
“자주 찾아뵙고 안부도 여쭙고 사업 이야기도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요새 남쪽에서 아주 산다면서? 한 반년 됐다고? 거기 뭐 좋은 거 있나? 애인이라도 생겼어?”
문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순식간에 사르르 풀어졌다.
“저 그런 거 안 만드는 거 회장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업 구상 좀 하고 있었습니다. 의외로 그쪽이 블루오션이더라고요.”
“그래? 무슨 사업?”
백태호 회장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며 매력적인 눈가 주름,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억실억실한 이목구비만 보면 왕년의 미남 영화배우 같지만, 그를 바라보는지 딱 30초만 지나면 누구나 알게 된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깡시골 출신이 몸뚱이 하나만으로 지금 자리까지 올라왔다. 젊었을 때는 알아주는 정치 깡패였다고 했던가. 시장에서 푼돈으로 돌리던 일수는 사채업이 되었다가 대부 회사를 거쳐 번듯한 저축은행이 되었다.
말이 좋아 용역 회사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던 깡패 집단은 철거 전문 회사가 되었다가 지방 건설사 하나를 집어 먹은 뒤에 이름을 바꿔 달고 번듯한 회사 흉내를 내게 됐다. 그 외에도 식당이며 호텔 등 백태호가 거느린 사업체는 수십 개에 이른다.
문화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백호그룹 계열사 사장이자 백호파의 행동대장인 자신이 서울 사무실을 비우고, 지방을 돌아다니는 건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부러 건천동 꼭대기 자택까지 문화를 불러서 속을 떠보는 걸 보면 무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쑤석거린 걸까. 잡히기만 해 봐라. 귀때기를 쑤셔 줄까, 배때기를 쑤셔 줄까.
“해상 급유…… 그, 뉴스에서 보셨지요? 순양에서 난리 난 건 있지 않습니까? 해상 급유선, 바지선이라고 하는 그게 판만 잘 짜면 안정적으로 수익이 날 것 같습니다. 시험적으로 돌려 볼 곳 찾으려고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항구들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서요한 검사가 지나가듯 언급했던 말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그 동네에 그런 데가 있나?”
“제가 주의 깊게 보는 곳이 개산항이라고, 요새 자주 다니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거기가 시골 항구치고 제법 큽니다. 항구에 모래 야적장이랑 작은 수리 조선소가 있어서 급유 양도 꽤 되고요, 고철이랑 모래 사업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해상 급유는 백호그룹이 아직 해 본 적 없는 사업이니까 너무 크지 않은 항구에서 시험적으로 운영해 보고, 된다 싶으면 확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장이면 어련히 잘하겠지.”
“예. 회장님 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잘하겠습니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한 면피 목적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백 회장에게 설명하다 보니 문화 자신도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는 연암으로 돌아가자마자 서요한 검사를 꾀어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겉으로는 센 척해도 어리고 약한 것 상대로는 무르기 짝이 없는 검사 나리 하나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서 검사가 문화의 어디를 보고 그를 어리고 약한 것으로 분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화는 그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요한 검사, 생긴 것만 꽃인 줄 알았더니 머릿속은 아주 꽃밭이야. 그 눈썰미로 무슨 검사를 하겠다고.
백 회장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딴생각을 했음을 깨닫자마자 문화는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부하들이 자기 앞에서 한눈파는 걸 못 견디는 백 회장은 한눈판 사람이 누구든 골프채를 휘두르거나 재떨이를 집어 던져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문화는 눈알을 굴려 그의 기색을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백 회장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먼눈을 하고 있었다.
“회장님. 저는 그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다음에는 좋은 소식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문화야.”
폭력배와 시비가 붙어 두 명을 피떡으로 만들었다가 조직 본부로 끌려가서는 보복 폭행을 당해 양팔이 다 부러진 열일곱 살 이문화를 거둔 사람이 바로 그 조직의 두목 백태호였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눈이 시커멓게 죽은 게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백 회장의 가방잡이에서 시작한 조직 생활도 벌써 15년째. 문화는 이십 대 중반에 이미 간부가 되어 서른둘인 지금은 백호홀딩스의 사장이자 백호캐피탈의 상무이며 백호엔지니어링의 대외협력실장 명함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백호파의 명실상부한 이인자였다.
문화가 이 실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뒤로 한 번도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 없었던 백 회장이 “문화야.”라고 했다.
무슨 일일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는 걸까.
“나는 네가 냉정해서 좋았다. 잡념이 없다는 말이거든. 너 같은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림이 없지. 미련이 없어서 그렇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희로애락이 생기면 어찌 되는지 알아?”
“…….”
“부서진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산산조각이 나. 약점을 만들지 마라.”
“…….”
“네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무릎 꿇는 사람이 되지 말란 소리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약점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치 이문화에게 약점이 생겼다는 말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문화는 누구도 믿지 않고, 무엇에도 애착을 품지 않는다. 하물며 백태호 회장조차도 믿어 본 적이 없다. 그런 이문화에게 미련이라니. 희로애락이라니.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은밀한 불쾌감이 문화의 피부 위를 기어 다녔다. 백 회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앞뒤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문화의 불쾌감을 부추겼다.
문화는 가만히 백 회장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아무 답도 주지 않았다. 결국 먼저 눈길을 거두며 “나가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이 사장.”
“예.”
“내가 요새 정원을 새로 꾸미고 있거든.”
“아, 예. 들어오는 길에 봤습니다.”
“괜찮은 소나무하고 정원석 구하는 게 영 어렵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이 사장만 믿어.”
“예. 알겠습니다.”
문화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싫다는 말은 있을 수 없기에 그저 알겠다고 대답했다.
문화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두 그의 손에 들린 야구 배트를 본 모양이었다.
“휴대 전화 다 가지고 와.”
“예? 휴대 전화요?”
“귓구멍에 좆 박혔어? 휴대 전화 전부 꺼내서 여기 올려놓으라고.”
탁자 위에 올려진 최신형 휴대 전화 일곱 개가 야구 배트 아래서 순식간에 박살 났다.
“다음은 턱주가리다.”
문화와 10년 넘게 부대끼며 그나마 문화를 덜 어려워하는 마상식 부장이 총대를 멨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건천동 쥐새끼 누구야.”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그런 놈 없습니다.”
“다음에 물어볼 때까지 쥐새끼 못 찾으면 전부 다 쥐새끼인 걸로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뭘 아는데?”
“저희 턱주가리가 전부 공평하게 날아가겠죠.”
“잘 아네.”
쾅, 하고 문틀이 흔들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장실 문이 닫혔다.
“어휴, 씨발. 저거 또 어디가 꼬여서 지랄이야.”
마상식이 한때 휴대 전화기였던 것들의 잔해를 치우며 구시렁거리는데, 사장실 문이 다시 열렸다.
“마 부장.”
욕하는 걸 들은 건 아니겠지. 마상식의 굽은 어깨가 한층 더 오그라들었다.
“예, 사장님.”
“1톤 트럭 하나 수배해.”
“어디 쓰실 건가요?”
“너 나랑 무덤 좀 보러 가자.”
누군가를 죽일 예정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이미 누굴 죽여서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는 뜻인가. 마상식은 갑작스러운 위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 또 무슨 쓸데없는 상상 했지? 아니야, 이 새끼야. 회장님이 정원 꾸미신대서 소나무하고 비석 캐러 가는 거야.”
아.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도굴을 하러 가겠다는 소리구나. 아무래도 살인보다는 절도가 낫지. 다행이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매우 싫어진 마상식이었다.
* * *
[검사 서요한]
문화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경직되어 보이는 네모난 플라스틱 명판이 걸린 문 앞에 서서 옷차림을 점검했다. 부하에게 빼앗아 입고 온 후줄근한 옷이 요한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최고급 맞춤 양복만 입는 이문화에게 젊은 층 대상의 일상복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그는 요한을 만나러 올 때마다 매번 새 옷을 사 입었다.
꼴에 검사랍시고 문화의 옷이 계속 바뀌는 것을 유심히 눈여겨본 요한은 언젠가부터 그에게 옷 좀 그만 사라며 타박을 놓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공작새냐며. 그렇게 옷만 사 대면 언제 돈 모아서 건실하게 살 거냐며.
서요한. 예쁘고 똑똑한 바보.
문화는 너무 우스운데 차마 웃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성대가 오그라드는 소리를 힘들게 억눌렀다.
요한은 문화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혼이 나서 기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다음 날 저녁에 양꼬치를 사 줬다.
그걸 사 준 거라고 할 수 있나?
돈을 낸 사람이 요한이었으니 사 주기는 사 줬다. 문화가 네 개를 먹는 사이에 자기는 스물두 개를 먹기는 했지만.
문화는 굳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가다듬었다. 아침에 거울로 확인했을 때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는데 과연 요한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려나.
돈도 술도 안 통하니 별수 있나.
요한이 몰래, 문화가 자신의 은밀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믿는 것이 분명한 눈빛으로, 연신 흘끔거리는 잘생긴 얼굴과 두툼한 몸을 써서 꼬드기는 수밖에.
그렇다고 쉽게 넘어오지도 않으니, 서요한은 생긴 것만큼이나 다루기 어려운 인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괜히 가슴이 꽉 눌리는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 두어 번 천천히 심호흡하고, 둔탁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안녕하십니까.”
서요한 검사실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일단 거의 항상 검사실에 나와 앉아 있던 요한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저기 널린 상자며 책상마다 산처럼 쌓인 건 서류는 그대로인데 묘하게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문화 오랜만이네?”
“검사님은요?”
“집무실에 계셔.”
혹시 몸이 안 좋은 건가. 문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어.”
짧은 대답이 들리자마자 문화는 바로 문을 열고 일단 허리부터 깊숙하게 숙였다.
“검사님, 서울 갔다가 지금 왔습니다.”
요한은 문화를 흘끔 올려다보더니 시큰둥하게 손을 휘휘 흔들었다.
“어.”
뜻밖의 반응에 문화가 망가진 로봇처럼 멈춰 서서 요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 할 말 있어?”
“아닙니다.”
“그럼 가 봐. 나 바빠서.”
“아, 네…….”
하나도 안 바빠 보이시는데요.
요한과 안면을 튼 뒤로 2주 넘도록 얼굴을 못 비춘 건 처음이었음에도 요한은 문화가 반갑지도 않았나 보다.
나름 친밀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문화 혼자만의 오해였던 걸까. 집무실 문을 닫고 몸을 돌리자 실무관과 수사관이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문화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좀, 그게…….”
“이거 유통기한 짧으니까 바로 드세요. 근데 혹시 서 검사님 몸이 안 좋으신가요?”
문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빈 책상 위에 서울에서 사 온 디저트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요한의 냉대에도 기죽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이는 문화를 향해 실무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곤란한 얼굴로 어물거리던 수사관이 입을 열려는 찰나, 집무실 문이 열리며 요한이 나왔다. 문화와 수사관 그리고 실무관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요한을 쳐다보았다.
“왜요? 왜 놀라는데요? 제 욕 했어요?”
“에이, 검사님. 저희가 검사님 욕을 왜 합니까. 문화가 서울에서 맛있는 거 사 왔다네요?”
수사관의 넉살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요한이 뺨이 미미하게 허물어졌다. 고운 입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가는 듯하다가 다시 아래로 축 처졌다.
“고마워. 잘 먹을게.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드세요. 저는 속이 좀 안 좋아서.”
저 서요한이 먹을 것을 마다하다니.
요한은 다시 집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검사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문화는 요한을 흘끔거리다가 수사관과 두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세 번째 눈이 마주쳤을 때 수사관이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요한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문화는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자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청사 현관까지 문화를 따라 나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게 말이야, 서 검사님이 좀 곤란하게 되셔서.”
“왜요?”
“우리 내부 일이라 그것까지 말하기는 좀 그렇고, 검사님 마음에 많이 안 좋으셔. 요 며칠 좀 그랬어. 때마침 네가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저요? 제가 왜요?”
“검사님이 너 많이 예뻐하시잖아. 오늘 검사님한테 술 한잔 사 달라고 졸라 봐. 외지 생활 얼마나 쓸쓸하시겠냐. 우리랑 같이 저녁 드셔 봐야 안 좋은 일만 계속 떠오르실 거고. 부탁한다, 응?”
“아, 뭐. 네. 그거야 어려운 일 아닌데요, 서 검사님 기분 안 좋으신데 제가 괜히 귀찮게 해 드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아니야, 아니야. 우리 검사님이 저래 봬도 정이 참 많은 분이야. 네 생각 얼마나 많이 하신다고.”
“제 생각이요.”
“응. 너 일자리 좀 알아봐 주라고 하셨다. 가능하면 자격증 딸 수 있는 데로. 뭐 자격증 가진 거 있어?”
저거 진짜 재미있는 물건이네.
백호파 조직원 여럿을 불러서 작신 밟은 걸로 모자라 기어코 백태호 회장을 법정으로 끌고 나와 망신을 준 날, 문화는 요한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막상 손에 쥔 건 별것 없었다. 서요한은 사생활이랄 것이 전혀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수학능력시험 만점을 받아 한국대학교를 전체 차석으로 입학하여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역대 최연소 합격자 기록을 경신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연수원 성적도 우수해 법원, 검찰, 유명 로펌이 모두 그를 탐내 물밑 암투가 상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검찰 내부 평판은 극과 극을 달렸다. 제 잘난 것만 믿고 앞뒤 없이 나대는 꼴통, 혹은 강단 있고 실행력 좋은 장래 특수통.
특이사실이 있기는 했다. 요한의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가 그에게 이득보다는 손해를 많이 가져왔다는 것.
요한의 두드러지는 미모는 남이 자기보다 돋보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잘난 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요한이 부당한 비방을 받거나 간혹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데에는 외모에 대한 유치한 질시가 큰 몫을 차지했을 터였다.
“수사관님이랑 실무관님도 같이 가시면 어때요? 회식에 제가 불청객으로 끼어드는 식으로.”
“아니야. 하, 이걸 말을 해 줘야 하나. 지금 검사님은 그냥 연암지청 전체가 다 미우실 거야. 우리랑 얼굴 보기 불편하셔서 사흘을 집무실에서 안 나오셨어. 오늘 너 왔다고 사흘 만에 처음 검사실로 나오신 거야.”
“그렇군요.”
“그럼 부탁한다?”
“아, 네.”
“엉망진창이네.”
요한이 양손 엄지 두덩으로 눈을 꾹꾹 누르다가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했다.
“뭐야. 이거 너무 이상한데. 깡촌에 뭐 주워 먹을 거 있다고 자꾸 꾸역꾸역 기어 들어오지. 무슨 속셈이야.”
요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빈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문화가 의아한 눈으로 요한을 건너다보았다. 요한은 문화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혼잣말했다.
“뭐가요?”
“아. 아니야. 나 혼잣말하는 버릇 있어. 오늘 내려왔다며 안 피곤해?”
막상 피곤한 건 요한인 듯했다. 뻑뻑한 눈을 연달아 끔뻑이자 뺨으로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어룽졌다. 문화의 반들반들한 눈길이 요한의 눈꺼풀 위에 3초쯤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요한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무의식적으로 지은 표정이었던 걸까. 그의 웃음은 물 위에 쓴 글자처럼 순식간에 지워졌지만, 문화가 동요하기에는 충분했다.
“야, 이문화. 너 내가 사람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정말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그렇게 쳐다보는 게 어떤 거예요? 반항하는 게 아니고 진짜 몰라서 그럽니다.”
“그런 게 있어. 시선 자체는 굉장히 무기질적인데, 그래서 더 이상한 느낌? 인간 눈빛이 무기질적이라는 게 말이 되냐? 안 되지? 근데 넌 그렇게 사람을 봐. 금속 같기도 하고 파충류 같기도 하고.”
“뱀? 징그럽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애매해. 아무튼, 너 지그시 사람 쳐다보는 그거…… 하지 마. 나니까 말로 좋게 얘기하지, 밖에서 그러면 시비 걸린다.”
감히 누가 문화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기분 나쁘다며 시비를 건단 말인가. 그럴 사람은 서요한밖에 없다.
말로 좋게 얘기해 주기는,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으면서. 그리고 애초에 문화가 그토록 집중해서 관찰하는 대상도 서요한뿐이니 요한의 걱정은 세상 쓸데없는 것이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문화가 시선을 떼지 않자 요한이 눈을 비볐다. 뚜벅뚜벅 요한의 눈앞으로 걸어간 문화가 그의 눈초리를 검지로 쓱 훑었다.
“응?”
“눈썹 붙어서요.”
예상치 못한 문화의 행동에 사고가 정지한 듯 요한이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뗀 문화는 당황으로 동공이 흔들리는 요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는 것도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거예요?”
“그냥 나를 보지 마.”
“어떻게 안 봐요.”
“너 집에 안 가냐?”
“퇴근 안 하세요?”
“나 일 남았어. 넌 얼른 집에 가라. 늦게 들어왔다고 엄마한테 혼날라.”
저것도 농담이라고.
밤 10시 반이었다. 요한의 퇴근 시간 직전에 저녁을 같이 먹자고 연락했더니 요한이 오늘은 일이 많이 쌓여서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도시락과 간식을 사서 검찰청으로 찾아온 것이 8시. 함께 밥을 먹고 요한이 마저 일하는 걸 두 시간 가까이 구경했다. 지루한 줄도 몰랐다.
“……워.”
“네?”
요한이 입술을 악물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지겹다고.”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하던 요한이 주어도 목적어도 불분명한 음절을 토하듯이 내뱉었다.
요한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시선을 어두운 바깥으로 두었다.
“너는 어떤 계기로 조폭이 된 거야? 아, 나는 깡패가 되어야겠다, 이런 각오를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조직에 투신한 건 아닐 거 아니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그냥? 그냥 태어난 김에 살다가 그냥 흐르는 대로 막 나가다가 그냥저냥 인생 낭비하다 그냥 죽을래? 이 새끼야. 정신 좀 차려. 말을 해도 알아먹지를 않으니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다.”
만난 지 1년도 안 되는 사람 때문에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뛸 것까지야.
문화는 문득 궁금해졌다. 요한의 오지랖은 그가 이제껏 만나고 대했던 ‘어리고 약한’ 모든 것에게 베풀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것인지.
저 마음을 동정심이라고 한다면 그 바탕에 은은하게 깔린 것은 한심함인지, 아니면 안타까움인지.
만약 서요한이 이문화에게 조금이라도 공감과 연민을 느낀다면, 그는 문화를 얼마나 포용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문화를 얼마만큼 감내할 수 있을 것인지.
문화를 어디까지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나가자.”
작게 한숨을 쉰 요한이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어 검찰청을 빠져나왔다. 가로등이 불빛을 밝히고 있었으므로 바깥은 완전히 캄캄하지는 않았다. 바다 쪽에서 불어온 습습한 바람이 딱 기분 좋을 만큼 차고 부드러웠다.
“별이다.”
요한이 불현듯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대로 서서 검푸른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매일 깜깜할 때 퇴근하는데 막상 별은 오랜만에 본다.”
가로수가 가로등 불빛을 막고 있어서 요한의 표정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문화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여 요한의 옆에 나란히 섰다.
“별 좋아하세요?”
“그냥 그래.”
문화를 올려다보며 웃은 요한이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그의 눈을 닮은 검은 하늘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별 보러 가실래요?”
“별을? 지금?”
“바다 쪽으로 가면 별 진짜 잘 보이는 데 있습니다.”
요한이 담배를 꺼내 물자 문화가 당연하다는 듯이 불을 붙여 주었다.
볼이 쏙 패일 정도로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요한이 고개를 돌리고 훅 얕은 숨을 뱉었다.
“어쭈? 이제 나 운전까지 부려 먹으려 드네?”
“아니요. 제가 모셔야지요.”
“너 차 있어?”
“제 차는 아니고, 일 거들고 오는 길이라 이 앞에 트럭 대 놨습니다. 트럭이라도 괜찮으시면…….”
딱 한 모금 피운 장초를 탁탁 털어 끈 요한이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문화가 반 발짝 뒷걸음질 쳤다.
“일? 너 일해? 진짜?”
“아, 예…… 저도 먹고살아야죠.”
“사람 패고 왔어?”
“아닙니다.”
“그럼?
“정원 일 했어요.”
“정말? 사람 묻고 온 거 아니고?”
“아닙니다. 진짜 정원이요. 소나무 옮겨 심고 돌 옮기고 잔디 깔았어요.”
요한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문화를 올려다보았다.
“이문화 이제 정신 차렸어?”
“슬슬 정신 차리려고요.”
“가자.”
“어디요?”
“네가 별 보여 준다며. 가자고.”
“아, 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요한과 이문화는 바닷가에 가지도, 별을 보지도 못했다. 연암을 벗어나기도 전에 요한의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요한이 전화를 받지 않고 화면만 노려보기에 문화가 “어디인데 그러세요?”라고 묻자 요한은 하얗고 긴 검지를 세워 새 부리 모양으로 내민 제 입술에 대고 쉿,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네. 서요한입니다.”
녹녹하게 풀어져 있던 요한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순식간에 서늘한 얼굴의 검사가 되어 버린 요한을 곁눈질한 문화가 미간을 조금 구겼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요한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급한 일이십니까?”
“급한 건 아니고. 아니, 인제 급한지 아닌지 확인하러 가야지.”
“검찰청으로 가십니까?”
“일단은. 아, 밤에 운전하기 싫은데.”
“다시 어디 먼 데 가셔야 해요?”
“선양대병원.”
요한은 연암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종합병원 이름을 댔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이 문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이 바로 “뭘 안다고 끄덕끄덕이야?” 하며 퉁바리를 줬다.
“야, 왜 이쪽으로 가냐?”
“모셔다 드리려고요.”
“나 선양대 병원 간다니까?”
“밤에 운전하는 거 싫으시다면서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검사님 별 보여 드리려고 트럭 몰고 왔는데 그냥 반납하면 아깝잖아요.”
“됐어. 정원 일 하고 왔다면서.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라.”
“제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요. 검사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서.”
“마음대로 해라.”
잠시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요한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넌 죽지 마라.”
“네?”
“너 죽으면 무조건 부검해야 할 테니까. 네 시체 검시하는 것도 끔찍하고 부검 지휘 내리는 것도 끔찍하고 검사 지휘서에 서명하는 것도 끔찍하니까 너 절대로 죽지 마라.”
“알겠습니다. 절대로 안 죽겠습니다.”
“칼에 찔려 죽어야만 부검하는 거 아니거든. 변사가 다른 게 아니야. 아직 죽을 때 안 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게 변사라 일단은 다 검안하는 게 원칙이야. 근데 말만 그렇지 돈도 시간도 사람도 없어서 다는 안 하지. 근데 네가 곱게 죽을 리가 있어? 부검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꼴로 죽을 게 뻔해.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너 죽으면 절대로 검사 지휘서에 서명 안 한다. 내가 이문화 장례 치르게 해 주나 봐라.”
요한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비록 표현은 악담에 가까웠으나 분명히 선의나 일종의 성의라고 해도 될 만한 감정이 촉발한 행동이었다. 누구보다도 문화가 제일 잘 알았겠지만.
한가한 국도를 내달린 문화는 머지않아 병원 정문 앞에 요한을 내려 주었다.
두 시간 뒤 지쳐 빠진 얼굴로 계단을 올라온 요한을 맞이한 건 뒷짐을 지고 로비를 서성거리던 이문화였다.
처음에는 환영인가 했다. 요한이 문화의 환영을 볼 리가 있겠는가. 뭐 그리 애틋하다고.
그다음에는 닮은 사람인가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거대한 덩치가 작은 시골 동네에 둘이나 있을 리가 있는가.
“야, 이문화. 너 여기서 뭐 해?”
“기다렸어요.”
“뭘 기다려? 죽은 사람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검사님 기다렸습니다.”
“나를? 왜?”
문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요한의 얼굴을 향해 문화가 손을 뻗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을 뿐이다. 문화가 한발 다가오자 요한이 흠칫 두 발 뒤로 물러섰다.
“야, 씨. 저리 가.”
“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나한테 부검실 냄새나.”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콧속이 소독약 냄새로 꽉 찼어.”
요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에휴.”
“피곤하시겠어요. 배는 안 고프세요?”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너 진짜 안 피곤해?”
“저 앉아서 잠깐 졸았는데 정말 푹 자서 개운합니다. 가시죠. 가는 길에 24시간 설렁탕집 있는데, 가실래요?”
“그러자. 뜨끈한 거 먹고 싶네.”
동이 트려면 멀었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두툼하게 덮인 밤의 끄트머리가 조금, 아주 조금 희뿌옇게 된 정도였다.
요한은 트럭을 모는 문화의 옆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밖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와 닿지 않는 그의 오른쪽 뺨에 습한 어둠이 뭉쳐 있었다.
어둠은 무섭지 않다. 어둠을 무서워한 적은 없었다. 세상에는 어둠보다 무서운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별.”
“네?”
“어제 별 보러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저 앞에. 봐봐.”
멀리 간판과 네온사인이 만든 보잘것없는 야경이 있었다. 비록 별은 보러 가지 못했지만, 별을 닮은 풍경을 둘이서 바라보았다.
“저것도 별이라면 별이겠지. 인간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왜 그렇게 별을 좋아할까? 우주에 못 가니까 땅에다 비슷한 거라도 만든 건가.”
“다음에 제대로 된 별 보여 드릴게요.”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잖아.”
“네.”
“근데 사실 죽으면 끝이잖아.”
“그렇죠.”
“인생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게 죽음인 거 같아.”
“그럴까요.”
“불합리하다는 점에서 그렇지. 어떻게 죽는지는 차치하고, 아무튼 누구든지 죽긴 죽잖아.”
“저한테는 죽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그래서 별이 된다는 말을 지어 낸 게 아닐까.”
“네?”
“설렁탕집 아직 멀었냐?”
“다 왔습니다. 다음 사거리 지나면 바로예요.”
아직 해도 안 뜬 이른 새벽, 당연하게도 설렁탕집에는 요한과 문화 둘밖에 없었다. 코를 훌쩍거리며 말없이 한 뚝배기를 싹싹 비운 요한이 식탁 맞은편에 앉은 밤의 동지를 불렀다.
“이문화.”
“네?”
“뭘 놀래.”
“갑자기 이름을 부르셔서.”
“난 죽음이 정말 싫어.”
“죽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무서워.”
“아.”
“목숨이 있는 건 반드시 죽지. 거기서 완결인 거야. 죽은 사람은 더는 어디에도 있지 않아. 돌아올 수도 없고.”
요한이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 죽고 없어져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해. 어떻게 그 ‘존재하지 않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지어 내기 시작한 게 아닐까?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그럼 뭐가 달라지나요?”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굳이 지어 내는 거야.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인생은 딱 한 번, 죽으면 거기서 다 끝이잖아?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 별은 빛나잖아. 낮에 안 보여도 없어지지 않고 빛나고 있다고. 빛과 희망인 셈이지. 비록 죽더라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별은.”
“별은?”
“이미 오래전에 불타서 사라진 우주 먼지의 잔상이죠, 사실은.”
“낭만 없기는.”
“아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여전히 빛나는 걸로 보인다는 뜻입니다.”
문화의 눈은 다른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요한은 그를 물끄러미 건너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문화가 요한에게 관사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고, 요한은 검찰청에 내려 주면 된다고 우기다가 짧은 실랑이 끝에 내비게이션에 관사 주소를 찍었다.
요한이 문화에게 자기 사는 곳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던 데에 별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문화가 요한의 주소를 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관사는 검찰청에서 가까운 저층 아파트였는데, 아무리 연암이 촌동네라고는 해도 검사 관사치고는 좀 허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문화에게 체면 깎이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 말이다.
“오늘은 쉬세요?”
“아니? 씻고 사무실 나가 봐야지.”
“어젯밤에 갑자기 불려 가셨는데도요?”
“검사는 그런 거 없어. 너야말로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 얼굴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놈처럼 허옇게 떴다. 누가 보면 내가 너 밥도 안 주고 부려 먹는 줄 알겠어.”
문화가 안전띠를 푸는 요한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검사님.”
“왜?”
“개산항에는 부두에 급유 시설이 없답니다.”
“개산항이 왜?”
“이전에 이 동네 배들 어디에서 기름 넣냐고 물으셨잖아요.”
“아! 맞다. 그렇지. 그걸 용케 기억하고 있었네?”
매끄럽게 손목을 돌려 문화의 손을 떨어낸 요한이 트럭 앞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문화가 “검사님.” 하고 다시 요한을 불렀다.
“저기, 그러면 관사 올라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뭐를?”
“개산항 급유요.”
“어, 음…….”
입술을 모으고 콧등을 찌푸린 요한이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척했다.
“지금은 좀 어렵겠는데? 출근하기 전에 눈 잠깐이라도 붙이려면 시간이 빡빡해.”
“그런가요?”
“다음에 느긋하게 말해 주라.”
“네.”
문화는 가타부타 발을 덧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차를 돌렸다.
한쪽 후미등이 나간 트럭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요한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꿀꺽 삼키듯이.
* * *
“토토 언제까지 할 거야?”
“당장 이만큼 수익 나는 것도 없는데요…… 한 반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 번 돈 어떻게 수면으로 올릴 거냐고.”
“다른 데다가 작업장을 하나 더 파서…….”
문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얼어붙는다. 책상 앞에 뒷짐을 지고 선 부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문화의 눈을 피했다.
“야, 이 개대가리 새끼들아. 돈 끌어올릴 방법을 생각해 보랬더니 작업장을 또 파겠다고? 왜? 마늘밭에 돈 묻어 놓고 10년 기다리게? 씹, 대가리가 너무 딱딱해서 뇌가 안 돌아가? 골 좀 빠개 줘?”
숨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은 사무실 분위기가 문화의 휴대 전화 진동 소리에 얼음 깨지듯 갈라졌다.
“꺼져.”
“네.”
불 켠 방의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부하들이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 문화가 휴대 전화를 들고 소파로 자리를 옮겨 방만하게 드러누웠다.
메시지는 요한에게서 온 것이었다.
[서요한: 너공공근로할래?]
천하의 이문화에게 공공근로라니. 사과 따기나 감자 캐기라도 시키려는 건가. 문화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기어코 큰 소리로 웃었다.
“서요한 이거, 진짜 또라이인가?”
고작 깡패 주제에 감히 검사님의 메시지를 씹을 수는 없는 노릇.
문화는 성실하지만 약간 모자란 똘마니의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한 글자 한 글자 성실하게 찍어 답장을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무식하게 보이는 쪽으로.
[검사님 안녕하세요? 요세 일을 하고잇어서 공공근로는 힘들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요한: 죄송할 것까지야]
[서요한: 그냥너노는중이면이름넣어 주려고한 거]
[서요한: 오늘은뭐하냐]
곧바로 새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시골 검사란 어지간히도 한가한 모양이다.
[사무실왓다가 지금 현장가려고 합니다. 저녁에끝나고 검찰청 가도 돼나요?]
[서요한: 그러던지]
문화가 느른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양옆으로 번갈아 가며 뚝뚝 꺾었다.
오늘 저녁에는 우리 서 검사 입에 뭘 집어넣어 줄까.
백태호 회장에게 불려 갔던 이후로 문화는 제 행적이 백 회장에게 알려지는 것을 몹시 꺼렸다. 끄나풀 의심을 받은 녀석 셋을 직접 손봐서 병원에 실려 가게 했으니 한동안은 알아서 몸들 사리는 중일 테다.
그러나 그는 연암에 내려갈 때만큼은 절대 남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았다. 연암에 간다는 언질조차도 없이 도둑처럼 내려갔다가 귀신처럼 올라오곤 했다. 오늘도 거의 다섯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데 귀찮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번에 보니 매운 걸 잘 먹던데. 꼬막 비빔밥을 살까. 거기에 입가심으로 도넛을 사 가면 되겠다. 꼬막 비빔밥 잘하는 식당이 어디였더라.
식당.
식당이라는 단어가 문화에게 무언가를 떠오르게 했다.
「너 모텔 탈세 어떻게 잡는 줄 아냐?」
보름쯤 전, 문화는 지난번에 못 본 별을 보여 주겠다며 요한을 거의 납치하다시피 바닷가로 데려갔다.
성수기가 한참 지나 썰렁한 해변을 두리번거리던 요한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왜 갑자기 모텔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문화가 의아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자 요한이 한 철 장사가 끝나 불빛도 드문드문한 모텔 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텔 대실 하면서 누가 카드 쓰냐. 다 현금이라 마음먹고 빼돌리면 못 잡아요. 그래서 모텔을 터는 게 아니라 세탁소를 잡는대. 손님 한번 들인 방은 이불은 안 갈아도 침대 시트는 갈거든. 시트 세탁을 얼마나 맡겼는지 보면 답 나오는 거지.」
그래서 그날은 별을 보았는가 하면,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문화와 요한의 머리 위에 어느 별자리의 저주라도 걸렸는지 별 보러 나온 날마다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사건이 터졌다기보다는 요한이 사건을 잡아낸 거지만.
문 닫은 모텔에 몰래 꾸려진 불법 도박장을 발견하고 경찰까지 불러 급습해 대대적인 소탕을 했다. 검사님은 운도 좋으시다고 문화가 농담하자 요한은 정색하고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눈썰미가 좋은 거야.”라고 대답했다.
눈썰미가 좋기는, 제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주제에.
문화는 그냥 웃었다.
아무튼. 요한의 ‘진짜’ 조언은 그다음 부분이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말이다. 매출을 부풀려도 잡아내기 힘들다는 뜻이야.」
「매출을 왜 부풀립니까?」
「자금 세탁. 대기업들은 대부분 하청 업체 이용해서 하는데…… 이탈리아 마피아는 식당으로 한다 그러더라. 매장 면적 크게 잡고 현금 매출 신고 왕창, 왕창 꾸준하게 하는 거야. 많이 벌어서 세금 많이 낸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냐?」
「그게 됩니까?」
문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요한이 신난 표정으로 이어 설명했다.
「매출 많은 식당이니까 식자재가 많이 필요할 거 아니야? 납품 제대로 받아서 세금 계산서 끊어 주고, 그걸 다 쓸 일이 없으니까 무자료로 좀 싸게 넘기는 거지. 일단 거기서 현금이 나오지. 조직원들 직원으로 이름 올려서 월급 주는 걸로 현금 또 만들고. 임대료 내고 받는 걸로도 꽤 나올 것으로.」
「돈세탁도 어려워서 못 하겠습니다. 전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야. 이 자식아, 하면 안 되지. 맞다. 누가 명의 빌려 달라 하면 절대 싫다고 해라. 식당이든 뭐든 안 된다고 해. 신용불량자라고 해. 알겠어?」
「네…… 절대 안 된다고 하겠습니다.」
명의는 빌려 주는 것이 아니다. 바지사장은 신세 망치는 지름길이다. 문화의 다짐을 받아 내고도 요한은 잔소리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도대체 조폭에게 사업 아이템을 몇 개나 알려 주는 건지. 요한의 팁 덕분에 개산항 이권 사업에도 손을 댄 문화는 겸사겸사 연암에 사무실을 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마 부장. 와 봐.”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는 편인 마상식을 불러 서요한이 기획하고 이문화가 실행할 새 사업 계획을 대략 설명했다.
“알아듣고 끄덕거리는 거야, 내가 지랄할까 봐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 자리 좀 알아보고. 소방서하고 보건소 너무 빡빡하지 않은 데로. 알지?”
“네. 근데, 사장님.”
“왜.”
“이런 아이디어 있으셨으면서 아까는 왜 또 애먼 애들을 잡으셨습니까. 무식한 새끼들 쥐어짜야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괜히 사장님만 짜증이 나시죠. 뭐, 주기적으로 군기 잡는 건 필요하지만…….”
“마 부장. 너 대학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전공이 뭐야?”
“아, 법학과 나왔습니다.”
“법대 나왔어? 진짜야?”
“네…….”
문화가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마상식이 쑥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소싯적에는 저도 공부 좀 했습니다. 잘 안 풀려서 그렇지.”
“아니, 똑같이 법대 나왔는데 왜 마상식은 이렇게 무식하지?”
“네? 제가 그래도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요.”
“무식해. 완전 무식해. 아주 깡통이야.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우리 서요한 검사는 모르는 것도 없고 참 똑똑한데 말이지. 이문화가 음침하게 웃었다.
* * *
요한은 몹시 짜증이 났다. 이문화, 그놈의 이문화 때문에.
이문화가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이문화가 했던 행동이나 말에 굳이 의미를 붙이려는 자신에게, 애새끼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피곤함에 절은 몸이 간절하게 잠을 외쳤지만 도저히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이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잠이 도망간 자리에 이문화가 비집고 들어왔다.
요한은 어둑어둑한 병원 로비를 서성거리던 널따란 등을 생각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떼어 주던 마디가 굵게 불거진 손가락을 생각했다.
뜨거운 뚝배기를 찻잔 잡듯이 들고 마시던 커다란 손을 생각했다.
이문화는 왜 아무리 구박해도 기가 죽지 않는 걸까. 이문화는 왜 계속 별을 보여 주고 싶다는 걸까. 이문화는 왜 병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이문화는 왜 관사에 따라 올라가도 가도 되냐고 물었던 걸까. 이문화가 하려던 말은 정말 개산항 급유뿐이었을까.
뜨거운 물로 정수리를 지지면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온 정신머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요한은 옷을 훌러덩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잡념이 물에 녹아 발밑에 고였다가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며 배수구로 빨려 내려갔다. 발등이 새빨개질 때까지 온수 아래 서 있었더니 머리가 조금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털어 말리던 요한이 문득 떠오른 가설에 배터리 떨어진 장난감처럼 우뚝 멈췄다.
“설마 그 새끼 나 좋아하나?”
겨우 돌아온 요한의 정신머리가 물방울과 함께 바닥으로 흩어졌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역시 일이다. 요한은 6시도 되기 전에 출근했다. 나는 기계다. 효율도 높고 수율도 우수하지.
기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일을 처리해 나갈 뿐. 기계는 동요하지 않는다. 화내지도 않는다.
일하는 기계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이성적이고 뛰어난 지성체 서요한 검사는 온종일 자기 스스로를 세뇌했다.
이문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녀석에게는 아무 감정도 없다.
……적어도 지금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어슬렁어슬렁 주차장을 가로질러 나오는 요한의 눈에 익숙한 후드 점퍼가 들어왔다.
이번 주말까지는 서울에서 일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내려오면 누가 반가워할 줄 알고? 입으로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요한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야, 이문…… 어?”
문화가 아니었다.
“서요한 검사님이시지요? 안녕하십니까!”
요한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남자는 문화의 것이 분명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뭐야.”
“저는 백호엔지니어링 건설사업본부에서 근무하는 이대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재현 청장님께 허락받고 서 검사님 모시러 왔습니다.”
“청장님이? 나를 어디로 모시는데 청장님 허락을 받아?”
“성라지검 고준영 검사님하고 연암지원 정대기 판사님도 오십니다.”
둘 다 요한이 익히 아는 이름들이었다.
“두 번째로 물어본다. 어디로 모시는데.”
“검사님들하고 판사님 모시려고 간소하게 저녁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누가.”
“저희 백호엔지니어링 사장님하고 성라지검 법사랑위원회 용연경 회장님하고…… 몇 분 더 계십니다.”
“거기 모여서 무슨 수작질을 하려고?”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일단 가시면서…….”
“싫은데.”
“네?”
“간소한 자리 가기 싫다고.”
“검사님…….”
남자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움츠리고 울상을 지었다.
심부름꾼에 불과한 녀석에게 화는 내어 무엇하리. 지청장 허락까지 받아 왔다니 아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요한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가자.”
“예.”
자신을 이대한이라 소개한 남자는 검찰청에서 멀지 않은 곳의 고택으로 요한을 데려갔다.
이문화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건성건성 남자의 뒤를 따라간 요한은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문 앞에서 약간 멈칫했다가, 문 안쪽에 펼쳐진 별천지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정원과 우아한 건물이 고즈넉한 저녁 분위기에 녹아 영화 촬영장 같은 느낌이 났다.
“어서 오십시오. 서요한 검사님이시지요? 안녕하십니까? 백호엔지니어링의 이창훈이라고 합니다.”
이대한의 꼬락서니가 이문화와 비슷해서 요한은 사장이라는 놈도 분명 어딘가의 조폭 나부랭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별채 밖으로 나와 요한을 맞이한 이창훈은 예상외로 멀끔하니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사장 같아 보였다.
“서 검사, 오랜만이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이전 같은 검찰청에서 근무했던 선배 검사 고준영이 요한을 반겼고, 몇 번 식사를 같이했었던 연암지원 판사가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고 선배님, 정 판사님 안녕하십니까.”
그 뒤로 법사랑위원회에서 안면을 튼 지역 유지와 처음 보는 얼굴 몇몇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목과 허리를 괴상하게 굽실거리며 인사했다.
간소하게 자리를 마련했다더니 방 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바글바글했다. 미간을 바짝 좁힌 요한이 이대한을 향해 작게 그르렁거렸다.
“야. 네 눈에는 이게 간소하냐?”
직원 대신 사장이 대답했다.
“서 검사님 꼭 한번 모시고 싶어서 제가 고 검사님께 간곡하게 부탁 좀 드렸습니다. 미리 연락드리고 일정을 여쭈어야 했는데, 고 검사님께서 워낙 서 검사님과 막역한 사이라 바로 모셔도 괜찮을 거라고 하셔서…….”
“예. 미리 연락해 주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애초에 거절했을 테니까.
요한이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이창훈이 별채 안쪽을 흘끔거렸다. 아마도 지원 사격을 요청하는 듯했다.
“다음부터는 꼭 미리 연락드리고 약속 잡은 뒤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검사님,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죄송한데요, 오늘까지 꼭 처리해야 하는 급한 일이 있어서요.”
에이,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고 검사가 요한을 타박하고 나섰다.
“서 검사. 밥 한술 뜨고 가지? 우리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이렇게 가는 게 어디 있냐? 여기 용 회장님하고도 아는 사이라며?”
“선배님. 저도 아쉬운데요. 중요한 일이 크게 틀어져서 오늘 꼭 뒤처리해야 탈이 안 나거든요. 아, 독촉 전화 오기 시작했네요.”
때마침 벨 소리가 울리자 요한이 잽싸게 휴대 전화를 꺼냈다. 발신자 이름이 마치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이문화]
“야, 이 새끼야! 너는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 네?
“정신 제대로 안 차리지, 너? 사무실 들어가서 바로 전화할 테니까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 아, 예…….
요한은 휴대 전화를 흔들어 보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 판사님, 조만간 뵙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솟아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내리누른 요한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리자 검찰청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며 이대한이 따라붙었다.
“백호엔지니어링 뭐 하는 회사야?”
“종합 건설 회사입니다.”
“건설……? 정 판사 옆에 있던 사람은 누구야? 인상 더럽던데. 무슨 작당 하려고 다 불러 모은 거야?”
“작당이라니요. 그런 거 아니고요…… 검사님께 인사드리려고…….”
요한이 눈을 부라리자 남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정 판사 옆자리 조폭 맞지?”
“아닙니다. 사업하는 분이에요. 건설 하청이랑 건축 자재 사업.”
“철거, 폐자재 불법 매립, 하청 업체 삥 뜯기, 밀수, 무자료 거래, 자금 세탁?”
“검사님…….”
“잠깐만. 백호엔지니어링이라고 했지. 어디서 들어 봤나 했다. 너희 청성 터널 공사 하청 들어가 있지 않아? 모래 개산항에서 가져오지? 하, 이딴 식으로 개수작 부린다 이거지. 재미있네.”
“아니요, 그게요.”
“그래. 네가 뭘 알겠냐. 사장이랑 나란히 정갈하게 목욕재계하고 기다려라.”
“검사님…….”
“아, 맞다. 너 이문화 알지?”
“네? 아, 아니요? 모르, 모르는데요?”
“씨, 어디서 구라야. 새끼야. 너는 삥 뜯을 사람이 없어서 이문화 그 거지 삥을 뜯냐? 이거 이문화 옷 맞지? 당장 돌려줘라. 내가 이문화한테 물어볼 거야. 알겠어? 이문화 물건 또 빼앗았다는 소리 들리면 뒤진다, 진짜.”
“아니요, 검사님. 제가 삥을 뜯은 게 아니라…….”
“시끄러워. 빨리 가.”
별로 검찰청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정문 앞까지 따라온 이대한의 시선이 끈질겨 요한은 어쩔 수 없이 컴컴한 사무실까지 들어왔다.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자 난데없이 욕을 먹고 어안이 벙벙해 있을 문화 생각이 났다.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검사님!
“야. 미안, 미안. 내가 아까 좀 곤란한 일이 있었는데 마침 네가 전화를 해서 살았어. 너한테 욕한 거 아니다. 오해하지 말고.”
― 안 그래도 전화하라고 메시지 보내신 거 같아서 조금 기다렸다가 전화했어요.
“새끼. 눈치 좀 늘었네.”
―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셨습니까?
“뭐. 똘추 새끼들이 모여서 똘추 짓 하는데 나까지 끼우려고 해서 튀었지. 근데 너 이대한이라고 아냐?”
― 이대한이요? 음, 왜요?
“그 자식이 너 때리냐? 돈 뺏긴 적 있어?”
― 돈, 을 뺏어요? 저한테서?
“응. 이대한 그놈이 오늘 저희 사장 심부름을 왔는데 네 옷을 입고 있더라고. 어떻게 아는 사이야? 걔 말로는 백호엔지니어링 직원이라던데. 너 그 회사 용역 뛰어?”
― ……백호엔지니어링 사장이 지금 연암에 있습니까?
“어. 거기 사장이 이 동네 한자리하는 영감들 싹 다 모았더라? 지랄 염병들을 하고 있어. 뒤질라고. 너 거기 끼어서 용돈 받아먹을 생각도 하지 마. 조만간 전부 다 때려잡을 거니까.”
휴대 전화 너머에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잇새로 짓씹는 소리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좋지 않은 말임은 분명했다.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 아니요…… 문에 새끼발가락 찧었어요. 너무 아프네요. 아…….
“조심 좀 하지. 아무튼, 저번에 네가 나 병원 데려다줬던 거 기억나?”
― 아, 예. 그날 날씨 좋아서 별 보기 딱 좋았는데…….
“너는 인마, 별에 집착 좀 그만해라. 그날 부검했던 변사체 말이야.”
― 아, 예. 저한테는 죽지 말라고 하셨죠.
“쓸데없는 것만 기억하고 그래. 아무튼, 그 사건 미제였거든? 저 위 원산항에서 실종되었는데 청성 터널 공사 현장에서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이야. 사망한 지도 꽤 오래 지났는데. 시체가 살아나서 걸어왔을까.”
― 좀비, 인가요?
문화의 엉뚱한 대답에 요한이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수사 내용 유출하면 안 되는데…… 너 어디 떠들고 다니면 죽인다?”
― 제가 어디 가서 누구한테 이야기하겠어요. 아시잖아요, 저 왕따인 거.
“실종자는 원산항 모레 채취장에서 사망했는데, 그 안에 시체 있는 걸 모르고 모래를 그대로 퍼서 개산항으로 싣고 와서 공사장에 보냈어.”
― 좀, 다이나믹…… 하네요.
“근데 돌아가신 분이 그냥 평범한 실종자가 아니거든.”
― 어떤 면에서 안 평범한데요?
“오늘 촉이 왔어.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아니다. 확실해. 잘만 풀리면 대박이야.”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렇게 이문화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이 얼마 만인지. 문화에게 잘난 척을 하고 있으니 요한의 온몸으로 익숙하고 편안한 감각이 퍼졌다.
요한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의자 깊숙하게 몸을 묻고 긴 다리를 책상 위로 올려 꼬았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 같다고.”
― 아…… 그래도 저, 검사님 계속 찾아뵈어도 돼죠?
“너 하는 거 봐서. 나 일 좀 해야겠다. 아까 고마웠어.”
― 저기, 검사님!
“왜?”
― 저 예정보다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은데, 내일 저녁 괜찮으세요?
“뭐…… 그래.”
요한은 전화를 끊고 십여 분을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백호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 이름이 낯익다 싶었는데 문화와 이야기하던 중에 그놈의 백호를 어디에서 만났었는지 깨달았다.
1군 건설 회사 네 곳이 컨소시엄으로 시공권을 딴 역대 최대 규모의 아파트 재건축 사업에서였다.
아파트 재건축은 원래 종합 범죄 선물 세트기 마련이지만, 그 사업은 규모가 역대 최고인 만큼 연루된 사람과 비리 규모도 역대 최고였기에 중앙지검에 재건축비리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공정거래수사부 에이스였던 요한에게는 철거 하도급 사건이 배당되었다.
요한이 수사했던 업체는 경쟁사를 협박해 입찰을 포기하게 하는 식으로 사업권을 땄고, 철거에 항의하는 상가 입주민들에게 용역 깡패를 보냈다. 건설사의 자금 세탁 창구였으며, 하청 업체에게 상납금 명목으로 돈을 뜯어 국토부 공무원, 경찰, 국회 의원에게 뇌물을 뿌렸다.
수사는 녹록지 않았다. 증인들은 하나씩 발을 뺐고, 고소는 계속 취하되었으며 수사 정보가 끊임없이 새어 나가 압수 수색은 매번 허탕이었다. 거기에 적당히 하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매일 들었다. 결국 자금 세탁, 뇌물 공여, 불법 정치 자금 제공 혐의는 수사가 종결되기도 전에 불기소 결정이 내려왔다.
책임이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항변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요한은 아무리 상부의 압력이 거셌다고는 해도 명백한 범죄를 처벌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는 소를 잃지 않을 테니까.
요한은 바지사장이나 심부름꾼에 불과한 임원이 아닌 진짜 대가리를 끝까지 추적했고, 기어코 증인으로 소환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요한에게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었냐고 물은 사람이 있었다. 요한은 “사람은 가도 법원 속기록은 남으니까요.”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요한을 중앙지검에서 연암지청으로 쫓겨나게 만든 문제의 증인이 바로 백태호였다. 백호그룹의 회장이자 백호파의 두목.
요한이 뒤집어엎은 회사는 백호흥업이라는 조폭 냄새 풀풀 나는 상호를 달고 있었는데, 백호엔지니어링은 아마도 백호흥업이 건설업 면허가 있는 회사를 집어삼킨 뒤에 바꿔 달은 이름일 것이다.
백태호, 호로개잡놈의 새끼.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지랄염병을 하나.
요한이 눈을 번쩍 떴다.
“넌 이제 뒤졌어, 씹새끼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반드시 교도소에 집어처넣고 말 것이다. 백태호도, 백태호 똘마니 놈들도, 백태호 뒷구멍 핥아 주는 똘추 새끼들도, 전부 모조리 다.
구토를 참으며 부검을 참관한 보람이 있었다. 사망한 남자는 다리가 부러져 있었고, 온몸에 골절상을 입고 있었으며, 폐에서 바닷모래 흔적과 분진이 발견되었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 알코올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지만, 원산항 CCTV에서 심하게 비틀거리는 모습이 찍힌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만취 상태였을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이 모래 채취장에 들어왔다가 넘어져 죽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계획된 사고사였다면 어떨까.
열악한 근무 환경에 반기를 들고 항만 노조를 조직하려던 젊은 노동자. 회사의 지속적인 탄압과 용역 깡패까지 동원한 핍박. 여기까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요한은 그 뒤의 퍼즐 조각을 맞춰 나갔다.
원산에서 죽이고, 개산에 버리고, 모래와 함께 레미콘에 섞어서 터널 바닥에 묻는다. 아마 그럴 계획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될 예정이었을 것이다.
트럭이 변사체가 담긴 모래를 레미콘 공장이 아닌 터널 현장에 쏟아붓기 전까지는. 아니, 그 변사체의 검안을 서요한 검사가 맡기 전까지는.
요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은 되도록 누구와도 약속을 만들지 않고 일찍 퇴근해서 곧장 관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술을 마실 기분도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취해서 괜한 말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기반 없는 검사는 생각보다 박살 나기 쉽다. 약간만 방향이 틀려도 불운이 겹치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요한은 이미 경험했다. 자신은 모래알처럼 작다. 검찰은 수많은 모래알로 이루어진 바닷가와 다름없으며, 모래 한 알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밀려오는 파도는 없다.
* * *
백호파 내에서 문화의 입지가 탄탄해진 건 자비 없는 일 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신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무정한 손속 하나만으로 얻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다. 이문화의 세계는 자비 없는 사람과 무정한 사람이 그저 평범한 표준인 곳이므로.
똥개.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고 어떤 이들은 문화를 그렇게 얕잡아 불렀다.
가방끈이 길어야 세상을 넓게 보는 건 아니지만, 고작 고등학교 중퇴에 불과한데도 문화는 유독 큰 그림을 그리는 데에 능했다.
회장의 개인 심부름꾼이나 다름없는 가방잡이로 조직 생활을 시작한 주제에 어느 순간 이재에 눈을 떠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백호그룹이 거느린 회사 중에 쓸 만한 것은 전부 문화의 손을 탔다. 쿰쿰한 지하를 벗어나지 못하던 조직 사업을 양성화시키자고 제안하고 꿈만 같던 계획을 현실로 만든 사람도 이문화였다. 그 과정이 경제지에 나오는 우아한 인수·합병이었을 리는 없다.
일단 목표를 찍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냥감을 막다른 절벽까지 몬다. 완벽하게 고립되어 절망한 목표물에게 마치 선량한 구원자처럼 접근해 동아줄을 내민다.
가느다란 동아줄에 사냥감이 매달린 순간, 문화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생명줄을 잘랐다.
그것이 이문화의 사냥법이었다.
한때 사무 집기였던 것들의 잔해 위에 정복왕처럼 버티고 선 이문화는 양손에 야구 배트와 일명 빠루라고 불리는 쇠 지렛대를 들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배트와 빠루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영문도 모른 채 불려 와 문화의 패악을 지켜보아야 했던 마상식이 움찔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사무실을 이 꼴로 때려 부쉈으면 몸이 지치기도 할 거니와 제풀에 분이 삭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마상식의 보스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문화가 쉭쉭 숨을 쉴 때마다 짙은 살기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안 되겠다. 가자.”
“어, 어디를요?”
“이창훈.”
“이창훈…… 사장 말씀이세요? 엔지니어링?”
“깔짝깔짝 애쓰는 게 깜찍해서 두고 봤더니…… 좆병신 새끼가 겁도 없이 남의 뒤통수를 갈겨? 뒤지고 싶다는데 뒤지게 해 드려야지.”
“사장님. 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맞다. 이대한 어디 있어? 개 같은 새끼. 시팔, 그 새끼 끌고 와.”
미친놈처럼 씩씩거리던 문화는 갑자기 거울 앞에 서더니 얼굴 근육을 씰룩대며 여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살짝 처진 눈초리가 부드럽게 접히는 눈웃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흰 이까지 드러내며 웃는 표정을 몇 번이나 연습했다.
아무리 상냥한 미소를 지어도 거울 속의 이문화는 조금도 다정해 보이지 않았다.
올리브색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번들 빛났고, 입꼬리를 끌어올릴 때마다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가 사냥을 앞둔 육식 동물의 그것처럼 흉포하게 번득거렸으며, 잘생긴 입술 사이로 나오는 건 살벌한 욕설뿐이었기 때문이다.
문화가 조끼 밑단을 잡아당겨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조여드는 조끼 덕분에 넓은 어깨와 두툼한 가슴이 유달리 두드러졌다. 그 위에 크림색 더블 버튼 재킷까지 걸치니 곁눈으로 보아도 위압적인 조폭 두목이었다.
마상식은 불길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잃은 고운 빛깔의 슈트와 먼지 하나 없는 하얀 구두에 점점이 떨어져 말라붙은 거뭇거뭇한 액체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절대 안 돼. 무조건 말려야 한다.
“사장님! 이창훈 지금 자리에 없어요. 가셔도 못 만나실 겁니다.”
“마 부장이 어떻게 알아?”
칼 같은 시선이 마상식의 얼굴을 할퀴었다.
“이번 주 출장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고요. 지난주에 이창훈 비서한테 사장님 잠깐 뵐 수 있냐고 연락 왔길래 이번 주에 시간 되시는지 여쭤본다고 했더니 자기네 사장 이번 주 출장이라 다다음 주에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시팔 새끼, 명줄 존나게 질기네. 야. 뭐해? 가자니까.”
“이창훈 없, 없다니까요?”
“사무실에다 나 왔다 갔다고 표시해 놓으면 연락하겠지. 한명진, 가서 차 시동 걸어. 조경태는 빠따하고 빠루 챙겨서 따라서 오고. 박건호, 김동식. 너희는 이대한 데려다 놔라.”
오후까지만 하더라도 딱히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 이문화는 잠깐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화살 맞은 멧돼지처럼 발작하면서 사무실을 때려 부쉈다.
문화는 야구 방망이와 쇠 지렛대를 즐겨 썼는데, 야구 배트는 도자기나 집기를 깨부술 때 쓰고 쇠 지렛대는 책장이나 테이블, 소파 등 가구를 박살 낼 때 썼다.
연장을 들고 설치는 이문화도 물론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건 맨손에 장갑만 낀 이문화였다.
문화에게 빠따로 얻어맞으면 몇 군데 부러지기는 해도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화가 재킷을 벗고 시계를 풀면 그날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 나갔다.
사무실을 걸레로 만든 문화가 백호엔지니어링의 이창훈 사장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 마상식은 환각으로 피비린내를 맡았다.
말단 조직원으로 시작해서 사장까지 오른 문화와는 다르게 이창훈은 컨설턴트 출신의 전문 경영인으로 문화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백호파 고문이 뒤를 봐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문화는 이창훈에게 손을 쓰면 백호파의 늙은 여우들에게 빌미를 준다는 걸 모르는 아둔한 인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직접 죽여 버리겠다고 나설 정도였으니 무언가 크게 사달이 나기는 난 모양이다.
이문화는 아마 이창훈을 피떡으로 만들 생각이었을 것이며, 이창훈은 주먹까지도 갈 것 없이 문화의 딱밤 두 방이면 두개골이 깨질 것이다. 그 작자는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문화의 심기를 이토록 긁어 놓았단 말인가.
마상식은 문화가 듣지 못하도록 입술만 작게 움직여 “대한이 잘 숨겨. 한 일주일 어디 보내 놔.” 하고 지시하며 이창훈이 진짜로 출장이든 뭐든 가서 자리에 없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요한은 맹렬하게 일했다. 중앙지검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중이고 주말이고 허다하게 검사실에서 밤을 새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연암으로 내려온 뒤 이렇게까지 일에 열중하기는 처음이었다.
얼마 전 서울에 다녀온 뒤로 한층 뺀들거리는 문화와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시간 대부분을 검찰청에서 보냈다.
비록 징계성 인사 발령을 받아 땅끝 촌구석으로 쫓겨 내려왔어도, 연암지청에 전임하고 반년도 안 되어 지청장에게 대들었다가 크게 찍히는 일이 있었어도, 요한은 우수한 검사였다.
다만, 법무부 장관 표창을 두 번이나 받은 엘리트 검사 서요한과 다르게 인간 서요한의 수완은 변변치 못했다.
그는 명쾌하게 어느 쪽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몹시 결벽증적이고 예민한 구석이 있지만 고집스럽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사생활이라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으니 공과 사를 잘 구분한다고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사교에 서툴고 인맥 쌓기나 조직 내 정치질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검사라는 단단한 껍데기 속에 서요한이라는 무르고 부드러운 알맹이를 완전히 집어넣고 겉으로는 담담한 척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요한의 외면을 감싼 견고한 권위의 껍데기와 복잡한 음영이 어른거리는 아름다운 눈동자의 부조화가 마치 인력처럼 이문화를 끌어당겼다.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은밀한 감정이 문화를 동요시켰다. 요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까지 내몰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안하기도 하고, 도착적인 집착 같은 것도 불쑥 일어나고는 했다.
다른 때였으면 이런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대상에게 주먹부터 날리고 보았을 텐데, 이상하기도 하지.
“커피나 한 잔 하고 들어가자.”
요한이 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자 문화가 부지깽이에 찔린 사람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것까지는 없고.”
주말에도 일만 하면 자기랑은 언제 놀아 줄 거냐며 문화가 뻔뻔한 얼굴로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요한은 문화를 데리고 작은 시내까지 나가 생선조림 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연암 유일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고작 몇백 미터를 걸었을 뿐인데 코가 빨개질 정도로 겨울이 무르익어 있었다. 늘 창백하도록 새하얗던 요한의 뺨이 추위로 발그레했다.
문화가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요한의 휴대 전화가 심술이라도 부리듯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좀 받고 올게.”
발신자를 확인한 요한이 통화를 시작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문화는 팔짱을 끼고 창가의 높은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선 요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요한은 코를 찡긋거리며 웃다가 블라인드 틈 사이로 스며든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서요한은 처음 보았다. 저렇게 무구하게 방심한 얼굴은.
잠시 후 요한은 다시 한번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오도카니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문화를 향한 겸연쩍은 웃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른 데가 있었다. 명치에 둔중한 불쾌감을 느끼며 문화는 요한에게서 눈을 뗐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유경이 넌 언제든 환영이지. 기다릴게.”
바로 가까이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 문화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에이. 커피 다 식었다.”
목울대를 울리며 꿀꺽 커피를 삼키는 요한을 바라보다가 문화도 묵묵히 자기 잔을 비웠다.
요한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문화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문화는 자기가 요한을 빤히 바라볼 때마다 요한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잠자코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속 안 좋아?”
“아니요.”
“아까 생선조림이 좀 맵긴 했지?”
“방금, 여자 친구세요?”
“누구? 전화? 아니야, 여자 친구는 무슨.”
“여자분 성함이시던데…….”
“그새 봤어?”
요한이 피식 웃으며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새하얀 손가락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감긴 모양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남자애야. 내가 음…… 후원한다고 해야 하나? 소소하게 돌봐 주는 애야. 고등학교 때 야구 하던 앤데, 안 좋은 일에 말려서 학교 그만두고 방황했거든. 어디 단속 갔다가 알게 되었는데, 애가 참 착해. 안타깝더라고.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앞으로는 좀 잘 풀렸으면 싶어서…….”
“다정하시네요.”
“내가? 뭘 다정해, 다정하기는. 해 주는 거 아무것도 없어. 그냥 전화 받아 주고 가끔 밥 사 주고 그러는 거지.”
“검사님은 인생 잘 안 풀린 사람 보시면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시나 봐요.”
“아니라니까? 내가 막장 인생 수집가냐?”
문화는 서늘한 냉기를 띈 눈으로 물끄러미 요한을 건너다보았다.
“저도 인생 잘 안 풀려서 불쌍해서 봐주시는 거예요?”
“야이, 씨. 말본새하고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네가 하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떼어 내기도 귀찮아서 내버려 뒀다. 왜. 너 불쌍한 놈 아니라고 항변하려고?”
“아니요. 저 불쌍한 놈 맞습니다. 막장 인생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앞으로도 잘 봐주세요.”
“너 하는 거 봐서.”
“아까 기다리시겠다고 하셨는데……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 유경이 군대 갔거든. 곧 휴가 나오는데 여기 와도 되냐고 해서.”
“아. 그러시구나.”
일요일 오후 3시 40분. 평범한 오후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요한이 평소보다 나긋한 태도로 문화를 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종이 냅킨을 만지작거리는 요한의 기다란 손가락이 아름다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화는 발밑에 늪이 펼쳐지는 기분을 느꼈다. 요한의 검고 둥근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뱃속에서 찰랑거리던 이름 없는 감정이 기어코 흘러넘쳐 제 몸을 축축하게 적셔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 *
12월 24일 오후 8시 30분.
휴대 전화가 온몸을 뒤트는 소리에 요한은 화들짝 선잠에서 깼다.
“지진 난 줄 알았네.”
이 시간에 서요한 검사를 찾는 연락이라면 십중팔구 긴급 체포나 변사체 발견이다. 과연 사건일까 사고일까.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문화: 뭐 하세요?]
사건도 사고도, 하물며 스팸 메시지도 아니었다. 요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 하세요, 식사하셨습니까,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낯짝 두꺼운 녀석의 메시지는 보통 이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거리를 두고 대하는 요한이 문화에게 쉬이 곁을 내주고 유독 무르게 대하는 데에는 문화의 시의적절한 메시지 덕이 컸다.
놈은 마치 가까이에서 요한을 내내 지켜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요한이 지청장에게 박살이 나서 기분이 몹시 저조할 때나 전날 잠을 설쳐서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을 때, 아니면 끼니도 거르고 허겁지겁 일을 해치우고 겨우 한숨 돌릴 때면 문화의 메시지가 요한의 휴대 전화에 꽂혔다.
“이 새끼, 설마 나 스토킹하나?”
요한은 한 글자씩 꾹꾹 눌러 답장을 썼다. 너무 빨리 보내면 혹시라도 문화의 연락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까 5분 기다렸다가 보냈다.
[일하다쉬는중너는뭐하는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오늘 밤은 당직이니까. 비록 몸은 관사 바닥에 눌어붙어 있을지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일하는 중인 건 맞았다.
[이문화: 근대 왜 아직까지 일하세요? 퇴근않하세요?]
[당직당첨]
[이문화: 식사 하셨습니까?]
“그 말 왜 안 하나 했다.”
검사님께서 사 주신 밥이라 맛이 남다르다며 히죽거리는 뺀질뺀질한 얼굴이 떠올라 요한이 피식 웃었다.
[아직안먹음너는]
[이문화: 아직 못먹엇습니다. 검사님 식사 전이시니까 같이 드실래요.]
“같이? 이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지금어딘데]
[이문화: 연암 다왓습니다.]
[서울간다고하지않았냐]
[이문화: 얼른 연암오려고 일 빨리봣어요.]
[뭐하러]
요한은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뱃속이 간질간질해지는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문화: 검사님하고 저녁 같이 먹으려고요. 검찰청 앞으로 갈까요?]
모로 드러누워 있던 요한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터미널앞으로나삼십분뒤도착]
절대로 방구석에 퍼져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하나 없이 청승맞게 드러누워 있었던 걸 들킬 수 없다.
대단한 사정은 아니나 요한에게는 중요했다. 할 일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고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문화에게는.
오늘 당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당직을 바꾸기를 잘했다고 안도하는 요한이 있다.
언제든지 당직을 대신 서 주는 서요한 검사의 내면은 소심한 겁쟁이였다. 당직을 자처해서라도 어디도 갈 수 없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핑계를 만들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미련퉁이였으니 말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감았던 머리를 또 감았다. 머리를 감다가 어깻죽지가 축축하게 젖어 내친김에 홀딱 벗어 버리고 샤워까지 했다.
옷은 고르고 말 것도 없었다. 대충 걸어 둔 양복을 주섬주섬 다시 주워 입었다. 넥타이도 도로 맬까 하다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대신 셔츠 윗단추 두 개를 풀었다. 얇은 코트에 몸을 꿰고 현관문을 나섰다.
“으, 추워.”
매서운 저녁 바람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찔러 요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두꺼운 패딩점퍼로 갈아입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춥다 한들 고등학생 같은 옷을 입을 수는 않은가. 검사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가 있는 법이다.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어도 될 텐데 문화는 어김없이 식당 문 앞에서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문화가 요한의 등허리에 살짝 손을 짚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어요. 들어가요.”
언제부터였을까. 문화가 자연스럽게 요한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요한이 익숙해진 건 문화의 손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문화의 시선에도, 알 듯 모를 듯 움찔거리는 입꼬리에도 언젠가부터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휴일 전날 당직 싫으시죠.”
“당직이 사람 가리면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내일 크리스마스인데요.”
“시골 검사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
일부러 당직을 바꿨다는 건 비밀이었다. 문화의 앞에서는 내내 거들먹거리는 서요한 검사이고 싶었으니까.
“당직이시면 다시 사무실 들어가셔야 해요?”
“왜?”
“그냥요.”
“별일 없으면 안 가려고. 너는 집에 안 가?”
“그럼 관사로 돌아가세요?”
“글쎄? 어차피 당직이니 푹 자기는 글렀고.”
“오늘 별 보러 가면 좋을 텐데 흐려서 아쉽네요.”
“그놈의 별, 진짜.”
요한이 미간을 콱 찌푸리고 노려보자 문화는 눈초리를 접고 사르르 웃어 보였다.
문화에게 입꼬리만 올리고 눈은 부릅뜬 가짜 웃음이 소름 끼친다고 했었더랬다. 그간 웃는 얼굴을 연습하기라도 한 양 문화는 이제 아주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커피 한 잔 하고 가라.”
“커피요?”
“나 오늘 당직이라 술은 못 마시니까.”
“문 연 카페가 있으려나요?”
“롯○리아 가면 되지.”
“푸…….”
문화가 손등으로 입을 급히 막았으나 푸흣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났다. 요한이 샐쭉하니 흘겨보자 그는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빨개진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뭐야, 왜 웃어.”
“왜 하필 롯○리아예요?”
“연암에 맥도○드 없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허우대 멀쩡한 성인 남자 두 사람이 롯○리아의 옹색한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구겨 앉았다.
“뭐 마실래?”
요한은 자기를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문화의 어깨를 눌러 도로 의자에 앉혔다.
“커피요. 안 단 걸로.”
키오스크 화면을 능숙하게 다루는 요한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문화가 들고 온 봉투를 꺼냈다.
“뜨겁다. 조심해.”
요한이 테이블 위에 빨갛고 하얀 크리스마스 색깔 종이컵을 내려놓자 문화도 선명한 주황색 상자를 요한 쪽으로 쓱 밀었다.
“뭐야?”
“크리스마스 선물이요.”
“나?”
“네.”
“나 주는 선물이라고?”
“네.”
“왜?”
“크리스마스니까요.”
“크리스마스에 왜 네가 나한테 선물을 주는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해 묻는 요한에게 문화가 지치지도 않고 상냥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좋은 날이니까 같이 축하하면 좋잖아요. 겸사겸사 감사도 드리고.”
“나한테 왜 감사해?”
“잘 봐주셔서 감사해서요.”
“잘 봐준 적 없는데?”
“이제까지 저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 분은 검사님이 처음이세요.”
“내가 다정하다고?”
문화는 종이봉투를 열어 납작한 상자를 꺼내 황황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만 끔뻑거리는 요한의 손에 상자를 묶은 짙은 고동색 리본을 쥐여 주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뭔데?”
“열어 보세요.”
비뚜름하게 치켜든 고개를 갸우뚱하며 요한이 천천히 리본을 풀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는 잠자리 날개 같은 내지 아래 얌전하게 누워 있던 카멜색 가죽 장갑을 손끝으로 훑더니 전기라도 오른 양 얼굴을 반짝 들었다.
“이거 비싼 거 아니야?”
“제 수준에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요.”
“그게 선물 주면서 할 말이냐?”
요한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장갑을 꼈다.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을 쫙 펼쳤다가 하더니 검지를 세워 문화의 손등을 쓸었다.
“부드럽네.”
“잘 맞아요?”
“딱 맞아.”
“마음에 드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응.”
요한이 장갑 낀 양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장갑 끼니까 하나도 안 뜨겁다.”
“잘 어울려요.”
눈을 가늘게 접은 문화는 진귀한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듯 커피를 마시는 요한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문화의 눈길을 느꼈는지 요한이 장갑에서 시선을 떼고 문화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요한의 말간 눈이 문화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니, 그 눈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저 문화 혼자 찔리는 것뿐.
“사실…….”
“네?”
“아니다.”
“사실, 뭐요?”
“나 크리스마스 선물 처음 받아 봤어. 우리 집이 좀, 뭐라 그래야 하나. 선물 주고받고 그러는 집이 아니라…….”
“저도 처음이에요. 남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주는 거.”
“너 지금 검사한테 사기 치냐?”
“거짓말 아닌데요.”
“얼씨구.”
“그럼 올해는 처음인 걸로 하죠.”
“……난 준비 못 했는데.”
요한이 입 안에서 내내 우물거리던 말을 결국 뱉었다. 뺨을 물들였던 붉은 기가 목까지 내려왔다.
“너 선물로 뭐 받고 싶어? 뭐 줄까?”
“생각 안 해 봤는데요.”
“생각해 봐. 나만 받으면 염치없잖아.”
“내년에 말씀드릴게요.”
“내년 같은 소리 하네. 내년에 살아 있을지도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문화는 은근히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요한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내일 안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받고 싶은 거 골라 놔.”
“생각해 볼게요.”
요한도 문화도 이미 식어 버린 지 오래인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었다.
“내년에는 뭐 하냐?”
“아직 모르죠.”
“뭘 하고 싶냐고.”
“글쎄요…….”
“아, 나는 유학 가고 싶은데 되려나.”
“유학이요?”
“응. 검사 상위 20%는 유학 보내 주거든. 원래는 당연히 가는 거였는데…… 너도 알잖아. 나 사고 쳐서 쫓겨 내려온 거. 딱 내년이 우리 기수 유학 선발하는 해인데 어찌 되려나.”
“유학이요…….”
“너는 인마, 깡패나 빨리 그만둬. 백호엔지니어링 사장 아래 아래 아래? 더 아래인가? 하여간 제일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놈한테 삥이나 뜯기고 다니고. 야, 다음에 이대한인가 하는 놈이 또 삥 뜯으려고 하면 나 팔아. 덩치는 네가 더 큰데 왜 당하고 사냐? 차라리 패 버리든가. 깡패끼리 싸운 건데 어차피 쌍방일 거고. 너는 내가 특별히 훈방해 줄게.”
“하하. 지인 특전입니까?”
“아니? 이문화는 내가 직접 보호관찰 할 거야. 그게 더 괴로울걸?”
“괴로울 리가요. 제가 검사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진심이에요.”
요한이 웩 하고 구역질하는 흉내를 냈다.
“야, 때려치워. 그딴 진심 필요 없어.”
“그렇게까지 질색하시면 저 상처받아요.”
“안 받는 거 알거든?”
“아닌데요…… 유경이만 예뻐하지 마시고 저도 예뻐해 주세요.”
요한이 눈을 삐쭉 치켜떴다.
“네가 권유경을 어떻게 알아?”
“저번에 말씀해 주셨잖아요. 후원하신다고.”
“아…….”
그제야 표정을 푼 요한이 문화를 향해 눈을 흘겼다.
“유경이랑 너랑 같냐? 걔는 인마, 조폭들이 자기 아래로 들어오라고 하는 거 싫다고 버티다가 두들겨 맞기까지 한 애야. 너처럼 날름 깡패 하겠다고 손들고 나선 놈이 뭐가 예쁘다고.”
“그때 저한테도 서요한 검사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웃기시네. 넌 분명히 싹수가 노랬을 거야. 저기, 너 혹시 고등학교는 졸업했어?”
문화는 머쓱하게 웃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절반만 다녔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너 이 자식, 애들 패다가 걸려서 잘렸지?”
“노 코멘트 해도 됩니까?”
“너 새 삶 살더라도 찐하게 회개와 반성의 시간 좀 가져야겠다.”
그새 표정을 지운 얼굴로 요한을 지그시 건너다보던 문화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저도 어릴 때 야구했어요.”
“진짜?”
“예. 프로 가려고 진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왜 그만뒀어?”
“돈이 없어서요.”
호시탐탐 문화를 놀릴 기회만 엿보며 입꼬리를 심술궂게 삐죽대고 있던 요한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운동, 생각보다 돈 정말 많이 들거든요. 야구 안 할 거면 학교 다닐 이유가 없어서 2학년 여름 정도부터 그냥 안 나갔습니다.”
“……검정고시는?”
“몸 쓰는 일은 딱히 졸업장 필요 없더라고요.”
“졸업장이 없으니까 깡패밖에 못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하냐?”
퉁바리를 주는 요한의 목소리가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누그러졌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혼혈 고아가 할 수 있는 게 깡패밖에 없었다고 하면, 노력이 부족하다고 검사님께 혼나려나요?”
“야…… 너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그 정도 냉혈한은 아니다. 근데 너 혼혈이야?”
“모르셨어요?”
“네가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보면 티 나지 않나요? 다 알던데요.”
“그러고 보니까 눈 색이 연하네?”
“자세히 보실래요?”
연한 갈색인가. 녹색도 보이는 것 같고. 홍채 반점이 꼭 금모래 뿌려진 것 같네.
요한은 숨이 닿을 만큼 문화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그의 짙은 올리브색 눈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네 눈, 되게 예쁘다.”
예상치 못했던 요한의 말에 문화가 흠칫 어깨를 뒤로 물렸다. 요한의 새카만 동공에 얼뜨기같이 입가를 허물어뜨린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12월 25일 오전 11시.
아무것도 안 하고 내내 잠만 잤는데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
이놈의 몸뚱이는 염치도 없다며 자기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 요한은 캐럴이 요란한 시내로 나갔다. 그래도 나름 크리스마스라고 늘 한산했던 거리가 조금은 복작거리는 것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손등에 닿는 뭉클한 덩어리에 깜짝 놀라 화들짝 손을 뺐다. 열악한 관사 상황을 생각해 보면 지난 밤에 쥐가 들어와서 코트 주머니에 숨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니까.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던 요한이 퍼뜩 기억해 냈다. 주머니 속의 무언가는 쥐가 아니라 문화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을.
요한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가락 끝으로 가죽 장갑의 보드라운 촉감을 음미하다가 장갑을 꺼내 한 쪽씩 천천히 꼈다.
어제 문화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까지 질색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이문화도 권유경처럼 순진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야구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 혹시 서럽게 엉엉 울었을까. 서요한 검사가 열여덟 권유경의 곁에 있어 주었듯이 누군가가 열여덟 이문화의 곁에 있어 주었더라면 최소한 조폭 똘마니가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에라, 됐다.
과거를 가정해 보아야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요한은 끊임없이 문화와 자신이 과거의 인생 갈림길에서 만나 미래를 바꾸는 상상을 했다.
쓸모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망상을 멈추지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몰이해와 이해 불가능의 사이에서 요한이 끙, 하고 답답한 신음을 뱉었다.
그래서 뭐.
깡패짓 못하게 하겠다고 다 큰 어른 팔다리를 묶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딱히 본인이 바라지도 않는 도움을 준답시고 어쭙잖게 남의 인생에 개입할 생각도 없다. 그저 조금 불안하고 조금 초조해 속이 울렁거리는 것뿐.
말로는 그 정도밖에 할 수 없다. 그 너머에 있는 건 요한의 어휘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설명하더라도 요한이 현재 느끼는 감정을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한이 억지로 그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 보아야 지저분한 마음의 방을 청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청소를 하면 마음이야 깔끔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지는 않는다. 문이 굳게 잠겨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방이 아무리 깨끗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멍하니 걷던 요한은 케이크 박스가 산처럼 쌓인 제과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왜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는 거지. 자기 생일도 아니면서 요란들을 떨어요.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지난 밤 선물을 내밀며 문화가 했던 말이 요한의 뇌리를 스쳤다.
「좋은 날이니까 같이 축하하면 좋잖아요.」
신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러 태어난 날이라니까 확실히 좋은 날은 맞다. 그러면 올해는 남들과 함께 좋은 날을 축하해 볼까.
요한은 제과점 진열장 앞에 멈춰 서서 케이크를 살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이문화 그 자식, 분명히 인기 많겠지.
알맹이야 어쨌든 최소한 눈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근사했다. 키도 크고 몸도 훌륭하고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목소리도 좋다.
무식한 것이 흠이긴 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공부를 안 해서 그럴 뿐이지 머리도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빨랐다.
그런 이문화에게 크리스마스에 만날 사람이 없을 리가 있나. 어쩌면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수십 명쯤 될지도 모른다.
요한은 자신의 자의식 과잉에 실소가 나왔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문화가 자기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한 걸까. 그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했다. 문화의 커다란 손도 몹시 따뜻했던 기억이 났다.
제과점 문을 열고 들어가 케이크를 샀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 대신 롤케이크를.
검사실 직원들과 나눠 먹으려면 동그란 케이크보다는 길쭉한 롤케이크가 나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이문화를 준다든지 이문화와 함께 먹으려고 케이크를 사는 것은 아니다. 롤케이크에 마음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유통기간이 제일 긴 롤케이크를 샀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내일이 아니면 모레라도 혹시 함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만났을 때 문화가 관사에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그때는 흔쾌히 그러라고 해야지.
요한은 사무실에 돌아와서야 막상 점심밥은 먹지도 않고 그냥 돌아온 걸 알았다.
다시 찬 바람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팔을 베고 누우니 잠이 쏟아졌다.
폭력적인 수마를 이겨 낼 도리가 없어 일찌감치 항복을 고하고 눈을 감았다.
“요한아.”
문화가 웃는 목소리로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아?
이 자식이 미쳤나.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건방지게 이름을 불러 젖히는 문화를 엄하게 꾸짖어 주려고 했는데, 막상 요한이 입을 벌리자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좋아?”
“야! 너 지금 뭐하…… 읏!”
언제 옷을 벗었더라. 크고 따뜻한 손이 요한의 사타구니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바지 위로도 느껴지는 뜨끈한 체온에 요한이 몸을 뒤틀자 문화가 몸을 숙여 요한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저리 안 비켜?”
“진심이야?”
“지, 진짜야…….”
“더 해 줬으면 하는 것 같은데.”
황망함에 끄트머리가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흐트러진 말꼬리가 마치 울먹거리는 소리로 들려 요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도 모르는 중심은 단단해진 지 오래였다. 문화의 손가락 끝이 두둑해진 앞섶을 슬쩍슬쩍 건드릴 때마다 요한의 허벅지가 경련했다.
“너, 너…….”
“기분 좋게 해 줄게.”
문화가 요한의 무릎을 잡아 벌리더니 다리 사이에 꿇어앉았다.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요한이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어찌 된 일인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습한 점막이 성기를 감싸는 생경한 촉감에 요한의 허리가 펄쩍 튀었다. 양손으로 요한의 골반을 내리누른 문화가 요한의 성기를 단숨에 뿌리까지 깊게 삼켰다.
성기가 만져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인의 입에 머금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요한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물기 가득한 음란한 소리가 귀를 때리자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온몸의 피가 성기로 몰려갔기 때문인지 산소부족이라도 온 양 머리가 멍해져 요한은 눈을 감았다.
“하아, 하아…….”
혀끝으로 성기 기둥을 훑어 내리는 아찔함과 목구멍 안쪽으로 귀두가 강하게 흡착되는 짜릿함에 요한이 허벅지를 벌벌 떨었다.
틀렸다.
이래서는, 이런 건 정말이지.
“그만, 그만해. 나, 정말, 아. 안 돼.”
“이대로 가. 괜찮아. 다 마셔 줄게.”
“싫어, 안 돼. 그만, 제발.”
드르륵―
탁자가 뒤집힐 것 같은 굉음에 요한이 벌떡 일어났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낯익은 소파, 낯익은 천장. 서요한 검사실이었다.
“씨발. 미쳤나. 별 개 같은 꿈을 다 꾸네.”
요한은 잠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슬쩍 바지춤을 내려다보았다.
확연하게 부풀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휴대 전화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기가 허해졌나.”
아무도 안 듣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메시지를 확인한 요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문화: 좀 쉬셧나요? 오늘도 당직하세요?]
요한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코 이문화가 싫은 것은 아니다. 한 번도 그가 싫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싫지 않음의 반대말이 좋아함은 아니지 않은가. 어른의 좋아함이란 아마도 조금 전 요한의 개꿈에 나온 종류의 것일 테니까.
[당직중]
[이문화: 오늘 야근하시나요?]
문화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문자에 쓰여 있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매일 입고 다니는 회색 후드 점퍼처럼 담담했다.
[내가무당이냐오늘밤일을어떻게알아]
[이문화: 시간 괞찬으시면 저녁밥 같이 드실래요?]
[봐서]
[이문화: 드시고싶은 거 있으세요?]
[아무거나]
[이문화: 아무거나라는 음식도 있나요? 머 드실지 알려 주세요. 검사님이 진짜로 원하시는 거.]
문화의 질문은 늘 직설적이었다. 머리가 단순해서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처음 문화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는 툭툭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말버릇에 매번 당황했다.
하기야 할 말 있으면 검찰청으로 찾아오라는 요한의 으름장에서 당장 눈앞에서 꺼지라는 진의를 파악하기는커녕 검사실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었던 녀석이니 솔직하다 못해 눈치가 없는 것이겠지.
요한도 에둘러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의 말버릇에 금세 익숙해졌고, 곧 문화 앞에서 편안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자기 속은 감추고 남의 속을 까발리는 직업 특성상, 문화는 요한이 제 진심을 거의 그대로 이야기하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는 듯하지만, 요한의 친근한 태도는 친밀함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반사적 방어에 가까웠다.
그러니 요한이 자기 좋을 대로 요한의 안전거리를 무시하고 성큼 다가온 문화를 걷어차는 대신 곁을 내준 건 문화의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에는 설명하기 힘들다.
요한이 문화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서요한 검사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가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내가 원하는 거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었기는 한가.
요한은 갑자기 쓸쓸한 기분이 들어 문화의 메시지에 답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날 저녁.
요한은 검찰청 앞으로 찾아온 문화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맹렬하던 추위가 누그러진 틈에 나란히 산책도 했다. 그저 공원을 같이 걸은 것뿐이었지만.
이문화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린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그와 약간 거리를 두려던 참이었다.
문화도 무언가 눈치챈 것이 있는지 요한 앞에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굴고 있다고 느껴졌다. 요한은 발끝만 쳐다보며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고양이.”
“뭐?”
“검사님 고양이 닮았어요.”
요한이 황당함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문화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미쳤나.”
“죄송합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네.”
뭔가 위엄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요한의 말수는 도리어 줄었다. 문화의 어깨와 팔이 자꾸만 요한의 몸에 닿았다. 그때마다 요한의 맥박이 빨라졌다.
“장갑, 안 끼셨네요.”
“깜빡하고 두고 나왔어.”
안 그래도 장갑을 낄까 한참 고민했다. 장갑은 마음에 쏙 들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건 영 불편하므로 장갑은 편리하기까지 하다.
어제 받은 장갑을 오늘 끼지 않는다면 문화는 요한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이문화의 수준으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 무리해서 샀을 것이 분명한 선물을 무시하는 정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장갑을 끼자니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요한이 마음에 든 건 장갑이지 장갑을 준 이문화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여러 차례 자기 자신에게 일렀다시피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제 선물을 신난다고 쓰는 요한을 보고서 문화가 요한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하냐 이 말이다.
하여간, 전부 음란한 개꿈 탓이다.
문화의 눈에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장갑 없으니까 손 시리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한의 오른쪽 주머니 속으로 문화의 왼손이 불쑥 들어왔다.
몸을 휘청거릴 만큼 놀란 요한이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자기 손을 감싸 쥔 문화의 손을 털어 냈다.
“뭐야. 너 미쳤어?”
“손 시리시다면서요.”
“그래서 주머니에 손 넣고 있었잖아. 어우, 깜짝이야.”
“뭘 놀라고 그러세요.”
히죽 웃으며 태연하게 자기를 내려다보는 문화를 보면서 요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얼굴에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잔잔한 욕망이 짙고 깊게 깔려 있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한낮의 개꿈, 그 속에서 본 얼굴이다.
어른거리는 시야를 털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요한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눈 불편하세요?”
“아, 아니.”
허리를 굽혀 요한과 눈높이를 맞춘 문화의 습하고 따스한 숨이 요한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요한은 당황을 삼키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등을 반듯하게 세우고 턱을 치켜들어 문화의 어깨 너머 공기 덩어리를 응시했다.
이문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뭐야?
“너무 춥네요. 이만 들어갈까요?”
“응.”
요한은 상상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앞가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 남보다 이르게 독립한 탓에 요한은 빨리 나이가 들었다.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늘 결과부터 생각했다. 그래서 주위에 담을 세웠다. 담 안쪽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어쩌면 이 불안하게 술렁거리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닐까.
담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계속 담장을 두드려 대는 이문화 때문에 기어코 담이 무너질까 봐. 요한은 아직 문을 열어 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관사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혼자 갈란다. 들를 데 있어.”
“그러면 거기까지라도.”
“아니라니까. 공무 때문에 가는 거야. 너, 따라오면 죽는다?”
곧바로 몸을 돌린 요한은 공원 외곽의 어두운 길로 걸어갔다. 뒤통수에 꽂히는 문화의 시선이 따가웠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의 문화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검사님 혼자 가시게 합니까.” 하면서 억지로 따라왔을까. 이제까지 문화와 어울리며 오늘같이 어중간한 안녕은 없었다.
요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지갑이라도 잃어버린 듯 찜찜한 기분을 안고 관사로 갔다. 관사로 돌아오니 다시 혼자가 됐다. 그는 코트만 벗고 방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얕은 잠이 들자마자 또 이문화가 나왔다.
찰랑거리는 잠에 발목까지 잠긴 요한은 꿈속에서 이문화와 섹스를 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거기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 요한은 방금 자기가 문화와 했던 질퍽한 무언가가 섹스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잠에서 깨니 방 안이 캄캄했다. 누리끼리한 가로등 불빛이 창문 너머 비쳐들어 천장이 어슴프레 보였다.
“후…… 하, 아…….”
‘검사님, 정말 좋아합니다.’
“으…….”
‘제 마음 아시죠.’
“후아…….”
요한의 발치에 꿇어앉은 문화가 굳게 오므린 요한의 무릎을 억지로 벌리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손이 예민한 점막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아찔함에 요한이 허벅지를 움츠리자 문화가 작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성기를 감싸는 따뜻한 습기에 요한이 헉 숨을 멈췄다.
목젖에 닿을 만큼 깊게 요한의 성기를 빨아들인 문화가 추릅 소리를 내며 입술을 놀렸다. 뜨거운 혀가 성기 기둥을 진하게 핥아 내리더니 선액과 침으로 미끈미끈해진 귀두를 살살 간질였다.
움찔움찔 들썩이는 요한의 허리를 꽉 잡은 문화가 요한의 성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들어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눈에서 정염이 일렁인다. 달뜬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요한이 이를 꽉 악물고 몸을 덜덜 떨었다.
터질 것같이 부푼 성기를 입에 머금은 채 문화가 속삭였다.
‘좋아해요.’
문화의 머리가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 주위의 압력이 거세지며 마치 흡착판이라도 달린 듯 문화가 요한의 성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앙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뇌가 팽창하다 못해 고막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요한이 사정했다.
사정 직후의 진한 허무감과 급격하게 식은 체온으로 몸서리를 치며 요한이 제가 토해 낸 정액으로 끈적해진 손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묻었던 왼쪽 소매가 축축했다. 땀이 아니라 희열에 취해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침이란 걸 깨닫자 피가 차갑게 식다 못해 걸쭉하게 엉겨 붙는 것 같았다.
“미쳐 버리겠네.”
현실감 넘쳤던 혀와 입술과 입안 점막의 촉감이 재생되자 귀가 달아올랐다.
머리가 이상해진 걸지도 모른다. 그저 회음부 앞에 달린 돌기 모양의 남성 비뇨 생식기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몰두하는 저 자신이 조금 황당했다.
그러나 그 일련의 행위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쾌감을 가져다준다는 건 사실이었다.
기껏 자위 따위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요한에게 있어 자위란 갑자기 몰려온 사정감을 물리적 자극을 통해 배설하는 단순한 작업에 불과했을 뿐, 딱히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는 상상을 하며 성욕을 고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생생한 체험은 처음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혼자 성기를 만질 때는 엄청난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론 무슨 짓이든 무슨 말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데서나 그런 망상이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요한이 바닥에 고개를 박고 울부짖었다.
“돌았나 봐. 진짜 제대로 돌았어.”
몇 시쯤 되었을까.
문화와 요한은 친구도, 동료도,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의 두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좋은 건가. 왜 새삼스럽게 성가신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아이고.”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자 아무 소용 없다. 요한은 한심한 기합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몸을 씻는 것이 제일이다. 뜨거운 물 아래 서 있으면 마음에 쌓인 잡념이 차츰 안개처럼 흩어진다. 응어리진 마음이 녹아서 하수구로 쓸려 내려가면 머리도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만약 문화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만약 고백이라도 해 온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씻고 나온 요한은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순간 다시는 웃는 얼굴로 이문화를 마주할 수 없게 될 것이 뻔했다.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손등을 입술에 꾹 누르며 문화의 넓게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몸통을 떠올려 보았다.
키스가 무리라면 그냥 껴안고 있는 정도라면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 이상은, 요즘 가끔 꾸는 미치광이 꿈에서 하는 짓들은 상상도 하기 싫었고.
아니, 씨발. 나는 왜 이런 쓸데없는 걸 고민하고 앉아 있지.
스스로가 한심해진 요한의 컨디션이 다시 저조해졌다. 식탁에 엎드려 차가운 유리에 달아오른 뺨을 비비다가, 요한은 종일 기분이 께름칙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그 말을 못 했네.”
요한은 피식 웃으며 듣는 사람도 없는 인사를 읊조렸다.
“깡패 새끼야. 메리 크리스마스다.”
* * *
“이문화 너 이 섀끼! 니 모 하는 섀끼야! 지미, 으데서 겁대가리 없이 굴고 있어. 니 몬 지꺼리 하고 댕기는 기야!”
묵직한 물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문화를 향해 날아왔다. 피하려면 못 피할 것도 없었지만, 문화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백태호의 화풀이를 맞았다.
문화의 왼쪽 눈썹 바로 위에 처박힌 크리스털 재떨이가 새하얀 이마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얇은 피부가 찢어졌는지 근사하게 솟은 눈썹뼈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 관자놀이를 거쳐 뺨, 턱을 붉게 물들이고는 이내 양복 어깨를 거무죽죽하게 적셨다.
“야, 이 씨벌 놈아. 배은망덕한 섀끼야. 니 진짜 죽고 싶나!”
백태호는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아나운서 출신 선생까지 붙여 힘들게 고쳤다는 사투리로 연신 걸쭉한 욕을 쏟아 냈다.
문화는 백 회장이 길길이 날뛰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서 잘못했다거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늙은 호랑이의 분노를 묵묵히 감내하기로 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백태호는 제풀에 지쳤는지 소파에 털썩 앉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주먹을 꼭 쥔 채 차렷 자세로 장승처럼 선 문화가 불쌍했는지도.
“앉아.”
“네.”
문화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다시금 성질이 뻗치는지 백태호가 커피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니 지금 낸테 왜 맞았는지 아나?”
“가르쳐 주십시오.”
“니기미, 씨벌 놈아. 내 개망신 준 검사 섀끼, 니가 한참 전부터 작업 치고 있었다매. 그기 뭐 비밀이라고 낸테 숨겨? 이 섀끼, 니 딴 맘 묵은 거 아니고?”
아. 역시.
백호엔지니어링 사장실을 때려 부수러 갈 때부터 백태호의 귀에 요한의 이야기가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백태호는 은혜는 쉽게 잊지만,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니까.
수억을 들여 온갖 곳에 로비하고 전관 출신 변호사를 몇 명이나 써서 겨우 혐의를 벗은 백태호를 기어코 증인으로 소환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서요한 검사를 저 옹졸한 늙은이가 쉬이 용서했을 리가 없는데.
“회장님. 미리 말씀 못 드린 것은 입이 백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변명이지만, 좀 더 확실해진 다음에 제대로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언제부터 작업 쳤는데.”
“법원에서 퇴장당한 날, 바로 검사한테 애들 붙였습니다.”
“허. 이놈 좀 보게.”
자신의 수모를 그냥 넘기지 않고 바로 검사 길들이기에 들어갔다는 소리에 기분이 풀렸는지 백태호의 얼굴이 녹녹하게 누그러졌다.
“쉽지 않은 놈입니다. 돈도 안 통하고 여자도 안 통합니다. 앞뒤 없이 들이받는 것 보셨으니 회장님도 짐작하셨겠지만, 보통 또라이가 아닙니다.”
“그냥 잡아다 묻어 버리면 안 되나.”
“저도 그 생각 안 해 본 건 아닙니다만…… 검찰 놈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네 사람 건드리면 아주 발광을 합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박관형이가 완전히 나가리 난 것도 검사 건드려서 그렇지 않습니까. 찍어 내도 자기들이 직접 찍지, 바깥에서 건드리는 건 못 참는 게 검사들입니다.”
“그래서.”
“길 좀 들여 보려고 합니다.”
“길을 들여?”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입양아더라고요. 부모는 이민 가고 형제들하고는 연락 안 한 지 10년도 넘었습니다. 돈, 여자, 술, 가족까지 뭐 하나 약점 잡을 게 없습니다.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이창훈이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그럼?”
“이창훈 사장이 회장님께 뭐라고 보고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검사 새끼 칠라고 준비 다 해 놨는데, 이 사장이 깽판 놨다던데.”
문화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이창훈 사장한테 좀 세게 항의한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가 한창 사업 기반 만드는 동네에 미리 상의도 없이 무작정 밀고 들어온 바람에 그런 겁니다. 개산항 사업은 비밀 유지가 필수인데 다짜고짜 큰일 벌여서 검사 눈에 뜨이기나 하고 말이죠. 회장님. 그 또라이 검사, 절대 만만한 놈 아닙니다.”
이창훈, 이 씹새끼. 모가지를 따 버릴라.
얼굴로 감정이 올라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더니 목빗근을 따라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문화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내부 평판도 좋고 인맥도 나쁘지 않습니다. 검사들도 보통 미친놈들이 아닌 게, 그런 또라이를 검사답다고 좋아하는 윗대가리들이 제법 많은 모양입니다. 회장님께 그따위로 굴고 쫓겨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요직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그냥 찢어 버리기는 아까운 패입니다.”
문화는 요한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를 몇 가지 흘렸다. 알아봐야 뭘 할 수도 없지만 대충 들으면 마치 중요한 정보 같은 이야기들.
백태호에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길을 들인다…….”
구두에 들어간 모래가 발바닥에 박힌 것 같은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백 회장이 다시 시비를 걸어오기 전에 무거운 고요를 흩트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짜증이 나서 문화가 턱을 약간 떨었다. 혀끝으로 입술을 축여 보려 했지만 비릿한 피 맛만 날 뿐이었다.
침묵을 깬 쪽은 백태호였다.
“내 지난번에 이 사장한테 했던 말 기억하나?”
“약점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명심해라.”
“예.”
갑자기 약점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는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말투는 또 무엇이고.
문화는 눈알만 위로 굴려 백태호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는 백 회장의 얼굴에서 자기 기분에 취해 있던 사람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냉정함을 되찾을 때 짓는 잔인한 표정을 보았다.
약점을 잡았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인가. 설마 서요한이 이문화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문화는 인간을 신뢰하지도, 그렇다고 불신하지도 않았다. 세상에는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도 없고 온통 욕망으로만 들끓는 사람도 없으니까.
이성은 옳고 욕망은 그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성은 고상하지만 나약하다.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지만 흉포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자기 자신조차도. 이문화도 결국에는 한갓 인간일 뿐이니까. 그저 이용할 뿐이다. 그게 누구든.
그날의 이문화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이창훈이한테 너무 각 세우지 말고, 검사 단속 제대로 하고. 검사 놈이 요새 천방지축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던데. 이 사장이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내 잠깐은 두고 보겠어.”
“예. 잘하겠습니다.”
“얼른 병원 가 봐. 잘생긴 얼굴에 흉 지면 쓰나.”
문화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등 뒤로 백태호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 백 회장에게 불려 왔을 때 같은 감정 동요는 사라졌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기 좋을 대로 패악을 부리고 약점 운운하며 협박 비슷한 것을 하려던 백태호를 보며 무언가를 깨달았을 뿐이었다. 대단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저,
“씨발 놈의 노인네. 너무 오래 살려 놨어.”
회장실 밖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화를 기다리던 마상식은 문이 닫히자마자 위험천만한 소리를 짓씹는 문화에게 신경질을 부리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 버렸다.
얼굴 절반이 피투성이인 데다가 찢어진 눈썹뼈가 부어오르기 시작해 한쪽 눈이 반쯤 감기다시피 한 형편없는 몰골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것처럼 이문화도 가끔은 맞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면서.
“응급실부터 가시죠.”
“아니. 응급실 말고 거기 가자.”
“거기요? 거기가 어딘데요?”
“거기 있잖아. 도박쟁이.”
“아, 남 선생이요. 사랑의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병원 이름 한번 좆같네.”
포켓치프를 뽑아 뺨이며 턱에 달라붙은 핏자국을 문지르는 문화를 흘깃 올려다보고 그의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깐족거렸다.
“그 좆같은 이름 사장님이 지어 주신 건데요.”
“내가? 언제?”
“병원 이름 사랑이라고 짓고 로고는 꽃분홍 하트, 병원 내장재 전부 분홍색으로 하고 남 선생도 분홍색 가운 입고 진료 보면 임대료 안 받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고 진짜 그렇게 했대? 남전원 그거 미친 새끼네.”
“애초에 제정신인 인간이면 한국대 병원에서 쫓겨날 정도로 도박을 하지 않죠. 사장님한테 돈 빌리는 건 더더욱 안 하고.”
“마 부장, 요새 사는 게 좀 지루한가 봐?”
“아니요? 엄청나게 바쁜데요. 왜요?”
“뒤지고 싶은 거 같아서.”
마상식은 입을 다물었고, 문화는 반가운 적요 속에서 백태호의 같잖은 협박을 곱씹었다.
문화의 인생은 그가 바란 적도 선택한 적도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고, 부모 얼굴도 모른 채 버려지고, 덩치가 좋으니 운동부에 들어오라는 말에 야구를 시작하고, 갑자기 후원자가 손을 떼서 학교를 그만두고, 어쩌다 보니 조폭이 되어 이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다가 난생처음 스스로 선택한 것이 서요한이었다. 돈벌이도, 세력 다툼도, 보복이나 로비 대상도 아닌데 호기심을 가졌다.
처음으로 이문화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은 대상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의 밤, 요한이 문화에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해 설교했던 적이 있다. 서요한 검사에 따르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갈망이었다.
무엇도 갈망하지 않던 문화는 살아 있었으나 진정으로 살지 못하였다. 갈망하는 존재가 된 지금, 그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오래간만에 느낀 갈망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격렬함으로 문화를 압도했기에 그는 자기 스스로가 조금 두려울 정도였다. 문화에게 있어 갈망이란 소유와 독점인 동시에 파괴이므로.
“건드리기만 해 봐.”
혼잣말에 가까운 문화의 중얼거림은 1년 동안 쌓인 감정에 부딪혀 아득하게 울렸다.
인생의 몇몇 결정적인 순간은 현기증과 비슷한 데가 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요한 검사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작년 이맘때였던가. 문화는 머릿속 달력을 뒤적이다가 문득 내년 이맘때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별일 없으면 지금처럼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조폭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백태호에게 뒤통수를 맞고 장기를 다 털린 채 드럼통에 담겨 깊은 바다에 잠겨 있지 않을까.
문화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내일 연암으로 내려가 예쁘고 똑똑하지만 바보인 검사 나리나 구경하자고, 어쨌든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일명 남 선생, 남전원 원장의 사랑의원은 번화가 중심에서 살짝 빗겨 난 골목 초입의 5층짜리 건물에 있었는데, 비록 유흥가 한복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병원이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1층과 2층은 병원이지만, 3층은 마사지숍이고 4층은 사채회사였으며 5층은 창문마다 검은 필름이 붙은 데다가 간판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수상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남전원이라고 딱히 좋아서 그곳에 병원을 차린 건 아니다. 그에게는 애초에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건물은 이문화 개인 소유의 부동산이었다.
문화가 한국대 의대 출신에 자기 병원까지 가진 남전원을 도박쟁이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도박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병원과 같은 건물 4층의 사채회사 햇살 금융에 십억 넘는 빚을 진. 당연히 햇살 금융 역시 이문화가 바지사장을 내세워 은밀히 운영하는 개인 소유 회사였다.
“아…… 사장님 얼굴이…….”
“별거 아니야. 옛날에는 이딴 거 침만 발라도 다 나았는데.”
문화의 시답잖은 소리에 남전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움찔 놀라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세히 볼게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대충 해, 대충.”
“꿰매야 할 것 같아요. 한 서너 땀?”
“안 돼.”
지난번에 문화에게 대들었다가 왼손 약지와 소지를 꺾여 지금까지 손가락에 부목을 댄 남전원은 소심하게 우물거리면서도 상처 주변을 꼼꼼하게 닦고 소독했다.
“피부가 좀 깊이 찢겼어요. 꿰매야 빨리 아물어요.”
“그러면 더 안 되지.”
“상처 덧나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차라리 좋아.”
“네?”
“대충하라니까.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
남전원이 그나마 문화보다는 상식적인 마상식을 향해 몸을 돌렸고, 남전원과 눈이 마주친 마상식은 순식간에 다섯 살은 더 먹은 얼굴로 “사장님 해 달라시는 대로 해 드려.” 하고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최소한 드레싱은 해야 한다는 의사와 빨간약이나 바르라는 환자의 팽팽한 대립 끝에 진물을 흡수하는 의료용 테이프를 작게 붙이고 그 위에 누런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퉁퉁 부은 눈꺼풀을 힘주어 들어 올리고 거울을 요리조리 보던 문화가 마상식에게 물었다.
“나 좀 불쌍해 보이냐?”
“아니요. 험악해 보이는데요.”
“왜? 얻어터지고 돈 없어서 병원도 제대로 못 간 조폭 똘마니 같지 않아?”
“그럴 리가요. 20:1로 싸우고 온 사람 같습니다. 당연히 사장님이 1이고, 20명은 전부 다 뒤졌고요.”
“하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지.”
“불쌍해 보이는 게 좋으세요?”
“아니.”
“그런데 왜 자꾸 불쌍 타령을 하세요. 안 어울리게.”
“불쌍한 거 좋아하는 양반이 있거든.”
문화의 영문 모를 소리에 질린 마상식은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전화를 받는 척하며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남 선생.”
“예, 예.”
“그, 뭐냐. 안정제, 수면제, 진통제 아주 센 거…… 그런 약들 좀 알아?”
“대충은요.”
“제일 잘 듣는 약들 이름 쭉 적어서 마상식 줘.”
“그런 약은 향정신성의약품이라서 구매 수량이랑 처방받은 사람 이런 거 정보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는데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약 이름이나 적어 달라고.”
“제, 제가 아무리 막장까지 갔어도…… 저 아직 의사예요. 범죄에 쓰일 수 있는, 어, 그러니까 납치나 성범죄, 이런 거 못 해요. 죽어도 안 해요. 그냥 제 간이랑 신장 가져가세요.”
“야. 남전원. 너는 네 몸뚱이에 10억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남 선생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너 눈 라섹 수술했다며? 그럼 각막은 나가리고. 간, 폐, 심장, 콩팥, 췌장, 소장, 골수, 피부, 뼈…… 고기까지 저며서 팔아도 1억 안 나와. 너희 영감이랑 할멈, 네 누나, 누나 남편, 조카들 다 데려와도 10억 못 맞춰. 이게 어디서 객기를 부려. 뒤질라고.”
제 가족 이야기까지 나오니 벌벌 떨기만 하던 남전원도 참을 수 없었는지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언제 병원 내달라고 했어요! 사장님이 멋대로 병원 여시고 저한테 개업비 5억 덮어씌우셨잖아요. 그리고 애초에 햇살 금융에 빌린 돈 원금은 1억도 안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쩌라고.”
“사장님!”
“남전원 선생님. 입 벌리고 혀 좀 내밀어 보시겠어요?”
문화가 남전원에게 가까이 다가가 양쪽 검지로 그의 입을 옆으로 쭉 벌렸다.
“애, 애 흐어헤혀(왜 그러세요)…….”
“혀가 너무 길어서 반 토막만 있어도 될 거 같은데.”
“항 해혀(안 돼요)! 하이 하헤혀(하지 마세요)!”
“내가 이미 빚이 5억 넘는 너한테 왜 병원을 차려 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구세군이냐? 씹새끼야, 눈치 안 챙길래? 곱게 자란 존만이라 그 지랄을 겪고도 인생 실전인 걸 아직도 모르네. 야. 남전원. 너는 그나마 의사 면허라도 있어서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 줄 알아. 너랑 같이 토토하던 새끼들은 전부 신장, 간, 눈알 털리고 배 탔어. 지금쯤이면 다 오징어 밥 되었겠네.”
문화의 큰 손이 몇 번 앞뒤로 움직이자 문화의 어깨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고 마른 몸이 수수깡처럼 흔들렸다.
“정신 차려라?”
“네…….”
“그리고 마약 해독하는 약도 필요해.”
“그런 약 없어요…….”
“없어? 진짜? 다른 데 가서 물어봤는데 있다고 하면 너 뒤진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퍼진 게 메스암페타민인데요…… 필로폰이요. 그건 그냥 금단 다 견디고 자연 해독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고요. LSD나 엑스터시 같은 합성 마약은 잘 몰라요. 그리고 헤로인이나 코카인은…….”
“금단 증상 좀 완화하는 약은 있을 거 아니야. 너 내과 아니었나? 내과가 그런 거 하는 데 아니야?”
“그건 내분비내과고 저는 소화기내과…….”
“열 손가락 전부 부목 대고 싶냐?”
“찾아볼게요.”
“싹 찾아서 적어 놔. 내일 아침에 마상식 보낼 테니까.”
“저기, 시간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밤새우든가. 이 새끼가 자꾸 날로 먹으려고 하네. 야, 사랑의원은 24시간 진료가 세일즈포인트인 거 몰라? 밤이 진짜야. 이제 대가리 깨진 놈들, 약쟁이들, 칼빵 맞은 놈들 밤마다 올 거야. 다 비보험이라서 쏠쏠할걸?”
“돈 번 거 사장님이 전부 다 그대로 가져가실 거잖아요.”
“남 씨발 선생님아. 빚은 갚아야지요.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킨 것만 제대로 하면 최소한 뒤질 일은 없어요. 살아야 뭐라도 할 거 아니야. 인생 존나게 긴데. 그렇지? 너 올해 서른 몇이냐? 야, 마흔도 안 돼서 서울에 자기 병원 가진 의사가 몇이나 될 것 같아? 잘해. 병원 망해서 목매달고 뒤지는 의사가 한 해에 몇십 명이나 된다더라. 나는 사랑의원이 오래오래 영업했으면 좋겠거든.”
* * *
[이문화: 검사님 저 정문에 잇습니다.]
한동안 이문화가 아무 수작질도 부리지 않길래 방심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전화가 왔다. 요한은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오래간만이기도 하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닐까 싶어 문화의 전화를 받아 주었다.
처음부터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이 있다고 해서 큰일이 난 줄 알았다. 꼭 들어 주셔야 한다고 사정하길래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싶어 일단 말해 보라고 했더니, 오늘 저녁에 검찰청 앞으로 갈 테니까 밥을 사 달라고 했다.
“검사님.”
정문 앞에 서 있던 낯익은 하얀 트럭의 창문이 열리며 문화가 요한을 불렀다. 요한이 자연스럽게 트럭 앞자리에 올랐다.
“일하고 왔어?”
“네.”
조수석에 앉아 차 문을 닫자마자 문화의 팔이 길게 뻗어 왔다. 안전띠를 매어 주려는 걸까. 요한의 귀에 문화의 손등이 스쳤다.
“너 감기 기운 있어?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
“제 손이요?”
문화가 뻗어 온 손을 그대로 요한의 뺨에 댔다.
“검사님 얼굴이 뜨거운 거 같은데요? 혹시 검사님 감기 걸리셨어요?”
“아니야. 네 손이 뜨거운 거야.”
요한이 제 뺨에 닿은 문화의 손을 떼 자신의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지그시 눌렀다. 요한의 손보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큰 두툼한 손이 요한의 마른 손 사이에서 살짝 움직였다.
요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럽게 문화의 손을 놓고 안전띠를 당겨 찰칵 소리 나게 잠갔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잡아 버린 자신의 무신경함을 원망하면서.
“너 얼굴은 왜 그래?”
“얼굴이요?”
“눈탱이가 밤탱이잖아. 눈썹 위에 찢어진 거야? 뭐야. 왜 밴드만 붙였어? 너 병원 안 갔어?”
“아…….”
문화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반창고 위를 톡톡 두드렸다.
“뭐가 날아 왔는데 못 피해서 맞았어요. 조금 찢어졌는데, 별거 아니에요.”
“다른 데 상처 없는 거 보면 싸운 건 아닌 거 같은데…… 병원은?”
“이런 거로 무슨 병원이에요. 금방 나아요.”
요한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문화의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닿은 자리가 간지러워서 얼굴을 움찔거렸더니 요한은 문화가 다친 자리가 아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조심 좀 하지.” 하면서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다.
“혹시 너…….”
“네?”
“어, 병원비…… 때문에 병원 안 갔어?”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병원 가자. 병원비 내가 낼 거니까 안 간다는 소리 하지 말고. 피부과 야간 하는 데가 있나? 응급실 가야 할까? 검색 좀 해 볼게.”
신호가 걸려 정차한 틈에 문화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요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문화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수심에 가득 찬 미인의 얼굴이 그렇게 절색이라던데, 역시 옛말은 틀린 법이 없다. 문화의 기분이 매우, 아주 좋아졌다.
“검사님. 저 병원 안 가도 돼요. 상처 다 붙었어요. 눈썹뼈 바로 위라 피부가 얇아서 조금 찢어진 거고, 어제 다친 건데 벌써 많이 가라앉았어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요한은 내일까지 붓기 안 빠지면 정형외과랑 안과에 가자, 일단 파상풍 주사부터 맞아야겠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술은 마시지 마라,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요한은 오늘도 참 잘 먹었다. 문화가 본 어느 사람보다 먹는 모습이 단정한데, 문화가 본 어느 사람보다 복스럽게 먹었다.
“어우, 소화 안 된다.”
“오늘 좀 많이 드시기는 하셨어요.”
“아, 답답해.”
창문을 열고 찬 바람을 쐬던 요한이 결국 입을 틀어막았다.
“야, 차 세워 봐.”
“토하시게요?”
“아니. 나 관사까지 걸어가려고. 내려 줘.”
요한은 차가 멈추자마자 뛰듯이 내렸다. 곧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화도 요한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너는 왜 나와?”
“검사님이랑 같이 걸으려고요.”
“차는 어쩌고?”
“나중에 찾으러 오면 돼요.”
“네 차도 아니면서 뻔뻔하네.”
“이 밤에 어떻게 검사님 혼자 가시게 합니까.”
“내가 애냐?”
“검사님 잘 모시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밥 내가 샀거든?”
지난번에 요한과 함께 공원을 걸었던 날은 밤바람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지금은 바람이 상쾌했다. 밤바람이 문화의 달뜬 가슴을 식혀 주었다. 열없이 끓어오른 뺨을,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혀 주었다.
문화는 요한과 보폭을 맞췄다. 타박타박 같은 박자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요한과 나란히 밤을 걸었다.
“있잖아.”
“네.”
“라면 먹고 갈래?”
“네?”
문화는 당황을 미처 감추지 못한 뜨악한 얼굴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소화가 안 되어서 관사까지 걸어가겠다던 사람이 라면을 먹겠다니. 그 라면이 먹는 라면이 아니라 관용적 의미의 유혹인 걸까.
요한이 문화의 눈을 피하며 서투른 변명을 했다.
“아니…… 그게, 걸어왔더니 소화가 다 되어서 그래.”
미묘하게 구겨진 문화의 표정을 흘끔 쳐다보며 요한이 허겁지겁 말을 덧붙였다.
“야. 크리스마스 지난 지가 언제인데 너 왜 아직도 크리스마스 선물 뭐 받고 싶은지 얘기 안 해? 너 이러다가 밸런타인데이 선물 달라고 하겠다?”
“아, 들켰나요?”
“이문화 미친 새끼인가.”
요한의 친숙한 욕설에 문화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면 저 검사님 관사 가서 휴대 전화 충전 좀 하고 가도 되나요?”
“충전? 너 아○폰 아니야? 나 아○폰 충전기 없는데?”
“보조 배터리 충전하면 되죠.”
그제야 문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요한이 잽싸게 계단을 올랐다.
일단 관사에 들이기는 했으나 막상 문화가 제 공간에 들어오자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요한은 작은 주방에 서서 찬장만 뒤적거렸다.
“라면 몇 개 먹을 거야?”
“라면이요?”
“응. 세 개 끓이면 되려나?”
진짜 라면 먹고 가라는 말이었다니. 문화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안 나왔다.
“라면 진짜 드실 거예요?”
“넌 안 먹게?”
“전 괜찮아요.”
냄비에 수돗물을 와르르 붓던 요한이 몸을 돌렸다. 문화는 방석도 없는 맨바닥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편하게 앉아, 편하게. 좀 춥지? 이 집 되게 오래돼서 단열이 좀 안 좋아. 지은 지 35년이나 되었다더라. 집이 나보다 나이 많아. 근데 나 원래 여기 들어오는 거 아니었거든. 저기 그, 신영동에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있잖아. 원래 그쪽에 있는 관사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청장님이 갑자기 가족이랑 같이 오시게 되었거든. 청장님 관사가 단독 부임용이라서 곤란하게 되신 거야. 집 자체는 큰데 방이 두 개라서. 근데 나한테 배정되었던 관사는 방이 세 개라서 일단 청장님이 거기 들어가셨어. 청장님은 8월 부임이시고 나는 1월에 왔는데…… 청장님 관사가 비어 있기는 하는데, 평검사가 지청장 관사 갈 수는 없잖아. 갑자기 빈 관사 찾으려니까 여기밖에 없다더라고. 그래서 그냥 여기 온 거야. 혼자 사니까 낡은 데라도 별로 상관없고. 위치도 검찰청 코앞이라 걸어 다녀도 되어서 편해.”
요한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언부언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마구 던졌다.
이런 관사를 받을 만큼 대우를 못 받는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한참을 혼자 떠들던 요한은 명색이 손님인 문화에게 물 한 잔도 안 내줬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뭐 마실래? 맥주는 있는데. 너 다쳤으니까 술은 마시면 안 되겠지?”
“저 트럭 찾으러 가야 하니까 그냥 물 주세요. 시원한 물이요.”
요한은 제가 마시다 넣어 둔 헛개수 페트병을 꺼내 관사에 딱 두 개뿐인 유리잔에 따랐다.
<법무부 법사랑위원회 연암지역연합회>라는 로고가 크게 박힌 쟁반 위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잔을 얹어 문화 앞에 내려놓았다.
“청성 터널 사건 수사는 잘 되고 있나요?”
“그냥 그래.”
“왜요?”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
“검사님께서 잘될 것 같다고 하셔서…….”
“이창훈이 알아 오라고 시켰어?”
문화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저 이창훈한테 명령받는 사람 아닙니다.”
아차, 무심결에 실수했다고 자책하려는 찰나 요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네가 백호엔지니어링 사장한테 바로 일 받을 레벨은 아니지. 야. 너, 혹시…… 이대한이 또 너 괴롭혔어? 이마에 그거, 이대한이 때린 거야?”
“아닙니다.”
“진짜 아니야?”
“네. 이대한 만난 적도 없습니다.”
문화는 약간 초조해진 기분으로 요한을 채근했다.
“수사 그만두셨어요?”
“음…… 청장님이 쑤시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긴 하셨는데.”
역시. 백태호가 손을 쓰지 않았을 리가.
“내가 포기하나 봐라. 서요한 자존심을 걸고 끝까지 판다. 시체 숨겨서 은폐하려다 망했으니 되게 쫄리겠지? 그러니까 여기저기 돈 풀고 압력 넣고 지랄 염병들을 하는 거 아니야. 실족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청부 살인 시킨 놈도 한 놈도 다 잡을 거야. 살인죄는 공소 시효도 없어. 평생 잠 제대로 못 자게 해야지.”
“안타깝기는 한데요…… 그래도 검사님, 지청장님께서 만류하시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냥 거기까지 하시는 게 어떠실지…….”
“이문화가 백호엔지니어링 부스러기 먹고 사는 깡패 새끼인 걸 잊고 있었네. 새끼야, 너는 진짜…….”
“그게 아니고요. 그렇게 치밀하게 사람 죽이고 치우고 하는 쪽에서 검사님께 원한 품으면 어떡합니까. 혹시라도 검사님께 해가 미치면 어떡합니까. 혹시 그런 일 생기면, 검사님께 해코지한 놈들…….”
“왜 말을 하다 말아. 나 해코지한 놈들 뭐.”
“가만 안 둘 겁니다.”
요한이 문화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앉은 요한에게 사심은 읽히지 않았다.
허물없는 거리.
문화와 요한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었다.
“방금 너 진짜 조폭 같았어. 눈깔이 순간적으로 확 맛이 가네? 이게, 빠져 가지고 검사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도 못 가리네. 가만 안 두기는 뭘 가만 안 둬?”
“누가 위협하면 저한테 꼭 알려 주세요. 저 힘 세요.”
“힘은 나도 세, 자식아. 넌 깡패 짓이나 빨리 그만둬. 그러고 사니까 누가 이마 찢어 놔도 신고도 못 하고 병원도 못 가는 거 아니야.”
“하하.”
“먹고 살려고 조폭 한다는 소리는 하지도 마. 내가 아무리 좆밥 같아 보여도 검사야. 너 하나 먹고 살 기반은 마련해 줄 수 있어. 힘은 들겠지만…… 인생 쉽게만 살 수 있냐? 나도 어릴 때 진짜 힘들게 살았어. 참고 버티면 언젠가 좋은 날 온다. 근데 그 좋은 날, 조폭한테는 절대 안 와. 너 고기 방패로 인생 마감할래? 교도소에서 인생 마감할래? 전과 23범으로 인생 마감할래? 기왕 태어났는데 그렇게 살아야겠냐?”
“하하.”
“계속 가식적으로 웃을래?”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감사해서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건너다보는 요한의 시선을 피하며 문화가 뺨을 긁었다.
어색해하는 문화를 보며 요한이 피식 웃었다. 눈 아래의 도톰한 애교살이 볼록 올라오며 요한의 시원스러운 눈초리가 살짝 휘었다. 기름한 눈매가 접히자 검은 눈동자만 남기고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요한의 커다란 눈이 새카만 흑요석처럼 반짝거렸다.
“예전에 해상 급유 말씀해 주신 적 있잖아요. 저 그거 계속 궁금했어요.”
“아. 순양?”
단숨에 잔을 비운 요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순양이랑 연암이 같은 행정 구역 안에 있는 건 알지? 형주남도. 형남 거점이 어디일 것 같아?”
“신도 아닙니까?”
“신도는 형남 아니야.”
“원당?”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너는 평생 가도 네 힘으로 밥벌이 못하겠다.”
요한이 쯧쯧 혀를 찼다.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이거 진짜 대책 없네. 너 지금 검사한테 깡패 키워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무식한 놈 하나 구제해 주신다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검찰청이 어디 있을 것 같아?”
“서울 아닙니까? 서초동에 있는 거기.”
“그렇지. 서울중앙지검. 그러면 서울중앙지검이 왜 제일 클까?”
“서울 인구가 제일 많아서 아닌가요?”
“서울에 중앙지검 말고 지검이 네 군데 더 있는 거는 알아?”
“지검이요?”
요한이 휴대 전화를 꺼내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지방검찰청을 지검이라고 불러. 내가 지금 있는 데는 성라지방검찰청 연암지청, 그러니까 성라지검 아래에 있는 지청이야. 근데 서울에는 지청이 없고 다섯 군데 전부 다 지검이야. 네 말대로 인구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
“네.”
“서울중앙지검은 서초동에 있고, 동, 남, 북, 서에 지검이 따로 있어. 서울중앙지검이 왜 중앙이냐면.”
요한이 지도를 확대했다.
“서울 중앙에 있거든.”
“큽.”
“웃겨?”
“죄송합니다.”
“너 서울은 가 봤지? 서울 지리 좀 알아?”
“네. 뭐. 조금.”
“뉴스에서 대기업 본사 쫙 모여 있는 동네 본 적 있지?”
“네.”
“거기가 여기, 여기, 여기야.”
요한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종로구, 중구, 강남구를 차례로 짚었다. 문화의 눈동자가 프랑스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어?”
“뭘요?”
“형남 거점이 어디인지 알겠냐고.”
요한이 휴대 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던 문화와 눈이 마주쳤다. 문화가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아이고, 이문화야. 넌 영 글렀구나.”
흥이 깨진 요한이 코웃음을 치며 휴대 전화 화면을 꺼 버리자 문화가 머쓱하게 웃었다.
“지검 있는 곳이 거점입니까?”
“너 내 말 안 들었지?”
“아니요. 그냥 이해가 잘 안 되어서.”
“잔칫상이 크면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크겠지.”
“그렇죠.”
“큰 회사가 많으면 하청 업체도 많고, 거기 자재나 인력 공급하는 회사도 많고 물류 업체나 하다못해 식당도 많겠지? 당연히 뭐 뜯어먹을 거 없나 달려드는 놈들도 많을 거 아니야.”
“네.”
“너 같은 인간쓰레기들이 바글바글하니까 당연히 검사도 많이 필요하고.”
“제가 뭘요…….”
“그러니까 사건, 사고 많은 동네에 검사가 많다고. 사건, 사고도 먹을 게 있어야 생겨. 쥐뿔도 없는 동네는 검사도 할 일이 없어요. 연암지청은 청장님 포함해도 검사가 달랑 셋이다. 네가 아까 순양 얘기했지? 순양이 겉보기로는 완전 시골인데 순양지청은 평검사만 스무 명이 넘어. 시골 지청 중에서 제일 큰 축일걸.”
“오…….”
“검찰청 규모를 보면 그 동네 경제 규모가 바로 보인다는 뜻이야. 검찰청 홈페이지 보면 검사실 배치도까지 다 나와 있어. 야…… 너 진짜 앞날 깜깜하다. 생긴 것만 번드르르하지, 어쩌면 그렇게 아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냐. 동네 지도 보면서 지리라도 익혀라. 너는 운전이라도 잘해야지, 그거 말고는 쓸모도 없겠다.”
문화는 대답 대신에 시원스럽게 웃었다.
“아, 검사님. 저 더 있다가 가고 싶은데 내일 일찍 일을 나가야 해서 슬슬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문화를 따라 일어서던 요한이 속이 빈 쌀 포대가 넘어지듯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삐걱삐걱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요한을 부축하며 문화가 키득키득 웃었다.
“웃지 마! 발 저려서 그래.”
“왜 불편하게 앉아 계셨어요. 편히 계시지.”
“네가 무릎 꿇고 있으니까 나도 깜빡하고 무릎 꿇었잖아.”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겨우 바로 선 요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던 문화가 “검사님.” 하고 요한을 불렀다.
“연휴에 뭐 하세요?”
“유경이 온다니까?”
“아…… 본가는 안 가세요?”
“안 가.”
“그러면 저 여기 설 쇠러 와도 됩니까?”
“세뱃돈 받으러 오려고?”
요한이 하얗게 웃었다.
“주실 거예요?”
“뭐…… 그러던지. 대신에 떡국은 인스턴트다?”
“제가 전이랑 이것저것 사 올게요.”
“됐어. 벼룩의 간을 빼 먹지. 몸만 와. 유경이랑 인사시켜 줄게. 둘이 친하게 지내면 나야 좋지. 아, 유경이한테 깡패 하라고 꼬드기면 너 진짜 죽는다?”
문화가 떠나자 관사를 채웠던 온기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놓인 유리잔 두 개를 보며 요한은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꼈다. 아, 라면. 라면 먹어야겠다. 가스레인지를 켜서 물을 끓였다.
냄비를 데우는 파란 불꽃을 보며 요한은 아주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다.
서요한은 이문화를…….
* * *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정기 교육이 하필 연초에 잡혔다.
요한은 교육 대상자 통지를 받을 때마다 늘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걸로 사람 오라 가라 한다며 성질을 냈지만, 이번에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법무 연수원으로 향했다.
문화에게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좀 떨어뜨리면 마음 정리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며.
검사 수십 명과 함께 지내는 건 요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았다.
최장수 검찰TV 앵커였던 요한은 이프로스 항명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미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던 데다가, 탁월한 미모에 버금가는 실적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두 번이나 받은 유명 인사였다.
중앙지검, 법무부, 중요 정부 기관 파견 등 최고 요직만 골라 다니며 기획 검사 꽃길을 걸을 줄 알았던 서요한이 땅끝 시골 지청으로 날려 갔다. 역대급 엘리트의 역대급 추락이 얼마나 재미난 구경거리였겠는가.
요한은 거의 무해하지만 아주 무례한 시선들에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버티는 것으로 대응했다.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다들 오랜만에 동기나 선후배를 만나 왁자지껄한 시끄럽게 떠드는 대식당에서도 구석 대신 한가운데 상석에 자리를 잡고 맛대가리 없는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은 뒤 숙소로 돌아갔다.
내 초라한 꼴을 보고 싶으셨겠지만, 꿈들 깨시지. 누구 좋아하라고 주눅 든 모습을 보여.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의 저 사람 역을 맡고 있지만,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그는 서요한이었다.
애초에 누구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거적때기를 입혀 동냥을 시켜도 전혀 초라해지지 않는 남자.
요한은 사법 연수원 기숙사가 절로 떠오르는 딱딱한 침대와 옹색한 책상을 둘러보다가 눈을 감았다.
피스 오브 마인드. 어떠한 외부 자극도 나를 흔들 수 없다. 나는 서요한이다.
주문은 꽤 오래갔다.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이문화가 힘세고 강한 서요한 검사를 흔들기 전까지.
“뭐야.”
“검사님 잘 계시나 전화했습니다.”
“내가 잘 계시건 못 계시건 네가 무슨 상관인데?”
“서운하게 왜 그러십니까. 저는 밤낮으로 검사님 생각뿐인데요…… 혹시 오늘 야근하세요?”
“아니.”
“그럼 야식 같이 안 하실래요?”
“여기까지 오게?”
“그럼요. 당연히 제가 검찰청으로 가야죠.”
요한이 피식 웃었다.
“용인까지 오려고?”
“용인이요?”
“얼른 자라. 나 내일모레까지 교육이라서 계속 용인 법무 연수원에 있을 거야.”
“오. 마침 잘되었네요. 저 내일 서울 갈 일 있는데. 그러면 제가 내일 저녁에 용인으로 모시러 갈까요?”
요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묘한 불안감.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머릿속에서 경광등이 미친 듯이 번쩍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 됐어. 못 나가. 교육도 늦게 끝나고 통금시간 있어.”
그는 문화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누웠다가 모로 누웠다가 하며 몸을 뒤척여 보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 * *
[이문화: 검사님 얼굴 좀 보여 주세요.]
[바빠]
[이문화: 퇴근은 하실거 않이에요.]
더 미적거릴 핑계를 떠올리는 데에 실패한 바람에 요한은 보름 만에 문화와 마주 앉았다.
문화는 너무 태연했다. 자신을 너무 밀어내시는 것 아니냐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던 마지막 통화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서요한 검사님.”
어라, 하는 요한의 마음속 속삭임. 검사님이 아니라 서요한 검사님이라고 이름까지 붙여 부르는 이문화는 낯설다.
“제가 검사님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죠?”
“모르는데?”
요한의 목소리가, 눈동자가 떨렸다.
“저 검사님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 또 왜 이래. 내가 뻔한 수작질 하지 말라고 했지.”
“진심입니다. 정말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말일지도 모른다. 세간에서는 이 정도의 말은 누구나 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별 뜻도 없을지 모르는 문화의 말이 요한의 가슴에 박혔다.
“요새 계속 바쁘다고만 하시고. 만나 주시지도 않고. 저 정말 서운합니다.”
“유학 준비하느라 바빠. 토플 공부하느라 정신없어.”
문화가 고개를 들었다.
“유학 가세요? 정말요? 어디로 가십니까?”
“미국. 가고 싶은 학교가 있기는 한데, 내가 가고 싶다고 가나. 붙어야 가지. 토플 점수 좀 더 올려야 해.”
“미국에…… 가신다고요?”
“응. 합격하면 8월 말쯤 출국할 거야. 야, 이문화. 너 전과 없다고 했지? 혹시 여권은 있어? 여권 없으면 빨리 만들고 ESTA라고 무비자 입국…….”
테이블 위에 놓인 요한의 손 위로 문화의 손이 와 덮였다.
“역시 검찰에 두기는 아까워요.”
“뭔 소리야?”
“미안합니다.”
요한은 문화가 대체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몰랐다. 아주 한참 지나고 나서야 문화의 사과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
문화는 그때 이미 끝을 보았던 것이다. 무너지기 직전의 성채.
겉으로는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던 요한의 성이 곧 모래처럼 발치부터 허물어질 것임을 문화는 알고 있었다.
“아무튼. 너 얼른 여권부터 만들어. ESTA 신청하는 건 내가 나중에 가르쳐 줄게. 나 들어간다. 토플 강의 들어야 해서. 우리 설에 보는 거 맞지? 연암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려던 요한은 무엇을 돌아보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요한이 자신과 문화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조용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