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3장.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4/11)

제3장.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검찰청 현관을 나서던 요한은 발바닥이 따끔하니 뭔가 발에 밟히는 느낌을 받았다. 구두를 벗어 확인하려다 바로 앞이 관사인데 싶어 주차장을 가로지르는데, 왼발 뒤꿈치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정문에 기대고 서서 왼쪽 구두를 벗어 털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래보다 약간 큰 돌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돌가루를 삼 초 정도 내려다보다가, 살이 비쳐 보일 만큼 해진 엄지발가락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와 실없이 웃었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 행색까지 될 대로 되어 버린 건가.

요한은 외다리로 선 채 발뒤꿈치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부스러기를 손으로 털었다.

멀리서 또각또각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다가오더니, “검사님.” 하고 불렀다.

“씨발, 왜.”

요한은 몸을 숙인 채 가까이 선 남자의 검은 구두를 보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막일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운동복. 얼룩 하나 없던 새하얀 운동화. 어떻게 그런 차림을 한 이문화를 잔심부름이나 하는 똘마니라고 착각했을까.

“꺼져, 개새끼야.”

문화가 파충류처럼 서늘한 냉기를 띈 눈으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마지막으로 약을 받은 날이 언제였는지, 그때 문화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실감 없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검사님, 나랑 저녁 먹으러 갑시다.”

요한은 천천히 허리를 바로 폈다.

“꺼지랬다.”

“왜 이렇게 까칠해? 일터라고 내외하는 거야? 침대에서는 그렇게 간드러지면서.”

문화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요한은 몸을 굳히고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처럼 단단한 표정을 허물지 않았다.

“너한테는 그게 간드러진 거로 보였냐? 씹새끼. 시체한테는 부끄러움 많고 조신하다고 하겠네. 변태 새끼. 씨발, 더러워.”

“볼 거 다 봤는데 뭘 새삼스럽게 수줍어하고 그래? 아유, 귀여워. 맛있는 거 사 줄게. 밥 먹으러 가자. 응?”

“너랑 밥 먹느니 똥을 퍼먹겠다.”

문화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한쪽 발끝을 세워 까딱거리다가 “검사님.” 하고 요한을 불렀다.

“우수하고 뛰어난 사람도 가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사람인 이상 어딘가에 허점이 있기 마련이니까.”

“무슨 개소리야.”

“우리 서 검사님은 청렴하고 정직한데, 안타깝게도 검찰 조직은 더러운 변태야. 검사님이 아무리 용을 써도 시스템은 꿈쩍도 안 해.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잡아넣을 수 없는 사람, 검사님 생각보다 많아.”

“조폭 새끼 주제에 지금 검사 가르치는 거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죽는 수가 있어.”

“야, 이문화. 너만 없으면 죽을 일 없어. 그러니까 좀 뒤져 줄래?”

이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예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거는 문화를 보고 있자니 요한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덕분에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고아에 눈치도 부족하고 남의 비위를 맞출 줄도 모르는 데다가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된 듯한 문화의 위태로운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오해였는지.

요한과 문화의 차이는 요한은 검사이고 문화는 조폭이라는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문화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자기 자신을 비롯해 그 어떤 대상에도 애착을 품지 않았기에 요한의 차가운 시선이나 멸시가 담긴 욕설에도 그저 덤덤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문화의 초연한 모습을 바라보는 몇 초 사이, 요한은 자기가 무엇에 흥분해 큰 소리를 냈는지도 잊어버리고 묵직하게 가라앉는 기분만을 느꼈다. 발이 땅속으로 꺼져 드는 것 같았다.

“나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자. 얼른.”

그 순간 요한은 폭발했다. 힘을 주어 뻑뻑하게 감은 태엽 장치처럼 부서졌다. 작은 나사들이 사방으로 튀듯 눌러 두었던 감정이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지랄 염병 같은 소리 좀 그만해! 나 이미 충분히 미쳐서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너 진짜 나 죽는 꼴 봐야겠어? 목매달고 죽을까? 식칼로 목 찔러서 죽을까? 아니면 지금 바로 검찰청 옥상 올라가서 뛰어내릴까? 어?”

광인의 독백 같은 문장을 내뱉으며 요한은 깨달았다. 요 몇 주 동안 그가 겪은 끔찍한 일로 인하여 요한의 인생은 논리와 인과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을 지나 버렸으며, 이미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요한은 그런 일을 겪고도 부서지지 않은 자신의 몸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몸 생각해서 맛있는 거 사 준다는데도 성질이야…… 알겠으니까 소리 좀 그만 질러. 목에서 피 나겠다. 갈게. 모레 봅시다.”

“죽어.”

요한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문화는 대답 대신 피식 웃음을 흘리고 몸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문화의 등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물거리는 네온사인처럼 매달려 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꿀꺽 삼키며 요한은 그저 매끈한 침묵을 지켰다.

이문화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요한이 아는 것이라고는 문화가 자기 입으로 알려 준 이름과 백호파의 간부라는 간단한 정보뿐.

혼곤한 와중에도 뇌가 팽팽 돌았다. 혼자 고민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기에 요한은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런 짓이나 하려고 검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검사 법복을 지키려면 이런 짓이라도 해야 한다.

쓴물을 삼키며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고 가짜 수사 협조 공문을 만들어서 뿌렸다. 경찰까지 동원해 이문화의 주소, 출입국 정보, 범죄 경력을 닥치는 대로 모았으며 공안부 후배들에게도 정보를 부탁했다.

이문화는 깨끗했다. 거짓말한 적이 없다고 하더니, 그는 정말로 사소한 경범죄 전과 하나 없는 선량한 민간인이었다.

개새끼. 벼락 맞아 뒈질 새끼.

요한은 책상에 엎드려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문화를 저주했다.

그는 친구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13살 전의 기억이 없는 데다가, 기억을 잃은 뒤로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남보다 2년 이르게 입학한 대학에서도 친구는 사귀지 못했다. 사법 연수원이나 검찰 지인은 그저 동기나 동료일 뿐, 친구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더 알고 싶다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문화였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어수룩하지만 절대 어리석지 않은 그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웠다. 무엇을 먹어도 맛있었고, 어디를 가도 신이 났다. 그와 함께라면 뭘 해도 재미있었다.

좋았다.

빌어 처먹을 놈을 좋아했다.

그 모든 시간이 이문화에게는 전부 거짓이고 연기였다니.

요한의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비실비실 입으로만 웃다가 킥킥 작게 소리 내 웃다가, 이윽고 등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즐거워서는 아니다. 웃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의 아픔이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차라리 아팠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짐승처럼 요한을 겁간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게 굴었다. 마치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공들여서 요한의 몸을 열고 심지가 허물어지도록 부드럽게 안았다.

그럴수록 요한의 수치와 굴욕이 커진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약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판다는 자기 환멸에 요한은 죽어 갔다. 제대로 토출하지 못하는 울화가 쌓여 갔으나 문화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끔찍한 금단 증상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난 끝났어.

요한이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 * *

“야, 이 개새끼야. 너 이런 짓까지 해야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어휴, 우리 검사님.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모르는 척하지 마.”

약속한 날짜도 아닌데 요한이 문화의 서울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그는 창백한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길길이 날뛰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문화에게 작은 전자 기기 몇 개를 집어 던졌다.

“이게 뭐야? 설마 나 주는 선물?”

“형법 319조 주거침입, 성폭력처벌법 14조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통신비밀보호법 3조 통신 및 대화 비밀의 보호!”

“검사님. 나 무식한 깡패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듣는데.”

“내 관사 몰래 들어와서 도청기하고 카메라 달았잖아. 씨발, 더러운 변태 새끼…… 버러지 같은 놈…… 너 왜 사냐? 뒤져. 뒤져 버리라고!”

최근 급격하게 살이 내린 몸에서 재킷이 흘러내리며 뾰족한 어깨뼈가 튀어나왔다.

요한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잡을 생각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연신 악을 쓰며 욕을 해 댔다.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목청 하나만큼은 대단히 우렁찼다.

“이거 어디서 찾았어요?

“네가 달아 놓고 왜 물어?”

“나는 이런 거 안 써.”

“씹새끼야, 너 아니면 이런 짓을 또 누가 하는데.”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문화는 한밤중에 어울리는 나직하고도 깊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대답하며 도청기며 카메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건 또 뭔가 싶었다.

하지만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뿐, 금세 어찌 된 영문인지 가닥이 잡혔다.

하필이면 백호홀딩스 정기 이사회 직전에 이런 물건이 발견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백태호인지 백태호 앞잡이의 짓인지, 그저 유치하고 우스웠다.

멍청한 놈들.

문화는 요한의 앞이라는 걸 되새기며 끓어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참았다.

“검사님, 진짜로 내가 한 거 아니야. 나는 언제든지 우리 서 검사님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데, 뭣 하러 이런 걸 달겠어.”

“지랄하시네.”

“나 거짓말은 안 한다니까. 알잖아. 좀 믿어 봐요.”

“널 한 번만 더 믿었다가는…… 씨발, 왜? 이번에는 장기 다 털어 가게?”

안 그래도 핏기 없이 새하얗던 얼굴은 한층 수척해지고 갓 삶은 달걀처럼 보기 좋게 매끈했던 볼살도 홀쭉하게 빠졌다.

은근한 조명 아래 널브러진 요한은 마치 종이 인형처럼 여려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커다란 눈은 문화를 꿰뚫으려는 듯이 번쩍이고 있었다.

약에 취해 휘청거릴 때조차도 요한을 처음 본 문화의 부하들은 요한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요한의 시선에 익숙해진 문화마저 그가 자신을 쏘는 듯이 바라볼 때마다 가볍게 긴장하곤 했다.

적의와 증오로 활활 불타는 새카만 눈동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문화를 똑바로 겨누었다.

비록 눈두덩이가 움푹 꺼지고 눈 아래는 거무스름하게 물들어 지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요한의 눈에서는 문화를 매료시켰던 새파란 힘이 생생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음. 일단 힘든 발걸음 하셨으니까 이대로 가시라고 하면 서로 서운하잖아? 밥부터 먹을래, 아니면 나부터? 뭐부터 해 줄까?”

“일단 뒤져 줬으면 하는데.”

“나 죽으면 검사님은 누가 챙겨 줘요. 내가 검사님 두고는 못 죽지. 혹시라도 나 죽거든 부장품으로 검사님 같이 태워 달라고 할 건데.”

“미친놈…… 넌 정말 미친놈이야.”

“아, 왜. 그러면 산 채로 순장시켜 줘? 그쪽을 더 원하면 그렇게 해 주고. 나는 검사님 생각해서 일부러 부장품 해 달라고 한 건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시답잖은 소리를 찍찍 내뱉으면서도 문화는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촌스러운 영감탱이. 어째서 하는 짓마다 이렇게나 싸구려 연속극 같은지. 정말이지 백태호를 너무 오래 살려 두었다. 진작 백태호를 없애지 못한 건 확실히 문화의 패착이었다.

잠시 후,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 같아.”라는 요한의 독백이 들려왔다. 한국대 출신으로 검사까지 된 남자가 조폭 나부랭이의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아 헛소리나 읊조리고 있다.

문화는 솔직히 요한이 왜 저렇게까지 억울하고 분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문화는 무엇도 속이지 않았고, 비록 첫 관계는 거칠었지만, 요한이 문화에게 숙이고 들어온 뒤로 문화는 단 한 번도 요한에게 강압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아끼고 있는데.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한의 ‘맛이 간’ 모습은 몹시 가혹하며 위태로워 보였고, 문화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았어. 밥부터 먹자. 그리고 이제 관사는 가지 마. 짐은 애들 시켜서 빼 오라고 할게. 내가 괜찮은 데 데려다 줄게. 출퇴근도 시켜 줄 테니까, 앞으로는 거기서 자자.”

“지랄 마.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고, 자고 싶은 데서 잘 거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자꾸 그러면 검사실에 도청기랑 카메라 단다?”

“미친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 진짜 너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어?”

문화는 요한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진 뒤 그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자신이 관사에 도청기와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요한이 오해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 이유로 관사를 꺼리면 오히려 좋았다.

백태호가 여전히 요한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것이 그 순간 문화의 유일한 불안이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문화를 노려보던 요한이 한껏 들어 올렸던 고개를 모로 꺾었다. 흥분으로 연한 붉은색으로 물든 목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문화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문화는 검지와 엄지로 요한의 예리한 턱선 바로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얇은 피부 아래로 생생한 펄떡거림이 느껴졌다.

“건드리지 마.”

“깨물어 봐도 돼?”

“미친 새끼…….”

요한이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욕설을 쥐어 짜냈다. 구겨진 셔츠 아래로 얄팍한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싫으면 말고. 왜 욕을 하고 그래.”

노기로 가득했던 요한의 얼굴에서 표정이 잦아들었다. 머리를 가로저어 문화의 손을 털어 낸 요한은 소파에 기대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웅얼거려서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욕이 분명한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눈을 감았다.

“배고프지? 뭐 먹을까?”

“…….”

“검사님? 먹고 싶은 거 없어?”

관사를 뒤집어엎느라 밤을 꼬박 새운 데다가 네 시간 넘게 운전해 오느라 요한은 문화의 서울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충분히 지친 상태였을 것이다.

분노를 연료 삼아 한 시간 넘게 발악하며 전신을 불태운 요한은 대꾸할 기력도 없는지 눈을 감은 채 문화의 말을 무시했다.

“졸려? 잘래?”

“…….”

“그러면 내가 알아서 시킨다?”

문화는 요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갔다.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고르려고 했던 것뿐인데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요한이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흐느적흐느적 팔을 휘젓자 몸 위에 올려져 있던 무언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순간 싸늘해진 것을 보니 옷을 벗어 덮고 있었나 보다.

요한은 잠들기 직전의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분명히 소파에 앉아서 이문화 개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자신이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요한이 벼락 맞은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옷은 제대로 입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덮고 있던 것이 문화의 재킷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문화가 잠든 요한을 눕히고 제 옷을 벗어 덮어 준 것이다. 이문화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것도 모자라 이문화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옷을 덮고 잔 자기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오. 딱 좋을 때 일어났네.”

“뭐야, 너.”

“응? 잠 덜 깼어요? 나 이문화잖아.”

문화가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요한 쪽으로 다가오며 큰 소리로 “상 차려라.” 하고 사무실 바깥을 향해 외쳤다.

곧 묵직한 문이 열리더니 덩치 몇 명이 김이 풀풀 나는 접시를 소파 테이블에 차례로 올려놓고 잽싸게 사라졌다.

매콤한 고추기름 냄새가 요한의 코끝을 간질였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잊고 있던 허기가 폭력적으로 밀려왔다. 요한은 애써 음식을 못 본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요리 오자마자 일어났네. 우리 서 검사님이 먹을 복은 있다니까. 이리 와. 식기 전에 먹자. 얼른.”

“너나 처먹어.”

“여기 삼선백짬뽕 진짜 맛있어.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지? 면은 소화 안 될 것 같아서 짬뽕밥으로 시켰어. 검사님 좋아하는 유린기하고 가지튀김도 있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문화가 앞접시에 양상추와 튀긴 닭고기, 가지를 조금씩 덜어 요한의 앞에 놓아주었다. 짬뽕 국물에 밥을 넣으려는 문화를 다급하게 말렸다.

“야! 국그릇에 밥 말지 말고 밥그릇에 국물…….”

“아, 맞다. 검사님 국물 흥건한 거 싫어하셨지. 깜빡했네. 큰일 날 뻔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 그러니까 문화를 어수룩한 조폭 똘마니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말버릇이 튀어나와 요한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문화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밥공기에서 밥을 절반 덜어 내고 국물과 해물 건더기를 부어 요한에게 내밀었다.

“안 먹는다고 했지.”

“배고프잖아. 밥 불어. 얼른 드세요.”

“네 앞에서 밥이 참도 잘 넘어가겠다.”

“그래? 그러면 나 나가 있을게. 다 먹으면 불러.”

문화는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의 커다란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내가 돼지 새끼냐? 나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어.”

“흠. 음식 남으면 아까우니까 내가 좀 먹어 줄까?”

요한은 대답 대신 문화가 건네준 밥공기를 양손으로 들고 국물을 조금 마셨다. 국물 맛이 마음에 드는지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빵빵하게 부푼 요한의 볼을 보고 문화가 소리 없이 웃었다. 다행히 요한은 문화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 눈앞의 요리에 집중했다.

“검사님. 맛있지?”

“아니.”

“맛없는데 왜 먹어?”

“넌 어쩌면 말 한마디도 그렇게 좆같이 하는 재주가 있냐. 입 다물고 밥이나 처먹어. 짜증이 나니까.”

문화는 요한의 욕설이 오히려 반가운 듯 비시시 웃으며 양상추를 집어 먹었다.

“아.”

요한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왜?”

“돌 씹었어. 조개껍데기인가?”

문화는 긴 팔을 쑥 내밀어 요한의 턱 아래에 커다란 손바닥을 펼쳤다.

“뭐야?”

“돌 뱉으시라고.”

잠시 멍멍하게 있던 요한이 티슈 곽에서 티슈를 몇 장 뽑아 조심스럽게 입을 감싸고 내용물을 뱉었다.

“하여간 변태 새끼.”

“어디가 변태인데?”

“더럽게.”

“아니, 어디가? 돌 삼키지 말고 뱉으라고 한 게 왜 변태고 더러워?”

요한은 입가를 몇 번 씰룩거리더니 검지를 입 안에 넣고 어린애처럼 빨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새빨간 입술 사이를 오가는 모습은 끔찍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요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문화는 말을 잃고 그저 요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금니 깨진 거 같은데.”

요한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치과 갈까?”

“오늘 일요일이거든?”

“문 연 데 찾아 줄게. 잠깐 보자.”

“싫어! 야, 씨발 새끼야, 나 건드리지 말랬지!”

문화가 요한의 턱을 잡고 그의 좁은 입 안으로 불쑥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요한이 이를 앙다물며 문화의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문화는 아랑곳없이 검지로 이를 더듬었다.

“어디가 깨졌다는 거야? 나는 모르겠는데.”

“히하 애히야(씨발 새끼야), 해(빼)!”

“흠…… 원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깨진 것 같기도 하고.”

요한의 입에서 손가락을 뺀 문화가 침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그대로 제 입에 넣고 자신의 어금니며 송곳니를 더듬었다.

“나는 영 모르겠다. 치과 가자.”

“꺼져. 너랑 안 가.”

“어금니 깨졌다며. 그럼 치과를 가야지.”

“너랑 안 간다고!”

“알았어. 그러면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연암 치과 예약해 둘게.”

“신경 끄시지. 내 이가 깨지든 틀니를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중요하지. 검사님 이가 정말 깨진 거면 까칠까칠해져서 내 고추 긁히잖아. 큰일이지.”

요한이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요한을 따라 일어선 문화가 그의 얼굴 높이로 몸을 낮추고 어깨를 가볍게 쥐고 물었다.

“키스해도 돼?”

“아니.”

“그럼 섹스할래?”

문화는 자신을 노려보는 요한의 싸늘한 눈빛에 선득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환희에 젖었다.

앙상한 오만에 기대어 어설프고 허전한 삶을 지탱해 나가는 요한의 얼굴을 보며 문화는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저 얼굴이야말로 서요한 검사의 정수가 아닌가.

“네 대가리 속에는 그 짓 하는 생각밖에 없어?”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좆 놀리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며칠 이르기는 한데…… 상관없겠지. 섹스하고 나서 약 줄게. 좀 오래가는 스페셜 믹스로. 어때? 이제 좀 꼴려?”

“미…… 됐다. 하려면 빨리 해. 나 피곤해.”

요한은 바로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움푹 팬 쇄골 아래로 군데군데 멍 자국이 남은 가슴이 드러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톰한 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있던 몸은 요한의 앙상해진 자아만큼이나 앙상하게 말라붙었다.

셔츠 앞자락을 풀어 헤친 채 벨트를 풀던 요한은 문화가 가까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뭐라 말을 하지도 않자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섹스하자며. 몸 꼬라지 보니까 팍 식었어?”

“아니? 나 지금 터질 것 같은데. 만져 볼래?”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문화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하게?”

“장소가 중요해?”

“여기가 싫은 건 아닌데…… 소파에서도 하고, 책상에서도 하고, 창가에서도 하고. 사무실 구석구석에 검사님 정액 발라 놓으면 나중에 검사님 생각하면서 자위하기도 좋겠지.”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나 문제 아니고 문화인데.”

요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몸으로 질색하는 티를 내자 문화가 해사하게 웃으며 문을 손가락질했다.

“여기 방음이 별로야.”

“상관없어.”

“내가 있어. 전부 못난 놈들이지만 그래도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인데 내 손으로 고막 뚫고 싶지는 않거든.”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이 검사님 야한 소리 듣는 거 싫다고.”

요한은 손바닥으로 심장 바로 위를 문지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턱을 바짝 당기고 눈에 힘을 주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으며, 어금니를 앙다물었는지 뺨 근육이 조금씩 씰룩거렸다.

“계속해 봐.”

“젤도 없고 콘돔도 없어.”

“그리고?”

“짬뽕 냄새 풀풀 나는 데서 사랑 나누는 건 너무 무드가 없잖아.”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깔렸다. 요한이 느리게 숨을 넘기는 소리만이 그 공간에 사람이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이문화.”

“응?”

요한의 강렬하고 열띤 응시에 명백한 조롱이 깃들어 있었다. 얼굴 전체로 창백한 쓴웃음이 퍼져 나갔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바로잡을 필요가 있어. 현직 검사의 가르침이니까 잘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네에.”

“네가 나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사랑 나누기도 아니고 섹스도 아니고, 강간이야.”

“왜? 내가 검사님 때렸어? 나랑 섹스 안 하면 죽이겠다고 했어? 묶어 놓고 강제로 했어? 아니잖아. 방금도 검사님이 먼저 빨리하자고 옷 벗었잖아. 그런데 그게 왜 강간이야?”

“강간 정의부터 알려 줄게. 형법 297조. 폭행이나 협박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을 간음하는 죄. 여기에서 폭행이나 협박은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상당히 곤란할 정도여야 해. 약물로 반항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도 당연히 포함되고.”

“그러니까. 내가 검사님을 어떻게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그러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이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항상 날 찾아온 건 검사님이야. 안 그래?”

“너는 나를 납치해서 감금한 다음에 강간하고 마약을 투여했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

“닥쳐. 이유 같은 거 필요 없어. 너는 나를 마약 중독 상태로 만들어서 너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했어.”

“강제 안 했는데? 그래, 처음에는 내가 좀…… 거칠게 한 거 인정해.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니지. 한 번도 강제로 한 적 없었다? 검사님도 섹스 좋아하잖아. 몇 번씩 사정하면서…….”

문화가 자기 콧잔등을 꼬집고 눈자위를 쿡쿡 눌렀다. 커프스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서성대며 정신 사납게 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했다.

“목구멍 찌르면 토 나오고, 식초 마시면 침 나오는 거랑 똑같은 생리현상이야.”

“아니…… 요새 우리 꽤 좋지 않았어?”

“……좋았다고?”

요한은 자신의 감정을 또박또박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역겨워. 너처럼 끔찍한 인간은 처음이야. 네가 다정한 척, 비위 맞추는 척 알랑거릴 때마다 찢어 죽이고 싶어.”

“갑자기 왜 그래?”

“똥 밭에 굴렀을 때 누가 밀어서 똥 밭에 빠진 거라고,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고 뒹굴어 보아야 똥만 더 묻을 뿐이라는 걸 막 깨달았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똥 밭에서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도.”

“그래서 내가 똥이라고?”

“냄새나는 배설물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문화가 숨을 길게 내쉬면서 혀로 볼 안쪽을 찔렀다. 손가락으로 우뚝한 콧대를 문지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서요한 검사님. 좋아, 강간이든 뭐든 검사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뭐. 똥 밭에서 혼자만 쏙 빠져나가시겠다고? 웃기지 마. 똥 범벅을 해서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약 필요 없어. 금단 현상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면 되겠지. 이문화. 설마 너, 내가 네가 준 약 전부 다 맞고 있을 줄 알았어? 멍청한 자식.”

“아니…… 애초부터 내가 검사님한테 줬던 약은…….”

“네 말 안 들어. 목성 좋아한다고 했지? 목성이 주피터라고, 신 중의 신이라고. 네가 내 신이라고 개소리했었지.”

“기억하네?”

“성경에 바알(Baal)이라는 우상을 숭배했던 왕이 나와. 비참하게 죽어서 개 먹이가 되었어.”

“뭐야, 갑자기.”

“바알이 제우스라는 설이 있어. 네가 좋아하는 주피터. 네 말대로 약 달라고 널 찾아온 건 나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그냥 없던 일로 묻어 두겠어. 하지만 앞으로 한 번이라도 내 눈에 다시 뜨이면, 너는 개 먹이가 될 거다.”

요한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반쯤 벗었던 셔츠와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허리를 숙이지 않은 채 소파 구석에 구겨져 있던 재킷을 집고 문화를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단호했다. 그는 말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강의 잘 들었어. 내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 강간 한 번 한 거랑 강간 백 번 한 거랑 차이 있어? 어차피 강간범인데 똑같지?”

“놔!”

사무실을 나가려던 요한을 문화가 몸으로 막았다.

문화가 요한의 오른팔을 꺾어 그의 등 뒤로 돌려 누르고 왼팔을 위로 잡아 누른 뒤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워 넣어 움직임을 봉쇄하자 요한이 욕설을 짓씹으며 저항했다.

문화가 체중을 실어 꾹 누르자 요한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나한테 만날 개새끼라고 그러면서 나를 개 먹이로 주면 어떡해. 동족상잔의 비극 만들 셈이야? 나를 먹이로 줘도 될지 개의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지. 검사님 동물권 인식이 아주 바닥이네. 내가 또 그쪽 전문이잖아. 한 수 가르쳐 줘야겠는데?”

“비, 비켜.”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지 어디 감히 제멋대로 똥 밭에서 나간다느니 마니야?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말도 몰라? 지금 네 상황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는 해? 검사님 나 아니면 예전에 토막이 나서 죽었어. 개 먹이 되는 건 내가 아니라 서요한 당신이었을 거라고.”

“윽…….”

“욕 안 하고 멀쩡하게 말할 줄도 아는 거 오늘 알았네. 근데, 욕해도 돼. 나는 서 검사님이 욕할 때 더 꼴리니까.”

문화가 하체를 요한에게 바짝 붙이고 불룩해진 앞섶을 요한의 바지에 문질렀다.

“금단 증상 거의 없어진 게 나는 멍청하고 검사님은 똑똑해서 그런 줄 알았어? 귀엽네. 봐줄 때 정도껏 해.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내가 한 번이라도 검사님한테 욕하고 손찌검한 적 있었어? 구멍 찢어져서 피나도록 함부로 대한 적 있었어? 나는 검사님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아무튼, 잘 지내고 싶어서 노력했어.”

“그게, 자랑이야? 그건 인간이면, 누구나…… 당연히…….”

땀에 젖은 요한의 목덜미가 하얗게 빛났다. 문화를 둘러싼 얇은 비누막 같은 이성이 빠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깨져 갔다. 요한과 닿은 모든 자리에서 열꽃이 피어오르며 몸이 순식간에 달궈졌다.

“육변기로 굴려지다 산 채로 내장 뜯겨서 인생 마감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문화는 요한의 몸을 꽉 붙잡아 소파에 던져 눕히고 그 몸을 가두려는 것처럼 팔다리를 세워 높이 엎드린 채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요한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문화는 몸을 낮춰 요한을 깔아 눌렀다. 한쪽 팔을 그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손으로 마른 어깨를 붙잡아 요한을 품에 끌어안았다.

“넌 절대로 곱게 못 죽을 거다.”

“알고 있어.”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기대할게.”

요한이 더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문화의 두툼한 혀가 요한의 예민한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사냥감의 가장 연하고 보드라운 자리를 찾는 육식 동물처럼 문화의 앞니가 경동맥 위를 맴돌았다.

요한이 바둥대며 몸부림쳤지만, 문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목을 지분거리던 혀가 다시 목덜미로 내려왔을 때 요한이 잇새로 억누른 비명을 흘렸다.

“읏…….”

“지금부터 검사님이 소리 내는 횟수 기억해 뒀다가 그 숫자만큼 애들 불러서 검사님 보는 앞에서 고막을 송곳으로 후벼 팔 거야. 운 좋은 놈은 나을 거고 운 나쁜 놈은 평생 못 듣게 되겠지. 아, 고귀하신 검사 나리께서는 깡패 몇 놈 귀머거리 되는 건 아무 상관 없으신가? 아무튼, 오늘 귀머거리 되는 놈 있으면 전부 검사님 탓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문화가 요한의 목덜미를 세게 물어뜯었다. 이상한 열기와 집요함이 문화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가 만든 상처를 혀로 날름 핥았다. 뜨거운 혀가 찢어진 자리를 파고드는 아픔에 요한은 욱욱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잇자국 위로 핏방울이 몽글몽글 배어났다.

“서요한. 넌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다정한 척하는 거로 보였으면 그건 그냥 다정했던 거야. 비위 맞추는 척이 아니라 비위 맞추려고 애쓴 거고. 그런데 싫다는 사람한테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졌네. 바라는 대로 강간범답게 굴어 줄게.”

요한의 옷을 찢어 벗겨 버린 문화가 아무 예고 없이 손가락으로 요한의 뒤를 쑤셨다.

꽉 다물린 입구를 억지로 뚫고 예민하고 연약한 안쪽을 거칠게 휘저었다. 조붓한 길이 강제로 늘어나는 이물감에 요한이 이를 악물고 허리를 뒤틀었다. 문화는 묵묵히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흡.”

비명을 닮은 콧김을 내뿜으며 요한이 목을 길게 늘였다.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렸고,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그 때문에 그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문화는 체중을 실어 요한을 꽉 누른 채 바지 지퍼를 내렸다.

오른손으로 요한의 양손을 잡아서 머리 위에서 누르고, 왼손을 무릎 밑에 밀어 넣어 요한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문화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요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요한이 집요하면서도 고통에 찬 시선으로 문화를 올려다보았고, 문화는 핏기가 증발해 버린 듯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잘근잘근 깨물어 피가 배어난 입술 그리고 촉촉이 젖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문화가 요한의 다리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메마른 곳으로 난폭하게 밀고 들어오는 살덩어리의 중량감에 요한이 소스라쳤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인지 입술을 말아 문 요한은 온몸에 남은 힘을 쥐어짜 발바닥으로 소파를 딛고 뻗댔다. 마른 다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벌벌 떨리며 경련하더니 절반도 채 들어가지 못한 문화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윽.”

문화가 얼굴을 찌푸리고는 허리를 뒤로 물렸다. 굵은 성기가 오돌토돌한 내벽을 드르륵 긁으며 단숨에 뽑혀 나가자 내장을 압박하는 이물감이 사라진 안도감에 요한이 순간적으로 몸에 힘을 뺐다. 그 순간 문화가 다시 몸을 찔러 넣었다.

“흣, 으…….”

요한이 도리질 쳤다.

“한 번.”

문화가 툭 내뱉은 소리가 생경하게 울렸다. 그르렁대는 숨과 번들거리는 눈은 가히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저항하듯 수축하며 문화를 밀어내던 좁은 벽을 여기저기 찌르자 요한이 목울음을 삼켰다.

문화는 피로 얼룩진 목덜미에서 가슴까지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흰 몸 여기저기를 잘근잘근 깨물기도 하면서 요한의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아픔에 허우적거리는 요한의 몸을 다시 강하게 끌어안고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벌벌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문화를 버티던 요한의 입에서 결국 “흑…….” 하고 앓는 소리가 샜다.

“두 번.”

안쪽이 파열되어 피가 났는지 성기를 움직이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내벽이 성기를 쥐었다 풀었다 하는 극치감에 문화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요한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성기가 짧게 또는 길게 불규칙한 리듬으로 요한의 가장 민감한 곳을 후벼 파듯이 꿰뚫었다.

* * *

휴일 오후에 갑자기 울리는 휴대 전화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남전원의 경우에는 제로다.

<개문화>

불길하기 짝이 없는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남전원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오한이 들었다.

“소름 끼치게 왜 전화질이야…….”

휴대 전화의 전자음이 울부짖는 소리에 분홍색 벽이 진동했다.

전화를 꺼 버리고 전화 온 줄 몰랐다고 우겨 볼까. 아니지. 이문화에게 그런 변명이 통할 리가.

이번에는 통화 버튼도 못 누르는 쓸모없는 손가락이라며 엄지를 부러뜨릴 것이 분명하다.

남전원은 빠르게 항복하고 전화를 받았다. 핵탄두 발사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이보다 무거우랴.

“네, 사장님.”

― 갑자기 토해. 숨 잘 못 쉬는 거 같고, 몸이 너무 차가워. 정신 못 차리고 팔다리 흐물거린다.

도통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문화의 목소리에 옅은 당황이 묻어 있었다. 모질기 짝이 없는 야차가 이 정도로 평정을 잃을 만한 일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누가요?”

― 하나밖에 더 있냐?

아하. 한숨이 나올 만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뭐 먹였어요?”

― 말하면 알아?

“아니…… 아닙니다. 숨 막히면 큰일 나니까 고개 뒤로 너무 젖히지 말고 빨리 데려오세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깡마른 손이 분주하게 주사기와 수액 파우치, 약병을 챙겼다.

“지긋지긋한 인간. 하여튼 악마야, 악마.”

날개라도 달렸는가. 남전원의 저주가 끝나기도 전에 도착한 성질 급한 불청객이 휴일 호출 벨을 연거푸 눌렀다.

“갑니다, 가요.”

문화가 데려온 환자는 의식이 없었다.

남전원이 예상했던 대로 약물 과다 복용이 분명했다. 보라색으로 보일 정도로 창백한 안색과 부어터진 입술, 셔츠에 번져 있는 노란색이 병원에 실려 오기 전 그의 상태가 어땠는지 명징하게 보여 주었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이문화였다. 남전원이 남몰래 강박증으로 진단 내렸을 정도로 결벽스러운 그가 토사물 범벅이 되는 것도 아랑곳없이 망가진 인형 꼴의 요한을 직접 업고 왔다. 자못 신기한 마음에 남전원은 문화가 하는 양을 잠시 두고 보았다.

문화는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요한이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문화의 고급 드레스 셔츠가 요한이 토한 위액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남전원은 요한의 호흡과 맥을 확인하고 소매를 걷어 팔꿈치 안쪽에 준비해 둔 정맥 주사를 꼽았다.

“주사 꼭 거기에 놔야 해? 다른 데 놓으면 안 돼?”

“무슨 말씀이세요.”

“혈관 약하다며. 바늘 자국에 멍 안 들게 조심해.”

“……사장님.”

“왜.”

“약 안 쓰신다고 했잖아요. 지금쯤이면 해독이 되었을 텐데, 환자 상태가 왜 이래요? 급성 중독인 거 같은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저러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또 이러면 진짜 큰일 나요.”

“안 죽어.”

“방금 죽을 뻔했어요. 사장님 진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 사람한테 원한 있어요?”

“안 죽는다니까?”

“사장님이 무슨 신이라도 되세요?”

“어. 내가 쟤 신이야.”

두 손을 맞잡은 남전원이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갗을 반복해서 꼬집다가 긴장한 목소리로 문화에게 말을 건넸다.

“저 사람 그만 때리세요.”

“때린 적 없어.”

“때린 적 없으시면 몸에 저 멍은 뭔데요.”

“내가 민간인 때리는 거 봤어?”

“저는 손가락도 부러뜨리시고 입도 찢으려고 하셨잖아요.”

“네가 민간인이야? 채무자지, 씁.”

“자꾸 멍드니까 근육이 녹아서 점점 더 쉽게 무너지는 거예요. 사장님은 저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남 원장님. 빨리 뒤지고 싶은 거 아니면 남의 일에 신경 끄는 습관을 기르세요.”

남전원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사장님 진짜…… 쓰레기 같아요.”

“뭐?”

“그러다가 곱게 못 죽어요.”

“아까 쟤도 그러더라. 근데 그 전에 너 뭐라 그랬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 이상 어쭙잖게 끼어들었다가 괜한 화살이나 맞으면 자신만 손해다. 남전원은 입을 다물고 문화에게 작은 유리 앰풀을 몇 개 내밀었다.

“뭔데?”

“날록손이라는 약이에요. 약물 과다복용 때문에 호흡 곤란해졌을 때 숨통 트여 주는 거예요. 몇 개 가지고 계세요. 뚜껑 따서 코 아래 대고, 음…… 코카인 할 때처럼 흡입시키면 돼요. 혹시 정맥 주사 놓을 줄 아세요?”

“알겠냐?”

“그러면 환자 두고 가세요. 주사 한참 더 맞아야 해요.”

“안 돼.”

“그래서 지금 바로 데리고 가시겠다고요?”

“응.”

“의식 없잖아요. 움직이면 위험해요. 기도 막히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그럼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안 죽는다고 했지.”

문화의 말투에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얻어맞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남전원의 용기를 야금야금 갉아 먹었지만, 남전원은 이문화의 채무자이기 전에 의사였다.

마귀 같은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의식도 없는 환자를 무책임하게 퇴원시킬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피곤하니까 헛소리하지 마. 지금 맞는 거 끝나면 데리고 간다.”

문화의 형형한 눈빛에 꿰뚫리는 것 같았다. 남전원은 약을 정리하는 척하며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이런 식으로 조급하게 구는 이문화는 낯설었다.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자비를 구해 보았다.

“잡아먹으려고 기르는 소, 돼지도 아프면 수의사 불러요. 사람이잖아요. 다른 병원 데려갈 수도 없을 거 아니에요? 숨 잘 못 쉬면 호흡기 써야 할 수도 있어요. 혹시 이 사람 도망갈까 봐 그러세요? 제가 도망 못 가게 감시 잘할게요. 사장님 부하들 불러서 지키게 하셔도 돼요.”

“…….”

“주사 다 맞고, 환자 의식 돌아올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가세요. 제발요. 급성 중독이라서 아직 수액 한참 더 맞아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퇴원해서도 절대 약 주시면 안 돼요. 아시죠? 저번처럼 그렇게 용량 줄여 가며 주는 것도 하지 마세요. 지금 몸이 너무 많이 상했어요. 아무리 죽겠다고 해도 모른 척하시고 차라리 어디 가둬 버리세요.”

문화는 대답 대신 토사물로 오염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상의를 벗고 맨몸으로 침대 옆에 앉은 문화를 보며 남전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독한 놈.

잇새로 비어져 나오는 욕을 혀로 밀어 삼킨 남전원이 의식 없는 요한과 인성 없는 문화를 뒤로 하고 입원실을 나갔다.

* * *

요한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는 출근이었다.

드디어 무단결근인가.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요한은 쿡쿡 웃었다. 울 수 없으니 웃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지금 몇 시나 되었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몽롱함이 가시지 않았다. 사지에 힘이 없었고,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현기증과 함께 심한 구역감이 몰려왔다.

“잘 잤어?”

문화는 아침 인사라도 건네는 듯 가볍게 물었다. 그들이 맨 처음 만났던 날, 검찰청 앞에서 요한에게 말을 걸었던 문화도 딱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반듯한 면상을 보니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요한은 문화의 잘생긴 얼굴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쳐서 뭉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후려갈기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시야?”

“알아서 뭐 하게?”

“출근해야 해.”

“하시던가요.”

“여기 어디야?”

“병원.”

분홍색 천장에 분홍색 벽.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보니 손등과 팔뚝에 주삿바늘이 주렁주렁 꽂혀 있었다.

“얼마나 지났어?”

“백 년.”

문화가 씩 웃었다.

요한은 속이 뒤집혀 욕지기가 치밀었다. 감시 카메라를 찾느라고 모조리 뒤집어엎은 관사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이러다가 정말 징계 면직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인간 서요한에게서 검사 서요한을 덜어 내면 뭐가 남아 있을까.

시스템에 편입되어 규율과 질서를 따르는 몰개성의 삶은 요한에게 권태나 속박이 아닌 안정과 평온을 주었다.

요한의 모든 에너지는 검사 서요한으로 살아가기 위해 유보되고 저축되었기에 요한은 제대로 살아 보았던 적이 없었다.

요한은 검사가 아닌 삶을 사는 법을 몰랐다. 완전하게 비어 있었다.

“뭘 그렇게 뜨겁게 봐? 흥분했어?”

“미친 새끼.”

“욕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집에 가자.”

“너나 가. 난 출근할 거야.”

문화가 허리를 깊게 숙여 요한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더니 검지를 내밀어 부어터져 딱지가 앉은 입술을 쓱 훑었다.

“어디도 못 간다고 했지.”

“지랄하지 마. 나 혼자 갈 거야. 관사 들어갈 거고.”

“안 돼. 혼자 다닐 생각 하지 마. 관사 짐 다 빼서 새집에 옮겨 놨어.”

요한은 팔꿈치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다 척추를 관통하는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도로 드러누웠다.

“내가 가고 싶은 곳 갈 거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꺼져.”

“여기 서울이고, 벌써 12시도 넘었어. 연암 내려가면 퇴근 시간이야. 오늘 새집 데려다 줄게. 의사가 며칠 더 쉬어야 한대. 내일도 못 간다고 검찰청에 연락해 두지?”

“안 돼. 내일 또 빠지면 진짜 잘려.”

문화가 아주 큰 소리로 웃었다.

“사람이 대범한 건지 소심한 건지 헷갈린다니까. 검사님. 거울 좀 보고 얘기해. 그 몰골로 출근하는 게 더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

“너 때문이야. 너를 죽여야 내가 살 것 같아.”

“섭섭하게 왜 그래? 나 죽으면 검사님은 누가 챙겨 줘?”

“개새끼.”

“어제 우리가 하도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 바람에 검사님 옷이 다 찢어졌어. 일단 내 옷 입혔는데, 너무 크네. 연암 가기 전에 옷부터 사자.”

“개도 안 먹을 새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이렇게 착한 개새끼가 어디 있어?”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이 뒤집혀 욕지기가 치밀었다. 초조함에 손끝이 바늘에 찔리는 듯 따끔거렸다.

“다음 주에 검사님이 스스로의 쓸모를 좀 증명해 주셔야 할 것 같아.”

“지랄하지 말랬지.”

“아직 살려 둘 가치가 있다고 어필할래, 아니면 약에 쩔어서 좆도 제대로 못 세우는 영감들한테 돌려지다가 드럼통 들어갈래. 검사님이 선택해.”

문화가 요한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그가 웃을 때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때뿐이다. 문화가 자신을 향해 웃을 때마다 요한은 속 깊은 곳에서 뭉글뭉글 솟아오른 분노에 몸을 떨었다.

“하고 싶은 게 뭔데?”

“내가 할 게 아니라 검사님이 할 일이야. 중앙지검 최형서 부장하고 친하다며? 자리 좀 만들어 줘.”

“싫어.”

“그럼 죽을래?”

“죽이든지 말든지.

“서운한 소리 하지 마. 언제 내가 죽인댔어? 상가 공사 현장에서 크레인이 넘어갔지 뭐야. 환경부하고 노동부도 한 발씩 걸쳐 있기는 하는데, 괜히 번거롭게 중간에 손쓸 필요 없잖아. 어차피 마지막에는 검찰로 오는데. 검사님이 중간에서 조율만 잘해 주면 서로 편한데. 안 그래?”

“나한테 지금 사건 묻는 데 협조하라는 거야?”

“응.”

“미친 새끼.”

“검사님 사건도 아니잖아. 그냥 최 부장하고 자리만 만들어 달라고. 그게 어려워? 후배가 선배하고 술자리 가질 수도 있는 거지. 거기에 우연히 서 검사님이랑 매우 친밀한 사이인 누군가가 합석할 수도 있는 거고.”

“싫어.”

“죽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해. 별것도 아닌데. 내가 몸을 팔고 오랬어, 장기를 팔고 오랬어. 쉽잖아.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 얼마나 간단해?”

요한은 문화에게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침이 문화의 손등에 떨어졌다. 문화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코를 울리는 소리를 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뇌를 싹 긁어 내고 돌멩이나 꽉꽉 채워 넣었으면 좋겠다.

죽을힘을 다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또 죽을힘을 다해 검사 임관을 받았다. 그렇게나 꿈꾸던 검사가 되었는데도 머리가 돌멩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요한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단숨에 빈 껍데기가 되었다는 새삼스러운 감회가 요한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검찰이라는 무형의 조직을 통해 실현해 왔다고 생각한 인생은 실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었다. 미래 같은 건 역시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열세 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디로도 탈출하지 못했다.

* * *

요한은 무단결근으로 구두 견책을 받았다.

무단결근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딱 하루 결근에 인사 기록에 남아 두고두고 흠이 될 견책은 과할 정도로 엄한 처분이었다. 서요한 검사실 직원들이 이상하다며 수군거렸지만, 막상 요한 본인은 선선히 납득했다.

“제 잘못 맞는데요, 뭐. 감봉이나 정직 아닌 게 어디예요.”

그간 눈에 뜨이게 불량해진 업무 태도에 딱 좋은 징계 거리를 제공한 건 요한 본인이었으니까.

화장실 가장 구석 칸에 들어가 유두에 반창고를 붙이며 요한은 웃었다. 엉망진창인 몰골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처지도, 재기할 가능성이 매일 조금씩 사라지는 미래도 웃겨서 웃음만 나왔다.

문화가 쥐어뜯고 깨문 유두는 스치기만 해도 아파서 반창고를 붙이지 않고는 셔츠를 입을 수 없었다.

마약 중독자에, 깡패와 붙어먹는 사이에, 슈트 안쪽은 온통 물리고 빨려서 멍투성이인 데다가 유두에 반창고를 붙인 검사라니.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요한은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로 귀결되었다. 몸이 더럽혀졌다는 따위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몇십 번, 몇백 번을 더 강간당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요한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문화가 시키는 대로 은밀한 청탁을 들어 주는 더러운 거래였다.

지금 요한이 하는 행동이 몸을 파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연은 요한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고 어두웠다. 아직도 그 끝에 발이 닿지 않았다.

말간 얼굴의 엘리트가 좌절과 굴욕과 패배감에 소리 없이 흐느꼈다.

“서요한 검사님.”

퇴근하려던 요한의 어깨를 익숙한 무게가 내리눌렀다. 찰나의 순간, 요한의 뇌리에 수천 개의 상념이 스쳤다.

“왜 왔어.”

“섭섭하게 왜 이래? 내가 여기 한두 번 와 봤나.”

“지금은 아니야.”

요한의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인내와 적개심, 그리고 억누른 분노. 약간의 공포도 들어 있었다.

“내가 왜 왔겠어?”

이건 또 뭔가 싶었다. 하지만 말문이 막힌 것도 잠깐이었다. 요한의 깊은 시선이 계속해서 문화를 파고들었다.

서늘한 파충류 같았던 주말의 인상과 달리, 눈앞의 문화는 단정하고 촉촉한 얼굴에 머리도 말끔하게 올려붙여 꼭 남성지 모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놔.”

요한이 잘게 몸을 흔들어 자기를 붙든 손을 털어 내려는데, 문화는 요한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요한이 짜증스럽게 몸을 비틀자 문화의 입가를 비집고 조소가 새어 나왔다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일단 가라고. 내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

“안 돼.”

“가. 제발…… 부탁이니까…….”

“퇴근해야지. 혼자 다니게 안 둔다고 했잖아. 벌써 까먹었어?”

요한은 덫에 걸린 짐승이었다. 덫을 놓은 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덫에 걸린 짐승이었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혼자 울고 신음하는 것에도 지쳐 피를 흘리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는 짐승이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다리를 잘라서라도 덫에서 빠져나왔더라면…….

* * *

“저기 검사님 나오십니다.”

“확실해?”

“네. 저 얼굴을 어떻게 헷갈려요?”

“……검사 맞아?”

“생긴 것만 저렇지, 진짜 말하는 싸가지가…….”

“주둥이.”

“아, 네.”

마치 면접 순서를 통보받은 대기자처럼 넥타이 매듭을 조이고 재킷 자락을 잡아당겨 옷차림을 가다듬은 마상식이 다소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요한의 앞에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마상식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아무 대꾸 없이 가만히 서서 마상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알맹이가 없는 매미껍질처럼 무력하고 투명해 보였다. 모든 표정이 사라진 망망한 얼굴에는 인간의 의지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구신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요한이 바싹 말라 버석버석한 목소리를 냈다.

“이문화 사장님 지시로 검사님 모시러 왔습니다.”

얇은 얼음처럼 요한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무표정이 산산이 갈라져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알맹이가 드러났다.

“내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 좆대로 오라 가라 불러 대도 꼬리 흔드는 동네 똥개였나?”

혼잣말을 빙자했으나 엄연히 마상식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요한의 입버릇이 험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초면의 상대에게도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

이문화의 오른팔로 불릴 정도로 가장 가까운 수하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마상식이 요한을 직접 만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문화가 연암에서 요한에게 개수작을 부리는 동안에는 서울에서 이문화가 떠맡기고 간 일을 하느라 바빴고, 요한이 분노에 가득 차서 씩씩대며 서울로 문화를 찾아올 때는 연암에서 문화가 벌인 사건 사고를 뒤처리하느라 바빴다.

서요한 검사는 여러 입을 통해 들은 대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저 얼굴에 저 허우대를 가지고 왜 검사처럼 곰팡내 나는 일이나 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외모였다.

화사한 이목구비가 모난 데 하나 없는 작은 얼굴에 빈틈없이 들어찼는데, 신비로울 정도로 균형이 완벽했다.

게다가 마상식과 비슷한 큰 키에 조금 많이 마르기는 했지만, 골격도 반듯한 것이 과연 그 까다로운 이문화가 더럽게 얽혀 보고 싶다고 헛소리를 지껄일 만했다.

홀린 듯이 요한의 껍데기를 감상하던 마상식은 뒤에서 이대한이 큼큼 눈치를 주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틀어 차를 대어 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장님께서 검사님 출퇴근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차는 민원실 앞에 있습니다.”

“두목이나 쫄따구나 숨만 쉬면 협박이야?”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요한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남의 일터까지 찾아와서 따라오라고 사람 압박하는 행동을 협박 아니고 뭐라고 생각해?”

“협박 아닙니다.”

“협박 아니면 뭔데?”

“……부탁입니다.”

허를 찔린 요한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부탁이라고요.”

“예. 검사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 주시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압니다. 절대로 강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다만, 저희 사장님께서 검사님 안위를 많이 생각하십니다. 저희로서는 윗분 의향에 최대한 맞춰 드려야 하기도 해서…… 부디 저희와 함께 이동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마상식 씨라고 했지요.”

요한이 갑자기 존댓말을 해서 마상식과 이대한이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예, 검사님.”

“마상식 씨는 사람 말 통하는 분 같으니까 저도 사람 말로 하겠습니다. 이문화도 없는데 굳이 이문화 지시 같은 거 따라 주고 싶지도 않고, 그것보다도 이문화 집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최소한 이문화 없을 때는 관사에서 출퇴근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안절부절못하고 방정맞게 다리를 떨던 이대한이 “부장님…….” 하고 우는 소리를 냈지만, 마상식은 못 들은 척했다.

“아, 부장님. 사장님이 엄청나게 화내실 텐데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너는 그냥 내가 시켜서 했다고 해.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냥 안가로 모시죠?”

“야, 이 새끼야.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뚜벅뚜벅 관사 쪽으로 걸어가는 요한의 뒤를 잰걸음으로 바싹 따라붙은 마상식이 급하게 요한을 불렀다.

“검사님.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검사님 그, 경호하는 것까지는 좀 봐주십시오. 저희도 사장님 뵐 면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저기, 그리고 관사에서 생활하시기 불편하지는 않으시겠습니까?”

걸음을 멈춘 요한이 한숨을 쉬더니 뒤를 돌아 마상식을 건너다보았다. 빛이 없어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순간 별처럼 보였다.

“설마 전부 다 버리지는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제 짐, 마상식 씨가 옮기신 거 아닙니까?”

“아, 예…… 허락 없이 관사 들어가서 죄송했습니다. 급히 준비하느라 전부 다 챙기지는 못했습니다. 버린 건 없습니다. 도청기나 위치 추적기 붙어 있는지만 확인하고 전부 다 제자리에 뒀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이문화 집에 가 보니까 거의 다 새로 사셨던데요. 그럼 관사에 원래 쓰던 물건 다 그대로 있다는 말이니까 오히려 편합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요한은 꽃이 만개하도록 봄이 무르익었음에도 혼자만 추워 보였다.

“그리고 하나만 더…… 검사님 댁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희가 딱 한 번만 더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저희 회사 이사회하고 주총 시즌이라서 사장님 상황이 여러 가지로 좀 어렵습니다.”

“아니요. 그건 됐습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다 불법 카메라 설치하는 미친놈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건 정말로 그게 아니라…….”

“현관 밖에서는 뭐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관사 안으로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관사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바람에 고작 몇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모래주머니를 차고 걸은 듯 피곤해졌다.

다른 곳에서 지낸 지 고작 2주도 안 되었는데 관사가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연암에 내려온 뒤 1년도 넘게 머문 곳이었음에도.

다행히 이부자리는 그대로 있었다. 살짝 먼지 냄새가 나기 시작한 이불 위로 풀썩 쓰러지듯이 누운 요한은 습관적으로 천장의 곰팡이 얼룩 숫자를 세었다. 지난번에는 열두 개였는데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아홉 개로 줄었다.

그러다가 등이 너무 결려서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는데, 이번에는 어깨가 눌려 아팠다.

인간의 몸은 얼마나 간사한가. 기대했던 안락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문화의 강요된 호사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요한이 허허롭게 웃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굳이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벌컥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손 가득 묵직한 비닐봉지를 든 마상식이 있었다.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 왔습니다. 요새 속이 안 좋으시다고 들어서요. 남는 건 얼리셨다가 데워 드시면 됩니다.”

마상식이 건넨 죽 봉투는 받았으나,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편히 쉬십시오. 내일 출근 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날도 어찌 보면 서요한에게 있어 당연한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의 유일한 친구나 마찬가지였으니.

* * *

들큼하고 끈적한 햇볕이 블라인드 틈으로 올각올각 쏟아져 들어오는 봄날이었다.

요한은 볕에 들러붙어 방까지 따라 들어온 꽃가루가 작게 소용돌이치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신영 기업 압수 수색 영장 나왔습니다.”

“출발합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일이 있나요?”

요한은 수사관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눙쳤다.

“압수 수색 명목은 폐기물 불법 투기인데 사실은 그, 터널 건 때문에 그러시는 거 맞으시죠…….”

“그렇죠.”

“요새 시국에 별건 수사는 너무 무리하시는 거 같은데요…….”

“일단 싹싹 긁어 와야 꼬리를 잡든 발을 잡든 하죠. 수사하던 와중에 새 의혹이 나왔다고 하면 되죠. 별건 수사 안 하는 검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그러다가 혹시 징계라도 받으시면…….”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자신이 모시는 검사님이 전임과 현임 연암 지청장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이 못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요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사관을 향해 “그렇게 겁나시면 여기 계세요. 저 혼자서 갔다 올 테니까.”라고 비아냥대고 싶은 못된 마음을 신중하게 억누르고 맥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사관을 믿을 수 있는지를 떠나, 전투를 앞두고 아군에게 날을 세울 만큼 서요한 검사는 멍청하지 않았다.

“제가 책임질게요. 사실 이거 별건 수사라고 할 것도 없어요. 폐기물 사건 파다 보면 분명히 원청사 꼬리 나옵니다. 터널 시체 유기도 폐기물 불법 매립이랑 관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타고 올라가면 연결 고리가 보이겠죠.”

“그렇지만 이렇게 서두르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 아니면 안 됩니다. 시간이 없어요.”

요한이 검지와 중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다는 신호였다.

이문화가 여기 없을 때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수사관이 요한의 마음속 소리를 들었을 리는 없겠으나, 그는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요한은 여전히 책상을 두드리며 작년 이맘때 무얼 하고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복숭아 살처럼 무른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요한이 영영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이었다. 요한이 잃어버린 것은 처음으로 자각한 자신의 욕망에 관한 기억이었다.

“지겹다고 했던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던가.”

지겨울 정도로 평화롭던 일상은 마치 전생처럼 아스라했다.

요한의 시간은 그대로인데 계절은 그를 두고 저 혼자만 한 바퀴 돌아 모든 것이 시작했던 시절로 요한을 다시 데려다 놓았다.

* * *

현관문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다는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리고 곧이어 크게 욕하는 소리와 철문을 난폭하게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한이 허겁지겁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이번에는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했는지, 이대한이 현관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이문화가 바깥에서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문화의 가슴에 코를 박을 뻔한 이대한은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 하고 문화에게 인사했다.

아니, 인사를 하려고 했다.

“오셨습…….” 하고 말했을 때 문화가 이대한의 머리를 전력으로 후려쳤다.

일단 얻어맞고 시작할 것을 예상했던 바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세게 맞은 이대한은 볼품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문화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뒹구는 이대한의 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새끼들이, 아주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지?”

“죄, 죄송합…… 니다…….”

“개겨? 빨리 안 일어나?”

문화의 발길질을 멈추게 한 것은 안쪽 방에서 들려온 요한의 목소리였다.

“야. 그만해.”

“어, 검사님. 몸은?”

널브러진 이대한의 다리를 콱 밟는 것으로 일방적인 구타를 중단한 문화가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요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왼쪽 눈썹 위와 광대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목에도 왼쪽 귀 바로 아래에서부터 빗장뼈까지 가로지르듯 길게 긁힌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 뭐래?”

요한이 교통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무작정 연암으로 내려왔다. 회의든 모임이든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될 일이면 어디에 있건 될 것이고, 안 될 일이면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도 안 될 것이다.

문화는 그렇게 자신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고는 미친 소 내달리듯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속도위반, 신호 위반이라고 삑삑 울어 재끼는 내비게이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결국 주먹으로 두들겨 부숴 버렸다. 진짜로 부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는데.

“급하게 회전하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셨습니다. 뇌진탕 소견은 없는데, 며칠 찬찬히 두고 보면서 어지럽거나 구토감 느껴지면 얼른 병원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안전벨트에 쓸려서 목에 찰과상이 조금 나셨고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고 하십니다.”

요한 대신에 마상식이 대답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마상식은 제 잘못을 알고 있는 듯, 문화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는 검사님한테 물어봤는데 왜 마상식 부장님이 나대시나요?”

“시끄러워. 골 울려. 들었으면 됐잖아.”

“아니,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검사님, 내가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고집부리다가 이게 뭐야. 얼굴에 흉터 남으면 알지? 이대한 얼굴에 칼집 나는 거다?”

“닥치라고, 좀.”

백호엔지니어링의 하청사인 신영 기업 압수 수색을 나가다가 교차로에서 신호 위반 트럭이 요한의 차를 덮쳤다.

하필이면 그때 브레이크가 듣지 않아 급히 핸들을 꺾어 겨우 피했다. 속도를 내기 전이라 다행히 가로수를 들이받아 자차 사고로 마무리되고 말았지만, 영 찜찜한 사고였다.

왜 하필 요한이 사거리를 지날 때 신호를 위반한 걸까. 왜 하필 제동 장치가 고장 난 걸까. 왜 하필 에어백이 안 터진 걸까. 왜 하필…….

요한은 어디에 부딪혔는지 보라색으로 멍든 왼손 손등과 앞판에 금이 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망가진 시계를 풀어 오른손에 쥐었다가 왼손으로 옮겨 쥐어 보았다.

그 시계 외에 자신이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실감이 들면서, 요한은 스스로가 앞판이 부서진 시계처럼 쓸모없이 느껴졌다.

“마 부장은 내 말이 좆같아?”

“아닙니다.”

“그러면 왜 시킨 거나 제대로 하지, 좆대로 굴어서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들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맨입으로?”

요한이 넋을 놓은 사이에 문화가 마상식을 달달 볶았다.

관사에서 지내겠다고 우긴 사람도 요한이었고, 절대로 직접 운전하지 말고 어디 갈 일이 있으면 꼭 자신을 부르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마상식의 말을 무시한 사람도 요한이었고, 문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문화의 뒤를 치려다가 수상한 사고를 당한 사람도 요한이건만 이문화는 애먼 사람만 두들겨 팼다.

“이문화.”

“예, 검사님.”

“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어.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

“아이고, 제가 검사님께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못돼 처먹은 새끼. 제 성질이 더러운 걸 남한테 화풀이나 하고. 네 소갈머리는 딱 네 양심 크기랑 똑같구나.”

“크고 아름답다고?”

“지랄하네.”

문화가 요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 마상식 편을 든 거야?”

“뭐?”

“사장이 일을 시켰는데 부하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다가 망쳤으면 사장 입장에서 부하 직원 혼 좀 내도 무방한 거 아닌가?”

“그게 사장이 부하 혼내는 태도였어? 너 꼴리는 대로 지랄한 거지. 아까 걔는 왜 때려?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대한 편도 드네?”

“그래. 든다. 왜! 너만 아니면 전 세계 사람 누구 편도 들 수 있어.”

“그럼 전 세계 사람 다 죽으면, 그때는 내 편 들어 주나?”

“들겠냐?”

문화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혀를 찼다.

“나랑 서울 가자.”

“싫어.”

“며칠만 있다가 오자고.”

“싫다고.”

“왜 싫어?”

“너는 깡패 새끼라서 출근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직장에 나가서 노동이라는 걸 해.”

“가지 마.”

“직장에 가지 않으면 해고라는 걸 당할 수 있어.”

“그럼 휴가 내면 되잖아.”

“일 많아.”

요한의 말꼬리를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던 문화가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상식에게 턱짓하며 “소지 두 마디 할래, 약지 한 마디 할래?”라고, 요한으로서는 암호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을 했다.

“약지로 하겠습니다.”

“가져와.”

“예.”

“뭐야, 무슨 소리야?”

“뭐긴 뭐겠어. 마상식 부장님 벌 받는 거지.”

“약지, 소지, 하던 소리가 그럼…….”

문화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미쳤어? 너 진짜 왜 그래? 미친 새끼. 너 지금 괜히 화풀이하는 거지!”

넓은 어깨가 다시 한번 위로 솟았다가 내려왔다.

“화풀이는 무슨.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지. 검사는 검사의 방법이 있고, 깡패는 깡패의 방법이 있는 법이야. 흔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사람 손을 자르겠다는데!”

“요새 의료 기술이 좋아서 손가락 정도는 금방 붙여.”

“다시 붙일 걸 왜 자르냐고, 애초에!”

“검사님, 마상식 새끼손가락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설마 마상식 좋아해?”

“너보다야 좋아하지.”

“섭섭해. 만약에 마상식이 검사님한테 상냥하게 대해서 그런 거면, 그거 전부 내 덕이야. 내가 검사님 잘 모시라고 시켰단 말이야.”

요한은 어울리지 않게 심통 부리는 어투로 말하는 문화의 얼굴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 눈이 이상하진 않은지 의심했다.

문화는 선명한 원색 실과 낡고 바랜 더러운 실을 교차해서 짜낸 양탄자 같았다. 대범한 색채에 눈앞이 어지럽다 싶다가도, 어느새 더럽고 칙칙한 시궁창 색이 펼쳐졌다.

서요한에게 이문화는 압도적이었으며, 동시에 예측할 수 없어 어려웠다.

“사장님.”

마상식이 침통한 표정으로 나무 도마와 흰 천, 천으로 둘둘 말린 길쭉한 물체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퉁퉁 부은 이대한이 절뚝거리며 마상식의 뒤를 따랐다.

“앉아.”

“네.”

마상식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도마를 내려놓고 도마 위에 두툼하게 접힌 흰 천을 올린 뒤 막대 같은 것을 감쌌던 천을 풀었다. 길쭉한 물체는 요한의 예상대로 칼이었다.

꽉 쥔 주먹을 양 무릎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 마상식을 내려다보던 문화가 불쑥 요한에게 물었다.

“검사님. 이따가 나랑 서울 갈 거지?”

“안 간다고 했다.”

문화는 화살을 마상식에게 돌렸다.

“마상식 부장님만 제대로 했으면 우리 한 떨기 꽃 같은 서 검사님이 우중충한 관사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자동차 키 제때 회수해서 검사님이 브레이크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에어백도 안 터지는 차 몰고 나갔다가 트럭에 받혀서 죽을 뻔한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지?”

“예. 제 잘못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 바쁜 시기에 굳이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와서 화를 낼 일도, 싫다는 서 검사님 억지로 모시고 서울 갈 필요도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마상식 부장이 뼈저린 반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문화가 과장되게 손뼉을 짝 쳤고, 그 소리를 신호로 요한이 벌떡 일어나 마상식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마상식 씨. 멀쩡한 손가락은 왜 자릅니까. 미친놈 말을 왜 듣고 있어요? 가세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입니다.”

“각오는 무슨 각오요. 그럴 만한 일도 없었고, 있었다 한들 이문화가 시키는 일에 손가락 잘릴 각오 같은 거 할 가치 전혀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얼른.”

“검사님께도 사죄드립니다. 험한 일 겪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이문화만큼은 아니라도 미친놈 많이 봤어요. 제가 검찰 밥 먹고 산 지가 몇 년인데 지금까지 살해 위협 한번 안 받아 봤을 것 같습니까. 성격 더러운 놈 배알 뒤틀려서 지랄하는 거 하나하나 다 받아 주지 마세요. 수지 접합 수술받아도 손가락 미세 신경은 연결 안 됩니다. 하지 마세요.”

팔짱을 끼고 지그시 요한을 바라보던 문화가 “뭐야. 왜 그렇게 애틋해. 나 없는 동안 둘이 만리장성이라도 쌓았어?”라며 기분 상한 티를 숨기지 않고 툴툴거렸다.

많이 놀라셨을 거라며 마상식이 놓아준 진정제 효과가 훅 올라왔는지 요한은 평소보다 몽롱하고 느슨한 기분을 느끼며 문화를 향해 느릿느릿 고개를 돌리고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내가 너인 줄 알아?”

“내가 뭐? 설마 내가 마상식이랑 잤다고? 대단히 모욕적인데, 이거.”

“너한테는 세상에 때리는 사람이랑 자는 사람 두 종류밖에 없어?”

요한은 마상식의 앞에 놓인 칼을 들어 문화의 정수리를 찍어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가는 역공을 당해 정수리가 뚫리는 쪽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태껏 몰랐던 걸 검사님이 깨닫게 해 주시네. 역시 머리가 좋아, 우리 서요한 검사님. 그러네. 쥐어패거나 같이 자거나 둘 중 하나네. 그런데, 검사님. 마상식이랑 자면 안 돼. 불륜이야. 쟤 유부남이야. 딸도 둘 있어.”

“지랄 좀 하지 마, 걸레 새끼야. 네가 아무 데나 좆 대가리 휘두르고 다닌다고 남들도 다 그러는 줄 알아?”

“아니, 내가 왜 걸레야? 진짜 억울하네. 마 부장. 말 좀 해 봐. 나 걸레야? 내가 걸레면, 걸레한테 박히는 검…….”

쌩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요한이 더 참지 못하고 물잔을 집어 던진 것이다.

문화는 아랑곳없이 마상식을 재촉했다.

“서 검사님 서울 안 가신단다. 마 부장이 다 책임진다고 했다며? 책임져야지.”

“네.”

날 길이가 30㎝ 정도 되는 칼을 단단히 쥔 마상식이 도마 위에 왼손을 올려놓고 새끼손가락 첫 마디를 긋기 시작했다. 피가 배어나 흰 천이 붉게 물들자 요한이 신음을 닮은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해! 이문화! 네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그만!”

“어, 마 부장. 잠깐만.”

살갗을 깊이 파고 들어간 칼날이 뼈를 가르기 직전, 문화가 명을 거두었다.

“나랑 서울 갈 거야?”

“갈게. 휴가 낼게. 며칠 가 있으면 되는데.”

“음. 이번 주말까지?”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런 미친 짓 다시는 하지 마. 개새끼야, 나한테 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라고!”

“검사님한테 불만 없다니까.”

“협박도 하지 마. 나는 너 하나도 안 무섭고, 죄책감도 안 느껴. 그냥…… 내 행동의 책임을 지는 것뿐이야. 내가 관사에서 자겠다고 했고, 내가 내 차 직접 운전하고 다니겠다고 했으니까…….”

요한이 살의를 담아 문화를 노려보았지만, 문화는 즐겁게 웃었다.

사실 이문화는 저한테 혐오 당하는 것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아니면 역시 자신이 이문화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즐기는 사디스트 쪽일까.

어느 쪽이든 요한에게는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문화가 신나라 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문화가 요한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숨이 닿았다.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실까, 우리 검사님.”

“내 표정은 원래 안 좋아.”

요한의 말에 문화가 대단히 흥미로운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박장대소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하 하나는 두들겨 패서 다리를 절게 하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무릎 꿇려 칼로 손가락을 자르게 했으면서 뭐가 좋다고 저렇게 재미있게 웃는 걸까. 어떻게 하면 가장 찬란한 방법으로 이문화를 깨부술 수 있을까.

요한은 자신의 인생에 남은 유일한 좋은 일이 딱 그것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문화는 요한의 턱을 잡았던 손을 내려 그의 윗목을 움켜쥐었다. 요한은 복종하듯 의식의 스위치를 내렸다.

그의 무르고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의식의 스위치를 올려 날카롭게 소리를 내질러 불분명한 어둠을 부수고 싶은 충동을 침착하게 억눌렀다.

“억지로 하니까 피곤한 거야. 그냥 검사님이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편하잖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 몰라?”

“지, 랄…….”

“검사님이 좋아서 나랑 자고, 검사님이 좋아서 약 맞고, 검사님이 좋아서 나랑 살고.”

뭉툭한 나무칼이 부드러운 버터를 가르듯, 문화의 말이 요한의 심장을 푹 찔렀다.

“안 그래? 그러면 검사님도 좋고 나도 좋잖아.”

“미친 새끼.”

“맨날 욕하는 거 보면 확실히 사람이 금욕적인 데가 있어. 왜 그렇게 자기 스스로한테 화를 내? 자기한테 화가 나 있으니까 다른 사람한테도 말이 험해지는 거야.”

문화는 멍하게 입을 벌린 요한의 얼굴을 구석구석을 핥듯이 눈에 새겼다.

뼈가 도드라진 곳이 한 부분도 없는 곱고 갸름한 얼굴. 새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정말이지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과연 요한에게 미인이라는 말이 칭찬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문화는 요한의 목을 잡은 채 새가 쪼는 듯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고 무용한 저항을 하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마 부장, 가 봐. 재수 없으니까 차는 폐차하고.”

세차게 고개를 털어 문화의 손을 떼어 낸 요한이 치를 떨었다

“미친 새끼야, 왜 네 마음대로 폐차를 해라 마라 지랄이야? 아직 할부도 안 끝난 새 차야.”

“마 부장. 할부 인수해. 햇살 말고 백호캐피탈로. 그다음에는 어디로 보내면 되지?”

피 묻은 흰 천으로 손가락을 감싼 마상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태화캐피탈로 하시면 됩니다.”

“태화? 아…… 개씨발 좆같은 새끼. 갈아 버릴 거니까 관은 필요 없고 빠께스나 넉넉히 준비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도마와 칼을 정리한 이대한까지 방을 나가자 문화가 요한을 침대에 눕히고 무게를 실어 꽉 눌렀다.

“검사님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죽지 그랬어.”

“검사님 모를 때는 어떻게 살았지.”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문화는 요한의 위에 올라타 얼굴 곳곳에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요한은 세상에서 제일 불결한 것을 마주한 표정으로 문화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결국 문화의 어깨를 때리며 성질을 부렸다.

“최소한 씻기라도 해라. 더러운 새끼야.”

“씻고 왔네요. 그리고 어차피 이제부터 땀 잔뜩 뺄 건데 뭐 하러 지금 씻어?”

“하.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살아?”

“검사님이 죽지 말라고 해서.”

요한이 움직임을 멈추고 문화를 향해 멍한 얼굴을 들었다.

요한의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난데없는 문화의 말에 대한 의구심과 성욕이 짙게 밴 숨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가 납득되지 않아 망연히 문화의 깊게 음영 진 눈을 쳐다보았다.

이문화의 눈은 흔들림 없이 요한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닐 것이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문화는 요한이 짐작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 올리브색 눈동자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는 기억이 떠올라 요한은 괴로움에 이를 갈며 눈을 감았다. 문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한의 눈꺼풀에 키스했다.

문화가 그렇게나 공을 들여 길들였음에도 요한의 몸이 그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전히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요한의 전부를 아작아작 씹어 삼키고 싶은 문화로서는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요한의 길고 늘씬한 몸을 핥고 주물러야 겨우 좁디좁은 틈이 열렸다.

요한은 잘 익은 과일처럼 달콤했으나, 저절로 벌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문화는 있는 힘껏 요한을 갈랐고, 요한은 소스라쳤다.

요한이 몸을 비틀며 아파할 때마다 문화는 그의 희고 매끄러운 살갗에 얼굴을 비볐다. 피부가 맞닿아 찰지게 문질러지는 느낌이 문화를 살아 있게 했다.

요한의 금욕적인 옷차림 아래 감춰진 속살이 얼마나 흰지, 투명하리만큼 새하얀 피부와 대조된 샅의 음모가 얼마나 검은지, 요한의 색이 옅은 성기와 선명한 선홍색을 띤 비부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아는 사람이 문화 자신 외에 아무도 없기를 바랐다.

문화에게 요한은 마치 신기루 같았다.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문화의 곁에 머물러 있지만, 결코 그의 손아귀에 붙잡혀 주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매혹한 것으로 모자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든 뒤에 그를 내버려 두고 스르르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문화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다.

문화는 요한의 상아처럼 희고 고상한 목을 천천히 핥았다. 그 목을 손아귀로 감싸 그대로 부서뜨리고 싶은 욕망과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연약한 것을 어루만지듯 입 맞추고 싶은 공존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헤매다가, 요한의 목덜미를 콰직 깨물었다. 요한이 꽉 다문 잇새로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상냥하게 웃을 때면 귀가 녹을 것처럼 달콤해지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크고 새카만 눈동자. 새초롬하게 다물린 심지 굳은 입술. 보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화사한 눈웃음.

이런 것들이 문화의 눈에만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다.

씨발.

입에서 쓴맛이 났다.

내 거야.

문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요한을 꽉 끌어안았다.

쓴맛을 지우려 달콤한 입술을 핥으면서 요한의 옷을 벗겼다. 맞닿은 입술로 열기가 아른아른 흘러 들어왔다. 이를 세워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 요한이 연신 움찔거렸다.

“아파? 아프면 얘기해. 안 아프게 해 줄 테니까.”

문화를 올려다보는 요한의 눈에 엷은 물기가 스며 있었다. 요한은 고개를 휙 돌리는 것으로 문화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늘도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안길 셈인 듯했다.

“뭐라고 얘기 좀 해 봐. 응?”

요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를 가득 채운 요한의 살냄새에 아찔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방금 자신이 깨문 잇자국에 입을 대고 연한 살을 빨아들였다.

“검사님은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해? 뭐, 이해는 하는데 가끔은 서운해. 아주 가끔.”

대답을 바라고 물은 말은 아니었으나 의외로 요한이 대꾸해 주었다.

“그러면 너는 나 좋아해?”

“당연하지.”

“너는 좋아하는 사람 강간해?”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 없기는 한데…… 그래도 나 검사님 좋아해.”

“다시 물어보자. 너한테 소중한 게 있기는 해?”

소중? 소중한 게 뭐지?

문화가 할 말을 잊고 있자 요한이 이어 말했다.

“소중한 건 누군가가 무언가를 아끼고 보살필 때야 비로소 가치를 얻는 거다.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를 소중히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집이고 맹목이지. 너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아.”

“나보다 끗발 훨씬 좋은 검사들로 검찰 연줄도 충분히 만들어 줬잖아. 인제 그만해. 나 좀 놔줘.”

문화는 요한의 몸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소중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소중한 건 아끼는 거라고 내가 방금…….”

“나는 그런 거 몰라.”

그저 가지고 싶고, 품고 싶고, 누구에게도 내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요한의 모든 것을 전부 자신만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머리카락 하나조차도 양보할 수 없었다.

“대신에 한 가지는 알겠어, 검사님. 뭐가 소중하면 소중하지 않은 척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거. 지키려면 그래야 한다고.”

“그건 진짜 소중한 게 아니야.”

요한이 빈정거리자 문화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무튼 나는 그만할 생각 없어. 놓긴 뭘 놔? 꿈도 꾸지 마.”

문화가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한이 뭘 보냐는 눈빛으로 문회를 노려보았지만, 문화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문화가 자신을 눈으로 핥든 말든 내버려 두기로 한 요한이 도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죽어 버릴까.”

“절대 안 되지.”

잽싸게 나온 문화의 단호한 거부에 요한이 치를 떨었다.

“그럼 네가 죽든가.”

문화는 요한의 무연한 태도에 조금 성이 났다.

그는 요한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조금의 관심, 약간의 다정함. 예전의 이문화가 서요한 검사에게 받았던 것의 아주 작은 찌꺼기라도 좋았다.

하지만 요한은 문화에게 무엇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건 요한에게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시의 이문화는 알지 못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문화를 사로잡았던 요한 안의 불꽃이 기어코 요한을 활활 태워서 사람 모양의 재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문화는 입술을 미끄러뜨려 가슴으로 향했다. 유륜을 할짝거리며 간질이자 요한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만 좀 해. 기분 나빠.”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거야.”

그는 요한의 항의에 답하는 대신 작은 유두를 덥석 물었다. 뜨거운 혀가 예민한 점막을 스치자 요한이 또 한 번 소스라쳤다. 문화가 젖을 찾는 갓난아기처럼 요한의 판판한 가슴을 빨면서 혀끝으로 유두를 밀어내듯 굴리자 요한이 이를 악물었다.

고집 세기는.

요한이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문화는 반대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쪽 유두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다른 쪽 유두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희롱하듯 비비자 요한이 고개를 뒤로 꺾였다.

발갛게 물들기 시작한 피부, 눈초리에 어린 물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큼한 숨. 비록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고 있으나 문화는 쾌감을 배운 요한의 육신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서요한이 느끼는 모든 것은 하나같이 이문화로 인한 것뿐. 그 사실이 문화에게 정신이 아뜩해질 만큼의 만족을 안겨 주었다.

문화는 요한의 옷을 속옷까지 전부 벗겼다. 요한은 성기를 손으로 덮어 가렸다. 이미 수십 번이나 알몸을 보였으면서도 새삼스럽게 치부를 가리려고 하는 모습이 묘하게 야했다.

“다리 벌려.”

다리를 꽉 오므린 요한이 몸에서 힘을 풀지 않기에 문화는 그의 양 무릎을 잡아 넓게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성기를 가린 손을 잡아떼니 요한의 모양 좋은 성기는 이미 반쯤 발기해 있었다.

“흠.”

문화는 자꾸만 몸을 뒤집어 엎드리려는 요한의 골반을 힘주어 누른 채 허벅지 안쪽의 야들야들한 살점을 크게 베어 물었다.

과즙 많은 과일을 깨물었을 때처럼 향긋한 단내가 훅 끼치는 듯했다. 분명 문화와 같은 비누를 쓰고 문화와 같은 세제로 옷을 빠는데 요한에게는 늘 좋은 향이 났다.

요한은 절대로 알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문화는 요한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문화의 손길에 반응해 움찔거리는 허리가 얼마나 교태로운지. 희열을 참느라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촉촉한 신음을 억지로 목 안으로 욱여넣는 모습이 얼마나 문화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요한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침대 시트를 잡아 뜯고 있었다. 문화는 요한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요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에서 시작해 허벅지를 거쳐 오목한 샅까지 천천히 쓸어 올리자 다분히 의도를 띈 손놀림에 자극된 요한이 목이 졸리는 소리를 냈다가, 흠칫하며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엄지로 회음부를 살살 매만지다가 꾹 누르니 작은 새가 날갯짓하듯 팔다리를 파드닥거렸다.

회음을 꾹꾹 누르자 굳게 다물렸던 입구가 슬며시 벌어지면서 은밀한 속살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난 살덩어리를 뿌리까지 박아 넣고 사정없이 허리를 흔들어 요한의 몸 가장 깊은 곳에 욕망을 뿌리고 싶었지만, 문화는 자신의 입술을 세게 깨무는 것으로 본능적인 충동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아직은 안 되지.

회음부에서 손을 떼자 빠끔 벌어졌던 그곳이 새침하게 오므라들었다.

문화는 제법 부풀어 꺼떡거리는 요한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요한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문화는 요한의 허리를 붙들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번들거리는 귀두를 할짝거리다가 갈라진 틈을 혀로 문질렀다.

“흡……!”

문화는 도리질하며 침대에 뒤통수를 짓이기는 요한의 성기 기둥을 잡고 선단 전체를 삼켰다. 제 손목을 물고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는 요한의 경련을 느끼며 문화는 반대편 손을 요한의 다리 사이로 찔러 넣었다.

손가락 두 개가 버겁게 들어갔다. 손가락을 감싼 내벽의 탄력을 즐기면서 손가락을 벌려 가위질하듯 움직이자 요한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살아 있는 연체동물처럼 꿈틀거리는 내벽을 천천히 더듬다가 조금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을 꾹 누르니 입 안에 가득 찬 요한의 성기가 불쑥 부피를 키웠다.

문화는 요한의 거친 콧숨에 맞춰 한껏 예민해진 안쪽을 다정하게 짓뭉개면서 동시에 성기를 세게 빨아들이며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여 기둥에서 뿌리까지 전체를 애무했다.

“그만!”

요한이 허리를 튕기며 절박하게 외쳤다. 문화는 그 말을 신호로 목젖을 넘어갈 정도로 요한의 성기를 깊게 빨아들였고, 머지않아 요한은 문화의 입에 사정했다.

문화가 요한의 몸을 돌려 엎드리게 하고는 그 위에 무게를 실어 몸을 겹쳤다. 어깻죽지를 잘근잘근 깨물자 요한이 목덜미를 물린 동물처럼 몸에서 힘을 빼고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자신보다 몇십 킬로그램이나 더 나가는 문화가 무거울 만도 한데, 침대와 문화 사이에서 짜부라진 요한은 버거운 신음은커녕 숨소리조차 바뀌지 않았다.

납작하게 눌릴 때 안정감 느끼는 타입인가.

그러고 보니 요한이 관사에서 사용하던 이불도 요새 좀처럼 보기 드문 두꺼운 솜이불이었다.

문화는 무거운 이불 위로 발갛게 익은 얼굴만 내밀고 쌕쌕 편안한 잠에 빠진 서요한 검사를 상상했다가, 갑자기 정체 모를 감정이 울컥 치밀어 요한의 부드러운 목을 제법 세게 빨았다.

요한이 뭐라고 웅얼거리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아마도 보이는 곳에 자국을 남기지 말라는 소리겠지.

문화는 일부러 반대쪽 목도 잇자국을 따라 멍이 남도록 세게 씹었다. 화를 내던 요한은 문화가 대뜸 뒤에 손가락을 찔러 넣자 흡, 하고 숨을 삼키며 입을 꾹 닫았다.

그새 다물린 내벽이 옴짝거리며 손가락을 씹는 감각이 기가 막혔다. 손가락을 굽혀 구멍 안쪽을 벌리자 요한의 허리가 불쑥 튀어 올랐고 높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문화의 두둑해진 앞섶을 건드렸다.

문화는 요한의 좁고 뜨거운 곳을 휘젓는 동시에 등골을 따라 혀를 미끄러뜨렸다. 두툼한 혀가 날씬한 허리 아래쪽에 쏙 패인 보조개와 두덩 근처를 맴돌았다.

점 하나 없이 도자기처럼 매끈한 요한의 등의 유일한 흠을 핥고, 핥고, 또 핥았다.

그가 요한에게 새긴 낙인이었다.

담뱃불로 지진 자리는 아물 새도 없이 침대 바닥에 문질러지느라 몇 번이나 피가 나고 덧나서 검붉은 흉이 남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번 딱지가 앉으니 순식간에 새살이 차올랐고 상처의 붉은 기도 금세 빠져서 지금은 새끼손톱 절반 정도 되는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침으로 번들거리는 상흔을 내려다보며 문화는 문뜩 흉터가 마치 물고기 비늘 같다고 생각했다.

요한을 만나기 직전에 키웠던 물고기의 반짝거리는 비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물고기가 어떻게 되었더라…….

아까 울컥 치밀었던 이름 없는 감정이 다시 목구멍에 고이는 기분이 들어 꿀꺽 침을 삼켰다.

“만약에 내가…….”

문화가 입을 열자마자 요한이 몸을 뒤틀었고, 경련하는 몸을 따라 안쪽 근육이 꾹 오므라들며 문화의 손가락을 씹듯이 조여 왔다.

손가락이 마치 성기와 이어진 양 성기로 피가 확 쏠리면서 문화가 하려던 말이 그대로 휘발되어 날아갔다.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성기에게 참을성을 주문하며 문화는 양손으로 요한의 엉덩이를 벌리고 선홍색 구멍에 혀를 쑤셔 넣었다. 요한이 잇새로 욕을 짓씹었지만, 문화는 못 들은 척하며 요한의 속살을 계속해서 맛보았다.

조붓한 길을 혀로 헤집을 때마다 요한이 손톱으로 침대 시트를 벅벅 긁었다. 자꾸만 다리에 힘을 주어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하기에 문화는 “그래서 내 머리통 터지겠어?” 하고 요한을 놀리며 상체를 세웠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요한의 등이 눈에 뜨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검사님. 똑바로 누워 봐.”

“그냥 해.”

“얼굴 보고 할 거야.”

“대충 박고 싸라고, 씨발 놈아.”

갑자기 욕을 하는 걸 보니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문화는 힘을 주고 버티는 요한의 몸을 억지로 돌려서 천장을 보게 바로 눕혔다. 그의 성기가 눌려 있던 자리가 축축했다. 문화의 집요한 애무를 이기지 못하고 그새 한 번 더 사정한 모양이었다.

몸을 바르작거리던 것이 문화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꿈틀댄 것이 아니라 쾌감에 못 이겨 침대에 성기를 문지른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문화는 고양감에 눈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숨을 시근덕거리는 요한을 보며 문화는 급하게 옷을 벗었다. 속옷을 내리자마자 배꼽에 닿을 정도로 발기한 성기가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퉁 솟아올랐다.

요한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알몸이 된 문화는 그의 위에 엎드려 맨살을 맞대고 지그시 무게를 실었다.

요한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생각보다 문화의 얼굴이 가까이 있어 놀랐는지 크게 뜬 눈이 문화의 시선과 부딪쳤다.

살갗은 이토록 부드럽고 따스한데 어째서 눈빛은 저렇게 차갑고 날카로울까.

요한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욕이라도 할 셈인가. 문화가 얼른 요한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덮어 막아 버렸다.

한계까지 커진 성기를 두 번 아래위로 쓱쓱 문지르고는 바로 구멍 입구에 가져다 댔다. 단숨에 끝까지 박아 넣고 싶은 본능을 힘겹게 억눌렀다.

요한의 골반을 붙잡고 몸 안쪽에 성기 모양의 길을 내려는 듯이 천천히 허리를 돌려 가며 밀어 넣다가 귀두만 구멍 입구에 걸칠 정도로 뒤로 뺐다가 다시 내벽 여기저기를 찌르며 삽입했다.

요한이 다시 눈을 감고 손목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희열의 전조였다.

그는 문화와의 섹스를 강간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그 관계에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을 세상 누구보다도 혐오했으며,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신음을 참다가 견디기 힘들어지면 손목이나 팔뚝, 입술 등 어디든 닿는 대로 물어뜯었다.

문화는 요한의 온몸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녹여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느긋하게 음미할 예정이었으므로 요한의 손을 잡아떼고 요한의 뜨겁고 축축한 입에 요한의 마른 손목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물려 주었다.

짐승처럼 쑤셔 박고 헉헉대며 허리를 흔들어 끝낼 거라면 모르겠지만, 농밀하고 진득한 육체 교류의 시간에 피를 보는 건 질색이었다.

그렇게나 시간을 들여 풀었는데도 요한의 안은 지나치게 좁고 뜨거웠다. 내벽이 성기에 척척 달라붙는 짜릿함에 문화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성기를 한계까지 밀어 넣었다.

문화가 성기를 밀어 넣었다기보다는 요한이 문화의 성기를 물어 삼켰다. 탄력 있는 점막이 살덩어리를 콱콱 조이는 현란한 감각에 문화의 정신이 흐리멍덩해졌다.

요한이 문화의 손가락을 씹기 시작했다. 무언의 반응에 맞추어 문화가 남은 한쪽 팔을 요한의 허리 아래로 둘러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각오를 전하려는 것처럼.

문화는 허리를 은근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움직이며 연한 속살을 짓찧었다.

가늘게 떨리던 요한의 목울대가 빳빳하게 굳었다. 경직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문화의 손가락을 끊어질 정도로 세게 깨문 요한이 몸 안쪽을 쥐어짰다.

절정의 여운으로 여전히 움찔거리는 내벽의 용틀임에 자극되어 문화도 요한의 안에 길고 진하게 정을 토했다.

문화는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세워 늘어진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과 목이 여전히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요한이 색색거리며 내쉬는 불규칙한 숨이 문화의 빗장뼈에 와 부딪쳤다. 심장이 간지러웠다.

“마상식 손가락은 못 자르게 했으면서 내 손가락은 직접 이로 끊어 버리려고 하네.”

“손 좀 씻고 다녀라. 짜고 써서 혼났네.”

“간 잘 맞고 좋지 뭐.”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문화를 노려보았다.

요한의 시선에 깃든 칼날에 문화의 아랫배가 다시금 시끄럽게 날뛰었다. 요한과 닿은 모든 곳으로 울컥하니 열기가 쏟아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쌌으면 꺼져.”

“있잖아.”

“없어.”

“뭐야, 그게.”

문화가 요한의 뜬금없는 대꾸에 장난꾸러기처럼 얼굴을 구기고 웃었다.

잠긴 목소리, 나른한 호흡, 찌푸린 미간, 마른 입술을 축이는 붉은 혀. 이런 것들이 문화를 사정없이 주물렀다. 그는 점점 부피를 더해 가는 중심을 의식하며 요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리가 만약에…….”

문화는 요한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친 뒤 발기한 성기를 쑥 집어넣었다.

내부에 고여 있던 정액이 윤활제 역할을 해 준 덕분에 문화는 요한의 내벽을 긁으며 단박에 깊은 곳으로 진입했다. 잔뜩 예민해진 속살은 처음부터 성기를 꽉꽉 조여 왔다.

문화가 드나들 때마다 물이 튀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두 번째의 절정은 성급하게 찾아왔다.

문화를 휩쓴 황홀경이 가라앉지 않고 허리와 아랫배 근처를 계속 묵직하게 짓눌렀다. 몇 번은 더 요한의 안에 몸을 파묻어야 진정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과연 요한이 얼마나 자신을 더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는데, 갑자기 요한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퍼졌다.

문화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몸을 물리고 요한의 상태를 살폈다.

“어이, 검사님.”

“…….”

“검사님, 괜찮아?”

요한의 몸을 꽉 메웠던 성기가 빠지자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르 흘렀다. 몸에서 흐른 액체가 흐르는 느낌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요한이 흰 거품이 인 점액질이 몸 아래에 고여 흥건해지는 데도 요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 죽었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가. 죽은 사람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문화는 요한의 코 아래에 물어 뜯겨 군데군데 살점이 뜯긴 손가락을 대어 보고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 잠이 든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혼절한 것일 거다.

고통에는 강하지만 쾌락에는 약한 서요한. 오직 의식이 없을 때만 뺨을 편안하게 푸는 서요한.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문화가 중얼거렸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상황에서 다른 모양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의식이 있었다 한들 대답해 줄 리는 만무했지만. 문화는 씻으러 가려던 생각을 바꿔 요한의 옆에 누워서 마른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땀과 체액으로 젖은 몸이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어서 따뜻한 물로 씻기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렇게.

문화는 자신을 흔드는 어렴풋한 울림을 느끼며 요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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