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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없는 마음 (1) (5/11)

제4장. 없는 마음 (1)

“서 검사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요한의 퀭한 눈 밑을 한심한 듯 올려다보던 부장이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혹시 제가 뭐 했습니까?”

얌전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요한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사람이 적당히 할 줄 알아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배운 게 없어?”

아침부터 불길한 예감에 찝찝해하던 요한이 부장 검사에게 불려 간 시각은 오후 3시.

책잡힐 일이야 한둘이 아니었다. 연간 5일을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인 연가를 벌써 다 써 버렸다든지. 외근을 핑계로 자리를 자주 비웠다든지.

그러나 부장 검사는 업무 태도나 근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요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날 밤의 무리한 정사로 후들거리는 허리에 힘을 꽉 주고 등을 폈다. 우두커니 넋 잃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세홍케미컬 말씀이십니까?”

“서 검사 올해 검사 적격 심사 있지? 심층 적격 심사 받게 될 거야.”

“무단 결근 한 번 했다고 심층 적격 심사 올라갑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 지금!”

부장 검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의원 면직 어떻게 생각해?”

“지금…… 설마 제 발로 검찰 나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젊으니 변호사로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원래 특수통이었고, 나이도 어리고 연수원 성적도 좋으니까 로펌에서도 환영할 거고.”

요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짓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 양반은. 2년에 한 번 재배치 받는 평검사와 다르게 부장 검사는 매년 근무지가 바뀐다. 얼마 전에 연암지청으로 부임한 눈앞의 부장 검사는 사사건건 요한과 각을 세웠던 전임 부장 검사와 다르게 요한에게 호의적이었다.

요한의 고집이 검사답다고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부장님. 저 절대로 퇴직 안 합니다. 만약에 적격 심사 탈락하면 소청 심사, 아니, 필요하면 행정 소송이라도 할 겁니다.”

부장은 말없이 손톱 끝으로 책상만 두드렸다.

“서 검사 인생이니 알아서 해…… 근데 말이야. 내가 서 검사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아껴서 하는 말이었어.”

“압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어쭙잖은 공명심이 터럭만큼은 남아 있던 시절의 일이다.

사건 처리하는 속도보다 새로 쌓이는 속도가 백 배쯤 빨랐던 생활에 익숙한, 그것도 일 중독자로 소문났던 요한에게 연암지청은 지나치게 한가했다.

너무 무료한 나머지 기록 정리라도 해야겠다 싶어 검사실 한쪽 벽에 늘어선 철제 캐비닛을 모조리 비우고 날짜순으로 도로 채워 놓던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열리지 않는 캐비닛을 만났다. 열리지 않는 것은 열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열었다가는 반드시 화를 입는다. 대표적으로 셋을 꼽아보자면, 판도라와 푸른 수염의 아내와 서요한 검사.

요한이 캐비닛 열쇠가 어디 있는지 묻자 실무관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옛날부터 잠겨 있었어요.”

요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웃었다. 직원들이 잠근 것도 아닐 터, 실무관에게 애먼 화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수인계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캐비닛과 요한의 눈을 피하는 직원들.

검사는 의심하는 사람이다. 요한의 눈앞에 제시된 증거는 명징했다. 서요한 검사실의 모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요한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이 캐비닛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총무계에 연락해서 열쇠 따는 분 불러 주시겠어요?”

“그냥 두시죠? 사건 목록에 없는 거면 중요한 것도 아닐 것 같은데.”

“자리가 부족해서 그래요. 일단 보고 별거 아니면 비워서 캐비닛 쓰게요.”

미궁의 문을 여는 건 쉬웠다.

수년 전 전국을 뜨겁게 달군 유출 사건의 주요 증거 파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해상 급유선과 오래된 화학 제품 운반선이 충돌하여 새카만 연료유와 유독 화학 물질이 대량 유출된 큰 사고였다.

피해가 어마어마해 몇 년이 지났는데도 지역 어업이 사고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 사건을 일으킨 세홍케미컬의 압수 수색 자료가 서요한 검사실의 캐비닛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각 배의 선장은 구속되어 실형을 받았지만 주인 격인 세홍케미컬은 법적 책임을 피했다. 결국 하청 업체만 철퇴를 맞아 대기업 편들기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요한은 주저 없이 부장 검사실로 향했다.

법원은 정의를 가리는 곳이 아니다. 법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증거뿐, 증거가 없으면 사실도 없다. 그 증거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 이관되지 못한 것인지, 이관되지 않은 것인지 요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열리지 않는 캐비닛이 실은 누군가의 의지로 열어서는 안 되는 캐비닛이 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안 그래도 잠깐 보자고 할 셈이었어. 닫아 놔.”

“네?”

“세홍 때문에 온 거 아니야?”

“맞습니다. 무슨 이유로 누락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대검에 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둬.”

“아니, 무슨 말씀을…….”

“지금 그걸 통째로 대검에 보낸다고 쳐. 이미 지검 지나고 고검 지났어.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면 대법원 선고 원심 확정으로 나올 텐데요.”

“그러니까 놔두라고.”

“부장님!”

“관련자가 몇 명 될 것 같아? 당시 담당 검사, 부장 검사, 청장에 그 이후로 그 검사실 쓴 검사들부터 역대 청장까지 전부 찾아서 물 먹여야 서 검사 마음이 편해지겠어?”

“그래서 그걸 그냥 두라는 말씀이세요?”

“서요한 검사. 중앙에서 할 만큼 했는데 이제 자중할 때도 되지 않았어? 서 검사한테는 검찰 일원이라는 마음가짐 같은 건 없어? 조직에 대한 충성심 말하는 게 아니야. 동료 의식이라든지 대의를 위해 서로 보듬고 가야 한다는 그런 마음은 안 들어?”

“대검 감찰에 연락하겠습니다.”

“꼭 그래야겠어?”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대로 뭉갤 수는 없습니다.”

부장의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온 요한은 대검찰청 감찰 본부 내선 번호를 눌렀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묘하게 달라진 사무실 공기에 위화감을 느낀 요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실무관이 선수를 쳤다.

“노후 가구 교체했어요.”

캐비닛이 바뀌었다. 그 캐비닛이 빠진 자리에 번쩍거리는 신형 캐비닛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공간 부족하다고 하셨잖아요. 이전보다 더 큰 걸로 바꿔 주셨어요.”

유일하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사라진 이상 요한에게 남은 건 사실도 정의도 아닌 불명예스러운 배신자 낙인뿐이었다.

제 입으로 뿌린 씨는 제 입으로 거두는 수밖에.

허탈하게 웃으며 요한은 다시 한번 감찰 본부 내선 번호를 눌렀다.

* * *

“동의서 메일로 보냈습니다. 서명해서 스캔한 다음에 보내시든지 아니면 팩스로 보내 주세요.”

안 그래도 메일함을 보고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대검찰청 감찰 본부에서 온 금융 거래 정보 제공 동의서와 통신 사실(통화 내역) 확인 자료 제공 동의서.

근태 불량 정도로 감찰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세홍케미컬 건은 중간에 엎어졌고, 터널 변사 사건은 묻혔다. 그 외에 요한이 내사를 받을 만한 특별한 일이 있던가.

서요한 검사가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을 감찰 본부에서 알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누군가가 요한을 고발한 것이다.

뱃속 깊은 곳에서 불꽃이 일어 몸 안쪽을 태우고, 매캐한 연기가 눈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에 수화기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전화를 내동댕이치고 일어난 요한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검사실을 뛰쳐나갔지만, 누구도 요한을 붙잡지 못했다.

“부장님!”

“깜짝 놀랐네. 노크도 안 하나?”

“그래서 의원 면직 하라고 하신 겁니까?”

“뭐가?”

“감찰이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감찰 본부에서 연락 왔어요. 내사 시작했다고. 무슨 일인지 알려 주지도 않던데요?”

“서 검사, 진정해. 진정하고 다시 찬찬히 말해 봐.”

“청장님 지시인가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감찰 본부에서 지금 서 검사 감찰하고 있다고?”

“네. 원하시던 대로 제가 옷을 벗게 되겠네요.”

“왜 그렇게 단언하는 거야?”

“됐습니다. 좋으시겠어요.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이봐! 서요한!”

요한은 목에 걸었던 공무원증을 빼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빠직 깨지는 소리가 마치 요한이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있던 검사 갑옷이 박살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감찰 본부의 칼끝은 서요한 검사의 봐주기 수사 의혹에 집중되었다. 봐주기는커녕, 대충 넘어가라는 압박을 대놓고 들이받아 인사 불이익까지 당한 요한은 황망함에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프로스 항명 사건으로부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체 누가 누구를 봐주었다는 것인가.

봐주라고 한 놈을 잡아야지, 봐주기 싫다고 뻗댄 놈을 잡으려 들면 어쩌자는 건지.

감찰 담당 검사는 요한보다 한 기수 위의 선배로, 요한이 이미 비위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양 굴었다. 어쩌면 내내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요한에게 사실 확인이나 반박 자료 제출을 요구했는데, 그가 3년 전의 대규모 분식 회계 사건을 언급했을 때 요한의 황망함은 기어코 분노가 되었다.

하마터면 전화에 대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시 중요경제범죄수사단의 막내 검사였던 요한의 개고생은 기소 위원회의 독단적인 불기소 결정으로 헛고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심하게 반항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생생한데 봐주기라니. 어쩌면 조직 부적응자라는 낙인은 그때 찍혔는지도 모르겠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 지금 어디서 지내지?

“관사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 관사 출입 안 한 지 한참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아, 그게……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관사가 낡아서 녹물이 나와서요…….”

― 서울에서 나서 평생 서울에서만 산 서요한 검사에게 하필이면 딱 연암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남의 뒷조사나 한 주제에 감찰 검사의 말투에 비아냥이 담겼다.

― 지금 지내는 집 주소하고 명의자 이름 불러 봐.

“그게, 그 친구도 세입자라서요.”

몇 번이나 혀를 씹어 가며 간신히 주소를 불러 주자 전화가 끊겼다.

명의자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요한은 정말로 그 집의 명의자를 몰랐다. 이문화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쩐지 몰이사냥 당하는 느낌에 신경이 곤두서서 계속 잠을 설쳤다. 작은 얼음 조각이 혈관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불쾌함에 손이 닿는 대로 벅벅 긁다가 손톱에 피가 묻어난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분 전환 겸 잠시 산책이나 할 생각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실무관이며 수사관이 동시에 요한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냥 검찰청을 나왔다.

빌어먹을 친구가 강제로 떠안긴 차를 몰아 빌어먹을 친구 집으로 갔다. 거기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요한은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바닥의 냉기에 피부 안쪽의 화끈거림을 달랬다. 언젠가 문화가 이죽거리며 했던 말이 떠오르며 몸이 식기는커녕 격렬한 작열감이 몰려왔다.

「그냥 내가 재수가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검사님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개씨발 새끼. 내 인생에서 너 마주친 게 제일 재수 없는 일이야…….”

이문화는 한동안 지긋지긋할 정도로 요한을 싸고돌더니 요 며칠은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이문화가 눈앞에 있으면 짜증이 났고, 이문화가 눈앞에 없으면 화가 났다. 짜증은 이문화를 때리거나 욕을 하는 걸로 해소할 수 있지만, 대상이 없는 화는 무슨 수로 풀 수 있을까.

요한은 신경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약…… 진정제 남은 게 있을 텐데…….”

많을 필요도 없었다. 바짝 일어선 신경을 가라앉히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

지난번에 교통사고가 났을 때 마상식이 꺼내 줬던 약이 분명 어딘가 있을 것이다. 요한은 벌떡 일어나 집안 모든 서랍을 잡아 빼서 탈탈 털었다.

욕실장을 헤집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거울에 눈이 토끼처럼 새빨간 남자가 비쳤다. 목을 얼마나 긁어 댔는지 선명하게 남은 울혈이 목이 졸려 죽은 시체에 남은 검붉은 손자국 같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가 요한의 분노에 다시 한번 불을 붙였다. 거울 반대편에서 저를 비웃고 있는 빨간 눈의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문화에게 날리고 싶었던 주먹을 거울 속의 자신에게 대신 날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대편 서요한의 얼굴에 금이 갈 때까지 거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나한테 왜 그래! 도대체! 왜! 왜 전부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내가 뭘 어쨌다고!”

피범벅이 된 거울을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요한이 부르르 떨었다.

“씨발…… 다 죽여 버릴 거야…… 이문화도 죽이고 백태호도 죽이고 천승태도 죽이고 조승환도 죽이고 전부 다 죽이고 중앙지검 로비에서 분신하고 죽어야지…….”

뒤죽박죽으로 엉킨 뇌가 끔찍한 망상을 쏟아 냈다.

피를 뚝뚝 흘리며 거실로 돌아온 요한은 충동적으로 문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넘어간다는 안내음이 나오자 휴대 전화를 집어 던졌다. 파삭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액정이 깨진 것 같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 피에 젖은 모양이 기괴해서 웃음이 나왔다. 요한은 손등을 바닥에 넓게 문질러 일부러 피범벅을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지옥을 보며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는데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울어라. 신나게 울어라.

나 대신 울어라.

벨 소리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끈질기게 요한을 부르던 휴대 전화가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요란한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요한은 엉금엉금 기어가 내던졌던 휴대 전화를 들었다. 이문화였다.

“너 왜 내 전화 무시해, 이 개잡놈의 호로 새끼야.”

― 미안, 미안. 전화 온 줄 몰랐어. 우리 검사님,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두꺼비 불알 터지는 소리 하지 말고…… 씹새끼야, 네가 나 찔렀지.”

― 찔러? 어디를?

“네가 찔렀지! 너지!”

― 뭐, 내가 자지로 검사님 구멍을 찌르…….

개소리를 들어 줄 기분이 아니라 휴대 전화를 다시 집어 던졌다.

이문화에게 패악을 부리고 나니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그는 여전히 피가 줄줄 나는 손을 곱게 모아 가슴 위에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똑바로 누웠다.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조금 걷히며 사고가 조금 명료해졌다.

서요한 검사의 편파 수사를 조사해 달라고 고발장을 날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애초에 봐주기 수사를 해 본 적이 없는 요한은 도대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교묘하게 뒤튼 사실로 요한을 모함했다는 소리인데.

이문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요한도 딱히 확신이 있어서 문화에게 네가 나를 찔렀냐며 고함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이문화가 자신을 팔아넘긴 사람이 맞는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요한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찔리고 베인 손등에 대충 붕대를 감은 뒤 검찰청으로 돌아갔다.

“부장님.”

“어…… 아니, 손은 또 왜 그래? 뭐야? 싸웠어?”

“설거지하다가 컵을 깨뜨려서 좀 심하게 베였습니다.”

“아이고, 조심 좀 하지…… 그래. 무슨 일인데?”

“감찰이 제가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데, 혹시 무슨 건으로 그러는지 아시는가 여쭈러 왔습니다.”

“흠…… 나한테는 별말 없어서…….”

부장 검사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부장님. 아시지 않습니까. 저 봐주기 수사 못하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여기 왔습니다. 제 주제에 누구를 봐줘요. 저, 정말 억울합니다.”

“서요한 검사.”

“네.”

“옷, 넥타이, 신발. 다 무슨 돈으로 산 거야?”

“네?”

“그 시계, 평검사 연봉으로는 절대 못 사는 물건이야. 억 소리 나는 거라고. 설마 그것도 모르고 받았어?”

요한은 황황한 얼굴로 손목에 두른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관사에서 불법 카메라가 나온 일로 이문화의 사무실에서 난장을 피웠을 때, 양부모님이 대학 입학 선물로 사준 손목시계를 망가뜨렸다.

시계 수리점을 묻는 요한에게 사정을 들은 문화는 자신이 고쳐다 주겠다며 부서진 시계를 가져갔고, 그동안 차고 있으라며 건네준 것이 요한이 지금 차고 있는 시계였다.

“그게, 받은 게 아니라, 이거는…….”

“서 검사가 직접 샀다고? 영수증이랑 자금 출처 제시 가능해? 어느 순간부터 서 검사 옷차림이 화려해졌다고 청에 소문이 짜하게 났어. 그리고, 성라지검 고준영 검사하고도 대차게 한 판 했다며?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가만히 있어도 눈에 뜨이는 사람이 왜 그렇게 튀는 행동을 하고 다녀. 그러니까 자꾸 적이 생기는 거 아니야.”

“제가, 설마, 편파 수사 대가로……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정말…… 저는…….”

“판단은 감찰 본부에서 하겠지. 나는 진짜 서 검사 믿고 싶다.”

감찰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찰 본부는 요한의 사건 기록과 수사 내용, 거기에 금융 거래 내역과 통화 내역을 샅샅이 파헤쳤지만 그럴싸한 봐주기 수사의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요한에게 그의 봐주기 수사 때문에 흐지부지된 것 아니냐며 윽박질렀던 분식회계 사건과 재건축 사건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서요한 검사에게 뒤집어씌우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라는 판단이 뒤늦게 들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요한은 연암 전보 직후 일어난 토건 업체 분쟁에서 특정 회사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요한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문화가 일으켰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자기들끼리 정리했다며 고소, 고발을 취하하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가 요한을 데려간 아파트가 분쟁 당사자 한 명의 소유였던 까닭에 의혹은 거의 사실로 굳어졌다.

대검찰청 감찰 본부는 직무 태만 및 공무원 품위 유지 위반을 이유로 서요한 검사를 법무부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였다.

문화가 만사를 내팽개치고 연암으로 달려왔을 때, 요한은 만취 상태였다.

요한은 문화 자신을 포함해서 그가 아는 어느 사람보다도 술이 셌다. 소주 열 병을 마셔도 멀쩡한 사람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려면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셔야 하는 걸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양주, 전통주, 와인 할 것 없이 집에 있던 술이란 술을 전부 꺼내 마신 모양이었으니까.

빈 병 십수 개가 거실 바닥에 굴러다녔고, 술병 사이로는 요한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처참한 꼴에 아연해진 것도 잠시, 문화는 귀신 같은 얼굴로 요한이 입을 대고 마시던 브랜디 병을 빼앗아 남은 술을 싱크대에 쏟아 버렸다.

요한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문화가 진정제를 싹 감춰 둔 바람에 술을 꺼내 마셨을 뿐인데. 애초에 진정제를 숨기지 않았으면 되었을 일이 아닌가.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은 모두 이문화 때문이니까 이문화에게는 화를 낼 자격이 없다고 요한은 엉성한 발음으로 항변했다.

“지금 내가 비싼 술 멋대로 마셨다고 화내는 거로 보여?”

“말 걸지 마…… 더러운 밀고자 새끼…… 밀고자, 고자…… 고자 새끼…… 조작질이나 하고…… 불알이나 떼라…… 고자 새끼야…….”

꼴도 보기 싫다느니, 당장 베란다로 뛰어내려 죽어 버리라느니 요한이 혀 꼬인 악담을 퍼붓는데도 문화는 대꾸는커녕 굳은 얼굴을 풀지조차 않았다.

악에 받친 요한은 비틀비틀 일어나 문화에게 달려들어 주먹질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문화를 때리고 발로 차다가 기어코 벽을 잘못 걷어찬 요한은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잡고 끙끙댔다.

문화는 요한이 기운이 달려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는지 난장판을 치우는 데에 집중했다.

요한이 거실로 끌고 와 뭉개며 더럽힌 이불을 세탁실로 옮기고 빈 병을 한곳으로 모았다. 걸레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수건에 물을 적셔 술이 흘러 끈끈하게 얼룩진 바닥을 꼼꼼히 닦았다.

“바닥 닦게 좀 비켜 봐. 검사님 자리가 제일 더럽다.”

더럽기는 누가 더럽냐고, 더러운 건 네놈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를 줄 알았는데 요한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야. 검사님답지 않게 웬 엄살?”

문화가 얄밉게 웃으며 요한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그제야 요한의 얼굴이 고통으로 새하얗게 질린 것을 보았다.

* * *

감찰 본부 내사가 끝나자마자 요한은 자택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에게는 자택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었기에 이문화가 차명으로 소유한 아파트에서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시간이 가기만 기다렸다. 징계 위원회 회의가 열리는 날에야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전화로 결과를 통보받아도 되지만, 요한은 문화의 부축을 받아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검찰청으로 갔다.

술에 취해 문화를 두들겨 패다가 벽을 잘못 걷어찬 날, 새끼발가락 뼈가 골절되었다. 이문화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파서 끙끙대는 요한을 본 이문화는 얼굴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린 채 요한을 둘러업고 뛰어나갔다.

고작 이런 정도로 응급실 가는 거 아니라는 요한의 만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문화는 야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요한을 서울의 대학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 의사가 “발가락뼈에 금이 갔네요.”라고 말했을 때, 이문화는 마치 요한의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밤중의 난리로 술이 홀딱 깬 요한은 놀란 척하는 이문화가 가증스럽고 괘씸해서 “엄살 부리지 말라고 비아냥거릴 때는 언제고.” 하며 퉁명스럽게 이죽거렸다. 그때 문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을 곱씹고 있노라니 어느새 검찰청 근처였다. 요한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의료용 보호대에 감싸인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이문화는 충실한 시종처럼 요한의 수발을 들었다. 처음에는 미친놈이 새로운 유희 거리를 발견했구나 싶어 내버려 두었는데, 이문화는 그저 담담했다. 능글맞은 농담도 절로 주먹이 올라가는 음란한 소리도 하지 않았다.

요한이 손은 멀쩡하다고 아무리 짜증을 내도 못 들은 척 욕실까지 요한을 안고 가서 몸을 씻겨 주었다.

홀딱 벗은 요한의 몸에 비누칠할 때도,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 줄 때도 그의 손길은 한결같이 담백했다. 침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요한의 옆을 지킬 뿐, 멋대로 끌어안지도 않았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지도 않았고, 음탕하게 지분거리지도 않았다.

아주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 평화도 오늘이면 산산조각이 나겠지만.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내게 강 같은 평화.” 하고 혼잣말했다가, 뺨이 뜨거운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가 문화와 눈이 마주쳤다.

“현관 앞에다 내려 드릴까?”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릴래.”

“거기까지 업어 달라고?”

“미친놈인가? 아. 미친놈 맞지.”

문화가 건조하게 웃었다.

“이제야 서요한 검사님 같네.”

요한은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춘 틈에 문을 열고 내렸다. 뒤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문화를 무시하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공원 후문이 검찰청 쪽으로 나 있어 산책로는 검찰청 방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절뚝절뚝하며 인적이 드문 샛길로 벗어나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그 위에 앉았다.

하루가 더럽혀지기 전에 옷부터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담배를 꺼내며 억 소리 난다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공원 전체가 금연 구역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는 담배를 무신경하게 발로 비벼 껐다가 에구구, 한심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숙여 꽁초를 집어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옷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조금 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날씨 조옷타.”

날씨가 좋으면 내 인생은 이따위인데 날씨만 좋다고 화가 나고, 날씨가 안 좋으면 기분 나쁜데 날씨까지 그 모양이라서 화가 난다. 오늘도 세상은 진부하고 화낼 명분투성이다.

요한은 한 시간이 넘도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사람이 아니라 벤치에 설치된 조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동도 없이 허공만 노려보던 요한은 갑자기 전원이 켜진 기계처럼 벌떡 일어났다.

10시 15분이었다.

“석 달 뒤에 뵙겠습니다.”

“음.”

침음인지 대답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목 울림 소리를 들으며 부장 검사실에서 나왔다. 징계 위원회는 요한에게 3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생각보다 뼈아팠다. 수치스러웠고, 억울했으며, 분했다. 얼굴에 물을 좀 끼얹어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아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펭귄같이 촌스럽다는 이유로 이문화는 요한이 기성품 정장을 입는 걸 질색했다. 대신에 요한의 늘씬한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색 맞춤복을 입혔다.

그는 요한이 대충 메고 다니던 싸구려 넥타이를 자기 마음대로 버리더니 수입 브랜드의 실크 넥타이를 수십 개나 사 왔다.

요한은 넥타이 매듭 사이에 손가락을 걸어 느슨하게 풀면서 실감 없는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누구지.

이문화가 사 준 옷을 입고, 이문화가 준 시계를 차고, 이문화의 집에서 먹고 자며, 이문화가 모는 차를 타고 다닌다. 이 정도면 애첩이라 불려도 할 말 없는 거 아닌가.

“검사님?”

뒤에서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요한 검사실의 수사관이었다.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요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잠깐 어지러워서요.”

손을 들어 이제 괜찮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발을 질질 끌며 검사실로 갔다. 실무관이 놀란 얼굴로 연신 요한의 발과 얼굴을 번갈아 보길래 “살짝 삐었어요.” 하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집무실로 들어가 진통제를 꺼내 몇 알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투명한 파란색 알약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꼭 바다 같은 색을 한 주제에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자꾸만 바다 생각이 났다. 마치 금단 증세에 괴로워하며 약을 갈구하던 그때처럼 당장 바다 비린내를 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무엇을 달성하려고 해 왔다. 강한 사람이 되려고. 그래서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노력해 왔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나.

이내 요한의 속에 황량함이 몰려들더니 오금이 저려 올 정도로 강한 분노의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흡사 살의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요한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검사실 직원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검찰청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좀 더 빛이 넘치고, 바람 소리가 맑고, 소금 냄새가 강렬한 곳을 원했다.

어느새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물이 땅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공기 속에 습한 바람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해변 군데군데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잔물결을 하염없이 보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도망치듯이 일어서서 걸었다. 그러다 지치면 다시 적당한 곳에 앉았다.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도 요한을 수상하게 여기는 기색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저물었다. 요한은 마치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처럼 놀랐고 당혹스러웠다.

벌써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 아니라 더 쓸쓸한 저녁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바다에 반사되었다. 엷은 빛이 흔들리고 꺼지는 모습이 거기 바다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지쳤어.

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자신이 한심해서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일만 일어나는 걸까. 이렇게 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닫아걸고 보내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을까.

요한은 대답을 찾아 귀를 기울였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렸다.

바닷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펼쳐진 남색 하늘에는 암막에 뚫린 작은 구멍처럼 빛 알갱이가 몇 개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빛은 신기할 만큼 반짝임이 강했다. 손을 위로 뻗어 보았지만 반짝임은 너무나 멀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 전화를 꺼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대로 끊어 버리려고 했는데, 손가락이 멋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검사님! 지금 어디야?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요한이 대답하지 않자 상대방도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다가 낮게 억누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발도 시원찮은 사람이 대체 어디 간 거냐고…….

요한은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전화 반대편의 목소리를 듣고 겨우 이해했다.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문화?”

한 호흡 쉬고 나서 대답이 돌아왔다.

― 검사님 지금 어디야? 파도 소리? 바다야? 바다에 있어? 거긴 왜 갔어?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어? 대답해.

“위치 추적하면 되는데 왜 물어봐.”

― 그런 거 안 한다고 했잖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불신이 아주 골수까지 새겨졌어. 그거 병이야. 알아? 그래서 거기 어디라고?

바닷가에는 누구의 모습도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 어두운 파도가 밀려왔다가는 빠져나갔다.

요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요한이 한나절을 걸어 도착한 곳에 이문화가 다다르기까지는 고작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밤바다 좋네.”

마치 신경증 환자 같았던 전화 건너편 목소리와 사뭇 다른 어조로 문화가 건들거렸다.

“그 발로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우리 검사님, 하여튼 깡다구 하나는 대단해.”

“안 그래도 발 아파서 뒤질 것 같으니까 비아냥댈 거면 그냥 닥치고 꺼져.”

요한의 쌀쌀맞은 대꾸에도 아랑곳없이 문화는 벤치에 앉은 요한의 앞에 버티고 섰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하얀 알약이 든 작은 비닐봉지와 정체 모를 갈색 드링크 병을 꺼내 요한에게 내밀었다.

“검사님 아플까 봐 이 기사가 약 챙겨 왔어. 잘했지?”

문화에 대한 신뢰가 0에 수렴하는 요한은 차마 약을 받아 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요한이 머뭇거리는 사이 문화가 약봉지를 찢고 음료수 뚜껑을 열었다. 그는 서슴없이 요한의 턱을 잡아 입을 벌려 알약을 털어 넣고 드링크를 강제로 부어 넣은 뒤에 우악스럽게 요한의 고개를 뒤로 젖혀 버렸다.

요한이 사레들린 기침을 캑캑대자 문화는 큰 손으로 요한의 코와 입을 막았다.

쿨럭거림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문화가 요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요한은 숨이 막혀 붉어진 얼굴과 습기 찬 눈으로 문화를 노려보았고, 문화는 능청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요한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위치 추적 왜 안 깔았어?”

“그런 걸 왜 깔아?”

요한이 홧김에 내던졌던 휴대 전화는 액정이 완전히 박살 났고, 망가진 휴대 전화를 보자마자 문화는 부하를 시켜 곧장 새 휴대 전화를 사 오게 했다.

문화가 요한에게 건네준 것이 밀봉된 휴대 전화 박스가 아니라 달랑 휴대 전화 본품이었기 때문에 요한은 문화가 당연히 휴대 전화를 복제했거나, 최소한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을 깔았겠거니 생각했다.

“너 하는 짓이 늘 그렇잖아. 음습하고, 치졸하고.”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손수건을 구겨 휙 내던진 문화가 요한의 옆에 털썩 앉았다.

“폰 버리고 사람만 빼 가면 위치 추적이 무슨 소용이야? 그딴 건 피부에 직접 박아 넣지 않는 이상 쓸모없어.”

요한이 질린 얼굴로 문화를 쳐다보았다.

“아, 뭐. 검사님 몸에 위치 추적기 심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옥에 티는 하나로 충분해서,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그는 요한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올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그냥 사람을 붙여. 왕창 붙여. 뒤에도 붙이고, 옆에도 붙이고. 사방 천지를 둘러싸 버려. 그게 제일 확실하거든. 더 좋아하는 건 그냥 내 눈 미치는 데에 두는 거야. 내 눈에서 안 벗어나는 게 최고지.”

“스토킹한다는 소리를 참 저렴하게도 한다.”

“그게 왜 스토킹이야? 호위고 경호지.”

“지랄하네. 야, 무거워. 팔 치워.”

문화가 요한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꽉 끌어안고는 우는 아이 달래듯이 등을 토닥거렸다. 갑작스럽게 어린애 취급을 당한 요한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검사님 3개월 쉬게 됐다며.”

“징계를 휴가받은 것처럼 얘기하는 놈이 다 있네.”

“이왕 이렇게 되어 버린 거 어쩌겠어? 겸사겸사 푹 쉬는 거지. 응?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누가 이대로 있겠대? 좆같은 소리 할 거면 꺼지라고 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안 그럴게. 집에 가자.”

요한의 등을 두어 번 툭툭 더 친 문화가 일어나더니 요한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요한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떠한 반응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뚜벅뚜벅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 문화는 장신의 성인 남성을 한쪽 팔로 가뿐하게 받쳐 들고 차 문을 열었다.

요한을 조수석에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매 준 뒤에야 운전석에 올라탄 문화는 시동을 걸고도 한참을 출발하지 않았다.

“죽여 줄까?”

“누구를?”

“그냥, 뭐…… 검사님 괴롭히는 사람들?”

“드디어 자살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어?”

문화가 하하,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야, 이문화.”

“응.”

“돈 좀 줘.”

“얼마나?”

“우선은 3천만 원.”

“현금으로 주는 게 낫겠지?”

“왜 돈 달라고 하는지 안 물어봐?”

“검사님이 쓸데가 있으니까 달라고 하겠지.”

문화가 그 돈을 적선이라 생각해도 좋고, 손해배상금이라 생각해도 좋고, 하물며 화대라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요한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징계 취소 소청 심사 청구할 거야. 거기서 안 되면 행정 소송도 할 거야. 또 안 되면 대법원까지 갈 거고. 최소한 법원장 이상, 가능하면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 쓸 거니까 1억 넘게 들 거야. 네가 내. 안 갚을 거야. 갚을 능력도 없고. 그리고, 너도 사실관계 확인하는 데 협조해.”

“협조? 내가? 내가 밀고했다면서? 내가 밀고한 내용 사실은 조작이라고 양심선언하고 나는 감옥 가라고?”

정말로 나를 고발한 사람이 너라면 그렇게 어설프게 처리했을 리가 없지. 너였다면 징계 면직도 아니라 파면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꼼꼼하고 잔인하게 공작을 폈을 텐데. 연금도 박탈당하고 변호사도 개업도 할 수 없게, 그래서 비굴하게 너에게 얹혀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네가 안 했다며? 그러면 안 했다는 증거를 가져와야지.”

“했다는 증거도 아니고, 내가 안 했으니까 안 했다고 하는 건데…… 세상에 안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너 말고 다른 놈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으면 너는 아니라는 증거가 되잖아.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 하여간, 무식해서는.”

“아, 그러네.”

요한이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어디서 조그맣게 웃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이어 볼륨을 키운 휴대 전화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나왔다.

― 이게 다 다 강재섭 차장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이죠.

― 서 검사, 그새 말재간이 더 늘었어? 아, 그리고 이쪽 분은 서 검사 지인이시라고?

― 예. 안녕하십니까. 김종영이라고 합니다. 백호로지스틱스라는 작은 물류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음성 파일 재생을 중지한 요한이 휴대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문화를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뭐야, 이게?”

“최형서 부장, 강재섭 차장, 서정배 부장, 김동규 부장, 고태원 차장, 이현준 부장.”

“허…… 이걸로 뭐 하려고? 협박?”

“협박을 왜 해? 탄원서 받아야지. 서요한 검사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강직하고 청렴한 검사의 표본이다. 분명히 오해일 것이다. 모함일 수도 있다. 다시 수사해라.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제일 잘 아시는 분들이니까 흔쾌히 써 주시겠지.”

요한의 뻔뻔스러운 말에 문화가 헛웃음을 켰다.

“우리 서 검사님,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네. 그러다가 높으신 분들한테 미운털 더 박히면 어쩌려고 그래?”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어.”

“잘린 것도 아니잖아. 괜히 무리하지 말고…….”

새파랗게 날 선 눈빛이 문화를 꿰뚫을 것처럼 날아왔다.

“잘리지만 않으면 된 거야? 간당간당 목숨만 붙어서 구차하게 말단에 이름만 붙이고 살면 다냐고. 너나 그렇게 살아. 난 이따위 불명예 뒤집어쓰고는 절대 못 살아.”

“알았어. 알았어. 누가 검사님한테 작업 쳤는지 알아볼게. 대신에 이런 거 있다는 티는 내지 마. 그 늙은이들 탄원서 꼭 받아야 해? 그냥 없으면 안 되나? 검사님이 거기 찾아가면 저 양반들이 곧바로 누구한테 연락할 거 같아. 응? 알잖아.”

“모르는데.”

“세상 조폭들이 전부 나처럼 선량하고 이해심 많지 않아요. 사악하고 지독한 놈들이라고.”

“지랄하지 마, 미친 새끼야. 네가 제일 사악하고 제일 지독해. 너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내 신세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어. 전부 다 네가 뿌린 씨니까 독초인지 아닌지 네가 처먹어서 확인해.”

문화가 요한을 향해 멍한 눈을 들었다. 그는 망연히 요한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잘 벼린 칼 같은 요한의 모습에 문화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쾌감을 느꼈다.

요한의 그린 듯한 옆모습을 배경으로 차창 너머 우뚝 솟은 해송 군락이 보였다. 바닷바람에 구부러지고 뒤틀어졌음에도 나무의 뼈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문화는 요한과 소나무를 번갈아 보며, 그 사이의 짙은 남색 하늘과 거기 점점이 박힌 별을 보며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름답구나.

서요한은 아름답구나.

여름이 다 지나 슬슬 이파리가 하나둘 떨어지는 계절이 되었어도 혼자만 푸르른 요한의 모습에 핸들을 쥔 문화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 *

“어디 가십니까?”

“뭐야?”

“아, 사장님 지시로 경호를 맡게 된…….”

“안 물어봤어. 나가게 비켜.”

“오늘은 댁에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요한은 다짜고짜 앞을 막아선 덩치에게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나가는 데 네 허락이 필요할까?”

“사장님 지시입니다.”

“지랄 말라고 해. 따라오려면 따라오든지.”

“안 됩니다. 들어가십시오. 오늘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요한이 기세 좋게 성질을 부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가 움찔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어쩔 것이고, 또 모르면 어쩔 것인가. 말단 조폭 나부랭이 앞에서, 그것도 이문화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검사입네 하고 우쭐거리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다 싶어 요한은 살짝 부끄러워졌다.

“그게, 어느 분이신지……?”

“안 가르쳐 줘.”

“네?”

괜히 창피해져서 요한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벌게진 얼굴을 찬물로 식히느라 자신이 왜 나가려고 했는지, 그리고 이문화가 자신을 실질적으로 감금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요한은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흩뜨리며 거실로 나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빌어먹을 고급 소파는 몸을 던지듯이 앉았는데 먼지 한 톨 피어오르지 않았다. 허리와 등을 포근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가죽의 촉감도, 거실 전체에 뭉근하게 배어 있는 산뜻한 숲 냄새도 모조리 심기에 거슬렸다.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왜 눈을 뜨자마자 바깥에 나가려고 했는지 깨달았다. 담배가 없었다.

이문화는 피비린내 나는 깡패 주제에 지독하게 깔끔한 체를 하였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걸로 모자라 사무실이나 집 청소와 정돈에도 미친놈처럼 집착했다. 모든 물건은 반드시 제자리에 있어야 했고, 집기가 흐트러지거나 가구가 삐뚤어지게 놓여 있으면 눈에 뜨일 정도로 불편해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한다며 문화를 비웃었던 것도 잠깐, 요한의 명석한 두뇌는 문화의 결벽증적인 성미를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는 법을 금세 깨달았다. 그저 평소에 하던 대로 뒹굴어 다니기만 해도 이문화가 알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요한은 섬세한 외모와 다르게 태평하고 느슨한 생활 습관을 지녔는데, 이문화의 눈에는 나태하고 불결하게 보였던 듯하다.

문화가 틈만 나면 자신을 끌어안고 몸 여기저기에 입을 대는 것이 짜증이 난 요한이 “오늘 안 씻었는데.” 하며 몇 번 제동을 걸었더니, 이문화는 최소한 자는 사람을 건드리는 짓은 그만두었다. 대신에 직접 요한을 씻기기 시작했지만.

아무튼, 그런 이문화가 제일 못 견뎌 하는 것이 바로 요한의 흡연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요한은 그의 사무실이든 집이든 내키는 대로 담배를 피우고, 대리석 타일에 담뱃불을 눌러 끄고, 아무데나 담배꽁초를 버렸다.

이문화가 자신을 싫어하도록. 지긋지긋해하도록. 진저리나서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도록. 그래서 종래엔 자신을 버리도록.

지금까지는 속 얕은 수작이 딱히 유효타를 기록하지 못한 듯하지만, 요한은 믿었다. 고이고 쌓인 감정의 무게는 언젠가 사람을 바꾼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아, 머리 아파…… 잡놈 새끼, 아무거나 처먹이고 지랄이야…….”

문화가 바닷가로 데리러 왔을 때 살짝 노글노글해질 뻔한 요한의 마음은 그가 진통제인 것처럼 꾸며 건네준 약에 진정제와 수면제가 섞여 있었음을 알았을 때 다시 황야처럼 삭막해졌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쏟아져 눈을 감았는데, 요한이 눈을 뜬 곳은 으리으리한 이문화의 서울 아파트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깨끗하게 씻겨져 실내복으로 갈아입혀진 채 이문화의 거대한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이문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놈이었다.

요한의 의사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호의랍시고 내키는 대로 아무거나 요한에게 떠안겨 놓고는 요한이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요한이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이코패스 새끼.”

잠시나마 그에게 위로받았다고 생각한 자신마저 싫어질 정도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이문화는 경호라는 이름으로 현관 밖에 감시자를 세워 놓았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다니. 요한은 자신이 마치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죄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속에서 계속 쓴물이 올라오는지 입이 텁텁했다. 담배를 사러 가지 못하게 하니 담배 심부름이라도 시켜야겠다며 소파에서 일어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보안 요원이 24시간 지키는 아파트 로비를 지나 장승처럼 버티고 선 현관 가드를 패스해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이문화밖에 없을 터인데. 무슨 시답잖은 흉내를 내는 건지.

요한은 혀를 차며 벌떡 일어났다가, 정수리까지 치솟은 발 통증에 비틀거렸다. 그새 성질 급한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주인님, 어서 오세요.’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건가? 미친놈.”

아픈 발을 질질 끌고 너른 거실을 가로질러 중문을 열고 길고 긴 전실 복도를 걸어가 현관문 앞에 섰다. 이문화의 현관 전실만 해도 요한이 머물던 관사 안방보다 컸다.

“무식하게 크기만 해서는.”

그는 중얼중얼 혼잣말로 욕하며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네 집에 들어오면서 벨은 왜 눌러?”

“어. 저기. 이문화 사장님께 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요.”

어물어물하면서도 요한을 빤히 올려다보는 남자를 보며 요한의 눈가에 당혹과 낭패가 순서대로 떠올랐다 지워졌다. 그는 금세 말쑥해진 얼굴로 낯선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누구신지?”

“사장님이 가져오라 하신 물건이 있어서요.”

“이문화 지금 없습니다.”

“아, 예. 그럼 이것 좀 전해 주시겠어요?”

“제가 누구인지 아시고 이문화 물건을 전해 달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저는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물건은 맡아 두기 싫습니다.”

체구가 작고 소심하게 생긴 남자가 들고 온 커다란 상자의 내용물을 가늠하려는 듯, 요한이 눈을 기름하게 떴다.

“약이에요.”

“약?”

요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우듬히 기울였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이문화 이 미친 새끼가 이렇게 또 선을 넘네. 너 어디서 왔어?”

“네?”

“겁대가리가 없네. 너 어디 심부름으로 왔어? 이게 뭘 잘못 먹었나? 약을 그렇게 뻔뻔스럽게 들고 와?”

“심부름은 아니고요, 그냥 이문화 사장님 부탁받고 왔는데요.”

주눅 든 말투로 제 할 말을 다 하는 기묘한 남자의 대꾸에 요한이 미간을 좁혔다.

“누구 상대로 수작질이야?”

남자는 그런 요한을 보며 오히려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 모르세요?”

“내가 널 알아야겠어?”

“아, 맞다…… 모르시겠구나…….”

요한이 삐딱하게 대꾸하자마자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울리며 현관문이 열렸다. 문짝만 한 어깨를 향해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오, 검사님 깼어? 아! 진짜! 내가 보조대 없이 막 걸어 다니지 말랬지! 뼈 다시 부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요한이 성큼 문화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고 그를 채근했다.

“야, 이문화. 너 이거 뭐야? 약이라니 무슨 소리야!”

“사장님.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말씀하신 약 여기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불청객이 상자를 내려놓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어이, 어딜 가? 오늘 정맥 주사 놓는 거 가르쳐 준다며.”

“주사? 이문화 너 진짜 미쳤어? 저 사람 뭐야? 일반인 같은데? 너희는 상도덕도 없어? 일반인 빚 같은 거 씌워서 약 배달시키고 그래?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죽고 싶냐, 진짜?”

도망가려던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챈 문화가 어울리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일반인? 무슨 소리야? 검사님, 남 원장 몰라? 이거 사랑의원 남전원 원장이잖아. 왜 그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게 뭐야? 몰라.”

문화의 손아귀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온 남전원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연했다.

“당연히 모르죠…… 제정신으로 만난 적 없으니까…….”

“뭐? 너 이 새끼 이리 와. 이게 아까부터 진짜…….”

요한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문화는 “아, 그런가?” 하며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무슨 일 꾸미고 있어?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라. 죽기 싫으면.”

“그, 있잖아. 내 사무실 건물 1층이랑 2층에 있는 병원, 검사님도 거기 여러 번 신세 졌는데. 거기 의사 선생님이야. 내가 뭐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집에 오라고 했어. 남 원장, 내과라고 했나?”

“소화기 내과 전문의요.”

요한의 얼굴이 묘하게 찌그러졌다.

“의사시라고요? 병원 원장이 왜 이문화 심부름을 하세요? 뭐 약점 잡히신 거 있어요?”

문화가 끼어들었다.

“약점은 무슨? 검사님 눈에는 내가 남의 약점 잡아서 함부로 막 부려 먹는 사람으로 보여?”

“어.”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한 대답에 문화가 억울하다는 듯이 눈초리를 늘어뜨렸으나 요한은 문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기 들어 있는 게 약이라고 하셨죠. 상자 열어 보세요.”

“네? 별거 아니고 진짜 그냥 약인데요.”

“별거인지 아닌지는 제가 보고 판단합니다.”

쭈뼛거리며 문화의 눈치를 보던 남전원은 문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윗면을 봉했던 테이프를 떼어 냈다. 요한은 상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수액 파우치를 하나씩 꺼내 신중하게 살폈다.

“수액이에요?”

“네.”

“아무것도 안 섞인?”

“이거는 기초 수액이고요, 생리식염수에 포도당 섞인 거요. 이거는 영양 수액이에요. 비타민이랑 아미노산 들어 있는 거요.”

“진짜 일반의약품?”

“네.”

제일 위에 놓여 있던 수액 파우치를 전부 꺼낸 요한의 눈빛이 급격하게 날카로워졌다.

“남전원 원장님.”

“네?”

“이것도 뭔지 설명해 주셔야죠.”

“아…….”

요한이 덕용 포장된 플라스틱 약통을 하나씩 꺼내 라벨을 읽어 내리자 남전원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코데인, 옥시코돈, 펜타닐.”

“그게요…….”

“아편 계열 마약성 진통제네요? 처방전 어디 있어요? 보여 주세요.”

“처방전은 병원에…….”

요한은 계속해서 약상자를 뒤졌다. 작은 유리 앰풀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미다졸람, 로라제팜, 아리피프라졸? 마취제랑 진정제가 왜 필요해? 내과 의사라고 안 했어요? 뭐야, 플루마제닐이랑 날록손도 있네? 병 주고 약 주려고? 장난해? 졸피뎀? 돌았어?”

벌떡 일어난 요한이 사납게 으르렁대며 문화의 어깨를 떠밀었다.

“이문화가 시켰겠지. 애들 병원 보내서 가라 처방전 뗐어? 향정신성 약 모아서 뭐 하려고? 다른 게 마약인 줄 알아? 이게 마약이야, 이 새끼야. 너 이런 식으로 약 얼마나 빼돌렸어!”

항복한다는 듯이 양손을 번쩍 들고 요한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인 문화가 난감하게 웃었다.

“다 쓸 데가 있어서…….”

“또 누구를 약쟁이 만들어서 네 마음대로 굴리려고? 너나 이거 다 처먹고 뒤져. 너 하나만 죽어 자빠져도 대한민국이 10배는 안전해지겠다.”

“아니, 검사님 내 말 좀 들어 봐.”

“남전원 너도 의사라는 새끼가 깡패하…….”

요한을 덥석 가슴에 끌어안아 입을 막은 문화가 남전원에게 눈짓으로 신호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튀어 나갔다. 현관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문화가 요한을 놓아주었다.

“너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냐? 도덕이야 애초에 없던 놈이라 쳐도, 법도 우스워?”

“아니…… 맞아, 멀쩡한 애들 보내서 가라 처방전 끊은 건 맞아. 그래도 몰래 누구 먹이고 그러려고 약 타 온 건 아니야. 진짜야.”

“개가 똥을 끊지.”

“왜 모든 개가 똥을 먹는다고 생각해? 똥 안 먹는 개도 많다? 자꾸 이런 식으로 동물권 무시할 거야? 응?”

요한이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려는 문화의 팔목을 잡아챘다.

“정맥 주사는. 정맥 주사 놓을 일이 어디 있다고 정맥 주사야? 아예 본격 약쟁이로 갈아탄 거야? 뭔데?”

“수액 놓을 일 있을 때마다 남 원장 부를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수액 놓을 일이 어디 있냐고!”

“검사님이 수액 주사 자주 맞아.”

말문이 막힌 요한이 손아귀에 힘을 주어 문화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네가 마취제나 수면제 먹여서 나 기절시키니까 그렇잖아. 이 호로 새끼야. 너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하다니까 왜 안 죽어?”

“안 돼. 지금 나 죽으면 검사님 큰일 난다.”

“큰일 나겠지. 너무 좋아서 큰일 나겠지. 너 죽으면 내가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쌀 한 가마니 떡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 나눠 주고 부채춤 출 거다.”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그래. 나한테 죽지 말라고 했으면서. 나 죽으면 장례도 못 치르게 할 거라면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즐거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그대로 도려 내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자 요한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그래. 조폭 새끼한테 얹혀사는 부정부패 검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냐. 세상이 보기에는 너나 나나 똑같지.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린다고 그러겠네.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부패 검사 주제에 뭐 잘났다고 조폭 일에 참견이야. 예. 제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씨발 조폭 나리께서 인생을 화려하게 조져 버리신 바람에 나리님 댁 아니면 노숙인 쉼터 밖에 갈 데가 없거든요. 좆밥 새끼가 뭐 잘났다고 잘나신 조폭 나리 하시는 일에 훈수를 두겠어요.”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해?”

“예, 예.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나댔네요. 지금 검사도 아닌데 검사인 것처럼 윽박질러서 기분이 아주 나쁘셨나 봐요. 잘못했습니다, 예. 잘못했어요.”

“서요한!”

문화가 처음으로 요한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검사님이 아닌 요한의 이름을 부른 것도 처음이었다.

“왜, 개씨발 조폭님아! 이 좆같은 새끼야. 너 왜 나한테 소리 질러? 네가 뭔데 사람 가둬 놓고 나가지도 못하게 해, 개새끼야! 내가 우습지? 넌 내가 아주 존나 우스워서 죽겠지? 검사라고 잘난 척하던 놈이 좆도 없이 개털 되니까 좋아 죽겠지? 예, 좆도 없는 새끼가 나대서 죽을죄를 지었네요. 죄송해 죽겠습니다!”

발악하며 소리를 지르는 요한 앞에서 문화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요한에게 붙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아유, 시끄러우세요? 듣기 싫은 소리 해서 죄송하네요! 너 내 꼬라지 보기 싫어서 어떻게 참고 사니? 내 숨소리는 안 시끄러워? 차라리 죽이지그래. 네가 죽이기 싫으면 내가 알아서 죽을까? 내가 지금 여기 베란다 문 열고 뛰어내려서 죽으면 되겠어? 어? 그럼 나 그만 괴롭힐 거야? 내가 죽으면 만족하겠어?”

요한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낸 뒤 그의 두 손을 모아 잡은 문화가 허리를 굽혀 요한과 눈높이를 맞추고 달래듯 말했다.

“어이, 서요한 검사님. 잠깐만. 진정하고. 왜 이래, 응?”

“놔! 안 놔? 놓으라고! 너야말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네 부모라도 죽였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어떻게 해야 나 좀 가만히 둘 거야! 진짜 내가 죽어야겠어? 죽을까? 죽어? 죽어!”

순간, 요한이 휘청대며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깜짝 놀란 문화가 요한의 허리를 잡아 지탱하려 했으나 요한의 몸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아찔한 와중에 요한이 생각한 건 우습게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잠들어 있던 기간을 포함해 거의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바닥에 머리 너무 세게 부딪치면 안 되는데. 이문화 이 멍청한 자식아, 허리가 아니라 머리를 받쳐야지…… 머리 깨져서 너 같은 바보 되면 어쩔 거야…….

“어이, 검사님! 검사님?”

문화가 차가운 타일 바닥에 널브러진 요한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요한의 눈꺼풀이 슬쩍 올라가며 검은 눈동자가 문화를 쳐다보는가 싶었는데, 긴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리더니 눈이 도로 감겼다.

요한이 눈을 떴을 때 이문화는 바닥에 앉아 요한이 누워 있는 침대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잠들어 있었다. 현관에서 발광하다가 기력이 달려 혼절한 요한을 문화가 방까지 안고 와 침대에 눕힌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요한의 눈이 자신의 허리께에 머리를 묻은 이문화의 잘생긴 귀를 담았다.

문화의 시선은 언제나 요한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에 요한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 문화의 눈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문화의 정수리라든지 소용돌이 모양의 가마라든지 귀의 생김새 같은 건 볼일이 없었다.

이문화의 귓바퀴는 의외로 얇고 커브가 작은 데다 제일 위쪽이 고양이 귀처럼 뾰족했다. 귓불은 도톰하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넓어서 요한은 흔히 말하는 복귀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바로 이런 모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잘생긴 놈은 귀까지 잘생긴 것인가.

문화의 귀에 두 사람분의 1년 반 어치 기억이 배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밤의 마력인 걸까. 심지어 끔찍한 기억은 어디론가 안개처럼 사라지고 즐거웠던 추억만이 이문화의 귀의 곡선에, 둥근 귓바퀴에, 어두운 귓구멍에 조용히 그러나 생생하게 새겨져 요한을 불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요한은 이문화의 귀를 잡아 아주 세게 비틀었다.

“아, 아아아! 아파.”

문화가 격렬한 반응과 함께 깨어났다.

“좀 평범하게 깨우면 안 돼?”

“내 맘이야.”

“나는 검사님 큰일 난 줄 알고, 하, 진짜. 쓰러지려면 예고 좀 하고 쓰러지든가.”

“네가 죽으면 될 일이야.”

“검사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안 죽습니다.”

“네가 무슨 불사조라도 돼?”

“검사님 앞에서 변사하면 안 되지. 혹시라도 우리 서 검사님이 살인 혐의 쓰면 어떡해? 절대 안 될 일이야. 내가 갑자기 죽으면 아마 검사님이 제일 먼저 용의자 될걸.”

“웃기시네.”

문화가 조용히 일어나 불을 켜지 않고 창가로 다가갔다. 반투명한 속 커튼을 젖히고 환기창을 열었다.

안 그래도 조용한 동네의 고층 맨션 창밖은 한없이 고요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졸린 듯이 희미한 반달뿐, 별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하기 전, 1년 중 가장 산뜻한 계절이었다.

“혹시 내가 소리 질러서 그런 거야?”

요한이 갑자기 기절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냥 네가 살아 있어서 그래.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죽어 줄래?”

침묵이 흘렀다.

“약 먹여서 납치하고, 감금하고, 굶기고.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런가.”

“끔찍해.”

“아무리 끔찍해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낫지 않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데.”

“네 눈깔에는 내 사지가 멀쩡해 보여? 그것도 눈깔이라고.”

“검사님 새끼발가락이 조금 안 멀쩡하기는 하지.”

요한은 생각했다.

나는 그림자다. 죽을 만큼 싫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문화 옆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는 관념적으로는 존재하나 현실에는 없는 사람인 것으로 하자.

“너 반드시 후회할 거다.”

“글쎄?”

“내가 너 땅 치고 후회하게 만들 거야.”

문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의 힘은 그런 것이다. 어떤 형태로 꺼내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말이 향한 사람도, 말을 한 사람도. 어쩌면 후회하는 것은 요한일지도 모르지. 자신이 뱉은 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마. 기분 나빠.”

“나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는데?”

요한이 수수께끼 같은 얼굴로 문화를 건너다보았다. 맑은 피부 아래로 혈색이 은은하게 비치던 매끄러운 뺨은 해쓱해졌고, 보기 좋게 유연한 선을 그리던 몸은 안쓰러워 보일 만큼 깡말라 있었다. 그리고 문화는 요한의 암호를 해독할 수 없었다.

“네가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니, 너는 기분 나빠. 아주 기분 더러운데 지금은 그 말이 아니고…… 창가에 커튼…… 아, 모르겠어. 뭐지? 굉장히 소름 끼치는 기분인데…… 뭐지? 갑자기 뭐야, 이거…… 몰라. 기억 안 나. 머리 아파…….”

살랑살랑 흔들리는 커튼 앞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던 문화를 보며 나쁜 기억을 떠올린 듯했으나, 요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끄집어내지 못해 괴로워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몰라. 아무튼 창가에 서 있지 마. 토할 거 같아. 그게 이문화 너라서 더 불쾌해. 너는 그냥 존재 자체가 민폐야. 왜 사냐?”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도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문화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창가에 서 있는 게 습관인 사람하고 나쁜 일 있었어?”

“몰라.”

“검사님 일인데 본인이 모르면 어떡해?”

“야. 너 내 뒷조사했지? 가져와 봐. 나도 좀 보자.”

“하기는 했는데…… 검사님 연대기야 검사님이 제일 잘 알 텐데 그게 왜 궁금해?”

“내 신상 제대로 캤으면 내가 왜 내 뒷조사 자료를 궁금해하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요한의 단조로운 어조에는 자기가 모르는 자신이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던 소외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음. 열셋에 지금 집으로 입양되었고, 중고 안 다니고 검정고시 봤고, 열일곱에 대학 가서 스물셋에 검사 됐고, 대학 때 검사님 짝사랑하던 애들이 자꾸 가택 침입을 해서 다섯 번이나 이사했고, 연수원에서는 검사님 빠진 검사님 치정 사건 찐하게 두 번, 소소하게는 수도 없이 났고, 애인들은 전부 연상이었고, 검사 되고서는 정신 나간 참고인한테 2년 스토킹 당했고, 검찰청 직원이 사귀어 달라고 자살 소동 벌였고…… 엄청나게 화려하더라고? 또 뭐 있지?”

“개쓰레기 같은 것만 뒤졌네. 열세 살 전 자료는 없어?”

“보통 거기까지는 조사를 잘 안 하지?”

“도대체 쓸모가 없네.”

“왜? 어릴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예쁘고 귀여웠다고 자랑하는 거야?”

“열세 살 이전 기억이 없어. 엄마 돌아가셨을 때……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기억 상실이 온 것 같대. 두 달 넘게 입원 병동에서 치료받았는데 소용없었어. 하나도 생각 안 나. 지금도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냥 백지야.”

그것은 요한이 처음으로 타인에게 드러낸 연한 속살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문화에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말았다는 낭패가 창백한 얼굴에 잠시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요한은 다시 예의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문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에는 평소의 미움과 원망이 아닌 고독이나 쓸쓸함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너처럼 잔악무도한 인간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너도 아기 때는 귀여웠을 거고, 어린이 때는 기운만 넘쳐서 까불거리고 말 존나 안 들었겠지.”

“나는…….”

문화는 요한과 불과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마치 지구의 반대편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나는 아니야.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사람 같아. 13년이면 인생 거의 절반인데 나는 그 시간을 산 기억이 없어. 텅 비었어, 나는. 바닥이 없어서 아무것도 쌓이지 않아.”

“무서워?”

“무서운 게 아니라…… 말해도 넌 몰라. 그러다 보니 친구도 없고, 가족은 멀고…… 결국 교활한 이문화한테 속아서 탈탈 털렸지.”

문화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같지 않다. 서요한은 이문화를 이해할 수 없고, 이문화는 서요한을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이요. 착각인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을 되새겨 보았다.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숨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문화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도.

몸이 커지고 팔다리에 힘이 실리기를 기다리며 그는 희망의 힘으로 살았다. 비록 지금은 잘못 배달되어 버려진 택배처럼 살고 있지만, 그의 진짜 삶은 그따위 시궁창일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 희망으로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바라던 진짜 삶이 멀게나마 보였던 바로 그때, 문화는 그전까지 그를 구성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오기 하나만으로 되는 일도 없었다. 끊임없이 베고 혹은 베이던 와중에 마주친 서요한은 찬란한 불빛과도 같았다.

날카롭게 벼린 칼 같던 요한은 문화를 베는 대신 위안의 손을 내밀었고, 그 찬란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마음의 멍울이 조금씩 녹았다.

멍울이 흘러 나간 자리에 자리 잡은 것은 모호한 감정이었으며, 미련을 닮은 그 감정의 이름을 이문화는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바람직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반듯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놓치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붙잡고 싶고,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고 싶다면, 그 마음 역시…….

* * *

요한은 꿈결에 친모를 보았다. 아득하니 선명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사람이 친모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아마 요한이 실제로 겪었던 일이리라.

그는 여자의 등에 업혀 있었고, 여자는 요한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손으로 받치고 몸을 살짝살짝 들썩이며 작은 흔들림으로 어린아이를 즐겁게 했다.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자는 부드러운 곡조를 흥얼거렸다. 섬유 유연제 냄새가 향긋한 등판을 타고 여자의 노랫소리가 요한의 몸으로 울려 왔다.

이튿날 요한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친모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파편도 그대로 사라졌다. 잃은 기억을 엿보았다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기 아쉽지도 않았다. 요한은 그런 아침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구수한 냄새가 났다. 꾸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 요한은 비척비척 냄새를 따라 걸었다.

“커피 마실래? 아, 검사님 빈속이지. 빵 구워 줄까?”

“아니. 그거 맛있는 커피야?”

“당연하지.”

“맛없는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어쩌면 이문화보다 더 싫을지도 몰라.”

문화는 평소처럼 흐흐, 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능숙하게 커피를 내려 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요한에게 내밀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흡족한 듯 눈을 감고 커피를 홀짝이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나 술도 잘 말고 커피도 잘 내려. 액체는 다 잘 만드는 편이지.”

“그래. 마약도 잘 말고.”

“아, 왜 그래? 방금 분위기 좋았는데.”

“지랄 좀 하지 마. 너랑 나랑 같은 공간에 있으면 결코 분위기 좋을 수가 없어.”

“검사님 참 냉정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요한이 조금 전까지 잘 마시던 커피잔을 대리석 타일로 내던졌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검은 커피가 마치 흙탕물처럼 흰 바닥에 번졌다.

“뭐라고? 이 새끼야, 다시 말해 봐.”

“나 나름대로 검사님한테 잘하지 않아?”

“그래. 네 나름대로겠지. 내가 너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 있어? 어?”

“아, 서 검사님. 너무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고…….”

“검사님이라고 부르지 마, 씨발 새끼야. 너 나 놀려? 그 검사님 노릇 못 하게 만든 게 누군데!”

“검사님을 검사님이라고 하지, 그러면 뭐라고 불러?”

“그냥 아예 나를 부르지 마.”

새삼스럽게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요한은 문화의 말에서 느껴진 거슬거슬한 이물감을 더듬어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를 잡아냈다.

이문화가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서요한이 아니라 검사 서요한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돌이켜보면 어제 이문화가 요한에게 언성을 높인 이유도 요한이 자기는 검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비록 비아냥거림이었지만, 문화에게 존댓말을 쓰며 비굴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었다.

“변태 새끼.”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변태 새끼 자꾸 자극하지 마. 나 진짜 힘들게 참고 있으니까.”

“웃겨? 네가 뭘 참는데? 넌 네 꼴리는 대로 다 하잖아.”

“나 꼴리는 대로 다 했으면 검사님 구멍 초저녁에 망가졌어. 아, 저번에 검사님이 하도 해서 몇 번 헐었다고 했나? 그런 거 좋아하는데 내가 검사님 마음도 모르고 너무 살살 한 거였어? 진짜 나 꼴리는 대로 박아도 되나? 그런 거야?”

요한은 한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돌렸다.

“별 보러 갈래?”

뜬금없는 문화의 말에 요한이 찌푸린 얼굴로 문화를 쳐다보았다.

“뭐?”

“오늘 9시 반쯤 출발하면 될 거 같은데.”

요한이 대답하기 전에 문화가 먼저 말을 이었다.

“9시 반에 데리러 올게. 시간 맞춰서 나갈 준비하고 있어. 오늘도 밖에 나가지는 말고. 나중에 내가 데리고 나가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담배는 현관 앞 화장실에서만 피워. 욕실장 열어 보면 담배 있어. 거실에서 연기 나면 소방 알람 울린단 말이야. 또 내 속 긁는다고 일부러 거실에서 담배 피우다가 물벼락 맞지 말고. 이따 봐. 낮에 남전원 보낼 테니까 수액 맞으면서 낮잠 푹 자. 이상한 거 아니고 진짜로 영양 주사야. 내 말은 쥐똥으로도 안 듣는 거 아는데, 비타민이랑 아미노산 주사야. 검사님 너무 몸이 허약해졌대. 그리고 남전원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걔도 알고 보면 불쌍한 애야.”

“지랄도 가지가지 하시네.”

“별 보러 가는 거다? 알았지?”

자기 할 말이 끝난 이문화가 요한이 만들어 바닥 지옥을 대충 치우고 바람같이 나가 버렸다.

“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요한은 휴대 전화를 들고 톡톡 화면을 누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똘추 새끼, 날을 골라도.”

그날의 일기예보는 호우주의보였다.

* * *

정확도 92%에 빛나는 슈퍼컴퓨터 예보답게 오후 5시 즈음부터 가늘게 떨어지던 빗줄기는 8시가 넘어가면서 굵어지더니 약속한 9시 반에는 호우가 되었다. 문화는 억수로 흐려진 거실 창을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일단 나가자.”

“비가 이렇게 오는데 가기는 어디를 가?”

“빗소리 들으면서 우중 드라이브하는 거지. 별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가오 빠지게 비 온다고 집에 퍼져 있을 수는 없잖아. 별보다 더 재미있는 거 구경시켜 줄게.”

“재미있는 거?”

“오늘 내 밑천 탈탈 턴다. 내가 이렇게 검사님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어디 가?”

문화의 밑천이라는 말에 잠들어 있던 요한의 검사로서의 본능이 깨어났다.

요한은 문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발을 질질 끌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문화는 남이 용변 보는 와중에도 자기 할 말이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지라 일단 문부터 잠갔다.

“검사님! 앉아서 쉬해, 앉아서! 알지?”

“시끄러워! 앉아서 싸든 누워서 싸든 무슨 상관이야!”

“서서 싸면 정력 떨어진대! 전립선염 걸릴 확률 높아진다고! 내가 화장실 더러워지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검사님 건강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앉아서 싸고 있지?”

“세면대에 싸기 전에 좀 닥쳐!”

“아, 검사님! 진짜 자꾸 그러면 검사님 안아서 쉬 뉘어 주는 수가 있어?”

“꺼져, 이 미친놈아!”

요한은 문화의 시답잖은 시비에 일일이 반응하는 척하면서 휴대 전화에 이전에 중앙지검 수사관이 추천했던 달리기 앱을 깔았다.

GPS로 이동 경로를 추적해서 기록한다는 애플리케이션이었다.

비록 문화가 위치 추적 애플리케이션이나 휴대 전화 복제 프로그램 같은 건 깔지 않았다고 공언했지만, 요한은 믿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이 자는 틈에 문화가 멋대로 휴대 전화 잠금을 풀까 봐 지문이나 얼굴 인식 같은 생체 정보는 하나도 등록하지 않은 요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요한이 기댈 수 있는 ‘가오 빠지는’ 행동을 질색하는 이문화의 같잖은 체면이었다.

부디 그가 복제폰을 구질구질하니 격 떨어지는 짓이라고 치부했기를 절실히 바랐다.

“손 닦았어?”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이따위이니 도저히 곱게 보아 주려고 해도 그럴 도리가 없다. 요한은 젖은 손을 문화의 얼굴 가까이 올려 대고 탈탈 털어 그의 매끈한 낯짝에 물방울을 튕겼다.

“넌 내가 세균으로 보이냐?”

“아이, 설마.”

문화는 하얗고 고른 이를 씩 드러내며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그를 향해 마주 웃어 보이고 싶은 괴이한 충동과 문화의 시원스럽게 벌어진 입꼬리에다 양손 검지를 각각 걸어 그의 잘생긴 입술을 양옆으로 쭉 늘려 버리고 싶은 본능적인 충동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에 하던 대로 평범하게 짜증 난 얼굴로 대충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문화가 내민 겉옷을 받아 입었다. 옷감이 두꺼워졌다. 요한이 잠만 자던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는가 보다.

“돈 언제 줄 거야?”

요한은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다소 뾰족한 어투로 던졌다.

“아, 그거. 줄게. 줘야지.”

“얼른 줘. 이번 주에 변호사 선임할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

“시간 없어. 징계 처분 취소 받고 검찰청 돌아갈 거야.”

“검사님, 혹시 인감 있어?”

“없어.”

“왜 없어?”

“있겠냐? 내 집은커녕 전셋집도 없는데 인감 등록을 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있는 게 뭐야?”

요한이 온몸의 증오를 담아 문화를 쏘아보았다. 마치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어. 안 그래도 개털이었는데 네가 다 털어먹어서 이제는 쥐뿔도 없다. 왜. 불만이야?”

음절 하나하나에 강세를 두어 뚝뚝 씹어 끊듯이 말하는 요한에게 문화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불만은 무슨. 몰랐던 것도 아니고.”

“알면 묻지 마. 할 일 없나.”

요한이 문화를 계속 노려보았다. 이전의 송곳 같은 서요한이었더라면 시선만으로 문화를 산산조각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화의 무표정에 굳어 버린 것은 요한이었고, 요한에게 문화는 굳어 버린 자신을 단숨에 부숴 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따귀라도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요한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눈에 뭐가 들어간 척 눈을 비비며 쏘아붙였다.

“뭘 째려봐? 그렇게 봐도 너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서우라고 본 거 아닌데. 그냥 검사님 본 거야.”

“보지 마.”

“나 안 무서우면…….”

문화는 상체를 숙여 핸들 위에 엎드렸다. 팔 위에 머리를 올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 요한을 잠시 건너다보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 사랑하나?”

“개좆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짜증 나게.”

“사랑받거나, 혹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나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사랑해야지.”

요한이 킁, 코웃음을 쳤다.

“네가 마키아벨리냐?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와 뜻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지.”

“아, 예. 그러시군요. 아돌프 히틀러도 이문화 사장님과 뜻을 같이했지요. 두 분의 마지막도 똑같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자꾸 이럴 거야? 내가 검사님 깜짝 놀랄만한 정보 캐 왔는데. 영감, 아니 백태호 회장 말이야.”

“왜? 백태호가 뭐 했어?”

몸을 일으킨 문화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눈언저리에 장난기가 묻어 있는 웃음을 지었다.

“맨입으로 들으려고?”

“그 입에 주먹 떡 물려주기 전에 빨리 말해라.”

요한이 옴팡지게 쥔 주먹을 문화의 코앞에서 들이대며 으르렁댔다.

“백태호 집에 빈대가 너무 많더라고. 아, 생각만 해도 몸이 근질근질하다.”

“백호파 위계질서 개판이네. 오야붕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되냐?”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백태호를 백태호라고 하지 그러면 뭐라고 불러?”

“너 뽑아서 키운 게 백태호라고 들었는데. 사이 좋은 거 아니었어?”

“사이? 좋지. 너무 좋아서 내가 우리 회장님 하루라도 빨리 극락왕생시켜 드리려고 매일매일 애쓰는 중이지. 영감이 내 지극한 효심을 몰라 줘서 가슴이 아파.”

문화의 이야기를 들으며 요한은 휴대 전화 음성 녹음을 켜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문화가, 백호파의 2인자이자 백태호의 충실한 오른팔이라고 알려진 이문화가, 백태호의 사주를 받고 요한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한 이문화가, 요한의 인생을 결딴냄으로써 자신이 존경하는 회장님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킨 검사에게 복수한 것으로 생각했던 이문화가 백태호와 각을 세우든 말든, 어차피 의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을 세계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뒤통수 노리는 사이였든 말든, 극락왕생이고 나발이고 요한에게는 둘이 싸우다 둘 다 죽어 주면 제일 좋은 일이다 싶었지만, 아무튼 이문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치떴던 눈을 살짝 내리깔며 약간의 동정이나 공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네가 백태호 뒤통수 후려갈기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린다는 게 내가 깜짝 놀랄 만한 정보야?”

“그럴 리가 있나. 빈대 말이야, 빈대.”

“빈대가 뭐?”

“검사님이라면 빈대 퇴치 어떻게 할 것 같아? 화끈하게 초가삼간 홀랑 태울 거야?”

“일단 가재도구 다 들어내고 옷이랑 이불 빨아 넌 다음에 방 구석구석에 약 치고 집 밖에서 기다려야지. 초가지붕이랑 멍석도 갈 수 있으면 갈고.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전부 꺼내서 약 쳐서 볕에 말리고 계속 반복해서 해야지. 빈대 전부 다 죽을 때까지.”

“검사님 빈대 본 적 없지? 빈대 생각보다 잘 안 죽어. 장난 아니게 끈질기다고.”

“빈대보다 내가 더 훨씬 더 끈질겨.”

문화가 흥미로운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다가 컵 홀더에 꽂아 둔 생수병을 땄다. 뚜껑의 밀봉이 부서지는 빠각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문화는 생수병을 들어 입술에 댔다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생수병을 그대로 요한에게 건넸다.

“마실래?”

요한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화와 생수병을 번갈아 흘겨보다가 못 이긴 척 생수병을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문화는 요한이 고개를 살짝 뒤로 꺾은 바람에 한층 길어진 목과 도드라진 울대뼈를 바라보다가 요한의 젖은 입술을 엄지로 훑어 내더니 손가락에 묻은 물방울을 쪽 소리 나게 빨았다.

그는 곧장 요한이 곧장 주먹을 날릴 거라 예상하고 상체를 뒤로 쭉 물렸다.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요한이 펄펄 뛰기를 기다렸지만, 막상 요한이 문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자 머쓱하게 큼큼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비 좀 잦아든 것 같은데.”

약간 잠긴 목소리로 요한이 말했다. 그 말에 문화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축축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은밀한 밤 나들이를 위해 일부러 수배한 보급형 국산 차는 문화가 원래 몰고 다니던 최고급 외제 차에 비하면 비좁았고, 거구의 문화와 장신의 요한이 나란히 앉으니 어깨가 닿을락 말락 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러나 요한은 딱히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안 가?”

요한은 눅눅하게 들러붙은 냉기를 털어 내려는 듯이 양손을 교차해 어깨와 팔뚝을 쓸어내리며 문화를 재촉했다.

이상하게 침착한 요한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문화는 “가야지, 가자.” 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서울을 빠져나온 뒤로는 자동차 전조등 외에 아무 불빛도 없어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도로를 따라 30분 넘게 달렸다.

포장 상태가 엉망인지 타이어 아래로는 돌이 달각거렸고 길이 팬 자리에 생긴 물웅덩이를 밟으면 차가 덜컹 흔들리며 철퍽 물이 거세게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마다 요한은 마치 자신이 발을 헛디디고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움찔움찔했다.

“야. 너 혹시…… 드디어 나 어디 묻어 버리기로 했어?”

“묻어? 무슨 소리?”

“그러면 왜 이런 데로 데려오는데?”

문화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요한을 흘끔거리다가 양쪽 허벅지 위에 각각 놓인 흰 주먹을 보았다.

요한이 분위기 전환용으로 실없는 소리를 한 것도, 농담을 한 것도 아니라 진심으로 문화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긴장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나 하나도 안 무섭다면서. 사랑이랑 두려움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니까 기어코 고른 게 그쪽이야? 그렇게 내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이 엉키고 뒤섞여 굉장히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내 밑천 턴댔지 검사님 밑천 턴댔어? 사람을 뭐로 보고.”

“이문화로 보니까 그렇지.”

맥이 풀린 듯 요한의 목소리가 살짝 느슨해졌다. 마찬가지로 느슨하게 풀어진 하얀 손을 보자 문화의 마음이 한층 더 어수선해졌다.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푸르스름한 전조등 빛으로 어둠을 누르며 산길을 끝까지 올라 차가 섰다. 언덕 아래로 트럭이며 버스부터 온갖 종류의 자동차로 꽉 들어찬 주차장이 보였다.

“여기야?”

“아니. 길을 잘못 들었어. 차 좀 돌릴게.”

문화는 후방 카메라를 보는 대신 조수석 헤드레스트를 붙잡고 몸을 틀어 직접 뒤를 확인하며 핸들을 돌렸다.

창문에 바짝 붙어 산 아래의 기묘한 주차장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헤드레스트에서 손을 뗀 문화가 자신의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내리자 그를 향해 못마땅하게 눈을 흘겼는데, 그 순간 목덜미가 뜨끔했다.

불에 덴 듯한 아픔에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 쥐고 문화를 노려보자 문화는 요한의 뒤통수를 만졌던 손을 허공에 탈탈 털며 호들갑스럽게 사과했다.

“아이구, 미안. 날도 습한데 무슨 정전기지. 우리가 불꽃 튀는 사이라는 거 굳이 증명 안 해 줘도 되는데 말이야.”

“전기구이 통닭으로 만들기 전에 닥쳐.”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신이 난 문화는 연신 흥흥거리며 언덕 위에서 보았던 주차장 앞으로 요한을 이끌었다.

“여기. 내 밑천 중 하나야.”

“이게? 어, 아니…… 여기 주차장 아닌 거 같은데. 차들이 다 썩었어. 야적장인가? 고철 수집해?”

“고철이라니. 멀쩡하게 잘 굴러가는 차들인데 너무하네. 야적장 맞아. 수출용 중고차 야적장.”

“양심 있냐? 이런 차를 수출한다고?”

“그래도 아프리카나 서남아 가면 귀한 취급 받는다? 이 정도면 상태 좋은 편이야. 더 낡고 오래된 차 수출하는 업체도 많아. 사실 중고차 수출은 백 회장도 아는 사업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내 밑천이라고까지 하기는 좀 어렵겠다.”

“그럼?”

“내 진짜 밑천은 저기.”

문화의 검지가 가리킨 방향에는 시커먼 어둠 덩어리밖에 없었다.

“뭐가 있다는 거야.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나의 마음?”

“시커멓고 음습한 게 딱 맞긴 하네.”

“아, 왜 그래. 내가 진짜 비장의 패 까서 보여 주는 건데. 검사님 심심하다고 해서 목숨 걸고 재롱떠는 거다?”

“어차피 범죄 소굴이겠지.”

“우리 엘리트 검사님은 그런 범죄 소굴 직접 본 적은 없을 거 아니야. 신기할걸? 바로 요 앞이니까 걸어가자.”

요한은 자신의 손가락만큼이나 굵은 철사로 촘촘하게 엮어 세운 높은 울타리와 꼭대기에 달린 흉악한 방범용 철조망을 올려다보면서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묻는 듯한 평이한 말투로 물었다.

“뺑소니나 사고 차 받아서 폐차 번호판이랑 갈아 끼워서 깡통 차 만들어 팔고, 폐차는 서류 처리만 하고 중고차로 바꿔치기해서 수출하는 거지?”

“척척박사네.”

“그게 다일 리가 없지. 또 뭐 하냐?”

“글쎄?”

“내 차도 여기서 폐차했어?”

“어, 음…… 아마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도는 뭐야.”

문화는 의뭉스러운 눈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요한은 네모난 무설탕 껌을 나란히 세워 둔 것처럼 하얗고 반듯한 이문화의 치열을 보며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새 차는 아마도 가짜 번호판을 달고 뺑소니로 위장한 살인에 동원되었거나 마약 운반용으로 쓰이다가 바다 건너로 팔려가 열사의 도로를 달리고 있겠구나 짐작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범죄가 이곳에서, 또는 이곳을 통해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범죄에 무뎌진 건지, 이문화에 익숙해진 건지.

요한은 차들의 무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산처럼 쌓인 타이어와 옆면에 페인트 스프레이로 숫자가 갈겨 써진 승용차의 뼈대와 납작하게 눌린 과거 자동차였을 고철 더미와 나사며 플라스틱과 금속 조각, 부서진 유리창 같은 쓰레기를 유심히 살폈다.

“이문화 너 진짜 겁도 없다.”

“이 정도 깡도 없으면 깡패 노릇 못하지.”

“그런 뜻이 아니고. 저기 중고차 야적장, 백태호 허락받고 하는 거라면서. 어떻게 그 바로 코앞에 폐차장을 둘 생각을 하냐. 겁대가리가 없는 건가, 아니면 백태호 끗발이 다 해서 이문화한테 좆밥 취급을 받는 건가.”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하잖아. 이렇게 대놓고 영업하는데 설마 하겠지. 의심해도 어쩔 수 없고.”

“다 죽이면 되니까?”

“그렇지.”

“이 새끼가 검사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좀 봐줘라. 배운 거 없는 깡패 새끼가 이런 거라도 있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풀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바닥에 낮게 깔려 있던 매캐한 고무 탄내와 녹슨 금속의 비린내, 출처를 알 수 없는 곰팡내와 기름 냄새가 두 사람이 바각바각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걸을 때마다 구두 코에 채여 둥둥 떠올랐다.

악취에 코가 매운지 요한이 콧등을 연신 찡긋거렸다.

문화는 마치 배냇짓 하는 갓난아이처럼 쉴 새 없이 표정이 바뀌는 화려한 얼굴을 훔쳐보다가 요한과 눈이 마주치기 직전에 겨우 그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그러나 군데군데 남아 있는 짙은 구름 때문인지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드문드문 켜진 방범등이며 CCTV의 빨간 불빛을 보던 문화는 언젠가 요한과 둘이 바라보았던 간판과 네온사인의 밤 품격을 떠올렸다. 야경의 상스러운 하위 호환이라며 요한이 웃었던 기억도 났다.

“검사님 별 보여 드리겠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약속을 못 지켰네.”

“너 그거 아냐?”

“응?”

“아무렇지도 않게 옛날에 네가 사기 치던 시절 이야기할 때, 너 진짜 미친 사이코패스 같아.”

“언제는 소시오패스라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그렇게 많다더라. 그런 면에서 너는 크게 성공하겠어.”

“응원 고마워. 재벌 되어서 검사님 제대로 호강시켜 줄게. 한 달에 1억씩 쓰게 해 주면 되나?”

“그렇게 돈만 밝히고 살면 인생이 지겹지 않냐?”

“내가 언제 돈만 밝혔어? 나 검사님도 밝히잖아.”

문화와 다르게 요한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나 출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가끔은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인간적인 욕구를 꾹꾹 눌러 둔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요한의 결벽함에는 어딘가 병적인 구석이 있었고, 만약 요한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런 기질 때문일 거라고 문화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물론 요한의 태연무심한 태도는 문화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었기에 언제 보아도 황홀했지만, 하필이면 요한이 그런 공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아름다움은 요한의 것이어서는 안 됐다. 분명 훼손되어 버릴 테니까.

“그따위로 살면 짐승이랑 뭐가 다르냐.”

“사람도 엄밀히 말하면 짐승인데 뭐 어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짐승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가.”

“이유가 꼭 있어야 해?”

“짐승만도 못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있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며. 어차피 사후세계는 망했으니까 지금이라도 신나게 살아야 지옥에서 굴러도 억울하지 않지.”

“그거 아니야.”

“뭐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말, 그거 부자는 전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라 욕심 적당히 부리라는 뜻이라고. 옛날 예루살렘 성벽에 짐승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는데 그 문 이름이 바늘귀였어. 바늘귀처럼 생긴 문이었다니까 아마 좁고 길쭉했겠지? 낙타에 너무 짐을 많이 실으면 바늘귀에 걸려서 성안으로 못 들어갔어. 부자도 천국에는 갈 수 있지. 과욕만 안 부리면. 너는 어차피 그거 말고도 죄를 많이 지어서 천국 가기는 글렀으니까 막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그런 거 되게 잘 아네.”

“내 이름꼴을 봐라.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검사님 이름 성경에서 따 온 거였어?”

“당연히 뻥이지. 그걸 믿냐?”

요한은 바늘귀라는 문이 있었다는 말이 거짓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묵시록의 그 요한이라는 말이 거짓인지 제대로 말하지 않고 발을 재게 놀려 문화를 앞질렀다.

요한이 긴 다리를 성큼성큼 놀릴 때마다 은근히 드러나는 늘씬한 다리 윤곽을 진득하게 눈에 담으며 문화는 느긋하게 폐차장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너무 졸리는데.”

차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얼른 오라며 손짓하는 요한을 못 이긴 문화는 결국 차까지 뛰어왔다.

잠금 해제 소리가 나자마자 성급하게 조수석에 올라앉은 요한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오싹오싹할 정도로 야했다.

“피곤하면 집에 갈까?”

“아니? 오늘 너 밑천 다 깐다며. 네 비밀 사업 다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검찰 복귀 기념으로 전부 압수 수색 해서 이문화 무기 징역 때려야지. 빨리 가자. 다음은 뭔데.”

“조폭 새끼 먹고 살게 좀 봐 달라니까. 사람이 정이 없어.”

“정으로 돌대가리 쪼개는 소리 하지 말고. 나 눈 따가워서 잠깐 눈 감고 있을 테니까 좀 떠들어 봐. 사업 이야기든, 백태호 이야기든.”

시트를 뒤로 젖히고 몇 번 꿈틀거리며 편한 자세를 잡은 요한이 팔짱을 끼고는 문화에게 가진 패를 전부 까 보이라며 닦달해 댔다.

역시 겁먹은 요한보다는 남을 턱짓으로 부려 먹는 요한이 백 배는 좋다고 생각하면서, 문화는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냉동 창고와 수산물 가공 공장, 그리고 탐지선, 포획선, 냉동 운반선으로 이루어진 원양 어선 선단에 관해 설명했다.

혹시 잠들었나 싶어 말을 멈추면 요한은 언제 졸았냐는 듯이 “그래서?” 하며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요한이 정말로 자신의 설명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문화의 목소리를 화이트 노이즈 삼아 자는 건지 궁금해서 아무 상관 없는 말을 주절거렸더니 요한이 “말 똑바로 안 할래?” 하며 벌떡 일어나 어깨와 팔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바람에 문화는 30분 넘게 백태호 눈을 피해 위장 사업체를 세운 비결까지 탈탈 털었다.

“냉동고가 영하 19도쯤 되거든. 냉동 창고는 보통 영하 38도에서 40도가 많고, 요새는 영하 70도 창고도 조금씩 늘고 있어.”

“백호로지스틱스가 냉장, 냉동 운송 전문이지. 거기 창고 많겠네. 빼돌린 거야?”

“그걸 다 기억해? 대체 머리가 얼마나 좋은 거야?”

“됐고. 너 영하 70도 창고 몇 개나 있어?”

요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문화를 올려다보았다. 문화는 산들산들 흔들리는 긴 속눈썹을 향해 씩 웃었다.

“없다고 해도 안 믿을 거지? 몇 개 없어. 진짜야. 영하 70도 창고는 투자 단위가 좀 달라서 자본이 딸려. LNG 운송선 들어가는 단열재랑 같은 거 써야 해서. 무지 비싸. 영하 70도는 거의 의약품 전용 창고인데, 엄청 비싼 항암제 같은 거…… 알지? 요새 창고 용량이 수요 못 따라가거든. 전망이 되게 좋아. 검사님, 어디 조선소나 대기업 바이오 회사 연결 좀 해 줄 수 없어?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하려면 조 단위는 투자받아야 하는데.”

“있는 거나 제대로 해.”

“냉정하다니까. 아, 맞다. 참치 좋아해?”

“없어서 못 먹지.”

“참치 들어오면 구경시켜 줄게.

“참치?”

“수산물 가공 회사 있다고 했잖아. 원양 어선 선단부터 냉동 창고까지 수직 계열화했지.”

“하여간 주워들은 건 많다니까.”

“어디서 들었겠어. 전부 우리 특수통 엘리트 서요한 검사님한테 배운 거지.”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요한의 얼굴을 룸미러로 확인한 문화가 마치 요한을 달래려는 듯이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YH야.”

“뭐가.”

“회사 이름이 YH물산이라고.”

“근데 뭐…… 아, 설마…….”

문화는 “딩동댕, 정답입니다!” 하고 외치고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 정도면 내 사랑이 좀 전해졌나? 명의도 검사님 앞으로 돌려줄까?”

잠깐 눈 감고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갈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며 까무러지는 기분에 요한이 등받이를 바로 세우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옆에서 방정맞게 떠들어 대는 이문화를 애써 무시하며 망할 놈의 YH물산에 생각을 집중했다.

“야! 입 좀 가만…….”

“여기가 YH물산 냉동 창고 1호야.”

“1호? 2호도 있어?”

“1호는 자체 물류용. 2호는 항구에 있고, 3호는 공장 옆에. 1, 2, 3호는 영하 40도고 4호, 5호가 영하 70도. 4호랑 5호는 대기업 사외 하청.”

“공장은 어디야?”

“공장까지 까라고?”

“밑천 다 턴다며?”

“정말로 한 방에 다 벗겨 먹으려고 할 줄은 몰랐지. 이야, 우리 서 검사님 진짜 벗기는 데 소질 있네. 이따 집에 가서 내 옷도 홀딱 벗겨 줘.”

“너, 이 씨…….”

“알았어, 알았어. 미안. 명교산업단지 알아?”

“녹산항 옆에 있는 거? 대양제분하고 삼원참치 있는?”

“응. 거기.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주무시죠.”

안 그래도 정신이 있다가 없다가 하던 참이었다. 요한은 시트를 뒤로 쭉 빼고는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넘겨 거의 눕다시피 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악랄한 변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순간 스쳤지만, 이상하게 무거운 육신이 중력에 끌리는 힘이 더 강했다.

어리어리 잠이 들려는 몸을 입 안쪽 살을 씹어 가며 깨웠다. 분명 불법 반에 탈법 반으로 남의 회사를 빼앗았을 것이다.

처음 손을 댄 회사는 어디였을까.

유동성 안 좋은 회사에 투자 명목으로 돈 태워 임원 꽂아 넣고, 핵심 인력 회유해서 조직적으로 횡령하고, 계약 뒤로 돌려서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쥐어짠 다음에 돈 갚으라고 협박했겠지.

원래 사장은 살아 있기나 할까…….

가물가물하는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입술을 깨무는 요한을 내려다보던 문화가 푸스스 웃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주사기를 꺼내 들고 몸을 숙여 요한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미안해. 나도 살아야지.”

완전히 까부라진 요한의 꺾인 고개를 조심스럽게 고쳐 세운 문화는 썩은 고구마 같은 얼굴로 서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 * *

차가운 손이 펄펄 끓어오르는 뺨을 식혀 주었다. 고열로 흐려진 눈을 억지로 뜨고 이마를 짚어 주는 다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꼭 닮은 까만 눈동자가 요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까만색은 어둠처럼 차갑지 않았다. 밤처럼 무섭지 않았다. 요한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위로해 주는 까만색이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 많이 자야 빨리 낫는데.」

「나는 언제 첫영성체 받을 수 있어?」

조용히 요한을 어루만지는 손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손가락 마디마다 묻어 있었다.

「응? 나도 복사하고 싶어.」

사리문 입술이 잘게 떨렸다. 차마 입술을 떼지도 못한 채 입꼬리만 끌어올려 힘겨운 웃음을 띤 앳된 얼굴을 향해 요한이 순진한 목소리로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후레자식이 뭐야?」

「요한아.」

요한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 가늘고 부드러웠다.

「나는 후레자식이라서 세례 못 받는대.」

「요한이 이름이 무슨 뜻이게?」

「세례 못 받으면 지옥 가는데.」

「하느님은 사랑이 아주 많으시다는 뜻이야.」

「나 세례 못 받았는데. 그럼 나 죽으면 지옥 가?」

「요한이가 있는 곳이 천국이야.」

계속해서 어긋나는 대화에 요한이 결국 콧등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왜 자꾸 내가 모르는 말만 해!」

「요한이는 하느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야.」

요한은 정말이지 좆같은 꿈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벌겋게 달아오른 무쇠 가마 앞이었다.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불길이 그의 유일한 혈육을 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또 다른 꿈속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커튼 봉에 목을 매달아 창가에서 흔들거리던 모친의 시체를 발견한 열세 살 아이는 제 손으로 119를 불렀다.

떨지도 않고 또박또박 주소를 알려 준 뒤에 구급차가 도착하자 현관문을 열어 준 아이는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온 구급대원의 품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일주일 뒤 눈을 뜬 아이는 백지가 되어 있었다.

요한은 그를 낳고 13년을 키워 준 이가 재가 되었는지 땅에 묻혀 백골이 되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의대에 기증되었는지 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그 순간은 좆같은 꿈일 수밖에 없었다.

신 따위에게 사랑받는다고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어쩌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요한을 사랑했을지도 모르나, 자비 없는 세상은 요한을 사랑하지 않았다.

요한은 너무 억울해서, 너무나도 분해서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싶었다.

나를 낳은 당신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세상의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냐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런 것이 사랑일 리가 없다고.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건 후레자식이라 세례를 받지 못한 요한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린 탓에 고해성사를 하지 못한 그의 모친도 분명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혹시 지옥에서 아들을 기다리려던 것일까.

그랬을 리가. 그저 자비 없는 세상을 견딜 만큼 요한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내가 사랑해.”

거짓말.

“진짜야. 내가 검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마를 쓸어 주는 따뜻하고 건조한 손에 요한이 비로소 긴 꿈에서 깼다.

“안녕?”

어둠처럼 새까만 눈이 아닌,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산들산들 바람이 불 때마다 싱그러운 흙냄새가 피어오르는 생명력 가득한 땅을 닮은 녹갈색 눈동자가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문화.”

“응?”

“너, 큼, 은.”

목구멍이 말라붙어 연신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던 요한은 문화가 건넨 물잔을 끝까지 비우고서야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해?”

“서요한 검사님?”

“아니. 나에 대한 사실 말고 너의 생각 말이야. 느낌이나 감상, 그런 거.”

“고양이?”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요한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반대편으로 돌아눕자 문화가 요한의 몸을 타고 넘어가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불법 브리더가 몇 대나 혈통 엄격하게 관리해서 드디어 만들어 낸 궁극의 고양이인데, 브리더가 무슨 무슨 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하는 틈에 서요한 고양이가 번식 공장을 탈출한 거야. 워낙에 완벽한 고양이라서 머리도 비상하게 좋거든. 우리 서요한 고양이는.”

“씹…… 그만해라?”

“들어 봐. 처음에는 고생을 좀 해. 근데 서요한 고양이는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싸움도 잘해서 금방 스트리트 파이터 킹 먹는 거지. 그러다가 어느 비 많이 오던 날에 어미가 버린 새끼 고양이 구하려다가 서요한 고양이가 차에 치일 뻔했어. 다행히 사고는 안 났어. 차 주인이 우산도 없이 허겁지겁 뛰어내렸는데 놀라서 빡친 서요한 고양이가 달려들어서 모가지 콱 물고 얼굴 다 긁어 버리고, 아주 복수를 끝내주게 해. 근데 차 주인이 예쁘고 강하고 박력 넘치는 서요한 고양이한테 홀딱 반한 거야.”

“쌍팔 년도 주간지 야설 도입부 같은 소리 작작 해라. 하. 너한테 뭘 바라냐.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쓰다듬으려고 하면 할퀴고, 밥 먹으라고 하면 밥그릇 엎어 버리고, 씻으라고 하면 도망쳐서 숨고, 앞에서 장난감 흔들면 꺼지라고 하악질 하고. 그런데 그렇다고 진짜 꺼지면 애옹애옹 울고 난리가 나요.”

“염병…….”

그때 문화가 요한의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봐. 코 분홍색 됐다. 분홍 코 고양이.”

“서른 살 먹은 남자한테 무슨 개소리야. 토할 거 같으니까 닥쳐.”

이번에는 양손으로 요한의 뺨을 잡고 정수리를 콱 깨물었다.

“아! 씨발, 아파! 미친놈 아니야, 이거. 진짜…….”

“옛날부터 고양이 키우고 싶었거든. 근데 고양이는 너무 조그맣잖아. 어디 망가질까 봐 함부로 만질 수도 없고…… 그래서 고양이 노는 거 구경만 했어. 저번에 마 부장이 수금하러 갔다가 되게 비싼 황금색 물고기를 압수해 왔는데, 아로니아였나 아로시아였나…… 아무튼, 사무실에서 키우기로 하고 이름을 고양이라고 지어 줬는데…….”

요한이 참지 못하고 큽 하며 웃어 버렸다.

“예전에 애들 기강 잡다가 야구 배트로 어항을 깨뜨려서…….”

“죽었어?”

“안 죽었어. 마 부장이 자기 집에 데리고 갔어.”

문화가 요한을 잡아당겨 품에 가두고는 세게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문화의 맨 가슴에 얼굴을 처박게 된 요한은 나무 덩굴처럼 자신을 동여맨 문화의 팔 안에서 거세게 몸부림쳤다.

“미친, 하…… 숨 막혀서 죽을 뻔했잖아.”

“커다란 고양이 진짜 좋다. 끌어안을 수도 있고.”

“아, 비켜! 개새끼야, 숨 막힌다니까!”

“나 개 맞는 거 같다. 검사님이 오라고 하면 신난다고 꼬리 흔들면서 뛰어오고, 쓰다듬어 주면 좋아서 미쳐 날뛰고.”

문화는 요한을 꽉 조여 안았던 팔을 헐겁게 풀고 땀에 젖은 앞머리가 몇 가닥 붙어 있는 흰 이마에 깃털처럼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요한은 처음으로 이문화가 짜증 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나눈 그 대화가, 한 명은 잠이 덜 깨서 현실과 꿈을 혼동하며 속말인지 혼잣말인지를 주절거리고 다른 한 명은 부끄러움도 없이 유치한 망상을 나불거리는 그 괴이한 대화가 그냥 평범한 일상의 조각처럼 느껴졌다.

그럼으로써 요한은 깨닫고 만 것이다.

자신을 농락하고, 강간했으며, 약을 먹였을 뿐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검사라는 오욕을 뒤집어씌운 이 남자를 온전히 미워하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요한은 문화를 증오했다. 그리고 문화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어넘겼다. 그는 문화에게 던지는 사나운 욕설이나 신경질적인 대답으로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일까. 어째서 날카로운 심지가 부러진 것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이문화가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고 그런 태도를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문득 마음이 착잡했다.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요한은 솟아오르는 자기혐오를 억누르려 매우 노력했다. 그는 양손으로 문화의 가슴을 밀어내며 꺼지라고 말했다.

“잘 거야.”

“그렇게 자고 또 자? 배 안 고파? 애들 시켜서 먹을 거 사다 놓을까? 뭐 먹고 싶어?”

“됐고, 내가 받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네 부고장. 나 자는 사이에 죽어서 일어났을 때 부고장 받게 해 주면 진짜 기쁠 것 같다.”

“농담도 잘해.”

문화는 쾌활하게 웃으며 요한의 등뼈가 부서질 만큼 세게 껴안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벗고 잤는지 거대한 살덩이가 딱 요한의 눈높이에서 께름칙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기에 요한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것으로 이문화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했다.

문화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어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요한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이불에서 기어 나왔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지나 있었다.

흠뻑 젖은 잠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감촉이 마치 끈질기게 따라붙는 악몽처럼 느껴져서 재빨리 욕실로 뛰어가 찬물을 뒤집어썼다.

피부에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냉수마찰을 하다가 보라색이 된 발톱을 보고야 욕실에서 나와 도톰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다.

식탁 위에는 이문화가 부하를 시켜 사 오게 했을 것이 분명한 샌드위치와 다 식은 테이크아웃 커피가 있었다.

요한은 기계적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파삭파삭 부서지는 바게트를 씹으며 전날 밤의 기억을 반추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중고차 야적장과 폐차장이 전부였다. 이문화가 참치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것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기는 하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 혹은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언덕으로 차를 몰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며 차를 돌렸을 때, 목덜미가 불에 덴 듯 뜨끔했던 생각이 났다. 이문화는 정전기라고 둘러 댔지만 약을 썼던 것이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의 기억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는데 두통은 전혀 없었다. 요한은 입술에 묻은 빵가루를 혀로 핥아 지우며 그 집에 들어온 다음 날 남전원이 들고 왔던 약상자를 떠올렸다.

“펜타닐이랑 미다졸람…… 이 새끼가 진짜…….”

출발하기 전 주차장에서 문화가 마시려다가 요한에게 준 생수병도 분명 수작을 부린 물건이었을 것이다. 마개가 부서지는 소리에 안심했던 자신이 안일했다.

아마도 그 생수병에는 펜타닐이 섞여 있었으리라. 펜타닐 약효가 들 즈음해서 첫 번째 약을 주사했을 것이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문화가 요한에게 두 번째 미다졸람을 주사함으로써 그가 당당하게 까 보인 밑천은 다시 미지의 영역으로 사라졌다.

요한은 휴대 전화를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드러누워 달리기 앱이 기록한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른 곳이 빨간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기억이 사라진 요한으로서는 어떤 곳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서요한 아직 안 죽었다. 이문화 개씨발 놈아.”

“집사님 오셨다.”

요한은 큰소리로 귀가를 외치며 들어온 문화를 본체만체하고는 소파에 드러누워 등받이에 한쪽 다리를 척 걸쳐 올린 방만한 자세로 휴대 전화만 들여다보았다.

문화의 눈에는 소파와 똑같은 아이보리색 스웨터에 흰 바지를 입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딴청을 피우는 요한이 정말로 커다란 고양이처럼 보였다.

“캔 따줄 때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지. 매정한 서요한 고양이. 캔 따개 서럽다.”

“지랄 스톱.”

“오늘 뭐 먹었어?”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깝다는 듯 싱크대에서 급하게 손만 씻은 문화가 기어코 요한의 머리맡으로 비집고 들어와 보드라운 귀며 새하얀 뺨을 지분거렸다.

“꺼져.”

“오늘 서요한 고양이가 환장하고 좋아할 만한 특식 캔 가져왔는데.”

“지랄 스톱이라고 했다. 인간 새끼가 아니라서 그런가. 낫살 처먹을 만큼 처먹은 놈이 수치심이 없어.”

“매정하게 그러지 말고 야옹 한 번만 해 줘.”

“멍멍! 됐냐?”

고양이 소리를 흉내 내 달라고 했더니 개 소리를 흉내 낸다.

요한은 용수철이라도 달린 것처럼 자리에서 폴딱 일어나 몸을 탈탈 털고 반대편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문화는 당연하다는 듯이 요한의 옆자리를 다시 꿰찼다. 짜증을 내며 자신을 밀어내는 요한을 가볍게 제압하고는 빙글빙글 웃으며 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양이 얼마나 좋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먹고 자고 싸기만 해도 사랑받는데. 안 그래?”

요한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거나 말거나 문화는 요한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벽처럼 두꺼운 문화의 가슴과 기둥 같은 팔뚝 사이에 낀 요한이 꽤 하고 목 졸린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좋으면 너나 고양이 해.”

버둥거리며 문화의 가슴을 온 힘을 다해 밀어 보았지만, 문화의 돌덩이 같은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 지금 꾹꾹이 하는 거야?”

“개소리 좀!”

“검사님이 매일 나한테 개새끼라고 그러니까 그렇지. 개새끼가 개소리 하는 데에 뭐 문제 있어? 그리고 혹시 알아? 나를 사람처럼 대해 주면 내가 사람 소리 할지.”

“일단 맹자 떼고 오면 생각은 한번 해 볼게.”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무수오지심 비인야(無羞惡之心 非人也), 무사양지심 비인야(無辭讓之心 非人也), 무시비지심 비인야(無是非之心 非人也)?”

요한이 이마에 주름이 갈 정도로 눈썹을 치켜올리고 문화를 건너다보았다.

“왜? 조폭 새끼가 맹자 아는 게 신기해?”

“응.”

“백태호가 뭐 하나 꽂히면 밑에 애들한테도 하라고 강요하거든. 이전에 갑자기 사서삼경에 꽂혀서 개지랄하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공자 왈 맹자 왈 수업 따라다녔다. 알고 보니까 영감탱이가 사주 배운다고 그런 거였더라.”

“서당개였냐? 참, 내. 맹자 읊는 개새끼는 좀 신선했다.”

“딱 이거밖에 몰라. 내가 검사님도 아니고 한번 들은 걸 어떻게 다 기억해.”

요한이 “흥.” 코웃음을 치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문화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문화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요한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는 마치 잔뜩 칭찬을 바라는 거대한 개처럼 요한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요한은 “아이, 씨!” 하면서 문화의 손을 뿌리치고 손바닥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너 진짜 개냐?”

“손 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

“내가 좋아할 만한 거 가져왔다며! 그거 내놓으라고!”

“아, 그거. 응. 있지. 가져왔지. 주머니에 있는데…….”

문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양쪽 바지 주머니에 각각 손을 넣었던 요한이 기겁하며 양손을 물리고는 거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개변태 새끼야, 뒤질래?”

“검사님이 마음대로 내 자지 주물럭거려 놓고 왜 화를 내? 가만히 있다가 성추행당한 사람은 나인데 왜 검사님이 화를 내지?”

“아, 더러워…… 씨발, 미친…….”

“내 입으로 바지 주머니에 있다고 한 적 없다?”

자신이 아는 욕을 전부 내뱉으며 허겁지겁 화장실로 뛰어가 손을 씻고 온 요한이 소파에 느른하게 기대앉은 문화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취객이 쏟아 낸 토사물을 보는 눈으로 문화를 내려다보았다.

“별것도 아닌 걸로 이 지랄 떤 거면 너 진짜로 죽여 버린다. 내놔.”

“백태호가 국회 의원하고 산자부 차관하고 친목 다지는 영상이면 별거야, 별거 아니야?”

“어디서 났어?”

“내가 찍었지.”

“네가?”

“이 정도 급은 내가 영감 모시고 다녀.”

“네가?”

“이래 봬도 내가 백호그룹 넘버 투야. 나 부회장이야. 저번 임시 주총…… 그때 검사님 교통사고 났었지.”

문화가 갑자기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아, 갑자기 열이 확 받네?”

“뭔데?”

“아니야, 아무것도. 청새치들 포식하고 살 통통하게 올랐겠네.”

팔짱을 낀 요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문화를 노려보았다.

지난밤, 분명 이문화가 그에게 참치를 좋아하냐 물었더랬다. GPS 기록에 냉동 창고가 있었다. 수산물 창고도 이문화의 사업 중 하나인 걸까.

요한은 문화에게 언제까지 비겁하게 약물을 쓸 거냐며 화를 내려다가, 섣불리 아는 척해서 산통을 깨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뒤를 캐서 대차게 엿을 먹여 주는 것이 훨씬 더 통쾌할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가오 빠지는 짓은 안 한다면서 몰카는 찍냐?”

“누구한테 배웠겠어? 다 검사님한테 배웠지. 우리 서 검사님도 ‘만일에 대비해서’ 철저하게 대비하잖아. 검사님도 하는 일인데 가오가 왜 빠져? 절대 가오 빠지는 일 아니야.”

“내가 언제 몰카 찍었어? 난 녹음만 했어!”

“에이. 검사님은 검사고 나는 더러운 조폭이니까 조금 더 나가야 가오가 살지. 안 그래?”

요한은 재차 문화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거 나 줘.”

“맨입으로?”

“나 주려고 찍어 온 거 아니야? 맞잖아. 빨리 줘.”

“아무리 그래도 맨입으로 가져가는 건 좀 그렇지?”

“뭐 바라는데? 뭐 하면 되는데?”

“음…… 아무래도 이런 건 베갯머리 송사가 으뜸 아닌가 싶은데…….”

“베갯머리 송사?”

요한이 콧등에 주름을 잡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국식으로 갈까, 아니면 이국적으로 갈까?”

문화는 예상치 못한 요한의 반응에 “너무 떨려. 어떡하지?” 하며 수선을 떨었다.

“아, 빨리 골라.”

“일단 한국식부터?”

“콜. 목침으로 대가리 깨지기 당첨.”

함박웃음을 짓던 문화가 웃는 얼굴 그대로 정지했다.

“뭐야, 그게. 베갯머리 송사해 준다며?”

“베갯머리로 송사(訟事) 일으키는 거지. 한국식이면 목침 아니야?”

“그럼 이국적인 건 뭔데?”

“라텍스 베개로 얼굴 눌러서 질식시키기.”

정지 상태가 풀린 문화는 손뼉까지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 내가 우리 서 검사님을 너무 띄엄띄엄 봤네. 그렇지. 이래야 서요한 검사님이지. 방금 그거 괜찮았어.”

“너 괜찮으라고 한 소리 아니야. 순도 100% 진심이야.”

“알지, 알지.”

“USB야, SD카드야? 빨리 이리 내.”

“맨입으로는 안 되지. 강호의 도리가 있지, 남이 목숨 걸고 찍어 온 걸 날로 먹으려 드시면 쓰나.”

“치사한 새끼. 됐다.”

문화가 팔을 뻗어 냉랭하게 돌아선 요한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갑작스럽게 균형이 무너진 요한이 비틀거리다가 문화의 무릎 위에 주저앉았다.

“검사님 주려고 어렵게 찍어 왔는데…… 서비스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

요한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문화가 폐부 깊숙이 요한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어리광 부리듯이 고개를 비벼대는 문화의 양어깨를 콱 틀어쥔 요한이 문짝만 한 몸을 소파 등받이 쪽으로 밀었다.

“왜…….”

“가만있어 봐.”

“뭐 하려고?”

“서비스.”

문화가 상체를 세우고 앉자 요한이 자리를 고쳐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당혹과 기대로 살짝 상기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뚝한 콧대와 곧은 콧날, 깊은 안와, 딱 적당하게 솟은 광대가 그늘진 녹갈색 눈동자와 밀 빛으로 살짝 그은 피부색과 만나니 마치 고전 영화의 남자 주인공 같았다.

저 얼굴로 하는 짓은 천하에 둘도 없을 개망나니 인생 말종 인간 쓰레기 깡패라니.

요한은 잠자코 문화의 재킷을 벗겼다. 문화는 순순히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팔을 들어 옷을 벗기는 요한에게 협조했다. 그다음에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단단한 목빗근에서 곧게 뻗은 빗장뼈를 지나 두툼한 가슴까지 부드럽게 훑어 내리는 손놀림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뭔데?”

되묻는 문화의 낮은 목소리에 나른한 성감이 짙게 배어났다.

“너 왜 몸에 털이 하나도 없어?”

“그게 궁금했어?”

“이상하잖아. 털북숭이여야 할 것 같은데 맨들맨들하니까.”

“레이저로 싹 지졌지.”

“온몸을? 그러면 아예 털이 안 나는 거야? 수염도? 희한한 인간이네. 굳이 왜?”

“털 부숭부숭하면 검사님이 짐승 같다고 나 안 예뻐할까 봐.”

“털 없어도 안 예뻐해. 완전 파충류 같아.”

“만지는 느낌 좋지 않아? 바디 케어 꽤 신경 쓰는데.”

요한은 문화의 잘 짜인 근육을 덧그리다가 불현듯 손바닥을 쫙 펴 가슴을 크게 움켜쥐었다.

“윽.”

“엄살은.”

마치 치한이라도 된 것처럼 한참 동안 문화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요한이 다시 손가락을 세워 상체를 훑어 내리다가 이번에는 단단한 복근을 더듬었다.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 결을 손끝으로 긋기도 하고 꾹꾹 누르기도 하며 문화의 몸을 가지고 놀던 요한이 갑자기 배꼽을 꾹 찔렀다.

난데없이 급소를 찔려 히끅 딸꾹질 소리를 낸 문화가 더 아래로 향하는 요한의 손목을 잡아챘다.

“더 할 거야?”

“가만히 있어.”

“더 할 거면 방에 가서…….”

손목을 털어 문화의 저지를 뿌리친 요한이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기어코 속옷 밴드 안으로 꾸물꾸물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선액으로 미끈미끈해진 살덩어리를 꺼냈다. 한참 전부터 퉁퉁해져 있던 성기가 바깥바람을 쐬자마자 한층 부피를 키우더니 독 오른 뱀 대가리처럼 꼿꼿해졌다.

“뭐, 뭐 하려고 그러는데.”

요한은 대답 대신에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내려가 문화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앞섶을 풀어 헤친 채 황망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문화를 힐끗 쳐다보고는 혀를 내밀어 번들거리는 귀두를 살짝 핥았다.

혈관이 불끈불끈 불거진 흉악한 해면체를 노려보던 요한이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려 선단을 물었다.

“서요한!”

문화가 황급히 요한의 머리를 밀어내며 허겁지겁 바지와 속옷을 추켜 올렸다.

“왜? 서비스해 달라며.”

문화의 얼굴이 달라졌다. 평소의 엉큼하고 능청스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눈 안쪽에서 거칠고 사나운 불길이 확 타올랐다.

“내가 언제 이런 거 해 달라고 했어!”

문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리자 눈초리가 약간 붉어진 눈을 치켜뜬 요한이 그를 도발하듯 쳐다보며 야유했다.

“강제로 입에 처박을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착한 척이야?”

“다시, 다시는 이러지 마.”

“뭘?”

문화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요한의 손바닥에 손톱만 한 칩을 올려놓고 커다란 손으로 요한의 손을 세게 움켜쥔 채 단어 하나하나를 자근자근 짓씹었다.

“이런 거 얼마든지 가져다줄 테니까…… 다시는 무릎 꿇거나, 후, 이런 거 하지 마.”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랄발광인지…….”

요한이 언짢은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자 문화가 남은 손으로 요한의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문화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동요하게 만든 걸까.

문화는 소리가 날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물어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으나 숨이 계속 차올라 호흡하기 어려웠다.

그를 뒤흔든 격정이 슬슬 요한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

억지로 언성을 낮춰 내뱉듯 말하는 동안 요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바지를 툭툭 털었다.

문화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씻는다.”

문화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까지 그는 요한에게 내키는 대로 모욕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가 어떠한 굴종을 강요하더라도 요한은 그의 협박에 굴하여 꺾여서도 아니 되었고 그에게 주어지는 굴욕을 묵묵하게 감수해서도 아니 되었다.

서요한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고고하며 드높은 자긍심을 드러내야만 했다.

쿵. 쿵.

문화는 심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타일 벽에 머리를 박았다. 어깨로 쏟아지는 더운물이 채찍질처럼 느껴졌다.

그는 늘 자기감정에 충실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자기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문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비록 순간적이나마 요한이 그토록 외쳤던 수치심을 비로소 경험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까지 요한을 대했던 자신의 태도가 부끄러웠다.

요한이 검은 눈으로 자신을 힐끗 올려다본 그 짧디짧은 순간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그가 요한의 시선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경멸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단히 깨지고, 안간힘을 써서 다시 그러모으고, 겨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산산조각이 나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어느 한구석이 돌이킬 수 없도록 손상되어 버린, 그리고 마침내 망가지기 전과 선연하게 달라진 서요한의 자아였으며, 이문화가 요한의 검게 죽은 눈에서 보았던 것은 좌절된 희망과 학습된 체념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끔찍해도 감정은 쌓이고 그 감정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일진대, 문화를 올려다보던 요한의 눈은 어둠처럼 새카맸다.

그는 마치 인간의 모양을 한 폐허와도 같았다. 그는 요한의 황폐함에서 역으로 과거의 영광을 보았다. 몰락할 수 있는 것은 한때 영화로웠던 것들뿐이므로.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고 야단법석을 떤 것인가. 요한의 꼿꼿한 아름다움을 훼손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문화 자신이었던 것을.

통렬한 깨달음과 동시에 문화를 뒤덮은 것은 우습게도 허기를 닮은 격한 성욕이었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광소를 터트리며 요한의 눈을 떠올렸다. 검은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건지 알 수 없는 선명한 검은자와 지진으로 갈라진 땅처럼 핏발이 그어진 눈이 문화를 집어삼켰다.

문화는 파르스름하니 잘 벼린 칼처럼 예리하던 요한과 빗속의 소금 포대처럼 느른하고 맥없던 요한을 번갈아 반추하며 검붉게 부어오른 성기를 힘주어 쥐었다.

몇 번 아래위로 흔들었을 뿐인데 척추를 타고 짜릿함이 치솟으며 아랫배가 죄어 왔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기 직전―

“야.”

언제 발정했냐는 듯이 문화의 성기가 푹 주저앉았다.

“네 노트북 잠깐 쓴다?”

요한이 욕실 문을 살짝 열고 자욱한 수증기 속으로 고개만 빼꼼 들이민 채 말을 걸었다.

“흐흐, 하, 흐흐흐흐…….”

“미쳤나, 징그럽게 처웃고 지랄이야. 서재 노트북 써도 돼? 야, 이문화. 노트북 잠금 걸려 있냐고!”

“써, 써. 비번 없어. 마음대로 써. 다 써. 부숴도 돼.”

“내가 너냐? 넌 무슨 샤워를 한 시간이나 하냐…… 샤워하다가 뒤진 줄 알고 좋아했는데 살아 있었네. 이왕 살아 있는 김에 다 씻었으면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와. 출출해.”

열린 문틈 사이로 요한의 발소리가 들렸다. 문화는 다시 타일 벽에 쿵쿵 머리를 박았다.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지금은 고작해야 발목에 휘감겼다 떨어져 나간 정도에 그쳤지만, 이 기묘한 위화감은 언젠가 자신의 목을 조를지도 모르겠다고 이문화는 생각했다.

향기로운 거품으로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 닦고 보습 오일을 꼼꼼히 발라 간단한 마사지까지 한 뒤 미지근한 물로 육신의 껍데기 위에 덮인 것을 전부 씻어 내렸다.

불발된 성욕 탓에 아랫배가 무지근하고 상쾌하지 않았지만 일단 식어 버린 감흥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문화는 썩 개운치 못한 상태로 욕실을 나왔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옷을 챙겨입고 나가 아파트 상가에서 초밥과 우동을 사서 돌아오니 요한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컴퓨터 다 썼어?”

“어. 뭐 샀어? 우동이야? 오, 나 오뎅 국물 좀 먹고 싶었는데. 잘 됐다. 이문화가 어인 일로 말을 빠릿빠릿하게 잘 알아들었을까. 너 아까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찔려서 그러지. 또 소리 지르면 죽는다? 오늘은 특별히 한번 봐주는데, 건방지게 내 이름 부르거나 나한테 성질부리고 그러면 너 잘 때 목 졸라서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명심해.”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문화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온 요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식탁 상석에 앉았다. 문화가 포장 용기에서 음식을 꺼내 그릇에 담는 짧은 시간에도 그의 훈계는 그치지 않았다.

“화질은 좋은데 소리가 좀 깨지더라. 다음에는 영상이랑 음성을 따로 따는 방법도 한번 고려해 봐. 그리고 백태호 말고 다른 임원, 아니 백호파 간부들이 공사 치는 것도 괜찮으니까 기회 되면 영상 따 줘. 아, 넘버 투 부회장님이셔서 급이 안 맞는 다른 간부하고는 같이 안 다니시려나? 아무튼…… 아. 맞다. 나 감찰하라고 대검에 고발장 넣은 회사 어떤 놈이 사주한 건지 알 것 같다며. 누구야? 그 새끼들 약점 잡은 거 있어?”

문화가 준 백태호 비리 영상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약간 상기된 어조로 노래하듯 말하는 요한을 보고 있노라니 평소와 다름없는 서요한 같기도 했다. 문화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요한의 앞에 정갈하게 차린 초밥과 우동 한 상을 올려 주었다.

“너는 안 먹어?”

“이 시간에 탄수화물은 좀.”

“어이구. 야, 미스터 코리아 나가냐? 체지방률 너무 낮으면 심장에 안 좋아. 하긴. 뭐, 나야 네가 단명하면 좋지만.”

“검사님도 몸에 지방 거의 없던데.”

“그건 네가 밥맛 떨어지게 굴어서 제대로 못 먹는 바람에 그런 거고.”

“밥맛 떨어진 사람치고는 너무 잘 드시는데.”

“어린애 손바닥만 한 빵 조각 하나가 하루 끼니 전부였는데, 너 같으면 배 안 고프겠냐?”

“아니…… 종일 굶었다고? 왜? 하…… 나한테 전화를 하든가, 아니면 마 부장을 부르든가…….”

“뭐 좀 하느라 바빠서 그랬어.”

“집에서 잠만 자면서 뭐가 바빠?”

“어, 종일 처자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요한은 툴툴거리면서도 특대 초밥과 우동 곱빼기를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보기와 다르게 요한은 상당한 대식가였다.

보통 식탐이 있는 사람은 욕심을 억누르지 못해 먹는 모습이 추접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요한은 천하 진미를 눈앞에 두어도 언제나 단정한 자세로 음식을 먹었다.

그가 가득 차려진 밥상을 정갈하게 비워 내는 모습에는 멸종 위기의 희귀 생물이 사냥감을 해체하는 듯한 진귀함이 있었기에 문화는 요한과 함께 식사할 때면 자기 밥그릇을 비우는 것보다 요한을 관찰하는 쪽을 선택하고는 했다.

“안 드실 거면 이만 꺼져 주시면 안 될까요?”

“싫은데.”

“남 먹는 거 볼 거면 돈 내고 봐.”

“얼마인데?”

“1분에 100만 원.”

“30분어치 3천만 원 입금하면 먹는 거 구경해도 되나?”

“넌 밉상 할증 붙어서 3억.”

식탁에 턱을 괴고 요한을 관찰하던 문화는 그만 참지 못하고 픽 헛웃음을 내고 말았다.

“거기에 조폭 할증 더 붙어서 5억.”

“시간당 10억이야?”

“말대꾸 할증 3억 추가.”

상을 싹싹 비워 낸 요한이 습관처럼 뾰족 내민 혀로 입술을 핥는 것을 보며 문화는 자기도 모르게 요한을 따라 입술을 핥았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갈증인가, 갈망인가.

빈 접시를 겹쳐 쌓은 쟁반을 개수대로 옮기는 요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방을 나서는 요한을 허겁지겁 붙들었다.

“나 지금 현금이 없는데.”

“어쩌라고.”

“몸으로 때우면 안 되나?”

“미친 새끼인가?”

“아까 보니까 검사님 내 몸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던데.”

몹쓸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치를 떨며 잰걸음으로 화장실로 도망치려던 요한의 허리를 덥석 낚아챈 문화는 양치해야 한다며 팔꿈치를 휘두르는 요한을 가볍게 들어 침실로 데리고 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가만히 있어 봐. 확인할 게 있어.”

“그럼 나 양치라도 좀 하게, 윽…….”

“확인해야 해. 꼭…….”

서요한이 아직 서요한인지, 이문화가 아직 이문화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문화가 체중을 실어 요한을 깔아뭉개자 요한이 버거운 숨을 헐떡였다. 자신의 뺨을 덥히는 습한 공기가 요한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나왔다고 생각하니 문화의 다리 사이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띵하니 눌린 것처럼 무겁게 고여 있던 정욕이 일시에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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