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번외편: 서요한 검사의 사건 수첩 (6/11)

번외편: 서요한 검사의 사건 수첩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야.”

중요경제범죄수사단 뒤치다꺼리 담당 서요한 검사는 수사단 막내 된 원죄로 남들의 몇 배나 되는 자료를 떠안았다.

귀신 같은 집중력으로 세 시간째 재무제표와 계약서를 들여다보던 요한이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매출 이상한데. 부채 비율하고 안 맞잖아. 충당금에 비해서 미수 채권이 너무 많아.”

요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상한 거 있습니까?”

검사 임관 두 달째에 접어든 수습 검사 조현우가 요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외상 매출 채권이 너무 많아요. 진짜로 미수금인지 충당 부채 안 늘리려고 억지로 분개만 이렇게 한 건지 숫자만 봐서는 판단이 안 됩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요한의 하얀 뺨이 창백하게 빛났다. 며칠 계속된 밤샘으로 안색은 해쓱했으나 요한의 이목구비만은 변함없이 단정했다.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주먹으로 눈을 한참 문지른 요한이 커다란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눈물이 맺혀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부채처럼 펄럭거렸다.

“조 검사님, 전에 한국은행 있었다고 했죠? 외환 관리법 소송 한번 봐 주실래요? 조 검사님 보기에는 어때요?”

사회생활을 하다 뒤늦게 검사가 된 조현우 검사는 요한보다 기수는 한참 아래였지만 나이는 여섯 살이 많았다.

본인은 서요한 프로의 줄임말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서초동 프린스의 줄임말인 ‘서프’라는 거창한 별명에서 요한에 대한 주변의 시각을 대충 짐작한 데다가, 역대 최연소 합격자답게 시건방짐이 이루 말할 수 없다는 험담까지 들었던지라 조현우는 기수가 깡패라는 격언을 주문처럼 외우며 서요한 검사실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 검사의 어린 사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었다. 가끔은 이래도 되나 황송하게 느껴질 정도로 깍듯했다.

소문이란 건 얼마나 헛된 것인가. 조현우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을 반성했다.

“외환 임의 상계 건 말씀이시죠? 1심에서 지연 배상금 손해 배상 아니라 계약가 조정이라고 인정해서 한성중공업이 승소했고, 관세청이 항소했죠. 아마 2심도 한중이 이길 겁니다. 그런데 지연 배상금을 그렇게 많이 물어 줬는데 미수금이 남았다는 건 이상합니다.”

“이상한 거 맞죠.”

“예.”

“분식 회계 맞네요. 유 계장님.”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사관을 불렀다.

“네.”

“지난 3년 치 재무제표 미수금이랑 외상 매출금 과목별로 명세표 작성해서 관련 계약서하고 계약 변경 내역, 공시 내역 전부 가져오라고 하세요. 지금 진행 중인 관세나 부가세 소송도 계약서하고 건별 손익 계산서 첨부해서 제출하라고 하시고요. 과거 5년간 총예정 원가하고 최종 손익 비교해서 20% 이상 차이 나는 건은 상세 소명하라고 하세요. 그 해 연도 말 현금 흐름하고 매출 원천 자산 회계 처리 어떻게 했는지 위주로.”

잠깐 숨을 돌리며 볼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 요한이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3년간 충당 부채로 편입된 내역하고 대손상각 관련 내역은 본 계약서랑 하도급, 자재, 계약 양수도 이력도 필요하겠는데요. 이건 일단 적어 두시고 가져온 자료 보고 참고인 조사 왔을 때 추가로 요청하거나 압수 수색 가서 가져오죠.”

요한이 달력을 들어 일정을 살피고는 흠, 하며 마땅찮다는 듯이 콧등을 찌푸렸다.

“수요일 오전 10시 반에 회계팀장이랑 법무팀장 참고인 소환해 주시고 자료는 다음 주 월요일 오후 2시까지 가져오라고 하세요. 음…… 영업, 자재 구매, 협력사 관리, 생산 부서 팀장도 소환해야 할 거 같네요. 이건 미리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보고 얘기하죠.”

속사포 쏘듯이 내뱉는 요한의 지시를 익숙하게 받아 적는 수사관과 점심 메뉴라도 읊는 것처럼 담담한 표정의 요한을 번갈아 보며 조현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요일 오전에 시작한 참고인 조사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되었다. 지치지도 않고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던지는 요한의 인내심에 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요한의 어조는 높낮이가 거의 없고 조곤조곤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검사의 권위가 묻어 있었다.

요한은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가며 말했다. 상대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 되뇌는 듯한 말투였다. 서요한이라는 개인은 사라지고 검사라는 관념적인 지위가 덧씌워진 듯한 독특한 말버릇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강력한 위엄이었다.

수사관을 도와 한성중공업 회계팀장을 심문하면서도 현우의 시선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한 요한의 옆모습에서 떠나지 못했다.

요한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들의 까마득한 선배였다. 검사 출신인 한성중공업 법무팀장은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극도로 정중한 말투로, 그러나 권태와 피로를 미처 숨기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조심스럽게 항변했다.

“장기 매출 채권으로 분류하신 이유가 뭐죠?”

“그건 회계 문제라서 제가 답 드리기가…….”

“법적인 측면에서 여쭙는 겁니다. 계약적으로 합당하게 받을 권리가 있는 돈이라고 판단해서 계약 종료 후에도 상각하지 않고 외상 매출 채권으로 분류하신 거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요한이 미려한 손짓으로 두툼한 영문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어찌나 꼼꼼하게 살폈는지 귀퉁이가 죄 말린 계약서에는 색색의 꼬리표가 수십 개나 붙어 있었다.

저 많은 자료를 저토록 성실하게 살펴보려면 대체 며칠 밤을 새워야 하는 걸까.

조현우도 요한의 보조를 맞추느라 거의 매일 늦게까지 야근을 했지만,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조현우는 요한을 보며 저 사람을 뛰어넘기는커녕 따라잡을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계약서를 보면요, 발주자가 승인하기 전에는 계약 변경이 무효예요. 일방적으로 이행하면 안 됩니다. 직접 검토하신 계약일 테니 계약서 설명은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공기를 맞추려면 발주자랑 공방하면서 기약 없이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공사를 진행하고 나중에 금액을 정산하는 게 업계 관행입니다.”

“관행이 계약과 법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받을 수 있는 채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죠. 간과하신 건가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가능성을 무시하신 건가요?”

사법 시험 합격으로 인생의 관운을 모조리 써 버리기라도 한 듯 검찰 조직 내에서 출세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 한국중공업 법무팀장은 자신의 이십여 년 검사 인생과도 같은 밋밋하게 지친 표정을 지었다.

“회사는 팀장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업무상 과실과 배임 중에서 고르기 어려우시죠? 이해합니다. 본인 판단으로 결정하신 거라는 말씀은 그만두세요. 계약 금액이 2조 3천억인데 1천 2백억이 팀장 결재로 처리 가능한 금액이라고 계속 우기실 건가요?”

저녁 식사를 위해 30분 쉰 뒤 7시에 다시 앉은 요한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날 선 질문을 던지며 상대를 맹렬하게 코너로 몰았다.

고단한 시간이 되어서야 정말 중요한 조사를 시작하는 요한을 보며 조현우는 그제야 요한이 오후 내내 똑같은 질문만 반복했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정신력도 체력도 한계에 달한 법무팀장이 부주의하게 진짜 대답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던 것이다.

서요한 검사의 내면에 자리한 사냥꾼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리라. 사냥감이 지나치게 거대할 때는 작은 상처를 내면서 지칠 때까지 몰아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그 순간, 목을 물어뜯어 단숨에 숨을 끊는다.

요한은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 나가고 있었다.

조현우는 천천히 물을 마시며 소리도 없이 돌아가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시 15분에 멍하니 시곗바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영혼이 휘발되어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은행에서 일할 때도 검찰과 비슷한 격무에 시달렸지만, 검찰은 역시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거기에 책임의 무게가 묵직하게 얹힌다. 그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서요한 검사의 꼿꼿한 자세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무슨 힘으로 이런 압박을 오롯이 버텨 내는 걸까. 1차 참고인 조사가 마무리된 것은 오전 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요한이 일어서자마자 한성중공업 법무팀장과 회계팀장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나가자 한밤의 정적이 적막한 사무실에 스며들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소음기를 뗀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소리가 정적에 박차를 가했다.

조현우는 공기가 조여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정리하는 요한의 주위로 공기가 모여들어 그의 몸을 꽉 조이는 것처럼 느껴져 조현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차례에 걸쳐 여섯 명을 소환해 참고인 조사를 하고 산더미 같은 자료를 제출받아 밤낮없이 검토했으나 정교하게 가공한 자료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다.

이에, 요한은 전면 압수 수색이라는 강력 카드를 뽑아 들었다.

특수 1부에서 4부의 수사관이 골고루 투입되었고, 요한이 몸담은 공정거래수사부의 모든 검사가 수사관을 보냈다.

중앙지검에서 서른일곱, 서울지방경찰청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도 광역수사대 수사관 스물세 명을 지원하여 예순 명의 대규모 압수 수색팀이 꾸려졌다.

“주임 검사 서요한입니다. 한성중공업 압수 수색은 내일 오전 8시 10분에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앙지검에서 한 번에 출발하면 여러 가지로 번거로우니 서울지방경찰청에 모여 한 번에 이동하기로 합니다. 박스는 차에 실어서 세종로파출소 앞에 대주시고, 서울청에 7시까지 모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시를 내리는 요한에게는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당장 방송국 황금 시간 뉴스 진행자석에 앉혀도 될 것 같은 화려한 이목구비와 귀에 쏙쏙 박히는 울림 좋은 목소리로 묵직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했다.

요한은 그 자체로 아주 거대한 불협화음이었다. 진동수가 맞지 않는 수많은 울림이 요한을 둘러싼 모든 것을 떨리게 했다.

“한성중공업 수사는 이번 압수 수색에 달려 있습니다. 작은 단서 하나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식 회계, 주가 조작, 비자금 조성, 배임, 정치 자금법 위반, 하도급 공정화 위반 혐의가 있습니다. 압수 수색 대상 부서는 전산실, 정보 보안팀, 해외 영업 3개 팀, 협력사 관리팀, 내자 및 해외 자재 구매팀, 사업 관리팀, 회계팀, 소비 관세팀, 세무팀, 법무팀, 영업본부장실, 경영지원본부장실, 대외협력실장실입니다. 17층, 21층, 24층, 26층, 29층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압수 수색 영장은 광범위하게 신청하기는 했지만, 수색 대상 부서나 압수 항목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일 새벽에 영장 발부되면 업데이트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 자료가 중요합니다. 서버 확보를 최우선으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물 도착하면 계단실, 비상 통로 확보하셔서 직원 이동 차단해 주십시오.”

요한은 메모 하나 없이 브리핑을 계속했다. 종이를 들여다보는 대신 자신을 쳐다보는 수사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무언의 대화를 건넸다.

“외부 로펌 지원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압수 수색을 방해하면 선처 없이 공무 집행 방해로 고발하겠으니 위법하지 않은 한에서 최대한 강하게 대응하시기 바랍니다. 고의로 자료를 빼돌리거나 폐기한 흔적이 있으면 증거 인멸도 혐의에 추가합니다. 발견 즉시 저에게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압수 수색의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여러분의 경험과 능력만 믿고 가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팀 배정과 동선 안내는 유동수 계장님이 계속해 주시겠습니다.”

다음 날, 납작하게 접은 푸른 박스를 방패처럼 든 수십 명이 구둣발로 힘껏 바닥을 차며 한성중공업 본사로 진격했다.

“서울중앙지검 중요경제범죄수사단 서요한 검사입니다. 형사소송법 122조에 의해 압수 수색 집행을 통보합니다. 현재 시각 8시 10분, 압수 수색 영장에 기해 한성중공업 본사 압수 수색 개시합니다.”

로펌을 통해 며칠 안으로 압수 수색이 있을 거라는 첩보는 전해 들었을 터이나 이 정도 인원이 밀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지 한성중공업 법무팀장의 고단한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해 보았지만, 요한과 대치한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이번 전투의 승패는 이미 가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장 복사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저희도 수색 대상 확인을 해야…….”

“눈으로만 보십시오.”

법무팀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요한이 치고 들어왔다.

로펌 변호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시간을 벌려는 요량이었겠지만, 요한은 무심하게 손을 들어 보안요원에게 입구 차단기를 열라고 지시했다.

“올라갑시다.”

전방위 압수 수색은 다음 날 5시가 넘어서야 일단락되었다.

꽉꽉 눌러 담은 파란 박스 몇십 개와 함께 중앙지검으로 돌아온 요한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격려 회식 장소로 압수 수색팀을 안내했다.

경찰청으로 복귀한 인원을 빼고도 서른이 훨씬 넘는 수사관 모두와 일일이 잔을 부딪치고서도 요한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것뿐이던가. 수사관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직위를 정확하게 부르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요한을 보며 누군가가 “괴물이네.”라고 속삭였다.

한성중공업 분식회계 규모는 애초 예상했던 금액의 열 배가 넘었다. 순자산은 심하게 부풀려져 있었으며 모든 추정치가 모두 잘못되어 있었다.

다만 국책은행 지분이 40%에 육박하는 한성중공업이 이른바 푸른 지붕과 사전 교감 없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중요경제범죄수사단에도, 한성중공업에도.

“한성중공업은 작년 말에 4조 6억 원 순손실이 났어요. 1년 안에 갚아야 할 빚이 1년 안에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보다 5조 가까이 많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회계 용어로 ‘계속 기업으로서의 존속 능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불확실성’이라고 하지요?”

“회계 처리에 실수가 있던 점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계속 사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부실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압수 수색에서 확보한 자료 검토를 위해 추가 인원이 파견되었다. 조현우를 포함해 네 명이 밤낮없이 분투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자 요한은 곧바로 CEO를 소환했다.

“검사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이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제외하면 50대로 보이는 한성중공업 CEO기 입을 뗀 것은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창문을 활짝 열었으나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던 어느 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한성중공업에서 32년을 일했지만, 회사에 제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요한이 기록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회한의 농도만큼 거무스름해진 CEO의 눈 아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올해가 창사 60주년입니다. 저와 동갑이지요. 회사가 쌓아 온 모든 것이…… 이름도, 사옥도, 회사가 지은 건물도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더군요. 제가 회사에 남긴 건 그저 회계 사기 하나라고 생각하니 스물여덟부터의 제 인생은 과연 무엇이었나 싶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하는 예순의 전문 경영인은 매미가 탈피하고 나간 껍질처럼 무력하고 투명해 보였다.

그 껍질에는 뒤늦은 후회와 울분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5년 전에 검찰 조사받고 돌아가던 길에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물류 회사 사장이 있습니다.”

“네. 압니다.”

“제 육촌 되는 사람입니다.”

조현우는 움찔했고, 요한은 담담했다.

“형님이 어떤 마음이셨을지 알 것 같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큰 폐를 끼쳤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직원 3만 명과 그 가족을, 수천 협력사와 자재 공급사를 떠받쳐 온 회사입니다.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요한은 모든 표정이 사라진 남자의 망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묵묵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기 자리를 지켜온 사람의 마지막은 참으로 초라하고 비참했다.

<함부로 다정하게> 3권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