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무정불사다정고(無情不似多情苦) (8/11)

제5장. 무정불사다정고(無情不似多情苦)

무거운 누름돌에 짓눌리는 사람이 낼 법한 신음에 문화가 퍼뜩 눈을 떴다.

혹시 내가 악몽을 꿨나.

문화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히 잠에서 깨어났는데 끙끙거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자신이 무심결에 앓는 소리를 내는 건가 싶어 목을 큼큼 다듬어 보았다. 그런데도 옅은 신음은 여전했다.

그것은 문화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비통한 앓는 소리는 옆에 누운 요한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길래 그렇게 죽는 소리를 내는 거야?”

요한이 악몽을 꾸며 끙끙대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괴로워하는 요한을 이미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깨어난 후 자신이 꾼 악몽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문화는 혹여 잠결이라도 요한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면 꿈결의 괴로움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요한을 끌어안으려다가 공중에서 허위허위 팔을 거두었다.

“내가 검사님 악몽이지. 내가 누굴 걱정하냐.”

갑자기 끙끙 앓던 소리가 끊겼다. 요한은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이. 서요한 씨. 살아 있지? 어이?”

문화기 요한의 왼쪽 가슴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늘 번거로울 정도로 거세게 뛰는 요한의 심장은 귀를 바짝 붙이지 않아도 고동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화가 한참을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도 규칙적인 박동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문화의 심장 박동이 미친 들소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요한의 가슴에 귀를 딱 붙이고 그의 주먹만 한 심장이 팔딱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잠든 요한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의 심장이 멈추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문화는 요한의 오뚝한 코 아래 검지를 가져갔다. 다행스럽게도 손가락 끝에 축축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있네.”

그대로 턱을 괴고 요한의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콧날에 푸르스름한 밤이 반사되어 섬세한 이목구비에 그림자가 졌다.

“왜 이렇게 쓸데없이 예쁜 거야.”

미인의 눈썹을 아미라고 했던가. 문화는 요한의 결 고운 눈썹을 허공에서 매만졌다. 문화를 칼로 찌를 것처럼 늘 날 서 있는 매서운 눈매도 하늘하늘한 눈꺼풀로 덮여 있으니 그저 곱고 순해 보이기만 했다.

윗입술과 비교해 살짝 도톰한 아랫입술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에 촉촉하게 젖어 요염하게 빛났다.

“서요한. 네 잘못이야. 멍청하든지 못생기든지 둘 중 하나는 했었어야지. 그렇게 똑똑하고 예쁘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문화는 요한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사이로 새끼손가락을 살짝 넣었다가 얼른 뺐다. 아마 깨어 있는 요한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의 새끼손가락은 어설픈 조폭 똘마니처럼 제일 끝마디가 뜯겨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끝으로 요한의 미려한 얼굴 윤곽을 따라 허공을 더듬었다.

요한이 잠에서 깨기 전에 다시 누워야 한다. 문화는 커다란 손바닥을 쫙 펼쳐 요한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흉내를 냈다. 마치 눈을 뜬 채 죽어 버린 전우의 눈을 감겨 주는 부상병처럼 요한의 미려한 이목구비를 공기 너머로 더듬었다.

요한의 뺨에 내린 밤이 깊어졌다.

문화는 입술만 달싹여서 말로는 할 수 없는 밤의 인사를 소곤소곤 건넸다.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

요한은 내내 은밀하게 상처받아 왔다.

기억을 잃은 후로부터의 십팔구 년만이 아니라 마치 수천 년을 텅 빈 우주를 홀로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요한은 외로워했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요한의 상처를, 요한의 외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지겹다고 여기면서도 차마 그 지겨운 것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던 요한의 고집이 그 외로움을 지워내 버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잠결에 어렴풋한 체온을 느꼈다. 누군가가 요한을 반듯하게 눕혀 놓고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맨살에 닿는 손바닥은 따스했고, 지겹지도 않은지 한참이나 계속해서 배를 문지르는 손길에는 애틋함과 미련이 가득했다.

이문화인가.

요한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매만지는 저 안타까운 손길은 이문화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문화는 싫지만, 그의 체온은 싫지 않았다. 그냥 미지근한 탕파라고 치부하며 요한은 안온한 잠에 파묻히려 노력했다. 새벽어둠 속에서 고른 숨소리를 흉내 냈다.

그와 동시에 요한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자신은 곤히 잠들 수 없다는 것을. 평화로운 얼굴로 꿈꿀 수 없다는 것을. 거의 모든 밤, 고통과 회한을 끌어안은 얼굴로 잠들고는 했다는 것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확하던 숨기척이 곧 대중없이 변했다.

요한의 숨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불규칙해지자 문화가 요한의 코끝에 귀를 가져다 댔다.

처음 보았을 때 비해 살이 많이 빠지면서 높은 콧대와 매끈한 얼굴 뼈의 섬세한 윤곽이 한층 선명하게 떠올랐다.

곧은 뼈대와 그 위를 감싼 부드러운 피부는 여전히 나무의 어린 가지처럼 싱그러웠으나, 가뿐하게 안겨 오는 무게는 역시 우려스러웠다.

요한이 점점 가벼워지다가 바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근심이 들어 문화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볼록한 뒤통수의 형태라든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이나 우아한 목선에 딱 어울리는 새침한 울대뼈를 음미하며 요한이 아직 그곳에 있음을 확인했다.

서요한의 형태는 아마도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리라.

문화는 자신의 옆에 누워 괴롭게 숨을 몰아쉬는 요한이 격렬하게 사랑스러웠다. 그것은 그가 요한에게 종종 품었던 성급한 욕망과는 색채가 다른 감정으로, 언제부터인가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싹을 틔워 이문화의 모든 뼈를 휘감아 자라고 있었다.

적요했던 침실에 요한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깔렸다.

문화가 요한의 형태를 더듬어 가는 행위를 그만두었을 때, 요한의 꼭 다물렸던 입술이 다시 살짝 열렸다.

붉은 점막이 벌어진 사이에 손을 대니 습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손바닥을 간질였다. 가라앉았던 감각이 자극을 받아서 떠올랐다. 문화는 한쪽 팔을 괴고 요한이 악몽과 다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점점 더 강하고 생생하게 형체를 갖춰 가는 그 감각이 어디에서 들어온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창문으로 희부연 빛이 스며드는 아침, 요한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문화는 요한이 깨지 않도록 불을 켜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씻고 옷을 챙겨입은 뒤 마지막으로 요한의 얼굴을 보러 방으로 돌아왔을 때, 요한은 헤드에 기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또 이상한 꿈 꿨어?”

“아마.”

“대체 무슨 꿈이길래 매번 그렇게 가위눌리는 것처럼 땀을 흘릴까?”

“기억 안 나. 개꿈이었겠지…….”

“꿈은…….”

문화는 침대에 걸터앉아 요한의 턱을 잡고 얼굴 여기저기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에도 입술에도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잠을 잘 때 뇌파 변화는 측정할 수 있어도 어떤 꿈을 꾸는지 그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어. 자고 일어난 사람이 꿈이었다고 기억하는 내용이 그대로 그 사람이 꾼 꿈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어, 음…… 사실은 검사님도 간밤에 아무 꿈도 안 꿨을 수도 있다고. 아무리 걸쩍지근한 꿈이어도 아침 먹고 나면 기억도 안 나잖아.”

요한은 여전히 파리하게 질린 채였다.

“괜찮아?”

“걱정하는 척은.”

턱을 잡은 문화의 손을 쳐 내며 요한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걱정하는 척이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

“머리 울려. 조용히 해.”

“잠깐 일 좀 보고 올게. 내가 점심 사 올 테니까 같이 먹자.”

“그러든지 말든지.”

* * *

책상 위에 요한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공무원증, 신용카드 여러 장을 트럼프 패 돌리듯 쭉 늘어놓은 문화가 오묘한 인상으로 요한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초저녁에 주민등록 말소시켰겠지?”

문화가 눈초리를 늘어뜨리며 희미하게 웃자 마상식이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이 얼굴을 콱 찌푸렸다가, 순식간에 공손한 부하 직원의 표정으로 돌아와 상사의 오류를 침착하게 지적했다.

“요새는 주민등록 말소 신고 가족밖에 못 합니다. 엄청 까다로워졌습니다.”

“아, 그래.”

“가족 아닌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거주불명 등록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옛날 직권 말소랑 비슷한 겁니다.”

“그렇구나.”

“말소 푸는 것도 다릅니다. 옛날에는 행정심판…… 그러니까 법원에서만 가능했는데, 거주불명자는 그냥 주민센터 가서 과태료 내면 바로 주민등록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응…… 아, 행정심판!”

마상식의 열띤 설명을 시큰둥하게 듣던 문화 행정심판이란 소리에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이문화를 곁눈으로 살피며 마 부장은 이번에는 어디의 어떤 판사를 어떻게 하려고 계획하는 건가 싶어 착잡해졌다.

예로부터 공권력과는 척지지 말라 했거늘.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리고 이문화의 주먹은 매우, 매우 세다.

“로펌은 알아봤어?”

“로펌이요?”

“서 검사.”

“아, 네. 대법관 출신 전관 선임 가능한 곳 하나랑 올해 초에 행정법원장으로 퇴직해서 수임은 못 받지만, 대신에 자문역으로 붙여 줄 수 있다는 곳 해서 두 군데 상담 잡아 놨습니다. 가격은 뒤쪽 로펌이 더 비쌉니다.”

“수임은 왜 못 받는대?”

“전관예우 금지법…… 이라고 퇴직 1년 내에는 자기가 근무했던 법원 사건 못 맡습니다.”

“그래도 살 구멍은 다 빼놨네, 십팔 새끼들…… 앞에는 일단 두고 뒤에 행정법원장 있다는 거기. 오늘 볼 수 있나? 3시에서 4시 사이로.”

“네.”

문화를 보내고 다시 잠들었던 요한은 좀처럼 울리는 법이 없던 휴대 전화 소리에 늦잠에서 깨어났다.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 온 전화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영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의외롭게도 상대는 요한의 주거래 은행이었다. 요한의 대출이 조기 만기가 되었으니 이른 시일 안에 전액 갚아야 한다는 건조한 안내였다.

“한도 2억 마이너스 통장 말씀이신가요? 3천만 원밖에 안 썼는데요. 매년 3월에 갱신되는데 갑자기 전액 상환하라고 하시니까 당황스럽네요.”

― 신용 등급이 급격하게 하락하셔서 현재 신용으로는 대출 유지가 안 되세요. 지금 고객님 신용 점수로는 대출이 아예 안 나오는 상황이거든요. 대출 약관에 보시면 신용 등급의 급격한 변동은 대출 한도 축소나 조기 만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직접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아무 지점이나 가도 되나요?”

― 네. 가까운 지점 방문하셔서 상담받으시면 되세요. 그리고 이번 달 10일에 통장 자동대출 약정이 해지되니 그 전에 원금과 이자 전액 변제하셔야 연체 안 걸리시니 유의하시고요.

이번 달 10일이라면 바로 이틀 뒤였다. 요한은 말 그대로 자다가 멱살 잡혀 깨어나 양쪽 뺨에 따귀 맞은 기분에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직도 자는 거야?”

요한은 문화가 거실에서 외치는 소리를 알아들었다기보다는 그쪽에서 간신히 잠재운 불안과 동요를 다시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찌푸린 얼굴로 시선을 방문 쪽으로 쳐들었다.

벌컥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문화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요한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일어났네? 배 안 고파?”

“이문화.”

“네, 검사님.”

“은행에서 대출 갚으라고 전화가 왔는데. 네가 뭐 한 거야?”

“아. 그거. 맞다.”

문화가 여행 가방에서 100장씩 묶인 5만 원짜리 지폐 다발을 꺼내 하나, 둘 세며 꺼내 정확히 스무 개를 요한의 다리 위에 착착 쌓았다.

“일단 여기 1억 받으시고.”

그는 500만 원 뭉치 일곱 개를 더 꺼내 이번에는 요한의 종아리 위에 올렸다.

“대출 원금 3,200만 원 상환용.”

“뭐야, 이게? 네가 내 대출을 어떻게 알았어? 도대체…….”

“응? 검사님이 돈 달라고 했잖아.”

“그게 내 신용 등급 떨어진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 그 돈 출처가 햇살 금융이라서 그런 거 같은데.”

“……뭐?”

“현금 그냥 오가면 출처 증빙하기 어렵잖아. 그래서 검사님이 햇살 금융에서 대출받은 걸로 처리했어. 내가 인보증 서서 어제 빌린 돈 오늘 전액 다 갚았으니까 검사님이 갚을 돈은 없어. 이거 다 그냥 검사님 거야.”

요한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잠시 자신의 대뇌피질이 벗겨졌는가 했다.

문화는 마치 어제 시장에서 두부를 샀고 오늘은 돼지고기를 샀으니 오늘 반찬은 두부 두루치기를 해 먹자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

“무슨, 야…… 야, 이문화. 내가 대출로 해결할 거였으면 내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서 썼지…… 너, 도대체 무슨 짓을…….”

“1억을 검사님이 무슨 수로 갚아.”

“무슨 개소리야! 너, 진짜 내 이름으로 사채 빚 냈어?”

“대출은 일으킨 건 맞는데, 빚은 아니야. 말했잖아. 내가 인보증 서서 오늘 완납하고 약정 해지했다고.”

이불을 휙 던지고 침대 아래로 내려온 요한이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침대 헤드를 짚고 섰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새카맣게 가라앉았던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문화의 멱살을 잡았다.

“개새끼야, 너 내 지장 찍어 간 게 사채 때문이었어?”

“어, 검사님. 왜 이렇게 화를 내지? 빚 갚을 필요 없다고…….”

“그렇다고 내가 사채업자한테 돈 빌렸다는 사실이 변해? 너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끌어내려야 만족할 거야. 어? 이제 나는 은행 대출도 못 쓰고 신용카드도 못 써. 좋아? 신나? 신용 점수 개판인 사람이 어떤 취급 받는지 잘 알면서…… 제일 잘 아는 새끼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내가 네 앞에서 빌빌 기는 꼴을 기어코 보고 싶었어?”

낮게 잠겨 있던 요한의 목소리가 말을 거듭할수록 점점 높아지고 갈라지더니 결국 요한이 크게 외치는 음성은 고함이 아니라 성대가 찢긴 사람이 내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그러나 문화는 자신의 멱살을 꽉 움켜쥔 채 몸을 흔들며 격렬한 분노를 쏟아 내는 요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검사님,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돈이 왜 필요해…… 빌빌거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죽어! 죽어 버려!”

“아이고, 왜 이렇게 흥분했어…… 진정해. 이거 놓고. 응? 검사님.”

그때, 요한의 턱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적신 것은 땀만이 아니었다. 요한은 울고 있었다.

“저기, 검사님…… 갑자기 왜…….”

“갑자기? 너 지금 갑자기라고 그랬어? 야, 이문화. 이 육시랄 놈의 개씨발 조폭 새끼야. 넌 조폭 그만두면 뭐 남냐? 백태호 몰래 빼돌린 돈으로 젊은 졸부 행세도 할 수 있고, 바지 세워 놓은 회사 찾아서 사업가인 양 행세할 수도 있지. 씨발 새끼야…… 난, 내가 검사가 아니면 도대체 나한테 뭐가 남냐?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해서…… 너는 나한테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어서…… 내가 딱 하나 가진 것까지 빼앗아 가려고 그러냐…….”

눈물이 여러 줄기로 나뉘어 온 뺨을 적셨다. 문화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요한의 뺨을 닦아 주려 하였으나 요한이 차갑게 문화의 손을 쳐 냈다.

“너는 기어코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구나…… 씨발 놈아. 그런 거면 일찍 말을 하지 그랬어. 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사람 헷갈리게 했다가 다 뺏어가냐…… 재밌어? 재밌었어? 좆같은 새끼야, 재밌었냐고!”

“내가 왜 그러겠어. 아니야. 재미없어. 검사님 죽는 거 안 보고 싶어. 검사님.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봐. 나 검사님한테 어떻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미안해. 응?”

“개만도 못한 새끼…… 부당 징계 소청 심사 하려는 사람한테 조폭 사채? 그것도 네가 보증을 서서? 씨발, 야…… 너 진짜…… 꼭 그렇게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어? 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서 죽는 꼴이 그렇게 보고 싶었냐고!”

“검사님이 왜 아무것도 아니야…… 검사잖아. 그리고 검사 아니어도 변호사잖아…….”

“닥쳐.”

요한이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문화도 다급히 요한의 눈높이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검사가 그렇게 좋아? 검사 아니면 안 되겠어? 내가 검사님 검사 그만두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요한이 화를 내고 패악을 부리는 건 그저 감내하면 되었지만, 요한이 눈물을 흘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화는 알지 못했다.

문화는 자신의 슬픔은 물론, 타인의 슬픔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요한의 괴로움을 달래 줄 방법이 없어서 차라리 그의 눈물이 분노로 바뀔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돈을 달라고 한 사람은 너였고, 조폭이 조건 없이 돈 주는 거 본 적 있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요한이 더 울기만 할 것 같았다. 요한을 더 울리고 싶지 않았다. 문화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문화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와중에도 툭툭 떨어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내가 잘못했어. 응? 뭐든지 할 테니까, 증거도 증인도 내가 다 모아 올게. 검사님 꼭 원래 자리로 되돌려 줄 테니까…… 검사님…….”

문화는 태어나 처음으로 변명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나 요한의 흠뻑 젖은 눈동자는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열세 살에 백지로 다시 태어나서 오로지 검사가 되겠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살았어. 겨우 검사 되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번듯하게 사람 노릇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다 망쳤어.”

일그러진 요한의 얼굴과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문화의 숨을 멈추게 했다. 요한의 눈물은 이문화의 핏줄을 타고 흘렀다.

요한의 축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때문에 나는 다시 기억도 없고 말도 못 하는 열세 살이야.”

끔찍한 신음을 내며 깨어난 요한은 머리가 터질 것같이 아팠다.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된 것 같아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니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시 잘까.

영원히 안 깨면 좋을 텐데.

일어나.

죽으면 안 돼.

격렬한 자아 다툼에 시야가 뭉개지며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일어나려고 몸에 힘을 줘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갓 잡아 올려 갑판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연체동물처럼 침대에 누워 팔다리를 꼼지락거려 보았다. 손가락 관절을 억지로 굽혀 주먹을 쥐어 보았다.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삶이 이렇게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는지 절망감에 몸이 욱신거렸다.

새삼 자신이 어떤 지경까지 떨어졌는지 자각하고 나자 몸이 다시 굳기 시작했다. 뭐라도 생각해 보려 하는데 머리가 혼탁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아 버렸다.

잠이 요한을 다시 끌어당겼다.

얼마나 잤을까.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한은 다시 한번 손을 굽혀 주먹을 쥐어 보았다. 팔을 올려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손등에 처음 보는 멍이 들어 있었다. 문화에게 달려들었을 때 돌덩이 같은 몸에 부딪치기라도 한 모양이다. 한참을 울고 잤더니 눈이 퉁퉁 부어 시야가 얼보였다.

굴러떨어지다시피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어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굶지 말고…….” 하며 이문화가 걱정하는 척하던 것이 떠올라 사과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지랄하지 마, 씨발 새끼야.”

문화를 향해 욕지거리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씹새끼가 내 신분증도 다 훔쳐 갔어.”

그런 곳에 신용카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요한은 집착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수납장을 다 열어 서랍을 잡아 빼 뒤집어엎었다.

주방을 한참 뒤지다가 힘이 빠져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웠다.

“좆같은 놈.”

그대로 있다가는 입이 돌아갈 것 같아 엉금엉금 식탁까지 기어가서 식탁 다리를 붙들고 일어났다.

살짝 열려 있는 드레스룸 문이 흐느적거리며 침실로 돌아가려던 요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문틈으로 가지런히 걸려 있는 문화의 양복이 보였다. 의연하게 줄을 맞춰 서 있는 옷이 모두 이문화로 보였다.

“감시하냐?”

드레스룸에 늘어선 이문화의 껍데기들이 위압적으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비웃어?”

그는 단정하게 옷걸이에 걸려 있는 문화의 옷을 거칠게 꺼내 모조리 바닥에 내팽개쳤다.

“웃지 마, 씹새끼야.”

여기에도 이문화가, 저기에도 이문화가, 드레스룸 사방에서 문화가 요한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닥쳐, 닥쳐, 닥쳐!”

요한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이미 다 쉬어 버린 목에서 금속 비린내가 훅 올라왔다. 입술도 찢어졌는지 뜨끔뜨끔했다.

완전히 탈진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바닥에 널브러진 양복의 산 위에 드러누웠다.

“씨발…… 더러운 냄새.”

옷더미 위에서 버둥거리던 요한이 익숙한 체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문화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싱크대 문은 죄다 열려 있고 서랍은 모조리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 침실로 들어갔으나 요한은 거기에 없었다. 문화의 심장이 덜컥덜컥했다.

혹시라도 요한이 정말 죽기라도……

생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문화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욕실 세 개와 창고를 뒤졌지만, 요한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재바르게 서재로 가다가 열어 두는 일이 거의 없는 드레스룸 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하…….”

옷더미 위에 누운 요한이 문화의 코트를 덮고 자고 있었다.

꽉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에 피부 아래가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단단하게 얼었던 피부 아래로 미지근한 피가 도는 느낌은 혈관으로 안도가 퍼지는 감각과 똑 닮았다.

“서요한.”

문화가 낮은 목소리로 요한을 불렀다.

“검사님.”

재차 요한을 부르자 잠결에 알아듣기라도 한 양 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싫어? 이름 부르는 것도 싫어?”

문화는 요한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습관처럼 그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물로 흠뻑 젖었던 긴 속눈썹이 몇 가닥씩 엉켜 있었다. 삐죽삐죽하게 뭉친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더니 요한이 뺨을 씰룩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평소에 볼 수 없는 다채로운 표정이 신기해 문화가 검지로 요한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제야 기척을 느꼈는지 요한이 부스스 눈을 떴다.

“왜 이런 데서 자고 그래. 뭐 좀 먹었어?”

“꺼져.”

“일어나야지.”

“상관 마.”

“잘못했어. 검사님…… 나 좀 봐. 응?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책임지고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요한이 덮고 있던 코트를 발로 차서 날려 버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잘못했다고? 네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걸 알기는 해?”

“내가 주제에 안 맞게 욕심을 부렸어. 내 욕심으로 검사님을, 그러니까, 원래 있어야 하는 곳에서 떼어 내 왔는데…… 여기서 편하면 된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왜 자꾸 화만 내는지 몰랐어. 내 생각만 했어. 진짜, 내가 너무 잘못했어.”

문화는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억누르며 뭉크러진 생각을 천천히 쪼개 요한에게 건넸다.

지금 자신의 혼란은 요한이 겪어 온 일에 대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요한이 온몸으로 외치던 말들을 돌이켜 보면 요한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응?”

“잘못했다며. 그다음은?”

“용서, 아니…… 용서를 빌지는 않을게. 왜냐하면…….”

“용서를 빈다는 건 용서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하는 거니까. 그리고 네가 하나 크게 착각하는 게 있는데 도대체 너 따위의 사과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지? 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 네가 어떤 의도로 했든지 아무 상관 없어. 죽일 생각으로 사람을 죽여서 살인죄를 선고받든 어쩌다 실수로 사람을 죽여서 과실치사죄를 선고받든 사람은 죽었어. 이미 죽은 사람한테 살인이든 과실치사든 그게 뭐가 중요해?”

“평생 사죄하면서 살게. 정말이야. 어떻게든 보상할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너 같은 인간을 너무 많이 봤어. 죄송하다, 잘못했다,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 처음에는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처럼 빌고 또 빌어. 정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헌신적으로 용서를 구해. 시간이 지나. 억울해져.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왜 나를 이렇게까지 못된 사람으로 만드나.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때부터는 자기가 피해자가 되지.”

문화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안 그럴 거야. 정말이야.”

“너,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응. 좋아해. 진심이야.”

“강간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지위를 과시하려는 전시형 폭행이고, 그 어떤 생명체도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 폭력을 쓰지 않아. 무슨 변명을 둘러대도 전부 다 핑계지. 넌 어차피 좆을 구멍에 박고 싸는 건데 섹스와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겠지. 내가 동의하지 않았잖아. 너랑 섹스하겠다고 하지 않았잖아. 너는 내가 너랑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무시했어. 네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소유욕이나 통제욕이지. 사람은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대상이 아니야. 넌 나를 물건으로 취급했어. 너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물건도 쓸모가 있을 때는 아낌 받을 수 있겠지. 그게 다야. 너한테 내가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증오해. 경멸해. 너는 나를 사람이 아니게 했어. 용서하지 않아.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싫어할 거야.”

* * *

요한은 이문화의 호화로운 서재를 꿰차고 앉아 노트북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며 막연하게나마 무언가가 떠오르거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눈에 걸릴 때마다 곧장 자신의 검찰 이메일로 메시지를 남겼다.

휴대 전화에 저장해 두었던 음성 메모며 GPS 기록은 클라우드와 이메일로 분산 저장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문화는 지난 밤 요한이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겠노라는 말을 들은 후 그림자까지 희미하게 탈색된 채로 비틀거리며 집을 나가 그때까지도 귀가하지 않았다.

비록 실제 감정보다 많이 과장해서 폭언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요한은 자신의 말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후회하지 않기 때문에 요한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 큰 사내새끼가 다른 사내새끼 앞에서 질질 짠 건 약간 쪽팔린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문화를 식겁하게 할 수만 있다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또 울 수 있었다. 바짓가랑이 붙잡고 통곡이야 못 하겠는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변명을 늘어놓고 요한의 기색을 살피던 이문화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후련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거센 산바람을 정면에서 맞은 것 같은, 한여름의 뜨거운 모래밭에 서서 커다란 파도를 온몸으로 뒤집어쓴 것 같은 후련함이었다. 요한의 뱃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어둠이 바람과 파도에 쓸려 몸 밖으로 뛰쳐나간 듯한 통쾌함이었다.

“꼴 좋다, 이문화.”

요한은 노트북 사용 기록을 싹 지우고, 삭제한 내용까지 전부 소거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야 컴퓨터 전원을 껐다.

특수부 압수 수색에 뼈가 굵은 요한은 디지털 포렌식으로 중앙지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따라서 요한이 컴퓨터에 문화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겼다면 그건 전부 유인이나 혼란을 위함이었다. 요한을 백지 천치 취급하는 이문화는 절대로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가죽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요한은 반짝거리는 오크 책상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자신의 기분을 살폈다.

전날의 소란에서 요한이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문화였다. 뻔뻔스럽기가 사막의 낙타 발바닥 수준인 이문화가 요한의 독설 두 번에 그토록 연약하게 흐무러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요한도 혀끝에 보통 아닌 칼을 품고 문화를 난도질하기는 했지만, 제 놈이 무엇 하나 잘한 것 있다고 요한에게 욕 좀 먹었다 해서 걷어차인 들개처럼 깨갱거리며 꼬리 말고 도망친단 말인가.

여느 새벽과 마찬가지로 악몽에서 헤매다 끙끙거리며 깨어났을 때, 요한은 홀로 누워 더욱 광활한 침대가 유난히 차갑다고 생각했다. 뜨끈한 체온에 칭칭 감싸인 아침이 아니어서 그랬던가.

새벽부터 계속 스미는 한기에 어깨가 썰렁해 그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 혀를 찼다.

“설설 기어 봐야 일주일이겠지. 내가 너 내장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요한은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새벽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조사한 내용을 휴대 전화 메모장에 일목요연하게 입력했다.

이문화는 이전에 스크랩 사업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문화는 폐차장 사업을 한다. 폐차장에서 나온 고철은 스크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소나 제철소 고철 수거까지 손을 댄 걸까.

요한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가며 가설 검증에 골몰하느라 서재 문이 열린 줄도 몰랐다.

“흠. 거긴 경우회가 꽉 잡고 있는데…….”

귓불을 스치는 꽃잎처럼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음성이 요한의 상념을 깨트렸다.

“검사님.”

“앗, 씨발…….”

“미안, 놀랐어?”

“아니? 씨발 놈이 보여서 씨발이라고 했는데.”

“이거 검사님 주고 사무실 나가 봐야 해서.”

“거기 두고 꺼져.”

문화는 책상 위에 서류 두 개를 올려놓고 결재를 바라는 듯이 뒷짐을 진 채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러 온 말단 직원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로펌 제안서. 왼쪽은 전직 대법관이 맡아 준다고 했고, 오른쪽은 올 초에 퇴직한 행정법원장 고문으로 붙여 준다는데.”

“오른쪽.”

“제안서는 안 읽어 봐도 되겠어?”

“어차피 소청 심사 하다 보면 올해 다 갈걸. 내년으로 넘어가면 행정법원장 변호사로 합류할 수 있어. 행정 소송 할 때 선임계 다시 내면 돼.”

“그러면…….”

문화는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또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선임계약서. 검사님이 선임하는 거라서 검사님이 자필로 이름 쓰고 서명해야 한다네. 로펌에서 만들어 준 거야.”

세 장짜리 선임계를 대충 훑어본 요한이 서류 두 부에 각각 서명하고 간인까지 한 뒤에 문화에게 가져가라고 턱짓했다.

“사무실 간다고?”

“응.”

“오늘도 안 들어오냐?”

말하고서야 자신의 말투가 꼭 외박한 배우자 바가지 긁는 뉘앙스라는 걸 깨달은 요한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조금 늦을 것 같아. 끼니는 애들 시켜서…….”

“나도 같이 간다.”

“어디를?”

“너 사무실 간다며. 나도 간다고.”

“왜?”

“왜긴 왜야.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지.”

“그게, 오늘은 좀…….”

양손을 깍지 껴서 책상 위에 올린 요한이 안절부절못하는 문화를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뭔데. 말해.”

“T타워 가야 해서.”

“거기가 어딘데?”

“백호빌딩.”

“백태호 그 새끼 이름 호랑이 호(虎)도 아니면서 별 지랄 염병 주접은 다 싸고 앉아 있네. 설마 진짜 타이거 타워라서 T타워냐?”

평소의 요한과 다를 바 없는 적나라한 폭언에 문화는 하마터면 안도의 미소를 지을 뻔했다. 입술을 사리물어 간신히 웃음을 참아 낸 그는 큼큼 목청을 가다듬어 굵고 거친 목소리를 꾸며냈다.

“등기부 등본에는 티그리스 타워(Tigris Tower)로 올라가 있어. 줄여서 T타워.”

“티그리스가 호랑이야. 노망난 영감탱이 같으니. 대가리 잘려서 박제되고 몸뚱어리는 가죽 벗겨져서 로비에 카펫으로 깔려야 정신 차리지.”

“백태호 잡아서 그렇게 해 줄까?”

요한이 눈빛으로 “미친놈.”이라고 욕했다.

“아무튼 나도 같이 갈 거니까 좀 기다려. 씻고 채비하게.”

요한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한 문화는 말 그대로 호랑이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요한을 말릴 수도 없었다. 요한이 하겠다는데 문화가 어떻게 감히 그 앞을 막아서겠는가.

그저 “다음에 가는 건 안 되겠지?” 하며 소심하게 에두른 말을 꺼냈다가 말 없는 눈빛 호통에 “아니야, 아니야.” 하며 고개나 열심히 주억거렸다.

요한과 마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죄이는 듯도 하고, 배가 간질거리는 듯도 하고, 피가 정수리로 몰리는지 귀에서 쏴아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문화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긴장감에 일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말 한마디를 신중하게 골라 건넸다.

“그러면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마 부장이랑 이대한 데리고 백화점 가서 옷 갈아입고 시간 차 두고 오는 건 안 될까?”

“옷은 왜?”

“검사님 옷 양복밖에 없잖아. 양복 입으면 그냥 온몸으로 나 서요한 검사요, 하고 외치는 수준이라…….”

“백태호 때문에? 검사가 백태호 무서워 숨으리?”

“숨으라는 건 아니고. 일종의 눈속임? 그리고 오늘 간부 회의가 있어서 좀, 뭐라고 해야 하나…… 검사님한테 원한 있는 애들이 많이 와.”

“건물 출입구 막고 불 지르면 긴급 방역 대성공이겠는데.”

“부탁할게. 마상식하고 이대한 여기로 보낼 테니까. 응?”

* * *

문화가 백호그룹 본사로 떠나고 얼마 뒤에 마상식과 이대한이 요한을 데리러 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한은 초조하게 입술을 질근거리던 이문화를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요한이 제일 안전할 때는 바로 자신과 함께 있을 때라는 당연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갔을 줄이야. 아무리 조폭이 앞뒤 못 가린다 해도 설마 백호빌딩에서 이문화를 테러하겠는가.

마상식 본인도 백호파 간부이니 서요한 검사나 이문화에게 원한을 품은 인물이라면 그가 이문화의 최측근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고, 이대한은 비록 말단이지만 연암에서 요한과 부딪쳤던 인사들은 이대한이 이문화의 사람이라는 걸 이미 안다.

그런 마상식과 이대한이 모시고 올 젊은 남자가 서요한 말고 또 있겠는가.

고르고 골라 그 나물에 그 밥이라니. 명색이 조폭 대장이면서 믿을 수 있는 부하라고는 달랑 둘이 전부인가 싶어 요한은 이문화가 한심하면서 동시에 약간 측은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정말 위험한 수준의 위협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요한을 쉽게 포기할 것이다. 요한의 기분과 무관하게, 지금 누가 요한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 그의 앞을 막아 줄 사람은 이문화 하나뿐이라는 걸 요한도 알고 있었다.

몇 군데 베여도 신경도 안 쓰겠지. 어쩌면 칼 여기 가져다 박으라고 팔뚝 정도는 일부러 내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우악스러운 힘으로 칼을 빼앗아서 상대방 목을 그어 버리겠지.

상상만으로도 코점막에 피비린내가 달라붙는 느낌에 요한은 치를 떨었다. 요한이 백화점에 가기 싫어서 인상을 찌푸렸다고 생각했는지, 마상식이 조심스럽게 요한을 달랬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사장님께서 백화점 담당자한테 연락하셔서 이미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옷 다르게 입었다고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문화는 자기가 해태 눈깔이라고 남들도 다 그런 줄 아는 건가?”

“저희 사장님, 이유 없는 일은 안 하시는 분이니 따로 염두에 두신 일이 있으실 겁니다.”

마상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에게 반박하지 않고 그저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자기네 보스를 욕해서 기분이 상한 걸 티 내지 않으려 웃는 건지, 아니면 요한이 이문화를 신랄하게 씹어서 통쾌하다는 건지 영 알 수 없는 얼굴로 요한을 수행했다.

세상에서 서요한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우선 첫 번째가 이문화이고 두 번째가 쇼핑이며 세 번째가 옷 챙겨 입는 것이다. 그러니 세 가지가 모두 조합된 일정이 반가울 리가 있었겠는가.

속내는 어찌 되었든, 당장은 T타워에 발을 들이는 것이 더 중요했으므로 요한은 잠자코 마상식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마상식이 공언한 대로 백화점에서는 별로 오랫동안을 보내지 않았다. VIP 전용문 앞에 차가 서자마자 은신 무사처럼 슥 나타난 직원이 요한과 마상식을 전용 엘리베이터에 태워 부잣집 거실처럼 꾸며진 방으로 데려갔다.

“부회장님께서 언질 주신 대로 셀렉트 한 아웃핏입니다.”

전담 직원은 행거에 줄줄이 걸린 옷을 들어 보여 주며 요한의 귀에는 생소한 외국어로만 들리는 설명을 마치 기관단총 내갈기듯이 우다다 쏟아 냈다.

“솔리드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노 워싱 라이트 블루 슬림 스트레이트 핏 진과 코튼과 실크의 믹스로 코튼의 심플함과 실크의 실루엣이 동시에 구현된 저스트 핏 화이트 셔츠입니다. 아우터는 이탈리아산 송치 스웨이드로 팔꿈치와 손목에 패드를 댄 그레이와 브라운 헤링본 체크의 카슈미르 산 캐시미어 100% 노퍽 헌팅 재킷입니다. 탈의실은 커튼 뒷면입니다. 사이즈 아래위로 하나씩 추가 준비되어 있으니 불편하시면 알려 주십시오.”

수상할 정도로 긴장한 채 요한을 흘끔거리던 마상식은 직원이 구두를 집어 들며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려고 하자마자 바로 손을 휘저어 말을 끊어 버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아서 입고 갈 테니까 다른 일 보셔도 됩니다.”

요한은 프라이빗 룸을 나가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고객님.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모자 하나만 주세요.”

“오늘 룩에 매치하실 헌팅캡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요. 야구 모자요. 검은색으로 부탁합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요한은 트레이에 올려져 있던 볼캡 중 가장 수수한 걸 골라 뒤집어썼다.

“됐죠? 가죠. 아, 편의점 들렀다 가요. 마스크 사게.”

“아, 예? 예.”

“마상식 씨. 아까부터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그게.”

난감한 얼굴로 잠시 망설이던 마상식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솔직하게 고백했다.

“직원이 아주 성가시게 굴지 않았습니까. 노골적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그래서 검사님께서 그, 성나셨을까 봐 조금 걱정했습니다.”

“쌍욕하면서 난동 피울까 봐서요? 설마 아무데서나 그럴까요. 민간인한테는 욕 안 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마상식의 뺨이 기묘하게 실룩거렸다.

“오늘은 어인 일로 다 늙은 놈을 데리고 왔나 신기해서 쳐다봤겠죠. 뭡니까? 욕 안 해서 잘했다고 칭찬 스티커라도 주시게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저희 사장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셔서요.”

“뭔데요. 말해 봐요. 그래야 내가 다시는 그 소리 안 하지.”

“어, 음…… 말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민간인은 안 때리신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 마상식 씨한테 한 말 아닙니다.”

넓은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탔으나 고요한 어색함으로 마상식은 숨이 턱턱 막혔다. 게다가 요한의 “어인 일로 늙은 놈을 데리고 왔나.”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상식 씨.”

“흥, 아, 예.”

“욕 안 해요. 소리 안 지릅니다. 사람 민망하게 놀라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말씀하십시오.”

“이문화 원래 호모였습니까?”

“잘 못 들었습니다.”

“이문화 원래 옆구리에 남자 애인 끼고 다녔냐고요.”

마상식은 요한이 무슨 의도로 저런 걸 묻는지 도저히 해독할 수 없어 미미한 공포와 긴장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사장님 성적 취향을 물으신 거라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짧게 만나신 분은 몇 분 계신데 남성분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만난 사람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알 거 아니에요.”

“저희가 사모님으로 모신 분은 아직 없어서 정확히 모릅니다.”

“그럼 스폰은요?”

“잘 못 들었습니다.”

“이문화한테 맞아서 고막 다친 적 있으세요? 왜 자꾸 잘 못 들으실까. 이문화, 남자 스폰서 했죠?”

“아니요. 그러신 적 없습니다.”

“아닐 텐데. 많이 해 본 솜씨인데.”

요한은 “딱 어린 애인 비위 맞추려고 염병 떠는 스폰 영감 돈지랄 스타일인데.” 하며 모자챙을 아래로 내려 얼굴을 그림자 아래로 감췄다.

그제야 마상식은 왜 요한이 ‘늙은 놈’ 운운했는지 알아차리고 필사적으로 보스를 감싸기 시작했다.

“저희 사장님 그런 쪽으로는 별로 관심 없으십니다. 스폰서 제의가 종종 들어오기는 하는데 보시지도 않고 다 치워 버리시고요. 몇 달씩 꾸준히 만나신 분도 아직 없었고, 저희에게 잘 모시라고 지시한 분도 검사님이 처음이십니다.”

“안 물어봤는데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첨언 드리자면, 사장님께 걸레라고 하실 때마다 굉장히 속상해하십니다. 성적으로 방종하신 분 아닙니다.”

“안 궁금합니다.”

저 싸가지를 진짜.

요새 심기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이문화가 온종일 달달 볶아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그의 성깔 더럽고 까탈스러운 애인 뒤치다꺼리까지 하려니 마상식은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마상식은 새삼스럽게 열이 치받아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때마침 도착한 차에 올라타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마상식 씨. 당신은 민간인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면 조용히 갑시다.”

* * *

알록달록한 도표며 테이블이 화려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전체적으로 조도를 낮춰 한층 선명한 대형 스크린과 스크린이 쏟아 내는 빛으로 약간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발표자, 자리마다 마이크가 설치된 거대한 U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중장년 남성 스물댓 명.

회의실 세팅만 보면 번듯한 회사 이사회 같았지만, 불편한 표정으로 가죽 의자에 앉은 참석자 면면을 보면 빼도 박도 못하는 조직 폭력배 회동이었다.

현재 수감 중인 인원을 제외하고 대외적으로는 백호그룹 임원진, 실질적으로는 백호파 간부 전원이 모인 조직 정기 회동이었다.

주제는 신사업, 발표자는 이문화.

“배가 금융 쪽이랑 좀 비슷해요. 괜히 모피아니 해피아니 하는 게 아닙니다. 외부인은 지네 카르텔에 안 끼워 줘요. BH저축은행 때처럼 일단 기존 업체 하나 잡아서 들어가는 게 맞습니다.”

“후보는 골라 놓고 하는 소리겠지?”

“예. 명성해운 오너 해외 자금 담당하던 임원이 퇴직하고 차린 중개 회사인데요, 그랑블루라고. 여기저기 발 걸치고 통행료 받습니다. 명성한테 받은 커미션 절반은 리베이트로 돌려주는 세탁소입니다.”

“되겠어?”

“명성 오너 풍 맞고 쓰러져서 자식들 개싸움 났거든요. 명성 큰 사위한테 백호엔지니어링 사외이사 자리 하나 빼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에이전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당장 명성 리베이트 3분의 1로 줄이고, 3년 이내에 완전히 백호해운으로 만들겠습니다.”

“역시 우리 부회장밖에 없다. 야, 인마. 너희들은 간부라는 것들이 밥 처먹고 술 처마시는 거 말고 하는 게 뭐냐? 똥 싸지르기, 헛발질, 염병…… 사고 그만 치고 이 부회장 하는 거 보고 배워라. 나이는 두 배씩 처먹은 것들이 하는 건 반도 안 되니 내가 성질이 뻗쳐서, 정말.”

아예 싸우다가 뒤지라고 굿을 하시지. 음습한 영감탱이는 그 나이를 먹어도 하는 짓에 발전이 없어요.

문화는 자신을 칭찬하는 척하면서 다른 간부를 자극해 은근하게 싸움을 붙이는 백태호의 이간질에 진저리를 쳤다.

예전부터 백태호는 제 아래의 누가 혼자만 도드라지는 걸 못 참았다. 자신에게 보탬이 될 정도로는 유능해야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까지 유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세력 다툼을 부추겨서 무능한 놈 여럿과 지나치게 유능한 놈을 동시에 처리하는 수작질이라면 지난 십몇 년간 질리게 보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치워지겠다고 예상했던 바이나, 이렇게 빨리 차례가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눅눅하고 으스스한 시선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쳐 돌려주었다. 대부분은 문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거나 딴청을 피웠지만, 개중 몇 명은 문화에게 품은 원한이 퍽 깊은지 제법 오래 눈싸움을 했다. 그놈들의 면상은 특별히 기억해 두었다.

문화라고 좋아서 사업을 백호파에 가져다 바쳤겠는가. 그 정도 충성심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물며 요한이 해 준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년 가까이 준비한 사업이다.

옆구리 살을 뭉텅 베어 바치는 씁쓸함까지 들었지만, 말 그대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할 생각이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일단 겉으로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고깃덩어리를 턱 하니 내놓았다.

독도 좀 바르고, 기생충 알도 좀 심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낚싯바늘을 수십 개 꽂아서. 이른바 이문화의 복심이랄까. 그는 백태호와 좆도 없으면서 혓바닥만 긴 노친네들을 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곰팡내 나는 옛날 조폭의 구태를 벗지 못한 영감들이 그럴듯한 껍데기 속에 숨겨진 악의를 알아차렸을 때는 아마 모든 일이 돌이킬 수 없도록, 그리고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도록 엉켜 버린 뒤일 것이다.

그들이 눈먼 돈을 쪽쪽 빨아먹을 동안 문화는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벌어들인 수천만 달러를 깨끗하고 반짝거리는 자금으로 만들어 한국으로 들여올 것이다.

요한이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지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문화는 검찰 특수통 엘리트 서요한 검사님이 본의 아니게 전수해 준 외국환관리법 지식에 경의와 존경을 표했다.

지금쯤이면 요한이 T타워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특별히 요한을 위해 고른 옷들이 과연 요한에게 잘 어울릴까. 거적때기를 입힌다 한들 어울리지 않을 리 없는 미모이기는 하다만…….

문화의 머릿속은 요한을 상대로 한 갖가지 망상으로 가득해 끈질기게 이어지는 백태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릴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일들 봐. 음, 부회장은 잠깐 남고.”

일단 전원 해산시킨 뒤에 따로 불러도 될 것을 굳이 다른 간부들 앞에서 문화를 따로 남긴 데에서 백태호의 악의가 진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문화는 목젖 언저리까지 남실남실 차오른 살의를 애써 진정시키며 회장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백태호와 마주 앉았다.

“부회장이 올해 서른 몇이지?”

“서른셋입니다.”

“문화가 벌써 서른이 넘었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쩐지 걸쩍지근한 느낌이 들어 문화는 평소의 애매한 미소 대신 뻣뻣한 표정을 고수하며 백태호의 미간 한가운데를 쏘듯이 바라보았다.

“슬슬 장가가야지?”

“글쎄요…….”

“좋은 자리가 들어와서 그래.”

“저 결혼 생각 없습니다.”

“예쁘장한 남자애 하나 싸고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놈의 소문, 빠르기도 하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요한에게 마상식을 붙여 백화점에 보낸 것이기는 하지만, 백태호의 눈은 문화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당연히 별거 아니어야지. 얼른 정리해. 이번 주 금요일 오후 3시에 시간 비우고. 일단 만나 보고, 딱히 싫지 않으면 날부터 잡자.”

“회장님.”

“놓치면 아까울 자리야.”

“어느 좋은 집이 귀한 딸을 근본 없는 중졸 튀기 새끼한테 줍니까. 전 됐습니다.”

“이 새끼…… 설마 너 남자 새끼한테 홀려서 그래?”

홀렸지. 홀려도 단단히 홀렸지.

문화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 중 이산화탄소 비율만큼의 원한을 허파꽈리마다 차곡차곡 적립했다. 백태호와 마주 앉아 헛소리를 듣고 있는 매분 매초가 지극히 싫고, 짜증스러웠다.

“말씀 감사합니다만, 그 자리 다른 사람 주십시오.”

“이문화. 하라면 하는 거지, 누가 말대꾸하라고 가르쳤어. 어?”

“새끼 치는 것까지 관리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죄송한데요, 저 10년 전에 정관 수술해서 평생 새끼 못 칩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백호그룹 회장실은 재물복을 뜻하는 숫자 8이 삼세번 더해져 길함이 극에 달한다는 24층 절반을 썼다. 거들먹거리는 걸 세상 무엇보다 좋아하는 인사가 굳이 한 층을 다 쓰지 않고 절반을 뚝 떼서 일반 직원 사무실로 내준 것도 서쪽은 불길하다는 무당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젊고 생기있는 직원들을 제 불운을 방어할 영혼의 고기 방패로 삼은 것이다. 북한산 자락을 타고 관운이 들어온다는 북동향으로 열리지 않는 큰 창을 내고 복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반지하 월셋집 방문보다 작은 문을 달았다.

그래서 문화는 그 방이 싫었다. 원한과 불신, 악의에 욕심이 지박령처럼 다글다글 붙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에 드나들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백태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좁혀야 했기 때문에.

풍수지리는 그저 핑계이고, 남들이 자신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문을 작게 만든 게 분명하다고 문화는 확신했다.

소화가 덜 된 짜증으로 울렁거리는 명치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22층으로 내려온 문화는 비서 자리에 앉은 사내를 보자마자 체기가 쑥 내려가는 걸 느꼈다.

“잘 모시고 왔어?”

“예. 안에 계십니다.”

“어때?”

“근사하십니다. 새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몸 더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아니, 나 말고.”

“아…… 그냥 뭐, 평범합니다.”

“아이, 씨. 똑바로, 자세히, 육하원칙에 따라서 다시 말해 봐.”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화난 상태입니다.”

막힌 속이 뚫려서 그런가. 산뜻한 기분이 된 문화가 흰 이를 전부 드러내고 시원스럽게 웃었다.

“마 부장, 삽소리 하다가 욕 처먹었지?”

껍데기만 보면 호남에 쾌남에 미남에 다 갖춘 것 같은데, 알맹이는 어찌 저리 쪼잔하고 심술궂은지.

마상식은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서요한이 들었으면 지랄발광을 떨겠지만, 마상식은 둘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특히 성격 면에서.

“원래 연애하면 찌질해진다고 했습니다.”

“뭐라고?”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너무 많이 하지 마. 누가 보면 조기 치매 걸린 줄 알겠다.”

마지막까지 밉상스러운 말을 던지고 부회장실로 쏙 들어간 문화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마상식이 내면의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똑똑? 나 들어가도 되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들어온 문화가 문가에 서서 요한의 허락을 구했다.

“이미 들어와 놓고 왜 물어봐? 안 된다고 하면 도로 나가게?”

“안 된다고 안 할 거 같아서.”

“하여간 웃기는 놈이야.”

평소 같았으면 “웃겼다니 다행이네.” 하며 느물거렸겠지만, 지금의 문화는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할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자신의 책상에 앉아 능숙하게 서류를 뒤적이며 동시에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메모를 적어 나가는 요한의 모습이 지나치게 눈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치 문화가 요한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강렬한 전기 자극이 그의 정수리로 쏟아져 두개골을 뚫고 뇌를 휘저은 후 척추를 타고 내려가 발끝까지 흘렀다.

“옷 잘 어울린다.”

“음.”

“비슷한 스타일로 집에 몇 벌 가져다 놓으라고 할까?”

“야. 너 폐선 스크랩 할 거야?”

“어? 나? 왜?”

“귀신을 속여라. 백태호 눈은 가려도 나는 어림없지.”

간부 회의에 가져갔던 그랑블루 보고서를 팔락팔락 흔들며 요한이 씩 웃었다.

얼마 만에 보는 웃는 얼굴인지. 문화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요한을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입안 살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씹었다.

“야, 이문화. 너 혹시 내가 했던 말 전부 어디 녹음해서 녹취 땄냐?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창의적인 것 같으면서도 진부할까. 애초에 내 머릿속에서 나온 가상 상황인데,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그게 검사님이 짠 시나리오였어? 어쩐지 대단하더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아니, 아니…… 씨발, 뭐라는 거야…… 너. 싱가포르에서 한번 빨래하고 어디로 보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내가 좋은 거 많이 모아 놨거든? 검사님 모함한 애들 로펌 데려가서 자필 자술서 쓰게 했고, 음성 녹취 다 땄어. 인감도 받아서 변호사한테 넘겼고. 그 새끼들 사주한 놈들 족치는 김에 여기 영감들 싹 터는 중이야. 조만간 재미있는 거 많이 나올 거야.”

“그러니까 너는 봐달라고?”

“꼭 그런 뜻은 아닌데…… 봐주면 나야 좋지.”

“뭐 하나 걸리기만 해, 너는. 무조건 무기징역이야.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지.”

앉은 채로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 요한이 고개를 양옆으로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짧게 접어 입은 청바지 밑단 아래로 인대 양옆이 쏙 들어간 날씬한 발목과 동그랗게 불거진 복숭아뼈가 보였다.

문화는 길게 뻗은 종아리와 탄탄한 허벅지, 위로 올라붙은 작은 엉덩이와 흰 셔츠 밑으로 윤곽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군살 없는 등과 툭 불거진 날개뼈를 눈으로 핥으며 요한에게 다가갔다.

“검사님.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싫은데.”

“뭔지 들어 보지도 않고 싫대.”

“어차피 변태 같은 거 아니면 쓰레기 같은 거 아니면 범죄잖아.”

“아닌데. 그냥 평범한 건데. 진짜로.”

“……뭔데.”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될까. 이상한 의미로 안는 거 말고…… 그냥, 프리허그 같은 거. 딱 10초만.”

“싫어.”

“싫구나. 미안.”

살짝 서운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싫다고 하자마자 선뜻 뒤로 물러서는 문화를 돌아보며 요한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넌 성장기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크냐.”

“키 그대로인데?”

“예전보다 훨씬 커 보이는데.”

“아. 요새 운동을 좀 열심히 해서 그런가.”

“조폭들 근육 위로 일부러 지방 붙이던데. 그래야 칼 맞아도 덜 다친다고.”

“그건 허접한 놈들이 하는 이야기고.”

문화가 가소롭다는 듯이 흥 코웃음을 쳤다.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싸우니까 맞지. 한 대도 안 맞으면 되는데 지방이 왜 필요해? 몸만 무겁게.”

“잘난 척하지 마. 칼에는 눈이 없다. 너 옛날에도 여기 찢어진 적 있잖아. 그건 뭐, 일부러 맞아 준 거야?”

요한이 문화의 눈썹 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콧등을 살짝 찌푸렸다.

“응.”

“뭐가 응이야?”

“일부러 맞아 줬다고. 백태호가 재떨이 집어 던지길래 안 피하고 맞았어.”

요한은 그때 자신이 문화에게 누구에게 맞았냐며, 그놈 당장 구속해 버리겠다며 펄펄 뛰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더니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다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문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요한은 곧장 책상 위에 벗어 두었던 모자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코트를 팔에 끼우며 “조폭 사무실 갈 거지? 나도 간다.”라고 하며 문화를 앞질러 방을 나갔다.

* * *

문화는 필사적으로 백태호와 그 일당의 뒤를 캤고, 요한도 필사적까지는 아니라도 맹렬할 정도로는 이문화의 뒤를 캤다.

문화가 마치 부지런히 둥지로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새처럼 거의 매일 두툼한 서류와 하드 디스크를 집으로 가져오면 요한은 문화의 서재 책상을 차고앉아, 일수 걷으러 온 사채업자처럼 자료를 검토했다.

일견 평범해 보이나 결코 평범할 수 없는 나날이 고요하게 흘렀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큰 싸움이나 욕설, 고함이 오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도 고요하고,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수상할 정도로 고요해서 오히려 불온한 매일이었다.

한동안 사무실이며 공장, 공사 현장 가리지 않고 문화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요한은 필요한 정보를 다 모았는지 요새는 로펌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아파트에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따라 감정 상태도 오락가락했던 걸까. 요한의 악몽이 유난스럽게 심해졌다. 거의 매일 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느라 잠을 설쳐서 종일 아픈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문화가 집에 돌아올 때면 요한은 어김없이 소파 위에 잠들어 있었다. 늦은 오후의 해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거실에 요한의 숨소리만 적막하게 울렸다.

그가 발소리도 없이 소파로 다가가 요한이 자는 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요한이 잠에 흠뻑 취한 눈을 반쯤 떴다.

문화는 예전처럼 요한의 머리칼이나 뺨을 함부로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그저 요한이 푹 잠긴 목소리로 “배고파.”하고 말하면 양손에 바리바리 사 들고 온 저녁 거리를 들어 보여줌으로써 화답하고는 식탁 위에 꾸러미를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요한은 멍하니 앉아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뜨거운 물로 그날 치 잡념을 털어 낸 문화가 온몸에서 김을 뿜으며 방에서 나오면 그제야 비척비척 일어나 그날의 첫 식사를 했다.

전날 늦은 밤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어 온종일 쏟아졌다.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으로 길바닥은 끈적끈적하게 녹은 누런 장판처럼 변했고, 반쯤 녹은 낙엽이 구두 밑창에 잔뜩 엉겨 발걸음을 따라 짓이겨진 자국을 너절하게 찍어 대던 날이었다.

그날도 요한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요한의 긴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과 붉은 입술과 매끈한 턱을, 모포 아래로 드러난 몸의 윤곽을 문화는 마치 전시품이라도 살피듯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목 아래로 덮고 있던 얇은 플란넬 모포가 흘러내리며 그의 마른 어깨가 비어져 나왔다.

문화는 방문을 열려다 말고 요한의 형체를 한 그림자를 건너다보았다. 요한의 희고 매끄러운 살갗이 떠올랐다.

요한의 점 하나 없이 새하얀 등, 붉은 입술과 다르게 부드러운 연홍색을 띤 유두, 문화의 것을 밀어 넣으면 배꼽 아래가 살짝 볼록해지는 판판한 배, 소리를 억누르려 이를 앙다물수록 곱아드는 발가락, 기력이 다하면 힘없이 늘어지는 길고 화사한 팔다리.

그 모든 것이 문화를 얼마나 환희에 젖게 했는지. 그런 요한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문화 자신 외에는 없다는 것이 문화에게 세상 모두에게 승리한 것과 같은 은밀한 짜릿함을 선사하여 주었다.

“……이문화?”

요한의 갈라진 목소리가 문화의 상념을 깨뜨렸다.

“피곤하면 더 자. 저녁 차려 둘 테니까 꼭 먹고. 나 다시 나가 봐야 하거든. 아마 좀 늦을 거 같다.”

“응…….”

다시 반쯤 잠이 들었는지, 평소의 요한과 완전히 다른 양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언뜻 봐도 예민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섬세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요한은 아무거나 잘 먹고 더러운 곳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손에 집히는 옷을 대충 집어 입는 무던한 생활 습관을 지녔는데, 유독 잠자리만은 가렸다.

좋은 침구나 깨끗한 방을 따지는 게 아니라 환한 곳에서는 잠을 잘 자지 못하였다.

낮잠은 아무 데서나 구겨져서 잘 자는데, 밤잠만큼은 빛도 소리도 침범하지 못하는 곳에서 눕기를 고집했다.

그런 요한의 습관을 처음 알았을 때, 문화는 사후 예행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관 같은 곳에서 잠이 오냐며 수면 등을 켰다가 요한에게 한참 욕을 먹기도 했다.

어두운 잠자리를 선호하는 것과 별개로, 사실 요한은 어둠을 싫어했다. 깜깜한 것이 싫었다. 며칠에 한 번씩 찾아오는 악몽에 시달리다 소스라치며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혼자 누워 있는 순간이 싫었다.

새카만 방이 언제나와 다름없이 정적에 잠긴 모습을 확인하면 자신이 천지에 오로지 홀로 존재함을 재차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강제적으로 이문화의 집에 얹혀살게 된 뒤로는 찝찝한 꿈에서 깨어나는 밤이 예전만큼은 괴롭지 않았다. 자다가 깨어 보면 불이 켜져 있는데, 그건 요한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슴푸레하게 밝혀진 방에서 문화의 실루엣이 보이면 요한은 자기도 모르게 안심했고, 이문화 따위의 존재에 안심한 자기 자신을 경멸했다.

그 밤도 요한은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눈앞이 어두워 혼자인가 싶었는데, 누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옆에 누운 사람에게서 새어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요한은 이불자락을 가만히 끌어 귀를 막았다.

언젠가부터 요한은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소리는 영원히 끊어질 것 같지 않았다. 문화가 있는데도 등이 꺼진 방이 을씨년스럽게 어두웠다.

그 어둠이 영원히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 자신과 문화가 누워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이 멸망해 버리고 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두 사람이 누운 침대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요한은 소리 없이 일어나 앉았다. 창밖에서 비치는 미끄덩한 빛으로 희뿌옇게 드러난 방 안의 가구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어둠을 눈에 익히는 사이 앓는 소리가 그치고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문화를 보았다. 엄지손톱을 씹으며 커다란 인영을 가만히 살폈다.

한쪽 팔을 눈 위에 올린 이문화는, 병적으로 깔끔한 체를 하여 씻고 옷을 갈아입기 전에는 절대로 침대에 올라오지 않는 이문화는, 아침에 입고 나갔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이문화.”

문화의 팔이 꿈틀하며 고개가 살짝 좌우로 흔들렸다.

“너 뭐야? 죽었냐?”

문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이 달아난 요한은 몸을 반쯤 세워 문화를 내려다보다가 왼쪽 옆구리에서 손바닥만 하게 번진 거무스름한 얼룩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림자가 아닌가 했다. 요한은 손을 뻗어 얼룩 위를 더듬어 보고야 그것이 배어 나온 피로 얼룩진 두툼한 붕대임을 깨달았다.

“야, 이문화. 일어나 봐. 야!”

요한이 온 방의 불을 켰다.

“너 여기 왜 이래? 뭐야, 이거?”

“별거 아니야. 검사님, 저 눈부셔요. 불 꺼주세요. 얼른 자자.”

“웃기지 마.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별거 아니기는 뭐가 별거 아니야. 병원 갔다 왔어?”

문화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요한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설마 칼 맞은 거야?”

“살짝 긁혔어.”

“자상 제대로 치료 안 하면 파상풍 걸려. 응급실 갔다 왔어? 꿰맸어? 항생제랑 파상풍 주사 맞았어? 진통제 받아 왔어?”

“검사님.”

“뭐.”

“자꾸 이러면 나 착각한다.”

문화가 눈을 가렸던 팔을 내리고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찌르는 듯한 문화의 눈빛이 아파 요한이 무릎을 안고 그 안에 얼굴을 숨겼다.

“네가 언제는 제대로 된 생각했다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요한이 웅얼거렸다.

다음 날 요한이 일어났을 때 문화는 옆에 없었다. 요한은 갑작스럽게 외롭다고 느꼈다.

혼자 있다는 감정이 외로움인가? 그렇다면 그는 열세 살부터 줄곧 외로웠다. 그러므로 요한이 외로움을 느낀 이유는 이문화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했다. 그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맥락 없는 꿈에 시달리며 토막잠을 잔 탓에 여전히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 피곤하기 때문이다.

단지 허기와 피로 때문이다.

비틀비틀 주방으로 나간 요한은 냉장고에 가득 찬 음식 재료 때문에, 식기세척기 안에 가지런히 놓인 반짝거리는 식기들 때문에 또 외로움을 느꼈다.

전날 밤의 기묘한 경험이 현실인지 꿈결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의 괴이한 악몽에 이문화가 등장한 것인지, 아니면 괴이한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이문화가 옆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그 순간도 괴이한 악몽의 연장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무슨 꿈 꿨어?”라고 물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개꿈에 무슨 내용이 있어.” 하고 코웃음 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외로워서 화가 났다. 세상의 어떤 것도 요한의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으로 가릴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도, 누구도 그의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 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그 찰나, 작은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이문화.”

서재 문을 벌컥 열고 이름을 부르자 문화가 드물게도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병원 안 가?”

요한은 발소리를 크게 울리며 걸었다. 화가 된 외로움이 약간의 익숙함과 안도감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격렬한 짜증이 되어 혀뿌리로 왈칵 몰려왔다.

“야, 씨. 너 칼 찔린 거 맞지? 지금 드레싱 갈겠다고 여기 숨어 있는 거야? 씨발, 미친 거 아니야? 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너 응급실 갔다 왔어? 안 갔지? 봉합 안 했지? 혼자서 뭐 하는 지랄이야. 이문화 이 미친 새끼야, 네가 무슨 슈퍼 히어로냐? 부검대 올라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병원 가서 제대로 처치 받아라.”

“검사님.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뭘!”

“나 착각한다고. 안 그래도 마음 약해져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오해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오해는 또 무슨 개소리야?”

“혹시 내 걱정해 주는 건가…….”

요한이 “하, 씨발…….” 하며 한 손을 허리에 다른 손을 이마에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조폭 새끼들은 안 그러는가 본데, 원래 사람이 다치면…… 그게 연쇄살인범이건 테러리스트이건, 사람이 다치면 치료해 주는 게 당연한 거야. 인간이잖아. 내가, 후, 매일 개새끼라고 해서 너 진짜 개 됐냐? 아니, 설사 네가 짐승이라고 해도 다쳤으면 걱, 아니, 괜찮은지 살피는 게…… 돌겠네. 야. 이문화. 그럼 칼 찔린 사람 앞에 두고 ‘존나 천벌 받았네. 쌤통이다.’ 이러리? 내가 사이코패스냐?”

몸이 아픈 탓이었겠지만 너른 어깨를 늘어뜨린 채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아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문화를 보니 요한의 가슴이 달각거렸다. 마치 투명한 손에 어깨를 짓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영업 시간에 딴짓할 틈도 있고. 요새 살 만한가 봐?”

문화가 원장실에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휴대 전화를 붙들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남전원은 솥뚜껑만 한 손이 정수리를 후려갈기자 뇌가 진탕되는 느낌에 눈을 꾹 감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남전원이 현기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문화가 휴대 전화를 가져가 그가 한창 빠져 있던 게임을 확인했다.

“남씨발전원 개선생새끼님아. 너 또 도박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도박 안 했는데요?”

“카드 뽑고 있었잖아. 돈 넣고 무작위로 걸릴 때까지 뽑는 게 도박이 아니면 뭔데?”

“카드 도박 아니고 게임인데요? 그냥 캐릭터 뽑는 건데요?”

남전원의 필사적인 항변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문화는 그의 최신형 휴대 전화를 반으로 접어 버렸다.

마치 폴더블 폰을 접듯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 전화를 꺾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과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문화의 표정에 완전히 질려 버린 남전원은 의미 없는 저항을 포기했다.

“다음에는 손목이다.”

“안 해요…….”

“해도 돼. 하고 싶으면 해야지. 근데, 손목 뽑히기 전에 바느질 좀 하자.”

“누구요?”

“나.”

문화가 상의를 벗는 동안 상처 봉합 준비를 하던 남전원이 “세상에 별놈이 다 있네요.”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사장님을 찌를 생각을 했을까요?”

“꼴 보기 싫으면 칼빵 놓고 싶을 수도 있지, 왜.”

“아니죠. 한 방에 못 죽이면 내가 죽을 게 뻔한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냐 이 말이죠.”

“남 원장이 그래도 한국대 나온 게 맞기는 하는가 보네. 도박만 끊으면 무병장수하겠어.”

거즈와 반창고, 안쪽에 피가 가득 차 출렁거리는 하이드로 콜로이드 밴드를 떼어 내고 환부 근처를 소독한 뒤 마취 주사를 놓던 남전원이 “으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깊게 찔리셨네요. 까딱했으면 신장까지 칼날 들어갈 뻔했어요. 아우…… 범인은 잡으셨어요?”

“아까 남 원장이 말했잖아. 어디 있겠어.”

“아, 네…….”

순식간에 죽은 눈이 된 남전원의 손길이 한층 정성스러워졌다.

“혹시 우리 검사님이 연락하면…… 아, 휴대 전화 없지. 혹시 찾아와서 내 옆구리 어쩌고 물어보면 그냥 살짝 베인 거라서 소독하고 드레싱 했다고 해. 쓸데없는 소리 하면 뒤진다?”

“네…….”

“파상풍 주사하고 항생제 주사 맞고 오라던데. 그거 꼭 맞아야 해?”

“당연히 맞으셔야죠…… 약도 드셔야 해요. 처방전도 드릴게요.”

“주사 맞았다고 꼭 말해.”

“……네.”

* * *

서재에 숨어 드레싱을 갈다가 요한에게 들킨 뒤 도망치듯 집을 나간 문화는 이틀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문화가 중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한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대신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문화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현관 쪽으로 나와 있었다.

“병원 갔다 왔어?”

문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처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못해 발뒤꿈치를 비비며 힘들게 구두를 벗는 문화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요한은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쓸어 넘기고는 재차 문화를 채근했다.

“남전원이 뭐래?”

먹먹한 눈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십여 초 정도 눈싸움하듯 문화를 노려보던 요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저 얼굴, 저 표정.

문화는 문득 떠올렸다. 요한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날, 요한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이 바로 저 표정이었다.

덩치만 컸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해서 어영부영 동네 깡패짓이나 하고 다니는 멍텅구리를 바라보던 요한의 눈빛은 이놈을 두들겨 패서라도 사람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반짝거렸다.

실제로 문화가 조직에 발가락 끝 정도를 막 담갔을 때 남들이 그에게 보낸 시선은 대부분이 한심함이 섞인 동정이었으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눈빛은 두려움과 꺼림칙함으로 바뀌었다.

요한은 문화를 볼 때마다 정신 차리라느니 그따위로 살지 말라느니 하며 꾸중했지만, 그의 맑은 눈은 단 한 번도 시혜적 연민이나 무시를 담지 않았다.

남전원에게 사람이 죽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인턴 때만 해도 진짜 너무 힘들었는데, 레지던트 2년 차 정도 되면 다 거의 무뎌져요. 사망 진단 내리고 나면 잊어버려요. 안 그러면 무너지니까요. 의사가 무너지면 다른 환자를 볼 수 없잖아요.”라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요한은 어땠을까. 검사 노릇을 몇 년이나 했으니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어째서 문화를 포기하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문화는 지금의 요한을 보는 것이 버겁고 두려웠다.

요한에게 있어 그때의 이문화와 지금의 이문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진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은 여전히 인간이 인간을 안타까이 여기는 순수한 걱정이기에 문화는 그만 오해하고 또 착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혹시 요한이 이문화라는 인간의 교화를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혹시 아직 이문화에게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 자신에게 기회가 남아 있을지.

문화는 요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도 먼저 건네지 않았으며 요한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고갯짓으로만 대답했다. 대답하라고 요한이 화를 내면 학대받은 개처럼 잔뜩 주눅 든 눈길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요한의 시선을 피했다. 얼굴색도 확연히 나빠졌다.

이문화가 외박한 이튿날 혹시나 해 남전원에게 연락하기까지 했다. 그의 휴대 전화 번호를 몰라 인터넷에서 병원 전화번호를 검색해 전화를 걸면서도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환멸이 올라와 두 번이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가 결국 다시 걸었다.

아무리 미워도 칼에 찔린 놈을 외면하는 건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문화의 상처를 처치한 건 남전원이었다. 비록 구제 불가능한 도박 중독자이기는 해도 실력 자체는 뛰어났던 남전원은 여기저기 베이고 부러진 조폭 진료를 하도 보았더니 이제는 어지간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보다 외상을 잘 봤다. 그 남전원이 직접 환부를 살폈다니 딱히 걱정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정도의 상처라면 문화는 몸이 아프다기보다 마음이 괴로운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괴롭다는 걸까.

이문화 주제에 괴로울 일이 뭐가 있다고.

문화는 딱히 무언가를 본다기보다는 공기 중에 시선을 둔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책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은 지 30분도 넘었다.

부르르 핸드폰이 진동하자 문화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찔거린 바람에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앉아 있던 요한이 책을 주워 문화에게 내밀자 문화가 생경한 표정으로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뭐.”

“이러면 내가 오해하고 싶어진다고 했잖아.”

“하든 말든.”

“차라리 무시해.”

지난 며칠 요한이 보여 준 온건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요한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요한을 바라보는 눈에 곤혹과 경계가 어리어 있었다. 요한의 우려 섞인 눈빛을 받을 때마다 매번 깊이 매료되어 황홀한 기쁨을 느꼈지만, 문화는 그 눈빛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치 양파를 까는 것과도 같았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면 아무것도 없다. 더 벗길 것이 없는 순간이 왔을 때, 요한의 아스라한 온기는 기어코 문화에게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살아오면서 줄곧 그래 왔듯이 문화에게는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다.

“서요한.”

불쑥 이름이 불리자 요한이 뾰족한 눈초리로 문화를 노려보았다.

“불쌍한 놈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거 아는데, 나 불쌍한 놈 아니야. 지금 누가 누구를 동정해.”

문화는 조용한 거리감을 느끼며 자신을 노려보는 요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니까 딱히 안쓰럽게 여길 필요 없다고.”

요한은 문화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순간 요한의 눈에서 반짝인 빛은 무엇일까. 경멸일까, 분노일까, 그것도 아니면 역시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자조일까.

요한의 입술에 조소가 걸렸다. 그러나 문화는 그 눈에 희미하게 스쳐 간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잘난 척하다가 칼빵 맞고 끙끙거리는 꼴 한심해서 좀 봐줬더니 봐준다고 지랄이네.”

“그러니까 봐줄 필요 없…….”

“야, 이 새끼야!”

문화는 깜짝 놀라 상체를 뒤로 물렸다. 요한이 몸을 일으키며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었다.

요한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요한이 차라리 빈정거렸다면,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을 하지 않았다면 문화는 자신을 그토록 혐오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의 발길에 차인 커피 테이블이 흔들리며 머그잔이 넘어졌다. 상아색 카펫에 번지는 커피 자국을 보며 문화는 잘 아물어 가는 중인 상처가 내장 쪽을 향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사이코패스인 줄 알아? 이 새끼가 진짜…… 야, 네가 빌빌거린다고, 좀 불쌍해 보인다고 너에 대한 인상이 바뀌는 거 아니야. 넌 여전히 개쓰레기 인간 말종이고, 나는 여전히 네가 싫어. 그거랑 네가 칼에 찔린 거랑은 별개잖아. 내가 널 가엾게 여기든 좆같은 새끼 뒤지지도 않고 명줄 질기네 하고 아쉬워하든 너랑 아무 상관 없어. 내 감정이고 내 생각이고,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나한테 원하는 거 있어?”

“있겠냐?”

“나 방심하게 해서 뒤통수치려고?”

요한이 발을 쾅쾅 굴렀다.

“너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나 문제 아니고 문화인데.”

“농담할 기분 아니다.”

“문제없어.”

“마음의 병이네.”

“마음의 병?”

자신에게도 마음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듯 문화의 어조에 강한 불신이 묻어났다.

“남전원 말로는 너 괴물 수준으로 빨리 낫는 중이라는데 네 얼굴 꼬라지는 오늘 내일 하는 거 보면 마음의 병이겠지.”

“괜찮아. 진짜로.”

그러나 요한은 지금 문화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이미 아는 표정이었다

“검사님. 나한테 바라는 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해. 나가 죽어라, 백태호 죽이고 와라, 이런 거 아니면 웬만한 건 다 들어 줄게.”

“바라는 거 없다고 말했다. 혹시 있어도 너한테 말하겠냐? 죽어도 말 안 하지. 세상 사람한테 다 떠벌려도 이문화한테는 절대 말 안 해.”

“혹시 검사님 나 좋아해?”

요한이 할 말을 잊고 있자 문화가 다시 입을 뗐다.

“너 설마 나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문화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요한을 불안하게 했다.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이문화의 말이나 행동에 처음에는 매번 격렬하게 분노했지만, 곧 화를 내는 것에도 지쳤고, 이제는 무연을 넘어 무심해졌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미쳤구나. 네가 나라면 너를 좋아하겠어? 내 인생 좆창 낸 새끼를? 뇌에 파상풍균 들어갔어? 칼에 찔린 게 아니라 개한테 물린 거 아니야? 개싸움 하다가 광견병 걸린 개한테 물렸냐?”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초리에서 평소의 요한이 비쳐 보였으므로 문화는 반가웠다.

문화와 말도 섞기 싫다는 듯이 치를 떠는 그 표정이 문화에게 제일 익숙한 요한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알지 못했다. 요한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요한이 그렇게까지 화를 낸 까닭은 그저 평소와 같은 시비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조차 의심하며 의뭉스럽게 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야, 이문화. 네가 옷을 찢으며 재를 뿌리고 반성을 하든 말든, 걷어차인 개처럼 눈치 보면서 내 비위를 맞추든, 뭐를 하든 안 하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

“넌 반성하는 것도 아니고, 눈치 보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넌 그냥 반성하는 척하고 사과하는 척하고 잘못을 비는 척하는 너한테 도취되어 있는 거야. 그래서 네 모든 행동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러니까 빌빌거리는 척하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뻔뻔하게 굴어. 네가 괜히 기죽은 척할 때마다 역겨우니까.”

그 순간 문화의 안에서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무수한 감정들이 무너졌다. 고통, 배신감, 상실에 대한 두려움. 모든 것이기도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이문화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졌다.

문화가 팔을 뻗어 요한을 어깨를 잡아당겼다. 휘청거리며 자신의 품으로 넘어진 요한을 바짝 끌어안고 뼈가 도드라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 잘못했어. 나 불쌍한 놈 맞아. 동정해 줘.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제발.”

상처 때문인지 문화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았다. 요한은 불쑥 문화의 등을 마주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한이 디딘 바닥이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문화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달리던 어느 날 핸들을 틀어 중앙선을 넘고 싶었던 충동처럼, 두 사람의 삶을 일시에 끝장내 버리고 싶었던 끔찍한 욕망처럼, 요한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요한이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보드라운 점막이 찢어지는 느낌에 요한이 반사적으로 문화를 세게 밀어냈다. 마른 몸뚱이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힘에 문화가 그대로 밀려났다.

황황하게 요한을 바라본 문화는 창백한 얼굴에 새겨진 생생한 고통에 당황했다. 요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전에 없이 격렬했으므로 문화는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바보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반성? 사과? 웃기고 자빠졌네. 너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야. 그때 각서라도 썼으면 아직 지장 찍은 인주도 안 말랐을 거다.”

요한이 온몸의 힘을 쥐어짜서 소리쳤다.

긴장으로 오그라든 주먹은 뼈가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굳게 쥐어져 있었다. 머리로 쏠린 피가 끓어오르는지 요한의 정수리가 뜨거웠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꽃 튀는 순간이 지나자 요한은 허탈감에 잠겨 주저앉았다.

“검사님.”

문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시야가 열리고 문화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자신이 거칠게 밀어냈던 크고 단단한 몸이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건드리지 마.”

요한은 안간힘을 다해 문화의 손을 뿌리쳤다.

“나갈 거야.”

“이 밤에 어딜 간다는 거야.”

“나갈 거야.”

요한이 눈을 깜빡거렸다. 시야가 얼보여 문화의 얼굴이 뭉개진 것처럼 보였다.

“옷이라도 따뜻하게…….”

어깨를 붙드는 문화를 외면하며 요한은 거칠게 현관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차가운 대리석 벽에 기대어 허탈하게 웃었다. 입가로 비어져 나왔던 웃음이 얼굴로 번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듯한 감각이 몸 전체로 번졌다.

요한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도록 허물어지고 말았음을 드디어 알았다. 일격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오랜 혼란과 자책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금이 벌어지고 귀퉁이가 떨어지며 그렇게 허물어져 온 것이다.

지저분하게 뒹구는 마음속 잔해를 보며 요한은 조용히 분노했다.

이문화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다. 요한이 분노한 대상은 바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폐허에 누워 있던 자기 자신에게였다.

요한을 허물어뜨린 사람은 요한 자신이었다.

그는 입술을 다문 채 몸을 떨었다. 목이 꽉 죄어 숨이 막혔다. 몸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슬픔이 마음이 허물어진 틈을 타고 뛰쳐나왔다.

속이 답답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더니 허공으로 토해져 나온 슬픔이 도로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진득한 슬픔이 메스꺼워 요한은 연신 토악질했다.

초겨울 밤 추위에 떨면서, 싸늘한 바람을 타고 풍겨 오는 달짝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속에 고인 슬픔을 쿨럭거리며 뱉어 내면서 요한은 웅장한 아파트 앞 벤치에 무릎을 세우고 초라하게 웅크려 앉았다.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이 집요하게 요한의 마음을 언짢게 했다.

자신은 한갓 짐승이었다. 넝마 같은 사람 껍데기 한 겹만 입은 나약한 짐승이었다. 홑겹 가죽 속에서 후회와 억울함과 자책과 수치가 부글거렸다.

황금인 줄 알았던 그의 심지는 그저 도금된 고철이었다. 허물어진 마음에 자괴감이 쏟아지자 번쩍거리던 도금은 금세 벗겨지고 벌겋게 녹슨 속살이 드러났다.

요한은 거기에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기억이 새겨져 있음을 보았다. 또한 모든 기억은 각각의 형태를 지님도 알게 되었다.

요한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잠자코 들여다보며 그 느낌과 생김새를 헤아려 보았다.

“생각하지 마.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버린 뺨을 문질러 닦으며 요한은 황폐한 가슴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세운 무릎 위에 팔을 괴고 거기에 이마를 댄 채 상념에 빠져 있던 요한의 위로 긴 그림자가 내리 덮였다. 어떻게 보아도 커다란 남자는 묵직한 몸을 어찌나 가볍게 움직였는지 다가오는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요한은 고개를 들어 문화를 쏘아보았다. 문화를 보며 옆구리를 물어뜯긴 육식 동물이 비틀비틀 간신히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 흘리는 짐승이 누더기 짐승을 불렀다.

“검사님.”

“꺼져.”

“감기 걸릴라.”

하얀 가로등이 요한의 얼굴을 해쓱하게 물들였다. 문화는 요한의 길어진 머리카락과 웅크린 어깨와 파랗게 얼어 버린 맨발을 보았다.

“너는 처음부터 명줄이 존나 길어 보였어.”

“응?”

“절대로 안 뒤질 것 같더라.”

“검사님이 죽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래.”

“씹새끼. 명줄 존나 길어.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왜 이렇게 화가 났어. 흠…… 당연히 나 때문이겠지만…….”

“사람은 죽을 때 되면 변한다잖아. 너는 아마 백 번 다시 태어나도 안 바뀔 거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어. 속죄는 얼어 뒤질 속죄야.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네 좆대로 하잖아. 이문화. 내가 말했지. 나 너 같은 놈 정말 많이 봤다고. 다음 단계가 뭔 줄 알아? 원망이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러기 시작한다. 네가 나한테 잘했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했겠냐? 너 분명히 일주일 안에 이런다.”

“아니야. 절대 안 그래…… 진짜야, 검사님. 나 한 번만 믿어 주면 안 될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요한의 발갛게 젖은 눈가가 문화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 눈물이 문화의 안에 넓고 깊은 강을 만들었다. 권력, 복수, 부귀영화, 자존심, 지위, 재산, 일신의 안위는 저쪽 강가에 남고 갈망과 애모, 연정과 같이 연약한 마음만 이쪽 강가로 넘어왔다.

“너는 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야?”

“전부 다 내가 잘못했어.”

“…….”

“너무 높은 곳에 있었어. 가까이 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해도 손이 닿을 것 같지가 않아서…… 절벽이든 산이든 성곽이든 무너뜨리면 될 줄 알았어. 내가 있는 데가 바닥이니까, 검사님을 여기까지 끌어내리면 될 줄 알았어. 한번 물어나 볼걸. 잠깐만 내려와 주면 안 되겠냐고. 아니면 내가 거기 올라갈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라도 해 볼걸.”

문화가 요한의 맨발을 커다란 손으로 쥐었다.

그의 손도 차게 식은 지 오래였지만 대리석과 아스팔트 바닥에 차가워지고 밤바람에 얼어 버린 요한의 발에 댈 것은 아니었다. 뻣뻣하게 굳은 발을 주무르며 문화는 요한의 종아리에 이마를 댔다.

요한은 얇은 옷감 위로 단단한 눈썹뼈와 높게 솟은 콧대의 윤곽을 느꼈다. 늘 암벽처럼 단단했던 이문화의 등이 마치 젖은 흙무덤처럼 느른하고 맥없었다.

요한이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아야만 했던 거대한 몸이 지금은 요한의 아래 꿇어앉아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살짝 열렸던 요한의 입술이 다시 닫혔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들어온 걸까.

연속성을 기억하는 요한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슬그머니 움을 틔운 감정에 당황했다. 남의 것인 양 한 발짝 떨어져 방관했던 감정이 요한을 거세게 덮쳤다.

“검사님?”

문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문화의 괴로운 표정에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그 혼란한 순간 요한은 희미하게 깨달았다. 뱃속에서 거세게 들끓는 날것의 감정은 아마도 이문화를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왜 그래?”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비에 젖어 너덜거리는 현수막, 또는 힘차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의 움직임을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요한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알게 되었다. 이문화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묵직하게 불편하게 조여 오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문화를 대할 때마다 뾰족한 것에 정수리를 찔린 듯이 시큰한 통증을 느낀 까닭이 무엇 때문인지.

마음은 여전히 슬픔을 뱉어 내는 중이었지만, 요한의 정신만은 명료해졌다.

역시 이 모든 건 문화의 잘못이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요한의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과신했던, 자기의 마음을 계속 부정했던,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학대했던 요한의 잘못.

마치 강한 파도가 가슴을 치는 듯한 시원함과 족쇄가 풀린 듯한 자유로움이 요한을 후려쳤다.

“내가 몰라서 그랬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아껴 줘야 하는지 몰라서…… 나도 구차한 변명인 거 알아. 정말 미안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있어? 네가 그렇게 태어난 건 네가 선택한 게 아니니까 네 잘못이 아니지. 그런데 너처럼 태어났다고 전부 너처럼 쓰레기처럼 사는 건 아니거든. 너는 너 스스로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거야.”

“알아. 다 내 잘못이야.”

“너 정신병원 입원 병동 가 본 적 있어? 없지? 난 1년이나 입원해 있었어. 말도 못 하고,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거든. 내 이름도 기억 안 났어. 그래도 살았어. 그 뒤로 내 인생은 전부 내가 선택한 걸로 만들었어. 너는 아니야. 나는 너를 선택한 적이 없어.”

“검사님…….”

“너는 내가 선택한 걸 다 빼앗아 가려고 했지. 웃기지 마. 내가 널 선택한 적 없는 것처럼, 내가 선택한 건 남이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미안해…… 너무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주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지.”

요한이 고개를 숙인 문화의 손에서 자신의 발을 빼내 바닥을 디뎠다.

그가 맨발로 바닥에 선 것을 본 문화가 허겁지겁 일어나 자신의 신발을 벗어 요한의 발에 신겨 주었다. 일어선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요한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요한의 왼발에서 커다란 신발이 벗겨져 떨어져 나갔다. 요한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른발에만 신을 걸친 채 앞으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길바닥에 남겨진 자신의 신발을 물끄러미 보던 문화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점점 멀어지는 요한을 따라잡으려 맨발로 달렸다.

무슨 말로 사연의 첫머리를 끄집어내야 할까.

두 사람이 알지 못하던 사이에 계절 하나가 왔다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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