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Devil―May―Care
순간은 스치며 세월은 지나고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원하는 방향으로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나.
변덕스럽고 불친절한 시간은 요한에게도 문화에게도 평등하게 흘렀다.
더위가 한풀 가실 무렵 정직 처분을 받았던 요한은 겨울이 무르익은 추위를 가르며 검찰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징계 무효 확인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문화는 마치 황제를 모시는 내관처럼 요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끈질기게 주위를 맴돌았고, 깔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의 앞날은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처럼 흐리멍덩하고 텁텁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왜?”
“내가 여기로 데리고 왔으니까, 데려다주는 것까지 해야지.”
“됐네요.”
“검사님 차 없잖아…….”
“아이 씨. 그러네. 야, 이 새끼야! 왜 마음대로 남의 차를 폐차하고 지랄이야! 고쳐서 쓰면 되는걸!”
“그 차 A 프레임 구겨져서 어차피 수리 안 됐어. 검사님 그날 진짜로 죽을 뻔했어. 그래서 폐차한 거야.”
그래서 요한의 차에 손을 댄 놈과 요한의 차를 들이받은 놈과 사고를 설계한 놈과 사고를 사주한 놈을 망가진 차와 함께 폐차했지.
문화는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요한은 눈치로 문화가 생략한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어휴…… 지금 가자.”
“벌써? 내일부터 출근 아니야?”
“관사 정리해야지.”
“애들 시켜서…….”
“관사에 누구 들어온 흔적 있으면 뒤진다.”
“미안, 이미 청소 시작했을 거야. 나는 내일 새벽에 출발할 줄 알고.”
“하여간 시키지도 않은 짓 하고 있어. 아무튼. 출발하자고.”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희끄무레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간헐적으로 유리창을 긁고 사라지는 와이퍼를 가만히 노려보던 요한이 불쑥 “야.” 하고 문화를 불렀다.
“배고파?”
“새끼가 사람을 뭐로 보고…… 밥 먹은 지 세 시간도 안 지났는데 설마 배가 고프겠냐?”
“세 시간 지났으면 배고플 수도 있지.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갈까?”
“아니.”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문화를 불렀을 텐데, 요한은 그대로 입을 닫고 다시 와이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빗방울은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 차창에 철퍼덕철퍼덕 부딪혔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어.”
“음…….”
“알아?”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봤겠지. 네 서재에 있던 책에서 나온 말이니까.”
요한이 말을 잇기를 기다리며 문화는 묵묵히 차를 몰았다.
진눈깨비가 우박 섞인 싸락눈으로 바뀌어 따닥따닥 작은 총알처럼 차체를 두들겼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어색한 침묵이 찰박찰박 채여 슬쩍 옆자리를 훔쳐보니 요한은 그새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아픈 역사를 대하는 두 가지 자세 알아?”
톨게이트를 막 지났을 때 요한이 혼잣말하듯 조용조용 속삭였다.
“뭔데?”
“용서는 하겠지만 잊지는 않겠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지만 잊겠다.”
“검사님은 어느 쪽인데?”
“난 둘 다 아니야. 나는 용서도 하지 않을 거고, 잊지도 않을 거야.”
“그렇구나.”
“거의 매일 화내고 지랄할 거야. 가끔 너무 열 받아서 폭발하면 발광도 하겠지. 이문화 나가 죽으라고 소리 지르고 저주하고 원망하고.”
“검사님은 그럴 자격 있어. 당연한 거야.”
문화는 요한의 곁에서 그 화를 받아 내고, 저주와 원망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지랄하는 나 스스로가 지겨울 정도로 너를 상처 주려고 안달하겠지. 너도 잠깐은 미안하다가, 곧 짜증이 나다가, 그다음에는 지긋지긋하다가 아마 마지막에는 환멸이 날 거야.”
“절대로 안 그래.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계속 일깨워 줘.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아마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나도 안 변해. 아니, 내 말은 평생 반성할 거야. 속죄할 거고. 그 마음 변하지 않을 거야.”
“평생을 논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그 영화 대사 있잖아. 꺼지라고 했다고 진짜 꺼지지는 말라고. 검사님이 나가 죽으라고 하면 잠깐 나갔다가 바로 들어올게. 절대로 검사님보다 먼저 안 죽을게. 죽는 거 싫다며. 죽음 무섭다며. 나 손금도 엄청 길고, 사주에서도 120살은 거뜬하게 무병장수한대.”
요한이 킥킥 웃었다. 비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장난기 어린 유쾌한 웃음소리에 핸들을 쥔 문화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고통은 피할 수 없었지만, 괴롭지는 않으려고.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수야 없지.”
“응. 그래. 그래야지.”
“잘못 쓰인 결말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어.”
“…….”
“맺을 결(結)에 끝 말(末). 그걸로 끝이야.”
“…….”
“근데 말이야. 이미 끝난 이야기에는 힘이 없어. 시간이 훨씬 더 강하거든.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사건이나 감정도 언젠가는 흘러가. 아무리 강렬하게 새겨진 기억도 결국에는 “아, 그때 그랬었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용서하지 않아도 잊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그렇구나.” 하는 날이 와. 내 경험상 그래.”
요한의 말을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여 문화는 잠자코 관사 정문 앞에 차를 댔다.
“노력해 봐.”
“뭐를?”
“망한 이야기는 때려치우고 새 이야기 써 보라고. 내가 한번 읽어 보고 싶도록.”
“어? 어?”
“내가 다시 너한테 반하도록 노력해 보라 이 말이야.”
“다시.”라고 했다. 다시 반하게 해 보라고 했다. 다시. 새로이 또. 되풀이해서.
문화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차 문이 닫혔다. 허둥지둥 요한을 따라 내리려고 했는데 안전벨트가 옭아맨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문화는 대신 차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고 요한의 등에 대고 외쳤다.
“검사님! 내일 저녁 사 주십니까?”
“봐서.”
요한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흔들했다.
“내일 퇴근 시간 맞춰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든지.”
등허리를 꼿꼿하게 편 남자가 낡은 현관으로 사라졌다. 하나씩 켜지는 전등이 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계단을 오를 뿐임을 알려 주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멍청하게 아파트를 바라보던 문화는 요한의 관사 창문이 팟 하고 밝아지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빛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라 히끅 한심한 소리를 냈다.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황황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거구의 미남자가 결국 핸들에 머리를 쿡 박았다.
문화의 마음이 부풀다 못해 터진 것처럼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 * *
문화는 황량한 아스팔트 바닥과 쓸쓸한 겨울나무들이 시커멓게 서 있는 검찰청 주차장을 다섯 바퀴 돌고, 휴대 전화를 서른아홉 번 확인하고, 창문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검찰청을 5분 정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아주 천천히 내신 뒤 현관 계단을 올랐다.
비록 낡았지만 깨끗하게 청소된 로비를 가로지르며 야식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다고 아차 했지만, 이미 발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딱 오늘까지만 뻔뻔하게 굴자고 생각하며 문화는 처음 서요한 검사실에 발을 들였던 날을 생각했다.
요한이 아무리 구박해도 뻔뻔스럽게 웃으며 간식과 야식을 사다 나른 지 2주 정도 되었을 때, 요한이 정문에서 꾸벅 인사하고 돌아가는 문화를 잡았더랬다.
무슨 변덕이었는지 몰라도 요한은 약간 쑥스러운 듯 콧등을 긁으며 “시간 괜찮으면 먹고 가든지.”하고는 문화를 검사실로 데리고 갔다.
요한이 피조사인이나 참고인을 데려온 줄 알았는지 덩치 큰 남자를 무심하게 스쳐 보낸 검사실 직원들은 “얘가 요새 매일 야식 사 온 걔예요. 저 아는 동생.”이라고 소개하자 매우 반가워하며 바로 말을 놓고 어깨를 두드리며 가족처럼 환영해 주었다.
그날 먹었던 만두 맛이 여전히 생생했다. 문화가 누군가에게 그토록 환영받았던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었기에.
그 아는 동생이 검사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문화를 혐오하고 배척하게 될까.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 문화! 잘 왔다. 잘 왔어. 안 그래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연락처를 알아야 말이지.”
“저한테요?”
“혹시 서 검사님 어디 계신 줄 알아?”
“네?”
“오늘 복귀하시는 날인데 출근을 안 하셨어.”
“출근…… 을 안 하셨다고요?”
“그러실 분이 아닌데…… 전화도 아예 꺼져 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종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어. 너도 모른다는 거지?”
“어제, 어제저녁에 뵈었는데…… 관사로 잘 들어가셔서…… 오늘 퇴근하시고 밥, 밥 사…… 주, 사 주신다고 해서…… 그런데 안 나오셔, 서 제가, 아…….”
“어제 뵈었다고? 오늘 퇴근 후에 만나기로 했고? 그럼 서 검사님 무단결근 아닐 수 있겠는데?”
서요한 검사실 수사관이 벌떡 일어나 뱅글뱅글 몇 바퀴를 돌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사건이야, 사고야…… 미치겠네. 아, 문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밥도 못 사 주고 보내게 생겼네. 혹시라도 검사님 소식 들으면 연락해. 여기, 여기 내 명함이랑 우리 실무관 명함. 꼭 연락해라?”
“네.”
무려 석 달을 쉬었다가 다시 나왔으니 퇴근이 조금 늦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7시 반까지는 태평하게 기다렸다. 8시 15분이 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넘어간다는 안내음이 나왔다.
혹시 첫날부터 사건 배정을 너무 많이 받아 그런가 해서 염치 불고하고 서요한 검사실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기껏 들은 소식이 이거였다.
서요한 실종.
문화는 검찰청을 나와 관사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계단을 세 칸, 네 칸씩 뛰어 올라갔는데 막상 손이 떨려서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잘못 입력해 하마터면 보안 업체를 호출할 뻔했다.
심장이 펄떡펄떡 자꾸 튀어나오려고 해서 한 손으로 입을 꾹 막고 싱크대 하부장에 옷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당연히 요한은 그곳에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수건 두 장, 팬티 두 개, 양말 한 켤레. 헝클어진 이부자리 위에 대충 벗어 둔 파자마 한 벌. 요한이 아침까지 관사에 있었던 증거는 명징했다.
전날 밤 문화가 관사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 차를 돌렸으니 요한은 분명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관사를 나갔을 것이다.
관사에서 검찰청까지 느긋한 걸음으로 10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차라리 자신을 엿 먹이고 싶어서 도망간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문화는 진심으로 소망했다. 제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틀어박혀서 이문화 꼴 좋다며 킬킬거리며 비웃고 있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나한테 새 이야기 써 보라고 했잖아. 주인공이 없는데 무슨 수로 이야기를 시작해. 이딴 도입부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냐고.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니 동원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었다. 일단 관사에서 검찰청 사이의 CCTV부터 확인해 보아야 했다.
전화를 걸려고 손을 입에서 떼니 곧바로 큽 하고 목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움을 닮은 감정이 북받쳐서 목구멍이 꽉 막힌 터라 몇 번을 심호흡하고 나서야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별일 없어?”
― 별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요. 신오균 전무가 외부 점심 약속 있다고 나갔는데 비서도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하고 모찌도 그 시간에 회사에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뒤를 잡아 봤는데요, 용강 노정일이랑 처음 보는 남자랑 셋이 석화정 별실에서 밥을 먹었더라고요? 누군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까 명성해운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일단 신오균, 노정일, 명성 작은아들 각각 꼬리 붙여 놨습니다.
“명성?”
― 예. 명준호요. 신오균이 원래 바지선 선주들이랑 연이 좀 있어서 맹탕은 아닙니다. 시기도 그렇고 좀 수상하지 않습니까?
“잘했어, 마 부장.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해.”
― 예, 사장님.
“백태호는?”
― 골프 치러 마닐라 갔습니다.
“언제 갔어?”
― 어제 오전 비행기로 나갔습니다.
문화가 요한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 섞인 심호흡을 했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검사님 없어졌다.”
― 설마, 그, 가출…… 하셨어요?
“나도 그런 거면 좋겠는데.”
― 아, 아! 당장 애들 내려보내겠습니다.
“다 보내지는 말고. 일단 이 동네 CCTV 좀 봐야겠다. 누가 가능하지?”
― 제가 얼른 찾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금 대한이한테 연락 왔는데 고승권 상무랑 이동환 고문이 누보에 같이 있답니다.
“누보 VIP 게이트 막아. 네 시간…… 아니 세 시간 안에 갈 테니까 사무실에서 보자.”
마음 한구석에서 문화를 쿡쿡 찌르던 송곳 같던 불안은 결국 업보의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이문화 주제에 감히 찬란한 보석을 욕심냈기 때문일까. 행복할 자격이 없는 인간이 잠시나마 설레고 기뻐했기 때문일까.
역시 그에게 미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는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연신 도리질을 치며 한밤의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 * *
백호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이창훈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정각 7시에 집에서 출발해 차로 30분 걸리는 호텔 피트니스에서 40분간 운동한 후 8시 30분에 업무를 시작했다. 전날 아무리 늦게 귀가했어도 그의 루틴은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그날도 정확히 7시에 집을 나선 그는 아파트 현관 앞에 정차한 낯익은 고급 세단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난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까닭일까.
차 바로 앞까지 와서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늘 뒷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다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매끄럽게 차를 탈 수 있도록 차 문을 열어 주던 기사가 없었다.
“요새 살 만한가 봐? 얼굴이 피었네?”
이창훈은 뒤로 바짝 붙어 선 타인의 체온에 불쾌해할 겨를도 없이 귀를 간질이는 묵직한 저음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타세요. 출근하셔야지.”
어느새 열린 뒷문과 문화 사이에 갇힌 이창훈이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문화가 이창훈의 등을 밀어 뒷좌석에 집어넣었다.
꼴사납게 엎어진 그의 등에 대고 “내려 봐. 나는 너 안 쫓아간다. 704호로 갈 거야.”라고 경고했다.
“너, 너…… 이런 짓 하고 멀쩡할 줄 알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같은 회사에 몸담은 사람들끼리 오붓하게 드라이브하는 건데.”
“현관에 CCTV 있어.”
“알아.”
간선도로에서 샛길로 빠져 한참을 달렸다. 비닐하우스와 작은 공업사가 드문드문 섞여 있는 외곽의 작은 공단을 지나 페인트칠이 벗겨진 음산한 건물 앞에 차가 섰다.
“내려.”
이창훈이 꼼짝하지 않고 있자 문화가 그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 엉겁결에 바닥을 구른 이창훈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팔이 잡혀 그대로 건물 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명준호는 왜 만났어? 걔 자형이 엔지니어링 사외이사로 오기로 했잖아. 명준호 지금 큰 누나하고 개싸움이라는 중인 거 몰라?”
“내, 내가 누구를 만…….”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창훈의 안경이 날아갔다.
“오늘 나랑 왜 드라이브했는지 육하원칙 맞춰서 대답해 봐.”
“몰라!”
주먹 대신 손바닥으로 모욕적인 따귀를 날린 문화가 연달아 같은 자리를 후려쳤다. 순식간에 왼쪽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이창훈이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푹 꼬꾸라졌다.
“창훈이 친구들 데리고 올 테니까 착하게 기다려. 다음에 물어봤는데 또 모른다고 하면 눈알 뽑는다. 음. 어차피 주둥이만 있으면 되니까 미리 뽑고 갈까?”
“하, 하깡간(잠깐만)…… 알하께(말할게).”
“필요 없어.”
순식간에 이창훈의 양복을 벗겨 버린 문화가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피투성이를 두고 일어섰다. 창문 하나 없는 폐건물의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 * *
걸쇠가 뜯겨 나가는 소리 하며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하게 들렸다.
난데없는 폭음에 남자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역광을 등에 져서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는 거구가 성큼성큼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문화는 문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철제 의자를 들어 제일 가까이 있는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남자가 신음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자 안쪽에 뭉쳐 있던 떡대들이 욕지거리를 하며 뛰어나왔다.
문화가 테이저건을 꺼내 주저 없이 쐈다. 두 놈이 감전된 야생동물처럼 몇 번 심하게 몸을 떨며 쓰러지자 미련 없이 테이저건을 버린 문화는 동시에 덤벼드는 나머지 둘을 순식간에 때려눕혔다.
테이저건을 맞고 기절했던 두 녀석이 뒤로 수갑을 차고 무릎을 꿇은 채 문화를 올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양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숙인 문화가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있어?”
“좆까.”
“카트리지 충분히 가지고 왔어. 내가 물어본 말에 제대로 대답 안 하거나 헛소리하면 테이저 갈긴다. 질문 들을 귓구멍이랑 대답할 주둥이만 남기면 되겠지. 일단 좆대가리부터 날려 볼까.”
테이저건으로 가랑이 사이를 조준하자 호기롭게 욕지거리를 하던 놈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문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피가 튀어 거뭇거뭇하게 얼룩진 구두 앞코를 내려다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디 있냐고 물었다.”
“우리 애들 어디다 치웠어.”
문화가 벌떡 일어나 반문한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뒤로 벌렁 넘어간 놈의 어깨를 지근지근 밟자 뒤로 돌려진 팔목이 수갑에 눌려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큭, 허으, 아아악!”
“그게 대답이야?”
걷어차여 바닥을 뒹구는 놈의 옆에서 내내 잠자코 무릎 꿇고 있던 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뭘 찾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시간 끌 생각이면 때려치워. 왜. 누구 기다려? 노정일이 구하러 올 것 같아? 아무도 안 와. 너희 대장님 먼저 가셨으니까 이따 가서 인사나 해라.”
흠칫 놀란 남자가 고개를 깊숙이 숙여 문화의 매서운 시선을 피했다.
“먼저 대답하는 새끼는 살살 해 준다.”
“이문화 이 개새끼야. 사람 죽이고 너는 멀쩡할 거 같아?”
문화에게 밟힌 어깨가 빠졌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뒤집힌 애벌레처럼 버둥거리던 놈이 악을 썼다.
“안 멀쩡할 건 또 뭔데.”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문화의 얼굴은 선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들의 눈에 공포가 깃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아래 애들한테 지시만 했어. 잘못했다. 다시는 접근 안 할게.”
“그건 당사자하고 해결할 일이고.”
“그럼 왜 이러는 건데!”
“내 질문은 하나야. 어디 있어? 몰라?”
하급 포식자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포식자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보다 강한 자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길 수 없는 대상에게는 결코 이빨이나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짙게 떠올랐다.
“사람 죽이면 바, 반드시 잡혀.”
“그때 넌 이미 뒤져 있겠지. 뒤진 놈이 내가 잡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선착순으로 답 받는다. 어디 있어?”
드러누운 놈의 반항에 문화가 미간을 살짝 좁히자 눈치만 보던 녀석이 무릎걸음으로 기어 나와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위험하니까 하지 말자고 했는데…….”
“대답만 해.”
문화가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벌렁 뒤로 넘어져 쿨럭쿨럭 피 섞인 침을 흘리던 남자는 꿈틀꿈틀 몸을 뒤집어 다시 문화 앞으로 기어 왔다.
“정일이 형님이 잠깐 붙들어 놓기만 하면 된다고…… 백호파랑 다 합의 끝났다고 그랬어. 그, 그냥…… 살짝 겁만 준다고, 영상 통화 건다고, 서명만 하면 된다고…… 일 끝날 때까지만 데리고 있으라고 시켰어. 내가 진짜로 그러지 말자고 했는데, 형님이 명성 그, 아, 명준호한테 주식 받기로 했다고…….”
“시팔, 말이 길다?”
“저 새끼가, 자기가 할 테니까 명성해운 자리 달라고…… 그래서 차로 박아서…….”
“차로 박아?”
“사고 난 것처럼 해서 차에 태우려고 했는데 너무 세게 쳤어. 원래는 순양, 순양에 숨겨 두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다쳐서…… 정신도 못 차리길래 내가 일단 병원 보내자고 했는데, 저 새끼가 걸리면 죽는다고…… 백호로지스틱스 물류 창고로 데리고 갔어. 양월동에 있는 거기. 나는 거기로 옮긴 것까지만 알아. 아직도 거기 있는지는 몰라.”
문화는 여전히 드러누워 있는 남자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그의 무릎을 콱콱 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극통과 뒤틀어진 관절이 피부를 찢는 날카로운 통증에 놈이 목이 쉬어라 비명을 내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문 남자 대신 더듬더듬 자백한 남자가 문화의 발치에 엎드려 구차한 용서를 빌었다.
“차로 친 사람한테는 안 죄송하고?”
문화가 쪼그리고 앉아 테이저건으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의 입에서 피와 함께 하얀 조각 몇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살살 하겠다고 했지, 살려 준다고는 안 했다.”
* * *
연암에 설치된 모든 경찰 CCTV를 깡그리 뒤지고 허공에 5만 원 지폐를 뿌리는 수준으로 돈을 퍼부어 예상 경로에 있던 차들의 블랙박스 영상을 구했다.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에 교통사고를 가장해 요한을 납치한 일당 꼬리는 금세 잡았다.
정체를 숨기겠다고 대포차를 쓰고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조폭이 조폭 하는 짓을 모르겠는가.
마침 마상식이 영리하게 군 덕분에 요한의 실종에 명성해운이 끼어 있음을 일찌감치 알았고, 따라서 문화가 명성해운 작업을 보고했던 간부 회의에서 유난히 적의를 드러냈던 노친네들이 사건 배후인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던가. 누가, 어떻게, 왜 그따위 등신 같은 수작을 계획하고 실행했는지 알았다고 해서 요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폭 사무실 몇 개를 때려 부수고, 수십 명을 두들겨 패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요단강을 건넜고, 직접적으로 관여한 놈들은 따로 수집해 두었는데도 요한이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이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고, 침을 삼킬 때마다 혀뿌리가 뽑힐 것 같았으며, 물이라도 삼킬라치면 식도가 불타는 것 같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터질 것 같아 괴로웠다.
크게 다친 요한이 문화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데도 눈치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이 괘씸해 왼쪽 가슴에 칼을 박아 넣을까 하다가, 요한이 은근히 자신의 가슴 근육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떠올라 참기로 했다.
문화의 얄팍한 인내심이 다 닳아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죽여야겠다는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워졌을 때, 마상식이 불현듯 비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검사님 찾았습니다.”
“어디, 어디 있어?”
“세광대 병원에서 찾았습니다.”
열이 치받았던 머리에서 김이 빠지자 문화는 마상식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문화가 혼자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동안 마상식도 요한을 찾아다녔는데, 그가 요한을 발견해 병원에 입원시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시킨 요한을 찾았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요한이가 혼자 병원 가서 입원한 거야? 많이 다쳤어?”
“아닙니다. 검사님은…… 음, 그게…….”
“뭔데, 빨리 말해. 얼른.”
“응급실 주차장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누가 다 죽어 가는 애를 거기다 버리고 갔다는 말이지?”
마상식은 말을 얼버무리려고 하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렇다고 답했다.
누가 버리고 갔냐고 물었더니 그건 모른다고 했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아서 문화는 그를 채근하는 대신 어깨를 두드리며 “마 부장, 고마워.”라고 말했다.
고맙다는 말이 뭐 그리 이상했는지 마상식은 잠시 경직되었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 예…….” 하며 어색해했다.
“요한이 사진 구할 수 있나? 응급실 실려 왔을 때나 중환자실에 있는 모습.”
“나중에 보시면 될 텐데 굳이 사진을요? 지금 미라 상태라서 알아보지도 못하실 텐데요.”
문화는 입술을 질근질근 씹다가 눈을 내리깔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깰 때까지 병원에 죽치고 있을 수가 없어.” 하며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기야 요한이 집중치료실에 있는 동안은 면회는커녕 유리창 밖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니 사진이라도 보고 싶을 수 있겠다 싶어 마상식은 사진을 구하는 자체는 어렵지 않다고 덧붙였다.
“아직 살아 있다고 확인할 수만 있으면 충분해.”
“그런데요, 사장님…….”
“뭐.”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 있기는 하는데……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절명했을 거라고 합니다. 지금도 생명 유지 장치 덕분에 겨우 죽지만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더더욱이나 살아 있을 때 사진 찍어 놔야지. 다음에 볼 사진은 영정 사진일 거 아니야.”
문화는 그 길로 바로 나가 간당간당 숨만 붙여 가둬 둔 놈들을 공들여 압착하고 분해하고 얼리고 갈고 녹여 존재를 지워 버렸다. 이틀에 걸쳐 물리적, 비가시적 뒤처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때 뜨거웠던 것은 식은 뒤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문화의 아파트에는 끓어 넘쳐 인덕션에 눌어붙은 국물처럼 요한이 머물렀던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었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알았는데. 문화의 손에 남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실연이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그리고 요한이 퍽 마음에 들어 했던 다크 그레이 더블 브레스트 슈트와 광택 없는 와인색 실크 넥타이로 단장한 뒤에 백호그룹 본사로 갔다.
백태호의 비서가 별말 없이 안에서 기다리시라며 문을 열어 준 것을 보아하니 팔자 좋게 골프 여행을 갔던 영감이 귀국한 모양이었다.
소파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필 그 시기에 백태호가 한국을 떠나 있던 것이 영 수상했다.
「너 같은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림이 없지. 미련이 없어서 그렇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희로애락이 생기면 어찌 되는지 알아?」
「부서진다.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산산조각이 나. 약점을 만들지 마라.」
「네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무릎 꿇는 사람이 되지 말란 소리야.」
문화가 요한에 대한, 요한을 향한, 요한을 위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화는 산산조각이 나지도 않았고, 요한을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연 백태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는 문화가 산산이 조각나기를, 쉽게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요한을 약점 삼아 문화를 무너뜨려 밟아 버리고 싶었거나, 아니면 문화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싶었거나.
백태호는 납치 감금의 적극적인 동조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악의 있는 방관자였을 것이다.
문화는 멍청하기 짝이 없던 자신을 자책하며 백태호가 퍼팅 연습을 한다고 가져다 놓은 골프채를 집어 들고 호사스러운 회장실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때려 부쉈다.
폐허가 된 방을 빙빙 돌며 문화는 백태호가 돌아오면 온몸의 뼈를 전부 부러뜨린 다음에 장기라는 장기는 다 터트리고 목뼈를 뽑아내는 것으로 치죄하겠다고 다짐했다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을 고통은 지나치게 자비로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초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낮이든 밤이든, 집이든 회사든, 언제건 어디에 있건 문화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공포에 절어 매일 악몽을 꾸고, 신경 줄이 가늘어지고, 결국 바짝바짝 말라가다가 시든 잡초처럼 스러지도록,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문화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고 두려워하도록.
스펀지 위에 넝마 조각을 얹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한때 소파였던 것의 잔해에 앉아 백태호를 기다렸다.
아주 오래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백태호가 왔던 것 같기도 했다.
문화가 사무실에서 난동을 피운다는 연락을 미리 받았는지, 백태호는 문화와 비등비등할 정도로 덩치가 큰 호위를 둘이나 달고 왔다.
“너 이문화 이 새끼! 이게 무슨 짓이야!”
“명원 외국어 고등학교 불어과 1학년 류승재.”
“너, 너…… 감히…….”
“우리 둘이서 단란하게 이야기합시다. 내가 지금 좀 피곤해.”
류승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에 뜨이게 동요한 백태호는 덩치들을 내보내고 부르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 와중에도 문화의 윗사람 노릇을 하고 싶었는지, 상석에 앉은 문화 앞에 서서 비키라는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대충 아무 데나 앉아. 오래 서 있으면 도가니 시릴 나이 아니야?”
“건방진 새끼…….”
분노에 몸을 덜덜 떨면서 백태호가 문화의 사선 건너편에 앉았다.
“애는 건드리지 마라. 이제 열일곱밖에 안 된 어린애다!”
“열일곱 살이 어려? 시팔, 영감탱이가 사람 빡돌게 하네. 노인네 양심 어디 갔어? 중동 갔어? 하긴, 양심이 있으면 애초에 깡패가 되지를 않았겠지. 내가 처음 너 대신 칼 맞았을 때, 그때 나도 열일곱이었어. 열일곱 네 새끼는 어린애고 열일곱 남의 새끼는 고기 방패야?”
“이문화, 너 진짜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 너 죽이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백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심호흡하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원하는 게 뭐냐.”
“류승재가 류정민 아들이더라고? 아, 지금은 개명해서 류진영이야. 류정민 말고 미나라고 불러야 알려나? 에이스도 아니었는데 마이깡 일시불로 털고 런한 RX 미나. 지금은 한강 보이는 주상복합 72평에 살더만. 팔자 폈어.”
“원하는 거 말 하라니까!”
“이창훈 그 씨발 놈. 좆도 아닌 새끼가 뭐 믿고 나대나 싶었는데. 이창훈이 미나 전 남편이더라? 류승재 원래 이름이 이주현이었던데. 근데 승재가 아빠를 너무 안 닮았어. 혹시 뻐꾸기 아빠인가…….”
“애랑 진영이 가만히 둔다고 약속하면 뭐든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마.”
“바라는 거 다 들어 준다고?”
“그래. 백호엔지니어링 사장 자리도 너 줄 테니까…….”
문화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백태호의 안면을 세게 후려쳤다. 고작 주먹 한 방이었지만 온 힘이 실린 펀치에 늙고 탐욕스러운 남자의 얼굴 뼈가 부서지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서요한 살려 내. 이 개좆만도 못한 씨발 새끼야.”
백태호의 귀를 잡아당기며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속삭이던 바로 그때, 회장실 문이 왈칵 열리며 경찰과 젊은 고기 방패와 백태호가 호위로 부리는 덩어리 둘이 들이닥쳤다.
경찰 네 명이 달라붙어도 바닥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백태호를 노려보던 문화가 야차처럼 웃으며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절친하신 용문건설 나종길 회장님이 백 회장님 자제분이 계신지, 혹시 계신다면 어디 계신지 궁금하시다고,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셨다던데요. 이름이랑 주소랑 학교랑 보호자 연락처 알려 줘도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저희 애들 시키시든가요.”
그 말을 끝으로 이문화는 기물 파손과 상해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되었다.
* * *
핸드폰, 시계, 벨트, 지갑을 모두 압수당하고 아무것도 없는 사각형 공간에 앉아 시멘트벽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멸망해 버린 세계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높게 뚫린 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을 타고 창살의 그림자가 반대편 벽에 늘어졌다. 시간이 정지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로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그때의 문화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오세요.”
밖에서 용접이라도 해 버린 줄 알았던 문이 열렸다.
“유치장에서 대기하라고 했는데요?”
“영장 실질 심사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일단 구치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이동하세요.”
“변호사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검찰에서 합니다.”
구속 영장이 기각될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영장 실질 심사가 끝나기도 전에 구치소로 옮겨지는 기분은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묘했다.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두려워하기에 문화는 세상의 어둠을 너무 오래 보아 왔다. 10년 넘게 남의 피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살았으면서도 이제야 구치소 구경을 하게 된 건 그동안 운이 엄청나게 좋았던 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실감 나지 않는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왠지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열일곱 살부터 거의 열일곱 해 동안, 인생의 절반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속에 품고 있던 실체 없는 악의가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고, 그 냄새가 악의를 더욱 팽창시키며, 다시 한층 심한 악취가 피어올랐다.
“뭐 때문에 왔어요?”
구치소로 가는 차 안에서 문화와 함께 탄 교정 공무원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렇게 말은 하더라고. 검찰이 무능하다느니 그러는데, 그건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고. 죄지으면 다 찾아냅니다.”
문화가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아직 어린 태가 남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자 묻지도 않은 말을 떠벌리던 교정 공무원이 입을 꾹 다물고 재빨리 시선을 창밖으로 피했다.
“탈의하세요. 속옷까지 다 벗으세요.”
“아직 구속 영장 안 나왔습니다. 법원에 확인해 보세요.”
“구속이 결정되지 않은 사람은 여기에 올 수가 없어요. 자기가 모른다고 아닌 줄 아나. 절차대로 하세요. 빨리 탈의하세요.”
교도관은 문화의 말을 범죄자의 쓸데없는 고집이라고 치부하는 듯했다. 구속 여부 재확인은커녕 그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남김없이 탈의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누구도 문화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옷을 벗으라고 했지만, 어디에도 탈의실 같은 것은 없었다. 환한 형광등 아래에서, 교도관이 눈을 번득이는 앞에서, 열을 지은 남자들이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인간 이문화의 존엄은 사라지고 그저 죄를 지은 대가로 구치소에 수용된 피의자로서의 이문화만 남았다.
공권력에 함부로 맞서지 말라는 백태호의 말을 숱하게 들으며 지내 왔지만, 문화는 구치소에 들어와서야 공권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공권력이야말로 살아 있는 진짜 권력이었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합법적으로 부여받은 것, 그것이 바로 공권력이었다.
인격적 대우를 박탈당한 지금에 와서야 문화가 이제까지 적대시했던,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치명적으로 그 가치를 훼손하기 위해 공격해 왔던 개념으로서의 공권력은 지금 그가 맞닥뜨리고 있는 실체로서의 공권력으로부터 그를 비호해 주었던 일종의 안전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요한 검사님 목이 뻣뻣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검사라는 이름이 요한에게 주었던 것은 단순한 사회적 지위만이 아니었다. 요한은 그 자체로 위대한 공권력의 상징이자 국가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던 서요한 검사의 패기 넘치는 표정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어 눈을 감았다.
“빨리 옷 갈아입으세요.”
문화는 교도관의 채근에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털어 내고 알몸 위에 지급 받은 속옷을 입었다. 합성섬유가 섞인 저급한 천이 피부를 긁는 느낌이 몹시 불쾌했다.
팬티와 러닝셔츠 바람으로 서 있는 문화에게 교도관이 국방색 관복을 나누어 주었다. 축축하고 무거운 옷에서는 찌든 땀내와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그가 옛날에, 아주 옛날에 입었던 야구복 같았다.
이제 문화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는 쓸모없는 저항은 그만두고 포댓자루 같은 관복을 몸에 꿰고 맨발에 하얀 고무신을 신었다. 옷도 신도 작았다.
얄팍한 고무바닥 아래로 바닥의 한기가 느껴졌다. 심장에서 가장 먼 곳부터 서서히 피가 얼어붙기 시작해 내일 아침에 냉동 시체로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들었다.
얼마나 형편없는 몰골일지 거울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거울 같은 건 없었다.
소매와 발목이 깡똥한 낡은 관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요한이 본다면 허리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벌리고는 큰 소리로 웃을 것이다.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다가 큰 눈에 그렁그렁하게 고인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너한테 딱 어울린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추태를 요한이 보지 못해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영치품 여기에 넣으세요. 중요한 물건은 여기 노란색 봉투에 넣고 나머지는 이쪽 자루에 넣으면 됩니다.”
문화가 법원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이관될 때 돌려받은 휴대 전화와 시계와 지갑을 노란 봉투에 넣고, 나머지 옷가지는 국방색 자루에 쑤셔 박았다.
노란 봉투와 자루를 열어 영치품 목록을 확인한 교도관이 양복 재킷, 양복바지, 셔츠, 팬티, 양말, 구두, 벨트, 손목시계, 지갑, 휴대 전화라고 날림 글씨가 적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서명하세요.”
그는 기계처럼 이문화라고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더니 다른 교도관이 택배 상자 치우듯 문화를 옆으로 밀었다.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의 영치품 목록에 서명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키가 작고 둥근 맥주 통처럼 단단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와 다짜고짜 관복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혈압 재겠습니다. 129에 88.”
평소 110을 넘기는 법이 없던 혈압이 처음 보는 수치로 올라 있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걸까. 문화의 심장이 격렬하게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요한의 몫까지 힘차게 뛰고 있었다.
“샤워장 이동합니다.”
샤워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물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화는 남들 하는 대로 옷을 벗고 샤워장에 들어갔다.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쓰니 정신이 조금은 명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누칠하려는데 물이 끊겼다. 시간제한 샤워기인가 싶어 수도꼭지를 잠갔다가 다시 틀어 보았지만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샤워 끝. 나오세요.”
씻는다기보다는 몸에 물을 칠하고 나와 입구에 놓여 있던 행주처럼 생긴 납작하고 거친 천으로 대충 물기를 털어 냈다. 냄새나는 옷을 다시 입으려고 하니 교도관이 탈의 상태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문화는 차례에 맞추어 커튼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무표정한 교도관이 발 모양 표식이 있는 곳에 정확히 발을 대고 쭈그려 앉으라고 했다.
“반대쪽으로 돌아앉으세요. 바닥 카메라에 안쪽 잘 보이게 엉덩이 더 내려요. 양손으로 엉덩이 잡고 벌리세요.”
남에게 엉덩이와 항문 안쪽을 보이는 것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문화는 요한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굴욕을 견디며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쏘아보던 요한의 강렬한 검은 눈을 떠올리며 문화는 절대로 요한이 구치소에 들어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요한의 성질머리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긍지 높고 고아하셨던 검사님 아니셨던가.
곧 칫솔과 치약과 비누가 든 비닐 파우치와 샤워장에 놓여 있던 것과 같은 납작한 수건과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를 받았다.
사실 문화는 귀가 먹먹해서 교도관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교도관을 따라가기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목구멍 끝까지 들어찬 불안과 싸웠다. 음침한 복도가 지겨울 만큼 길었으므로 자신을 학대할 시간은 충분했다.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다만, 문화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남겨 두고 온 사람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어느 남자가 자신이 홀로 누워 있다는 걸 인정하기 무서워 영영 눈을 뜨지 않기로 결심할까 봐 불안해졌을 뿐이었다.
외부의 빛이 닿지 않는 복도에는 탁하고, 어쩐지 끈끈한 느낌이 드는 공기가 고여 있었다. 무겁게 깔린 어둠을 발로 차며 한참을 걸으니 쇠창살로 굳게 잠긴 문이 나왔다.
철컥거리는 금속 마찰음과 귀를 찌르는 삐― 경고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 문 안쪽으로 철문이 종기처럼 다닥다닥 붙은 또 다른 복도가 나왔다.
감옥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여기가 내 감옥이구나.
문화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를 포함해 여덟 명, 사각형 방에 가득 찬 타인의 숨소리와 타인의 체온과 타인의 체취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요한을 끌어안고 잘 때는 옆자리에서 잠든 남자의 모든 것이 좋았다.
몸 주인을 닮았는지 정갈하고 고른 숨소리며 문화보다 체온이 살짝 낮아 꼭 매끈하게 다듬은 대리석을 만지는 것 같던 피부의 촉감, 문화와 같은 샴푸와 같은 샤워젤을 쓰고 같은 세제로 빤 옷을 입었음에도 산뜻한 초여름 산바람처럼 싱그럽던 체취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침밥을 받자 그제야 문화는 자신이 전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위가 완전히 말라붙은 모양인지 영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아침 식사를 물리고 앉아 있으니 교도관이 접견 신청이 들어왔다며 작은 쪽지를 주고 갔다.
접견 회차: 1회차
접견 장소: 3호실
접견인: 마상식 등 1인
1회차 접견이 몇 시인지 쓰여 있지 않았다.
교도관에게 물어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리는 문화에게 같은 방을 쓰는 수감인이 말을 걸었다.
“접견?”
“네.”
“쪽지 받고 한 5분 있으면 부르러 오니까 일단 여기서 물 빼고 가요.”
“네?”
“접견 나가면 화장실 못 쓰니까.”
“감사합니다.”
아직 구치소 생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몸은 노상 방뇨와 다를 바 없는 감방 변기 상대로 시원한 배설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배출하지 않았지만, 문화는 예의상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소변기에 바가지로 물을 뿌렸다.
문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으니 교도관이 문화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어 주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복도를 걸어, 금속 마찰음과 삐 소리를 넘어, 바깥세상과 조금 가까운 곳으로 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교도관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에 문화는 영화에서나 보던 구멍 뚫린 유리창 앞으로 나갔다.
“사장님.”
“뭐 하러 왔어.”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사람 잡아다 구치소 넣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갑자기 구치소로 옮기셨다는 소식 듣고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영치금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여기도 밖이랑 똑같아서 돈 없으면 힘들다고 그러네요. 일단 제가 사입 되는 건 다 챙겼는데, 혹시 영치금이나 사입 물건 모자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매일 오겠습니다. 박 변호사 같이 왔습니다. 바로 이어서 변호인 접견 신청할 겁니다.”
“너.”
“예, 사장님.”
“한동안 외국 나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제가 나가면 회사는 누가 챙깁니까. 박 변호사가 매일 변호인 접견 올 거고요, 지금 저번에 거기…… 로펌에서 팀 짜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몸 잘 챙기세요. 영양제 넣어 드렸으니까 꼬박꼬박 드시고요.”
“상식아.”
“회사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업장이랑 애들 잘 단도리 하고 있겠습니다.”
마상식은 문화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고개만 꾸벅 숙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접견 종료를 알리는 경보음이 울렸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접견장까지 10분을 걷고 접견 대기실에서 30분을 기다렸는데 고작 10분 만에 바깥세상과의 접점이 차단되었다.
사장이라는 놈이 멋대로 일을 벌여서 구치소에 처박혔는데도 첫날 아침 일찍 접견을 온 것을 보면 마상식은 문화가 벌인 사달에 딱히 마음을 쓰지 않는 듯했다.
사실 문화는 첫 접견인은 백태호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개판을 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 백태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건대 자신의 구질구질한 꼴을 반드시 확인하러 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어 다행이라고 문화는 생각했다.
백태호는 단 한 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문화가 언제든 자신을 팔아넘기고, 발을 빼고, 손을 씻고,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회로 돌아간다니, 애초에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문화의 손은 오래전부터 붉은색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애초에 누구의 인정을 바라고 벌인 일도 아니었다. 이해도, 공감도, 감사도, 용서도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일반 접견실을 나가자 교도관이 반대편 복도로 문화를 인도했다. 변호인 접견실은 마치 기차역 대합실처럼 북적거렸지만, 문화와 바깥세상을 가르는 방범창도 대화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하여 듣는 교도관도 없었다.
불룩한 눈 아래가 점점 처지다 못해 턱까지 늘어지는 건 아닐까 싶은 박 변호사가 문화를 보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증거 불충분이라 구속 영장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검찰이 전투적입니다.”
“어쩔 수 없지.”
“기소 전에는 최대 열흘까지만 구속할 수 있거든요. 아마 구속 기간 연장될 것 같아요. 전관 통해 알아보니 기소 결정 아직 안 난 것 같습니다. 지금 혐의 말고도 추가 혐의를 자꾸 붙이려고 해요.”
“그러든지 말든지.”
“변호인단 크게 꾸릴 겁니다. 판검 전관 다 끼워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 예정이에요.”
문화는 시큰둥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혹시 기소장에 혐의 추가되면 혐의 사실 전부 인정하실 겁니까?”
“추가 혐의? 뭐?”
“그, 살인이요.”
“증거 있대?”
“증인도 물증도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정할지 부인할지에 따라 재판 방향이 달라져요. 검찰 증거를 반박해서 무죄를 주장할지, 아니면 형량 낮추는 데 집중해서 전략을 세울지 차이죠.”
“박변 의견은?”
“구속 영장 청구할 때 걸린 혐의들은 초범인 거 고려하면 그렇게 큰 형량 나올 건 아닙니다.”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은 문화가 테이블에 넙죽 엎드려 웅얼거렸다.
“그러면 안 했다고 해.”
“제일 중요한 변수가 서요한 검사입니다. 아직은 의식이 없지만, 만약에 깨어나서 검찰에 협력하면 많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만 되면 내가 더 바랄 게 없겠다.
문화는 혀뿌리까지 튀어나왔던 말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오래 묵은 거북이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문화를 지그시 응시했다.
“검찰도 경찰도 너무 성급합니다. 아무래도 백 회장이 손을 쓴 것 같아요.”
딱히 이유를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쓰레기처럼 살다가 쓰레기통에서 인생을 마감할 남자가 하나 있을 뿐이니까.
33년, 수만 번 밥을 먹고 수만 번 배설해 온 이문화의 육신이 처절한 지랄 염병 끝에 도착한 곳은 결국 걸레 같은 인생에 딱 어울리는 구치소였다.
어디에서 끓어오르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문화의 몸을 휩쌌다.
문화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 죽음의 일부는 그가 직접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어떤 죽음에서도 슬픔이나 아쉬움 따위는 느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죽음이라는 두 글자에 문화의 서른셋 인생이 통째로 달라붙어 위태롭게 흔들렸다.
요한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불과 며칠 전에 내가 다시 너에게 반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해 보라고 말했던 사람이 얼마나 처참하게 뭉개졌는지 알게 되었을 때도 문화는 오래지 않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며칠 사이에 요한이 겪었던 끔찍한 일들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서요한의 일이었지 이문화의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자기 일도 아닌 데에 인생을 걸었다.
문화가 매미 유충처럼 어두운 흙 속에서 살다가 17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의 바람을 쐰 순간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맴맴 울며 부르짖을, 17년에 또 17년 그리고 그 뒤로 17년의 17배만큼의 세월을 걸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서요한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걸었다는 것도 말만 거창하지, 실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유능한 검사가 어느 날 갑자기 성공 가도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떨궈지는 세상에서, 또는 한때 유망주로 불렸던 고교 야구 선수가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변두리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내내 진창을 구르며 살아온 조직 폭력배가 평생 처음으로 한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검사님께 해코지한 놈들 가만 안 둘 겁니다.」
「검사님 괴롭히는 사람들 죽여 줄까?」
문화는 새삼 자신과 같은 인간은, 깨달음이 너무 늦은 어리석은 인간은 역시 누군가의 악몽으로 끝나는 삶 외에는 달리 갈 길이 없구나 절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화는 남은 인생에 아무 미련도 없었다. 운이 좋아 무사히 풀려난다 한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죄 선고를 받아 교도소로 옮겨진다 해도 이제까지의 삶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보다 좀 더 냄새나는 쓰레기가 되어 있을 뿐이지 않겠는가.
이문화의 인생은 전부 ‘그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냥 야구를 하고, 그냥 주먹을 휘두르고, 그냥 학교를 그만두고, 그냥 개싸움을 벌이고, 그냥 시키는 일을 하고, 그냥 살다가 문득 돌아보니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생각한 대상이 바로 서요한, 요한이었다.
그의 인생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의 강렬한 무언가가 없었다.
서울중앙지검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요한을 보았던 날, 서울중앙지법 재판정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던 서요한 검사를 보았던 날, 문화는 온종일 우두커니 넋이 빠져 있었다.
서요한 검사가 외친 날카로운 단어들이 둥둥 울리다가 문화의 인지 너머로 사라졌다.
판사에게 쫓겨나 법정을 나가던 요한의 당당한 눈빛에서 엿본 굳건함과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생생한 불꽃에 문화는 드디어 평생을 갈구해 온 ‘무언가’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점점 들떴다.
그는 무엇보다 매력적인 진수성찬이었다. 처음 요한에게 접근하려고 작업하던 무렵에는 자신의 설렘이 천하의 백태호를 물 먹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거로 생각했으나, 요한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처음 요한을 보았을 때 그가 뿜어내던 기운의 덩어리와 그를 둘러싼 주변의 공기며 상황 같은 것들이 전부 되살아나면서 시간이 멈추고 간혹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당혹감이 엄습하고는 했다.
기어코 요한을 강제로 억눌러 몸을 취했을 때도 그랬다.
문화는 요한과 몸을 겹칠 때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공백에 빠져들었고, 홀린 듯이 하반신을 움직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격렬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마치 심해의 바닥을 기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도대체 왜 느껴지는지 수도 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감정은 이문화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으므로.
문화의 검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참고인이 아니라 피고인으로서, 심지어 구치소에서 검찰청으로 출두하게 된 문화는 교도관에게 전신을 샅샅이 훑어진 뒤에 금속 탐지기를 지났다.
정신적으로 이미 녹다운이 된 문화에게 수갑이 채워졌다. 그는 맨살에 닿는 금속의 차가운 촉감에 진저리를 쳤다.
그걸로 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도관은 문화에게 수갑을 찬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지시했다.
수갑 위로 파란색 포승줄이 묶였다. 마상식이 넣어 준 영치금으로 사 입은 하늘색 수형복과 파란 포승줄이 묘하게 잘 어울려 문화가 허탈하게 웃었다.
요한은 짙은 파란색이 아주 잘 어울렸다. 요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서요한 검사는 거의 항상 미드나이트 블루와 로열 네이비 사이의 짙푸른색 양복을 입었다.
문화가 요한을 처음 본 날도 요한은 짙은 파랑을 두르고 문화의 마음에 파랑을 일으켰다.
그때 문화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마 푸른색 양복이 마치 서요한 검사의 파르라니 날 선 기상을 형상화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기억과 망상과 소원과 후회가 어지럽게 뒤섞여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문화를 선두로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두 명이 뒤에 엮었다. 마치 굴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코끝에 비린내가 훅하니 끼쳐와 문화는 숨을 멈췄다.
코를 닫고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철망이 쳐진 유리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구치소에 들어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았건만, 백 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바깥세상이 생경했다.
내 발로 저 길을 다시 걷는 날이 올까?
……요한이 다시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참담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문화의 바로 뒤에 묶였던 남자가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지만, 모든 언어가 문화의 귓바퀴를 스쳐 지나갔다.
문화가 자신의 말을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무어라 중얼거리던 남자는 교도관의 주의를 받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버스에서 내린 문화는 검찰청 유치인 보호소로 안내되었다. 안내되었다기보다는 임시 감방에 다시 가두어졌다. 수갑과 포승줄을 풀어 주길래 잽싸게 팔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계속 묶여 있던 팔이 자글자글 저려서 열심히 양팔을 주물렀다. 손 아래로 열흘도 안 되는 사이에 눈에 뜨이게 체적이 줄어든 근육이 느껴졌다.
다 부질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검사실 이동하겠습니다.”
다시 수갑과 포승줄에 묶인 문화는 검사실 앞에서 박 변호사와 처음 보는 젊은 변호사를 만나 함께 검사실로 들어갔다.
“수갑하고 포승줄 좀 풀어 주시겠습니까?”
박 변호사가 교도관에게 깍듯하게 묻자 교도관이 검찰 수사관을 흘낏 바라보았다.
“그러세요.”
수사관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교도관이 포승줄과 수갑을 걷어 갔다.
몸이 자유로워진 김에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겠냐고 물으니 검사실 밖으로 나가려면 수갑과 포승줄을 도로 차야 한다고 하기에 문화는 그냥 화장실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번거로움을 견디느니 차라리 참는 쪽이 나았다. 참고 견디는 것은 이문화의 특기이니까.
진득한 인내 뒤에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문화는 참을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문화는 기다리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수사관은 말할 때 눈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문화는 그의 특이한 무표정에 정신이 팔려 이건 무슨 인종일까 멍하니 생각했지만, 알 길은 없었다.
박 변호사가 열띤 말투로 무언가 항변하는 것 같았는데, 문화의 뇌는 어떠한 외부 자극도 해석하기를 거부하여 박 변호사와 검찰 수사관이 나누는 모든 이야기는 그저 번거로운 벌레 떼의 윙윙거림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검사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전날 밤을 새웠는지 꺼칠한 안색에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린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검사의 감정 없는 눈길이 1초쯤 문화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점심 먹고 다시 하죠. 1시 반까지 오세요.”라고 말했다.
거의 일주일을 밤을 새운 다음에도 요한의 얼굴은 해쓱할지언정 늘 단정했다. 눈이 뻑뻑하다면서 커다란 눈을 끔뻑거릴 때면 새카만 속눈썹이 부채처럼 펄럭거렸다.
요한은 저렇게 거칠거칠하게 쉰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고 조곤조곤한 어조가 듣기 좋은 목소리와 만나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가며 말하는 요한의 독특한 말버릇도 떠올랐다.
요한은 정직 중에도 서요한 검사로 살며 몸에 밴 습관을 버리지 못했는데, 문화가 약간의 조롱을 섞어 우리 검사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성난 것도 분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단지 외로운 표정이었다.
문화가 밥을 먹으러 산천 유람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검사실 바로 아래층의 검찰청 유치장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수갑과 포승줄이 꼼꼼하게 채워졌다.
헛된 일은 아니었다. 문화가 말도 안 되는 데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까탈스럽게 굴던 요한이 특히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검찰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그렇게 변하는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인 사람만 검찰에 들어오는 건가 궁금해하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문화의 웃음소리가 포승줄을 너무 세게 조이는 바람에 아파하는 소리로 들렸는지 교도관이 수사관과 대화를 나누는 박 변호사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변호사들은 문화가 그 자리에서 포승줄에 목이 졸려 죽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왕 묶인 김에 아까부터 가고 싶었던 화장실에 들렀다가 가기로 했다.
교도관이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길래 문화는 시치미를 떼고 좌변기 칸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쳐다보지 않는 환경에서 볼일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요한은 문화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앉아서 싸라고 잔소리를 했는데도 서서 볼일을 보는 것이 남성성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꿋꿋하게 서서 변기를 썼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치기 어린 심술을 부리던 얼굴이 떠올라서 문화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박 변호사와 최 변호사라는 젊은 변호사가 문화와 함께 유치인 보호소에 들어와 최 변호사가 일찌감치 배달 주문을 넣어 두었다는 설렁탕을 먹었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요한과 함께 먹었던 어느 새벽의 설렁탕 생각이 나서 울컥하는 바람에 문화는 설렁탕이 식는 것도 모르고 멍하게 있다가 최 변호사가 자신을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채고 남은 밥을 국물과 함께 훌훌 마셨다.
박 변호사와 최 변호사가 진중한 말투로 기소가 어쩌니 공소장이 어쩌니저쩌니 이야기했지만, 문화는 세상 모든 것에 심드렁한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오후 조사에는 검사가 직접 나왔다. 검사는 꼬락서니는 너저분한 주제에 상당한 엘리트주의자인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문화를 향한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문화는 그가 툭툭 던지는 말을 모조리 잡아챈 뒤 추한 보라색 입술을 찢어지도록 벌려 누런 덧니 때문에 한층 더럽게 보이는 주둥이에 도로 처넣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검사의 목을 조르고 싶은 욕구와는 별개로, 지금 문화의 가련한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독두꺼비 같은 검사 놈이었으므로 문화는 일단 피의자의 자세를 지키기로 했다.
검찰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오전의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요한은 문화에게 욕하고 소리를 지르고 패악은 부릴지언정 저따위로 노골적이고 유치한 경멸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어도, 무엇을 보아도 생각이 무조건 요한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문화는 전날보다 조금 더 죽고 싶어졌다.
결국 구속 기간이 만료되었다. 하지만 문화가 구치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구속 기간이 열흘 연장되었다는 통지문을 받았을 뿐이었다.
문화가 접견 온 마상식에게 “작작 좀 귀찮게 하고 꺼져. 여기까지 걸어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하고 짜증을 냈더니 마상식이 씩 웃으며 “이제 좀 사람 같으시네요.”라며 건방진 소리를 했다.
문화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저 할 말을 고르며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을 뿐인데, 마상식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문화가 가만히 있으니 “좀 어렵대요.”라고 기어가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얘기 하러 왔어?”
“그런 건 아니고요.”
“요한이 무연고자야. 죽으면 마 부장이 인수해서 간소하게 장례 치러 줘.”
“누가 죽는답니까.”
“죽으면 그렇게 하라고.”
“수요일에 또 수술 있습니다. 바로 경과 보고드릴게요.”
“안 해도 돼. 죽으면 그때나 알려 줘.”
“아휴. 마음에도 없는 말씀 그만 하세요.”
접견 종료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문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돌아가려는 마상식을 급히 불러 세웠다.
“요한이 화장할 때 내가 맡긴 상자 같이 태워라.”
“아직 안 죽었다니까요!”
* * *
문화와 같은 방에 수용된 이들은 하나같이 검찰 조사를 질색했는데 문화는 구치소에 있느니 검찰청에 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갇혀 있는 게 싫다기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은 게 싫었다. 마음대로 몸을 뒤집을 여유도 없는 공간에서는 생각의 폭도 딱 그만큼으로 좁아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한 덩어리로 뭉쳐 굳어진 덩어리를 꺼내 곱씹어 봐야 올라오는 것은 분노뿐이다.
피로에 찌든 검사의 지리멸렬한 추궁을 듣는 것이 궁상맞게 쭈그리고 있는 것보다는 즐거웠다. 제 놈이 아무리 검사랍시고 잘난 척을 해 봐야 그저 법무부 공무원. 문화는 단 한 번도 검사를 어려워한 적 없었다.
“피해자 백태호에게 상해를 가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셨는데, 피해자를 폭행하러 갔다가 부재중이라는 걸 알고 사무실을 부순 뒤에 피해자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사무실만 부수러 갔는데 왜 피해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셨어요?”
“보여 주려고 그랬습니다. 제가 사무실 부쉈다고.”
“왜요?”
“절연하려고요.”
“절연이요? 조직 탈퇴하려고 사무실을 부쉈다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박 변호사가 항의했다.
“검사님. 조직 탈퇴라니요. 억측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의뢰인은 분명히 절연이라고 했습니다.”
문화가 의욕 없는 목소리로 부연했다.
“호적으로는 안 이어져 있지만, 그 양반을 제가 양아버지로 모셨는데요. 이제 양아들 그만하겠다고 표시하러 갔습니다. 그 정도는 해야 그 양반이 미련을 끊을 것 같아서요. 내가 이렇게 후레자식이니까 앞으로 보지 말자고 이야기는 하고 와야 할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
“백호그룹 주식이랑 자회사 관계로도 복잡하게 얽힌 거로 알고 있는데요. 경영권 다툼은 아니었고요?”
“아닙니다.”
“최근에 백호그룹 내 파벌 싸움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사이가 특히 안 좋았던 임원 몇 명이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어디 있는지 아세요?”
박 변호사가 과장되게 책상을 양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화를 냈다.
“검사님, 자꾸 그렇게 유도 신문하실 겁니까? 혐의 사실도 아닌 거 가지고 자꾸 이러시면 정식으로 이의 제기하겠습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개싸움을 하든 말든, 문화는 조사실 문만 쳐다보며 검사가 이렇게 귀찮게 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백태호를 죽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하십니까?”
검찰 수사관이 문화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딴생각하느라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문화가 멍하게 있으니 박 변호사가 “이제까지 진술하셨던 내용 전부 인정하냐는 확인이신 거죠?” 하고 재확인하는 척하며 문화에게 수사관의 질문을 알려 주었다.
문화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박 변호사를 바라보았더니 박 변호사가 “말씀하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네. 인정합니다.”
문화는 지문을 등록하고 다시 구치소로 돌아왔다. 검찰 조사는 일단 끝난 것 같다는 박 변호사의 말에 인제 공판이 아니고서는 구치소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아쉬워졌다.
* * *
요한은 온몸을 덮치는 격통에 몸서리쳤다.
날카로운 칼로 뼈에서 살을, 살에서 피부를 발라내는 듯한 극렬한 통증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곧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폭주하며 미친 듯이 피를 뿜어냈다. 머리로 너무 많은 피가 휘몰아쳐 뇌혈관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번에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고통이 요한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성대를 울리는 법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억지로 목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말라붙은 목구멍 안쪽에서는 비리고 쓴 냄새만 올라올 뿐 성대 근육이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제 진짜로 죽는구나.
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다. 미처 죽지 못한 육체는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 조금씩 들이쉰 숨을 간신히 꿈틀대는 심장 밑으로 불어 넣으면서 요한은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유하는 정신 사이로 날카로운 기계음이 들렸다.
사지의 긴장이 풀리며 냉정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몽롱했던 의식이 점차 맑아짐에 따라 시야가 완전히 캄캄한 것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근육이 완전히 무력해졌기 때문이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경악이 치달았고, 정말로 죽는다는 실감이 들었다. 이미 시체가 되기라도 한 듯 이가 덜덜 떨리는 냉기가 온몸을 휩쌌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요한의 망상인지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기억 속의 어느 날, 창문 밖을 내다보며 즐겁게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줄 알았던 어머니의 손을 잡아당겼을 때 느꼈던 생생한 공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혼란과 당혹 속에서 이대로 죽는 건가 생각하니 새삼 슬퍼졌다.
죽음은 가장 죽음을 원하지 않는 순간에 불현듯 찾아오는 모양이다. 예고된 종말까지 남은 아주 잠시의 유예는 고작 이렇게 끝날 삶에 끈질기게 집착해 온 어리석음을 회고하기 위함인가 보다.
비틀린 슬픔이 요한을 덮쳤다.
“환자분, 들립니까?”
낯선 목소리가 침잠해 가는 요한의 의식을 잡아당겼다.
“제 말 들리면 오른손 엄지로 버튼 눌러 주세요. 손가락 움직일 수 있습니까?”
요한의 전신에 연결된 수많은 장치가 일제히 절규하기 시작했다.
체외막 산소 공급기와 인공호흡기, 그리고 수십 종류의 약물이 간신히 지탱해 온 실낱같은 목숨이 소생을 외치기 시작했다. 신경 세포가 발악이라도 하는 듯 온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의료진의 다급한 말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며 요한이 죽음과의 사투에서 기어코 승리하였음을 선언하였다.
이후로도 요한의 알맹이는 점멸하는 형광등처럼 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으나 껍데기만은 착실하게 회복세를 탔다.
몸 안과 밖의 출혈이 멈추고 들어오는 족족 새어 나가던 타인의 혈액이 기어코 요한의 체온을 입고 힘차게 혈관을 흘렀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자 드디어 체외막 산소 공급기가 떨어졌으며, 그 뒤로 일주일 뒤에는 인공호흡기 없이 자기 힘으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이 숨 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이 찾아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온갖 약물에 취해 잠들어 있는 요한이 경찰 조사에 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동 없이 누운 요한 대신 수사관들의 집요한 취조 대상이 된 것은 응급실 앞 구급차 주차장에 낡아 헤진 걸레 꼴로 버려져 있던 요한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던 응급실 당직 의사와 요한을 다시 삶으로 끌어온 외과 주치의였다.
“안와, 두개골, 하악, 늑골, 경추, 요추, 장골, 대퇴골…… 골절 안 된 데 찾는 게 빠르겠네요.”
요한의 증세를 기록한 간이 진단서를 들여다보던 수사관이 혀를 찼다.
“교통사고 환자한테 나타나는 전신 골절이 좀 심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요.”
“관통상? 총도 맞았어요?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칼에 찔린 것도 관통상이라고 합니다.”
형사의 질문을 차근차근 답하던 외과의가 차트를 손으로 짚으며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합병증입니다.”라며 발음도 어려운 병명을 몇 개나 짚었다.
“칼은 어떻게 찌르고 들어온 겁니까? 보시기에 한 사람이 푹푹 찌른 거 같아요? 아니면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찌른 거예요?”
“배를 두 군데 찔렸는데 하나는 얕고 하나는 깊습니다. 누가 어떻게 찔렀는지는 저도 모르겠고, 표피부터 몸 안까지 찢어졌어요. 내장은 찔리기 전부터 터져 있었는데 칼이 큰 혈관을 다 잘랐어요. 손목하고 발목에도 칼을 그어 놨습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인대가 심하게 상했어요.”
“미친놈들…… 죽이려고 찌른 걸까요?”
형사가 의사를 향해 몸을 돌리자마자 의사가 선수를 쳤다.
“글쎄요. 찔렀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하게 죽이려고 했으면 경동맥을 자르지 않았을까요?”
“신고를 병원에서 하셨던데요. 어떻게 발견하신 건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작게 한숨을 쉰 의사가 몇 번을 반복해 대답한 내용을 기계적으로 읊었다.
“구급차 주차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응급실 당직의가 구급차 맞으러 나갔다가 엎어져 있는 환자를 발견했습니다.”
“거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아십니까?”
“거긴 CCTV가 없는 곳이라서요. 제 발로 걸어왔을 리는 없으니 누가 데려왔겠지요.”
“환자 신원은 어떻게 파악하셨습니까?”
형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최초 신고 내용과 미리 수집해 놓은 증언을 비교하며 꼼꼼하게 모든 기록을 확인해 나갔다.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요? 누가요?”
“젊은 남자 신원미상 환자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며칠 내내 일대 응급실을 전부 뒤지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들이 환자 신원을 확인해 주었습니까?”
“환자 신분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얼굴이 엉망진창이라 바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사람들이 찾아다니던 사람이 맞았습니다.”
“왜 찾아다녔답니까?”
“모르겠습니다.”
“안 물어보셨습니까?”
“네.”
단호하게 말을 자르는 의사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환자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못하죠. 중환자실에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합니까?”
“언제쯤 환자하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내일모레 3차 수술이 있습니다. 잘 회복되면 다음 주 정도에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환자가 그럴 정신이 있을지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사람이 죽으면 다른 범죄가 되니까요.”
세 번째 수술을 무사히 마친 요한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요한에게 평안과 무력을 동시에 선물해 주었던 수면제와 진통제가 점차 줄어들면서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찾아왔다. 통증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는 일이 잇달았다.
피가 혈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요한은 사람 목숨이 원래 이토록 지독하게 끈질긴 건지, 아니면 자신이 지독하게 이승에 미련이 많은 건지 궁금해했다.
안구 타박이 가라앉고 안압도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붕대를 떼어 낸 눈은 확실하게 시야를 분별하기 시작했다. 부목과 캐스트로 고정된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제대로 꼼지락거렸다.
실명이나 전신 마비는 면했다는 안심이 들자 요한의 심신은 곧 무연함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막 의식이 돌아왔을 때 느꼈던 압도적인 공포는 한없는 자책과 후회로 분절되어 통증보다 고통스러운 적요를 타고 요한의 정신을 좀먹었다.
오전 회진을 받은 정도로 완전히 지쳐 버린 요한의 몸이 잠을 원했다.
눈을 감은 채 몸 안의 소리가 몸 밖의 소리를 압도해 가는 감각에 빠져드는 찰나, 고무 밑창이 바닥에 철퍽철퍽 부딪치는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요한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서요한 검사님.”
굵고 텁텁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에 요한은 잠든 척 고른 숨을 흉내 냈다.
“경찰입니다.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요한이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을, 그렇지만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말투였다.
오늘 대답하지 않으면 내일 또 찾아올 것이다. 내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모레, 모레가 안 된다면 그다음 날. 그는 만족스러운 답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반드시 요한을 거듭거듭 찾아올 것이다.
형사라는 인간들은 대체로 집요한 법이지.
요한은 자는 척을 그만두고 누운 채 입을 뗐다.
“앉을 수가 없으니 누워서 듣겠습니다.”
“수술 잘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요.”
“뭐가 알고 싶으신데요.”
“서요한 검사님 맞으시죠?”
“네.”
이름을 부르는 걸로 대화를 시작했으면서 다시 신원을 묻는 수사관의 속내를 당최 모르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요한은 자신이 한 번도 이름을 말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누구인지 무슨 수로 알았지. 수술 동의서는 누가 썼지. 병원비는 어떻게 처리된 거지.
요한의 어지러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사관은 어설픈 탐색을 건너뛰고 성큼 본론으로 들어갔다.
“짐작 가는 사람 있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기 누워 계신 이유 말입니다.”
“모릅니다.”
“검사님. 그렇게 방어적으로 구실 필요 없으시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검사님 뭐 어떻게 하려고 온 게 아니고요. 병원에서 신고를 했단 말이에요. 범죄 피해자로 보이는 응급환자가 들어왔다고. 그러면 저희는 수사를 해야 해요.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설마 검사님이 보복 무서워서 그러시는 건 아니실 거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모르는 걸 무슨 수로 이야기합니까?”
“차로 들이받은 다음에 칼로 찌른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른다는 말이에요? 짚이는 사람이 없다는?”
“아니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사관은 이런 반응에는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지겹다는 듯이 혀를 찼다.
차에 들이 받혀 전신이 골절되고 내장이 파열된 것도 모자라 칼에 찔리기까지 한 사람이 범죄 피해 자체를 부인한다.
누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끔찍한 일을 상기하고 싶지 않아 일단 부정부터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을 리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 일종의 방어기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사관은 요한의 말을 믿기에는 그와 같은 피해자를 너무 많이 만났다.
“제가 검사님 누구신지 아는 거 이상하죠?”
“…….”
“이문화 아시죠?”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요한의 심장이 갓 아문 혈관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게 혈액을 뿜어냈다. 피가 굉음을 내며 역류해서 귀가 먹먹했다. 온몸의 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름을 거스르고 머리로 몰려갔다.
“이문화하고 무슨 사이에요?”
요한은 수사관이 빠르게 지껄이는 말들이 모조리 허공으로 휘발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모릅니다.”
“검사님, 지금 몇 달째 입원해 있는지 알아요? 수술 몇 번 했는지 알아요? 중환자실에서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아요? 지금 여기 VIP 특실인 건 알고 있어요? 그 돈 누가 낼 거 같아요?”
“모릅니다.”
요한의 속삭이는 듯한 말이 수사관에게 전해졌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억누른 요한은 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며 형사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그런가. 기억이 잘 안 나시나 보네. 다시 올게요. 다음에는 그냥 안 갑니다. 싫겠지만 잘 좀 떠올려 봐요. 쾌차하세요.”
어둠 속에서 요한이 희미하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에는 조금 전의 담담함은 사라지고 사람이 몹시 혼란스러울 때 애써 만들어 보이는 평정이 떠올라 있었다.
* * *
요한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생각할 시간뿐이었다.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순간, 요한은 가슴 깊은 곳에서 후회와 분노와 낙심과 실망을 꺼내서 곱씹었다.
이미 지나 버린,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속을 태우다가는 언젠가 자기 마음마저 씹어 부숴 버릴지도 모르니 그런 무용한 짓은 그만두라고 윽박지르거나 타이르거나 애원할 사람은 요한 곁에 없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까지 많아지니 커지는 분노만큼 생각의 폭은 점점 좁아졌다.
아프기만 한 나날은 이제 싫다. 무력하게 누워만 있는 것도 싫다. 외로운 시간은 질색이다.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요한은 그저 덧없이 바랐다. 하지만 빌어도 빌어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분의 용암이 요한의 배 속에 고여 있다가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타일렀다가 또 생각하고,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또 기대하고, 멋대로 낙담하고, 멋대로 안달했다.
무엇이 부족한 걸까.
요한은 생각했다. 왜 자신의 기도는 통하지 않는지. 그렇게나 간절히 빌고 기도하는데 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의 소원은 애매했다.
만나고 싶다고 기도하면서도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되는지 아니면 자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지 신에게 알리지 않았다. 보고 싶다고 기도하면서도 누구를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보고 싶은지 신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의 앙상한 기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그런 모자란 소망이 올바른 서원일 리가 없었다.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만 쌓일 뿐.
요한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못했다. 맹목이 되어 가는 자신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바라고 바랐다. 이만큼 절실하게 기도하는데 누군가가 내 갈망을 헤아려 주지 않을까.
요한의 불행의 크기는 요한의 실망과 후회를 합친 것만큼 컸다. 실망이란 무언가를 선택하기 전에 기대했던 것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겪는 고통이므로, 요한은 병실 밖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기대하고 매번 실망했다.
동시에 요한은 후회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했더라면 지금과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며 일어나지 않은 과거를 가정하여 괴로워하는 것이 후회이므로 요한은 불합리한 감정에 빠져 버리고 만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며 후회했다.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만 감당할 만하다. 요한의 불행은 너무나도 간단히 눈에 보이는 것이었으므로 요한은 자신의 불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서요한 님, 기도해 드릴까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과 과장을 따라 회진을 들어와 제법 낯이 익은 전공의가 혼자서 요한을 찾아왔다.
멍하니 누워 점적 주사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양만 바라보던 요한이 갑작스러운 방문자를 황망하게 올려다보자 아직 학생티가 남은 젊은 의사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저기, 저희 병원으로 서울대교구 신부님이 원목으로 오시거든요. 원하시는 분께 병자성사랑 병사영성체 해 주세요.”
“그런데요?”
“성함이, 그, 형제님이신 것 같아서요.”
아무도 찾지 않는 특실에 덩그러니 누운 요한은 실은 사회에서 격리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요한의 외로운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의사가 안경 너머로 연민 가득한 시선을 건네왔다.
“제가 신우회 총무거든요. 형제님만 괜찮으시면 다음번 신부님 오시는 날 여기로 신부님 모셔 올까 해서요. 신우회에서도 요한 형제님 쾌유를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의 말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다만 망연해진 상태로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의 턱짓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의사는 눈을 감고 짧은 기도문을 외운 뒤 성호를 긋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 27.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검은 수단의 신부가 내뱉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말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한은 신과의 대화에 새겨진 이물감을 묵묵히 감내했다. 그리고 버릇대로 통찰했다.
판단력이 부족했다. 냉철하게 생각해야 했다. 괜한 도발로 놈들의 화를 부추기지 말았어야 했다. 이문화가 너희를 전부 찢어 죽일 거라고 웃으며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인생은 학교도, 사법 연수원도 아니다.
요한은 온몸이 으스러진 채 버려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여기에는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무리 굴욕적이더라도 최대한 몸을 보존하며 얌전히 구출을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대체 언제 다시 일어난단 말인가.
요한은 그제야 자신의 소원에서 결여된 것이 무언지 깨달았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고, 바라는 것에 상응하는 제물도 없이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세상일이 아무런 고생도 없이 제 생각대로 될 거라 믿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요한이 아는 신은 요한과 똑같이 욕심이 많고, 요한과 똑같이 포기할 줄 모르고, 요한과 똑같이 집념이 깊은 존재라는 것을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요한은 놀랐고, 동시에 무서워졌다. 이번에는 신이 요한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인가. 지금 요한에게는 달리 신에게 내놓을 무언가가 있는가.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 5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신부가 작은 전병을 요한에게 내밀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부가 잠시 그대로 멈춘 채 머뭇거리는 요한의 손이 뻗어 오기를 기다렸다.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
“신실한 믿음과 반성으로 영성체에 임하면 성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사생아라서 세례를 받지 못해 아직 죄를 씻김 받지 못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새하얀 과자 조각을 집어 입으로 옮겼다. 요한이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벌려 그리스도의 살점을 밀어 넣고 혀로 눌러 부쉈다.
“서요한 형제님, 좋은 이름을 가지고 계시네요.”
“…….”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한 제자입니다.”
요한은 모든 수치심을 버렸다. 마치 의대 실습실 해부대에 올려진 실험용 사체처럼 병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침저녁으로 회진을 받고, 검사 때마다 열댓 명의 의사들에게 몸을 진열하고, 하루 두 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물리 치료를 받고, 간병인의 힘을 빌려 몸을 닦고, 링거를 꽂은 채 지시에 따라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삼켰다.
무의미한 반성은 요한이 회복하는 과정 내내 바짝 뒤를 붙어 따라왔다.
열세 살 이후로 요한의 두 번째 천성이 되다시피 한 맹목적인 의욕, 과제를 주면 남의 두 배는 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범생 기질, 폐 끼치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싫어하는 결벽성이 이번에는 요한의 지푸라기가 되었다.
필사적으로 재활에 매달리며 요한은 점차 멀어지는 죽음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느꼈다. 삶을 실감할수록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스며들어 요한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나름대로 삶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던 요한은 어느 날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이성이 삭은 고무줄처럼 끊어졌다.
수십 년을 호수 바닥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시커먼 덩어리처럼, 의식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기억이 이물질처럼 떠올랐다.
이문화.
그것이 요한이 떠올린 갈망의 이름이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요한이 만난 최악의 불운임과 동시에 요한이 만난 유일한 행운이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문화를 애써 미워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문화가 자기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극심하게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환멸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때 요한에게 떠오른 감정은 오히려 연민에 가까웠다.
서요한이라는 존재를 구성해 온 인간적인 요소들이 진물이니 고름이니 하는 것들에 섞여 상처 틈으로 새어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병실 회벽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푸르스름한 복도의 불빛, 환자용 침대를 일으켜 세울 때 나는 작은 모터 소리, 링겔 주사 파우치에 빼곡한 낯선 알파벳, 주치의의 좁은 미간에 새겨진 두 줄의 주름, 간호사의 입술과 눈의 미세한 움직임, 물리치료사의 단호한 목소리와 섬세한 손길,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스민 시간의 흐름과 멈춤.
내밀한 기억이 소리와 냄새와 감촉으로 화해 요한의 안에 새겨졌지만, 돌바닥 위에 물로 쓴 글씨처럼 곧 휘발되어 사라졌다.
이문화.
꿈도 아니지만, 생시도 아니다. 잠결에 보는 형상도 아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거대한 형체가 온몸을 짓누르듯 요한을 덮쳤다.
눈을 뜨고 눈을 감기 전의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때, 그래서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반복될 것을 깨닫고 몸을 움직이고 싶지도 않을 때, 요한의 멍한 눈앞으로 문화의 환영이 믿기지 않는 생생함으로 요한의 몸을 휩쓸었다.
그리고 요한은 비로소 죽은 어머니와 동년배인 여성을 만날 때마다 자신과 똑 닮았다는 얼굴이 세월을 맞아 어떻게 변했을지 그려 보던 버릇을 버릴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간은 멈춘 지 오래이므로 그런 망상은 인제 그만두기로 했다. 더는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반실로 옮겨 온 뒤로부터 언제나 그랬듯이 깊은 잠이 들지는 못했지만, 예전만큼 자주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요한은 그렇게 닳아 갔다. 한여름 지글지글 끓는 아스팔트에 문질러져 녹고, 한겨울 오돌토돌 굳어 버린 길바닥에 비벼져 각을 잃은 타이어처럼 요한은 닳아 갔다.
자신이 닳아 간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점점 미끄러워졌다.
* * *
두 번째 구속 기간 만료 하루 전날, 문화는 드디어 기소되었다.
한글로 쓰여 있지만 대체 무슨 말인지 해독도 안 되는 문서에 지장을 찍으면서 서요한은 용케도 이런 일을 몇 년이나 했구나 싶어 새삼스럽게 신기해졌다.
요한은 문화에게 “그렇게 사람을 못 믿는 건 병이야.”라고 했지만, 막상 아무도 못 믿는 사람은 요한이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남의 잘못을 추궁하다 보면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버릇이 들고, 결국 인간 불신에 걸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상식은 여전히 매일 접견을 왔고, 보석을 신청하겠다고 하기에 문화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첫 공판 기일 전에 보석 허가가 나는 일이 흔하지는 않으니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해서 상관없다고도 했다.
“아직 공소장이 안 와서 변호인 의견서도 방향이 안 잡힌 것 같기는 합니다.”
“알아서 하라고 해.”
“변호사 접견 때 듣는 둥 마는 둥 대답도 잘 안 하신다면서요.”
“알아서 하라니까?”
“언제까지 구치소 계시려고요.”
“시끄러워. 잔소리할 거면 오지 마.”
“검사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시끄럽다고 했다.”
“에크모 뗐습니다.”
“무슨 소리야?”
“제가 안 죽는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죽겠어요.”
“…….”
“변호인단 전부 다 오기는 어려울 것 같고, 수임계 낸 변호사 중에서 대표 변호사 위주로 내일 변호인 접견 오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사장님 뵙고 사장님 의중에 맞춰서 재판 전략 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든지.”
드디어 첫 공판이 잡혔다.
박 변호사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공소장 내용을 설명해 주었지만, 문화는 반의반도 알아듣지 못해 알아서 하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공소장을 이따위로 쓸 거면 진술 확인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했는지. 문화는 예나 지금이나 검사라는 인종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죄 주장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감형 쪽으로 밀어 보는 전략이 어떨까 합니다.”
“마음대로 하시라니까.”
“그러면 반성문을 좀 열심히 쓰셔야 해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반성문을 써?”
문화가 반문하니 박 변호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바로 근엄함을 되찾고 얼굴을 들었지만, 문화는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친 어이없음을 놓치지 않았다.
문화는 여전히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이 없어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것이 없으므로 잘못한 것이 없었다.
구치소는 야구부 합숙소와 별다른 것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때 되면 밥 나오고, 비록 찬물이지만 씻을 수 있고, 때리는 사람 없고,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사식이라는 이름으로 간식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운동시간이 하루에 고작 30분이라는 것과 취침 시간을 제외하고는 절대 누울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고 생각보다 유연한 법이다.
거기서 유일하게 넘쳐 나는 것이 시간인 관계로 문화는 본의 아니게 책을 몇 권 읽었다.
미국의 어느 의사가 쓴 책에 현대 인간들은 모두 살인자의 후예라는 문구가 있었다. 인간이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인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며, 우리가 태어날 수 있던 이유는 우리 조상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화는 피해자의 후예보다는 살인자의 후예 쪽이 마음에 들었다.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문화에게는 개소리로 들렸다.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 문화는 살아남은 자의 후예이며, 그러므로 살아남을 것이다. 요한도 살아남은 자의 후예이므로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구치소의 밤은 희었다. 불야성이 따로 없었다. 이 세상에서 요한과 가장 맞지 않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구치소일 것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고,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밥을 먹어야 하고, 자신의 식기는 제가 씻어야 하고, 절대로 드러누울 수 없는 데다가 9시가 되면 잠을 자라고 강제로 눕히는데 불을 꺼 주지 않는다.
문화는 요한과 침실 불빛 때문에 벌인 온갖 실랑이를 떠올렸다. 요한은 먼저 잠들어 있다가도 문화가 불을 켜면 전조등에 놀란 고라니처럼 벌떡 일어나 짜증을 냈다. 새카만 어둠이 싫어서 풋라이트를 약하게 켜면 요한은 고양이처럼 잽싸게 손을 뻗어 불을 껐다.
켜면 끄고, 켜면 끄고, 몇 번이나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다가 결국 문화가 요한을 깔고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야 신경전이 끝났다.
하지만 그 멍청한 싸움에서 문화가 이긴 적은 거의 없었다. 새벽에 눈을 떠 보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침실은 완벽한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문화는 자신이 어둠에 녹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옆에 누워 있는 하얀 몸을 바짝 끌어안고는 했다. 오직 잠에 빠져 있을 때만 양순하게 안겨 드는 체온은 의외로 몹시 큰 위안이 되었다.
석식을 먹고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문화의 사건이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유명 폭력 조직 내부 알력 다툼으로 큰 싸움이 났고, 그 와중에 공금을 횡령했다고 의심되는 간부 여러 명이 동시에 잠적해서 경찰이 수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문화의 이름이나 신원이 드러날 만한 언급이 없었는데도 다들 문화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본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수인복 위에 붙은 수감번호 색이 문화만 달랐다. 그때까지는 그저 미결수와 기결수의 차이가 아닌가 막연히 생각했는데, 뉴스 보도가 나온 그 날 감방 동기가 조직 폭력배는 입소 때부터 따로 관리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알려 주었다.
문화는 수용 직후부터 ‘조직폭력수용자’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사장이니 뭐니 멋을 부리면서 멀쩡한 척 용을 썼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법의 눈에도 사람의 눈에도 문화는 한갓 조직 폭력배일 뿐이었다.
예상대로 보석은 기각되었다. 박 변호사는 문화에게 판사에게 반성문 잘 보내고 있냐고 물었고, 문화는 한 통도 쓰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한심해 죽겠는데 그래서 더 애틋한 망나니 자식을 보는 표정으로 박 변호사가 문화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검찰 측 증인이 진술을 뒤집어서 재판이 또 미루어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번 기회에 검찰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보려고 해요. 증거도 불법 수집한 거라서 효력 없다고 밀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하라니까?”
문화는 늘 하던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뿐인데 박 변호사가 앞으로 자기 앞에서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며 처음으로 화를 냈다.
수감 5개월 만에 드디어 검찰 구형을 받았다.
징역 3년.
박 변호사는 원래 검찰은 시장에서 흥정하는 것처럼 일단 최고 형량을 부르기 때문에 선고는 훨씬 가벼울 거라고 문화를 달랬다. 문화도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화는 징역 3년이든 징역 30년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요한 없이는 어디에 있더라도 교도소 독방처럼 황량할 것이기에 진심으로 평생을 교도소에서 나오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박 변호사가 또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문화에게 넘쳐 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돈이었기 때문에 마상식은 문화의 돈과 박 변호사의 도움으로 집사 변호사를 여럿 고용해서 문화가 종일 접견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한동안은 문화도 변호인 접견을 반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접견 자체를 거절했다. 문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지겨웠다.
변호사들은 돈을 받고 계약을 한 사람들이라 문화가 거부하든 말든 매일 찾아왔는데, 눈치 빠른 마상식은 매일 오던 접견을 주 1회로 줄였다.
매주 월요일에 접견을 오던 마상식이 수요일에 또 찾아왔다.
문화는 접견을 거부할까 하다가 마상식이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도 접견을 왔다는 건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잠자코 교도관을 따라 지옥에 난 샛길 같은 복도를 걸어 접견실에 갔다.
혹시 요한이 죽은 걸까. 만약 요한이 정말로 죽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요한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지켰으니 그걸로 된 건가.
문화는 인제 혼자서는 이 지긋지긋하고 지리멸렬한 세상을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사장님. 드디어 병실 옮겼습니다.”
“영안실로?”
“아, 진짜. 마음에도 없는 소리 좀 그만하시라니까. 일반실로 옮겼습니다. 인공호흡기도 뗐고요. 이제 진짜로 죽을 일 없어요.”
“상식아.”
“예. 사장님.”
“나 나가야겠는데.”
“네? 어디를요?”
“요한이 혼자 있는 거 싫어해.”
마상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문화를 건너다보다가 정신을 다잡고 중요한 보고를 마저 했다.
“병원에 경찰 엄청나게 들락거려요.”
“어쩔 수 없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아는 건 없지.”
“사장님은 자기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 했대요.”
“상관없지.”
“경찰이 저한테 무지하게 화냈습니다. 혹시 입 다물라고 협박했냐고.”
“협박했어?”
“그분이 협박한다고 들을 사람이에요? 제가 협박을 당하면 당했지.”
“흐흐. 그건 그렇지.”
문화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안면 근육을 하도 안 썼더니 광대 언저리가 푸들푸들 떨려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는데 눈언저리가 축축했다.
웃은 게 아니라 울었던가 보다. 그는 마상식이 볼세라 얼른 물기를 훔치고 태연한 척했다.
마상식은 알고도 모른 척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못 본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 사정을 마저 보고하고 내일부터 다시 매일 접견을 오겠다고 했다.
문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상식을 배웅했다.
다른 의미로 구치소 생활이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문화는 결국 징역 1년 6개월 선고를 받았다. 앞으로 1년을 더 감옥에 있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문화가 먼저 나서서 박 변호사에게 항소하겠다고 말했다.
항소심 재판부에 반성문을 매일매일 보낼 테니까 베껴 쓸 반성문 초안을 다양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박 변호사가 반색하며 탄원서 써 줄 사람들도 최대한 많이 수배하겠다고 오래간만에 의욕 넘치는 얼굴을 했다.
항소심에서는 집행 유예가 나오거나 1심 판결이 확정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했다.
항소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법원까지 가지고 가도 되냐고 문화가 박 변호사에게 묻자 그는 대법원에서 사건을 검토하기도 전에 형기가 끝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무리 길어도 앞으로 1년이었다.
4계절, 12개월, 365일.
어느 일요일 오후, 문화는 구치소 복도에서 머리를 깎았다.
전달에 머리를 깎아 준 사람 솜씨가 제법 괜찮았기에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는데, 지난달 이발 당번은 교도소로 옮겼는지 집행 유예로 나갔는지 없어지고 처음 보는 사람이 바리캉을 잡았다.
군데군데 쥐가 파먹은 모양을 만들어 놓고 문화의 눈치를 슬슬 보길래 문화가 머리통도 아니고 머리카락은 어차피 다시 자라니까 괜찮다고 했다.
아무리 문화가 조폭이라지만 고작 이발을 잘하지 못했다고 사람을 때리겠는가, 죽이겠는가.
항소심 첫 심리에서 판사가 문화의 반성문을 잘 읽었다고 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냐는 판사의 물음에 문화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진지한 얼굴로 약속했다.
어쩐지 예감이 나쁘지 않아서 문화는 마상식에게 항소심 판결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선고 공판 날 일단 양복을 준비해 오라고 했다.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속된 지 8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문화는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라는 표현은 결코 구태의연한 수식어가 아님을 알았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이문화의 현재 상태를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집행 유예 선고를 받은 문화는 자유의 몸이었으므로 누구도 그에게 수갑이나 포승줄을 채우지 않았다.
8개월 전에 구속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던 법원 유치장으로 당당하게 들어가 마상식이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고, 수영복을 입고 꽁꽁 묶여 굴비처럼 끌려 왔던 버스에 단출하게 올라탔다.
문화가 사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자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손뼉을 쳤다.
문화가 이송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변호사들이 굳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왜 저렇게 얼음을 깨물어 먹은 풍치 환자처럼 구는가 했는데, 변호사들의 인간 장벽 너머 문화를 기다리던 또 다른 인간 무리를 보고야 문화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퇴소 절차를 채 밟기도 전에 다시 구속되었다.
* * *
“서요한 검사님.”
요한이 갈망을 되새기며 그것은 마치 병실 회벽에 어룽진 불빛 같다는 느낌을 매분 매초 확인하는 동안 몇 달이 더 지났다.
이번에 요한을 찾은 사람은 수사관이 아닌 검사였다.
“서 검사님.”
차분한 목소리가 재차 요한을 불렀다.
차갑지는 않지만 단호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귀에 송곳이 꽂힌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요한은 환상의 고통과 거리를 두려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자신을 부른 이를 올려다보았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요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움직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 검사님 일로 온 게 아닙니다. 음. 검사님 사건일지도 모르겠네요.”
“몇 번이나 다른 분들한테도 말씀드렸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세요.”
“이문화 때문에 왔습니다.”
별안간 문화의 이름이 끌려 나오자 피부 아래로 벌레가 굼실거리는 듯한 불편한 침묵이 병실에 깔렸다.
이제 자신이 대답할 차례라는 것을 깨닫자 요한의 턱이 약간 떨렸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자 피 맛이 났다.
“이문화와 아무 관계 없습니다.”
요한의 목소리가 쌀쌀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서늘한 실망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그러면 이문화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서 검사님 사건이 나눠서 진행된 건 아시죠? 뺑소니 사건 수사는 꽤 진척되었어요. 가해 차량이 대충 특정되었거든요. 그럼 다음은 시간문제란 말이에요. 상해 사건도 곧 단서가 잡히겠다고 했는데, 용의자가 사라졌어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요.”
“무슨 말씀이신지.”
“사람이 모기떼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철 바뀌었다고 사라질 리가 있나요? 누가 사라지게 만든 거겠지요. 어디 숨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다 죽어서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한참 울다 지친 기분이 들었다.
울음의 끝은 차라리 개운하기라도 하지, 바싹 말라 버린 화초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 안에 배어 있던 모든 물기가 빠져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문화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저는 이문화가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요?”
“왜 죽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문화한테 물어보세요.”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죽이지 않은 거겠지요.”
“서요한 검사님.”
검사가 또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검사님이 실종되셨던 동안 이문화 부하들이 검사님 찾으러 일대 병원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검사님 병원비는 이문화 수행 비서가 내고 있어요. 검사님 병실이 24시간 감시 중인 건 아십니까? 하도 꼼꼼하게 손을 썼길래 처음에는 이문화가 검사님 해친 범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모릅니다. 저한테 묻지 마세요.”
“제 심증으로는 분명 살인인데, 분명히 살인인데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혹시 검사님 때문은 아닙니까?”
요한의 신산스러운 시선이 검사를 향했다.
“조현우 검사님.”
“예.”
“조폭 몇 명 없어진 게 검사님이 그렇게 고민할 만한 일입니까?”
“서 검사님…….”
“누가 죽였든, 아무튼 그놈들 전부 죽었다고 쳐 봅시다. 사회 전체로 보면 잘된 일 아닙니까?”
“어떻게…….”
“검사가 하는 일이랑 뭐 다를 거 있습니까? 조현우 검사님은 사형 구형하신 적 없어요?”
“그건…….”
“네.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라고요? 그렇다고 사형 구형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넌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도장 찍는 거니까요. 거칠게 말하면 사형 구형은 법전이 정당화한 살인 교사죠. 판사에게 저놈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거니까요.”
“서 검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제가 그 이유는 아닐 겁니다.”
“어차피 공소장에 살인 빠져서 별건으로 추가 기소해야 합니다. 심증만 있지, 물증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체는커녕 핏자국 하나 발견된 게 없어요. 석방되든 수감이 되든, 살인 사건 수사는 점점 더 힘들어지겠죠. 지금 이 상태로는 살인으로 기소도 못 합니다. 무리하게 기소해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나올 겁니다. 평생 면죄부 주는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검사님 뵈러 온 겁니다.”
“공소장이요? 석방? 이문화가요?”
“모르셨습니까?”
“저랑 상관없는 사람 일을 알 리가 없죠.”
“긴급 체포돼서 바로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곧 결심공판입니다.”
문화는 요한에게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요한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덤덤하고 차분한 것이, 무정하고 무기력한 자세만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방패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님. 관용 위에서는 무엇도 건설되지 않는다고 선배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조 검사님은 특수부 지망이었던 걸로 아는데…… 지금 강력부 계시죠?”
“네.”
“시공이라는 말을 잘 헤아려 보면요, 시간이 있어서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공간이 있어서 모든 일이 오로지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깡패 몇 명 때문에 귀중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 파 볼 생각 없으세요?”
“네?”
요한도 이런 짓까지 하게 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요한은 지금 사법 체계가 명확하게 금지한 사법 거래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제가 징계 취소 소송 준비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있는데, 고구마 알뿌리처럼 엄청난 건들이 줄줄이 엮여 있습니다. 백호파 두목 백태호 아시죠? 제가 확보한 증거만으로도 백태호 징역 20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네. 듣고 있습니다.”
조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동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문화도요. 기소 여부도 불투명한 살인 수사하시느라 괜히 고생하지 마시고 경제 범죄로 방향 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 검사님 원래 그쪽 전문이잖아요. 회계 분식으로 투자 유치해서 중소 기업 지원금 편취하고 수출 가격 조작한 증거 있습니다. 관세법 위반, 자본시장법 위반, 특경법 위반이라 경합도 안 해요. 특수부에 뺏기지 마시고 검사님이 직접 수사하세요. 강력 범죄 수사하다가 나온 관련 사건이라고 하시고 꽉 쥐고 계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그대로 넘겨 드리겠습니다.”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아까 저한테 선배님이라고 하셨잖아요. 조 검사님이 제 후배님이니까요. 조 검사님 수습 검사 시절에 제가 사수였잖아요. 제 후배님이, 조 검사님이 잘되시기를 바라서 그렇습니다.”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왔다.
“노트북 하나 구해다 주시겠어요? 클라우드에 백업해 놓은 자료 정리해서 검찰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좋지를 않아서요. 우리 꼭 특수부에서 만납시다.”
가증스러운 격려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요한은 문가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머뭇거리는 조현우 검사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고 기력이 다한 척 침대에 드러누웠다.
요한은 무언가의 가치는 누군가가 아끼고 지켜 주기 때문에 비로소 부여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피붙이에게도 버려진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이라 여기게 된 건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사고 전개였다.
놀라운 것은 요한이 그다음에 선택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도 아껴 주지 않고 아무도 지켜 주지 않는 자신의 무가치를 혐오하는 대신, 선이나 정의같이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요한은 검사 외에 다른 것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서요한 검사는 누구보다도 강하며 누구보다도 굳건했기에 다른 사람의 아낌이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요한에게 처음으로 가치를 부여한 인간이 하필이면 이문화였다. 비록 그 방법은 몹시 혐오스러웠지만, 어쨌든 그는 요한을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처음에 요한을 선택한 사람은 문화였지만, 결국 마지막에 문화를 선택한 사람은 요한이었다. 요한이 지나온 어둡고 텅 빈 시간에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명료하게 빛났다.
「내가 선택한 건 남이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주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지.」
요한은 이문화를 빼앗길 생각도 없었고, 누구에게 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조현우 검사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교묘한 사법 거래를 시도하고, 백태호에게 이문화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증거를 빼돌려 문화의 범죄를 축소하고, 분명 이문화가 죽였을 것이 뻔한 사람들을 가치 없는 깡패로 비하해서 사건을 사고로 비틀지언정 그를 영원히 교도소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만신창이의 몸이 수술대에 올려졌을 때, 날카로운 메스가 몸을 갈랐던 그때, 무엇인가가 요한의 안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어쩌면 서요한이라는 존재가 무언가로부터 튀어나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지난 2년은 요한에게만 특별한 시간이었던 것이 아니다. 요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요한의 인생이 그 수술대에서 끝장났다면, 문화의 인생도 끝장났을 것이다.
한때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더럽게 엮여 버리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요한은 늪 같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 * *
요한은 온전하지 못한 몸을 보행 보조기에 매달다시피 해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조현우 검사는 문화의 부하들이 그의 병실을 감시한다고 했다. 며칠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아는 녀석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주 천천히 복도를 걷는데,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을 바로 발견했다.
“마상식 씨.”
“아, 어……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 합니다.”
“죄송합니다.”
“퇴원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가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길에서 죽더라도 병원에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여기 더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
“사장님께 여쭤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원에 홀로 누운 시간만큼 요한은 작아져 갔다. 지워지고 뭉개졌다. 고독을 견디며, 불쑥 치밀어 오르는 육신의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청했다. 자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요한은 잠을 잤다.
요한의 악몽은 그 내용이 바뀐 지 오래였다.
잠과 잠 사이로 애벌레 같은 꼴로 어두운 창고에 버려져 있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기억에 반응했다.
흉터만 남기고 아문 상처들과 잠들어 있던 통각이 깨어나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병원에서 나가고 싶었다.
* * *
“사장님. 죄송합니다. 병원에서 걸렸습니다.”
“등신이냐?”
“퇴원하시겠답니다.”
“의사는 뭐라는데?”
“수술 경과도 좋고 바이탈 수치도 정상이랍니다. 아직 퇴원은 이른 감이 있는데, 본인이 굳이 원한다면 통원 치료할 수는 있답니다. 재활 치료 하루에 두 번 받아야 한다는데, 어떻게 통원 치료를 합니까.”
“걸을 수는 있어?”
“혼자 못 걷습니다. 목발도 여의치 않고.”
“목발은 왜?”
“왼쪽 손목 잘 못 씁니다.”
마상식이 부랴부랴 덧붙였다.
“전동 휠체어 주문할까요?”
“타겠냐?”
“그렇죠?”
요한의 복직 시기며 새로 발령 난 검찰청, 징계 취소 소송 진행 상황을 물은 문화는 요한이 원하는 대로 퇴원을 시켜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게 하라고 일렀다.
“남전원한테 사랑 의원 휴원하고 요한이 간호하고 병원 데리고 다니라고 해.”
“할까요?”
“뒤지기 싫으면 하겠지. 하루에 빚 500만 원씩 까 준다고 하면 신나서 할 거다.”
“빚 진짜 까 주실 겁니까?”
“왜. 마 부장 눈에는 서요한이 하루 500만 원 가치도 안 되는 거 같아? 시팔, 하루에 천만 원씩 까. 빚 다 까면 매일 100만 원 준다고 하고.”
“네…….”
* * *
문화가 구치소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구치소로 잡혀 들어간 날, 요한은 병원을 나와 문화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 집에서 나온 지 8개월이 넘었는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아마 요한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즈음 문화도 구치소에 수감 되었기 때문에 실내 장식을 손보거나 침구를 바꿀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상식은 요한에게 원하는 대로 집을 꾸며도 된다고 했지만, 요한에게는 그럴 의지도 기운도 없었다.
요한은 예전에 즐겨 눕던 커다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거실 천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자신은 이제 안전하며, 누구도 그곳을 침범할 수 없으리라는 안도감에 요한은 아주 오랜만에 평온한 잠을 맛보았다.
불가침의 공간에서 안락함과 평화를 둘러쓰고 한참을 잤다.
요한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어리벙벙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상식이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던 과자 상자를 보았다. Langues de Chat(고양이 혀)라고 쓰인 멜론색 과자 상자는 예상보다 묵직했다.
요한은 곱게 감긴 리본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고양이 혓바닥이 아니라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이문화 명의의 신용카드 여러 장, 그리고 시곗줄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조금 묻은 시계였다.
그는 시계를 들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요한이 양부모님께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시계가 망가졌다고 문화에게 화를 내자 문화가 그 자리에서 풀어 자신에게 채워 주었던 시계였다.
요한이 비리 검사라는 간접 증거라면서 부장 검사가 비난했던 억 소리 나는 시계.
요한이 납치당하던 날 손목에 두르고 있었던 바로 그 시계.
핏자국이 약간 튀었을 뿐 시계의 형태는 온전했다. 두 개의 바늘이 오전 7시 40분을 가리킨 채 멎어 있기는 했지만, 태엽을 감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침이 조용하게 회전하기 시작할 것이다.
요한이 존재도 잊고 있던 몇 달 동안, 시계는 어두운 상자 안에서 시간을 멈춘 채 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여전히 근사하게 반짝거리는 시계를 손목에 찼다.
그는 반짝이는 것을 은밀하게 좋아했다. 인생에 빛이 깃드는 것 같아서 좋았다. 살다 보면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을 밟아 으깨야만 지날 수 있는 모진 계절을 반드시 만나기 때문에.
살이 많이 빠진 탓에 헐렁해진 시곗줄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요한이 오른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요한은 당황했다. 어두운 창고에 떨어트렸던 시계가 지금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것이 아닌 신용카드가 있다는 사실에, 그것들이 문화가 요한을 닮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고양이가 그려진 과자 상자에 담겨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요한은 당황했다.
혹시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요한은 당황해서 눈물이 나왔다.
“씨발, 사랑 그거 존나게 황홀하네.”
* * *
문화가 구치소 입구에서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변호사들과 문화의 부하들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지만, 문화는 올 것이 왔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요한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부터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로 해산될 예정이었던 변호인단은 문화의 두 번째 구속을 방어하기 위해 그대로 유지하기로 즉석에서 결정되었으며, 드디어 의왕 출퇴근이 끝났다고 기뻐하던 마상식은 서울 구치소 수발이 무기한 연장된 비극 앞에서 웃던 얼굴 그대로 울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태연자약한 태도를 고수하던 문화는 자신에게 붙은 혐의 내용을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화를 내려나 싶어 변호사들이 바짝 얼어붙어 있는데, 문화가 웃었다. 비웃음이나 허탈한 웃음이나 악에 받친 웃음이 아니라, 마치 짝사랑하던 아이에게 먼저 고백을 받아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년 같은 얼굴로 웃었다.
구속되어 구치소에 수용된 남자와 즐거운 웃음. 공존 가능성이 한없이 0에 가까운 두 가지를 이문화가 해냈다.
문화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공소장을 받았을 때 한층 심화하였는데, 그는 지난번에 구속되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공소장을 눈동자에 새길 것처럼 진중하게 읽었다.
“아, 씨발. 나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박변, 행복해서 뒤진 사람 본 적 있어? 그게 나야. 와, 진짜. 돌겠네.”
문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변호인 접견실을 몇 바퀴나 빙빙 돌며 연신 “씨발.”과 “돌겠네.”를 염불 외듯 중얼거렸다.
너무 오래 갇혀 지낸 탓에 안 그래도 살짝 미친놈 같았던 이문화의 광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한 것이라 짐작한 박 변호사는 업무 수첩의 할 일 목록에 ‘정신 감정 신청’이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아니, 들어 보라고. 씨발…… 하, 돌겠다. 박변, 공소장 보면서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놓치기 쉬운 부분까지 굉장히 꼼꼼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박변 보기도 그렇지? 역시…….”
“사장님. 잠깐 진정하시고요. 혐의 다 인정하실 건가요?”
“당연히 해야지. 이건 빼도 박도 못해. 진짜 다 내가 한 거 맞고, 발뺌 못하게 증거 확실한 거로 다 준비했을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문화가 박 변호사의 옆자리에 앉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거, 우리 요한이 작품이야.”
“네?”
“요한이가 나한테 보낸 연애편지라고.”
“공소장이요? 담당 검사는 조현우인데요?”
“이거 요한이가 형량 많이 안 나올 만한 걸로 깔끔하게 추려서 만든 거야. 확실해. 왜냐하면 내가 이 짓거리 했다는 거 아는 사람이 요한이 한 명밖에 없거든. 요한이가 가르쳐 준 대로 한 거라서.”
황황한 눈으로 문화를 건너다보던 박 변호사가 마른세수하고 한숨을 한번 내쉰 다음에 음울한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사장님, 제가 오늘 몸이 영 좋지 않아서 일찍 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준비서면 너무 신경 곤두세우고 그러지 마. 박변도 이제 슬슬 뇌혈관 신경 써야지. 그러다가 풍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형량 그냥 주는 대로 받으면 안 되나? 요한이가 어련히 잘 준비했을까.”
“내일! 파트너들이랑! 같이! 오겠습니다.”
“어, 내일 봅시다.”
박 변호사가 서울로 돌아가고 문화도 교도관을 따라 감방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사각 공간에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혐의 사실을 듣고 호기롭게 웃고, 공소장을 읽으며 미친놈처럼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사실 문화는 두려웠다.
요한이 공소장에 “이것으로 우리 사이 은원을 완전히 정리합니다. 다시는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담았을까 봐.
마상식이 고양이 혓바닥 과자 상자를 요한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했으니 요한은 상자에 넣어 둔 시계를 발견했을 것이다.
시계를 보자마자 문화가 어디에서 그 시계를 찾았는지 깨달았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요한을 납치한 놈들의 말로도 알았으리라.
구치소 정문에서 다시 구속되었을 때 문화는 요한이 문화의 살인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언을 했을 거로 생각했다.
요한과 우중 심야 드라이브를 하며 밑천을 탈탈 털었던 날, 요한은 문화가 어떤 식으로 사체를 처리하는지 눈치챘을 테니까.
그래서 혐의 사실을 듣고 웃었다. 살인을 지우고 관세법과 특경법 위반을 들이밀다니. 그 정도면 청혼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박 변호사에 따르면 형량은 최대 2년, 통상적으로 1년 정도가 될 것이라 했다. 집행 유예 중에 구속 기소된 사건이라 1년 징역을 먼저 채우고 다음 형기를 살아야 한다.
8개월을 구치소에서 보냈으니 잔여 형기는 4개월. 운이 좋아 징역 1년을 선고받으면 내년 여름쯤 요한을 보러 갈 수 있다.
만약, 요한이 문화를 만나 준다면 말이다.
* * *
서요한 검사가 돌아왔다.
정치적 압력 때문에 기소에 실패한 조폭 두목을 관련 사건 증인으로 소환해 법정에서 일침을 놓고, 그 일로 앙심을 품은 조폭 두목에게 모함을 당해 정직 처분을 받았던 서요한 검사가 끈질긴 노력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그뿐 아니라 음모를 파헤치던 중에 폭력 조직의 숨겨진 범죄까지 밝혀 냈고, 요한에게 여죄를 들킨 조폭 두목이 부하를 사주해 요한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천신만고 끝에 감금 장소에서 탈출한 그는 아주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그의 전설적인 무용담이 이프로스를 또 한 번 뒤집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한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불편한 몸을 하고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잊지 않고 확보한 증거를 검찰에 제공하는 등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알려졌다.
한때 서초동 프린스로 불렸던 슈퍼스타 서요한은 1년 만에 완벽하게 부활하여 마치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금의환향했다.
소문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무렵, 요한이 공정한 수사를 위해 이른바 백태호 게이트 수사를 후배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사건 양태며 범행 수법을 밝혀 낸 사람도, 증거 대부분을 확보한 사람도 요한이라는 사실을 후배 검사가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서요한 검사는 다시 한번 검찰의 아이돌이 되었다.
* * *
만기 출소인지라 법원에 들렀다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는 구치소에서 마상식이 챙겨 온 양복으로 갈아입고는 거울을 보며 연신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 머리 많이 이상하냐?”
“많이는 아니고요, 조금요. 안 어울리게 그런 신경을 쓰고 그러세요.”
“일단 서울 도착하면 사우나부터 가자.”
“사우나 하시고 나서 가실 데가?”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마상식은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문화는 묘하게 재수가 없는 표정으로 실실 웃는 마상식을 한 대 패 줄까 하다가 그래도 1년 넘게 옥바라지하랴 요한 수발 들랴 고생한 사람을 출소 첫날부터 매정하게 대하면 안 될 것 같아 격려하는 척 어깨를 아주 세게 쥐었다가 풀어 주었다.
“사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서 구속 기소되었던 사건에서 징역 1년, 두 번째로 구속 기소되었던 사건에서 징역 8개월. 합계 1년 8개월을 꼬박 채우고 돌아오는 대장을 맞이하려 서울 구치소 앞에 모인 열댓 명의 간부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폭력 전과와 경제 사범 전과를 두루 갖추어 전과 4범의 어엿한 조폭 두목으로 새로 태어난 이문화는 소란 떨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내젓다가 깜짝 놀라 팔을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처먹어라.”
두 줄로 정렬한 간부들 사이를 마치 레드 카펫을 밟듯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온 남자는.
“……검사님? 진짜 서요한 검사님?”
“그러면 서요한 판사님이겠냐?”
새파랗게 날 선 칼날처럼 날카롭던 기운은 묵직한 대검처럼 한층 굳건하고 단단하게 벼려져 요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르고 창백한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요한을 보고 문화의 전신 세포가 환희의 전기 신호를 쏘아 대는지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온통 찌릿찌릿했다.
“왜…….”
“뭘 왜야, 왜는. 대한민국 검사 된 입장에서 선량한 시민에게 해악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분자가 사회로 방출되는데 당연히 특별 점검하러 와야지. 고새 까먹었어? 넌 내가 직접.”
“보호 관찰하신다고 했지. 기억해. 잊을 리가 없잖아. 근데 정말로 나 옆에 끼고 관리해 줄 거야? 바쁘잖아.”
문화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엷게 수막이 낀 올리브색 눈동자에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인영이 담겼다. 문화는 결국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훅훅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쎄 빠지게 바쁘지. 그러니까 더 제대로 관리. 야, 우냐?”
“아니. 너무 반짝반짝 빛나서. 너무 오랜만에 보니까 눈이 부셔서…….”
“서른다섯이나 처먹고 길에서 울면 안 쪽팔리냐?”
“안 울어. 눈 아파서 그래.”
“두부나 빨리 먹어. 저기 대머리가 일부러 강릉까지 가서 사 왔대.”
눈가가 벌게진 문화가 요한이 건넨 두부를 우걱우걱 입에 넣고 씹지도 않은 채 꿀꺽 삼켰다. 목이 막혔는지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고 큼큼 목을 가다듬은 문화가 요한을 빤히 바라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정말로 나 마중 나온 거야? 왜?”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
“검사?”
“그래. 검사. 너 같은 전과자 제대로 교화해서 완전히 갱생시키는 것도 내 일이야.”
문화는 무작정 요한을 보러 연암지청에 갔던 날, 요한이 밥을 사 주며 했던 말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
「검사님, 이시지요.」
「그래. 검사. 너 같은 어리바리가 진짜 깡패 되기 전에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도 내 일이야.」
그때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던가.
아마도.
“그러시군요.”
“알면 잘해라? 인간 개조 용광로에 확 처넣는 수가 있어.”
“검사님이 가라고 하면 내가 어딘들 못 갈까.”
바야흐로 전쟁 같은 이문화 갱생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에필로그
서요한은 실패했다.
처절하게 실패했다.
이래서 자고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나. 하지만 이문화는 검은 머리 짐승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갈색 머리 짐승이다. 갈색 머리 짐승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비록 형법의 집행자이자 수호자임에도 요한은 형벌의 네 가지 목적, 즉 교화, 갱생, 격리, 징벌 중 앞의 두 개는 현대 사법 시스템이 체면치레를 위해 억지로 욱여넣은 선언적 목표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교화가 가능하다면 말로 가르치면 되니 애초에 사람을 가두는 벌을 줄 필요도 없고, 갱생이 가능하다면 전과 25범이 왜 나오겠는가.
고로, 자신의 1:1 집중 보호관찰을 대단히 신뢰했던 것은 아니다. 대단한 신뢰는커녕 애초에 개가 똥을 완전히 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적도 없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는 건 아니란 말씀.
서요한은 실망했다.
엄청나게 실망했다.
* * *
간판이 붙어 있지 않은 사무실은 보통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비어 있거나, 당당하게 간판을 달 만한 곳이 아니거나.
요한은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외벽 노출 콘크리트 마감재에 얼룩 하나 없는 빌딩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강남 왕복 10차선 대로에서 딱 한 블록 안쪽, 그냥 노른자도 아니고 노른자 핵쯤 되는 알짜배기 땅에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은 5층 빌딩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침착하면서도 사뭇 비장했다.
대체 어떤 괴짜가 용적률 걱정도 없는 상업지구에 고작 5층짜리 건물을 지었는지 일대 부동산 수십 곳이 떠들썩했다.
그러나 건물주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완공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밝혀진 바 없었다.
최신 건축 트렌드를 따라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럽게 지어진 건물 1층과 2층에는 내과 의원이 자리했고, 3층부터는 아주 짙은 틴팅 글라스를 사용해 빛을 반사하지 않으면서도 내부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게 철저한 보안 시공을 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 3층부터 5층은 기타 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의 본사 주소지이지만, 간판 하나 내걸지 않은 회사가 멀쩡한 곳일 리 없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요한은 착잡한 표정으로 건물 왼쪽 옆구리에 작게 난 출입문으로 가 무려 열한 자리의 비밀번호를 차분히 눌렀다.
“이문화 어디 있어!”
세련된 외장에 어울리지 않는 무식한 철제 방범 문을 뚫고 들어간 요한이 단전에서부터 뽑아 올린 노호를 내질렀다.
귀신 검사님의 습격에 로비로 쓰는 3층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떡대들이 서로를 흘끔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자 요한의 얼굴이 진짜 귀신처럼 변했다.
정상이 아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숙련된 추격자의 본능이 경보음을 울렸다.
“이문화 어디 갔어? 모른다고 하지 마. 구라 치는 놈 구속이야. 너네는 묵비권 없어. 세 번째로 묻는다. 이문화 어디 있어?”
무엇보다도 보안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물이다 보니 엘리베이터도 딱 3층까지만 운행했다. 3, 4, 5층은 내부 계단을 통해서만 오갈 수 있었는데, 위층에서 여러 사람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며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요한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조직 폭력배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서랍장이며 캐비닛이며 전부 활짝 열고 두툼한 서류철과 노란 파일 등 종이로 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박스에 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 스무 개가 서서히 느려지다 멈췄다. 칼이나 철근, 각목 앞에서도 흔들리는 법 없는 열 쌍의 눈동자에 두려움과 불안이 일렁거렸다.
“사장님은 어디 가시고 직원들만 이렇게 바쁜가?”
요한이 방긋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요한의 눈빛이 지나치게 살벌했으므로 부드러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불호령을 들은 듯 전부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입까지 얼어 버렸는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요한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후 한숨을 쉬었다.
심기 사나운 요한을 그나마 자주 접해 살얼음 정도로만 얼었던 이대한이 경직을 깨고 우물쭈물 입술을 뗐다.
“사장님 어제 조사 받으러 가셨는데요.”
“그래서.”
“조사가 이상하게 길어진다 싶었는데…….”
“결론만.”
“자정 좀 넘어서 구치소로 가셨습니다.”
요한의 커다란 눈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노려보는 요한에게서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문화가 어제 검찰에 조사받으러 갔다는 말이지?”
“네, 네.”
“이문화가 제 발로 거기 갔을 리는 없고. 소환장 받고 간 거야? 아니면 수사관이 나와서 데려갔어?”
“저는 잘 모르는데…….”
5층에서 허겁지겁 뛰어 내려온 마상식이 “제가 말씀드릴게요, 제가.” 하며 이대한의 말을 뚝 잘랐다.
“검찰 조사 받으러 오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무시했더니 나중에 우편물이 와서 그거 확인하고 가셨습니다.”
“출석 요구서 받고 소환된 거면 왜 불려 갔는지 알고 간 거네. 근데 마상식 씨는 이문화가 왜 거기 갔는지는 모르신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혼자 가지는 않았겠지. 누가 같이 갔어요?”
“그게요…….”
“말 씹지 마시고요.”
“사장님이 금방 오실 거라고, 검찰 조사 받으러 가신 거 검사님께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요한이 주먹으로 계단 난간을 쾅쾅 내리쳤다.
“이문화 이 새끼가 진짜! 지랄 염병을 하고 자빠졌네.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놈이 지금 구치소 들어가 앉아 있어?”
눈을 감고 숨을 훅훅 몰아쉰 요한이 약간 진정했는지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긴급 체포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구치소에 누구 가 있어요?”
“검사님…….”
“빨리 말해요.”
“저 죽습니다. 사장님이 검사님께만은 꼭 비밀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입 다물고 지금 나한테 죽을래, 아니면 싹 불고 나중에 면책 받을래. 말 안 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이것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전국 구치소 하나씩 털기 전에 빨리 말해.”
아마도 문화는 요한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음이 틀림없다.
요한을 따돌리려는 악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름의 선의, 그러니까 요한에게 쓸데없는 스트레스를 안겨 주지 않겠다는 성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겠으나 요한은 도리어 자신의 무력함만 절감했다.
“어디 검찰청.”
“남부지검입니다.”
“남부? 중앙 아니고요?”
“저희가 그, 여의도에 투자 자문도 하고 IPO 기획하는 회사를 하나 인수했는데요…….”
“금융조사1부?”
“네.”
“박 변호사님한테 7시 반에 찾아간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요한이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더니 재바르게 뛰어올라 마상식과 아주 가까이 붙어 섰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좁혀진 거리에 마상식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요한이 그의 어깨를 꽉 쥐고 작게 속삭였다.
“또 죽였어요?”
“아뇨,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됐어요.”
목까지 시뻘게졌던 마상식이 겨우 평정을 찾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또라니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하, 하, 하하하…… 네. 닥치겠습니다.”
* * *
“이 새끼들이…… 말하지 말라니까.”
입술을 꽉 깨문 요한이 문화를 노려보았다.
“사상 최초로 구치소에서 검사한테 맞아 죽은 조폭 되기 싫으면 주둥이 단속해라.”
“아니…… 검사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야, 이문화. 내가 개가 똥을 끊는 게 빠르겠다고 했을 때 너 뭐라고 했어. 모든 개가 똥 먹는 건 아니라며? 근데 너는 왜 일부러 나가서 똥 처먹고 지랄이야. 어? 똥이 그렇게 맛있어? 이 개똥 같은 새끼야, 그렇게 똥이 좋으면 아예 정화조에 코 박고 뒤지지그래?”
요한의 말끝이 갈라졌다. 흔들리는 눈동자 앞에 엷은 수막이 끼었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아 요한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시멘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화가 아이고, 탄식하며 요한의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울지 마.”
“울기는 누가? 하품했다.”
“입 벌리는 거 못 봤는데.”
“나 원래 입 안 벌리고 하품해.”
요한이 문화의 손을 쳐 내고 엄지와 검지로 양쪽 눈물샘을 꾹 눌렀다.
“눈 떨어지겠다.”
문화가 다시 커다란 손바닥으로 요한의 턱을 받쳐 들자 요한이 발갛게 물든 눈초리를 치뜨고 문화를 노려보았다.
“내 노력과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서,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겠다. 너 잘하겠다며! 이게 잘하는 거야? 어? 이게 잘하는 거냐고!”
“잘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네. 미안해.”
요한의 눈을 피한 문화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래. 사람 안 팬 게 어디야. 이 새끼가 진짜…… 사람 패고 다니지 말라니까 주가를 패고 다녀? 주가 조작 재미있디? 어? 개미들 돈 뜯어먹으니까 맛있었어? 이 개잡놈아!”
“안 했어. 진짜야. 주가 조작할 정도 규모도 안 된다. 억울해. 누명이야. 진짜라니까? 정말이야…… 모함 당한 거야…….”
“전과 4범이 구치소 앉아서 그런 말 하면 참도 신빙성 있게 들리겠다.”
“안 믿네…….”
“너 같으면 너를 믿겠니?”
“근데 왜 나 보러 온 거야?”
흥분으로 언성을 높였던 요한이 합죽이가 되었다.
“혹시 내가 면회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어?”
“네가? 감히?”
“그래서 면회로 안 오고 검찰 조사 있다고 핑계 대고 불러낸 거 아니야? 내가 거부 못하게…….”
“너는 참…… 꿈도 야무지다. 이문화 주제에 감히 내가 보자는데 싫다고 하려 했다고?”
“당연히 그런 말은 아니지. 근데, 뭐…… 그렇잖아. 창피하기도 하고. 나라고 검사님한테 이 구질구질한 수형복 입은 거 보여 주고 싶겠어?”
“존나 잘 어울리는데? 너한테 딱인데? 제2의 피부로 삼아도 될 거 같은데? 너 혹시 태어날 때 수형복 입고 태어난 거 아니야? 나중에 죽으면 네 수의는 꼭 수형복으로 해 줄게.”
문화가 평생 잊을 수 없을 어느 날, 사경을 헤매는 요한을 집중치료실에 홀로 두고 처음으로 구치소라는 곳에 잡혀 들어왔던 날, 퀴퀴한 냄새가 나던 수형복을 뒤집어쓰며 자신이 했던 생각을 요한의 목소리로 듣자 이상하게 울컥했다.
상황에도 장소에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웃냐?”
“검사님이 나 대신 울어 줬으니까 나는 웃어야지.”
문화가 처한 상황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문화가 사는 세상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졌다.
요한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문화가 자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구치소에 갇힌 문화를 찾아와서 화를 내고 있다. 문화의 눈앞에, 문화가 만질 수 있는 곳에 요한이 있다.
이토록 살아 있음을 감사히 여기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런 기분이라면 한 다섯 번 정도는 더 구속되어도 괜찮겠다고 문화는 생각했다.
“검사 그만둬야겠다.”
“안 돼! 무슨 일 있어? 그래도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해결해 줄게. 무슨 일이야?”
“너 집사 변호사로 취직하게. 이제 주구장창 구치소며 교도소며 들락거릴 거 아니야. 왜 남한테 돈 퍼 주고 그래? 내가 사표를 내고 변호사 등록할 테니까 그 돈 나한테 줘. 와, 1년이면 강남 빌딩 하나 사겠는데?”
“아, 무슨 소리야! 검사님은 정년까지 검사 해야지! 강남에 빌딩 갖고 싶었어? 내가 YH빌딩 검사님 명의로 해 준다니까…… 당장 증여 준비하라고 할게. 여의도 건물도 줄까? 검사 그만두지 마…… 검찰총장 해야지…….”
“검찰총장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 너 때문에 나는 청문회 나가야 하는 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안 꿔. 청문회는커녕 당장 3급 되면 재산 신고 내역 공개될 텐데 너 때문에 또 짤리면 이번에는 진짜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았어?”
“어…… 나 때문에 청문회 못 가?”
“그래, 이 전과 4범 조폭 두목아.”
“그거 나 안 버리겠다는 말이지? 응? 나랑 계속 같이 살 거라서, 계속 나 보호관찰 해 줄 거라서…….”
“시끄러워. 닥쳐.”
귀 끝을 붉게 물들인 요한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너 내가 특수부 검사인 건 아냐?”
“알지. 왜?”
“내가, 하…… 내 후배들이 너 수사하는 꼴을 꼭 보게 해야겠어?”
“아…… 반성. 진짜 반성! 한 번만 봐주라. 진짜로…… 투자, 코인, 주식, 파생, 선물 이런 거 다 정리할게. 진짜야. 싹 정리하고 건설이랑 YH물산만 할게.”
“공수표 남발하지 마라. 확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해 버릴까 보다.”
“착하게 살게.”
“한심해 죽겠어.”
“죽는다는 말 하지 마.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거 알아도 나 검사님이 그런 소리 할 때마다 무서워서 심장 찢어질 거 같아. 심각한 트라우마 있단 말이야. 알잖아. 그런 말 하지 마. 약속하는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문화가 플라스틱 의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요한의 무릎에 고개를 턱 올렸다.
“미친, 뭐 하는 거야. 누가 보잖아.”
“보면 좀 어때.”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검사님한테 싹싹 비는 범죄자?”
“꺼져, 꺼지라고!”
문화가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금방 나갈 거야. 보석 신청했어.”
“안 나와도 돼. 뭐 하러 나와? 금방 또 들어갈 거.”
“아니야. 인제 진짜 갱생 라이프를 살겠어.”
“그 말 열 번 넘게 들었다.”
그제야 요한의 목소리가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애써 꾸며낸 담담함을 모른 척해 주는 것이 이문화의 다정함.
말없이 앉아 있는 요한의 까만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문화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검사님. 나 없다고 굶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너나 잘 먹어.”
앙칼지게 쏘아붙인 요한이 교도관을 부르고는 작은 인사를 고했다.
“나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아, 당연하지. 빨리 나갈게. 우리 검사님 혼자 식사하시게 둘 수 없지. 검사님! 저 나가면 밥 사 주십니까?”
“봐서.”
“나가자마자 검찰청 앞에서 퇴근 시간 맞춰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