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Home, Sweet Home (10/11)

#외전1. Home, Sweet Home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어서 따라오라며 재촉하는 저승사자를 주먹으로 조용히 시킨 뒤 인생의 행복을 반추할 때 지금 이 시간을 최소한 세 번째로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이 이문화의 서른 몇 년 인생에서 최초로 맛본 진정한 행복이었으나 그는 앞으로 더 큰 행복이 찾아오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비워 두었다.

요한이 이른바 문화의 신병 인수인이 되어 서울 구치소에서부터 문화의 멱살을 잡아끌어 차에 태워 데려가는 내내 문화는 조수석에 앉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천하의 서요한이 빈정거리는 말 한마디 못 할 정도였다.

덩치는 구치소 정문 문짝만 한 서른 중반의 사내가 다섯 살 어린애처럼 우는 모양새가 끔찍하게 꼴사나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문화는 범람하는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택한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여 주었다는 희열.

지난 몇 년간 매분 매초 한 방울씩 문화의 마음에 똑똑 떨어져 기어코 작은 웅덩이를 만든 이름 모를 감정이 문화가 요한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름을 얻어 연못이 되고, 호수가 되고, 기어코 바다가 되어 그를 휩쓸었다.

문화는 그 물결에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기꺼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 흐르는 대로 쓸려 갈 생각이었다.

그 끝이 달에도 발을 디딘 인간이 기어코 도달하지 못한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대륙이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 물결 끝에 요한이 있다면 어디든 가지 못하랴.

“……려.”

“어?”

“다 왔으니까 내리라고.”

감정 과잉에 자아도취에 온갖 낯부끄러운 기분에 취해 해롱대느라 차가 멈춘 것도 몰랐다.

요한이 차를 세운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검찰청이나 문화의 아파트 주차장 같지는 않았다.

“밥 먹게?”

“배고프냐? 배고프면 밥 먹고.”

“밥 먹으러 온 거 아니야?”

요한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엘리베이터 홀 쪽으로 걸어갔다.

거의 2년 만에 사회에 나온 전과자는 새삼 민간의 모든 설비가 낯설어 두리번거리며 요한의 뒤만 종종 쫓았다.

비록 눈이 어두워졌다고는 하지만 타고 나기를 남보다 눈치가 몇 배는 빠르고 적응력도 그만큼 뛰어난 문화는 요한이 자신을 데려온 곳이 주거용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혹시 여기 검사님 집이야?”

“빌린 집.”

“빌렸어? 전세? 월세? 보증금 어떻게 마련한 거야? 근데 굳이 따로 나와 살 필요가 있어? 내 아파트에서 지내지 않았어? 그럼 그 집은 비어 있나? 왜 나왔어?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어?”

요한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흉내를 내며 콧등을 찌푸렸다.

“아, 말 많네. 너 구치소에서 나불나불 떠들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 내가 저기 가자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그냥 따라오면 될 것이지 어디서 캐묻는 나쁜 버릇 배워 온 거야? 쯧.”

“20개월 만에 만났으니까 그렇지…….”

“여기 이사 온 지 7개월 조금 넘었고, 월세로 1년 계약했고, 보증금은 네가 준 1억으로 냈고, 월세는 마상식한테 내라고 했어. 가구랑 가전제품은 네 카드로 긁었어. 네 아파트는 재수 없어서 팔려고 매물로 내놨고. 새 술은 새 가죽에 붓고 새 인생은 새집에서 시작해야지. 내가 괜찮은 곳 몇 군데 찍어 놓기는 했는데. 추천해 줘?”

요한이 깔끔하게 답변을 마치자 엘리베이터가 11층 도착을 알렸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요한이 “좁아도 참아.” 하며 경고했다.

좁으면 좀 어떤가. 요한과 함께인데. 문화는 집이 좁아서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했다. 집안 어디에 있어도 요한이 보일 것 아닌가.

현관에 발을 들이고서야 문화는 요한이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가 같이 살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새 인생은 새집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헌 집은 팔고…….

팔아? 내 아파트를?

“저기, 검사님. 내 아파트 급매로 내놨다고 했나?”

“어. 왜? 싫어?”

“아니, 아니, 아니. 싫을 리가. 검사님이 결정한 건데 당연히 좋지. 나도 그 집 별로야. 안 그래도 찜찜해서 호텔 가려고 했었어. 사람이 자고로 새 인생 시작하려면 사는 곳부터 일신해야지. 그럼. 그래야지. 내 좌우명이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 날로 새로워지려거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매일매일을 새롭게 하라)’이잖아.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놀이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그거였다?”

“헌 집 떠넘기고 새집을 강탈하다니, 이문화 어릴 때부터 싹수가 샛노랬구만. 교화가 쉽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착한 어린이였는데.”

요한의 억지에 묻어난 장난기에 문화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요한은 집이 좁다고 했지만, 문화가 보기에 그 집은 아담하니 딱 살기 좋아 보였다. 요한 혼자서. 방 하나에 거실, 주방, 다용도실, 베란다를 갖춘 그 집은 아늑하고 소담스러운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2미터에 육박하는 문화가 덧방 살이 하러 오기 전까지는.

“나는 어디서 자면 돼?”

문화와 한집에서 지낼 생각이 없다면 “무슨 헛소리야.” 하며 천하의 머저리를 보는 표정으로 통박을 놓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베란다.”

지극히 요한다운 한마디에 문화의 마음에 반짝 불이 켜졌다. 이곳에서 함께 지내자는 서요한식 표현에 이문화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의외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베란다 대신 거실 바닥에 요를 깔고 자는 것을 허락받은 문화는 오전 6시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정결하게 몸을 씻은 뒤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6시 30분에 일어난 요한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정갈한 조반상을 차리고, 요한이 밥그릇을 깔끔하게 비우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7시에 집을 나서는 요한의 손에 녹즙이며 간식을 들려 보내는 것으로 그의 이른 아침 일과가 끝났다.

요한을 배웅한 뒤 설거지며 청소, 빨래를 마치면 오전 10시쯤. 그때부터 요한에게 곧이곧대로 밝힐 수 없는 이문화의 은밀한 사생활, 아니, 사회생활이 시작했다.

일단 전화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일을 처리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아파트 근처의 카페에서 마상식을 만나 브런치 메뉴를 먹으며 일일 보고를 받은 뒤에 검토한 서류와 새로 검토할 서류를 교환했다.

대략 오후 2시가 되면 끊임없는 한숨으로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마상식을 일별하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향해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몸을 고강도로 혹사하며 수감 생활로 쪼그라든 근육의 소환 의식을 치렀다.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집으로 가는 길에 장을 봤다.

5시 전후로 요한이 회식 여부를 문자로 알려 오면 그에 맞추어 음식 재료를 손질했다. 쓸쓸하게 혼자 저녁밥을 먹고 다시 한번 집을 치운 뒤에 커피를 한 잔 내려 식탁에 앉아 결재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거나 새빨간 유성 펜으로 욕을 써 갈기고 나면 약 9시.

요한은 특별히 언질이 없는 날은 늘 9시 반 정도에 돌아왔으므로 문화는 그때부터 식탁을 치우고 야식을 준비하며 조신하게 요한의 귀가를 기다렸다.

요한을 모른 채로 살았던 32년, 요한과 만났으나 자신의 어리석은 욕심과 비뚤어진 욕심 때문에 단 하루도 평탄한 날이 없던 2년여, 공권력의 상징 서요한 검사에게 지은 죄의 대가를 대의적으로 보면 요한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법 체계를 통해 치렀던 1년 8개월.

그러니까 이문화가 태어나 자아를 가진 이후 간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비밀리에 소망했던 다정한 일상이 불쑥 그의 품에 들어왔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 * *

목깃에 스치는 바람에서 습기가 빠지고 공기가 바삭바삭해지자 거짓말처럼 문화가 앓아누웠다.

죽여도 죽지 않고, 설사 실수로 죽었다 하더라도 삼도천을 거꾸로 헤엄쳐 올라올 것 같은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의 화신 이문화가 고작 감기에 굴복해 쓰러졌다.

놀랍게도 요한이 문화의 간병인을 자처했다. 심지어 자신의 침대를 문화에게 양보하고 침대 아래에 이부자리를 펴고 잤다.

내심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문화는 정말로 요한이 자신을 보살필 줄은 몰랐다. 고열과 전신 근육통으로 맥을 못 추는 문화 대신 요한이 다시 집안일을 맡았다.

문화가 요한과 함께 그 집에 처음 왔을 때, 집이 아주 깔끔했기 때문에 문화는 어쩌면 요한은 손끝마저 야무질까 감탄했었다. 불과 2년도 안 되었는데 잊고 말았던 것이다.

매미 허물처럼 몸만 쏙 빠져나간 옷이 군데군데 똬리 틀고 있던 방과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밥을 지어 먹었는지 알 수 없는 바싹 마른 싱크대 하며 수건이 몇십 개나 있는데도 늘 수건이 모자랐던 연암의 그 관사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문화를 닦아 준다며 요한이 문화의 몸에 들이댄 것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건이었다. 차갑게 적신 수건으로 몸을 식힌 뒤에 마른 수건으로 훔쳐 낼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문화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요한이 흠뻑 적신 건 이문화의 마음, 그리고 이불과 침대보였다.

요한이 출근한 뒤에 몰래 해치우고 모른 척했지만, 그 빨래는 문화의 몫이었다.

파는 죽은 맛이 없다며 직접 죽을 끓여 주겠다던 요한이 끓인 것은 냄비 밑바닥과 화구였다. 새카만 냄비와 눌어붙은 죽으로 엉망진창이 된 주방을 닦으면서도 문화는 행복했다.

자기 위안이 아니라 정말로 매분 매초가 즐거워서 웃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완벽한 서요한 검사의 구멍을 본 것 같아서, 아마도 저렇게 헐렁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며칠이나 체온이 38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데도 눈만 뜨면 히죽거리는 문화를 보며 요한은 열이 너무 심해서 뇌가 익은 게 아니냐며 제법 진지하게 염려했다.

“넌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니라서 아파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랬는지 잘 모르겠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독설을 말을 날리는 요한을 무심코 껴안을 뻔했다. 문화가 그토록 무력해진 적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런 때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곁에 누군가가 있었을 리가 없었다. 혼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요한이 고맙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열이 내리지를 않았다. 혹시 야비하고 교활한 몸뚱이가 돌봐 줄 사람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시의적절하게 병에 걸려 준 걸까. 문화는 자신의 아픈 몸이 약간 기특해졌다.

문화는 약 기운에 취해 초저녁부터 정신없이 잤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순간 어두워졌다.

현기증인가 했는데 이마에 시원한 촉감이 느껴졌다. 요한의 손이었다. 이마를 짚어 체온을 재는 요한의 서늘한 손이 기분 좋았다.

벌떡 일어나 앉아 요한을 놀라게 할 셈으로 눈을 가늘게 떴는데, 바로 앞에 요한의 얼굴이 있었다. 문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덜컹덜컹.

심장이 발광하는 소리가 요한에게 들릴까 봐 문화는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요한의 얼굴이 더 가까이 내려온 듯했다. 따뜻하고 습한 숨이 문화의 얼굴 위에 얇게 깔려 질식할 것 같았다. 기어코 문화의 이마에 차갑고 매끈한…… 요한의 이마가 닿았다. 손이 너무 차서 열이 잘 안 느껴졌는지 이마에 이마를 대고 체온을 잰 것뿐이었다.

확 하고 불길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 심장이 다시 벌렁벌렁했다. 아무래도 얼굴이 시뻘게졌을 것 같은데 요한에게 자신이 자는 척하는 걸 들켰을까 봐 피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혈관을 질주했다.

바글바글 끓는 정수리부터 화끈거리는 얼굴에 목, 가슴, 손가락까지 전부 열감이 물씬 느껴졌다.

붉어진 얼굴을 아직 열이 덜 내려서 그런 거라고 오해해 주면 좋을 텐데.

고작 요한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황해 버린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워 문화는 자는 척을 그만둘 수 없었다. 너무 거세게 뛰는 심장이 짜증 나서 순간 잡아 뜯어 버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있나. 심장이 멈추면 죽어 버리는걸.

요한의 집에서 죽는 사고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요한이 크게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절대 안 되지. 그럴 수는 없지.

요한은 문화의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고는 아직 짧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그러고는 가슴에 걸쳐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 준 뒤 너무 작은 속삭임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웅얼웅얼했다.

잠시 그대로 서서 문화를 내려다보던 요한이 작게 숨을 내쉬고 침대 아래 펴 놓은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문화는 요한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번쩍 눈을 떴다.

요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던 날부터 문화에게 있어 요한은 거룩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구치소에서 혼자 몸부림치던 시간을 거치며 문화의 요한에 대한 마음은 기어코 신앙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아직 문화의 정신은 구치소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요한에게 음욕을 품는다든지 그를 성애의 상대로 보는 행위는 신성 모독에 준하는 지극히 불경하고 무도한 죄악이었던 것이다.

내면의 이문화들이 감히 요한을 상대로 아래를 부풀린 육신의 이문화의 불손함을 비난했다. 자아와 자아의 전투가 너무 치열해 문화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하늘이 푸르스름해질 무렵에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열은 다 내린 것 같았다. 삐거덕거리던 사지 관절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요한은 먼저 일어났는지 이부자리가 개켜져 있었다.

문화는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허기에 배를 문지르며 방을 나왔다. 주방에 가 보니 요한이 식탁에 앉아 뭘 먹고 있었다.

“약 먹어야지. 죽 데워 줘?”

담담하게 물어보는 요한의 붉은 입술에 흰 우유가 묻어 있었다. 서요한에게, 고결함의 상징인 서요한 님께 불경한 마음을 또…… 품고야 말았다.

고작 며칠 앓았다고 그새 평정심을 잃어버리다니 요한의 말대로 뇌가 고열에 익어 버린 것이 아닐까 문화는 고뇌했다.

뇌는 몰라도 얼굴은 익어 버렸던 듯하다. 요한이 벌떡 일어나서 문화의 뺨에 손등을 대었으니까.

“너 아직 열 많이 난다. 빨리 먹고 누워라.”

문화보다 체온이 약간 낮은 요한의 손에서 아른아른 흘러 들어온 냉기가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졌는지, 딱딱하게 얼어붙은 심장이 가슴 근육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흰 액체로 젖은 요한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음란한 망상을 뒤따른 것은 숨이 막힐 정도의 죄책감과 민망함으로, 문화는 요한이 마시던 우유에 코를 박아 죽고 싶었다.

“땀이 너무 많이 나서 냄새나는 거 같아.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 죽은 내가 데워 먹을 테니까…….”

“그래? 옷 가져다 줄게.”

요한이 옷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간 틈에 문화는 욕실로 뛰어 들어가 문부터 잠갔다. 고통의 순간에도 중력을 거스르며 팽창하는 중심에 문화의 고뇌가 깊어만 갔다.

아무래도 고열이 너무 오래 지속된 나머지 뇌세포가 모조리 찐만두가 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좆같은 좆이 이렇게 좆같이 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괴로웠다.

요한의 알몸은 수백 번도 넘게 봤다. 그 몸 안에 자신을 파묻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열락에 빠졌던 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요 며칠, 아니 최근 20개월 정도는 요한과 성적인 접촉이 아예 없었지만, 비단 요한을 상대로만이 아니라 성적 욕망 자체가 거세된 듯이 어떠한 욕구도 느끼지 못했다.

문화는 자신이 드디어 성욕이라는 극악한 독재자에게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요한이 아름다운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더군다나 세상 그 누구보다 문화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물기 어린 듯이 촉촉한 새카만 눈동자와 길게 베일처럼 드리워진 풍성한 속눈썹, 막 씻고 나오면 열기가 올라 살짝 분홍색으로 물드는 상앗빛 뺨에 달보드레한 맛이 날 듯한 매끈한 피부까지.

아아, 불경한 자에게 천벌이 내릴지어다.

요한의 입술에 흰 우유가 좀 묻었기로서니, 그 붉은 입술에 터질 것 같이 팽팽해진 자지를 처박아 좁은 따뜻하고 축축한 입안을 꽉 채운 다음 까마귀 깃털처럼 윤기가 반지르르한 머리채를 휘어잡고 허리를 튕겨 목구멍 깊은 곳에 귀두를 찔러 넣어서 거친 행동에 눈물이 고인 요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사정한 다음에 정액을 마시게 하고 싶어 하는 건 지나치게, 지나치게, 그러니까 너무 지나친…….

“뭐야. 문 안에서 잠겼어? 물소리 안 나는데? 이문화? 야, 너 괜찮아?”

요한이 욕실 문고리를 달각달각 돌리며 문화를 불렀다.

응, 검사님 강제로 펠라티오 시키는 상상 하면서 시원하게 한 발 뺐어.

흉신악살 같던 과거의 이문화도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금의 이문화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만약 요한이 자신의 망상을 눈치챈다면 당장 문화를 내쫓아 버릴 것이다. 그렇게 비참한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어, 잠깐 어지러워서 가만히 서 있었어. 금방 헹구고 나갈게.”

대충 둘러댈 말이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문화는 증거 인멸을 위해 욕조며 타일 벽 여기저기에 샴푸를 푹푹 뿌리고 미친놈처럼 샤워기를 휘둘렀다.

욕조 안쪽이 거품으로 지옥 불가마처럼 변한 것도, 급한 마음에 허둥거리던 문화가 미끄덩한 바닥을 잘못 밟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빠진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문밖에서 문화를 부르던 요한이 욕실이 부서지는 소리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마스터키를 가져와 문을 따고 욕실로 진격했다.

“머리 안 부딪혔어? 야, 이거 몇 개야? 보여? 팔 들어 봐. 발가락 움직여 보고. 이 씨…… 네가 애냐? 서른 중반에 욕조에 거품 범벅하고 놀다가 자빠지게? 이 새끼가 진짜, 사람 간 떨어지게…….”

뿌연 수증기가 지나가고 요한의 눈앞에 전개된 것은 욕조에 사지를 활개 치고 누운 문화의 나신이었다.

문화는 일어나려고 버둥대다가 미끄러운 욕조 턱을 잘못 짚어 다시 미끄러지고, 몸을 바로 세워 앉으려다가 욕조 벽에 미끄러져 앞으로 쭉 밀려나는 등 몸으로 보일 수 있는 온갖 기예를 선보였다.

“괜찮아?”

요한이 문화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끼워 무거운 몸을 끙끙거리며 일으켜 앉혔다. 그는 자신이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비누 거품으로 범벅된 문화를 깨끗하게 헹궈 주었다.

안 돼! 검사님, 내 타락한 몸을 만지면 검사님도 오염되고 말 거야!

문화의 내적 비명을 듣지 못한 요한은 캐비닛에 남은 수건을 전부 꺼내 와 문화를 닦아 준 뒤 자신보다 15㎝는 크고 30㎏은 더 나가는 문화를 질질 끌다시피 부축해 침대에 눕혀 주었다.

문화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요한을 만류했으나 요한은 서릿발 같은 서요한 검사의 눈을 하고 그를 꾸짖었다.

“너 안 그래도 머리 나쁜데 뇌진탕 입어서 지능 더 떨어지면 그냥 백치다. 골 흔들리니까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 수면제 먹여서 재우기 전에.”

요한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감전이라도 된 양 온몸의 세포가 전기 자극을 튀겨 내는 바람에 문화는 도저히 얌전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방금 아주 진한 우유를 거하게 빼냈음에도 문화의 탐욕스러운 해면체는 만족을 모르는지 다시 피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마치 독 오른 뱀 대가리처럼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중심이 자꾸 이불을 밀어 올리는 탓에 요한에게 방정하지 못한 행실을 들킬까 두려워 불안과 초조함에 토할 것 같았다.

이문화는 시방 위험한, 아니 더러운 짐승이었다.

“먹을 거 좀 사 올게. 어지럽고 메스껍고 그러면 병원 가야 하니까 참지 말고 말해.”

요한이 나가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화는 욕실로 전력 질주했다. 알몸으로 침대에 눕혀졌기에 옷을 벗을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아래가 덜렁거리는 느낌이 없다 싶더니 한계까지 팽창한 성기는 이미 배에 닿을 정도로 곧추서 선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문화의 머릿속이 살색으로 물들었다. 우선 요한의 옷부터 벗겼다. 단추를 푸는데 자꾸 몸을 뒤로 빼며 도망치려고 하기에 셔츠 깃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 뜯어 찌었듯이 상의를 벗겨 버렸다.

분명 욕을 할 것 같아 하얀 몸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요한을 제압하는 건 한쪽 팔로도 충분하기에 문화는 요한의 등을 단단히 부둥켜안고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렸다.

알몸이 된 요한을 침대까지 안고 가서 그대로 깔아 눕힌 후 긴장으로 뾰족하게 솟은 유두를 힘있게 빨았다.

요한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말아 문 채 신음을 안으로 우겨 삼키고 있었으나 뜨거워진 콧숨으로 자신의 불이 요한에게 옮겨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혀끝으로 살살 굴리던 유두를 제법 세게 깨물자 요한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꼭 감은 눈두덩은 발갛게 물들었고, 긴 눈초리를 타고 가는 눈물 줄기가 흘렀다.

얼굴을 보면 도저히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아 요한의 낭창한 몸을 덥석 뒤집었다. 아작아작 잇자국을 잔뜩 새기고 싶은 탄력 있는 엉덩이를 손자국이 날 만큼 세게 쥐고. 양쪽 엄지를 구멍 입구에 걸고 주름이 팽팽해질 때까지 당겼다.

붉은 속살이 어서 들어오라며 문화를 유혹했다. 기꺼이 유혹에 굴복한 문화가 요한의 안으로 아기 주먹만 한 귀두를 쓱 들이밀자 요한이 허리를 들썩이며 화답해 왔다.

‘검사님, 요한아…….’

흥분으로 쉬어 버린 목소리로 요한을 부르자 이름을 부르자 요한의 내벽이 살아 있는 연체동물처럼 문화의 성기를 답삭 물고 오물오물 씹어댔다. 부드럽고 따뜻한 내벽에 휘어 감기는 희열이란…….

흐읏…… 또 해 버렸다.

문화는 울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울었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침실로 돌아가 옷을 꺼내 입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무슨 낯으로 요한을 마주한단 말인가. 요한을 볼 때마다 자동반사적으로 발기하면 어떡하냔 말인가.

오랜 금욕 끝에 두 번 연속으로 사정해서 그런지 침대에 눌어붙은 몸이 잠을 원했다. 막 정신이 나가려고 하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화는 차마 요한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잽싸게 잠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자냐?”

열린 방문으로 요한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문화는 눈을 감고 있어도 요한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요한은 인간 공기 청정기라도 되는지 그를 감싼 공기에서는 늘 청량한 바람 냄새가 났다. 그래서 문화는 요한의 목이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냄새 맡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한은 그런 문화를 질색하며 개새끼라며 화를 내곤 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문화는 숨을 멈추고 고조된 기분을 힘겹게 가라앉혔다.

“이문화.”

나지막한 목소리가 문화를 불렀다. 목소리만 들었는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서 문화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 혀를 입천장에 꾹 눌러 붙이고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너도 잘 때는 얌전하구나.”

요한이 가까이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요한이 상체를 숙였는지 싱그러운 내음이 짙어졌다.

문화는 얼굴로 쏟아지는 요한의 숨결에 멍텅구리처럼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바위도 으깰 수 있을 만큼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그저 체온 재는 것뿐이야. 고작해야 이마에 이마가 와 닿는 것뿐이니까…….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한다. 문화의 이마에는 무엇도 와 닿지 않았다. 대신 입술에서 아주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촉촉한 요한의 입술이 열로 바싹 마른 문화의 입술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입술로도 체온을 잴 수…… 있나? 아니지 않나? 입술이 입술에 닿는 걸 두고 보통 체온 잰다고 하지는 않…… 는 거 맞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아닌가?

따로 떨어져 있는 입술이 제자리에 맞게 대어 붙이는 거를 보통 맞춤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입술을 맞추면 입…… 맞춤…… 입맞춤.

키스.

이것은 키스이다.

문화는 눈도 못 뜨고 숨도 못 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요한의 입술이 깃털 날아가듯 가볍게 떨어진 후에도 향긋한 체향이 한동안 문화 가까이에 머물렀다. 아마도 몸을 숙여 문화를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문화가 숨이 막혀 질식 직전에 몰렸을 때 요한이 방을 나섰는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앉은 문화가 오른손 검지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심장까지 간질거리는 황홀한 감촉이 여전히 입술에 남아 있었다. 혼란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엇도 생각할 여유가 없어 문화는 일단 한숨 자고 나서 이 사태를 반추하기로 했다. 똑바로 누워 양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눈을 감고 고른 숨을 흉내 냈다.

그러나 눈꺼풀 안쪽에 레이저 각인이라도 되었는지 눈을 감아도 요한의 모습만 둥둥 떠다녔다.

요한의 흰 얼굴. 요한의 붉은 입술. 요한의 부드러운 입술. 요한의 붉고 부드러운 입술에 묻은 흰 우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문화는 누운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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