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건반을 누르자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다란 의자에 두 소년이 앉아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한 명은 긴 다리로 페달을 밟고, 다른 한 명은 허공에 다리를 흔들며 작은 손으로 건반을 열심히 친다.
자꾸만 겹쳐지는 손에 손등이 간질간질해지면 서로 마주 보고 포시시 웃었다.
하지만 곧 두 손 위로 그림자가 진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점점 옅어지고 이어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장면이 폭발하듯 사라진다.
“……!”
잠에서 번쩍 깨어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피아노는 온데간데없었다. 피아노 하나 들어오지도 못할, 간신히 발을 뻗을 만한 좁은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되새겨보다가, 이내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곧 잠결에서 벗어나 이불을 걷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 * *
“서도운. 너 알바 하나 할래?”
재수 없는 새끼.
뒤통수로 들려오는 재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저 문장을 두어 번 정도 되뇌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다행히 뒤돌아 있는 상태였기에 표정을 들키지 않았다. 등 뒤의 남자가 알았더라면 대번에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간만에 밤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다. 일이 갑자기 취소되었다며 출근하지 말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하루 치 일당을 벌지 못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편히 잘 수 있어서 몸은 가벼웠다.
비록 깨기 전 조금 슬픈 꿈을 꾸긴 했으나…… 나는 이 꿈을 싫어하지 않았다. 꿈에서라도 ‘그 형’을 볼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하지만 그 꿈의 여운을 등 뒤의 깡패가 다 망쳐 버렸다.
“어? 알바 할 생각 없냐니까?”
남자가 두 번째로 물었으나 나는 그가 뭐라 물었는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고, 잘 못 들었다고 되묻고 싶지도 않았으며, 또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허리를 조금 숙여 두 번째 서랍을 열 뿐이었다.
‘비상금을 어디에 뒀더라.’
빨리 돈을 주고 보내는 것. 그게 최선이었다.
아침에 입금되어야 할 아르바이트비가 늦어진 탓에 시간을 조금만 미루겠다고 했을 뿐인데, 원래 돈을 부칠 12시보다 더 일찍 찾아와서는 이렇게 동네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 줄은 전혀 몰랐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양복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도 없이 풀어진 셔츠 안 두꺼운 금목걸이나, 묘하게 거슬리는 걸음걸이, 그리고 차 주변에 세워 둔 덩치 큰 남자들만 보더라도 이 사람들이 조폭이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을 험악하게 뒤흔드는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괜한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없이 사는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서 흉흉한 이야기가 나도는 건 달갑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서랍에서도 비상금 봉투를 찾기에 실패하고 마지막 서랍을 열어 살폈다. 옷가지가 들어 있는 칸을 급하게 손으로 헤집다 보니 잘 개어 넣어둔 옷이 흐트러졌다. 몇 벌은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떨어진 옷을 신경질적으로 주워 올리다 구석에 처박힌 흰 봉투를 찾아냈다. 드디어 깡패를 보낼 수 있겠다. 하지만 뒤로 돌자마자 또 짜증이 올랐다.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말라고요.”
현관에 서 있던 남자는 어느새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비가 온 탓에 그가 밟은 주변이 온통 흙이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저러는 듯했다.
명백한 무시의 행위였다. 내가 아무리 빚진 을이라지만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썩 기분 좋지 않았다.
날을 세워 말하자 깡패는 뭐가 그리 웃긴지 낄낄 비웃었다. 그는 재수 없는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 흙 좀 묻는다고 뭐 큰일 나냐?”
“……제가 청소해야 하거든요? 가지고 가세요.”
돈이 든 봉투를 깡패의 가슴팍에 퍽 던지듯 건넸다. 한 대 맞을 각오로 한 행동인데, 그는 오늘 기분이 좋은지 그저 ‘까칠하네?’라고 말하며 받아 든 돈을 셌다.
배가 아프다. 학교 대회에서 받은 상금이었다. 정말 위급할 때 쓰려고 모아둔 비상금인데, 허무하게 빚 갚는 데 나가 버리다니.
“내가 받아 온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네가 밤마다 물류창고 택배일 하는 것보다 몇십 배는 더 짭짤하거든?”
돈 받았으면 얌전히 돌아나 가지, 애써 무시하는데도 계속 왜 권하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내가 밤에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으며, 얼마를 받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 것인지. 그 조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았다.
“조폭 같은 일은 하기 싫어요.”
짧게 말하고 깡패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우스웠는지 푸하하 웃어대는데, 그 웃음소리마저 역겨웠다.
“너같이 허여멀건 애한테 무슨 조폭 일을 시켜? 가서 벌벌 떨다 올 것 같은데? 무서워서 오줌이라도 지리는 거 아니냐?”
“……놔요.”
“팔뚝도 봐라, 쥐면 부러질 것같이 생겨가지고는.”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깡패가 뒤에서 팔뚝을 강하게 잡아챘다. 정말 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힘을 주더니 이내 살살 손가락으로 팔뚝 안쪽의 여린 살 부분을 쓸고 주무르는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그의 팔을 확 쳐냈다. 수치심 때문인지, 분노한 탓인지 숨이 조금 가빠졌다.
“아무리 봐도 그 일에 적격인데.”
남자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자꾸만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일이라는 게 대체 무얼 말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 귀로 흘려듣고 그를 떨어내려고 했다.
“아……!”
하지만 남자는 나의 어깨를 확 밀치며 벽으로 몰아붙였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딱딱한 벽에 어깻죽지가 부딪히며 통증을 호소했으나, 나는 그만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는 자신의 커다란 몸집으로 나를 짓누르듯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길게 찢어져 씩 웃고 있는 입꼬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시선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뼛속까지 얼어붙는 기분을 느끼고 고개를 홱 사선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는 내 턱을 강하게 쥐어 올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일당 오백짜리 일인데, 진짜 할 생각 없어?”
“……제안이 아니라 강요 같은데요.”
자꾸만 숨이 가빠지는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공포였다.
아무리 한심하고 우습다고 속으로 비웃어대도 깡패는 깡패였다. 나같이 힘없는 사람 하나쯤은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해버릴 수 있는 그런 무식한 존재.
하지만 놈에게 겁먹었다는 걸 티 내기 싫었다. 떨리는 입술을 가리려 이로 꾹 물었다.
“창고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일하는 거로 어느 세월에 빚 갚게?”
“……왜 오백이나 줘요?”
혹하는 액수이기는 했다. 당장 십 원 한 장도 급한 신세. 불어나는 빚을 탕감하기 위해선 어떤 힘든 일이라도 나에겐 중요했다. 일당 오백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나 많이 준다는 것일까.
혹시 범죄라도 저지르게 하려는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깡패가 하는 짓을 떠올려 봐도 도통 그런 쪽으로밖에 연관되지 않았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아니면 또 무슨 다른 중범죄. 내 신분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세탁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깡패는 그 일을 주선하는 게 무척 선심을 써주는 것인 양 말했다. 남이 일하는 곳 뒷조사까지 해대는 음침한 새끼 주제에. 이렇게 뒷조사해 대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거만한 표정에 거부감이 일었으나 오백이면 정말 큰 금액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녀도 하루에 이십만 원 벌기가 힘들었는데, 오백만 원이라니…….
“대답 안 하냐?”
남자가 턱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고 확 밀며 말했다. 고개가 뒤로 밀리며 벽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제안을 해주려고 왔다는 사람치고는 말투나 행동이 너무나도 험악했다. 진하게 그을린 피부나 목을 타고 올라온 문신까지, 날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아픔을 참아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시발, 앙칼지기는.”
남자가 돌연 한 발짝 더 다가와 몸을 가까이 붙였다. 내 발 사이에 그의 발이 들어와 섰고, 당황해 눈을 굴리는 사이 그가 허벅지를 확 밀어붙이며 나의 고간에 문질러댔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큰 손으로 어깨를 쓰다듬더니, 턱을 쥔 손도 내려 양 팔뚝을 쓸고 내려갔다.
갑자기 몸이 만져지는 통에 너무나도 당황해 저지할 생각도 못 했다. 남자는 손을 더 내려 내 허벅지부터 엉덩이를 쓸어 올렸다.
“……!”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이 그의 손은 내 둔부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엉덩이가 아주 부드럽네.”
이어지는 행동에 내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 놀라 몸을 뒤로 빼고 싶어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막다른 곳이었다.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손끝 하나 움찔거리기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돌처럼 굳히고 얼어붙어 있는 것뿐이었다.
“――.”
눈앞의 커다란 남자가 무어라 말을 하는 듯 입을 움직였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으로 까만 먹구름이 낀 듯 시야가 어두워졌다. 세상에서 단절된 것처럼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음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무서워.’
막연한 감정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고간과 허벅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 더러운 손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이것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커다란 덩치에 험상궂은 인상. 저 손으로 당장이라도 나를 찍어 누르고 이곳저곳을 탐닉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야, 야. 쫄았어? 왜 답이 없어.”
더 이상 기어오르지 말자. 그냥 순응하고…….
“……할 테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첫마디를 꺼냈다.
“빨리 여기서 나가주세요”
눈앞에서 이 사람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대화를 더 길게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가 제안한 일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우선은 수락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깡패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내 몸에 얹어 두었던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났다.
“못 무르는 거 알겠지? 날짜랑 시간은……. 아, 시발. 그 고물 폰부터 바꿔. 백만 원은 그냥 현금으로 줄 테니까.”
“그냥, 문자로…….”
문장을 하나 끝마치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웅얼거리듯 의사를 전달하고 나서 침을 꿀꺽 삼켰다. 공포감에 입 안이 자꾸 말랐다. 착잡하고 무서운 심정에 눈을 질끈 감자 머리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더없이 두려웠다.
“연락할게?”
깡패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하나 꼬나물며 내 어깨를 탁탁 쳤다. 불쾌한 담배 연기를 남기며 마침내 그는 문을 열고 집에서 완전히 나갔다.
땅에 처박혀 있던 내 시선이 서서히 올라와 허공에 퍼지고 있는 연기로 향했다. 연기는 내 목을 옭아매 조일 듯이 불쾌한 향을 남겼다.
“…….”
나도 모르게 팔뚝을 끌어안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바깥에 세워 둔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떠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정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하아.”
무겁게 젖은 한숨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이 허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올 것 같았으나 애써 떨구지 않았다. 참아냈다. 울면 여기서 전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가방을 고쳐 메고 집을 나섰다. 집 문 앞에는 남자가 내던져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담배꽁초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위를 신발로 짓밟은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런 일을 겪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게 내 심장을 텅텅 때렸다.
낡은 스니커즈가 물웅덩이를 밟고 사방으로 물방울을 뿌렸다. 아침 해가 먹구름에 가려져 세상은 온통 어두웠다. 나는 어둠 속을 뛰었다.
* * *
[늦어서 미안해, 도운아. 이번 달에 추가 근무해 준 거 고마워서 보너스 조금 더 넣었어. 부담 가지지 말고 써.]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막 건물을 나왔을 때 도착한 메시지였다. 아르바이트하는 곳 사장님은 입금이 늦어진 게 많이 미안했는지 우는 이모티콘을 잔뜩 함께 보냈다.
곧바로 복도 구석에 있는 ATM기로 달려가 들어온 금액을 확인했다. 추가 근무 수당에 주휴 수당에 보너스까지 합치니 꽤 많았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 돈은 고스란히 다시 비상금으로 채워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장님, 확인했어요. 감사합니다.]
짧게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마음속에선 구구절절 감사한 마음이 넘쳤지만 다 풀어 보내기에는 뭔가 머쓱했다. 사장님은 이런 내 성격을 잘 이해해 주었다.
아까보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벽에 붙은 홍보물들을 눈으로 대강 훑으며 가고 있었는데, 1층에 막 도착했을 때엔 학생들이 대형 강의실에 강의를 들으러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흔히 듣는 강의가 아닌, 강사 초청의 취업 특강이었다.
“…….”
왁자지껄 떠들며 팸플릿을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다 막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도운!”
그 소리에 멍하니 몸을 돌렸다. 손에 종이 뭉텅이를 잔뜩 들고 있는 키 큰 사내가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아는 사람인데……. 누구더라. 나는 짧게 생각하다 곧 앞에 선 남자가 과 회장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알은척을 했다.
“어, 안녕.”
“왜 안 들어가? 여기 이거 받고.”
“아, 그……. 미안, 내가 지금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
그가 내민 종이를 받지 않고 한 발짝 뒤로 움직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렸는데, 그는 붙임성 좋게 대화를 이었다.
“많이 바쁜가 보네. 아니면 끝나고 뒤풀이라도 와. 과 선배님이신 거 알아? 얼굴 비치면 좋잖아.”
“응…….”
오늘 특강을 진행하는 사람이 과 선배였던 모양이다. 들을 생각조차 못 해서 전혀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동기도 잘 모르는 판에 처음 보는 선배에게 가서 눈도장을 찍는다니. 그의 제안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일 일찍 끝나면…….”
“단톡방에, 아, 메신저 안 된다고 했나? 문자로 장소 보내줄 테니까 되면 꼭 와.”
어차피 못 가겠지만……. 나는 낡은 가방끈을 만지작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가볼게.”
혹여나 그가 붙잡고 이야기를 더 이어 갈까 봐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뒤를 돌아 건물을 나왔다. 서두르는 내 발걸음이 그에겐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가슴에 차오른 이상한 기분이 사라졌다.
남들은 취업 특강이니 인턴이니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데, 나는 그런 경험을 해볼 새도 없이 벌써 마지막 학기에 도달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도 급급할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도 아버지의 사고로 생긴 빚이 있긴 했지만, 어머니가 생계유지를 위해 가리는 일 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에 끼니 걱정만은 없었다.
하지만 무리한 노동 때문이었는지, 나약해진 어머니의 몸은 병을 만들어 키웠다.
갑작스럽게 쓰러지고 난 뒤 진행된 수술, 그리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싼 치료약.
어머니는 돈 때문에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싶어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 곁에 남은 것은 어머니 한 분뿐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어머니를 치료받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만 살아 계시면 어떻게든 볕 들 구멍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대부업체에서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출했다. 당시 신용이 없던 나에게 큰 단위의 돈을 빌려주는 곳은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걸 알았다면 절대 빌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대출받은 돈으로 세 번째 수술을 하던 도중 허망하게 하늘로 떠났다.
“하아…….”
그리고 이제 내 곁에 남은 건 빚뿐이었다.
고등학생 때 악착같이 공부해서 명문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것은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성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등록금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 내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남들처럼 취업 특강을 듣거나 인턴 생활을 경험할 시간도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학교,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억울하기도 했다. 남들이 하는 만큼만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친구들과 놀고, 늦게까지 술도 마셔 보고, 여행도 가고.
‘현실은 고작 아침부터 비상금 찾아 깡패한테 갚는…….’
우울한 상상을 하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는 건 자학이었다.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침울해지는 기분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일주일이 지나 깡패가 얘기했던 아르바이트 하는 날이 되었다.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몸이 덜덜 떨렸지만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정말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평범한 일이었다.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 모 기업 회장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봉사자, 일종의 비서 역할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돈이 급할 때 몇 번 해봤던 호텔 연회장 아르바이트와 비슷해 보였다. 심부름이나 좀 하고, 음식이나 날라 드리면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30분 간격으로 늦지 말라고 협박성의 문자를 보내는 깡패가 지겨워 그냥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가 신신당부한 대로 입은 양복 주머니 안에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었다. 그러곤 거울 앞에 서서 마트에서 급하게 산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셔츠 깃을 세우고 목에 감는데, 폴리에스터 넥타이가 감기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까슬까슬한 감촉. 모양도 그렇고…… 꼭 뱀이 목을 감싸는 기분.
‘무슨 생각을…….’
순간 거울 속의 내가 넥타이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 보였다. 헛것이었다. 애써 고개를 털며 생각을 비웠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일러준 시간보다 늦진 않았는데, 순간 걱정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 들어갔다. 그런 내 손목을 한 남자가 붙들어 세웠다. 서도운이 맞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신을 회장님의 비서라고 소개한 남자는 무표정하게 나를 안내했다. 비서? 비서가 따로 있으면서 도와줄 사람을 왜 또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비서가 바빠서 가야 할 일이 있겠거니 하며 납득했다.
“회장님께서도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네.”
다행히 늦은 건 아닌 모양이다. 비서는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파티에 참여한 사람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성이었다.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나는 그냥 앞서가는 남자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뒤를 졸졸 따랐다.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와 함께 잔잔한 클래식 연주 소리가 들렸다.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몇 마디를 들으니 바로 곡명이 떠올랐다. 파티에 어울리는 곡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곡이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멈춰 선 비서 때문에 그의 등에 얼굴을 퍽 부딪쳤다.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여전히 무표정하던 비서가 흰 머리가 희끗희끗 난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오늘 부르신 서도운 군입니다.”
“서도운 군?”
“앗, 아……. 안녕하십니까.”
처음부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머쓱한 마음에 손등을 만지작대다가 잘 부탁드리겠다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하하, 아주 귀엽구만.”
회장에겐 다행히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손을 올려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그러다 확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하는데, 그가 쥐는 어깨 한쪽이 아릴 정도로 아팠다. 손아귀 힘이 굉장히 셌다. 하지만 차마 찡그릴 수가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팔을 내리며 내 허리를 가볍게 쓸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차마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냥 허리에 닿는 손길에 조심스레 회장을 올려다보았는데, 그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옆 테이블에서 잔을 하나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언제 간 것인지 옆에 서 있던 비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회장이 들어 올린 잔을 나에게 내밀며 웃었다. 표정이 능글차게 느껴졌다.
“웰컴 드링크.”
“아……. 저는 괜찮습니다. 술을 잘 못해서…….”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지만, 회장이 그 웃는 얼굴로 계속 잔을 내밀고 있기에 결국 받아 들었다. 잔 안에 연녹색의 술이 찰랑거렸다.
역시 거절하지 말고 그냥 넙죽 받아먹을 것을 그랬다. 괜히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술을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자 회장은 만족한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빈 잔을 지나가던 웨이터의 트레이 위에 올렸다.
술이 닿았던 입 안, 목구멍, 그리고 배 속까지 모두 따가웠다. 몇 번이나 침을 삼켰는데도 쓴맛이 맴돌았다. 쓰디쓴 맛을 보니…… 샴페인은 아니었다.
“따라오게.”
“네.”
회장은 내 손에 똑같은 잔 하나를 더 들려주고 나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천천히 마셔도 되겠지…….
나는 서서히 뜨거워져 가는 속 때문에 자꾸만 가슴께를 문지르며 회장을 따라다녔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하는 등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대체 무슨 일을 도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꾸벅 인사를 하거나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그러기를 벌써 한 시간째였다.
그러다 근처의 테이블에 새 과일이 도착하자 눈치를 보다가 작은 접시에 몇 개 옮겨 담아 그에게 살짝 내밀었다. 내 어색한 몸짓을 잠시 지켜보던 회장은 다시 크게 웃으며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뭐라 쑥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건가? 차라리 홀 서빙 아르바이트가 마음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이 일은 그저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다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더 신경이 쓰였다.
도저히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술이 들어갔다. 회장이 내 손에 잔을 쥐여 주어 그런 것도 있지만, 그걸 들고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일까 봐 홀짝홀짝 마셨다.
“으…….”
그렇게 여섯 잔쯤 술을 받아 마셨을 때, 속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자.”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는데, 회장이 다시 나에게 잔을 건넸다.
“더 마셔야지.”
“네…….”
나는 거절도 하지 않고 미련하게 술잔을 받았다. 몸이 조금 휘청하면서 시야가 흔들린 것도 같았다. 취했다. 스스로도 취했다는 게 느껴졌다. 취해 본 적이 없어서……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데…….
이젠 회장의 얼굴도 흐릿했다. 눈꺼풀도 무거웠다.
뻑뻑해지는 눈을 자꾸만 비볐다. 회장은 나에게 아기 같다고 했다. 아니…… 한 게 맞나? 그가 진짜로 말을 한 건지, 아니면 내 착각인지 모르겠다. 그게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히 취해버리고 말았다.
“회장님…….”
“응?”
취했다고,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입에서는 자꾸 앓는 소리만 나왔다.
내가 계속해서 휘청거리자 회장이 내 몸을 안은 것 같았다.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몸에 감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나보다 한 뼘 정도 큰 키를 가진 회장의 어깨에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스스로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였고, 또…… 회장이 계속 안기에…….
“답답해…….”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중얼거렸다. 발에 딱 맞던 신발도 어딘가 불편하고, 싸구려 넥타이도 자꾸 목을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넥타이를 풀고 싶었는데, 때마침 나를 안고 있는 남자가 넥타이를 조금 풀어 내렸다.
“감…….”
감사하다고 말했다.
“슬슬 데려가야겠군.”
“그러지.”
그리고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 *
“이사님.”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뒤로 다가서자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차 대기시켰습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한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를 뜨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고는 곧장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의 구둣발이 바닥에 깔린 카펫 위를 밟을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짧게 꽂혔다가 사라졌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사님, 많이 피곤하십니까.”
“후……. 괜찮습니다.”
걱정스럽게 물으며 따라붙는 비서에게 남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는 이제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국에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바로 이 파티에 참석했다. 장거리 비행에, 시차 문제까지 겹쳐 피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월요일 회의는 오후로 미뤄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비서가 눈치껏 그의 비위를 맞췄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희미하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
“…….”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었다. 남자는 또 머리가 지끈 아팠다. 이번엔 미간까지 확 구겨졌다.
괜히 온 것 같다는 후회가 머릿속에 스쳤다. 애초에 정식 연회가 진행된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게 도착한 데다, 사실 별로 중요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만간 묻어 두었던 바이오 사업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생각이었기에 짧게 눈도장이라도 찍어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정신적 육체적 피곤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연회에 참가한 것이었다.
어차피 중간에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그냥 연말 파티나 주최해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남자는 눈을 감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입에선 자꾸만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번 귓가에 들리기 시작한 소음은 집중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런 연회 후에는 남녀 할 것 없이 사람을 불러다 간혹 짐승처럼 섹스를 하는데, 하얗게 머리가 센 다 늙은 짐승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얽혀드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 남자는 이런 더러운 파티에서 희희낙락 웃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가 표정 관리를 못 하니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슬슬 그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1층에 있는 홀이 아니라 지하, 그것도 밑에서 세 번째 층으로 장소를 선정했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남자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졌다.
옆에 서 있는 비서는 어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이 건물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서도운 군!”
띵, 하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림과 동시에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순간 들려오는 이름에 남자의 눈이 번뜩 뜨였다. 서도운? 그는 속으로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서도운 군, 어딜 가는 건가.”
지금까지 말소리는 피곤한 그의 귀에 그저 소음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는데, 기억 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순간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섰다.
“이사님?”
서도운. 서도운…….
남자는 어서 엘리베이터에 타라는 비서의 부름에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서도운……. 흔한 이름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흔한 이름. 하지만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사님, 왜…….”
“잠시만요.”
그는 결국 뒤를 돌았다. 그 소리가 들려왔던 복도 끝을 잠시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서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이름이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자신이 잘못 들어 착각한 것일 수도, 다른 비슷한 이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발짝 한 발짝 걸을수록 그 기분 나쁜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절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자신이 보게 될 것이 어떤 장면인 줄 알면서도 그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정말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서도운 군, 이리 와야지.”
“으응…….”
여기 있는 게 정말 제 기억 속의 그 사람인지.
“서도운 군.”
“응, 네…….”
뒷덜미를 타고 올라오던 기분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 문 앞에 선 남자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기억 속의 상대를 마주하고 말았다.
“정신을 못 차리는군.”
“네에…….”
자신이 아는 서도운이 맞았다.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반쯤 벗겨진 차림새를 하고, 지저분한 손길로 몸을 만져도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품에 안겨드는 저 사람은…….
어릴 적 자신을 형이라 부르며 쫓아다니던,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피아노를 치던, 바로 그 서도운이 맞았다.
“……갑시다.”
“네?”
“어서 가죠.”
남자는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사이에 상사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진 것을 느낀 비서는 서둘러 걸어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가 다다른 순간 문이 열렸고, 남자는 지체할 것 없이 올라타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른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차 안에는 무거워진 공기만이 감돌았다.
* * *
“웃……. 으으.”
자꾸만 누군가 몸을 쓰다듬는다.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아니, 이게 잠이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이 도무지 떠지지 않는다. 몸은 축축 늘어지고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몸을 만져대는 손길에 정신이 멍하게 깨어나지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 뭘…… 하고 있었지?’
떠올리려고 하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무릎에 닿아오던 감촉이 점점 올라와 허벅지를 주물럭댄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찡그리는 것 좀 봐.”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은 음역대의, 중년 남성의 목소리라는 걸 간신히 인식했다. 따라 웃는 소리가 들린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인가? 왜……?
순간 기분이 나빠서 몸에 힘을 주며 비틀었다. 거치적거리는 손길들은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전보다 더 억세게 내 몸을 붙잡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허벅지에 머물던 손이 더 안쪽으로, 더 위로 올라왔다. 그 손은 내…… 사타구니를 쥐어짤 듯 강한 악력으로 만지작댔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한 감각이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또 그래서 역겨운…….
얼마 전 그 깡패가 내 몸을 마구 만졌을 때, 그때만큼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다.
상체의 맨살에 손이 닿아왔다. 입고 있던 셔츠 단추가 풀어져 그 사이로 들어온 것이다. 차가운 공기에 드러나는 맨살에 벌레처럼 손가락이 올라와 간지럽혔다.
그 벌레들은 허리 부근의 부들부들한 살결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마음껏 쓸고 문질렀다. 나는 더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감촉은 서서히 기어 올라와 내 가슴 위에 자리했다.
“윽……. 아!”
나는 가슴을 쥐고 유두를 괴롭히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눈물이 눈에 아롱아롱 어려 있어 시야가 흐렸다. 사람 형체를 한 검은 실루엣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언뜻 알 수 있었다.
“깨어났나?”
“윽, 으읏…….”
간신히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눈에 고였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고, 마침내 어지러웠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아까 연회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순간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으, 아윽, 이거……!”
“어허.”
반쯤 벗겨진 옷, 옷 안에 들어와 내 몸을 만지는 손.
그들은 내 팔과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내가 몸부림치려고 하자 주의를 주듯 손톱으로 꽉 눌러 아프게 했다.
나는 도통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대체 왜……? 왜 내가 벗겨진 상태로 누워 있는 거야. 왜 이런 사람들이 내 몸을 만지고 있는 거지……?
간신히 힘을 주어 손을 뿌리치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술이 셌던 건지, 아니면 약을 먹인 것인지 모르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엉덩이로 조금 기어 몸을 뒤로 내뺐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들은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웃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세요.”
그중 내가 오늘 저녁 내내 따라다녔던 회장이 손을 뻗어오기에 그의 손등을 탁 쳐냈다. 술 때문인지 혀가 꼬여서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들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며 팔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내 셔츠를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내 손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윽, 윽!”
겨우 앞을 여며 쥐었는데 사람들이 다시 옷을 벗겨내려고 했다. 강한 악력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한쪽 어깨가 드러났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뒤로 몸을 뺐다.
‘도망가야 해.’
아직도 정신이 멍해서 온전히 사고를 할 상태는 아니었으나, 한 가지는 명확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도망칠 수…… 있을까? 손뿐만 아니라 다리도 덜덜 떨려왔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또 어지러웠다.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힘이 다 빠진 몸으로 이 사람들을 헤치고 정말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괜찮아, 괜찮아. 술이 깼나 본데?”
내 다리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달래듯 말하며 무릎으로 걸어왔다. 으……! 나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비명을 숨기지 않고,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손길을 피해 있는 힘을 다 짜내 문을 향해 뛰었다. 넘어지면 안 돼, 넘어지면…….
“아악!”
하지만 뒤에서 누군가 발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앞으로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이라 무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강한 힘으로 당겨져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스스로의 처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윽, 하지, 마. 하지 마!”
최대한 끌려가지 않으려고 카펫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손톱이 뒤집힐 때까지 바닥을 기었다. 발을 뒤로 차며 누군가의 손을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
“으흑…….”
그러나 나는 무참히 끌려가 커다란 품에 안겼다.
몸이 구역질 나는 쓰레기통에 빠진 기분이었다. 좌우로 비틀어도 팔로 내 상체를 꽉 안고 있어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의 비웃음 소리가 더 커져 내 목을 조여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밀려 열렸다. 서빙을 하러 들어온 웨이터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사실 시야가 흐릿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저 사람의 등장으로 내 몸을 안고 있는 힘도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도망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몸을 일으키며 팔꿈치로 뒤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퍽 찍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옭아매던 팔이 완전히 풀리는 순간, 휘청하며 달려 나왔다. 옆에 서 있던 웨이터를 밀치고 문을 열어 기나긴 복도를 뛰었다.
“헉, 헉…….”
뒤에서 나에게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족쇄처럼 발목에 얽혀들었다. 다리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멈추면 또 조금 전처럼, 온몸이 그 더러운 사람들의 품에 안겨질 것 같았다.
계속해서 뛰었다. 계속……. 계속…….
그들의 눈길과 발길이 닿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곳으로, 가장 후미진 곳으로.
나는 간신히 비상계단을 찾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탑을 내려갔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힘이 빠진 몸이 자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 한다. 벽에 손을 짚어가며 간신히 중심을 잡고는 또다시 뛰었다.
“윽…….”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온 얼굴을 다 적셨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지하 주차장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을 열자 퀴퀴한 매연과 휘발유 냄새가 났다. 주차장엔 차들이 빈 곳 없이 차 있었고, 최소한의 전등만 켜져 있어 어두컴컴했다.
“흑, 으윽…….”
나는 주차장 구석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벽에 기대앉아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이곳은 내가 일하러 온 호텔이었다. 이제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 나는 이곳에 일하러 왔었다.
그 ‘일’이라는 게…… 이런 일이었나? 그 깡패가 얼버무리던 그 일이란 게…… 그저 시키는 대로 장단만 맞추면 된다는 것이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이었던가.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한심했던 조금 전이 떠올랐다. 반짝거리는 샹들리에 밑에서 침을 흘리는 남자들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던 내 모습이.
“흐윽, 으, 으읏…….”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기분을 말로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손길이 닿았던 살갗을 모두 벗겨내 버리고 싶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감정.
그들은 도망치려는 나를 그저 발밑의 개 쳐다보듯 했다. 절대 여기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듯이, 자신들의 손바닥 안에서 굴리는 나약한 남창이라는 듯이.
“우읏……. 하……. 윽…….”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손등으로 닦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셔츠를 끌어다 얼굴을 문질렀다.
까슬한 값싼 셔츠가 얼굴에 문질러지자 눈가가 따가웠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그렇게 주저앉아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집에 돌아갔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모든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온몸을 박박 문질러 가며 씻었다. 손끝이 물에 불을 정도로 씻고 나오니 4시였다. 두 시간가량이나 몸을 씻은 것이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긴장은 꿈속에서도 풀리지 않아 결국 끔찍한 호텔 방의 악몽을 꾸고 말았다.
“……하, 참 나.”
자고 일어나니 어제 집에 올 때 써버린 택시비가 너무 큰 지출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돈 걱정을 하는 처지가 우스워서, 성추행…… 성폭행을 당할 뻔했음에도 그깟 몇만 원의 지출에 전전긍긍하는 게 우스워서.
[너 뒈질 줄 알아. 씨발.]
꺼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해 보자 깡패에게서 저 한 줄의 문자만 와 있었다. 정말 웃기게도 겁이 났다. 남자가 때릴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그 호텔로 끌고 갈까 봐, 그게 두려웠다.
“…….”
어디 도망갈 곳도 없는데. 내게 있는 거라고는 이 낡은 집구석뿐이었다. 그때처럼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착잡함에 입 안이 썼다. 나는 그냥 핸드폰을 구석에 던져 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목과 이마가 뜨거운 걸 보니 감기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택시비 때문에 지갑에 구멍이 생겨 감기약을 살 수도 없는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이불 속이 피난처라도 되는 듯 그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그렇게 일주일을 집에만 있었다.
몸살감기인지 독감인지 모를 것에 걸려 일주일 동안 끙끙 앓기만 했다.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찬밥을 묽게 끓여 먹으려고 잠시 부엌에 서 있는 그 시간에도 머리가 어지러워 몇 번이고 휘청거리며 손을 델 뻔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동안 깡패는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돈 조금 늦게 입금한다고 했을 때는 몇 시간 만에 동네까지 쫓아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깡패는 제하기로 했던 오백은 없던 일로 하겠다는 문자 하나만 보내왔을 뿐이다. 금요일 저녁에 그 문자를 확인하고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언제는 뒈질 준비를 하라더니……. 그의 변덕이 죽 끓듯 하던 걸 떠올리면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엔 이르다.
두 개 남아 있던 아르바이트 중 하나는 결국 잘렸다. 밤에 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며칠 동안 연락도 되지 않아 결국 사람을 구했다며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또 새 아르바이트를 구해야겠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아주 다행히도, 카페 사장님은 몸이 아팠다는 연락을 드리자 푹 쉬고 나오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 아르바이트까지 잘렸으면 이번 달은 정말 답이 없을 뻔했다.
또다시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찾아왔다.
고작 일주일 동안 집 안에 처박혀 있었을 뿐인데, 문밖에 나서는 게 어색했다. 사실 두려웠던 것 같다. 혹시나 도망간 나를 뒤쫓아오지는 않을까 싶은 그런…… 두려움.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발목을 감싸드는 두려움을 애써 떨쳐 내고 가방을 고쳐 멨다. 학교 가는 길에는 이번 달 남은 돈을 떠올리며 얼마나 더 아껴야 하는지 끝없이 계산했다.
학교에 도착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도 머리가 약하게 지끈거려서 잠시 엎드려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잘까 싶었다.
그런 내 옆으로 한 무리가 붙어 앉았다.
“서도운!”
“어, 어…….”
“어, 도운 형! 빨리 오셨네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내 주변으로 자리를 잡아 앉은 그들은 같은 과 학생들이었다. 사실 동기 중 누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못 하지만 이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 몇 명은 알고 있었다.
기억하려고 기억한 게 아니라 워낙 붙임성이 좋은 무리여서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도운, 저번 주엔 왜 빠졌어?”
“어……. 그냥 좀 아파서.”
“못 본 사이에 볼살이 홀쭉해졌다. 아침은 먹었냐?”
고개를 저었다. 쌀이고 라면이고 전부 똑 떨어졌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오빠, 이거라도 드세요.”
내 왼쪽에 앉은 친구가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받아도 돼……? 고마워.”
“감기였어요? 병원은 가보셨어요?”
“아니, 아직.”
“수업 끝나고 꼭 가봐야겠다. 아니면 보건실이라도 가봐.”
“응.”
갑자기 주변에서 쏟아지는 걱정에 정신이 없었다. 원체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아이들이다 보니 내 자그만 변화도 쉽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들에게 그간 겪은 일 전부를 얘기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들은 교수님이 들어와 출석을 부르기 시작할 때까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지만 지갑이 쪼들려 점심은 건너뛰어야 했기에 과제가 밀렸다는 핑계로 조심스레 거절했다.
저렇게나 사람을 잘 챙기려 하는 친구들인데 자꾸 그 자리를 피하려고만 하니, 아마 저들의 눈에는 내가 재수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돈이 없으니 친구도 없구나. 슬퍼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업을 다 마친 뒤에는 학생관에 잠시 들러 약을 탔다. 초콜릿만 먹은 빈속에 정수기 물과 함께 약 두 알을 꿀떡 삼키고는 학생관을 나올 때였다.
“서도운 군.”
갑작스러운 부름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일주일 전의 그 일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학교였고, 다시 그럴 위험은 없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이었다. 1학년 때 담당 교수님으로, 내년이면 정년이 되는, 나이 지긋한 분이었다. 이번 학기에도 이분의 수업을 하나 듣고 있었다.
“저번 주 수업에 안 보이던데.”
교수님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아파서 저번 주에 다 출석을 못 했어요.”
“저런. 다음 수업까지 처방전 가져오면 출석 처리해 줄게.”
“제가 병원에 간 건 아니고…… 그냥 집에서만 쉰 거여서요.”
그렇게 대답하자 교수님은 껄껄 웃었다.
“다른 학생들은 가짜로 만들어 오기도 하던데, 영 꾀를 못 부리는구먼.”
“아…….”
“시간 되면 내 연구실에 잠깐 들르겠나? 지금.”
교수님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3시 반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3시 반이면 아직 아르바이트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이 앞장섰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연구실이 있는 층은 정말 조용했다. 두 사람이 걷는 발소리만 뚜벅뚜벅 섞여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교수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니 희미하게 담배 향이 났다. 교수님이 피우는 담배인 듯싶었다.
내가 책상 옆 소파에 앉자 교수님은 물 한 잔을 따라 맞은편에 자리했다.
“겨울에 졸업이던가?”
“네, 2월에요.”
“곧장 졸업하려고?”
“휴학으로 시간을 많이 버려서…….”
교수님은 가벼운 질문을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휴학은 총 2년, 세 차례에 걸쳐서 했다. 생활비가 다 떨어질 위기가 왔을 때마다였다. 다음 학기에 학교까지 다닐 지하철 요금도 못 낼 정도의 위기에.
“군도 면제였으니 너무 조급해 말게. 동기들도 아직 수두룩하잖아?”
그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어릴 적 수술로 인해 군 입대를 면제받았다. 그렇다 한들 휴학을 해버려서 남들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성적 생각하면 추가 학기를 하고 싶기도 한데, 빨리 취직하고 싶어서요.”
“아깝지, 아까워.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은 ‘자네가 제일 아쉽겠지’ 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잠시간의 정적 뒤, 교수님은 할 말씀이 있는지 잠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도 오늘 교수님이 갑자기 왜 부르신 건지 궁금했다.
“그래, 취직 방향은 잡았고?”
“음……. 그냥 여기저기 넣어 보고 불러 주는 곳으로 가려고요. 성적이 이래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건네받은 음료수병 뚜껑을 손끝으로 만지작대며 대답했다. 추가 학기 수업을 듣기엔 돈이 없다. 추가 학기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성적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 아르바이트에 치여 살 테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에게는 꺼내고 싶지 않은, 함부로 꺼내서도 안 되는…… 그런 이름을 대뜸 내밀었다.
“청영 기업은, 생각해 본 적 있나 궁금하네.”
“청영……이요?”
병을 만지작대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청영’이라는 이름을 살면서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청영은 어디에든 있었다. 핸드폰 같은 전자기기부터, 금융, 종합물류, 무역, 제약까지 손대지 않는 분야가 없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1위 기업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청영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죄인처럼 청영이라는 이름 앞에선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다.
실제로 나는 죄인과 다름없었다.
“내가 그쪽에 연줄이 많은데, 얼마 뒤에 공채 뜰 거라는 소식을 들어서.”
“아뇨, 그 회사는 전혀…….”
“한번 지원해 보는 게 어떤가.”
손을 끌고 와 무릎 위에 얹었다.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가 사르르 풀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인 것 같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성적이…….”
비겁하게 성적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것 말이다.
청영.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 하는 대기업인데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에 교수님이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영에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요.”
약 십여 년 전, 아버지가 낸 차 사고로 청영의 회장이 사망했다.
나는 자꾸만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몸을 휘감는 이상한 감각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주먹을 쥐었다, 난리를 피웠다. 교수님은 그런 내 반응이 이상하진 않았는지 그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을 뿐이다.
“별다른 활동이나, 어…… 인턴 경험도 없고, 그래서 아마 저는.”
“…….”
“안 될 겁니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끌어당기긴 했는데, 그게 과연 미소처럼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그날의 사고는 청영의 대표뿐만이 아닌, 아버지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우리 집, 모든 재산, 사소한 잡동사니까지 모두 팔아치워 사고를 수습했고, 어머니는 빚을 갚기 위한 무리한 노동으로 병까지 얻어 돌아가셨다.
그 사고는 그랬다. 나에게 있어서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시궁창으로 집어 던져 버린 사고.
“자네, 작년에 학술제 우승도 하지 않았나. 올 초에는 공모전 수상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교수님은 과 인원이 많은 학과임에도 내 경력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경영학과 학술제면 아주 알아준다는 걸 왜 몰라. 자신을 가져야지. 공모전은 어디 공모전이었지?”
“지방 은행 공모전이었습니다.”
“지방 은행이어도 은행은 은행이지. 충분히 경쟁력 있네.”
내 자신감을 북돋아 주려는 건지, 교수님은 턱없이 부족한 내 스펙을 계속해서 칭찬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하하……. 청영 문턱이 너무 높게만 느껴져서 그랬나 봐요. 조언 감사합니다.”
“흘려 넘기지 말고 지원하게.”
교수님이 물컵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순간 몸을 움찔거리며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내가 추천서를 써줄 테니.”
“네?”
나는 바보같이 되물었다. 추천서?
“여기까지 왜 불렀겠어. 내가 자네한테 추천서 써줄 작정으로 불렀던 거지.”
“아니요, 교수님. 저는…….”
“어렵게 생각 말아. 내가 연줄이 있다고 했잖아.”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낼 새도 없이 교수님은 그 연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 말들은 내 귀에 와 닿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엉켜 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회사든 한 번에 통과시켜 준다는 교수님의 추천서라니.
여의도, 서초, 그리고 광화문과 을지로까지, 그 일대에 교수님이 모르는 회사가 없고, 교수님을 모르는 회사가 없었다. 그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님이 나에게 추천서를 써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청영의 추천서를…….
“복지나 급여가 좋은 건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교수님,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감사한 거 알면 그냥 써. 내 추천서 무척 비싼 거 알지?”
“그, 그래서 받기가 죄송해요.”
“허, 참. 겸손 그만 부리게.”
교수님이 웃으며 말했다. 내 속을 모르는 교수님은 그저 내가 겸손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 청영과 연관되지 않으려는 나의 미약한 노력이었다.
“내 추천서가 무슨 만능인 것도 아니고, 면접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데. 자네야말로 너무 마음 쓰지 말게. 말 그대로 추천서일 뿐이니까.”
“…….”
나는 결국 음료수의 병뚜껑을 열었다. 손이 떨려 몇 번이나 헛손질하며 미끄러졌다. 너무 목이 타서 병 안에 든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노력은 말 그대로 정말 미약해서, 나는 금방 교수님의 설득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청영의 서류 심사에 통과하고 나면 한 번의 시험, 그리고 세 단계의 면접을 거쳐야 한다.
나도 악명 높은 면접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각 단계가 모두 압박 면접으로 진행되어 눈물이 쏟아질 정도라고.
“…….”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빼지 말고 추천서를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성적이 정말 좋지 못해 서류부터가 통과하기 어려울 게 뻔했고, 그 고되다는 압박 면접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제안을 더 거절한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게 분명하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기업의,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추천서를 거절하기에는 이제 더 할 변명도 힘도 없었다.
대체 교수님이 왜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학생에게 꽂혀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서류든 면접에서든 떨어질 테고, 결과적으로는 무용지물이 될 추천서를 써주시는 교수님께 죄송스럽기도 했다.
‘나 말고 다른 학생이 받았다면 분명 붙었겠지.’
교수님이 내 속마음을 들었다면 네 코가 석 자 아니냐며 야단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속으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고개가 무거웠다. 나의 어깨에는 세 사람의 죽음만큼의 무게가 지워져 있었다.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나의 업보. 눈을 질끈 감자 끔찍한 감정의 무게가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