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9)

  2.

나의 예상은 모조리 깨져 버렸다.

어쩌다 보니…… 청영의 최종 면접만을 남겨둔 상태가 된 것이다.

처음 지원했을 때엔 당연히 서류 심사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교수님의 추천서가 있어도 다른 스펙이 그것으로 보완될 만큼의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스펙은 거의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합격 결과 발표가 나오는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그냥 평소처럼 아르바이트와 공부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잘린 물류센터 아르바이트 대신 구한 와인바 아르바이트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기에 일이 끝나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에 바빴고, 당연히 합격 여부 한 번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 뒤늦게 교수님으로부터 온 연락으로 서류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문자함을 확인해 보았다. 정말 놀랍게도 내가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정말 딱 죽고 싶었다.

서류 심사에 붙을지도 몰랐고, 또 교수님이 이렇게까지 깊게 신경을 쓰고 있는 줄도 몰랐다. 나는 결국 교수님의 관심과 주도하에 시험과 면접을 보러 다녔고, 더 놀랍게도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신이 나를 도우려는 것인지, 괴롭히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면접에서도 다른 사람과 비교될 정도로 어리바리하게 떨고만 있었는데, 이런 내가 도대체 왜 합격했는지 정말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건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교수님의 덕분인 게 분명하다.

교수님의 입김이 이렇게 센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절했을 텐데……. 그걸 깨달은 지금은 너무 늦고 말았다.

“하아…….”

떨어져라, 떨어져라. 밤마다 빌어도 붙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냉정하게 나를 현실로 일깨웠다.

금요일 아침. 최종 면접 날이었다. 아침밥을 간단히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한 뒤 행주로 싱크대 주변의 물기를 닦았다.

요즘은 매일같이 고민에만 둘러싸여 있다. 청영이라는 글자만 보여도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내가, 이제는 글자만 보면 한숨이 나왔다. 혹시나 회사에서 나와 우리 가족을 아는 누군가라도 만나진 않을까 상상하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다.

교수님께 이제 와서 남은 면접은 보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면접에 몰래 불참한다고 하더라도 교수님이 모르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씻자.”

한 가지 선택이 있긴 했다. 최종 면접에 가서 당당하게 탈락하는 것.

우스운 소리였지만, 이번 최종 면접은 정말 ‘떨어질’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냥 면접에 참여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선에서 모르겠다는 이야기만 멍청하게 되풀이하면 교수님도 어쩔 도리가 없으시겠지.

그러면 나는 그냥 적당히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사과를 드리고, 조금 위로를 받고. 그리고 다시 아르바이트 생활을 계속하다…… 내 분수에 맞는 작은 회사에 입사해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갈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계속 살면 되는 거겠지.

‘제발 그렇게 살게 되면 좋겠다. 제발.’

나의 이 간절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후…….”

씻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얼굴과 목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내리는 모습이 그 속에 비쳤다.

나는 어젯밤 ‘형’의 꿈을 꾸었다.

언제나처럼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형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그러던 도중 건반들이 피아노에서 하나씩 튀어 오르듯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형과 내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 장면이 콰앙, 하고 터지며 꿈은 끝났다.

평소엔 이 꿈을 좋아했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혼자 마음으로 그리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민폐를 끼치는 것이었으니.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손에는 군청색의 값이 나가 보이는 넥타이가 들려 있었다. 셔츠 깃을 세우고 목에 그것을 감쌌다.

이 넥타이는 교수님께 받았다. 연말이 다가온다고 여기저기에서 선물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중 하나라며 주셨다.

나는 함부로 받기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거절할 자존심은 나에게 없었다.

문제의 그날…… 나는 호텔 연회장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넥타이와 양복 재킷을 모두 버려두고 나왔다. 그래서 결국 면접을 위해 새로 사고야 말았다. 잃어버린 것도 새로 산 것도 모두 똑같이 싸구려였지만, 그래도 나에겐 큰 지출이었다. 계획에도 없던 지출에 마음이 시렸다.

옷이나 넥타이를 다양하게 살 여유는 없어 지금까지 모든 면접에 똑같은 차림으로 다녀왔다. 면접관은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들이었고, 그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서 내 옷차림을 기억할 사람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혹시나, 매번 같은 옷을 입고 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지, 하며 움츠러들었다.

돈 없는 사람의 괜한 자격지심인가.

씁쓸하게 웃으며 넥타이를 맸다. 교수님이 주신 넥타이는 아주 부드러운 실크 재질이었다. 스윽, 마찰음과 함께 매끄럽게 목에 감겼다.

‘감사히 받아야지.’

교수님은 오늘 아침에도 내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마지막 면접이니 편안히 잘 치르고 오라는 안부 연락이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데 떨어질 궁리만 하고 있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재킷을 걸친 뒤 옷 끝부분을 잡아당기며 탁탁 폈다. 넥타이만 고급이고, 옷은 영……. 살짝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거울 속에 비친 사람도 싸구려이긴 마찬가지였다.

* * *

청영 기업 건물에 들어오는 것은 오늘로 세 번째였다.

내 생에 여길 올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이 짧은 기간 동안 벌써 세 번이나 방문하고 말았다.

[청영, 미래를 향한 맑고 푸른 도약]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청영 로고를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맑고 푸른 도약이라니. 역시나 나는 이곳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이 제발 마지막 방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긴장하며 넥타이 매듭을 살짝 풀었다. 세게 맨 것도 아닌데 자꾸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긴장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내 안내를 받아 면접이 진행되는 층으로 올라갔다.

대기실에는 의자와 음료수, 간식 몇 개만 놓여 있을 뿐 사람 한 명 없었다. 내 순서가 맨 처음인지 맨 마지막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떨어지러 온 것인데, 왜 이리 긴장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좀 안심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15분 정도 대기했다. 빈속으로 왔는데 배도 고프지 않아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속으론 떨어지고 나서 교수님께 뭐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때 누군가 나를 데리러 들어왔다. 무테안경을 쓴 남자는 내 수험 번호를 불러 신원을 확인하더니 나를 복도 끝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제발 엄청 어려운 질문해 주세요. 제발 내가 마음에 안 들게 해주세요. 끝없이 기도하는 내 눈앞으로 마침내 문이 열렸다.

“…….”

내 눈에는 그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막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새하얀 문은 아주 천천히 열렸다. 나보다 앞선 사람이 먼저 한 발자국 들어가 무어라 나에 대해 간략히 전달했다. 그가 비켜서고, 나는 바닥에 꽂혔던 시선을 들어 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놓인 긴 테이블 한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단정하게 넘겨 고정된, 흐트러짐 없는 머리의 남자는 몸에 딱 떨어지는 맞춤 슈트를 입고 테이블 위 서류를 들추며 훑어보고 있었다.

남자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타고 올라간 내 시선이 그의 얼굴에 가 닿았다.

나는…… 걸어 들어가려다 말고,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앉으세요.”

낮고 차가운 목소리.

형이었다.

기억 속, 꿈속의 형이 무미건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놀란 것은 나 하나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지 가볍게 턱짓하며 가만히 서 있는 나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내 정신은 그제야 돌아왔다.

나는 바보같이 삐걱거리며 걸었다. 의자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걷는데도 발이 꼬여 하마터면 꼴사납게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의자까지 도달하고 나서는 그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앉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진한 눈썹 밑에 옆으로 시원히 뻗은 눈.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분명 내 기억 속의 형이 맞았다. 어릴 적보다 더 선이 진해진 느낌이 들긴 했지만, 분명 형이 맞았다.

“자기소개 안 합니까.”

“아, 아…….”

형은 나를 노려보듯 보며 짧게 말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바보같이 말을 더듬었다.

“안녕하십니까. 수험 번호 194620……. 서도운입니다.”

날…… 기억 못 하나? 나는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형은 내 짧은 소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너무 자라서, 외형이 조금 달라져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 지금…… 서운해하고 있는 건가……?’

형이 날 기억 못 한다면 나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상황인 건데, 이대로 면접을 망치고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살면 되는 것인데. 왜 형이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단정하게 모아 주먹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눈앞의 형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그가 천천히 넘겨보며 살피는 서류의 종이 소리와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

체감상 억겁의 시간이 흘렀고, 그는 여전히 서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서도운 씨.”

“……네.”

“명문 대학에 재학 중인데 성적은 무척 좋지 않군요.”

뭐라 대답해야 하지?

순간 나는 변명의 말을 늘어놓을 뻔했다. 떨어지려고 와놓고 변명이라니.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너무 예상치 못한 인물이라 머릿속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휴학은 2년이나. 이렇다 할 스펙도 없고, 기본 중 기본이라는 토익도 없고. 지원자 중에 성적이 2점대인 건 서도운 씨가 유일한 것 아십니까.”

형이 읽고 있던 서류들은 내 지원서였던 모양이다. 바닥을 기는 점수와 아무것도 없는 스펙을 지적하며 그가 나에게 짧게 시선을 던졌다. 그 찰나에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알 정도로 크게 몸을 움찔거렸으나, 다행히 그의 시선은 다시 서류를 향했다.

“소개도 제대로 안 하고, 변명도 안 하고. 떨어지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구네.”

형이 내 정곡을 정확히 찔렀다.

나는 지금 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우울하고, 또 부끄럽고.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의 압박 면접에서 이미 한 번씩 지적받았던 부분들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니 그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아마…… 과거 내가 좋아했던 형에게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이러는 모양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그에게 죄인인데.

머릿속엔 어렸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두 가족이 가깝게 지내던 어린 시절. 비서로서 성실히 일하던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청영가의 사람들.

그리고 동생처럼 나를 아껴주던 형. 눈앞의 바로 이 남자, 정해일.

항상 자신의 피아노 의자 옆에 나를 앉혀두고는, 내가 원하는 노래를 연주해 주곤 했다. 내가 더 자라고 난 뒤엔 직접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형이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는 내가 형을 위해 연주해 주기도 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족처럼 친밀했다. 그날의 사고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반갑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 말지.”

“…….”

“난 그다지 반갑지 않으니까.”

과거 회상으로 시야가 흐려지던 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형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확히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삼백안이 일직선으로 나를,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에 감겨들어 꽉 움켜쥐는 것 같은 기분.

동시에 심장이 이전까지와는 다른 빠른 속도로 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의 말로써 확실해진 것이 있다. 그 또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알고 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서도운이 과거의 그 서도운임을 안다.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뜻은…….

나는 순식간에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형이 날 기억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괜히 서운하다고 느낀 것이 얼마나 철없고 어리석은 투정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나도 참 웃기지.”

형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뭐라 중얼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 잘 듣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한 번 꾹 누르고 이마를 쓸더니 다시 똑바로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렇게 형편없는 성적으로 서도운 씨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궁금하진 않습니까.”

“전, 저는…….”

“추천서 때문에?”

내가 당황해 어물거리는 사이, 형은 서류철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빼냈다.

“이윤철 교수님, 좋은 분이시지. 부탁도 잘 들어주시고.”

“……?”

“추천서가 있었는데도 하마터면 서류에서 탈락할 뻔해서.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추천서를 무심하게 던지듯 놓았다. 추천서는 허공에서 몇 번 바람을 타더니 내 발치에 와 떨어졌다.

“이 지원서 통과시키겠다고 대체 몇 배수를 추가 선정했는지…….”

나는 지금 형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외국어로 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 문장 몇 개를 해석할 수가 없어 목이 탔다.

시선을 내리면 교수님이 써주신 추천서가 있었고, 시선을 올리면 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그의 눈이 보였다. 도통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하는지 몰라 초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도운 씨 여기로 데려왔다는 소리입니다.”

어……?

귓가에 흘러들어 온 말이 단번에 해석되지 않아 순간 멍해졌다. 두 번, 세 번 곱씹어 생각하고 나서야 그의 말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다 형이 의도한 것이었다는, 그런 얘길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아니 어떻……게…….”

“서도운 씨 발밑에 있는 그 추천서, 내가 쓰라고 한 겁니다.”

“…….”

“물론 그게 있어도 서류에선 영락없이 떨어질 점수라 내가 수를 좀 썼고. 서류만 붙여놓으면 면접은 워낙 변수가 많으니 아무도 의심 못 할 테니. 다행히 학벌은 좋아서…… 어디 내놓기 부끄럽진 않겠군.”

형은 뒤적거리던 서류철을 완전히 닫아 옆으로 밀어 치웠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이 과연 진짜일지, 정말 이렇게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계획된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지금까지 내 말을 뭐로 들었어?”

“그럼 왜,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묻자 형은 피식 웃었다. 비웃음처럼 들렸다.

“서도운 씨는 나에게 감사해야 될 입장 아닙니까. 이런 형편없는 지원서 어디 받아줄 곳도 없을 텐데, 왜 날 탓하는 것처럼 들리지?”

“그러는 형이야말로, 저는 안 뽑아야 하는 거 아닌…….”

“네가 날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형이 내 말을 끊으며 선을 그었다. 목소리는 지금까지 중 가장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의미였다. 항상 그렇게 불러왔는데, 꿈속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형을 떠올렸는데.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말에 말이 뚝 멎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도운 씨는 대표이사실 비서직으로 발령 날 겁니다. 그에 맞는 호칭으로 부르면 되겠군요.”

대표이사실 비서직이라니? 놀란 나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것도, 모두 예정되어 있었던 건가요?”

“당연하지. 널 비서로 부리려고 이 쓸모없는 짓거리를 한 건데.”

형의 답을 들으니 대체 나를 왜 여기로 불러들였는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우리 가족에게 가진 증오심은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에 청영의 대표를 죽음으로 몰고 가 한 가정을 박살 냈다. 당시 청영 기업 전체가 휘청거렸다. 죽음의 여파는 그렇게나 컸다. 청영을 평생 모르고 살고 싶었던 나도 어쩔 도리가 없이 청영의 문제들을 알게 될 정도로, 거의 모든 국민이 청영의 존폐에 관심을 가지던 때도 있었다.

청영 기업을 그렇게 우스운 꼴로 만든 게 바로 내 아버지인데, 그는 대체 왜. 왜 나를 다시 청영에 불러들인 것인가.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절?”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오는 것은.

“빚은 마저 갚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서도운 씨. 당신 아버지가 가져간 내 아버지 목숨 값.”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상기시키는 말뿐이었다.

역시 그는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잊을 수 있을 리가. 믿었던 사람의 실수로 아버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 증오가 가벼울 리가.

나조차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큰데, 청영이라는 거대 기업을 등에 업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선 내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빈자리를 느꼈을 것이다.

“거절 같은 주제넘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내 말 들어요.”

“전, 저는.”

“아직 청영에 갚아야 할 돈이 일억에 가까운 거로 알고 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잘 갚아오다가 중간에 끊겼더군요. 끊긴 지는 5년이 됐고. 그사이에 강제 집행을 안 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형의 말이 맞다. 잘 갚아가던 빚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그 빚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상속되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병원비로 들어간 사채를 갚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었다. 정말 그사이에 청영에서 이걸 문제 삼았다면 징역을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 내가 감내해야 할…… 온전히 나의 짐.

“청영 입사해서, 이사님 밑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청영이 주는 월급으로 빚 갚으면 되는 겁니까? 제가 취직 못 해서 빚도 갚지 못할까 봐 친히 청영으로 데려와 주신 건가요?”

“월급으로 어느 세월에 일억 갚습니까? 사채도 지고 있으면서.”

“……!”

형이 내 사정을 알고 있었다. 역시 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난 것이었다.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가 이 모든 판을 짜 나를 불러들였으니 당연히 나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 텐데. 내 학교, 내 생활, 사사로운 빚까지.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굳이 비서로 데려오려고 한 이유는 가까이 두기 위해섭니다.”

“…….”

“내가 원할 때, 몸 대줄 사람이 필요해서.”

형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여상히 말했다.

너무 물 흐르듯 말이 흘러나와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평온한 자세로, 평온한 목소리로 뱉을 말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굳은 채로 아무 말이 없자 형은 확인 사살을 하듯 다시 한번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서도운 씨가 잘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거.”

그의 말이 끝나자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동시에 내 심장도 멈춘 듯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징징 울려 아팠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올라왔다. 그 정도로 나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형은 계속해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예사 눈빛이 아니었다. 나를, 나를 그저 몸이나 파는 남창 보듯 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왜 나를, 그렇게…….

그가 선택한 ‘노골적인 단어’에 수치심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도 난 그게 무슨 소리냐며 그에게 쏘아붙이질 못했다. 그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줄 뱉는 게 전부였다.

“제가, 잘하는 게…… 그런 일이라니,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뭔가 착각하신 거라면.”

“시치미도 뗄 줄 알고.”

“시치미가 아니라!”

“그럼 호텔에서 내가 본 건 대체 뭐였습니까.”

호텔……? 내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

호텔이라면. 가장 최근에 호텔에 갔던 일은 그날…… 연회장뿐이었다.

혹시. 설마…… 형이 나를 본 것인가? 정말?

“무슨, 언제를 말씀하시는…….”

“두 달 전 M호텔, 기억 안 납니까?”

하도 그런 일을 많이 다녀서 기억을 못 하는 건지.

그는 덧붙여 이렇게 중얼거렸다.

형이 알고 있다. 그날 호텔에서 내가 어떤 꼴을 보였는지. 술에 잔뜩 취했던 데다 억지로 기억을 지우려고 해 나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나를 그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양 볼이 달아올라 붉어졌고, 주먹을 쥔 손은 힘이 너무 들어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세게 날 정도였다.

“그건, 그날의 일은, 제 의지가 아니었…….”

하지만 그의 얼굴은 내 말을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꼭, 어디 더 변명해 보라는 듯한 표정.

나는 부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고개가 자꾸만 숙여졌다.

“정말……입니다…….”

내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였으니 그가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정말 아니었는걸. 정말로…….’

조용한 면접장의 공기가 무겁게 우리 사이를 누르고 있었다. 이 무거운 침묵을 이겨내기엔 내 정신이 너무 나약했다. 강했다 하더라도, 형의 이런 노골적인 모욕에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그 사람들이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가고, 오라면 오라는 대로 오고. 쪼르르 달려가서 품에 안기는 걸 내가 봤는데도 그게 정말 본인 의지가 아니었습니까.”

“…….”

“그런 일로 돈은 벌어놓고, 이제 와서 부끄럽습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 그렇게 부끄러운 척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꼬여내는 게 특기입니까?”

“저는! ……그날 한 번뿐이었습니다.”

턱이 덜덜 떨렸다. 목소리도 똑같이 덜덜 떨리며 흘러나왔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우스웠다.

“아니라고 시치미 떼다가 한 번뿐이었다고 하면. 하, 서도운 씨가 나라면 그걸 믿겠습니까?”

“…….”

형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나는 나를 방어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짓을 거짓이라 증명할 수도, 사실을 사실이라 외칠 용기도 나한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참해질 수가 있구나.

그날 멋모르고 호텔에 갔다가 그런 일을 당할 뻔한 것도 이미 내 삶의 의지를 반은 갉아먹었는데, 형은 말로써 나를 다시 그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혹시나 내가 알던 형이 불쌍해서 나를 불렀을까, 나를 기억해서 날 한번 보려고 데려온 걸까. 그런 일말의 기대를 했던 내가 순진했고, 바보였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나는 간신히 몸의 떨림을 이겨내며 한 자 한 자 뱉었다.

“다 늙은 새끼들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들길래 얼마나 맛있을까 싶어서 나도 먹어보려고.”

“…….”

“그 작자들이 돈은 얼마나 줬습니까. 아량을 베풀어서 서도운 씨가 원하는 만큼 주겠습니다.”

“…….”

“평소에 어떻게 계산했습니까. 하룻밤에? 아니면. 한 번 사정할 때마다?”

형은…… 끝까지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어차피 절 마음대로 하려고 부르신 것 아닙니까. 제 의견 묻지 마시고 그냥 이사님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우리의 추억은 이제 회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영 협상을 할 줄 모르는군. 내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면 그런 태도는 버리게 될 겁니다.”

그는 다시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길게 감았다가 뜨는 진한 눈매에서 피곤하다는 기색이 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얘기해요. 얘기하는 순간 서도운 씨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꼭 나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형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나를 이도 저도 못 하도록 모서리에 몰아놓고, 위압적인 냄새를 흘려놓고는 이제 와서 제안이라니. 이건 강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강요임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나는 빚을 갚아야 했고, 청영뿐만이 아닌 고리대금의 사채도 있었다.

이 기회가 동아줄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썩은 동아줄. 나를 이끌고 달에 도착하자마자 후드득 끊어지며 저 깊은 바닷속, 심연에 빠뜨릴.

“오백이요.”

나는 홧김에 최대한 뻔뻔함을 가장하고 말했다.

“오백만 원이요. 하룻밤에. 그렇게 받아 왔습니다.”

그 깡패가 나에게 제안했던 금액, 오백이었다. 그 호텔 연회장에서의 하룻밤에 오백.

그럼 나는 최소한 오백은 받아도 되는 사람이란 소리 아닐까. 실제론 받아본 적도, 이런 거래를 해본 적도 없어 형이 이 가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순간 어리석게도 너무 비싸게 부른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몸을 팔 작정을 하고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상 약자였고,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왔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더 뻔뻔해져야 했다.

사람이 한순간에, 고작 몇 분 만에 바뀌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그런 척을 했다.

이건 내 오기였다. 내 추억을 짓밟고, 내 자존심을 짓밟은 형에 대한 내 오기.

그리고 반쯤은 체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밑바닥을 기는 인생을 사는 거,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내어주고 빚이라도 갚자. 알량한 순결 따위 십자가라도 된 것인 양 가슴속에 파묻어 지키지 말고, 내가 빠져 있는 이 시궁창 같은 인생을 벗어나기라도 하자.

나는 그의 제안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다짐했다.

“오백……. 알겠습니다. 일억을 탕감하려면 스무 밤은 보내야겠습니다.”

“네.”

“감당할 준비는 하고 대답한 거겠지.”

형은 턱을 쓰다듬으며 별것 아닌 일처럼 말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속이 쓰린 것은 나뿐이었다.

“준비가 안 됐으면 입사 날까지 준비하십시오. 내가 언제 동할지는 모르겠는데, 입사 전엔 부르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게 단번에 알겠다 하면 되지, 무슨 자존심을 그렇게 부려 사람 피곤하게 합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형이 긴 테이블을 돌아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아 한숨을 쉬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그의 잘 닦인 구두가 광을 내는 게 날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뒤에 남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그냥 한 번에 들여와서 끝내야겠군요.”

“……정말 이 모든 게 저 하나 때문이었군요.”

“서도운 씨 말고 신입 사원은 몇 명 더 뽑힐 겁니다. 다른 면접팀에서 이미 가려냈고, 내 면접에선 내 비서팀으로 들어올 사람 한 명만 뽑는 게 계획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업부로 발령될 거고.”

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가 흘러들어 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배수를 늘리느라 의도치 않게 많은 취준생한테 기회를 준다느니 하는 기사가 나긴 했는데,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도운 씨 하나 뽑겠다고 쓸데없이 버린 비용이 얼만데.”

“혹시…… 그 비용도 저에게 청구하실 생각인가요.”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또다시 웃었다.

“그걸 받아내려면 서도운 씨 뒷구멍이 다 헐 텐데, 괜찮겠습니까.”

형의 말에 울컥, 가슴속에서 답답하게 뭉쳐 있던 응어리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를 서도운으로 봐주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그의 눈에 그저 몸을 대줄 성욕 처리 기구로밖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내가 물었을 땐 무조건 대답하세요.”

“……안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형은 어이없다는 듯, 아니면 조금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저 경멸 어린 시선을 더 이상 받아내고 있기엔 오늘은 한계를 넘어섰다.

내가 가슴팍에 붙은 수험표를 보란 듯이 팟, 하고 떼어내자 형이 눈썹을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내가 괜한 성질을 부리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앙탈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그리고 그의 태도를 확인하며 눈치를 보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면접 치르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이라.

나는 그냥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였다. 그리고 뒤돌아 아까와 같은 새하얀 문을 열고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하아……!”

언제부터 숨을 참고 있었는지, 나는 청영 기업 건물에서 완전히 나오자마자 길게 숨을 뱉어냈다.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최대한 멀쩡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일직선의 길을 꿋꿋하게 걷다가, 형이 나에게 한 말이 문득 생각나면 움찔 멈춰 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청영 CY]

높은 건물 꼭대기에 걸려 있는 커다란 로고. 이젠…… 저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다리를 벌려야만 했다.

“…….”

울지 마. 울지 마, 서도운.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아직 우리의 관계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 * *

면접의 여파로 정신이 피폐해졌지만, 나는 휴식이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도 없이 토요일에 일일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다. 정말 쉬고 싶었지만, 쉰다고 해도 돈이 없어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바엔 그냥 돈이나 벌자 싶었다.

바로 다음 날엔 와인바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다. 그리고 또 다음 날은 학교, 또 다음 날도…….

그 면접만 아니었더라면 내 평소 일상과 아주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꽤 쌀쌀해져 목도리를 하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 가는 길에 떨어진 갈색 낙엽을 일부러 밟으며 걸어갔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겨울은 또 어떻게 나면 좋을까.

더울 땐 벗으면 된다지만 겨울은 껴입을 것이 없어 항상 고민이었다. 가뜩이나 추위도 잘 타는 몹쓸 체질이었다. 다들 도톰한 겨울 점퍼를 장만하는데, 나는 입학할 때 샀던 코트 하나뿐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작년 겨울을 떠올리면 절대 코트 하나로 겨울을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경량 패딩이라도 살까…….’

난방을 때는 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아 겁이 났다. 밤마다 손발과 코끝이 시려 깰 것을 생각하니 벌써 끔찍했다.

학교는 높은 지대에 있어 그런지 더 춥게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짧게 떨며 빠르게 건물로 들어갔다. 강의실은 너무 좋다. 더우면 에어컨 틀어 주고, 추우면 히터 틀어 주고. 강의실 한 칸 빌릴 수 있다면 다람쥐처럼 웅크리고 거기서 살고 싶다.

“청영 최종 결과 떴나 봐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복도를 걷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시에 발걸음도 우뚝 멈췄다.

강의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속이 괜히 울렁였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문득문득 그날의 대화가 자꾸만 떠올라 뒷덜미가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의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빨라졌다.

“청영? 내 회사는 언제 뜨려나.”

“난 진작 2차 탈락해서 볼 것도 없다…….”

동기 몇 명이 모여 청영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탈락했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착잡해졌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려는데, 그들이 알은체를 해왔다.

“어, 서도운. 왔어?”

“여기 앉아.”

한 명이 자신이 걸터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살짝 비켰다.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무시하고 다른 곳에 앉아 버릴 수가 없어 나는 다시 가방을 들고 쭈뼛쭈뼛 그 자리로 향했다.

자리로 갈 때까지 그들은 계속 청영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로 면접 후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압박 면접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중간에 집에 가고 싶었다는 둥. 나는 최대한 듣지 않는 척을 하며 어색하게 목도리를 풀어 내렸다.

“과대 오빠가 청영 썼댔잖아요. 지금 주영이가 톡으로 그러는데, 아마 붙은 것 같대요.”

“와, 대단하네. 부럽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문자인 것 같았다. 혹시 이 문자가 합격 문자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굳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날의 면접으로 이미 합격 사실과 내가 출근할 부서까지 안내받았기 때문에…… 무의미했다.

다행히도 대화 주제는 금방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한전이 어떻고 도공이 어쨌고 하며 약간은 침울한 취업 준비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나도 한때는 공사 취업이 목표였는데, 강제로 청영행이라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교수님이 들어왔다. 내게 추천서를 써준 이 교수님이었다.

시끄럽게 떠들던 동기들은 교수님의 등장으로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교수님은 들어오자마자 출석을 불렀다. 그러다 내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서도운.”

“네.”

“도운 군, 청영 연락 왔나?”

“네?”

그 말에 일순 강의실 안의 시선들이 나에게로 향했다. 주변에 앉아 있던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교수님은 다시 말했다.

“오늘 청영 최종 결과 뜨는 날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문과 사람들의 주목에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혀를 씹을 뻔했다.

“아직 확인 못…… 했어요.”

“그래? 흠. 수업 끝나고 잠깐 보지.”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네’ 하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바로 다음 학생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동기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팔을 쿡 찌르더니 ‘너도 청영 썼어?’라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머쓱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것도 형이 시킨 게 아닐까, 나는 의심하게 되었다.

혹시나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갈까 봐 교수님을 시켜 아예 공개적으로 내가 청영에 입사할 거란 사실을 못 박으려고 그런 게 아닐까. 정말 그런 거라면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 악질이었다.

수업 내내 그에 대한 분노가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 울컥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끝나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언제 청영 썼냐, 너무 말이 없어서 몰랐다, 하며 붙잡고 물어보는 것을 어색한 미소로 뿌리치고 나와 복도에 서 있는 교수님께 다가갔다. 다른 학생과 대화 중이던 교수님은 나를 보자 활짝 웃었다.

“그래, 최종 면접 어땠어. 초조할까 봐 일부러 연락을 안 했네. 결과는 아직 안 뜬 건가?”

“저…… 청영 붙었습니다.”

“오, 그래?”

교수님은 내 합격 소식에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표정을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애써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내가 뭘 했다고. 될 거라고 했지 않나.”

하하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잘해서 된 게 아니라 교수님의 추천서가 있었고, 형이 계획한 판이 있었다. 나는 그 위에서 인형처럼 놀아난 것뿐이었다.

교수님이 떠나고, 그제야 주머니 속 핸드폰을 잠깐 확인했다.

“하……!”

……목 끝까지 차오른 욕을 간신히 삼킨 뒤 나오는 것은 어이없는 헛웃음뿐이었다.

나에게 온 문자는 합격 문자가 아니었다.

[오늘 7시까지 회사로 오세요.]

형의 문자였다.

* * *

“도운 형이랑 술자리 와본 거 처음인 것 같아요.”

“나도 신입생 환영회 때 빼고 처음인 것 같은데? 근데 좀 천천히 마셔.”

“응……?”

누군가 내가 벌컥벌컥 마시던 잔을 가져가더니, ‘벌써 다 마셨네’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오늘 굉장히 충동적으로 과 술자리에 참석했다.

교수님과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시 가방을 챙기러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동기들이 나갈 준비를 하며 떠드는 걸 들었다. 과대가 쏘는 술자리가 있다며 거기에 참석하자고. 그들은 가방을 주워 드는 날 보더니 자연스레 함께할 것을 권했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거절했을 테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줘.”

나는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술잔에 당황해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 봐야 바로 옆에 앉은, 오늘 이 술자리를 쏜다는 과대 손에 들려 있던 건데, 꽤 취한 상태여서 그걸 알아볼 정신도 없었다.

과대는…… 아니, 이제 이름을 외운 이준혁은 청영에 붙었다고 했다. 그 김에 한턱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회사에 붙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너무 작아 보였다. 그래서 빨리 취하고 싶어서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평소엔 돈이 없어서 이런 자리에 한 번 참석해 보지도 못했다. 돈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없어서 이런 자리에 참석하기엔 너무 어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형의 문자 연락 때문이었다.

[오늘 7시까지 회사로 오세요.]

답장을 하자마자 문자함에서 지워 버렸는데, 이미 뇌리에 박혀 머릿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입사 전까지는 부르지 않겠다던 사람이 대뜸 불러내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결과 나왔다고 이젠 청영 사원이다 이건가?

형 생각을 하니 다시 화가 치밀어 나는 뺏어간 술잔 대신 새 술잔을 가져와 술을 콸콸 따랐다.

“야, 서도운. 어휴……. 내가 따라줄게.”

그러자 옆자리 사람이 또 병을 가져갔다. 있는 힘껏 그 사람을 노려보려고 했는데 술에 잔뜩 취해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실실 웃으며 잘 받아 마셨다.

단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한번 행동해 보고 싶었다. 남들에겐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내 선에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그 일탈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이걸 부추긴 건 전부 형이야.’

내가 인생에서 형을 다시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서도운, 계속 전화 오는 거 같은데?”

테이블에 머리를 반쯤 박고 있던 나는 내 어깨를 살살 흔드는 손길에 약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내 전화 올 곳이 없다는 걸 생각해 내고는 그냥 스팸 전화이겠거니 싶어 대충 손을 휘저었다.

무시해도 돼,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에선 옹알옹알 알 수 없는 술주정만 흘러나왔다. 울리던 핸드폰 진동도 이내 잠잠해졌으니 더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나는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켜고, 옆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옆에서 누가 뭐라 뭐라 청영에 대해 물어보는 것 같았는데 귓가에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이 말랑말랑한 떡이 먹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손에 힘이 풀려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얘 취했네.”

이렇게 취해본 건 호텔 일 이후로 처음이었지만, 여기는 호텔이 아니었으니 겁도 없이 이렇게 술을 들이켰던 것 같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고개를 제대로 못 가눠 양옆으로 마구 휘청거리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옷이 입혀지고, 가방도 메어지고, 목도리도 둘러졌다. 이 이후부터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 * *

엄청 어렸을 적이었다.

형이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거기가 어딘지 당시엔 정확하게 몰랐으나, 좀 더 자랐을 땐 그곳이 형의 아지트와 같은 별채라는 걸 알았다.

별채로 향하는 길은 동화 같았다. 푸른 나무가 집보다 더 높게 자라 있었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나뭇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낮에도 별이 보이는 곳이라고 말하며 아주 좋아했다.

옆으로 꽃이 한가득 심어 있었고, 작게 분수도 있었다. 길에는 넓은 돌이 징검다리처럼 박혀 있었고, 우리는 그 위를 폴짝폴짝 뛰며 별채로 향했다.

별채로 가면 형은 항상 나를 피아노 의자에 앉혔다. 내 키가 작았을 땐 내 양팔 밑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린 다음, 옆에 앉혔다. 형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다리를 천천히 흔들며 바람을 타고 흐르는 음악을 감상했다.

내가 피아노를 배우게 된 건 다 형의 영향이었다.

형이 피아노를 치는 걸 옆에서 따라 치다가 형이 가르쳐 주어 혼자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형이 부모님의 반대로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의 나는 생각이 어려, 내가 대신 열심히 피아노를 쳐서 형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형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내 앞에선 항상 잘 친다며 웃었지만 속으론 내가 얄미웠을지도 모르겠다.

‘전공을 이쪽으로 가보시면…….’

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피아노 선생님이 아버지께 하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수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던 편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 전공을 하길 원했고, 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의 반응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선생님께 그런 칭찬을 들은 것이 너무 기뻤다.

그길로 집을 나서 형의 집으로 달려갔다. 본채엔 들르지도 않고, 수풀 옆으로 난 우리만의 비밀 통로로 기어 들어가 곧바로 별채로 향했다.

‘형…….’

형이 뒤뜰 벤치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내가 나지막이 불렀을 때도 형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내가 형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허리를 조금 숙이자 수풀을 통과할 때 머리에 붙었던 나뭇잎이 머리에서 살랑 떨어졌다. 작은 나뭇잎은 그대로 형의 볼 위로 떨어졌다. 형은 간지러웠는지 눈썹을 움찔거렸지만, 깨진 않았다.

자랑하려고 왔는데. 형이 피아노 가르쳐 줘서 선생님께 엄청 칭찬받았다고. 다 형 덕분이라고, 내가 형 대신 더 열심히…… 치겠다고…….

하지만 하려던 말은 형의 자는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귓가엔 환청이 들려왔다. 형이 치는 피아노 소리. 형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웅장하게 한데 엉켜 내 가슴속으로 밀려오던 그 소리가…….

문득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의 출처를 찾았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인지 살폈던 것인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 수가 없다.

‘꼭 해일처럼…….’

작게 중얼거린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형의 볼 위로…… 촉, 내 입술을 올렸다.

* * *

“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잘 떠지지 않는 뻑뻑한 눈이 깜빡이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간신히 부드럽게 떠졌다.

주변은 어두웠다. 아주 깜깜했다.

‘아침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누워 있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

손에 이불이 잡혔다. 집에선 볼 수 없는, 아주 보들보들한 감촉의 이불. 아니, 애초에 집엔 침대도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술이 단번에 깼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과의 술모임에 참여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다 너무 취했었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누가 날 데리고 갔던 것 같은데. 친구 집인가?

주변을 둘러보아도 온통 어둡기만 해서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었던 순간, 방의 문이 열리며 길게 빛이 들어왔다. 빛 때문에 눈이 얼얼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빛을 가렸다.

간신히 빛에 익숙해진 눈이 검은 실루엣을 발견했을 때,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은 다 깼습니까?”

* * *

세 시간이나 이어진 기나긴 회의를 중간에 멈추고, 잠시 식사를 위해 쉬는 시간을 가졌을 때였다.

해일은 비밀리에 힘쓰고 있는 바이오 사업의 국외 업체 협력 건으로 요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마라톤처럼 이어지는 회의는 그를 상당히 피로하게 만들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적자를 내고 있는 국내 연구소나, 낌새를 눈치채고 들러붙을 언론은 문제도 아니었다. 언제 튀어나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지 모르는 형, 정영일이 가장 골칫거리였다.

해일은 테라스로 나가 안주머니에서 매트한 표면의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기다랗게 누워 있는 담배 중 하나를 꺼내 입술에 물고 불을 붙인 뒤 길게 빨아들였다.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사고를 아무리 많이 친다 해도 그것도 형이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회사를 이끌어보려 노력하던 모습이 그의 기억에 박혀 있었다.

당시 정영일은 이제 서른이 된 참이었고, 나이나 실력 면에서 회사를 이끌기에는 모자랐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삼촌의 도움을 받아 사업부 하나를 맡아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욕적으로 일을 진행해 보는 듯싶었다. 그러나 역시 우려대로 정영일은 사업에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정영일이 손대는 사업이란 사업은 족족 적자를 찍었고, 심한 경우엔 아예 사업을 접어야 했다. 처음은 조선이었고, 다음은 바이오였다. 정영일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해일이 막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회사를 나 몰라라 하고 해외로 도피했다.

“……후우.”

그럼에도 형이었다. 해일은 형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신없던 시기에 먼저 정리에 나서 회사를 맡은 형을 싫어할 수는 없었다.

형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한 개비를 다 피워 버렸다. 해일은 재떨이에 담배 끝을 대충 문질러 끈 뒤 다시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6시 반, 잠시 뒤면 서도운에게 말했던 7시가 된다.

서도운을 부른 건 계약서 작성을 위해서였다. 회사 차원의 계약이 아닌, 개인 대 개인의 계약. 그를 위해 불러둔 집안의 변호사가 곧 도착할 터였다.

“…….”

해일은 서도운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떠오르려는 걸 애써 막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오는 길인지 연락을 해보려고 했는데, 문자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싫습니다.]

서도운에게서 온 문자였다. 내용은 그게 다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 * *

“제가, 왜, 여기에…….”

나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모았다. 급히 눈을 굴려 살펴보니 다행히 옷은 전부 입고 있었고, 형은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합니까.”

“……네. 아니, 술을 마신 건 기억이 납니다.”

“그건 기억해야지.”

형이 불을 켰다. 낮은 조도의 불이 은은하게 켜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늘 내가 부른 건 기억 안 납니까.”

형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다. 전에 이야기했을 때와 비슷한 것도, 아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화가 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납니다……. 그건 술을 마시기 전이어서.”

“맨정신에 그 문자를 보냈을 줄은 몰랐는데요.”

역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은 깼습니까.”

“네……. 그런데 저는, 제가 왜…… 이사님과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렀으니 나랑 있지.”

형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자신이 불렀으니, 내가 거절의 문자를 보내고 일부러 술자리에 참여해 피했음에도, 그는 내 위치를 알아내 나를 데려올 수 있는 사람. 그의 짧은 말은 이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사님 집입니까?”

“호텔입니다.”

“……제가 분명, 싫다고 답장을 드렸었는데요.”

“그런데요.”

그는 여상히 대답하며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다 빨리 일어나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이불을 걷으며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그러니 가보겠습니다.”

“어딜 가.”

차마 침대에서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형에게 손목이 잡혔다. 강한 힘으로 움직임을 막아서는 통에 나는 억지로 다시 침대에 던져지듯 앉고 말았다.

“……이사님. 분명 입사 전엔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불러내서 섹스를 안 하겠다는 소리였지.”

형은 이내 내 손을 놓았으나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귓가로 흘러들어 온 단어가 순간 내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럼 왜 호텔로 절 데려오셨습니까.”

“인사불성인 사람을 회사로 데려갈 순 없잖아요?”

형은 이내 내 손을 다시 놓았다. 그의 대답은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어투였다. 지금 영문도 모르고 호텔로 끌려와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그는 전혀 이해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회사로 불렀던 건, 계약서를 쓸 요량에서였습니다. 입사 전에 사사로이 계약할 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원들 앞에서 쓸 수도 없고.”

“그런 짓을 하는 데도 계약서가 필요한가요?”

내 물음에 형은 피식 웃고는 탁자 근처로 걸어갔다. 그 위에 놓인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더니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탕, 맑은소리와 함께 지포라이터가 열렸고, 끝부분에 불을 붙이자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위는 조용했다.

“이런 일일수록 필요하지. 누구한테 발설한다든가 하면 문제가 생기니까요.”

“발설 안 합니다.”

“그건 모르는 거고. 계약서는 항상 만에 하나를 대비해 쓰는 겁니다.”

“…….”

“변호사가 회사로 오던 길이었는데, 서도운 씨가 연락도 안 받고 사라지는 바람에 결국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입에 담배를 문 채 말하자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형은 이내 손가락 사이에 걸쳐 담배를 빼내더니 내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아, 그리고…… 나와 관계 맺으면서 다른 사람한테도 다리 벌리는 건 못 참아서, 당신 행동에 제약을 두기로 협의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는 계약서입니다.”

“네?”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아니, 제가 무슨, 제가 왜 다른 사람이랑……!”

그러다 문득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을 떠올렸다. 나는 형에게 그저 남창일 뿐이었다. 돈만 주면 몸도 흔쾌히 내어주는 그런 존재.

내가 여기서 그 사실을 부정하면 앞서 한 거짓말과 모순되고 만다. 그리고 형이라면 내가 남들이랑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형이 비웃음을 담고 말했다.

“오늘도 취해서 다른 남자한테 업혀 가지 않았습니까.”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희뿌연 연기가 퍼졌다.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후우. 이번엔 젊은 남자한테 안겨 가던데. 어디서 물어왔습니까, 또.”

“…….”

“나도 못 알아보고 나한테 좋다고 안기던데. 역시 나 없는 곳에선 술 마시지 말라는 조항도 넣어야겠습니다.”

모욕적인 언사에 어금니가 다물렸다. 힘을 주느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는……. 걔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동기들끼리 모임이었습니다. 그냥 친구고…… 그런 짓 할 일 절대 없습니다.”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사실 친구라고 말하기에도 뭐했다. 정말 데면데면하다 오늘에서야 겨우 술 한 번 마신 게 다인 사이였기 때문에. 차리라 좀 더 친했으면 해명하기 수월했을까 싶었다.

나는 숙취인지 모를 것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마를 몇 번이나 쓸었는데도 골을 울리는 쨍한 아픔이 사라지질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사님이 무슨 상관이십니까. 우린 아직 계약 전인데.”

“하하. 당돌하네.”

아랫것 대하는 듯한 말투에 나는 시트를 그러쥐었다.

“대뜸 제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셔서 이렇게 데려오신 것도 솔직히 많이 당황스럽고요. 연락 무시한 건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냥 제 상황을 조금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

“이해해 주면, 계속 그렇게 몸 굴리려고 했습니까?”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대체 나는 그 호텔엔 왜 가서. 왜 하필 그가 있던 호텔에 가서 그런 꼴을 보였던 걸까.

한 번 형의 뇌리에 박혀 버린 내 이미지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그걸 알아달라는 것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내 반가운 사람과 이런 사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서 당황스럽다는 걸 알아달라는 것뿐이었는데.

“……네.”

짓씹는 듯한 대답이 흘러나갔다.

“네, 그러려고 했습니다.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죄송하지만 전 이사님한테 말고도 빚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사람이라서요.”

고개를 들어 형과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은 꼭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매서웠으나, 나는 피하지 않고 시선을 보냈다.

“그 사람들한테 빚 갚으려면 50번은 자야 하거든요.”

“누구 마음대로.”

그가 담배를 비벼 껐다. 아직 길게 남아 있던 개비가 중간쯤에서 탁 부러지며 구겨졌다.

“이사님이 다른 빚도 갚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저 계약서 안 쓰겠습니다. 하루빨리 빚 갚아야 하니까 값 후려쳐서라도 여기저기 몸 좀 팔고 다녀야겠, 윽!”

강한 힘 때문에 순식간에 몸이 형의 앞으로 끌려갔다. 그가 한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아 끌어당긴 것이었다.

코앞까지 형의 얼굴이 다가왔다. 서로의 숨이 희미하게 섞일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도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 그러죠.”

형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놔주었다. 그리고 그러겠다고 답했다. 나는 대답을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근처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으며 스스로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내가 남은 빚도 갚게 해주겠습니다.”

“…….”

“이리 오세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나는 어쩐지 겁이 나서……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하지만 형의 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입술이 부은 게 느껴질 정도로 이로 세게 씹으며 그의 앞에 섰다.

“꿇어앉으세요.”

그의 말이 꼭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이라도 되는 듯 따랐다. 굴욕적인 자세로 꿇어앉자 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날 만족시킬 수 있으면…… 남은 빚도 내가 다 갚게 해주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씹질에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응?”

“다 늙은 새끼들도 절 보고 침 질질 흘렸다고 안 하셨습니까.”

형은 소파에 깊게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 그랬었죠.”

그러고는 내 뒷머리를 그 큰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남자 좆은 빨아봤겠지?”

“……!”

“입 벌리세요.”

“윽…….”

내가 놀란 상태로 굳어 있자 형이 억지로 내 입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넣어 벌렸다.

“잘 빨면 이것도 그 빌어먹을 하룻밤으로 쳐줄 테니까. 입 벌려.”

형이 내 아래턱을 쥐고 당겼다. 강한 악력에 턱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에서 절로 흐윽, 하고 앓는 소리가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는 사정 봐줄 줄을 몰랐다. 그대로 끌고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내 얼굴을 가져갔다.

나는 시선을 올려 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이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항상 무표정했다.

굳이 깊게 헤아리려 하지 않아도 ‘나’에 대한 감정 하나는 확실했을 것이다. 증오…… 배신감.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짧은 순간 속으로 수만 번 고민했다. ‘하룻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애매하게 허공에 떠 있던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형의 바지춤에 가져다 대자 그는 그제야 붙잡은 턱을 놓아 주었다.

손의 움직임은 아주 느렸다. 나도 모르게 느리게 한 것 같다. 이 절망적인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춰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지만 벨트 없이 버클만 채워져 있는 검은 바지는 내 손짓 한 번에 손쉽게 풀렸다.

“긴장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티가 안 날 수가 없었겠지.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갑작스럽기만 하다. 평생을 도망쳐 오던 상대 앞에 꿇어앉아 그의 성기를 애무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서 짧게 웃는 소리와 함께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났다.

허리춤을 살짝 끌어내리니 그의 드로즈가 보였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밴드에 손가락을 걸어 내렸다. 마침내 그의 성기가 나타났다.

더 망설일 수가 없어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성기를 잡아 꺼냈다.

‘너무…….’

아직 발기하지도 않았는데, 크기가 너무나도 컸다. 어쩌지, 어쩌지…….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처음 마주한 남의 성기는 나에게 너무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손끝만 갖다 대어도 느껴지는 열기에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용기를 내서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요령도 없이 선단에 곧바로 입을 갖다 대었다.

뽀뽀하듯 귀두 끄트머리에 입술을 내렸다가 혀로 끝을 살짝 핥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냥 그가 말했던 대로 빨아들였다. 형에게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 기둥을 따라 입술로 훑어 내렸다.

힘을 받기 시작한 성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입술을 델 것 같았다.

“아읍, 음…….”

나는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다시 올라왔다. 끝이 미끈해진 성기에 혀를 넓게 펴 문질렀다. 긴장했기 때문인지 맥박이 요동쳤다. 고동은 내 손을 타고 그의 성기에까지 전해졌다. 그때 형이 소파 팔걸이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 뒷덜미로 뻗어왔다.

그는 네 손가락으로 뒷덜미를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는 내 귀 근처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숨을 하, 뱉어내며 성기에서 입을 뗐다. 그가 내 목을 아플 정도로 쥐며 말했다.

“다시 물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곧바로 귀두를 입에 담았다. 너무 커서…… 턱이 얼얼해질 때까지 입을 벌렸음에도 쉽사리 입 안에 담을 수 없었다.

간신히 입술을 오므려 귀두 밑의 틈을 간질이자 형이 내 귓불을 엄지로 마구 뭉개듯 문질렀다.

“입이 작네.”

“읍, 으흡…….”

“작고…… 좁고. 하아. 뭐 이렇게 작습니까.”

형이 중얼거렸다. 그가 말할 때마다 담배 연기가 우리 주변을 떠다녔다. 그는 손을 조금 더 내려 내 턱을 간질였다. 꼭 애완견을 대하는 듯한 손짓.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읏, 으응…….”

“하아…….”

나른하게 가라앉은 그의 한숨이 귓가에 닿았다. 형은 지금 기분이 좋은 걸까.

나는 뭘 더 해야 할지를 몰라 귀두를 문 채로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바람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가 움찔 허리를 떨었다.

“서툰 척하는 거예요?”

형이 내 머리채를 잡고 입을 떼어내었다. 크게 벌어졌던 입이 드디어 다물리자 볼 쪽에 미약한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일 리가 없었다.

“으……. 네?”

“제대로 빨아요. 혀 뒀다 뭐 합니까.”

“……알겠습니다. 으읏.”

알겠다고 답하자마자 형이 다시 내 머리를 자신의 사타구니 위로 짓눌렀다. 발기해 커다래진 성기 위로 볼과 입술이 마구 문질러졌다. 수치스러운 행위에 귓가가 붉어진 것도 잠시, 제대로 빨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무릎을 더 모아 앉으며 상체를 조금 세웠다. 조심스럽게 그의 양쪽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돌처럼 딱딱한 허벅지 근육에 살짝 지탱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크기를 키운 듯한 성기가 입 안을 억지로 벌리며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귀두의 가장 굵은 부분이 입천장을 잔뜩 긁고, 혀 위를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오싹한 감정에 등허리가 덜덜 떨렸다. 결단코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형은 절대 모를 테지만 남자의 성기를 만져 보는 것은, 그리고 입에 담아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이 모든 감각이 정말 생소하기만 했다.

“읏, 으읍, 흐읍…….”

천천히 위아래로 고갯짓하며 성기를 깊이, 더 깊이 물었다. 너무 입을 크게 벌려 입꼬리가 당겨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찢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형이 명령한 대로 몸은 충실히 움직였다. 혀를 쓰라고 했었나……? 입 안에 꽉 차 있는 것 때문에 혀를 움직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어릴 적 사탕을 굴려 먹던 것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빨아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모르게 입 안을 조였는지, 그의 허벅지가 움찔 떨리는 게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그가 내 앞머리를 빗듯이 쓸어 올렸다.

“이로 긁지 말고. 입 더 크게 벌려.”

“우읏…….”

그렇게 말해도 이게 내 한계치까지 벌린 것이었다. 더 크게는 못 벌린다고, 그렇게 대답하려고 웅얼거렸으나 성기를 물고 있는 상태라 목소리는 입 안에 갇혀 나오질 못했다.

“윽……. 일부러 이러는 건지.”

“후읏, 하아…….”

나는 형이 잠시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놓는 사이 성기를 빼냈다. 숨을 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코로 숨을 쉬면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오히려 계속 들이마시기만 해서 폐에 공기가 한가득 차 있었다. 가슴이 너무 벅찼다.

오래 쉬면 또 날카로운 말이 날아올까 걱정돼 숨을 고르자마자 다시 그의 성기에 얼굴을 붙였다. 츠읍, 춥, 춥. 척척하게 젖은 성기를 게걸스럽게 빨고 입술로 문질렀다.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듯 혀끝에 힘을 주고 핥아 올렸다.

“더 세게…….”

형의 엄지가 내 입꼬리를 만지작댔다. 조금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손이 뒷머리를 누르는 대로 다시 선단부터 입 안에 넣었다. 쓴맛이 났다. 프리컴이 입 안을 더럽히고 있었다.

“웃, 으윽!”

그때였다. 형이 갑자기 내 목뒤를 단단히 잡고 콱 누르는 것이었다.

‘아파……!’

돌연 목구멍까지 들이박히는 성기에 놀라 헛구역질과 기침이 터져 나왔으나,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 때문에 기침 한 번도 제대로 못 하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윽, 크읍, 흑!”

형은 아예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봐주는 법이 없었다. 간신히 입 밖으로 빠져나갔나 싶으면, 그만큼 더 깊숙이 박으려 양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나는 애처롭게 그의 허벅지를 누르며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슬퍼서, 괴로워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생리적인 현상일 뿐인지 모르겠다.

“목구멍까지…… 윽, 제대로 삼켜.”

“흐읍, 하아……! 못, 못 합니다.”

“왜 못 해. 하아, 입 벌려.”

“크읍, 읏, 흐윽!”

형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손으로 내 머리를 잡고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성기를 밀어 넣고 거세게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찌르고, 입천장을 긁고, 커다란 성기는 목구멍을 찢을 듯 몰아붙였다. 볼을 타고 눈물이 주룩 흘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의 다리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면…… 꼭 내가 성기를 먹여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으응, 으……읍, 읏……!”

“하아, 씨발…….”

“으, 으응, 흐으…… 으으읍!”

형이 절정에 다다르며 성기를 퍼억 크게 박았다. 딱딱한 성기가 그 순간 입 안에 정액을 터뜨렸다. 목구멍부터 혀 위까지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양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허리를 몇 번 더 털고 나서야 내 입 안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기도가 막혔던 느낌에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렸다.

“혀 내밀어.”

진정할 새도 없이 그가 머리카락을 세게 잡았다. 억지로 고개를 들린 나는 체념한 채로 입을 벌렸다. 그는 혼자 수음하기 시작했다.

툭, 투둑. 이내 그의 정액이 혓바닥 위로 한 번, 그리고 얼굴 위로 한 번 떨어졌다. 얼굴에까지 쌀 줄은 몰라서 눈을 뜨고 있다가 질끈 감자 속눈썹에 뜨끈한 정액이 엉겨 붙었다.

“후우……. 삼키세요.”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입 안이 너무 쓰고 비렸다.

몇 번이고 삼키려고 했지만 자꾸 기침이 나와 입술 사이로 정액이 흘렀다. 그런 날 보더니 형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 목 근처를 누르며 매만졌다. 그 손길 한 번에 정액이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완전히 삼키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기침할 수 있었다.

“켁, 콜록, 콜록…….”

“다 삼켰습니까.”

“콜록……. 네.”

눈가에 떨어진 정액을 손등으로 훔쳐 닦았다. 손등에 옮겨 묻은 정액이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감촉이 몹시 좋지 않았다. 나는 주변에 놓여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 손과 눈 근처를 문질러 닦았다.

형은 옷을 추슬러 입고는 말했다.

“다음엔 얼굴에 싼 것도 다 삼켜. 알겠어?”

“……네.”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요령껏 손으로 훑어 닦은 뒤 손을 빨아 먹으라는 소리였다.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다가와 입술을 문질렀다.

“목구멍 열어서 빨 줄도 모르는데. 이래서 지금까지 좆 어떻게 빨았습니까.”

“…….”

“이렇게 형편없는 실력으로도 돈을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가 괜한 의심을 할까 봐 변명하려는데, 목구멍이 따가워서 자꾸 목이 멨다. 아무래도 목 안이 헌 듯했다. 이걸 어쩌지 싶어 목을 문지르고 있는데 내 대답을 들은 그가 바람 빠지듯 짧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요망하게 굴어서 꼬여냈던 거군.”

그의 중얼거림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아무도 꼬여낸 적 없는데, 이 사람이 알아줄 리 없다.

“받아요.”

아직도 꿇어앉아 있는 내 무릎 근처로 형이 뭔가를 던졌다. 허공에 떠 있던 시선이 자연스레 밑으로 향했고, 떨어진 게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

수표였다. 백만 원짜리 수표.

지갑에 들어 있던 탓에 반이 둥글게 말려 있는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청영에 갚든, 사채를 갚든, 필요한 물건을 사든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이렇게 비참한 방식으로 돈을 받을 줄은 몰랐다.

이미 형과 자기로 결심한 때부터, 아니 강요받은 때부터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바닥에 던져진 돈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덩달아 바닥으로 쿵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쿵쾅거리며 내달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다 아플 정도로, 나는 억울함과 분노…… 실망감에 휩싸였다.

우습게도 난 그 돈을 주워 들었다. 조심스레 떨리는 손을 뻗어 한 장 한 장 주워 잘 모아 손에 쥐었다.

내가 느끼는 이 비참함이 형이 원하던 복수구나. 내 몸을 유린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진흙탕으로 굴리는 것이…….

“피곤하면 자고 가도 됩니다.”

형은 어느새 겉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안주머니에 넣는 담배 케이스와 지갑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 거면, 나는 지금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자고 가도 됩니다. 내일 아침 아무 때나 나가면 되고.”

형이 길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래 꿇어앉아 있었던 바람에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고통을 무시하고 급히 방을 나서는 그를 불렀다.

“이사님.”

“네.”

현관문을 열려다 말고 형이 뒤로 돌았다. 그는 아까와 달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그 눈빛을 받고 서 있다가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연락하면 받으세요.”

형은 그 두 마디만 남겨놓고 문을 열었다. 터엉. 공허한 울림과 함께 문이 닫혔고, 호텔 방 안엔…… 몸을 팔고 돈을 받은 나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

묻고 싶었다. 정말 우리 이래도 되는 것이냐고. 형은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나는 자꾸만, 자꾸만 옛날의 형이 겹쳐 보여서, 떠올라서 너무 심장이 답답하다고.

하지만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그 대답에 상처 받을 나도 뻔했다. 그래서 억지로 질문을 삼켰다.

“하아.”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손에 꾹 쥐고 있는 오백만 원이 너무나 우스워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형이 떠난 뒤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얼마 뒤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 찬물을 틀어놓고 몇 번이나 세수를 하고, 그의 것이 들어왔던 입을 헹구고 또 헹궜다.

옆에 놓인 칫솔과 치약을 써도 되는 건지 한참을 고민했다. 일회용 물건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혹시 쓰게 되면 비용을 내야 하는 걸까 봐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이기를 반복했다. 어릴 때 호텔에 묵으러 왔을 땐 대체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냥 포장을 뜯었다. 돈 내라면 그냥 오늘 받은 오백만 원으로 내지, 뭐…….

오백만 원을 떠올리니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잇몸이 아파올 때까지 거세게 양치질을 한 뒤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호텔 룸은 무척이나 넓고 화려했으나, 나는 구경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나왔다.

눈이 질끈 감겼다. 저 화려한 샹들리에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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