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9)

  3.

집에는 어머니가 쓰던 물건을 모아둔 상자가 있었다. 차마 다 태우지 못한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던 것이라 그런지 상자 위로 먼지가 좀 쌓여 있었다. 물걸레로 그 위를 닦아내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잠시 추억에 잠겨 어머니의 옷들을 가만가만 쓸다가 밑에 깔려 있는 두툼한 수첩을 꺼냈다. 검고 투박한, 어머니가 쓰시던 가계부였다.

그곳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의 우리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루에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썼고, 얼마를 갚았는지. 1원 단위까지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수첩을 몇 장 넘기지 않아 청영에 대한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억 오천만 원. 교통사고 사망으로 인한 보상 금액. 나는 계속 넘기며 청영이라는 단어만 눈으로 좇았다.

집을 팔고, 차를 팔고, 가지고 있는 것 중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팔아 조금을 갚고, 이후론 계속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청영에 갚아 왔다.

거의 마지막 장에 다다르자 어머니가 입원하기 직전에 쓴 페이지가 나왔다. 형이 말했던 대로 청영에는 빚이 일억 정도 남아 있었다. 정확하게는 일억 일천이백만 원. 어머니는 혼자 일억이 넘는 금액을 갚아왔던 것이다.

그간 어머니가 하셨을 고생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다가도, 이제 이 빚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다시 장부를 상자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옷도 잘 개어 그 위로 올렸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언젠가 내가 빚을 다 갚는 날이 오면 그날 모든 유품을 태워서 보내 드려야지.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다.

마지막 학기가 끝났다.

기말고사가 끝났던 날, 건물 밖으로 나오니 길게 한숨이 터졌다. 그렇게 고생해서 공부해 가며 들어온 대학이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돈 때문에 자퇴 충동이 들었던. 그런 곳을 마침내 졸업한다.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졸업하고 취업하게 되면 그 모든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생각해서 뭐 하겠어.’

눈앞에 흩어지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다 가방을 고쳐 메고 발을 옮겼다.

* * *

1월의 중반, 2월까지 머지않은 애매한 날이었다.

나는 공장 아르바이트가 일찍 끝난 탓에 추운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오후에 있을 카페 아르바이트에 갈 시간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미리 가 있을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카페에 가면 사장님이 직접 커피를 내려준다.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고 한구석에서 잠시 멍을 때리다가 아르바이트 시간이 되면 옷을 갈아입고 일을 하면 되었다. 종종 그랬다.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시간을 알려주는 커다란 숫자만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가방에나 넣고 다녔던 것을 지금은 손에 꾹 쥐고 있었다.

시계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온 연락이 없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연락하면 받으세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 진짜 미쳤나 보다.”

형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니…….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친 게 분명했다. 지금 누구 연락을 기다리는 건지. 그런 짓을 당해놓고도 왜 한 달이 넘도록 그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야겠다. 카페에라도 가 있어야겠다. 나는 애써 잡생각을 떨치려 나갈 채비를 했다.

코트를 주워 입고 현관에 대충 놓았던 목도리와 장갑을 챙겨 착용했다. 그렇게 막 집을 나왔을 때, 돌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으악!”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처량하게 떨어져 도로롱, 계속해서 소리를 내는 핸드폰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누군지 확인도 하기 전에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나예요.

아. 갑자기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그 한마디로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이었다.

“……네.”

―오랜만입니다. 내 연락 기다렸어요?

“…….”

혹시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겠지만 나는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기다렸을 리가 없지. 지금 어딥니까.

“집 앞입니다.”

―어디 가려고요? 아니, 이제 집에 온 건가.

“아닙니다. 나가려고요.”

나는 형과 대화하면서 구겨 신었던 운동화 뒤축을 펴 똑바로 신은 뒤 앞코를 바닥에 탁탁 쳤다. 다른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왜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 같았다. 억지로 고개를 털며 길을 나섰다.

―어디 갑니까.

“그냥…… 카페요.”

―내일은 뭐 해요. 전에 말했던 계약서 쓸까 하는데, 시간 됩니까.

“내일요? 어……. 일요일 아닙니까.”

곧장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나도 일요일에 불러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급하게 출장 나갈 일이 생겨서 내일이 아니면 도저히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말이에요.

“……많이 바쁘십니까?”

지금까지 너무 바빠서 연락을 안 한 건가. 나는 사심을 숨기고 물었다.

―네.

형의 목소리 뒤편으로 이사님, 하며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바쁘다더니 설마 오늘도 회사에 있는 것인가 싶었다. 정말…… 많이 바쁘구나.

―그래서 내일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어……. 4시 이전에요.”

내일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건 내일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럼 그냥 오라고 명령을 하지……. 왜 사람한테 선택권을 주는 듯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요. 회사로 1시까지 오세요.

“네.”

―사람 내려보낼 테니까 멍청하게 두리번거리지 말고 전용 엘리베이터 타고 곧장 올라오세요.

“……알겠습니다.”

―또 어디로 도망가지 말고.

도망가려고 해봤자 금방 어디 있는지 알아낼 거면서. 나는 도망칠 일 없다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형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말 자기 멋대로네.”

배경화면만 보여주고 있는 핸드폰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에게 정신없이 휩쓸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었는데, 빨리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진 몸이 절로 나를 일으켰다. 결국 아침부터 집 안 청소를 한바탕 하고는 늦지 않게 준비해 집을 나섰다.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에 덜덜 떨면서 회사에 도착했다.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5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는 줄 알았다.

형과 약속했던 1시가 되기 딱 10분 전이다.

[청영, 미래를 향한 맑고 푸른 도약]

로비엔 여전히 그 문구가 박혀 있었다. 면접 날엔 여길 다신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여기 사원이 되었다니.

최대한 문구에 눈길을 안 주려 노력하며 사람을 찾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로비에 아무도 없어 너무 조용했다. 내 발걸음 소리가 이 큰 로비에 메아리치며 울릴 정도였다.

문득 형이 멍청하게 두리번거리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미간이 구겨졌다. 심통 난 아랫입술이 절로 삐죽 나왔다.

“서도운 님?”

“어……. 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사람이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남자는 내 얼굴이 목도리에 파묻혀 있어서 그랬는지 잠시 눈을 굴리며 나를 확인하는 듯했다.

내가 목도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보여주자 남자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더니 ‘스위치 내리세요’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서도운 님. 절 따라오십시오.”

그는 자기가 딱히 누구라는 말도 없이 나를 안내했다. 극존칭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나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카드를 찍고 더 안으로 향한 그는 내가 잘 따라오는지 한 번 확인한 뒤, 일반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들어가 어느 문을 열었다. 그 문 속에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하나 더 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엘리베이터엔 숫자가 쓰인 일반적인 버튼이 아니라 알파벳이 적힌 버튼 몇 개만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중 하나를 눌렀고, 엘리베이터는 끝없이 올라가다 어느 층에서 멈췄다.

남자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바닥에 발을 딛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어두운 남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벽엔 고급스러운 프레임에 넣은 그림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순간 미술관에 온 줄 알았다.

멍하니 정신을 빼고 있다가 발을 빨리해 앞서가는 남자 뒤에 붙어 걸었다. 이 층에 올라오니 공기가 훈훈해진 것 같아 칭칭 감았던 목도리를 풀었다.

“이사님, 서도운 님 오셨습니다.”

내가 주섬주섬 목도리를 챙기는 사이 커다란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안 늦고 잘 왔네.”

열린 문 안에는…… 우습게도 내가 한 달을 보고 싶어 했던, 나를 유린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뭐 합니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들어와요.”

그냥 어쩐지 다리가 굳어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도 이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형이 말한 대로 나는 몇 발짝 걸어 완전히 안으로 들어갔다.

형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타악, 등 뒤의 문이 닫혔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남자가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은 모양이었다. 꼴사납게 어깨를 움찔거린 나는 쭈뼛거리며 형이 앉아 있는 근처로 다가가 섰다.

“앉아요.”

형이 턱짓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가 푹신하게 내 몸을 받쳤다. 나는 풀었던 목도리를 옆에 내려두고 장갑도 벗어 그 위에 차곡차곡 올렸다.

“이쪽은 박문호 변호사이십니다.”

형이 소개하자 마주 보고 앉은 변호사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도 따라 허리를 숙였다.

“밖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회사 사람은 아니고. 우리 집안일 사사롭게 봐주는 분입니다.”

“아…….”

“계약서 보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호사가 내 앞쪽 테이블로 하얀 종이를 밀어 건넸다. 계약서인 것 같았다.

부끄러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주워 들었다.

“꼼꼼하게 읽어보고 사인해요.”

꼼꼼하게 읽어서 싫은 항목이 나온다 해도 어차피 내겐 바꿀 힘도 없었다.

“알겠습니……. 어…….”

대답하려는데,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제2조, ③ 갑 또는 을의 사정 횟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눈이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떠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계약서엔 삽입, 성기와 같은 더 적나라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내가 계약서를 읽는 것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변호사는 정말 친절하게도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나는 제정신으로 이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려고 했지만, 한 줄 건너 한 줄꼴로 나오는 적나라한 서술에 자꾸만 시선을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귀퉁이로 돌리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계약서를 마침내 다 읽었을 때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 어디에 사인하면…….”

“제대로 읽은 건 맞습니까. 귀가 새빨개졌네.”

“…….”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귀를 가리듯 만지작거렸다. 형은 비웃듯 피식 웃었다.

내가 테이블에 계약서를 내려놓자 변호사는 차근차근 내가 사인할 곳을 알려주었다. 전부 사인하고 나면 우리는 정말 서로 돈과 몸만 취하는 관계가 된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펜으로 사인을 시작했다.

“끝났습니까.”

“네, 이사님.”

변호사가 계약서 한 부를 종이봉투에 넣어 나에게 건넸다. 사인까지 모두 마친 계약서를 받아 들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어볼 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합니까.”

“그냥……. 이런 계약서를 써보는 게 처음이라서요.”

“이제까지 남자들은 서도운 씨 뒷구멍에만 관심이 있었지, 계약으로 매어둘 생각은 못 했나 봅니다.”

형이 태연히 찻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내가 안 그래도 빨갰던 볼을 더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이자 눈치껏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박 변호사, 유능하고 돈도 많지만 남자한텐 관심 없는 사람입니다. 몸 비비 꼬면서 또 누굴 꼬시려고.”

“그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그만 부끄러워해. 신경 거슬리니까.”

나는 형의 말에 번쩍 들었던 고개를 다시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계약서를 가져갔다. 한 장 넘기며 대충 내용을 훑는 것 같더니 다시 던지듯 내려놓았다.

“나도 이렇게 적은 돈 때문에 계약서를 써보기는 처음이라 많이 생소한 기분이 드네요.”

계약서엔 우리가 관계를 가질 때마다 갑이 을에게 오백만 원을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오백만 원. 누군 이 돈이 없어 조폭에게 끌려가 복날 개 두드려 맞듯 맞은 적도 있고, 연회장에 끌려가 억지로 겁탈당할 뻔한 적도 있는데.

그에겐 오백만 원 정도야 푼돈이겠지. 그냥 슈퍼에서 사탕 사 먹을 정도의 돈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지나가다 흘려도 허리를 숙여 줍지도 않을 그런 돈.

‘부럽다.’

그 돈을 받아내려고 몸까지 팔며 아등바등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형의 시선을 받고 앉아 있는 내가 너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후에 스케줄 있습니까.”

“아르바이트 가야 합니다.”

“또 그런 아르바이트는 아니겠죠.”

“……평범한 아르바이트입니다. 방금 계약서 썼으니까요.”

형이 웃었다. 말하고 나니 내가 뱉은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더라면 계속 몸을 팔고 다녔을 거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도 웃은 것 같다. ……괜히 말한 것 같다.

“말했듯이, 내가 급하게 미국으로 출장을 가야 합니다. 서도운 씨 입사할 때나 돌아올 겁니다.”

“……네.”

“나한테 몸 대주라고 뽑아놨어도 일 문제는 철저하게 가르치고 시킬 겁니다. 설렁설렁할 생각으로 오지 말고 각오 단단히 해요.”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구멍 간수 잘 하고 있어요. 다른 새끼들이 침 못 흘리게.”

또다시 모욕을 주는 말에 수치스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좋겠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순간 바닥으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바닥으로 향했다. 떨어져 있는 것은 내 핸드폰이었다. 주머니가 전부터 헐거워졌다 싶더니……. 평소에는 낡은 옷을 입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형의 앞이다 보니 갑자기 그가 내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신경 쓰였다.

나는 급히 허리를 숙여 다시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핸드폰 하나 사는 게 어때요.”

“네?”

“너무 구식인 것 같아서. 작동은 잘 됩니까.”

형은 다행히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창피한 건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은 무슨. 그에게 받았던 돈 오백만 원 중에 사백은 청영에 이미 갚았다. 나머지 백만 원으론 밀린 공과금을 내고, 카페 식구들에게 취업 턱을 썼다. 수중엔 아르바이트비 조금이 전부였다. 당장 출근할 때 입을 옷 사기에도 벅찼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는 챙겨왔던 목도리와 장갑을 그냥 손에 든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밖에 박 변호사, 다시 들어오라고 해요.”

나는 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나가자 변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하더니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

그렇게 허무하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달 전, 인사불성이 된 나를 형이 호텔에 데려갔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들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그런 감각.

나는 손에 계약서 봉투를 꽉 쥐고 복도를 걸었다.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까 나를 안내했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의 안내를 받아 회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정신이 깨어났다.

“하아…….”

이래서 겨울이 싫다. 내 한숨이 눈에 보이니까.

피어난 입김은 내 고통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금방 공기 중에 퍼져 사라졌지만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억지로 나를 현실과 마주하게 하는 이 계절이 정말…… 싫었다.

* * *

“안녕하세요, 사장님.”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와인잔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있던 사장님이 나를 맞아주었다.

“어, 왔어? 밖에 진짜 춥지.”

“네. 엄청요.”

“안에 들어가서 손 좀 녹여.”

사장님은 연주자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연주도 교대로 돌아가면서 하는 방식이어서 그리 피로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조용한 와인바였기 때문에 크게 힘든 일도 없었다. 거기다 페이도 좋았다.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손에 그건 뭐야?”

“아, 어…… 그냥 우편물이요.”

나는 손에 쥔 종이봉투를 대충 우편물이라고 둘러댔다. 내 우편물에 별로 관심도 없을 텐데, 혹여나 깊게 물어볼까 봐 발걸음을 빨리해 직원실로 후다닥 들어왔다. 그런 내 꼴이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아직 직원실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제일 빨리 온 모양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곧장 따뜻한 난로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내밀자 열기가 살을 감싸들어 차갑게 얼었던 손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서류봉투가 난로에 그을리진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 멀리 내려놓을까 싶다가도, 누가 들어와 이걸 열어 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코트를 벗었다. 그 안에 서류를 넣고 감싸듯 잘 갠 다음, 서랍에서 오늘 입을 유니폼을 꺼내고 그 자리에 코트를 넣어두었다. 아무도 내 코트를 건들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여서 가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목도리와 장갑으로 옷을 덮는데, 집에 들러서 두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다.

유니폼을 꺼낸 김에 미리 갈아입었다. 유니폼은 특이할 게 없이 그냥 평범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였다. 바에서 일하는 분들은 여기에 타이를 매고 베스트를 더 입던데, 나는 그냥 이 정도면 되었다. 피아노를 치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복장이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 빨리 왔네.”

“안녕하세요.”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며 다른 연주자가 들어왔다. 나는 셔츠 단추를 마저 채우며 인사를 꾸벅 했다.

“밖에 진짜 엄청 춥다. 내일은 좀 풀린다는 것도 같은데.”

“풀려도 추울 것 같아요…….”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워하는 남자를 위해 난로 옆으로 살짝 비켜서자 그가 다가와 손을 녹였다. 그는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귀마개……. 패딩 점퍼는 못 사더라도 저건 꼭 사야겠다. 목도리만으론 귀까지 보호하기 힘들었다. 나는 차가운 귀를 매만졌다. 괜히 아까, 형이 내 귀를 보며 붉어졌다고 한 것이 신경 쓰였다.

“이거 먹자.”

그때 연주자가 멀리 놓인 테이블로 손을 뻗어 바구니를 가져왔다. 사장님이 편히 먹으라고 준비해 둔 간식 바구니였다. 귤 같은 과일도 있고, 초콜릿이나 사탕도 들어 있었다.

나는 아까 문득 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받은 오백만 원은 형에겐 고작 사탕 한 알 사 먹을 돈쯤이라는 것. 그래서 괜히 사탕을 집어 들었다.

“슬슬 나오자, 얘들아. 선호 너, 아직도 옷 안 갈아입었어?”

“읍! 지금 갈아입을게요.”

귤을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던 남자는 사장님의 호출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도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손을 가볍게 풀고 직원실을 나가기 직전에 사탕의 포장을 뜯어 입 안에 넣었다. 동전만 한 크기의 사탕이 한쪽 볼에 가득 찼다.

피아노 연주가 두 사람의 교대로 진행되는 만큼, 연주를 쉬는 동안에는 잠시 휴식 후 창고에서 허드렛일을 돕기도 했다.

나는 난로 앞에서 쉬다가 따뜻한 물을 받아 걸레를 적신 뒤 와인 창고의 먼지를 닦아냈다.

카페 사장님이 처음 이곳을 소개해 주었을 때 캐주얼한 곳이라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운 내부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와인도 비싼 종류가 엄청 많았다. 지나가다 슬쩍 본 메뉴판에 백만 단위의 금액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입을 가리며 놀라기도 했다. 가격을 안 이후론 와인 창고 청소가 어쩐지 무서웠다.

나는 청소를 재빨리 끝내고 비품실로 향했다. 버리는 코르크 마개가 들어 있는 포대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포대를 모아두는 곳에 내려놓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랐으나, 다행히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어 누군지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손님인가?

“안녕하십니까.”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남자가 그런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 멈춰 세웠다.

“피아노 연주하시던 분이죠.”

“어……. 네.”

날 잡으려 조명이 있는 곳으로 나온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키가 무척 컸고, 두툼한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따뜻해 보인다……. 나는 멍하니 딴생각을 했다.

“연주하시는 거 보고 너무 좋아서 말씀 나눠보고 싶었는데, 잠깐 담배 피우러 나온 사이에 다른 분이 앉아 계셔서 당황했어요.”

“아……. 그러셨구나. 보통 한 시간 간격으로 교대로 연주합니다.”

남자가 잡은 손목을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떼어내며 대답하자 그는 웃었다.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연주 좋았다고요.”

“아! 감사합니다.”

칭찬을 해줬는데 감사 인사가 없어 웃었나 보다. 나는 다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혹시 내 얼굴 기억 못 해요? 자주 왔는데.”

남자가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놀라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피아노만 치느라 손님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껏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주만 하고 접객을 안 해서…….”

“하하, 아니에요. 앞으론 기억하면 되지.”

남자의 말은 내가 반드시 그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자주 올 손님이라면 알아두는 게 가게 입장에서도 좋겠지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내 눈앞으로 하얀 무언가가 사르르 떨어졌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눈이다…….”

까만 밤하늘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바라보자 야경으로 반짝거리는 풍경에 별이 쏟아져 내리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오는 날 인사했으니 안 잊겠다. 그렇죠?”

“그러네요.”

둘이 잠시 그렇게 서서 눈을 구경했다.

‘형이 눈 오는 날을 정말 좋아했는데.’

과연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어릴 적엔 눈 오는 날을 가장 고대했다. 나는 추운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눈도 싫어했다. 그래도 형이 좋아한다니 항상 모자에 목도리에 중무장하고 형을 쫓아 나가 눈밭에서 한참을 놀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괜히 잡히지도 않을 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잡히려던 것은 잡히지 않고, 다른 눈덩이가 내려와 내 손바닥 위에 앉았다. 하지만 손의 열기 때문에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추울 텐데 들어가요.”

“……네.”

남자가 내 옷차림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물기만 남아 있는 손을 한 번 꽉 쥐고는 다시 거둬들였다.

* * *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연구진은 1군과 2군으로 우선 나눠 두었고, 한국으로 함께 귀국할 연구원은 1군 중에서도 소수를 선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협력 업체와 공장 부지만 확정되면 바로 나머지 연구원들도 차례로 입국시킬 계획에 있습니다.”

해일이 미국 지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일이 쏟아졌다.

시차 적응을 채 할 시간도 없었다. 인천에서 열네 시간을 넘게 비행해 공항에 도착한 순간 곧장 차를 몰아 회사로 와야만 했다. 이미 준비된 회의가 그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동안 받아 든 서류를 반복해 검토한 뒤 해일은 회의에 참여하며 브리핑을 들었다. 약 한 달간의 출장이었음에도 여유가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국내 연구팀엔 미리 언질을 주었습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1군 전부 내가 입국할 때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합시다. 이렇게 위험한 시국에 설마 잘릴 걸 각오하고 마찰까지 일으킬 사람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해일은 이마를 매만졌다.

바이오 사업은 그가 온 신경을 여기다 쏟아붓고 있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분명 청영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될.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바이오가 현재 주목받고 있는 분야인 것과 별개로, 성공시켜야 할 이유에는 과거의 뼈아픈 실패가 있었다.

정영일, 그의 형이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게 된 사건이 바이오 사업과 연관이 깊었다.

당시 정영일은 조선 사업을 말아먹고 굉장히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사업팀 전부가 잠도 못 자고 매달려 내놓은 대책이었던 해양 플랜트 산업도 국제 유가 폭락으로 인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에 실패가 이어졌다. 다행히 청영의 주력 사업이 아니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나, 정영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분야에 손을 뻗었다. 바이오였다.

바이오는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분야였고, 그만큼 언론 플레이도 중요했으나 정영일은 두 개 모두 실패했다. 공장을 무리하게 확장하던 도중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공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고, 그 때문에 유해 물질이 지역 하천에 흘러들었다는 의혹을 받게 된 것이다.

자체 검사 결과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조급했던 정영일은 초반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언론은 일을 부풀려 물어뜯기 바빴다.

뒤늦게 후속 기사를 내며 진정시키려 해보았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 회사에 찾아온 두 번째 위기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떠들어댈 정도였다.

급기야는 공장 신설을 반대한다는 시위까지 열렸고, 청영은 그렇게 그 사업을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정영일은 그 사건으로 경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났다. 말이 여행이었지, 도주나 다름없었다.

정영일의 빈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이 해일, 바로 그였다.

해일은 처음 경영에 참여하게 된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겉은 고상해 보여도 아수라장 같았던 임원 회의나, 아무 경력이 없는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무리. 정영일이 마무리하지 못한 실패한 사업들의 뒤처리까지.

모든 위험을 헤쳐 내고 단기간에 여기까지 올라왔다.

“……형은 별다른 움직임 없습니까.”

잠시 눈을 붙이러 호텔로 이동하던 도중 해일이 물었다. 태블릿을 살펴보던 비서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직까진 없습니다. 비밀리에 진행하려고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긴 했습니다만, 지난해 하반기에 미국 지사에 방문하신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재방문하셨기 때문에 아마 곧 눈치를 채실 것 같습니다.”

“후, 그렇겠죠.”

정영일이 감정적으로 싫은 건 아니었으나, 사업적 면에선 멀리하는 게 좋았다. 경영대학을 졸업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정말 경영에 소질이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 형이 몇 번이나 회사를 물려받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으나 번번이 탐탁지 않아 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순 없으니 건축 허가만 나면 한번 보러 가야겠습니다. 형수님도 못 뵌 지 오래되었고.”

“알겠습니다.”

어느새 차는 해일이 묵는 호텔에 다다랐다. 그는 내릴 채비를 하며 가방을 들었다.

“3시까지 차 대기시켜 두세요.”

“이사님, 식사하시고 꼭 눈 붙이십시오. 너무 피로해 보이십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기사가 열어주는 뒷문으로 내리려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툭. 빗줄기는 순식간에 거세져 차창을 때렸다.

“한국에는 지금 눈이 온다고 합니다. 유례없는 폭설이라 하더라고요.”

“…….”

해일이 내리지 않고 잠시 멈칫하는 사이 기사가 우산을 꺼내와 펼쳤다.

‘형이 좋아하면 나도 좋아.’

눈…….

눈처럼 새하얗던 두 볼이 추위에 빨개졌으면서도 어린 저를 따라 눈밭에 쫄래쫄래 쫓아 나온 누군가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내 해일은 생각을 떨친다.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린 뒤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갔다. 차마 우산이 막아주지 못한 빗방울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 * *

미국에서의 나날은 바쁘게만 흘러갔다.

해일은 3주 동안 매일같이 출근했으며, 휴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적된 피로에 지칠 만도 했으나 한 번 앓는 소리도 없이 강행군을 해내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의 일에 큰 차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 출장에서의 마지막 하나의 고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스카우트에 실패했던 이번 연구의 핵심 인물을 다시 만나보기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미국 지사의 유능한 영업 사원이 수차례 방문하여 설득을 시도한 바 있지만 차마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지금 확보한 연구진으로도 충분히 성공 가능성은 커졌지만, 이 인물은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었다. 해일은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 있을 미팅을 위해 한국에서 지원군을 불렀다. 미팅 룸에 이르게 도착해 지원군과 미팅 상대를 기다리던 해일은 살펴보던 노트북을 덮고는 눈가를 문질렀다.

“본사도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님. 분명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죠. 음.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연락 없습니까.”

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벗어두었던 정장 재킷을 걸치는 순간 미팅 룸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여. 정해일.”

들어오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가 한국에서 부른 지원군, 문지원이었다.

“늦었네.”

“나 잠도 못 자고 달려왔거든?”

지원은 피식 웃으며 다가와 해일과 가볍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는 해일이 미국 유학 시절 만나 친분을 쌓은 친구였다. 대대로 소규모 식품 사업을 하던 집안이었으나, 지원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몸집을 불려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발을 넓혔다. 그리고 이젠 그 규모가 꽤 커져 청영과 엇비슷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와줘서 고맙다.”

“협상 성공만 하면 톡톡히 받아먹을 거니까 긴장해라.”

지금 만나보려는 연구원은 지원의 집안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해일은 그가 과거 지원의 아버지 도움을 받아 유학을 다녀온, 지원의 아는 삼촌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곧장 그를 미국으로 불렀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려는 시도였다.

지원은 입고 온 코트를 벗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이내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대하던 연구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었다.

미팅은 순조로웠다. 반가운 얼굴인 지원을 앞세운 설득은 연구원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해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끝끝내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 직원들은 모두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해일은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며 비서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알아서 잘 먹고 놀고 오라는 신호였다.

사업팀은 이틀간의 휴일을 가지기로 했다. 해일에게도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이었다.

지원은 해일에게 밥을 사라며 자신이 잘 아는 레스토랑으로 끌고 갔고, 해일은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휴가는 내일까지라고 했고, 다음 주엔 뭐 해? 나도 기왕 온 김에 좀 놀다 갈까 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 들러야 해. 원랜 일주일 있을 계획이었는데, 좀 앞당겨서 끝낼지도 모르겠다.”

“강행군이네.”

“알면 놀아달라는 소리 하지 마.”

해일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하자 지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 때문에 한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내가 고맙지도 않냐.”

“고마우니까 저녁 사잖아.”

“술도 사.”

지원은 해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곧바로 손가락을 딱 마주치는 소리를 내었다. 곧바로 테이블에 다가온 서버에게 와인을 한 병 주문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와인의 이름이 들려오자 이번엔 해일이 웃었다.

“아주 뽑아 먹으려고 온 거 같은데.”

“이 정도는 사 줘야지, 친구야. 나 지갑도 안 들고 미국 왔어.”

지원은 장난스레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보였다. 그사이 테이블로 와인이 도착했다.

서버는 라벨을 두 사람에게 보이며 주문한 와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곰팡이가 슬어 있는 코르크를 따고 둥근 와인잔에 아주 얕게 와인을 따랐다.

탁한 보라색 액체가 찰랑대는 것을 바라보다 지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바에서 진짜 취향인 사람 만나서 요즘 공 좀 들이려고 하는데, 너 때문에 이번 주말엔 못 만나.”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혀에서 굴려 향을 음미하던 해일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주중에 만나면 되잖아.”

“아니야, 주말에만 일하더라고.”

“직원이야?”

원래 사람 가려 만나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직원에게까지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응. 예쁘장해. 귀엽고. 아직 따로 만날 정도로 친해지진 않았어. 어딘가 모르게 좀…… 맹해서. 내가 들이대는 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여자?”

“내가 여자 만나는 거 봤어?”

“남자면 모를 만도 하지. 누가 자기한테 남자가 대시한다고 생각하겠어.”

“그런가. 근데 난 잘생겼잖아.”

해일은 지원의 농담을 그냥 무시했다. 지원은 그의 반응이 어떻든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옷도 선물해 줬는데, 철벽을 너무 쳐. 세 번이나 거절하더라.”

“그런데도 관심이 생겨?”

“귀엽다고 했잖아.”

“코 꿰였네. 회장님 알면 또 뒤로 넘어가시겠군.”

“야. 아버지 얘기 꺼내지도 마.”

지원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엊그제 라운딩 돌다가 골프채로 맞을 뻔했어. 긁힌 거 보이냐? 창피하게 직원들 앞에서 멱살잡이를…….”

“여전히 정정하시네. 이번엔 무슨 일인데.”

“결혼 때문이지, 뭐. 어차피 정략결혼인데 왜 안 하냐, 이 소리셔. 거기다 대고 말대꾸 좀 했다가 죽을 뻔했다.”

지원은 습관적으로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다가 금연 구역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손을 거두며 한숨 쉬었다.

“너는? 회장님이 별말씀 없으셔?”

“아직까진. 일하느라 바빠서.”

해일은 여상히 대답했다. 어머니는 결혼 문제로 그를 괴롭히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까진 그러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해가 갈수록 결혼에 대한 압박은 커질 것이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있어야 해?”

“넌 진짜 일만 하냐. 삶을 참 지루하게도 산다.”

‘내가?’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거의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삶이라지만 남의 눈에는 그게 퍽 지루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일은 지루함을 느낄 틈도 없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왔다. 그의 지난날들은 지루함마저도 사치였다.

그는 일에 매달리기 전엔 공부에 매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더 악착같이. 유학길에 올라 머릿속에 뭐라도 잔뜩 넣고 돌아와 형에게 도움이 될 생각뿐이었다. 결과적으론 형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꼴이 되었지만.

그리고 공부에 매달리기 전엔…… 피아노. 피아노와…….

해일은 무심코 한국에 남기고 온 서도운을 떠올렸다.

“미치겠네.”

“응?”

“……아니야.”

해일은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도운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떨쳐 버리려고 해도 자신의 과거에 엮여 있는 사람을 온전히 지워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했다. 도운은 말 그대로 새로 산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빈 잔에 술이 다시 따라졌다. 그는 베이스를 손끝으로 잡고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동그라미를 그리며 굴렸다.

“한국 돌아가면 나도 좀 재밌게 살아볼까…….”

이내 잔을 들어 올린 해일이 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서도운을 데려온 본래 목적이 있었다. 굳이 과거를 되새기며 인격적으로 대우해 줄 필요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