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나는 잠시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눈만 끔뻑거리다 차가운 공기에 얼듯 굳어진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으, 추워…….”
발뿐만 아니라 손도 얼었다. 3월이라 괜찮을 줄 알고 보일러를 내리고 잤더니……. 후회하며 두 발을 맞비볐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이 집은 도무지 살기 알맞을 때를 찾기가 힘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사를 하고 싶었지만, 서울 구석에서 이렇게 싼 집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사 비용도 추가로 드니 항상 상상만 하다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쉬며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첫 출근 날이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말끔하게 씻었다. 수건으로 탈탈 머리를 말리며 나와 곧장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찬장엔 얼마 전에 잔뜩 사다 둔 라면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오늘은 첫 출근일이니 조금 사치를 부려 계란도 넣어 먹을 작정이다.
물이 끓기 전까지 머리를 다 말리고 깔끔하게 빗었다. 다른 친구들을 보면 왁스 같은 걸 사용해서 어떻게 올리기도 하던데, 나는 손기술이 없어서 그냥 빗기만 했다. 괜히 시도했다가 왁스 값만 날릴까 걱정이 된 것도 있다.
“엇, 넘친다.”
잠시 딴생각을 하다 보니 부엌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가 났다. 급히 달려가 불의 세기를 줄이고 면을 반으로 부수어 넣었다. 수프를 넣고 면을 잘 풀어준 뒤에 계란을 톡 쪼개 넣으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마침내 다 끓인 라면 국물을 수저로 한 번 떠먹자 따뜻한 국물이 속을 덥혀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꾹 감으며 음미했다. 너무 맛있다…….
나는 늦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 라면을 먹었다. 국물까지 말끔히 비워 먹은 뒤에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새로 산 정장이었다.
거울 앞에 서니 모양새가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대형마트에서 싸게 팔고 있는 기성품을 입어보지도 않고 사 왔던 것인데, 다행히 잘 맞았다. 이 옷 몇 벌과 구두 한 켤레, 그리고 출근할 때 쓸 가방까지 장만하고 나니 이번 달은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꿈지럭대며 넥타이도 맸다.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면접을 보고, 계약서를 쓰고 난 뒤의 나는…… 이날을 기다렸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잘 잡지 못했고, 싱숭생숭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 게 아닐까?’
속되게 말하면 몸을 팔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래야 함이 옳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걸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코트를 꺼내 입었다. 얼마 전에 친해진 손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코트였다. 언제 그렇게 그 손님과 친해졌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코트도 원래 거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환불이나 교환도 불가능한 사정이라고 했다. 내가 망설이자 입어보고 안 맞으면 거절하고, 맞으면 가져가면 되지 않겠느냐기에 결국 입어보았고, 맞춘 듯 딱 맞는 사이즈에 결국 집으로 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고 좋다.”
지금까지 입던 코트와는 차원이 다르게 좋아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코트를 한 번 털듯 쓸고 거울로 뒤태도 살폈다. 순식간에 사람이 멀끔해졌다.
이렇게 비싼 물건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받아 온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입지 않았는데, 막상 입고 나니 너무 도톰하고 따뜻해 그런 미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번 주말에도 그 손님을 뵙게 되면 감사히 잘 입었다고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확인한 뒤,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회사까지 꽤 멀어 일찌감치 나가야 했다.
회사에 도착해 간략한 안내를 받고는 곧장 이사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전에 썼던 전용 엘리베이터와는 다르게 지금 탄 것은 여느 엘리베이터처럼 평범하게 숫자가 적힌 버튼만 있었다.
사람들이 꽉 찬 엘리베이터에 제일 늦게 올라탔더니 다른 층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나도 같이 내려야만 했다. 옆에 서서 사람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타는 것을 반복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나 하나만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맑은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쉬고 난 뒤 발을 옮겼다.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미 출근해 있던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새로 발령받은 신입 사원 서도운입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긴장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늦은 건 아니겠지.’
짧은 찰나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는데, 다행히 늦진 않았다.
“아, 서도운 씨. 어서 와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며 인사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에 나도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나를 안쪽 유리문으로 데려갔다.
“실장님, 서도운 씨 오셨어요.”
“아. 어서 와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한 발짝 다가가며 인사를 하자 자신을 비서실장이라고 소개했다. 비서실장……? 전에 계약서를 쓸 때 나를 안내했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봤던 그 남자도 회사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장님은 나를 이끌고 나와 비서실 모두에게 인사시켰다. 나는 쭈뼛거리며 두세 번 더 허리를 숙였다.
비서실엔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많았다. 기껏해야 서너 명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들어오면서 여섯 명이 되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해 식은땀이 날 뻔했다.
“도운 씨 자리는 여기예요.”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맨 처음 나를 이끌고 갔던 분이 내 자리도 안내해 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에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두었다.
“첫날이라 아마 일은 많지 않을 거예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오늘은 천천히 보면서 분위기 좀 익혀요. 저는 박하나 대리이고,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알겠습니다.”
친절히 전해지는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실장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사님 올라오십니다.”
그 말에 직원 모두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빠르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앞으로 나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서 있다가 박 대리님이 팔을 잡고 이끄는 탓에 절로 끌려나갔다.
일렬로 선 사람들 옆에 붙어 서자 박 대리님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사님 오시면 이렇게 서서 인사드리는 거예요.”
“아…….”
그 순간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작게 들렸다. 그리고 이내 뚜벅뚜벅 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모습을 보였다. 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
나는 입을 열 타이밍은 놓치고 말아 그냥 따라 허리만 숙여 인사했다. 내 시야엔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그의 잘 닦인 구두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김 실장, 오후 출근해도 된다고 했는데 일찍 나왔네요.”
“주말 동안 푹 쉬어서 괜찮습니다.”
형이 실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허리를 펴고 섰다. 하지만 차마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시선은 계속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오늘 비서실에 신입 사원 서도운 씨가 출근했습니다.”
“…….”
그런데 돌연 들려오는 내 이름에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시선을 들자마자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한 번 움찔 떨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사원 서도운입니다.”
오늘 몇 번째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형에게 인사하고 허리를 들었을 때도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뭔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일정 보고는 나중에 듣도록 하고. 서도운 씨, 따라 들어오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저렇게 말하고는 곧장 이사실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당황한 채로 잠시 어떡해야 하나 서 있었다. 비서실장님은 그냥 가벼운 면담을 진행하려는 것뿐이라며 나에게 들어가 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히자 계약서를 쓸 때 한 번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중앙에 야트막한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로 세련된 디자인의 소파가 놓여 있었다. 나는 분명 저기에 앉아 계약서를 읽고 사인했었다. 그날을 떠올리니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안녕하십니까.”
형은 코트와 재킷을 벗어 근처의 옷걸이에 걸어두고 있었다.
등에다 대고 작게 중얼거리자 그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데스크 앞 의자에 앉았다.
“이리 와요.”
그가 명령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씹어대며 몇 걸음 걸었다. 넓은 이사실의 중반까지 가 멈춰 서자 형이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더 가까이.”
괜히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나는 그의 책상 바로 앞까지 걸어가 섰다. 그때 형이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마디가 툭 튀어나온 하얗고 긴 손가락이 알 수 없는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사실 창문에 걸려 있는 블라인드가 움직이며 커튼처럼 완벽히 시야를 차단했다.
“아무도 못 보니까 이리 와.”
“…….”
형은 의자를 조금 빼 몸을 틀었다. 그 앞으로 와 서라는 뜻이었다. 나는 결국 옆으로 돌아가 앉아 있는 그와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서고 말았다.
“예쁜 코트네요.”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붙어 서게 했나 싶었는데, 돌연 내 옷 얘기를 했다.
“비싸 보이는 코트인데. 직접 산 겁니까?”
“어……. 아뇨. 그냥 받았습니다.”
나는 미국 출장을 잘 다녀왔는지 묻고 싶었는데, 물을 처지가 안 되었다. 그냥 그가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
“받아? 누구한테.”
“…….”
“이게 얼마짜린데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대답.”
“저, 잘, 모르는…….”
“뭘 모른다는 겁니까. 가격을? 아니면, 준 사람을.”
나를 올려다보는 형의 시선이 날카로워 무서웠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데, 어디로 피해야 할지를 몰랐다. 열심히 눈을 옆으로 굴려 피하자 강한 악력으로 내 허벅지를 붙들었다.
“내가 구멍 간수 잘 하라고 하지 않았나?”
“윽!”
허벅지 뒤쪽으로 손을 감싸 나를 한 발짝 더 앞으로 끌었다. 그의 다리 사이에 가둬지듯 서게 된 나는 엉덩이를 쥐어짤 듯 주무르는 손에 악물듯 신음을 내고 말았다.
“계약서 썼다고 몸 안 굴리겠다더니, 지금 이게 무슨 꼴이지?”
“아닙,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거슬리니까 코트 벗어요.”
“…….”
“벗어.”
형이 손톱을 세우며 내 살을 눌렀다. 나는 갑자기 몰아치는 무서운 기운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단추를 풀고 팔에서 빼자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꼴사납게 구겨졌다. 나는 다시 검은색의 싸구려 정장 차림이 되었다.
“누구랑 붙어먹었어.”
“이사님.”
“누가 줬길래 아직 벗지도 않고 입고 있었습니까.”
“저는, 정말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 없었습니다.”
나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옷을 늦게 벗은 건 오늘 첫 출근이라 너무 경황이 없어서 벗어둘 생각도 못 했던 것뿐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아닙니다, 정말…….”
“그럼 누가 줬습니까. 그냥 받았다며. 뭘 어떻게 했길래 저런 코트를 그냥 받았습니까.”
“제가, 제가 취직했다고 해서…… 전에 일하던, 곳, 사장님이 주셨습니다.”
나는 아르바이트 얘기는 쏙 뺐다. 괜히 아르바이트를 따로 한다는 걸 알려봤자 그는 그런 쪽으로 의심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손님에게 받았다는 게 더 거짓말 같았다.
“비싼 물건인지 저도, 잘 몰랐, 습니다. 그냥 어……. 사장님 동생분이 입으시던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그냥 받아온 게, 다예요. 정말입니다.”
놀랐는지 말이 중간에 뚝뚝 끊어졌다. 차마 형을 쳐다보고 말하진 못하고, 눈치를 보듯 힐끔 짧게 시선을 맞추며 더듬더듬 변명을 이어 갔다.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이 풀어지나 싶더니, 그의 손가락이 돌연 사타구니와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읏…….”
그의 손은 너무 커서 내 아랫도리가 한 번에 잡힐 지경이었다. 손바닥은 엉덩잇살을 누르고, 손가락은 둔덕 사이를 파고들듯 문지르고…….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몸에 힘이 들어갔다. 등허리로 소름이 올라와 어깨가 떨렸다.
“그래서.”
“……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정확히 해줘야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힌트를 주듯 다시 엉덩이 사이를 문질렀다.
“읏, 저…… 아무와도, 자지 않았…… 읏.”
“똑바로 말해.”
“흐윽!”
형의 손이 매섭게 엉덩이 한쪽을 때렸다. 순간 무릎이 꺾여 휘청거릴 뻔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고 섰다.
“다른 남자랑, 섹스……, 안…… 했습니다.”
형이 원하는 대로 나는 적나라한 단어를 섞어 말했다. 남창이 자신의 주인에게 고하듯, 꼭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듯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내가 출장 간 사이에 이 구멍에 아무도 박은 사람이 없다고.”
“……네.”
나는 비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목소리나 형의 화난 목소리가 혹여나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하는 걱정에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다시 그의 매서운 손이 엉덩이를 때렸다.
윽……! 아랫입술을 꽉 물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참았다. 나는 곧바로 다시 그와 눈을 맞췄다.
“못 믿겠는데.”
형은 진한 눈매를 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정말 믿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나를 놀리고 있었다. 이 모든 행위가 별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 다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라는 것처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마침내 내 엉덩이와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던 손이 떨어졌다. 움찔거리며 아랫배가 조여들던 감각이 드디어 멈췄다. 하지만 또 다른 궁금증에 휩싸였다. 혹시 지금……? 여기서 확인하겠다고 말하는 건가?
“지금 벗어야 합니까?”
내 두려움 섞인 물음에 우습다는 듯 형이 피식 웃는 소리를 내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섹스가 하고 싶어요? 원하면 여기서 확인해 주고.”
“아닙니다.”
아니었던 모양이다. 볼에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분명 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퇴근 후에 봅시다. 이따 연락할 테니 시간 비워요.”
“……네.”
“앞으로 주중 저녁 시간은 항상 비워두는 게 좋겠죠.”
“알겠습니다.”
형이 책상에 턱을 괴며 말했다. 주중 저녁 시간은 비워라. 명령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가봐요.”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눌러 삼키며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형은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날 내려다보는 시선. 그의 앞에 무릎 꿇어 입을 벌리던 그날 밤과 같은 눈빛이었다.
서둘러 코트를 반 접어 팔에 감고는 몇 발자국 떨어져 선 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발걸음을 빨리해 이사실을 나왔다.
“하아.”
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등 뒤의 공간에서는 형이 내뿜는 압박감 가득한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편히 숨 쉴 수도 없고 손끝 발끝부터 조여드는 느낌.
나는 코트에 얼굴을 묻고 한 번 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괜히 빨개졌던 볼을 만지작대며 걸음을 옮겼다. 배정받았던 자리로 돌아와 코트를 툭툭 털어 옆에 걸어두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멀쩡한 회사원이 된 내게는 이사실 안에서의 은밀했던 대화가 어쩐지 꿈만 같았다.
* * *
“……해서 주말 중으로 모두 입실을 마쳤다고 합니다.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고, 박 대리가 내일 오전에 연구소에 내려가 전체적인 동태를 확인해 볼 예정입니다. 추가적인 사항은 보고 올라오는 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오늘 회의는 말씀해 주신 대로 내일로 미뤄 두었습니다. 내일 오찬 모임 후 바로 참석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일정은 내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도운이 이사실을 나간 뒤 김 실장에게 스케줄 안내를 받던 해일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 회의에 서도운 씨도 참석시키세요.”
“네?”
내일 진행될 회의는 전체 회의였고, 그만큼 규모가 컸다. 진행되는 사업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를 오늘 막 출근한 신입을 그런 곳에 참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신입 사원인 서도운 씨가 회의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냥 분위기나 좀 보라는 거니까.”
김 실장이 우려하는 점을 그도 알고 있었다. 억지로 데려간다 해도 내용의 90퍼센트, 아니 아마 99퍼센트는 알아듣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럴수록 무식하게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가서 멍청한 얼굴로 넋 놓고 있는다고 해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수확이 있을 것이다.
“일을 빠르게 익혔으면 좋겠는데. 김 실장처럼 유능한 내 수행 비서로 삼을 예정입니다.”
해일은 책상 위 기계의 버튼을 눌러 조금 전 조정했던 블라인드의 각도를 다시 맞췄다. 빛이 차단되었던 창문이 바깥의 햇빛을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그러셨습니까.”
“교육 철저히 시키세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사님.”
김 실장은 남다른 사명감이 생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도운 씨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런데 뒤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돌연 들려오는 그 말이 어딘가 거슬렸다. 해일은 눈썹을 짧게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직접 면접 보시고 뽑지 않으셨습니까. 수행 비서로 키운다고 하셔서, 꽤 마음에 드셨구나 싶어서요.”
“…….”
잠시 당황했지만, 그는 이내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마음에 들었다기보단 그냥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해일은 서도운을 비서로 들이게 된 최초의 목적을 계속 상기시켰다.
수행 비서가 해내는 일의 양은 일반 비서의 몇 배는 되었다. 거기다 대표이사 비서실은 사원들 가운데서도 특출한 인재가 모인 만큼 사업전략실의 기능도 하고 있었기에 인당 다루는 일이 타 부서 사원보다도 많았다.
일에 일을 더 얹어 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흐음.”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틀린 말도 아니고……. 마음에 꽤 들었습니다.”
해일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지자 김 실장은 조금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김 실장. 회사 제품 하나 준비해야겠습니다.”
* * *
나는 멍하니 앉아서 안내문을 읽고 있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느 회사에나 다 있는 그런 것. ‘청영, 도약하다’와 같은 제목 아래 쓰인 청영 기업의 눈부신 업적……. 그리고 간략한 규율이나 공지사항이 적혀 있는 안내문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뭐해서 한구석에 꽂혀 있는 걸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집중은 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나를 불러낸 건 대리님이었다.
“도운 씨, 이리 와볼래요?”
대리님은 나를 데리고 비서실 옆 복도로 나가 문을 열었다. 그곳은 탕비실이었다. 대리님은 나에게 아침은 먹었느냐며, 본인은 첫 출근 날 긴장돼서 아무것도 못 먹고 왔다가 중간에 탕비실을 털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번 훑어보니 간식거리들이 많았고, 커피머신도 여러 대 놓여 있었다. 바구니 안엔 알록달록한 색의 티백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썰어 말린 과일도 반투명한 포장지에 들어 있었다. 무심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도 차로 끓이는 거예요. 나중에 먹어봐요. 아, 하나 가지고 와요.”
“네.”
나는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 대리님 옆으로 냉큼 붙어 섰다. 대리님은 내가 내미는 말린 과일을 받더니 포장을 뜯어 컵 안에 넣었다. 이사님 드릴 음료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내일부터는 도운 씨가 준비해서 가져다드리면 돼요. 별로 어려울 건 없고, 회의 있는 날 아침엔 커피 드세요. 오늘은 차. 종류는 아무거나.”
그렇게 말하면서 대리님은 과일이 잠길 정도로만 뜨거운 물을 붓더니 티백 하나를 꺼내 넣고는 그 위로 또 물을 부었다. 순식간에 달콤한 향기가 탕비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사이 티스푼으로 컵을 천천히 젓던 대리님이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아까 이사님한테 혼난 건 아니죠?”
“네?”
그 물음에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들렸나?’
밖에까지 우리의 대화 소리가 들렸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괜한 의심을 살까 봐 길게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일 잘 배우라는 말씀해 주셨어요.”
“난 또,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긴장해서 그랬구나. 하긴, 첫날부터 혼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쵸.”
“네…….”
말끝이 흐려졌다. 잘 지내보자고 하기는커녕…… 첫날부터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갑자기 아까 맞은 왼쪽 엉덩이가 아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형의 큰 손이 감싸 쥐었던 아랫도리에 그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느낌에 나는 남몰래 어깨를 떨었다.
이건 전적으로 그의 오해, 그의 심술 때문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거짓말을 한 상황이라 그리 당당할 수는 없지만, 코트 일은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런 짓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또 몰랐기에.
출근 첫날부터 오백만 원에 몸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듣는 건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확인, 검사……. 나는 형이 꺼낸 단어들이 무섭기만 했다.
그리고 과연 그를 끝까지 속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내가…… 그런 짓이 처음이라는 걸 그가 앞으로도 모를 수 있을까. 잘 속일 수 있을까. 내뱉을 땐 오기로 가득 차서 뱉어놓고는, 막상 실제가 되어 다가오니 사형선고를 받아 놓은 기분이다.
그렇게 준비한 차는 트레이에 담겨 이사실에 전달되었다. 책상 옆에 놓인 네모난 탁상이 음료를 올리는 전용 공간이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적었다.
이후 또 한참이나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비서실 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구내식당은 무척 넓고, 음식 종류도 다양했다. 거기다 무료로 준다니 아침, 저녁도 회사에서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는 빈 쌀통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오후 3시쯤 이사님과 실장님이 다시 돌아왔고, 실장님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늘 일이 없어서 많이 심심했겠어요.”
“아닙니다, 긴장해서 시간이 어떻게 간 줄도 모르게 지나갔어요.”
“내일도 긴장 단단히 하고 오면 좋을 것 같은데. 이사님께서 내일 전체 회의에 서도운 씨도 함께 참석하라고 하셔서요.”
“네?”
아까 밥을 먹으며 주워들은 것이 있다. 내일 있을 전체 회의는 엄청 커서 각 부서에서도 우두머리만 모인다고 했었다. 비서실에서도 실장님만 참석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 내가? 오늘 입사한 내가?
“어려울 건 없습니다. 그냥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라는 거니까. 서도운 씨한테도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따로 준비할 건 없나요?”
실장님이 무어라 계속 조언을 이어 갔다. 나는 수첩에 대강의 내용을 옮겨 적으며 생각했다.
‘본격적인 시작이구나.’
이렇게 회의에 참여시키는 게 일회성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실장님의 말을 곱씹어 보니 일단은 형이 일부러 시킨 일 같았다.
그가 날 여기까지 데려온 목적이 하나둘씩 실행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책상 위로 작은 상자 하나가 내밀어졌다.
“자사 스마트폰이고, 이사님이 주신 거니까 앞으론 이걸 사용하세요.”
“아…….”
“비서실에서만 사용되는 메신저도 다운받아 뒀으니 앞으론 그걸 사용하세요. 보안 문제 때문에 꼭 그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상자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실장님은 그것으로 볼일은 다 끝났는지 나가보라고 말했다.
상자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스마트폰……. 신기하다. 손님이 가게에 두고 가서 찾아 드리러 갔을 때 빼고는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한 게 스마트폰이었다.
기계 값도 비싸고, 요금도 비싸서 한 번 가져볼 생각조차 못 했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내 손 안에 똑 떨어질 줄이야.
‘이사님이 주신…….’
실장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의미 부여를 하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상자를 열어 기계를 확인해 보며 이리저리 살폈다.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려면 개통해야 할 것 같은데, 개통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르겠다. 사용 설명서나 읽으며 사용법을 익혀두자 싶어 상자 밑바닥을 뒤적거리는데, 핸드폰에서 짧게 알람이 울렸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개통되어 있나 보다고 생각한 찰나, 손가락이 멋대로 화면을 눌러 창을 열었다.
[8시까지 H 호텔 2201호로 확인받을 준비 해서 오세요.]
“……!”
화면에 나타난 글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말았다. 형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혹시나 주변의 누가 보진 않았는지 책상 밑으로 손을 숨기며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다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변함없이 내용 한 줄이 떠올라 있었다.
화면을 쓸듯 만지작거리다 겨우 엄지를 움직여 자판을 눌렀다.
[알겠습니다.]
손이 떨려 자꾸만 오타가 나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짧은 답을 완성하고 전송했다.
말풍선이 생기며 내 메시지가 전송되었다는 표시가 뜨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진짜로 하겠지.
핸드폰을 엎어 책상 저 멀리 내려놓았는데도 도무지 진정이 안 된다. 떨리는 양손을 꼭 부여잡고 눈을 감아 보았지만, 오히려 그날 밤의 광경과 호텔 아르바이트 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섞여 눈앞에 펼쳐졌다.
이 와중에 능숙한 척까지 해야 한다니 속이 쓰렸다. 나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6시 정각에 맞춰 퇴근했다. 일과라 해봤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출력물을 조금 정리하는 게 다였다.
박 대리님이 일찍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집보다는 그냥 회사에 있는 게 좋아서 퇴근 시간까지 붙어 있었다.
끝나고 나와선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장 형이 말한 호텔로 향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이 그 역으로 점점 다가갈 때마다 입술이 말랐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질질 끌며 호텔에 도착한 것은 형이 얘기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들어가 있으면 될 것을 괜히 호텔 주변을 걸으며 돌아다녔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을 조금 넘기고 말았다.
‘미쳤다.’
헐레벌떡 달려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버튼이 눌리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 위 스피커에서 키 카드를 접촉시키라는 안내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키 카드? 나한텐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굳어버렸다. 형에게 전화를 해봐야 하나……? 받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보다 10분은 더 흘러 있었다. 입에선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정말 다행히도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그 사람은 자신의 카드를 어딘가에 대더니 자연스레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나도 재빨리 손을 뻗어 22층을 눌렀다.
‘와……. 신기하다.’
내가 추운 골방에 틀어박혀 사는 사이에 세상은 많이도 변했구나. 그런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는 참 빠르게도 내가 가야 할 층에 도착했다. 가방을 든 손에서 자꾸만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나는 2201호 앞에 도착하고서도 심호흡을 세 번이나 한 뒤에야 벨을 누를 수 있었다.
“카드는 뒀다가 뭐 합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형이 꺼낸 말이었다.
그는 젖은 머리를 한 채 샤워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 나는 순식간에 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쾅 닫히자 내 어깨도 동시에 움찔 떨렸다. 형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서도운 씨 문까지 열어줘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키가 없어서…….”
“데스크에 이름 말하면 줬을 텐데요.”
“…….”
몰랐다. 아니, 알았더라도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 같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슬쩍 돌아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항상 이곳 이용할 거니까 챙기세요.”
“알겠습니다.”
“그 코트 정말…… 꼴 보기 싫군.”
나지막이 말하고 방 안으로 사라지는 형을 눈으로 좇다가 결국 신발을 벗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카드를 챙겨 가방에 넣고, 가방과 함께 코트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사님.”
형이 들어간 방으로 따라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말을 계속했다.
“아까 주신 핸드폰, 가격 알려주시면 드리겠습니다.”
“하아. 회사 제품이라 돈 안 들었습니다.”
“그럼 제 명의로 다시 개통하겠습니다. 월마다 비용이…….”
“필요 없으니까 그냥 받아요.”
그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더 빚지게 되는 게…… 싫어서요.”
핸드폰을 받았을 때부터 든 감정이었다. 나는 항상 청영의 죄인처럼 살아왔고,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 아마 빚을 다 갚는다고 해도 살인자 가족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텐데, 그런 그에게 뭔가를 무상으로 받는다는 게 불편했다.
그러자 형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웃었다.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그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와 닿았다. 차마 거기에 대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겐 말 그대로 푼돈. 그 돈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손가락만 얽어대고 있자 그는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날 제대로 만족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빚지는 기분 안 들게.”
“…….”
“이런 실랑이 하려고 호텔까지 부른 게 아닙니다, 서도운 씨. 내가 당신을 이해시켜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방 안은 조도가 낮은 조명 하나만 켜져 있어 어두웠으나,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씻고 나오세요.”
형의 명령에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눈치껏 욕실을 찾아 들어왔다. 욕실 안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씻은 욕실인 모양이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옷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는 한참을 맞고 서 있었다.
그가 썼던 샴푸와 샤워 젤을 써서 간신히 다 씻고 나니, 이젠 옷이 고민이었다. 집에선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이 상황에서는 어쩌면 좋지? 그렇다고 알몸으로 나가기엔…… 너무 부끄러워서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물기를 닦고 입고 왔던 옷을 다시 입었다. 셔츠와 바지를 입고 나가니 형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있던 그는 내가 어정쩡하게 걸어 나오는 모양새를 보고는 담배를 끄며 일어났다. 재떨이에는 벌써 세 개의 담배꽁초가 들어 있었다.
“옷을 왜 다시 입고 나왔습니까.”
“아.”
“나보고 포장 풀라는 건가.”
“아닙니다. 그냥, 뭘 입어야 할지 몰라서…….”
“입어?”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너 왜 이렇게 초짜처럼 굴어.”
“…….”
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겨 왼편에 놓인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른 놈들은 그런 스타일 좋아했을지 몰라도 난 아닙니다. 순진한 척 그만하고 옷 벗으세요.”
“…….”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는 내가 서툰 행동을 하는 게 연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애써 채우고 나왔던 셔츠 단추를 다시 풀어냈다.
형이 쳐다보고 있을 걸 생각하니 자꾸만 손이 엇나갔다. 작은 단추가 내 마음대로 풀려주질 않았다.
“하……. 이리 와.”
그는 답답했는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형의 앞으로 다가갔다. 회사에서처럼 그의 다리 사이에 서자 두어 개 남은 셔츠 단추를 능숙하게 풀어냈다. 내가 움찔거리다 바지도 벗으려고 하는데, 내 손을 치우듯 상의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읏…….”
손끝으로 간질이듯 허리를 만지작댔다. 큰 손으로 부드럽게 등을 쓸더니 한 손은 엉덩이로, 다른 한 손은 사타구니로 내려갔다. 성기 위로 확 느껴지는 손길에 갈 곳 잃은 내 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말리는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형이 내 손을 가볍게 밀며 떼어냈다.
“손대지 말아요.”
“흣, 네…….”
“마저 벗으세요.”
부끄러워할 것 없다. 내가 알던 형이 아니다. 내 몸을 산 사람이다.
나는 단추가 다 풀린 셔츠에서 팔을 빼냈다. 셔츠가 사르르 떨어지며 몸을 훑었다. 손을 내려 바지 버클을 풀어내고 속옷과 함께 벗어 내리자 어쩐지 좀 찬 듯한 공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뭐부터 해야 할까요.”
형이 넌지시 물었다.
“……자지 빠는 거요.”
마음에 드는 대답을 했는지 그는 한쪽 팔을 뒤로 지탱하며 앉았다.
“전처럼 형편없이 빨지 말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샤워 가운 아래로 커다란 성기의 실루엣이 보였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허리에 묶인 끈을 풀고 옷자락을 양옆으로 벌렸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그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잘 짜인 복근 아래 자리한 성기가 나를 절로 겁먹게 했다.
나는 두 손으로 성기를 잡고, 그날 밤 어떻게 했는지를 상기하며 혀를 대었다.
혀끝으로 요도구를 핥고 내려와 귀두 아랫부분을 입술로 쓸었다. 성기가 코에 문질러지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베어 물듯 입술로 기둥 아래까지 뽀뽀하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귀두를 입 안에 담았다.
……여전히 너무 컸다. 입을 벌리는 것만으로도 턱이 당겨왔는데, 여기서 더 움직이거나 혀를 써야 한다는 게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형이 또 화를 낼까 봐 나는 손을 열심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성기를 쓸어 올렸다. 입술로 귀두를 우물거리자 그의 손이 내 젖은 뒷머리를 쓸기 시작했다.
“하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이 귓가에 와 닿아 나는 절로 몸을 움츠리며 신음했다.
“흐으, 읍…….”
“후……. 귀가 약한 모양입니다.”
“우읍……. 으응…….”
그의 손이 조금 힘을 주어 머리를 눌렀다. 귀두가 입천장을 주욱 긁고 들어가며 목구멍에 닿았다.
“으, 흐읍……!”
형이 내 머리를 눌렀다가 힘을 빼는 것을 반복했다. 내 입 안에 대고 아주 얕게 피스톤질 하는 것이었다. 깊게 박힐 때마다 목구멍이 찔려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조금 괜찮아졌다.
나는 열심히 혀를 굴렸다. 이렇게 빠는 게 맞는지, 그의 기대에 부응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열심히 혀를 움직여 귀두를 넓게 핥았다. 타액이 흘러나오며 춥춥,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세게 빨아.”
형의 말에 나는 홀린 듯 성기를 세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힘을 받아 발기한 성기는 입 안에서 크기를 더 키웠다. 나는 이로 물지 않도록 조심하며 혀를 밑으로 깔고 기둥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혀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형의 숨소리도 조금 거칠어진 듯했다. 나는 한 손으론 계속해서 성기를 쓸고, 다른 손으론 그의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더 파묻었다.
“우극, 으욱…….”
더 깊게 넣어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너무 무리했더니 입과 턱이 아프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가 말하던 목구멍을 열어 빠는 것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조심스레 형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 머리를 잡아 떼어내었다. 천천히 성기를 뱉어냈다. 내 입술과 성기 사이로 길게 타액이 늘어졌다.
“하아……. 그만하고 콘돔 꺼내.”
형이 협탁 쪽으로 턱짓했다.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협탁 서랍을 열어 콘돔으로 보이는 것을 꺼냈다. 언뜻 보면 사탕 봉지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껍질을 까서 그의 성기 위로 올렸다.
나는 벌게진 눈으로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와 마주했다. 돌돌 말린 것을 천천히 펴 내리는데, 군데군데 핏줄이 서 있어 무섭기까지 했다. 손으로 그 부근을 잡아 내릴 때면 그 모양까지 생생히 느껴져 몸이 덜덜 떨려왔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움찔거리며 조였다. 무릎끼리 절로 맞비벼졌다. 형의 것을 만지고 핥으면서…… 나도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가 흥분한 내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나는 콘돔을 끝까지 씌우고 나서 몸을 움츠리며 가렸다.
그런데 그때 형이 손을 뻗었다. 전에 내 턱을 간질이던 손과 똑같은 동작으로 내 가슴을 밑에서부터 위로 쓸어 올렸다.
“흐읏……!”
그의 손끝이 유두를 긁고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빨면서 젖꼭지 세운 겁니까.”
“…….”
“야하기도 하지.”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조금 숙였다. 하지만 이내 턱을 붙드는 강한 힘에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성기를 쥐고 내 얼굴 위로 세게 내렸다. 탁, 탁. 매끈한 콘돔을 뒤집어쓴 성기가 볼과 광대 주변을 때렸다. 입술 위나 콧잔등 위로도 묵직한 성기가 내려앉았다.
“읏, 흐읏…….”
“다음엔…… 하아. 어떻게 해줄까.”
또 나에게 물어왔다. 형의 태도는 꼭 내가 바라고 바라서 이런 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게 내겐 엄청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뒤…….”
하지만 나는 또다시 그가 바라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뒷구멍에 박아주, 세요…….”
“……침대 올라가서 엎드려.”
형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기계처럼 명령을 받들어 푹신한 침대에 기어 올라갔다.
그가 시키는 대로 엎드려 두 손으로 시트를 짚었다. 다 벗은 몸으로 엉덩이를 쭉 빼든 자세를 취하자 부끄러움이 배가되었다.
나는 자꾸만 양발을 마주 비볐다. 긴장에 떨리는 손은 주름이 깊게 생길 때까지 세게 침대 시트를 쥐었다.
뒤에서 형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뒤로 다가섰는지 꼼지락거리던 발가락 끝에 그의 몸이 닿았다.
“아…….”
등으로 손이 뻗어왔다. 그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워 얼음장 같았다. 그는 등허리를 손바닥으로 둥글게 쓸다가 허리를 붙들고 고정하듯 조금 위로 올렸다. 나는 손길이 이끄는 대로 허리를 올려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
큰 손이 엉덩이 위로 내려앉았다. 살결을 쓸다가 강한 힘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꾸만 움찔하며 엉덩이가 조여들었다. 그의 손에 이리저리 뭉개지는 게 너무 부끄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 엉덩이랑 허벅지 사이에 점 있는 거 알아요?”
형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설명한 부근을 손바닥으로 짜악 때렸다.
“흐윽! 읏……. 몰랐, 몰랐습니다.”
“아무도 이걸 얘길 안 해줬어?”
“네, 에……. 읏…….”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를 훑고 올라와 오른쪽 엉덩이 바로 아래를 쓰다듬었다. 그곳에…… 나도 몰랐던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엄지로 자꾸만 그곳을 쓸고, 엉덩잇살을 들어 올리듯 위로 세게 문지르기도 했다.
“이 점만 봐도 꼴려서 좆이 설 것 같은데.”
“으읏! 으응…….”
손톱으로 누르는 느낌이 나서 나도 모르게 허리를 앞으로 뺐다.
그리 많이 뺀 것 같지도 않았는데, 형은 대번에 내 허리를 붙잡고 세게 뒤로 당겼다. 그 힘에 의해 엉덩이가 다시 뒤로 쭉 빠지며 그의 사타구니에 박혀들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물며 터져 나오는 이상한 소리를 삼켰다. 내가 콘돔을 씌운 뜨거운 살덩어리가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졌다.
아직 삽입하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삽입을 마친 것처럼 내 밑에 허릿짓을 했다. 꺼덕이는 성기는 내 허벅지 사이를 거세게 문지르고 빠져나갔다가도, 엉덩이 사이를 미끄러져 올라가 등허리까지 열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다리 벌려봐.”
형이 몸을 조금 떼어내며 말했다. 형은 내 허벅지 안쪽의 말랑한 살을 만지작대고 있었는데, 너무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다리를 조일 뻔하다가 곧장 무릎을 움직였다.
다리를 벌리자 형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엎드린 상태여서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액체가 엉덩이로 떨어졌다. 젤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에 닿아올 때마다 움찔움찔 엉덩이 볼이 패었다. 그는 왼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구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색이 예쁘네…….”
형이 내 구멍 위로 젤을 짜내며 말했다. 차가운 젤이 닿아 나도 모르게 뒤를 조이는 모양새가 너무 부끄럽고 이상했다. 와중에 내 뒤를 살피며 품평하듯 말을 하는 그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흐윽……. 하지, 마십시오…….”
“뭘요.”
“그런, 말…….”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더듬더듬 대답을 마치자마자 형이 다시 내 엉덩이를 때렸다.
“아아!”
“버릇이, 씨발…….”
이제까지 중 가장 세게 때린 듯한 느낌에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매서운 손길이 닿았던 엉덩이 한쪽이 따끔거렸다.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요, 서도운 씨. 이전에 어떤 새끼가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윽!”
불시에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를 잡아 벌린 틈으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들어온 손가락은 밑으로 굽어져 안을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나도 모르게 뒤를 꽉 조이며 벌벌 떨었다. 하지만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마구 움직여대며 내벽을 이리저리 눌렀다.
“그런 버릇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으응, 아파요. 아픕……!”
“대답 안 합니까?”
“흐윽, 안 그럴……게요. 앞으로, 으응, 으으읏…….”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조금 늦춰 주었다. 그렇다고 긴장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엉덩이 솜털이 비죽 선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밀어 넣었고, 내벽의 모양을 가늠하듯 만지작대며 빼내었다.
미끈한 젤이 묻은 손가락이 질꺽질꺽 소리를 내며 출입을 반복했다. 소리가 너무 자극적이어서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여기서 팔을 빼내면 상체를 숙여야만 했다. 그가 그걸 허락해 줄지 몰라서 나는 애써 어금니를 다물며 자극을 참아냈다.
“엉덩이 가볍게 돌아다니진 않았나 봐.”
“네……. 읏.”
“그런데 후……. 이렇게 조여서야. 내 거 먹을 수 있겠어요?”
형은 손가락을 확 빼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한껏 벌렸다. 나는 신음을 참으며 그가 내 뒤를 살피는 것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의 성기 끄트머리가 슬며시 구멍 위로 문질러졌다. 크기를 가늠해 보고 있는 듯했다.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일순 힘이 들어가 구멍 위를 누르면, 나는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들어올까 봐 겁이 나 엉덩이를 떨었다.
“흐읏, 흐으응…….”
“좆 받으려면 힘을 풀어야지.”
성기가 치워지고, 엉덩이를 잡아 벌렸던 손가락 중 엄지 두 개가 양옆으로 들어왔다. 구멍을 찢듯 잡아 벌리는 감촉에 나는 고개를 젖히며 숨을 훅 들이켰다.
너무, 너무 아팠다. 신음을 내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그가 벌리면 벌릴수록 자꾸만 뒤에 힘이 들어갔다. 오물오물 주름지며 다물리는 구멍이 거슬렸는지 그가 다시 엉덩이를 때렸다.
“우읏…….”
“섹스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할, 거예요. 잘하겠……습니다.”
나는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말을 뱉었다.
뒤로 남자 한 번 품어본 적 없는 몸이었다. 경험 없는 뒤가 저런 흉기를 담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나는 사정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리고 앓는 소리가 섞인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흐윽. 넣어, 주세요. 안에 넣어…… 주세요, 이사님.”
형은 내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기를 갖다 대더니 끄트머리부터 주욱 밀어 삽입하기 시작했다.
“아아아―!”
손톱을 세워 시트를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입에 넣었을 때랑은 감각부터가 달랐다. 억지로…… 억지로 내 골반을 벌리고 밀어 넣는 듯한 느낌. 뼈가 아예 벌어져 버려서 영영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그런…… 감각.
“흐윽, 아아!”
“힘…… 빼세요.”
형은 내 허리를 양손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나는 침대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침대 시트를 당기며 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성기를 받아내고 있는 뒤로 감각이 몰려서 손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아직 반도 안 들어갔어.”
“아파……. 아파요, 아……. 하아!”
그가 욕을 뱉으며 허리를 더 붙였다. 성기가 조금씩 더 진입할수록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최대한 힘을 빼려고 했지만, 어떻게 하면 힘을 뺄 수 있는지조차 몰랐다.
접합부로 젤을 더 짜냈는지 질척한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엄지로 구멍 주변을 만지작대며 허리를 더 붙였다가 천천히 뒤로 잡아 뺐다.
“흐으, 흐으으…….”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반쯤 들어왔던 성기가 귀두만 걸친 상태가 될 때까지 빠져나갔을 땐, 조금은 그 고통에 익숙해졌는지 참을 만했다.
얕게 피스톤질 되는 두툼한 귀두가 맥박 치는 듯했다. 나는 그 뜨거운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심호흡했다. 귀두에서 가장 두툼한 부분이 내벽을 살살 긁어내렸다.
아랫배에서 피어나기 시작하는 미묘한 감각에 나는 어쩐지 겁을 먹었다.
뒤로 남자를 받아내며 느끼다니……. 이래서야 경험이 전혀 없다고 했었어도 그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형은 내 등허리를 만지작댔다. 툭 튀어나온 꼬리뼈를 부드럽게 만지며 내 긴장을 풀어주는 듯하다가 척추뼈를 따라 간질이듯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응…….”
형이 몸을 숙이자 성기도 조금 더 안으로 진입했다. 커다란 손이 몸을 훑고 쓰는 자극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원래 간지럼을 잘 타는 체질이었던가, 다시금 생각했다. 그는 날 보고 귀만 예민한 게 아니라 온몸이 다 예민하다며 중얼거렸다. 눈이 질끈 감겼다.
손이 점점 더 올라와 어깨를 둥글게 쓸었다. 그때였다. 형이 내 어깨를 부서질 듯 잡았다.
그리고 뒤로 당기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퍼억 박아 넣었다.
“……!!”
나는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허리를 꺾었다. 고개를 젖히며 입을 벌리고는 아주 가느다랗고 작게…… 앓는 소리 한 줄기만 흘려보냈을 뿐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봐준 것이라는 듯 본격적으로 허릿짓하기 시작했다. 퍽, 퍼억! 살갗이 맞닿는 소리가 거세게 호텔 방을 울렸다.
“아, 하아! 아아! 흐윽! 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성기가 배의 한가운데까지 들어온 느낌이었다.
“하, 씹……. 이렇게 쑤셔 박았는데도…… 다 안 들어가네.”
“으윽, 흐으응……!”
“엉덩이가 너무 작군요”
그게 아니라고, 내 탓이 아니라 형의 것이 너무 큰 것이라고 말하며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이상한 소리만 터져 나왔다.
배 속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몽둥이 같은 성기가 내 장기를 휘젓고 몰아붙이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정말 말 그대로 성기를 욱여넣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상체가 무너졌다. 침대 시트로 고개를 처박고 그의 강한 허릿심에 그저 이리저리 흔들렸다. 팔이 옆으로 널브러졌다. 그가 내 위로 상체를 숙이며 양 손목을 위에서 붙들었다. 그러고는 무게를 실어 내 몸을 완전히 압박하듯 퍽퍽 박아대기 시작했다.
“으윽, 이사님. 흑…….”
목구멍 안에서 무언가 울컥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시트에 문질러 닦았다. 울음을 참느라 숨이 모자랐다.
벌어진 구멍은 아프고 쓰렸다. 배 속에 처박히는 성기는 내벽을 찢을 것 같았다. 젤이 녹아내려 춧춧 물이 튀기 시작하자 나는 점점 울음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형이 어깨를 잡았던 한쪽 손을 내려 가슴을 쓸기 시작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유두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의 것을 빨 때부터 솟아 있던 작은 돌기는 손길을 받고 더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비틀다가, 내가 아파하며 뒤를 조이면 그는 그 감각이 황홀하다는 듯이 허리를 붙였다.
“아읍, 아윽……. 이사님, 이사, 님……! 으응……. 흐윽!”
“내벽이, 하……. 이렇게 꽉 무니까 다들, 환장을 했지. 응?”
“흐아아……!”
퍼억, 성기가 날카롭게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문질러 닦을 새도 없이 신음했다. 아랫도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감전된 사람처럼 이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울어?”
형이 내 훌쩍임을 들었는지 돌연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그를 이제야 볼 수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배어난 땀으로 촉촉이 젖은 몸. 억지로 틀어진 몸이 멋대로 뒤를 조이자 그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윽!”
한쪽 다리는 그대로 깔리고, 들어 올려진 다리는 그대로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반쯤 선 성기를 내보이며 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에 수치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서도운 씨 강간합니까?”
“으윽, 흑. 아니, 아닙니다. 으응……!”
“근데 왜 울어.”
형의 목소리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내가 우는 게 매우 귀찮고 거슬리는 일이라는 듯 말투가 신경질적이었다.
“박아달라고 사정한 건 넌데, 윽……. 왜 우냐고 묻잖아.”
밑이 너무 아파서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는데…… 그보다도 그가 하는 말이 나에겐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심장이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눈물은 내가 참자고 해서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나도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는데, 아까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손을 뻗어 얼굴을 닦기도 전에 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날아왔다.
“안 그쳐?”
커다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숨을 헉 들이켰다. 고통에 점철되어 부르르 떨다가 한참 만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죄송합, 니다. 죄송합니다. 흐윽, 이사님. 으읏……!”
“예쁘게 굴어야 좆질 할 맛이 나지. 윽, 내가 너 우는 것까지 달래줘야 해?”
“아니에요, 아닙……. 으응! 흐읏, 흐으응……!”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 탓에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흐려졌던 시야가 멀쩡하게 돌아오고, 형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긴 했지만, 아까만큼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이내 내 가슴을 모아 쥐고 젖꼭지를 짜내듯 손가락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생소한 감각에 상체를 다시 비틀자 그가 자세를 바꿔 내 두 다리 모두 몸쪽으로 접어 붙였다.
“흐으, 으, 아, 아읏!”
몸이 반으로 접혀 무릎이 어깨 부근에 닿는 것으로도 모자라 허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형이 내려찍듯 허리를 박을 때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엉덩이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넘치듯 부었던 젤이 뚝뚝 떨어져 시트를 동그랗게 적시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맹수가 사냥감을 잡으려 전력 질주를 하듯 숨이 무겁게 몸 위로 내려앉았다. 절정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아, 아파……. 으흑, 흐응, 으으응……! 아, 아아, 흐아, 아……!!”
“하아, 크윽……!”
형은 성기를 되는대로 밀어 넣고는 콘돔 안에 사정액을 분출해 냈다. 퍼억, 퍼억! 사정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거세게 성기를 처박으며 허리를 떨었다.
벌어질 대로 벌어져 감각이 흐릿해진 구멍에서도 그의 핏줄 솟은 성기가 꿈틀거리며 사정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끝……났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며 성기를 잡아 빼냈다. 질꺽, 야한 마찰음이 조용해진 방 안을 채웠다.
그제야 내 다리를 놓아주었다. 힘이 빠진 다리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양옆으로 벌어졌다.
“야해라.”
피식 웃은 형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반응할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는 다시 숨을 내뱉으며 콘돔을 벗겨냈다. 이미 사정한 성기였음에도 탱탱하게 서 있었다. 척척하게 젖은 성기를 수음하듯 쓸며 내 허벅지 안쪽 살에 마구 문질렀다. 귀두에 묻어 있던 정액이 허벅지에 옮겨 묻었다.
“힘듭니까?”
“…….”
그의 성기가 사정하지 못한 내 성기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그제야 다리를 한쪽으로 오므렸고, 간신히 팔을 지탱해 상체를 일으켰다.
“아닙니다.”
“안이 좁아서 끝까지 넣지도 않았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형은 무척이나 나를 배려한 듯이 말했다. 나는…… 너무 지쳐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사님은…… 어떠셨습니까.”
그리고 주제넘게 물었다.
“저랑 잔 것,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왜요. 내가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어쩌려고.”
“그건…….”
형은 바닥에 떨어진 샤워 가운을 다시 걸쳐 입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문질렀다. 아직 젖어 있는 눈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만족스러웠습니다. 운 것만 빼면.”
“…….”
“또 쑤셔 넣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고.”
눈에 머물던 손은 광대를 타고 볼로 내려왔다가, 내가 간지럼을 가장 잘 타는 귓가로 옮겨갔다.
“오늘은…… 서도운 씨가 우는 바람에 흥미가 식었으니 여기서 마무리합시다.”
“…….”
“씻죠.”
말랑한 귓불을 한참 만지작대던 형은 내 귀 끝이 붉어지는 걸 보곤 웃었다.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내 시선이 잠시 비뚤게 바닥에 박혀 있는 사이, 그는 욕실로 모습을 감췄다.
“…….”
나는 그렇게 침대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씻는 물소리가 뚝 끊겼을 때가 되어서야 주섬주섬 일어나 다른 욕실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이제 한 번이었다.
한참 동안 몸을 씻고 나왔을 때, 형은 이미 호텔을 떠나고 없었다. 내가 너무 늦게 나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나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뜨거운 물을 한참 맞으며 몸을 녹이고 찜질했는데도 허리와 엉덩이가 지끈거렸다. 벌어진 아래가 화끈거리는 감각이나, 얻어맞은 엉덩이가 따끔한 감각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간신히 물기를 닦고 옷을 갖춰 입었다. 한 발짝 떼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서야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싶었다. 내일 출근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에 가려고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드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역시나 수표였다. 오백만 원이 찍혀 있는 빳빳하고 하얀 종이 한 장.
“그냥 갈 뻔했네…….”
하마터면 여기에 온 목적도 잊고 그냥 돌아갈 뻔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팔고 벌어낸 돈……. 손끝으로 종이를 만지작대다가 와작 구기듯 반으로 접었다.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눈을 질끈 감고는 호텔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