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9)

  5.

뜨거운 수건으로 찜질을 하다 잠들었더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 상태는 어젯밤보다 좋아진 듯했다.

제때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되어 일찍 맞춰 두었던 알람 때문에 오늘은 조금 이르게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제보다도 일찍 출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비서실에는 박 대리님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출근해 있었다.

나는 인사를 드리고 고개를 빼꼼 빼서 이사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재빨리 목도리와 코트를 벗어냈다. 괜히 입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 형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안쪽으로 옷걸이에 가려지게 코트를 건 뒤 그 위에 목도리까지 둘러 색을 가렸다. 툭 튀어나온 팔 부분이 신경 쓰였지만 이렇게까지 해뒀으니 그가 별다른 지적 없이 넘어갈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사무실 내부를 휘둘러보았다. 모두 자리에 앉아 데스크톱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리님도 없고, 부여받은 업무가 아직은 없어 나는 머쓱하게 목만 매만지다 책상을 한 번 쓸고 닦았다.

그러기를 잠시, 실장님이 나오며 이사님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눈치껏 사람들을 따라 나가 복도에 섰다.

“……녕하십니까, 이사님.”

시작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묻어가며 인사를 마쳤다. 형은 여전히 잘 닦인 구두를 신고 걸어가며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어제와 변함이 없었다.

괜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자꾸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고, 그 감각들은 아직도 내 몸 위에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하지만…….

“박 대리는 지금 막 사무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진행 상황 전해 듣고 현장 확인한 뒤에 서울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어제 지시하셨던 조사표 문항별로 정리해서 올려두었습니다.”

“아침부터 수고했습니다.”

나만 어제의 은밀했던 만남을 신경 쓰고 있는 듯 형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른 사원들과는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을 맞추며 간단한 인사와 업무 보고를 받았으면서, 내 쪽으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실장님부터 직급 순서대로 한 명씩 대화하고 내려와 내 차례인가 싶었을 때, 나는 우습게도 꼭 어미 새에게 모이를 받아먹길 바라는 아기 새처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형은 내 기대를 저버리고, 실장님한테 바로 스케줄 보고를 듣자고 말한 뒤 이사실로 들어갔다.

“…….”

허망하게 닫힌 문에 속이 쓰렸다.

나도 이 싱숭생숭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어릴 적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도 난 형에게 닿고 싶었다. 손을 잡고 싶기도 했고, 끌어안고 싶기도 했고, 안기고 싶기도 했다. 그때는 성애(性愛)의 개념이 없었다. 그냥 형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마구 머리칼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지금은 자의든 타의든 성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여기에 애(愛)를 붙여도 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형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떠올리며 질척거리고 있는 것인지…….

“도운 씨, 서도운 씨.”

닫힌 이사실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 있던 나를 실장님이 불렀다.

“네, 네.”

“커피 준비하세요.”

“알겠습…….”

실장님은 한 번 미소 짓고는 내가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정신을 빼고 있던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붉어지려는 볼을 문지르며 냉큼 탕비실로 달려갔다.

‘커피……. 회의 있는 날은 커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실력 발휘를 해서 커피를 내리고 싶어졌다.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렇지만 역시나 시선 한 번 받지 못하고 커피만 덜렁 내려두고 돌아오고 말았다.

오후가 되고, 인사과에서 신입 사원 호출이 있었다.

내 이름이 들어간 명패와 사원증 목걸이를 전달받고, 짧은 교육도 함께 받았다. 무슨 안전, 무슨 방지 교육……. 잘 기억나진 않았다. 교육을 받는 내내 딴생각뿐이었다. 무척이나 주제넘은 생각.

교육이 끝나고 동기였던 이준혁이 알은체를 했다. 낯빛이 영 안 좋아 보였다. 월요일부터 환영 회식을 했다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나는 왠지 더 침울해졌다.

가라앉은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비서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뒤돌아서서 회의를 위한 수첩과 볼펜을 챙기며 아랫입술을 비죽거렸다.

“준비 다 됐어요?”

“네.”

“바로 따라오세요.”

실장님을 뒤따라 이사실로 향하자 거울 앞에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셔츠의 깃을 올리고 넥타이를 둘러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기다란 손가락을 눈으로 좇다가 거울 속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훔쳐보던 중간에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혼자 무슨 쇼를 하든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귓가엔 계속해서 쓱쓱 넥타이를 매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괜히 손에 든 사원증 목걸이를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회의실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말 한마디 없었다. 부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우리는 이제 막 분위기가 정돈된 회의실로 들어섰다. 형이 자리에 앉고 난 뒤 나는 그대로 뒤쪽 벽에 붙어 서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갈지 전혀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듣는 대로 모두 적어두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회의실 불이 꺼지고 빔프로젝터를 실행하는 사이, 형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서도운 씨, 하고 부르는 작은 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형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움찔 한 번 떨고는 몇 걸음 걸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네.”

“긴장했습니까?”

언젠가 들었던 문장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그의 앞에 무릎 꿇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귀를 붉혔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나 또한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꺼냈다. 아마 형은 모를 것이다.

“사원증 매야지.”

손끝으로 내 손을 툭툭 건드리며 그가 말했다. 손에 수첩과 사원증을 꾹 쥐고 있었다.

이렇게 불시에 닿을 줄 몰랐던 손길에 당황해 허둥대며 명찰을 맸다. 형은 뒤집힌 내 사원증을 돌려 똑바로 했다. 가슴 밑, 윗배 근처에 그의 손이 스쳐 나도 모르게 배에 힘을 주었다.

“못 알아들어도 최대한 많이 보고 들으려고 하세요. 가장 바쁜 시기에, 가장 바쁜 부서에 합류하게 된 서도운 씨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니.”

“……알겠습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기에 나도 인사를 꾸벅 하고 벽으로 붙어 섰다.

목에 걸린 사원증의 무게에 고개가 무거웠지만 애써 힘을 주고 버텼다. 이젠 억지로라도 이곳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어땠습니까.”

회의가 끝나고 돌아왔을 때, 형은 나에게 이사실로 따라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는 한쪽에 놓인 옷걸이에 재킷을 걸어놓으며 주어도 없이 물었다. 눈치껏 회의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유추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완벽히 이해는 못 한 것 같습니다.”

“필기를 열심히 하던데요.”

“그냥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 안의 수첩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형이 말했던 대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 열심히 따라가려고 했을 뿐이다.

형은 이내 자리에 앉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가인 의자는 잡음 하나 내지 않고 그의 무게를 받쳤다.

“정리해서 한번 말해 보세요.”

“네?”

“브리핑하듯이. 내가 회의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명해 보세요. 오늘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의 요구에 처음엔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나를 시험해 보는 건가? 형은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1분도 채 흐르지 않았는데, 나는 그를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작년 하반기 실적에 이어 연초 사고 수습에 대한 지적이 나왔습니다. 어……. 대구 공장 측과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던 문제가.”

“됐습니다.”

내가 한참 줄줄이 말을 꺼내던 중반에 형이 끊으며 멈춰 세웠다. 필기했던 수첩에서 시선을 떼고 바라보자 그는 살짝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일머리가 아예 없진 않군.”

그건 분명 칭찬이었다. 대단한 칭찬도 아니고, 그냥 일머리가 없지 않다고 한 것뿐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

적어도 이번 회의는 잘 따라갔다는 의미이겠지. 이렇게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면 되겠다.

형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나에게 말했다.

“아까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네?”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요.”

그렇게 묻는 그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전혀 안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기민하게 내 표정까지 관찰했는지 모르겠다.

“아파서 그래요? 어제 섹스 때문에.”

“아, 아닙…… 아닙니다.”

불시에 튀어나온 단어 때문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답했다. 살짝 시선을 돌려 바깥의 사람들에게 들렸을까 살피기도 했다.

“밖에까진 안 들립니다. 바깥 눈치 보지 말아요, 그게 더 수상해 보이니까.”

“죄송합니다.”

“어젠 너무 좁긴 했습니다. 엉덩이가 원래 작은 건지, 아님 계약한 이후로 쑤셔준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죄송, 합니다.”

“그거까진 죄송할 필요 없고.”

내 대답에 형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그런 쪽의 대화를 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부끄러웠다.

“아파서 그런 것도 아니면, 왜 표정이 안 좋았을까.”

형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나는 그게 질문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질문이었으면 무조건 답했어야 하니까. 나는 고개를 더 숙여 표정을 감췄다.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고 우스운 이유 때문이다. 그가 들으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엉덩이 맞은 게 억울했어요?”

“아닙…….”

“그렇게 해서 번 돈이 고작 오백이라 서러웠나.”

“아닙니다, 이사님.”

형이 퀴즈를 맞히듯 보기를 하나씩 만들어 내뱉을 때마다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제가 잘 처신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 얘기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혹시 형이 정말 그 이유를 맞히기라도 할까 봐 나는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는 내 행동에 정말 아무 일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흥미가 떨어진 듯 보였다.

“그러십시오. 내가 서도운 씨 기분 헤아려야 할 입장은 아니니까.”

“…….”

당연한 소리였지만 어쩐지 서러웠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표정에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업무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주제로 얘기할 때와 업무 이야기를 할 때의 톤 변화가 거의 없었다. 나에게는 형과의 관계가 사적 영역이지만, 그에겐 그 또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영어는 할 줄 압니까.”

“회화는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렇게 말하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는데. 이른 시일 안에 시험 봐서 점수 제출하는 것으로 합시다.”

나는 짧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시험을 보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취업 시즌이 다가왔음에도 영어 시험 한 번 못 본 이유는 전부 비용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하루하루 살아갔던 생활에서 시험 때문에 몇만 원을 훅 써버릴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 영어 회화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름 부유했을 시절엔 외국에서 살아보기도 했고, 아직 감각을 잃지 않아 말은 술술 나오는 정도였다.

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대답하자 실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사님, 박 대리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보고 들어보죠.”

실장님이 문을 닫고 나가고, 나도 이사실에서 나가기 위해 책상에 대고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서도운 씨는.”

나가려는 나를 붙들고 형이 말했다.

“오늘 회의, 그리고 비서실에서 작년에 진행했던 사업 계획서 읽어보고 정리해서 보고서 올리세요.”

그의 말을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어 생각하고는 곧장 수첩에 적었다. 그가 주는 첫 일이었다. 다행히 새로운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를 공부시킬 생각인 듯했다.

“박 대리에게 배우든 이전 계획서를 살피든, 반드시 양식 지켜 작성하세요. 기한도. 내일 아침까지 받아보고 싶군요.”

“네?”

“내가 출근했을 때 책상에 올라와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야근해도 좋습니다.”

‘필요하다면.’

그건 그냥…… 야근을 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수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형은 이사실을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게 누군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나를 괴롭히려고 이 회사로 데려온 게 분명했다. 나는 내 손 위로 떨어질 오백만 원과 월급을 생각하며 꾹 참아야 하는 입장…….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출근 둘째 날부터 전날 혹사당했던 몸을 이끌고 야근하게 된 나를 가여워하며 책상에 앉았다.

* * *

그 뒤로도 형은 나에게 매일같이 과제를 부여했다. 그가 요구하는 보고서의 양은 신입인 내가 감당하기엔 확실히 버거운 정도였다. 거대한 기업이니만큼 진행한 프로젝트도 많았기에 아직 비서실에서 언급되었던 작년 사업을 다 다루지도 못했다.

매일 야근을 해야 했고, 의도치 않게 탕비실 간식들을 저녁으로 축내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영어 공인 시험도 준비해야 했다. 형이 시험 점수를 제출하라고 하고 나서 바로 시험을 등록했다. 시험일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그에게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받을 것이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낙하산……과 비슷한 신세인데, 뭐라도 눈에 보이는 증명을 내보여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내주는 과제를 야근으로도 모자라 집에까지 들고 와서 완성해 내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열심히 해서 일부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실력이 되면 그와 그의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형이 들으면 어쭙잖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들여쓰기 같은 기본적인 양식도 지키지 않은 보고서를 내가 읽어봐야 할까요.”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데스크 위로 반투명한 파일이 던져졌다. 나는 숨을 헉 들이켜며 재빨리 파일을 집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작성하세요. 초보적인 실수 하지 말고.”

형의 목소리엔 높낮이도 없었다. 많이 화가 난 건지 눈치를 살펴도 안색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사과하고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파일을 들추며 어디를 실수한 것인지 계속 눈으로 훑었다.

“아, 바보야…….”

두 번째 문단 들여쓰기가 빠져 있었다. 첫 문단에만 집중하고, 그 뒷장을 살피느라 두 번째 문단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서류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 쉬었다.

빨리 수정해서 다시 제출해야지. 이러다 때를 놓치면 또 점심시간에 밥도 제대로 못 먹을지 모른다.

비서실로 들어오자 조용한 가운데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나도 어서 자리에 앉아 다시 파일을 불러왔다.

형이 나를 호텔로 부른 지 보름이 훌쩍 넘어갔다.

나는 혹시나 그가 일을 많이 줘 미안해서 부르지 않은 것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그가 요즘 내주는 일의 양을 따져 봤을 땐…….

“…….”

그건 절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이 두 배, 세 배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냥 나를 부르기엔 바쁜 것뿐이었다.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무척 아프고 힘들었지만, 또 너무 슬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나간 아픈 감각은 희미해졌다.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 감정은 내가 애써 내리누른다 해도 틈 사이를 비집고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속이 쓰렸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그런 감정을 키우다 결국 죽여 버릴 것이란 걸 알기에.

키보드를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탁! 탁!

들여쓰기를 수정하고, 다른 곳에 맞춤법이나 양식 오류가 없는지 두 번 확인했다. 출력한 뒤 출력물로도 한 번 훑어본 뒤 파일에 끼워 다시 제출했다.

나는 간신히 늦지 않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차장님께서도 차 드신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의 지시에 나는 재빨리 티백 하나를 더 뜯어냈다. 삼각형으로 접혀 있는 것을 잘 펼쳐 둥근 잔에 담은 뒤 따뜻한 물을 부어 천천히 우려내고 있는데, 뒤로 박 대리님이 다가왔다.

“도와줄게요.”

“아니에요. 거의 다 되었어요.”

박 대리님은 일이 바쁜 와중에도 나를 잘 챙겨주었다. 내 초보적인 질문에도 귀찮은 기색이 없었고, 일을 가르쳐 주면서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 신세였다는 한탄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왜 나를 이렇게 잘 챙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 많이 힘들죠?”

“네…….”

“그래도 영업팀이 계약을 따내서 다행이에요. 이제야 한시름 놓겠네.”

하루가 더 지난 금요일, 추상적이었던 사업의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미친 듯 바쁘게 달려오다가 잠시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구간이었다.

“환영 회식도 못 해서 어떡해요.”

“저는 회식 안 해도 괜찮아요.”

박 대리님이 꿀을 꺼내며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내 환영 회식에 관한 얘기는 종종 언급됐었는데, 항상 그럴 때마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사업을 따내면 하자고 뒤로 미뤄졌었다. 팀원들은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상관없었다. 꼭 회식을 해야지만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술도 잘 못했다. 회식이라는 게 으레 술을 잘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 않은가.

대학 동기인 이준혁이 출근 첫날부터 술에 절어 다크 서클을 턱까지 달고 출근한 모습을 본 뒤 두려움은 더해졌다. 심지어 나는 내 주량이나 술버릇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회식은 나한테 너무 위험한 모임이었다.

“실장님이 무척 미안해하고 계시거든요. 다음 달 초에 한번 자리 잡으신대요.”

“아……. 알겠습니다.”

아예 안 하면 더 좋겠지만 차마 거기다 대고 싫다고 토를 달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가 우러난 찻잔에 꿀을 조금 타 저은 뒤 트레이에 옮겨 담았다.

이사실로 들어서자 형이 다른 직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근처로 다가가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웃는다.’

형이 무어라 말을 하며 살며시 웃었다. 확실히 그의 웃는 표정에서 여유가 피어났다. 정말 급한 불을 껐다는 게 실감이 났다.

물론 내겐 여전히 그가 내준 과제와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씁쓸하게 입술을 다물며 일어났다. 트레이를 들고 나가려는데, 형이 뒤에서 날 불렀다.

“서도운 씨.”

“네.”

“점심 먹지 말고 대기하세요.”

나는 그 말에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곧 점심시간이란 사실을 깨닫고 나니 배가 고파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왜 점심을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또 점심시간에 일을 내주려는 못된 속셈인가 싶었다.

‘그런 거면 진짜 밉다.’

탕비실에 먹을 만한 게 얼마나 남았나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둑고양이처럼 탕비실 식량을 축내는 꼴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일 것 같았다. 형이 일을 내주면 빨리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방 안의 지갑을 미리 챙겨두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나에게 겉옷을 챙겨 입으라고 말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코트를 챙기러 냉큼 비서실에 들어왔을 때, 실장님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지금 오찬 약속 있으신데, 나 대신 이사님을 수행하면 됩니다.”

“저…… 저 혼자요?”

“기사님이 운전은 맡아주실 거고, 아마 가서도 어려운 일은 없을 거예요. 어차피 손님 만나셔서는 그분과 식사하실 거니까 도운 씨는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식사하세요. 오고 가고 할 때 불편한 건 없으신지 옆에서 살피면 됩니다.”

다른 일들은 다 김 실장님과 동행해 배웠는데, 이런 간단한 오찬 모임은 딱히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우선은 서둘러 나가야 했기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짐을 챙겨 들었다.

코트에 팔을 끼워 넣으며 나오자 형은 이미 밖에 나와 있었다. 나는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섰다.

“가방 제가 들겠습니다, 이사님.”

“…….”

그는 역시나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가 입은 코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가죽으로 된 브리프케이스를 건네받고, 실장님께 전달받은 사항을 보고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3시 이후 외부 일정은 없으십니다.”

“알겠습니다.”

“식당은 종로구에 있는 곳으로…….”

“알아요. 설명할 것 없습니다.”

이사실에서 곧바로 로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층에 도달했다. 형은 태연히 말하며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걸어 나갔다. 나도 재빨리 그의 뒤로 붙었다.

형의 등장에 로비에 있던 사원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인사 소리에 덩달아 인사를 받게 된 나는 머쓱해져 몸 둘 바를 몰랐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가 유리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형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이미 밖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옷 틈을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게 코트 목 부근을 조여 쥐며 서자 그가 흘끗 바라보았다.

“후……. 빨리 날이 풀렸으면 좋겠군요.”

“……조만간 벗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하.”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해 대답하자 형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기사가 연 차 문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내가 조수석에 타려 하자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뒷좌석에 타세요.”

잠시 멈칫한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말을 따랐다. 옆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그의 옆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기사님의 말씀과 함께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흔히들 듣는 라디오나 노래 한 소절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바깥의 소음이 새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 값비싼 차는 차체의 소음마저도 최소한으로 내도록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단둘이 있는 게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최대한 어색함을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하며 창문으로 바깥을 쳐다보고 있는데, 형이 돌연 손을 뻗어왔다.

갑작스레 손에 닿는 감각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에서 그의 가방을 가져갔다. 가는 길에도 일할 모양인지 가방을 열어 서류를 꺼내 들었다.

“프로그램 사용법은 익혔습니까.”

그가 여전히 시선을 파일에 둔 채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 대리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장님도요.”

“박 대리 무척 바쁠 텐데 고생이 많았겠어요.”

“네……. 그래도 제가 일을 빨리 배워서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어쩐지 자랑 같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런 편인 것 같았다. 한 번 설명해 주면 웬만한 건 빠르게 습득했다. 물론 무척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대리님이나 과장님도 와서 도와주고는 했다.

이 정도면 무척 빠르게 깨우치는 거라며 좋아했다. 바쁜 와중에 끼어든 신입이 어리바리할까 걱정스러웠을 텐데, 나도 내가 잘 배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제출한 보고서가 이제까지 중 가장 괜찮았습니다.”

“아…….”

“빠르게 느는군요.”

형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다시 보니 그건 내가 오늘 제출한 보고서였다. 어제 야근을 해서 간신히 아침까지 만들어놓은 것.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보고서 칭찬에 갑자기 기분이 수직 상승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간 퇴짜 맞았던 형편없는 수준의 보고서에 비해 많이 발전한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자만하지 마세요.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그가 찬물을 끼얹듯 경고했지만 그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회계를 공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이사님.”

재빨리 수첩을 꺼내 들어 ‘회계 공부!!☆’라고 펜을 꾹꾹 눌러 적었다. 일할 게 산더미고, 공부할 게 산더미 위의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좋다고 웃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내 기분이 심장과 함께 쿵, 수직으로 하강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식당에 도착하자 지배인 명찰을 달고 옷을 갖춰 입은 남자가 입구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주셨습니다.”

“네.”

“문 전무님께서도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남자는 자갈이 깔린 정원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키가 큰 나무 사이로 커다란 한옥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촘촘히 쌓인 청색 기와 아래 나무로 된 현판이 걸려 있었다. 고급스러운 한지가 발린 분합문 양옆으론 청사초롱이 달려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 줄지어 놓여 있는 장독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가 열린 문 사이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 보안 점검 마쳤으니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지배인은 우리를 어느 장지문 앞까지 이끌었다. 막 그 문을 당겨 열려고 했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며 형의 이름을 불렀다.

“정해일.”

어……?

남자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내 머릿속엔 물음표와 느낌표가 수없이 떠올랐다.

남자는 내가 일하는 와인바에 자주 오던 손님과 무척 닮아 있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코트를 선물해 준 바로 그 남자.

‘……!’

성큼성큼 걸어 더 가까워졌다. 닮은 게 아니었다. 오늘 오찬 약속 상대라던 그 문 전무가 바로 그 손님이었다.

“빨리 왔네?”

“지금 막 왔어.”

“이쪽은…….”

내가 어리석었다. 고개를 숙이든 뭘 하든 해서 얼굴을 숨겼어야 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굳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들키면 안 되는데……!’

남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알아챈 듯 눈이 둥그레졌다.

“어어?”

그의 입에서 기어코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쩌지, 어쩌지……. 온몸에서 식은땀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내가 몰래 아르바이트하는 곳 단골손님이 여기에, 눈앞에 나타나다니. 거기다 형과도 아는 사이라니.

자연스레 반말을 하며 인사하는 모양새를 보니 그냥 사업 파트너 정도가 아니라 꽤 막역한 사이인 듯싶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남자의 입에서 다음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팀 신입 사원 서도운입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숙였던 허리를 들자 남자는 여전히 놀란 낯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손끝이 저려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초조한 얼굴을 하고 형을 힐끔거렸다. 들킬까? 들킬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가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사선으로 피했다.

“웬일로 김 실장이 안 오고?”

형이 나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하던 찰나 손님이, 아니 문 전무라는 분이 그 틈새를 파고들듯 물었다. 나는 그제야 다시 시선을 똑바로 돌릴 수 있었다. 다시 형 눈치를 한 번, 그리고 문 전무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남자는 형과 시선을 마주한 상태로 흥미 가득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아주 짧게, 정말 찰나의 순간에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거둬들였다.

이건 혹시…… 모른 척해 주려는 건 아닐까?

“신입 교육차.”

“아아, 어어……. 신입 사원이었구나.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 같아서.”

처음 보는 얼굴!

남자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비밀을 지켜주려는 걸까? 제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다.

이미 형에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고, 코트는 아르바이트하는 곳 사장님이 주신 것이라고, 거기다 동생분이 입던 걸 받은 거라고,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여기서 내가 아르바이트도 여전히 하고 있고, 코트도 이 손님께 새것을 선물 받은 것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형은 나에 대한 신뢰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지워버릴 게 분명했다. 그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화난 형이 어떤 식으로 화를 낼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 전무는 더 태연하게 굴려는 듯 악수를 청하며 손을 척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가방을 냉큼 왼손으로 바꿔 들고는 악수했다.

“안, 안녕하십…….”

“안, 안녕?”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을 달달 떨다가 그만 말도 더듬어 버렸다. 그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놀리듯 말했다. 당황해 얼굴이 점점 빨갛게 익어갔다.

그때 내 손을 잡고 끌어내린 것은 형이었다.

“무례한 짓 그만해.”

“죄송합니다.”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긴장해 말을 더듬었을 뿐 무례하게 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형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나는 시선을 땅으로 처박았다.

형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돌이 떨어진 듯 어깨가 무거워졌다. 괜히 거짓말했다. 무섭다는 이유로 한 번 속이고 나니 그 뒤로 거짓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저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지도 못하고 이렇게 벌벌 떨 거면서,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거짓말을 한 걸까.

착잡함이 온몸을 감싸들었다. 시무룩하게 내려간 입꼬리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차 안에서 칭찬을 받고 신났던 그 기분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날아가고 없었다.

“서 비서님도 같이 식사하겠습니까?”

방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고 있는데, 문 전무가 돌연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저 은근하게 쳐다보는 눈빛, 분명 날 놀리는 것이다.

“아닙니다, 두 분 편히 식사하십시오.”

“배고플 것 같은데.”

“저는 따로 마련된 곳에서…….”

나는 어물어물 대답하다 구원의 손길을 바라듯 형을 쳐다보았다. 그 간절함을 들어주기라도 하는 듯 그가 턱짓했다.

“가서 식사하세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나는 혹여나 붙잡을까 봐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편안한 식사 되십시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문 옆에 서 있던 종업원이 문을 닫았다. 타악. 상황이 종료되는 소리였다. 아니, 아닌가.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문 전무가 계속 비밀을 지켜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체념했다.

나에게 마련된 식사 자리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다. 놀라고 긴장했는지 다리도 후들거렸고, 식은땀이 공기에 날아가며 몸이 차게 식었다. 몇 번이고 손을 주무르며 자리에 앉았다.

“바로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못 드시는 음식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어, 오이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사라지고, 음식은 빠르게 나왔다. 맛깔나게 차려진 한정식 일인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감에 절로 식욕이 동해야 함이 맞는데, 어쩐지 입맛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지나온 복도 쪽을 힐끔거렸다. 그런다고 해서 저 방 안의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얹힐 것 같은 기분에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종업원에게서 형이 있는 방에 식후 차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리에 앉아 잠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코트를 팔에 말아 쥐며 일어났다. 기사님께 차를 대기시켜야겠다고 말한 뒤 형이 들어간 문 앞으로 가서 기다렸다.

실장님께 곧 복귀한다는 연락을 드리고 있는데,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는 재킷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구두를 신었다.

그의 뒤를 이어 문 전무가 나왔다. 지금 당장 나의 모든 관심과 걱정이 쏠려 있는 남자. 과연 저 안에서 그 얘기를 했을까, 아니면 비밀에 부쳤을까.

사업으로 바쁜 두 사람이 고작 나 따위의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문 전무는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네?’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는 나에게 눈가를 짧게 찡긋거렸다.

‘비밀로 지켜줬다는 뜻인 것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문 전무는 끝까지 별다른 말 없이 떠났다. 문 전무가 반대편 문으로 나가고 나서 우리도 발을 옮겼다. 차가 대기되어 있을 문 쪽으로 걸어 나가자 종업원이 양옆으로 문을 당겨 열어주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서비스에 움찔움찔 당황하는 버릇도 고쳐야겠다.

“식사는 맛있게 잘 하셨습니까.”

형의 빠른 걸음을 따라붙으며 의례적으로 물었다.

“네.”

형은 짧게 답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나도 그를 따라 뒷좌석에 올랐고,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의 표정은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에도 눈이 달린 것인지 귀신같이 내 시선을 알아채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무릎에 올려둔 코트를 쥐었다.

“……호텔로 갑시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말했다. 기사는 능숙하게 방향을 돌렸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형이 팔을 창틀에 기대며 이마를 매만졌다. 하긴, 급한 일을 막 넘긴 참이라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스케줄을 점검했다. 회의도 없고 외부 일정도 없었으니 곧장 퇴근해도 상관없었다.

‘호텔에 들렀다 회사로 가면 3시는 훌쩍 넘어 있겠지. 도착해서 실장님 뵙고 보고서를 마저 작성한 다음에, 아, 대리님께 프로그램표 검사받고…….’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쭉 정리했다. 오늘은 잘하면 야근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실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는데, 형의 손이 뻗어와 내 핸드폰을 집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물 흐르듯 흘러간 상황에 당황할 새도 없이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작동시킨 건지 앞 좌석과 뒷좌석을 가르는 차폐막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완벽하게 틈과 맞물리는 것까지 멍하니 보고 있는데, 형이 나지막이 물었다.

“문 전무를 압니까.”

“네?”

멍청하게 되물었다. 안다고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차폐막이 생기니 갑자기 주변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목소리조차도 짧게 뻗어 나갔다가 금방 차체로 흡수되는 듯한 기분…….

“아……!”

멍하게 다른 생각을 하는 나에게 마치 부드러운 경고라도 주는 듯이 형이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왼손을 뻗어 무릎을 공 굴리듯 매만진 형이 손을 뱀처럼 움직여 코트 밑 허벅지 위로 가져갔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꽉 쥐었다. 아프게 한 번, 그러고는 쓰다듬듯이 한 번 스윽 문지른다.

윽……. 급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덜덜 떨렸다. 나도 모르게 코트를 부여잡으며 다리를 오므리자 오히려 그의 손을 다리 사이에 넣고 꽉 조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형에게서 짧게 웃음이 터졌다.

“힘 풀어요.”

“읏, 으…….”

“다리 벌리세요.”

형이 명령했지만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몸을 만져 오는 그의 의중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힘을 빼자 그는 힘을 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놀라서 숨을 헉 들이켰다.

“가까이.”

그 한마디에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옆으로 붙었다. 그 바람에 절로 코트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간격을 떼고 앉자 그의 손이 더 깊게 들어왔다.

“이, 이사님. 왜…….”

허벅지 안쪽 살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의 손날이 자꾸만 내 중심을 은근하게 누르고 스쳤다.

“간지러워요…….”

그의 눈치를 봤다. 형은 창틀에 팔을 괸 상태로 나를 보고 있다가 으음, 하고 낮게 소리 내더니 몸을 바로 했다.

“잘 만질 수 있게 무릎 위로 올라와요.”

“…….”

“어서.”

그가 재촉했다. 나는 앞 좌석을 힐끔거렸다. 차폐막으로 막혀 있어 기사님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이 모습을 누군가 볼 것만 같고, 대화를 들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겁이 났다. 도로 한복판,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나는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 형의 채근으로 몸을 움직였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자세에 부끄러워졌다. 그와 마주 보는 자세로 조심스레 그의 무릎쯤에 엉덩이를 내렸다. 엉덩이에 닿는 단단한 허벅지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긴장했습니까.”

“앞에서 들으면…….”

“안 들려요.”

정말 안 들리는 게 맞을까, 혹시라도 들리면 어떡해야 하지.

차마 어깨를 잡을 수가 없어 형의 어깨 뒤 시트를 짚었다. 내가 대충 자세를 잡자 그가 허리를 잡아 진득하게 눌렀다. 내가 제대로 앉게 만든 뒤 다시 손을 움직여 엉덩이를 쓸기 시작했다.

손톱을 세워 바지를 찢을 듯이 쥐고, 금세 손아귀를 빠져나간 살들을 다시 꾸욱 주무르다 자연스레 허벅지로 옮겨왔다.

엄지로 여린 살을 쿡쿡 눌러가며 애무하는 손길에 자꾸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 좌석이 신경 쓰여 이를 악물어 보아도 비음이 흘렀다.

“원래 그렇게 잘 빨개집니까?”

그때 형이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내 얼굴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사님이 자꾸, 만지시니까요.”

“문 전무 보고도 얼굴이 빨개지던데요.”

“그건…….”

“난 또, 이전에 몸이라도 팔았던 상대인 줄 알았지.”

너무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그분과 그런 적 없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냉큼 대답이 튀어 나갔다. 아르바이트하는 바에서 종종 마주친 게 전부인 사람인데, 내가 좀 아는 듯 행동했다고 이렇게 엮이게 되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형이 그런 추측을 한 게 당연해 보였다. 그가 아는 나는 몸을 파는 사람이었고, 그 상대는 문 전무 같은 사람들이었으니.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신입 사원이 문 전무를 알고 있다면 그에게 몸을 팔았다고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그럴듯했다. 조금 씁쓸했지만 그렇게 혼자 생각했다.

“그럼 누구랑 했었어요.”

“아윽…….”

형이 엉덩이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찰싹 때리며 물었다. 누구와 잤냐고? 지어내서라도 누구인지 대답해야 하는 상황인 걸까?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왜요. 지금까지 상대가 너무 많았어?”

“아닙니다. 그냥, 그냥 술에 취해 있어서 잘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나니 입 안이 썼다.

“약도 했어요?”

“아마…….”

“아주 난잡하게도 살았네.”

형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나를 혼내는 것만 같았다. 난잡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기에 억울함이 울컥 치밀었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쪽 눈썹을 짧게 꿈틀거리며 그가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힘에 사선으로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올라와 그의 눈과 마주쳤다.

“으응, 아파요.”

“아프라고 한 거니까.”

나는 차가 멈출 때마다 혹시 목적지에 다 도착했나 신경 쓰고 있었다. 문 전무와 만났던 장소에서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데, 혹여나 도착한 거라면 열리지 않는 뒷좌석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출 줄을 모른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허리를 부드럽게 쥐더니, 갈비뼈 부근을 매만지다가 손끝으로 유두 근처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등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읏, 화나셨습니까?”

“화나 보여요?”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간지러워서 상체가 자꾸만 굽어졌다. 피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는지 다시 엉덩이로 손이 날아왔다.

“흐윽!”

“화났다면요.”

형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는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말아 넣어 깨물며 고민하다가 곧 그가 원하는 대답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제가…… 호텔에서,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은 호텔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누가 볼까 걱정하며 바깥을 흘긋거렸지만, 형은 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만 해도 매섭게 손을 날렸다. 둔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운전석까지 넘어갈까 봐 그게 또 걱정되었다.

호텔에 멈춰 서고서도 판판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극하던 형 때문에 결국 새빨개진 얼굴로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누가 이상하게 쳐다볼까 싶은 괜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신없이 그가 향하는 대로 뒤꽁무니만 쫓았다.

미리 호텔에 보고했어야 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이 갑자기 등장한 이사의 모습에 직원들 모두 놀란 기색을 보였다. 당황하며 알은체를 해오는 직원들에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 위의 호텔 방에서 우리가 뭘 할지 알고 있으면서 저리 태연하게 구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풀어줄지 기대되네.”

형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의 손 안에서 풀어지는 넥타이를 멍하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물었다.

“왜 화나셨는지 알려주시면…….”

“왜 화났을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재미있다는 듯.

“제가 너무…… 난잡하게 살아서 그러십니까?”

“……씻고 나오기나 해요.”

틀렸구나. 그럼 뭐지…….

형은 내가 거실에 멈춰 서 있는 사이 안쪽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머지않아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아닌 척 힐끔거리던 시선을 거두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재킷을 벗으면서 내 코트를 그의 차에 두고 내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중에 찾으면 되겠지? 괜히 지금 찾다가 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는 싫었다.

의식적으로 한숨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작게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차에서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됐다. 그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왜 화가 났는지도, 하물며 그가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라도 하는 건데…….”

웃긴 소리였지만 이런 쪽도 공부했으면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능숙한 척을 해버리려니 눈앞이 깜깜했다. 회계 공부와 더불어 할 게 늘었다. 결국 머리를 몇 대 쥐어박다가 나도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욕실 밖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자 상대적으로 서늘한 공기에 몸이 떨렸다. 이번엔 저번과 달리 옷을 입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알몸인 채로 형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벌써 나왔는지 서서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뿌리고 있었다.

젖어 내려앉은 머리카락, 샤워 가운이 감싸고 있는 탄탄한 몸, 쭉 뻗은 다리까지. 나는 정신없이 그를 뜯어보기 바빴다.

“……이리 와요.”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그가 말했다. 입술에 매달린 담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담배 연기도 함께 주변으로 흩어졌다. 나는 각오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게 처음도 아닌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꾸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형의 눈빛 때문일 것이다. 명령할 때 보이는, 푸르게 내려앉은 눈이 나에게 더한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볼과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내어 재떨이에 비벼 끌 때까지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사선으로 틀며 눈가를 문질렀다.

“부끄러워요?”

“조금……. 읏!”

형이 갑작스럽게 팔을 뻗어 엉덩이 한쪽을 꽉 쥐었다. 몸이 조금 앞으로 쏠린 탓에 절로 안기듯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게 되었다. 혹시나 그가 불쾌해할까 봐 급히 몸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오히려 허리에 팔이 감겨왔다.

“만지기 좋네요. 살결이 부드러워서.”

주먹을 꼭 쥐어 그의 가슴에 얹은 자세로 품에 안겼다. 귓가로 나직하게 흘러드는, 숨소리가 반쯤 섞인 그의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목을 움츠렸다. 꼭 그의 쇄골 부근에 이마를 문질러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왜 다들 이 몸을 좋아했는지 알겠네.”

형은 한쪽 손을 조금 더 내려 허벅지 뒤쪽으로 뻗었다. 말랑한 살을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가 다리를 조금 잡아 벌렸다.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서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으읏, 흐응…….”

“힘 풀어요.”

그가 엉덩이 사이를 가볍게 문지르며 잡아 벌렸다. 구멍 위를 매만지는 손길이 간지럽고 부끄러워 몸에 힘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 몸을 뜻대로 만질 수 없으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엉덩이를 얻어맞을 게 무서워 나는 최대한 힘을 뺐다.

꽉 다물려 있는 구멍 위를 그의 손가락이 힘주어 눌렀다. 손끝이 살짝 밀려들어 오는 감각에 파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젤을 바르지 않아서인지 뻑뻑했다. 그도 한 번에 넣을 생각은 없었는지 곧 손을 뺐다.

이번엔 손바닥으로 등허리를 넓게 쓸며 올라왔다. 척추를 더듬거리는 감촉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이런 곳을 만져도 간지럼을 탈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한숨처럼 가느다란 신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기분 좋아요?”

“네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옷 위로, 만져 주시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그러자 형이 짧게 웃었다. 듣기 좋은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지금은 화나지 않은 것 같다. 조금 안심되는 마음에 그의 몸에 편히 기대며 나도 살며시 그의 허리께를 안듯 잡았다.

그의 샤워 가운 아래로 힘을 받은 성기가 느껴진다. 아랫배에 닿은 그의 것이 딱딱하게 존재를 드러낼 때마다 내 중심부로도 자꾸 열이 모였다.

형이 내 몸을 살짝 떼어냈다. 주제도 모르고 한껏 이마를 비비고 있던 나는 열에 들뜬 얼굴을 무방비하게 내보였다. 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내 몸을 구경하는 듯했다. 어깨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게 우습다는 듯 조금 쓰다듬다가 힘주어 내리눌렀다.

“빨아봐요.”

나는 부드러운 카펫 바닥을 한 손으로 짚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서둘러 자세를 잡고 살짝 매여 있는 그의 샤워 가운 허리끈을 풀어 내렸다.

두꺼운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샤워 가운 아래서부터 발기하던 그의 것은 한 손에 쥐기 버거울 수준이었다.

몇 번 만져도 보고 입에 물어도 본 것이지만 볼 때마다 적응이 어려웠다. 아랫부분을 잡고 살짝 손으로 흔들며 크기를 가늠했다. 그의 것이 목까지 들이닥쳤을 때의 그 압박감이 벌써 선연했다.

슬쩍 시선을 올려 형의 눈치를 보고는 찢어지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혀를 내밀어 적셨다. 그리고 귀두 끝부분에 입을 맞췄다.

형은 내가 입을 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내 뒤통수에 손을 뻗어왔다. 가볍게 쓰다듬기만 하는 손길이었지만 곧 흥분하면 콱콱 힘을 주어 박을 것임을 알았다.

나는 혀를 내어 귀두 아랫부분을 힘주어 눌렀다. 그러곤 곧 입을 크게 벌려 윗부분을 담았다.

“아읍…….”

벌써부터 버거웠다. 입천장을 잔뜩 누르고 긁는 굵은 성기 때문에 순식간에 입 안이 뻐근해졌다.

이로 긁지 않게 조심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혀끝으로 귀두의 파인 부분을 문지르며 쪽쪽 빨아들였다.

“하…….”

“응, 으읍…….”

고개를 틀어가며 최대한 안쪽으로 담아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숨이 막히는 것은 둘째 치고, 입을 그렇게 크게 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성기는 계속해서 힘을 받아 커지는 중인데, 입은 그에 익숙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잠시 빼내 혀로 길게 핥아 올렸다. 도무지 담기 어려운 아래쪽은 양손으로 부드럽게 쥐어 자극했다.

형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성기에 난 힘줄을 따라 베어 물듯 입술을 우물거리자 그는 참기 힘들었는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내쉬었다.

“잘 빠네.”

칭찬하듯 말하며 내 눈가를 매만졌다. 볼을 가볍게 쓸고 만지는 손길에 눈이 깜빡깜빡 감겼다. 그의 손이 닿은 광대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더 깊게 삼켜.”

내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핥자 형이 허리를 밀며 말했다. 타액으로 젖어 미끄러지듯 입 안으로 쓸려 들어간 성기 끄트머리가 순식간에 목구멍을 찔렀다.

우윽, 엇갈린 숨을 뱉어낼 새도 없이 한 번 더 콱 밀려 들어왔다. 형은 내 머리를 쥐어뜯을 듯 거세게 쥐고는 허리를 움직이며 추삽질하기 시작했다.

“읍, 크읍, 흑……!”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먼저 예상했음에도 전보다 나은 감이 전혀 없었다. 너무 버겁고, 벌어진 입과 목이 아프기만 했다.

그의 것이 퍽퍽 목젖을 때리며 더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목 안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나도 자꾸만 기침이 터져 나와 그걸 참느라 성기를 막듯이 입을 꾹꾹 조였다.

“하……. 더 세게 빨아.”

형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쯤 되면 나는 정신을 반쯤 놓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격한 자극에 그저 혀를 깔고 입을 벌리기만 했다.

눈물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술을 오므렸다. 기도가 막히는 감각을 참아내고 성기를 자극해 댈 정신이 없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듯이 나는 작게 도리질 쳤다.

그게 더 자극되었던 모양인지 행위가 더 거세졌다. 성기를 아예 입 바깥까지 쭉 빼냈다가 벌어진 입으로 쿠욱 밀어 넣기까지 하며 내 혼을 빼앗았다.

형은 포기한 듯 나에게 더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허릿짓과 손길은 무자비해져만 갔다. 끝으로 달려가는 듯 콱콱 거세게 치받았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고, 자꾸만 눈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내 뒤통수를 꾸욱 누르며, 결국 목 저 안쪽 깊은 곳에서 사정했다.

“컥, 크읏……. 흐읍…….”

입 안 가득 정액이 쏟아졌다. 형의 허벅지를 마구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하게 선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게 양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누르는 힘에 결국 굴복하고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의 손아귀 힘이 약해지고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형이 싼 정액을 흘릴까 얼얼하게 벌어졌던 턱을 서둘러 다물었다. 입술에 닿았던 성기가 춥, 하는 야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자 그 사이로 길게 실처럼 타액이 이어졌다.

“삼켜요.”

형은 성기를 쥐고 내 입술 위를 두어 번 때렸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번 간신히 삼켰으나 어김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제대로 다 마셔야 화가 풀리지.”

그가 허리를 숙이더니 전처럼 목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입에 남아 있던 것을 모두 목구멍으로 밀어 삼킬 수 있었다.

계속해서 자극당한 목구멍이 무척이나 쓰라렸다. 텁텁하고 아파서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형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서랍으로 향했다.

얼굴에 싸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입가에 묻은 끈적이는 것들을 훔쳐 닦았다. 그리고 그가 보지 않는 사이 재빠르게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이 젤과 콘돔을 들고 와 침대 쪽으로 턱짓했다. 침대에 누우라는 신호였다.

해일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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