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조심스럽게 시트를 짚으며 침대에 올라갔다. 헐벗은 몸에, 이상하게도 반쯤 선 성기가 달랑거리는 게 너무 부끄러워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다리는 최대한 오므렸다.
형은 바로 자세를 잡은 게 마음에 든 모양인지 내 어깨부터 날개뼈…… 척추를 따라 엉덩이까지 손끝으로 쓸었다. 그 감각에 오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젤 튜브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허리 떨어뜨리지 마세요.”
“읏, 네…….”
그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엉덩이 한쪽이 확 잡혀 벌려졌다. 그리고 곧바로 회음부로 젤이 뚝뚝 떨어졌다. 차갑고 물컹한 것이 엉덩이골을 간지럽게 타고 흘러 고환까지 내려갔다가 시트 위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민감한 부위를 느릿하게 긁는 것 같은 감촉에 발을 꼼지락대며 뒤를 움찔 조였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그가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목구멍이든 뒷구멍이든 다 좁아서는.”
“아윽…….”
손가락 하나가 서서히 진입해 들어왔다. 엄지 한 마디가 들어와 얕은 안쪽을 둥글게 돌려 눌렀다. 가느다란 실 같은 흥분감이 목덜미부터 머리끝까지 이어졌다.
형은 곧 손을 빼내고 다른 쪽 손을 움직였다. 허벅지살 사이에 자리해 살짝 뭉개진 고환을 간지럽게 손끝으로 긁어 올렸다. 흐른 젤을 닦아 올려 곧장 구멍으로 가져가더니 몇 번 그 위를 문지른 뒤 쿡, 하고 깊게 찔렀다.
“흐으!”
아파서 그랬는지, 아니면 놀라서 그랬는지 순간 몸이 앞으로 쏠렸다. 곧바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그는 들어갔던 손가락을 단번에 빼내고 오른쪽 볼기를 찰싹 때렸다. 자세 제대로 잡으라는 낮은 경고와 함께 다시 손가락은 쑤욱 들어왔다.
몸을 제대로 고정하기 위해 힘을 줬더니 본의 아니게 뒤를 꽉 조였다. 그래서인지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도 크게만 느껴졌다. 짚고 선 팔과 옆구리에 자꾸만 소름이 올랐다.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 더 늘었는지 볼기를 잡아 벌리는 힘이 조금 더 세졌다. 내벽을 확 긁고 빠지는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자꾸 허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다리를 더 벌리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권유하듯 얘기했지만 실은 벌리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슬금슬금 무릎을 움직여 어깨너비로 벌려 섰다.
“읏, 흐윽! 으응!”
전과 다르지 않은 무자비한 손길이 이어졌다.
내가 아픔과 쾌감의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사이 손가락이 몇 개까지 밀려들어 갔는지 모르겠다. 벌어진 구멍이 홧홧하게 아파왔다. 내벽을 넓히려고 하는 행위인데 뒤는 익숙해질 줄을 모르고 자꾸만 손가락을 조여대기 바빴다.
형은 젤을 또 부었다. 넘칠 만큼 회음부에 떨어진 젤이 그가 아래를 쑤실 때마다 찌걱찌걱, 하는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뭘 했다고 벌써 세웠어요.”
뒤를 벌리던 손가락을 모두 빼내며 그가 말했다. 기진맥진해져 시트에 고개를 처박자 정말 다리 사이로 완전히 발기한 내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트에 얼굴을 완전히 묻어버리고 웅얼웅얼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는데, 허락 없이 싸면 혼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 뒤로 콘돔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려 번뜩 고개를 들었다. 벌써……? 주제넘게도 그런 생각이 훅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 이사님.”
이만큼 풀었어도 분명 아플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잤던 처음이 나았지, 지금은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이 들어올지 알고 있다 보니 한참은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더…… 풀어주시면…….”
형에게 초짜인 티는 내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품어 본 그의 것이 정말 너무 컸다.
형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라며 나는 엉덩이를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손가락으로 쑤셔지던 구멍이 벌써 다물려 옆으로 길게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형은 잠시간 아무 말도 없었다.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화가 난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엉덩이를 살살 흔들었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졸랐어요?”
“네? 으앗.”
몸이 순식간에 똑바로 돌아갔다. 팔뚝을 잡은 그가 내 몸을 한 번에 돌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혼자 해봐요.”
“……?”
“똑바로 앉아.”
그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허리를 세운 뒤 엉덩이를 당겨 그대로 슬그머니 내렸다. 발뒤꿈치 위로 엉덩이가 뭉개지는 자세로 꿇어앉아 형의 눈치를 봤다. 앞을 만지라는 건가? 아니면 뒤를……?
“다리 벌리고 앉아요. 뒤 쑤시기 좋게.”
형은 근처 탁자로 걸어가며 그리 말했다. 그제야 그가 말하는 자세를 파악하고는 무릎을 세워 양옆으로 벌려 앉았다. 사타구니가 다 내보이는 자세에…… 허벅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형이 내 발 근처로 젤이 들어 있는 튜브를 던졌다. 그러고는 또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가 풀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이렇게 시간을 주는 게 어디냐 싶어 튜브를 주워 들었다.
손가락 쪽에 쭉 짜낸 다음, 한 손을 뒤로 보내 몸을 지탱하며 엉덩이 뒤쪽으로 깊게 앉았다. 이미 충분히 젖어 있는 회음부로 손을 가져가 곧장 검지를 밀어 넣었다.
“읏, 아……. 아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대뜸 손가락부터 넣었지만, 정말 생소한 감각에 절로 발가락이 굽어졌다.
아래에 내 손을 직접 넣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진 넣을 일도 없었고, 살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행위였다.
손가락을 구부려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자 그 감각이 또 미칠 것 같았다. 미끈하게 젖어든 내벽이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는 것이 너무 이상하고 부끄러웠다.
“후으으…….”
억누른 한숨을 흘리며 시선을 들어 형을 힐끗거렸다. 샤워 가운을 걸친 차림으로 탁자 앞에 기대선 그는 담배 연기 사이로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치자마자 움찔 손가락을 움직였는데, 그 순간이었다.
“아응……!”
손끝이 안쪽 어딘가를 훅 스치자 배가 확 조여들었다. 뒷덜미가 찌릿 당기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빼냈다. 하지만 제대로 안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기에 다시 찔끔해서 볼기를 벌리며 손가락을 천천히 넣었다.
“으, 아응……. 흐으!”
이상했다. 정말 이상한 감각이었다. 손가락으로 내벽을 이리저리 문지르다가 갈고리처럼 구부려 안을 긁어내리면 등 뒤가 오싹해지는 것이다.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자꾸만 발가락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겼다.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탱탱하게 선 성기가 손목에 비벼지는 것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계속 그 부분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뒤 넓히라고 했지, 자위하라고 했습니까?”
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꿈에서 깨어나듯 번뜩 눈을 뜨자 그가 어느새 내 앞으로 걸어와 있는 게 보였다.
앞은 만지지 않았다. 뒤만 계속 문질렀을 뿐이다. 그가 무슨 영문으로 자위하지 말라는 것인지 생각하다 멍하게 사과를 흘렸다.
“죄송합…….”
“계속하세요.”
“……읏.”
“손도 이렇게 작아서. 손가락 두 개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의 경고에 얼른 두 손가락을 한 마디 넣었다. 그치지 않고 약지를 구멍 근처로 가져가 주변을 문질렀다.
그 순간에 문득, 전에 형이 이곳…… 구멍의 색이 예쁘다고 했던 게 스치듯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해지다 못해 머리가 핑 돌았다.
살짝 힘주어 밀어 넣자 구멍이 조금 더 벌어지며 세 손가락을 꾸물꾸물 삼켰다. 최대한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하며 다시 열심히 뒤를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은 조금 전의 희미한 쾌감을 기억하고 자꾸만 손가락을 그 부분으로 이끌었다. 손끝으로 내벽을 굴리듯 문지르자 절로 머리가 쭈뼛 서며 입이 벌어졌다.
“아아……. 하으, 우웃, 응…….”
찌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선 성기 끄트머리에 투명한 액체가 맺히기 시작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맺히다 못해 귀두를 타고 주룩 간지럽게 흘러내리고 나서야 성기가 이만큼이나 발기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영 말을 안 듣네.
형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제대로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저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며 자극하고 있었다. 어느새 커다란 손 안에서 흉흉하게 세워진 기둥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자랑했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오자 성기가 눈앞까지 붙었다. 뜨거운 귀두가 볼 위를 쿡 찌르고 문질러졌다. 혹시 다시 입에 담으라는 뜻인가 싶어 더운 숨을 뱉으며 물었다.
“빨까요……?”
“뒤나 제대로 푸세요.”
가소롭다는 말투였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서툰 손길이긴 했다. 손가락 세 개만 겨우 넣고 깔짝거리는 수준이었으니 이상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능숙함을 연기할 정신이 없었다. 그의 젖은 성기가 얼굴을 더럽히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질꺽질꺽……. 중지가 어느 한쪽을 실수로라도 긁어내리면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어금니가 앙다물리며 무릎이 절로 확 모였다.
“후읏!”
손을 쑥 빼낸 덕인지 다행히도 사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이 발발 떨렸다.
“하아……. 정말 미치겠군.”
형은 팔에 걸린 샤워 가운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몸을 밀어 눕혔다. 윽! 시야가 훅 천장을 향함과 동시에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오늘은 울지 마세요.”
강한 악력으로 허벅지살을 눌러 벌린 그는 콘돔을 쓰지도 않은 성기를 구멍 위로 내렸다.
“엉덩이 몇 대로 못 끝낼 것 같으니까.”
마치 눈물로 자신의 흥을 깨지 말라는 듯,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경고하듯 속삭였다.
“아으윽……!”
형은 말을 끝으로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열심히 풀려고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입구는 자꾸만 움찔움찔 조이며 진입을 방해했다.
최대한 힘을 풀려고 해도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구멍과 성기 모두에 젤이 축축하게 묻어 있었지만 두툼한 앞머리를 한 번에 다 담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허리를 떼는가 싶더니 다시 위를 꾹 눌러왔다. 억지로 좁은 곳을 비집어 열자 주름이 서서히 펴지며 귀두를 삼키기 시작했다.
“아프, 아으응……!”
기어코 아프다는 소리가 터져 나갔다. 힘만 있었다면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괜한 엄살을 부린다고 쓴소리를 들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아팠다. 천천히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아랫도리가 마비된 것처럼 아렸다.
“힘 빼.”
“흐읏!”
구멍이 조금씩 더 이완되며 귀두를 받아들였다. 간신히 귀두만 삼켰을 뿐인데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형도 내벽이 조이는 힘에 힘들었는지 목 안으로 긁는 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몸짓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모으자 허벅지를 확 잡아 벌리고 고정하듯 눌렀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움직여 남은 성기를 넣기 시작했다. 꽉 막힌 듯이 좁은 안쪽을 뚫어대듯 단번에 허리를 확 쳐올렸다.
“아아윽! 아……아!”
아래를 밀어붙이는 힘에 절로 허리가 튀었다. 버둥거리듯 등을 움직여 위로 조금 기어가기가 무섭게 그의 팔이 단단하게 허벅지를 감싸듯 붙잡았다.
이어서 또다시 퍼억, 내벽을 찔렀다.
“흐으, 으웃……!”
내가 손을 넣어 깔짝거리던 수준을 단번에 뛰어넘어 배 속을 꽉 채워 들어왔다.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일이었지만 전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나 아플지 알고 있어서 더 두려운 마음에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긴장 풀어요.”
“흐윽, 웃, 살살……. 으응!”
“후……. 아직 다 넣지도 않았어.”
그는 내 허벅지를 당겨 안으며 허리를 거세게 쳐올렸다.
“……!”
나는 신음도 내지 못했다. 상체가 허공으로 떠오를 정도로 허리가 휘어졌고, 고개를 젖히며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들어왔는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배가 무서울 정도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의 것이 어느 정도로 큰지 알고 있기에 함부로 속단할 수가 없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정말 내가 울려고 해서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주 생리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쏟아내기엔 정신이 없었고, 형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다행히 흘러내리진 않았다. 최대한 눈물이 나지 않도록 몸에 힘을 풀고,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심호흡했다. 속눈썹이 조금 젖는 선에서 그치는 듯했다.
그 또한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숙였던 허리를 폈다. 흉부가 부풀었다 가라앉는 모습이 희미한 시야 사이로 보였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니 위로 고정되듯 넘어가며 이마가 보였다.
“…….”
나도 모르게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형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얼굴 근처로 다가가기 무섭게 그는 허리를 뒤로 빼더니 단숨에 안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아으윽! 아!”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집중해.”
“흐으……. 으으…….”
무릎을 접어 다리를 누르며 내 위로 무게를 실었다. 아주 조금씩, 내벽을 잔뜩 벌리며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주름 하나 없이 홧홧하게 구멍이 벌어졌다. 의지와 반대로 자꾸만 움찔거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얼마나 두꺼운지 가늠되는 것만 같았다.
있는 대로 허리를 밀어 넣던 형이 어느 순간 행동을 멈췄다.
“후으…….”
“하, 지금…….”
비웃듯 짧게 웃더니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내 뱃가죽 위로 손을 올렸다. 손끝이 간지럼 태우듯 배꼽 언저리를 쓸더니 어느 한곳을 꾹 눌렀다.
“하아! 아아아!”
“윽, 씨발…….”
갑작스러운 자극에 등허리로 소름이 삐죽 솟았다. 나도 모르게 뒤를 확 조이며 허리를 떨자 형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여기까지 들어왔나 보네.”
“아아……. 아으으…….”
“튀어나오는 거, 보입니까?”
나는 지금 안에 들어찬 것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그 위를 바깥에서 자꾸 쓰다듬고 누르니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았다. 그는 아예 배 위로 젤을 짜냈다. 그리고 엄지로 마사지하듯 문지르며 애무했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본격적인 행위는 시작도 않았는데 전기가 오른 사람처럼 떨었다. 아파서 풀 죽었던 성기도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형은 나에게 진정할 시간을 주듯 다시 허리를 뒤로 천천히 빼내었지만,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 발목을 부술 듯 강한 힘으로 쥐더니 빠른 속도로 허리를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아! 흐읏!”
“하아. 힘, 풀라고 했어.”
“아으윽, 흐응……! 살살, 아!”
턱턱 박힐 때마다 엉덩이에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다른 한 손으론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벌어진 구멍이 성기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을 감상하며 허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흐으으, 이사, 님……!”
귀두가 빠져나갈 때마다 내벽을 죽죽 긁어내렸다.
처음 할 때와는 분명히 뭔가 달랐다. 피부 아래, 아니 그보다 더 안쪽.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간질간질 끓어오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엉덩이가 찢어질 것 같았던 아픔은 점차 사라져 옅어졌다. 예민해진 몸 위로 아주 얇은 흥분감이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졌다.
그의 성기가 묘한 지점을 계속 스쳤다. 콘돔을 쓰지 않아서 그런지, 가장 은밀한 살과 살이 꽉 맞물렸다는 생각에 정신이 혼미했다.
아랫배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더니 그곳을 사정없이 퍼억 찌르고 미끄러지는 그의 것 때문에 허리가 절로 뒤틀렸다.
“하아!”
뒤가 조여들었다. 아니, 배 전체가 확 조여들었다. 아까 혼자 뒤를 풀어주다가 어느 지점을 스쳤던 때처럼.
“흐아, 아, 아! 아응! 읏……!”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을 버둥거리다 시트를 붙잡았다. 찢을 듯이 시트를 쥐어 당기다가, 다시 한번 안쪽이 쾅 들이박히자 손이 절로 펴지며 머리부터 온몸의 선단까지 전기가 내달렸다.
“생좆으로 박아주니 어때요.”
“흐윽, 제발. 아, 아아!”
“뒤로는, 후……. 전혀 못, 느끼는 줄 알았는데.”
이건 단연 콘돔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 몸도 전과는 달랐다. 저 깊은 해저에 깔려 있던 성감대가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분명 내 몸이…… 이전과는 달리 더 예민해져 있었다.
“아주, 꽉 조이네.”
그는 뒷구멍으로 대답하는 것 같다며 비웃고는 다시 퍼억, 매섭게 아래를 치받았다.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랑도 해봤어요? 네 좆, 써봤느냐고.”
“으흣, 흣, 아니요. 아…… 아!”
“앞은, 써보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벌릴 줄 알다니. ……요부가 따로 없군.”
형이 허릿짓하는 속도가 올라갈수록 내가 내지르는 소리도 커졌다. 허우적대던 손을 옮겨 내 발목을 붙잡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땀이 배어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한 번 미끄러졌다.
“흐응, 으! 살살……. 천천히, 흐윽……!”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배가 아팠다. 장기가 죄다 위로 밀려 올라갈 듯이 거세게 처박혔다. 나는 자꾸만 고이는 눈물이 흘러내릴까 걱정이었는데, 그는 열락에 들뜬 얼굴을 하고는 나를 내려다봤다. 반쯤 인상 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완성된 문장이 아니었으나 뒷말을 알 수 있었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네 몸이 이렇게 예민해서 혼자 흥분했다고. 그렇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아랫배부터 가슴까지 넓게 쓰는 감각에 오들오들 떨었다. 어쩌다 손가락이 유두를 스치기라도 하면 겹겹이 쌓인 흥분에 불이라도 지펴지는 듯 목뒤가 아찔해졌다. 그가 발딱 솟은 유두를 꾹 짓눌렀다.
“흐읏! 좋……아, 으응…….”
“좋아요?”
“아……아!”
엉덩이에 사타구니가 철썩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들이박혔다. 나는 결국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처음에만 아프고 그다음부턴 괜찮아지는 것인지, 쾌감을 알게 된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성기를 물어 삼켰다. 돋아난 힘줄까지 모두 느껴질 것만 같았다.
손끝 발끝까지 저려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정말 이렇게 달아오른 몸이 내 몸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우읏, 하아아……. 안, 아윽!”
츠윽, 츳, 츳. 접합부에서 젤이 질척한 소리를 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치대는 소리가 더 잘 들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성기 끄트머리에서 실처럼 체액이 질질 흘렀다. 성기를 타고 흘러 고환 아래로, 그리고 배꼽 근처로 떨어져 배 위를 난잡하게 더럽혔다. 나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눈물도, 성감도 더는 참기 어려운 지점까지 몰아붙여졌다.
“이사……님……!”
“울지 말라고, 윽, 말했어.”
“아앗, 흐, 못, 못 해. 못 참겠……. 아! 아아윽!”
나도 모르게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인지 버둥거리다 상체가 반 돌아갔다. 손으로 침대를 마구 긁고 기어가려고 했지만, 꽉 붙들린 하체는 뒤틀린 채로 그의 손에 의해 활짝 벌려져 있었다.
“이사님, 아, 흐으! 갈 것, 같아요. 아아! 아흐윽……. 아윽!”
허락 없이 싸면 혼날 거란 말에 몸이 덜컥덜컥 흔들리면서도 간신히 문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형은 무자비했다. 내가 느끼는 안쪽을 고스란히 찔렀다.
“아직이야.”
“흐으! 윽, 안, 쌀 것 같……. 하아!”
“하아, 안 그쳐?”
형은 돌아간 내 상체를 똑바로 눌러 눕혔다. 온몸의 감각이 다 아래로 몰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들끓었다.
곧이어 그가 두꺼운 기둥과 귀두까지 모두 빼낸 뒤 다시 찌르듯 안으로 콰악 파고들었다.
“아, 아아아!”
몸이 관통당한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 전신으로 쏟아지는 작열감에 목을 빼고 짐승처럼 울었다.
성기에서 팟, 터지듯 정액이 쏟아졌다. 울컥울컥, 덩어리진 정액이 배와 가슴까지 튀고는 성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으흐윽……!”
딱 죽을 것 같았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침대 위로 녹아내리고 싶어졌다. 안 된다면 마구 발버둥 쳐서 나를 옭아매는 간지러움에서 해소되고 싶었다.
속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억지로 고개를 틀어가며 시트에 문질러도 차마 숨길 수 없었다.
“흐으으으, 흐으아…….”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쳐올려지는 대로 흔들렸다. 몽둥이가 내벽을 짓이기는 감각에 사정하면서도 성감이 올랐다. 눈이 자꾸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아 억지로 깜빡거렸다.
그가 널브러진 다리 안쪽을 혀로 길게 핥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뒤를 꽈악 조였다.
“윽…….”
허리를 구기듯 접으며 그 위로 무겁게 허리를 내리눌렀다. 마침내 내 안에서 그가 사정했다.
성기가 정액을 토해내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내벽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예민하게 부어오른 곳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결국 나도 또다시 실처럼 정액을 흘리며 사정하고 말았다.
“아으으…….”
안쪽을 꽉 채웠던 성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사정했음에도 크기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아 내벽이 딸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귀두까지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형은 성기를 끝까지 잡아 빼내고 나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힘을 풀자 잡혔던 다리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활짝 벌어진 하얀 허벅지 위로 귀두에 묻은 정액을 닦듯 성기를 문질렀다.
“엉덩이가 얼마나 작으면, 후우. 싸준 걸 다 담지도 못하고.”
뒤로 조금 물러선 그가 엉덩이 사이를 보며 말했다. 다물리지 못한 구멍에서 정액이 울컥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선이 부끄러워 살짝 힘을 주자 벌어졌던 구멍이 오물오물 줄어들었다. 그 탓에 정액이 조금 더 흘러내렸다.
“이래서야 오늘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으흑!”
형이 손가락 두 개를 확 찔러 넣었다. 긁듯이 몇 번 피스톤질 하니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세 정액이 흥건하게 묻어 흘러나왔다.
“죄송합, 니다.”
그는 다시 다리 한쪽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엉덩이 아래, 허벅지와 이어지는 바로 그 부분에 있는 점을 엄지로 긁듯이 꾹 눌렀다. 읏……. 사소한 행동에도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화가 풀리게 해봐요.”
“흐, 으…….”
“다른 놈들한텐 어떻게 아양 떨었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팔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엉덩이를 높게 쳐든 자세로 엎드렸다.
어깨와 달아오른 볼을 시트에 대고 양팔을 뒤로 돌려 엉덩잇살을 잡아 벌렸다. 주욱 벌어지는 구멍에서 정액이 툭툭 흘러내렸다. 박아달라는 듯이 엉덩이를 흔들며 그를 유혹했다.
“우읏…….”
동시에 눈물도 왈칵 쏟아졌다. 다행히도 얼굴을 침대에 처박고 있어 울음소리가 크게 나지 않았다.
얼마나 계속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호텔 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완전한 밤이 오려면 멀었다는 것을.
* * *
“……!”
나는 어금니를 악무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
벌떡 일으킨 상체가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쾅쾅 뛰던 심장이 진정되었다.
꿈에 형이 나왔다. 평소 꾸던 것과 다를 것 없었다. 형은 여전히 다정하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그런 형이 좋아 그저 웃으며 건반을 따라 눌렀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꿈은 끝난다.
얼굴을 쓸어내리고, 뻑뻑한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넓은 호텔 방 안의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형은 없었다.
무릎을 끌어모으자 하얀 시트가 바삭거렸다. 시트를 새로 간 것인가 생각했는데, 다시 살펴보니 어제 섹스했던 곳과는 조금 달랐다. 다른 방으로 날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
시선을 움직여 몸을 살폈다. 누군가 닦은 듯 어제의 질척한 흔적은 없었다. 형……이겠지?
시트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리를 타고 꼬리뼈까지 통증이 올라왔다. 순간 휘청거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듯 넘어졌다.
“아으으…….”
이젠 바닥에 박은 무릎까지 아팠다. 무릎에 호호 입김을 불며 몇 번 쓰다듬었다. 심기일전하듯 심호흡을 한 다음에야 옆의 티테이블을 짚고 일어설 수 있었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처음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몸이 땅겨왔다. 정말 미친 듯이,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눈을 꾹 감자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허락 없이 사정한 것으로 혼이 나고, 또 울어서 엉덩이를 맞았다. 그리고 다시, 형이 지칠 때까지 섹스했다. 형이 지칠 때까지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게 끝나기 전에 반 기절했으니까.
분명 어느 순간, 아픔이 가시고 쾌감만이 몸을 감쌌다. 뒤를 찌르는 성기가 내벽을 녹일 것만 같았던 그 감각. 하지만 그런 쾌락이 계속되자 반대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랫도리는 물론이고 온몸의 감각이 남아나질 않았다. 사정할 것이 없어 발기도 되지 못한 채로 달랑거리던 성기는 형의 손에 의해 거의 물 같은 정액만을 간헐적으로 내보냈다.
뒷덜미를 때리는 듯한 흥분감에 거의 졸도할 뻔했을 땐 형이 엉덩이를 토닥이며 정신을 깨웠다. 희미하던 시야로 보이던 그림자 진 그의 얼굴이 악마 같았다. 너무 미웠다.
형은 한 번 콘돔을 안 쓰기 시작하더니 끝날 때까지 콘돔을 쓰는 일이 없었다.
구멍 안쪽이 흰 액체로 넘치다 못해 엉덩이를 푹 적실 정도로 흘렀다. 손가락으로 두어 번 쿡쿡 쑤시기만 해도 그의 큰 손이 잔뜩 젖을 정도였다.
중간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콘돔을 써달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형이 가볍게 무시하곤 다시 쑤셔 박았던 것은 너무 억울해 잘 기억이 났다.
엉덩이에 남아 있던 화끈거리는 통증은 자는 사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샤워하는 내내 정액이 다리를 타고 흘러 씻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 나왔나 싶으면 또 울컥, 저 안 깊숙이에 싸둔 것이 흘러나와 샤워를 끝마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넣어서 빼내볼까……도 생각했는데, 매만져 본 구멍이 너무 무섭게 부어 있어서 다시 손을 집어넣기는 무서웠다.
간신히 샤워를 마치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나와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넥타이까지 다시 맬 필요는 없겠다 싶어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있는데, 테이블에 뭔가 있었다.
“어?”
돈이었다. 아니, 돈인 건 이상하지 않은데…… 액수가 이상했다.
잠시 돈을 손에 쥐고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저장되어 있는 주소록을 누를 생각도 못 하고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서도운…….”
―알아요.
형은 소개할 필요 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완전 맛이 갔네.
“……큼, 크흠.”
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순식간에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화상이라 빨개진 볼을 들킬 일이 없어 정말 다행이었다. 목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몇 번 했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변함없이 쉬어 있었다.
―지금 일어났어요?
“네……. 아, 아뇨. 조금 전에요. 일어나서 막 씻었습니다.”
―일찍 일어났네. 더 자지 그래요.
10시가 조금 넘었다. 분명 이르진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내가 어제 일로 무척 늦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저, 주말에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몸 닦아주신 거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요?
형의 대답은 너무 간단명료했다. 혹시 내 전화가 귀찮아 그런 것인가 싶어 갑자기 풀이 죽었다.
“아니요……. 돈을 잘못 주고 가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손에 쥐었던 돈을 다시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간격을 두고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잘못 준 거 아닙니다.
“네? 하지만…… 천만 원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가 두고 간 돈의 액수는 천만 원이었다. 우리가 계약한 금액인 오백만 원이 아니라 그 두 배인 천만 원.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네.
내가 당황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여상히 대답했다. 꼭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 하는 것만 같았다.
전화를 걸면서도 정말 실수로 두고 간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천만 원짜리 한 장을 두고 간 것도 아니고, 오백만 원짜리 두 장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실수가 아니었다.
―어제 힘들었습니까.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이렇게 물어오니 나는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별것 아니었던 것처럼 넘겨야 할까. 어쩐지 내가 하는 연기에 점점 허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피가 나던데.
“네?”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요.
“아…….”
어쩐지, 어쩐지……. 처음 했을 때보다 더 아프다 싶더니 뒤가 찢어졌었던 모양이다. 그저 이번엔 오래, 많이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얼굴이 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알겠습니다.”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는 걸까?
“감사……합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감사 인사를 했다. 확실히, 뒤가 찢어진 보상으로 받는 금액치고는 많긴 했다.
그리고 짧게 침묵이 이어졌다. 딱히 더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했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을까 싶어 입을 떼려는 찰나, 수화기에서 먼저 목소리가 건너왔다.
―혹시 옆에 쇼핑백은 못 봤습니까.
형의 말에 어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옆 테이블에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까만 배경에 흰색으로 영어 로고가 박혀 있는 쇼핑백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두고 가신 물건이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형이 열어 보라고 말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일어나 쇼핑백을 열자 상자가 있었다. 하얀 리본이 매여 있는 뚜껑을 들어 올리자 얇은 종이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코트 하나가 나왔다.
“코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형의 옷인가? 하지만 옷의 사이즈가 딱 보아도 그에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제 건가요?”
―네.
무척이나 뜬금없는 선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 괜찮습니다. 코트도 이미 있고…….”
―아. 그거.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어제 형의 차에 코트를 두고 내렸다는 게 떠올랐다.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내 정신은 그의 말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 코트는 기사가 실수로 버렸다는군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할 형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 * *
형은 호텔에서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버린 것조차 내심 충격이었던 나는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토요일과 일요일 낮까지 내리 집에 누워만 있었다.
아르바이트에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씻었다.
주말 동안 밥을 따로 차려 먹을 생각도 못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간단하게 라면으로 끼니를 챙기고는 밖에 나섰다.
와인바에 도착해 적당히 손을 풀고 연주를 시작했다. 사장님이 지정해 준 악보를 순서대로 연주하는데, 이젠 모두 외워서 보지도 않고 칠 수 있었다.
한참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다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지나가던 손님이 피아노 위로 돈을 올려두고 갔다. 고개를 숙이며 작게 인사했지만 거의 뒤통수에 대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어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 바에 오는 손님들은 참 친절했다. 실수해도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고, 피아노에는 따로 팁 박스를 두지 않았음에도 종종 팁이 올라온다. 항상 여유가 넘쳐 보였다. 저런 여유는 돈에서 나오는 거겠지. 부러웠다.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지만, 꼭 그런 날이 있다. 오늘같이 몸이 성치 않거나, 아니면 몸을 판 대가로 천만 원이나 받아서 조금 안도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낄 때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은 전부 반짝거렸다. 여기에 이질적으로 탁하게 섞여 있는 건 나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꾸만 초라해진다.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도 기분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분을 상하게 만든 장본인이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건반 실수를 두 번이나 할 뻔했지만 무사히 한 턴을 마쳤다. 후우!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직원실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르고 창밖에 완전히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자 나는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안 오는 걸까?’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문 전무였다.
금요일에 그렇게 마주치고 어물쩍 헤어졌으니 오늘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12시가 다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안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문 전무가 나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을까를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졌다.
심지어 말도 없이 내 거짓말에 동참해 달라고 반 강요한 셈인데, 거기서 내 속내를 알아채 주고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며 거짓말까지 해주었으니. 부끄러운 동시에 엄청난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음 주, 그게 아니라면 형의 옆에서 일을 수행하다 보면 만나겠지.
나는 분리수거 쓰레기를 양손에 두 봉지씩 들고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쓰레기통 문을 터억 닫고 손을 터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 사람이 보였다.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근처로 몇 발자국 다가가며 보니 확실해졌다. 문 전무가 온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뛰듯이 그의 근처로 다가갔다.
“저기……!”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자 막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간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했다. 문 전무가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잡아 세웠다.
“밖에 나와 있었네요.”
“아, 잠시 분리수거 하러요.”
“그렇구나.”
문 전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할 얘기 있잖아요, 우리.”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안 오시는 줄 알고…… 조금 걱정했습니다.”
“나 기다렸어요?”
“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하자 문 전무는 고개를 살짝 틀며 입을 가렸다. 주먹 쥔 손에 반쯤 가려진 입꼬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못 참겠다는 듯 하하 웃는 소리를 냈다. 왜 웃는 거지?
“아, 미안해요. 귀여워서.”
“……?”
그의 말이 칭찬인 건지, 아니면 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오찬 자리에서 만났을 때도 ‘안, 안녕’이라며 놀렸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할 말이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문 전무는 헛기침하듯 몇 번을 더 웃더니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잠깐 얘기할 시간 돼요?”
“지금요? 어어…….”
가게 쪽을 잠깐 돌아봤다. 대화가 길어지려나?
곧 휴게 시간이기도 하고 연주 순서도 아니어서 꽤 여유 있었지만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잠시만요.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안에서 기다리실래요?”
어색하게 손을 뻗으며 말하자 문 전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냉큼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사장님은 잠시 쉬고 오겠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그가 기다릴까 봐 걸음을 빨리해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 그날 식당에서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께 비밀로 해주셨던 거죠……?”
“네, 별말 안 했어요.”
“그럼, 혹시, 정말 주제넘은 부탁이지만.”
손가락이 절로 얼기설기 얽혀들었다.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까? 문 전무도 어쨌든 기업의 임원인데 직원이 상사도 모르게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걸 썩 탐탁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
“계속 비밀로 묻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려요.”
하지만 달리 방도는 없었다.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서도운 씨. 그냥 바로 본론만 얘기하면.”
“……네.”
“아무 얘기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겁니다.”
문 전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순간 말뜻을 이해 못 하고 멍해졌던 나는 천천히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비밀을 지켜준다는 얘기였다.
“정말요……?”
꼭 혼잣말처럼 확인하듯 되물었다.
“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문 전무는 그렇게 말하며 전에 식당에서처럼 눈가를 찡긋거렸다.
순간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에 금빛 가루가 쏟아진 것처럼 반짝거렸고, 가로등 불빛이 꼭 그에게서 나오는 후광처럼 느껴졌다.
무겁게 짊어진 내 고민을 단번에 없애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랫입술이 비죽비죽 나오려고 하는 게 보일까 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일도 아닌데요.”
“저한테는 무척 중요한 일이어서요.”
돈뿐만 아니라 형에게 거짓말한 것까지 모두 얽혀 있다. 문 전무가 비밀로 해준다는 것이 나에겐 얼마나 큰 안심인지 모를 것이다.
“내가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었겠네요.”
문 전무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거기서 단번에 내 초조함을 파악하고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해주다니.
내가 왜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문 전무에게 설명하는 게 도리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눈치 빠른 그는 당연히 금전적인 사정이 안 좋아서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을 것 같았다.
“네, 그때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시 감사 인사를 하는데, 문득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는 이유가 혹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냥 이 바에서 얼굴 익히고 조금 친해진 게 전부인데. 서로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서 거짓말까지 해주다니.
불쌍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쳐주는 거라면 너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 돈……은 아니겠지, 당연히.
“혹시 제가 뭔가…… 대가로 드려야 할 게 있을까요?”
말을 뱉고 나니 너무 무례했나 싶어서 조금 후회됐다. 하지만 문 전무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아니 오히려 내 말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내가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무, 물론 가게에 오시면 제가 사비로 서비스 드릴 거예요.”
“하하! 아…… 서도운 씨.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문 전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안 해줘도 비밀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털듯이 쓰다듬었다. 나에게 완전한 안심을 심어주려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붙임성이 좋을 뿐만이 아니라 남을 무척이나 배려하는 사람인 듯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조금 편견 어린 시선으로 봤던 게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자기는 입이 무겁다며 쐐기를 박는 말에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무님.”
“……도운 씨.”
문 전무는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며 거둬들였던 손을 다시 뻗었다.
“활짝 웃으니까 보조개가 생기네요.”
“아…….”
내 얼굴 근처로 온 그의 손은 기어코 볼 위로 부드럽게 올라왔다. 그리고 엄지가 조심스럽게 광대 위쪽을 살살 쓸었다.
신기한가 보다.
나도 처음엔 이게 보조개인 줄 몰랐다. 어릴 땐 나도 모르는 새에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해서 찍힌 상처인 건가 걱정했다. 내 걱정을 들으시곤 어머니가 보조개라고 알려주셨다. 볼에 콕 찍힌 보조개가 아니라 광대 위로 길게 생기는 보조개라 무척 생소했던 기억이 났다.
‘형도 신기하다고 만지작거리던 때가 있었는데…….’
의식의 흐름을 타고 옛날 생각을 하는데, 문 전무의 손끝이 귓불을 스쳤다.
순간 간지러워서 움찔 목을 움츠리자 바로 손이 떨어져 나갔다.
“미안해요, 실수로.”
“괜찮습니다.”
사실 사과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간지러운 기가 남아 있는 귀를 손으로 대충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문 전무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되게 비싼 명함인데, 도운 씨한테만 주는 거니까 한 장 받아둬요. 번호도 저장하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들며 짧게 탄식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명함이 없어서…….”
내 명함도 드려야 하는 게 예의라고 알고 있는데 명함 자체가 없었다. 짧게 중얼거리자 문 전무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불이 들어온 화면엔 숫자판이 띄워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받아 들긴 했으나 영문을 몰라 그를 올려다봤다.
“도운 씨 번호요. 숨기는 게 생겼으니 우리도 입 맞춰야 할 것 아니에요.”
“아! 그렇구나.”
입 맞출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문 전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철저한 을의 처지가 된 나는 군말 없이 넓은 화면을 토닥토닥 눌렀다.
“전화하면 받아요.”
“알겠습니다, 전무님.”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약점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가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 전무가 심하게 굴 성격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내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뒷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을 빼 들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내 번호 남긴 거예요. 그리고…… 밖에서는 그냥 이름 부르죠, 도운 씨. 내 이름 문지원인데.”
그는 내가 못 알아듣기라도 할까 싶은지 또박또박 이름을 말했다. 나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뚱맞은 제안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회사 밖이라지만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인 데다 내가 모시는 상사의 친구이기까지 한데.
“어, 음…….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어색해서 그래요.”
어어……. 어쩌지. 입에서 자꾸만 늘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완강하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당장 ‘그럴게요’ 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만약 부른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고민이었다. 문지원 님? 문지원 씨? 아니, 뭐라고 불러도 무례하게만 느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한 티를 역력히 내자 그가 포기했는지 피식 웃었다.
“이만 들어가 보세요. 저 때문에 쉬는 시간 다 뺏겼겠네요.”
“어, 아닙니다. 괜찮아요.”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문 전무는 웃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가게는 마감하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남아 있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곧장 돌아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로 돌아가십니까?”
“네. 나도 사실 일요일만 기다렸거든요. 서도운 씨 보러 온 거여서, 이만 갑니다.”
친절한 말씨에 가슴이 찡해졌다. 아쉽다. 고마운 마음에 서비스로 음식을 왕창 내어줄 생각이었는데.
문 전무는 자신의 차로 곧장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어 그가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앞 좌석에 앉은 그가 문을 닫기 전에 아, 하고는 말했다.
“금요일에 내가 사준 코트 입은 거 봐서 좋았어요. 잘 입고 다녀요.”
그리고 문이 탁 닫혔다. 곧바로 시동이 걸렸고, 내가 무어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으아아아.”
코트!
코트 생각을 하니 문 전무에게 더 미안해졌다. 부탁까지 들어준 고마운 상대인데, 준 선물을 잘 간수하지도 못하고. 그가 준 코트를 이사님이 버렸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죄송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쭈그려 앉고 말았다. 갑자기 형이 미워졌다…….
* * *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출근하자마자 실장님께 불려갔다.
바로 금요일의 일 때문이었다. 복귀해야 하는 상사와 사원은 돌아오질 않고, 돌연 방향을 틀어 호텔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을 나에게서 전해 들은 것도 아니고 놀란 호텔 총지배인의 연락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게 내가 지금 혼나는 이유였다.
“호텔 측에서 연락이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잡고 고개를 떨군 자세로 최대한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이라도 예정에서 틀어지는 일이 생기면 곧장 나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의전의 기본이에요.”
쓴소리를 듣고 있자니 주제넘게도 억울함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분명 보고하려고 했었다. 기사님이 차를 틀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었다. 하지만 형이 멋대로 쓱 가져가더니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그길로 차와 호텔에서……. 하여튼 그랬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 말이다.
“퇴근하시기 전까지는 이사님이 계신 위치를 내가 항상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다음부턴 그 즉시 보고하도록 하세요.”
“네, 앞으로 정말 주의하겠습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다시 사과드렸다. 발밑으로 실장님의 한숨이 짧게 떨어졌다. 나도 한숨이 나올 것만 같다.
나가 보라는 말에 힘없이 몸을 돌렸다. 혼나고 나니 힘이 죽죽 빠진다.
다음부턴 형에게 얘길 해서라도 꼭 연락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혼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에겐 금요일에 끝마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날 그렇게 의도치 않은 조기 퇴근을 해버리느라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는 아직도 완성을 못 했고, 그런 나 때문에 대리님의 일도 조금씩 밀렸음은 당연했다.
사실 그렇게 시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형이 나 때문에 일부러 시일을 앞당겨 받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찍 온 김에 대리님께 검사받아야 하는 항목부터 재빨리 정리했다. 아무리 빨리 해도 형이 출근하기 전에 책상에 올리기는 무리일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한 대리님과 함께 열심히 일을 진행해 보았지만 짧은 시간에 완성하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이 출근한 뒤 당연한 순서처럼 나를 불렀다. 나는 커피를 준비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이사실로 향했다.
“주말에 출근하진 않았나 봐요.”
그가 책상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당연히 주말에 출근해서 일을 끝냈어야만 한다고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맡긴 일이 있고 기한이 있으면, 특히 나처럼 낙하산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쳤어야만 했다. 하지만 주말엔 아르바이트가……. 나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주말 동안 몸이 아파서 그럴 생각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변명도 할 줄 알고.”
그의 지적에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잔을 데스크에 내려놓으며 나는 둔탁한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만 들렸다.
“어디가 아팠어요?”
“그냥 몸이……. 아래가 좀…….”
“아래 어디.”
잠시 잊었다. 그에겐 구체적인 대답을 해야만 했다.
“허리랑…… 구멍이요.”
“찢어먹었으니 아플 만했겠네.”
미안해하는 걸까 싶었지만, 역시나 형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유예해 준다는 듯 말했다.
“점심시간 전까지 올릴 수 있겠죠?”
“……네! 꼭 완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형은 신문을 집어 들며 나가 보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꾸벅 인사하고는 뒤를 돌았다.
“아.”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오늘 내가 준 코트 입었습니까.”
나가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세워졌다. 코트?
“아니요.”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잠시 눈알을 굴리다 대답했다. 오늘은 입고 오지 않았다.
“안 입었습니다.”
“왜요.”
“어…….”
뭐지? 형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게 표정 변화가 없는 그였기에 내 착각인가 싶었다.
“날이 풀려서요.”
“…….”
“……?”
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져 있었다. 거슬리는 게 있을 때마다 꿈틀 올라가는 눈썹도 그의 기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아…….”
깊고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뭐지, 왜지……?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내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고 있는데, 형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됐으니까 나가 봐요.”
그가 이마를 짚었다. 엄지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걸 보니 보통 기분 나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퇴근하고 호텔로 오세요.”
“…….”
알겠습니다…….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오늘도 금요일과 같은 일이 반복될 거란 예감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울상이 된 내 표정을 보고 대리님이 많이 혼났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이렇다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