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7/29)

  2.

새벽 5시. 핸드폰에 설정해 둔 알람이 울리자마자 번뜩 눈이 떠졌다. 차갑게 식은 방바닥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을 곧장 눌러 끄고는 상체를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당기며 뻐근한 근육을 늘려주었다. 그래도 혹사당한 몸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고, 또 꾹꾹 눌러주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더 늑장 부리면 안 됐다. 곧장 이불을 개어 한쪽 벽면에 밀어두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왔다. 머리를 탈탈 터는데 촉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수건이 낡아 많이 빳빳해졌기 때문이다. 수건도 살 때가 됐나. 그렇지 않아도 새 양말을 사야 했고, 떨어진 식재료도 사야 했다. 이번 주말엔 마트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장을 꺼내 입었다.

“……이 애물단지.”

허름한 옷장 안에 들어 있는 코트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죄 없는 코트가 괜히 미워서 팔뚝 부분을 손으로 치듯이 밀었다. 그러자 옷걸이에서 쑥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또 헉, 하며 놀라 곧장 옷을 주워 다시 예쁘게 털어 걸어두었다.

코트를 받은 지는 몇 주 지났는데 아직 입어본 적은 없다. 내일이면 벌써 5월이고, 아마 다시 추워질 때까진 입을 일이 없을 것 같다.

넥타이는 잠시 테이블에 내려두고 식사 준비를 했다. 달걀을 꺼내 프라이를 하나 만들어 먹으면서 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서둘러야겠다.

집이 워낙 교통편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남들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 두 대를 타고 지하철을 또 갈아타야지만 회사에 도착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회사와 가까운 곳이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역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들었지만 돈이 없으니……. 몸이 조금 고생하는 셈 치고 열심히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실장님이 무척 일찍 출근하는 편이라 나도 절로 따라 하게 됐다. 마음대로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놓칠 뻔한 버스까지 간신히 뛰어가 올라탔다. 이 시간 버스에는 아직 사람이 별로 없어서 문과 가까운 쪽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회색빛이 내려앉은 조용한 동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을 갈아탈수록 사람들이 점점 늘었다. 아예 사람으로 꽉 차서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매일 겪는 일이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참 쉽지 않았다.

한숨마저 시끄러운 지하철 소음에 묻혔다. 커브를 돌 때마다 쏠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잡이를 꼭 붙들고는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뉴스들이 짤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던 도중 눈길을 끄는 소식이 등장했다. 누군가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기사였다.

“…….”

피아노를 배웠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그리고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이라면 도전해 보고 싶은 대회였다. 순식간에 과거 기억에 정신을 빼앗겼다.

형이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냥…… 형이 한 번 쳐줬던 피아노곡을 외웠다. 악보도 볼 줄 몰랐고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태였는데, 형이 치는 손을 외웠다. 움직이는 걸 보고, 눌리는 건반을 외워 똑같이 따라 했다.

그때부터 나를 보는 형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 친구의 자식 정도로 대했다면, 그 일 이후로는 친동생처럼 아꼈다. ……아꼈다고 느꼈다.

형으로부터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그저 형을 따라서 치는 게 아닌 나만의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는 형이 나를 위해 연주해 주는 게 더 좋았다.

형이 피아노를 그만두었을 때 그 집에 있던 피아노를 우리 집으로 가져왔는데, 무척 멋있고, 또 고가의 피아노였던 게 기억난다. 정말 열심히 연습하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대회도 나가고, 형한테 자랑할 생각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집이 어려워지면서 피아노는 압류당했다.

우스운 꿈이지만 나중에, 빚도 다 갚고 아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같은 피아노를 다시 들여오고 싶었다. 형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앗!”

“죄송합니다.”

다시 지하철이 크게 커브를 돌며 꺾였다. 몸이 휘청거리면서 앞사람이 발을 살짝 밟았다.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회상에 잠겼던 나에게 꿈 깨라는 듯했다.

짧은 뉴스 화면도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전광판에는 회사 근처의 역 이름이 크게 떠올랐다.

사람들을 헤치고 근처로 가 있으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팔을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실장님이나 대리님의 급한 용무일까 싶어 간신히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문자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내 얼굴은 급격하게 구겨졌다.

[요즘 입금이 좀 많다?]

텍스트만 봐도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깡패였다.

어제 입금해 두었더니 아침에 확인하고 곧장 연락한 모양이었다. 뒷덜미가 싸늘하게 식는다.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 대체 왜, 또…….

아직 남자가 한 추행의 충격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호텔에서 있었던 일 또한 상상만 해도 손톱을 마구 물어뜯고 싶은 충동이 인다. 회사든 뭐든 집어치우고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 가 이불 속에 숨어버리고 싶은.

피곤하게 아려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답장을 하려는데, 뒤이어 문자가 또 도착했다.

[어디서 몸이라도 팔아?]

“…….”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알고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서 던지는 말일까. 계약서까지 쓰게 한 형이 보안을 허술하게 했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 후자일 거란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번호를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이 말에 부정조차 할 수 없는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해서 우스웠다. 그렇게 싫다고, 벗어나고 싶어서 손톱으로 바닥을 억지로 긁어가며 뿌리치려 했던 그 상황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

“엇, 어, 잠시만요.”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문이 열려 있었다. 삐삐, 하는 음까지 울리며 곧 문이 닫힌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내릴게요,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나는 급하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닫히기 직전에 빠져나왔는지 등 뒤로 문이 탁 닫히는 게 느껴졌다.

“하아…….”

한숨을 흘리며 식은땀을 닦았다. 오늘따라 험난한 출근길이었다.

“이거 크기 줄여서 복사 좀 해주세요. 인원 몇 명이었더라.”

“여덟 분이세요.”

“여덟 부 복사해서 철해 둬요.”

“네, 알겠습니다.”

성 과장님이 건네주는 도면 파일을 받아 들고 탕비실 옆 복사실로 향했다.

처음엔 사용법을 몰라 쩔쩔맸던 복합기도 이젠 꽤 능숙하게 사용했다. 이것저것 버튼을 누른 다음 초록색 출력 버튼을 누르자 웅웅대며 기계가 돌아갔다. 나는 종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슬쩍 바깥 눈치를 보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답장을 보내려다 만 문자 화면이 떠올랐다.

[오늘 시간 있어요? 저녁에 같이 식사나 할까요?]

오늘은, 까지 썼다가 업무 지시 때문에 급하게 껐던지라 나는 다시 뒤를 이어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렵……습……니……다……. 죄송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식사를 청해온 사람이 다름 아닌 문 전무였기 때문이다.

“뭐 해요?”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대리님이었다.

다시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박 대리님은 장난스럽게 농땡이 피우는 거냐고 농담을 걸었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리님은 웃으며 근처로 다가와 쌓여 있는 박스 포장을 뜯어 종이를 뭉텅이로 꺼냈다. 따로 쓸 일이 있는지 대강 장수를 눈으로 세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회식 얘기 들었죠?”

“네.”

오늘 비서실 회식이 있었다. 입사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환영 회식이라기엔 많이 늦은 감이 있었지만, 대구 공장이 시공에 착수하는 등 큰일을 대강 넘긴 때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시기적절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회식 때문에 오늘 문 전무님의 연락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그가 수틀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박 대리님은 오늘 가는 고깃집이 얼마나 맛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군 돌판 위에 직접 짠 참기름을 펴 바르고 굵은 소금 뿌린 소고기를 얹어서…….

설명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비서실에서 회식으로 종종 가는, 조금 가격이 있는 음식점이라고 한다.

고기 맛있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치며 출력된 파일을 정리했다.

빈 파일에 출력물을 가지런히 끼우고 제목을 달았다. 두 손 가득 무겁게 들어 올려 비서실 캐비닛에 옮겨두자마자 이사님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복도로 나갔다. 넥타이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손으로 다시 조여 매었다. 그 순간 그가 등장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얕게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 형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출근했는데, 그래서인지 비서실 분위기가 붕붕 떴다.

기민하게 그걸 알아챈 형이 피식 웃었다.

“점심들 먹었습니까.”

과장님이 이사님을 뵙고 먹으러 가려 했다고 능청을 떨었다.

“팀원 하난 잘 뒀지.”

그가 자연스레 웃는 것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밤마다 불러내 내 몸을 뒤흔들어 놓는 남자라는 걸 이럴 땐 항상 망각한다.

“이사님. 오늘 저녁에 회식 있을 예정입니다.”

실장님이 말을 꺼냈다. 뒤에 내 환영 겸 회식이라는 설명이 짧게 덧붙여졌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로 향했다. 내가 피하지 않고 올려다보자 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은 부드럽게 옮겨져 실장님에게로 향했다.

“그렇습니까.”

조금 전과는 약간 달리 느껴지는 목소리에 형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계약서 때문에……?

문득 계약서 조항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확하게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허락 없이 술을 마시거나 취하면 안 된다는, 그런 비슷한 내용이 적힌 조항이 분명 있었다.

나는 형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회식도 가지 말라고 하진 않겠지? 사실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회식까지 가지 말라고 막는 갑갑한 구속하에 있기 싫은, 일종의 반항심에 가까웠다.

끈질기게 그를 쳐다봤다. 차마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진 못하고 아랫입술을 우물우물 깨물거나, 손가락을 엮어 꿈질거렸다. 초조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최대한 티를 내려고 노력했다.

“주말이라고 과음하지 말고.”

내 바람이 닿듯 마침내 형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나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며 그가 한 템포 쉰 뒤 말했다.

“일찍 들어가세요.”

“…….”

그리고 다시 시선이 옮겨졌다.

“식사하고 오세요. 보고는 이후에 받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옆 팀원들에게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나는 형이 나에게 한 말이라고 확신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팀원들과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 나는 남들 모르게 계속 심장 부근을 쓸어내렸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밥 먹는 내내 왜 이럴까 생각하다 스스로가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 몰래, 형과 나 둘만 아는 이야기를 은근하게 교환했다는 사실에 지금 떨리는 모양이다.

‘미쳤나 봐.’

이게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상황이야.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 어딘가 부끄럽고, 또 멍청해 보였다. 애써 지워 버리려고 밥을 꾸역꾸역 삼켜 넘겼다. 그랬더니 오후 내내 속이 답답하게 얹히고 말았다.

* * *

퇴근하자마자 회식 자리로 향한 우리는 고민도 없이 메뉴를 쭉쭉 시켰다. 눈으로만 봐도 배부를 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를 나는 안타깝게도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점심때 체해서 약을 먹은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긴장해서 오들오들 떨리는 내 건배사로 술판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센스나 유머도 없는 건배사에도 팀원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하늘로 뻗었다. 나도 함께 잔을 들고 나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다행히 술 강요는 없었지만 팀 자체가 술고래들의 모임이었다. 이 분위기에 섞여 있다 보니 저절로 내 입에도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말았다.

“도운 씨는 몇 달 일해 보니까 어때요?”

화제가 돌고 돌다가 나에게 왔다. 물을 홀짝홀짝 마시다 사레가 들려서 작게 캑캑댔다.

“저는…… 엄청 좋아요. 무척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시고…….”

“일 강도 세서 힘들죠?”

“어, 음, 양이 많긴 해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솔직하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셔서 최대한 돌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 대답이 전혀 말도 안 된다는 듯 대리님은 에이,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이사님이 도운 씨한테 일을 장난 아니게 내주시는데요.”

“안 그래도 바쁠 때라서 일을 두 배로 하고 있잖아요.”

박 대리님이 내 어깨를 토닥이듯 치며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받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괜찮아요, 대리님이 엄청 도와주셔서 저는 따라가기만 했습니다.”

“어휴, 도운 씨 일 배우는 게 얼마나 빠른데요. 한번 말하면 척 알아들어서 내가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툭 튀어나온 칭찬에 머쓱하게 웃는데, 대리님이 이어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일 내주시는 게 이사님 나름의 방법이에요.”

“방법이요? 어떤…….”

“시험해 보는 거요. 비서실에 둘지 말지.”

그 말에 감탄할 새도 없이 실장님이 끼어들었다.

“뭘 그런 얘기까지 해요.”

“왜요, 솔직히 맞는 말이잖아요. 저도 입사 초기가 제일 힘들었는데. 아, 도운 씨 전에도 비서실에 발령받은 사람 있었는데, 업무 강도가 너무 세서 결국 보름도 못 버텼잖아요. 열흘이었나?”

대리님이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꼭 내가 싫어서 일을 준 건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냥 으레 하는 테스트인 것처럼 일을 많이 줘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와 형의 관계는 그저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일 배우는 것도 영 신통치 않고, 이사님도 안 내켜 하셔서 결국 타 부서로 이동했어요.”

“그랬군요…….”

“그에 비하면 도운 씨는 정말 잘 버텨주고 있어요. 일도 잘하고.”

“감사합니다.”

헤헤 웃으며 술을 홀짝였다. 처음엔 썼던 술이 점점 들어가고 나니 물처럼 느껴졌다. 혀가 취했나 보다.

“벌써 볼이 빨개졌네.”

“술을 잘 못해서요.”

술고래들 앞에서 술을 못한다는 게 어쩐지 부끄러워 볼을 문질렀다. 손끝으로 뜨끈뜨끈한 열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사님이 도운 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는데. 맞죠!”

“이사님이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는 그간 보아왔던 그의 말과 태도를 곱씹어 보았다.

이런 양식도 안 지킨 보고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주말에 출근해서라도 마치세요. 멍청하게 서 있지 마십시오. 그 외에도 PT 수준이, 어학 성적이, 자격증이 등등등.

음…….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거친 관계를 가지고 난 다음 날에도 봐주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아픈 걸 애써 숨기고 끙끙거리며 일하는 걸 구경하는 게 즐거운 건가 싶을 정도로 괴롭힐 때도 있었다.

물론 칭찬을 들었을 때도 있지만, 그건 아주 포괄적이고 광범위해서 딱히 마음에 들어 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아니신 것 같은데요, 전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설령 테스트였대도 나에 대한 진심이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우리는 뒤가 너무 깊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도운 씨, S대 경영학과 출신이라고 했죠?”

“네.”

“여기 동문 많아요. 저랑 실장님도 같은 대학 출신이거든요.”

성 과장님이 반갑다는 듯 말하며 병을 내밀었다. 나도 화답하며 잔을 들어 받았다.

“이사님도 S대 경영학과시잖아요.”

“정말요?”

과장님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이 같은 학교를 다녔었다고?

“정확히 말하면 잠깐 다니다 유학 가셨을걸요. 그때 아마 청영에 큰 사건이…….”

“아, 아…….”

작은 감탄사와 함께 술자리는 급속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술잔에 술을 쪼르륵 따르는 소리만이 가늘게 들렸다 금방 그칠 뿐이었다.

청영에 있던 큰일……. 아버지의 차 사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소송이 마무리되고 곧장 유학길에 오른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는 대한민국의 온 관심이 청영의 소송에 쏠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경영을 이어받을 두 아들에게만 모든 포커스가 맞춰지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 가족에게 쏠리는 이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누가 이렇게 우울한 얘기를 꺼냈습니까. 어!”

어색해진 공기에 차장님이 일어나며 고기와 술을 추가로 주문하였다. 이사님이 빨리 자리 잡으셔서 지금 우리가 고기도 시켜 먹지 않느냐고 말하며 술을 말아 나눠 주었다.

다들 맞장구치며 풀어지려는 분위기에 나도 따라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받은 잔을 들고 다시 건배하며 술을 들이켰다.

회사에 충성심이 깊어 보이는 팀이었다. 혹시 내가 청영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사람의 자식인 걸 알면 이 친절하던 사람들도 날 싫어하게 될까, 그런 게 순간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꾸만 그가, 형이 떠올랐다. 이런 모든 일을 떠올리는 때면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미안하고 신경 쓰일 정도였다.

내가 금전적인 빚을 다 갚는다고 해서 청영과 그의 가족에게 진 마음의 빚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뻔뻔스럽게 그가 주는 돈을 받아 생활하고, 빚도 갚고 있다니. 갑작스레 찾아온 자괴감에 주량도 잊고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얼마나 더 나를 미워할 수 있을까. 다시는 이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씁쓸했다. 조금만 욕심내 보면 어떨까 싶다가도, 죄인인 주제에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자책하는 게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충돌했다.

나는 생각을 비우기 위해 다시 잔에 술을 받았고, 자제를 모르고 들이켰다.

‘형…….’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 * *

“으…….”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갔다. 나는 온통 깜깜하기만 한 정신 속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누군가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심하게.

몸을 마구 비틀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온몸이 술에 절어 뻐근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앓는 소리를 길게 냈다. 그러다가도 보드라운 촉감에 스르르 잠들 뻔했다.

“…….”

그 때 불현듯 위화감이 들었다. 번뜩 고개를 들어 바라본 풍경이 이상했다. 커튼이 반쯤 쳐진 커다란 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엔 이런 탁 트인 큰 창이 없는데.

뭐지? 나는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고작 팔꿈치를 대고 조금 일어났을 뿐인데 머리가 웅웅 울리며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시 엎드렸다가 간신히 몸을 돌려 똑바로 일어났다.

나는 지금 호텔에 와 있었다. 형이 나를 불러내는 그 호텔이었다.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아직 잠이 덜 깼나?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주변을 서둘러 둘러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 호텔 방이 맞았다.

설마 어젯밤에 그가 나를 불러냈나 싶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봐도 그런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필름이 중간에 뚝 끊긴 것만 같았다.

회식 자리에서, 맞다, 어제 회식을 했다.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집에 안 가고 호텔에 와 있는 것인지, 그 중간이 텅 비어 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언젠가의 상황과 겹치는 느낌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다가 이불을 확 걷고 일어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옷은 어제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아니, ‘그대로’라고 말해도 되는 상태인지는 모르겠다. 셔츠와 바지는 고스란히 입고 있었지만, 넥타이는 어디인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재킷은 근처 소파에 걸쳐져 있었다. 단추가 위에서부터 몇 개 풀린 상태인 걸 보면 옷을 벗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내 스스로 온 거라면 상관이 없지만, 혹여 팀원 중 한 명이 내가 가지고 있던 호텔 카드를 보고 데려다준 거라면 수상한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혹시 정말 형이 불러서 온 거라면……. 왜 섹스하지 않았는가가 가장 문제였다. 취한 내가 무슨 망발을 입에 담았을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나는 취하면 안 됐다!

“으아아. 어떡해……. 진짜 어쩌지, 정말…….”

나는 서둘러 단추부터 다시 잠갔다. 머리를 콩콩 때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재킷을 가져오려 발을 옮기는데, 발끝에 차이는 내 가방 때문에 하마터면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가방에서 쏟아진 서류를 급히 쓸어 모아 주워 들었다. 미쳤어. 미쳤나 봐. 입에선 자책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제발 차라리 내가 취해서, 반 미쳐서, 집까지 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호텔로 스스로 온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형한테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허겁지겁 모은 서류를 탁탁 정리해서 가방에 쑤셔 넣고, 소파에 놓여 있는 재킷도 챙겨 들었다. 넥타이가 어디 있나 한참 살피는데, 내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 깔려 있는 걸 간신히 발견했다. 그것도 쭉 당겨 꺼내 손에 말아 쥐었다.

최대한 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대충 침실을 정리하고, 빠뜨린 물건이 없나 눈으로 살피며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바닥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가 날 리 없음에도 나는 뒤꿈치를 들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할 만큼의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아직 취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 혼비백산한 것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생각하자.’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향했다. 얼마나 술을 마셔서, 어쩌다 이 호텔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도망가자. 걸려도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 아닐…….

“지금 뭐 하는 겁니까.”

……!

조용하던 가운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멍청하게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절망감이 거센 물살로 온몸을 때렸다. 현관 근처에 주저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에게 형이 천천히 걸어 다가왔다.

“어디 가려고요.”

형이 호텔에 있었구나.

그럼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에 분명히 형의 개입이 있었다는 소리다. 몰래 나가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지만, 차라리 잘됐다. 몰래 나갔다간 더 크게 화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안녕은 무슨.”

“…….”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머리는 까치집이고.”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로 급하게 머리를 쓱쓱 빗었다. 손으로 아무리 눌러도 머리가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형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어나요.”

미적거리다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대고 일어났다. 힐끔거리며 주춤주춤 재킷과 가방을 끌어안았다.

“그건 안 버릴 테니까 좀 놓지.”

“네…….”

그 말에 힘없이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았다. 내 모양새를 보고 형이 또다시 한숨 쉬었다. 그는 턱짓을 한 번 하더니 아무 말 없이 안쪽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라는 신호인 것 같아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뒤를 느리게 따랐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가니 서재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한편에는 커다란 소파가 있고, 다른 쪽엔 모던한 데스크가 놓여 있는 단조로운 공간이었다. 형은 데스크로 다가가 스탠드를 껐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일한 모양인지 위에 노트북과 서류가 놓여 있었다.

편해 보이는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있던 그가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근처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얼마나 마신 겁니까.”

“……죄송합니다, 이사님.”

“얼마나 마셨냐고 물었어요.”

그가 다그쳤다.

“두 번 묻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또 전처럼 엉덩이 맞고 싶어요?”

“아뇨, 아니요……. 너무 많이 마셔서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선은 저절로 땅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시던 커피잔을 다시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계약은 완전히 잊었던 모양이에요.”

“…….”

“아니면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든가.”

“죄송합니다…….”

그가 분명히 주말이라고 과음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고 했었다. 나는 일단 하나는 지키지 못했다. 과음했다. 엄청. 뭐에 씌었던 것인지 술이 말 그대로 술술 들어갔다. 사고와 형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좀 취하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들키지만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조금 있는 것 같다. 어차피 형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는 건 아닐 테니까. 내가 주말에 몰래 일하는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분명 아닐 것이다. 어제는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회식 자리에서 좀 취하면 어때, 하는 핑계를 대가며 마셨던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여기 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형 또한 여기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팀원 중 누군가가 그를 불렀나 했지만, 감히 이사를 술자리에 부를 부하 직원이 있겠는가.

그럼 혹시 내 예상이 틀렸던 걸까? 회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나에게 미행이라도 붙였을까?

“그런데…… 제가 왜 호텔에 와 있는 건가요?”

“전에도 비슷한 걸 물었던 것 같은데. 내가 데려왔습니다.”

“설마 정말…… 저 감시하셨습니까? 제가 계약 위반할까 봐.”

조금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들고 말하자 가만히 내려다보던 형이 이번엔 정말 어이없다는 듯, ‘하!’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어제 일이 전혀 기억 안 나나 봐요.”

그는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나 본데, 어쩐지. 기억이 멀쩡했으면 이렇게 대들면 안 될 텐데.”

“……?”

“하긴, 제정신이었으면 어제 그러지도 않았겠네요.”

그러지도 않았겠지?

그의 말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 말은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건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술 마신 걸 말하는 걸까? 하지만 술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눈썹이 절로 팔자로 늘어졌다.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왜 괜한 소리를 한 것인지, 1분 전의 나를 혼내 주고 싶었다.

차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물을 자신이 없어 그냥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기억 안 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형이 이렇게 지적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듯했다.

“하, 참.”

“…….”

“이걸 화낼 수도 없고.”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형은 신경 쓰지 마.’

뭐지……? 뭐지? 이거, 아주 옛날의 기억인가?

하지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옛날의 나는 그런 말을 절대 했을 리가 없다. 동공이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등 뒤가 싸늘하게 식으며 덜 깼던 정신이 말짱해지는 게 느껴지고, 이마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내 굳어진 표정을 보더니 형이 허리를 조금 숙여 시선을 맞춰 왔다.

“정말 기억이 안 나?”

* * *

어두운 장막이 내려앉은 늦은 시간, 한참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해일은 책상을 긁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팔을 뻗었다. 손 안에서 묵직하게 움직이는 핸드폰이 예사롭지 않았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를 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서도운…….”

해일이 중얼거렸다. 이름 위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오늘 분명 환영 회식이 있다고 했었다. 그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회식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왜 전화를 했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해도 순순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해일은 다시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시선은 핸드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보고 있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바람 빠지듯 짧게 웃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해일은 책상에 채 닿기도 전에 또 울어대는 핸드폰을 가져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전화를 건 사람은 서도운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해일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밀어 누르고는 책상 위로 엎어 올려두었다. 하지만 전화는 또 울려왔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왜 전화입니까.”

―…….

“서도운 씨.”

―네……!

“이 시간에 지금 제정신이에요?”

―…….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서도운.”

―네……!

출석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이름에만 대답을 해대는 꼴이라니. 그러고 다른 말은 하지도 않는다.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서 수화기 볼륨을 높여보니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아무래도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것 같았다. 제정신이면 전화를 걸 리조차 없었다.

해일은 어이가 없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쓰고 있던 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미간을 손가락으로 주무르듯 문질렀다.

―……이사님.

마침내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네.”

―이사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이……. 화내지 마세요.

한껏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지금 귀로 들은 말이 화내지 말라고 한 게 맞나 싶었다.

“취했습니까, 지금?”

―몰…… 몰르겠는데.

대답하는 꼴을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일은 눈가를 누르며 또다시 한숨 쉬었다.

수화기를 타고 빵빵거리는 차 소리가 들렸다. 집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 옷걸이로 걸어가 걸어놨던 겉옷을 챙겨 들었다.

“팀원들은 어디 있어요?”

물었지만 웅얼대는 소리만 들렸다. 짐작해 보건대 팀원들은 이미 집에 돌아간 것 같다.

“지금 어딥니까.”

해일은 서랍에서 지갑과 차 키를 챙겼다. 손을 바꿔 핸드폰을 들고 겉옷에 한쪽 팔씩 끼우며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그럴 때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서도운. 서도운 씨. 어디냐니까.”

―그게 왜…… 궁금하세요?

대답에 문을 열다 말고 우뚝 멈췄다.

“지금 본인이 전화한 겁니다.”

화내듯 뱉고 나서야 해일은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무작정 차를 가지고 나온 그는 익히 들은 회식 장소 근처로 향했다. 오밤중에 차로 그 부근을 두 바퀴 돌았고, 역 근처로 차를 조금 더 빼고 나서야 간신히 구석에 쭈그려 앉아 졸고 있는 서도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아내면 당장 끌고 가 밤새 재우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

어쩐지 서도운을 발견하는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해일은 차를 세우고 근처로 다가갔다.

발 앞까지 다가갔으니 인기척이 느껴졌을 만도 한데, 서도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발끝으로 신발 끝을 툭 치자 누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헉, 소리를 내며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사님!”

술이 깼나 싶었지만 헤실헤실 웃으며 발을 타박타박 구르는 걸 보니 아니었다. 번쩍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무너트린 그는 무릎 위로 포갠 팔 위에 얼굴을 기대었다.

“여기 앉아서 또 누구 꼬시려고 했어요?”

해일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도운의 팔뚝을 잡았다. 힘을 줘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술에 취한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저……는,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른 게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그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할 작정으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적당히 마시라고 안 했습니까? 서도운 씨는 이렇게 취하는 것도 과음이라고 안 치는 모양이에요?”

제대로 세우려고 해도 힘 빠진 몸이 팔랑팔랑 앞뒤로 흔들렸다. 으응,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있는 상대한테 혼자 계약 위반이니 뭐니 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였다.

해일은 서도운을 끌고 차로 데려갔다. 성큼성큼 뻗는 발걸음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한 번은 넘어질 뻔했다. 그는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도 쓰지 않고 조수석을 열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던지듯 서도운을 밀어 넣었다.

“아퍼.”

“가지가지 하는군.”

해일은 더 말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랐다. 녹은 젤리처럼 늘어진 옆 사람에게 안전벨트만 채워주고 곧장 호텔로 차를 몰았다.

호텔에 도착하기까지의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해일의 마음은 심란하게 어질러졌다. 이렇게 챙겨 데려온 게 잘하는 짓인가, 길바닥에서 얼어 죽든 말든 그냥 뒀어야 하는 게 맞았나 싶었다.

애써 시선을 떼려고 해도 자꾸만 눈으로 좇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한숨이 나왔다. 

해일은 호텔 방까지 끌고 온 서도운을 침대로 밀어 눕혔다. 속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서도운을 내려다보려니 속이 끓었다.

서도운이 뒤척거렸다. 옷이 말려 몸에 깔린 게 답답해 보여서 이상하게 자신도 짜증이 났다. 재킷을 벗겨주었다. 근처 소파에 걸쳐 두고 오는데 서도운이 스스로 낑낑거리며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어쩐지 웃겨서 도와주지 않고 가만히 구경했다. 혼자 힘으로 간신히 풀어내더니 휙 던져 버렸다.

집에서는 이렇게 하나 보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났다. 하지만 해일은 금방 자신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생각을 지웠다. 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

이 주정뱅이를 데리고 뭘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끝없이 한숨을 쉬며 뒤로 돌았다. 내일 아침 일어나서 기겁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형.”

낮게 가라앉은, 아니 조금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해일은 발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한 발짝을 더 걸었다.

“형.”

등 뒤의 남자가 또다시 말했다. 그것은 말이 아닌 부름이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해일은 잠꼬대일까 싶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몸을 모로 눕혀 웅크린 서도운이 눈을 뜨고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니 기분 좋다는 듯이 입꼬리를 길게 당겨 웃었다.

포시시 흩어지는 웃음에 또 마음이 울렁인다. 광대 위로 길쭉하게 패는 보조개. 시선이 한참 그 위에 머물렀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직선으로 꽂혔다. 서도운은 잠시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큰 눈을 끔뻑거리더니 웅얼거렸다.

“화내지 마요.”

“…….”

“형. 화내지 마요. 나…… 미워하지 말아요.”

“…….”

“너무 미워하지 마요.”

각인시키듯,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조금만 미워해요, 조금만…….”

웅얼웅얼 작아지는 목소리에 해일은 참지 못하고 근처로 다가가 침대 앞에 섰다.

“내가 지금 화내지 않게 생겼나 봐.”

“…….”

“이렇게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취하고, 일찍 들어가기는커녕 길바닥에 버려진 개처럼 졸고 있고. 이럴 거면 계약서에 사인은 왜 했어요. 조금 풀어줬다고 선 넘어 버리는데.”

길게 말하기 시작하자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번갈아 비죽거린다. 타액이 묻어 반들반들해진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얕은 숨이 흘러나왔다.

“또 다른 남자한테 안기러 가진 않을지 내가 왜 걱정해야 하냐고. 응?”

해일은 허리를 숙였다. 팔을 뻗어 서도운의 앞머리를 빗듯 넘겼다. 오밤중에 그를 찾아 나선 데는 이 이유가 가장 컸다. 저에게도 이렇게 겁도 없이 전화를 해대는데, 다른 밤 상대들한테도 그러지 않을까. 안아달라며 젖은 눈망울로 유혹하진 않을까.

“형은 신경 쓰지 마.”

“뭘 신경 쓰지 마. 다른 남자한테 몸 팔겠다는 소립니까?”

“아니, 안 해요. 진짜……. 너무 아파.”

“아파?”

“허리.”

취한 손이 허리께를 툭 치고는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정말 감시를 하든가 해야지.”

경고하듯 낮게 중얼거리자 이내 눈이 감긴다. 이 상황에 잠이 잘도 오는지 순식간에 고롱고롱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만 열 받은 것 같아 짜증 나서 해일의 이마에 핏대가 확 섰다. 이걸 대체 어떻게 요리해 삶아 먹어야 하나, 엄청난 고뇌가 밀려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말랑한 볼을 툭 쳤다.

“너만 엮이면 내 생각대로 안 돼.”

“…….”

“항상 그랬어.”

* * *

“기억이 난 얼굴인데.”

“…….”

“사태 파악이 좀 됐어요?”

입이 바싹 말랐다. 형이 물었지만 입을 열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 이사를 불러내는 정신 나간 사원이 바로 나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길이 없어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인내심 있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오른쪽으로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 왼쪽으로 기울이며 ‘응?’ 하고 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취해서…… 너무……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끝없이 사과를 쏟아냈다. 정말 미쳤던 게 아닐까. 나는 어제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더니 팔짱을 꼈다.

“어디까지 기억해요?”

“어어…….”

“술 마시고 나한테 전화한 거?”

“으……아……. 네……. 전부는 아니고, 조금요…….”

머리를 쥐어뜯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대고는 형, 형, 하며 대들었던 게 기억났다. 기억의 조각이 뇌리에 날카롭게 박혀들었다.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거센 두통이 밀려왔다.

결론적으로 나는 형이 하지 말라는 짓을 전부 한 것이다. 과음했고, 일찍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형이라고 마구 불렀다. 오늘은 묻는 말에 대답도 늦게 했다.

얼마나 혼날까? 제발 간밤의 내가 ‘형’이라고 부른 것 이상의 짓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그것보다 더 심한 소리를 지껄였다면 그냥 혼나는 수준은 아닐 것 같았다. 형이 내 엉덩이를 때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았다. 수틀린 그가 더 세게 몰아붙일까 걱정되었다. 힐끔거리며 형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또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자다 깬 바보 같은 얼굴로, 술 마시고 한 실수를 사과하고 있다는 게……. 평소에 형에게 무시당하는 게 정말 억울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왜 무시당하는지 알겠다. 나도 내가 너무 한심했다.

“서도운 씨.”

사형선고 내려지듯 이름이 불렸다. 나는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내가 할 말이 정말 많은데…….”

형이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팽팽하게 이어지는 듯하던 긴장감을 그가 한숨과 함께 끊어냈다.

“일단 씻고 나오세요.”

“네?”

어떤 모진 말이 날아올지 걱정하던 것과는 다르게 형은 여상한 말투로 씻고 나오라고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나는 혹시나 그가 번복할까 봐 다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재빨리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고, 흘긋 눈치를 보다가 서재를 빠져나왔다.

욕실에 들어온 나는 쏴아아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멍하니 맞고 서 있었다.

우선 씻고 나오라고 하기에 쭈뼛대며 욕실로 들어오긴 했는데, 왜 씻으라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다시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나를 안 혼내는 게 아니라, 씻고 난 다음에 혼내려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정답 같았다. 설마 아침부터 섹스를 할까 싶어도 그의 성격으로 미뤄 보면 시간대에 개의치 않고 다리를 벌리라고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는 옷을 다시 입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나가야 할지 고민까지 되었다.

몸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끝없이 생각했다. 항상 형이 씻고 나오라고 할 때마다 벗고 나갔고, 그리고 섹스로 이어졌다. 그러면 지금도 벗고 나가야 하는 걸까. 처음에 다시 옷을 입고 나갔다가 혼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벗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옷 입은 모습을 바랐는데 알몸으로 나가면 그건 그거대로 또 혼나지 않을까.

“울고 싶다…….”

눈치 없는 스스로가 너무 미워졌다.

잠시간 고민 끝에 결국 옷을 입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가려는데, 때마침 욕실이 있는 이 방으로 들어오던 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하아.”

형은 의도를 알 수 없는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가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하루에 몇 번씩 사람을 놀라게 하는지.”

그 한 문장만 남겨놓고는 다시 뒤돌아 방을 나갔다. 처음엔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는데, 쇼핑백을 열어 보니 그 안에 옷이 들어 있었다. 나는 쇼핑백과 형이 사라진 방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냥 말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행히 섹스는 아니구나. 안심하기엔 이르긴 했지만, 그래도 목이 뻐근하게 아플 때까지 긴장하던 방금 전보다는 기분이 나아졌다.

그가 준 옷을 갖춰 입으니 멀끔한 정장 차림이 되었다. 몸에 대고 만든 것 같은 꼭 맞는 사이즈가 신기했다. 머쓱하게 팔뚝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집에 있는 내 저렴한 정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시 서재로 돌아가자 형도 옷을 입고 있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 그의 근처로 다가가며 나도 모르게 내 넥타이를 매만졌다.

“잘 맞아요?”

“아, 네.”

“갈 곳이 있습니다. 업무차.”

셔츠 깃을 내려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옆에 걸린 옷걸이에서 재킷을 내렸다.

“지금 말씀입니까?”

“주말인데 일 좀 해야겠습니다, 서도운 씨.”

형은 재킷을 걸치며 탁자 위로 턱짓했다.

“술은 다 깼겠죠.”

그곳에는 차 키가 놓여 있었다.

일? 일을 하라고? 잠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멍하니 그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잽싸게 차 키를 집어 들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차는 호텔을 빠져나와 수원으로 향했다. 기사님도 김 실장님도 없이 서울 이외의 지역까지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운전을 하다 보니 나도 점차 차분히 가라앉았다. 깊게 고민하거나 생각할 것 없었다. 형은 지금 일이 제일 중요했고, 그의 일을 수행하는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바로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아득해져 갔다.

형은 태블릿으로 전달받은 문서를 확인하기도 하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아마 연구소 직원인 듯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에 불량률이 높아지는 문제가 있어 그가 확인차 발걸음하는 것이었다.

회의 때 익히 들은 주력 상품 분야였다. 불량률이 회사에서 책정하는 기준을 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폭 상승한 채 지속성을 보이고 있었다. 상급 책임자가 갑자기 바뀐 것이 원인인 듯 보였다.

공장에 도착해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내부를 견학하고, 곧장 브리핑을 받으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책임 소재를 묻는 대화가 오가고, 간략하게 회의가 진행되었다. 형의 옆에 앉아 모든 대화를 끝없이 메모하고 말을 보태며 생각했다. 이렇게 공사다망한 사람을 내가 미쳤다고 불러낸 것이다.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해서.

하루에 수십 번씩 자책해도 모자랐다. 왜 이렇게 멍청할까. 처음부터 내가 청영에 입사한 게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냥 다른 막노동을 해서라도 청영은 오지 말았어야 했나…….

“서도운 씨.”

“…….”

“서 비서.”

“……네!”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나를 부르는 줄도 모르고 서 있다가 대답하자 그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그냥…… 제품 생각이요.”

“애사심이 강하네.”

형이 피식 웃었다. 방금 입사를 후회했다는 건 평생 비밀로 하기로 했다.

건네주는 가방을 받아 챙기고, 공장에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약 두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생각보다 조금 길어진 미팅이었지만 오전에 출발했기에 아직도 중천에 해가 떠 있는, 점심때가 살짝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나와서 이 시간까지 일을 하고 나니 조금 허기가 졌다. 집에 가자마자 근처 마트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형도 허기질 것 같았다. 그에게 요깃거리라도 사다 주어야 하나 싶어 물어보려는데, 차에 올라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근처 A 호텔로 가죠.”

차의 시동을 걸려다 말고 손을 우뚝 멈췄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A 호텔이요……?”

“모르겠으면 내비게이션 검색하세요. 멀지 않습니다.”

길을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나한텐 호텔이라는 단어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아침에 그냥 넘어갔다고 내심 좋아하던 게 무색하게도 그는 호텔로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대답했다. 급격하게 기운이 빠진 몸이 힘없게 시동을 걸었다. 내 처지가 이런 걸 누굴 탓할 수 있을까.

내비게이션에 호텔 이름을 찍고 있는데, 문득 보안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가던 호텔은 청영이 소유한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보안도 철저했다. 특히나 형이 사용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나 그 층은 아무나 드나들지도 못하고, CCTV 또한 용도에 따라 쉴 새 없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며 그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었다.

A 호텔은 그런 부분이 미흡할 텐데, 과연 안전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길 안내를 시작한다는 알림음에도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며 형에게 물었다.

“이사님, 호텔은 서울로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A 호텔에서는…….”

“…….”

“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살짝 돌려 얘기하자 무심하던 형의 표정이 조금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뭐가 어려운데요.”

“그…….”

“둘만 있는데 왜 말을 못 합니까. 정확하게 얘기해 봐요.”

하긴, 그랬다. 회사에서는 밖에 사람들이 있어도 섹스에 관련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 왔었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대답했다.

“……섹스요.”

“하하, 서도운 씨.”

형은 보고 있던 태블릿을 옆에 엎어 내려놓으며 웃었다.

“A 호텔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

“밥 먹으러.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플 것 아닙니까.”

레스토랑……!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순식간에 볼이 화끈거려 얼굴이 타오를 것만 같았다. 재빨리 몸을 다시 돌려 똑바로 앉고는 안전벨트를 당겨 매며 허둥댔다.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아닙니다. 저는 그냥 걱정이 돼서…….”

“귀가 새빨개졌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룸미러로 시선이 갔다. 거울 속에 비친 그는 창틀에 한쪽 팔을 괴고는 비스듬히 앉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시선이 닿는 귓가도 간지러웠다. 마구 문질러 해소하고 싶었지만 그를 의식한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뒤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도무지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호텔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둘만 차 안에 남아 있는 이 어색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조금 속도를 낸 탓도 있다.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있는데, 형이 내리면서 내 귓불을 만지고 지나갔다. 실수가 아니었다. 엄지와 검지로 가장 말랑한 살 부분을 콕 잡고는 바로 손이 떨어져 나간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귀를 확 잡으며 한 발짝 물러섰지만, 형은 이미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놀림 받은 것 같은 느낌에 간신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벌렁거렸다.

주차 요원에게 키를 맡기고 재빨리 형의 뒤에 따라붙었다.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의 걸음걸이에 맞추려면 움직임을 조금 서둘러야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부터 바닥으로 반짝거리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햇빛과는 또 다른 반짝임에 눈가를 찡긋거리는 사이, 두세 명의 무리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정 이사님.”

미리 연락을 주거나 예약하지도 않았는데 형을 알아보고 로비에까지 사람이 마중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려던 찰나, 인사를 건넨 사람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총지배인 이해성이라고 합니다. 문 전무님께서 연락 주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가슴에 금빛 명찰을 단 지배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내했다. 형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고는 안으로 향했고, 나는 문 전무라는 말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A 호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 전무가 일하는 AG 기업의 소유였다. 분명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레스토랑이 위치한 층으로 이동했다. 문이 열리고, 옅은 갈색의 카펫이 깔린 길을 쭉 따라 들어가니 화이트 톤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넓은 창 앞에 두 명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배인이 베일을 치는 사이 형은 재킷을 벗었다. 내가 냉큼 받아 들고는 한구석에 놓인 옷걸이에 예쁘게 걸었다.

옷걸이 하나도 무척이나 비싸 보였다. 꼭 나무처럼 가지가 뻗은 옷걸이는 그 끄트머리마다 금색 새 장식이 놓여 있었다. 동글동글한 새의 머리를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지배인이 바로 메뉴판을 준비해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형은 한쪽 의자에 앉았고, 나는 그의 뒤쪽으로 가서 두 손을 모아 쥐고 얌전히 섰다.

“뭐 해요?”

“예?”

“앉지 않고 뭐 하냐고.”

웨이터가 작은 은접시 위로 따뜻한 물수건을 올렸다. 그는 삼각형으로 접힌 물수건을 펼쳐 손을 닦으면서 자신의 앞, 비어 있는 의자로 턱짓했다.

“앉아요.”

나는 따로 마련된 자리가 있거나, 아니면 내 식사는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게, 나는…… 이런 곳에서 형과 같이 먹을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을 못 했다. 문 전무의 호텔인 것으로 보여서 그가 와서 함께 식사하는 줄 알았다.

어어……. 맹한 소리를 내다 눈치를 보곤 슬쩍 발을 떼었다.

쭈뼛거리며 형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로 가서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처럼 살짝 비틀어 앉았다가 그가 매서운 눈을 하고 쳐다보기에 결국 똑바로 마주 앉았다.

때마침 지배인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공손히 받아 들고 열어 보았는데, 전부 코스 요리인지 메뉴가 순서대로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라별 식단으로 나누어진 것 같았지만 워낙에 생소한 메뉴와 재료들이라 설명을 읽어도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메뉴판 너머로 형을 흘긋댔다. 그는 큰 고민 없이 메뉴판을 접더니 따로 추가하거나 빼는 것 없이 일반적인 코스 요리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나보고 주문을 하라는 것 같아 어물대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드시지 못하는 식재료는 없으신지요.”

“어……. 네. 괜찮습니다.”

오이를 빼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말았다. 형도 그대로 시켰는데 내가 뭔가를 빼고 더하는 게 우스워 보이지 않을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편식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편식은 아닌데…… 오이에 약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먹어도 조금 붓거나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수준이었다. 약을 먹으면 금방 가라앉기도 한다. 메뉴의 음식 중에 부디 오이를 쓴 음식이 없기를 바라며 메뉴판을 돌려주었다.

지배인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베일이 걷혔다가 되돌아오며 사르르 흩날렸다. 바깥을 완전히 차단하지도, 그렇다고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보이지도 않는 것이 딱 좋았다.

“문 전무님이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문 전무가 왜요.”

“아까 지배인님이, 문 전무님이 연락 주셨다고 하셔서…….”

어색한 상황에 말끝을 흐리며 나도 따끈따끈한 물수건을 손에 쥐었다.

“두 분이 식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문 전무는 지금 프랑스에 가 있습니다.”

“아…….”

그러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저번 주말에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문 전무가 다음 주에는 못 올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프랑스에 가느라 그랬던 거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 전무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사람을 안심시킬 줄은 몰랐다. 문 전무가 나와의 일은 비밀에 부쳐 주기로 했지만, 몇 번 보아온 결과 그는 꽤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나 장난기가 도져 비밀을 흘리는 척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테이블은 잠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작게 넘어왔으나,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음식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

전채 요리와 함께 와인이 한 병 들어왔다. 검은 라벨로 감싼 화이트와인이었다.

“문 전무님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차갑게 식힌 통에서 꺼내 와인을 확인시켰다. 형은 문 전무답다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잔에만 따를 것을 부탁했다. 나는 운전을 해야 하는 데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운 탓에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머지않아 메인 요리도 테이블에 올라왔다. 이름 모를 해산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꾸며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금가루가 내려앉은 익힌 가재살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젓가락을 머뭇대자 그가 땅콩가루가 들어간 소스를 친히 섞어 내 앞에 놔주었다.

“감사합니다.”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고민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맛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포크로 익힌 당근과 함께 콩콩 찍어 맛있게 먹었다. 오이가 없다는 것도 내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데에 한몫했다. 괜히 또 오이가 나오면 편식쟁이처럼 걸러내야 하니까. 그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창 맛있게 식사하고 있는데, 형이 넌지시 물어왔다.

“면허는 언제 땄어요?”

그를 바라보았다. 물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종류의 질문이라 잠시 당황했으나, 가벼워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늦지 않게 대답했다.

“수능 끝나고 바로 땄습니다. 필요할 것 같아서.”

운전면허가 필수처럼 여겨지는 문화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보다도 혹시나 하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면허를 땄다. 어머니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할 비상 상황.

당시 고된 노동 때문에 몸이 허약해졌던 어머니는 이런저런 병을 달고 살았다. 매일같이 기운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열이 나 몸을 못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가 크게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평소와 달리 사지를 경련하며 쓰러진 어머니가 머리를 계단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는데 동네가 험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구급차가 빨리 오질 않았다.

기다리던 1분 1초가 지옥 같았다. 어머니가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결국 가까이 지내던 동네 음식점 사장님이 차로 어머니를 병원까지 데려가 주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퇴원할 수 있었다. 사장님은 어서 면허부터 따야겠다고 말해주었다. 급하면 그냥 가게에서 차 키를 가지고 가라고까지 하면서.

세심한 배려에 무척 감동했지만, 나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는 없길 바랐다. 그렇게 사장님이 조언해 준 대로 면허를 따긴 했지만, 그러기가 무색하게 어머니는 병원에 장기 입원을 시작했다.

“……연수는 많이 못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말할 필요는 없겠지.

형이 이런 걸 궁금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그리고 그는 내 옛날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과거는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악취만 날 뿐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일전에 제출한 어학 성적은 준비 기간이 얼마나 돼요?”

“어, 그건 제출하라고 하신 뒤에 바로 등록했습니다. 가장 빠른 시험이 3주 뒤에 있었는데…….”

나는 주절주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저번 주 회사로 찾아왔던 거래처 얘기나, 회계 공부에 대한 진척, 또는 오늘 들렀던 공장 이야기 같은 것들이 주제였다.

일과 관련된 얘기라고 해서 무겁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나누던 대화와는 확실히 달랐다. 지금 하고 있는 대화는 꼭 친구 사이에 가볍게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같았다. 형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메인 접시가 거의 비워지자 후식이 나왔다. 후식도 세 단계에 걸쳐 나온다고 하기에 입이 떡 벌어질 뻔했다. 이미 배가 너무 불러서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청록색 포도가 너무 맛있어 보여 절로 손이 갔다.

“맛이 좋네요. 해물을 잘 만진다더니 역시 깔끔하고. 서도운 씨는 어떻습니까.”

“맛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세요.”

지금도 또 형과는 해볼 수 없을 것 같던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생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 착각이라고 생각하자. 스스로 그렇게 세뇌하는 것이 정신에도 더 좋을 것 같다.

“부산타운 호텔 주방장으로 데려오면 괜찮겠는데.”

형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음료를 마셨다. 나는 내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컵을 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비죽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가리며 물을 마셨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전부 꿰뚫어버릴 것 같은, 그 푸르스름한 삼백안과 마주하면…….

“무슨 생각 해요?”

시선을 드는 순간 형과 눈이 마주쳤다. 척추를 타고 저릿한 감각이 정수리까지 뻗어 나갔다.

“……네?”

“골똘해 보여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컵을 내려놓으며 괜히 허둥댔다. 손가락을 마구 얽고, 손끝으로 멀쩡한 식기를 건드리기도 하고. 형은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가 모든 식사를 마칠 때까지 눈을 마주하지 않았으니.

식사가 마무리되고, 지배인이 다시 등장해 식사가 어땠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등을 물었다. 그는 만족스러웠다며 주방장에 대한 칭찬도 건넸다. 정말 부산타운으로 데려올 생각인 건가 싶어 수첩을 꺼내 별표를 치고 몇 자 적었다.

형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나도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그의 재킷을 내려 한 번 털듯 모양새를 잡은 뒤 그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팔을 끼워 넣었다. 어깨까지 올린 뒤 옷깃이 구겨지진 않았나 매만지며 확인했다.

그러고 있자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그가 아침에 준 것이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아침엔 너무 경황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속옷부터 양복까지 지금 걸치고 있는 모든 게 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짙은 회색을 띠는 재킷을 내려다보다 손으로 배 위를 쓱 쓸었다. 의식하고 나니 어색하다.

“이사님.”

“네.”

“옷은 세탁한 뒤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돈이라도…….”

바깥으로 성큼성큼 나가는 형의 뒤를 따라붙으며 말했다. 그는 잠시 복도 중앙에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머리부터 하반신까지 지그시 누르듯 훑더니 눈썹을 가볍게 올렸다 내리며 말했다.

“그 작은 옷을 내가 어떻게 입는다고 돌려줘요.”

“그렇지만…….”

코트도 사주지 않았느냐고, 너무 많이 받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술주정으로 그렇게 민폐를 부려놓고는 뻔뻔히 옷도 받을 순 없었다.

“키가 어떻게 됩니까?”

형이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180…….”

“…….”

“……178입니다.”

고작 2센티 올려 얘기했다고, 그의 눈매가 예리하게 신장을 훑었다. 어쩐지 억울했지만 다시 중얼중얼 진짜 키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 혼자 찔려서 그래.”

형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창피해……. 형에게 자꾸 이런 엉성한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깐 급해서 말을 못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손이 뻗어왔다. 옆머리에 닿는 손길에 놀라 다시 고개를 들자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누르듯 매만지더니 귓바퀴를 타고 내려왔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놀라 힘을 주기도 전에 손이 내려와 어깨에 닿고…….

“잘 어울립니다. 그 갈색 코트보다 더.”

가슴께를, 그러니까 재킷의 앞주머니쯤, 내 심장 위를 지그시 눌렀다.

손은 오래 머물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그는 진하게 웃었다. 내 빨개진 얼굴을 보고 웃은 것일까, 걱정이 들기도 전에 뒤로 돌아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저 멀리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 발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이 닿았던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옷을 구기듯 쥐었다.

따라오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그가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뛰었다.

심장이 쿵쿵댄다. 울리는 심장을 멈출 방법도 몰랐다. 종착지도 없이 달리는 열차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이제 그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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