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많이 피곤하십니까?”
서울로 차를 몰고 가던 중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 전 누군가와의 통화를 마친 형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룸미러로 모습을 살피니 눈을 꾹 누르듯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반복하고 있었다.
토요일인데 수원까지 내려가 회의하느라 당연히 피곤할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서류를 미리 정리해 두는 게 좋겠다며 바로 회사로 갈 것을 명령했다.
서류는 나 혼자 제작해서 월요일에 그의 확인을 받아도 충분했기에 그냥 집으로 차를 돌릴까 싶었다. 혼자 하려면 조금 오래 걸리긴 할 것 같았지만 이제 주말 출근은 익숙해서 저녁 시간까지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은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를 밀어 끄고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룸미러 속의 나와 눈을 맞췄다.
“곧바로 자택으로 모실까요?”
“아뇨.”
여상히 흘리는 대답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주제넘었나 싶기도 하고. 그에게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고 신경 쓰였다. 잘못해서 괜히 책잡히거나 미움을 사기는 싫으니까.
형은 아무 생각 없는데 내가 과민하게 신경 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만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칭찬을 해주고, 그렇게 나를 마구 휘두르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린다. 나는 딱 거기까지인 느낌이었다. 편하게 잘 수 있는 상대.
“…….”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왜 슬퍼하지. 진짜 주제넘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어떻게 운전했는지도 모르는 새에 서울에 도착했다. 회사에 차를 멈춰 세우기 직전까지 습관적으로 룸미러를 흘긋거렸는데,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비서실에 올라가서는 곧장 일을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형에게 필요한 서류부터 전달했다. 그가 검토하는 동안 자료실에서 필요한 파일을 뽑아 들고 와 데스크톱 앞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꼼꼼히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형도 일을 미리 해두는 게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나도 조금 그런 편이었다. 미루면 쌓여서 피곤해지고, 잊기 전에 그때그때 해두는 게 일을 배우는 것에도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사원이라서 그렇다지만, 그는 다른 기업 총수들과는 다르게 일을 열심히 했다. 팀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사람들은 출근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데, 그의 경우엔 출근하지 않는 날이 거의 드물 정도였다.
혼자서 위험에 빠졌던 회사를 일으켜 세우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갑자기 반성 모드가 되어가는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볼을 착착 때리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중간에 형이 내려보낸 파일을 받아 합쳐 출력했다. 필요한 내용이 전부 들어갔는지, 오탈자 등의 문제가 없는지 형광펜을 쳐가며 꼼꼼히 확인하고 다시 한 부를 더 뽑아내 다른 자료와 하나의 파일로 묶었다.
조심스레 이사실의 문을 두드리고, 마지막으로 형의 사인을 받아내고 나서야 오늘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수고했습니다.”
형이 만년필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 서류를 받아 들며 연하게 웃었다. 아주 폭풍 같은 하루였다. 어젯밤부터 정신없이 일이 몰아친 기분이라, 어쩐지 후련한 숨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나진 않겠지. 아직 어제의 잘못에 대해 혼나지 않았다. 나는 예상되는 뒷일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슬쩍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길어져 이젠 5시여도 한낮과 같다.
“이만 가봐요.”
“네?”
이번에야말로 당연히, 다시 호텔로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어제의 꾸중을 듣지 않은 것도 그렇고, 내가 어제 입었던 옷도 호텔 세탁 서비스에 맡겨 두었는데. 옷을 다시 받으러 가기 위해서라도 가야 하지 않나……? 호텔의 세탁 서비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먼저 돌아가도 좋습니다.”
“이사님.”
왜 그러는 거지? 형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데 이러는 모습을 보니 더 무서웠다.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나중에 한 번에 혼내려는 거면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또 없을 것이다.
나는 아까의 망신으로 도무지 내 입으로 다시 말할 자신이 없는 것을 또 꺼내 물어봐야 한다는 게 너무 창피했지만,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기에 결국 입을 열었다.
“호텔에…… 안 가십니까?”
“오늘따라 왜 그러지.”
형이 정말 왜 그러냐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요. 섹스하고 싶어요? 아니면 돈이 급한가.”
“그런, 그런 게 아니라.”
돈이 급하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어쩐지 씁쓸해진 기분에 마음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데스크 앞으로 돌아 나와 다리를 꼬듯 서서 몸을 기댔다.
“어제 제가 잘못한 게 있는데, 화도 안 내시고…… 혼내시지도 않고. 그래서, 저는 너무 걱정돼서요.”
자꾸만 내려가는 시선을 애써 올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오늘 형의 행동을 보면 혼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하는 꼴과 같지 않았던가. 옷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잘 어울린다고 좋은 말까지 건넸다.
“매를 맞고 싶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불편해서요. ……맞습니다. 혼나고 싶어요.”
나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제가 또 잘못하면…… 크게 실망하실 것 아닙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좋게 그냥 넘어가고 나면 으레 기대하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봐준 대신 앞으로 더 잘하겠지, 라든가. 그런 무게를 짊어지고 싶진 않다. 감당이 안 되었다.
“왜 잘못할 생각만 해요? 잘하면 되지.”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형이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잘한다’는 기준은 매우 높은 편이라 항상 혼나기만 하는 내 처지가 불쌍할 지경인데.
그는 팔짱을 끼듯 하더니 한쪽 손으로 눈가와 눈썹 뼈 부근을 매만졌다. 으음, 하고 작게 앓듯 소리를 내는 것에 이어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혼내지 말라면서요.”
큰 손에 가려진 입가 때문에 순간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어젠 혼내지 말라면서. 이것도 기억 못 해?”
“예……?”
“혼내지 말랄 땐 언제고.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네.”
혼내지 말라고 했다고? 내가?
“제가, 그런 소리까지 했습니까?”
“전에 내가 혼낸 게 무척이나 억울했던 것 같던데요.”
“와……. 아…….”
혼내지 말란 소리까지 했었다니.
아침부터 이어진 충격은 끝날 줄을 모르고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쳤다. 혼내지 말라고? 잘못해 놓고 혼내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 미쳤다. 형, 형, 불러젖힌 것도 모자라 이렇게 버릇없고 무례한 소리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서도운, 너 왜 그랬어…….’
나도 모르게 재킷 아랫단을 구기듯 꾹 쥐었다. 단순한 직장 상사와 부하라면 웃고 넘길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되는 관계였다. 돈과 몸으로 얽혀 있었다. 나는 형에게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런데 술 한잔으로 그 선을 훌쩍, 한참이나 넘어섰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등골이 싸늘해졌다. 이건 정말 반드시 혼나야 한다.
“어젯밤 일은 정말,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이사님.”
재차 허리를 숙였다.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서도운 씨.”
“네.”
“오늘 섹스하면 내가 많이 혼낼 것 같은데.”
그가 손을 뻗었다. 가볍게 내 귀밑 턱에 손끝을 대더니 슬슬 내려 목선을 쓸었다. 손은 재킷 사이로 살짝 들어갔다. 옷이 들리며 벌어졌다. 단추를 잠근 탓에 완전히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가 다른 손으로 단추를 톡 풀어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엉덩이, 때리시는, 아…….”
큰 손이 셔츠 위로 어깨 부근을 매만지다 옆구리로 내려왔다. 간지럽게 문지르는 것도 모자라 엄지가 유두 위로 올라왔다. 손끝으로 세게 긁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행위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머리까지 소름이 올랐다. 둥글게 문지르다 허리를 꽉 쥐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겼다. 자꾸만 달뜬 소리가 입가로 새어 나왔다. 부끄러워서 아랫입술을 살포시 물었다.
“여기서 벗으라면 벗을 수 있겠어요?”
“어, 읏…….”
바로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대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회사이기도 하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창이 커 너무 밝기도 했다. 주말이라 사람은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눈가가 뜨끈해졌다.
“시, 시키시면, 하겠…….”
“됐어요.”
형은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내가 되물을 새도 없이 내 재킷을 다시 여며 단추를 채워줬고, 어깨를 탁탁 털어주기까지 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뭘 하겠다고.”
“죄송합니다, 이사님. 안 울고 잘…… 하겠습니다.”
“됐다니까. 할 맛 떨어졌어요.”
형은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당황한 눈동자로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사님, 혹시.”
“화 안 났으니까 그만 가봐요.”
내가 물으려고 했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말을 가로막으며 그가 말했다.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지. 그가 대단하게까지 느껴졌다. 정말 내가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고 화 안 내는 것은 아닐 것 아닌가?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손가락을 꼬며 그의 눈치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형은 나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내가 너 참 많이 봐주는 것 같아.”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그 이후로 형은 나를 호텔로 부르지 않았다. 그런 상태는 꽤 지속되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불러내 무자비하게 몸을 취하고는 했는데, 그날의 주정 사건 이후로는 그의 호텔에 불려가지 않은 지 몇 주가 훌쩍 넘었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입사 초기보다는 일도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았다. 매일같이 사업 보고서를 살피고 정리하다 보니 이젠 더 끄집어내 공부할 것이 없기도 했고, 그냥 내가 많은 일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출근했다. 내가 그렇게 사고를 친 것치고는 형의 심기도 많이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형은 호텔로 나를 부르는 대신에 이사실로 호출하기 시작했다.
별로 하는 일은 없었다. 불려가서 실장님 대신 스케줄 브리핑을 해드리거나, 아니면 일의 진척도 같은 것을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아주 간혹, 특히 그가 사준 옷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출근하는 날은…….
“이리 와봐요.”
가까이 부르기도 했다.
이젠 와보라는 게 어느 정도로 가까이 붙으라는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형과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가 섰다. 그가 다리를 살짝 벌리면,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서면 되었다. 어쩐지 부끄러워 이럴 때마다 그의 눈을 자꾸만 피했다.
“셔츠가 빠져나와서요.”
“아…….”
“옷차림 단정히 안 할 겁니까.”
“죄송합, 니다.”
형은 오른손을 내 허벅지 뒤쪽으로 가져갔다. 오금에서부터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 손에 힘을 주고 쓸어 올리더니 가볍게 엉덩이를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엉덩이 위를 스치듯 손을 움직여 허리에 댔다.
살짝 빠져나왔던 셔츠를 넣어주는 야릇한 손길을 받고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바깥을 흘긋댔다. 그러자 그는 어김없이 엉덩이를 세게 쥐며 집중시켰다.
“눈치 보지 말라고 안 했어요?”
“죄송합니다.”
거의 이런 식이었다. 팀원들 몰래 은밀한 만남이라도 가지는 것 같아 내 심장은 남아나질 않았다.
팀원들이 다른 협력 부서로 빠지고 비서실에 아무도 없었을 때는 대놓고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오기도 했었다. 그의 대담함에 진땀을 빼는 건 항상 나였다. 이렇게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팀원들이 알아채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쌓여만 갔다.
형은 그렇게 초조해하는 내 모습을 보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형을 정말 미워하고 싶은데…… 이미 한 번 자각해 버린 마음을 잠재우기는 힘들었다.
* * *
바쁘게 일한 금요일이 끝나고, 토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뻐근한 어깨와 상체를 풀어주고, 까치집이 된 머리를 쓱쓱 빗으며 완전히 일어났다.
아침으로 딱히 챙겨 먹을 만한 게 없어 남은 우유를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는 곧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토요일이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편하게 하고 나오라는 당부에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 봤자 옷이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장과 캐주얼한 옷 사이의 고민이었지만. 주말 약속인데 너무 격식을 차려도 우스울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편하게 입기엔 그 상대가 편하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냥 하얀색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두운 회색 남방을 걸친 뒤에 옷 고르기를 마무리했다.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
스니커즈를 신고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서울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입구가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직 오픈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안에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테이블 세팅을 하는 종업원 몇 명이 저 멀리 보이긴 했으나 차마 들어가서 물어볼 용기가 없어 그냥 잠시 구석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에서 5분 정도 지나 있었다. 온 연락이 없나 핸드폰을 잠시 확인하고 다시 뒷주머니에 넣어두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약속 상대가 나타났다.
“서도운 씨.”
남자는 나를 보며 활짝 웃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둘렀는지 숨이 차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미안해요, 조금 늦었네요.”
“괜찮습니다.”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던 문 전무가 다시 웃었다.
“먼저 들어가 있지 그랬어요.”
문 전무는 내 옆으로 나란히 섰다. 어깨동무하듯 팔을 올려 왼쪽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금세 내리고는 어서 들어가자며 앞서 나갔다.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한 발짝 느리게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직 영업 시작 안 한 것 같아서…….”
“가오픈한 곳이라 오늘은 나만 오기로 해서 손님이 없죠.”
“아,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얼마 전 문 전무에게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약속을 한 날이었다.
물론 형에게 이 만남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숨기고 있는 비밀도 있었지만, 비서가 다른 기업의 임원을 만난다는 것이 혹여나…… 회사 이야기를 유출하거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 전무도 참 예리한 사람이었다.
‘형이랑 닮았다.’
순간 형이 지적하는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맞은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은 내가 알아서 시킬게요. 정말 맛있는 메뉴가 있어서.”
“네.”
문 전무는 웨이터가 들고 온 메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약하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많이 배고팠던 모양인지 메뉴 고르는 것도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나는 레스토랑 내부를 훑었다. 모든 게 전부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아직 정식 오픈도 안 한 곳이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어요?”
“오이요.”
“오이 들어가면 빼주시고요.”
문 전무는 무어라 주문을 하더니 내게 친절하게 물어주기까지 했다. 상당히 매너 있는 사람이었다. 웨이터를 보내기 전 셰프가 나왔는지 등을 묻다가 나의 멀뚱한 시선을 느꼈는지 문 전무가 내게 입을 열었다.
“아는 형이 여는 곳이어서요.”
“아, 그렇구나…….”
“따지고 보면 여기가 분점 같은 거예요. 파리에 본점이 있고. 솜씨가 좋아서 아마 만족스러울 거예요.”
뭔들 라면이나 딱딱한 찬밥보다는 맛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내부에 너무 편하게 입고 온 것은 아닌가 싶어 스니커즈 신은 발을 의자 안쪽으로 숨겼다.
“앞에서 보고 순간 대학생인 줄 알았어요.”
칭찬인가 싶은 말을 문 전무가 갑자기 꺼냈다.
“제가 너무 편하게 입고 온 모양이에요.”
“아뇨, 잘 입고 왔는데요.”
“전무님께서 편하게 입으라 하셔서 그렇게 입었는데, 전무님은 정장 입으시고…….”
내가 쭈물쭈물 말하자 그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 그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뜯어 살폈다. 부드러워 보이는 흑갈색 머리카락과 밝은 피부. 시원하게 찢어지는 입매가 눈에 띈다. 지나가다 언뜻 보아도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 친화력도 좋으니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나 따위를 만나는 데 시간을 써도 될까, 싶을 정도로.
“나도 편하게 입은 건데. 그냥 셔츠에 바지 차림이잖아요.”
“저도 그럴 걸 그랬습니다.”
턱을 괴며 내 옷차림을 훑는 문 전무의 눈길을 피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목이 탔다.
“해일이랑 우리 호텔 와서 식사했다면서요?”
“네.”
“나는 김 실장이랑 오는 줄 알았는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해일이가 나한테 연락했을 땐 그냥 김 실장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런가요……?”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사실 우리 집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사님이고, 비서는 그냥 그를 보좌하는 사람일 뿐 그게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김 실장님이나 다른 누구나 나나, 그냥 하나로 묶여 비서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형의 표정도 쉽게 읽지 못하는데 잘 모르는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냥 지구 정반대인 프랑스에서 연락을 받고 멋진 식사를 준비해 준 문 전무의 우정에 감탄할 뿐이었다.
“호텔 식사는 어땠어요.”
“아주 맛있었습니다. 정말로요.”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어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진심을 담아 강조하듯 대답했다.
“정말 맛있었나 보네. 다음에 볼 땐 거기로 가죠. 메뉴판에도 없는 비밀 메뉴가 있는데, 그게 진짜 맛있거든요.”
문 전무가 입가를 살짝 가리며 귓속말하듯 말했다. 나는 기뻐서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다음에’라는 단어가 살짝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내가 을이었지. 부르면 가야 했다.
“해일이가 뭐라고 해요, 우리 호텔?”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랬을 리가 없는데. 걔 사업가적 기질을 생각해 보면요.”
“……이사님과 업무상으로 나눈 대화는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우리 주방장 빼가려고 하죠?”
그의 예리한 물음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문 전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쿡쿡 웃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았지? 친구라더니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거 아닌가!
“아, 귀엽네.”
그의 손이 순식간에 뻗어와 그 끝으로 볼을 톡 치고 사라졌다. 짧은 순간 벌어진 일이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멈춰 있었다. 문 전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냅킨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첫 요리가 등장해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그제야 나는 접시 위 냅킨을 허둥지둥 펼쳐 허벅지 위로 올렸지만, 문 전무에게 자꾸 시선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놈은 정말……. 수원점 셰프는 우리 회장님이 직접 데려온 사람이거든요. 해일이가 호텔에 들른 거 알고 회장님이 아주 노발대발을…….”
“그, 그러셨군요.”
“전적이 있어서 이번엔 아마 데려가기 어려울 거예요.”
나는 무어라 답하기 어려운 상황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원래 스킨십이 많은 사람인가 싶었다. 하긴, 전에도 손이나 얼굴을 만지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그랬던 걸 보면…….
형이 주방장에게 관심 있어 보이기에 수첩에 따로 적어 뒀었는데, 이런 것도 집에 가서 적어두고 나중에 말해 줘야겠다. 근데 오늘 문 전무를 만난 걸 비밀로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하지…….
“맛있게 먹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돌려 얘기하거나 그냥 입을 다물든가, 스카우트가 실패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다.
따뜻하게 데워진 접시 위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스테이크가 나왔다. 문 전무의 말을 들어보니 은행과 체리를 갈아 넣은 특제 소스가 들어갔다고 한다.
고기는 무척이나 연해 칼질 한 번에도 슥슥 잘려나갔다. 완전히 익지 않은 붉은 살을 꼭꼭 씹어 삼키자 새콤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정말 맛있어요.”
“그렇죠?”
문 전무는 대단한 미식가인 것 같다. 그가 먹으라는 대로 먹으면 다 맛이 있었다. 종종 그가 와인바로 가져오는 간식거리들도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비싸겠지? 내가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오늘 비상금을 빼 통장 잔고를 채워두고 나왔는데, 메뉴판을 보지 못해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체리 소스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문 전무가 말을 걸었다.
“토요일인데도 일한 거예요?”
“네. 공장에 잠시, 견학차요.”
“역시 비서 일은 주말이 없어서 힘들죠.”
“제가 아직 일이 많이 서툴러서 주말에까지 잘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주말엔 주로 김 실장님을 대동했고, 나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멍청하게 술에 취해서 형을 불러냈기 때문에. 아마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를 데리고 주말에 수원까지 내려가 밥을 사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회사에 틀어박히는 일을 시키면 시켰겠지.
“나한테 뭐 궁금한 거는 없고요?”
“어…….”
“사적인 거 말이에요.”
문 전무는 한쪽 팔을 테이블로 올리더니 턱을 괴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질문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의 대화가 모두 문 전무의 질문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지금 나는 약점이 잡혀 그를 만나고 있는 것이었는데, 식사 시간에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역시 재미없겠지. 무슨 화젯거리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운을 뗐다.
“어, 음. 프랑스에는 무슨 일로 다녀오셨습니까?”
“말투 너무 딱딱한데.”
“……다녀오셨어요?”
이렇게 말하면 될까? 잘 모르겠다. 머쓱한 나와는 달리 문 전무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순간,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했던 형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에게 들키면 정말 혼날지도 모르겠다.
“회장님이 비행기 티켓 던져 주시면 그냥 무조건 다녀와야 해요. 해외 나가서 사업 아이템 같은 거 구상해 오라는 뜻인데, 나도 원래 여행하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크게 불만은 없지만요.”
여행 많이 다닌다는 걸 보니 그렇게 스킨십이 많은 스타일인 것도 이젠 이해가 되었다.
“여행 자주 다니시나 봐요.”
“회사 빼먹을 수 있어서 좋거든요. 원래는 주말에도 종종 나갔었는데, 올해는…… 주말에 도운 씨 보러 가야 해서 주중에만 주로 나가는 중이에요.”
“아…….”
문 전무는 좋은 성격인 것은 분명하지만 가끔 이렇게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드는 면이 있어 조금 불편했다. 당연히 내가 눈앞에 있으니 그냥 하는 빈말이겠지만, 저렇게 쳐다보면…… 꼭 진심처럼 느껴졌다.
“도운 씨는 여행 좋아해요?”
“저는 아직 여행을 많이 못 해봤어요.”
자연스럽게 넘어간 화제에 느릿느릿 대답했다.
여행은 거의 못 해봤다는 말이 더 맞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주 어릴 때나 종종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마저도 회사 일로 바쁜 아버지는 함께하지 못한, 어머니와 둘만 간 여행이었지만.
내가 여행에 조금 관심을 보이자 문 전무는 자신이 다녀온 해외여행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미식 체험을 하러 돌아다니는 듯했다. 유명한 여행지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브런치 가게에 일부러 들렀다던 소소한 이야기도 들었다.
문화 콘텐츠 사업이 중심이어도 뿌리는 요식업이라 그런지 새로운 맛을 탐험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도 많이 만나고, 해외 곳곳에 친구도 있고, 이 나이를 먹고도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형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유학하러 갔을 시절, 함께 여행도 떠났었다고.
“…….”
그날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형도 문 전무처럼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일에 매달릴 필요도 없었을까.
나는 어쩐지 씁쓸해진 기분으로 식사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 전무는 물 흐르듯 나를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AG 기업 소유의 영화관이었다. 식사도 못 샀는데 영화표는 꼭 내가 사야 할 것만 같아서 매표소로 직행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미 상영관 하나를 차지해 둔 상태였다.
문 전무가 손에 쥐여 주는 치즈 나초와 캐러멜 팝콘을 들고 얼결에 상영관으로 이동했다. 이 넓은 상영관에는 좌석이 단 여덟 개뿐이었으며, 그마저도 둘만 앉게 되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어영부영 휩쓸리는 것에 불만을 제기할 새도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차분한 영화는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영화를 본 후에는 카페에 가서 조금 편해진 문 전무에게 영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추워요?”
“괜찮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밤 10시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거지?
슬슬 만남이 마무리되는 것 같아 그를 슬쩍 바라보며 쭈뼛대자 문 전무가 내 앞으로 한 발 나와 서더니 등을 토닥였다.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아, 아니요,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버스 막차 시간까지 약간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지금 바로 출발하면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었잖아요.”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그리고 동네가 험해서 아마 다시 나가시기 무척 어려울 거예요.”
내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턱을 쓰다듬던 문 전무는 이내 알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나를 바래다줄 기세이기에 냉큼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문 전무가 소리 없이 웃으며 리모컨 키를 눌렀고, 나는 비서의 직종에 충실하게 운전석 문을 열고 타시라며 손짓했다.
근처로 걸어온 문 전무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쿡쿡댔다. 나도 얼결에 웃으며 말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도운 씨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제가요?”
말주변도 없어 오늘 지루하진 않았을지 걱정했는데, 재미있다고 해주니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다행이었다.
문 전무는 무슨 목적으로 나를 만나는 걸까? 나에게 대가성의 무언가를 바란다고 하기엔 그냥 너무 평범한 만남 같았다. 같이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 사이처럼.
“다음에 또 뵙게 되면 제가 보답하겠습니다.”
“흠. 다음엔 여행이나 같이 갈래요? 해외로. 휴가 언제예요?”
이렇게 다짜고짜 해외여행을 제안하다니, 역시 친화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휴가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 비서팀은 너무 바쁘게 산다니까.”
내가 어색하게 웃자 문 전무는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 사이 나는 문을 닫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가 차창을 내리더니 입꼬리를 당겨 시원하게 웃었다.
“이렇게 자주 봐요, 우리. 내일 바에도 놀러 갈게요.”
“알겠습니다, 전무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문 전무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창문을 올렸다. 출발해 점점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에 대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상체를 들었을 때는 이미 차가 도로로 빠져나간 후였다.
“……후!”
어쩐지 후련한 마음에 허공에 짧게 숨을 뱉었다.
* * *
“회의 시작할까요.”
형의 낮은 목소리를 신호로 대회의실의 불이 꺼졌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한쪽 벽면에 나란히 앉았다.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기자 오늘 회의를 진행할 발표자가 나타나 고개 숙여 인사하고 PT를 시작하였다.
회의의 주된 내용은 현재 그가 가장 신경을 쏟고 있는 청영 바이오에 관한 것이었다.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브리핑이었는데,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회의처럼 보이게 꾸미고는 보안을 위해 도청 장치 등의 유무를 미리 점검하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시작되었다.
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부산 연구소는 최근 미약하게나마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외부에 흘리기엔 부족했으나 착실하게 진척이 있어 조만간 더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진행될 프로그램에 대해서 QC팀의…….”
회의 내용을 열심히 정리하고 있긴 하지만, 과학적인 부분은 삼분의 일도 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비서라고 해서 그냥 임원진의 시중만 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회사에 와서야 깨달았다.
괜히 다른 직원들이 입을 모아 우리 비서실을 헤드, 혹은 중추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비서실 사람들은 모두 입사 시 가장 뛰어났거나, 해당 부서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천재를 데려와 꾸린 것이었다.
바로 위 사수인 박 대리님만 해도 회사 자체 입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분자생물학에 두각을 나타낸 인재 중 인재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여기서 멍청한 건…… 낙하산으로 들어온 나 하나였다. 성적도 안 좋고, 스펙도 안 좋고, 이렇다 할 경험도 없는. 형이 교수님께 말해 받아낸 억지 추천서 한 장이 전부인 나.
나는 어느 순간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형을 바라보았다. 옅은 어둠이 내려앉은 회의실이지만 스크린에 반사된 빛으로 형의 집중한 얼굴이 보였다.
형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일까. 일하다 보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용서를 받을 수는, 사이가 좋아질 수는 있는 걸까.
‘빚을 다 갚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멍한 의문이 들었다. 왠지 이젠 쓸모없다며 회사에서 쫓겨날 것만 같다. 회사에서 나가게 되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이후의 우리 관계가 신경 쓰였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 연구소 직원들을 보내고 올라왔다. 곧장 이사실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층수 버튼 사이로 비치는 내 모습을 확인했다. 셔츠나 넥타이가 흐트러지진 않았는지, 머리는 잘 정돈되어 있는지 가볍게 훑고 문이 열리자 내렸다.
책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회의실로 뛰어가는데, 코너를 돌자마자 형이 나타났다. 급하게 멈춰 서긴 했지만, 순간 휘청 넘어질 뻔한 것을.
“조심해야지.”
그가 단단히 상체를 잡아주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사님.”
“복도에서 뛰지 마십시오. 애도 아니고.”
흘겨보는 시선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기껏 옷매무새를 점검했는데, 뛰어서 혼이 나다니. 형의 말처럼 정말 애도 아니고…….
뜨끈한 볼을 마구 문지르며 형의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양 볼을 찰싹 때리는 나를 그가 조금 비웃는 것도 같았다.
“박 대리, 시작해요.”
“네, 이사님.”
연구소와의 회의를 정리하며 시작된 회의는 이사님과 박 대리님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회의의 연속이었지만 내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피곤하지도 않았다.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내 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할 뿐이었다.
“프로그램 시작 즈음해서 간단한 확인 절차도 밟고, 격려 차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김 실장님의 첨언이 일리 있다는 듯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2박 3일 부산 출장 일정 잡으면 차질 없겠습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 실장님이 곧바로 태블릿을 켜고는 구체적인 일정을 확인했다. 아무 무리 없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오자 그는 곧장 출장을 기획했다.
“늦지 않게 스케줄 조정하고, 연구소와 부산타운 호텔에 미리 연락해 두세요. 박하나 대리는 예외 없이 동행해야 합니다.”
“네.”
“김 실장, 박 대리, 그리고…… 서도운 씨.”
“네!”
수첩에 열심히 일정을 적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출장 동행합니다.”
“알겠습니다.”
“남은 세 분은 사무실을 부탁합니다. 맡은 일만 제대로 끝낸다면 일찍 퇴근하거나 오후 출근해도 좋습니다.”
그 말에 격양된 대답이 흘러나왔다. 노골적인 반응에 그도 피식 웃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각자 건강관리 잘들 하세요. 이만 마칩니다.”
마무리 인사를 끝으로 오전을 꽉 채웠던 회의가 모두 끝났다.
조금 늦어진 점심을 식당에서 먹으며 대리님께 출장에 관해 물었다.
2박 3일이나 출장을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멀리 가봐야 당일치기인 수원이었는데, 이번엔 부산이라니. 출장 준비도 꽤 번거롭다며 대리님은 혀를 찼다.
항공권부터 시작해 식사나 숙박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야 하고, 회사를 벗어나면 각종 위험 요소가 도사리기 때문에 의전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이사님께서 예상 밖으로 행동하시거나 하는 분은 아니고, 우리 편의도 많이 봐주시잖아요. 아마 별다른 일 없으면 일부러라도 계속 호텔에만 계실 분이니까 그런 부분은 편하죠.”
“아아.”
“호텔도 1인 1실로 잡으라 하시고, 마지막 날엔 회식하거나 자유 시간 주실 거예요.”
우와, 좋다.
나 같은 직원을 출장에 동행시킨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설명을 듣다 보니 어쩐지 괜찮아졌다.
자유 시간에는 뭘 하지? 전에 문 전무와 만나서 여행 얘기를 들을 때, 바다가 무척 보고 싶었는데……. 부산에 내려가면 바다 구경을 실컷 하고 싶었다. 모래사장을 걸으며 바닷바람을 맞으면 마음속 뭉쳐 있던 응어리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상상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나는 차장님과 대리님의 조개구이 맛집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으며 식사를 마치고 올라왔다. 그러던 도중 무심코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는데, 순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 깡패가…… 스무 건이 넘게 부재중 통화를 남겨둔 것이었다. 누가 보지도 않는데 재빨리 화면을 손으로 가리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가겠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급히 옥상에 올라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회의가 있어 무음으로 바꿔 두었는데, 이렇게 많이 전화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혹시나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너무 걱정됨과 동시에 화도 치밀었다. 그런 초조한 내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 통화가 연결된 수화기에선 음식을 먹는 듯 쩝쩝거리는 소리가 제일 먼저 넘어왔다.
―어. 야.
“무슨 일로 전화를 이렇게 많이……!”
―넌 씨발, 무슨 전화를 이렇게 안 받냐? 답답해서 진짜.
답답한 게 누군데 도리어 짜증을 내고 있다. 문자로 무슨 일인지라도 남기는 게 맞지 않느냐고 화를 내려는데, 남자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너 이번 달 입금 안 해?
“지금 그 일로 이렇게 전화한 거예요?”
―그거 말고 중요한 일이 또 뭐가 있는데?
대출 상환으로 전화를 스무 통이나 하다니, 그것도 이 짧은 시간에. 정말 단단히 미친 사람이 아닐까.
“제가 전화 끊고 바로 보낼게요.”
문 전무 만난답시고 있는 돈을 모두 한 통장에 몰아넣고는 대출금을 빼놓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도, 내 잘못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람을 심장 떨어지게 하다니. 항상 이렇게 겁을 주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집에 찾아가도 없고 말이야.
“집에 또 왔어요?”
나쁜 새끼. 분명 잠긴 문을 따고 들어왔을 것이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디 취직이라도 했어?
“……왜요.”
―취직했으면 상환금 조정해야지. 그게 너한테도 더 좋은 거 아니야?
“그 부분은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 테니까…….”
―연락? 언제.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고 싶은데, 깡패는 꼬투리 잡을 것만 생기면 물고 늘어지는 듯했다.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드릴게요. 앞으로는 이렇게 밀리는 일 없을 테니까 절대 찾아오지 마요. 무섭게 전화 여러 통 남겨두지도 말고.”
―무서워?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대며 웃었다. 표정이 어떨지 그려졌다. 그 웃음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괜한 소리를 했다. 분명 다음에도 부재중 전화를 여러 통 남겨두며 날 놀릴 게 눈에 선했다.
―저번 달은 입금일도 아닌데 몇백씩 턱턱 보내더니 말이야. 어디서 무슨 일을 물으셨을까? 이번 달은 또 너무 조용하고.
“……그런 게 왜 궁금한데요. 돈만 갚으면 되잖아요.”
―아니, 나는 몸이라도 파나 궁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깡패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오호, 야……. 이거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그가 비아냥거렸다. 지르고 나니 조금 후회되었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희롱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일에 나를 끌어들인 것도 싫었고, 구석으로 사람을 몰아 추행하던 것도 끔찍했다. 잊을 만하면 문자로 몸 파는 게 적성 아니냐며 스트레스를 주는 것까지…….
항상 누가 그런 흔적을 볼까 무서워 수그리고 사느라 서러워서 울음이 터진다. 눈에서 눈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서둘러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래서, 이번 달도 추가금 있냐?
“없어요. 이만 끊을게요.”
울먹임을 애써 억누르고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더는 저 목소리를 듣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아…….”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눈물은 애써 멈추었지만 터져 나오는 한숨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리가 아플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가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정신을 차려 옥상에서 벗어났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돌아와 조금 눈치가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수첩을 꺼내 업무를 정리하고, 깡패에게 돈도 보냈다. 그리고 통화 목록도 모두 지워버렸다.
통장의 잔액을 확인해 보았다. 조금 여윳돈이 있었지만, 이는 다시 비상금으로 빼두어야 할 듯하다. 만약 형이…… 나를 계속 호텔로 부르지 않으면 빚을 순조롭게 갚기엔 차질이 있을 것 같다.
형과 잠자리를 가지기 시작하고 나서 나름의 계획을 세워두었다. 한 달에 형에게서 보통 얼마 정도를 받으니 아르바이트비와 회사 급여를 합쳐 얼마를 깡패에게 갚고, 또 얼마를 청영에 갚을지. 그런 대략적인 계획이었다.
이번 달은 추가로 갚는 금액 없이 정해진 것만 주어야 했다. 사실 그것도 많은 금액이기는 했다. 다음 달은 더 아껴 생활해야 하는 걸까. 지금도 충분히, 삶이 불편할 정도로 아끼고 있는데.
“…….”
수첩 귀퉁이에 마구 까만 동그라미를 그려대다 작게 적었다. ‘힘들다’라고.
무심코 마음 기댈 수 있는 가족, 아니 누군가라도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절로…… 이사실로 복귀하는 형에게 향했다.
“……아.”
고개를 돌린 형과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멍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허둥지둥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컷 봐놓고 안 본 척하면 뭐 해.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눈알을 굴리다 슬쩍 시선을 옮겨 살피는데, 그는 이미 이사실로 들어가고 없었다. 분명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어디다 정신을 놓고 있느냐고 지적을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속으로 형에게 기대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면 형은 분명 싫어하겠지. 얼마나 경멸스러운 반응이 돌아올지 알기에 나는 그저 씁쓸히 웃으며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항상 형은 내 맘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스크 전화기에 뜬 번호를 보고 곧장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사님.”
―잠시 들어오세요.
짧은 문장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나도 곧장 수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왜 부르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번 회의에 대해 시험하듯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과학적 실험과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자 그가 여상히 대답했다.
“그런 지식까지 바라고 뽑은 건 아니니까 고개 숙일 것 없습니다.”
어쩐지 그 말이 더 상처였다. 박 대리님한테 조언받아 관련된 책 한 권이라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주말엔 뭐 했어요?”
“어, 어……. 그냥 집에서…….”
밖에서 문 전무를 만났다. 친구와 만나서 놀듯 밥을 먹고 영화를 봤다. 카페에 가서 대화도 나눴다. 일요일에는 아르바이트, 역시나 문 전무를 만났다.
근데 이미 집에서, 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거짓말을 하려고 하니 입 안이 썼다. 형의 예리한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거짓말이 아니냐며 판별해 낼 것만 같았다.
너무 떨려서 예전 같았으면 묻지도 않았을, 일상적인 질문을 들었다는 건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부했습니다. 회계…….”
“그래요?”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를 했다며 거짓말하고 말았다. 묘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형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학창 시절 땡땡이를 치고 놀다 와놓고 자습하고 왔다고 거짓말하는 학생이 된 심정이었다.
“전에도 공부한다더니, 꾸준히 하는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기특하네.”
웃음기 섞인 칭찬에도 전혀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어째 그에게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왜 형한테만 이렇게 솔직해질 수 없는 걸까. 앞으로 형과의 관계가 걱정되긴 했지만, 만약 틀어진다면 그건 전부 나 혼자만의 탓일 게 분명했다.
“강의 비용 같은 건 회사에서 나오는 지원도 있으니 놓치지 말고 알아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출장 준비도 잘 하고.”
“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형은 내 대답에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빤히 날 쳐다보는 시선에 조금 당황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왼쪽 팔을 괴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밥 먹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왜 또 울상입니까.”
형은 참……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이렇게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사람. 나는 울고 싶은 이 심정을 그가 알아준다는 것에서부터 벌써 울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 울어선 안 됐다. 다 큰 성인이 회사에서, 회사 일도 아닌 것으로 울면 그만큼 볼썽사나운 꼴도 또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날 더 이상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거기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서도운 씨 기분 헤아려야 할 입장은 아니니까.’
이 말을 또 들으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나는 형에게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차단해 버리듯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다짜고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형은 내 하는 양을 보더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떤 의미에서 사죄를 했는지 안 것 같았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꾹 물고 나서 다시 일자로 다물었다. 좁아진 미간과 짧게 꿈틀거린 눈썹. 마주 보는 그의 얼굴엔 어쩐지 영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정확히 읽을 순 없었지만,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은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뻔했다.
“출장까지 컨디션 관리 잘 하세요.”
“알겠습니다.”
형이 나를 걱정하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혼자 상상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 * *
금세 한 주가 흘렀다. 지난 주말에 나는 정말 모범생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형이 전에 공부했다고 기특하다 칭찬하던 게 어쩐지 찔려서, 혼자 마음속으로 그 죄를 덜기 위함이었다.
일요일엔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생각보다 팁도 많이 받아 기분이 좋았고, 항상 나를 고민하게 만들던 문 전무는 이번 주엔 무슨 이유에선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조금 안도했다.
그렇게 바쁜 월요일도 지나고, 화요일 저녁. 내일 있을 출장을 위해 짐을 싸야 했다.
나는 퇴근하고 돌아와 집 앞에 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시키거나 한 물건이 전혀 없는데, 발송한 곳은 아주 익숙한 백화점에, 수취인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형이 보내왔을 게 분명한…… 꽤 큰 상자 두 개였다. 우선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고 나와 칼을 꺼내 들어 상자를 열었다. 택배 상자 안에는 또 쇼핑백과 상자로 포장된 것들이 나왔다.
“와아…….”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이 터졌다. 그가 보내온 것은 정장이었다. 전에 주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구두와 브리프케이스도 함께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또 다른 상자엔 기내용 캐리어가 들어 있었다.
꼭 출장 준비 세트를 선물 받은 것만 같았다. 얼떨떨한 기분에 비닐 속 옷을 손끝으로 쓸었다. 역시나 형이 보내온 물건답게 만져지는 감촉부터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났다.
옷뿐만 아니라 구두와 브리프케이스에는 모두 가격표가 없었다. 눈에 띄는 상표도 없어 어디에 검색을 해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게 절대 싸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무척이나 비싼 물건들일 것이다.
이걸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일전에 준비해 준 정장 한 벌도 그렇고, 그전에는 코트도 선물 받은 바 있다. 몸을 판 대가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이유 없이 나에게 전달된 것. 이걸 온전한 호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에게 조금 어려웠다.
‘돈으로 돌려주면 안 받을 것 같은데.’
애초에 얼마인지 가늠도 안 되고, 호텔로 불러내지도 않으니 몸으로 갚을 길도 없다.
일단 이 옷을 고스란히 싸서 출장에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닐과 습자지를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옷을 차곡차곡 개려는데, 바지를 들어 올리니 그 사이에서 손바닥만 한 비닐이 툭 떨어졌다.
그 투명한 포장지 안에는 검은 띠 같은 게 들어 있었다. 뜯어서 꺼내 살폈지만 무슨 용도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벨트? 벨트라기엔 허리에 차기에 너무 작았다. 머리와 목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였다.
“……개 목걸이는 아니겠지……?”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다 어쩐지 무서워져 다시 포장 비닐에 담았다. 이것도 챙겨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사이, 방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형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네, 이사님.”
―집입니까?
“네.”
전화를 받으며 다시 옷상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앉았다.
―오늘 택배 도착했을 거라고 해서. 받았습니까?
“네, 지금 막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옷, 신발, 가방 보냈습니다. 다 왔는지 확인하고 출장 때 사용하세요.
내심 나보고 입으라고 준 게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걱정이 싹 사라졌다.
“전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제가 이걸 다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가격도 너무 비싸 보이고, 저는…… 드릴 게 없는데. 이사님께서 너무 베풀어 주시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말이 횡설수설 뻗어 나갔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비싼 물건을 받는 게 부담스럽다고, 정말 이게 대가 없는 호의가 맞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내 마음은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다른 팀원들한테도 이 정도는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전화상이었으니 형이 내 얼굴을 볼 일은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나한테만 이렇게 베풀어주는 줄로만 알고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팀원들한테도 하는 건데.
혹시 그가 그렇게 생각한 나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웃을까 봐 너무 부끄러워졌다.
“저, 저 그런데 여기에, 개 목걸이 같은 게, 한 쌍이…….”
뭐라도 화제를 돌리기 위해 손에 집히는, 아까 그 이상한 검은 물건을 구기며 더듬더듬 말했다.
“혹시 잘못 보내신 게 아닐까 해서……요.”
―개 목걸이?
생각해 보면 형은 나를 때리거나 하는 등 지배적인 성향을 다분히 내보였다. 이게 혹시 그것의 연장선이라면…… 나는 따라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그에게서 피식,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정말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놀라게 하네.
말끝에 쿡쿡, 작게 웃는 소리까지 들렸다.
―가터벨트입니다. 셔츠 안 빠져나오게 잡아주는.
“아……?”
―처음 보는 모양인가 보네요.
안 그래도 새빨갰던 얼굴이 아예 타오를 듯 달아올랐다. 그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웃음기가 나를 더 부끄럽게만 했다.
가터벨트……. 그런 거였구나. 진짜 미치겠다. 그냥 옷 입는 데에 도움이 되는 물건일 뿐인데 내가 지금, 이걸, 개 목걸이라고 오해해서, 나한테, 채우는 줄 알고, 형한테…….
―얼굴 빨개졌어요? 아니면 개 목걸이가 아니라서 실망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왠지 전자일 것 같은데.
아아, 정말…….
나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 앓는 소리를 들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또다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그 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아플 듯이 뛰는 걸 애써 숨기듯 몸을 웅크렸다.
“정말 아니에요…….”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척이나 편한 말투가 흘러나갔다. 뜨끈한 눈가를 손등에 문지르며 열을 식히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 대답에 형은 잠시간 답이 없었다. 하아, 짧은 숨소리가 넘어오기도 했다.
―일찍 자고, 내일 늦지 않게 공항으로 와요.
“알겠습니다.”
가라앉고 나른해진 목소리로 대답했고, 쉬라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통화 종료 화면에 그의 이름이 몇 초간 떠올라 있다가 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힘없이 핸드폰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바스락, 떨어진 핸드폰은 옷 포장지 위로 떨어졌다.
무자비한 말로 심장을 난도질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부드러운 웃음소리로 예민한 귓가를 어루만진다.
나는 형이 선물한 선물 상자들에 둘러싸여 그렇게 한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