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9/29)

  5.

잠결에 뒤척이다 다리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일어 신음했다.

뻑뻑하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어두운 침실에 넓은 갓을 쓴 탁상 스탠드만이 낮은 조도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다가 내가 알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윽! 아픔에 이를 악물었다. 허리 밑으로 마비가 된 것 같아 적응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일어났습니까?”

어두운 방 안에 초점 없이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시선 끝의 방문이 열리며 형이 들어왔다.

샤워를 했는지 젖은 머리카락에 샤워 가운을 입고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가까이 다가왔다.

“저, 얼마나…….”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얼마나 소리를 내질렀는지 목구멍이 따갑도록 쉬어 있었다. 목을 매만지자 형이 웃으며 수건을 내렸다.

“얼마 안 지났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잠들었군요.”

근처의 시계를 확인한 그가 대답했다.

“목욕시키긴 했는데, 안 깨더군요.”

“네?”

“찜찜하면 방에 돌아가서 다시 씻어요.”

그가 잠든 날 데려가 목욕을 시켰다는 소린가 싶어 되물으려는데, 이어진 말이 기어코 확인을 시켜주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할지 몰라 입을 어물거리며 망설였다.

형은 흐음, 하고 낮은 소리를 내더니 성큼성큼 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있는 검은색의 반지갑을 들어 올렸다.

지갑을 벌리는 손가락이 어쩐지 느렸다. 들어 있는 수표 중에 한 장을 꺼내는데, 나에게 돈을 주려는 것인가 싶어 힘겹게 몸을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 공손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형이 나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쩐지 주기가…… 싫네.”

왜……. 왜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워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렸다. 화가 난 걸까……? 내가 너무 못해서?

돈을 주기도 아까울 정도로 형편없는 섹스였다는 뜻일까 걱정되었다.

돈을 못 받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 몸을 붙였던 관계에서 그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제가…… 제가 많이 부족했습니까?”

“뭐?”

“오늘 많이 서투르게 행동했나요?”

내가 능숙하지 못한 것을 형은 싫어했다. 오늘은 내가 봐도 그랬다. 전적으로 그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다. 몇 번이나 관계를 가졌는데도 여전히 초짜인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서도운 씨.”

형이 날 불렀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며 들리지 않는 척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하.”

샤워 가운의 허리끈을 풀자 앞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나타난 굵은 성기를 손에 쥐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그의 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나는 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끄트머리를 입술로 물었다.

“윽, 정말…… 이렇게 놀라게 할 줄은.”

“아읍, 으음…….”

형은 지갑을 다시 내려놓고는 내 머리를 쥐었다. 억지로 움직이거나 하지 않고, 그냥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기만 했다.

나는 이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귀두 아랫부분을 혀로 파고들었다. 오목한 곳을 입술로 훑을 때마다 금세 성기가 힘을 받아 부피를 키웠다.

양손으로 기둥을 붙잡고 머리를 동글게 굴려가며 혓바닥 위로 최대한 문지르려 노력했다.

“후……. 서도운 씨.”

“읍, 흣, 네……. 흐읍.”

“처음도 남자였어요?”

형이 목 안으로 긁는 소리를 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귀두에서 입술이 떨어져 나오며 츄우웃, 하는 소리가 났다. 벌써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훑었다.

“지금 같은 일 하다 만난 겁니까. 아니면 원래 남자를 좋아했어요?”

“……둘 다입니다.”

그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이 나갔다. 둘 다였다. 지금 같은 일을 하며 만난 것이고, 원래도 남자를 좋아했다. 한 명만을 좋아해 왔다.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제가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좋아하던 사람?”

“……첫사랑이요.”

그 대답을 끝으로 나는 다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으읍……. 순식간에 들어차는 압박감에 귓가가 저릿했다.

“하아…….”

“…….”

“기분이 이상하네.”

그렇게 말한 형은 내 머리를 붙잡고 떼어냈다. 어깨를 밀어 다시 침대로 털썩 눕게 만들더니,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완전히 벗었다.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는데.”

“…….”

“한 번 더 하죠.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올라온 형이 내 허리를 꽉 붙들었다.

“……네.”

시트를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밤이 언제 끝날 줄을 몰라 두려웠다.

* * *

내가 간혹 꾸는 형의 꿈은 항상 비극으로 끝난다. 행복하게 함께 치는 피아노의 선율, 그 위를 자동차가 부딪치는 굉음이 덮어버린다. 채 슬픔을 느낄 시간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오늘은 어쩐지 달랐다. 평소 꾸던 그런 꿈이 아니라 내가 형의 별채 정원에 놀러 간 꿈이었다. 따사로운 햇살 밑에서 잠들어 있는 형에게 내가…….

“…….”

입을 맞추려는 순간 눈이 떠졌다.

뻑뻑한 눈을 몇 번 끔뻑였다. 벗은 몸 위로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에서 온전히 깨지 못해 멍한 정신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직 시야가 어두웠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형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내가 베고 있는 것이 형의 팔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정신이 깨어났다. 몸이 차게 식으며 굳었다. 그의 팔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었다.

내 어깨를 안고 있는 그의 팔을 힐끔거리며, 어떻게 하면 깨우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주 천천히,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더 자.”

헙…….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꼼지락대는 걸 느꼈는지 형이 머리 위에서 중얼거리고는 다시 팔로 단단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이……사님.”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의 가슴팍에 가까워진 얼굴 때문에 숨을 쉬는 것마저도 신경이 쓰였다. 콧바람이 그를 간지럽힐까 걱정된 것이다. 심장 소리도 너무 크게 울렸다. 그에게 들키면 비웃음을 사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그렇게 뻣뻣하게 몸을 굳힌 채로 안겨 기다리다가 그의 팔 힘이 약간 풀어지는 틈을 타 엉덩이를 꼼질꼼질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고 조금 속도를 내려고 했는데.

“뭐 해?”

형에게 뒷덜미를 확 붙잡혔다.

푸르게 밝아지는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졸음이 내려앉은 그의 눈과 마주쳤다. 미간이 조금 좁아진 것도 같았다.

“저, 돌아가려고…….”

“……몇 신데.”

형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간신히 팔을 풀어주었다. 눈가를 문지르며 똑바로 누운 그 덕분에 나도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탁자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5시 반입니다.”

“더 자도 되겠네요.”

“그렇지만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엇…….”

내가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고 하자 형이 내 배를 끌어안으며 확 당겼다. 바보처럼 다시 침대에 풀썩 눕게 된 나를 아까처럼 그가 끌어안았다.

“나한테 한 시간만 할애해요.”

“…….”

“요즘 잠을 못 잤는데, 서도운 씨 안고 있으니까 잠이 잘 오네요.”

맨살이 다시 맞닿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 수밖에 없었다. 형의 나른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 나를 감싼 단단한 팔이 적당한 무게로 몸을 눌러 기분이 좋았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밤새 품에 파고든 게 누군데.”

“네?”

“자는 내내 계속 안기던데요.”

내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지그시 누르듯 감았다. 잠들어버린 것도 웃긴 일인데, 멋대로 품에 파고들기까지 했다니. 형이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몸이 따끈따끈해서…… 잠이 잘 온다니까.”

형은 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고 등허리를 만지작댔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부터 쏙 들어간 척추를 타고 내려와 꼬리뼈까지 가 닿았다.

그리고 느릿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소한 향도 나는 것 같고……. 애처럼.”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몸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덩달아 나도 긴장으로 숨을 들이켰다. 크림향이 나는 보디워시로 씻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손이 조금 더 내려가 엉덩이를 쥐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큰 손이 말랑한 엉덩잇살을 쥐고, 손아귀를 빠져나가면 다시 부드럽게 문질러 쥐기를 반복했다. 형이 나를 만지는 손길이 좋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내가 그에게 필요하다는 것만 같았다.

“아…….”

“부었네요.”

세게 쥐어 저절로 벌어진 틈 사이로 손가락 끝이 닿아왔다. 더 자자고 하며 사람을 끌어당기더니, 나는 이미 잠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잠을 더 잘 생각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보자 아까보다 더 선명해진 눈매가 진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졸린 기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흠칫거리며 시선을 다시 피했다. 그러자 형이 옆구리를 넓게 쓸어 올려 간지럽히더니 내 몸을 똑바로 눕히며 그 위로 올라왔다.

“안 주무실, 아, 읏…….”

그가 얼굴을 내려 유두를 핥았다. 이미 어젯밤 한껏 괴롭혀진 부위는 퉁퉁 부어 붉어져 있었다. 길게 혀를 내어 유륜을 둥글게 문지르더니 뾰족한 혀끝으로 꾹 누르며 괴롭혔다. 하도 만져 상처가 난 모양인지 살이 쓸릴 때마다 약하게 따끔거렸다.

흐으, 가느다랗게 신음이 흘렀다. 부드러운 입술이 튀어나온 알맹이를 훑고 이로 물어 비트는 감각에 허리가 또 징징 울렸다.

“아픕니다……. 부어서…….”

내가 중얼거렸지만 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래 만진 것도 아닌데 나는 다시 흥분하고 말았다. 고작 유두를 조금 만졌다고 앞을 세운 게 부끄러웠다.

나는 형의 목과 머리를 살짝 끌어안았다. 부끄러운 것과 기분 좋은 것은 별개였고,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식으로 굴었어요?”

“으읏.”

“섹스하고 나서 이렇게 품에 안겨서 자고…… 빨아달라고 끌어안고, 그랬느냐고.”

입술이 반대편 가슴으로 옮겨갔다. 더운 숨과 축축한 혀가 닿고, 곧장 확 물렸다.

“아!”

몸이 퍼뜩 튀었다. 나는 마구 도리질 쳤다.

“아니요, 윽. 이렇게 같이 누워 잔 적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인 일인지 모르겠지만 형의 움직임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만족스러운 대답인 듯싶었다.

“……하실 건가요?”

“후우. 네.”

형이 시트를 완전히 걷으며 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허벅지 밑을 쓸며 자신의 허벅지 위로 다리를 뻗도록 올렸다. 완전히 드러난 아래가 부끄러웠지만 이제 그의 앞에서 차릴 체면은 없다.

“그럼…… 키스해 주세요.”

밤새워 몇 번이나 형을 받아낸 몸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몇 번이든 해주죠.”

기분 좋은 웃음이 섞인 그의 대답과 함께 입술 위로 뜨거운 키스가 쏟아졌다.

* * *

순조롭게 마친 3일간의 출장으로 팀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좋았다.

나는 일과 관련된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던 주제에 형에게 침대 위에서 혹사당했다는 이유로 몸살에 걸렸다. 출장지에서 너무 열심히 일한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팀원들에게 차마 할 말이 없어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저었다.

열이 나서 주말 아르바이트에선 영 집중을 못 했다. 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치고 있다 보니 출장에서의 일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연주하던 나를 사장님이 불러 집에 일찍 보냈다. 너무 죄송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 탓에 나를 보러 바에 갔다던 문 전무의 걱정 어린 전화도 받았다. 그렇게 걱정하게 할 일이 아니었는데 과분한 관심을 받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감기를 빨리 떨쳤다. 평소에도 한 명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아파서 걱정하게 하거나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게 너무 죄스러웠다. 평소엔 잘 가지도 않는 병원에 일부러 들러 약을 처방받아 꼬박꼬박 먹었다. 시판되는 약과는 다르게 효과가 좋았다.

오늘은 일부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회사에 이르게 도착했다. 분기 말 회의가 있는 날이라 하루 종일 바쁠 예정이었기에 오늘만큼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필 이럴 때 복합기가 망가져서 불편하네.”

무슨 이상이 있는 건지 아침부터 작동하지 않는 복합기를 차장님이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는 종이컵에 든 커피를 모조리 마시고는 끄트머리를 이로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따 스캐너도 수령해야 하는데.”

“제가 대기하다가 받겠습니다.”

“으응, 아니에요. 이사님이 도운 씨 없으면 찾으실 텐데. 아래에 맡겨달라 하면 돼요.”

차장님은 쪼그려 앉으며 고장 난 원인을 찾으려는 듯 기계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팀 내엔 이미 형이 나를 수행 비서로 키운다는 얘기가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게, 그가 요즘 계속 외근을 나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녔다. 회의할 때도 말단인 나를 꼭 참여시킨다거나, 내 의견까지 묻고 들었다.

그제에는 내가 잠시 심부름을 하러 나간 사이에 그가 나를 찾았다고 한다. 대리님은 그 잠깐 사이에 도운 씨를 찾으시더라며 은근하게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꼭 우리 사이를 들킬 것만 같았다.

‘참 나.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우리 사이라고 하고 나니 꼭 비밀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구는 것 같아 스스로가 웃겼다.

아무튼…… 비밀 연애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 사람들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은 맞았다. 돈을 받고, 몸을 팔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회사에서 시선을 피해 몸을 만져 오는 일도 다분했다.

다른 사람들이 낌새를 알아챘다간 어떤 눈초리를 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피가 마르는 것만 같다. 불안하지만, 또…… 너무 좋아서.

“슬슬 명함 신청해요. 외근 나갈 일 더 많아질 텐데.”

안 그래도 형에게 같은 소리를 들었다. 입사 후 정해진 기간이 흐르면 명함을 신청할 수 있었는데, 내 경우엔 아직 날짜가 조금 모자라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입사 때 받았던 명함케이스를 찾아 꺼내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출력은 아래층 가서 하는 거로 합시다. 이거 영 원인도 모르겠고. 나눠 줄 자료가 급한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지금 연락 바로 할 테니까 수고 좀 해요.”

차장님은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무거운 서류철을 가득 안고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서 출력에 필요한 USB를 챙겨 막 비서실을 나섰는데, 때마침 이사실로 올라오던 형과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한 발짝 물러섰다. 거의 복도 벽에 붙어 선 수준이었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으로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내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살짝 스쳤다.

“…….”

내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자 형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대로 지나쳤다.

닿은 손등이 덴 것처럼 뜨거워지고 덩달아 볼도 붉어졌다. 뜨끈한 열감이 얼굴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비상구로 냉큼 뛰어갔다.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볼을 몇 번이나 때리며 정신을 차리고서야 아래층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나만 이렇게 이 관계에 휘둘리는 것 같아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퐁퐁 솟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지는 법이니까.

* * *

“으, 흐윽, 으! 으응!”

새하얀 시트를 구겨 잡은 내 손 위로 형의 핏줄 선 커다란 손이 겹쳤다. 내 손을 억지로 구길 듯이 세게 쥐고는 아래를 거세게 쳐올리며 성기를 욱여넣었다.

항상 성기가 다 들어차지 못해 밑동을 남겨두는 것이 아쉬웠는지 형은 허리를 뭉갤 듯이 잡아 누르며 하체를 붙여왔다. 저 깊은 안쪽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통증에 입을 벌리고 파들파들 떨었다.

발버둥 치며 손을 뒤로 해 그의 허벅지를 마구 밀어내도 돌처럼 단단한 근육이 박혀 있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려야지만 봐주듯이 몸을 물렸다.

“으응, 아! 아! 아윽!”

철썩이며 치대는 소리가 빨라질수록 내 목소리도 높아졌다. 평소엔 낮게 유지하는 목소리가 그에게 안길 때면 듣는 나 자신도 어색할 정도로 높다랗게 나왔다.

하지만 쾌감과 고통으로 점철된 몸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접합부에서 뭉근하게 녹은 젤이 정액과 섞여 고환을 타고 흘러 시트로 뚝뚝 떨어졌고, 거칠게 유두를 긁는 손길에 허리를 한쪽으로 굽히며 끙끙거렸다.

“도망가지 마.”

나도 모르게 앞으로 기었는지, 형의 손이 허리를 부술 듯이 세게 쥐어 당겼다. 흐으윽……! 뭉개지도록 사타구니에 처박힌 엉덩이가, 그리고 그 사이 찢어질 듯 벌어진 구멍이 너무나도 아팠다.

형은 아예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으로 눌렀다. 나는 뒤에서 보면 내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의 품에 꼭 싸여 난폭한 성기를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괴롭히던 형이 어깨를 끌어안으며 내 안에 사정했다. 안에 들어차지 못한 정액이 좁은 틈새를 비집으며 쯔으윽 빠져나갔다. 그가 힘을 뺄 때까지 나는 목을 물린 짐승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몰아치는 사정감에 질금거리며 사정했다.

내 정액은 거의 물처럼 흘렀다. 그는 이번이 세 번째 사정이었고, 나는 그보다 몇 번이나 더 오르가슴에 다다랐다. 요즘에 관계를 가지면 이렇게 횟수가 많았다. 한두 번으로 끝나던 전과는 달랐다.

나는 시트에 얼굴을 문질러 몰래 흐른 눈물을 닦았다. 온몸의 정액이나 체액이 쭉쭉 빨려 나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마지막엔 거의 서지도 않는 성기에서 실처럼 끈적끈적한 물을 질질 흘리기나 했다.

“후우…….”

형이 몸에 힘을 빼며 성기를 주욱 잡아 빼고 나서야 나도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는 정액으로 젖은 성기를 내 엉덩이에 문지르며 후희를 즐기다 허리를 숙여 등에 촉촉 입을 맞췄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천장을 보는 자세로 똑바로 누웠다. 형은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팔을 위로 뻗자 그가 흔쾌히 나에게 안겨주며 키스했다.

“으응…….”

쪽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이리저리 뭉개졌다. 조심스레 혀를 내밀면 형이 혀끝을 맞춰 꾹 누르는데, 그럴 때면 정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기가 내달리며 쾌감 젖은 소름이 올라오고 콧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입천장의 예민한 부분을 혀로 긁고, 혀 밑의 여린 살을 문질렀다. 그리고 또 한참을 얽히다 내가 숨차 하며 손을 올린 어깨를 살짝 밀면 그제야 그는 만족했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하아. 피곤하네.”

형은 근처 일인용 소파에 걸쳐져 있던 샤워 가운을 집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입고는 탁자 근처로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려는 듯 케이스로 손을 뻗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자꾸 제 어리광 받아 주십니까.”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일으키고는 형에게 물었다. 담배 필터를 입에 물던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렇게 불퉁한 투로 물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뱉고 나니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말과 행동이 너무 맞지 않는 것 아닌가. 실언이었다며 말을 다시 거둬들이려는데, 그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내리며 웃었다.

“어리광이었어요?”

“그, 그게 아니라.”

형의 태도는 확실히 전과 달라졌다. 나는 그러한 변화에 못 따라가는 게 싫었다.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사님은, 제가 원하는 것도 들어주셨잖아요.”

“그…… 애 장난 같은 뽀뽀 말하는 겁니까, 지금?”

기어코 담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인 형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담배 때문에 발음이 어눌해졌다. 잇새로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앞까지 다가오는 움직임에 다시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냥 지금처럼.”

한 손으로 내 턱을 쥐어 얼굴을 고정했다. 손이 커 양쪽 볼에 그의 손가락이 올라왔다.

“예쁘게만 굴어요.”

“…….”

“그럼 알아서 잘해 줄 테니까.”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말을 뱉을 때마다 얼굴 근처로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지금 서도운 씨가 참 마음에 드는데…….”

“…….”

“나도 나름 잘해주고 있지 않나.”

내가 지금처럼 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고 잘만 행동한다면 그도 잘해주겠다는 소리였다.

형이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은 내가 눈물을 내비쳐도, 몰래 닦아낸다 해도 분명 알 텐데,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엉덩이를 맞는 횟수도 줄었다. 그만큼 섹스의 횟수가 늘기는 했지만. 그와의 관계에서 점차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잘해 주는 게 언제까지일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전에도 얘기했지만.”

“…….”

“선 넘지 말아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에 얼어붙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말하는 ‘선’에는 여러 뜻이 있었다. 전처럼 인사불성으로 취해 집도 못 찾아간다거나, 무슨 이유에서든 그를 자극하는 것들.

나는 이번에 다른 뜻 하나를 더 추가해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몰래 키워온 이 마음을 절대 내보이지 말자는 것. 이 선을 넘는다면 절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란 걸…… 오늘로써 확신했다. 잘 대해준다 한들 나는 그저 그에게 몸을 대는 사람, 그 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턱을 쥔 손을 놓자 시선이 절로 밑으로 떨어졌다. 형은 몇 번 담배 연기를 내뱉는 한숨 같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재떨이에 문질러 꺼버렸다. 아직 길게 남아 있던 담배가 중간에서 툭 부러졌다.

“욕실에서 한 번 더 할까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어루만지던 형이 욕실 쪽으로 턱짓하며 물었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요즘 다시 일이 늘었다.

처음 입사했을 때처럼 나를 가르치려고 일부러 보고서를 받아보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형이 나를 신임하기 시작하면서 작은 사업팀에 곁다리로 배치한 덕에, 그 중간다리 역할을 내가 맡게 되었다. 그래서 바빠지게 된 것이었다.

8월까지만 하는 짧은 프로젝트라지만, 나에겐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선임들은 늘 이렇게 일을 해왔는데 나는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라 그런지 사소한 것도 크게 신경이 쓰였고,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구소 일로 바쁜 대리님께 이것저것 묻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나는 졸업 이후 펴보지도 않았던 전공 책을 찾아보기까지 하며 일에 매달렸다. 설렁설렁하고 싶지 않았고, 형을 실망시키는 것은 더 싫었다.

일에 더불어 주중 저녁엔 형과 관계도 해야 했다. 주말까지 부르지 않는다는 것에 정말 감사할 지경이었다. 일과 섹스에 마구 치인 몸은 주말에나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토요일만 돌아오면 밥도 먹지 않고 쓰러져 자기 바빴다.

일요일 낮에는 기어코 깡패를 만났다. 미루고 미루던 상환액 조정 건 때문이었다.

그 더러운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전화로 하자고 차일피일 미루고 미뤘지만 꼭 사인을 받아야 한다고 온갖 유식한 척을 다 해대기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본 것인데, 역시나 끔찍했다.

차마 집에 들일 수가 없어 일부러 그의 사무실 근처로 내가 찾아가기까지 했다. 답지 않게 깔끔한 분위기의 카페로 나를 불러낸 깡패는 대뜸 서류부터 내밀었다. 나는 잘됐다 싶어 얼른 펜을 꺼내 들었다. 길게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너 대기업 취직했더라?”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시비를 걸듯 걸걸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야, 우리는 그런 걸 모를 수가 없어. 어?”

내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남자는 소파 위로 팔을 걸치며 거만하게 기대앉았다.

말을 말아야지, 더 따졌다가는 말려들 게 분명했다.

억지로 시선을 다시 테이블로 떨구며 종이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설마 회사로 찾아오지는 않겠지. 미쳤다고 그 으리으리한 건물에 발을 들이진 않겠지. 불안함이 마음속에 얇게 깔렸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아주 바늘구멍이라던데. 똑똑이들만 들어가는.”

“…….”

“너 그, 청영, 거기다 몸 대?”

하지만 그 말에는 도무지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왜 발끈하는데? 찔려?”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했는데, 사실 맞았다. 내가 청영에…… 그 기업의 이사에게 몸을 팔고 있는 게 맞았기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닌 척 빼지 마. 원하면 나도 사줄까? 얼마에 파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날 세우긴……. 너 내가 호텔 일 봐준 거 고맙게 생각해. 새끼가 그게 어떤 기회인 줄도 모르고.”

그러고는 컵에 꽂힌 빨대를 빼버리고 벌컥벌컥 음료수를 마셨다. 마시면서도 시선을 내려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니 몸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목뒤가 서늘했다. 그날 나를 만지던 것처럼 시선이 몸으로 달라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떨리는 목소리를 잠재우듯 침을 삼키고는 거칠게 종이를 밀었다.

“……다 썼으니까 가져가요.”

“너 청영 거기 조심해라. 내가 오래 본 정이 있어서 충고하는 거야. 알겠냐?”

‘미친 새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가 종이를 살펴보든 말든 나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오래 본 정? 정이 있어서 사람을 구석으로 내몰고, 추행하고, 그런 곳에까지 몸을 던지게 만든단 말인가.

이 깡패를 더 보고 있다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인사도 없이 일어나는 내 뒤통수에 대고 놈이 낄낄댔다.

“몇 년만 더 고생해라. 어?”

역시 대답 없이 무시하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어깨에 멘 가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낡은 끈을 하얗게 질릴 정도로 쥐었다. 몇 년. 다 갚을 수나 있을까.

만약 중간에 형이 나에게 질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청영에서 내쳐질 텐데, 그럼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사채 갚으면서 하루하루를 날리겠구나.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바로 향하는 길에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지 속으로 궁리했다.

* * *

형이 사준 정장을 입을 때면 몸에 묘하게 힘이 들어간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층 버튼 사이로 비치는 모습을 확인했다. 옷깃에 뭔가 묻지는 않았는지, 잘 접혀 있는지 눈으로 훑어 점검한 뒤 바르게 매여 있는 넥타이도 괜히 한 번 만져 더 예쁘게 자리 잡게 했다.

부드러운 옷은 그 감촉과는 달리 나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얹어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지워진 책임이 큰 것도 사실이었고.

나는 더 바른 자세로 행동해야 한다는 무의식에 지배당한 채로 내렸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비서실은 조용했다.

곧장 컴퓨터부터 켰다. 확인해야 할 메일이 있었다. 컴퓨터가 켜지는 사이에 재킷을 벗어 걸어두고는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매일 출근하고 싶다.’

회사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돈도 주고, 맛있는 식사도 주고, 추울 땐 히터를, 더울 땐 이렇게 에어컨도 틀어준다. 창문을 아무리 활짝 열어두어도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낡은 집과 비교되었다. 할 수만 있으면 아예 회사에서 숙식하고 싶었다.

비록 낙하산이라 찔리지만……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끌고 오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하아…….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그런 마음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곧 팀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잠시 호출이 와 나간 나는 작은 상자 하나를 전달받았다.

자리로 돌아와 냉큼 테이프를 뜯었다. 안을 확인하자 얼마 전 신청했던 명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반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직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들. 뚜껑을 열자 흰색 바탕에 청록색의 푸른 로고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으로는 바로 나의 이름 세 글자가 검은 글씨로 아주 선명히 박혀 있었다.

이메일 주소나 연락처가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안도하듯 웃으며 이름 위를 엄지로 쓸었다. 살다 보니 이런 게 생기는 날도 있다. 눈가가 간지러웠다. 어쩐지 울컥했다.

냉큼 한 장을 지갑에 챙겼다. 어머니 드려야지. 그리고 나머지 중 적당량을 집어 명함 케이스에 차곡차곡 넣었다.

“이사님 오십니다.”

그러던 도중, 바깥에서 차장님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역시 출근이 빨랐다. 나는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얼른 팀원들을 따라 나가 일렬로 섰다.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형이 실장님과 함께 대화하며 가까이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에게서 답인사가 돌아오고, 여느 때처럼 간략하게 한마디씩 대화를 나눴다. 요즘은 나도 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서도운 씨, 시안 기한이 오늘까지였던가요.”

“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받아보죠.”

“지금 출력해서 올리겠습니다.”

형은 짧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사실 문 뒤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도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출력한 파일을 챙겨 들고 이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시안을 받아본 형의 표정은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기한이 촉박하긴 했지, 라며 중얼거렸다.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뻔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

“……오늘 오전에 회의가 있으니 제가 기획팀에 잘 전달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턱을 괸 형의 손이 톡톡 볼을 두드리는 모양새를 보니 방향을 많이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초안 단계이기에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기회는 충분했다. 나는 그럴 것이라며, 그를 설득했다.

형은 시안 파일을 끝까지 읽어보고 난 뒤, 주르륵 손으로 한 번 넘기고는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이 일 때문에 정신없겠어요.”

“저는 보조나 다름없어서…….”

“열심히 한다는 얘기 다 전해 들었습니다.”

형이 손끝으로 파일을 짚고 가져가라는 듯 앞으로 밀었다. 팔을 뻗어 집어 들려고 하는데, 그의 손이 더 빠르게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놓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요.”

형의 말에 걸음을 옮겼다. 그도 자연스럽게 의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자 그의 손끝이 내 배 위부터 허벅지까지 부드럽게 이어 쓸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라 움찔거렸다.

“살이 좀 빠졌나.”

“아, 아뇨.”

“재봤어요?”

“그건 아니지만…….”

딱히 몸에 변화는 없었다. 요즘 일이 바빠 좀 수척해 보이는 것인가 싶어 볼을 슬며시 쓸었다. 못생겨 보이는 것도 모자라 볼품없어 보이기는 싫어 조금 속상했다.

“점심때 식당 가지 말고 대기해요.”

“오찬 모임 있으십니까?”

“아니요. 같이 나가서 식사나 하죠.”

팀원들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둘이 나가서 식사하고 오는 일이 생기는데, 대놓고 나를 챙긴다는 소문이 돌아 어쩐지 민망했다.

그는 김 실장과도 자주 식사하는데 뭐가 문제냐며 내 고민을 단번에 정리했다. 내가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주의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회의 때 어떤 식으로 의견 개진할 겁니까.”

“저는 메인 컬러를 바꿔보는 방식으로…….”

“어떤 색이요?”

“파란색은 뻔하다고 하시……니까 오렌지나 망고 컬러로…….”

형이 내가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다가 등허리로 손을 옮겼다. 꼬리뼈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등을 누르고는, 내가 주춤거리며 허리를 굽히자 입을 짧게 맞췄다. 입술 위에 도장을 찍듯 가볍게 꾹 누른 정도였다.

“좋네요. 팀장을 서도운 씨로 바꿔야겠는데.”

“……아닙니다. 정말, 저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가 다시 몸에서 손을 떼었다. 나만 얼굴을 붉히며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회사에서 몰래 하는 이런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마 내가 형에게, 형과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몸만 취하는 관계여야 하는데 나는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이걸 그냥 늘 하는 일인 것처럼 여길 수가 없었다.

“명함에 팀장이라고 찍고.”

“어, 어떻게 그럽니까…….”

“농담입니다.”

내가 식겁하자 형이 피식 웃었다. 넘지 말라고 내 발치에 선을 그어줘 놓고는 여전히 저렇게 웃어준다. 모난 마음이 비죽비죽 고개를 든다.

“아, 저 명함 오늘 나왔습니다.”

“그래요?”

형이 한 장 줘보라는 듯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찾으려는데, 책상에 두고 왔다는 게 떠올랐다. 한 장을 지갑에 넣어뒀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뒷주머니에서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고이 들어 있던 빳빳한 종이를 한 장 꺼내 공손하게 건네자 형이 눈썹을 짧게 올렸다가 내리더니 말했다.

“예쁘게 잘 나왔네요. 나 주는 겁니까?”

“어……. 네.”

원래는 어머니 사진 앞에 두려고 따로 꺼내둔 것이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명함을 상사에게 대뜸 줘도 되는 것인지, 혹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 순간 걱정되었다. 그도 그럴 게…….

“귀엽네.”

“…….”

“근데.”

형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굳어졌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방금 내가 한 행동을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지갑 좀 잠깐 보여줄래요?”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대뜸 지갑을 달라며 손을 내밀기에 당황스러움이 턱까지 차올랐다. 왜 그러는 거지? 나는 다시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끝이 해진 낡은 지갑이 부끄러웠지만 그의 손 위에 얌전히 올렸다. 혹시 낡은 물건을 가지고 다닌다며 혼나는 것은 아니겠지.

반으로 접힌 갈색 지갑을 펼치는 형에게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에 사진도 없고 뭣도 없는데, 그는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끄트머리가 빨간 장미색으로 물들여진 어느 명함 한 장을 부드럽게 꺼내 보였다.

“문지원 명함이 있네.”

“어…….”

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비서실에 한 장 들어온 적도 없는데, 왜 서도운 씨가…….”

꾸깃, 빳빳하던 명함이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삼백안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문 전무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겨진 명함은 기어코 손에서 떨어져 톡, 소리를 내며 굴렀다. 바닥에 나뒹구는 명함으로 시선을 옮기지도 못했다.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형은 나에게 분명 질문을 했고 나는 그에게 곧바로 대답해야 했는데, 놀란 것 때문인지, 표정이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되지 않아서인지…… 입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일자로 다물린 내 입술을 보고 형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나를 불렀다.

“서도운 씨.”

그의 음성에 다시 움찔 어깨를 떨었다.

“묻잖아요, 내가.”

쾅, 작지 않은 소리가 났다. 형이 책상 위로 쥐고 있던 주먹을 내려쳤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순식간에 밀려드는 공포에 온몸이 싸해졌다. 입술이 달싹이며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뭐라도,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저, 저는. 그게, 실은…….”

“네가 입사하고 문지원이 회사에 온 적도 없고. 둘이 마주친 거라고는 저번 오찬 때 한 번이었던 것 같은데.”

“…….”

“그게 아니었나 본데.”

뭐라도 말하려던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무릎이 붙을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에는 두 발짝의 거리가 생겼다.

형은 이 기업을 이끌어온 게 요행이 아니라는 듯 정말 예리했다. 칼처럼 날카로워 내 거짓말을 단숨에 베어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한 번밖에 안 본 사이가 아니라 벌써 몇 번이나 만났다. 심지어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입사 후였지만,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자주 찾아왔고 그때부터 얼굴을 트고 지냈다.

“말도 없네. 면접 볼 때처럼.”

나도 형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사한 뒤 차곡차곡, 아주 간신히 겹쳐 올려온 감정이나 관계가 모두 와르르 무너져서…… 아주 오랜만에 형을 마주했던 그 면접 때로 시간이 돌아간 것만 같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어 옷자락을 쥐었다. 구겨진 옷자락으로 그의 시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명함을 받은 건 아마 문 전무에게 내 직업을 들킨 이후 처음 와인바에서 마주쳤을 때였을 것이다. 워낙 물 흐르듯 지나갔던 순간이라 어쩌다 받았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얘기를 해야 할까……? 한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처음부터 말하면 아르바이트 때문에 혼나지는 않을지, 하지 않는다면 또 나중에 이렇게 들켜 혼날 일이 생기진 않을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엄청 굴려댔지만 이렇다 할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이사님. 그건.”

“속일 생각 하지 말아요.”

“…….”

“나도 지금…… 내가 언제부터 속은 건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니까.”

형은 화를 내리누르는 듯 억압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르고, 드러난 이마를 문지르기도 했다.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이 모두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은 오해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게 있었다.

“하……. 몸 팔던 습관이 어디 갈까 하긴 했는데.”

“……이사님.”

“사람을 이렇게 배신할 줄은.”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하는 형의 말에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울컥거렸다.

“아닙니다, 그런 게…….”

내가 문 전무에게 몸을 내주었다고 오해받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이미 온갖 오해로 나에 대한 불신이 쌓여 있겠지만, 그것만은 싫었다. 문 전무는 형과 친구 사이였다. 친구 사이에서 양쪽으로 몸을 팔고 다닌다는 그런 오해는…… 정말 싫었다. 너무 비참했다.

“그런 게 아니면.”

“문 전무님과 그런 일은, 정말 없었습니다. 정말이에요.”

“말로만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믿겠어요?”

“정말, 정말 아닌데……. 저는…….”

이사님 외의 사람이랑 한 번도 관계 가진 적 없습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그걸 말하면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어그러질 것이라는 생각에.

대신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오찬 후에도 한 번 아니라고……. 하, 씨발…….”

“…….”

“그때 이미 알던 사이였던 건 아니겠죠.”

“알던, 알던 사이인 건 맞지만…….”

형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내 지갑을 책상에 쾅 내려놓았다.

“이사님, 이사님. 정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정말 우연히 알게 된 분이지,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다급하게 변명을 이어 붙였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 무고함을 뒷받침해 줄 증거 같은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호소를 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결백하면 왜 나를 속였어. 지금 서도운 씨 행동이 앞뒤가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제가, 제가 이사님께…….”

여기서 그를 더 속여봤자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이렇게 반쯤 까발려졌는데, 숨겨봤자 소용없지 않을까.

“제가 이사님께…… 아르바이트한다는 걸 숨기고 있어서…….”

“뭐?”

“그걸 같이 숨겨주신다고 하다가 몇 번 만난 것뿐입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문 전무님을 만나게 돼서, 그래서 저는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에 물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억지로 깜빡거리며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울먹이는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지금껏 그를 속여온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아무 사이 아니었던 사람이 그랬다 해도 배신감을 느낄 것 같은데, 가뜩이나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금 아르바이트라고 했어요?”

“오시던 손님이 전무님이셔서, 저는 정말 모르고, 그냥 손님이신 줄로만 알고…….”

“서도운 씨.”

“그렇게 알게 된 게 전부예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서도운.”

형이 짓씹듯 내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내 시선이 위로, 그의 얼굴로 짧게 향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화난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무슨 일인데 속였어.”

“그냥…… 바에서 하는…….”

내 더듬거리는 대답을 듣고 서 있던 형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이없다는 듯이 짧게 웃기도 했다.

“네가 말해서 그런가, 건전한 일처럼 안 들리는데.”

“아니, 읏, 아니에요. 아닙니다, 정말.”

“울지 마.”

“…….”

“네가 잘못 해놓고 울면 내가 뭐가 됩니까.”

억울함 가득 담은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형은 정말 회사라서 참는다는 듯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울음 섞인 숨을 참아냈다.

“문지원이 말한…… 그게 너였나.”

문 전무가 이전에도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인지, 형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를 앞에 두고 울음을 참아냈다.

“언제까지 속일 작정이었어요. 서도운 씨를 봐준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

“또 있잖아. 왜 말을 안 해요. 그 코트, 내가 치워버리라고 했던 그 코트도 문 전무가 준 것 아닙니까.”

형의 말에 놀라 눈이 커졌다. 문 전무가 그에게 무슨 소리를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알게 됐다면 더 변명할 것도 없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이사님…….”

“바에서 몸 팔면서 그 대가로 코트도 받았다는 게 제일 말이 되는 것 같네.”

“아닙니다. 그런, 그런 곳이 아니라……!”

“입 다물어.”

내 말은 중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형이 큰 손아귀로 거칠게 내 목을 쥐더니 강한 힘으로 밀어 벽에 몸을 쿵 부딪치게 했다.

“윽……!”

손끝에 힘을 주고 조여오는 탓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그의 몸에 사방이 가로막히고, 드나들던 숨마저도 빼앗기고 말았다.

“내가 널 어디까지 봐줘야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혀.”

“윽, 으흑……!”

숨이 막혀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형이 하는 말이 귓가에 제대로 닿지도 않았다. 나는 벽을 긁던 손을 올려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자제를 잃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도운, 너는…….”

“…….”

“넌 항상 이렇게 날…….”

그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마주친 눈동자가 이젠 무섭다기보다 슬프게만 느껴졌다. 나는 체념하듯 손목을 쥐었던 손에 힘을 뺐다. 손을 밑으로 툭 내리자 잠시 멈칫하던 형이 서서히 내 목도 놔주었다.

“큽, 콜록…….”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그에게 졸렸던 목을 부여잡고 모자란 숨을 보충하듯 기침해 댔다. 서느런 가슴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형은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도운 씨한테 운전까지 맡긴 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몰랐나 봅니다.”

“…….”

“믿은 나만 손해잖습니까. 아버지처럼.”

그가 자조적으로 뱉은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으나, 이미 데스크 근처로 간 그의 뒷모습만 보였다.

교통사고로 형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 차를 운전한 것은 나의 아버지였고, 두 분은 서로 무척 신뢰하는 관계였다.

나는 내 아버지의 뒤를 잇듯 그의 비서가 되었고, 형은…… 어느 순간 나에 대한 태도를 고친 것처럼 굴며 나에게 운전을 맡겼다. 그에게 얼마만큼 깊은 고뇌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를 가볍게만 여기고 있었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속이다 너도 네 아버지처럼 날.”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사님. 저는 정말……!”

내가 다급히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데, 하필이면 그때 형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벨 소리에 말이 가로막힌 나를 그가 돌아보았다.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

“내가 널 더 봐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구겨진 미간이 그가 느끼는 배신감의 깊이를 보여주는 듯했다.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깨물고, 한없이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울음을 참아낼 뿐이었다.

“나가요.”

형은 내 발치로 지갑을 던지며 말했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주워 들었다. 죄송합니다……. 작게 중얼거렸으나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 형. 무슨 일이야.”

그는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나에게 턱짓했다. 어서 나가라는 듯,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눈빛에서는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나약해 빠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팀원들은 이사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며 걱정하고 있던 모양인지, 내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나오자 무슨 일이냐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나는 어물거리다, 애써 프로젝트 문제로 혼이 났다며 얼버무렸다. 대리님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를 속인 것도 모자라, 그의 배려를 몰라보고 기만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가 말한 것처럼…… 내가 정말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목이 졸린 것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사치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서류들을 챙겨 일어났다. 회의 시간보다는 조금 일렀지만 여기 있다간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못 쉴 것만 같았다. 회의에 들어간다며 일어나자 팀원들은 그냥 모르는 척 나를 보내주었다.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는 비상계단에서 한참을 한심하게 울다가 간신히 화장실에서 얼음장 같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런다 한들 빨개진 눈가와 코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회의 시간이 다가왔기에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사님께선 이제껏 진행되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셨습니다. 메인 컬러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형이 말했던 문제점을 담담하게 전했다. 일을 대충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그가 나에 대한 믿음을 모두 버렸다 한들 이곳에서 쫓겨나는 순간까지 열심히 하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미미한 부분일 테지만.

회의를 마치고 다시 이사실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필이면 시간도 훌쩍 흘러가 점심때와 가까워져 있었다. 형이 점심에 대기하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분명 나와 마주 보고 식사하고 싶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명령이었으니 별다른 말이 있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

최대한 이사실에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계단을 이용했다. 세 층을 천천히 올라가고, 비상구 문을 열기 전에도 주변을 세 번 왕복해 걸어 다니며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절대 울지 말자. 내가 잘못해 놓고 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형을 더 화나게만 할 것이다. 뺨을 때려가며 속으로 끝없이 되뇌고 나서야 무거운 철문을 밀어 열었다.

“어……?”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어,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고 있는 문 전무였다.

* * *

―무슨 일은. 형이 무슨 일 있어야지만 전화하냐.

“…….”

해일은 눈을 꾹 눌러 감으며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의 형, 정영일이었다.

―바쁘냐. 요즘은 연락도 없네.

“하아. 회사 일로 정신없지.”

가뜩이나 방금 있었던 일로 머리가 지끈지끈 당겨왔다. 짧은 순간에 몰려온 극심한 고통이었다. 두통이 지속되면 짬을 내어 최 박사를 다시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듯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리 진정을 하려고 해봐도 쉽지 않았다. 시야에 구겨진 명함 끄트머리만 들어와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불이 끓어오른다. 대체 지금까지 몇 번을 거짓말하고 몇 번이나 속여왔던 것인지, 그리고 자신은 바보처럼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간 것인지.

더 화가 나는 것은, 이렇게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주체하지도 못하면서…… 그 새까만 눈동자가 젖어 울먹이는 것을 보면 정말…….

“……제길.”

그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믿어주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왜 그래?

“아니야.”

해일은 감정을 갈무리하듯 데스크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아주 차가운 물이 들어 있던 탓에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손끝을 적셨다.

“……거긴 이제 저녁이던가.”

―어, 6시쯤 됐다. 나도 오늘은 잠깐 일 좀 보고 오느라.

“일?”

―미국 지사 들렀다.

“…….”

집 앞 산책이나 했다는 것처럼 여상히 튀어나온 말에 해일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형.”

―별거 안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회사에서 어떤 신분도 아닌데, 거길 가서 무슨 얘길 하려고.”

―아직은 사장 취급해 주던데?

가볍게 웃는 소리가 넘어왔다. 후우……. 해일은 이제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이게 웃어넘길 일이던가.

―나 복귀해야지, 해일아.

형에게 사업 수완이 없는 것은 이미 뼈저리게 겪은 바 있었다. 미국으로 넘어가 조용히 사는 게 언젠간 끝을 보이리란 것도……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그리 좋지 않았다.

바이오가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곧 있으면 크게 터뜨릴 시기라 정영일의 거취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조용히 있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이미 회사까지 찾아간 사람이 말을 들을 리는 없어 보였다.

어쩐지 조금 전부터 문밖에서 김 실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는 듯 신호를 보내왔었다. 미국 지사에서 이제야 연락을 해왔나 보군. 해일은 짧게 생각했다.

“나 바빠. 미국 지사 들렀으면 알 텐데. 형이 매장시킨 바이오 끌어 올리느라 형한테 신경 쓸 시간 없어.”

―나도 염치가 있지, 큰일 바라겠냐. 상관없어. 형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형이 복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일이야.”

―내가 악의가 있어서 그랬냐? 나도 다 살려보려고 한 짓이야, 이 새끼야.

담배를 피우는지 치익, 하며 불을 붙이는 소리와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 누구보다 담배 생각이 절실한 것은 해일이었다.

―그냥 괜찮은 자리 하나만 만들어주면 돼. 지금이 벌써 몇 년이냐. 사람들 다 까먹고도 남았다.

“…….”

―애들은 머리 컸다고 바라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아빠가 돼서 집에만 있으니까 눈치 보이잖냐. 너도 결혼해 봐라. 아 참, 넌 왜 결혼 얘기가 없어. 미국에서 하나 데려가?

형의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해일은 컵에 남은 물을 모두 마셨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듯 목구멍 안이 답답했다.

6년…… 아니, 7년이던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니 오래되긴 한 일이었다. 형의 성정치고는 그 긴 근신을 나름 잘 버텨왔다. 그리 생각하니 도통 그를 막을 명분이 떠오르지 않는다.

등받이 깊게 등을 기대며 해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값비싼 의자가 제값을 하며 그의 몸을 튼튼히 받쳐 들었다. 그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제까지고 유배 보낸 꼴로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회사를 생각하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부정적인 눈초리를 생각하면 이대로 미국에서 지내주었으면 좋겠다만.

“언제쯤 올 거야.”

피를 나눈 형제라고 측은지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회사를 도맡아 바삐 일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과가 좋지 못했을 뿐. 이런 태도가 경영에 좋지 못하다는 것은 그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해일은 큰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했다.

―조만간. 어머니도 뵙고.

“말했듯이 당장은 내가 신경 못 써. 와서 그냥 조용히 지내.”

―무서워서 살겠냐. 알았다. 애들이랑 애들 엄마는 미국에 계속 있을 거니까 이해해라. 내년이 졸업이라 예민해, 아주.

“……그래.”

―이번 아버지 기일은 장남이 챙겨야지.

해일의 눈이 자연스레 달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기일이 두어 달 앞으로 다가왔다. 완전히 잊고 있던 일에 그는 또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매만졌다.

정신없는 이유가 꼭 일 때문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서도운……. 종이에 베인 작은 상처처럼 은근히 신경을 건드리는 존재.

형이 돌아오면 또 서도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것도 문제였지만 지금 당장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해일은 일이 바쁘다는 말로 대충 통화를 정리하며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사님, 조금 전 샌프란시스코 지사에서 연락이…….”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김 실장의 말허리를 잘랐다.

“방금 들었습니다. 형한테 전화가 와서.”

“그러셨습니까.”

김 실장의 표정도 그만큼 어두워졌다. 정영일이 돌아온다는 걸 눈치채고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니 조용히 있기를 바라야겠습니다. 변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일 없나 고심 좀 해봐요.”

“알겠습니다.”

“언론 쪽은…… 곧장 전달하고, 내부에서 또 팀을 꾸리는 게 좋겠습니다.”

“네,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해일은 손끝으로 빈 유리잔을 툭툭 건드렸다. 손톱에 부딪히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작게 들렸다.

“혹시…… 여름 시즌 캠페인에 문제가 많았습니까?”

“왜요.”

“서도운 씨가 프로젝트 일로 많이 낙담한 듯싶어서요.”

해일은 시선을 들어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짜증은 어디다 치웠는지 측은함 가득한 표정으로 서도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 일을 맡으면 열심히 하려다 과해질 수도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는.”

“그런 잔소리 들을 기분은 아닌데, 지금.”

여기저기서 서도운으로 난리였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았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서도운에게 받는 것 없이 정을 주었다.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서도운이 사람들에게서 그런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역시 빌어먹게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평소 김 실장의 조언이라면 달갑게 듣는 편이었으나 이번엔 날을 세울 정도로.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올라온 서류부터 보죠. 빨리 정리하고 쉬고 싶네.”

머리가 아까보다 더 지끈거렸다. 갑자기 신경 쓸 일이 몰아닥치면 두통과 함께 약한 불면 증세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서도운을 호텔로 불러내면 어쩐지 편안하게 잘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서도운이 잠든 사이에 배신감이 주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그의 목을 조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

해일은 아까 서도운의 가는 목을 쥐었던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꽉 쥐며 애써 생각을 지웠다. 이내 서류를 받아보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이사실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해일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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