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더워 죽겠다.”
무너지기는커녕…… 너무나도 맑고 화창했다. 태양이 정수리로 빛살을 내리꽂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손부채를 부치며 버스 정류장의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4시가 훌쩍 넘은 오후인데 이렇게 덥다니, 올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운 기분이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버스가 나타났다. 문이 열리고 올라타는데, 허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순간 삐끗하며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옆의 손잡이를 잡으며 계단을 올랐다.
고작 두어 개 있는 계단에 힘들어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반나절을 쉰다고 해서 쉽게 회복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배 위를 손바닥으로 넓게 쓸었다. 엉덩이가 아픈 것뿐만 아니라 배 안쪽까지 쿡쿡 쑤시고 아팠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만 같은 열감이 계속되었다.
아프고 지친 몸이었지만 애써 이끌고 나온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던 바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아르바이트를 갑자기 그만두어야 한다고 사과 말씀을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덜컹덜컹 움직이는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타 진땀을 빼며 간신히 바에 도착했다. 사장님께 오기 전 미리 사정이 생겼다는 연락을 드려서 그런지 사장님은 크게 탓하지 않으셨다. 갑작스럽게 그만두어 무척 민폐였을 텐데, 오히려 아쉬워하시는 것에 더 죄송해지고 말았다.
“자주 놀러 와. 언제든지 놀러 와도 되니까.”
“네. 그럴게요.”
“아, 저녁 먹고 갈래? 주방에 말해서 파스타 하나 하라고 할까?”
“아뇨, 정말 괜찮아요.”
사장님이 계속 먹을 것을 권했지만, 나는 사양하고서는 상체를 푹 숙여 가보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사장님은 내 어깨를 토닥여주며 인사를 건넸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일하면서 참 좋은 경험을 많이 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도 좋았고. 이젠 다 끝나고 말았지만…….
나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주머니의 핸드폰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
꺼내 화면을 보자 발신인은 문 전무였다.
나는 그렇게 핸드폰을 쥐고 잠시 멈춰 서고 말았다.
오늘 사장님께 이렇게 사과드린 것처럼 문 전무에게도 이 상황에 대해 무어라 말이라도 하긴 해야 했다. 그간 죄송했다고, 나 때문에 두 분이 싸우셔서 또 죄송하다고. 이렇게까지 상황을 꼬아간 원인이 나 하나인데,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자초해 놓고 뒤로 빠진다는 게 비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비겁자로 남기로 했다.
핸드폰은…… 형이 준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통화 내역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또 오해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앞으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 사과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차마 전화를 내 손으로 끊을 수는 없어 그냥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한숨이 폭폭 나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 고장 난 거 아니네요.”
고개를 번쩍 들자 자신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가까이 걸어오는 문 전무가 보였다.
“……전무님.”
내가 일부러 전화를 피하는 걸 다 본 모양이었다. 어쩌지……. 너무 놀라고, 또 죄송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를 이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또 그 말투로 돌아왔네.”
문 전무는 피식 웃으며 코앞으로 다가와 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상처 난 아랫입술이 다시 깨물렸다. 따끔거리며 피 맛이 느껴졌지만, 불안한 나머지 그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랑 얘기 잠깐 해야겠죠.”
“……네.”
강요가 섞인 그의 말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바 뒤쪽의 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형의 눈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까 봐.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는데도 해가 길어져서 아직도 바깥이 밝은 게 어쩐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익숙한 차 앞에 서자 문 전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약속 있거나 갈 곳 있어요?”
“아니요, 집에 곧장…….”
“그럼 타요. 데려다줄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 전무는 키를 누르고 조수석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타요, 계속 두리번거리는 거 보니까 누가 볼까 봐 불안한가 본데.”
“…….”
문 전무가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타라는 제스처에 나는 눈을 꾹 감으며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집 주소를 묻고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 위를 쌩쌩 달리던 차가 첫 번째 신호에 걸릴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들킨 것 맞죠?”
문 전무가 마침내 운을 떼었다. 나는 그를 살며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이 일 그만두라고 하셔서…… 오늘 사장님께도 말씀드렸어요.”
“근데 내 연락은 왜 안 받아요?”
“…….”
“해일이가 연락받지 말래요?”
문 전무가 핸들을 손끝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며 손가락만 얽고 있자 멈췄던 다시 차가 출발했다.
“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사실.”
“…….”
“아르바이트한 거 속여서 문제가 된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화날 만큼의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는.”
왜냐하면…… 형은 내가 몸을 팔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에게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고, 자신과의 계약마저 저버린 상황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문 전무는 이 거짓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형이 문 전무에게 말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할 말이 없어 그냥 팔뚝을 조금 끌어안자 추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문 전무가 에어컨의 세기를 낮췄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은 알아요? 평생 내 연락 피할 건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전무님.”
“피하려고 했나 보네.”
“아닙……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기에 퍼뜩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우연히 만나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계속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슴이 콕콕 찔렸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일도 그만뒀다면서요. 더 혼은 못 내겠지.”
“네…….”
“……기분 전환하러 갈래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다음 주말에 바다라도 보러 갈까요.”
문 전무는 조개처럼 입을 다문 나 때문에 답답해져서인지, 아니면 불쌍해서인지 묻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인지 바다를 보러 가자며, 어느 지역의 해산물 요리를 잘하는 레스토랑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문 전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러다간 정말 다음 주에 약속을 잡아버릴 것 같아서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저, 전무님……. 이제 밖에서 따로 뵙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익숙한 거리로 들어선 차가 우리 집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짧게 이유를 물었다.
“저는, 더 이상 이사님의 신뢰를 깨고 싶지 않아요.”
“회사에서도 아니고, 주말에 날 만나는 게 신뢰를 깨는 거예요?”
“그건…….”
설득력 있는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계약을 했다고, 생활을 통제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미 거짓말한 것도 다 드러났고, 더는 제 비밀 지켜주지 않으셔도 되고……. 그러니까 이젠 이사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서도운 씨는 지금껏 내 입만 막으려고 만났던 거예요?”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꽤 급하게 멈춘 탓에 몸이 조금 앞으로 쏠렸다. 문 전무를 향해 있던 시선이 절로 앞을 향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내가 고작 그런 비밀 하나 쥐었다고 서도운 씨 만나자고 한 것 같아요?”
문 전무는 핸들에 양손을 올리고, 그 위로 머리를 기댄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뜻을 한 번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소리지? 그가 내뱉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켜들었다. 비밀 때문에 만난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
짧은 순간 고민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던 모양이다. 문 전무는 피식 웃고는 엄지로 내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
“나 서도운 씨한테 관심 있는데.”
“……네?”
엄청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내가 지금 들은 문장이 무슨 뜻인가 싶었다.
“서도운 씨한테 관심 있다고요. 몰랐어요?”
“전…….”
“또 못 알아채고 다른 생각 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건데, 연애 감정으로 관심 있다는 거예요.”
“…….”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나는 온 세상이 멈춘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렇게 굳어버렸다.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내가 이해한 게 맞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내가 미쳐서 이해를 잘못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의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문 전무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를 왜……? 왜지? 아무리 이유를 찾아보려고 해도 잘 모르겠다. 나를 좋아할 수가 있나? 너무 보잘것없는데, 이런 나한테 관심이 생긴다고?
“정말이세요……?”
나도 모르게 나를 가리키며 ‘왜 저를?’ 하고 물을 뻔했다.
“네.”
“그럼…….”
“나 게이예요.”
마침내 문 전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그러자 크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데엥, 하고 울렸다.
이제야 단번에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에게 특히 친절했던 것이나, 맛있는 요리를 사주고, 대뜸 선물을 가져다주었던 일 등. 그리고 형이 문 전무와 엮여 있는 나를 보고 그렇게나 화를 냈던,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쉽게 믿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문 전무도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와 쉽게 몸을 섞을 수 있다고 생각했구나. 그래서 그렇게…….
문 전무가 꺼낸 고백에서 더 나아간 다른 생각으로 또다시 머릿속이 점철되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고백을 한 것치고는 무척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놀랐어요?”
“저한테…… 저, 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몰라서요.”
“왜요, 도운 씨가 얼마나 매력 있는데요.”
“저는, 정말, 저어는…… 몰랐어요, 아무것도.”
말이 자꾸만 늘어졌다. 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자꾸 쥐었다 펴며 더듬더듬 말했다.
“난 티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어요…….”
“죄송할 필요는 없죠. 내 마음은 아프지만.”
문 전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심장 부근을 쥐고 아픈 척 ‘으으!’ 하는 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정말…….”
이런 얘기를 들어보는 게 생전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그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지는 게, 어쩐지 내 잘못 때문인 것 같아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왜 자꾸 죄송하다고 해요. 내 마음 거절할 거예요?”
“어, 어어, 그게. 그게…….”
눈알이 이리저리 굴려졌다. 자의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사과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형을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릴 땐 그저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며 발자취를 좇는 데 바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저 생계를 신경 쓰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닥쳐온 일이 너무나도 많고, 또 커서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내 대답의 의미를 문 전무도 알아챘는지 시선을 거두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정말 처음이라서 너무 당황스럽고 어쩔 줄을 몰라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거절해도 되는 걸까, 실례는 아닐까.
우물쭈물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거둬들이기를 반복했다. 내 머뭇거림을 본 문 전무가 다시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괜찮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어색한 상태로 차에서 내렸다. 문 전무가 배웅해 주듯 같이 따라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 시선이 바닥으로 꽂혔다가.
“이제 서도운 씨가 내 약점 잡았네요.”
문 전무가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약점은, 약점이라뇨.”
“어디 가서 말 안 할 거예요?”
“네.”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미안하고, 또 그의 표정이 어쩐지 씁쓸해 보여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저, 저도…… 동성애자인데…….”
느릿하게 굴러 나오는 말을 참을성 있게 듣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라고요?”
“제가 어디 가서 퍼뜨리거나, 그러지 않을 거라고요…….”
“그게 아니라.”
문 전무가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허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 말 꺼낸 거, 나보고 포기하라는 거예요, 아니면 더 들이대 보라는 거예요?”
“예?”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 같은데.”
그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입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달싹거리는데, 제대로 된 문장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 하는, 단어도 아닌 이상한 말들이 목구멍에서 제멋대로 뻗어나갔다.
“앞으로 해일이 몰래 여기로 놀러 와야겠다.”
“아니, 아니에요. 아닙니다.”
“단번에 차놓고 지금 희망고문 한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젠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었다. 문 전무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 지금 이 상황이 그의 장난인 건지, 진심인 건지도 잘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문 전무가 흔들리는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볍게 잡아당겨 몸을 앞으로 휘청거리게 만들더니, 다른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정말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얼굴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내 광대 위쪽, 보조개가 생기는 눈꼬리와 가까운 자리에 쪽, 하고 입술을 대었다.
“……!”
너무너무 놀라서 다시 몸이 굳었다.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절로 얼빠진 표정이 지어졌다.
문 전무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볼 위로 나도 모르게 손끝을 갖다 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운전 수고비 받은 셈 칠게요.”
“…….”
“들어가요, 푹 쉬고.”
문 전무는 물 흐르듯 인사한 뒤 차 문을 열었다.
“내 생각도 좀 하고.”
가볍게 차에 올라탄 그는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차를 몰고 좁은 길을 빠져나갔다.
“…….”
입술을 깨물며 뒤돌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렇게 잘근잘근 씹었다. 문 전무의 입술이 닿았던 볼에 댄 손을 한참 동안 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더없이 무거워졌다.
* * *
금요일엔 본의 아니게 멋대로 조기 퇴근한 꼴이 되었기에 나는 평소보다 이르게 회사에 도착했다. 팀원들이 도착하기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쑤시는 허리와 배를 어루만지며 잠시 숨을 고르다 벌떡 일어나서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환기를 시킨 뒤 간단히 자리를 정리하고 금요일에 마치지 못한 일을 차근차근 모두 끝냈다. 오늘 있을 회의 자료까지 미리 출력해 준비해 두자 그때야 한두 명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신입 사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눈치를 보며 인사했다. 지난 금요일에 프로젝트 문제로 혼이 났었다고 말해둔 덕인지 팀원들은 내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아니면 무슨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역시나 눈치가 없어서 그런지.
“AG 전무님은 이사님이랑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박 대리님이 내가 건네준 파일을 받으며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대리님도 하긴 그렇겠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파일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검토했다. 가만히 손을 모으고 서서 대답을 기다리기까지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된 사무실에서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다행히 화젯거리는 곧 모습을 보일 정영일 전 사장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머지않아 형도 회사에 모습을 나타냈다. 늘 하던 평범한 인사를 하는데, 어쩐지 내 입에선 맥없이 굳어진 단조로운 목소리만 흘러나갔다.
나도 내 잘못을 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형이 조금 미워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순진한 척하는 얼굴…….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척을 했다는 것일까.
그 얘기를 신경 쓰다 보니 도무지 어떤 표정으로 그를 봐야 할지를 모르겠다. 웃으면 웃는 대로, 찡그리면 찡그리는 대로, 또 무표정하면 무표정한 대로 혼이 날 것만 같았다.
“서도운 씨.”
움찔!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다 순간 불리는 이름에 놀라 화들짝 몸을 떨고 말았다.
“아, 네!”
“……2차 시안은 회의에서 검토하겠습니다.”
“……네.”
바보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찰나에 마주친 눈빛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꼭 공중에서 먹이를 발견하고 지상으로 질주하는 독수리처럼 가슴팍에 쿡 찔려 들었다.
다시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아직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리고, 형은 이사실 문 뒤로 사라졌다.
회의 전 형에게 줄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향을 풍기며 찰랑거리는 커피를 고급스러운 잔에 담아 너무 뜨겁지 않게 얼음 한 개를 넣고 잘 저었다.
“…….”
한 손은 티스푼으로 젓고 있으면서, 눈은 탕비실의 벽 한쪽을 바라보며 멍하게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문 전무를 만난 걸 형에게 얘기해야 할까…….
엄연히 따지자면 약속을 잡고 만난 것은 아니고, 그가 날 찾아온 것이었다. 거의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친 수준이 아니던가.
형에게 얘기해서 우연히 만났다고,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고 했다고 그리 보고를 해야지 옳은가 고민되었다. 말해서 괜히 그의 심기를 긁는 것은 아닐까. 지금 잘했다고 말하는 거냐며 화를 내면 어쩌지.
그렇다고 말을 아예 안 하기에는 나중에 들켰을 때 크게 혼날 것 같았다. 그럼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그가 돌연 날 붙잡고…… 한 것까지? 정말 어떡해야 하지…….
혼자 고민하는 사이 실장님이 탕비실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운 씨, 폴더 어디에다 뒀어요?”
“아, B칸 서랍에 있습니다.”
“알았어요. 빨리 준비해 줘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얼음은 녹은 지 한참은 되어 보였다. 왜 또 이렇게 정신을 뺀 거지?
“너무 주눅 들지 말고요.”
“……네. 감사합니다.”
가벼운 격려가 이어졌다. 격려를 받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받았다.
회의 시간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 수 있었다.
형은 내 브리핑을 들으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수정되었다며 이대로 진행하자고 허락까지 내려주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수첩의 할 일 목록에 ‘결재 올릴 서류 작성하기’라고 적어놓았다.
중요한 안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형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김 실장에게서 전해 들었겠지만…… 조만간 전 사장이었던 정영일이 돌아올 겁니다.”
형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단조롭게 정영일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정영일. 그의 형은 나에게는 미지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두 집안이 가까이 지낼 적에도 직접 보았던 적이 한 손에 꼽았다. 그에 대한 어릴 적 내 기억은, 그냥 매우 크고 또…… 어딘가 모르게 날 서 있다는 게 전부였다.
“늦어도 이번 주말에 입국할 예정이고, 맡을 직책도 부서도 내일 오후까지 결정됩니다.”
평소와 거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피로가 쌓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나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형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금요일부터 그의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오늘 오전 9시에 홍보실에서 따로 언론 대응 TF팀이 꾸려졌습니다. 당분간 시끄러울 거고, 아마 정신없을 겁니다. 이런 때일수록 각자 맡은 일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군요. 내가 따로 신경 쓸 필요 없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잘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영일이 염치란 게 있는 사람이라면…… 잠자코 있겠지.”
형은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어쩐지 조금 노려보는 듯하게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서도운 씨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정리하고 이사실로 오십시오.”
“……알겠습니다.”
“마칩시다.”
형은 서류 파일을 닫으며 짧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지 넥타이를 조금 잡아 끌어내리며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실장님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내가 회의실의 뒷정리를 마치고 이사실로 향했을 땐 약 15분이 지난 상태였다.
혹여나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걱정했으나, 막상 마주한 형의 표정은 아까 회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수원 출장에서 내가 주방장 얘기했던 것 기억납니까.”
책상에 가까이 선 내게 형이 말을 꺼냈다.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간신히 예, 하고 대답했다.
“따로 알아봐 줬으면 좋겠군요. 스카우트 건으로.”
형은 살펴보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종이가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의 손끝을 눈으로 좇았다. 어쩐지 깊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수원 호텔 얘기가 나온 순간 가까운 미래를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다 줄줄이 불겠구나.
“팀원 중에서 제일 한가로운 게 서도운 씨니까.”
분명 나도 맡은 일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했다.
“이사님. 실은…….”
“네.”
짧게 참았던 숨을 터뜨리고, 눈가를 구기듯 한 번 꾹 감았다가 뜨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해당 주방장은 AG 기업의 회장님께서 해외에서 직접 스카우트해 오신 분이라,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형은 들고 있던 펜을 탁 내려놓고 서류에서도 손을 떼었다. 차라락, 종이가 첫 페이지로 되돌아왔고 그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혼자 미리 알아본 거예요? 아니면…… 문지원한테서 들은 겁니까.”
“…….”
“전자면 기특할 뻔했는데, 반응 보니까 후자인가 보네.”
“제가…… 따로 알아보려고 하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 전무님께서 눈치채시고는 먼저…….”
“하아.”
형의 한숨이 내 변명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이마를 매만지며 등받이 깊게 몸을 기댄 그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내가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목소리에서 짙은 짜증이 묻어 나왔다. 모아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가까이 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항상 서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의 앞에 가까이 붙어 서자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로 들어가 서는 꼴이 되었다.
그는 왼쪽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턱을 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구둣발이 장난치듯 살짝 움직이며 내 발을 툭툭 건드렸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많이…… 화나셨어요?”
“글쎄요. 어디서 몸 굴리다가 회사 기밀이나 질질 흘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정보를 주워왔으니 칭찬을 해줘야 하는 건지.”
그리 말하며 형의 발이 움직였다. 내 구두 위로 살짝 올라와 꾹 누르며 밟았다.
“아……. 저는, 그런 생각은 정말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느껴지려고 하는 순간 부드럽게 허벅지를 감싸는 손에 가느다란 소리가 터졌다.
오해를 받는 입장임은 알고 있지만 내가 회사 일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닐 것이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자니 생각보다 더 슬펐다.
“그건 모르는 거고.”
혹사당했던 배 속이 아릿하다. 자꾸 표정이 흐려질 것 같아서 입술을 다물었다.
순진한 척하는 얼굴. 그의 말이 또 떠올랐다.
형의 손이 내 몸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엉덩이를 쥐고, 또 그 틈과 앞섶을 차례로 괴롭히는 손길에 자꾸만 무릎이 꺾여 그에게로 안겨들 것만 같다.
“주말에…… 아르바이트 정리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문 전무님께서 찾아오셔서, 아, 으…….”
“그래서.”
앞섶을 엄지로 문지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다리 사이로 들어가 예민한 곳을 어루만졌다. 달뜬 신음이 흘렀다. 문 전무 얘기를 꺼내는 순간, 형의 손아귀 힘이 더 세진 게 느껴졌다.
“제가, 더 연락하지 말자고……. 따로 뵙지 말자고……. 아!”
“그리고요.”
“그…… 그게 전부입니다.”
뒷일은 끊어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한들 고백받았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얘기를 했다가는 분명 내가 몸으로 문 전무를 꼬여냈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더럽게 몸을 굴려서 그를 현혹했다고. 그리 오해할 게 분명했다.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서도운 씨.”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습니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무서웠다. 변명하듯 말에 살을 붙이자 어딘가 구차해졌지만, 신뢰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형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냥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내 형 일이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는 웬만해선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
“정영일은 네가 여기 있는 걸 모르니까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수행이 줄어드는 대신 다른 업무가 부여될 겁니다. 스카우트를 맡기려고 했는데, 워낙 유능해서 한 번에 처리해 버리는 바람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말, 지켜요.”
“…….”
“아니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할 거니까.”
“어떤…….”
형은 다시 엉덩이 한쪽을 쥐었다.
“이 안에 넘치도록 싸주고, 좆물 받은 상태로 회사 돌아다니게 한다든가.”
“……지키겠습니다.”
“원하면 지금 바지 벗고. 선 것 같은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농담이 분명한 말을 하며 형은 진하게 웃었다.
좋다는 대답도, 싫다는 대답도 감히 할 수 없는 내가 우물거리는 걸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지켜보았다.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나가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그길로 곧장 화장실로 발걸음 했다. 세면대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틀고는 피부가 차가워져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세수를 반복했다.
고개를 들자 앞머리와 셔츠가 젖은 바보 같은 내 모습이 보였다. 순진한 척하는 얼굴…….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 * *
[CY 전 사장 정영일, 비밀리에 입국……. 복귀 전망]
[청영 정영일 前 사장, 입국 사실 뒤늦게 알려져]
외근을 다녀오는 길, 버스 안에서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의 제목만 눈으로 훑었다. 화면을 죽죽 내려 보아도 온통 청영에 관한 기사뿐이었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알릴 것이라 했는데, 생각보다 파장이 크게 일어난 것은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사내 인트라넷도 벌써 시끌벅적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정영일은 회의 결과 전자와는 거리가 먼 물산으로 배치되었으나, 복귀일이 머지않아 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괜히 기사를 살펴봤다가 더 침울해지기 전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 근처의 도넛 가게로 향했다. 실장님이 부탁한 간식 심부름이었다. 도넛이 달고 맛있어서 팀원들이 자주 사 먹곤 했다. 최근 입소문이 퍼져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다행히 줄이 없었다. 하마터면 햇볕 쨍쨍 내리쬐는 이 더운 날 줄 서서 기다릴 뻔했다.
“크런치초코 여섯 개랑 베리베리필드 여섯 개요.”
“만팔천 원입니다.”
여러 가지 맛 중에 제일 맛있는 건 베리베리필드. 겉에 새하얀 슈가파우더가 묻어 있고 안엔 얇게 커스터드 크림이 발려 있고, 수제 딸기잼이 담뿍 들어 빵까지 촉촉하고 부드러운 도넛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다.
종이상자에 한가득 포장된 도넛을 받았다. 마음이 든든했다. 더운 날 외근까지 나갔다가 오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사소한 공짜 간식에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었다.
“손님! 이거 받아가세요.”
“어……?”
가게를 돌아 나오려는데, 점원이 갑자기 기다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상자를 쥔 손목을 향해 약하게 내려쳤다.
“이게 뭐예요?”
자처럼 길고 빳빳하던 그것은 내려쳐지자 순식간에 모양이 바뀌어 둥글게 손목에 감싸졌다. 귀여운 도넛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팔찌였다.
“장난감 팔찌인데, 이만 원 이상 사시면 드리는 사은품이에요. 그냥 드릴게요.”
“우와……. 감사합니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캐릭터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가게를 돌아 나왔다.
회사에 도착하자 바깥과 다르게 시원한 공기가 입구에서부터 느껴졌다. 살짝 땀이 났던 이마가 순식간에 시원하게 말랐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로비를 걷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도넛 상자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들고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연락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문 전무였다.
[다음 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는 종종 이렇게 연락을 해오곤 했다. 내가 무례할 정도로 아무 답도 없이 무시해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날이면 또 연락해 왔다.
워낙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의 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렇게 무시하는 게 너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로 연락한다는 걸 형이 모를 수가 없으니까.
“…….”
형은 요즘 내 핸드폰을 검사했다. 마음만 먹으면 내역을 뽑아 확인할 수 있을 텐데도 일부러 나를 불러내 검사를 하는 건 압박감을 주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문 전무의 연락을 무시하려고 했다. 화면을 끄려는데, 다시 떠오른 문자 한 통에 나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켰다.
[도운 씨 집에 놀러 가도 되나…….]
집?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계속되는 내 무시에 강수를 두려는 심산인 듯 보였다.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그건 안 돼요!]
이 정도는 형한테 들켜도 혼나지 않겠지? 거절한 거니까…… 나름의 변명도 할 수 있다.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두었다. 묵직해진 주머니에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며 내 어깨를 퍽 밀쳤다.
“읏…….”
너무 멍하니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뒤에 오던 사람이 너무 세게 밀어서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들고 있던 도넛 상자 위로 손을 짚는 바람에 구겨지며 내용물이 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아……. 낭패였다.
“쯧, 한복판에 서 있으면 어떡하나.”
“죄송합니다…….”
혹시 음식물이 상대방의 옷에 튀었나 걱정돼 바짓단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
상대는 정영일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손으로 털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았으나 그냥 나와 닿은 게 기분이 나쁘다는 듯 굴었다.
그가 정영일이라는 것에 정신을 빼앗겨 나도 모르게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가 어떻게 지금 회사에 있지? 아직 복귀일이 안 되었는데. 순간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다. 눈이라도 비벼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영일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날 봤을까? 내 얼굴을…….
고개를 땅으로 내리꽂고는 어색한 손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정리했다. 이미 못 먹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떨어진 것들을 상자 속에 담았다. 그런데 내 시야에서 정영일의 구두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
잠깐 마주친 것뿐인데…… 그는 원래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꼭 혼잣말하듯 물었다.
겁을 먹고 얼어붙었다. 눈치를 보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땅으로 처박았다. 설마, 아주 어릴 적 봤던 것이 전부인데 알아볼 리가 없을 것이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며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구세주처럼 주변에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아. 오랜만입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직원이 정영일의 주의를 끄는 사이, 나는 냉큼 일어나서 잰걸음으로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우그러진 도넛 상자를 손에 꾹 쥐고는 안쪽의 화장실로 직행해 몸을 숨겼다.
화장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가쁜 숨을 고르면서 밖을 확인했다. 그러다 자괴감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따라오기까지 할까.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뭉개진 도넛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베리베리필드의 잼이 손에 묻어 달큼한 향을 내며 끈적거렸다. 새하얀 설탕가루도 군데군데 묻어 있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손을 비누칠해 닦자 금세 깨끗해졌다.
손의 물기를 탈탈 털고, 괜히 무릎 부근도 털어냈다. 넘어져 부딪힌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내게 문제인 것은 정영일의 존재였다.
“…….”
거울 속에 과거의 형상이 흐릿하게 비친다.
어릴 적 본 정영일에 대한 기억은 무척 크고, 무서웠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는 위압을 온몸에서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당시의 나는 동물의 왕인 사자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실제로 정영일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할 때는 허공에 뜬 발을 흔들지도 않고 딱 붙여 가만히 앉았으며, 젓가락질 실수도 하지 않으려 신경 썼다. 정작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말이다.
나에게 그의 그런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 데에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랄 것도 아니었다. 아주 우연히 그가 내 아버지를 다그치던 걸 목격한 일이었다.
다정하고 편안하던 회장님과는 다르게 그 첫째 아들은 고압적이었다. 오너 일가와 친하다고 한들 그저 직원은 직원일 뿐이라는 듯.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는 정영일에게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사과하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아버지에게 날카로운 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 뇌리에 남아 있다.
“……아직도 무섭다.”
거울 속의 나에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회사에서 마주칠 일이 있을 텐데, 그가 언젠가는 내가 누군지 알 텐데.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영일의 등장은 내 예상에 없었던 일이기에.
‘하긴. 내가 청영에 오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지.’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곧 여기서 쫓겨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곧장 사무실로 올라가려다가 정영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도 하고, 망가져 버린 도넛이 신경 쓰여 그대로 건물을 나왔다. 늦지 않게 도넛을 다시 사서 와야겠다.
도넛 가게에서 회사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조용했고, 바닥에 지저분하게 묻어 있던 소스도 깨끗이 닦인 상태였다. 이사실로 올라가자 어쩐지 비서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메인 데스크 위로 상자를 조심스레 올리며 눈치를 보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고생했어요.”
물티슈와 접시를 꺼내 와 옆에 나란히 쌓고 있는데, 이사실에서 김 실장님이 나오며 나를 불렀다.
“서도운 씨.”
“네.”
“이사님이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
실장님의 표정도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에 내가 물으려는데, 그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조금 전에 정영일 사장님께서 회사에 방문하셔서 이사님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
“금방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이사님의 예상 밖의 행동을 하시는 게…….”
정영일, 그 때문이었구나.
그의 방문으로 술렁거리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의 말이 맞았다. 복귀일이 오늘이 아닌데도 대뜸 회사에 나타나 술렁이게 만들고 또 금방 사라졌다는 것이, 벌써 형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보고 드리고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호기롭게 했지만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자료를 출력해 묶은 뒤에 이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눈을 감고 있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근처로 다가갔다.
“외근 다녀왔어요?”
“네. 저…… 사장님이 다녀가셨다고…….”
“누가 사장이야. 사표 낸 지 오래고, 복귀해도 사장 될 일은 없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심기 거스르지 말자고 생각해 놓고는 긴장을 하는 바람에 어이없는 곳에서 실수하고 말았다. 날카롭게 눈을 뜨고 노려보는 시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후우……. 보고서는요.”
“여기 있습니다.”
데스크 위로 파일을 밀어 올렸다. 형은 눈가를 문지르더니 의자를 바로 하고는 파일을 가져가 한 장씩 넘기며 검토하기 시작했다.
종이가 사락사락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의 미간에 난 주름이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금 검토하는 보고서는 또다시 시작된 지난 프로젝트 분석하기 과제였다.
프로젝트를 맡기면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내 잘못에 화가 나 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계획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쳇바퀴 같은 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거의 마지막 장까지 확인했을 때 형은 여전히 시선은 서류에 두고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한번 볼까요.”
아. 나는 짧게 소리 내고는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평소엔 아침에 검사해서 오늘은 검사가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송송 나오는 것 같았다. 문 전무에게 답장을 해서인가. 지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냥 지울 걸 그랬나.
형은 주로 통화나 메신저 내용을 확인하고는 추궁하거나 이상한 점이 없으면 다시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여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문 전무가 네 집을 알아?”
형의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순간 속으로 움찔 놀랐으나 최대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아니요.”
“아니면.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까?”
“그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전무님께서 제가 자꾸 연락을 피하니까 일부러 놀리시려고…….”
“집에 들인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절대.”
형이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는 손에 핏대가 섰다.
“서도운 씨는 본인이 남자한테 여지를 주고 다닌다는 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파일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집에 온다니까 그건 안 된다고 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오지 말라고…….”
“순진한 척하지 말라니까.”
형의 지적에 나도 모르게 서운해져 입술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무슨 순진한 척이란 말이지. 내가 집에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혼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서러웠다. 애써 입술을 물며 죄송한 얼굴을 해 보였으나 표정 관리가 쉽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손목에 그건 대체 뭡니까?”
“앗, 아아.”
형이 내 손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왼쪽 손목을 감싸고 있는 분홍색의 알록달록한 팔찌. 나는 당황하며 오른손으로 손목을 쥐어 감쌌다.
“이, 이거는, 받았습니다.”
도착해서 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장난감을 손에 감고 있다니. 또 옷차림이 단정치 못하다고 혼날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항상 왜 이러지.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어디서요.”
“외근 다녀오는 길에 베리, 아니 도넛을 사려고……. 거기 가게에서 주셨습니다.”
허둥대며 팔찌를 빼려고 하는데, 어떻게 빼는지 모르겠다.
펼쳐지다가도 휙 감겨드는 분홍색 팔찌가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등 뒤로 땀이 흘렀다.
“하.”
그때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형은 어쩐지 웃고 있었다. 피식, 하며 입꼬리가 짧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화도 못 내게 하네, 너는.”
“…….”
“나가봐요.”
* * *
그날의 일이 이상할 정도로 이후로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더 혼나지도 않고 밤에 불려가지도 않았다. 형이 날 반쯤 포기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기엔 나는 또 다른 사업을 맡게 되었다. 그냥 형이 많이 바쁜 것뿐일까.
나는 무려 AG 기업과의 협력으로 새 복합 문화 타운을 건설하는 일을 맡았다. 김 실장님이 사업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며 어렵지 않을 거라고 잘 해보라 했지만 워낙 대규모 사업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쩐지 겁이 났다.
오늘 기획서를 올려야 하는데, 형은 아침부터 총회에 참가하고 있기에 출근했을 때 잠깐 인사했던 것 말고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정영일이 공식적으로 다시 회사에 돌아오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얼마 전 불시에 회사를 방문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정식 출근 날까지 무척 조용했다.
오늘도 큰 잡음 없이 출근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비서실은 그 소식에 한시름 놓았지만 형은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총회에 가기 전 차장님께 몇 번이나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하라고 엄포를 놓고 간 걸 보면 말이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오늘 출근이 무사히 넘어갔을 뿐이지, 그는 앞으로 계속 회사에 출근할 것이다. 오늘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오전 내내 서류 검토와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올라왔다. 회의가 얼마나 길게 진행되는 것인지 형은 점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실장님의 요청으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가져다드리긴 했으나 끼니를 해결했을지는 모르겠다.
2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바깥의 햇빛이 너무 쨍쨍해 비서실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에어컨은 적정 온도를 맞춰두느라 미적지근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살짝 더운 기분이 들어 손부채를 부쳤다.
그때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이 시간에 연락 올 곳이 딱히 없는데, 혹시나 문 전무일까, 아니면 깡패일까 싶어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었다.
[대한대병원 서도운(등록번호7843956) 님 20××/8/31 신장내과 김경윤 교수 진료 예약 1588-0000 시간 예약/변경]
“어…….”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됐나. 깜빡 잊고 있던 연례행사를 일깨워주는 문자에 정신이 멍해졌다. 나도 모르게 배에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가만히 문질렀다.
매년 8월 말일이 되면 정기 검사를 받아야 했다. 네 살 때 받은 수술 때문이었다.
“……멀쩡한가?”
한쪽밖에 남지 않은 신장이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매년 검사 문자가 올 때면 지난날들을 후회하곤 한다. 몸을 좀 아끼고 살 걸 그랬나 하고. 병원에서 먹지 말라던 술을 얼마나 자주 마셨는가, 운동을 얼마나 하지 않았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작년에는 어땠더라. 영양 상태가 나쁘다고 한 소리 들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올해는 청영에 입사해 회식도 자주 가지고 운동은 전혀 못 했으니 관리 꽝이었다.
최근에 배가 따끔따끔 아픈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혹시 문제가 되진 않는지 걱정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아픔은 형과의 섹스 때문이었지, 하고 생각을 지웠다.
이번 8월 말일이 주중이다 보니 아무래도 주말로 예약을 옮겨야 할 것 같다.
별일 없어야만 했다. 빚을 갚기에도 돈이 모자라 매일 쪼들리며 사는데, 몸에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일단 일이나 열심히 하자 생각했다. 오후에 회의가 모두 마무리되면 형이 곧장 내 서류를 받아볼 수 있도록. 나는 작성이 끝난 서류의 오탈자를 확인하기 위해 복사실로 향했다.
복합기에서 프린트되어 나온 서류를 챙겨 들고 앞 장을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혹시 형이 돌아온 것인가? 나는 냉큼 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내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이사실로 올라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정영일이었다.
곧장 이사실로 성큼성큼 들어가려던 그는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계속해서 땅만 바라본 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나에게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 주었으면 했는데, 멈춘 구둣발은 내 방향으로 돌아서기까지 했다.
“정 이사 보려고 하는데.”
“지금은 총회에 참석하고 계셔서 자리에 안 계십…….”
“고개 좀 들고 얘기하지?”
낮은 음성이었다.
꼭 명령처럼 들리는 말에 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하지만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시선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시선을 땅에 처박은 채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자 정영일은 영 거슬린다는 것처럼 혀를 찼다. 그리고 곧.
“전에 나 본 적 있지 않나?”
그는 대체 왜 여기에 올라와 있는 것일까. 이사실은 현재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총회가 있다는 것은 회사 직원이라면, 특히 정영일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터. 그는 일부러 지금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빈 이사실에 들어가 이리저리 활보하며 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려는 속셈인 걸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당장 보고를 해야만 했다. 빨리 그를 보내고 형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 그 도넛, 너 맞잖아.”
“아…….”
하지만 정영일이 날 알아보고는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가 움찔 굳었다.
“네.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그가 와서 부딪친 것이었지만, 내가 먼저 사과를 했다.
“고개 들라니까. 사원증 똑바로 해봐.”
“…….”
“뭐 해.”
명치께에 뒤집힌 채로 걸려 있는 사원증을 짧게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정영일은 재촉했다. 자꾸만 주먹이 쥐어지는 손을 애써 펼쳤다. 사원증 아래를 살짝 잡아 똑바로 돌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사진 아래 서도운이라는 이름이 선명한 글씨체로 박혀 있었다. 정영일의 시선도 그 검은 글씨 위로 날카롭게 박혀들었다.
“이름이 서도운이네.”
“…….”
“서도운……. 서도운.”
되뇌듯 그의 입 안에서 내 이름이 몇 번 굴려졌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던 정영일이 마침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헛것을 보나. 서도운?”
그는 거친 손길로 내 턱을 부술 듯 쥐고는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마른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그 서도운? 그 서명현 아들 서도운?”
“으…….”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깔았다. 어쩐지 목에 닿은 손가락 몇 개가 내 기도를 콱 누를 것만 같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반응 보니 대답이 필요 없네.”
정영일이 거칠게 얼굴을 밀며 손을 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무겁게 내리꽂히는 비수에 입을 함부로 열 수가 없었다. 어릴 적 느꼈던 감정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서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나는 사자 앞의 토끼처럼 사지가 마비된 듯 굳어 있었다.
비서실 안의 사람들이 들을까 무서워졌다. 나를 챙겨주고 아껴주던 사람들이 내 정체를 알면 돌아설 게 무서웠다. 재차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며 소리치는 정영일에게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고작 한마디를 뱉었을 뿐인데. 짜악, 하는 매서운 마찰음이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세게 돌아갔다. 왼쪽 볼에 아무 감각도 없다가, 서서히 따끔거리는 통증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벌벌 떨었다. 칼로 난도질당한 느낌이었다. 맞은 곳도, 가슴도. 짧은 순간 온몸이 차게 식었다가 열이 오르기를 반복했다.
“네가 고개를 쳐들고 여길 들어올 수가 있어?”
정영일이 목소리를 더 높였다.
나라고 여기에 오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살지 않았다. 평생 청영의 이름 아래 고개를 숙이고 살았다. 피하고 숨고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았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형의 뜻이었다. 그렇게 따져 들고 싶었다.
하지만…… 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온전히 그의 뜻만은 아니었다.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했고, 내 발로 걸어와 면접을 봤다. 그전에, 청영에 갚아야 할 빚도 다 갚지 못한 채였다. 나는 말로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지, 죄를 덜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줄행랑을 치더니. 평생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닙, 죄송합니다. 윽!”
“뻔뻔하게 이런 걸 목에 걸고 지금.”
정영일이 사원증을 한 손에 붙들고 확 잡아당겼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휘청거렸다. 강한 힘에 끈의 이음새가 끊어지며 부속품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통증이 남았다.
끼익, 안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팀원들이 들은 것이다. 나는 차라리 다른 곳에서 맞든 욕을 먹든 하고 싶었다. 사원증을 바닥에 내던지는 정영일을 막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그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철썩! 또다시 볼을 때리며 그가 욕을 내뱉었다. 귀가 먹먹하게 울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누군가 몽둥이로 목덜미를 내려친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에 순간 힘이 빠질 정도였다.
“본부장님!”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뭡니까.”
“……이 친구 사수인 대리 박하나입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제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니…….”
“나 여자 안 때리는데. 비키지.”
“지금은 이사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공석일 땐 이사실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면 제가 곧바로 이사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대리님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긴장한 듯 떨리고 있었다.
“박하나 대리? 나 해일이 형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사님께서…….”
“여기 비서실은 눈치 없는 사람들만 모아놨나.”
정영일의 목소리가 더없이 가라앉았다.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라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행동을 보였다.
나는 대리님의 팔을 잡고 계속 끌어당겼다. 대리님, 괜찮습니다, 하며 뒤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대리님은 비켜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뒤로 나를 꼭 붙들고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 손톱으로 살을 눌렀다.
이러다간 정말 나 대신 맞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손을 뿌리치며 옆으로 나왔을 때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본부장님.”
열린 엘리베이터로 긴 다리가 뻗어 나왔다. 형과 김 실장님이 빠른 발걸음으로 근처까지 걸어왔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왔는지 조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정해일.”
정영일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고는 그의 앞에 내놓듯 세웠다.
“이 새끼가 누군지는 알아? 이 새끼가 여길 기어들어 오는 걸 넌 보고만 있었어?”
휘청거리다 간신히 두 발로 서자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커다란 손에 머리채가 잡혔다. 뒤에서 놀란 대리님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두피가 세게 당겨지고, 머리가 죄 뽑힐 것 같은 통증에 신음할 때.
“손대지 마.”
형이 정영일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순간 힘이 빠진 손이 머리채를 놓았을 때 형은 던지듯 그의 손을 쳐내기까지 했다.
“내 비서야.”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잡아 자신의 옆으로 당겼다.
나는 형의 옆으로 당겨지면서도 정영일의 눈치를 봤다. 그의 매서운 눈매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형의 옆에 서 있으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내 비서?”
더 무서웠다. 또 오해받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믿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너 지금…….”
허무하게 허공으로 쳐내진 손을 내리며 정영일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려 하였다. 또 머리채를 잡힐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서도운 씨. 나가 있어요.”
형이 그의 앞을 가로막듯 한 발짝 앞에 서며 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발을 끌며 한 발짝을 뒤로 보내긴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이 욱신거렸다. 눈가까지 화끈한 감각이 내달렸다. 차마 볼을 만질 수도 없었다.
“어딜 내보내. 지금 내 앞에서 누굴 감싸고돌아.”
“첫날부터 소란 피우지 말지. 좋게 안 보일 텐데.”
“그놈부터 해결 봐.”
“그러니까 눈앞에서 치워준다잖아.”
형은 무척이나 별것 아니라는 듯 차분한 말투로 반박했다. 답답했는지 정영일이 목 안으로 긁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어댔다. 그는 다시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씨팔,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야? 너도 서명현처럼 회사 망치려고 들어왔어? 죽은 듯이 살아도 모자랄 판에 여기까지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와?”
“서 비서. 안 나가고 뭐 해요.”
“정해일!”
“서도운, 나가 있으란 말 안 들려?”
그가 어서 여기서 나가라는 듯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까보다 언성이 더 높아진 탓에 굳었던 몸이 움찔거렸다.
“……죄송합니다.”
나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움직이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어 자리를 벗어났다. 비상구 문 속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내 등을 향한 날 선 말은 그칠 줄을 몰랐다.
비상계단을 미친 듯이 올랐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닿다 못해 머릿속까지 어지럽혔다. 쿵쿵 거세게 내달리는 심장이 몸의 말단까지 박동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계단을 타고 오르자 빙글빙글 도는 미로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먹구름이 꼈다. 그러다 발을 헛디뎠을 때쯤, 계단을 손으로 짚으며 멈춰 섰다.
“우욱…….”
갑자기 올라오는 토기에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어느 층인지도 모른 채 비상구를 다시 열고 나와 곧장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칸 하나를 열고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은 채로 변기를 부여잡았다. 동시에 위장에 든 음식물들이 토해져 나왔다.
“윽, 우욱……. 으…….”
눈을 질끈 감자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배 속이 꼬인 듯 위장을 조여대는 불쾌한 감각에 사로잡혀 고개만 처박고 있었다.
정영일이 나에게 화내던 모습이, 과거에 내가 봤던 아버지와 정영일의 모습에 겹쳐졌다. 아버지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2대에 걸쳐 이어진 이 현상이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악의 굴레처럼 느껴졌다.
표면적으로 아버지의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였다. 하지만 청영 일가에서는 다르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고를 꾸몄다는 것. 그걸 뒷받침하는 정황도 있었다. 회장의 대리자임을 이용해 무언가를 주도하려고 한 흔적이 있다거나, 통정매매의 주동자로 탈바꿈 당해 앙심을 품었다든가 하는.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정황 증거였을 뿐이다. 법원에서도 사고의 고의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운전자의 운전 과실만이 인정되어 사망에 대한 보상을 해야 했다. 그 판결에 청영은 분노했고, 항소심까지 이어졌다.
나조차도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다. 만약 청영이 상고까지 밀어붙였더라면 판결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고의성을 따지는 것은 차치하고 결론만 놓고 보자면 아버지의 과실로 사고가 난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는 판결이 났다. 그 잘못을 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가정이 깨지고 기업이 무너질 뻔했다.
“흑, 우으윽…….”
장례도 온전히 치르지 못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던 어린 날. 기자들이 쳐들어오고, TV를 틀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다니던 학교를 옮기고 옮겨 아무도 날 모르는 곳까지 스며들었음에도 도무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죄인의 가족,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하아…….”
점심으로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내고 더는 나올 것이 없어 끈적한 액체까지 쏟아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이 뺨을 맞아서인지 토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한바탕 게워낸 속이 무척이나 불편했고, 가슴께를 문지르는 손끝이 아직도 바들거리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일어나 세면대로 다가갔다. 입 안을 헹구고 고개를 들자 빨갛게 부어 실핏줄이 터진 볼이 보였다. 입이 따끔거린다 싶더니 아랫입술이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자 고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끝까지 오른 열감이 식을 줄을 몰랐다. 형을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후회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앞을 부옇게 흐리다 기어코 볼을 타고 흘렀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다 아픈 곳을 건드려 눈가가 찌푸려졌다.
형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집안을 망칠 뻔한 죄인의 아들이 그 집안에 당당히 들어선 이 상황이 도무지 옳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들어오고 조용하던 비서실마저 시끄러워진 듯해 가슴이 먹먹했다. 차라리 여기서 내보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또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형이 바라는 게 내 고통이었다면, 이런 고통을 바랐던 것일까?
끝없이 일깨워지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런 모습을 바랐던 것이라면…….
“윽…….”
나는 늪에 빠진 듯 그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무거운 어둠에 짓눌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다시 보았다.
‘역겨워.’
순진한 척하는 얼굴. 그가 무슨 의미로 한 얘기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질식한 듯한 기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