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터덜터덜 옥상으로 올라왔다. 한편에 마련된 벤치에 걸터앉았다. 머리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해를 막을 가림막도 없었지만 나는 굳이 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앞으로 발을 쭉 뻗었다가 뒤꿈치로 번갈아 바닥을 토닥토닥 쳤다. 가만히 모아 똑바로 앉았다가 아예 의자 위로 발을 올려 두 팔로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어떻게 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온몸이 화끈거렸고, 어딘가에서 시선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이래서 회사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앞으로 태도는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정영일을 만날 때마다 매번 이렇게 맞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뺨을 내려치는 강한 힘에 시야마저 흔들리던 조금 전을 떠올리니 다시 아찔하게 눈이 감겼다. 눈물이 또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너무 꼴사나워 무릎 위로 눈을 문질러댔다.
그때 마침 연락이 왔다. 주머니에서 웅웅거리며 소리를 내는 핸드폰을 꺼냈다. 차라리 김 실장님이었으면 했는데, 상대는 형이었다.
―어딥니까.
내가 받았다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형이 먼저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의자로 올렸던 다리를 다시 땅으로 내리며 대답했다.
“……잠깐 나와 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어떻게 됐을까. 정영일이 화를 내며 나를 내보내라고 했을까. 형이 그 말을 들어주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팀원들에겐 뭐라고 설명하고 넘어가지? 더 이상 프로젝트 문제라고 둘러대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어디예요.
“옥상에…….”
젖었던 앞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햇볕에 벌써 바삭바삭 말랐다. 손끝으로 대충 빗으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수화기 너머로 한숨이 흘러왔다.
―널린 게 휴게실이고, 카페도 있는데 왜 땡볕 아래 가서 서 있습니까. 미련해서는.
“……죄송합니다.”
―내려오세요.
“…….”
―정리했으니까 내려와. 속 터지게 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뚝 끊어졌다.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통화 종료 화면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리라는 말이 어불성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 이제 시작일 텐데, 과연 오늘 일만 잘 넘어갔다고 해서 정리했다고 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옥상 문을 열고 다시 계단을 찬찬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영일이 조용히 지낼 것 같지는 않았다. 출근 첫날부터 남 시선 하나 의식하지 않고 언성을 높이며 내 뺨을 내려치던 남자였다. 물러났다 해도 전략적 후퇴일 것이 분명했다.
불안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뺨을 맞은 순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신히 이사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아까와는 달리 무척이나 정적인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일부러 비서실에 들르지 않고 이사실로 직행해 문을 두드렸다. 다른 곳엔 시선도 두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 발끝만 바라보았다. 들어오라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문 안으로 내 부끄러운 모습을 감춰버리듯 몸을 밀어 넣었다.
“쯧…….”
형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얼굴을 찌푸리더니 급기야 혀를 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닫고 몇 발짝 떼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코앞에 섰다.
“몇 대나 맞았습니까.”
“읏!”
형이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아픈 곳이 마구 눌려 나도 모르게 잇새로 소리를 냈다.
“이렇게 심하게…….”
“아픕니다…….”
“입술도 터지고. 여기 멍들고 긁혔습니다. 봤어요?”
“아…….”
형이 손끝으로 광대 부근을 매만졌다. 멍이 들었다고? 아까 화장실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붉은 수준이었는데. 타격감이 심하다 싶더라니. 나도 손을 들어 볼을 만져 보려고 하는데, 그가 막듯이 내 얼굴을 옆으로 틀었다.
“쯧, 손톱에 긁혔나 본데.”
오른쪽 얼굴은 맞지 않아 비교적 멀쩡했다. 그걸 확인하면 표정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처럼 보였다.
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자신이 사서 자신만이 때릴 수 있는 몸을 멋대로 건드려 화가 난 것일까?
형은 앞머리도 빗어 올리며 이마까지 확인했다. 또 다른 곳은 멀쩡한지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다가 마침내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홱 뒤돌아 화난 듯한 발걸음으로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병가 쓰고 조퇴하세요.”
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 사원증이었다. 사원증을 끼우는 목걸이는 부서져 버렸는지 보이질 않고, 사원증만 덩그러니 데스크에 올라와 있었다.
“사람 붙여줄 테니까 따라가서 병원 들르고.”
“오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내 선에서 정리했습니다.”
“어떻게…….”
“아무리 내 형이라고 해도 공적으로는 그냥 본부장일 뿐입니다. 회사에선 오늘 같은 일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할 거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
“이렇게 심하게 때린 줄은 몰랐는데, 내가 따로 처리하겠습니다.”
형은 말을 함과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다음 주부턴 그냥 평소처럼 일하면 됩니다. 원하면 한 주 쉬어도 좋고.”
내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듯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랫입술을 물다 상처를 씹어 움찔거리자 형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 쪽으로 팔을 뻗으려다 이내 주먹을 쥐며 그냥 내려놓았다.
이미 맞은 상태라 또 때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순간 등허리로 소름이 올랐다. 감각이 떠올라 손끝까지 저릿했다.
“정리된 거면…… 오늘부터 하던 일 마저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 사원증을 집어 들었다. 사각형의 카드를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자 날렵한 모서리가 손바닥을 짓눌렀다.
“병원 가서 치료나 받으세요. 그 상태로 무슨 일을 한다고 고집부립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일하고 싶었다. 어차피 쫓겨날 게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 당장 돈으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일이라도 미친 듯이 해서 상쇄해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치료할 것도 없었다. 입술에 연고나 한 번 발라주면 될 일이었다. 이미 얻어맞은 볼에 뭘 해봤자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형의 생각은 전혀 달랐는지 매서운 눈매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준비한 기획서가 있습니다. 곧 올릴 테니 검토…….”
다급하게 대답하려다 터진 입술이 자극되었는지 따끔거렸다. 말을 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서도운 씨.”
“……검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올리고 돌아가세요.”
“의무실에서 약 바르면 됩니다.”
“올리고 가면 내가 알아서 확인할 테니까 그만 돌아가라고 했어요.”
화를 참아내듯 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제야 그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서 있었다.
“내가…… 말 두 번씩 하게 하지 말라고 안 했습니까.”
그러자…… 그가 뺨을 때렸던 감각이 떠올랐다. 조금 전부터 온몸을 감싸든 이 불안감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장소가 어디든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에 대한 공포.
입을 꾹 다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엔 정말 맞을까? 그의 말을 듣지 않아서 또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밤에 나를 불러내 고통을 준다거나 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정영일과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던 게 우스웠다. 전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 * *
형은 내 서류를 받아 들며 재차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손까지 내저어가며 극구 사양했다. 고작 병원 가는 것에 누군가 따라붙는 것도 우스웠고, 이런 배려마저도 나중에 다 갚아야 할까 걱정도 되었다.
대낮에 회사에서 나오니 할 일이 없었다. 햇볕은 쨍쨍한데 마음은 먹구름이 끼다 못해 당장 죽지 않아도 이상할 정도였다.
얼굴이 이 지경이 된 채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부끄러웠기에 우선 약국으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약과 반창고 값을 계산하다 말고 약사가 물었다. 괜찮고 말고 할 게 없어 그냥 짧게 대답했다. 심해 보이긴 하나 보다.
“멍 빼는 약도 있는데, 같이 드릴까요?”
그러면서 내민 작은 약상자는 몸통에 만 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면 빠지는 멍인데……. 집에 가서 찜질이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약국을 나섰다.
무슨 정신으로 이 먼 길을 왔는지도 모른 채 두어 시간이 지나자 집에 도착해 있었다. 반쯤 나간 정신으로 골목을 도는데, 이 동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길이 좁아 옆으로 비켜 가려고 하는데,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도운 씨!”
나를 부른 건 문 전무였다.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한 자동차다 싶었다. 정말 연락이 안 된다고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경악한 나와 달리 그는 활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나를, 내 다친 얼굴을 보자마자 단번에 표정을 굳혔다.
“이게 무슨…….”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왜 다친 거예요? 응?”
“돌아가 주세요. 정말 이사님이 아시면.”
문 전무는 내 말을 가로막듯 턱을 가볍게 쥐었다. 끄트머리만 아주 살짝. 그러고는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해일이가 때렸어요?”
“네, 네? 아니에요.”
“그럼 누가 때렸어요. 맞았는데 왜 이렇게 태연해.”
울고불고하는 건 아까 다 끝내서……. 그리고 내 잘못으로 맞은 거라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냥 고개만 바닥으로 툭 떨궜다.
“일단 타요. 나랑 병원 좀 가야겠어요.”
“아니에요!”
“해일이가 모르게 할 테니까 같이 가요.”
“그게 아니라!”
문 전무가 내 손목을 잡아끌 기세이기에 우뚝 멈춰 서며 소리쳤다.
“저 약, 약…… 사와서……요.”
문 전무를 집에 들이고 말았다. 기어코 자기가 상처를 확인해야겠다면서 막무가내로 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소리가 더 커지면 이웃집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일단 저 크고 화려한 차부터가 문제였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기에는 몸과 정신이 너무 고단했다.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에 남자 둘이 들어오니 더 좁게만 느껴졌다. 그의 키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커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군데군데 이상한 얼룩이 진 마루가 부끄러워 발끝으로 가리다 그냥 그를 얼른 자리에 앉혔다.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누추한 집. 집엔 음료수 한 병도 없었다. 집에선 밥도 잘 먹지 않는데 음료수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찬장을 마구 열어 살피며 뭐라도 없나 찾아보려는데, 문 전무가 됐다며 나를 말렸다.
“내가 다짜고짜 찾아온 건데 무슨 대접이에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괜찮으니까 일단 앉아요.”
문 전무는 내가 들고 있던 약국 봉투를 가져갔다. 안에서 나오는 건 소독약과 연고 하나였다. 그가 어쩐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말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약을 꺼내놓고 준비하고 있던 그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
얼굴 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소독약으로 닦는 것인지 화끈거리고 싸한 느낌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집 안은 조용했다. 간간이 전자제품이 돌아가는 소리만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이러고 있다가 설마 형에게 들키지는 않겠지. 그런 불안감이 짧게 들었다.
“해일이는 알아요?”
때마침 묻는 그 때문에 눈을 떴다.
“아세요.”
“누가 그런 건데요. 회사에서 이런 거예요?”
“……아.”
“아, 젠장. 미안해요.”
문 전무가 광대에 난 상처를 소독하다 잘못 건드렸는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작게 소리 내자 예민하게 반응하며 손을 떼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영 서투네.”
집 앞에서는 분명 자기가 치료해 주겠다며 온갖 능숙한 의사인 척은 다 해댔다. 그게 전부 수작이었다는 걸 알자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움직이지 마요. 손이 떨려서.”
다시 눈을 감자 광대 위로 연고가 덧발라졌다. 입술 위로 치덕치덕 연고가 올라왔다. 영 느낌이 이상했다.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모르겠다.
“어, 난데. 주소 찍어줄 테니까 최 박사님 좀 불러줄래? 응.”
“……?”
잠깐 손길이 안 느껴진다 싶더니 문 전무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는 그가 보였다.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톡톡 문질렀다.
“의사 불렀으니까 그냥 의사한테 치료받아요.”
“왜, 왜요.”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벽 한쪽의 거울로 시선을 보냈다. 헉…….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광대와 입술 위로 새하얀 연고가 폭설이 내린 것처럼 쌓여 있었다. 정말, 정말 소질이 없구나. 그냥 바르기만 하면 되는데, 대체 왜…….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런 작은 상처에 의사까지 부를 일이던가. 나는 문 전무의 손수건을 가져가 약을 조금 덜어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약 발라주셨으니 이제 됐어요.”
“내가 안 괜찮아요. 그냥 처음부터 병원 데려가는 건데.”
결국 문 전무는 내 말을 무시하고 의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의사가 오기까지 딱히 할 게 없어 집을 구경했다. 그렇다고 집이 넓은 것도 아니라 구경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엌 겸 거실 겸 현관으로 쓰는 곳과 자는 곳으로 쓰는 안쪽의 작은 방, 그리고 화장실이 전부인 단출한 곳이었다. 그의 긴 다리로 걸으니 다섯 발걸음 만에 끝과 끝을 오갈 수 있었다.
“이건 뭐예요?”
문 전무가 탁자 위의 팔찌를 집어 들며 물었다. 얼마 전 도넛 가게에서 선물로 받았던 장난감 팔찌였다. 내가 시범을 보이듯 길게 편 팔찌를 그의 손목 위로 탁 내리자 순식간에 둥글게 말리며 감겨들었다.
“가지셔도 돼요.”
문 전무는 신기하다는 듯 팔찌를 한참 구경하면서 웃었다. 의사도 불러준 사람인데 못 줄 것도 없었다. 그는 그럼 잘 받겠다며 팔찌를 안주머니로 챙겨 넣었다.
그렇게 떠들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침내 의사가 도착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의사였다. 문을 열어주며 꾸벅 인사하자 역시나 놀란 눈으로 얼굴의 상처를 살폈다.
의사는 문 전무와는 다른 전문적인 손길로 상처를 치료했다. 나도 모르게 거울을 힐끔댔다. 아까완 달리 안정적으로 발리고 있는 약품에 티 나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날이 더워서 거즈는 안 붙였습니다. 덧날 수도 있고. 씻고 나서는 이 약을 발라주면 됩니다. 더워도 볼에 온찜질 해주고요.”
“고생하셨어요, 최 박사님.”
“전무님이 때리신 건가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문 전무가 황당하다며 웃었지만 의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듯했다. 영 못마땅한 사고뭉치 아들을 바라보듯 위아래로 그를 훑더니 가방에서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 나에게 주었다.
“집에 이런 거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곧장 누워서 푹 쉬세요.”
내가 배웅하려고 하자 선생님은 나오지 말라며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신발을 마저 신고는 문 전무가 괴롭히는 거면 바로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오해하셔서.”
“저분 원래 저러세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문 전무는 장난스럽게 웃어넘겼다. 그에게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비용, 의사 선생님 부르신 비용이…….”
“그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불렀는데 왜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왕진을 받으니 그 비용이 부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 비쌀 것 같았는데, 이렇게 그에게 떠넘겨도 되는 걸까 싶었다.
“나한테 빚졌으니까 가끔 여기로 놀러 오게 해줘요.”
“그건 안…….”
그건 안 된다고 대답하려다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여지를 주고 있다던. 여지. 여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잘 모르겠다.
“배고파요? 아니면 잘래요?”
“그냥 좀 쉬고 싶습니다.”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목 부근도 아까 거세게 당겨져서 그런지 약간의 통증이 있었다. 속을 게워내서 식욕은 전혀 없었고, 아무 생각 없이 푹 자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많이 나아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돌아갈게요.”
“죄송합니다. 괜히 오셔서 제 뒤치다꺼리만 하시고……. 그러니까…….”
“그런다고 안 올 거 아니니까 그만 밀어내요.”
나는 최대한 완곡히 거절하고 싶었다. 꼭 형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누군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하지만 그는 내 의도를 금방 파악하고는 말을 막았다. 난감함에 입이 다물렸다.
문 전무가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빗듯이 쓸어 올렸다. 손길에 따라 올라갔던 머리가 다시 사락 내려왔다.
“내가 했던 뽀뽀는 안중에도 없죠?”
대답도 못 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백을 들어서 무척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왜 나를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내 사정을 전부 알면 날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여기다 해줬잖아요. 도운 씨 보조개 생기는 곳에……. 지금은 상처가 나버려서.”
“…….”
“대체 누가 때렸을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걱정 받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가 하는 걱정이 오히려 내 마음속의 죄책감을 키웠다.
“회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거면 해일이가 잘 처리를 해야 할 텐데. 아니, 그런 일이 못 일어나게 막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운 씨 그냥 내가 데려와야겠다. 우리 회사로.”
“……하하.”
“농담 아닌데.”
문 전무는 내 어색한 웃음에 짧게 대답하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벗어두었던 구두를 다시 신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회사 올래요? 청영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나름 대기업인데.”
“저는 괜찮습니다. 지금에 만족하고 있고, 이 자리도 과분해서 제가 박차고 나올 수가 없어요.”
“과분해서 부담스러우면 AG로 오면 되잖아요. 연봉 협상도 다시 해주고, 원하면 집도 주고, 차도 주고.”
“……그런 걸 제가 그냥 얻는 게 아닐 것 아닙니까.”
그렇게 대답하자 가벼웠던 그의 말투도 진중해졌다.
“그래요. 나한테 온다는 게 전제조건이겠지.”
“전무님.”
“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냥 가볍게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도 이렇게 퍼다 줄 수 있을 만큼 재력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거기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력도 있고, 지위도 있었다. 누구나 바라는 사람. 나한테는 정말 과분하고, 또…….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그냥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
“저…… 이사님 좋아해요. 그렇게 된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문 전무는 놀란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입이 가만히 다물렸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겨우 뱉고 나니 조금 후회도 되었다. 알려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썩어버린 마음이었다.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더러운.
그런데도 말을 해버린 것은…… 지금 내 선에서 그를 도저히 끊어낼 방법을 몰랐고, 친구 관계인 두 사람 사이에 얼결에 껴버린 이 상황에 내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여지를 주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그래서 말하고 말았다.
“제 아버지가 저보다 먼저 청영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사고를 내셔서 회장님과 함께 돌아가셨어요. 아마 전무님도 아실 겁니다, 그 일.”
“…….”
“그런 저를 다시 데려와 주신 게 이사님이시고……. 무슨 목적으로 데려오셨든 저는 그냥, 일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빚을 갚을 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제가 죄인의 자식이니까요.”
“도운 씨.”
문 전무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그래서 평생 숨기고 살 겁니다. 그냥, 그냥 이렇게 옆에서 갚으면서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편하게 뭔가를 누린다든가 하는 것들이 전부…… 저한텐 무척이나 사치 같은 일이에요.”
“…….”
“죄송합니다, 전무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얼마나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전부 내뱉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일 뿐이었는데 내가 너무 오버한 건 아닐까, 괜히 얘기했나. 그가 조용하니 별걱정이 다 들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이런 사정을 들었으니 나에 대한 정도 곧 떨어질 거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도 날 좋아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내가 싫어지는데, 남은 어련할까.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저절로 시선이 내려갔다. 그런 내 머리 위로 문 전무의 손이 올라왔다. 쓰다듬듯 쓱쓱 움직였다.
“누가 때렸는지 알 것 같네.”
“……전무님. 이사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그에겐 또 빚을 졌다. 온갖 마음이 다 뒤섞여 들었다. 죄송하고, 감사하고.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꽉 막힌 말을 당장이라도 끄집어내 보이고 싶었다. 내 성격이 너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울지 말아요.”
문 전무가 손으로 내 눈가를 쓸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급히 고개를 틀며 눈가를 닦아냈다. 별 부끄러운 모습을 다 내보이고 있었다.
“약 다시 발라야겠네.”
“네…….”
훌쩍임을 억지로 누르며 대답하자 그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쉬어요. 난 가볼게요.”
문 전무는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탁 닫힌 문 뒤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는 내 말에 뭐라 말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가만히 듣다 비밀을 지켜주겠다고만 했다. 그래서 더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문 전무를 따라 나가 배웅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도, 그럴 수 없는 처지라는 걸 다시 상기하고 발을 돌렸다.
소음이 사라진 조용한 밤은 내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오늘 분명 할 일이 많았는데. 기획서도 검토받고 허가 떨어지면 회의 일정도 조정해야 하는데. 회사에서 나오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한 채로 바닥에 누웠다가 병원이 생각나 다시 벌떡 일어났다. 예약 날짜를 변경하면서 또 병원비가 들겠다는 생각에 입 안이 까끌까끌해졌다. 병원 검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모으던 비상금도 야금야금 빚으로 빠져나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힘이 빠져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일어나 근처의 책상을 끌고 왔다. 책상에 놓여 있던 두꺼운 책을 펼쳐 샤프를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형이 배우라고 했던 과목 공부였다.
하지만 집중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청영. 정영일. 회장님. 형. 가족들. 비서실. 깡패. 문득문득 떠오르며 머릿속을 찌르는 사람들. 어지럽다 못해 두통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일어나 장롱 위에 놓은 검은색 가계부를 꺼냈다. 모서리가 닳아 속지가 다 드러난 낡은 가계부.
어머니가 쓰던 가계부를 내가 이어 쓰기 시작해 글씨체가 달라지는 부분부터 손가락으로 훑어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청영에 남은 빚은 얼마. 사채 빚은 또 얼마. 이자와 원금. 그 외의 항목들도 사소한 것까지 구구절절.
언제인지 모르겠는, 너무 힘들어 귀퉁이에 써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아빠 따라갈까.]
이런 생각도 했었나……? 지금은 이런 극단적 생각을 하기에도 지친 상태였다. 메모를 보고 피식 웃음이 흘렀다.
괜히 펼쳤다. 나는 다시 가계부를 덮고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본다고 해서 빚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꼭 이렇게 몇 번씩 확인하고 싶어진다. 아주 미련하게도.
“힘들다…….”
나는 그렇게 천장만 바라보다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날 꾼 꿈에선 형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 손에 목이 짓눌려 죽어가는 내 모습만이 뇌리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 * *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오늘처럼 일어나기 싫었던 날이 또 없었지만, 억지로 털고 일어나 준비했다.
“…….”
태연한 척 출근해 키보드를 두드리고는 있지만, 도무지 팀원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둘씩 비서실로 들어오던 팀원들은 내 낫지 않은 상처를 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행히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형이 정리했다더니, 입단속이라도 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미안했다. 쉬엄쉬엄하라는 격려까지 받으니 이런 분위기에 적응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대리님이 도착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겼다.
“대리님, 저번 주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자리로 다가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내 앞에 나서서 막아주었던 게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나 대신 모욕을 듣게 한 것이 죄송해 계속 마음이 쓰였다. 주말에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대리님이 좋아하는 프랑스 과자였다.
“우와, 이게 뭐예요? 고마워요.”
“별거 아니에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맛있게 먹을게요. 이런 것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그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는 손까지 내저어가며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렇게 화가 난 청영 집안 일원을 상대로, 거기다 자신보다 훨씬 큰 사람을 상대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부하 직원을 보호하는 그 행동은 감사함을 넘어 감동까지 주었다.
“저 대신 맞으셨을 수도 있는데…….”
“설마 진짜 여자를 때릴까요? 몰라, 진짜 때렸으면 유급 휴가 받고 보상금도 받았겠죠, 뭐. 안 그래요?”
대리님은 여느 때와 같이 키득키득 웃으며 오히려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 재치와 호탕함에는 아무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 덕에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아까보단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일에 임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실장님이 나를 실장실로 호출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의 김 실장님이 사원증을 끼울 새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받아왔어야 했는데.”
“뭘요.”
얼른 새 목걸이에 사원증을 끼워 넣고 목에 걸자 실장님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
“이사님께 대강의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
“팀에서 알고 있는 건 나 하나고, 다른 팀원들은 내가 적당히 둘러대고 입단속 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대로 행동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인사했다. 역시 김 실장님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 형과 관련한 일은 거의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형도 믿고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신경은 쓰였다.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걱정되는 것도 있었고……. 복합적인 심경이었다. 그는 내 근심을 덜어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죠? 이편이 훨씬 안전할 겁니다. 이사님이 안 계실 땐 나한테라도 연락해서 해결 볼 수 있으니까.”
“아닙니다, 죄송해서 그래요.”
“비서가 하는 일이 그건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님은 대리님과 마찬가지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서도운 씨한테 사감을 가진 건 청영 쪽 사람들이나 그렇지, 나나 다른 팀원들은 그런 것 상관없이 그냥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고개 숙일 것 없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 얘기 하려고 불렀습니다. 전에 기획서 올렸던 복합 문화 타운 건설 건 말이에요. 이사님이 담당자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네?”
갑자기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라 되물었다. 어째서……?
물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한 것도 아니고, 아직 기획 단계였다. 하지만 이미 이건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해 올렸다. 그가 바꾸자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아들인 나에게 청영의 큰일을 시키기 껄끄러워서겠지.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었다.
“…….”
다 자기가 정리하겠다면서. 평소처럼 일만 하면 된다면서.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나를 믿기 힘든 것이다. 굳이 잡음을 낼 사건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는 있는데. 바라는 게 사치인 걸 알고 있지만 서운한 마음이 퐁퐁 솟아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확정된 건 아니니 이사님 오시면 말씀드려 보세요.”
“알겠습니다.”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침울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말한다고 바꿔줄까 싶었다.
* * *
오후 늦게 출근한 형이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보고서 검사였다. 급한 일을 마치고 왔는지 목을 답답하게 조이던 넥타이를 조금 당겨 내리며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그는 앞 장부터 하나씩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거의 막바지가 될 때까지 아무런 지적이 없자 나는 그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사님. 복합 문화 타운 건…… 제가 맡아서 계속해 보고 싶습니다.”
그가 내 말에 시선을 짧게 보냈다.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넘겼던 장을 모두 되돌리며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로 양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글쎄요. 서도운 씨를 그 일에 참여시켜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잘해낼 수 있습니다.”
피곤한 듯 감기는 눈에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실장님 말로는 그도 그냥 권유해 본 거라고 하던데, 역시 빈말이었던 모양이다. 사업을 맡긴 건 실장님이었으니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두 사람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도 한번, 끝까지 말이나 해보자 싶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물론…… 못 미더우시겠지만, 절대 다른 생각 없습니다. 일부러 잘못되게 일을 한다거나, 그르치거나 할 생각 없습니다.”
바보처럼 말이 뚝뚝 끊겼다. 할 말은 많은데,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할지를 몰라 머릿속이 엉켜들었다. 형이 감았던 눈을 뜨며 나를 응시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얼결에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굴리고 말았다.
“저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렇다고 제가 이 사업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역할이 큰 것도 아니고요.”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데,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역시 못 믿겠지. 나를 믿어달라는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영 믿음직스럽지도 않았고. 나 같아도 나를 못 믿을 것 같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이미 한 번 청영을 무너뜨릴 뻔한 죄인의 가족. 나에겐 그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서도운 씨.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내 말허리를 중간에 끊으며 형이 말했다. 잠시 앞으로 짧게 내밀었던 손은 그대로 관자놀이에 가져가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그 이유가 아니면 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그냥 내가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인가? 하지만 이제껏 배운 것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 어려운 걸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들은 따로 있어 나는 그저 취합하고 전달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그 정도 일도 못 해낼 것으로 보였다는 것에 더더욱 침울해지려는 때에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도운 씨가 AG 기업 일을 안 맡았으면 하는 것뿐입니다.”
“예?”
“마음에 안 들어.”
어, 어디가……. 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지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그의 말에 우물쭈물하고만 있자 내 쪽을 흘긋 바라본 형이 더 인상을 구겼다.
“또 그런 얼굴 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서…….”
내가 또 순진한 척한다는 의미였다. 순진한 척한 거 아닌데. 나는 그냥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
“문 전무 있는 곳과 엮이게 되는 게 싫다는 거예요.”
“네? AG 문 전무님께서는 이 일과 관련이 없으십니다.”
“알아요.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근데 또 모르지. 어떻게 될지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말하면서도 설득력이 없었다. 문 전무의 속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는 내가 문 전무를 꼬여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내가 꼬여내는 게 아니라 문 전무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호감을 보이는 것이었다. 막는다고 막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문 전무와 상관없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의 직무와 관련 없는 일이기도 하고, 주말에 만나 이미 내 속을 있는 대로 다 내보였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들었을 시점부터 정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잘할 수 있어요?”
“네.”
“……핸드폰 한번 봅시다.”
나는 냉큼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번엔 정말 숨길 것도 없었다. 무려 따로 지운 문자도 없는 상태였다. 문 전무에게서 연락이 없으니 내가 먼저 연락할 일은 절대 없고. 그가 집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그건 숨기려면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누그러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살피던 형이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눈썹을 짧게 올렸다가 내렸다.
“병원? 대한대병원은 무슨 일입니까.”
“아, 아……. 그건 그냥 정기적으로 받는 검진입니다.”
병원에서 온 알림 문자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어릴 적 받은 수술 때문이라고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내 짧은 설명으로 이해가 되었는지 그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핸드폰을 살폈다.
“얼굴 다친 건 왜 병원 안 갔어요.”
시선은 그대로 핸드폰에 둔 채 물었다. 병원에 가라고 붙여줬던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었는데, 역시 그에게 전달되었는가 보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요.”
“하여간 고집은.”
“…….”
“그래도…… 주말 동안 많이 나아졌네.”
형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다시금 살폈다. 이리저리 훑어보는 눈길에 어쩐지 볼이 조금 뜨거워졌다.
“다음부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말 잘 들어요.”
“알겠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보상금이 나올 겁니다. 일도…… 맡아서 해보세요.”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서 허가가 떨어졌다. 믿어주는 걸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며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잘해 보겠습니다.”
수포로 돌아갈 뻔했던 계획들이 다시 차근차근 머릿속에 쌓였다. 무슨 일을 어떻게 진행할지 대강의 줄기를 그려나갔다. 앞으로 무척 바빠질 것이다.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살 것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서도운 씨.”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 내 앞으로 다가와 데스크에 걸터앉았다. 다리가 워낙 긴 탓에 내 발끝에 그의 구두가 닿았다. 잠시 밑으로 시선을 빼앗긴 순간, 그가 내 광대 부근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서도운 씨가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입니다.”
상처가 아물고 있는 자리. 약이 묻어 있는 곳을 피해 주변을 덧그리며 쓸어내렸다. 내려온 손이 볼을 감쌌다. 그의 손은 조금 차가웠다.
“기회 잘 잡아요.”
“…….”
“잘 잡았으면 좋겠군요. 내가 더 실망하지 않게.”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기회를 잘 잡으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어두웠다. 짙은 어둠이 막 걷히는 것만 같은 푸르스름한 삼백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일까. 일을 잘 진행해 보란 듯이 업적을 쌓으라는 소리일까. 그래서 그에게도, 그의 형에게도 당당해지라고, 그렇게 응원해 주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의 의중은 항상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잘 마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혼란스럽고 무거운 감정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봐요.”
“이사님……. 오늘 저녁에 이사님께 가도 되겠습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등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내 얼굴은 귀 끝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안 됩니다.”
“……그럴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얼굴을 좀 봐. 아직 덜 나았는데 울기라도 해서 더 심해지면 대체 언제 회복할 겁니까.”
그러게 진작 자신이 말한 병원에 가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형이 짓씹듯 말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몸이 달았나 봅니다.”
그의 눈빛이 살벌했다. 절로 시선을 피했다.
몸이 단 게 아니었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도 나에게서 원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그거 하나 아니었던가. 사업까지 허가해 주었으니 나는 응당 다리를 벌려야만 했다. 그의 배려는 우리 관계에서 어울리지 않았다.
관계를 조르고 나니 낯부끄러웠다. 형은 이제 나를 완전한 창부처럼 생각할 것이다.
“혹시 또 다른 새끼한테.”
“안 갈 겁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았다. ‘또’라니.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안 갈 것이라고 내뱉었다. 충동적이었지만 혼날 것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다.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얼굴은 땡볕 아래 서 있었던 것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인사하며 얼굴을 가렸다. 뒤돌아 이사실을 나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릴 뻔했다.
그는 역시나 나에 대한 불신은 지우지 않은 채였다. 크게 기대할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크게 낙심했다.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어대다 다시금 따끔거리기에 후회하며 자리로 발걸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