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3/29)

  4.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락사락, 서류 종이들이 내 몸 주변으로 흘러내리며 바닥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어리둥절한 상황에 잠시 멍해졌다가,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에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바보야.”

자기 직전까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가슴팍에 내려놓은 채로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흩어져 순서가 엉망이 된 서류를 다시 차곡차곡 주워 모은 다음에야 알람을 꺼버렸다.

일어나자마자 한바탕 쇼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나는 서류를 홀더에 끼워두고 나서 욕실로 향했다.

오늘 AG와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날을 위해 준비하느라 몇 주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끼니를 챙길 시간도 없이 일하기 바빴고, 끝없는 내부 회의의 연속이었다. 거기다 이번 달 이사실의 외부 행사가 두 건이나 있어 그 의전을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면서도 눈으로는 서류를 흘금댔다. 발표를 대비해, 수십 수백 번씩 읽어 이미 다 외운 대본을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실장님이 협력 사업이지만 또 그 안에서의 주도권은 적당히 쥐고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에 걱정이 산더미 같았다.

회사에 빨리 가서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도 아침은 건너뛰기로 했다. 대신 카페인이 가득 든 에너지음료를 꼴깍 삼키는 것으로 배를 채웠다.

“살이 좀…… 빠졌나?”

벨트를 당겨 매는데 요즘 계속 헐렁거린다 싶더니, 조금 체중이 줄어 보였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데 키에 비해 무게가 덜 나간다며 잔소리를 들었더랬다. 회의만 끝나면 특식을 챙겨 먹어야겠다.

결국 벨트 한 칸을 더 당겨 맸다. 영 볼품없어진 것 같은 얼굴을 찬찬히 쓸어보다가 서류를 가방에 넣어 들고 집을 나섰다.

조금 일찍 도착한 편이라 회사 로비는 비교적 한산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며 서류를 꺼내 보려는데, 누군가 내 뒤로 다가와 서더니 손에서 파일을 확 앗아갔다.

“……!”

“그래, 이거 네가 맡았다는 얘기 들었지.”

정영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경악할 새도 없었다.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던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짧게 째려보았다. 그 눈빛에 심장까지 얼어붙는 줄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렸다. 몸도 떨리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놀라고 긴장한 나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 가슴팍에 서류를 퍽 던지듯 밀어놓고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올라탔다.

“타.”

“…….”

마주친 지 1분도 안 되었는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벌써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와 붙어 있으면 좋을 게 없다.

“타라니까.”

하지만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타라며 턱짓하는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류를 손에 꼭 쥐고 올라타는 것뿐이었다.

본부장실이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르기에 나도 뒤따라 이사실로 올라가는 층을 누르려고 했다. 그때 그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엘리베이터 한쪽 벽으로 쾅 밀어붙였다.

“으……!”

“살판 난 모양이야, 일한답시고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내 온몸을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처럼 그가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위압감 때문에 부딪힌 뒤통수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내가…… 해일이가 널 데려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정영일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손목을 붙든 손아귀의 힘이 대단했다. 손목의 핏줄이 죄 터지고 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강한 힘. 그는 그치지 않고 그대로 팔을 눌러 내 쇄골 위를 압박했다. 조금만 올라오면 바로 목이 있는 곳이었다.

“너 몸 팔다 굴러들어 왔다며.”

“……!”

“낯짝도 두껍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 뒷조사를 한 것인지 이미 확신에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부러 물어본 것이다. 내가 얼마나 뻔뻔하게 굴지.

팔꿈치가 아프게 어깨를 짓눌렀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청영에 남아 있는 이상 나는 두 형제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야만 했다.

“……일반 엘리베이터라 CCTV가 있습니다.”

“알아. 근데 넌…….”

정영일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끌더니 왼손을 내……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윽!! 이러지, 마……!”

“같은 거 달린 새끼랑 어떻게 씹질 하나 했더니.”

“아으윽!”

그는 기어코 팔을 움직여 내 목 위를 콱 짓눌렀다. 목젖이 눌리고 기도가 확 좁혀드는 아픔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허벅지 사이를 주무르고 올라온 손이 옆구리를 매만졌다. 더러운 오물이 온몸에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허리도 가늘고.”

“윽, 끄흡……!”

“생긴 것도 시발, 여우같이 생겨선.”

저항하려고 하자 목을 콱 눌러 조였다. 그의 기세에 완전히 짓눌려 버리고 말았다. 그가 내 몸 어디를 만지는지는 이제 중요치도 않았다. 숨이 막혀왔다. 폐부에서 산소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고통이었다. 눌린 목젖에 잔기침이 나오려 하지만 그마저도 원활하지 않았다.

“넌 아무 데도 신고 못 할 거잖아. 그렇지?”

협박하듯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왔다. 나는 시뻘게진 눈을 애써 감으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윽, 하아! 흐으윽……!”

그제야 정영일이 팔에 힘을 빼주었다. 잡힌 어깨와 손목이 풀리자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목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숨이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눈알이 뻑뻑했다. 모래가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온몸의 열이 머리끝으로 몰려들었다. 손끝은 차갑게 식어만 가는데, 얼굴은 압박으로 터질 듯했다.

채 호흡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채 정영일을 올려다보았다. 내 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안다. 원망. 그에게도, 형에게도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가 착각한 듯하다. 정영일과 정해일, 둘은 같은 피를 나눠 가진 형제였지만 나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확연하게 달랐다.

이런 더러운 취급을 받는 것은 익숙했지만 형과는 느낌이나 기분, 압박의 정도까지 모두 달랐다. 정영일은 형과…… 다른 사람이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의 손이 닿았던 내 몸의 부위에 검게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 같다. 그리고 점점 몸으로 흡수되어 겉부터 썩어든다. 이 저린 통증이 내 착각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종래는 살을 도려내어야지만 이 혐오스러운 감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창 새끼를 회사에 데려오는 정해일이나, 좋다고 따라오는 너 같은 새끼나.”

“…….”

“이런 취급 받는 게 억울하면 너도 네 애비처럼.”

정영일이 내 얼굴 가까이 허리를 구부리며 앉았다. 일직선으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내 눈은 실핏줄이 터진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피눈물로 젖은 듯한 눈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의 긴장이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차로 벽이라도 들이박고 죽음으로 갚든가.”

“…….”

“도와줘, 내가?”

대단한 호의를 보인다는 것처럼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기분 나쁘게 가로로 찢어진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겁이 났다. 내가 죽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얘기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벌레 하나 죽인다는 듯이…….

나는 아직도 목의 통증 때문에 입도 벙긋 못 하고 있었다. 거칠게 끊어지는 숨소리만 간신히 내뱉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말에 반박할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청영 일가에게 나는 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임이 다시금 일깨워졌다. 환상에 눈이 멀어 빛을 좇았던 불나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너나 나나, 조용히 살아야 하는 처지잖아.”

“…….”

“입 다물고 있으라고. 나 봐, 눈치 보고 납작 엎드리는 거.”

“……콜록.”

“금방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거지만.”

정영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직, 그의 발밑에 내가 떨어뜨린 서류가 밟혔다. 발에 채는지 몰랐다는 듯 능청스러운 연기를 해대며 몇 번 더 지르밟아 아예 찢어버린다.

“지금 제사가 코앞이라 조용히 있는데…… 네가 우쭐해하지 말라고.”

“…….”

“넌 지금 유일한 약점이야.”

누구의 약점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그가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때마침 문이 열린다. 그는 발끝으로 차듯 바닥을 나뒹구는 종이를 쳐내고는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정영일이 밟고 지나간 서류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목을 감쌌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지는 순간 텅, 엘리베이터 문도 다시 닫혔다.

잘해내고 싶었는데. 정말 보란 듯이 잘해 내려고 했는데. 그래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보려고 했는데.

서류를 모아 주워 들었다. 그새 먼지가 묻어 손에 잡히는 감각이 껄끄러웠다. 구둣발 자국이 찍힌 곳을 손바닥으로 몇 번 털어 보았지만 자동차 바퀴 자국이 진하게 남은 것처럼 흔적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그 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를 보고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사실이 있는 층을 눌렀다.

조여들었던 목을 매만졌다. 그의 말뜻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나를 빌미 삼아 형을 공격하겠다는 것. 즉, 내가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더러운 성추행을 당하고도 내 걱정은커녕 남 걱정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가슴속에 차오른 것은 모순되게도 공허함이었다. 같은 일이 몇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이는 외부의 탓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계속되는 걸 이젠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참혹한 운명은 애석하게도 한 번을 비켜나가지 않는다.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럴 때 기댈 수 있는 곳 하나 없다는 게 나는, 나는 정말…….

“윽…….”

이사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나를 뱉어냈다. 비서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조용한 복도에서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사무실에 출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나는 형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탕비실로 숨어들었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소파 끄트머리에 문을 등지도록 걸터앉았다. 양다리를 끌어모아 꾹 안고는 무릎 위로 눈을 꾹꾹 눌렀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울기 시작했다.

정영일의 말대로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신고도 못 할 그런 일. 더러운 내가 당한, 더럽고 끔찍한 일.

“흑, 으윽……. 미워…….”

자기가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형이 해결했으니 평소처럼 일만 하면 된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나는 미쳤다고 형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하면서도 알았다. 내 이기심에서 비롯한 잘못된 일이란 것을.

그래서 길어지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다시 세수하며 회사라고 끝없이 되뇌고 마음을 추슬렀다. ……아니, 비웠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저 기계처럼 온전히 내가 다 짊어지고 살자. 씁쓸한 다짐을 하며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차장님이 잠깐 외근을 다녀오며 자주 먹는 도넛을 사왔는데, 빈속에 에너지음료만 먹어서 그런지 위장이 울렁거리며 소화를 못 했다. 결국 회의 시작 직전에 전부 토해내고 말았다.

요즘 맡은 사업에, 형 일에, 사채에, 신경 쓸 일이 하도 많아 과민해졌는지 이런 일이 잦아졌다. 멀쩡한 날도 있지만 오늘처럼 꼭 이렇게 과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에서 음식을 받지 않았다. 그냥 따뜻한 차나 한잔 간신히 마시고 들어가려 했는데, 이런 날은 차의 향마저도 거북했다.

첫 회의 날인데 표정이 이렇게 어두워도 되나. 나는 애써 거울 속 모습을 살피며 볼을 착착 때렸다. 내가 힘든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혼자서 이겨내야만 한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회의실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AG 사람들이 로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맞이하러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는데.

“전무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은 바로 문 전무였다.

나도 모르게 놀람을 숨기지 않고 그를 부르고 말았다.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상태로 굳어 있다가, 그가 싱긋 웃으며 내미는 손에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어색하게 흔들리던 시선이 맞잡은 손에 가 닿았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이번 문화 사업 AG 총책임을 맡은 전무 문지원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책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문 전무가 여기까지 직접 온다는 연락은 아예 받지를 못했고, 거기다 그가 총책임을 맡는다는 얘기도 전혀 듣지 못했다. 대체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일단 사람들을 회의실로 안내하고 있긴 하는데,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초장부터 일에 잡음이 생긴 기분이다. 이 일을 허락받은 건 문 전무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인데, 만약…… 형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돌려버린다면.

아니, 그보다도 만약 내가 문 전무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어쩌지?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사업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던 본래 담당자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전무님이 오시면 말씀을 해주셔야…….”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왜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았느냐는, 책망이 가득 묻어난 한 문장이었다. 차라리 미리 알고 있었으면 형에게 뭐라 말이라도 해두었을 텐데.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무어라 설명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경황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전무님이셨던 건가요?”

“아니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바뀌어서 전달된 사항이에요. 저도 어쩔 수가…….”

그 말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해도 되는 거냐며 책망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거기다 오늘 아침 바뀌었다니. 급작스러워도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착잡함에 눈앞이 흐려졌다. 속을 게워낸 위나 배 속이 쿡쿡 찌르듯 아파왔다.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하기 전, 계속 나를 흘금거리던 문 전무가 살짝 나를 붙들고는 물었다.

“얼굴 다 나았네요. 걱정했는데.”

“네……. 감사했습니다.”

나는 길게 얘기할 수가 없어 지나가듯 짧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까지 그의 시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감정 상태가 어떠하든 일단 회의부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으며 차분하게 회의를 이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급하게 추가 인원이 생긴 것에 대해 지적하는 말을 흘릴 수 있었다. 문 전무가 피식 웃는 것도 같았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변수가 많은 사업이라 제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고 뒤늦게 결론이 나서.”

“다음부턴 변경 사항이 있으면 제가 미리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으나 속이 썩 시원하진 않았다. 산더미 같은 할 일에 더불어 형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 부지 확보에 청영이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또 외국인 고객을 타깃으로 한…….”

시작 전 각오와는 다르게 텐션이 떨어졌다. 자꾸만 나를 쳐다보고 있는 문 전무도 너무나 신경 쓰였다. 왜 이 일을 맡았을까. 내 정체를 알고 나서도 싫어지지 않았나? 아니면 내가 너무 싫어져서 오히려 괴롭히고 싶었나?

문 전무가 형에게 무슨 말을 할까. 비밀로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설마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지나간 일들이 모두 후회뿐이었다. 자꾸만 목이 탔다. 도중에 물을 거듭 마셨지만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갈증이 있었다.

목을 졸려서 그런 걸까. 아직도 미세하게 통증이 남은 목을 자꾸만 매만지게 되었다.

다행히 회의는 내가 원하는, 청영이 원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로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나누며 서류를 간략히 정리했다. 함께 회의실을 나서며 AG 측의 기존 담당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문 전무가 그를 살며시 불러냈다.

문 전무의 곁으로 다가가 무어라 짧게 얘기를 듣던 그는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나에게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인사했다. 문 전무가 먼저 보낸 게 분명했다. 다른 사원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흩어지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잠시 복도에서 그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놀랐어요?”

“네. 무척.”

형에게 말은 해야겠지, 숨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전달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초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맞잡고 손톱을 뜯어내고 있었다.

“손, 하지 말아요.”

그리고 문 전무가 그런 날 저지하기 위해 손을 뻗어왔다. 손가락을 얽으며 잡아드는 큰 손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살짝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한 발짝 물러났다.

“왜…….”

“왜?”

“왜 갑자기 이번 일 맡으셨습니까?”

“정말 그걸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두 번이나 차여놓고 밸도 없이 와서 치근덕대냐고 하고 싶은 거예요?”

문 전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치근덕대시는 거였습니까.”

“그럼 내가 이 일을 왜 맡았겠어요.”

“제가 싫어지지 않으셨어요?”

나는 진심으로 물었다.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를 놀리려고 온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는데, 치근덕댄다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게 묻고 싶었어요?”

“…….”

“네, 별로 안 싫어졌어요. 답이 됐어요?”

“어째서…….”

“도운 씨는 참 변수가 많아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변수가 많은 사업이라 제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고 뒤늦게 결론이 나서.’

그가 회의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같은 문장에서 사업을 나로 바꾸어 말하고 있었다. 이 사업에 참여한 근본적인 이유 자체가 나 하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움에 동공이 떨려왔다. 나는 이런 관심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을 모르겠다. 이젠 정말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주위엔 온통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젠 서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피할 건 없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오늘 정신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또 한 발짝 뒤로 갔는지 문 전무가 눈썹을 팔자로 휘며 말했다. 그가 싫어서 피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마음을 편히 할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가 작용한 모양이다. 짧게 관자놀이를 눌렀다가 곧장 사과드렸다.

“오늘 해일이한테 저녁 약속 있어요, 혹시?”

“없……으십니다.”

회의 들어간 사이에 스케줄이 추가된 게 아니라면 없었다.

“같이 저녁 먹으려고 하는데, 말 좀 전해줄래요?”

“지금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제가 나에게서 형으로 넘어간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피로감에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둘이 만나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몰라 걱정되기 시작했다.

별다른 수가 없어 문 전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 전무는 내 걱정을 꿰뚫어 보았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겁주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내 나름대로 확인할 게 있어서요.”

“…….”

“미안해요.”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층에 다다라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치 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던 사람처럼 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이사님.”

“안녕.”

형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사나운 비구름을 몰고 다니는 사람처럼 그의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하도 안 오길래 내가 내려가려고 했는데, 마침 둘이 같이 올라오네요.”

“……이사님, 제가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있을까요.”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조용한 복도에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오해할 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던 일이었다. 이를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다.

“회의 끝나고 잠깐 사업 얘기 좀 했어.”

“얘기는 회의에서 했어야지?”

문 전무의 말에 형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눈썹이 꿈틀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직원은 어디 가고 내 비서를 따로 빼내.”

“되게 싸고도네. 이상해 보일 정도로.”

아, 제발. 싸우지 말아줬으면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명치 부근이 쿡쿡 찌르듯 아팠다. 스트레스가 밀려오다 못해 온몸을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형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고는 자신의 옆에 세웠다. 휘청이며 그 옆에 딱 붙어선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또 그렇게 끌고 가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비서님 그만 괴롭혀. 오늘 서 비서님 만나러 온 거 아니야.”

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문 전무를 응시했다.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전무님께서 오늘 만찬 함께하고 싶으시다고…….”

“전에 못 먹은 점심 억울해서 같이 먹게.”

간신히 형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뒷말이 흐려졌으나 문 전무가 잘 이어받았다. 나는 제발 여기서 목소리만 커지지 않기를 바랐다. 더 주목을 받았다간 수습이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참은 대가는 내가 온전히 받아내야 하겠지. 나도 한숨이 터져 나올 뻔했다.

“잠깐 기다려.”

“도운 씨도 같이하죠.”

“속 긁지 말고, 먼저 내려가. 서도운 씨, 기사 호출하세요.”

문 전무의 가벼운 목소리에 형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뚝뚝 끊어가며 말했다. 나는 그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형은 끝까지 문 전무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다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허둥대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문 전무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이사실로 따라 들어가자 그는 재킷을 챙기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문 근처에 서서 공손히 손을 모았다.

“이사님, 회의 브리핑은 내일 진행하겠습니다.”

“…….”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다시 당겨 매는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절로 깨물렸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

“AG 측에서도 급작스럽게 바뀐 사항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전무님이 참여하기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저도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씀 없이 오셨어요. 어제 받은 명단에도 전무님은 안 계셨습니다.”

“서도운 씨.”

마침내 거울에서 시선을 뗀 형이 내 이름을 불러 주의를 끌고는 손에 집어 든 재킷을 걸쳤다.

“나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옆에서 부추기지 말아요.”

“…….”

“안 그래도 정영일 때문에……. 하아.”

형은 정영일과 관련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지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영일. 그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움찔거렸다. 바로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얘기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괜히 말했다가 나를 안 믿으면? 혹은 그랬다 해도 별로 신경 안 쓴다면? 더 마음이 찢어질 것이다. 차가운 눈을 상상만 했음에도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정영일이 말했듯 그의 유일한 약점은 나였다. 그가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졸렸던 감각이 예민하게 뒷덜미를 스쳤다. 순간 소름이 올라 손목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며 감각을 내리눌렀다.

“혹시 회사에서 정영일 만나면.”

“…….”

“서도운. 서도운 씨.”

“네.”

“왜 그럽니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나 보다. 그의 부름에 번쩍 뜨며 고개를 들자 인상을 쓴 채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닙니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형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구겨진 미간이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체력 관리 제대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재킷을 털듯 탁 당긴 그는 이사실을 나섰다.

로비까지 따라 내려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오는 길이 천 리 길과 같았다. 그냥 내가 모두 포기하는 게 맞는 것인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그가 잠깐 보여준 나에 대한 관심에 자꾸만 가슴이 떨린다는 사실이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5시가 넘어서 나간 형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김 실장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곧장 퇴근하신다고 했다며, 6시가 되자 비서팀도 퇴근하라고 했다. 나는 내일 아침에 곧바로 회의 정리본을 올릴 수 있도록 두어 시간 더 남아서 일을 마무리했다.

문 전무에게서도 연락은 없었다. 나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줄 줄 알았지만, 핸드폰은 몇 시간 내내 조용했다.

‘이젠 불안해하는 건 그만두자.’

어차피 이렇게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만찬에 따라가서 문 전무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형에게 아무리 변명을 해봤자 믿지도 않을 테고.

다 내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니 그냥 내가 혼나고 끝나면 될 일이다. 형이 정말 화가 난다면 날 버리겠지.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은 있었다.

슬슬 돌아가기 위해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했다. 컵을 씻어다 놓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는 없는지 모두 꼼꼼히 확인한 다음 가방을 챙겨 나오려고 하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형?”

화면에 떠 있는 건 다름 아닌 형이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고개를 홱 돌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8시 반이 넘었다. 이 시간에 왜 갑자기 연락을……?

생각은 잠시였다. 나는 얼른 화면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어딥니까.

“회사입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잠시 말이 없었다.

―혼자 회사에서…… 뭐 합니까. 왜 아직도 안 갔어.

“잠깐 남아서…….”

―대체 뭘 하길래.

“……회의 자료 정리했습니다.”

어물어물 대답하는데, 나에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어딘가 취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고 허스키해진, 거친 목소리였다.

“일이 조금 남아서 마무리하고 가느라 잠시 남았습니다. 이사님, 혹시…… 취하셨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 전무와 식사 후 술을 마신 모양인데, 집에 잘 돌아갈 수 있나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

“많이 취하셨습니까? 기사는 돌아갔나요?”

형은 또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잠이 들었나 싶어 볼륨을 높였다가, 잠시 귀에서 떼기도 했다가, 핸드폰을 톡톡 쳐보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아주 희미하게, 컵을 내려놓는 것처럼 유리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오세요.

“예? 아, 네. 지금 가겠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청담동이요.

그는 지금 술집에 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집에 있었다. 문 전무와 만나고 집에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곳에서 혼자 술을 마신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는 또 술을 들이켜고는 주소를 읊었다. 나는 급하게 메모지 한 장과 펜을 꺼내 받아 적었다.

“지금 가겠습니다.”

―당장 와.

“……알겠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런 기분은 애써 구겨 메모지와 함께 앞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청담동 집. 그곳으로 부르는 걸 보니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닌 관계 때문이겠지.

회사 밖으로 나와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그가 말한 주소로 향하자 골목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커다란 주택들이 간간이 나타났다.

창밖으로 멍청하게 집들만 구경하고 있다가 택시 기사님이 어느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렸다. 봐왔던 집 중에서 제일 크고 넓은 것 같았다.

높지 않은 담장과 함께 작은 문이 있었다. 열려 있었는지 손으로 밀자 열렸다. 담 옆에 초인종이 있었는데,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가고 말았다. 눈앞의 넓은 정원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릴 적 놀러 갔던 형의 집, 아니 형의 집 뒤에 있는 별채와 꽤 비슷했다. 넓은 돌이 다리처럼 깔린 바닥과 양쪽으로 난 잔디밭. 화단을 전문적으로 가꿔주는 사람이 있는지, 담장 주변으로 각종 식물이 일정한 키로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보며 마침내 집의 문에 다다랐다. 하얀 문에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두드리려다 옆에 있는 초인종을 보고 버튼을 눌렀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철컥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한쪽 벽에 기대 문을 밀어 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허리 숙여 인사했지만, 형은 그런 날 가만히 응시하더니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라는 소리인 듯해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빠르게 신발을 갈아 신으며 뒷모습을 흘긋대는데, 그에게서 진하게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독한 양주라도 마시는 듯 향만으로도 코가 톡톡 쏘였다.

하지만 진한 술 냄새와 달리 그의 발걸음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많이 취하지는 않은 걸까. 그의 주량이 센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오늘은 얼마나 마셨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일자로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길고 넓은 복도 벽엔 그림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고급스러운 프레임 안에 든 그림을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 보듯 구경했다. 중간에 있는 낮은 서랍장엔 작은 식물 화분도 있었는데, 평소에 잘 쓰지 않고 놀리는 집이라더니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식물도 전혀 시들지 않았고, 먼지 하나 앉지 않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이후로 그의 집에 들어오는 건 처음…….

“뭐 합니까.”

내가 갑자기 멈춰 서자 형이 나른한 목소리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 시선이 닿는 곳을 짧게 바라보다가 이내 소파에 풀썩 앉았다.

“아, 피아노.”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 내가 치던 피아노였다. 아무리 같은 피아노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해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피아노였다.

“이거 제…….”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엄연히 따지면, 형이 나에게 준 피아노였다. 그가 피아노를 그만두면서 나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알아보는 모양이네.”

그의 말에 애써 피아노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럼에도 자꾸 그쪽으로 힐끔힐끔 눈길이 갔지만, 입술을 꾹 다물며 애써 뒤돌았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가만히 내려두고는 그가 앉아 있는 소파 근처로 몇 걸음 걸어 다가갔다.

“쳐보고 싶으면 쳐봐요.”

“……아닙니다.”

“매몰차게 팔아 버리더니, 이젠 별 관심도 없나 봐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도 비수를 꽂듯 하는 그에게 울컥하고 말았다. 선물 받은 이후로, 아니 그전에 그의 별채에서 이 피아노를 쳐볼 때부터 내가 저 피아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를 것이다. 압류로 빼앗긴 뒤로도 언젠가 꼭 되찾아 오고자 소망했던 피아노였는데.

그가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 소중한 피아노라는 걸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 집안의 모든 것이 쓸모없었는데, 그건 내 거였으니까.”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나에겐 꼭 악에 받친 듯 들렸다. 나에게 선물했던 것을 아마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형은 짧게 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유리로 된 테이블엔 양주병과 얼음이 든 잔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과일 같은 안줏거리 하나 없었다.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낮게 따르자 안에 들어 있던 둥근 얼음이 조금 움직이며 유리잔에 부딪혔다. 달칵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도운 씨도 내 것 아닙니까.”

“…….”

“아직은.”

그의 말이 이상하게 귓가에 거슬렸다. 나도 모르게 갸웃하듯 움찔거렸다.

아직은. ‘계약한 이상’, 혹은 ‘돈을 갚을 때까지는’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직은’이었다. 꼭 그의 의지로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과민한 반응이었다. 나도 알았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간 망설이다 체념하듯 말했다.

“……씻을까요?”

“서도운 씨는 그 생각만 하고 왔나 봐요.”

“…….”

“진짜 몸이 달긴 달았는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에게 밤에 불려온다는 건 항상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평소에도 그런 생각만 하고 사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완전히 매도하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집 안의 전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조도 낮은 조명등 몇 개가 전부였기에 태연한 척했다.

“쳐봐요.”

형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낮은 한숨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내가 멈칫거리자 날카로운 시선이 와 닿았다.

“씹질 말고는 내 말에 별 관심도 없는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왜. 그러니까 계약이든 뭐든 무시하고 다른 남자나 뒤로 만나고 다니지.”

“아닙니다!”

“그러니까.”

눈을 번뜩이며 일어나 내 손목을 확 붙들었다. 내가 외마디 소리 한 번 내기도 전에 억지로 끌고 성큼성큼 걸었다. 꽉 잡혀 당겨지는 손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휘청거리며 끌려간 나는 기어코 피아노 앞에 서고 말았다.

“쳐보라니까.”

강압적이고 낮은 목소리였다. 들려 있던 잔에서 술이 조금 흘러 그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진하게 알코올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꼭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처럼 느껴졌다.

“잘 치던 거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꼬리 칠 때 치던 거.”

그의 말에 어쩐지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다. 다행히 꼴사납게 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내가 하는 연주가 그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억지로 눈을 깜빡였다. 아직 섹스를 한 것도 아닌데 눈물을 흘렸다가는 또 어떤 모욕적인 소리를 들으며 맞을지 몰랐다.

결국 의자에 앉았다. 손끝에 닿는 가죽의 느낌마저 너무나도 익숙했다. 아랫입술을 티 나지 않게 살짝 물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의자를 끌고, 다리를 뻗어 페달 위로 발을 올렸다. 그리고 건반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

손가락이 떨려왔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억지로 건반을 눌렀다. 「달빛」. 그가 가르쳐 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 음에서 다음 음으로 넘어가며 삐끗거리고, 네 번째 마디를 지나며 또 실수하고, 점점 낮은 음으로 내려가며 또다시 박자를 놓쳤다. 손이 덜덜 떨려 내가 원하는 대로 칠 수가 없었다.

이 엉망인 연주를 그는 계속 듣고 있었다. 피아노에 살짝 팔을 기대고 서서는 내 손 위로, 그리고 손목과 팔을 타고 올라와 얼굴로 계속해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 무겁고 강압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추억이 깃든 곡을 연주하고 있자니, 내가 이 곡에 가지고 있던 감정과 현실이 너무나도 달라 괴리감이 들었다.

형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했을까. 이 늦은 밤, 술에 취해 나를 불러내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는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하나 파악할 수 있었던 건 그가 화가 났다는 것뿐.

문 전무와의 저녁 식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누구 탓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 잘못일 것이다. 그가 또 나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눌러 감은 눈꺼풀이 떨리고, 눈썹이 자꾸만 휘어졌다. 이젠 아랫입술을 완전히 말아 넣어 윗니로 꾹 누르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콰앙!

“윽……!”

그가 건반을 누르고 있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거세게 눌러 연주를 멈췄다. 낮은음을 연주하고 있던 탓에 굉음을 내며 깊고 넓게 울려 퍼졌다. 꿈에서 자주 목격하던 광경인 것만 같아서…… 목덜미에 날카로운 감각이 스쳤다.

그의 손 밑에 구겨져 깔린 내 손이 미약하게 통증을 호소했다. 얼얼하게 아팠지만 억지로 빼낼 수 없었다. 그의 위압감이 그 정도였다. 서늘한 손의 온도가 내 손도 모자라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문지원이 너한테 고백을 했다고 하던데.”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나도 모르게 순간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삼백안이 나에게 무섭도록 깊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습니까.”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움직여 다시 앞을 바라보자 그가 내 턱을 강하게 붙잡고 다시 자신을 보도록 돌렸다.

“……제가 거절해서, 그래서…… 끝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나는 최대한 내리누르며 솔직하게, 그리고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을 말을 찾고 찾아 간신히 답했다.

대체 문 전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일까. 내가 그때 형을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이를 다 산산조각 낼 작정이었던 걸까.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설마 그 얘기까지 다 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언제예요.”

“전에, 제가 아르바이트 그만두던 날입니다.”

“이번엔 솔직하게 말하네. 또 거짓말하면…… 정말 가만 안 두려고 했는데.”

형이 내 손을 짓누른 자신의 손과 턱을 붙잡은 손을 떼어 놔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자를 잘 받지도 못하고, 계약 불이행에 거짓말이나 하고. 쓸모 있는 건 그 손가락밖에 없어 보이는데.”

“…….”

“부숴 버리면 내 속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넌 항상 잘도 빠져나가지.”

“…….”

“약 올리듯이.”

그는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다시 세게 내려놓았다. 매끈한 피아노 몸통으로 유리잔의 충격이 울릴 정도였다.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저 잔이 나에게로 날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결국 안 끝난 일이잖습니까.”

그리고 다시 질책이 날아왔다. 나는 손을 모아 감싸 쥐었다. 시선이 조금 떨어져 흰 건반으로 향했다.

“끝냈다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담당까지 바꿔가면서 사업을 맡습니까? 내가 대체 서도운 씨를 몇 번이나 봐줘야 합니까.”

“문 전무님의 마음은……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억울한 마음에 아래턱이 떨렸다. 울컥하며 말을 쏟아냈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아 가슴이 여전히 답답했다.

“그리고…… 진심 아니실 겁니다. 문 전무님께선 그냥 호기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실 거예요. 저한테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있으실 리가 없습니다. 대체 누가 절……!”

“오늘 보니 아닌 모양이던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바짝 들었다. 형은 독한 술에 어지러운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인지 잠시 이마를 짚었다.

“널 달라고.”

“…….”

“나한테 널 달라고 하던데.”

그러고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주친 눈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가 낮은 건반을 억지로 꽈앙 눌러 큰 소리를 냈을 때처럼 심장이 한 번 펄떡일 때마다 속에서 그렇게 온몸이 울렸다.

문 전무가 형에게 그런 소리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오해가 있어 보였다. 그는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나를 비서 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한 게 분명했다. 내가 AG에 가는 걸 거절해서 그에게 대놓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일부러 형이 곡해하도록, 내가 형을 좋아하는 걸 알고 곡해하도록 애매하게 이야기한 게 아닐까. 그렇게 부탁했는데. 그냥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형은 꼭 문 전무와 내 사이가 그 정도로 발전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아무 일 없는 척하더니 나를 달라고 말할 정도였느냐고, 그렇게 책망하는 것 같았다. 서러움에 몸이 떨렸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게 느껴져 일자로 다물었다.

“저는 분명 거절했습니다.”

억울해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내 시선이 악에 받쳐 있었다.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내가 얼마나 우스운지.

“멋대로 담당자를 바꾼 건 문 전무님의 독단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문 전무님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게 아니에요.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에 하겠다고 고집부린 것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왜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나한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그에게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형을 화나게 하기 싫었어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형의 표정은 굳어졌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무표정. 내가 언성을 높여서……. 아니, 언성을 높여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무어라 불렀는지, 그 호칭이 문제였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얼굴 옆으로 잔이 날아갔다.

“…….”

하마터면 광대 위로 부딪칠 뻔한 잔은 아슬아슬하게 내 얼굴을 피해 뒤쪽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퍼억, 무겁게 유리가 깨져 흩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잔이 깨진 모습을 보면, 안 그래도 떨려오고 있는 몸을 더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시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시선이 다시 앞으로,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굳어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 핏기가 어려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속으로 형, 형, 해대던 것이 무의식중에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걸까.

자책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짓.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아니지.”

내가 몸을 틀어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강하게 어깨를 잡아왔다. 어깨로 올라온 그의 손끝이 살과 뼈를 파고들어 전부 으스러트릴 것처럼 아프게 짓눌렀다.

“사과하면 일부러 그랬다는 것 같잖습니까.”

“…….”

“정말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렇게 선을 넘으면 내가…….”

“…….”

“너한테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흔들리는 걸 알고?”

형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내 몸을 한 번 흔들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답을 알 수가 없다. 그가 여러 번 되묻는 걸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대답을 못 해 혼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날 보며 형은 헛웃음 쳤다. 하, 짧게 웃는 그의 입꼬리 한쪽이 어이없다는 듯 올라갔다.

“정말…… 말을 안 듣네.”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서 절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살짝 틀어진 고개로 핏대가 선 목이 보였다. 

안 그래도 무거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건반 위에 올려두었던 한쪽 손이 파르르 떨려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섭기만 했다. 이 상황이. 이사님이. ……형이.

“아!”

손목이 거칠게 끌렸다. 다짜고짜 끌고 간 그는 침실로 나를 몰아넣었다. 내던지듯 하는 손길에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는 나를 앞에 세워두고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벗어요.”

“이사님.”

“오늘 하려던 거 해야지.”

“……이사님.”

그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자 거칠게 쳐내며 나를 뒤로 밀었다. 나는 어느새 침대에 내던져져 있었다.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그는 몇 발짝 걸어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왜 안 벗어. 정말 문지원한테 가고 싶어요?”

“전…… 물건이 아닙니다.”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에게 나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미친 것처럼 대들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주워 담을 생각조차 없었다.

“아직도 부릴 자존심이 남아 있어?”

“이사님은, 절 보내고 싶으십니까?”

“물건 아니라면서.”

“…….”

“날 잘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는 셔츠를 마저 벗고는 밑바닥으로 던졌다.

“서도운 씨가 엉덩이 가볍게 돌아다니는 것보다 날 속이는 게 더 화나게 한다는 걸 왜 모를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정말 사람 미치게 한다는 것만 알아둬요.”

그의 눈빛이 나에게 경고하듯 짙어졌다. 그리고 손이 뻗어왔다. 핏줄이 서고 마디가 툭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목을 쥘 듯이 다가왔다. 형은 가볍게 내 턱 끝을 쓸고는 손가락을 넥타이에 걸어 넣고 주욱 잡아끌었다.

손길이 재킷 밑 어깨로 파고들었다. 동그라미를 그리듯 어깨를 문지르는 손이 가볍게 재킷을 벗겼고, 나는 입술을 물며 팔을 빼내었다.

“속이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목소리가 침착하지 못하고 떨렸다.

정말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난 항상 잘하고 싶었다. 그와 회사와 관련한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잘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관심을 받고 싶었고, 나를…… 나로 봐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몰랐으면 좋겠는 일을, 몰라야만 하는 일을 모르게 했을 뿐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내가 서도운 씨를 봐줄 걸 알고 그러는 게 아니었습니까.”

비웃음 섞인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관통했다. 너무 당당하게 속이기에 당연히 자신을 기만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그런 말투였다.

“내가 너한테 약해지는 걸 알고.”

“…….”

“그깟 전화 한 통이나, 부탁이나, 네 피아노에 약해지는 걸 알고.”

“저는!”

“네 앞에서 꼴사납게 무너질 걸 아니까 날 속이고 기만하는 것 아니었어?”

형이 내 어깨를 짓누르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나를 뒤로 확 눕히며 한쪽 무릎을 침대에 대고 올라왔다. 동시에 손이 목으로 올라왔다. 그의 손은 기어코 나의 목을 쥐었다.

조일 듯 말 듯, 강하게 짓누르고는 있으나 주춤거리듯 이따금 힘이 빠졌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그런 느낌. 형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제가, 문 전무님께 가고 싶었다면.”

“…….”

“으, 으읏. 전무님께서 오라고 하셨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갔을 겁니다.”

문 전무 이야기를 꺼내자 무의식적으로 그가 손에 힘을 준 모양이다. 순간 확 기도가 막혀오는 탓에 양손으로 그의 손목을 쥐었다.

“형이 생각하는 그 어떤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형한테서 벗어났을 거예요.”

내 입으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또 없었다. 나는 오기로, 그를 다시 형이라 불렀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찼다. 나를 짓누른 그가 무거웠다.

“하지만 저는 여기 있어요.”

“…….”

“저는, 여기에…… 있잖아요.”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가에 순식간에 고여 든 물이 눈꼬리를 타고 옆으로 흘렀다. 속눈썹을 적시고 관자놀이에 자국을 남기며, 그렇게 흘러내렸다.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해한다기엔 내가 너무 주제넘게만 느껴졌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속인 건 나인데, 그런 내게 그를 원망할 자격이 있는 걸까 싶었다. 나는 그냥…… 갈망하고 있었다. 그의 애정을.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앞까지 개처럼 달려오는 건 나였다.

그의 명령에 고개를 바싹 조아리는 것도 나였다.

그는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뒤흔드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아니란 것을 아마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눈물에 젖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울렁거리던 시야가 선명해졌지만, 형과 눈을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저 푸르스름하게 내려앉은 눈동자를 보면 함부로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어딘가에 사슬로 묶인 것처럼 나를 옭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해일이었다. 공포로 물들게 하고, 숨을 갈망하게 하고, 나의 밑바닥을 내보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을…… 나를 잠식시키는 어두운 해일.

“……키스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그의 애정을 갈구하며 내 밑바닥을 내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키스해 주세요.”

처절한 몸부림으로…….

우리는 기름에 불이 옮겨붙듯 타올랐다.

순식간에 맞붙은 입술은 상대를 끝없이 갈구했다. 여린 살을 물어뜯고 강한 힘으로 빨아들였다. 그에게서 넘어오는 쓴 양주의 향이 내 정신도 몽롱하게 만들었다.

“흐, 아읍…….”

짓눌린 입술 틈새로 가느다랗게 신음이 흘러나갔다. 그 한줄기마저 먹어치우듯 형은 위아래 입술을 번갈아 물어가며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파고든 혀가 내 혀를 건드리고 얽혔다. 덩달아 숨이 섞였다. 날숨과 들숨이 한데 뒤엉켜 호흡이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옷에 주름이 질 정도로, 손등 위로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형의 페이스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뒷덜미로 커다란 손을 넣어 머리를 받치고 깊게 입 안을 파고들었을 때는 이러다 숨이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증이 일었다. 간혹 입술이 떨어지면 숨을 가쁘게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그에게 애원했다.

“더 해주세요. 더, 더…….”

그에게 매달리듯 키스를 받았다. 이대로 집어삼켜져도 좋았다.

“지키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원하는 것만 많지.”

그의 말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내 옷을 잡아 뜯는 손길에서도 상냥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친 손길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당장 오늘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러움……. 이 한 단어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시발.”

내 바지를 벗겨 내리며 형이 상체를 일으켰을 때,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일어나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정신없이 그의 입술과 턱 언저리에 입술을 맞비볐고, 그의 입에선 기어코 욕이 흘러나왔다.

“너…….”

그의 손이 뒷머리를 잡아챘다. 두피가 홧홧할 정도로 당겨지며 절로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픔에 잠시 감았던 눈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잠재우며 천천히 눈을 떴다.

“왜 자꾸 날 쥐고 흔들려고 해.”

“……제가 흔든다고, 흔들릴 분입니까.”

과연 그가 그런 사람일지 의문이었다. 맥을 못 출 정도로 그에게 휩쓸리는 것은 나였는데, 자꾸만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윽…….”

“네 그 눈을 보면 너를 몇 번이나 봐주고 싶어져.”

형은 내 목을 그대로 당겨 자신의 고간에 짓눌렀다. 날 떼어내려고 더 거친 손길로 다루는 것만 같다. 자신에게 매달리지 말라고, 나에게 일부러 상처 주는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속아 넘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단 말입니다.”

“…….”

“서도운 씨가 날 그렇게 만들어. 그래서…… 화가 치밀고.”

바짓단 위로 코가 아프게 쓸리고 뭉개졌다. 뭘 해야 하는지 알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화를 받아내는 것뿐이었으니.

목을 쥔 손에서 힘을 풀어줄 때까지 그대로 고개를 처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뒤 그가 서서히 목을 놓아주었을 때,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헛손질하고서는 겨우 바지 버클을 풀었다.

속옷 안에서 반쯤 발기한 그의 것을 꺼냈다. 이런 관계를 가진 횟수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는 것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손으로 기둥을 몇 번 쓸어 올리고 그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혀를 내밀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 끄트머리에 촉 입을 맞췄다.

아직 울음이 섞여 호흡이 어려웠으나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윗부분을 입 안 가득 담았다. 그의 손이 다시 머리로 올라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고 빗듯이 쓸어내렸다.

“웁, 흐읍…….”

힘을 주어 빨아들였다. 더 깊게 담는 것은 어려웠다. 목구멍에 가까이 갈수록 숨이 턱 막혀왔다. 자극을 받은 성기가 서서히 부피를 더해가기 시작할수록 더 그랬다. 왼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살짝 틀어가며 그의 것을 애무했다.

“하아…….”

“으읍!”

“윗부분만 빠는 버릇 고쳐야지.”

나른한 숨을 뱉은 형은 그대로 내 머리를 꾸욱 눌렀다. 놀라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순식간에 입천장을 긁고 들어간 성기가 목구멍에 닿았다.

“누구한테서, 후우, 그런 버릇이 들었습니까.”

“욱, 흐윽, 큽……!”

목구멍에 귀두가 닿았다 떨어지며 찌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더 깊게 파고들어 오면 정말 목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벌써 목구멍이 아팠다. 젖은 볼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호흡은 더욱더 가빠졌다.

나는 그의 허벅지를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내 애처로운 손길을 알아챈 것인지 머리를 내리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서서히 성기를 뱉어내고 잔기침을 했다. 몇 번 콜록대다가 다시 기둥을 쥐고 훑었다. 핏줄까지 선 그의 것을 마주할 정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훌쩍거리며 아래를 애무하고 있는 내 어깨를 형이 밀어 뒤로 눕혔다. 순식간에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하얀 속살을 그에게 다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연한 살 위로 입술을 올리더니 깨물고 핥기를 반복하며 나를 자극했다. 혀끝을 세워 가랑이가 접히는 부분을 핥는 질척한 느낌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먹을 말아 쥐고 입가를 가리며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마침내 엉덩이로 손을 가져간 그는 두 살덩이를 넓게 쓸며 강한 악력으로 쥐었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가 슬며시 빼기를 반복했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형은 한쪽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어 오금까지 쓸어 올리며 자신의 어깨 위로 다리를 걸쳤다. 점점 발기하며 파르르 떨리는 내 성기가 너무나도 잘 보여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일부러 감량하는 겁니까.”

젤을 부은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었다. 으윽! 갑자기 밀려오는 아픔에 이를 악물며 소리를 목 안으로 삼켰다.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두 번째 손가락이 다시 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허리가 퍼뜩 튀었다.

“읏……! 아닙, 니다.”

“몸 관리 제대로 하세요. 안을 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아, 아아!”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손을 돌린 형이 여린 내벽을 거칠게 긁어내렸다. 전립선이 그대로 자극되었다. 매트리스로 손을 확 내렸다. 시트에 주름이 지도록 손끝으로 긁어 쥐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안을 몇 번 더 쑤셨다.

“아, 아흐윽…….”

손가락의 수는 점점 늘어 어느새 네 개가 되었다. 안을 자극하는 그의 손길이 점점 속도를 내었다. 빠르게 안을 풀려는 듯 보였다. 나 또한 어서 그를 담고 싶었다. 내 성기는 이미 바짝 서서 배에 올라붙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파고든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져 버거웠으나 애써 참아내며 힘을 풀었다.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형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허공에 대고 깊은숨을 내쉬는 모습은 마치 감정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어쩐지 멀어 보이는 형에게 손을 뻗었다. 내 움직임에 시선을 준 그가 기꺼이 상체를 조금 숙여주었다. 나는 원하는 대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꼭 끌어안으며 다시 매달렸다.

“안아주세요, 빨리…….”

정말로, 이대로 집어삼켜져도 좋으니…… 그가 나를 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이상…….”

“…….”

“널 안달 내게 만들지 마.”

그의 말뜻을 알아듣는 순간, 다시 눈물이 터졌다.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아……!”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봐주는 것 없이 단번에 밀고 들어와 깊숙한 곳까지 쿡 찔렀다.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의 어깨를 감싼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차마 그에게 상처를 낼 수 없어 내 팔뚝 위로 손톱을 세웠다. 아팠다. 몸인지 가슴인지 모를 곳이 너무…….

형은 무자비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아래를 밀어붙였다. 벌어진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몸정이라도 들지 않을까 기대한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아니, 별 기대 말자고 다짐해 놓고서는 또다시 바라고 있었던 스스로가 더 바보 같았다. 너무나도 한심했다.

나에게 애정 결핍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싫다는 사람한테 자꾸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할지 알면서도 나는 그를 포기하질 못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흐읏, 흐으읍, 읏, 으…….”

턱턱 아래를 칠 때마다 몸이 뒤흔들렸다. 눈을 꼭 감았다. 나도 모르게 고여 있던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가 날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의문스러울 지경이면서도…… 그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는 것은 대체 왜일까.

점점 속도를 올리던 형이 상체를 조금 올렸다. 허벅지를 억지로 잡아 벌리고 아프도록 누르며 아래를 감상했다.

웃기게도 자꾸 형의 탓을 하게 되는 건 또 왜일까. 형이 먼저 다정하게 대해줬잖아. 형이 먼저 날 데리고 와서 안아줬잖아. 이런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기어코 또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신음과는 다른, 명백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을 새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절로 아래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내 울음소리 때문인지 형의 표정이 구겨졌다. 허벅지를 감듯 쥐어 세게 당기며 그가 목 안으로 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형은, 윽, 저랑 이러는 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나요.”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중얼거리듯 흘러나간 말은 기어코 그를 탓하는 말로 변하고 말았다.

“형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으, 흐윽! 으읏……. 저는, 저는 자꾸…….”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다 내 잘못이 아니던가.

“전 자꾸 옛날의…… 형이 떠올라요.”

애써 울음을 눌러보려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그가 싫어할 만한 말을 끝까지 해버렸다. 내 턱에 그의 손길이 닿은 탓에 눈이 떠졌다. 가볍게 턱을 쥐어 올린 형의 손은 서늘했다.

“그 과거 기억, 지우려고 한 지 오래입니다.”

“…….”

“억지로 기억하기도 싫고, 꺼내 늘어놓기도 싫고. 고작 몸 좀 섞는 것뿐인데, 서도운 씨 때문에 과거까지 고려할 생각…… 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철없이 생각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서도운 씨 입에서 그 부름을 듣는 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요.”

나만 과거에 갇혀서…… 이렇게…….

“아, 아으윽!”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벽을 쿵쿵 치받는 힘에 허리가 절로 꺾이며 들렸다.

꽉 막힌 듯 진입을 방해하던 내벽 깊은 곳이 꿈틀거렸다. 그의 성기가 밀어붙이는 힘을 못 이긴다는 듯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등 밑으로 손을 밀어 넣고 어깨를 세게 붙들었다. 옴짝달싹 못 하도록 나를 감싸고는 각도를 달리하며 아래를 퍼억 쳐올렸다.

“아흐윽, 아아……. 아……!”

턱을 들어 올리고 덜덜 떨었다. 안쪽이 뚫리며, 더 좁고 깊은 곳을 귀두가 파고들었다. 고환이 엉덩이 사이에 닿을 때까지 진입했다. 지난 섹스에서 느꼈던 생소한 쾌감에 허리를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발기했던 성기에서 나도 모르는 새에 정액이 툭툭 쏘아지기 시작했다. 가슴까지 끈적한 흔적을 남기고도 모자라 그의 아랫배에도 문질러졌다. 숨이 너무 가빠 그의 허락도 없이 사정했다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마침내 내 안에 사정하고 나서도 그의 허릿짓은 끝나지 않았다.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의 정액을 밀어 넣겠다는 듯, 더 들어갈 수도 없는 안쪽을 파고들었다. 엉덩이를 억지로 벌려가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뺨으로 몇 번이나 손찌검이 떨어져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늘의 섹스에서만큼은 목 놓아 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엎드려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기절한 것인지 중반부턴 기억이 없다. 애써 기억하려고 하진 않았다. 어차피 거칠었던 그에게 아팠던 것이 전부일 테니까.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키려다 풀썩 무너졌다. 잠깐 살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방은 깜깜했고, 조도 낮은 조명만 하나 켜져 있었다. 나는 시트에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눈물을 너무 흘려서인지 눈이 부어 뜨기 힘들었다.

몸을 뒤집은 뒤에야 간신히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아래의 통증을 참아내려 눈을 감고 호흡했다. 널브러진 두 다리가 우스울 정도로 꼴사나웠지만 가리거나 할 힘도 없었다. 몸을 일으킨 것뿐이었는데도 숨이 가빴다.

그때 안쪽 문이 열렸다. 샤워 가운을 입은 그가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정신 차렸습니까.”

형은 근처에 수건을 던져 놓고는 탁자 서랍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에 하얀 담배가 하나 끼워지고, 그 끝에 불이 붙는 것까지 지켜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

“오래 안 잤습니다. 한 시간 조금 안 되었군요.”

뒤쪽 벽으로 턱짓했다. 그제야 멍하던 시야로 시계가 들어왔다. 11시에 조금 못 미친 밤이었다.

시선이 다시 떨어졌다. 침대 밑으론 그가 벗겨낸 셔츠와 바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형이 지갑을 꺼내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정신 차렸으면 씻고 돌아가요.”

“…….”

“내가 널…… 내 집에서 재울 만큼 너그럽지는 못하네.”

손 옆으로 떨어진 돈을 쥐었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는 시선을 이내 손으로 고정했다. 그에게 내 가치는 딱 이 구겨진 돈만큼이다.

“……알겠습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허리뼈를 삐끗한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애써 침대 프레임을 붙잡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돈…… 감사합니다, 이사님.”

바닥에서 옷을 주워 들었다. 몸을 숙일 때마다 엉덩이 사이에서 울컥거리며 그의 정액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혀를 차며 팔을 붙잡았다.

“씻고 가라고 했잖아.”

“괜찮습니다. 곧 막차라서 버스가…….”

“택시 타고 가세요.”

그는 영 답답하다는 듯 입술에 걸린 담배를 잘근 물며 말했다. 머리를 쓸어 올리곤 다시 지갑을 가져와 얼마인지도 모를 흰 수표 한 장을 더 건넸다.

“뒤로 다 흘리면서 또 누굴 꼬여내려고.”

“…….”

“말 들어.”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결국 돈을 받아 들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차마 감사하단 인사는 하지 못하고 꾸벅 고개만 숙였다.

품에 안았던 옷은 몇 걸음 걸어 방구석에 두었다. 받은 돈도 그 위에 올려두고는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거슬리겠지. 최대한 빨리 씻고 떠나는 수밖에 없겠다.

* * *

그날 밤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나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비서로 돌아와 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은 전보다 빠르거나 느리지도 않았고, 회의도 아무 차질 없이 진행했다. 눈치가 빠른 박 대리님만 어디 아픈 거냐고 물어보았으나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픈 건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착 가라앉았을 뿐.

형은……. 이사님은, 내가 그 날 무례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나도 더 조심하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며칠이 흘렀으나 이제까진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 돈까지 아낄 심산으로 결국 지하철 막차를 탔다. 시간이 늦어져 버스는 끊긴 상태여서 환승은 못 하고 중간부턴 궁상맞게 걸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혼자 오랜 시간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정리할 것도 없었다. 나만 모든 걸 포기하면 됐다. 그게 어려워서 문제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힘들었던 하루도 벌써 끝을 보이고 있다. 각자 하던 일을 마무리하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실장님이 나와 말했다.

“내일은 이사님 출근 안 하실 겁니다. 오후 출근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각자 맡은 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 잘 판단해서 너무 늦지 않도록 유의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다들 고생 많았어요.”

실장님의 인사로 비서실의 일과가 끝났다. 그가 내일 출근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일 때문이 아닌…… 그의 아버지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내일이 내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늦게 출근해도 된다 하시니 납골당에 잠시 들를까 했지만, 그냥 마음을 접었다. 이 바쁜 시기에 괜히 늦게 출근했다가 이사님께 밉보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집에서 단출하게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퇴근길에 간단하게 장을 봤다. 제사상을 온전히 차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최소화했다. 이런 불효가 또 없었다.

그래도 양손 가득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과일을 샀더니 무게가 꽤 있어 골목길 계단을 올라가는 데 무척 애먹었다. 차가 있으면 훨씬 편하겠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 유지비를 생각하면 금방 달아나고 만다.

돈만 생각하는 구질구질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집 근처 골목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집 앞엔 몇 번 보았던 차가 세워져 있고, 분명 끄고 나갔던 집 안의 불이 켜져 있었다. 심지어는 대문도 열려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집으로 뛰어갔다.

열려 있는 현관에 막 다다르자 아니나 다를까, 신발을 그대로 신고 집 안에 들어와 있는 깡패의 모습이 보였다.

“이봐요!”

대충 옆에다 비닐봉지를 내려두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쪽 방까지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는 내 기척을 느끼자 태연한 표정을 하고 뒤로 돌았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담배 꺼요. 아니, 빨리 나가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내 손끝을 따라 문 쪽을 잠시 쳐다봤을 뿐 미동도 하지 않고 보란 듯이 담배 연기를 내 얼굴로 뱉었다. 매캐한 연기에 순식간에 코와 눈이 매워졌다.

나는 입가를 가리며 남은 손으로 연기를 휘저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남자는 낄낄 웃으며 담배를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위를 구둣발로 지르밟았다.

“하……!”

지금 남의 집에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욕감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태연히 날 지나쳐 걸어가 현관으로 다가갔다. 나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를 발로 슬쩍 쳤다.

“장 봤어?”

“왜 멋대로……!”

“그만 까칠하게 굴어라. 누군 오고 싶어서 오는 줄 아나. 시팔.”

오기 싫으면 안 오면 될 일을, 욕까지 해대며 이 집에 들어와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는 허리를 숙여 봉지 속을 손으로 헤쳤다. 사과 한 알이 굴러떨어졌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그 행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사상? 아아. 아버지 제사.”

어찌 된 영문인지 남자는 내용물을 보더니 아버지 제사임을 단번에 알았다. 안을 마구 휘저어 들어 있던 과일이나 다른 음식 재료들을 바닥으로 내던지기에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들며 당겼다.

“그만해요!”

“이 새끼가!”

남자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팔꿈치로 내 몸을 밀쳤다. 나는 허망하게 뒤로 확 밀려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윽, 앙다문 잇새로 아픔을 참아내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그는 내 손이 닿았던 팔 부분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 달은 원금도 다 안 들어오고. 무슨 배짱이야.”

“……곧 보내려고 했어요.”

이사님과의 섹스가 무척 오랜만이었다. 빈도가 줄어들다 보니 받는 돈도 자연히 줄었고, 빚을 충당하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분명 내야 할 이자는 전부 보냈다. 원금은 선택 사항이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온다고 해서 없는 돈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닌데. 놈은 그냥 날 위협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 주까지 드릴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세요.”

하지만 따져 봤자 나만 손해였다. 그가 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지 않은가.

“네가 뭔데 가라 마라야.”

“제 집이…….”

“손님이 왔는데 대접도 안 해?”

“무슨 대접을……!”

역시나 말이 안 통했다. 남자는 발끝으로 내 다리를 툭툭 차대며 웃었다. 과일이나 깎을 수 있냐는 둥 비웃는 소리만 지껄이더니 내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리자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내 양다리 사이를 기어코 밟으며 그가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눈앞의 상황을 외면했다.

“너 다시 몸이나 팔래? 어?”

“…….”

“그 호텔. 네가 내빼서 나 좆 되게 만든 거기서.”

남자가 손끝으로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고개를 틀어 피하자 이번엔 손아귀 힘으로 턱을 세게 붙잡고 자신을 보게 만든다.

“자, 여기. 시간, 날짜, 장소 다 쓰여 있거든?”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손을 꺼내자 손가락 사이에 반 접힌 종이가 끼워져 있다. 잠깐 그곳에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손이 내 상체를 꾹 누르고 점점 내려가더니 아랫배까지 기어갔다. 그러고는 뭐라 반항할 새도 없이 내 바지춤에 그 종이를 끼워 넣었다. 욕이라도 한마디 하려고 입을 벌리자 그제야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니면 나한테 팔든가.”

“……저리 비켜요.”

“살이 말랑말랑한데. 사람 꼴리게.”

그는 다시 손을 올려 내 어깨를 쓰다듬더니 넥타이를 슬쩍 잡아 내렸다. 그의 손을 쳐내려고 하자 손목이 붙들렸다.

“비싸게 사줄 테니까 벗어보라고. 응?”

“놔!”

내가 소리치자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행동을 멈추는가 싶더니 나를 뒤로 확 밀쳐 눕혔다.

“아윽…….”

뒤통수가 바닥에 부딪혔다. 고통에 아파할 새도 없이 그는 내 넥타이를 억지로 잡아당겼다. 어느새 커다란 몸이 내 하체를 완전히 내리누르고 있었다.

“하지…… 마!”

주먹으로 놈의 가슴팍을 퍽퍽 쳐댔지만 돌덩이를 때리는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어 큰 손이 상체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억지로 이리저리 틀어가며 손길을 피하려고 애썼으나 하체가 꽉 짓눌려 쉽지 않았다.

“가만히 안 있어?”

“윽, 흐윽!”

놈이 만지던 끔찍한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호텔에서, 그리고 정영일과 있었던 일도 스멀스멀 내 발목을 잡아왔다.

그 감각에 절로 눈이 감기려 했지만 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어딘가에 연락이라도 해야 했다. 계속해서 몸을 틀며 반항했다. 그리고 한쪽 손은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경찰에 연락할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그럴 정신은 없었다. 화면을 켜고 다짜고짜 통화 버튼만 눌렀다.

“너, 이 새끼가.”

“아윽!”

하지만 내 수상한 행동을 금방 눈치챈 남자가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 나는 허리 밑으로 손을 깔아뭉개며 핸드폰을 감췄다.

내 팔뚝을 부술 듯이 쥐고 잡아당기는 그를 오래 당해낼 수 없었다. 근본적인 힘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억지로 손목을 잡아 휙 빼낸 그가 얼굴 옆으로 손목을 내리누르며 고정시켰다.

핸드폰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 그가 내 어깨를 내리누르며 핸드폰을 가져가려 다른 손을 뻗었을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서도운 씨.

핸드폰에서 낮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이었다.

“이, 이사님!”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재고 따져볼 때가 아니었다. 내 몸을, 정신을 짓누른 이 거대한 괴물이 사라졌으면.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런 썅…….”

깡패는 거의 속삭이듯 욕을 내뱉고는 이내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몸도 일으켜 세웠다. 순식간에 몸이 자유를 찾았다. 나는 꼭 목이 졸렸던 것처럼 가쁜 숨을 내쉬었다.

냉큼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그게 꼭 나의 생명줄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끌어안고 가슴에 품었다.

눈물 맺힌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깡패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배로 발길질이 한 번 날아왔다. 헉……. 목구멍으로 숨이 훅 뱉어졌다. 서서히 명치부터 통증이 찾아왔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놈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쾅! 신경질적으로 문이 닫혔지만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직 통화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사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이 시간에 전화했습니까.

“그, 급한 일은 아닌…….”

이 상황을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빚 때문에 깡패가 찾아왔다고? 그걸 일러바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사님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었어도 말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럼요.

“……그게, 그…….”

―할 말 없으면 끊어요.

“잠, 잠시만요!”

이사님이 정말 전화를 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눈앞에서 깡패는 사라졌지만, 전화를 끊은 걸 알면 금방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 겁이 났다. 깡패에게 짓눌렸을 때보다 지금이 더 몸이 덜덜 떨려왔다.

핸드폰을 양손에 꼭 쥔 채로 현관 근처로 다가갔다. 문밖에선 차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놈이 떠난 건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문을 열어보기엔 무서웠다.

나는 현관문을 다시 잠그고 걸쇠도 걸었다. 문고리 밑에 따로 달려 있던 잠금장치도 돌려 잠갔다. 그러고 있는 도중 차갑게 굳어진 목소리가 넘어왔다.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 말고 다른 할 말 없어요?

이사님의 목소리에 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난……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왜 하필이면 이사님께 연락이 가서는……. 가장 최근에 전화 통화를 했던 사람이 그였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다. 최근 통화라고 해봤자 회사 사람들과의 전화일 텐데. 그 사람들이 나서서 뭘 해줄 수도 없었을 텐데.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나았을 뻔했나. 거기다 그와는 채무 관계도 얽혀 있지 않던가. 깡패의 편을 들었으면 들었지, 내 편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버튼을 잘못 눌러서…….”

그렇게 변명하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난 그냥 당장 연락이 되는 내 편이 있다는 것, 그거 하나만 깡패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연결된 사람이 하필 날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문제지.

―끊지 말고 기다리라더니, 무슨 버튼을 잘못 누릅니까.

“…….”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전화한 거예요?

이사님이 낮게 이야기했다. 굳이 소리치지 않아도 충분히 위압감이 느껴졌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또 밖에 달이 밝았습니까. 아무래도 날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그게 아닙……. 죄송합니다.”

말을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도 없는데 다짜고짜 전화한 것도 내 잘못, 하필 이런 날 전화한 것도 내 잘못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백한 나의 잘못이다.

“…….”

억울해할 것 없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다.

나는 목 안에서 울컥이며 터져 나오려 하는 울음을 애써 눌렀다. 적어도 그의 앞에선 울면 안 됐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정말 무슨 일 있습니까.

하지만…… 달래듯 묻는 이사님의 목소리에 애써 다잡은 마음을 전부 무너뜨려 버리고 싶어졌다. 내 착각인지 목소리도 누그러진 것만 같다.

이러면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는데 또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러다 또다시 멋대로 기대하고, 그러면 분명 또 이사님을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나는 그의 말을 차단이라도 해버리듯 재차 죄송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몇 번을 반복하자 이사님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허공에 대고 고개를 숙여 끝인사를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

“으윽, 으…….”

간신히 참던 울음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눈물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오래 울고 싶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는 듯이 빨리 떨쳐 버리고 싶었다.

주변을 살피자 엉망이 된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나는 진정되지 않는 숨을 애써 갈무리하며 눈을 감았다. 난장판이 된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뭔가를 할 기운이 없다. 제사는커녕 청소를 하기도 힘들 정도로 정신이 바스러졌다.

그대로 무거운 몸을 끌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밟힌 채 놓여 있는 담배꽁초를 치우지도 못하고 한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속이 메스꺼웠다. 깡패가 더러운 손길로 날 만져서인지, 아니면 이사님이 곧 날 혼낼 걸 예상해서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깡패에게 배를 걷어차인 것 때문에 정말 몸이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배가 심히 아팠다. 나는 옆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배를 끌어안았다. 속이 울렁거린다. 눈알이 뜨겁게 타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이사님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차라리 이사님이 내 몸이라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몸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으면. 돈을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나를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 주었으면.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가 하는 어떤 가혹한 행위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그렇게 한참을 세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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