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4/29)

  5.

점심을 먹은 뒤 양치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셔츠 단추 사이에 끼워두었던 넥타이도 다시 잡아 빼고 옷차림에 문제가 없는지 한 번 쓱 점검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켜고 옆에 꽂아두었던 서류를 빼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난 주말, 병원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다녀온 이후로 마음이 편치 않다.

검사해 본 결과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존에 해오던 기본 검사가 아닌 정밀 검사가 필요해 그날은 결국 CT 촬영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 중에 또 상담을 받기로 했다.

만약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다면 투석을 진행하거나, 심각하면 이식 수술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의사는 수술이란 말에 겁먹은 나를 달래듯 요즘 수술은 위험하지 않고 회복도 빠른 편이라고 말했으나,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상담 분위기는 그렇게 심각하게 마무리되었다.

다른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돈이 문제였다. 투석 비용이나 수술 비용을 찾아보았다. 천에서 천오백. 이것저것 다른 비용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큰돈이 지금 있을 리 없었다.

“도운 씨, 벌써 일해요? 아직 점심시간인데 쉬엄쉬엄하지.”

“이따 외근 나가야 해서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서류는 거의 검토하지 못했다. 커피 한 잔씩 하고 돌아오겠다던 대리님과 차장님은 손에 도넛 상자를 들고 왔다.

“하나 먹어요. 배부르면 이따 먹어도 되고.”

“감사합니다.”

점심밥을 많이 먹어 배는 이미 불렀지만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도넛 하나를 집었다. 하얀 슈가파우더가 잔뜩 묻어 있는 보들보들한 도넛을 한입 베어 물자 입 안에 단맛이 퍼졌다.

병원에서 영양이 부족하다고 한 게 걱정되었다. 신장에 안 좋은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은 둘째 치고 영양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고, 체중도 끌어올려야 한다고 했었다.

저렴하면서 배를 많이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찾아봐야겠다. 라면은 당연히 몸에 좋지 않겠지. 한 끼 해결로는 라면이 제격이었는데. 다른 음식은 또 뭐가 있을까.

이사님께 받은 돈은 받는 대로 청영과 빚을 갚는 데 써버렸다. 그나마 일이백 모아두었던 돈도 이젠 다 써버렸고. 사채가 아직 한참 남은 이 상황에서 또다시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

심지어 투석을 받으려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고, 수술도 장기간의 휴가를 내야 한다. 휴가든 퇴사든…… 이사님이 그걸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도넛을 먹어 잠깐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한쪽 신장이 없어 골골댄다는 걸 알면 이사님은 날 더 혐오스러워할 것 같았다. 일도 못하고, 몸이나 팔고 다니고, 거기다 몸도 아프다 하면……. 어쩐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할 그를 떠올리자니 씁쓸했다.

회사는 계속 다니고 싶었다.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당장 죽을 수는 없으니 우선은 돈이 절실했다. 그가 날 내치지 않도록 나는 무조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각오를 다지듯 남은 도넛을 와구와구 먹어치웠다. 꽉 찼던 배가 더 빵빵해졌다.

“이제 일합시다.”

언제 왔는지 이사님이 비서실 문 앞에 서서 벽을 똑똑 두드렸다. 어느새 1시가 넘은 것이다. 실장님과 함께 오찬 약속을 마치고 일찍 돌아온 모양이었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이사님의 시선이 내 얼굴에 일직선으로 꽂혔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나 또 뭘 잘못했나……?

“도운 씨, 입에 묻었어요.”

그가 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는가 했는데, 대리님이 먼저 티슈를 건넸다. 입가에 뭔가 묻었다는 듯 살짝 가리키기에 재빨리 티슈를 받아 들고 얼굴을 문질렀다. 슈가파우더가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리에 다시 앉았다. 창피했다……. 갑자기 속이 얹히는 것 같아 가슴을 퍽퍽 쳤다.

[오늘 오죠?]

외근을 나가기 직전 빠진 서류가 없는지 다시 한번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업무 메일을 확인했을 때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위에는 일과 관련한 내용을 사무적인 말투로 써놓고는 그 아래 추신을 덧붙여 묻는 사람, 문 전무였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내가 AG 본사로 찾아간다는 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그냥 나에게 말을 거는 행동이었다.

[3시 반 도착 예정입니다.]

무슨 표정으로 답을 썼는지 모르겠다. 이사님께 모든 걸 들킨 이후로 나는 문 전무의 개인적인 연락에는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위치는 못 되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번호를 차단해 두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모든 연락은 회사 메일을 통해서만 하고 있었다. 물론 업무에 관련한 것만.

그도 느낀 것인지 자연히 연락을 줄였다. 그게 나에게 미안해서인가, 아니면 어차피 한 번은 대면하게 되니 그때를 기다리는 것인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오늘은 문 전무를 봐야만 했다. 일 때문이니 회피할 수 없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회사에서 빌린 차 키도 주머니에 넣고, 잠시 이사실에 보고를 하러 들렀다. 문을 두드리자 곧장 들어오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이사님,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AG와 미팅이라고 했죠?”

“네.”

이쪽은 보지도 않고 서류를 확인하던 이사님이 짧게 흘겨보듯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다녀와요.”

“……염려하시는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염려…….”

내 말에 그가 서류를 넘기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랬을까, 그는 다시 시선을 옮겨 서류를 살피며 말했다.

“서도운 씨한테 별 기대는 없지만,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겠습니다.”

“…….”

괜한 말을 했구나. 그제야 그런 후회가 들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이사실을 나왔다. 등 뒤로 닫힌 문이 다신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른 기업과 미팅을 하러 가는 자리, 바른 태도로 임해야 할 텐데 자꾸만 어깨는 처지고 표정도 굳어졌다. 속도 편하지 않았다.

양 볼을 손으로 탁탁 쳐가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입으로 중얼중얼 차 번호를 읊조리며 두리번거렸다. 검은색 차가 전부 비슷비슷해 보여 결국 차 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차에 라이트가 켜졌다.

“……?”

그 차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라이트가 번쩍거리며 켜지자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데, 옷차림을 봐서는 회사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이 더운 여름에 검은 항공 점퍼를 입고 있었다.

관리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지금은 날 둘러싼 다른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사소한 것을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곧장 차를 몰고 AG 본사로 향했다.

마련된 회의실에서 평소와 다르지 않게 회의를 진행했다. 큰 잡음도 없었고, 양사의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많았다. 곡해되지 않도록 의견을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그럴 요소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문 전무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를 보았을 때도 평범한 인사와 함께 짧게 악수를 건네왔을 뿐이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연락을 무시해 혹시 되레 그가 화나지 않았을까 걱정한 것과는 달리 회의 내내 분위기는 좋았다.

“도운 씨.”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회의가 끝나자 문 전무가 나를 불렀다.

“예, 전무님.”

“잠깐 얘기 좀 하고 갈 수 있어요?”

대답을 망설였다. 이사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안 됐지만, 그렇다고 문 전무와의 대화를 평생 피할 수는 없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었고……. 오늘로 그와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회사로 돌아가 보고 드려야 해서 오래는 어렵습니다.”

“그럼…… 짧게 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문 전무는 빈 회의실의 블라인드를 쳤다. 그리고 앉으라는 듯 의자로 턱짓하기에 방금까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문 전무는 앉지 않고 내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붙잡고 잠시 망설이듯 서 있었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도 같더니 으음, 하고 소리를 낸 끝에 첫마디를 꺼내놓았다.

“미안해요.”

“…….”

“내가 도운 씨한테 고백했던 거 해일이한테 이야기했어요. 곤란했을 거란 거 알아요.”

그는 얼굴을 주욱 쓸어내렸다. 그 행동은 자신이 무척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다른…… 비밀은 당연히 안 꺼냈어요.”

“……네. 감사합니다.”

내가 이사님을 좋아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감사할 필요 없는 일이라고 그가 곧바로 덧붙였다. 자신이 지켜주기로 한 약속인데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내가 그 얘길 한 덴 이유가 있었어요.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전무님, 저한테 이유를 해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는 그냥, 분명 전무님이 제가 얼마나 곤란해질지 아실 텐데도 불구하고 그러셨다는 것에 조금, 상처……였고…….”

“…….”

“그 결과를 제가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버겁고…… 이미 힘듭니다. 무슨 이유가 있으셨는지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올바른 단어를 썼는지 헷갈렸다. 상처였다는 말이나, 힘들다는 말이나, 내 주제를 모르고 한 버릇없는 말이 아닌지. 내뱉는 족족 후회가 뒤따랐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드린 건 제가 아닙니까. 전부 전무님이 지켜주셨는데……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반쯤은 체념한 듯한 말이 흘러나갔다. 문 전무도 느꼈는지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도운 씨. 나한테 감사할 것 없어요. 지금 내가 사과해야 할 상황인 거예요.”

“저는 이 일로…… 계속 실랑이하는 게 무척 지칩니다.”

그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떨어트렸다. 책상 위에 머무르던 시선을 옮겨 가방을 쥔 손등에 올렸다. 끈을 너무 세게 쥐어 뼈가 도드라졌다.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이사님을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에서 서로에 대한 일은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정해일이 도운 씨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는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사님이 그에게 화를 냈을 때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난 정해일이 청영 외의 일에 그렇게 집착하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

“정해일이 도운 씨한테 집착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느냐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기에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을 보며 문 전무는 어쩐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이사님이 절 왜 집착……. 절대 아니십니다.”

그렇게 답은 했지만, 그 와중에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다. 혹시 몸……? 계약을 하고 관계를 가지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는 행위가 혹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싶었다.

“혹여 그렇다 해도…… 제가 청영의 직원이니 그러시는 것뿐일 거예요. 다른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설마 문 전무가 이 관계를 아는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신경이 쓰여 그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처음엔 놀라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젠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서로 있었던 사적인 일은 모두 없었던 셈 치고, 앞으로도 개인적인 연락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리하면…….”

내가 장황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그가 쾅, 하고 작지 않은 소리를 내며 책상을 쳤다.

“정해일이랑 무슨 사이예요?”

“…….”

“그냥 짝사랑만 하는 거…… 맞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심장이 찔렸다. 온몸의 기능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곧 얼어붙었던 것 같은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맥박 치다 못해 손끝까지 욱신거릴 정도로 거세게.

턱이 덜덜 떨렸다. 숨이 가빠졌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기 위해 내리눌렀다. 경직된 어깨와 가방끈을 꽉 쥔 채로 굳어진 손. 바들바들 떨려오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평범한 상사와 부하 사이입니다.”

나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이 관계를 이야기했을 리 없고, 이건 다 문 전무의 추측일 것이다.

“추궁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래요.”

“전무님……. 저는,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운 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연히 연기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게 불안했다. 이사님과 몸을 섞는다는 것도, 단순히 섞는 게 아니라 돈을 받는다는 것도, 빚을 졌다는 것도, 그가 사실 날 무척이나 증오한다는 것도 전부 남에게 밝혀지면…… 내가 무너질까 봐.

나도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흙바닥에 짓밟혔어도 언젠간 털고 일어나고 싶은 사람. 그 언젠가를 위해서 이 일은 정말 이사님과 나만 알았으면 했다.

“잠깐만요, 서도운 씨.”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문 전무가 손목을 붙들었다.

“가고 싶어요.”

“내가 둘 사이에서 이러는 게 오지랖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윽……. 놔주십시오!”

나는 손목을 거칠게 잡아 빼며 크게 소리 냈다. 하지만 금방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내지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면 어떡하지, 문 전무가 무례하게 느꼈다면 어떡하지. 나 같은 것에게 가진 얕은 호감 따위 순식간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것이었는데, 내가 너무 기고만장하게 군 것은 아닌가.

온갖 걱정을 하고 있는데, 문 전무가 먼저 손을 놓았다.

“미안해요.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빨리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잠시……만요.”

욱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잘 내지 않던 큰 소리를 내서인지 머리가 징징 울렸다. 관자놀이를 총알이 관통해 나간 것처럼 깨질 듯한 두통에 몸까지 휘청거렸다.

“도운 씨, 왜 그래요?”

“……죄송합니다. 잠시, 윽…….”

“괜찮아요?”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간신히 괜찮다고 대답했으나 착각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윽, 욱…….”

눈을 질끈 감고 몇 번 몸을 떨며 참아내다 이내 견디지 못하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근처의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열고 속을 울렁거리게 만든 것들을 모두 게워내기 시작했다. 으욱, 우욱……. 목이 몇 번 더 꿀렁거리며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운 씨, 괜찮아요?”

뒤쫓아 왔는지 문 전무가 내 상태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다고 손이라도 내젓고 싶었는데, 위장이 끊어질 듯 조이는 것이 너무 아팠고 머리도 울렸다. 그사이 위장에 남은 것들이 더 게워내졌다.

등으로 토닥이는 손길이 올라왔다. 일정한 토닥임에 진정될 법도 한데, 심장은 더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눈을 감으니 그 울림이 온몸으로 쏟아져 꼭 어둠이 어깨를 쿵쿵 짓누르며 내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나는 진저리치듯 몸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역질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어 위액까지 뱉어내고 나서야 몸을 애써 일으킬 수 있었다.

물을 내리고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끌었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문 전무를 그대로 지나쳤다.

“죄송합니다.”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를 뱉는데도 머리가 너무 지끈거렸다. 관자놀이 부근을 짚으며 세면대로 걸었다.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울 속 흐트러진 내 모습이 보였다. 땀에 살짝 젖은 머리나 생리적으로 비집고 나온 눈물에 젖고 붉어진 눈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물을 틀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물을 얼굴에 몇 번 끼얹었다.

남의 회사에서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이사님이 아시면 분명 혼이 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와 배가 너무 아파 혼날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간신히 수도꼭지를 잠갔다.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통증에 배를 감싸 쥐었다.

“병원부터 가요.”

턱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통증을 애써 내리누르려 이를 악물고는 페이퍼타월을 뽑으려 했다. 그런 내 손 앞에 문 전무가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손수건이 괜찮다는 것인지, 병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문 전무는 전자라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계속 손수건을 내밀었다. 잠시 멈칫했지만 그냥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걸 받아 들었다. 도저히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병원 가요, 같이.”

“정말 괜찮……. 윽. 으…….”

“도운 씨.”

또다시 위장이 꼬인 것처럼 아팠다.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배를 감싸며 휘청거렸다. 간신히 세면대를 붙잡으며 몸을 지탱했지만 눈이 자꾸 어물어물 감겼다. 머리가 뜨거워서 그런 것 같았다.

문 전무는 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며 어깨를 붙들고 내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간신히 중얼거렸다.

“……원래 자주 이래요.”

고작 속 좀 게워낸 것 가지고 병원까지 갈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자주 이러는 거면 더 병원에 가봐야죠.”

“아니, 자주가 아니라…… 그냥 가끔 속이 안 좋거나 하면 이럽니다.”

말실수했다. 내가 변명하듯 덧붙였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잘 안 될 때가 있었다. 얹힌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꼭 속을 게워냈다. 나한테는 별것 아닌 익숙한 일이었다. ……사실 하루 종일 먹는 족족 게워낼 땐 몸에 문제라도 있나 싶긴 했지만 속으로 합리화 중이었다. 병원은 정말 가기 싫다.

“의사라도 부를게요.”

“정말 괜찮습니다, 전무님.”

그를 말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문질렀다. 의사를 부를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더 민폐를 끼치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나는 서둘러 회의실로 돌아와 가방부터 챙겼다. 문 전무는 인상을 쓰며 뒤따라왔으나 더 이상 나를 말리지는 못했다.

“오늘 실례 많았습니다. 손수건은 세탁해서…… 다음에 돌려드릴게요.”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문 전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긴 다리로 빠르게 따라온 문 전무가 먼저 버튼을 눌러주었다.

“안색이 아무래도 안 좋은데, 다음에라도 꼭 병원 가요.”

끝까지 표정을 펴지 못하고 날 살피는 그에게 되레 미안함을 느끼고 말았다. 나는 이런 걱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닌데. 오늘만 해도 그에게 폐만 끼쳤지 않은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어요. 그렇게 할 테니까 건강부터 챙겨요.”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행위를 한 것만 같았다. 나는 또다시 죄책감을 떠안았다. 이건 내 고질병이었다.

“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 안에 올라타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손잡이를 붙들었지만 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밑으로 하강하는 것 같았다. 무서워 눈을 감았다.

“도운 씨, 서도운 씨!”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나를 불렀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바늘로 온몸을 찌른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새하얀 전등 때문에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몇 번을 끔뻑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금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최근엔 꾸지 않던 이사님 꿈이었다. 내용은 달랐다. 항상 꾸던 우리의 어릴 적이 아니라, 그와 부산으로 출장을 내려갔을 때였다.

“…….”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그가 바라봐 주는 그런…… 내 희망 사항이 담긴 꿈이었다. 아무도 내 꿈을 모를 텐데 부끄러워졌다. 혼자 그런 상상을 한 적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걸 무의식이 비춘 모양이었다.

뻐근한 눈가를 비비며 애써 부끄러움을 날려버렸다. 멍하던 정신을 애써 깨우기 위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으으…….”

배가 너무 아팠다. 명치부터 배꼽 아래까지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는 살살 배를 문질렀다. 그런데 배를 문지르는 내 손등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어진 투명한 호스를 타고 시선이 움직였다. 그 끝에 수액인지 약인지 모를 것이 담긴 팩이 걸려 있었다.

병원인 건가? 침대가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자다 일어난 지금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팔을 뻗어 커튼을 치자 건너편 침상에서 주사를 맞은 어린아이가 제 부모의 품에 안겨드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깨운 울음소리는 저 아이에게서 나온 것이겠구나.

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걸 그제야 온전히 이해하고는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지 이전의 일을 찬찬히 되짚어봤다.

아침엔 평범하게 일을 했고, 오후엔 AG에서 회의가 있어 이동했다.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야 했는데, 문 전무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다가…….

“……미치겠다.”

속이 울렁거려 토하고, 머리와 배가 아프더니 정신을 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진 날 붙들고 문 전무가 깨우려 불러대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시계를 찾다 옆 탁자에 올라가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켜 확인해 보니 시간은 벌써 7시가 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재중 전화가 두 건이나 찍혀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모두 이사님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5시 반까지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돌아가서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 드리기로 했었다.

이사님이 혹시 지금까지 날 기다렸던 것일까. 정말 어쩌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냥 혼나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다른 것보다 그에게서 신뢰를 잃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지금까지 반복된 일련의 사건들로 이미 바닥난 신뢰가 또다시 바닥칠 걸 생각하니 너무나도 두려웠다.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신발을 신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등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 링거를 억지로 빼냈다.

끌어 내려진 넥타이를 다시 당겨 똑바로 매고, 가방도 챙겼다. 겉옷을 입을 정신이 없어 그냥 손에 들고 문을 뛰쳐나갔다.

“어떡, 어떡하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입구를 찾지 못해서 로비에서 한참을 돌았다. 뛰어다니다 보니 또 배가 꼬인 것처럼 아팠고, 허리뼈가 엇나간 것처럼 자꾸만 바닥으로 넘어질 뻔했다.

발을 동동 구르다 간신히 반대편에서 사람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입구를 찾았다. 밖으로 나오자 택시가 줄지어 기다리는 정류장이 보였다. 나는 곧장 그곳으로 뛰어갔다. 빨리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사님이었다.

―서도운 씨, 지금 어딥니까!

전화를 받아 귀에 대는 순간 이사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겁을 집어먹은 나는 택시를 향해 뛰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죄송, 죄송합니다, 이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덜 혼나고 싶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죄송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제가, 실은, 조금…….”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 할까 하다가, 그가 몸 관리 제대로 하라고 혼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듯 눈을 감았다.

그냥 회의가 늦어졌다고 변명을 이어가려는데, 이사님이 다시 말했다.

―지금 어딥니까.

“저, 지금 곧장 회사로 복귀하겠습니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더 겁이 났다. 턱이 떨리다 못해 어깨까지 떨렸다.

다시 서둘러 택시를 잡으려 했다. 얼마나 혼날까. 함부로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를 이 시간까지 기다리게 만든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내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짧게 하, 하고 한숨 쉬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지금 뭐?

“예……?”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어요, 내가.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정신이 풀어지듯 멍하게 대답했다. 택시 하나를 붙잡아 타려고 뒷문 손잡이까지 잡았던 손이 허망하게 떨어졌다. 그대로 뒤돌아 병원을 다시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 이사님이 혹시,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소리인가……?

“병원, 정……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병원 문이 열리며 이사님이 나타났다. 나를 찾아다니고 있었는지 거친 숨을 쉬며 뛰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안 그래도 어둡던 그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그는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리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도운!”

이사님이 소리치자 내 어깨는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어느새 그는 무척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거의 한 발짝 앞까지 다가와도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겁이 난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너……!”

하지만 이사님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세게 붙들어 당기자 몸이 휘청거리며 다시 한 발짝 앞으로 서고 말았다. 우리는 서로의 발 앞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었고, 그는 여전히 인상 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 찾으러 뛰어다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의 눈치를 보듯 올려다보았다가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금방 눈을 깔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자 손목을 붙든 손아귀 힘이 더 세졌다.

“그 잠깐 사이에 어딜 가려고 한 겁니까.”

통화할 때처럼 소리를 내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낮아진 이사님의 목소리가 나는 더 겁났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그의 심기 하나만 거슬리게 해도 당장 덤벼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회, 회사에…… 돌아가려고…….”

“지금? 병원에 실려 와놓고?”

“이사님 기다리실까 봐…… 혹시…….”

다시 힐끔 그의 눈치를 봤다. 이사님은 내 손목을 붙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허공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떨어지려 하기에 나도 급히 바닥으로 시선을 꽂았다.

“내가 이 늦은 시간까지 서도운 씨를 기다릴 것 같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조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늦은 건 내 잘못이긴 하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다 이사님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는데.

그가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하는 이유는 없지만 괜히 서러워 얼굴이 흐려졌다.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사라져서 사람 놀라게나 하고.”

“…….”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고 나서, 나서길.”

그의 질책이 한 줄씩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입술이 튀어나왔다. 티 내지 않기 위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물었다.

“……쯧.”

이사님은 내 손을 위로 끌어당겨 이리저리 살피더니 혀를 찼다.

“피 나지 않습니까.”

“아.”

주삿바늘을 급하게 잡아 뜯어서 그런지 조금 피가 흐른 모양이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바늘이 꽂혔던 주위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가져와 반대쪽 셔츠 소매로 벅벅 문질렀다. 그런 내 손을 이사님이 다시 급하게 잡아챘다.

“지금 뭐 하는……!”

“……네?”

“…….”

이사님은 뒷말을 삼킨 것처럼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걸 본다는 듯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에서 그의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이사님은 말없이 날 이끌었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는 그의 보폭이 너무 커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해야지만 그 걸음에 맞출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사님, 하고 불렀다.

“이쪽입니다.”

자연스레 그들에게 다가간 우리는 안내에 따라 병원 안쪽으로 더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에게 팔을 잡혀 끌려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힐끔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워 있던 응급실은 저쪽인데…….

“이사님, 저…….”

“조용히 해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뭔가 물으려고 하자 그는 대번에 내 말을 막고 말았다. 나도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다다랐고, 이내 도착한 것을 타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은 AG 본사였는데, 왜 병원에 실려 와서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이사님인 것인지.

정황상 이사님께 연락한 사람은 문 전무인 것 같았다. 그럼 문 전무는 어디로 간 거지? 그의 모습은 아까 응급실에서도 지금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우리가 가고 있는 목적지에 있을까 싶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도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역시 그는 없었다. 이미 돌아간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아닙니다.”

나는 가방끈을 꼭 쥐고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은 영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앞선 의사를 따라 걸었다.

의사는 어느 병실 문을 열며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호텔과 같은 방이었다. 두 사람이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침대와 벽 한쪽을 차지하듯 걸려 있는 TV. 그 앞엔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언뜻 본 안쪽엔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이곳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언뜻 볼 수 있었던 VIP 전용 병실이었다. 아니,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좋아 보였다. 내 집보다 더 넓은 병실이라니…….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네…….”

앉으라고는 했지만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였다. 그의 눈치를 보다 결국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정답이었는지 그의 표정이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방만 끌어안고 있자 의사가 앞으로 다가왔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던 손부터 살피더니 소독약을 적신 솜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혈관이 약하고 얇아서 멍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의사가 그리 말하자 이사님은 다시 혀를 찼다. 의사의 뒤로 붙어 서서 팔짱을 끼곤 날 내려다봤다. 정수리가 그의 시선으로 따끔거렸다. 그래 봐야 고작 멍인데. 멍 정도는 섹스할 때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혹시 멍든 몸이 섹스할 때 많이 보기 싫은가. 반창고를 붙여 가리면 안 되나. 나중에 이사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많이 허약하고 영양도 부족해서,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입원을 하고 영양제 맞으면서 푹 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의사는 내 몸에 어떤 링거가 꽂히게 될지 이사님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이 병실을 나 하나 때문에 빌린 것이란 말인가.

“혹시 정밀 검사를 원하시면.”

“아뇨, 아니요. 이사님, 저 괜찮습니다. 입원 안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의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런 병실이면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쉽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호텔도 아니고 병원이면 각종 의료 서비스에 대한 부가적인 금액이 붙을 텐데. 그걸 다 충당할 돈이 있을 리 없다.

“검사도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다른 때였다면 그에게 받은 돈으로 어떻게 해결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말 빈털터리다. 가뜩이나 병원에서 검사를 받느라 생각지도 못한 지출이 또 있었기에 탈탈 털어도 십 원 한 장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지금 몸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해 그에게 눈총을 받았는데, 분명 안 좋게 나올 검사 결과를 들으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냥 퇴원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사님.”

“진정제도 하나 놔줘요. 헛소리로 힘 못 빼게.”

의사는 그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 힘이 다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살벌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의사는 우선 링거를 챙겨 오겠다며 병실을 나섰다. 그를 따라 다른 의사와 간호사까지 나가버린 탓에 이 넓은 병실엔 순식간에 우리 둘만 남게 되고 말았다.

“이사님.”

혼날 게 예상되었지만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테이블로 걸어가던 그가 내 부름에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정말 입원할 정도는 아닙니다. 너무 더워서, 그래서 어지러워서 잠깐 쓰러진 거지, 멀쩡해요. 그리고…… 제가 이런 큰 병실비를 충당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멀쩡하다고?”

“…….”

“병원비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제발 내가, 시키는 대로 좀 해요.”

이사님은 말을 뚝뚝 끊어가며 말했다. 꼭 화를 눌러 참는 듯한 말투였다.

“신장 수술했다고 왜 나한테 얘길 안 했습니까.”

“어…….”

그가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애써 숨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알게 되었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병원에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아주 어릴 때 한 거여서, 저도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의 어릴 때……. 지금은 다 회복됐습니다.”

사실은 이사님이 몰랐으면 했다. 몸 관리 제대로 하란 말을 들은 이후로는 더더욱. 내 몸에 하자가 있으면 더는 날 안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

나에겐 지금 내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이든, 돈이든, 다 필요했다. 그래서 혹시 계약을 해지하자고 말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졌다.

“검사는 제가 얼마 전에 따로 받았습니다. 아마 별문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 관계에 처절해져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면…….

“전염되는 병…… 같은 것도 물론 없을 거예요. 없습니다, 분명.”

잘 모르겠다. 스스로를 갉아먹고 비참해지는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도운. 내가 그런 것 걱정해서 묻는 건 줄 알아?”

“신장 한쪽 없어도 일하는 데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섹스도 잘할 수 있고, 빚도 최우선으로 갚을 거고, 계약 이행하는 데 어떤 문제도 없을 겁니다.”

나는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정말 괜찮았다. 겨울부터 지금까지 이사님과 관계를 가져오면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난 내 의지를 내비쳤다. 계약을 계속할 수 있다고. 빚을 최우선으로 갚을 것이라고.

“어떤 문제도 없을 거라면서 오늘 쓰러진 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거래처에서 이 일을 우리 쪽에 문제 삼으려면 얼마든지 삼을 수 있을 텐데, 그걸 서도운 씨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이사님은 잠시 말없이 날 응시하더니 한참 만에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 표정이 시무룩해진 모양인지 그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소리 그만하라는 겁니다.”

꼭 날 달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사님의 얼굴이 조금 전처럼 찌푸려졌지만 아까와는 다르게만 느껴졌다. 나에 대한 걱정으로 물든 것만 같았다.

“옮긴다느니, 그런 얘기 듣는 내 기분은 왜 생각을 안 해.”

……어떤 기분.

이사님이 어떤 심정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픈 사람을 건드려 괜한 일에 꼬였다는 귀찮음? 죄책감?

“전…… 그냥 이사님이 제 개인적 일에 자꾸 신경 쓰시게 되는 게 걱정됩니다. 저한테…… 질리실까 봐.”

“…….”

“제가 잘했으면 됐을 일인데 자꾸 이렇게 실수를 해서 신뢰감이 바닥나는 것도 걱정되고. 그날 이후로 정말 거슬리지 않도록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생각대로 잘 안 돼서 죄송스럽고…….”

말끝을 흐렸다.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에게 질려 날 내치지 말아달라는 것.

이사님의 관심은 나에게 과분했다. 나는 그냥 그의 곁에서 일하고, 그를 만족시키고, 죄책감을 덜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날 달래듯 굴 때면 내 나쁜 심보가 자꾸 불쑥 고개를 든다. 이렇게 다정하니까 자꾸 내가 어리광을 부리게 되잖아. 더 매달리고 싶어지잖아.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게 되잖아.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더 주의할 테니까 기회를 주세요.”

이사님의 표정이 안 좋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하아.”

그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아주 어려운 문제에라도 대면한 듯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서도운 씨가 어떤 황당한 고민거리를 떠안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데, 내 지금 심정은 딱 하납니다.”

내 앞으로 가까이 걸어온 이사님이 링거 바늘이 꽂혔던 오른손을 잡아 들어 올리고는 반창고가 붙은 곳 위를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서도운 씨가…… 걱정됩니다.”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들어 이사님을 쳐다봤다. 지금 들은 것이 내가 생각한 의미가 맞나 싶었다. 그는 계속해서 내 손에 시선을 두고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빚을 못 갚을까 봐, 관계를 제대로 못 할까 봐 하는 걱정이 아니라…… 네 건강이 걱정된다고.”

“…….”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참 웃기지.’

이사님이 언젠가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쳤다. 그와 재회했던 그 면접장에서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했던 말이었다. 왜 스치듯 했던 그 말이 지금 생각났는지 잘 모르겠다.

“아…….”

“우선은…… 쉬는 게 좋겠군요.”

갑자기 배가 따끔거려 움찔거리자 이사님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이사님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기로 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린 의사가 링거를 챙겨 돌아왔다.

의사가 침대 옆 기둥 고리에 팩을 걸며 준비하는 사이 내게 환자복 한 벌이 내밀어졌다.

“갈아입어요. 가방 좀 그만 끌어안고 있고.”

“네…….”

나는 가방의 어깨끈을 몸에서 빼 아래에 내려두었다. 옷을 받아 들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 환복을 하고 나왔다. 신발도 마련된 슬리퍼로 갈아 신고 단추를 끼우며 나왔다. 이사님은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책자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 회의에서 받아온 샘플 책자였다.

의사의 지시로 침대에 누운 나는 오른손을 내밀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문 전무님께서 연락 주신 건가요?”

“문 전무 얘긴 하지 말아요.”

“네…….”

이사님이 책자를 탁 덮으며 내려놓았다. 그사이 손등엔 순식간에 링거가 꽂혔다. 이런 걸 할 땐 항상 혈관이 얇아 혈관을 찾는 데 애먹는 걸 봐서 그런지 순식간에 끝낸 베테랑의 솜씨가 신기했다.

손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이사님이 내 가방에서 흘러나온 손수건을 집어 들며 물었다.

“이건 누가 줬습니까.”

“…….”

문 전무인데……. 문 전무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해서 어쩌나 싶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 표정을 살핀 그가 누구인지 눈치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전해주겠습니다.”

“버, 버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버릴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그에게 더 뭐라 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다 됐다며 이사님에게 무어라 설명하기 시작했고, 다 맞으려면 앞으로 네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속을 다 게워냈다면서요. 배는 안 고픕니까.”

“괜찮습니다.”

“왜 계속 괜찮다고만 해.”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그래야 안 거슬릴 것 같아서…….

“먹고 싶은 건요.”

“없습니다.”

“말해요. 호텔 주방에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정말 괜찮습……. 안 먹어도 됩니다. 속이 안 좋아서, 먹으면 또 토할까 봐…….”

“……그래요, 그럼.”

그는 그리 대답했지만 의사에게 상태가 나아지면 소화가 잘 되는 죽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들었다. 벗어 팔에 걸쳐 두고 있던 겉옷도 다시 입었다. 돌아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얌전히 링거 다 맞아요. 아까처럼 중간에 뛰쳐나오지 말고.”

“네.”

“내일 연락 주겠습니다.”

의사들과 함께 이사님이 문밖으로 사라지려고 하기 직전, 나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이사님, 오늘 일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괜히 그런 말을 했나. ‘형이 신경 써줄수록 내게 질릴까 봐’. 아까 했던 말이 내심 신경 쓰였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 급하게 이야기한 건데,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뒤돌았다.

“…….”

하지만 곧 아무 말 없이 다시 뒤돌아 병실을 나갔다. 잠시간 그와 시선이 마주쳤었다. 그의 흔들리던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자꾸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해석하게 되어 그냥 애써 생각을 지웠다.

나는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뒤척이다 깨어났다. 선잠이 들었다가도 어느 순간 눈이 반짝 뜨였고, 아침이길 바랐지만 시곗바늘은 번번이 깜깜한 어둠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잠을 청하려고 해서 그런 것인지……. 어머니 병간호를 할 땐 병원에서 잘 때도 많았는데. 나는 어쩐지 두 팔을 벌려 누워도 한참이 남는 넓은 침대를 두고도 간이침대에서 잘 때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잠을 자려 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깐 일어나 있다가 링거를 빼주러 온 간호사와 마주치기까지 했다. 결국 4시가 넘어갔을 때는 자는 걸 포기했다. 한 서너 시간은 잤을까.

조금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당기며 기지개를 켜고, 병실을 가볍게 한두 바퀴 돌듯 걸어 다녔다. 그리고 병실 안에 마련된 개인 욕실로 향했다.

개인 욕실까지 딸린 병실이라니……. 따뜻한 물을 맞고 서 있으면서 속으론 하룻밤 입원하는 데 얼마나 들까 이리저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이사님이 내주겠다고는 했지만 그런 큰돈을 아무런 대가 없이 덜컥 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 이사님도 나중에 몸으로 받으려고 하겠지……?

‘그냥 갚는 게 마음 편하겠다.’

이러나저러나 그한테 받은 것으로 다시 갚는 것이었지만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씻고 나오자 창밖은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말리고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 들렀다 출근할 생각이었기에 시간이 좀 촉박해질 수도 있겠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가 간단한 검사 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벌써 갈아입으셨어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혈압을 재봐야 한다는 그에게 나는 대뜸 손등을 내밀었다.

“저기…… 여기 멍이 든 것 같은데…….”

어제 내가 억지로 바늘을 빼낸 손등엔 옅었지만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내 울상인 표정에 간호사가 손등을 살폈다.

샤워하며 생각해 보니 멍든 몸을 이사님이 당연히 싫어할 것 같았다. 전에 정영일에게 맞았을 때도 얼굴에 멍든 모습을 보고 표정이 무척 안 좋지 않았던가.

“…….”

보기에 많이 흉했나.

“오래갈까요? 빨리 빠져야 해서요.”

손등을 내려다보니 정말 괴물처럼 흉하게 푸른 물이 든 것 같아서 걱정이 밀려왔다.

“아니면 가릴 만한 반창고 혹시 있을까요?”

“그럼 멍 빼는 연고랑 반창고 같이 준비해 드릴게요.”

우선 혈압부터 재자며 나를 앉히기에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손등에서 걱정 어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검사를 마친 간호사는 잠시 뒤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덩달아 아침 식사도 테이블 위에 준비되었다. 아침밥을 먹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자 의사는 속이 텅 비어 있을 거라며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따뜻한 미역국을 조금 떠먹는 시늉을 하자 의사가 말을 꺼냈다.

“이사님께선 오늘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하셨는데, 퇴원은 오후에 하는 게 어떤가요.”

하지만 오늘 출근을 해야 했다. 나는 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최근에 CT 촬영을 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는 말에 의사는 연이어 촬영하면 몸에 좋지 못하다며 검사 결과를 이쪽으로 연계해 달라고 말했다.

알겠다고는 했으나 사실 이사님이 내 몸 상태를 알게 되는 게 너무 싫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의사와 간호사가 모두 떠나자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봉지에서 연고부터 꺼내 손등에 덕지덕지 발랐고, 그 위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 멍 자국을 모두 가렸다. 어쩐지 반창고가 더 흉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창고를 붙일까 뗄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뭐가 더 나을지는 후에 이사님의 표정을 살피기로 하고, 나는 약을 챙겨 가방에 넣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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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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