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시 30분. 차가 너무 막혀 세 정거장 앞에서 내려 열심히 뛰었음에도 결국 회사에 도착한 때는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넘은 시간이었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향해 옷을 갈아입고, 서류도 챙기고. 빠르게 준비해서 다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니, 괜히 가계부를 쓰겠다고 펜을 잡아서 그랬나.
병원에서 나오면서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그 내역을 뽑아 받았다. 이사님에게 갚아야 할 금액 목록에 적어두고 내역서도 반으로 접어 그 사이에 끼웠다. 무슨 하루 입원비가 백만 원이 넘어가는 걸까…….
나는 회사 로비에 들어와 사원증을 찍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이사님은 아침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9시 15분이면 출근한다. 오늘도 분명 벌써 와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 속도가 너무 느리게만 느껴졌다.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버튼을 두세 번 더 누르다 마침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비서실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너무 뛰어서인지 종아리가 땅길 지경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서실에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쪽 실장실을 확인하니 역시 실장님은 이사님을 뵙고 있는지 비어 있었다. 절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운 씨,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배터리가 없어서…….”
“괜찮아요. 아까 이사님이 도운 씨 못 올 거라고 하셨거든요. 아프다고.”
“아……. 그러셨습니까.”
나는 전혀 아픈 곳 없다고 말하며 재차 늦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이사님은 안에서 실장님과 이야기 중이시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어제 회의했던 내용을 다시 검토하며 간단하게 브리핑 준비를 했다. 어제 병실에서 이사님이 살펴보던 책자에도 알아보기 쉽도록 중요한 부분에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두었다.
두 팔에 서류와 책자를 끌어안고 이사실 앞으로 다가갔다. 막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자기 열린 문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이사님이었다.
“안, 안녕하십니까.”
잠시 굳어져 말이 없는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사님.”
그 말을 덧붙이자 그의 표정이 더없이 구겨졌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그가 나에게 화를 내듯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실장님이 나타나며 ‘도운 씨?’ 하고 나를 불렀다. 오지 않는다던 사람이 나타나서 놀란 모양이었다.
이사님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표정에서 화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회사에 나타나서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그냥 병원에 있는 것이 정답이었나? 나는 그저 오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또 쉬었다간 이사님의 눈총을 받을 것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회의록도 정리해야 했고, 프로그램도 짜야 했고, 의전 계획 회의도 있었고, 또 AG에 두고 온 차도…….
“……들어오세요.”
속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마구 떠올리고 있는데, 김 실장님을 내보낸 이사님이 문을 더 밀어 열며 나를 안으로 인도했다. 꾹꾹 내리누르는 듯한 말투.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를 따라 이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나가시는 길 아니었습니까.”
큰 보폭에 맞춰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중간쯤 들어갔을 때, 내 물음에 그가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땅을 보고 걷다가 하마터면 그의 등에 머리를 콩 박을 뻔했다. 다행히 그런 대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나도 발을 급히 멈춰 세웠다.
“서도운 씨 찾으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네? 저를요?”
놀라 되묻는 날 이사님이 돌아보았다. 차갑게 굳어진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더니 내 품에 안겨 있는 서류와 책자를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큰 손 위로 얌전히 올리자 자기가 대신 들고 데스크로 걸어갔다.
“병원에선 일찍 퇴원했다고 하지, 전화는 안 받지.”
데스크 위로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은 그가 그 앞에 기대어 섰다.
“원래 그렇게 자주 사람을 놀라게 해요?”
“…….”
“일어났으면 나한테 곧장 전화해야 할 것 아니야.”
그는 팔짱을 꼈다. 나는 차마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작 토한 것 가지고 며칠씩 입원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하루 입원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아픈 건 그도 싫을 것이고. 나는 이렇게 멀쩡히 출근함으로써 내가 건강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서 입술 삐죽거리지 말고 가까이 와.”
헙. 나는 퍼뜩 고개를 들며 입을 가렸다. 속으로 구시렁대던 게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순간 마주친 그의 시선에 어깨가 다 움찔거렸다. 뺨이 조금 뜨거워졌다.
조심스레 데스크로 다가가 섰다. 이사님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바로 앞에 가까이 서게 했다.
“몇 번이나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이사님이 가벼운 손길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 같았다.
“……다 나았습니다. 이젠 건강합니다. 별일 아니었으니까 빨리 퇴원한 것뿐이에요.”
“쓰러진 게 별일이 아니에요?”
“이틀씩 병원 신세를 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내가 착각한 것 아닐까. 나는 그가 내 걱정을 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 어제 내가 걱정된다던 그의 말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고, 그냥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그게 불편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잠시 그를 향했던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어제 그의 말을 얌전히 듣기로 했었지. 아랫입술을 꼼질꼼질 물다 대답했다.
“다음부턴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이사님의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사님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서는 데스크에 기댔던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서도운 씨 집으로 곧장 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옷까지 갈아입고 출근한 걸 보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평소처럼 일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해서 일을 못 시키겠어. 회의 자료는 검토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요. 병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파일 앞장을 슬쩍 넘겨보고는 말했다.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나는 진짜 이 회사에서 쓸모없는 사람이구나. 자격도 없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주제에 이렇게 사고만 치고 다니고. 당장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다. 그는 대답 없는 내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더니 손을 뻗었다.
“…….”
움찔거리며 한 발을 뒤로 물렸다.
피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정말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몸이 본능적으로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때리려는 줄로만 알고. 이사님이 뺨을 때렸던 것과, 정영일이 손을 날렸던 것이 오버랩되며 순간적으로 등 뒤에 싸한 한기가 흘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한 것이 이사님을 더 화나게 했을까 봐 허둥대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놀라서…….”
이사님은 내 대답에 허공에 뜬 채로 멈춘 손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뻗었다. 착각이겠지만, 꼭 내가 놀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뻗어온 손으로 내 앞머리를 한쪽으로 빗어 넘겼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쓸더니, 드러난 이마 위로 가볍게 손등을 올렸다. 그렇게 가만히 잠시간 있었다.
내가 괜히 겁을 먹고, 별것도 아닌 일에 과히 반응한 것 같다. 분명 무척 기분 나빴을 것이다…….
“저, 이사님.”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할까?
“밤엔 미열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내린 모양이군요.”
이사님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밤? 깨어 있을 땐 열이 있다는 얘길 못 들었는데. 그의 말은 꼭 내가 잠자리에 든 사이 병원에 나를 보러 왔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주듯 이사님이 바로 이어 말했다.
“넓은 침대 두고 그렇게 구석에 웅크리고 자니 안 아플 몸도 아프지.”
“밤에 오셨었습니까?”
“내가 입원시켰으니 가봐야죠.”
역시 진정으로 날 걱정하는 게 맞는 건가. 이사님은 항상 날 헷갈리게만 했다. 그의 의미 모를 다정함은 내 마음을 쥐고 뒤흔들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니까 자꾸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건 모두 그의 탓이었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였는데, 왜 이사님이 왔던 걸 몰랐을까. 하필 쿨쿨 자고 있을 때 그가 왔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의사와 간호사가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깨달았지만 나는…… 날 걱정하는 이사님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날 생각해 주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그는 날 밀어내려 애쓰는데. 정말 이 마음을 들켰다간 큰일 나겠구나 싶었다.
“손등에 반창고는 뭡니까. 이리 내봐요.”
“아, 멍이 들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내 손을 가져갔다. 그는 반창고를 반 떼어내 손등의 상태를 확인했다. 보지 못하게 가리고 싶었지만 함부로 손을 잡아 뺄 수 없었다. 그래서 꼭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멍 빼는 연고 발랐습니다. 금방 사라질 겁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은 기분이었다. 역시 보기 싫었구나.
“반창고 몇 개 더 받아 왔습니다. 잘 가리고 다니겠습니다.”
“더운데 뭐 하러. 가릴 필요 없어요.”
“그래도 보기 흉하실 것 같아서요.”
“흉하다고 한 적 없습니다.”
이사님의 표정이 흐려진 것 같았으나 나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는 어제처럼 내 손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곧 반쯤 떼어진 반창고를 마저 떼고는 데스크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 이따 잠시 AG 본사에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병가 처리하겠다고 한 거 못 들었습니까.”
“그렇지만 어제 거기에 차를 그대로 두고 왔습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차 키를 꺼내 보였다.
“이리 줘요. 기사 시켜서 가져다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문 전무님께 어제 일 인사도 해야 하고…….”
그는 내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가더니 곧장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딥니까. 올라와서 키 받아가요. AG 본사 가서 차 한 대 가져와야겠습니다.”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짧게 용건만 말하고는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인사는 기사가 대신 하겠다는군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그는 네가 어쩔 것이냐,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언젠가와 비슷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마 이사님에게 손수건은 돌려주었느냐고 물어보면 천연덕스럽게 ‘그럼요’ 하고 대답할 게 분명했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이 문 전무에게 따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체념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는 맛이 어땠습니까.”
“네? 어…….”
“죽도 안 먹고 잤다고 해서 위에 부담 없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했는데. 제때 배달 갔을지 모르겠네. 잘 먹었어요?”
아침도 이사님이 준비해 주었구나. 말하는 것으로 보아 병원 밥도 아니고 어디 다른 곳에 직접 음식을 주문해 일찌감치 병원으로 보낸 것 같았다.
그럼 다 먹을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입맛이 없어 국이나 몇 번 떠먹고 그냥 나와 버렸는데, 내막을 알고 나니 이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사님의 눈치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
“……잘 먹었습니다.”
“안 먹었군요.”
하지만 그는 내 거짓말을 단번에 간파하고는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낮게 말했다. 소심하게 아니라고 중얼거렸지만 이사님은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밥도 먹지 않고 비실거리면서 걱정이나 끼치지 말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오늘 비서실 일정이 빠듯해서 제가 빠지면 다른 팀원들에게 폐가 될 겁니다.”
“아픈 서도운 씨 일 정도는 커버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
그래, 그것. 여기에 내가 없어도 아무 문제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날 너무 속상하게 만들었다. 나도 알고 있고 몸소 느끼고도 있지만, 이렇게 확인받게 될 때면 심장이 쿡쿡 찔렸다. 멀쩡하던 배도 갑자기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그걸 이사님의 입으로 직접 듣는 심정은 더 참담했다. 그도 역시 내가 일 면에서는 별로 쓸모없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하긴, 처음부터 잠자리 상대로 데려온 처지였지. 나는 이렇게 자꾸 내 위치를 망각하고 만다.
“그럼……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사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대뜸 이야기했다. 이사님의 걱정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내 감사함은 진실한 마음이었다.
“걱정해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저는, 다 나은 것 같아요.”
뒷말을 덧붙여 놓고는 살짝 후회했다. 어쩐지 이사님을 좋아하는 티를 내버린 것 같아서. 괜히 말했나 하며 그의 눈치를 봤지만, 그는 잠시 날 응시하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뒤돌아 문 앞까지 걸었다.
등 뒤에서는 사락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고, 거기에 더해진 내 발소리 외엔 주위가 조용했다. 문을 열기 직전, 나는 문고리를 쥐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뒤를 돌아보며 나는 또다시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사님께 유능한 사람이고 싶어요.”
데스크 옆에 서서 서류를 확인하던 이사님은 내 말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허공에서 잠시간 서로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에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보다 더 차갑게 내려앉은 것만 같은 그 눈매가 내 입을 다시 다물리게 했다.
나는 태연한 척하며 다시 묵례하고는 문을 열고 이사실을 빠져나왔다. 당연하게도 날 붙잡는 어떤 말도 없었다.
그대로 비서실로 돌아와 실장님께 보고했다. 실장님과 팀원들의 걱정 어린 말이 한마디씩 들려왔으나 애써 웃기만 하고, 머릿속으론 다른 생각뿐이었다.
‘꼭 말을 뱉어놓고 후회해.’
그래 봤자 고작 침대에서나 쓸모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우스웠을까.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다. 적어도 주말 동안 부끄러운 기분을 날려 보낼 수는 있겠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길로 회사를 빠져나왔다.
덥고 좁은 집은 내 가슴을 답답하게 옥죄어왔고, 그날도 끼니를 챙기지 못한 채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만 있었다.
* * *
우울했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금요일에 그렇게 일찍 돌아간 것이 역시 눈치 보여 나는 오늘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했다.
팀원들은 보통 아무리 일찍 와도 30분 정도 전에 도착하기에 나는 당연히 내가 제일 먼저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두가 출근해 있었다.
“일찍 왔네요?”
“네. 제가 제일 일찍 온 줄 알았는데.”
거기다 밖에 있는 소파에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나는 유리벽 밖을 힐끔대며 물었다.
“밖에 와 있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오늘 면접 볼 사람들이에요.”
“면접이요……?”
면접이라는 소리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설마 날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채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성 과장.”
과장님이 나에게 무어라 대답하려고 하는데, 대화를 막듯 한마디가 끼어들었다. 비서실 문을 열고 나타난 김 실장님이었다.
“도운 씨?”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왜 이렇게 일찍…….”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오늘 무슨 일 있나요? 어떤 면접이…….”
그러자 그는 어딘가 착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차장님은 실장님의 눈치를 보다 정리하던 서류를 파일에 끼워 건넸다. 실장님은 파일을 받아 들고 잠시 그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일단, 후우. 면접 준비부터 합시다.”
그 말에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일단 쉬고 있으라고 말하곤 나갔다. 나는 그렇게 회의실로 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에 내가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비서실에서 사람을 뽑는 큰일인데.
설마 정말 나 이대로 퇴사당하는 건가? 그래서 나 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건가?
“실장님.”
나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실장님을 붙들었다.
“오늘 어떤 면접이…… 급하게 잡혔나요? 제가 지난주에 일찍 돌아가느라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금요일에 급하게 모집한 건 맞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절 대신할 사람인가요? 그런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마터면 그 말이 대신 튀어나갈 뻔했다.
“이사님이 도운 씨가 아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벌써 알지 않았습니까.”
가방을 쥔 손이 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머리가 차게 식었다. 목구멍 안으로 쓴 사약이 부어진 것처럼 입 안도 까끌거렸다.
하지만 마침내 떨어진 대답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사예요. 운전기사 면접.”
실장님은 잠시간 뜸을 들이다 손끝으로 안경을 조금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원래 계시던 최 기사님이 금요일에 사고 나서 입원하셨습니다.”
사고? 그 이질적인 단어에 머리가 문장을 다 이해하기도 전 온몸으로 위화감이 덮쳐들었다.
“도운 씨가 몰았던 차 다시 가져오다 난 사고예요. 브레이크 고장이라고 합니다.”
이사님이 출근하기 전 면접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아무리 빨리 운전기사를 선발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루 이틀의 시간은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주말 동안은 실장님이 운전을 했다고 했는데, 이사님의 스케줄을 살피고 업무 보고도 하며 운전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장 오늘 오후부터 외부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나는 아무래도 내가 운전을 돕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사님과 실장님이 허락할지는 모르겠지만.
“…….”
이사님께 드릴 커피를 내리는데 정신이 자꾸만 멍해졌다.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빌린 차였고 내가 몰고 왔어야 할 차였다. 기사님이 나 때문에 나 대신 사고를 당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실장님께 전해 들은 바로는 다친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고 했다. 브레이크 고장으로 차를 멈추지 못하고 달리다 급히 핸들을 꺾고 전봇대를 들이박았다 하는데, 조수석 부분은 차가 찌그러진 수준이었으나 운전석 쪽은 긁히지도 않고 멀쩡했다고 한다.
기사님은 한쪽 다리에 금이 간 정도로 그쳤고 2, 3주 정도 쉬면 다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행자가 다치지도 않았고, 전봇대 파손도 크지 않아 주변 상가에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실장님은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피해가 크지 않았어도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애써 위를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주말 동안 회복됐다고 생각한 몸에 또다시 위화감이 감돌았다. 몸살에 걸린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꼭 내 죄를 잊지 말라는 것처럼 경고하듯 옥죄어왔다.
한숨이 폭폭 나왔다. 자동차와 연관된 사고. 그 어떤 일보다 나와, 내 가족과 밀접했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티 테이블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주말 동안 아픈 곳은 없었고요.”
“예.”
그는 내 움직임에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더니, 내가 나가지 않고 계속 옆에 서 있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오늘 기사님 면접 결과…… 내일 발표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그가 어쩐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길 바란다고 했었지.
“서도운 씨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저, 이야기 다 전해 들었습니다. 기사님 사고 나셨다고, 저 때문에…….”
“그게 왜 서도운 씨 때문입니까.”
신경 쓸 일이 많아 머리가 아픈지 이사님이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제가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그럼 서도운 씨가 대신 사고 당했겠죠.”
“그게 맞는 일 아닙니까.”
“네가 다치는 게?”
만년필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사님은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유능한 사람이고 싶다면서. 아프고 다치고 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과는 다른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가서 네가 대신 아파줄 거야?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자는 겁니까.”
날카롭게 스치는 말에는 틀린 부분 하나 없었다. 그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나 모르게 일을 진행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속 터지는 소리 하지 말고 본인 몸 회복에나 신경 쓰세요.”
“저는 다 나았습니다.”
“겉보기엔 전혀 안 그럽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오늘 이사님 외부 일정 운전 맡겠습니다.”
이사님은 날 응시하며 긴 한숨을 내쉬더니 시선을 다시 서류 파일로 옮겼다. 몇 장을 넘겨 대충 훑고는 사인한 뒤 덮고, 옆에 쌓인 다른 파일을 가져와 열었다.
“서도운 씨는 사무실에 있어요. 회복 덜 된 몸으로 외근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절대.”
차라리 내가 다쳤더라면 비서실은 내 빈자리쯤은 가볍게 메꾸어 일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이사님 또한 외부 일정을 소화하는 데 아무 차질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기사를 다치게 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사님과 팀원들의 업무에까지 차질을 입힌 것이다.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원흉이 전부 나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잠깐 눈을 꾹 눌러 감았다가 뜨는데, 문득 머릿속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수상한 사람…….’
외근을 나가기 전 주차장. 내가 타려던 차 앞에 누군가 분명 있었다. 내가 차 리모컨을 눌러 소리 나게 했을 때 조금 놀랐던가? 태연한 척했던가? 벌써 며칠이 지나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이질적인 상황인 듯했다.
이 더운 날 긴팔의 두툼한 점퍼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것도 같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이사님.”
분명 이상했다. 그날 차를 몰고 가는 길에 툭, 툭, 차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었다. 돌아와 보고하려고 했었는데, 그 또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지금 떠오른 이 모든 것을 이사님에게 전하려 했다. 그를 다시 부르자 내가 조르는 줄 안 모양인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 그게 아니라.”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실장님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사님, 본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정영일이 큼지막한 걸음걸이로 이사실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불청객이 있네.”
정영일의 낮은 목소리가 나에게 일직선으로 꽂혀들었다. 불청객은 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습관 좀 고치지그래. 직원들 보기 안 부끄러워?”
이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정영일은 그저 피식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앞의 소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사고가 났다길래 네가 너희 애비처럼 뒈진 줄 알았는데.”
딱히 누구를 특정 지어 가리키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바로 나였다. 이번 일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비수처럼 꽂혀든 문장에 어깨가 잘게 떨렸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모아 잡은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회사 내에서도 조용히 처리된 일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청영 일가의 사람이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인가.
“결국 다른 사람 다치게 했으니 부전자전인 건가?”
“서도운 씨, 이만 나가봐요.”
한숨과 함께 이사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 나와 날 지나쳐 정영일이 앉은 소파 옆에 섰다.
“회사야. 말 좀 가려 하지.”
“뭐야. 지금 저 새끼 두둔하는 거야?”
다리를 꼬고 앉은 정영일이 차갑게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두둔하는 거로 보여?”
그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정영일은 가지고 온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나도 커피 한잔 줘야지? 이거 상사 대접이 영.”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정영일의 말에 아차 싶어 아, 하고 탄식하자 이사님은 그럴 필요 없다고 나를 막았다. 나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만히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몰라 우물쭈물하다 결국 잰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일하러 왔으면 일 얘기나 하지?”
“우리 직원 사고 얘기가 일 얘기가 아니면 뭐야.”
정영일은 나 들으라는 듯 사고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이사님의 입에선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얼굴 반을 가리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낮게 경고했다.
“하아……. 회사 분위기 해치는 짓 그만해.”
“분위기를 해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순간, 정영일이 이사실을 나가려는 나에게 손을 뻗어 확 끌어당겼다.
“아……!”
손목을 붙잡은 강한 힘에 몸이 휙 돌려세워지다 못해 정영일의 앞으로 끌려갔다.
“이 새끼 아니야? 이름이 서도운. 그랬지.”
휘청이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지만 그의 무릎과 내 무릎이 닿아 있었다. 그는 내 몸을 위아래로 훑더니 내 명치께에 걸린 사원증을 보고 비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순식간에 심장이 벌렁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손길, 맞닿은 몸, 경멸하는 시선까지, 모두 끔찍했다. 전에 그가 내 다리 사이를 만졌을 때처럼 소름이 끼쳐 왔다.
“그 손 놔.”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이사님이 빠르게 다가와 날 잡아 떼어냈다. 거칠게 떨어진 몸이 이사님의 가슴팍에 반쯤 안겨들었다.
그러자 뒤에선 정영일의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표정을 보지 못해서 다행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사님은 그대로 내 팔을 잡고 손수 문 앞까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의 보폭을 간신히 따라갔다. 문이 열리고 내보내지기 직전.
“그 차, 네가 고장 낸 거 아니야?”
정영일의 말을 끝으로 문이 쾅 닫혔다.
“…….”
등 뒤로 쾅 소리가 몇 번이고 메아리친 것 같았다. 덩달아 정영일의 목소리도 함께 뇌리를 파고들었다.
절대 아니었다. 내가 차를 고장 내다니. 나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내가 탔던 차였다. 그리고 내가 다시 타고 올 차였고. 올 때 타지 못했던 건 정말 나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일 때문이었는데…….
“윽…….”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숨이 너무 가쁘게 쉬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사실 앞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듯 막았다.
정영일의 말은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럴듯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멀쩡하던 차가 내가 끌고 나간 이후에 갑자기 고장 나다니. 청영의 형제들은 내가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고……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이사님이 나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으려 한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인가?
“으, 욱…….”
나는 목 안에서 올라오는 역한 구토감에 빠르게 화장실로 뛰었다. 또 꼴사납게 변기를 붙들고 구토하기 시작했다.
아침도 먹지 않아 나오는 것이 없었지만 속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억지로 고개를 처박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묽은 위액을 뱉어냈다. 그제야 위통이 조금 가셨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아내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언제든지 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나한테…….’
억울한 마음도 동시에 차올랐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계속해서 생기는 걸까.
그 기나긴 의문의 끝은 누군가 나를 일부러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 * *
“회의는 여기서 정리하는 거로 하고, 도운 씨.”
“…….”
“서도운 씨.”
“네, 네?”
김 실장님이 재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노트북 자판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놓고 있던 나는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화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눈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정리 다 됐어요?”
“아, 네. 마무리만 조금 하면 됩니다.”
나는 문서 파일의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며 기록한 내용을 살폈다. 반쯤 집중 못 한 것치고는 다행히 빼먹은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한심함에 이가 다물렸다. 멍청아…….
“10분 내로 정리해서 태블릿에 옮겨둬요. 이사님 오찬 가시는 길에 확인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회의를 끝내는 실장님의 인사를 끝으로 비서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자리로 돌아와 회의 기록을 정리했다. 문장을 다듬고 회사 양식에 맞는 형태로 고친 뒤 이사님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파일로 제작했다.
옮겨 담은 태블릿을 들고 이사실 문을 흘긋거렸다. 아직 저 안에 정영일과 이사님이 함께 있었다. 다시 마주쳤다간 또 속이 울렁거릴까 봐 걱정되었다.
그리고 정영일이 이사님에게 내가 사고를 꾸민 게 아니냐며 이간질할까, 그게 걱정되기도 했다. 도무지 지금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마침내 문이 열리며 정영일이 나왔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비서실을 지나가며 나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사님과 닮은 진한 눈매로 비열한 웃음을 날렸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아까부터 짓씹던 입술에서 어쩐지 피 맛이 나는 것 같다.
정영일이 사라지고 난 뒤, 심호흡하고 이사실에 들어갔다.
그는 나갈 채비를 하며 재킷을 걸쳐 입고 있었다. 나는 살짝 묵례한 뒤 데스크 위로 출력한 서류와 태블릿을 함께 올려두었다.
“의전 계획 회의록입니다.”
“네.”
넥타이를 다시 당겨 조이는 이사님을 살짝 바라보다가,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가는 길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또 할 얘기 있어요?”
태블릿을 집어 든 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아까는 무리한 고집 부려서 죄송했습니다.”
“뭐가요.”
화면을 넘기며 살펴보던 이사님의 손이 잠깐 멈추며 시선이 짧게 나에게 닿았다.
“제가 운전하겠다고 해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음에 짐 덩어리가 있는 건 무엇보다도 싫었기에 나는 그에게 아까의 무례함을 사과했다. 내가 몰고 나간 차가 사고까지 난 마당에,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기 싫은 것은 당연했다.
‘서도운 씨한테 운전까지 맡긴 게…… 나한테 무슨 의미인지 몰랐나 봅니다.’
이사님은 확실히 그 말을 한 뒤로는 나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았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꾸 그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나였다.
주제넘어선 안 됐다. 말을 잘 듣기로 해놓고 계속 그런 무리한 부탁이나 하고. 아마 나는 그가 말하는 ‘선’을 골백번은 넘었을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서도운 씨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했을 뿐입니다.”
“네……. 배려 감사드려요.”
이사님은 날 배려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속이 꼬일 대로 꼬인 나는 올곧게 들을 수가 없었다. 차를 고장 낸 사람이 나든 아니든, 아버지한테서 그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 이사님. 오늘 밤에…….”
나는 그가 막 다리를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머뭇거리며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청담동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이사님의 오후 일정은 모두 외근이었다. 여기서 그를 보내면 오늘은 더 이상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할 얘기가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작정하고 이 일을 뒤집어씌우는 거라면, 그전에 구차한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내가 아니라고, 솔직히 난 그럴 위인도 되지 못한다고. 그가 믿을지 안 믿을지는 둘째 문제였다.
굳이 돌려 표현할 것 없이 베갯머리송사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니요.”
그는 내가 운전을 맡겠다고 졸랐을 때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은 서도운 씨 안 부를 겁니다.”
“왜, 왜…….”
“몸 회복부터 최우선으로 하세요. 검진 결과는 언제 나온답니까.”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나를 지나쳐 점점 멀어졌다. 문 앞에 다다르고 나서도 내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자 이사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잠자리 갖는 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사님.”
“시위하지 말고 가서 점심 들어요.”
“신장은, 처음 잘 때부터 없었…….”
“나도 그래서 후회하고 있으니까…… 더는 입씨름하게 하지 마요.”
그는 내 말을 중간에 가로막으며 낮게 경고하듯 말했다.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미안한 것인지, 아니면 아픈 사람을 건드렸다는 불편한 감정인지 모르겠다. 후자에 가까울 것 같아 씁쓸함에 입술을 물었다.
그는 이제 문을 열 것이라는 듯 문고리를 붙잡고는 턱짓했다. 그 행동에 나는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 붙었다.
이사님을 뒤따라 이사실에서 나오자 실장님이 대기하고 있었다. 실장님의 안내로 떠나려는 그에게 인사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평소에는 아무 의식 없이 의례적으로 하던 인사말이었는데, 그 말이 이렇게나 무거운 의미를 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 *
다행히 금방 모집할 수 있었던 운전기사는 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덕분에 이사님의 외부 일정은 어떤 차질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문제는 나였다.
사업도 잘 진행되고 있고, 연구도 큰 성과를 보이고 있고. 모든 게 물 흐르듯 순조로운 상황에서 나만이 문제였다.
어쩐지 막 입사했을 때보다 실수를 더 많이 하는 기분이었다. 일에 잘 집중하지 못해 혼나는 일도 생기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처음엔 이사님이 날 안아주지 않고, 내 말도 들어주지 않고, 정영일에겐 온갖 수모를 당한 것이 분해 그러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일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다.
이사님이 날 다시 안을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 체중이라도 증가시키려 했다. 음식이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 먹었는데, 그도 오래가지 못하고 전부 게워냈다. 몇 번 그걸 반복하고 나니 정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어차피 게워낼 걸 알아서 그런지 목구멍으로 아무것도 넘어가질 않았다.
오늘도 간신히 출근하긴 했으나 몸에 기운이 없었다. 기껏 일찍 출근했는데 업무 시작 시간까지 책상에 엎드려만 있었다.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려고 샷을 세 개 넣어 만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씁쓸하고 차가운 물이 안으로 들어오자 어쩐지 배 속이 더 요동치는 듯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
업무 메일을 확인해 보는데,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는 곳에서 메일이 와 있었다. 본부장실이었다.
메일을 클릭하기 직전까지 마우스에 얹은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으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이번에 건설될 복합 문화 타운에 청영 물산의 새 생필품 마트를 입점시키는 건에 대해 논의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정말 일과 관련된 메일이었다.
혹여나 메일에 나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쓰여 있을까 조마조마했던 것이 확 풀렸다. 그런 내용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의문스러운 점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차장님께 물어보았다.
“차장님. 아직 CY 타운 착공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나요?”
출력한 메일을 보여주며 묻자 역시 약간은 의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엔 직접 브랜드 디자인에 나서려는 것 같다며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본부장님은 그냥…… 웬만하면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는 게 나아요. 괜히 청영 사람들 건드렸다간.”
차장님은 손끝으로 목을 짧게 긋는 시늉을 반복하셨다.
“우리 이사님이 좋은 분이지, 아주.”
“그럼…… 오전 중으로 만나뵙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이사님은 1시에나 돌아오실 테니까 그전에 대강 얘기해 보고 이사님한테 곧장 올려요.”
그래서 나는 정영일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회의를 해보자며 답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빠르게 진행된 일에 곧장 관련 자료와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이사님께 미리 보고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되었다. 역시 그의 형이니까.
본부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정영일이 몸을 만지던 게 떠올랐고, 내려서 본부장실에 가까워지자 뺨을 맞았던 순간의 당혹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결국 나는 잠시간 화장실에서 찬물을 끼얹어 세수하고 나서야 본부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본부장실은 화려했다. 그 내부로 들어가기 전부터 빼곡히 전시된 미술품이나, 그 미술품을 올려둔 탁자의 골드 프레임 같은 것들이 눈부실 정도였다. 과시성이 다분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가자 거의 이사실과 맞먹는 크기의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정영일은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굴었다.
그는 내 뒤의 비서에게 손짓해 나가보라고 한 뒤, 꼬았던 다리를 풀며 등받이에 기댔던 몸도 똑바로 세웠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CY 타운 담당 서도운…….”
“다 아는 사이에 소개는 무슨.”
그는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어색한 걸음걸이로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일인용 소파에 앉은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은 마음에 측면에 있는 긴 소파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내 속셈을 아는 것인지 정영일은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는 모멸감이 들진 않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서류 파일을 밀어놓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번 부산 타운에서 가장 처음으로 선보일 자체 브랜드인데, 미국의 생필품 마트를 벤치마킹한…….”
그러자 그도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예상과 다르게 정말 착실하게 사업 이야기만을 하는 것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가 건넨 파일도 훑어보니 꽤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가 본부장에 취임하고 손대는 첫 사업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체계적으로 준비한 흔적이 엿보였다.
“수도권이 아닌 부산에서 처음으로 론칭하는 것엔 리스크가 많이 따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이점을 주자는 거야. 그리고 부산도 서울 못지않은 대도시인데. 지금 무시하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영일은 내가 당황하는 것을 즐긴다는 듯 낄낄 웃었다.
“지역 특성화 제품들로 그 정도 리스크는 메울 수 있겠지.”
“그……럼 매장 구조가 특이한데, 이 부분은 건설 측과 다시 얘기를.”
“그 정도는 리모델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서도운 씨.”
“네…….”
나는 괜한 토를 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결정은 이사님께서 하시는 거니까 잘 정리해서 보고 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역시 초짜 티가 나네.”
정영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말에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서툴러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니.
때마침 밖에서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정영일의 대답에 안으로 들어온 그는 내가 마실 차를 준비해 왔다며 내 앞에 잔을 내려놓아 주었다.
“큰 사업 맡아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지.”
나는 비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작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난 뒤 대답했다.
“네.”
“원래 같으면 내가 할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꼭 내가 그의 일을 뺏어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인가? 그가 복귀하면서 원래는 이 일을 맡을 생각이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사님의 자리로 갈 생각이었다는 뜻인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는 사이 비서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셔, 독 안 탔으니까.”
안 그래도 입술이 바짝 마르던 참이었다. 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레몬티의 향긋한 맛이 느껴졌다. 꿀이 들었는지 달았고, 긴장도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너 말이야.”
정영일은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돈이 급하다면서, 호텔에는 안 왔던데.”
“네?”
나는 그의 영문 모를 소리에 바보처럼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잔을 입에서 뗀 정영일은 입꼬리에 비열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됐나?”
“…….”
“이래서 무식한 깡패 새끼들은, 쯧.”
정영일은 다시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거만한 몸짓, 말투. 모두 날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뜻을 머리가 해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그 말씀…….”
얼마 전 깡패가 집에 쳐들어왔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갚아야 하는 돈을 안 준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내 정신까지 뒤흔들었던 그날.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그 일 때문에 치르려고 했던 제사도 온전히 치르지 못했다. 그날 걷어차인 배가 아직까지 아렸고, 이리저리 더듬어진 몸은 오물에 빠졌던 것처럼 아무리 씻어도 불쾌함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걸 본부장님이…….”
믿기 힘들었다. 그런 일을 시킨 게 이 사람이라니. 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잔을 다시 테이블로 내렸다. 하마터면 잔을 엎을 뻔했다.
“본부장님이 부르신 거였습니까.”
나에게 어떤 모멸감을 주려는가 싶더니…….
“호텔로 오라고, 그 깡패한테 시킨 게 본부장님이셨느냐고요.”
“어려운 일 아니잖아. 너 원래 그 깡패한테 일 받아서 몸 팔고 다니는 남창이라며.”
주먹이 쥐어졌다. 손등에 핏줄과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남창 주제에 사람 가려?”
정영일은 가슴에 돌을 던지듯 비웃음을 날렸다. 정영일이 설마 정말 나와 잠을 자려고 불렀을까.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다고 들었다.
바람 빠지듯 짧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제 그런 일 안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난 이사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여기도 정해일한테 뒤 대주고 들어온 거겠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내 동생이지만 참…… 알 수가 없어.”
정영일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허리가 숙여지면서 내 쪽으로 살짝 가까워진 것뿐이었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거리고 말았다.
겁먹은 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비웃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역시 일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었다. 아무 꿍꿍이도 없이 대뜸 날 부를 리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다.
“그래서 지금 그 말씀을 여기서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왜. 일터라고 또 부끄러운가 보지?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건 따로 있으면서.”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자동차 고장 냈잖아.”
정영일은 그 사고가 무척 가벼운 이슈거리라도 된다는 양 툭 던지듯이 말했다. 날 조롱하기 위해 사고를 가벼이 여기는 것도, 내가 그런 게 아닌데도 확신에 차 말하는 것도 모두 화가 났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아닙니다. 왜 제가 고장 냈다고 생각하십니까.”
“해일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거짓말. 저건 거짓말이다. 이사님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었다. 증거도 없이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리 없었다.
“이간질하지 말아 주십시오.”
거짓말이어야만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심호흡했다. 정영일 앞에선 계속해서 숨이 가빠졌다.
“이간질? 정 이사 내 동생이야. 너 따위가 뭐라고 이간질을 시켜.”
“제가 고장 낼 이유도 없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해하시면.”
“오해라니.”
정영일은 꼭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정말 일부러 누군가 고장 낸 거라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제가 그날 차에 다른 수상한 사람이 붙어 있는 걸 똑똑히 봤습니다. 주차장 CCTV나 다른 차 블랙박스에 분명 찍혀 있을 겁니다.”
“확인해 봤어?”
“확인은 안 해봤지만 분명…….”
“CCTV는 고장이 났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내가 중얼거리듯 되묻자 정영일은 여유롭게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고장이 ‘났다’는 것도 아니고, ‘났을 것 같다’니.
“블랙박스도 웬일인지 작동이 안 되고.”
그는 또다시 넌지시 말했다.
의도가 있는 말이었다. 불확실함을 가장하여,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사실을 담고 있었다.
나는 입 안으로 삼켰어야만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본부장님이 고장 내셨다는 말로 들립니다.”
내뱉고 나자 이상하게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CCTV를? 아니면.”
“…….”
“차를?”
정영일의 말에 나는 숨을 확 들이켰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게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상체 또한 나와 무척이나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움찔, 몸을 떨었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노트북부터 닫았다. 그리고 챙겨왔던 서류들을 허둥지둥 정리해 끌어모았다. 노트북 위에 다급히 서류를 얹어 챙기려 했다.
하지만 서둘러 일어나려는 나의 손목을 정영일이 턱, 하고 잡았다.
“지금 나 의심한 거냐고 물은 건데. 이 정도 눈치는 없나.”
“놔주십시오.”
“가서 정 이사한테 고자질이라도 하려고?”
역시 나의 얕은 속셈 정도는 전부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의미이든, 나는 곧장 이사님께 보고를 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그게 성급한 생각이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정영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입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CCTV를, 아니 차를 고장 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가 직접 한 말도 모호한 문장일 뿐이었다.
“똑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너도 그 깡패랑 별반 다를 게 없네.”
그리고 정영일은 이사님의 가족이다. 내가 하는 말은 그저 ‘자신의 형을 의심하라’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는 더더욱. 오히려 내가 멀쩡한 형제 사이에 끼어 둘을 이간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멍청한 줄 알았으면 몇 번씩 꼬아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는 중얼거렸다. 커피를 모두 비웠는지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령 내가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 갖다 댄다 하더라도 이사님이 내 편을 들어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 같았다. 나에게 뒤집어씌우기만 하면, 그래서 나만 없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 있을 테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 발화자가 나라는 것에서 아마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과거 아버지의 일, 여기저기 더럽게 구르다 그의 도움으로 겨우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내 처지, 그리고 몇 번이나 그를 속이고 기만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들어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에게 몸을 파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그날 절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나는 이제 진심으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사고를 뒤집어씌우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사고로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꼭 목이 서서히 조여오는 것 같다. 나를 향한 이 사람의 분노가 이렇게 거셀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너무 얕본 것이다. 가벼이 여겼다. 이사님이 나를 배려하고 다정히 여겨준 만큼.
“글쎄.”
영문을 모르겠다. 정영일이 왜 날 불렀고, 왜 이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인지.
“궁금하면 다시 와야겠지?”
나는 아버지의 죄업으로 느끼던 일말의 억울함도 모두 날려버렸다. 그리고 홀린 듯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고 묻고 말았다.
정영일은 나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얇은 카드 키도 한 장 건넸다. 이사님과 자주 만남을 가지던 그 호텔이어서 절로 입술이 다물렸다.
모든 게 정영일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걸 느끼고 있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날 떠미는 물살에 휩쓸리듯 그렇게 따랐다.
가겠다는 내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짐을 챙겨 일어나자 정영일도 일어섰다. 그는 문으로 걸어 나가려는 나를 따라왔다.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서 비서.”
“……최종적으론 이사님의 허가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 동생 너무 괴롭히진 마라. 안 그래도 약혼 문제로 정신없을 텐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날 지나쳐 몇 발짝 더 빠르게 걸었다.
익숙하지 못한 단어에 멈칫하듯 내 발걸음이 느려지자 정영일은 보란 듯이 문을 직접 열어주며 바깥으로 고갯짓했다.
“형 노릇 한번 해보네.”
약혼……이라고?
나는 한 번도 그런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사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비서팀에서 그의 약혼 얘기는 한 번도 돈 적이 없었단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약혼이라니……. 나는 그런 큰일이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
“장 비서, 사람 불러서 내부 청소 한 번 해.”
정영일이 던지듯 뱉은 말에 나는 문밖으로 툭 내쫓겼다. 나는 그제야 멍해졌던 정신을 갈무리하듯 발을 바삐 움직여 본부장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몸과 정신은 다시 현실의 끈을 놓은 듯 풀어졌다.
나는 힘없이 버튼을 누르고 한쪽 벽에 몸을 기대 간신히 섰다. 노트북을 쥐고 있는 양손에서 자꾸만 힘이 빠지려고 한다.
‘약혼.’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지. 그의 약혼이 내가 이렇게 정신을 빼놓을 일이던가. 이사님은 언젠가 당연하게도 결혼을 할 텐데.
그걸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갑작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내부가 미세하게 울렸다. 매번 이런 식으로 이사님에게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고 만다. 그가 베푼 호의 한 톨에 멋대로 선을 훌쩍 넘어 주제도 모르고 기대하다가, 또 이렇게.
바보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자신이 한심해 고개를 푹 숙였다.
자리로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면서도 손은 슬쩍 포털 사이트를 검색했다. 청영과 관련한 최근 기사는 부산에 신설할 타운이나 신약 개발 사업 이야기뿐, 어디에도 이사님의 약혼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사내 인트라넷에도 지라시 한 줄이 없었다.
비서실 사람들도 모를 정도로 이렇게 비밀스럽게 진행되다니. 아니, 아마 김 실장님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약혼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사님은 아마 이런 일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아 조용히 진행하길 바란 것 같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하아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전혀 예상도 못 했던 사실을 정영일의 입으로 듣게 되다니.
“도운 씨, 점심 먹으러 가요.”
“아, 저는 오늘 속이 안 좋아서…….”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지 대리님이 날 불렀지만 지금은 입맛이 없었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는 사람들을 보냈다.
정적이 찾아온 비서실에서 나는 비로소 인터넷 창을 끄고 일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서를 만드는 와중에도 한숨은 끊이지 않았다.
아직은 이사님이 좋았기 때문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그와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에게 이리저리 굴려지다가 언젠가 회사에서 내쳐질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이사님이 약혼이나 결혼을 한다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날 청담동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하신 것도 설마…….’
그렇게 생각하자 손이 멈췄다.
약혼 때문에 그랬던 거라면…… 모두 말이 된다. 그가 정말 내가 아픈 것 때문에 섹스하지 않겠다고 한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뭐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그냥 핑계이고, 약혼 준비 때문에 바쁘다거나, 아니면 그 상대를 만나는 거겠지.
어쩐지. 요새 그가 내 몸엔 손도 잘 대지 않았다. 이전엔 이사실로 불러내 온몸을 희롱하더니, 이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뚝 끊겼다. 역시 다 이유가 있는 거였구나.
“…….”
나는 입술을 깨물며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허공을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다잡자 흘러내리진 않았다. 일에 온전히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러기 정말 힘들었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