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6/29)

  2.

“복부 통증이나 허리 통증은 계속 있으신 거고요.”

“네.”

내 단조로운 대답에 의사는 눈썹을 팔자로 휘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사 결과가 나온다기에 병원을 찾았건만, 그리 상태가 좋지 못한지 의사의 말투나 표정은 처음부터 안쓰러운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상태가 나쁜 수준이든 당장 죽을 지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냥 빨리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차피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건 분명했으니.

스스로도 몸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치료를 위해 따라붙을 병원비가 얼마나 막막할지도. 그래서 이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차분했다.

“위는 어떠세요. 계속 쓰리신가요?”

“명치 쪽이 쓰라리고, 전보다 토를 더 자주 하는 것 같고…….”

어제도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 중간에 화장실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부드러운 죽 종류로 간신히 속을 달래가며 먹으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면 위에서 잘 받아들이질 못했다. 스트레스성인 것 같았다.

의사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가며 내 몸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쯤은 흘려들었다.

“당장 검사에서 심각하게 나오지 않는다 해도 신장병은 급성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신장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셔서…….”

의사는 넌지시, 하지만 반복해서 이식 수술을 언급했다. 미리 절차를 찾아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투석은 완치될 확률도 높지 못하다며. 네, 하고 흘리듯 대답하긴 했으나 수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신다니, 소견서 써드릴 테니까 결과지랑 같이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만 나가보셔도 좋다며 간호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밖으로 나와 잠시 수납을 기다리는 사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통화 목록에 들어가자 계속 연결에 실패한 번호가 눈에 띈다. 매번 날 닦달하고 괴롭히던 깡패와 요즘은 연락이 닿질 않고 있었다.

일이 바쁜 것인지, 아니면 정영일이 뭐라 언질을 준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깡패뿐이었는데. 그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 나는 이번 달 빚이 빠져나가는 통장을 비워두었다.

CCTV는 법적 문제로 개인이 확인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당시 주차장에 있던 차량이 어떤 것인지 조회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 고장 난 것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내 힘으로는 지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 몸뚱이 하나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수납을 하며 소견서도 함께 받았으나, 이사님이 연계해 준 병원에 전달해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애써 안주머니에 구겨 넣으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나는 병원에 다시 오지 않기로 다짐했다.

* * *

오늘 하늘엔 아침부터 먹구름이 꼈다.

여름 더위는 서서히 가시고 있었고, 그에 박차를 가하려는지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다. 해가 떴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구름이었다.

우산을 챙겨 나오긴 했지만 다행히 출근길엔 비가 쏟아지지 않았다.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습한 공기가 얼굴 솜털 위로 내려앉았을 뿐이다.

회사 건물로 들어오자 에어컨 바람이 살짝 차갑게 느껴졌다. 해가 가려 그런지 오늘은 평소보다 추웠다. 그래도 습하지 않다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비서실로 올라와 제습기를 켜고, 일을 시작하기 전 책상을 정리했다. 책상 한편에는 아직 결재를 올리지 못한 서류가 쌓여 있었다.

이사님은 요즘 출근도 늦었고, 일찍 퇴근하기도 했다. 아예 출근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비서실 팀원들도 드문 일이라며 입을 모아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 이유는 아마 약혼 준비 때문이겠지. 어디에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러게요’ 하고 대답하며 속으로 울컥하는 감정을 삼켰다.

오전에 타운 기획 회의를 진행하고 난 뒤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됐다.

4시가 넘었는데 이사님은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출근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가 검토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아마 이 서류도 오늘 확인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였으나, 미리 파일로 만들어두어 나쁠 것 하나 없었기에 나는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미리 한 부를 뽑아 오탈자가 있는지 확인한 뒤 다시 프린트했다. 복합기 옆에 쪼그려 앉아 방금 만들어온 따뜻한 녹차를 홀짝이며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앉아서 뭐 해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출근한 건지, 복사실 문 앞에 이사님이 서 있었다.

“이, 이사님. 앗.”

급히 몸을 일으킨 바람에 컵이 출렁거리며 손을 확 적셨다. 뜨거운 온도에 놀라 내가 한 손을 탈탈 털자 그가 성큼성큼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데었습니까?”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그는 곧장 내 손을 감쌌다. 화상을 입은 정도는 아니었다. 살짝 화끈거렸을 뿐이다. 거기다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끼얹어진 물의 온도가 빠르게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이사님은 손수건을 살짝 걷었다. 그가 안 보는 사이에 멍이 다 빠졌던 손등엔 이제 약하게 붉은 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는 그 위를 가만히 매만졌다.

“찬물에라도 대고 있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내 손을 쥔 그의 손을 살며시 밀어냈다. 센 힘이 아니었는데도 스르륵 밀려나가 마침내 떨어졌다.

감사하다고 중얼거렸지만 이사님은 말이 없었다. 등 뒤로 복합기가 계속해서 웅웅 우는 소리만 들렸다.

“뭘 그렇게 많이 뽑는 거예요.”

짧은 정적 끝에 그가 물었다. 어? 나도 이상함을 느끼고 복합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프린트 매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장을 뽑아야 했는데, 뭘 잘못 누른 것인지 멋대로 오백 장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취소 버튼을 연타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의 그가 웃는 것 같았다.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종이를 꺼내보자 족히 마흔 장은 뽑혀 있었다. 중간에 멈추길 천만다행이었다. 정신 놓고 이걸 전부 뽑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서도운 씨가 비서실 비품 다 축내는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이사님에게 변명하듯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복사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도 새빨개졌다.

결국 종이 뭉텅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서른다섯 장은 혼자 야금야금 이면지로 써야 하나 고민하다 나중에 파쇄기에 넣기로 하고, 우선 뽑힌 것들을 파일로 묶어 제목을 붙였다.

하필이면 비서실에 아무도 없어 실장님 다음으로 바로 내가 보고하러 들어가야만 했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들어오라는 이사님의 대답이 들리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이사님, 기획팀 3차 회의 정리했습니다.”

가장 급한 일부터 올렸다. 이사님은 재킷을 벗어 근처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자리에 돌아와 바로 파일을 열었다.

“요즘 바빠서 통 신경을 못 썼더니. 언제 3차 회의까지 진행했습니까.”

“3차는 오늘 오전에 진행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몸도 좋지 않은데.”

두 번째 장까지 훑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 병원 검사 결과는 나왔습니까.”

“결과가 나오긴 했는데…….”

“근데 왜 말을 안 해.”

이사님은 팔을 뻗어 데스크 위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뽑았다. 서류 위로 체크 표시를 해가며 간단히 메모하는 듯 보였다.

“이사님께서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조금.”

“아무리 바빠도 서도운 씨 병원 같이 갈 시간이 없겠습니까.”

그는 무심한 것 같은 말투로 다정한 말을 건넸다. 나는 또다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무 감정 없으면서 그렇게 다정하면 어떡해요.’

이상하게 목 안으로 울컥이는 감정이 차올랐다. 요즘 그를 자주 못 보기도 했고, 정영일이나 깡패와 관련한 일로 혼자 백방으로 알아보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는데, 이렇게 내 상태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 그가 유일했기 때문인지…….

“결과는요.”

“그냥…… 특별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아직 큰 병으로 발전하지 않았을 뿐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언제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다.

“못 믿겠는데. 조만간 같이 가보죠.”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이사님. 혼자 갈 수 있어요. 애도 아니고…….”

말을 흐렸다. 그의 관심이 누구보다 고팠지만, 또 막상 관심을 보여주니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괜히 손끝을 문질러가며 그의 눈치를 봤다.

“이거 뭡니까.”

서류를 확인하던 그는 어느 대목에서 펜을 탁 찍었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보자 정영일과 회의한 내용이 들어 있는 문단이었다.

“얼마 전에 정 본부장님께서 호출하셔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획팀과 회의를…….”

“정영일을 혼자 만나고 왔단 말입니까, 지금?”

“네.”

그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 맥없는 대답을 듣자마자 그에게선 낮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너무 곧바로 대답한 게 아닌가 싶어 말을 덧붙였다.

“사업 개요만 설명 받고, 다른 이야기는 없으셨습니다. 본부장님 비서도 동석했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검토는 해보겠는데, 다음부터 그런 호출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고해요.”

“네.”

이사님은 파일을 닫고 만년필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핸드폰 알람을 잠깐 확인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기사 호출하겠습니다.”

“직접 운전해서 갈 겁니다. 서도운 씨, 내일 시간 내요. 병원 가보게.”

걸어두었던 재킷을 다시 꺼내 팔을 꿰어 넣으며 그가 말했다. 내일은…….

“죄송하지만 다음 주는 어려우십니까. 아니면 혼자 가도 괜찮습니다.”

내일은 정영일이 나를 부른 날이었다. 밤에 오라고 했기에 병원에 갔다가 갈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혹시나 꼬리가 길어 밟힐 것이 걱정되었다.

“그럼 다음 주에 같이 가죠.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혼자 보내기엔 영…… 불안해서.”

이사님은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넥타이를 매만지던 그가 시선을 내려 나를 살짝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짙은 회색빛의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홀린 듯 물었다.

“오늘도 청담동에 가면 안 됩니까.”

“당분간은 안 부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키스해 주시면 안 됩니까.”

“회사에서 답지 않게.”

그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혹시 돈 필요해요?”

“아닙, 아닙니다, 그런 게…….”

“그럼. 아파서 어리광이 늘었습니까.”

“…….”

“본인 입으로 애 아니라고 하더니.”

꼭 날 탓하는 것만 같아 고개가 숙여졌다. 이사님은 곧 손을 뻗어 가볍게 내 턱을 쥐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막 입술이 부딪히기 직전, 이사님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버튼을 눌러 소리를 꺼버리고는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타이밍이 참……. 나는 어색해진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너한테 이렇게 약해져서 문제야. 안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는 꼭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는 듯 말했다. 키스하려고 했던 게 후회되는 건가……? 울렁거리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그를 올려다보자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씩 웃고는 그대로 이사실을 나갔다. 적어도 다음에 하자느니 그런 얘기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그는 이제 정말 나와 그런 걸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젠 사랑을 나눌 상대는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혼자 남은 이사실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나왔다. 얼굴도 모르는 이사님의 약혼자를 부러워하며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가슴에선 비가 내렸다.

* * *

나는 그날 저녁, 혼자 사무실에 남아 두어 시간 정도 초과 근무를 했다.

퇴근하기 직전에 내릴 듯 말 듯 하던 비가 기어코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오길 잘 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땐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빗방울이 바람에 흩날려 옷과 바지 밑단을 적셨다. 높은 언덕길도 평소보다 미끄러워 다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서둘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더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했다.

“…….”

집 근처에 몇 번 보았던 차가 세워져 있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렸기에 각오를 다지고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당겨 열었다.

현관에 우산을 접어 내려놓으며 절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구둣발 모양의 흙탕물이 집 안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찍 좀 다녀라.”

방 한가운데에서 담배를 피우던 깡패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없는 걸 보면 오래 기다리진 않은 듯한데. 괜한 생색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일찍 다니든 늦게 다니든 무슨 상관이에요.”

“싸가지가 없네.”

남자는 손끝으로 내 이마를 꾹 눌러 밀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휘청거렸다. 그를 노려보자 꼭 때리려는 듯이 손바닥을 쳐든다.

“손대지 마요.”

시험해 보듯 말을 던졌다.

“정영일 본부장님이 다친 얼굴을 싫어하실 것 같은데.”

“……뭐야, 너.”

그는 내 말에 얼이 빠진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입술 끝에 매달린 담배를 바닥에 휙 던지고는 구두로 밟아 불을 꺼버렸다.

“거기 붙기로 했어?”

“그쪽은 언제부터 붙었는데요.”

“하, 이 새끼 봐라.”

말이 툭 튀어나갔다.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돈은 일부러 안 넣었어요. 내 연락을 안 받길래.”

“붙기로 했냐니까. 가서 대줬어?”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온통 더러운 내용뿐이었다. 직접적으로 날 희롱했을 때보다 더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쪽이…… 정영일이랑 얽혀 있을 줄 몰랐어요.”

나는 주먹을 꾸욱 쥐며 짓씹듯 말했다.

“내가 청영에 들어간 걸 알면서도 왜 말을 안 했어요?”

“왜 해야 하는데.”

남자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자기 집처럼 태연하게 굴며 내 말을 받아치는 꼴이 아주 끔찍했다.

“그러고 보니 그 집이랑 얽힌 세월이 족히 15년은 가까이 되네.”

“……청영이 왜 당신 같은 깡패랑 엮여 있는지 모르겠네요.”

“정확히 말하면 그 집 첫째 아들의 더러운 짓은, 우리가 다 해결해 주지.”

구체적으로 정영일의 뒤를 봐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정영일이 어떤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뒤가 더럽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했던 짓만 떠올려 봐도 깨끗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것도…… 다 정영일이 시킨 짓이에요?”

내가 그냥 돈을 갚지 않아서 괴롭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글쎄. 난 돈을 주면 뭐든 하고, 음. 돈을 안 줘도 뭐든 하지.”

전자는 돈을 주고 자길 부리는 걸 말하는 것 같았고, 후자는 나처럼 빚을 갚지 않는 사람에게 뭐든 해서라도 받아낸다는 의미 같았다.

울컥, 목 안으로 울음이 찼다. 돈 때문에 서러운 적은 많았어도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부들거리는 몸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허공을 보며 심호흡하는데 진정이 되지 않았다. 숨을 내리누르느라 말이 뚝뚝 끊어졌다.

“나…… 몸 팔게 만든 것도…… 혹시 정영일 짓이에요?”

“그건 네놈이 돈을 못 갚을 것 같으니까 시킨 건데.”

“정말이에요? 정영일이 시킨 게 아니라?”

“질문 진짜 많네.”

분노에 찬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남자는 다리를 꼬며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금세 불이 붙은 끄트머리에서 불쾌한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정영일이 날 죽이려고 하던데요.”

“아, 큭큭. 앞으론 정부 짓 하면서 잘 빌붙어 살아봐.”

그는 선심 써 조언을 건넨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날 죽이려고 한다는 말에 아무 동요도 없는 남자. 정영일의 더러운 짓을 해결해 준다던 놈의 말.

“네가 마음에 들면 앞으론 잘 끼고 살 수도 있잖아.”

“……설마 내 차 고장 낸 게 당신…….”

“다 아네?”

“……!”

경악해 굳어진 내 얼굴과 다르게 남자는 씨익,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난 이만 간다’며 나를 지나쳐 걸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매캐한 연기가 남아 눈이 따가웠다.

“무슨 일인지 얘기하고 가요!”

“돈이나 제때 갚아라. 이번만 봐준다.”

“더러운 일이라는 게 차를 고장 내는 일이었어요?!”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지만 그는 유유히 이 집을 빠져나가려고만 했다.

“15년 가까이 맡아온 더러운 일이라는 게, 고작 차를…….”

나는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에 말을 우뚝 멈췄다. 남자를 따라 나가려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십여 년 전, 더 정확하게는 13년 전에 아버지의 사고가 있었다. 교통사고. 그때 사고의 원인이 뭐였더라……? 운전 미숙? 차량 결함? 여러 가지가 섞여 있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 사고가 갑자기 왜 떠올랐지?’

정신 없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고 되짚어가며 꼬인 사건의 결론을 내리려 애썼다. 사고와 정영일. 고장과 깡패. 돈, 배상, 사채, 아버지…….

절로 눈이 질끈 감기고, 관자놀이가 아프게 욱신거리던 그 때.

“너 그래서 내가 진작에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어?”

문밖으로 나가려던 깡패가 흘긋 뒤를 돌아보며 넌지시 말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남자의 음성에 고개를 들고,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까지 말리지 못한 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본 게 아니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느라.

‘너 청영 거기 조심해라. 내가 오래 본 정이 있어서 충고하는 거야. 알겠냐?’

언젠가 저 깡패가 했던 그 말을 떠올리고 나서…… 나는 곧장 그를 뒤따라 나갔다.

“거기서!”

밖은 좀 전보다 더 거센 빗줄기가 퍼붓듯 쏟아지고 있었다. 크게 소리쳤음에도 빗소리가 너무나도 커 내 목소리는 순식간에 빗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나와 막 차에 타려는 남자를 불러 세웠다. 집에서 차까지의 그 잠깐 동안 순식간에 온몸이 젖어들었다. 발걸음이 무겁다. 나를 땅으로 끌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팔을 붙잡혀 서둘러 차에 타려는 계획에 실패한 남자의 몸도 빗줄기에 푹 젖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요.”

“이 새끼가 진짜.”

“똑바로 얘기해! 내 아버지 일도 당신이 꾸민 짓이야?”

악을 쓰며 소리쳤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와 내 목소리까지 섞여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거센 빗줄기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시팔, 돌았어?”

“아윽!”

그는 차마 날 때리진 못하고 어깨를 퍽 밀쳤다. 강한 힘에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빗물이 흐르는 흙바닥에 몸이 뒹굴었다. 부딪힌 엉덩이와 팔꿈치가 아프게 쓰라렸다.

젠장. 그는 다시 욕을 지껄이며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손으로 훔쳐 닦아냈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비 때문에 순식간에 다시 젖어들어 물방울이 턱으로 흘렀다. 포기한 듯 하아, 한숨을 쉬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너희 가족은 그렇게 약아빠지질 못해서 어차피 못 이겨. 알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네가 돈이 있어? 힘이 있길 해? 씨팔,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으면서 무슨 게임이 된다고. 어? 기왕 대주기로 한 거 고개 숙이고 가서 아양이나 떨어. 너는 잘못 덤비면 죽어! 진짜 그 새끼 손에 뒤진다고!”

빗소리가 너무 컸다.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이 갑자기 친 천둥소리와 섞여 어깨가 움찔 떨릴 정도로 겁이 났다.

나는 땅을 손으로 짚었다. 물살이 손가락 사이를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비에 무겁게 젖은 몸을 끙끙대며 일으켰다.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중얼거리는 소리가 상대에겐 닿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는 ‘뭐?’ 하고 소리쳤다.

“나 어차피 죽을 각오 했다고요! 그러니까 얘기해!”

나는 무슨 힘이 난 것인지 깡패의 몸을 확 밀었다. 무겁게 밀쳐진 몸이 차체에 퍽 부딪혔다. 그의 앞을 가로막듯 서서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때 아버지 차를 고장 낸 것도, 그걸 아버지 잘못으로 꾸민 것도…… 그래서 내가 이런 시궁창에 빠져 사는 것도 다 정영일이 시켜서 한 일이냐고!”

마지막으로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악에 받친 내 절규 끝엔 다시 빗소리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회장님을 누구보다 존경하던 아버지. 서로의 신뢰 관계는 돈독했고, 함부로 깨어질 수준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회장님을 모셔 청영을 이끄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정말 그뿐이었다. 어린 나도 알고 있었을 정도로.

그런 아버지가 일부러 회장님을 차에 태우고 사고를 냈다니. 청영 측이 주장했던 대로 아버지가 돈이나 회사를 목적으로 회장님을 죽이려 했다면, 자신도 차에 타는 무모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빗방울에 섞여 순식간에 흘러내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턱이 떨려왔다.

“그렇다면.”

쏴아아, 한참을 쏟아지던 빗소리를 뚫고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

“그럼 어쩔 건데.”

“당신……!”

“누가 네 말을 들어줄 것 같은데, 증거도 없는 주제에.”

“…….”

그 말에 남자의 옷자락을 잡았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그도 느꼈는지 내 손을 탁 쳐냈고, 힘없이 밑으로 떨어진 손엔 얼얼한 통증이 맴돌았다.

“같은 배 탄 줄 알고 신났더니, 정말 주제도 모르는 애새끼였네.”

허망함. 아주 강한 무력감이 내 등을 찔러왔다.

증거가 없는 나는 다시 원점이었다.

내 허탈한 표정을 본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며 내 손이 닿았던 옷자락을 탁탁 털어냈다. 그 끝에서 빗방울이 튀었다.

그는 이내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빗속을 뚫고 차를 몰아 저 멀리 사라졌다.

나는 차의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마침내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시선을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눈을 파고들며 아프게 찔렀다. 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흙탕물이 흐르는 삶의 밑바닥에서 내뱉은 질문은 날 향한 것이 아니었다.

‘왜…….’

왜. 나는 이제 정영일이 왜 그랬는지 알아야만 했다.

* * *

빗물에 푹 절인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밤사이 끙끙 앓던 나는 온몸이 불구덩이가 된 채로 깨어났다. 이미 시간은 오후,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직도 바깥엔 비가 내리고 있는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거셌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애써 몸을 일으킨 나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몸에 힘이 없었다. 열도 나고 목도 아프고. 깡패에게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배 속이 욱신거렸다.

맥을 못 추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다가, 흘긋 확인한 시간이 오후 4시를 알리고 있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정영일. 그가 고지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몸에 힘이 없어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씻기 위해 욕실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스스로의 꼴도 우습기 그지없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 서서 뜨거운 몸을 식히며 오랫동안 느릿하게 씻었다. 머릿속에 잡생각이 가득 들어차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씻기를 마무리하고 나왔다.

빗물에 젖어버린 옷은 그대로 세탁기에 처박아 두었다. 입사할 때 마트에서 샀던 싸구려 정장이라 막 다뤄도 된다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려니 속이 쓰렸다. 이사님이 선물로 주신 옷이었다.

“이걸 입고 가게 되네.”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사준 옷을 입고, 그의 형을 대면하러 가야 한다니.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의 호텔로 불려가는 것이었다.

멍하니 옷을 갖춰 입으며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영일이 사주했다고는 하나 깡패도 공범일진데,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의 빚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여태껏 날 오해한 이사님에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

정영일이 일을 꾸민 이유를 알게 되고 나선 또 어떻게? 증거는 또 어디서. 이런 끝도 없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 멱살을 쥐고 흔들다 못해 목을 세게 조이는 것 같았다.

“…….”

거울 속의 나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깡패에게 처음 일을 받아 호텔로 갈 준비를 하던 그 날처럼.

값싼 폴리에스터 넥타이는 세탁기에 처박혀 있고, 지금 넥타이는 이사님께 받은 것으로, 실크 재질이다. 하지만 뱀이 목을 감싸는 기분은 여전히 같았다.

넥타이의 매듭을 쥐고 평소보다 조금 더, 조금 더 끌어올렸다. 크읍. 살짝 목이 졸리자 숨이 막힌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끌어내렸다.

‘무슨 짓을…….’

고개를 휘휘 저었다. 거울 속으로 보이기만 하던 헛것이 이젠 실제 행동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밥을 차려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아 가만히 앉아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늦지 않게 집을 나섰다.

비에 젖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호텔에 왔건만, 역시 완벽히 비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어깨 부분에 물방울이 맺혔다. 우산을 접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재질이 좋아 그런지 어제 입었던 옷처럼 푹 젖지는 않았다.

정영일에게서 받은 카드키를 꾹 쥐었다가 손 안에서 굴리기를 반복하며 초조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며 로비를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이제는 이 엘리베이터 사용에도 익숙해졌다.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 불이 들어오면 층수를 누르면 됐다. 번호를 누르는 손이 너무 떨려 카드키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약속한 시각에서 조금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딱 맞춰 방문 앞에 도착했다. 손에 땀이 배도록 쥐고 있던 카드키를 문에 가져다 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사님한테는 또 거짓말을 하나 만드는구나.

내가 이사님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매번 이렇게 그를 속이고 거짓말하는데 날 믿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절대 들켜선 안 됐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이번만은 절대.

굳은 다짐 후 눈을 떴다. 그리고 문을 당겨 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내부 속 이질적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던 정영일은 내 기척을 느끼곤 들고 있던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정장이 뭐냐.”

취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친근한 척하는 말투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옷차림으로 이런 대화를 나눌 사이였던가.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몸살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몸이 다시금 열을 뿜기 시작했다.

“한잔할래?”

“괜찮습니다.”

“가까이 좀 와.”

그의 명령에 현관 근처에 뿌리를 내리려 한 발이 조금 움직였다. 그가 있는 소파 근처로 다가가자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평소에 어떻게 하는지 좀 리드해 봐.”

“……뭘 말씀입니까.”

“남창 짓.”

시작부터 모욕적 언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정말 정영일이 그 짓거리에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이미 결혼한 남자인데다 완전한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는데.

“시간 끌지 말고 벗어봐.”

“정말 그거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그럼 남창을 다른 일 때문에 부를까?”

그는 킬킬 웃으며 잔에 와인을 얕게 따랐다. 옆엔 양주병과 각진 잔이 있는 걸 보니 이미 양주도 마셔 많이 취한 상태인 것 같았다.

“저는 다른 말씀 드리려고 온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온전히 따르기를 거부했다. 어떤 욕이 쏟아질지, 아니, 욕보다 더한 폭력이 쏟아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와인 병이 쿵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졌다. 거칠고 낮은 정영일의 목소리가 족쇄처럼 내 발목을 옭아맸다.

“묻는 거.”

“…….”

“시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어?”

그는 테이블 위로 팔을 휘둘렀다. 테이블에 있던 모든 술병과 잔들이 바닥으로 휙 쓸려가며 쨍그랑 깨지는 소리를 냈다.

어깨가 움찔 떨렸다. 돌발적인 행동에 나도 모르게 한쪽 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몸을 일으킨 그가 내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허리가 숙여지며 그의 얼굴과 내 얼굴이 가까이 맞닿았다. 짙은 그늘이 진 날카로운 눈매. 피할 수도 없이 마주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버지고 정해일이고 사람들이고, 다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응?”

“……놔주세요.”

어깨와 팔이 얼얼할 정도로 땅겼다. 거기다 정영일이 쥔 팔뚝은 얼마나 힘을 세게 쥐고 있는지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나는 차마 다른 손으로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넌 뭐가 궁금해. 말해봐.”

가까이 맞붙은 얼굴에 숨을 편히 쉴 수 없었다. 숨을 헉 들이켜고 간헐적으로 내쉬기를 반복했다.

억지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찰나, 정영일이 내 팔 위로 손끝을 세워 누르며 대답을 종용했다. 손톱이 파고드는 것처럼 아릿한 감각이 팔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금니를 다물었다. 취해서 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절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는데, 역시 본능 수준에서 오는 공포감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내가 알아갈 건 반드시 물어야 했다.

“제 아버지 사고와 본부장님이 연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최대한 차분함을 가장하고 물었다. 이는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친 것과 같은 양의 에너지를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

정영일은 짧게 웃더니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드디어 놓아주는 건가……. 찰나의 순간 안심하기 무섭게, 어깨가 퍽 밀쳐졌다. 나는 바로 뒤에 놓인 소파로 반쯤 앉듯 눕혀지고 말았다.

“너도 역시 그놈 아들이네.”

“무슨 뜻입니까.”

“옛날부터 이 눈빛이 참 싫었지.”

정영일은 내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내 몸 양옆으로 자신의 팔을 대며 몸을 지탱해 섰다. 그의 차가운 그림자가 내 몸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머리 위로 날카로운 말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붙어서 찌꺼기나 갉아먹고 사는 주제에, 그렇게 살쾡이 같은 눈을 하고 노려보는 게.”

“그래서 저희 아버지를 죽이셨습니까.”

“…….”

“저희 아버지가…… 무슨 악의를 가지고 회사를 무너뜨리려거나, 갈취하려고 하신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이 있었든지 전부 오해일 겁니다.”

해명하고 있자니 울컥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가빠지는 숨을 애써 고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차라리 그냥 내치지 그러셨습니까. 어떻게 죽음으로 몰고 가십니까. 그 차에 회장님도 계시지 않았습니까.”

“서도운.”

“윽…….”

정영일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채를 잡아 뒤로 당겼다. 두피가 얼얼할 정도로 세게 당겨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내 머리 위에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서 실장을…… 서명현을 죽이려고 한 것 같았어?”

갑자기 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왔다.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단번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기도 전에 정영일은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옴짝달싹 못 하도록 허벅지 위를 무릎으로 꾹 내리눌렀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그의 무게에 눌려 결박된 것 같은 이 위압감이 두려웠다.

“기분 잡치는 소리 그만하고 하려던 거나 마저 해.”

“안, 안 할 겁니다. 아……!”

내가 그의 허벅지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뺨으로 손이 날아왔다. 벼락이 치듯 커다란 마찰음을 내고는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눈앞이 점멸되다시피 했다. 뺨뿐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꺾인 고개가 뻐근할 정도로 고통을 호소했다.

정영일의 엄지가 잇새로 들어오며 억지로 입을 잡아 벌리려 했다. 나는 도리질로 그의 손을 피했다.

“……저는 이런 짓 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남창이 호텔에 몸 팔러 오지 뭘 하러 와. 아, 화대 먼저야? 어?”

“아닙, 윽, 흑!”

돈을 찾으려는지 잠시 몸이 떨어진 사이에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바닥에 두 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머리채가 잡혔다. 아프도록 붙잡고 이리저리 몸을 뒤흔들다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쿵 찧었다. 통증에 아파할 새도 없이 다시 머리채가 붙잡혀 상체가 일으켜졌다.

“비싸게 구네.”

몸이 뒤흔들려서인지, 아니면 머리를 박아서 그런 것인지…… 아까부터 울렁이던 감각이 더더욱 거세졌다.

관자놀이가 칼로 찌른 듯이 아팠고 목으로 신물이 넘어오는 느낌. 익숙해지기 싫었던 불쾌한 감각.

정영일이 자신의 바지춤을 풀어 내리며 내 얼굴을 다리 사이로 가까이 하려고 했을 때였다.

“욱, 으으…….”

명치가 아프게 조여온다 싶더니 어김없이 나는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그가 욕을 지껄였지만 귓가에 잘 와 닿지도 않았다.

먹은 것이 아예 없어서인지 씁쓸한 위액과 타액만 쏟아냈다. 쉽게 그치지 않고 몇 번 더 속이 울렁였다.

“우욱…….”

“씨발, 가지가지 해. 어?”

한참 만에 간신히 구토가 멎자 혼미했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았다. 정영일의 옷과 몸에 토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재차 욕을 지껄였다.

“가서 씻어.”

맞은 뺨이 아프게 부어오른 것 같았다. 입술을 움직이는데 감각이 조금 둔했다.

“할 맛 떨어지게 구네.”

내가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 정영일이 억지로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그의 힘에 이끌려 유리 조각이 흩어진 바닥을 지나쳐 그대로 욕실로 밀어 넣어졌다.

등 뒤로 문이 텅 닫혔다. 넓은 욕실 안에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애써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만 바라보며 세면대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분명 볼품없을 것이다. 뺨을 맞고, 울먹거리고, 꼴사납게 구토를 한 자신의 상태가.

세면대의 물을 세게 틀어놓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소매나 가슴팍이 젖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물을 퍼다 얼굴을 닦았다.

더러운 손가락이 들어왔던 입을 닦고, 포장된 칫솔을 뜯어 양치질도 마쳤다.

하지만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씻고 있는 사람처럼 계속 물을 틀어놓고, 욕실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물소리가 어제의 거센 빗소리처럼 들렸다.

젖은 얼굴을 팔뚝에 문질러 닦았다. 세수한 물인지 눈물인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눈가가 발개질 정도로. 억지로 눈물을 집어넣듯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기까지 했다.

정말 다 포기해 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망가진 삶, 온전치 못한 몸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 하나만 사라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 같았다. 멀쩡하던 톱니바퀴 사이에 낀 이물질이 된 듯했다. 내가 남의 삶에까지 오물을 묻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영일이 어떤 짓을 저질렀든 내 힘으로 증거를 찾을 수나 있을까. 이사님의 혈육인 그를 내가 모함하는 꼴이 되진 않을까. 그냥 내가 평생 이렇게 떠안고 살다 떠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의지가 수그러드는 것 같다. 왜 이걸 찾아보려 했는지 그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도 흐려진 기분이었다.

정말 포기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선 찰나였다.

등 뒤에서 벌컥,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사님.”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정영일이 아닌…….

“…….”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이사님이었다.

“이사님, 이사님!”

여러 개로 갈라지는 복도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저 앞서 걸어가는 이사님을 간신히 발견해 소리쳤다. 몇 번이나 그를 불렀음에도 그는 한 번 뒤를 돌아보거나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그에게 따라붙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또 놓칠 수는 없었다.

욕실에서 나를 발견한 이사님의 표정은 정말, 다시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고요했다. 꼭 태풍의 눈처럼, 그것은 내가 본 그 어떤 감정보다 무서웠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고요하고 깊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더니, 그저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그대로 뒤를 돌았다.

차라리 날 향한 비웃음 혹은 경멸 어린 눈빛을 날린다든가, 아니면 화라도 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럼 그런 그를 붙잡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사님은 해명 한 줄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뒤를 돌아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그를 곧장 뒤따랐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어째서 이사님이 여기 와 있는지,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정영일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영일의 모략이었다. 그가 연락해 불러낸 뒤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여준 게 분명했다.

내 몸을 취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자신과 내가 그런 관계를 가지려고 한다는 걸 이사님에게 말하려고 한 것이었다.

‘나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깨버리려고.’

그래서 순순히 속셈을 다 얘기한 거야. 어차피 이 모습을 보고 난 뒤면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 없을 테니까.

“이사님!”

나는 뒤늦게 그를 쫓아 나갔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그를 찾아 차가 있을 곳으로 향하자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불러서가 아니라, 차 앞에 도착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뛰어 이사님에게 따라붙었다.

“이, 이사님. 잠시……만요.”

뒤집힌 배 속을 움켜쥐고 달려 속이 말이 아니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자, 그를 부르는 짧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이 매섭게 쳐내졌다.

“제 얘기 한 번만 들어주세요.”

지금 이 상황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해할 만한 상황을 일부러 연출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했다.

“서도운 씨한테서 들을 얘기 없습니다.”

“오해예요, 전부 오해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포기할까 했는데, 이사님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 해명하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믿어달라 애원하고 싶었다.

이사님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차 문을 당겨 열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이번엔 거세게 떼어내지 않았다. 올려다본 그의 턱에 옅게 근육이 섰다. 인내하듯, 뭔가를 눌러 참아내듯 잠시 숨을 내쉬더니 다른 손으로 내 손을 천천히 밀어내었다.

“출근하면서 우리 썼던 계약서 가져오세요.”

“……이사님.”

“이렇게 파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말을 잃었다. 우리를 이 관계로 만든 계약을 파기하자고 하다니.

“병원 대신 온 게 여기라니.”

“…….”

“지치네요, 이제.”

지친다고 말하는 이사님의 목소리엔 정말 힘이 없었다. 나 때문에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날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알고, 그런 나를 그가 수도 없이 봐주고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말 이번은 달랐다. 그럴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었고, 그런 상황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하필 욕실에 들어간 타이밍이었지만 옷도 모두 입고 있지 않았던가.

“서도운 씨 때문에 내 형을 싫어하게 만들더니. 이젠 뒤에서 둘이 만나 나를 물 먹입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려고 만난 게 아니라 알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만해요.”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날 저지했다. 이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포기하는 듯 벌어졌던 입술이 다시 일자로 다물렸다.

허무하게 끊겨버린 대화가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오해를 풀고자 여기에 온 것이지 오해를 쌓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아닌데.

눈물이 눈앞을 흐리게 만들었다.

꼴사납게 훌쩍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내 훌쩍임에 그가 날 돌아보았다. 한심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눈물로라도 그의 시선을 얻었다는 게 좋았다.

이사님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날 다른 곳으로 밀어버리고 떠나려는 것만 같았다. 도리질 치며 그의 옷소매를 꾹 붙들었다. 발에 힘을 주며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다.

“흐, 싫어요, 으윽…….”

울음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싫다고 중얼거리자 그가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입 다물고 타요.”

그러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밀어 넣었다. 날 버리고 가버리려는 게 아니라 차에 태웠다.

이사님이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에 오를 때까지 어리둥절하게 그만 쳐다보고 있다가, 안전벨트를 매라는 경고에 허둥대며 벨트를 끌어당겨 채웠다.

그러기가 무섭게 차는 출발했다. 급작스러운 출발로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윽, 작게 소리 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을 계속했다.

나는 벨트를 손에 꾹 쥐었다. 어느새 눈물은 뚝 그쳤다. 볼에 눈물 자국은 그대로 매단 채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의 옆모습만 흘긋대며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차가 도착한 곳은 그의 청담동 집이었다.

이전에 딱 한 번 와봤을 뿐이지만 주변 풍경이 익숙했다. 두 번째라고 이젠 길마저 외워버릴 것 같았다.

문을 열어주는 이사님을 뒤따라 들어가자 집 안엔 빛 한 줄기 없이 어둠만 존재하고 있었다. 공기도 서늘했다. 깨끗이 청소된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었으나 어두워 발을 헛디딜 것만 같아 벽을 손으로 짚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서도운 씨 눈물로 시선 집중시킬 수 없어서 데리고 온 겁니다.”

그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더니 낮은 테이블의 조명등을 켰다. 조도가 낮은 주황빛 전등이었으나 실내가 워낙 어두워 그마저도 밝게 느껴졌다.

“할 얘기 있으면 지금 해요.”

허락을 내리듯 짧게 말했다. 그러고는 테이블 옆 서랍에서 가죽으로 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라이터를 열고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섰다.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할 말이 정말 많았는데, 아직 잘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할 말 없으면 돌아가라’고 나를 내쫓을 것만 같아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일 치르기 전에 내가 들어간 게 아니고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말.”

“언제부터 만났어요?”

이사님은 내가 문 전무와의 일 때처럼 그의 형을 꾸준히 만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튀어나가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어졌다.

“이전에 안 만났습니다. 처음이에요. 모, 몸을 팔 생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요.”

또 오해할까 급하게 덧붙였으나 이사님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담배 연기만 그의 주변에 희미하게 퍼져 나갔다.

“본부장님이 억지로 하려고 하셨지만, 정말 제 의지랑은 관계없었습니다.”

“…….”

“……절대 제가 꼬시거나 한 게 아닙니다.”

말을 하는 중간, 이사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미간이 좁혀들며 흘긋 노려보는 시선에 나는 또 변명하듯 말을 붙이고 말았다.

이런 태도로 굴었다간 정말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더 못 믿을 것 같았다. 바로 본론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옷자락을 만지작댔다.

“확신이 필요해서…… 만난 거예요.”

막상 입을 떼려니 잘 나오질 않았다. 손끝으로 옷을 쥐었다 힘을 빼기를 반복하고, 또 이로 아랫입술을 꾹꾹 물다가 아주 천천히, 간신히 운을 뗐다.

“과거 회장님과 저희 아버지 사고에, 정영일 본부장님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는지, 단어를 잘못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그걸 전부 고려할 정신이 없이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사고를 낸 게…… 본부장님이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는 나른하게 팔을 뻗어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허리를 폈다. 마치 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사고를 낸 건 서도운 씨 아버지겠죠.”

“아, 아니…… 그…… 물론 운전은 아버지가 하셨지만,”

“지금 내 형을 모함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란 소리예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것부터 쉽지 않을 거라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다짜고짜 말부터 밀어붙인 것이라 뭐라 말해야 이사님이 내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다.

“본부장님이 사고를 사주한, 그, 차를 고장 내라고 다른 사람한테 사주해서…….”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회장님과 아버지가 탈 차를 일부러 고장 낸 거예요. 본부장님이 그렇게 만든 거고 그래서 두 분이 사고가 난 겁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세게 힘이 들어간 손이 긴장으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 서도운 씨가 하는 말이 나한테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알죠.”

“예상은…… 했습니다.”

고작 이 얘기를 하는데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 덩달아 가빠진 것 같았다.

“내 형이 왜. 무슨 이유로.”

“처음엔 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회장님을 목적으로 한 사고 같았어요.”

“정영일이 그걸 시인하던가요.”

“……시인은 아니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말은 했습니다.”

그는 손끝에 매달린 담배를 재떨이에 완전히 지져 불을 꺼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입에 대지 않고 있더니……. 아직 길게 남은 담배 가운데가 툭 부러졌다.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서도운 씨를…… 어떡하면 됩니까.”

그는 무척이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주길 바랍니까.”

“…….”

“또 병신처럼 믿고 넘어가?”

“……믿어주세요. 믿어주세요, 이사님.”

“내 형이 내 아버질 죽였다는 이야기를요?”

그는 등을 완전히 소파에 기대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젖혔다. 피로가 누적된 듯 보였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만 들어도 그러했다.

“차라리 둘이 잤다는 말이 덜 화가 날 것 같네.”

나라고 그를 피곤하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편하게 하진 못할지언정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 존재가 이사님에게 거슬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을 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증거를 들이미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뜩이나 아픈 서도운 씨한테 약한 걸 알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언제까지 휘둘려야 해. 내 형을 모욕하는 일에도 서도운 씨를 믿어줘야 해요?”

“…….”

“난……. 이제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면 대체 나한테서 뭘 얻어내려고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거짓말 아닙니다.”

이사님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속에선 악에 받쳤지만 흘러나가는 목소리는 힘없기 그지없었다.

“뭘 얻어내려는 것도…… 아니고요.”

이제껏 겪어온 일이 너무 많았고, 그 모든 것이 날 무기력하게 했다. 해명을 하면서도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믿어달라고 하면서도 차라리 그냥 믿지 말았으면 했다. 이사님이 피로를 느끼는 만큼 나도 그랬다.

“더 듣고 있기…… 피곤하네요.”

“가보라는 말씀입니까.”

이사님은 말없이 팔을 들어 손등으로 눈가를 가리듯 눌렀다. 나는 물러서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서서 말했다.

“제가 사채를 쓴 조폭이, 과거부터 본부장님과 알고 지내면서 뒷일을 봐줬다고 했습니다. 본부장님은 그 사람을 시켜서 차를 고장 냈고 그래서 사고가 났고…….”

그가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이젠 상관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제가 타고 나갔던 차가 고장 났던 것도 본부장님이 지시하신 일이에요.”

내 할 말이라도 속 시원하게 하고,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전해야겠다 싶었다. 차라리 정영일과 잔 게 덜 화날 정도라고 하니 이사님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뭐 하자는 거예요, 지금.”

“…….”

“나한텐 서도운 씨가 그냥 다 가져다 붙이는 것으로밖엔 안 보입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증거는 제가 어떻게든 찾아낼 겁니다.”

“어떻게 찾을 건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와 붙었다.

“멍청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누명 쓰고 억울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이사님의 눈이 이채를 띠며 물었다. 무거운 시선이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말단까지 심장 박동이 느껴지고 떨렸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깨가 무거워졌다. 겨울에 이사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간절함이 닿았으면 좋겠다.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고.

“제가…….”

제가 이사님을 좋아하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혀 위에서 맴돌다 꾸역꾸역 안으로 삼켜졌다.

* * *

주말이 평소보다 이르게 흘러간 기분이었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사람을 수소문하기 바빴다. 하루 만에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 허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출근 준비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그와 나눠 가졌던 계약서를 챙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만, 아직은 가지고 있기로 했다. 계약을 파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과 날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얼마나 혼이 날지 예상해 보았다. 그래도 설마 회사에서 때리지는 않겠지 싶었다. 아니 차라리 혼을 내면 다행이지, 아예 날 무시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회사로 가는 길에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속으로 ‘괜찮아’를 끝없이 중얼거렸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외근 나갈 때 이용할 차를 예약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차 앞에 서 있던 그 수상한 사람이 차를 고장 낸 것이겠지. 그걸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예약 신청 명단에서 미리 내 이름을 확인한 뒤 내가 빌리기 직전에 차를 고장 낸 것이 아닐까. 나는 보란 듯이 신청을 마쳤다. 내일 반차를 쓰든 해서 차 근처에 잠복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운 씨.”

“네.”

실장님의 부름에 달려가 팀원들과 지시사항을 몇 가지 전해 들었다. 월요일마다 하는 주간 일정 확인 시간이었다. 저번에 회의한 대로 내일 이사님은 잠시 수원 공장에 다녀오신다고 한다. 오늘 공장 측에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전해주기로 했다.

“오후엔 개인 일정이 있으셔서 아마 수원에서 곧장 퇴근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태연히 대답하면서도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갔다. 약혼 때문이겠지. 약혼자를 만나거나, 약혼 준비를 하거나.

접어야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에 확신이 섰으니, 이사님을 좋아하면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알고 있는데 쉽게 접을 수 없어서 문제였다.

“이제 일합시다.”

실장님은 손뼉을 가볍게 치며 팀원들을 흩어지게 했다. 어쩐지 실장님은 이사님의 약혼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자리에 돌아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 남몰래 한숨까지 내쉬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팀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내려간 사이, 나는 편의점에서 레토르트 죽을 하나 사 들고 돌아왔다.

일반식을 먹으면 분명 게워낼 것 같아서. 부드러운 죽을 먹으면 그나마 속이 덜 아팠다. 간이 세지도 않고 목으로 쉽게 넘길 수 있고, 빨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탕비실 전자레인지에 죽을 돌려 따뜻하게 데웠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에 동봉된 수저로 살살 떠먹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죽은 바닥을 보였다. 적당한 포만감이었다.

나는 뻐근한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어제도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돌아왔고, 출근 준비를 하느라 일찌감치 일어났더니 눈이 뻑뻑하게 아플 정도였다. 제대로 따지면 토요일부터 잠을 자지 못한 셈이다.

구두를 벗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일에도 집중하기 어려웠고, 잠깐 일어나기라도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딱 20분만 눈 붙여야지. 핸드폰으로 알람을 설정해 두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팔을 베개 삼아 웅크리고 누웠다. 눈을 감자 창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 것 같았다.

‘만약 모든 오해가 풀리면.’

나는 그런 가정을 세우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하루 편하게 쉬고 싶었다. 피아노도 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손이 굳었을 것 같다.

회사는 그만두게 될까? 계약도 절로 파기되게 될까? 형은 나에게 미안해할까……?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모든 걸 포기하기 직전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오해가 풀리고 나면 오히려 허탈해서 정말 처음 각오했던 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물어물 잠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잠에 얕게 빠져 있느라 이게 사람의 기척이 맞는지 아닌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참 만에 팀원 중 한 명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을 뿐이다.

기척이 사라졌나 싶을 정도로 고요해졌기에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려 했다. 바로 그때.

“……!”

눈가에 무언가 닿는 기분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졸음이 붙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이사님과 그가 뻗은 손이었다.

“이, 이사님.”

삐비빅, 내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며 그를 부르는 순간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새 20분이 흘렀던 모양이다. 둘 사이를 가르며 시끄럽게 우는 것을 서둘러 잡아 끄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는 내게 뻗었던 손을 거두며 허리를 바로 했다. 실장님 말로는 오후 늦게나 올 거라고 했는데 왜 벌써 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아…….”

나는 급히 구두를 다시 신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 옆에 서서 손을 가지런히 모은 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어색한 정적은 계속되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내가 누워 있던 소파와 테이블 위를 훑었다. 빈 죽 그릇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같았다. 흘긋거리며 그가 화났는지 눈치를 보았다. ……더 볼 것도 없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팀원들이 자주 쉬는 곳이라 너무 편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다른 손님이 지나가다 언뜻 볼 수도 있는 탕비실에서 이렇게 꼴사납게 누워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어리석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쓰레기를 주워 들어 분리수거 통에 버렸다. 몸을 바삐 움직이는 동안 나에게서 그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도운 씨.”

“네.”

“……아프면 휴게실 가서 쉬세요.”

그는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하듯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했다. 말을 끝마치고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꼭 그 말을 한 걸 후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또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이런 모습을 보여서 그가 또 마음이 약해 휘둘렸다고.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슬픈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내가 도대체 그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해도 다 내 탓 같아서.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잠시 쉬려고 그런 겁니다. 죄송합니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으면 되었다. 나는 최대한 멀쩡한 사람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점심도 제대로 안 먹고 이 좁은 소파에서 웅크려 자는 게 아픈 사람이 아닙니까. 늦게 복귀해도 되니까 휴게실 가서 눈 붙여요. 아니면 오후 반차 쓰든가,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정말 괜찮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여전히 이사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왜 나는 항상 이사님을 화나게만 하는 걸까. 매일같이 반성해도 그때뿐이고 매번 이렇게 또 잘못한 일이 생기니 나 같아도 쉽게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사님, 저…….”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그의 등 뒤로 비서실 팀원들이 등장했다.

“이사님, 지금 오셨습니까.”

식사하고 돌아온 팀원들은 이사님을 보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장님이 식사는 하셨느냐 묻는데,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1시네요. 밀린 결재부터 합시다. 김 실장, 서도운 씨 조퇴시켜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일하겠습니다. 내일 AG와 회의가 있어서, 오늘 결재해 주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지금 하죠.”

그는 짧게 이야기한 뒤 곧장 이사실로 들어갔다. 나도 사람들을 헤치고 서둘러 자리에서 서류 파일을 챙긴 뒤 그를 따라 들어갔다.

* * *

다음 날.

오전 반차를 써놓고는 아침 일찍부터 회사에 도착했다.

“후우…….”

한 번 심호흡한 뒤, 내가 대여하기로 한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숨어들었다. 그 차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여기서 무작정 내 차로 다가오는 사람을 붙들 작정이었다. 남들이 보면 우습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었다. 과거의 일을 파헤칠 힘은 없으니,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누군가 내 차를 망가뜨리는 걸 본다면 충격 받을 것 같았고, 잡으려다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것보다도, 이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애써 고개를 저으며 불안감을 떨치려 했다. 정영일이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어도 괜히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닐 것이다. 나한테 이야기한 이상, 끝장을 보려고 할 것이다. 분명 한 번은 더 시도할 것이다.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내일도 아니라면 그다음. 나는 계속해서 이를 추적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만 떨자. 불안감에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나는 그렇게 매캐한 연기가 쌓인 지하 주차장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 것에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한쪽 볼을 그 위에 댄 자세로 한숨을 폭폭 쉬었다.

‘이게 웬 바보 같은 짓이야.’

시간을 확인하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곧 이사님이 수원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어제 이사님에게 오늘 이렇게 저렇게 해서 범인을 잡아볼 것이라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말 안 하길 잘했다 싶었다. 이렇게 한심하게 허탕을 치다니, 분명 날 비웃고 내 말은 더 믿지 않게 될 것이다.

“하아.”

나는 무릎에 올린 손 위로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정말 아니라면, 정영일은 왜 나한테 자신이 사고를 냈다는 식으로 얘기한 걸까.

‘내가 ……을 죽이려고 한 것 같았어?’

그 말뜻은 대체 뭐였을까.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면, 그냥 다치게만 하려고 했다는 걸까. 그건 더 우습지 않은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는 걸 조절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배가 쓰라렸다. 나는 배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다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서 실장을…… 서명현을 죽이려고 한 것 같았어?’

완전한 문장이 떠오르자, ‘어……?’ 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지가 아니라 본능이 몸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뭔가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말이 꼭,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아버지를 오해해서 죽이려 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오해는 둘째 치고, 정말 말 그대로 아버지를 죽이려 한 게 아닌 것 같다. 확실히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은 정영일이 전 회장님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는 의미가 되었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오지 않아 계단으로 뛰었다. 다리가 아플 정도로 내달리며 순식간에 층계를 올랐다.

‘확신해도 될까.’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이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인 것일까. 내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방금 내 기다림과 마찬가지로 허탕을 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걱정으로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12시가 되기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중간에 잠깐 멈춰 숨을 몰아쉬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뛰었다.

‘정말 확신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했다가 이사님에게 어떤 창피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설령 허탕을 치는 것이어도 괜찮았다. 수 없는 물음 끝에 나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정영일의 목적은 내 사고가 아니라 이사님이 사고를 당하는 것이라고.

정영일은 분명 내 아버지가 아니라 회장님을 노린 것이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 이전의 차 사고를 떠올려 보면, 그날 AG 회의는 나와 이사님이 함께 가기로 처음에 계획되어 있었다.

중반에 갑자기 나 혼자 가기로 변경되었고, 그래서 사원용 차를 빌렸던 것이다. 그 예약 목록만 보고 나와 그가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착각한 정영일이 애먼 내 차만 고장 냈다. 그래서 실패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그리고 그 실패를 겪은 정영일은 두 번 다시 실패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사님의 차가 보관되는 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비상구를 벌컥 열었다.

조용한 주차장에 멀리까지 문 열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나는 가쁜 숨을 갈무리하며 애써 평범함을 가장한 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세워져 있는 이사님의 차로 터벅, 터벅. 정말 평범한 직원이 평범하게 차를 준비시키러 온 것처럼.

“……!”

찾았다.

전과 비슷한, 두툼한 점퍼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사님의 차 보닛을 텅 하고 닫는 몸짓을 보았다. 보닛 속 부품에 몹쓸 짓을 해둔 것이 분명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날 노린 게 아니었다. 정영일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모자라 자신의 동생마저 그렇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깊게 모자를 눌러 쓰고는 태연한 척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그를 흘긋거렸다.

점점 남자에게 가까이 붙자, 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수상하게 느껴졌는지. 그 둘 다인지.

그 때, 그 남자가 갑자기 속력을 내 뛰기 시작했다. 이런……! 나도 곧장 그를 뒤쫓았다.

헉, 허억, 두 사람의 가쁜 숨과 뜀박질 소리가 한데 엉켰다.

방금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와서 그런 것인지 힘에 부쳤다. 한 발짝만 더 따라잡으면 될 것 같았는데,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억울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앞서 뛰어가는 남자는 뛰면서도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악에 받쳐 뛰기 시작했다.

“아아악!”

주차장을 벗어나기 위해 문을 여는 그 찰나의 틈을 타 나는 몸을 던졌다. 몸이 문에 확 부딪히며 남자는 고통에 찬 소리를 질렀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그와 함께 덩달아 나도 바닥을 한바탕 굴렀다. 아픔을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에 곧장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의 몸을 붙잡았다.

“으윽!”

거세게 뒷발질을 하는 것에 어깨를 맞았다. 왼쪽으로 몸이 휙 틀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으나 나는 애써 참아내고 남자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반쯤 몸을 일으키려던 남자가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대비 없이 상체가 바닥에 고꾸라진 남자는 통증이 심했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질 못했다. 나는 쐐기를 박듯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엎어진 남자의 등을 무릎으로 완전히 찍어 누르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깔아뭉갰다.

“차에, 무슨 짓 했어.”

거친 숨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더 힘주어 눌렀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고 하는 팔을 붙잡아 뒤로 확 꺾어 그의 손을 등허리 위로 눌렀다.

“아악!”

“차에 무슨 짓 했냐고 묻잖아!”

날카롭게 악을 썼다. 이 남자에 대한 원망. 일을 시킨 깡패에 대한, 그리고 모든 일을 사주한 정영일에 대한 원망이 한데 뭉쳤다.

이는 내 상황에 대한 절규이기도 했다. 드디어 증거를……. 잡은 것이다.

“하아. 윽, 으…….”

눈물이 다 비집고 나왔다. 나는 거칠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내고 다시 남자의 몸을 확 눌렀다.

나보다 체구가 더 작은 남자였다. 두툼한 점퍼에 비해 드러난 팔목은 가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깡패 같은 사람이 왔더라면 나 혼자 힘으로 절대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했어요. 하면서 밑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를 거칠게 잡아 벗겨냈다. 바닥에 짓눌려 한쪽으로 틀어진 얼굴이 보였다. 젊은 사람이 아니라 오십은 되어 보이는 나이 든 남자였다.

“하…….”

지금 무슨 짓 한 줄은 아느냐고, 당신이 나도 이사님도 다 죽일 뻔했다고. 그렇게 물으려던 걸 포기했다.

이 사람도 다 깡패가 시켜서 한 일이겠지. 그렇다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들끓던 증오가 조금 잠잠해졌을 뿐이다.

나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그러곤 그대로 남자의 손목에 쓱쓱 동여맸다. 꼭 수갑을 채우듯 그의 양손을 그렇게 뒤로 묶어 완전히 결박시켰다. 그러고도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경찰에 신고 전화를 넣었다. 갈무리되지 않고 횡설수설한 내 말에도 곧잘 알아듣고 출동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남자의 위에서 일어나 매듭을 잡아끌었다.

“……일어나.”

계속 으으 하며 앓는 소리만 내던 남자는 내가 억지로 어깨를 일으키자 엉거주춤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께 보여드릴 것이다. 내가 직접 잡은 이 증거를.

그대로 남자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점점 높아지는 계기판의 숫자를 보며 나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이대로 이 남자를 이사님에게 보여주면 되겠지. 그 이후는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설마 이걸 보고도 믿지 않는 건 아니겠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층에 도착하고 나서도 문이 열리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나는 남자의 팔뚝을 세게 쥐고 끌어당겼다. 끌고 가는 것에 반항하듯 잘 협조하지 않으려 하는 무거운 발걸음 때문에 이사실 문 앞까지 끌고 가느라 힘이 달렸다.

“도운 씨?”

마침 비서실에서 팀원들이 무리 지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다.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내 얼굴과 지저분한 먼지가 묻은 옷의 상태를 보고 팀원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는지 물었다.

“뭐예요, 이 사람?”

“경찰 불러뒀어요. 이 사람 잡으러 곧 도착할 거예요. 아, 그리고…….”

나는 말을 하던 도중 이상함을 느꼈다. 실장님이 보이지 않았다. 실장님과 함께 있어야 할 이사님도 보이지 않았다. 팀원들도 이사님의 스케줄을 처리한 뒤 밥을 먹을 텐데. 벌써 식사하러 떠나는 것이…….

“……이사님 어디 계십니까.”

남자의 팔뚝을 쥔 손아귀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반쯤 예상된 대답이 들려왔다.

“이사님 조금 전에 내려가셨는데.”

그 말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몸이 굳어 서 있던 나는 이내 남자를 바닥으로 확 밀쳤다. 팔이 결박되어 있어 중심을 잡기 힘들었던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전화해야 해요. 이사님. 차…… 타시면 안 돼요.”

나는 급박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뒤를 돌아 뛰어나갔다. 아직 이 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연타했다. 그렇게 주차장까지 쭈욱 내려가며 이번엔 다른 의미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 * *

시동을 걸자 차체에서 우르릉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벨트를 매기가 무섭게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키를 받으며 물어보니 이사님이 출발한 지 채 5분이 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남자를 끌고 올라갔을 때 그는 내려와 출발한 것이었다.

이렇게 타이밍이 딱 엇갈릴 수가 있다니.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단번에 풀릴 수 있는 문제였는데 또 한 번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빠르게 차를 몰아 익숙한 길로 나갔다. 수원으로 향하는 길도 회의 때 미리 정해두었었기에 나는 그 길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신호마저 무시한 채 속력을 냈다. 내가 태어나서 해본 일 중 가장 대담한 일이었다.

“아……!”

대로에 진입하기 전, 순간 나는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멀리서 언뜻 이사님의 차를 발견한 것이다. 긴가민가했지만 차선을 변경하며 보인 번호판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멈춰요, 제발. 멈춰요…….”

이사님께 전화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인지 차는 멈추질 않고 달리고 있었다. 내가 차 옆으로 따라붙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도로에 다른 차들이 드문드문 있었기 때문에 요리조리 빠져나가 앞서나가는 것엔 약간의 무리가 따랐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 서기 위해 속도를 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사거리에서 신호가 서서히 바뀌는데도 차는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설마.’

노란불이었던 신호등이 기어코 빨간색이 되었는데도 차는 멈춰 서지 않았다. 서둘러 가기 위해 멈추지 않은 것과는 다른, 위화감이 드는 움직임이었다.

“벌써 차가 고장 난 거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차를 멈출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나는 차를 멈추려고 하다 다시 속력을 내었다. 갓길로 핸들을 돌려 앞차를 스치듯 지나쳐 나오고는, 양쪽에서 차가 오지 않는 타이밍에 맞춰 액셀을 밟았다.

급작스레 튀어 나가는 차에 나도 놀라 숨을 흡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핸들을 다잡았다. 속력을 줄일 줄 모르고 앞으로 빠르게 달리는 저 차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

반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결말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때인가. 사고에 대한 모든 걸 비밀로 혼자 감당하려 했던 때인가. 호텔에서 뛰쳐나와 이사님께 내 할 말을 다 쏟아내던 때인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속도를 올려 이사님의 차 바로 뒤에까지 따라잡았다. 귓가에서 엔진 소리인지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모를 것이 너무 크게 들려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역시나 살고 싶어서, 이제 뒤따를 일에 손이 떨릴 정도로 겁이 났다.

하지만……. 내가 이사님에게 했던 수많은 거짓말이 떠올랐다. 이미 그를 배신하고 계약을 불이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그래도 측은히 여겨주지 않았던가.

이사님이 신경 써준 덕에 앞선 사고에서 내가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에겐 이미 목숨을 한 번 빚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서둘러야 했다. 조금 뒤면 대로로 진입한다. 진입하고 나면 늦는다. 이렇게 차가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액셀을 조금 더 밟았다. 그만큼 차체의 울음소리와 떨림도 심해졌다. 핸들을 옆으로 틀어 이사님의 차 옆에 나란히 붙어 서는 수준까지 따라붙었다. 그리고, 쿠웅!

“으윽……!”

차를 살짝 옆으로 틀며 차의 앞머리끼리 부딪치게 만들었다. 몸이 한쪽으로 크게 쏠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으나, 속도가 빨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차가 튼튼해서 그런 것인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가빠지는 숨을 애써 가다듬었다. 핸들을 쥔 손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떨지 마. 심호흡하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 다시 타이밍을 쟀다. 충격이 가해져도 안전하게 멈춰 세워질 수 있는 길목. 옆으로 넓게 난 잔디와 수풀. 그걸 확인하곤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돼. 속으로 그렇게 되뇐 뒤, 더 세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확 꺾었다.

쿠웅! 폭발이 터지듯 강한 파열음이었다.

몸으로 쏟아지는 강한 충격에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끼이익! 귀를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차가 뒤흔들렸다. 벨트에 묶인 몸이 힘없이 충격을 따라 이리저리 쏠리고 부딪혔다. 유리창이 깨지고 파편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목이 앞으로 확 꺾이길 여러 번 반복하고, 몸이 위로 솟았다 꺼지기를 두어 차례.

통증이 너무 거센 나머지 나는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

콰앙, 쿠우웅! 지금 들려오는 이 굉음이 꼭 내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몸이 너무 이상했다. 누군가 아주 좁은 곳에 밀어 넣고 공간을 더 좁혀오는 것만 같은 그런 답답한 기분이었다. 거꾸로 몸이 뒤집혀 피가 머리로 쏠리기 시작한 것도, 손가락 하나 구부릴 수 없는 것도, 모두 다…… 이상했다.

바닥을 긁으며 밀린 차는 그제야 가만히 멈춰 섰다.

내 눈앞은 이미 암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빨리 이대로 잠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차는 덜덜거리며 불쾌한 소음을 냈고, 비릿한 냄새도 퍼져 나갔다.

“―――!”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 나에게 달려오고 있는 이사님이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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