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음 만난 순간은 찰나였다.
서도운은 조막만 한 손으로 제 아비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막 영국으로의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유독 하얗던 보송한 두 볼과 새까맣던 눈동자만이 기억에 남았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던 정해일은 그렇게 그 작은 아기를 지나쳤다. 회사 직원의 아들이라고 했던가, 그는 아버지의 ‘회사’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다른 세상에 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과는 무척 먼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국의 국제 학교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이미 입학할 학교는 정해져 있었고 인생 진로는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었으나, 유학길에서 약간의 일탈을 배우고 돌아왔다. 피아노였다. 겨울방학 내내 건반을 누르고 있는 그를 어머니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별채로 피아노를 치워버렸을 때는, 오히려 좋았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이젠 누구의 눈총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피아노 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시더니,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연습실을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녕.”
물론 누군가 갑자기 찾아오면, 혹시 어머니인가 싶어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너 뭐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건반을 누르던 해일이 확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님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였다, 갈색 더플코트 위로 하얀 목도리를 매고 있는. 그리고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장갑을 한 쪽씩 쏙쏙 벗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도운이.”
“……?”
이름을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저리 나가.”
표정을 굳히며 손을 내저어 보이자 꼬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새 부리처럼 나온 입술. 윗입술이 아주 조금 더 튀어나와 귀엽게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나가지는 않고 괜히 문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모습이 황당했다. 조금 더 가도 되나? 조금 더? 그렇게 속으로 재보는 것만 같았다.
어이가 없어 해일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아이는 이제 당당하게 피아노 근처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손가락 하나를 뻗어 피아노의 몸통을 쿡 찔렀다. 매끈하던 표면에 동글동글한 지문이 남았을 것이다. 그는 반쯤 포기한 듯 어깨에 힘을 빼며 대답했다.
“피아노.”
“나도 알아.”
뭐야, 이 애…….
해일은 황당해하면서도 그 도운이라는 아이에게 홀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누구인지,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는지 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건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에게 피아노를 쳐 주었다. 한 곡을 마칠 때마다 신기하다며 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피아노를 치며 환영받는 것은 간만이었기에, 해일도 덩달아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건반을 눌렀다.
그 날은 결국 어머니께 몰래 피아노 치던 것을 들키며 마무리되었다.
그 생뚱맞던 아이의 정체는 이제 비서실장으로 승진하는 직원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어린애가 없어져 한참을 찾던 도중 별채에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곧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아직도 피아노를 붙들고 있느냐고, 유학을 괜히 보낸 것 같다며 어머니로부터 잔소리가 쏟아져도 어쩐지 그 날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서실장 가족이 왜 자신의 집을 찾았나 했더니,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든 직원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최측근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하는 것과 더불어 두 집안의 사이도 순식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을 잘하고 총명한 서 실장을 무척 신뢰했고, 해일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전부 좋아했기에 자연스레 비서실장에게도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특이한 어린애도.
“도운이도 놀러 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동생 가져보는 게 소원이어서.”
그래서 어느 날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놀러 오면 놀아도 주고, 옆에 앉히고 공부도 도와주겠다고. 서 실장은 처음엔 조금 놀란 것 같았으나,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도운이가 이 집에 다녀간 이후로 자기도 형이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나.
도운이 두 번째로 놀러 오던 날, 해일은 대문까지 나아가 그를 맞았다.
“안녕.”
“……안녕하세요, 형님. 저는 서도운입니다.”
누가 봐도 제 아버지에게 인사말을 교육받은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땐 대뜸 안녕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존댓말이라니. 그 차이가 참 재미있었다. 역시 엉뚱한 점은 어디 가지 않았구나 싶었다. 해일은 한참을 웃다 대답했다.
“존댓말 할 것 없어. 그냥 형이라고 해.”
“응.”
그리고 곧장 응이라고 대답하는 아이를 보며 애써 웃음을 숨겼다. 정말 재미있는 동생이 새로 생겼다.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아이와 함께 지내면 귀찮거나 재미없지 않을까 했던 일말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도운은 눈치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습득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해일의 옆에 앉아 피아노를 통통 치기 시작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걸 누르는 게 아니라 화음을 넣듯이 한 옥타브 높은 음을 한 개씩 누르다, 어느새 두 개, 세 개로 늘려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음을 알았느냐 물어보자 그냥 형의 손을 보고 같은 모양의 건반을 눌렀다고 답했다.
“잘하네.”
그렇게 칭찬하며 꼭 상을 주듯,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 주었다.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해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5분이 넘는 곡을 도운이 완벽하게 치는 게 아닌가. 이번에도 역시, ‘형의 손을 보고 외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턴 단순히 동네의 어린 동생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지워버렸다. 서도운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자질을 보이는 음악적 감각이나, 엉뚱한 말로 해일을 당황시키고 웃음을 주는 것도 그렇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생각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눈이네.”
12월이 오기가 무섭게 눈이 펑펑 내렸다.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낸 지 벌써 1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눈 오는 날을 퍽 좋아하던 해일은 커다란 창을 활짝 열고는 그 앞에 앉아 바깥을 구경했다.
도운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람이 추웠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럼에도 해일이 타준 따뜻한 코코아를 양손에 쥐고 소파에서 일어나 해일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형은 겨울이 좋아?”
“응.”
“난 너무 추워…….”
“추우면 안쪽으로 앉아.”
그래도 고개를 젓기에 해일이 도운과 가까운 쪽의 창문을 반 닫아주었다. 그리고 담요를 가지고 돌아와 어깨에 둘러주고는 다시 앉았다.
“겨울보단 눈이 좋은 것 같네.”
“그래?”
딱히 이유를 묻는 것 같지 않았기에 가만히 턱을 괴자 도운이 다시 이야기했다.
“형이 좋아하면 나도 좋아.”
“……싫어하는 걸 굳이 좋아한다 할 필요 없어.”
평소에도 자신의 말을 뒤따르며 무조건 좋다고 대답하는 성향이 있었기에, 해일이 코끝에 묻은 우유 크림을 손끝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렇지만. 누가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다고 해주면 행복하잖아. 그치.”
사려 깊은 마음씨였다. 저 작은 머리통에 저런 생각이 꽉 차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리고 눈 오는 걸 바라보는 형이 좋으니까, 나도 눈이 좋은 거나 다름없지.”
하얀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작은 입술로 중얼거리는 도운을 보며 해일은 처음으로 가슴이 따뜻해졌음을 느꼈다. 놀랍도록 자신의 마음을 관통하며, 말수가 적은 해일을 대신해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어리다고 얕볼 게 아니었다.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이 어린아이에게 심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압박과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면, 도운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자신의 형과는 다른 존재였다. 형인 정영일과는 그리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다. 열 살의 나이 차이가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고, 일찍 어른이 된 정영일은 동생을 거추장스럽다고만 생각했다.
저녁엔 아버지와 형의 말싸움 소리가 종종 들려오기도 했다. 정영일이 일방적으로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었으나 자신은 그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고개를 돌리며 회피했다.
조금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 정영일은 회사 일에 욕심이 많았으나, 아버지는 망나니 기질이 있던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일부러 한참을 밀어내다가 기회를 줘보듯 계열사에 집어넣어 주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일어났다.
직무를 옮겨도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고 그것이 몇 번 반복되었다.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기엔 아버지 스스로가 직원들 볼 낯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폭행 사건이었다. 자신의 밑으로 인턴사원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한 일이다.
그 사건을 막느라 온 가족이 진땀을 빼던 것을 기억한다. 나이 서른에 싸움질이라며 형을 질타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갈 정도였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애써 묻었다. 돈과 힘을 써가며 묻어주는 아버지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해일은 무사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 후였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그만두고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공부에 열중했다. 정영일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에게도 일 욕심이 자라난 것 같다.
그에 비해 도운은 피아노를 더 열심히 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그만두자고 마음먹은 날, 해일은 자신의 피아노를 도운에게 선물로 주었다. 형이 아끼는 것이 아니냐며 감동 받은 표정으로 허리에 폭삭 안겨오는 작은 몸이 참 따뜻했었다. 형 대신 자기가 피아노를 쳐 주겠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처음 봤을 때보다 제법 자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면서 바빠진 해일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못 만나게 되었다. 도운은 이제 열세 살의 중반을 달려가고 있었고, 곧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매번 바쁘다고 만나기를 미룬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하여, 해일은 도운이 갈 만한 예술학교를 알아봐 주기로 하였다. 일취월장의 실력이니 전공을 하기에 어떤 무리도 없을 것이다. 직접 입시 상담사를 섭외해 추린 자료를 전해줄 생각이었다.
“오늘 저녁에 중도에서 같이 시험공부 할래? 이따 애들 만나서 저녁 먹는다던데.”
“아, 오늘은 가볼 곳이 있어서.”
기말시험을 앞둔 탓인지 동기들이 같이 시험 준비를 하자 제안했으나, 간만에 도운의 얼굴을 볼 생각에 해일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해일이 핸드폰을 꺼내 막 도운에게 저녁을 사 주겠다고 전화를 하려던 찰나였다. 무음으로 돌려두었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수도 없이 찍혀 있었다.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새 전화가 걸려왔고, 수화기를 통해 넘어온 소식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
사고를 낸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신뢰하고 의지하던, 그리고…… 자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서도운의 아버지 서명현 비서실장이었다.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해일은 비서실장이 그런 사고를 일부러 계획했다는 사실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 증거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라도, 하루아침에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해일의 가족은 책임을 지울 대상이 필요했다. 분노를 쏟아내어 이 비통을 해소할 마땅한 대상이. 서도운의 가족은 그렇게 쉽게 증오의 화살이 쏟아지는 과녁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상주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 증오를 쉽게 거둘 수 없었던 건 그만큼 믿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애써 지우듯, 잊고 살았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배신당했다는 고통에 또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여전히 눈이 오는 날. 그 새하얗던 아이를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 끔찍한 기분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 * *
정신없던 파티에서 빠져나온 해일은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막 입국한 데서 오는 피로감과는 달랐다. 지끈거리는 머리는 누군가 칼로 난도질이라도 한 것처럼 사납게 울리고 있었고 목뒤까지 서서히 땅겨왔다.
호텔에서 막 나왔을 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서 돌아가 남은 일을 조금 손보고, 그리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
하지만 차가 집까지 가는 길의 중반쯤 도달했을 때, 해일은 그 생각을 바꾸었다.
“……차 돌려요.”
“네?”
“차 다시 돌려요. 아까 있던 호텔로.”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괴고 있던 그는 여전히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아픈지 그 위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뭔가 두고 오셨습니까.”
기사가 룸미러로 뒤를 흘긋 쳐다보며 물었다. 해일의 안색을 살핀 기사는 신호 앞에 멈춰 선 뒤 다시 말했다.
“따로 사람 불러 찾아오라고 하겠습니다.”
“돌리란 얘기 못 들었습니까.”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탁 내려치며 말했다. 신경질적으로 쏘아진 말은 꼭 화를 낸 것만 같았다. 기사는 그를 모시며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성을 높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각한 상황인 듯해 기사는 재빨리 유턴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더 속력을 높여 오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빨리 호텔로 돌아갔다.
차를 세우자마자 해일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주변 직원들이 달려 나와 인사하거나, 왜 다시 돌아오셨느냐는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생각들이 복잡하게 엉켜든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아까의 그 참혹한 현장만은 정확히 기억해 그의 몸을 이끌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 더러운 치들이 이름을 부르던 음성이 호텔에 남아 맴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빠른 걸음걸이에 숨을 조금 몰아쉬며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엔 아무도 없었다. 불마저 꺼져 있었다.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해일이 벽면을 더듬어 불을 켜자, 아까와 똑같은 방 안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이미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인가.
“하…….”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도 아닌데 그새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뒤를 돌아 나오던 해일은 근처를 지나가던 직원에게 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 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잘……. 아. 봉사하러 온 사람이 갑자기 도망을 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행방을 모른다는 말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려던 해일은 이어지는 말에 다시 눈이 번뜩 뜨였다. 봉사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은 몸을 팔러 여기 온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도망. 도망이라니.
기껏 찾으러 왔더니 그 잠깐 사이에 도망을 갔다고 한다. 해일은 허탈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도망을 갔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아 있던 일말의 추억마저 짓밟힌 것이 아니었던가. 집안을 휘청거리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자취를 감추는 듯하더니. 이런 곳에서 끔찍한 꼴을 하고 있던 그를……. 자신은 대체 왜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애써 뒤돌아 자리를 벗어났는데, 아주 오랜만에 보는…… 아직 앳되던 그 얼굴이 계속 떠오른 이유는 도대체.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더 우스웠던 것은, 도운을 누가 고용한 것인지 알아보라고 시킨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찾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서도운이 갚지 못한 빚, 그것은 청영에겐 아주 적은 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남은 빚을 받아내기 위해서라고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도운을 그 자리에 데리고 온 포주를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해일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사용인을 보내 어제 연회장에 왔던 남자가 누구냐 물었다.
“목록이 있으니 한 번 보시죠.”
열 명 남짓 되어 보이는 그 명단 중간에 서도운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사용인이 서도운을 손가락으로 콕 집자마자 포주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은 마음에 안 드실 겁니다. 어제도 높으신 분께 상처를 내는 바람에. 보상금을 내야 할 처지거든요, 그 새끼…….”
포주는 상스러운 욕을 해가며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퍽 쳤다. 분한 속내를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도운의 처지가 어떤지 이것만으로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정해일의 사용인은 그가 시킨 대로 일을 진행했다. 그 피해를 대신 보상해 주기로 한 것이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길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다만 돈을 더 쳐주는 대신 서도운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기로 하였다. 머지않아 도착한 정보를 해일은 말없이 읽어 내려갔다.
도운은 자신이 유학 전 입학했던 그 대학에 진학한 상태였다. 하지만 성적은 바닥을 찍고 있었다. 입학 당시엔 장학금을 받을 정도라고 하였으나, 그 바로 다음 학기부터 심각한 추락을 내보였다. 도운의 어머니가 수술 중 사망한 사건이 거기에 있었다. 그게 원인이었다.
그 수술비로 빚이 불어났고 그걸 갚으려 밤낮없이 일만 하고 돌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꼭 일반적인 이십대의 삶은 잠시 접어둔 것처럼, 그렇게.
“……비서실 인원 충원할 때가 다 되었군요.”
김 실장을 불러 그리 말하면서도, 해일은 스스로가 미쳤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박 대리가 좋아할 소식이겠습니다.”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김 실장에게 그도 덩달아 웃어주고 싶었으나 표정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짧게 한숨을 쉬며 조만간 공채에서 한 명을 데려와야겠다고 이야기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해일은 직접 도운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갔다. 오랜만에 발걸음 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한 학기만을 마치고 유학길에 올랐으나,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의 담당 교수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적당히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준비해 인사를 하는 것과 동시에, 꽤 공신력 있는 그의 추천서를 서도운에게 써주라고 부탁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해일의 예상과는 다르게, 추천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교수는 반색하며 추천할 학생이 있다고 했다.
“성적은 보지 마. 썩 좋진 않은데 똑똑해. 일머리가 있어.”
교수가 학적을 뽑아 건넸다. 해일은 그 이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도운이었다.
“연구 논문 때 손 좀 빌린 적 있는데, 한 번 가르쳐 주면 잊어먹는 법이 없고. 대학원생들보다 더 눈치가 좋아.”
잘못 본 게 아니다. 왼쪽 상단에 박혀 있는 작은 사진도, 기억 속 그 얼굴이 맞다.
“연구 같이 하자고 했는데 부족하다고 겸손도 떨 줄 알고. 영 미덥지 않으면 인턴으로 써봐.”
“아닙니다, 교수님. 이 우승한 학술제 논문만 좀 받아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
교수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서랍에서 파일 사본을 꺼내 건넸다. 해일은 대충 훑어보며 살짝 웃었다.
“추천서 써주시면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후회 없을 걸세.”
파일을 받아 나오는 길에 해일은 도운이 작성했다는 논문을 살폈다. 대학생 논문치고는 수준이 높았다. 사실 실무에서 성적은 크게 상관없었으니 그건 감점 요인이 되지 않았다. 청영은 특히 더 그런 편이었다.
해일은 파일을 덮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굳이 교수 앞에서 생뚱맞게 서도운의 이름을 꺼낼 필요도 없이 이렇게 해결되다니.
오묘한 기분이었다.
서도운을 회사로 데려오기까지의 모든 준비가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꼭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것처럼.
해일은 홀린 듯 도운을 회사로 부르기로 했지만 스스로도 어떤 감정인지 가늠할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 점이 해일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모든 걸 화풀이로 포장하기로 했다. 서도운에게 자신의 화를 전부 쏟아내기 위해 가까이 두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처음 면접장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
해일의 심장이 쿵 울렸다.
여전히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해 보이는 얼굴과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멍거리는 큰 눈. 여기서 자신을 만날 줄은 몰랐는지 놀라 벌어진 봉긋한 입술. 바르르 몸을 떨다 마침내 결심한 듯 작은 주먹이 쥐어지고, 기다란 속눈썹이 한 번 팔랑이며 심해처럼 깊은 어둠의 눈동자를 숨겼다가 드러냈다.
가슴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본능 수준에서 자신에게 밀려드는 경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보내라는 의미였다.
“안녕하십니까, 수험번호 194620……. 서도운입니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새벽이슬이 떨어지며 맑게 울리는 것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면접장을 순식간에 메웠다. 어릴 적보단 낮아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깨끗하고 듣기 편안했다.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그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여기까지 불러들인 것은 자신이면서, 막상 만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후회가 물 밀듯 밀려드는 것이다.
“그렇게 반갑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 말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 돌이킬 수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다. 해일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과 마음에 대한 원망을 엉뚱한 곳으로 표출하며 매몰차게 말을 뱉었다.
허벅지 위로 올라온 새하얀 손은 긴장했는지 마디가 붉어졌다. 그런 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품이 조금 큰 옷이 그를 더 어리숙하게 보이도록 했다.
평범해 보이는 정장 재킷과는 다르게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고급스러운 넥타이가 이질적이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브랜드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
몸을 파는 일을 한다고 했던가. 어떤 일보다도 더 값을 쳐주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누구한테 받았을지 모를 저 넥타이를 잡아 풀어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고로 서도운의 가족에게 가졌던 모든 기대와 감정은 버린 지 오래였으나, 그래도 역시 실망하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모자라, 아양을 떨며 늙은 남자들의 품에 안겨드는 끔찍한 꼴로 자신과의 추억을 파괴한 만큼. 해일은 도운의 미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몰아넣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어코 도운을 여기까지 부른, 변명이 똘똘 뭉쳐 있는 목적을 내뱉었다.
“서도운 씨가 잘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거.”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자신도 똑같이 늪에 빠지게 하는 일임을 몰랐다.
* * *
교수가 했던 말이 틀리진 않았던 모양이다.
첫 회의에 참여시킨 뒤 요약만 해보라고 했을 뿐인데, 늘어지는 것 없이 핵심을 잘 짚어내고 있었다. 생소한 분야이기에 어디가 요점이고 중심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텐데 눈치가 좋았다.
“일머리가 아예 없진 않군.”
처음부터 너무 칭찬을 하면 주제도 모르고 기세등등해질까 봐 그리 말한 것이지만, 도운은 그마저도 큰 칭찬으로 여긴 듯했다.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는데……. 그의 볼 위쪽으로 길게 보조개가 패었다.
저 웃음을 몇 년 만에 보는 것일까.
해일은 순간 말을 잊고 도운의 보조개를 보며 신기해하던 때를 떠올렸다.
옛날과 다르지 않은 환한 보조개 웃음은 해일을 순식간에 과거 그 순간으로 데리고 갔다. 한 번 싸우지도 않고 피아노를 나눠 치며 평화롭던 때로.
그는 일부러 다른 주제를 꺼내며 대화를 돌렸다. 해일은 일이 잘못되어 감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애써 묻어두었다.
얼마 뒤 도운을 데리고 오찬 장소에 나갔을 때였다.
“반갑습니다.”
“안, 안녕하십…….”
“안, 안녕?”
문지원은 해일과 동행한 비서에 대놓고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악수한다고 손을 붙잡아 놓고는 한참이나 떼지 않고 놀려먹는 모습을 보니 해일의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서 비서님도 같이 식사하겠습니까?”
저 은근한 눈빛은 또 무언가. 명백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치근덕대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해일이 중간에 막아서며 도운을 멀리 보냈다. 씩 웃는 친구의 표정에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입사원이라더니. 아끼는 모양이네?”
“신경 꺼.”
해일이 대화를 차단하듯 짧게 대답했으나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 이야기를 하다가도 중간 중간 서도운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몇 살이야, 아직 어려 보이는데.”
“……부지 얘기는 아닐 거고.”
“당연 아니지. 서 비서 말이야. 일은 잘해?”
“뽑은 지 얼마 안 됐어.”
“귀여운데.”
“뭐?”
“귀엽다고. 내 스타일이야.”
친구의 호쾌한 미소에 해일이 한숨을 쉬며 마시던 물잔을 탁 내려놓았다. 뭐 얼마나 봤다고 자기 스타일이라는 것인가. 당장 뭐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다.
“관심 있는 사람 있다며. 전에 바 직원이랬나.”
“아, 아아. ……뭐, 여기저기 찔러보는 거지.”
“내 직원은 찔러보지 마.”
여기서 열을 내는 것도 이상했기에 해일이 가볍게 경고했다. 하지만 지원은 신경 안 쓴다는 듯 짧게 웃으며 글쎄, 하고 대답했을 뿐이다.
영 불쾌했다. 이 불쾌감의 출처를 알기 힘들었다. 자신의 것을 누군가 건드린다는 생각에 불쾌한 것일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지원이 도운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답답하게, 도운도 피하지 않고 그걸 고스란히 받아주고 있었다. 어쩐지 처연한 눈동자를 하며 그렁그렁 지원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역시 여기저기서 구르던 것이 어디 가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홀리는 게 분명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도운에게 화풀이로 이어졌다.
하지만 화풀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관심이었다. 그게 해일의 목을 서서히 옭아맸다. 도운이 그의 옆에서 일을 배우고 잠자리를 함께하면서 그 매듭을 더 공고히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해일의 삶이 점점 도운으로 젖어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쉽게 제 옆을 도운에게 내주고 말았다.
* * *
“형. 잠깐 이야기 좀 해.”
아버지의 제사가 끝나고, 해일은 현관을 나서려는 정영일을 잠시 불러 멈춰 세웠다.
“왜.”
정영일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며 뒤를 돌았다.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는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서서 해일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회장님한테 무슨 허튼소리를 한 거야.”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내 결혼 내 알아서 하시라던 분이 왜 갑자기 맞선 이야길 꺼내.”
“아.”
정영일은 바람 빠지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뻔뻔한 태도에 피로가 몰려왔다.
어머니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해일에게 결혼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괜히 밀어붙였다가 심기가 흐트러지기라도 할까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그가 하는 사업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벌써 상정해 둔 약혼 상대라도 있는 듯 사진과 이력까지 준비해 몇 개 내밀었다. 해일은 아직 이르다며 생각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이번엔 의외로 어머니가 강경하게 나왔다. 만나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정영일의 입김이 들어갔음에 틀림이 없다. 해일이 형에게 묻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니었다. 과연 자신의 형이 어머니께 서도운에 관련한 것을 말씀드렸는지, 그게 알고 싶은 것이었다.
“선 보라시니 만나봐. 네 형수 모임에서도 몇 명 추려본다고 했으니까.”
“날 미국으로 보내려는 건 아니고.”
“섭섭하다, 해일아.”
정영일은 누구보다도 가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해일의 추측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미국에 있는 여자와 결혼시키고, 그걸 기회 삼아 자신을 미국 지사로 보내려는 속셈일 수 있었다.
“회장님이 형 말을 다 귀담아들으시고, 별일이네.”
“일선에서 물러나신 지가 벌써 한참인데, 총기가 떨어지실 만했지.”
자학하는 듯한 말을 하며 정영일은 기분 나쁘게 낄낄 웃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자체가 우스운 모양이었다.
“네가 나랑 달리 효자니까, 당신 말 거절 못 할 걸 잘 아신 거지. 그리고 꼭 내가 말을 해야 아실까? 어머니도 마음만 먹으면 네가 누굴 끼고 사는지 다 아실 텐데.”
“황당한 소리인데.”
“네 첩 새끼 말이야. 원래 몸 굴리던 놈 붙잡아 들여온 거라며. 너한테도 엉덩이 흔들면서 꼬리 쳤겠지.”
현관 너머 거실에 아직 가족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영일은 상스러운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해일의 미간이 대놓고 구겨졌다.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불쾌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자신도 서도운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버지를 잃은 증오를 쏟아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의 형도 마찬가지로 서도운을 어찌 대하든 신경을 쓰지 말아야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자신은 되지만, 형은 안 된다는 소리인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서도운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나한테도 다리 벌릴 기세던데. 구미가 당기긴 하더라.”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내가 건드는 거야? 그 여우 같은 새끼가 엉덩이 가볍게 돌아다니는 건 아니고?”
정영일은 그렇게 말한 뒤 비열한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더 대화하기 싫다는 듯 신발을 신고 현관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던 것은 해일도 그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몸을 팔던 사람이었다.
거기다 그에게는 사람을 홀리는 오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게 꼭 성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를 데려오고 계속 휘둘리고 있는 처지였다. 지금도.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이 시간에 전화했습니까.”
도운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엔 받지 않으려 했다.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가족이 전화를 걸어오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당장 얼마 전 도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나왔음에도 마음이 쓰였다. 심장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서도운이 도무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그, 급한 일은 아닌…….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그런 스스로에게 분한 감정이 차올랐다. 누구의 탓을 할 것이 아니었다. 마음 하나 다잡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였다.
측은히 여기는 것이다.
보란 듯이 밑바닥에서 굴려주고 싶었는데, 이미 밑바닥도 모자라 오물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으니, 측은지심이 생겨 모질지 못한 것이다.
“……정말 무슨 일 있습니까.”
그래서…… 화를 내려다가도 이렇게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다. 해일은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애써 변명했다.
평소와 다른 듯한 목소리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실없이 전화를 걸어 자신을 홀리는 것이 그의 수법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가 끊어지고, 해일은 그대로 자신이 쓰던 방 침대에 털썩 누웠다.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듯 눌렀다. 나와 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이상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얼마 전, 친구인 문지원을 만나 식사를 함께했을 때였다.
안 그래도 도운에게 관심을 보이던 것이 무척이나 거슬리던 차였는데, 지원의 입에서 기어코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 서도운 씨한테 고백했어.’
그 말이 해일의 신경을 죽죽 긁어내렸다.
‘그래서…… 내 회사로 데려오고 싶다.’
‘산업 스파이 짓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 뜻 아닌 거 알잖아.’
해일이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가볍게 받아쳤다. 와인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이야기해 굳어진 입술이 보이지 않을 줄로만 알았는데, 지원은 예리하게 그를 알아보고는 덧붙였다.
‘네 회사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럴 거면 나 달라고.’
‘…….’
‘나 줘, 서도운. 내가 가질래.’
지금 대놓고 눈앞에서 자신의 직원을 빼앗아 가겠다니. 굉장히 불쾌했다. 해일은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했다.
‘서도운은. 그러겠대?’
‘아니. 아쉽게도 거절인데, 더 해봐야지. 그만큼 탐나는 사람이라서.’
서도운이 거절했다는 말에 가슴이 술렁이는 것도 잠시, 이어지는 지원의 말에 다시금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단지 그가 내 직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서도운이기 때문일까.
‘내가 가져도 되잖아. 네가… 도운 씨한테 마음 있는 게 아니라면.’
‘뭐?’
해일은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네가 서도운 씨한테 왜 그런 식으로 구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난 잘 모르겠다. 그거 정상적인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로는 안 보여서.’
‘도 넘지 마.’
‘정해일.’
이어지는 말에 해일은 꼴사납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서도운이 자신에게 진 빚이 있다고. 그는 어떻게든, 지금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이질적인 감각을 해명하고 싶어 했다.
‘너 정말 마음 있어?’
해일은 끝내 그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하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부정하기 어려웠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신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 * *
해일은 일부러 스케줄을 바꿨다. 원래 함께 참여하기로 했었던 AG 미팅에 도운 혼자 보내기로 했다.
도운에게 일부러 매몰차게 굴어놓고는, 회의 브리핑을 받으면서도 그 상처 받은 얼굴이 자꾸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일에 영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서류 위에 메모하듯 글씨를 적어 나가다가도 거칠게 선이 삐져나오듯 그어지는 것을 보고는 중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펜을 자리에 꽂았다.
이렇게 마음 쓰일 거면 대체 왜 매몰차게 굴었는지. 차라리 처음부터 잘 대해줄 것을.
“……미쳤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해일이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증오를 쏟아낼 상대가 필요해 데려온 것임을 망각하다 못해 이제는, 잘 대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니.
그는 다른 생각으로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한심스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회의 막바지에 다다랐음에도 연락이 없는 서도운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 분명 메시지를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럴 거면 괜히 혼자 보냈다. 해일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애써 스크린으로 시선을 고정하던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가볍게 손을 들어 회의를 멈추게 하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문지원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묻기가 무섭게 다급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지원이 전한 소식은, 도운이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는 것이었다.
급히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에게 회의실 안의 모두가 놀라 덩달아 일어났다. 무슨 일이시냐고 묻는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이사님, 무슨.”
“기사 호출해. 아니, 키 가져와.”
말의 허리를 끊으며 해일이 다급하게 말했다. 한 번도 말을 놓은 적이 없던 상대에게 자신도 모르게 말이 짧게 튀어나갔다. 김 실장이 허리춤에 매여 있던 키를 건네자마자 그는 더 설명하지도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동이 걸리기가 무섭게 차는 빠른 속도로 병원으로 달렸다. 쓰러지다니. 대체 얼마나 몸이 상했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해일은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다. 거칠게 핸들을 틀어가며 운전을 계속했다. 이렇게 마음이 급한 적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전화로 상태라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시간마저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로.
핸들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턱에 근육이 설 정도로 어금니가 세게 다물렸다. 역시……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지원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야.”
“응급실에 있어.”
응급실이라는 단어에 곧장 몸이 움직였다. 거의 뛰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안쪽으로 향했다. 지원이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급히 따랐다.
지원이 가리키는 침대에 반쯤 둘러쳐 있는 커튼을 젖히자, 파리한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도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쓰러져.”
“내가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해일이 애써 화를 억눌렀지만 흘러나가는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괴롭힌 게 누군데, 하고 중얼거렸으나 도운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는 해일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볼살이 홀쭉해 보일 정도로 말랐다. 핏기 없는 얼굴과 상한 입술이 꼭 죽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자 새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속이 안 좋았는지 갑자기 구토하더라고. 몸도 휘청거리고, 배도 아파 보였고. 병원에선 정밀 검사해 봐야 정확히 알겠다는데, 일단 영양실조래.”
“…….”
“말이 돼? 지금 이 서울 한복판에서 영양실조라는 게?”
그 말에 해일의 입술이 다물렸다. 도운의 얼굴을 쓸던 손에도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졌다. 그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지원에게 물었다.
“또 다른 말은 없었어?”
“일단 눈에 띄는 증상은 그거뿐이야. 깨어나 보고 다시 진찰해 보자고. 아마 구토가 지속적이어서 영양 흡수를 못 했을 거란다.”
속이 쓰렸다. 도운의 병원 이송 소식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 떨어지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서도운이 고통 받으면, 자신은 기뻐해야 했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다. 근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난 가봐도 되겠다.”
도운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는 해일을 보며 지원이 말했다. 제 나름 많은 뜻을 함축한 문장이었다.
“……고맙다.”
“고마워하지 마. 너 별로 안 부르고 싶었거든.”
지원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제 마음을 모르는 바보 같은 해일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실연당한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도운은 이후로도 해일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도운이 신장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었다.
해일은 의사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누군가 뒤통수를 때리는 줄로만 알았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흉터도 옅어져 거의 보이지 않았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신장 한쪽이 없는 그 병약한 몸을 자신이 짓밟은 것이다.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한 걱정,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가다간 자신의 삶에 서도운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가족을 저버리고 그를 택하게 될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가 시킨 대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애써 서도운에게서 눈을 돌리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도운에게 더 애틋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기 시작하니 오히려 서도운이 더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긴 일이었다.
처음의 의도와 완전히 주객전도된 이 상황에서,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걸어갔다. 정영일의 호텔 방에 있는 도운을 보고도 쉽게 마음이 접히지 않았다. 배신감이 거센 물살로 그의 심장을 때렸으나, 이내 눈물을 쏟으며 해명하는 도운을 보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졌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도 오히려, 그 정도 흠은 자신이 품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마저 하기 시작했다. 꼭 무언가에 눈이 먼 사람처럼.
도운이, 얼마나 자신에게 큰 존재가 되었으면.
“이사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알겠습니다.”
해일은 김 실장의 부름으로 재킷을 챙겨 입었다. 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와중에도, 부들부들 떨리던 그 작은 몸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 본부장이…… 뒷일을 사주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알아봐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김 실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증거도 없는 그 터무니없던 소리를 믿어주고 싶었던 그 이유는.
“…….”
이젠 스스로에게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서도운을…….
해일은 마침내 그 감정을 혀 위에 올렸다. 소리 내지 않고 애써 꿀꺽 삼키는데 목이 메는 것 같았다.
한참 돌아온 이 감정을 이제야 인정하고 만다.
어린 날에 남은 감정이든, 몸정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설령 도운에게 홀린 것이라고 해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도운이 좋았다. 부정할 수 없는 커다란 마음이 심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깨어나듯 그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지각하는 순간.
“도운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 차 안의 모든 사람이 당황한 그 때에 쿠웅, 옆 차가 밀어낸 충격에 해일이 탄 차는 스키드 자국을 내며 갓길로 빠졌다. 가드레일을 들이받고는 그대로 멈췄다.
해일은 차에서 몸을 내리자마자 자신의 차를 치고 뒤집혀버린 차로 달려 나갔다.
“도운아, 서도운.”
운전석에 탄 사람을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그 짧은 순간에 수도 없이 생각했다.
“도운아. ……도운아.”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
눈을 떴을 땐 온통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사위가 어두워 아직 밤인가 싶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이 너무 욱신거렸다. 사지가 칼로 난도질당하고 찢어진 느낌이었다.
눈을 뜨고 있기엔 고통이 너무 잘 느껴졌다. 잠이라도 자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피곤했는지 잠엔 어렵지 않게 다시 빠져들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을 더 짧게 눈을 떴다.
밝은 낮일 때도 있었고, 어스름한 저녁일 때도 있었다. 졸음이 묻어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따지면 꽤 여러 번 눈을 뜬 것 같은데……. 그때마다 이사님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다시 눈을 감자 눈물이 흘렀다. 혹시 내가 괜한 짓을 해서 이사님의 차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그가 나 때문에 다쳐서, 그래서 내 곁에 와줄 수 없는 것인지.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사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렇게 침울한 마음을 끌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팔을 만지작대는 느낌에 일찍 눈이 떠졌다. 창밖으론 새가 지저귀는 이른 아침이었다.
간호사가 내 팔에 꽂혀 있는 링거를 점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계속 사람이 없어 묻지 못했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감각이 둔한 손을 간신히 움찔거렸다. 그러자 간호사의 시선이 날 향했다.
“깨어나셨어요?”
놀란 얼굴을 한 간호사는 의사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나가 버릴까 봐 걱정되어 다급하게 목소리를 짜냈다.
“이…….”
“네?”
“이사님은, 요…….”
목이 완전히 잠겨 거의 숨소리처럼 말이 나갔다. 배가 아파 힘주어 말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산소 호흡기 때문에 소리가 뭉개지는 것 같았다. 간호사가 어디가 불편하시냐며 허리를 숙여 가까이 귀를 갖다 대었다.
“이사님, 괜찮으신…….”
“아, 아아. 이사님은 괜찮으세요. 다친 곳도 없으시고.”
그 말에 온몸의 긴장이 탁 풀어졌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편히 힘을 빼고 누웠다. 간호사는 다시 의사를 부르겠다며 자리를 떴고,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제야 사고로 정신을 잃기 직전, 그가 나에게 뛰어오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도 기억 못 하고 바보같이 내내 걱정했다니. 스스로에게 자조적인 감정이 듦과 동시에……. 그렇게 몸이 멀쩡하면서 나에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그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너무해. 정말 너무하다. 내 말도 안 믿어주고…… 날 한 번 보러 오지도 않고…….
하지만 그렇게 원망을 하다가도 내 탓을 하게 됐다. 정말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괜히 나서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래서 괜히…… 이사님의 마음만 무겁게 만든 것인가.
마른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이로 잘근거리자 약하게 피 맛이 느껴졌다. 그래, 다 내 잘못이었다.
“서도운 씨.”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정장 차림의 이사님이 급하게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의료진이 대거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들었어요?”
하지만 날 보러 오지 않았던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저 표정이…… 내가 깨어나길 무척이나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잠을 잘 자지 못한 것처럼 수척해진 얼굴과 벌게진 눈. 갈라진 목소리도. 다 나의 착각일까. 내가 그냥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일까.
사고에서 다친 것인지 그의 이마에도 상처를 치료한 흔적이 보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그 상처가 신경 쓰였다.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팔을 지탱해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딱딱하게 깁스가 감긴 손 때문에 움직임이 둔했다. 덩달아 그도 만류했다.
“누워 있어요.”
하는 수 없이 다시 힘을 빼고 누웠다. 진통제를 맞은 것인지 몸에 통증은 둔해졌지만 기력이 없었다. 잠깐 힘을 준 것도 숨이 찼다.
뒤따라온 의사가 간단하게 검진하는 사이 이사님의 손이 내 손 위로 올라왔다.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온기만 전해졌다. 안타깝다는 듯 흐려지는 표정이 꼭, 정말 나를 걱정한 사람 같았다.
“순조롭게 회복 중이십니다.”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 써넣는가 싶더니 말했다. 수술 부위에도 큰 문제가 없고, 상처도 잘 아물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안정을 취하면서 기력 회복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곧 유동식부터 식사를 시작하자고 말한 의사는 이내 의료진을 모두 데리고 병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이 안엔 나와 이사님만 남게 되었다.
계속 이렇게 누워 있어도 되는지 신경 쓰였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몸이 너무 피곤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다. 손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고, 잠깐 눈을 뜬 것인데도 졸음이 밀려왔다.
내가 어물어물 감기는 눈을 애써 깜빡이자 그는 옆 의자에 자리했다.
“괜찮습니까.”
“…….”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요?”
네. 작게 대답했지만 아직 목이 잠겨 있어 말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가 못 들었을까 봐 고개도 살짝 끄덕였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빗듯 넘어간 앞머리가 다시 사락 내려왔다. 그의 손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다시 얼굴로 향했다.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입술도 꽉 다물려 있었다.
“보름을 잠들어 있었습니다.”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사흘 전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 금방 깨어날 거라고 하더니 눈을 안 뜨더군요.”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몰랐다. 길어야 이틀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왜 한 번 보러 오지도 않았을까. 서운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했다. 호흡기 때문에 얼굴의 반이 가려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꾸 눈가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고일 것 같아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인 거겠지? 나는 이사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 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다시 내려와 내 손 위로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이사님.”
“네.”
“……저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망설이다 이야기했다. 그에게 이렇게 측은함 어린 시선을 받고 있는 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의 불을 껐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줄 알았는데, 창문의 커튼도 쳐 가리고는 다시 침대 근처로 돌아와 탁자 위의 전등을 켰다. 어두울 정도로 조도를 조절하고는 조금 전 앉아 있던 의자에 자리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나는 입술을 꾹 물며 빠르게 눈을 감았다. 밀어냈어야 한다고 속에서 아무리 외치고 있어도 그러기 쉽지 않았다. 다정한 그의 손길을 쳐내기엔 내가 너무 나약했다.
빨리 잠들어야겠다. 빨리.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이사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런데도 내 손 위에 올라온 온기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 * *
나는 그렇게 다시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선 드디어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찢어진 이마와 수술 부위의 상처 소독을 받으며 내 몸의 구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에어백이 제때 터지지 않아 처음엔 상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장기를 찔렀다고. 어쩐지 상체에 힘을 주기가 무척 어렵다 싶더니, 안이 망가져서 그랬던 거구나. 그리고 다리와 손에 골절이 있었고, 어깨에도 약한 타박상을 입었다고 했다.
나는 깁스가 꽁꽁 감겨 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붓기도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유동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영양부터 늘리고, 기력이 돌아오는 대로 재활도 진행할 겁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재활이 필요한 수준이긴 하구나.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는데도 착잡함이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보는 이사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표정을 흘긋거리자, 어쩐지 나보다 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 왔습니다.”
회진이 끝난 후 아침 식사 도착했다. 테이블을 펼치고, 비스듬히 세워두었던 침대를 조금 더 들어 올려 식사할 준비를 마쳤다.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은 거의 미음과 흡사할 정도로 묽디묽은 죽이었다. 그냥 허여멀건 하기만 해 아무런 맛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식욕이 돋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먹기 싫다고 하면 이사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왜 나가지 않고 계속 날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신경도 쓰였다.
재차 그를 흘긋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오른손 깁스 때문에 영 불편해 왼손으로 고쳐 쥐려고 하자, 그때 그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숟가락을 가져갔다.
“왜, 왜…….”
당황스러움에 물을 새도 없이 그는 숟가락으로 죽의 윗부분부터 살살 뜨더니 내 입가로 가져왔다.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
“먹어요.”
“주세요.”
“손이 그래서 불편하잖습니까.”
이사님이 떠먹여 주는 게 더 불편한데…….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한 숟갈을 받아먹었다.
나는 몇 번 받아먹다가도 재차 내가 먹을 수 있다고 의견을 피력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단호한 얼굴을 하고 죽을 떠주는 그에게 더 이상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물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데도 체할 것만 같았다.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자꾸만 움찔거렸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속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불안감에 또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욱, 으…….”
결국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죽이 바닥을 보일쯤에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가 급히 일어나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나는 이불 위로 묽은 죽을 전부 뱉어내고 말았다.
“읏, 죄송합니다……. 후으…….”
“죄송할 것 없어요.”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그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창피해짐과 동시에 죄송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사님이 벨을 눌러 사람을 불렀다. 달려온 사람들이 대신 테이블과 침대를 치웠다. 덩달아 의사도 따라 들어왔다. 급히 음식을 받아들여 그런 것 같다며 적은 양부터 서서히 늘리자고 진단을 내렸다. 별것도 아닌 일에 재차 검진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옷도 갈아입어야겠어요.”
“제, 제가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자복을 벗기려던 이사님은 입을 다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대신 다른 사용인이 다가와 내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혀 주었다.
새 이불이 포근하게 몸 위로 덮였다. 이내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는 이 어색한 정적을 참을 수가 없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나한테 죄송하지 말아요. 몸 상태가 안 좋아 그런 건데 왜 자꾸 사과를 합니까.”
이사님의 말투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걱정 어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귀찮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재차 죄송하다고 하려다 그가 또 화를 낼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미안합니다. 내가 예민했어요.”
“아닙니다.”
그는 속이 좀 진정되고 난 뒤에 식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도 지금은 다시 무언가를 먹기엔 속이 너무 아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쉬면 될 것 같았는데 내가 괜히 배를 쓰다듬자 이사님이 인상을 썼다.
“혹시 식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러면서 또 사람을 부를 기세이기에 애써 그를 붙잡아 말렸다.
“아닙니다, 제가……. 다음부턴 잘 먹겠습니다.”
그게 뜻대로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의사가 또 와서 내 몸을 이리저리 진찰하는 게 상상만 해도 피로했다.
이사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또 한참을 뜸 들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침내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습니까.”
다리 위에 올라간 그의 손이 주먹 쥐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자고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요. 그것도 그렇게 빠르게 차를 몰고. 위험할 거라는 생각을 못 했습니까?”
그는 사고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도운 씨가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죽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느냔 말이야.”
날 탓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전…….”
억울함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내가 그를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준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냥…… 말을 말았다.
괜한 짓. 그에겐 내가 한 일이 괜한 일이었을 수 있다. 그가 그토록 원망하고 분노를 쏟아내던 내가 그를 구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이사님이 무사하셨으면 됐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에 뛰어든 것에 큰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거나, 오해를 풀어달라거나 하는. 나는 그냥 그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 하나뿐이었고, 결국 그는 무사했다. 정말 그걸로 됐다.
“죄책감 느끼시라고요.”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했다.
“이사님이 죄책감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갚음 같아서.”
내 말에 이사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죄책감이요.”
“…….”
“정말 그것뿐입니까.”
이사님의 시선이 무거웠다.
“오해가 풀리면 모두 뒤따를 일이었습니다. 고작 그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걸었습니까.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고작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네 몸 상태가 지금 어떤 줄 알고 하는 소리야?”
그는 목소리를 높이려다 뚝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로 한숨만 내쉬었다.
“신장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 말이 없었어. 그 몸을 끌어안고 대체 어떻게 일을 했어요. 어떻게 그 몸으로 내 화를 다 받아주고 있었느냐고.”
“…….”
“신장 이식받아야 한다고 재차 진단 내렸다고 했는데 왜 다 무시하고 나한테 한 마디 보고도 없었습니까.”
의사에게서 내 몸 상태를 다 전달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난 그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내 몸 아픈 것을 그가 왜.
“서도운 씨가 눈 뜨지 않는 보름 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압니까. 이렇게…… 억장이 무너지는 꼴이 보고 싶었어요? 죄책감? 죄책감이다 못해 지금……!”
그는 분에 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낼 것처럼 하다가도 애써 거친 호흡을 누르며 진정하려 애썼다.
“모든 일을 자행한 게 내 형이더군요.”
“…….”
“서도운 씨가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갈피를 잃은 그의 눈동자에서 혼란스러움이 숨겨지지 않았다.
“내 형이……. 정영일이 내 아버지도 모자라 날 죽이려 한 정황이 모두 나왔습니다.”
그에겐 또다시 배신감만이 남았을 것이다.
“서도운 씨가 잡아둔 사람은 구치소에 수감 중이고. 형은 해외로 도피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혔습니다. 서도운 씨가 정신을 못 차리던 보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이게.”
“…….”
“너무 쉬웠죠. 이 모든 일에서 서도운 씨와 가족을 용의 선상에서 제하니…… 이렇게 쉬운 일이 되더군요.”
이렇게나 간단한 것을…….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조롭게…… 붙잡히기는 했구나.
그에게서 길고도 깊은 한숨이 뒤이었다. 한숨에서 고뇌가 느껴졌다. 쉽게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하나뿐인 혈육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라는 걸 충분히 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망의 대상이었던 나와 내 가족이 남아 있었다. 여태껏 화살이 향하던 곳이 올바른 과녁이 아니라는 죄책감. 난…… 미련하게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겐 잘못이 없지 않은가. 지금 맞닥뜨린 잔혹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다 끌어안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이미 돌아가셨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남은 건 나 하나였으니, 나만 사라지면 모두 마무리될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이사님은 아무런 고뇌를 겪을 필요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날 원망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차라리 제가 사고에서 죽는 게 나았을 뻔했겠네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고가 아니더라도……. 저만 아니었으면 모두 순조로웠을 테니까.”
“아니요.”
그는 또다시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정영일의 목적은 처음부터 날 죽이는 거였습니다. 서도운 씨가 없었으면 난 형 손에 아버지처럼 죽임당했을 거고. 만약 그랬더라면, 서도운 씨가 모든 걸 뒤집어쓸 수도 있었을 일입니다. 13년 전…… 그 사고처럼.”
내가 고스란히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뻔했다는 소리였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아버지처럼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그렇게…….
“그럼 제게 더 미안해하셨겠네요.”
“밝혀지지 않고 평생 묻힐 수도 있었다고. 왜 그걸 몰라.”
하지만 난 각오를 하고 뛰어든 일이었다. 그에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이 편안하진 못해,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제가 쓸모 있었다는 소리인가요.”
유능한 직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목숨을 살린 사람은 되었으니까. 거기서 만족할 수 있었다. 더 바라는 것도 사치였다.
“내가…… 어떻게든 보상할 겁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떼며 말했다.
“이사님.”
“서도운 씨 가족을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고, 서도운 씨를 지금껏 오해하고 고통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죄책감은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다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보상하겠습니다.”
그는 꼭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죄책감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것이 그를 감싸들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난 새삼스럽다고 느꼈다.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정말 차를 몰고 뛰어든 이유를.”
“…….”
“다 포기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에요.”
그 말에 이사님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반대로 나는 천천히 눈이 감겼다. 아버지께 너무나도 죄송했다. 이제야 밝혀지다니. 13년이나 파묻혀 있던 그 날의 진실이, 이제야.
그간 고생했던, 죽고 싶었던 모든 순간이 눈앞을 스쳤다. 쳐들어온 사람들로 정신없던 아버지의 장례나, 피를 토하며 쓰러지신 어머니. 몇 차례나 수술을 반복하고도 끝내 눈을 뜨지 못하시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졌던 그…… 절망적인 순간이.
애써 울음을 내리누르느라 턱에 힘이 들어갔다.
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가 밉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의지할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오해마저 풀려 버렸으니 더 이상은……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병원 신세도 필요 없다. 내가 살아봐야 이 세상엔 무의미한 존재 같았다.
“제가…… 저희 가족이 잃어버린 13년이 고작 보상으로 갚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사님도 이제 원망할 사람이 바뀌어 혼란스러우실 텐데, 저한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퇴원하고 싶어요.”
“…….”
“다 무의미하고, 그냥…… 놓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어코 훌쩍임이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에게 운다고 맞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내 꼴이 너무 우스웠다. 고개를 틀어가며 그에게서 얼굴을 숨기려 했다.
“내가 아픈 사람을 데리고 너무 오래 이야기한 것 같군요.”
그는 내 말을 막으려는 듯 대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사님.”
“쉬어요. 더 회복하면 이야기합시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눕혀줄게요.”
나는 그런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냥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조금 회복한 뒤에 얘기하면 들어줄까.
그가 침대 버튼을 눌러 기울기를 서서히 조절했다. 침대가 완전히 눕혀지자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나와는 계속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근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부르도록 하세요.”
나는 일부러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미동이 없더니 내 머리를 살살 쓸어 넘겨주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잠시 멈춰 서 있다가, 이내 자리를 비웠다.
* * *
깊은 어둠에서 한참을 허우적댔다. 소용돌이 속으로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모두 구하려고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하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내 몸은 어린아이로 바뀌어 있었고,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에 고통이 목을 옥죄어왔다. 나는 넥타이로 목을 조르던 순간처럼 손을 목에 가져다 댔다. 팔을 교차하듯 목을 잡고 감싸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연으로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나도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번쩍 눈을 뜨기가 무섭게 참던 숨이 터졌다.
“하아, 하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어깨가 땅겼다. 수술로 움직이기 힘든 상체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어 그대로 힘을 뺐다. 눈을 감고, 감은 눈 위로 손등을 올려 눌렀다. 눈가가 시큰거린다 싶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급하게 닦아냈지만 계속해서 번져 나왔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최대한 눌렀다. 병실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음에도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겁이 났다. 정확하게는 이사님이 들을까 봐.
나는 한동안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과 베개를 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울다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제발 이번엔 꿈을 꾸지 않길 바랐다.
* * *
“아……. 죄송합니다.”
죽을 떠먹던 수저를 떨어뜨렸다. 옆에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사님은 수저가 떨어지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난 것 같다.
허리를 숙일 수가 없어 머뭇거리자 그가 간병인을 불러 새 수저를 가져오게 하고는 자신이 직접 떨어진 것을 주워 들었다.
“왼, 왼손이 익숙하지 않아서…….”
급히 변명을 붙이긴 했지만 이사님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른손 깁스만 풀 수 있으면 편히 먹을 텐데, 풀려면 일주일은 더 걸린다고 했다. 아까 그가 없을 땐 혼자서 잘 먹었는데, 저 시선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가 날 보살피고 나 대신 잡일을 한다는 사실이 더 날 무겁게 짓눌렀다. 말로는 그에게 죄책감을 지워주려고 뛰어들었다 해놓고는 정작 가슴속에 미안함이 쌓여가는 것은 나였다.
“속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새 수저를 받아 들며 슬쩍 눈치를 보는데, 이사님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젠 정말 떨어뜨리지 말아야지. 왼손에 힘을 꾹 쥐며 천천히 죽을 떠먹었다.
억지로 다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나는 무조건 그릇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먹었다. 빨리 퇴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사님의 보살핌이 필요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치가 보였다. 빨리 낫지 못하는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손끝을 손톱으로 괴롭혀댔다.
다행히 구토 증세는 많이 줄었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긴 했으나 애써 참으면 토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의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술 부위도 큰 문제 없이 아물고 있다고 했다. 난 이것만으로도 퇴원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의사한테 빨리 퇴원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밥 먹은 테이블을 치우기가 무섭게 그가 물었다. 꼭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 뜬 지 고작 닷새 됐다는 거 모릅니까.”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의사는 왜 그런 말을 다 전하는 거지? 또 혼이 날까 두려워 그를 흘긋댔다.
“완벽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요.”
“제가 퇴원하고 싶다는데 왜…… 말리십니까.”
“이 상태로 퇴원하면 몸 회복은 어떻게 하려고.”
“회복 안 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차피 제 상태 아니던 몸이다. 이사님이 번거롭게 병원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애초부터 쓸모없던 몸뚱어리였다. 내가 빨리 퇴원하면 그도 좋은 게 아닌가.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고, 내 수발 들어줄 필요도 없고.
“서도운 씨.”
그가 꼭 경고하는 것처럼 낮게 이야기했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억울해졌다.
“전 그냥, 귀찮으실까 봐…….”
그러자 그는 말이 없었다. 역시 귀찮았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빨리 나아서 퇴원해야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나만…… 빼고.
이사님은 회사로 돌아갈 것이고, 팀원들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일할 것이다. 나는 애초에 없던 사람인 것처럼.
나는 돌아갈 곳이 없구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게 이렇게 허탈감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그가 날 회사에 다시 불러줄 리는 없고, 애초에 없는 자리를 만들어 내가 낙하산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니까.
아르바이트는 모두 그만두었는데. 손이 이렇게 돼서……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관자놀이가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님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다. 아파하면 분명 계속 입원해야 한다고 할 테니까.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하세요.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네.”
역시 내가 빨리 낫길 바라면서…….
그가 바라는 대로 서둘러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몸 회복이 되면, 신장 수술도 진행할 겁니다.”
“……네?”
놀라 되묻는 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사님은 내 깁스한 손을 만지작댔다.
수술이라니. 내 계획엔 전혀 없는 일이었다. 신장 수술이라 함은 당연 이식 수술을 말하는 것일 텐데. 수술에 드는 돈은 어떻게 하고?
“저 수술 필요 없습니다.”
“이제 못 숨깁니다. 의사한테 다 전해 들었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이식 수술 진행하려면 다시 면역력을 조절해야 해서, 그 전까진 잘 먹고, 잘 회복하고. 체력 길러야 한다고 합니다.”
회복이 문제가 아니었는데. 수술비를 한 번에 감당하기엔 모아둔 돈도 없었고, 한 달에 버는 돈 중 정말 생활에 필요한 돈만 남기고 모두 빚을 갚는 데 써버리기 때문에 나눠 낼 여력도 없었다.
“저 수술할 돈 없습니다.”
지금 이 병원비도 갚을 생각에 눈앞이 깜깜한데.
“내가 모두 지불할 거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는 무슨 어이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눈썹을 움틀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지 마세요, 이사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사고로 다친 것도 아니고 제 문제잖아요. 제 수술비를 왜 이사님께서…….”
“그게 중요합니까, 지금.”
중요했다. 또다시 이사님에게 내 존재가 빚이 되는 문제였다.
“……보상한다고 했잖아요.”
보상. 그 단어가 가슴을 텅텅 때렸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 보상이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임을 나는 이제 알아챈 것이다.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와 그 죄책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어리석었다. 망가진 몸에 대한 동정을 받는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보상도 필요 없고, 수술비도 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수술을 안 하겠다는 소립니까.”
“네. 안 받을 겁니다.”
“안 받으면.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서도운.”
죽는 것이라고, 그는 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각오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전…… 이런 좋은 병실도 필요 없고, 간병인도 필요 없어요. 과한 치료도 필요 없고……. 이사님께 갚을 능력도 안 됩니다.”
“갚을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안 갚겠습니까. 제 빚을.”
“그냥 좀, 받으면 안 되겠어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더니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엄지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또 그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왜 병원비를 내준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자꾸 날 살리려고 하는 거야.
몇 번이나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시간 쓸 필요도 없고, 귀찮은 뒤치다꺼리 할 필요도 없고. 망가진 몸 고쳐 보겠다고 돈 쓰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회복시킬 필요 없다고.
계속 이야기하는데 대체 왜. 내 말은 안 들어주는 거야.
“혹시 저한테 따로 원하는 게 있으신…….”
거기까지 말을 내뱉고 나자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계약……. 아직 파기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분간은 서도운 씨 안 부를 겁니다.’
내가 몸이 낫기 전까진 섹스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하지 않은 지 정말 오래되었고, 빨리 내 몸을 회복시킨 뒤 다시 그걸 하길 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그거면 앞뒤가 맞았다.
“혹시 ……섹스하고 싶으신 거면.”
아픈 몸을 가지고 그런 짓을 하기엔 영 껄끄러울 것이다.
“서도운.”
“제가 입으로라도…… 해드릴까요?”
“……서도운.”
그러자 이사님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얼음이 유리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화가 나다 못해 나에게 증오심이 생긴 것처럼.
몸이 이래서 섹스는 무리겠지만 입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오럴 섹스를 좋아하는 편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아 한 소리였는데. 표정을 보니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어찌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듯 그가 뒤를 돌며 한숨 쉬었다. 또 잘못을 했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당장이라도 손찌검이 날아올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화낼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날…… 더 이상…….”
얼굴을 반쯤 가리듯 눈가를 문지르던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 들게 만들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건 서도운 씨가 빨리 낫는 것뿐입니다.”
이런 기분이 뭘까.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빨리 낫고, 그다음은? 나는 그걸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비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끝까지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의 끝없는 한숨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대화를 차단하듯 내 어깨를 기울어진 침대로 살며시 눌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힘을 빼고 기대자 버튼을 눌러 천천히 침대를 눕혔다.
잠들기엔 조금 이른 저녁 시간이었지만 머리를 대고 누우니 졸음이 밀려왔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이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이내 꺼지는 전등과 함께 나도 눈을 감았다.
* * *
식사가 서서히 일반식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간이 세지 않고 부드러운 반찬 위주로, 위에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 식단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찜도 자주 올라왔다. 다른 건 남겨도 계란찜은 말끔히 먹었다.
젓가락을 못 쓰는 날 위해 상 위에 항상 포크가 올라오는 게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나 때문에 일거리가 하나 더 는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간병인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몰래 휠체어를 타고 옥상으로 나가곤 했다. 아직 다 붙지 않은 갈비뼈 부근이 무척이나 시큰거려 팔을 움직이기가 어려웠지만 병실에 계속 붙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더 나으면 목발만 짚고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남은 병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니까. 이사님의 무서운 감시하에 그냥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대부분이었고, 아니면 잠을 자든가, 가져다준 책을 읽기도 했다. 심하게 움직이면 절대 안 된다고 하도 주의를 준 탓에 그의 앞에선 뭘 할 수가 없었다.
“…….”
이렇게 옥상에 올라와 바람을 맞으며 사색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일탈이었다.
‘섹스도 돈도 아니면 대체 뭐지.’
그리고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시간이 훌쩍 간다.
내 머리로는 이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내가 이사님에게 줄 수 있는 건 저 둘뿐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것이다.
“서도운 님!”
나온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간병인과 간호사가 내가 없어진 걸 알고 찾으러 온 것이었다.
“또 이렇게 나와 계시면 어떡해요.”
“죄송해요, 병실이 답답해서…….”
“휠체어는 또 어디서 구하셨대. 괜찮으세요? 아픈 곳은 없으시고요?”
간호사가 내 수술 부위와 갈비뼈 부근을 가볍게 더듬으며 통증이 있는지 살폈다. 시큰한 감이 있었지만 그냥 고개를 저었다.
“또 이렇게 링거 막 뽑으시고.”
그가 내 손등을 살피며 가볍게 혼을 내듯 말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에도 깁스를 하고 있어 저 링거까지 챙겨 나올 손이 부족했다. 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도 알 것이다. 내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걸.
“바람이 차서 감기 걸릴 수도 있어요. 어서 내려가요.”
나는 그렇게 간병인의 손에 이끌려 다시 병실로 내려가야 하고 말았다.
병실엔 오늘 오지 못한다고 했던 이사님이 와 있었다. 그는 막 병실에 들어오는 날 보며 화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딜 다녀오는 겁니까.”
간병인마저 그의 눈치를 보며 나를 침대 가까이 데려갔다. 천천히 침대에 몸을 올리자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잘 정리해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잠깐 산책…….”
“산책 가는데 링거를 이렇게 억지로 뽑아두고 가요?”
그는 옆에 널브러진 긴 호스를 보고는 손가락질해대며 나에게 화를 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했다.
“정말 그냥 옥상 다녀온 거예요.”
이사님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리자 그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한숨 쉬었다.
“어디 사라지기라도 한 줄 알았어.”
이내 읊조리듯,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이 나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많이 심심해요?”
그러고는 링거를 뽑은 손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핸드폰이라도 가져다줘요?”
내가 사용하던 것은 사고 때 모두 박살 나 고장 났다고 한다. 새 핸드폰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받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통화할 곳도 없는데, 뭐.
오랫동안 보지 못한 팀원들이 보고 싶긴 했으나, 그가 병문안을 막았다고 한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자신과 의료진, 간병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하긴, 굳이 상전처럼 병문안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내 주제를 잊지 않기 위해 끝없이 속으로 세뇌했다.
“그냥 TV 보면 됩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TV 핑계를 댔다. 탁자 위의 리모컨을 가져와 대뜸 전원을 틀고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링거 다시 꽂아야 하니까 잠시 기다려요.”
이사님은 간호사를 부르러 병실을 나갔다. 평소처럼 호출벨을 눌러 부르면 됐을 텐데. 지금은 내가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다. 하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내가 얄미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TV를 응시하며 리모컨 버튼만 꾹꾹 누르다, 익숙한 이름을 말하는 뉴스 채널에서 손이 멈췄다.
―…사태라고 들었는데요, 박주영 기자. 침묵으로 일관하던 청영이 오늘 오전, 돌연 기자회견을 연 이유를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래도 주가의 문제가 크지 않을까 싶은데요. 청영물산 정영일 본부장의 구속 이후로 물산뿐만 아니라…….
기자회견?
―지금 보시는 화면이 오늘 오전 기자회견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기자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TV 화면이 뚝 꺼졌다. 놀라 옆을 돌아보자, 언제 돌아온 것인지 이사님이 그새 내 리모컨을 들고 가 TV를 꺼버렸다.
분명 화면에 이사님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TV를 삿대질하며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가만히 리모컨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볼 거 없어요.”
“오늘, 오늘 기자회견이 있으셨습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자회견까지 열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기자회견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약…….”
나는 그저 회사 일이 바쁘거나 아니면 약혼 준비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비밀에 부치고 있던 일이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바보 같았다. 정영일이 그렇게 교통사고를 사주한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약혼이 멀쩡히 진행될 리가 없었을 텐데. 조금 미뤄졌겠지. 말을 얼버무렸다.
“저는…… 몰랐어요.”
“얘길 안 했으니까.”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아픈 게 무슨 벼슬이라고 이렇게 바쁜 그를 계속 붙들어두고 있는 거지. 손으로 시트를 꾹 쥐었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입원하기 전엔 이사님의 비서였는데……. 지금은 아무 쓸모 없는 환자라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그 작은 머리로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냥, 본부장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해서요.”
“직위 해제됐으니 그렇게 안 불러도 됩니다.”
직위 해제…….
“결과가 전부 나오면 알려주려고 했는데. 일단 조사는 막바지입니다. 이미 나온 증거들만으로도 확실해서 더 볼 것도 없겠지만.”
그는 과연 괜찮은 걸까. 자신의 형이었다. 지금껏 믿고 지내던 형제가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자신을 노렸다는 것도 충격이었을 텐데.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거기다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오늘의 기자회견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처벌로 끝나게 하진 않을 거니까, 마무리 조사 과정에서 뭐라도 더 나오면 좋겠죠. 나 믿고 기다려요.”
괘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편히 기댈 곳은 있는 걸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했다.
사실 그가 정영일의 일은 반쯤 묻어버리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이었으니 어느 수준에서 정리하고는 말아버릴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강경했다.
당연히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형제여도 쉽게 용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도 좀 듣고. 제발.”
이사님은 병실로 들어오는 간호사를 보고는 말했다. 간호사는 내 손등을 살피더니 더 이상 꽂을 곳도 없다며 내 발에 링거를 꽂고 나갔다. 이래서야 움직이는 게 더 불편해지는 것 아닌가. 나는 침울해졌다.
“자업자득입니다.”
그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짧게 이야기했다. 나는 심통이 났지만 나지 않은 척하며 이불을 팩 끌어다 덮었다. 이불 속에선 한참이나 툭, 툭 손톱 끝을 뜯는 소리가 났다.
* * *
“신경 손상이 크지 않아서 경과가 좋아요.”
오른손의 깁스를 푸는 동시에 재활 치료에 들어갔다.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의사는 긍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정말 경과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희망을 주기 위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그저 그 무거운 깁스를 풀게 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물론 치료가 끝나면 다시 붕대를 감아두어야 하긴 했지만, 전보다 훨씬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둔하기만 하던 손끝도 감각이 돌아와서 오늘은 젓가락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
“저…… 선생님.”
경과를 차트에 적고 나서 다시 붕대를 감아 테이프로 고정시켜 주는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네, 하고 내 말을 기다리는 사람을 두고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혹시 저 피아노…… 칠 수 있을까요?”
말하는 중간에도 뜸을 들여가며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재활 치료 첫날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겁이 나서 물어보질 못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겁먹었는지 모르겠다.
“피아노요? 전공하시는 건가요?”
“…….”
그래, 전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프로 피아니스트인 것도 아닌데 왜 겁을 먹는 거지. 모든 걸 각오하고 뛰어들었다고 해놓고 내심 멀쩡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샜다.
“완전히 사고 전으로 돌아가는 건 힘들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피아노는 포기해야겠다.
내 사정에 피아노는 사치였다. 갚을 빚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몸이 다 회복되면 또다시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해야 하는 생활이 반복될 것이다.
괜한 미련으로 자꾸 주제넘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더 이상 피아노는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오히려 이 사고로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으니 더 다행이 아닌가.
“이사님껜 아무 말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소한 증상까지 이사님에게 다 일러바치는 사람들이 미워 나는 미리 당부했다.
“음, 네. 알겠습니다.”
“꼭이요.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절대요.”
그러자 의사는 잠시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치더니 말했다.
“이사님께서 환자분의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증상에 대해 완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증상은 괜찮은데……. 제가 피아노 얘기 했다는 건 전하지 말아주세요.”
이사님이 준 피아노도 돈이 없어 팔아 버렸는데, 이제 와서 피아노에 미련이 남은 것처럼 굴면 분명 그는 어이없어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이사님 아시면 혼날 수도 있어서요.”
이건 증상도 뭣도 아니니 굳이 얘기하지 않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했는데 말을 전할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
의사는 어쩐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덮어두었던 차트에 대고 또 무어라 몇 자 적기 시작한다. 나는 깊게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병실에 돌아오자 이사님이 병실에 와 있었다.
잠깐 치료 받는 사이에 올 줄은 몰라 마음이 급했다. 침대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에 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치료 잘 받았어요?”
“네,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요.”
그는 내가 침대에 자리하자마자 내 손 상태를 확인했다. 붕대에 감싸진 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내가 아파하지는 않는지 내 표정을 살폈다.
“…….”
왜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돌볼까. 역시 어릴 적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이사님은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쓸모없는 나까지 마음 써주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입술이 절로 다물리고, 힘없는 숨이 새어나가는.
그렇게 다정하니까, 자꾸만 내가…….
“저녁 식사 합시다.”
이사님은 문을 두드려 들어오는 간병인을 보고 말했다. 언제 저녁때가 다 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니 세상이 깜깜했다.
가을 날씨로 접어들면서 놀랍도록 빠르게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날짜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추운 겨울이 올 것처럼.
“이사님은 식사하셨습니까.”
“약속이 있어서 먹고 왔습니다.”
“아…….”
아마 약혼 상대가 아닐까 싶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죽거리려는 입술에 억지로 수저를 물었다.
아무리 이사님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죄책감 때문에 나에게 잘해주는 것임을 안다. 그의 천성이, 나 같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동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그 마음이 진심이 되어 날 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의 약혼만 떠올리면 이렇게 가슴이 흐려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난 대체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그가 날 좋아할 일은 없다. 평생 가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껏 한 오해는 정말 오해였다고 한들, 난 여기저기 몸을 팔고 다니는 고아에 억대 빚을 진 사람이라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한심하고, 멍청하고. 모든 면에서 이사님에 비해 한참이 모자란, 그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목숨을 바쳐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알고 보니, 좋아하기까지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오히려…….
“왜 안 먹어요. 입맛이 없어요? 아니면 혹시 속이 안 좋습니까.”
오히려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 아닙니다.”
역시 평생 숨겨야 할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숨기는 것뿐만 아니라, 어서 접어야 했다.
급하게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나약해진 상태라서 자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빨리 회복하자. 그리고 퇴원해서 더 이상 그의 보호 아래 있지 말자.
“큽, 콜록…….”
평소보다 빠르게 밥을 밀어 넣다 결국 사레에 들리고 말았다. 가슴팍을 툭툭 치며 기침하자 그가 혀를 차며 물을 따라 건넸다.
“괜찮아요?”
“예, 괜찮, 습니다.”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울면 안 된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고, 억지로 마른침을 삼킨 뒤에야 그가 건네는 컵을 받아 들었다.
“낮에 별다른 일은 없었고요.”
“네.”
“또 몰래 나가서 사람들 놀라게 하진 않았습니까.”
내가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젠 몰래 나갔지만, 오늘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오늘 일이 있어서 오래 있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던 때 그가 말했다.
“참고인 조사 때문에. 낮엔 회사 일로 시간이 안 나서요.”
“아, 아아. 네…….”
약혼 생각만 하던 나는 머쓱하게 뒷덜미를 문질렀다.
“밥 다 먹을 때까진 있겠습니다.”
“아니에요, 바쁘시면 가셔도 됩니다. 먹고 누워 자는 것밖에 안 하는데요…….”
어색한 젓가락질로 반찬을 뒤적거리다 밥 위에 얹어 한 술을 크게 떠먹었다. 그렇게 서서히 식판 위의 음식들을 비우고 있는데, 그가 내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오이는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오이 반찬이 나올 때마다 깨작거리며 남긴 것이 벌써 몇 번이다. 이번엔 다른 반찬에 곁들여 나온 채 썬 오이를 젓가락으로 슬쩍 밀어내 접시 구석으로 보내는 꼴을 보고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음……. 네.”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편식하는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갑자기 반찬을 집는 손이 느려졌다. 계란말이의 끄트머리만 조금 떼어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영양사가 서도운 씨 상태에 맞춰 짠 식단인데. 웬만하면 다 들어요.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내 식사는 병원에서 준비되는 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 뜻은 그가 영양사를 따로 고용했다는 의미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죄스러움이 더해졌다. 지금껏 편식하는 내가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고개가 절로 조아려졌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얘기할까? 믿어줄지 모르겠다. 내가 먹기 싫어해서 괜한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설령 이사님이 믿어준다 해도 번거로워 싫어할 것 같았다. 기껏 준비해 준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다니, 가지가지 한다고 경멸 어린 시선이 떨어진다면…….
그렇게 상상하자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렇게 싫으면 억지로 먹을 필요 없습니다.”
내가 너무 침울해했는지 이사님이 달래듯 말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가로저었다. 그리고 밀어 치워두었던 오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알레르기 증세가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었으니 대충 먹고 그가 떠나면 약을 받아먹으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어릴 적 빼고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오이를 입에 넣었다.
몇 번 우물우물 씹는데 불쾌한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오이 특유의 향도 코로 넘어왔다. 알레르기는 둘째 치고 맛부터가 내가 좋아하는 맛이 아니었다.
한참 만에 목으로 밀어 삼켰다. 중간에 뱉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으나 그가 지켜보는 와중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억지로 먹었다. 불쾌한 맛을 없애기 위해 급히 밥도 떠먹고, 다른 반찬도 집어 먹었다.
그렇게 무사히 식사를 마쳤다.
마지막 한 술을 뜨고 물을 마시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밥을 애매하게 남기거나 하면 그의 표정이 무척 무섭게 굳어지는데, 다 먹으면 이렇게 칭찬하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이 손길이 기분 좋았다. 밀어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올 테니까 일찍 자요.”
“알겠습니다.”
이사님이 시계를 확인하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김 실장님도 대동하지 않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죄스러움이 더해졌다.
문밖으로 이사님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간병인이 테이블을 치우려고 다가왔을 때였다.
“콜록…….”
갑자기 잔기침이 일었다.
목구멍에 간지러운 감각이 피어올라 몇 번 기침하며 해소하려고 해보았지만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안쪽은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숨통이 서서히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탁탁 치며 토해내듯 기침하자, 간병인이 당황하며 내 등을 두드렸다.
“괜찮으세요?”
체한 줄 알고 등을 토닥이던 그가 내 얼굴마저 열이 오르듯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급히 호출벨을 눌렀다.
“윽…….”
증상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나 심하게 나타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엔 그냥 조금 간지럽고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수준에서 그쳤었는데. 이사님이 이 소식을 모르길 바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달려온 의사는 내 상태를 확인하더니 알레르기인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빠르게 약을 처방했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약을 흡수하기가 무섭게 증세가 가시기 시작했다. 답답하게 부어올랐던 목구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빠르게 쿵쾅대던 심장도 차츰 진정되었다.
“점막이 붓는 증상은 기도가 막힐 수도 있기 때문에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어요.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지는 이제 검사를.”
“……오이요.”
마침내 정상적으로 숨이 쉬어지기 시작하자 내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오이요? 알고 계셨나요?”
“원랜 이렇지 않았는데, 그냥 두드러기만 올라오고 말았었거든요.”
생소한 증상이어서 물었더니, 의사는 몸 상태에 따라 다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병치레를 하다 보니 몸이 약해져 이전과는 다르게 더 증상이 심해진 것 같았다.
계속해서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의사에게 이제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이사님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
“뭘 말하지 마.”
하지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사님이 등장했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자 급히 뛰어 올라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가 보였다. 거칠게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성큼성큼 침대로 가까워지는 걸음걸이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빼며 목을 움츠렸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알레르기?”
“네, 오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그는 곧장 앞으로 다가와 내 양 볼을 손바닥으로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제 막 약을 흡수한 터라 아직 얼굴에 울긋불긋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약을 빨리 주입해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의 말에도 이사님의 차갑게 굳어진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이글이글 타는 것처럼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나도 모르게 사선으로 눈을 내렸다.
“알고 먹었습니까.”
마침내 그가 내 얼굴을 놓아 주었지만, 동시에 질문이 박혀들었다.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나 피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서도운.”
그가 침대 프레임을 손으로 탁 짚으며 말했다.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또 날 속일 생각입니까.”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다. 평소와 다른 증상 때문에 들킨 것이지, 내 생각대로 그가 나간 뒤 약을 타 먹었더라면 정말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바보 만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왜 이렇게 미련한 짓만 해.”
이사님은 화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며 말했다.
나도 안다. 미련한 짓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입으로 다시 확인받으니 더 우울해져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거기다 화를 내는 이사님을 보니 무서웠다. 나는 혼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어떻게든 혼이 날 운명이었는가 보다.
“죄송합니다……. 혼날까 봐…….”
“내가 그런 일로 혼낼 줄 알았습니까?”
“편식, 한다고…….”
이사님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 쉬었다.
“귀찮으실 수도, 있고……. 기껏 준비해 주셨는데.”
“서도운 씨를 위해서 준비한 건데 서도운 씨한테 잘 맞는 게 제일 중요하지, 내 기분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의 말에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사님은 또다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왜, 후우. 아닙니다. 더 얘기해 봤자…….”
이사님은 이마를 짚으며 골똘히 생각하다 이내 의사를 내보냈다. 나는 그 신호가 그가 화를 내겠다는 신호인 줄로만 알고 겁먹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아요.”
이사님이 침대 프레임을 다잡으며 말했다. 나와 눈을 마주하려는 듯 허리를 살짝 숙이기에 그가 바라는 대로 조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치 보듯 바라본 그는 미간을 한껏 구기고 있었다. 무언지 모를 감정이었다.
“그런 거로 화나지도 않고, 귀찮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사님은 이내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내가…… 그렇게 느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겁을 먹게 한 자신의 잘못이라며, 얼굴을 가리듯 눈가를 문질렀다.
“아니, 아니에요…….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잘못한, 제가 미련해서…….”
이사님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사과할 줄은 몰랐다. 이사님의 잘못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하지? 나는 손까지 내저어가며 더듬더듬 부정했다.
“제가 앞으로는, 잘 챙겨 먹고…….”
“챙겨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못 먹는 음식이 있거나 몸에 이상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를 해요, 제발.”
제발……. 그가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생소한 상황에 더욱 당황스러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선이 그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만 맴돌았다.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듯이 이사님은 또다시 한숨만 쉬었다.
“나한테 또 숨기는 것 없습니까.”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까.”
그가 재차 물었다.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사님에게 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젠 정말 들켜선 안 된다.
“없어야 할 겁니다.”
마지막 경고를 하듯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쿡 찔렀다. 소심하게 끄덕이는 고개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이사님은 십 년 치 수명을 오늘 당겨 쓴 기분이라며 뻐근한 뒷덜미를 주물렀다.
“오이는 다음 식사부터 빼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이야기해요.”
“딱히…… 없습니다.”
나는 이 상황에서 갑자기 베리베리필드 도넛이 먹고 싶었다. 단것이 갑자기 확 당겼으나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칠성급 호텔 주방장이 서도운 씨 하나 먹을 음식 만들겠다고 대기 중입니다. 정말 없습니까?”
“계란찜이…….”
“하아.”
이사님은 묻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한숨을 쉬며 끌어 내렸던 넥타이를 다시 당겨 맸다.
“내가 없을 때 저 벨을 누르면 나에게도 연락이 오니까, 숨길 생각은 접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벨은 누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사님은 내 턱을 쥐고 얼굴을 다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김 실장. 오늘 참고인 조사, 날을 미뤄야겠습니다. 서도운 씨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내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그는 날 노려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또 한 번 그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