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날이 점점 추워짐에 따라 병실의 온도도 따뜻하게 조절되기 시작했다.
고작 기온이 몇 도 떨어진다고 해서 훌쩍 감기에 걸리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이사님은 내 몸이 약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창문도 자주 열지 말라고 지시했다.
요 며칠 비가 오면서 싸늘해지긴 했다. 나는 이제 굳이 그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몸이 완전하게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수술 부위는 아문 지 한참이었고, 날 괴롭히던 갈비뼈 부근의 통증도 이젠 잠잠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장이었지만, 입원한 뒤로 이전에 보이던 증상은 많이 사라졌다. 옆에서 의료진이 사소한 변화에도 긴밀하게 반응하며 관리해 준 덕분이었다.
의사는 회복이 순조로워 다행이라며 기뻐했지만, 나는 내 몸이 어떻든 큰 관심이 없었다. 지금 내 모든 신경은 청영에 쏠려 있었다.
날을 따져 보니 사고로부터 한 달이 넘게 흐른 시점이었는데 아직도 세상은 청영의 사건사고로 시끌벅적했다. 정영일과 그 깡패 일당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면서 뉴스거리가 끝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정영일이 제 아버지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교통사고를 사주했다는 것은 아직도 끔찍한 충격이라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종 크고 작은 횡령 혐의도 불거지고, 자연스럽게 과거에 애써 묻었던 폭행사건 등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직접 일을 실행했던 깡패 무리는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와 더불어 법의 경계를 넘어선 고리대금업까지 걸려 수사를 받고 있었다.
“하아.”
나는 보던 TV를 끄고 한숨을 쉬었다. 펼친 테이블에 턱을 괴고 메모지 위를 펜으로 끼적거리며 남은 빚을 계산하고 있었다.
깡패 조직은 뉴스에서는 완전 소탕했다고 대서특필을 할 정도로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우두머리들은 전부 잡혀 들어갔다고 보면 되었다. 아마 깡패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돈을 갚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전부 소탕되었다고 해도 그와 연결된 다른 조직에서 받아내려고 찾아오진 않을까, 뭐 그런 걱정이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인가. 숫자를 적어나가던 펜이 귀퉁이에 구불구불한 선을 마구 그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내 머릿속과 꼭 닮았다.
나는 한숨만 폭폭 내쉬다 뒤로 벌러덩 누웠다. 설령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한들 이번 달은 돈이 없어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잠깐 누워 있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이사님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급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누워 있어도 돼요.”
“아, 아니에요. 방금, 잠깐 누운 건데.”
계속 벌러덩 누워 있었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다. 누워 있으나 앉아 있으나 침대 위에서 가만히 상전 노릇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나한테는.
뒷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어깨를 가볍게 털어냈다. 바깥에 비가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가 많이 오나요?”
“조금요.”
이런 날에도 굳이 여기까지 걸음 하다니. 대신 빗방울을 털어주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 소심하게 손을 뻗었으나 그는 내 손을 보지 못하고 손수건을 다시 접어 넣었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이건 뭡니까.”
그가 테이블 위의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엇……! 내가 가져갈 새도 없이 그가 메모지를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훑었다. 낙서하던 것을 그대로 올려두고는 그가 오기 전에 치운다는 걸 깜빡했다.
“그냥 낙서한 겁니다.”
“숫자뿐인데요.”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수상한 숫자의 나열뿐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털어놓았다.
“대부업체 빚이요.”
“……정영일 쪽 사람 말하는 겁니까, 그 조폭들.”
“예.”
남은 원금과 이자. 이번 달 갚아야 하는 돈. 만약 밀릴 경우 다음 달 내야 하는 돈. 대강 계산해 이리저리 낙서하듯 적어둔 것이었다.
“갚을 필요 없습니다, 서도운 씨. 이미 잡혀간 사람들이잖아요.”
“혹시나 해서요. 그 조직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갚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사님은 그 종이를 구기고는 근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그 사람들한테 갚을 필요 없습니다. 그거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되고.”
그의 말 중간에 머뭇거림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게 후회스러워.”
이사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진작 이랬으면 되는 걸. ……그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이 너한테 상처를 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자조적으로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그는 내가 몸을 팔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걸 순간 잊을 뻔했다.
“아니요, 전 오히려…….”
그 계약으로 우리가 어떻게든 묶일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그렇게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좋아한다고 대놓고 광고를 하는 것 같아서.
이사님은 말이 없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그 위를 쓸며 말했다.
“정영일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겁니다. 감형되지 않도록 내가 끝까지 힘쓸 겁니다. 빚도, 불안하면 내가 대신 갚아 주겠습니다.”
“그럼 이사님께 갚을 빚이 느는 거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나한텐 다시 갚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팔을 들었다. 형의 움직임에 내가 살짝 움찔거리는 사이 손이 볼 위로 올라왔다. 엄지로 눈가 밑 광대를 살살 쓸었다. 왜 자꾸 이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건지 모르겠다.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그렇게 느끼지 말아요. 내가 주는 대로 잘 받아서 쓰면 됩니다, 서도운 씨는.”
그렇다고 몸을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이사님.”
건강이 회복되고 나면 그 값어치만큼의 섹스를 원할까 봐 두려운 게 사실이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중엔 말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깡패도 그랬었다.
“제가 죄책감 가지라고 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런데 이사님의 눈동자를 보면 자꾸 그런 게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 깊은 눈동자가 꼭 다정함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 그것도 보상인가요……?”
정말 나에게 바라는 것 하나 없는 것만 같다.
“아니요.”
“…….”
“내가 그러고 싶어서요.”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이럴 때마다 그를 향해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밤마다 정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잠들면서, 밤이 지나 그를 다시 만나면 자연스럽게 심장이 뜨거워졌다.
마음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위험했다.
“갚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안 주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만지작대던 이사님의 손에서 피해 나오듯.
손이 살짝 떨어져 나가자 그대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침대에 눕는 시늉을 했다.
“피곤해서…….”
“그래요. 더 자요.”
이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눕기가 무섭게 그가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저녁 먹을 때쯤 다시 깨워 주겠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사님은 조용히 움직여 병실 불을 끌 뿐이었다. 그는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내가 움직임이 없을 때까지 지켜보다 한참 만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그가 나가고 난 다음에야 서서히 눈을 떴다.
피아노와 같이, 내가 하고 있는 주제넘은 기대가 바로 이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잡혀 들어간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완전히 달랐다. 머리를 빗어 넘겨주던 손길도, 내가 조르면 못 이긴다는 듯 입을 맞춰주던 부드러운 입술도.
다시 만난 이후로 이사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마음을 품게 되는 게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는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나빴다. 모든 게 내 거짓말로 일어난 일이다.
머릿속에 얽혀드는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이사님이 잘 대해주면 대해줄수록 악몽을 꾸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계속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뒤로한 가족들에 대한 죄악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전부 포기해 버리고 싶다. 몸이 편해지니 자꾸 주제넘은 생각만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손톱을 죄다 물어뜯고 있었다. 손가락 끝의 여린 살이 뜯기는 아픔에 정신을 차려보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청영물산 정영일, ‘무기징역 선고’…… 항소 기미 없어
―사법부, 13년의 과오…… 그 폐해는?
머지않아 정영일의 재판 결과가 나왔다. 이사님이 말했던 대로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청영의 일만 다루기 바빴다. 다신 없을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너도나도 떠들어대었다.
사실 긴가민가하긴 했다. 그래도 청영의 사람이라고 감형되거나 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무기징역이 나오다니.
눈은 TV 속 뉴스 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시야는 흐렸다.
시원섭섭한 감정이었다. 애초에 다 포기하고 달려들었었기 때문일까. 이렇게까지 정영일이 처벌받을 줄 몰랐고,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었는데.
자그마치 13년. 청영의 이름 아래 고개를 조아리고, 애써 피해 다니던 그 긴 기간. 죄인으로 살아오며 무거워진 어깨가 이제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서 보고 계셨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것 같다. 진범을 잡는 데 내가 기여한 바가 있으니, 자랑스럽다고 칭찬해 주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해가 풀린 것에 기뻐 셋이 부둥켜안고 울었으려나.
돌아가신 지가 하도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 아버지는 너무 어릴 적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 그랬다.
왜 이제야 풀린 걸까. 왜 이제야…… 그 억울한 죽음을 애도할 수도 없이.
“읏…….”
눈물이 또르르 흘러 손등 위로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훌쩍임을 최대한 내리누르고 볼을 훔치는데, 때마침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이사님이었다.
“서도운 씨.”
환자복 소매로 급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예, 예.”
“…….”
멀쩡한 척하며 대답했지만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내 근처로 다가왔다. 눈치를 보듯 흘긋 쳐다본 이사님의 표정은, 화가 난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이 뻗어왔다. 목과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우, 운 게 아니에요. 그냥 눈을 좀 세게 문질렀습니다.”
눈이 질끈 감겼다. 누가 들어도 변명 같은 소리를 잘도 덧붙여댔다.
그냥 넘어가기로 해주었는지 다행히 손이 날아오지 않았다. 한쪽 눈을 슬쩍 떠 그를 살피자 허공에 뻗어 있던 그의 손이 주먹 쥐어지며 이내 거두어졌다. 간병인이 보고 있어 때리지 않은 걸까.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은지 굳어진 표정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어쩌지…….
“주의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사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는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고는,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TV를 꺼버렸다. 망설이듯, 잠시 그렇게 꺼진 TV를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울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양팔을 살짝 벌리듯 들어 올렸다. 내가 놀라지 않도록, 뻗는 팔에 공격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
그렇게 이사님의 품 안에 안겼다.
넓고 따뜻한 품에 얼굴이 폭 파묻혔다. 그의 손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고 내려가 어깨를 둥글게 쓰다듬었다. 죄송합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순간 잘못 들은 것인가 착각할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한 말이 맞는지 다시 확인할 것도 없이, 같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내려앉았다.
“미안합니다, 서도운 씨.”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도 덩달아 이사님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함부로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나 하나 빼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 * *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날의 아침이었다.
상처 부위를 간단히 검진받고, 영양 상태에도 이상은 없는지 확인했다. 신장 기능이 더 악화되지는 않았는지 검사한 뒤에, 이어진 순서로 손 재활 치료를 받으러 내려갔다. 마침 옆에 있던 이사님이 모든 과정에 함께했다.
드디어 손 붕대를 모두 풀어도 되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약속받았던 일이기에 오늘 치료만을 기다렸다. 거의 정상에 가까운 움직임을 하는 손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재차 주먹을 쥐어 보이며 치료실을 나왔는데, 의사는 내가 나가기가 무섭게 이사님을 잠시 안으로 불렀다.
그는 머지않아 다시 나왔으나,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내가 전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전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가끔 이사님이 자리를 비울 때면 치료를 몇 번 빼먹은 적이 있는데 그걸 일러바친 걸까.
“상담 한 번 받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시 병실에 돌아오자마자 이사님이 꺼낸 말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이야기였다. 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놀란 모습을 그대로 내보였다.
“무슨 상담을…….”
정신과라니. 내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걸까? 이사님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가, 제가 이상해 보이십니까.”
“아니요. 정신과라고 해서 이상한 게 아닙니다.”
“굳이 받을 필요 없습니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스스로 휠체어를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의사가 권유한 일입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손에 상처가 났다고 하던데요.”
이사님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빨갛게 살갗이 벗겨진 것을 보며 쯧, 혀를 찼다. 강박적으로 물어뜯는 것이면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앞으론…… 안 그러겠습니다.”
내가 슬쩍 손을 빼내려고 하자 이사님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이 정도 일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할 수 있었다.
“전 멀쩡해요, 이제.”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치료받을 필요 없이 멀쩡했다. 트라우마 같은 것도 없었다. 정신과 치료가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받기 싫었다. 상담을 받으면 정말 내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나중에도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자꾸 날 아프다고 생각하는 이사님에게 이상하게 조바심이 났다.
“이사님, 저한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쁘실 텐데…….”
소심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또다시 손끝을 잡아 뜯으려다가 급히 이불 밑으로 숨겼다.
“서도운 씨가 회복하는 게 나한테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뭐…….”
이제 거의 다 회복했는데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사님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난 서도운 씨가 그렇게 나을 의지 없는 것처럼 구는 게 제일 겁납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표정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쏟아지는 시선을 가만히 받고 서 있다가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사선으로 피했다. 어쩐지 찔렸다.
정영일이 그런 판결을 받기가 무섭게, 신약 개발에 대성공한 바이오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당연한 추락을 예상한 세간의 추측을 완전히 뒤엎듯, 이사님은 시기를 노려 관련 소식을 터뜨린 것이다.
정영일의 무기징역 판결로 한참을 떠들 것 같던 사람들은 이제 노선을 틀어 신약에 대해서만 보도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라고, 또 다른 역사를 썼다고 앞다투어 기사를 내기 바빴다.
이제 청영 그룹에 관한 부정적 인식은 곧 걷히게 될 것이고, 그럼 이사님은 약혼을 준비하게 되겠지.
내가 그의 약혼이 조금이라도 늦어졌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하는 건 전혀 모를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서도운 씨.”
“…….”
“지금 나한텐 서도운 씨가 최우선이니까.”
이러다간…… 정말 홧김에라도 좋아한다는 말을 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 * *
이사님은 얼마 전 이야기했던 대로 새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매끈한 핸드폰 상자를 손에 쥐여 주며 언제든 전화를 걸어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바쁜 그를 굳이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막상 전화를 걸면 할 말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만지작대며 가지고 놀다가 실장님과 대리님께만 따로 연락을 했다. 역시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자 회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르겠다며 사내에 떠도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대리님은 이야기의 중심에 항상 내가 끼어 있다며 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어쩐지 부끄러워 귓가가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병문안을 꼭 가고 싶었는데 이사님이 출입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다음 주에 퇴원하는 대로 찾아뵙겠다고 대답했다.
말한 대로, 이제 퇴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오면 곧장 상태를 보고 퇴원하기로 했다.
내가 병원 안에서 사는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뀐 모양이다. 몸이 다 나으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막 전화를 끊은 순간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어…….”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누구인지 인지하는 순간,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모님.”
어릴 적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모님, 그러니까…… 이사님의 어머니였다.
사모님은 밖에서 출입을 막는 사람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병실로 들어왔다. 함께 따라 들어온 가드가 화려한 과일 바구니를 옆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 떨며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섰다.
“오랜만에 보네요.”
대답을 하려는데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일 뿐이었다.
“다리가 아파 보이는데, 앉지요.”
“네, 네…….”
사모님은 근처 소파로 걸어갔다. 나는 당황해 목발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절뚝이며 뒤따라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어색하게 무릎을 모으고 두 손을 주먹 쥔 채로 그 위에 올려두었다.
“곧 해일이 올 거 아니까 서론 없이 본론부터 이야기할게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내 아들이 서명현 실장 가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것, 그리고 그간의 모든 오해에 대해서…… 내가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사모님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사, 사모님.”
“어떻게 사죄해도 풀리지 않을 일인 것은 알지만,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나가는 것은 인간 된 도리가 아닐 것 같아서요.”
“아닙, 아닙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급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모님에게서 사과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계속해서 손만 내저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정 이사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못하도록 계속 막아서.”
이사님은 팀원들이 오지 못하게 막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어머니까지 막았던 모양이다. 왜지? 내가 신경 쓸까 봐?
사실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직접 인사를 하러 와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너무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곧 퇴원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더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할 일이에요. 해일이를 사고에서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모님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쉬이 상체가 들리지 않았다.
“서도운 군이 원하는 어떤 보상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금전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의식주, 따로 배우고 싶은 것들, 하고 싶은 일까지 모두 내 이름을 걸고 지원하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생기면 그 명함 속 번호로.”
“저는, 전 괜찮습니다, 사모님.”
내가 명함을 집어 들지 못하고 거절 의사를 내비치자 그는 다른 것을 또 꺼냈다. 척 보기에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백지수표였다. 무릎 위에 그걸 가만히 올려두며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 날의 사고 이후로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것 알고 있어요. 불편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죄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일도 괜찮습니다. 부모님 유골 안치할 좋은 납골당도 내가 따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 말에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애써 티 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켜가며 대답했다.
“보상은…… 이사님께서 이미 충분히.”
“그러니까 정 이사 말고 나랑 해결하자는 겁니다.”
사모님은 기어코 수표책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내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날 사고 이후로 서도운 군이 깨어날 때까지 병원에서 떠나는 날이 없더군요. 죄인 된 입장에서 염치없는 소리지만, 공사다망한 사람이 병원 일로 시간을 쪼개 사는 게 불편해 보여 내가 나선 거예요.”
“…….”
“내가 나서지 않으면 혼자 끌어안고 감당할 걸 아니까. 서도운 군이 이 점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물속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귀가 먹먹해졌다.
사모님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고 곧 약혼도 해야 하는 사람인데, 나 때문에 병원에 붙잡혀 있는 중이라고. 나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 말이…… 날 탓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가 이사님을…….”
아니다. 이사님이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내가 붙들어둔 것이다.
내심 그가 가지 않기를 바랐고, 계속 내 옆에 있기를 바랐다.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고, 머리를 쓰다듬어 잠에서 깨워줬으면 좋겠고, 계속 그렇게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봐 주며 날 살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그 말이 흘러나갔다. 날 보는 사모님의 표정이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빠르게 달려온 이사님이 벌컥 문을 열고 곧장 우리를 발견했다.
“회장님,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하며 망설임 없이 성큼 걸어 들어왔다. 사모님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회장님.”
나에게 인사하는 사모님의 팔을 이사님이 확 붙들었다. 그러고는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무슨 쓸모없는 소리를 하셨습니까.”
“아들 잘못 키운 사죄 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만 간다 하잖아.”
그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화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모님이 가져온 물건들을 훑었다.
“하아……. 서도운 씨, 미안해요. 잠깐 쉬고 있어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명함과 수표책을 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한 손에 집어 든 뒤 사모님을 붙들고 밖으로 사라졌다.
“…….”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열린 문이 이상하게 삐거덕대며 소리를 냈다. 그게 무척이나 내 심장을 긁어내렸다.
이사님은 저녁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를 기다리던 나는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이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가 함부로 열지 말라고 했던 창문을 밀어 열자,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병실 안을 파고들었다. 창틀에 턱을 괴고 한동안 바람을 맞다가 이내 목발을 챙겨 들었다. 잠깐 산책이 하고 싶었다.
간병인이 따라붙으려는 것을 만류한 뒤에 천천히 옥상으로 올랐다.
병원이 넓은 만큼 옥상도 드넓었는데, 그 안을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며두었다. 나는 잔디 위를 천천히 걸으며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사람도 없고,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만 있는 공원이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시선을 올렸다. 새까만 하늘에 커다랗게 떠 있는 달이 이곳을 비추고 있었다.
서늘한 빛이 내려앉은 발끝으로 다시 눈을 내렸다. 아직 한쪽 발에 단단히 깁스가 감겨 있었다. 뼈는 다 붙었다면서, 퇴원하기 직전에 풀어주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이 상태였다.
나는 기지개를 켜듯 팔과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가 그대로 힘을 털썩 뺐다. 참 고요하다.
겉옷을 걸치고 나올 걸 그랬나. 계속 바람을 맞고 있다 보니 조금 추운 것도 같았다.
팔뚝을 비비듯 쓸어내리려고 감쌌을 때, 어깨 위로 무언가 올라왔다.
“이사님.”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이사님이 서 있었다. 그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내 어깨 위로 올려준 것이다.
“또 사라진 줄 알고 놀랐잖아요.”
재킷에서 익숙한 이사님의 향이 느껴졌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것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손으로 붙들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하려고 했습니다.”
“다리도 성치 않은 사람이 간병인도 없이.”
그는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굽혀 앉으며 깁스한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다 나았습니다. 다음 주면 깁스도 푸는데요.”
“의사가 이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퇴원도 그렇고.”
큰 손이 깁스 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서도운 씨가 너무 답답해하니 그런 거지.”
그러면서 나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아요? 하고 조용히 묻는 물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랫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 안으로 이상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어머니가 무슨 소리를 하셨든,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잘 말씀드렸으니까.”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냥 사과만 계속하셔서…….”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으셨고요.”
“전혀요. 그냥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어가며 부정했다. 이사님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사모님은 그 정도의 말만 하셨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 이제…… 오해가 풀린 거로 전부 됐습니다.”
이제 와서 뭔가를 받는다는 것도 우습다. 13년이 흐르고, 산전수전도 겪고. 그리고…… 마침내 누명도 벗겨지고 제대로 된 범인도 잡으면서, 감정의 무게는 많이 줄어든 것만 같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쉽게 체념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 지금은 나 혼자 남게 되었으니 큰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진심 어린 사과면 됐다. 충분했다.
“서도운 씨가 편한 쪽으로 해요.”
그는 한참을 뜸 들이다 그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을 전적으로 존중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서 이채가 빛났다.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다정한 표정에,
“병원에서.”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뜸 말을 뱉었다.
“제 수술 이후로, 병원에서 눈뜰 때마다…… 이사님이 안 계셨습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사실 조금…… 속상했는데…….”
“속상했겠네.”
이사님은 나를 달래듯 부드럽게 웃었다. 자꾸만 늘어지는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들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사모님께서…… 이사님이 계속 병원에 계셨다고, 말씀해 주셔서…….”
“네.”
“그래서 너무…….”
내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내 볼 위를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웃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웃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너무 기뻐서 웃은 모양이었다. 그가 계속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서도운 씨는 웃으면 이 위로 보조개가 지니까.”
아, 그래서 계속 거길 만진 거였구나. 그제야 그가 내 얼굴을 쓰다듬은 이유를 알았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보조개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왜 우는 거예요.”
웃는다고 하기가 무섭게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렇게 된 것이어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잠깐 당황을 내비치던 그는 이내 눈썹을 늘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이사님은 내 볼 위를 찬찬히 쓸며 눈물을 닦아 내렸다. 그의 손이 눈물로 젖어들자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듯 화들짝 놀라 스스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사님, 저는, 읏, 이제…….”
이젠 정말 괜찮다고. 몸도 나았고 퇴원도 하니 앞으론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 말하려 했다.
“서도운 씨.”
이사님이 내 말을 막듯 나를 불렀다.
“고마워요.”
“…….”
“고맙습니다, 무척. 그 사고에서…… 날 구해줘서.”
“…….”
“고맙고, 그리고 또 미안하고.”
그는 내 이마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훤히 드러난 이마에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내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갈무리하며 말했다. 속삭이듯이 작게 뻗어나갔다.
“인사, 받으려고 구한 거…… 아니었으니까.”
“도운아.”
그는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날 불렀다.
도운아, 라고…….
무척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이사님이 날 이렇게 불러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왜…….
“매일 밤 달이 밝을 때마다 네가 생각나.”
“…….”
“널 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왜일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물음이었지만 답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왜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것인지. 그저 내가 그를 구했기 때문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나는 언젠가 출장에서 이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날을 떠올렸다.
달이 밝다는 핑계로 그에게 연락해 이런저런 억지로 말을 이어가고, 기어코 그의 방에 날아들었던 그 날. 오늘과 똑같은 달이 떴었다.
“내가 네 앞으로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줘.”
여전히 볼에 남은 물기를 쓸어 닦아주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가 어릴 적 쳐주었던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나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나와는 정말…… 많이 다른 사람이다. 함부로 마음을 품었던 것이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아해.”
“…….”
그 말은 무척이나 심장을 찔러서, 나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냥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대답이 이상했는지 그가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도운아. 나.”
“저, 그만…….”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나는 그의 말을 회피하듯 중얼거렸다.
“내려가고…… 싶습니다. 피곤해서…….”
그대로 이사님의 품에 안길 뻔했다. 주제도 모르고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을 뻔했다. 애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엉엉 울며 그를 당황하게 만들 뻔한 것이다.
저 말이 진심일 리가 없는데.
세상에 어느 누가 날 좋아할까. 가진 것 하나 없고, 속은 썩어들어 가는…… 볼품없는 나를.
순간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을 들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괜한 착각으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어딘가 착잡하게 가라앉은 듯한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기대 세워두었던 목발이 주륵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자, 이사님이 말없이 주워 챙겼다.
꼭 자신을 대신 붙들라는 듯이 팔을 내밀기에,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팔짱을 꼈다. 다른 손으로 이사님의 팔뚝을 붙잡으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그의 말을, 행동을…… 내 멋대로 해석할 뻔했다.
아직 접지 못한 마음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구나. 사람의 호의를 멋대로 곡해하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렇게 병실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 둘 사이엔 어떤 대화도 없었다.
“병실이 조금 서늘한 것 같은데.”
내가 침대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며 이사님이 중얼거렸다.
“아, 아까 잠깐 창을 열었더니…….”
“오래 열지 말아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제대로 자리를 잡자 이내 몸 위로 이불을 포근히 덮어주었다.
“아직 신장 수술 남아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됩니다. 퇴원하고도 몸 관리 철저히 해야지.”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대답하자 마음에 들었다는 듯 이사님의 입꼬리가 차분히 올라갔다.
그는 평소 날 재울 때처럼 큰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와 빗는 감촉이 무척 기분 좋았다. 계속해서 그렇게 쓸어주면 금방에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미국 출장 때문에 주말은 못 오니까 할 얘기 있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해요. 어딜 가든 들고 다니고, 오늘처럼 떨어뜨리고 가지 말고.”
“…….”
“벌써 자는 겁니까.”
내가 눈을 감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웃음기 섞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월요일에 만납시다.”
그는 내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
이사님이 잠시 손을 대고 있던 이마에 내 손바닥을 올렸다. 따뜻한 기운이 고스란히 내 손으로 전달되었다. 나는 닫힌 병실 문을 응시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퇴원 수속을 밟았다.
* * *
집으로 돌아오니 집 상태가 아주 엉망이었다.
문고리는 강제로 연 흔적이 있었고, 집 안 곳곳에 발자국이 나 있었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범인을 알았다. 깡패가 분명했다. 그가 잡혀가기 전에 여기까지 왔던 모양이다.
날 찾으러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의 범죄에 대해 증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집 여기저기를 들쑤셔 놓았다. 하지만 이 집에 나도, 증거도 있을 리가 없었다.
지저분한 집 안 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몇 개 없던 접시도 깨져 있고, 옷가지도 바닥에 널려 있고. 책과 온갖 종이 뭉텅이들이 찢어 발겨져 있었다. 여길 치우는 내내 주말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심각했다.
나는 쓰레기들부터 차근차근 주워 모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어차피 할 것도 없었으니.
“…….”
흩어진 종이를 주워 모으며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병인이 병실에 물을 가지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옷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간병인이 내 옷을 사러 나간 사이, 나는 이제 막 진료를 시작한 병동으로 다짜고짜 내려가 다리 깁스를 풀어달라고 졸랐다.
원래보다 이른 요청에 의사가 말렸지만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의사가 하는 수 없이 깁스를 제거해 주고는 간단히 뼈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다.
설령 아니라고 했어도 퇴원했을 거지만. 나는 멋대로 링거를 뽑고 간병인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이사님도 안 계신 주말이라 퇴원 수속이 어렵다는 병원에 이사님이 허락했다는 거짓말로 유유히 빠져나왔다.
나는 그렇게 집으로 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후, 힘들다.”
걸레질하던 방바닥 가운데에 엉덩이를 대고 쉬었다.
곧 들킬 거짓말임을 알았다. 아마 이상함을 느낀 의사들이 이사님에게 곧장 연락했겠지. 하지만 그는 이미 미국에 가 있었다.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월요일일 것이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는 자세로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피곤하니 이만할까……. 아직 절반도 채 치우지 못했는데 벌써 기력이 달렸다.
뭔가 챙겨 먹을 생각이 없어 그냥 이불을 깔고 누웠다. 퇴원하기가 무섭게 형편없는 생활습관으로 돌아가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게 내가 온전히 누려야 할 생활이었다.
“…….”
달을 보면 내가 생각난다는 이사님의 말.
난 그것을 온전히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나의 거짓말로 그가 화났을 때, 내가 자꾸 남자를 꼬여내는 행동을 한다고 말했던 게 자꾸만 생각나서. 어제도 그래서 그에게 전화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달갑지 않았다.
내 기우라고 해도, 언젠간 이사님 또한 그 일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그를 속이고 기만했던 일을.
그래, 이게 맞는 것이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
일요일 저녁, 오늘도 어김없이 집을 청소하다가 하루를 보냈다. 일반 쓰레기봉투가 딱 떨어진 것을 보고는 잠깐 슈퍼에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집 근처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차의 주인은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조금 더 걸어 들어가 집에 가까이 가자, 문 앞에 이사님이 서 있었다.
“서도운 씨.”
그는 나를 발견한 순간 미간을 구기며 걸어왔다.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는 실없이 웃음이 나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진짜 이렇게 보니까…….
그러자 이사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갑자기 퇴원하고 사라진 내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미국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몇 시간 체류하지 않고 돌아와야 했을 텐데. 조금 미안해졌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
“왜 멋대로 퇴원했어요.”
“저는 다 나았고…… 어차피 월요일에 퇴원할 거였잖습니까.”
내가 말하던 도중 그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위아래로 살폈다. 어디 상한 곳이 있진 않은 것인지 보는 것 같았다.
“난, 서도운 씨가……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습니다.”
“도망……이라뇨.”
도망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해놓고 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애써 억누르는 것으로 보였지만 새어 나오는 물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핸드폰은 왜 두고 간 겁니까.”
“그, 실수로.”
“월요일에 나랑 같이 퇴원하기로 해놓고는 왜.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합니까.”
“저…… 이제 이사님이 보호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어깨에 올라온 이사님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리며 말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제 일로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멋대로 병원을 빠져나온 건 그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사님의 표정을 살피니 뜻대로 되긴 어렵겠다는 직감이 왔다.
“내가 죄책감으로 이러는 건 줄 아는 겁니까? 고작 죄책감 때문에 미국에서 소식 듣자마자 돌아올 사람으로 보여?”
“그게 아니더라도 전 이제, 과거 일은 다 묻고…… 새로 시작하고 싶어서……!”
“누구 마음대로. 왜 네 멋대로 그런 걸 정해.”
이사님의 단호한 어조에 입이 다물렸다. 역시…… 그는 생각이 다를 줄 알았다. 내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한숨 쉬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한숨이 하얗게 퍼졌다.
“화내려고 돌아온 거 아닙니다. 걱정했어요, 많이.”
……이렇다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그는 내가 마음을 단호히 먹지 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를 꾸짖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다정한 말씨로 말을 건네오니까, 나도 금세 그에게 동화되어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집에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갔으면 찾기 힘들었을 테니.”
“멋대로 퇴원한 건…… 죄송합니다.”
“그래, 그건 미안해해요. 돌아오는 길에 피 말라 죽는 줄 알았으니까.”
그는 잠시 심호흡하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엔 한참 정적이 맴돌았다.
“저녁 식사는 했습니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나직하게 물음이 넘어왔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젓자 그는 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대신 뺏어 들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잠시 확인하는가 싶더니, 들어 있는 게 고작 쓰레기봉투와 청소 용품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들어가죠.”
“저, 잠시만요.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사님.”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차 한 잔도 못 내어줍니까.”
이사님은 내가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렇게 대답했다.
“녹차가 있긴 한데…….”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그가 먼저 앞장서 들어가려다, 멈칫하며 뒤돌아 내 손목을 붙들었다. 이젠 도망갈 수 없다는 듯, 짧은 일탈은 끝났다는 듯이.
나는 그렇게 당황할 새도 없이 그의 걸음에 맞춰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바깥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서늘한 집 안이었다. 무척 낡고, 또 좁은 집 안 구석구석에 이사님의 시선이 닿았다. 그렇게 뜯어 살피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의 커다란 집과 비교되어 어딘가 부끄러웠다.
“원, 원래 이렇게 지저분하지 않은데.”
먼저 재빨리 신발을 벗고 들어가 주변을 쓱쓱 정리했다.
“제가 집을 비운 사이에 깡패가 와서 다 들쑤시고 가느라, 그걸 치운다고 조금 어수선해요.”
“깡패?”
“그, 지금은 잡혀 들어간…….”
나가기 전에 잘못 건드려 쏟아져 있던 책 더미를 확 밀어 다시 벽에 붙여 세웠다. 그러는 사이 집 안으로 들어온 이사님은 봉지를 내려놓고는 더 안쪽 방까지 들어가 샅샅이 살폈다. 볼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허름한 집일뿐이었다.
“아, 조금 싸늘하죠. 잠시만요. 난방을 잘 안 해 버릇해서…….”
급히 보일러부터 틀었다. 이사님이 집에 왔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허둥대게 만들었다. 버튼을 꾹꾹 눌러 온도를 높이다가 또 너무 올린 것만 같아서 조금 내리고, 왔다 갔다 했다.
“금방 따뜻해질 거예요.”
“여기서 몇 년이나 살았습니까.”
“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계속이요.”
그러니까 13년이 다 되도록 살았다는 뜻이었다. 그는 다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작고 낡은 곳에서 어떻게 살았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녹차 바로 드릴까요?”
“……주세요.”
나는 곧장 물부터 올렸다. 집에 있는 컵 중에 가장 멀쩡한 머그잔 하나를 꺼내놓고, 서랍을 살펴 몇 개 남지 않은 녹차 티백도 준비했다.
추운 날에 맹물을 끓여 마시기 뭣해서 사다 둔 녹차였는데,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걸 보니 조만간 채워 둬야겠다.
포장지를 뜯고 티백을 컵에 담는 사이 이사님이 안쪽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해 나도 모르게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산더미처럼 쌓인 책 속에서 내 가계부를 용케도 찾아내었다.
“엇, 보시면 안 돼요!”
나는 성큼 다가가 이사님에게서 검은 노트를 확 낚아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왜, 왜 그러지. 내가 너무 버릇없게 뺏어왔나. 아니면 빚이 너무 많아서 놀랐나.
슬금슬금 이사님의 눈치를 봤다.
“안, 안 되는 건 아닌데…… 보고 싶으시면 보세요……. 그냥 부끄러워서…….”
완전 바보가 따로 없다. 이렇게 쫄아서 다시 돌려줄 거였으면 왜 굳이 뺏은 거야.
하지만 그는 내가 내민 가계부를 다시 받아 들지 않고 나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나도 가계부를 옆에 내려두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이사님은 그새 찬장을 열어 보고 있었다. 열린 찬장엔 깡패의 손에 깨지지 않고 살아남은 식기 몇 개와 라면 몇 봉지가 전부였다. 그는 그치지 않고 옆으로 이동해 냉장고 문까지 열어보았다.
나는 팔팔 끓기 시작하는 물에 불을 끄고는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뭐 찾으세요?”
“냉장고에 왜 아무것도 없습니까?”
“어…….”
그의 질문이 뭘 뜻하는지 모르겠다. 아까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했는데. 역시 그는 내 말은 잘 듣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김치와 계란 같은 기본 찬이나 재료는 있었다. 그에게 대접하기 부족한 음식이었을 뿐이지.
“항상 이래요?”
“예?”
“대체 뭘 먹고 사는 겁니까.”
그냥 이것저것…….
어쩐지 몰래 병원에서 나온 것보다 더 화난 듯한 말투에 소심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냉장고에 음식이 별로 없는 건 내가 입원 전에 밥을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뭘 먹으면 자꾸 게워내는 게 일상적이었으니까. 거기다 신장 문제인지 배도 자주 아파서 거하게 음식을 차려 먹기가 부담스러웠다.
먹는다 해도 간단하게 계란을 부쳐 먹는다든가. 아니면 라면을 끓여 먹는다든가. 적당히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는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아까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재차 중얼거리는 사이 그는 냉동실 문까지 열어 확인했다. 냉동실엔 정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배 많이 고프시면 뭐라도 사올까요?”
이사님이 라면을 먹을 것 같지는 않아 그리 물어보자 그는 대답 대신 냉장고 문을 쾅 닫았다. 좁은 집 안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화……나셨어요?”
역시 그를 들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나는 빨리 뭐라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 슈퍼가 작은 구멍가게나 다름없긴 했어도 이사님이 먹을 만한 뭐라도 있을 것이다. 레토르트 밥이랑, 국이라도…….
‘아, 돈.’
어제 통장에 있던 돈을 긁어모아 현금으로 뽑아두었다. 비상금으로 묵혀두려고 했던 것인데 지금은 이걸 쓸 수밖에 없겠다.
나는 옷을 넣어두는 서랍장으로 다가가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 숨겨두었던 비상금 봉투를 찾아 꺼내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먹을 것 좀 사오겠습니다.”
“그건 뭡니까.”
“어, 이건…… 돈이요.”
서랍에서 돈이 나오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오늘 그에게 참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원래 다들 서랍에 비상금 보관하고 그러거든요…….”
변명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사님처럼 돈이 많은 사람은 금고가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런 곳에 중요한 걸 보관한다는 개념이 없겠지.
나는 멋쩍게 뒷덜미를 문질렀다. 괜히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여 더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두 볼이 조금 화끈거렸다.
“서도운 씨는…….”
“네.”
이어질 뒷말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하려던 말을 삼켜버린 것처럼 한참 말이 없었다. 착잡한 표정을 하고 이마를 문지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가서 밥 먹읍시다.”
역시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에게 밥을 살 요량으로 주머니에 돈을 챙겨 나왔는데, 그의 차가 향한 곳은 도무지 내가 결제를 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들어가기를 머뭇거리자 그가 억지로 내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자리했다.
이사님은 나를 배려해 오이가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고 하며 주문을 마쳤다. 이내 나온 음식들은 이탈리아식 코스 요리였다.
“이사님, 미국에서 일은…… 못 마치고 돌아오신 겁니까.”
식사를 하던 도중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곧장 날아왔을 것이다.
“네다섯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급히 지사에만 들렀다 돌아왔습니다. 뭐, 미국은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시차 적응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곧장 돌아온 거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비행시간이 길어서……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서도운 씨가 나한테 관심이 많으니 좋네요.”
그가 칼질을 하다 말고 날 쳐다보며 살며시 웃더니 이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도망쳐 버려서 나한테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날 밤 옥상에서 했던 말이 많이 부담스러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어머니 일로 마음이 너무 급했던 모양입니다. 당황스러웠다면 사과할게요.”
마음이 급했다니.
‘내가 네 앞으로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줘.’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좋아해.’
그의 말을 들으니 나는 더더욱 그 기억 속의 문장들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자꾸만 희망고문 당하는 기분이었다. 애써 털어버렸다.
이후의 대화는 거의 그가 주도했다. 집에 대한 걸 묻는 게 대부분이었다. 집 한구석에 쌓여 있던 책들을 보고 꾸준히 공부할 생각이 있느냐며 묻기도 했다.
나는 묻는 대로 차분히 답하며 은근슬쩍 이사님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집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무척 좋지 않아 보였던 그의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싶어서. 내심 그가 모를 복잡한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이사님의 차에 다시 올랐다. 내가 안전벨트를 제대로 맸는지 확인하고 나서 그 또한 벨트를 맸다.
“저는 가까운 역에서 세워주시면 지하철 타고 돌아가겠습니다.”
“어딜 돌아가요? 그 집에?”
“네. 아시겠지만 골목이 좁아서 큰 차가 들어오기 좀 힘드니까요.”
내가 그렇게 대답했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기에 당연히 역 근처에 세워줄 줄 알았는데 그의 차는 역 입구를 휙 지나쳐 달려 나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내 집 쪽이 아닌 도로로 빠져나갔다.
“여기로 가시면 안 되는데…….”
“청담동으로 갈 겁니다.”
“예?”
“청담동에 있는 내 집이요. 거기로 가는 겁니다.”
놀라 되묻는 소리에도 그는 방향을 틀지 않고 여상히 대답했다. 내 집으로 돌아가는 건 선택지에조차 없었다는 것처럼 구는 그의 모습에 입이 벌어졌다.
“저, 집에 보일러를 켜두고 나왔는데…….”
“그 집은 좀 켜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너무 오래 켜두면 안 되잖아요.”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단열이 잘되지 않는 낡은 집이라서 그 온기가 고스란히 집에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좀 덥혀질 만하면 열이 빠져나가는데, 이불 하나 깔아두지 않은 게 너무 아까웠다.
나도 모르게 입이 툭 튀어나왔었는지 그가 흘긋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럼 잠깐만 있다가 가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그럼 됐죠.”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혹시 섹스…… 하려고 그러나.’
이제 몸이 다 나았으니까. 퇴원도 했고, 깁스도 풀었고. 수술 부위는 아문 지 한참이고. 아직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
원래 쓰지 않고 놀리던 집인 청담동은 이사님이 나를 만날 때만 주로 사용하는 것 같았으니. 그 말의 의도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냥 수긍했다. 역시 과거를 전부 묻고 새로 시작하려는 내 꿈은 터무니없던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 * *
이 집에 들어가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앞선 두 번의 경험이 썩 좋은 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기에 떨떠름해진 것과 동시에 이사님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번엔 절대로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복도를 걸었다. 나는 복도 끝, 마침내 나타나는 피아노를 보곤 일부러 고개를 틀었다. 그쪽으론 시선도 두지 않았다.
“잠깐 앉아요.”
이사님이 소파 쪽으로 턱짓하기에 쭈뼛대다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보들보들한 러그가 깔려 있어 슬리퍼를 신은 발로 밟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섹스는…… 언제 하지?
곧장 들어가서 씻고 나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편히 앉으라 하니 더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난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사님은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나도 뭔가 도와야 하나 하고 있는데, 이내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발 뻗어봐요.”
그가 들고 돌아온 것은 스팀 타월이었다.
“네? 아, 아닙니다. 이사님, 하지 마세요.”
그는 그날 밤 옥상 공원에서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깁스했던 쪽 다리를 그가 살짝 쥐기에 나도 모르게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색하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빨리.”
무릎을 굽혀 다시 한번 발을 빼내려 시도하자 그가 오금을 세게 잡으며 완전히 자신의 한쪽 허벅다리 위로 올렸다. 이어 발에 달린 슬리퍼를 빼내고 양말을 벗겨냈다. 순식간에 맨발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드러난 맨발이 부끄러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사이 이사님은 챙겨온 스팀 타월을 가볍게 손등에 대보며 온도를 확인한 뒤, 내 발목에 감쌌다.
“이, 이사님.”
“뜨거워요?”
“아니요, 뜨겁지는 않은데…….”
뜨겁지 않다는 말에 그는 타월을 펼쳐 발까지 감싸 쥐고는 천천히 그 위를 주물러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않으셔도.”
“그냥 가만히 받아요.”
“……제가 해드려야 하는 거 같아서.”
장시간의 비행으로 몸에 여독이 쌓인 건 이사님일 텐데. 그가 왜 내 발을 이렇게 손수 마사지해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찍 퇴원해서 아플까 봐?
그때 이사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발은 멀쩡한데요.”
“제 발도 다 나았습니다.”
“그래요.”
내가 무어라 따지려고 하니 그는 그래요, 라는 말로 내 말을 일축해 버렸다. 말이 그래요, 지. 풀어 해석하면 그런데 어쩌라고, 였을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더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이사님이 계속 발을 마사지해 주니 몸이 점점 노곤하게 풀렸다. 발이 다 나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골절되었었다는 생각에 괜히 걸을 때 신경이 쓰였었다. 그래서 피로감이 쌓인 것도 맞았고.
뜨거웠던 타월이 조금 식자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되어 더 기분 좋았다. 큰 손이 발을 꼭꼭 누르고 발목을 부드럽게 돌리는 감각에 약하게 소름이 오를 정도로 시원했다.
“으…….”
“아픕니까.”
“아니요, 시원해서…….”
이사님은 대놓고 큭큭 웃었다. 나도 얼결에 그를 따라 슬며시 웃고 말았다.
계속되는 마사지에 서서히 눈이 뻑뻑하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맛있는 식사도 배부를 정도로 하고, 따뜻한 집 안의 폭신한 소파에 앉아 발 마사지를 받으니 당연한 순서처럼 졸음이 밀려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잠들지 않으려 눈을 끔뻑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아주 얕은 물에 젖어 들어가듯 살며시 잠이 들었다. 잠들었다고 인식도 하지 못할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미련하게 잠들었던 나는 번뜩 눈을 떴다.
“……!”
상황을 파악하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처음엔 깜깜한 어둠 속이라는 것과 무언가 내 몸을 꽉 끌어안고 있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점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사님이 나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조금 뒤척이며 팔에 힘이 풀어진 사이 나는 슬며시 움직였다.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상체를 일으켰다. 입은 여전히 틀어막은 채였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나는 곧 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냥 형의 품에서 잠든 게 아니었다. 나는 이사님의 침실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미쳤어……!’
그의 침대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뒤돌아보며 이사님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바닥으로 발을 뻗었다.
값비싼 매트리스여서 그런지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그를 깨우지 않고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걸어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꼭 도둑이 따로 없었다. 나는 거실 소파 옆에 널브러져 있는 내 양말을 챙겨 신고는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복도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사님 집에 온 게 10시쯤이었으니까…….’
여섯 시간이나 침대에서 늘어져라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바보, 멍청아. 눈을 질끈 감으며 자책하는 말을 혀 위에서 수도 없이 굴렸다.
나는 그가 깨기 전 빨리 집에서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도어록의 열림 버튼을 누르자 멋대로 도로롱 소리를 내는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뒤를 흘긋대며 그가 깨진 않았을까 걱정했다.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 공기가 매섭게 몸을 에워쌌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세상은 한밤중처럼 깜깜했고, 가로등 불빛만이 듬성듬성 길을 밝히고 있었다.
주택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조용했다. 어쩐지 스산한 느낌에 나는 서둘러 역이 있는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래도 두 번 와본 곳이라고 길을 기억하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마침내 큰길이 나오며 역에 다다랐다.
아직 지하철 운행을 안 할 시간이어서 그런지 방화문이 내려가 있었다. 들어가 기다리려는 생각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조금 쌀쌀했지만 하는 수 없이 근처 벤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꼭 아침에 비가 올 것처럼 새벽안개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양발을 벤치 위에 올려 무릎을 세웠다. 팔로 끌어안은 뒤 그 위로 한쪽 볼을 대며 얼굴을 기댔다.
잠들었던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도망 나오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소파에서 마사지를 받는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눈을 뜬 곳은 침실이라니. 그러면 내가 그 침대에서 잤다는 사실을 이사님이 모를 수가 없었다. 잠든 나를 침대 위로 옮긴 것도 바로 그일 텐데.
얼마나 혼날까? 쉽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을 혹사시키듯 섹스했을 때에도 침대 한편을 내어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럴 정도로 내가 그의 집에서 자는 것을 싫어했는데. 대놓고 그의 품에 파고들어 여섯 시간이나 쿨쿨 잠들었다니.
‘내 집에서 재울 만큼 너그럽지는 못하네.’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가 나를 내쫓으며 했던 말이 메아리치듯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내일 다시 연락을 하든가 해서 싹싹 빌어야겠다.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누굴 탓할까. 다 내 잘못인 것을.
그렇게 자기비하에 가까운 수준으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서 급히 차가 멈춰 서며 끼이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서도운!”
자동차 바퀴 소리엔 아무 감흥도 없이 무릎에 얼굴만 파묻고 있었는데, 뒤이어 들려오는 날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부터 번쩍 들었다.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 이사님이 차 문을 쾅 닫으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사님……?”
혹시 잠이 덜 깨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한쪽 눈을 문질러 보았지만 여전히 이사님은 사라지지 않고 선명했다. 오히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며 벌떡 일어났다.
“이사님? 어떻게.”
“또 도망가려고 했어?”
그가 화를 숨기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또 도망가려고 했습니까!”
“도, 도망이 아니라…….”
소리를 내질러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게 아니면 왜 여기 나와 있어. 겨우 찾아 데려왔는데 또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 게 도망이 아니면 대체 뭐야.”
나도 모르게 이사님의 기세에 한쪽 발을 뒤로 물리자, 그가 날카롭게 알아채고는 곧장 내 손목을 붙들었다.
“어딜 가려고.”
짙은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띠고는 나를 응시했다. 여기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벌써 찾아온 것을 보면, 내가 집을 나오기가 무섭게 내 부재를 알고 찾으러 나온 것 같았다.
“도, 도망이 아니라, 집에 가려고…….”
“이 시간에 말입니까. 서도운, 지금 새벽 4시밖에 안 됐잖아. 어?”
“죄송합니다…….”
붙잡힌 손목이 점점 세게 쥐어졌다. 아팠지만 그가 화를 낼까 봐 함부로 빼낼 수도, 아프다는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제가, 잠들어 버려서.”
나는 머뭇거리다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피곤했던 건지 제가 멋대로 잠이 들어버려서, 이사님이, 싫어하실까 봐. 저는…… 무서워서.”
“내가 왜…….”
이사님은 무언가 따져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화나셨을 거 알아요. 정말 잠들 생각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그런 거예요.”
“잠든 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닙니다.”
그가 이마를 짚었다.
“서도운 씨가 갑자기 사라져서 놀란 겁니다.”
내 변명에 그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것도 같았다.
“전에 이사님 댁에서 자는 게 싫다고 하셔서, 저는 빨리 나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새벽 4시에 집을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왜 이렇게 미련하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입술이 어물어물 다물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내가 그를 피곤하게 만든 것만 같아 심장이 저릿했다.
“일단 돌아갑시다. 잠이 확 깼네.”
“저, 저는 그냥 집으로…….”
이사님은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붙잡은 손목을 거칠게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의 큰 보폭에 맞춰 발을 재게 놀려 겨우 뒤따르자, 어느새 몸은 조수석에 밀어 넣어져 있었다.
그는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고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벨트 매세요.”
“저 정말 그냥 지하철 타고 돌아가겠습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리면 첫차 올 텐데…….”
내 말에 침묵을 지키던 이사님은 순간 몸을 틀며 팔을 뻗어왔다. 얼굴 가까이 느껴지는 손길에 놀란 나는 등받이로 훅 몸을 붙였지만, 정작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안전벨트였다.
쓰윽, 쓱. 달칵. 가슴과 배에 벨트가 둘렸다. 무척이나 가깝게 붙어 있는 이사님의 얼굴 때문인지 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내뱉었다.
“아까 데려다주겠다고 했던 거, 거짓말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들리던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그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 자신의 벨트도 당겨 맨 뒤, 창틀에 팔꿈치를 기대며 이마를 짧게 매만졌다. 그리고 이내 착잡한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이사님이 왜 거짓말을 해가며 날 붙잡아두려고 했는지,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골똘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아무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기가 무섭게 먼저 차에서 내린 이사님은 빙 둘러서 내가 있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직 나는 벨트를 채 풀지도 못한 짧은 시간이었다.
혹시 그사이에 도망갈까 봐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난 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 해가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날 먼저 집으로 들어가게끔 하고는 바로 등 뒤로 따라붙었다. 내가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끼워 신은 뒤 사박사박 안으로 몇 걸음을 걷고 나서야, 그도 현관 탁자에 거칠게 차 키를 던지듯 내려두고는 뒤따라 들어왔다.
“저…… 씻을까요?”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생각해 낸 건 그와의 잠자리뿐이었다. 맥없이 잠드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를 재워야만 했을 테니, 이번에야말로 그를 만족시킬 기회라고 생각했다.
“씻고 싶으면 씻어요.”
“그럼…… 욕실 쓰겠습니다.”
눈치 보듯 중얼거리며 욕실을 가리키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나도 욕실에 들어와 문을 탁 닫았다.
넓은 욕실을 쭉 한번 둘러보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려갔다. 잘 개어 욕실 선반에 올려둔 뒤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밖에서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았던 몸에 온기가 퍼지자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던 근육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로 푹 적시고 난 뒤 보디워시를 짜냈다. 몽글몽글한 거품으로 몸 구석구석까지 닦았다.
이사님이 무슨 의도로 나를 데려왔든, 나한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데려왔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물로 깨끗하게 헹궈낸 몸을 보드라운 수건으로 닦아 말리고, 그대로 욕실 문을 열었다.
헐벗은 몸으로 나왔어도 그다지 찬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집 안은 따뜻했다. 나는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마저 탈탈 털어내고는 곧장 그가 있을 침실로 향했다.
이사님은 침대 끝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서류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괴고는 허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낀 그가 시선을 보냈다.
“…….”
그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는 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자세가 바르게 펴지자마자 나는 그의 발끝에 무릎을 꿇었다.
이사님과의 섹스에서 당연한 순서이던 오럴을 하기 위해서, 그가 입고 있는 바지 버클에 손을 뻗어 막 붙잡았을 때였다.
“서도운.”
그가 날카롭게 말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거친 한숨과 함께 그는 침실 안쪽의 작은 욕실 선반에서 샤워 가운을 들고 돌아왔다. 어리둥절한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내 어깨 위로 그가 가운을 걸쳐 주었다.
“……감기 걸려요.”
흘러내리지 않도록 가운을 붙들긴 했으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감기 걸릴 정도로 추운 집 안도 아니었던 데다가, 그는 씻고 옷을 다시 입고 나오는 걸 무척 싫어했었다. 그 사이 취향이 바뀐 걸까?
“내가 문 앞에 갈아입을 옷 놔뒀는데. 못 봤습니까.”
“저, 저는, 곧바로…… 하는 줄 알고…….”
전혀 보지 못했다. 그는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말이 없었다. 어색하게 가운으로 몸을 감싸며 일어나자 그가 내 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나를 지나쳐 침실 밖으로 나가 챙겨뒀다는 옷을 다시 들고 돌아왔다. 나한테 그걸 내밀며 가볍게 고갯짓했다.
“입어요.”
“그, 섹……스는 안 하실 겁니까?”
묻는 목소리에서 부끄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어딘가 모르게 그에게 거절당했다는 기분에 볼이 화끈거렸다.
“섹스하려고 데려온 거 아닙니다.”
“……그럼요?”
“좀 자려고요.”
잔다는 게 섹스가 아니었나.
“말 그대로 잠을 잔다고. 내가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서도운 씨 끌어안고 자면 잠이 잘 온다고.”
아, 몸을 섞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잠을……!
나는 허둥대며 그가 건네는 옷을 받았다. 조금 전보다 더 부끄러워져 고개가 숙여졌다.
서둘러 어깨에 걸친 가운부터 벗었다. 가운이 발밑으로 스르륵 떨어지는 사이 나는 그가 준 속옷부터 포장을 뜯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뒤돌았다. 다시 앉아 있던 의자로 다가가 털썩 앉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때를 틈타 빠르게 옷을 꿰입기 시작했다. 속옷을 입고,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입으며 구멍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저, 이사님.”
내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바지가 좀 커서…… 안 맞습니다.”
허리 부분이 밴드로 되어 있는 바지였는데도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허리춤을 붙잡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그는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 웃지 마세요…….”
“이리 와봐요.”
그는 날 가까이 불렀다. 이상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더 진하게 웃었고, 덩달아 내 얼굴은 더 붉어졌다.
“정말 크네. 이게 제일 작은 바지인데, 어쩌죠.”
“그냥 속옷만 입어도 되겠습니까. 티셔츠도 커서…….”
그렇게 하라는 허락이 떨어지고, 조심스럽게 손을 놓자 바지는 서서히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속옷도 큰 것 같은데. 불편하진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그에겐 분명 딱 붙는 드로즈이겠지만, 내가 입으니 어째 짧은 반바지 내지는 트렁크 속옷처럼 보였다. 큰 건 사실이었지만 이마저도 입지 않고 잘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않았기에 그냥 괜찮다고 대답했다.
“…….”
이사님은 가만히 내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허벅지 아랫부분부터 위까지 손끝으로 훑고 올라갔다.
약간 간지러운 감촉에 무릎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는 허벅지와 속옷 사이로 벌어진 틈에 마침내 손끝을 밀어 넣고는 위로 살짝 들추었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종종 불려가던 이사실에서 내 몸을 만지작대던 그의 모습과 지금이 겹쳐 보였다. 이대로 자연스레 관계까지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머지않아 손을 떼며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이리 누워요.”
넓은 침대 한쪽에 누운 그가 자신의 옆자리를 토닥토닥했다. 홀린 듯이 침대 근처로 다가가자 내 팔을 확 잡아당겼다.
“앗…….”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짐과 동시에 그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내 어깨를 꼭 끌어안고는 머리 위에 턱을 댔다.
“날 이렇게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에 서도운 씨 하나일 겁니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절대 칭찬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질책하는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전에 취해서 나한테 전화했던 것. 기억납니까.”
“……예.”
굳이 부끄러운 기억을 들쑤시는 것에 나도 모르게 이사님의 가슴팍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는 듣기 좋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움직여 더 깊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 때도 오늘처럼 밖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그 때 생각이 나서요.”
“그 때도, 오늘도…… 데려와 주셨네요.”
“……그렇네요.”
이사님은 자신의 품에 폭 처박히도록 내 뒷머리를 누르고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빗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그는 내 마음도 모르고 차분히 등을 토닥였다.
“장거리 비행도 그렇고, 새벽부터 깨서 서도운 씨 찾으러 나서는 바람에. 조금 피곤하네요.”
“푹 주무십시오. 제가 계속 있겠습니다.”
“정말 도망 안 갈 겁니까.”
“네.”
그렇게 단호히 대답하고는 어쩔 줄 모르던 손을 소심하게 이사님의 몸에 둘렀다.
“불편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정말 섹스를 하러 날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듯, 가만히 안고 있기만 했다.
“따뜻해서…… 좋아요. 품이…….”
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사실 밖은 좀…… 추웠거든요.”
“…….”
“이사님이 다시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반쯤 뭉개지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그가 서서히 몸을 뗐다. 살짝 움직일 수 있는 틈이 생겨 그를 올려다보자 그 또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보낼 생각 없었습니다.”
나른하게 속삭인 그가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천천히 한 방향으로 쓸어 넘겼다.
이사님은 내 드러난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촉, 작은 소리와 함께 금방 입술이 떨어졌지만 이마는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서도운 씨.”
“……네.”
“도운아.”
“…….”
“도운아.”
재차 날 부르는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
그러자 이사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내 턱을 가볍게 붙들고는 눈가와 콧잔등 위로 촉, 촉, 입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내 입술이었다.
깊은 키스가 아니라 도장을 찍듯 입술 위를 꾹 누르는 입맞춤이었다. 떨어져 나갈 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아…….’ 하고 탄식하고 말았다.
“왜…….”
나는 그가 입을 맞춘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었다. 입술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듯 통통한 살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었지.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턱을 가볍게 눌러 입을 벌리게 만든 뒤 혀가 들어왔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살짝 누르고는 다시 입술 위를 핥고 물었다. 쪽, 초옥……. 아주 작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각도를 틀어가며 키스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떼자 절로 눈이 뜨였다. 상기된 두 볼과 가빠진 호흡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기 어린 눈으로 이사님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내 등을 꼭 끌어안아 자신의 심장 근처에 나를 파묻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어느새 그 소리에 내 심장 박동도 맞춰 뛰면서 서서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