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는 일찍부터 눈을 떴다.
여전히 이사님의 품 안에 가둬진 채였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어깨를 감싸던 팔이 허리로 내려간다. 헐렁하던 옷이 잠든 사이 뒤척이다 말려 올라가 허리를 다 내보이고 있었다. 맨살에 이사님의 손이 닿자 나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씻은 후 다시 침실로 향했는데.
“…….”
그 잠깐 사이에 이사님이 일어나 있었다. 이제 막 몸을 일으킨 것인지 내가 있어야 할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본 채였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내가 기척을 내자 그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오른쪽 손을 꽉 붙들었다.
“또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아, 아니에요. 잠깐 옷만 갈아입었습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상의를 살짝 내밀듯 보여주자 그가 벌게진 눈을 손으로 문지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정말 미치겠군.”
내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게 그렇게 큰 불안인 것인가. 이사님은 머리를 한 번 털 듯 쓸어 올리고는 내 어깨에 팔을 감쌌다.
“아침부터 먹죠.”
그렇게 조금 이른 아침이 시작되었다.
이사님이 편안히 앉아 있으라고 했기에 식탁 앞에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긴 했으나,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그를 가만히 지켜봐야만 하는 내 심정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몇 번이나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준비해 주는 아침상을 받았다. 하얀 쌀밥과 국, 정갈하게 담긴 반찬 몇 가지와 보드라운 계란찜까지. 위에 부담 주지 않는 한정식 한 상이었다.
“서도운 씨, 퇴원하면서 약도 안 받아갔으니 아침 식사하고 하나 먹어야 합니다.”
그는 경고와 함께 수저를 내밀었다. 나는 수저를 받아 들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은 환상적이었다. 어디서 몰래 사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맛이 깔끔하고 좋았다. 특히 따뜻한 계란찜이 제일이었다.
“엄청 맛있어요.”
나는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밥을 비워나갔다. 체하지 말고 천천히 먹으라며 그가 따뜻한 차도 내밀었다. 차에서도 고소한 맛과 향이 나 무척 맛있었다.
식사가 점점 마무리되어 갈 즈음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집, 이제 이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입술 근처에 붙은 밥알을 손끝으로 밀어 넣으며 그 말의 의도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너무 작고, 또 낡은 집일 테니 거기서 사는 게 잘 이해되지 않겠지.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 음. 저는 그 집이 살기 편합니다.”
“회사에서도 멀잖습니까.”
“저…… 계속 회사 다녀도 되는 겁니까?”
이사님의 말에 나는 그만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계속 복귀 얘기가 없기에 자연히 그만두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 말은 분명 계속 회사에 다니려면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필요하니까.”
흔쾌히 허락하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좀 일찍 나오면 됩니다. 지각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못 미더운가……?
“한 시간씩 더 일찍 나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집이 작고 낙후되어 보여서, 불편하진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래 살았더니 이젠 익숙해서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조금 언짢아지는 것도 같았다.
“집 한 채 사주려고 하는데 참 안 따라주네요.”
“네? 집을 왜…….”
“사주고 싶어서요. 안 됩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상해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상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몇 번이나 필요 없다고 했는데 왜 기어코 해주려는 것일까.
내가 한 숟갈 남은 밥을 결국 먹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다.
“보상 때문 아닙니다.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니까요. 서도운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잘 보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나는 그가 주는 것이 대가성일까 걱정되었다. 이사님이 나에게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영 풀리지 않자 그가 한 수 포기하듯 말했다.
“그럼 사원 아파트로라도 옮겨요. 1층에 식당도 있어서 끼니 챙길 수도 있고, 월세도 그리 세지 않은 편이고.”
회사로부터 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에 청영이 마련한 사원 아파트가 위치해 있었다. 대리님이 알아보던 걸 언뜻 듣고 나도 찾아보았기에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공용 식당뿐만 아니라 도서관이나 트레이닝 룸 같은 문화 시설도 갖춰진 작은 타운이라고.
“저는 서울 거주민이라서 신청 자격이 없을 겁니다.”
지금 집보다 월세는 십만 원 정도가 더 나갔으나, 다른 생활비를 따져 보면 사원 아파트가 훨씬 낫긴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이어서 지원 자격이 없었다. 주로 지방 인재들을 위한 아파트라고 했다.
아쉽긴 했지만 조금 더 아끼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 된다. 어차피 지금껏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이미 익숙한 삶이었다.
“……이번에 새로 매입할 사원 오피스텔이 있습니다. 거기 신청해 보면 될 것 같네요. 거주지로 신청 자격 따지지 않으니.”
“그렇습니까? 처음 들어봅니다.”
“이제 막 매입하려던 참이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다시 물을 마셨다. 어쩐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도 같았다.
“신청은 조만간 받을 겁니다.”
“이사님, 말씀은 감사드리지만…… 옮기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오피스텔이 아파트와 가격대가 비슷하다면 옮기는 게 좋았겠지만 내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낙하산으로 부정 입사한 나는 언제든 이 회사에서 쫓겨날 수 있는 신분이었다. 아니, 부정 입사는 둘째 치고, 이사님에게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떨어지면 분명 내쳐질 것이다.
그가 내 몸에 언제까지고 관심을 둘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곧 약혼,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점점 더 필요 없는 사람이 되겠지. 그런 나를 계속 회사에서 마주치도록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월세가 무척 저렴한 지금 집에서 한 번 나오게 된다면, 다시 그렇게 저렴한 집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말하기를 망설이는 날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이 집에서 사는 건 어때요.”
“…….”
“평생 쓸 수 있게 해주겠습니다.”
이사님의 입술이 묘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은 내가 차려주고.”
맛있었죠? 하고 작게 묻는 그에게,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나는 또 내 멋대로 그의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그 말이 꼭…… 사랑 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는 호의로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뿐이었는데, 귀가 이상한 건지 심장이 이상한 건지 멋대로 그렇게 느끼고 말았다.
심장이 얼마나 거세게 뛰면 손끝까지 맥박이 내달렸다. 쿵쿵대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렸다. 몸이 잘게 떨릴 정도였다.
어제 그가 해준 키스 때문인 것 같다. 오랜만에 몸이 닿아오니, 내가 어리광을 부렸을 때처럼 그렇게 키스를 해주니…… 나도 모르게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그냥 조르기만 해도 해주던 키스인데. 그가 호의로 얼마든지 쉽게 해주는 키스인데.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뛰는 심장 위를 아닌 척 쓸어내리고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제가 이사님 댁에서 어떻게……. 괜찮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곧 약혼도 할 사람이었다. 아무리 이 집 말고 그가 사는 곳이 따로 있다지만, 결혼을 하고서도 내가 여기 사는 것은 그의 상대가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설마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날 계속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잠자리를 하려고……?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그를 응시했다. 입꼬리를 당겨 억지로 웃는 척해 보았지만 긴장으로 경직된 표정과 눈에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참 쉽지 않네.”
그는 한 보 후퇴한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 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하도록 하죠.”
* * *
나는 한 주가 지난 월요일부터 회사에 복귀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사님이 내건 조건이 있었다. 신장 수술 날짜를 확정하는 것. 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회피하는 내 태도에 이사님이 강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나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에게서 복귀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출근하기 전 그 일주일 동안은 계속 이사님과 만났다. 내가 집에 돌아간 다음 날은 그가 내 집 앞까지 아침 일찍부터 와 기다리고 있었고, 이사님의 집에서 잠든 날엔 또 그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는 늦게까지 그와 붙어 있었다.
내가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되냐고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으나 그는 그저 괜찮다는 말로 일축했다. 휴가라도 냈나? 나 때문에? 그가 다른 임원진보다 열심히 일하는 편이긴 했으니 좀 쉬는 것은 찬성이었지만 그 휴일을 나를 보살피는 데 쓰는 것은 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와 하는 일이라고는 밥을 먹거나, 밖으로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이었다. 일전에는 그가 이끌고 간 맞춤 양복점에서 몸에 꼭 맞는 슈트를 한 벌 선물 받기도 했다. 내 몸에 맞춘 거라 나 말곤 다른 누구도 입을 수 없다며 더 거절할 수도 없게 몰아붙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마침내 출근 일이었다. 나는 그가 사준 옷을 갖춰 입기로 했다.
“준비 다 되었습니까.”
나는 이사님의 집에서 이사님과 함께 출근하게 되었다. 하필 어제 그가 잠깐만 있다가 가라며 붙잡는 통에 안으로 들어왔다가 그가 건네는 달달한 와인 한 잔에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네.”
“잘 어울리네.”
그가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한 벌 더 맞추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 더 짙은 색상으로.”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벌써 차고 넘쳐요.”
처음 면접을 준비했을 때 고작 싸구려 정장 한 벌뿐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젠 이사님에게서 선물 받은 고급 정장이 옷장에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오찬만 하고 돌아올 겁니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첫날이라며 무리시키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오전 근무와 오찬 수행까지만 한 뒤 퇴근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퇴근할 때 나도 같이 퇴근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김 실장님이나 다른 팀원들도 그러는 경우가 많다고 하기에 이내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우,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이사님에게 양손을 펼쳐 내밀었다. 키를 올려놔 달라는 의미였다.
이사님과 아침부터 같이 출근하는 것도 웃긴 일인데,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유유히 등장하는 비서가 얼마나 황당할까.
아.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그가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있을까? 그렇지만 아버지의 일은 모두 정영일이 꾸민 짓이었는데…….
그를 흘긋거리며 눈치를 보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는 듯, 피식 웃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래요. 서도운 씨가 운전하세요.”
가슴이 쿵 한 번 펄떡였다. 요즘 이렇게 자주 웃는 그가 무척 원망스럽다.
“도운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몸은 어때요. 많이 나아졌어요?”
비서실로 출근하자 팀원들의 환영과 걱정 어린 질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나는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외의 다른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 이사님이랑 같이 출근했어요?”
“아, 제가 댁에 가서 모셨습니다.”
그동안 신경 써주신 게 감사해서 직접 댁으로 찾아갔다는 변명을 하자, 팀원들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어깨를 토닥였다.
“사람이 너무 착해.”
“정영일 본부장 때문에 사고 난 건데 당연히 많이 신경 써줘야죠.”
박 대리님이 고생 많았다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출근 전, 그가 미리 경고하듯 얘기한 일이 있었다. 회사 내부 사람들이 이제 내 정체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란 걸.
워낙에 큰 사건이어서 그런지, 뉴스 기자들이 사건을 깊게 파고들어 현재 내 정체와 상황까지 모두 보도를 한 상태였다. 물론 나도 TV를 보았으니 그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로 복귀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했고.
그는 직원들이 예전과는 달리 반응할 수도 있다고, 혹시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도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내가 상처 받을 만한 일은 없었다. 역시 우리 팀원들은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실장님이 퇴원을 축하한다며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베리베리필드 도넛이 담긴 상자였다.
“우와……!”
여태껏 본 상자 중 가장 큰 상자에 베리베리필드만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는 팀원들과 모여 앉아 나눠 먹었다.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도넛을 함께 먹으면 이렇게 환상적일 수가 없었다.
“저 입원한 내내 이게 너무 먹고 싶었어요.”
“이사님이 하나도 안 사주셨어요?”
“네.”
무심코 대답했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자 팀원들은 또 인상을 찌푸렸다.
“와, 정말.”
“너무하시네, 참.”
“이사님 진짜.”
“나 왜요.”
그 때, 비서실 문 쪽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언제 나왔는지 문에 기대고 서 있었다.
“이, 이사님.”
팀원들이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눈썹을 짧게 올렸다가 내리며 팀원들을 노려보자 다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장난입니다. 다들 일해요, 이제.”
이사님은 팔짱 꼈던 팔을 풀며 슬며시 웃었다.
“서도운 씨는 나 좀 봅시다.”
“예.”
이사님의 부름에 그의 앞으로 쫄래쫄래 달려 나갔다. 그는 잠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애처럼 다 묻히고.”
양손으로 턱과 볼을 감싸듯 쥐고는 엄지로 부드럽게 입가를 쓸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사님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팀원들이 있는 비서실이었다. 이렇게까지 친밀한 행동은 분명 이상해 보일 것이었다.
“감, 감사합니다.”
얼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옷소매로 입가를 마구 털어내며 팀원들을 흘긋거렸다. 정작 눈앞의 그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그저 웃으며 나를 다시 이끌었을 뿐이다.
나는 그를 따라 이사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내가 볼멘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팀원들이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그게 뭐 어떠냐는 듯한 태도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한숨을 쉬며 데스크로 다가가자 그는 몇 개의 물건을 밀어 건넸다.
“이건 그 때 두고 갔던 핸드폰이고, 이 서류는 전에 이야기했던 사원 오피스텔입니다. 서도운 씨가 직접 맡아서 검토해 보세요. 모델이 여러 개니 꼼꼼히 살펴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새 사원증입니다.”
이사님이 마지막으로 건넨 것은 내 사원증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사원증은 그 날 사고로 인해 유실되었다. 오늘 새로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가 미리 준비해 줬을 줄은 몰랐다. 나는 기쁜 마음에 사원증을 얼른 목에 걸었다.
“다시 목에 거니까 어때요.”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내가 미소를 숨기지 못하자 그가 따라 웃었다.
“이 일이 하기 싫으면 마음 편히 싫다고 해도 되고, 그만둬도 됩니다. 서도운 씨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것 알아두세요.”
“전 이 일이 제일 좋습니다.”
비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으나, 막상 맡아 하다 보니 내게 딱 맞는 일인 것 같았다. 이사님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괜히 사원증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흘긋거렸다.
“첫날인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간 놓고 있었던 부산타운 일부터 천천히 재개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스케줄표 전달받았습니까? 오늘 오찬 상대, AG 문지원 전무입니다.”
* * *
“와, 도운 씨.”
문 전무와 만나기로 되어 있는 어느 한정식 식당 앞. 차를 세우고 내리기가 무섭게, 어디 있던 것인지 문 전무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너무 반가워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사고가 있기 전 회의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가 날 반가워하는 것만큼 나도 그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 안 반가운가 봐.”
문 전무가 양팔을 벌리며 나를 안으려고 하자, 뒤에 있던 이사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문 전무의 팔을 붙들었다.
“넌 지겹도록 보니까.”
쳐내듯 팔을 치워버리자 문 전무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허공에서 짧게 신경전 하듯 눈빛을 교환했다. 먼저 시선을 돌린 사람은 문 전무였다. 그는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입원한 동안에 해일이가 보러 가지도 못하게 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네가 왜 눈물이 나.”
“왜 자꾸 시비를 걸어, 해일아.”
나는 문 전무가 무척 반갑기는 했으나, 일부러 이사님의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그의 발언에 겁이 났다. 이사님이 문 전무와 나의 사이가 무척 각별하다고 생각할까 봐.
다행히 내가 말릴 것도 없이 식당 지배인이 등장했다. 우리는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한, 떨떠름한 상태였다.
장지문 안쪽 방에 들어왔다. 이번에 나는 따로 먹지 않고 이사님 옆에 자리하고 앉았다. 그를 수행하러 온 것이기도 했지만, 문 전무와 내가 맡아 진행하는 프로젝트 이야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내 종업원이 따뜻한 물수건과 잔을 들고 들어왔다. 미리 주문했던 메뉴를 확인하려는 듯 주문서를 되짚어 묻자, 문 전무가 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쪽 식사엔 오이 전부 빼주시고요.”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는 헙 입을 닫았다.
종업원은 주문을 받아 문 전무와 주거니 받거니 메뉴 확인을 한 뒤 방을 나갔고, 나만 눈알을 굴리며 이사님의 눈치를 봤다. 문 전무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물 대신 차 좀 달라고 할까요? 여기 국화차가 맛있는데.”
“아, 아닙니다.”
나는 앞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도 모르고 있던 걸, 문 전무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큽, 콜록…….”
이사님이 넌지시 건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내 한심한 꼴을 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이사님은 내 등을 두드려주고, 문 전무는 냅킨을 뽑아 건넸다.
“감, 감사합니다.”
“문 전무랑 따로 식사한 적이 많았어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화내지 않을 테니까 얘기해 봐요.”
이사님도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나직하게 말했다. 정말 목소리만 들으면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묘하게 분위기가 무서워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오이 때문이야?”
“…….”
“뭐야, 정해일. 넌 도운 씨가 싫어하는 음식도 모르고 있었어?”
문 전무의 눈매가 짙어졌다. 딱 봐도 이사님을 놀릴 심산으로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큭큭 소리 죽여 웃는 문 전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이거, 역시 도운 씨한테는 나 같은 세심한 사람이 더 잘 어울린다니까.”
“하아.”
이사님은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매만졌다. 그 반응에 지금 나 혼자만 불안해하고 있었다. 문 전무는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래서, 얼마나 자주 만났느냐니까.”
“그냥…….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일하던 곳에 손님으로 자주 오셨기 때문에, 그 때마다 뵈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가감 없이 이야기했으나, 아마 내가 오이를 꺼린다는 걸 문 전무가 먼저 알았다는 것이 탐탁지 않을 것이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더니 자기도 모르던 사실을 알고 있다, 뭐 그런 배신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 바에서 만난 사람한테 공 좀 들이고 있다고. 거의 매주 놀러 갔지 뭐.”
문 전무가 하는 말의 의도가 반쯤은 농담인 것을 이사님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발하듯 저렇게 말하는 문 전무를 보고도, 정말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도운 씨가 피아노 연주하는 거 보려고 매번 시간 맞춰 갔었는데.”
“……피아노?”
“그, 그만해 주세요, 전무님…….”
하지만 그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언제까지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주제넘은 줄은 알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말리며 애원했다.
정말 다행히도, 때마침 음식이 다 조리되어 첫 코스부터 등장했다. 그래 밥을 먹으면 분위기가 좀 나아지겠지. 나는 연신 종업원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내가 얼마나 식사만을 기다렸는지 이 두 남자는 모르겠지. 나는 이사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싫었기에 애써 그릇에만 시선을 두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중반부터는 여느 오찬 모임과 다를 바 없이 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사고로 입원하는 탓에 프로젝트에 차질이 있을까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AG 측에서 별 탈 없이 진행해 우리 쪽 각 부서로 전달해 주었다고 했다.
AG의 프로젝트 팀에게 조만간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것 같았던 식사 자리가 마침내 끝났다.
후식으로 소화를 돕는 따뜻한 매실차가 나와 그걸 홀짝이고 있는데, 잠시 이사님이 통화로 자리를 비우시는 사이 문 전무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해일이가 잘 해줘요?”
그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네……. 잘 해주십니다.”
“대답이 탐탁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문 전무가 또 사람을 놀리려는 것 같아 내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사고 이후로 무척 잘 해주십니다. 건강 면에서도 철저히 신경 써 주시고, 입원했을 때 입원실도 정말 좋은 곳이었어요.”
“그건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고요.”
“무,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잘 대해 주십니다. 일에서도 제 의사를 최우선으로 배려해 주시고…….”
이사님을 헐뜯는 꼴이 되기 싫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부연설명을 붙였다. 하지만 내가 말을 덧붙이면 덧붙일수록 문 전무의 표정은 어리둥절한 것 같아 보였다.
“음, 내가 말을 잘못 한 모양이에요. 둘이 사귀면서 별다른 일은 없는 건지 묻는 거였어요.”
“……네?”
“만나보면서 해일이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다시 깨닫게 되면, 도운 씨가 나한테 관심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사귀면서?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찻잔 받침에 살짝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한텐 숨길 거 없어요. 해일이랑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서, 웬만한 건 서로 얘길 해주거든요.”
내가 완곡히 표현하니 그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야기했다.
“이사님과 저 ……그런 사이 아닙니다.”
“……?”
그러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문 전무가 나와 마찬가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이십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처신을 좀 더 잘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사무실에서 그가 내 얼굴을 쓸고 만지던 것 때문에 신경이 쓰이던 참인데.
“……정말 아니라고요?”
“정말 아닙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이사님이 제게 잘해주시는 것도, 그냥 제가 이사님을 구해 드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사님께 죄책감 느끼시라고 막, 강요 했……거든요.”
말 중간 중간이 뚝뚝 끊어졌다. 그만큼 나는 문 전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이, 내가 다 들었는데. 회사에 벌써 소문이 쫙.”
“소문이요?!”
소문이라는 소리에 내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것만큼 크게 뜨였다. 소문이라니. 이사님과 나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는 건가? 그것도 둘이 사귀는 사이라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거 사실이 아닙니다.”
소문이 난 거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다른 회사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널리 퍼진 소문이라면, 회사에도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어, 어쩌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덜덜 떨렸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말 아니라서…….”
“도운 씨, 진정해요.”
“제가 소문낸 거라고 생각하시면…… 정말, 안 되거든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만약 이사님이 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사님, 약혼하실 분…… 계십니다.”
“뭐라고요?”
“혹시나 그런 소문 퍼져서… 제가 이사님 일에 방해가 된다거나 하면 정말 안 돼요. 상대분께서 불쾌하실 수도 있고…….”
거의 울 것만 같았다. 역시 회사로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었나? 내가 너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나? 온갖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문 전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에요, 서도운 씨.”
“예?”
“소문 들었다는 거, 거짓말이었다고요. 그냥 놀리려고 한 소리였어요. 미안해요.”
그 말이 과연 정말인지 아니면 나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 전무는 재차 ‘청영 사람도 아닌 내가 소문을 어떻게 알겠어요.’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제야 손의 떨림이 조금 멎어들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 더 들어요. 진정 좀 하게.”
“네……. 전무님, 이사님껜 아무 말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쐐기를 박듯 다시 이야기했다. 문 전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사님에게 괜한 소리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문 전무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통화를 마친 이사님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경직된 내 표정을 보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냥 속이 좀 얹힌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결국 다시 이사님의 청담동 집으로 오고 말았다. 아까 식당에서 속이 불편해 보이는 나를 염려하여, 그는 자신의 집에서 편히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씻고 그가 마련해 둔 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내가 입을 수 있을 만한 편안한 실내복과 외출복을 모두 이 집에 구비해 두었다.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든지 여기서 편히 자고 갈 수 있도록.
조금 착잡한 심정으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헤어드라이어를 켜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자, 어느새 이사님이 등 뒤로 다가와 내 손에 들린 것을 가져갔다.
“앉아봐요.”
침대 끝에 놓인 소파에 앉으라고 턱짓하더니, 내가 자리하자 그가 대신 내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왼손으론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오른손은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따뜻한 바람으로 서서히 말렸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며 만져 주는 것이 무척 기분 좋았다. 머리가 다 마르자 보들보들해진 머리카락을 그가 단정히 빗겨주었다.
식당에서부터 그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던 것 같은데, 여전히 행동은 이렇게나 다정했다. 조금 불안하던 마음이 가셨다.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다 됐다고 해놓고도 손을 치우지 않던 그가 나지막이 날 부르며 말했다.
“……내가 오해했어요.”
“네?”
“아르바이트하던 거요. 멋대로, 질 나쁜 곳일 거라고 단언하고 화냈던 것 미안해요.”
그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커다란 손 안에 그의 얼굴이 모두 담겼다.
“변명이지만, 문 전무의 성 취향이 좀 남달라서.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 줄 알았어요.”
“아…….”
그 말에 이상하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를 오해한 게 아니라, 문 전무의 특성 때문에 오해했던 것이니까.
“전 괜찮습니다.”
“그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계속하고 싶어요, 피아노?”
이사님은 내 볼을 감싸며 물어보았다. 그 손의 온기를 조금 더 느끼고자, 나는 자연스레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대듯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지그시 눈을 감자 더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아니요. 지금은 그냥…….”
목소리가 노곤해졌다. 사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이 집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피아노만 봐도 옛날에 피아노를 배우던 때의 향수가 느껴졌고, 건반을 한 번쯤 눌러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내 처지에 피아노라니. 남들이 알면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
배울 돈도 없고, 손은 골절까지 당했다. 재활로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옛날처럼 치기는 어려울 것이란 걸.
“배우고 싶으면 내가 지원해 주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사님.”
난 그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 그걸 알기에 더 부정한 것이고.
이사님은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해도 좋다고 말하고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간만에 출근해서 피곤한 건 둘 다 매한가지니 같이 낮잠이나 잡시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누워 내 이마 위로 가볍게 뽀뽀했다. 어김없이 그는 날 꼭 끌어안았고, 나도 이젠 익숙하게 안긴 채로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늘은 잠들기까지 조금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약혼자……. 마음에 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낮잠을 자고 막 비몽사몽 일어났을 때였다.
이사님은 문 전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술 약속이 생겼다며 나가더니, 꽤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돌아왔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넌지시 물었으나, 아무 일도 없고 그냥 좀 취해서 그런 것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혹시 문 전무가 점심때의 일을 이사님께 말한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가도, 그렇다기엔 이사님이 아무 화도 내지 않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얘기를 전해 들었으면 응당 나에게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캐물을 수도 없이, 긴가민가한 상태로 하루가 지나갔다. 괜한 속앓이를 하다 보니 안 아프던 배가 다시 아파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은 어제와 같이 출근을 했다.
팀원들이 나를 배려해 업무를 많이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여유 있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사님이 나에게 맡겼던 사원 오피스텔 선정 건 또한 수월하게 마무리한 뒤에 이사실로 전달했다.
“수고했어요.”
그의 말투가 어딘가 모르게 건조한 느낌이었다. 내 기우인가.
걱정이 들긴 했지만 또 이사님이 모질게 굴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이 참 왔다 갔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며칠째 이어지자,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사님은 심지어, 내가 오늘은 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요,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가겠다고 해놓고 왜 속상함을 느끼는 건지 나도 참 웃겼다.
그렇다고 내가 청담동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걸 말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시나 그렇게 하세요, 라는 부드러운 어투로 나를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혹시…… 만나는 분이 너무 좋아져서 나한텐 흥미가 떨어졌나? 그래서 날…… 밀어내고 싶어지는 건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배가 따끔따끔 아파오기 시작했다.
벌써 그의 집에서 잔 날이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데도 그는 나를 한 번도 안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가장 깊고 진한 접촉은 고작 입맞춤에서 그쳤고, 요즘은 그마저도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청담동 집에서 잠을 자는데, 그는 서재에서 일을 하느라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저녁 인사를 했다.
“저 먼저 자겠습니다. 이사님께서도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그래요, 서도운 씨. 정리만 하고 나도 자러 가겠습니다.”
이사님은 쓰고 있던 안경을 잠깐 벗어 내리며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내일은 주말인데도 그렇게까지 몰두해서 할 일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채로 잠들려니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른 새벽녘에 눈을 뜨고 말았다.
“…….”
주말 아침. 이사님은 새벽 운동을 나간 모양이다.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요즘은 주말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는데. 항상 그가 운동을 다녀오고 난 뒤 씻고 아침상을 차릴 때쯤에 솔솔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곤 했다.
다시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눈이 너무 말똥하게 떠졌다. 나는 그냥 잠드는 것을 포기하곤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가볍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집 안을 돌아다닐 때였다.
서재 책상 위에 어제 그가 늦게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가 너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정리만 하고 자겠다더니,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자러 오질 않아 그냥 혼자 잠들었던 쓸쓸했던 어제가 떠올라 침울해졌다.
“…….”
나는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정말 그냥 무심코.
그런데, 서류의 내용이…….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지는 정신을 붙잡기가 어려웠다.
서류들은 모두 유학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미국 등의 영어권 유학. 그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나도 한 번 읽기만 해도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서류였다.
그가 누구를 유학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책상 위 또 다른 서류 더미에서 외국 음악 예술 대학교의 피아노과 입학 실기시험과 관련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 유학. 피아노. 이 세 키워드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건 나밖에는 없었다.
“윽…….”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날 외국으로 보내 버리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나는 서둘러 손에 든 서류부터 내려놓았다.
손등으로 급히 눈물을 훔쳤지만 수도꼭지라도 틀어둔 것처럼 멈추지 않고 나왔다.
“윽, 으흑…….”
여기서 살라고 해놓고.
나한테 원하면 이 집에서 살아도 된다고까지 해놓고는. 이제 와서 날 외국에 버리려고 하다니.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엉엉 소리 내 목 놓아 울며 무릎 위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날 희망 고문한 것만 같다. 그는 나를 처음부터 자기 옆에 데려오질 말았어야 했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그는 몰라본 것이다. 내가 쉽게 내쳐지는 줄로만 알고.
혹시 약혼이 가까워졌나? 그래서, 내가 너무 쓸모없으니까…… 이제 버리려는 건가.
잠옷 소매로 다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며 숨을 고르려고 하는데, 책상 서랍이 열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언가 직감하듯 그 안에 손을 넣어 그 작은 물건을 꺼냈다.
“…….”
내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화려한 반지. 그 반지가 든 상자가 서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상자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서재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침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베개에 얼굴을 푹 묻어버리는 자세로 누웠다.
몇 분이 지났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님은 재킷의 지퍼를 내리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셨다.
“……불편하게도 자네.”
내가 숨이 막힐 것 같았는지, 몸을 살며시 돌려 모로 눕혔다. 그 손길이 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잠시 걸터앉아 내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는 듯했다. 눈과 코가 울음으로 벌게지지는 않았는지 신경 쓰였지만, 그는 내가 엎드려 자고 있어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려준 뒤,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그가 씻는 물줄기 소리에 내 울음 섞인 흐느낌이 완전히 묻혔다. 나는 다시 강박증처럼 손끝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 * *
오늘은 하루 종일 우울했다.
나는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심경이었다. 그가 언제쯤 내 유학 이야기를 꺼낼지 그게 너무 걱정됐다.
그의 청담동 집엔 어딜 가나 내 흔적이 남게 되었다. 옷장을 열면 내가 입을 옷들이 들어 있었다. 그가 직접, 손수 사다가 채워 넣은 것이다. 신발장도 마찬가지였다. 욕실 또한 내가 사용하는 칫솔이 놓이게 되었단 말이다.
그걸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나는 속에서 울음이 차올랐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내가 또다시 누군가에게서 버려진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가 잠시 집을 비운 틈을 타 울다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
나는 어떻게 해도 행복해질 수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렇게 될 바에야, 나도 정말 부모님을 따라서…….
“서도운 씨.”
그가 제일 나빴다.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서도운 씨?”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려고…….
“……네. 네, 이사님.”
“왜 몇 번씩 불렀는데도 못 들어요.”
“아…….”
“밥도 깨작대고.”
죄송합니다.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가 저녁에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나오더니 어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왔다. 이상하게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나는 더 긴장하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바로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려는구나. 그의 부름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재킷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나는 심장이 철렁하는데, 그는 말없이 테이블에 올리고 내 쪽으로 쓱 밀었다.
“한번 천천히 읽어봐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고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긴 봉투 속 접힌 종이를 꺼내보니,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 내용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미국으로의 유학, 음악 예술 대학교. 나는 굳이 뒷장을 넘겨보지도 않았다.
“서도운 씨가…… 피아노를 계속했으면 좋겠고, 또 하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아서 내가 알아봤습니다.”
머리로는 그가 원하는 대로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베풀어준 것이 얼마인데, 이 정도 부탁 하나 못 들어줄까. 하지만…….
“이미 항공권은 준비가 됐어요. 그곳에서 살 집도 수배를 마쳤고. 등록금은 물론이고, 레슨비나 체류비 할 것 없이 전부 다 지원해 줄 겁니다.”
“전…….”
“물론 손 재활 치료도 계속할 거고. 그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의료진에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치할 겁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러기 힘들었다.
이사님은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조금 숙여가며 내 표정을 살폈다.
“도운아.”
그러고는 내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 내 이름을 불렀다.
“저 싫어요.”
이렇게 애처럼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나는 다짜고짜 싫다는 말부터 뱉고 말았다.
“싫어요, 이사님.”
반지를 보는 순간, 그의 약혼이 머지않았다는 것에 확신이 섰다.
여기서 빠져 주는 것이 그를 위한 길이겠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착한 사람이 못됐다.
“저 미국 가기 싫습니다. 윽, 흐으…… 저 보내지 말아주세요, 이사님.”
“도운아, 우선 진정해. 응?”
“약혼 때문에…… 저 보내시려는 겁니까.”
울음이 섞여 목소리가 꼴사나웠다.
“이사님 약혼하신다는 거, 흑, 압니다. 그래도……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읏.”
나는 정말 떼를 쓰기 시작했다. 훌쩍거리느라 숨이 뒤엉켰고, 거칠게 몰아쉬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인 아픔이었다.
“그걸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이 정말, 그가 곧 약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더 울음이 쏟아지고 말았다.
“절 이렇게, 읏, 기대하게 만드셨으면서…… 어떻게, 외국으로 보내려고 해요. 흐윽, 윽, 너무해요, 이사님. ……정말 너무하세요.”
“도운아. 아니야, 뭔가 착오가……. 아니, 우선 미안합니다. 이렇게 싫어할 줄 예상 못 했어.”
이사님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 얼굴을 재차 쥐며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내가 고개를 홱 틀어버리며 손길을 피했다. 그래 놓고 후회했다. 내 주제에 그의 손길마저 피해 버리다니.
이렇게나 말을 듣지 않으니 날 버리고 싶겠지.
“조금 미루시면…… 안 됩니까. 저 손 재활 마칠 때까지만요. 네?”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굴면 그가 날 더 싫어할 거란 걸 알았지만, 나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했다.
“저 신장 수술도 아직, 못 했잖아요. 수술 끝내고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윽. 미뤄주시면 안 됩니까?”
“도운아, 너 뭔가.”
“제발요. 제발…….”
난 이사님의 팔을 붙들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미간이 좁혀지고 눈썹이 팔자로 휘면서, 꼭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이젠 정말, 제게 아무 관심 없으신 겁니까.”
“…….”
“제 몸도요?”
“서도운!”
이렇게까지 사정하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난 처절해졌다.
“저 이사님 좋아해요.”
애써 그쳐가려던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저 이사님 좋아합니다. 이사님이 제게 말씀하신 거랑 다른 의미로, 좋아합니다.”
“뭐……?”
“그래서…… 그래서 단번에 이렇게 끊어내기가…… 흐윽, 너무 어렵습니다.”
나는 그만 가슴속에 응어리진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수술까지만요. 네? 그때까지만 미뤄주시면……. 제가 꼭 깨끗하게 마음 접겠습니다.”
자그마치 15년을 품어온 마음이 그의 앞에서 이렇게 힘없이 흩어져 내렸다. 물먹은 휴지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고개를 젓고, 아랫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꾹 물고는 울음을 참아내려 애썼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계속…… 이사님 곁에 있게만 해주세요.”
이사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결국 향하는 곳은, 나였다.
“…….”
그는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들어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평소와 다름없이 내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는 것에 더 눈물이 쏟아졌다. 내 속을 까맣게 문드러지도록 했던 그 작고 소중한 마음을 모두 토해내듯 그렇게.
울음이 잦아들 줄을 몰랐다. 꼴사납게 그의 옷까지 적셔가며 우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하지만 오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도운아.”
“…….”
“도운아, 도운아?”
몸에 힘이 주욱 빠졌다. 이사님이 내 몸을 다급히 안아 올리려 했으나, 내 정신은 이미 반쯤 사라지고 말았다.
난 또다시 그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는 그대로 실신하고 말았다.
* * *
눈을 떴을 땐,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한 달이 넘도록 입원하던 곳이어서 그런지, 천장만 봐도 단번에 어딘지 알 수가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이사님이 내 손을 꼭 붙잡고, 기도하듯 자신의 이마에 대고 있었다. 난 신호를 보내듯 손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숙여 있던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깨어났어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레스성 위염에, 탈수 증세까지 있어서 급히 내원했어요.”
걱정이 덕지덕지 붙은 어투였다. 아픈 나보다 더 가슴이 아린다는 듯.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더 누워 있으라고 했지만, 그럴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사님.”
내가 쓰러진 그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아 조심스레 부르는데, 하도 토해내듯 울어서인지 목이 다 쉬어버렸다.
큼큼, 목을 붙잡고 헛기침하는 나를 그가 말렸다.
“헛기침하면 더 상한다고 하니 일단 이것부터 마셔요.”
그는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라 건넸다. 목이 정말 마르던 차라 나는 벌컥벌컥 단번에 그 잔을 모두 비웠다.
“한 잔 더 줄까요?”
“괜찮습니다.”
컵을 다시 가져간 그가 옆 탁자에 내려두고는, 비어버린 내 손을 살며시 잡아왔다.
“링거 다 맞으면 곧장 퇴원해도 된다고 합니다. 한 시간 정도만 더 기다리면 돼요.”
“…….”
“서도운 씨.”
그가 나지막이 날 불렀다. 손등 위를 부드럽게 쓰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후회. 그의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자괴감. 그리고…… 이렇게나 철없이 마음을 드러내고 강요했다는 것까지. 절로 눈이 감겼다.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할 얘기가 무척 많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
“나 약혼 안 합니다.”
이사님의 말에 내 몸이 굳어졌다.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계획된 적 없는 일이에요.”
“네?”
“물론…… 상대들을 만나보긴 했지만, 약혼 이야기까지 진행된 적은 없습니다. 대체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건, 정 본부장님이…… 이사님 약혼 준비로 정신없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지금, 감방에 들어가서 무기징역 사는 사람의 말을 여태 믿은 겁니까?”
그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약간 어이없어하는 감정이 섞인 웃음. 그렇게 얘기하니 믿은 내가 바보 같지만, 정영일이 이야기했던 건 그가 잡혀 들어가기 훨씬 전이었으니. 나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말 미련해서는.”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자 그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날 좋아해요?”
“…….”
“대체 언제부터요.”
나는 부끄러워 대답을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끝까지 말이 없자, 다리를 꼬아 앉으며 그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
“내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 같아요. 사실 옛날에, 아버지들이 그렇게 되기 전에 말이에요. 서도운 씨를 위해서 예술학교 진학을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예술학교? 중학교 진학할 때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때 알아보다가 결국 사고가 나는 바람에, 못 전해줬던 게 생각이 나고 아쉬워서요.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밀어붙이려고 했나 봅니다.”
“…….”
“미안해요. 너무 급작스러웠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도 마음이 무지 급해서요.”
이사님이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괴며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문 전무가 그러더군요. 둘이 당연히 사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도운 씨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고.”
“…….”
“내가 분명히 고백을 했는데.”
그 말에 놀라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무, 무슨…….”
“분명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까?”
이사님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마저 갸웃거리며 물었다.
“물론 서도운 씨가 수락한 게 아니었으니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 계속 같이 지냈잖아요. 그래서 그 엇비슷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뜸을 들이다 다시 말했다.
“그렇게 아니라고 부정했다기에, 서도운 씨가 나를 무척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리가요…….”
대답이 곧장 튀어나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이사님을 왜 싫어합니까.”
“내가 서도운 씨를 강간하고, 유린했으니까요.”
이사님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나도 그의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건 강간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합의하에 이뤄진 일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는 수 없이 나의 말이 옳다 해주려는 것 같았으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애써 고개를 휙 돌리며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증오하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목숨을 걸고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불을 꾹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추운 것도 아닌데 어깨까지 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제가 목숨까지 내던져 가면서 이사님을 구한 건…….”
“…….”
“정말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
“죄책감이나 느끼라고 하는 그런 알량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제가 이사님을 정말로 좋아해서. 정말 많이 좋아해서…….”
나는 다시금 고여드는 눈물을 애써 흘리지 않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
“이렇게 멋없이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번엔 절대 꼴사납게 울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 내 마음을 전하고, 그리고 깔끔하게 포기할 것이다.
“……저는, 저는 진심으로, 이사님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르르 떨리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힘겹게 한 자 한 자 내뱉던 그 찰나.
“좋아합니다.”
“…….”
내 입에서 나왔어야 할 말이, 이사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좋아합니다, 서도운 씨.”
“…….”
“서도운 씨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요.”
그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죄책감이나 동정이 아닌, 내 진실한 마음으로.”
나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놀란 토끼눈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끈기 있게 나를 기다려 주었다. 재촉하거나 덧붙이는 말 없이 그렇게.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왜…….”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왜 저를.”
왜 저를 좋아하시나요? 나는 스스로 물었다. 그가 날 좋아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을 텐데. 나를 왜 좋아한다고 하지.
“거짓말이시면.”
“거짓말 아닙니다.”
“아니면 왜…… 왜 절 미국에 보내 버리려고 하셨습니까?”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다. 우는 것도 아닌데 울 때처럼 말 사이사이에 숨소리가 격하게 섞여들었다.
“약혼하시는 줄 알았어요, 제가 서랍에서…… 분명 반지를 봤는데.”
“이 반지 말하는 겁니까.”
그가 짧게 터뜨리듯 웃은 뒤,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아침에 분명 그의 서랍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네, 그거…….”
“하아. 이건 또 언제 본 거람.”
그는 손아귀에서 굴리듯 몇 번 돌리더니,
“오늘 저녁에 줄 생각이었습니다.”
이내 결심한 듯 케이스를 열었다.
“당연히 서도운, 너한테.”
“…….”
“너한테 제대로 고백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건너왔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껏 나에게 모질게 대한 모든 일을.
“어떻게든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를 생각이었고.”
“…….”
“네가 말했던 대로, 이전의 일은 모두 묻고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속죄가 된다면. 그가 거의 속삭임과 같이 말했다.
“애써 피어난 감정들을 부정하고 살던 내가 너무 바보 같지만, 그렇게 어물쩍 보상이나 죄책감이라는 말로 내 마음을 뭉개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서, 표정과 몸짓에서 알 수 있었다. 무겁고 착잡한 심정이 흘러나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서도운 씨가 이런 날 싫어하게 된대도 상관없어요.”
목에 밧줄이 매어진 듯했다. 그도 방금 전의 나처럼 숨을 몰아쉬었고, 마른침을 애써 목으로 넘겼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줘. 내 모든 잘못을 속죄하고 네게 온전히 이 마음만 전해줄 수 있는…….”
“…….”
“나에게 가장 이기적인 기회를.”
환영이 보이는 것 같다. 그는 목을 내밀었다. 그리고 칼 한 자루도 함께 건넸다. 그것은 그의 목에 칭칭 감긴 매듭을 잘라버릴 수도 있었고, 혹은…… 그의 목을 찔러버릴 수도 있었다.
이사님은 주도권을 나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릴 주도권.
잠시 침묵하던 나는…… 그대로 칼을 크게 휘둘렀다.
“절……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
“언제부터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까.”
정적이 흐를 때마다 나의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요.”
그 목소리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처음부터 널 좋아했던 것 같아, 도운아.”
“……읏…….”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팔을 감싸 걸었다. 세게 끌어안으며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 또한 화답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물어뜯어 여려진 살을 보드랍게 핥았다.
앞으로 당겨졌던 내 몸을 서서히 밀며 그는 침대 머리맡 프레임을 잡아 지탱했다. 다른 손으론 내 뒷덜미를 쥐고 각도를 달리해 가며 깊은 키스를 나눴다.
좋아해요. 입술에 틈이 생길 때마다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금세 그 안으로 먹혀들었다.
처음부터 서로를 향했던 마음이 너무나도 오랜 길을 돌아오고 말았다. 흙탕물이 진 길 위를 뛰며 가슴에 얼룩을 지게 하고, 갈림길에서의 잘못된 선택으로 낭떠러지를 맞닥뜨리게 했다.
하지만 마침내 닿았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제 서로는 서로에게 완전히 녹아들었다.
“좋아해요.”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나를 이리저리 쥐고, 흔들어, 넝마를 만든대도. 평생 그 심연 안에서 헤엄칠 수만 있다면.
강한 물살, 그리고 또 부드러운 물거품이 되어…….
끝내 나를 집어삼킨.
해일海溢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