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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 외전-1. 대해 2 (20/29)

  1. 대해 2

“서도운 씨.”

잠시간 망설이던 해일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도운을 불렀다. 해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진 줄도 모르고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까스로 시선이 가닿은 뒤에야 해일의 낯빛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은 모호한 표정. 짧은 순간, 그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는 도운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얽고 있던 손가락도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해일은 자신의 표정을 숨기려는 듯 입가를 살짝 쓸며 가렸다. 도운은 그 손짓에서 언뜻 혼란스러움을 엿보았다. 해일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된 만큼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덩달아 혼란스러워진 도운의 동공이 살며시 떨렸다. 왜 해일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자신이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두려움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운의 물음에 해일이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을 도운이 모르지 않았다.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도운의 몸이 절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해일이 도운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임에도 도운은 크게 놀랐다. 고개를 팩 숙이며 손목으로 시선을 떨구었다가 다시 올려 혼란을 숨기지 못하고 해일을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엉망이 된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도운이 물었다. 자신이 생각해 내기보다 차라리 묻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리고 빨리 사과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 말이 없던 해일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선 어떠한 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조금 놀라서.”

해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사고, 형 정영일, 그리고 도운과 그의 가족.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그는 마치 방관자처럼 한발 물러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무지한 채로 속단하고 도운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그 점을 무척 자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멋대로 쥐고 흔들려고 했던 그 오만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곧장 그를 캐물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분명 겁먹었을 것이다. 이번엔 절대 도운을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우선 따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는 게 올바른 수순일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물어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복잡한 머릿속에서도 사이렌이 울리며 해일에게 경고했다.

분명 모순되는 점이 있었다. 호텔에서의 재회 당시, 도운은 호텔에 있었다. 다른 남창과 다를 바 없는 차림새로 남자들의 손길을 받아내고 있지 않았던가. 첫사랑과 첫 관계를 했다고 했는데, 그 첫사랑이 어떻게 자신이 될 수가 있는 것인지… 해일은 도운 몰래 사람을 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놀라셨…다고요? 왜…….”

해일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던진 짧은 말에 도운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해일이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해 말했어도 도운은 이미 그 간극을 기밀하게 알아챈 후였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거야.’

도운은 불안한 마음에 얽어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그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긁고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아침에 입을 연 순간부터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운은 다시 멈칫, 몸을 굳혔다. 몰래 뽀뽀했었다는 말. 그게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어릴 적에 한 행동이라고 해도 허락 없는 입맞춤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걸 여태까지 비밀로 숨겨와 놓고는 이제 와 당당히 밝히는 꼴이라니.

그게 문제 되는 일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뻔뻔히 뱉었다는 것이 바보 같았다. 그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표정을 보면 놀라기만 한 게 아니라…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도운은 곧장 무릎에 손을 모으고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을 깨닫자 갑자기 맥박이 요통 치는 것 같았다.

“제가 뽀뽀했던 건, 너무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그때는……. 정말 죄송합니다, 이사님.”

중얼중얼 변명을 해보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어렸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하는 도운의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흐려졌다.

“제멋대로 그런 짓을 하고…….”

반지를 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실망해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래서 겁이 났다. 도운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왼손을 가렸다.

“서도운 씨.”

해일은 그런 도운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큰 손 안의 작은 두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억지로 빼내거나 피하지 않았기에 해일도 더 힘을 주어 붙잡았다.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운을 안심시키려 했다.

도운이 겁먹지 않기를 바라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건데 이러나저러나 겁을 먹어버렸다. 도운의 사과에 촉촉이 물기가 어려 있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해일이 느끼기에, 도운은 과거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도운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조심스레 타고 올라가 하얀 팔을, 어깨를 쓰다듬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해일은 하는 수 없이 도운을 끌어안았다.

“……!”

도운의 오금에 팔을 밀어 넣고 허리를 안아 확 당기자 가벼운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눈 깜짝할 새 해일의 허벅지 위에 앉는 자세가 되었다.

당황한 도운이 옆으로 뻗은 제 다리를 버둥대자 해일은 도운의 무릎을 끌어당겨 굽히고는 그 작은 몸을 완전히 팔에 가두어 안았다.

“힉, 딸꾹.”

갑자기 자세가 바뀌어 해일의 탄탄한 가슴에 한쪽 볼을 폭 파묻게 된 도운은 많이 놀랐는지 가슴을 들썩이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해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딸꾹질까지 하고.”

“죄송, 죄송해요.”

“사과하지 말라니까.”

딸꾹질 때문에 말이 뚝뚝 끊긴 도운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였다. 그런 얼굴을 가릴 생각으로 저도 모르게 해일의 품을 파고들었다. 해일은 웃으며 도운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그런 귀여운 짓을 할 줄은 몰라서.”

“하지만……. 이사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도운이 웅얼거리자 해일의 가슴께가 작게 울렸다.

“괜찮다니까. 놀란 건 난데 왜 서도운 씨가 딸꾹질을 합니까.”

해일이 일정한 속도로 등을 토닥여도 딸꾹질이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도운을 번쩍 들어 올렸고, 도운은 내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해일의 목에 잽싸게 팔을 감았다.

그렇게 천천히 부엌으로 향한 해일은 넓은 식탁 위에 도운을 내려놓았다. 차지 않은 정수 물을 컵에 따라 도운에게 건넸다. 도운은 천천히 물을 삼키고 나서야 가슴이 진정되었는지 딸꾹질도 나오지 않았다.

“어린애가 따로 없어.”

“아닙니다, 어린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자 도운은 기분이 조금 풀어져 조잘댔다. 딸꾹질은 나이 든 어른도 하는 것이 아니냐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도운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 안쪽을 아릿하게 채워오는 감정이 있었다.

해일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보석이 박힌 눈동자가 해일을 곧게 내려다보며 시선을 마주했다.

“…그때 얘기 좀 더 해봐요.”

그 모습에 해일은 스위치를 내리듯 복잡한 머릿속을 잠시 비워 버렸다. 도운과 함께하는 이 소중한 순간을 다른 생각으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심장 한구석을 애써 내리누르며 그가 다시 물었다.

“정확히 언제 뽀뽀한 겁니까. 기억나요?”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도운의 흰 다리를 살며시 붙들고는 발목과 종아리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해일의 손길에 어깨를 굳히며 피하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한 듯 힘이 풀어지며 동시에 입도 열렸다.

“사실은 그때…….”

작은 입술이 움직이며 당시의 일을 천천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긴장했는지 더듬거리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눈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뜨거워지는 볼과 광대 위를 만지작거리다가도, 하려던 이야기는 끝까지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해일은 짧은 순간 여러 번 바뀌는 표정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도운을 다시 만나 지금까지, 자신이 어리석어 차마 보지 못하고 지나친 순간들을 아쉬워하며. 그리고 과거 그 해맑던 웃음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해일은 도운을 끌어안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 이미 정답을 알 것만 같은 기분을… 완전히 지우기 어려웠다.

* * *

“반지는 어디 뒀습니까.”

다음날이 되어 출근하려고 차에 오르던 해일은, 운전석 문을 여는 도운의 손가락이 비어 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 도운은 문고리를 쥐던 손을 살짝 들어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서랍에 넣어 뒀습니다.”

그렇게 담담히 대답하고는 운전석에 자리했다. 먼저 차에 올라타는 도운의 모습을 지켜본 해일이 짧게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자 안전벨트를 당겨 매는 도운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보였다.

해일도 모르게 그곳 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이 와 닿는 것만 같았던 도운이 흘긋, 룸미러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해일이 심각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반지가 생기면 팀원들이 궁금해할까 봐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도운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하루 만에 비어 버린 손가락이 어색했는지 깍지를 껴 가볍게 주물렀다. 얼마나 오래 끼고 있었다고 어색해하는 것인지,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다.

“혹시 티라도 나면 안 되니까… 음……. 그냥 끼고 다니는 게 좋으십니까?”

해일과 반지를 나눠 낀 것도 아닌데 무슨 티가 난다는 것인지. 뱉어놓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도운이 덧붙여 물었다.

“서도운 씨 편한 대로 해도 좋습니다.”

티 나라고, 임자가 있다는 티 좀 내라고 끼워준 것인데. 해일의 속내도 모르고 도운이 맑게 웃었다.

“큐빅도 좀 크고, 반짝거려서 눈에 띄는 것 같아서요. 물론 무척 예쁘지만…….”

실은 더 이상 회사에서 팀원들을 방해할 정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이미 입사한 이후 여러 일로 팀을 시끄럽게 했고 많은 폐를 끼쳤기에 앞으로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 도운의 작은 목표였다.

시동을 거는 도운에게 해일은 그저 ‘그래요’라는 짧은 대답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다.

큐빅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인데. 도운은 해일이 자신에게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해일은 괜히 도운이 신경 쓸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애써 손에서 시선을 떼고 태블릿을 응시했으나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도운이 준비해 준 커피를 마시며 회의를 마친 해일은 다시 이사실로 돌아와 바로 김 실장을 호출했다.

“개인적으로 알아봐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따로 사람을 쓸까 하는데.”

흥신소 같은 외부 인력을 알아보라는 의미였다. 김 실장은 얼마나 개인적인 일이기에 자신에게 맡기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해일이 직접 고르고 골라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 김 실장은 보기 드물 정도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해일에게 보는 눈이 있는 것인지 현재 비서실 사람들은 다 그러한 편이었으나, 김 실장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그랬다. 눈치가 빠른 데다 행동이 가볍지 않았고, 묵묵히 맡은 일을 잘 해내는 타입이었다.

해일은 그간 어느 정도 사적인 문제들은 김 실장을 통해 해결했다. 맡겼던 일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유출된 적 없었으며, 그만큼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무척 두터웠다. 그래서 해일이 흥신소 등의 외부 인력에 일을 맡긴 적은 드물었다. 김 실장이 기억하기로는 작년 겨울쯤, 딱 한 번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조용히 진행했으면 좋겠군요.”

“어떤 일이십니까?”

이번에도 같은 흥신소에 연락을 넣는 게 좋을지, 아니면 새로운 곳을 알아보는 것이 좋은지 잠시 고민하던 김 실장이 해일에게 물었다. 일의 종류를 알 수 있다면 해당 방향으로 더 특화된 흥신소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행적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리 어렵진 않은 일일 테니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알아보세요.”

“제가 맡는 것은 내키지 않으십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더욱이 외부 인력보다 가까운 자신이 맡는 게 좋을 거라 김 실장은 생각했다.

“김 실장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김 실장이 고작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해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만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한 말이리라. 잠시 뜸을 들이던 해일은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서 비서와 관련한 일입니다.”

“…….”

해일의 대답에 김 실장이 저도 모르게 이사실 창 너머를 바라봤다. 회의실을 정리하고 있는지 비어 있는 도운의 자리에 잠시 시선이 닿았다가, 금세 움찔하며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경솔한 행동이었다.

김 실장은 곧장 죄송하다는 말을 조용히 꺼냈다. 밖에선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도운 또한 자리에 없었기에 큰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해일의 말이 내심 놀라웠던 모양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행동까지 하다니.

김 실장은 어렴풋이 해일과 도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으나 해일은 날이 갈수록 도운을 각별히 여겼다. 특히 도운의 사고 이후로는 해일의 모든 스케줄이 도운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단순한 직원과 직장상사의 관계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었고, 그건 애인이라 칭할 수 있는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사생활을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라는 예감이 들었다.

해일은 김 실장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 실장은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해오고 있었기에, 해일이 먼저 나서 그의 입을 막거나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해일은 비서실 내에선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의부증이라도 있는 사람이 될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제가 너무 과히 여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니니.”

의부증이라는 단어에 김 실장은 자신의 추측에 조금 더 확신을 얻게 되었으나, 겉으론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그 행동에 해일은 김 실장에 대한 신뢰가 한 겹 더 쌓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김 실장에게 온전히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혹여 도운이 과거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걸 김 실장이 알게 된다면, 제아무리 무던한 사람이라 한들 도운을 대하는 태도가 온전히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해일이 더 입을 열기도 전에 눈치껏 믿을 만한 곳으로 금방 보고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사실을 떠났다. 그리고 역시나 유능한 직원답게 대리인을 내세울 수 있는 중간 업체까지 물색해 해일에게 전했다.

이젠 소중한 연인이 된 사람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는 일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도운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처받거나 실망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

어떤 사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 또한 해일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첫사랑과 처음 관계를 맺었다는 말과 해일이 도운의 첫사랑이라는 말. 도운이 했던 말 중 어떤 것이 거짓말인지 지금으로선 속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일은 전자가 거짓말이었으면 싶었다. 수줍게 첫사랑을 고백하던 그 표정을 도무지 연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해일이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이마를 짚었다. 이 복잡한 심경을 도운에게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간…….

그 순간, 똑똑 이사실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다.

“네.”

문 옆으로 위치한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자그마한 머리를 보곤 곧장 도운이라는 것을 알아챈 해일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사님, 지난주에 맡기신 사원 기숙사 관련…….”

해일이 사준 정장과 해일이 골라준 넥타이를 맨 도운이 가까이 걸어 들어왔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이사실 안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단정한 머리카락이나 차분한 표정, 해일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해일의 시선을 빼앗다 못해 어지럽던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었다.

서류를 받아 든 해일이 몇 장 빠르게 넘겨보자 도운이 말했다.

“브리핑 필요하시면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사실 해일의 관심사는 기숙사가 아니라 도운의 취향이었다. 기숙사를 위해 건물을 새로 매입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거짓말이고, 어떻게 해서든 도운을 그 집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속내였을 뿐이다. 그가 찾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적합한 집을 고르면 되겠지 싶었다.

제 사심이 담긴 일이었는데 이렇게 열심히 잘 해온 것을 보곤 뿌듯한 한편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쉬엄쉬엄해요.”

“예?”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어떻게 열심히 안 합니까…….”

해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도운이 말했다. 귀여운 반응에 해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몸은 불편한 곳 없고요?”

“네, 아무 이상 없습니다.”

울다 지쳐 쓰러졌을 정도로 허약해진 몸이었기에 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도운은 해일이 과보호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자신의 팔뚝을 쓰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해일의 눈엔 오늘따라 유독 말라 보였다.

“점심 같이하죠. 잠시 대기해요.”

“알겠습니다.”

몸에 좋은 보양식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화가 잘되는 음식이 나오는 한정식 식당을 떠올린 그는 기사를 대기시키겠다는 도운을 말렸다. 오롯이 둘만의 느긋하고 긴 점심시간을 즐기다 올 계획이었다.

* * *

늦은 저녁, 퇴근한 해일과 도운은 밖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점심과 마찬가지로 저녁 메뉴도 온통 몸에 좋다는 음식뿐이었다. 한방 재료를 넣은 오골계탕과 연잎과 함께 찐 전복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위가 작은 도운은 고작 몇 입만으로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음식을 권하는 해일에게 그러한 티를 내기 미안해 계속 받아먹었다.

이러다 또 게워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을 즈음 해일이 억지로 먹지 말라며 젓가락질을 멈췄다. 자신을 챙겨주느라 정작 그는 몇 술 뜨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제야 배가 좀 꺼지는 것 같습니다.”

현관을 들어오며 도운이 말했다.

“속 불편하면 이야기해요.”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어미 새의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싫은 내색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기에 해일이 조금 고양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병원에서 소화제라도 처방받아야 하나 고민하기에 도운은 만류하며 집에 들어오기 전 마당 정원을 가볍게 산책했다. 그 덕에 속이 훨씬 가벼워졌다.

먼저 씻고 나온 해일은 도운이 샤워를 마칠 때까지의 시간을 활용해 잠시 서재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고 밖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이 의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도운이 샤워 도중 쓰러지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해일은 짧은 순간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다.

해일은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도운이 들어갔던 욕실은 이미 불도 꺼지고 사람도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직 남아 있는 수증기 속을 훑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회랑 쪽으로 나오고 나서야 도운이 보였다.

도운은 현관에서 이어지는 긴 복도 끝에 위치한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 조금 큰 잠옷을 입고, 목엔 흰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지만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가만히.

도운은 피아노 건반 위로 손을 뻗었다가도 멈칫하며 건반을 누르진 않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그 행동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도운을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해일은 에취, 작은 재채기 소리가 나자 그제야 도운을 불렀다.

“서도운 씨.”

도운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탓에 목에 걸려 있던 수건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일이 다가가는 사이 허둥대며 수건을 주워 들었다.

“…왜 안 치고.”

“아닙니다. 치려고 한 게 아니에요.”

해일은 도운이 두 손에 꼭 쥔 수건을 가져가 머리 위로 올렸다. 가볍게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치고 싶으면 언제든지 쳐도 좋습니다.”

“…….”

도운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닦아주는 해일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수건이 내는 작은 소음만이 주변을 떠돌 뿐이었다. 해일이 머리를 대강 말려주고 보드라운 면으로 물기가 튀었을 얼굴도 꾹꾹 눌러 닦아주며 도운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감고 있던 도운은 두 볼에 닿아오는 촉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치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이제 피아노 안 치고 싶어요.”

도운은 부드럽지만 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일은 절로 도운에게서 손을 뗐다. 말의 의미가 무거웠다.

“싫어하는 곳 억지로 보내고 그러지 않을 거니까… 치고 싶을 때 쳐도 됩니다.”

해일도 무거운 입을 열어 말했다. 분명 자신이 유학을 알아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관련 문서는 전부 폐기했고, 도운이 원치 않는 유학은 절대 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을 전했음에도… 혹여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면 해일이 다시 유학을 보낼까.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운을 위한 것이라 멋대로 판단한 자신의 과오가 얼마나 큰 후폭풍을 몰고 돌아오는지, 해일은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도운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물론 그가 변덕을 부려 다시 유학 보낼 것이 걱정되는 것도 맞았다. 그와 함께한 생활이 얼마나 길었다고 벌써 익숙해져 다시는 그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홀로 되는 것은 도운에게 그저 버려지는 것과 다름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잘 치던 거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꼬리 칠 때 치던 거.’

언젠가 그가 했던 말만 떠올리면 가슴 안쪽 깊숙이부터 차오르는 울컥함이 있었다. 도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군가가 머리를, 가슴을 텅텅 때리는 것 같았다.

진심이 아니겠지. 화가 나서 한 이야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해보아도 쉽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그런 쪽으로 생각할까 걱정부터 들었다.

해일은 도운이 성관계나 남자를 만나는 것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았던 사람임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거짓말한 결과이기에 이제 와서 꼬리 치던 게 아니라고 호소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일의 앞에서 피아노를 쳐대서 헤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었다.

그래서 건반에 손을 얹는 게 어느 순간부터 무서워졌다.

“나중에요.”

해일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싫어 도운은 억지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잘 웃고 있는 게 맞나 걱정이 됐다.

어차피 다시 피아노를 친다 해도 사고로 다친 손 때문에 이전과 같이 연주한다는 건 무리일 테고,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 그저 손톱 밑의 가시처럼 묻어둔 미련이 불쑥 튀어나와 마음에 걸리는 것뿐.

“빨리 자러 가요.”

“…머리부터 말리고.”

상황을 넘기려 도운이 해일을 끌었다. 해일은 그런 도운을 번쩍 안아 올렸다. 놀라 버둥대는 도운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침실까지 데려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드라이어로 머리를 꼼꼼히 말려주었다.

다정한 손길을 받고 있자니 그를 무서워하는 스스로가 무척… 못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 * *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12월, 완연한 겨울이었다.

가로수들은 옷을 벗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더 두꺼워지는 시기. 해일 또한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 발 빠르게 도운의 겨울옷을 구매했다.

백화점이라도 데려가고 싶었으나 극구 필요 없다며 지난 초봄 해일이 선물해 준 코트면 충분하다고 역설하는 탓에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해일은 보란 듯이 도운 전용의 퍼스널 쇼퍼를 고용했다. 쇼퍼는 도운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해 간 뒤 어울리는 스타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코디해 주었다. 그렇게 드레스룸에는 고작 며칠 사이에 커다란 옷상자가 수십 개 쌓였다.

도운은 어쩔 수 없이 해일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옷을 받아 입으면서도 부담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급기야는, 아주 모기만 한 목소리였지만 ‘보상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해일에게 따지기도 했다. 해일은 그런 도운을 붙들고 보상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해 일러주었다.

쇼퍼가 또 한바탕 쇼핑백을 들고 돌아왔는데, 이번엔 옷이 아니라 잡화류였다. 해일은 여덟 개의 시계를 차례로 하나씩 도운의 손목에 대 보고는 가장 잘 어울리던 하나를 손목에 직접 채워주기까지 했다.

“저 오늘… 하시겠습니까?”

그런 날이면 도운은 자신 또한 뭐라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해일을 침대로 이끌려고 했다.

“몸도 많이 좋아졌고… 또…….”

가만히 있어도 매혹적인 사람이 이렇게 대놓고 유혹적인 표정과 몸짓을 해오니 해일의 인내심은 바닥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강압적 관계로 상처 입혔던 것이 아직도 후회스러웠는데, 이렇게 대가성 짙은 섹스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곧 수술이니까. 수술하고 회복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저 몸 안 아픕니다. 요즘 이사님께서 계속 보양식만 먹여주셔서 살도 많이 붙었고.”

“고작 보름 잘 먹은 거로 그럴 리가.”

해일의 눈에는 하나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연약하고 작은 도운 그대로였다. 해일은 한약이라도 지어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신장이 아픈 탓에 함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아쉽기까지 했다.

내친김에 도운의 몸무게라도 재보자 싶어 막 체중계로 데리고 가려는데 도운이 해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젠 정말, 괜찮을 것 같은데…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어 해일의 시야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빨개진 귀는 잘 보였다. 해일은 어금니를 물며 자신의 옷을 붙든 도운의 손을 잡았다.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이 마디마디가 붉게 물들어 있다. 하얀 손이라 그런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도운에게 성적 욕망이 아예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해일 또한 온전히 정신적으로만 도운을 사랑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걱정돼서 그럽니다, 여러모로.”

“절 너무 약하게만 보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난.”

기어코 거절의 답을 꺼내자 도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 작은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끌어안고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도운아.”

“…네.”

해일은 허리를 숙여가며 도운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붉은 입술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비죽 나와 있다. 하는 수 없이 해일이 도운을 끌어당겨 품에 폭 안았다.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도운도 팔을 옮겨 해일의 등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해일이 고개를 숙여 도운의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다는 듯이 도운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해일의 입술이 얼굴 여기저기로 가닿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몰캉한 입술 위.

가볍게 대었다 뗀 뒤 다시 길게 입을 맞췄다. 윗입술을 부드럽게 빨고 문지르는, 해일의 입장에선 그리 깊고 거칠지 않은 키스였지만 도운은 키스가 끝난 뒤 숨이 부족하다는 듯 굴었다.

“감사합…….”

짧게 숨을 몰아쉬고 난 뒤 도운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순간 멈칫하더니 머쓱하다는 듯 웃으며 입가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헤헤 웃는 표정에 대고 해일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착잡했다.

다음 날.

검진받을 날이 되어 도운을 직접 병원까지 태워다준 해일은 미룰 수 없는 회의가 있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회의에 참석해 있던 해일은 초조한 기색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검진을 마칠 때쯤 도운을 데리러 갈 예정이었으나, 짧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던 회의는 의외로 길어지고 말았다. 정영일을 주제로 한 회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와중에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며 해일이 이마를 짚었다.

간신히 회의를 끝마치고 이사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퇴근 시간에 가까웠다. 해일이 핸드폰을 확인해 보자 도운에게선 문자가 두 건 도착해 있었다.

[이사님 아직 회사이십니까?] 4:31

[저는 지하철 타고 돌아가겠습니다.] 5:22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린 모양이었다. 전화를 했더라면 회의를 중단하고서라도 도운에게 다녀왔을 텐데, 도운은 해일이 그러길 바라지 않았기에 일부러 문자로 물은 것이었다.

“후…….”

이미 도운이 집에 도착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미안함에 입 안이 썼다.

해일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도운에게 전화해 잘 도착했는지, 의사 소견은 어땠는지 물으며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해일의 발길을 막듯 김 실장이 이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김 실장은 짙은 갈색의 종이 포장이 겹겹이 싸인 소포를 내밀었다.

“흥신소에서 조금 전 퀵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러고는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곧장 도운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의아함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흥신소에서 답이 빨리 돌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도운을 괴롭혔던 대부업체는 이미 경찰이 한 번 휩쓸고 간 뒤인지라 조사에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해일이 레터 나이프를 꺼내 봉투의 끄트머리를 베어내자 그리 두껍지 않은 서류 파일이 나왔다.

“…….”

반투명한 파일을 눈앞에 두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의 주변을 감돌았다.

자신이 알고 싶어 조사를 지시한 것인데도 알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금단의 상자를 손에 쥔 판도라. 그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그냥 덮어두고 평생 열고 싶지 않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직감.

해일은 파일을 잠시 내려놓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멋대로 켜진 화면에 전화를 걸려다 만 도운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그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다시 화면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이내 꺼졌다.

해일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앓았다. 뭐가 진실인지… 이걸 열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던가. 자신은 뭘 두려워하는 것일까. 복잡한 머릿속을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한 가지만이 명확해졌다. 이 파일 안에는 제삼자의 눈으로 본 객관이 담겨 있다는 것.

더 이상 무지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오히려… 조사가 늦어도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약할 줄은.”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서랍에서 담배 케이스를 찾아 꺼냈다. 도운이 병원 신세를 지면서 자연스레 끊게 되었던 담배였는데. 창가로 다가가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손동작이 군더더기 없었다.

몇 번 담배를 빨아들이자 순식간에 주변으로 연기가 퍼졌다.

“…….”

담배의 길이가 짧아질 때까지 그저 한 손으로 파일을 가만히 집어 들고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 피웠을 땐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유예가 모두 끝났다는 듯 망설임 없이 파일을 열었다.

가장 앞장엔 대리인이 붙여둔 듯한 전언이 먼저 보였다.

[해당 대부업체와 연관이 깊지 않았습니다. 내용이 짧아 재차 확인했으나 보내드리는 행적이 전부입니다.]

해일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느꼈던 불길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고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그는 말없이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그리고 그다음, 또 다음으로 넘겼다. 지나치게 조용한 이사실에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대체…….”

서류를 전부 확인한 것도 아닌데 심장 한구석에는 진실을 알 것 같은 예감이 차올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기본적인 학적과 함께 도운이 해왔던 아르바이트 전적이 모두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아르바이트는 끊인 적이 없다. 이미 일전의 간략한 조사로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다시금 확인하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끌어 올랐다.

조금 더 뒤로 넘어가자 대부업체와 관련한 일이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수술을 위해 돈을 빌린 것, 거기까지도 아는 내용이었다. 딱 한 장, 한 장만 더 넘기면 자신이 알고 싶어 했던 내용이 나온다.

긴장으로 목울대가 울렸다. 다시 손이 담배 케이스로 향할 뻔했으나 이내 주먹을 쥐며 서류를 넘겼다.

“…하.”

눈동자가 빠르게 종이를 훑어 내려갔다. 한 자 한 자 눈에 들어올수록 해일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그는 중얼거리며 그다음 장으로 넘겼으나 비고란이 튀어나왔다. 방금 본 그게 본문의 마지막이었다는 의미였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조사한 것이 맞는지 흥신소를 추궁하려는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으나, 그런 해일을 예상했다는 듯 남겨두었던 대리인의 사족이 떠올랐다.

연관이 깊지 않았다는 말이 정말이었다. 대부업체와는 채무 관계만 얽혀 있었을 뿐, 성매매와는 관련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도운이 그 성매매 대상 명단에 올라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해일이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그 날. 평소 같았으면 참여하지도 않았을 뻔한 연회.

하필 해일이 본 그날이 도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이었다.

그는 서류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입가를 쓸듯 가렸다. 처음이자 마지막. 그걸 깨닫자 강한 충격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그럼 그간 몸을 팔아왔다고 했던 것은.

‘그날의 일은, 제 의지가 아니었…….’

그저 오기였던 것인가.

‘저는! …그날 한 번뿐이었습니다.’

해일이 이마를 짚으며 깊게 눈을 감았다. 내가 널 그렇게 악에 받치게 만든 거야. 내가, 널.

이제야 도운이 했던 말들이,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맞춰지면 맞춰질수록 남는 감정은 후련함이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참담함이었다.

도운이 했던 말 중 어떤 것이 거짓인가 가늠하려 애썼는데, 첫사랑과 첫 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해일이 바로 그 첫사랑이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절벽 끝에 서 있는 도운을 자신이 거짓말하게 몰아갔고, 도운은 그걸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그 거짓말을 지켰다. 살을 에는 언어적 육체적 모욕을 견뎌내며.

‘오백이요. 오백만 원이요, 하룻밤에.’

이상한 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남자라고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서툰 손길과 몸짓. 관계를 가져본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쉬이 열리지 않는 작은 몸.

“…서도운.”

아니,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의 티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만 같은 앳된 얼굴.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남아 있는 순수함을 도무지 숨길 수 없었던 맑은 표정을, 해일이 애써 무시한 것이다. 이질감을 느꼈음에도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구겨 저편으로 던져 놓은 것이었다.

“도운아…….”

해일이 앓듯 속삭였다. 도운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탄식이었다.

무지하지 않기 위해 사실을 파헤쳤으나 자신의 무지만 더 드러나고 말았다. 어리석다. 그 한 단어로도 부족했다.

그때 그 거칠었던 관계가 네 처음이었어?

해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흉부가 조여드는 통증에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순진한 척하지 말라며 다그치던 과거의 자신이… 이렇게 혐오스럽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손 안에 한숨을 쏟아냈다. 터져 나온 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비 온 하늘처럼 어두웠고, 웅덩이의 흙탕물이 심장으로 끼얹어진 것처럼 축축했다.

* * *

도운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10시 50분. 이미 바깥은 어둠이 찾아온 지 오래인 늦은 시간이었다.

아랫입술을 짓씹다 이내 발걸음을 돌려 안방으로 향했다. 머리를 바로 말리라고 했던 해일의 말이 신경 쓰여 드라이어를 집어 들고 천천히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바싹 마를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55분.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사용한 물건들을 모두 정리해 두고 도운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초조한 마음에 물을 한 잔 마시고, 넓은 거실을 맴돌다 소파에 털썩 앉아 버렸다.

해일이 지금껏 연락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운은 초조함에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회의가 길어지나 싶어 아직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회의를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김 실장님한테서 연락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고, 비서팀에서 사용하는 단체 메신저가 조용한 것을 보면 모두 퇴근한 듯 보였다.

혹시 약속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말하는 걸 깜빡한 게 아닐까. 그렇다 한들 이 시각까지 연락 한 번 없을 수가 있을까.

이런 적은 처음이라 도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불안한 마음에 절로 손끝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일전에 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뜯어지며 쓰라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통증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개의치 않았다.

도운은 티테이블에 내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해일에게 전화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이사님?”

현관에서 소리가 났다. 도운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도어록 소리가 들려오자 몸이 절로 벌떡 일으켜졌다. 도운은 뛰다시피 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이사님!”

도운이 막 현관에 당도했을 때 열린 문 사이로 해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몸을 쉽게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한쪽 벽면에 어깨를 툭 기대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했다. 도운이 곧장 다가가 그의 몸을 부축해 안자 술 냄새가 더 강하게 끼쳐 왔다.

“아…….”

“괜찮으십니까?”

해일이 희미하게 웃으며 도운을 끌어안았다. 중심을 잘 못 잡는 그 때문에 도운의 몸 위로 해일의 무게가 쏟아졌다. 도운이 윽, 이를 다물며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조금 기우뚱하기는 했으나 발꿈치에 힘을 주며 다시 똑바로 섰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도운은 해일을 안으로 이끌었다. 해일은 그런 도운에게 기대어 걸어가며 천천히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늦어서…….”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간단한 의사소통이 되는 걸 보면 심하게 취한 것은 아닌 듯했다. 원체 주량이 센 그였던지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멀쩡해질 것이다.

도운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취한 사람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볼 자신도 없었고, 어쩐지 주제넘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입을 다물었다.

“걱정했어요?”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듯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은가. 도운을 안는 팔에 더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네, 무지무지요.”

연락이 안 되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해일은 모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한 그를 보니 안심이 되었는지, 도운의 입가에도 옅게 미소가 걸렸다.

현관에서 침실까지 해일을 부축해 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평소에도 집이 쓸데없이 넓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지금은 더 그랬다. 거기다 보통 사람보다 적어도 한 뼘은 더 큰 그가 술에 취해 휘청거리기까지 하니 크고 무거워 도운은 힘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습니다.”

도운이 해일의 코트를 살짝 잡아 벌리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절로 벗겨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반쯤 눈을 감은 해일이 스스로 손을 움직여 재킷의 단추를 풀어 벗기에 도운은 작게 숨을 내쉬며 떨어진 코트를 주워 챙겼다.

그런데 그 순간 해일이 크게 비틀거렸다. 도운이 재빨리 그의 허리를 끌어안긴 했으나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해일을 침대에 눕혔다. 이불이 풀썩이며 그의 커다란 몸을 부드럽게 받쳤다.

“후우!”

식은땀을 닦아낸 도운이 코트를 대충 근처 의자에 걸쳐 놓고는 침대로 돌아왔다. 셔츠 차림의 그를 마저 벗겨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함부로 옷 벗기는 걸 싫어하면 어쩌지. 고민하던 도운은 넥타이만이라도 풀어주려고 침대에 살짝 기대앉았다.

그때, 도운의 기척을 느낀 해일이 눈을 떴다. 손목을 붙잡아 확 잡아당기는 힘에 방심하고 있던 도운의 몸이 휙 끌려갔다.

“읏!”

갑작스레 시야가 뒤집힌 도운이 놀라 소리를 냈다. 덩달아 해일의 옆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취했어도 힘이 엄청나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

모로 누운 해일이 아무 말 없이 도운을 응시했다.

도운 또한 그런 해일과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해일이 이리 취한 것도, 평소와 태도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모두 생소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도운은 이내 차분해졌다.

“…약속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리고 아까 물으려다 그냥 말아버린 질문을 조용히 꺼냈다. 주제넘다고 혼내면 혼나지 뭐.

“얼마나 드셨기에 취하셨습니까.”

“…….”

“어디서 누구랑 드셨는지도 궁금하고…….”

나긋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혼날 각오를 해서 그런지 말이 술술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런 도운의 얼굴 위로 해일의 시선이 이리저리 붙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어두운 색의 눈동자가 도운의 얼굴 곳곳을 눈에 담는 것처럼 움직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제가 물어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계속 말을 이어가던 도운이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취하신 것 보고 조금 겁났습니다.”

걱정도 아니고 겁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도운은 조금 긴장했다.

해일이 갑자기 취한 것도,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집에 처음 자신을 불러들이며 화내던 때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혹시 이번에도 도운 자신 때문인가 싶어서.

그가 끊었던 담배 향이 희미하게 나는 것도 그렇고, 내가 해일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일까. 그 스트레스가 이렇게 터져 버린 건가. 도운은 가슴에 짐 한 덩이를 더 올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이사님을 너무 힘들게 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내내 침묵을 지키던 해일이 도운의 말을 가로막았다. 낮아진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진해진 시선에 도운은 조금 울컥하며 말했다.

“그야 제가…….”

아무리 해일이 진심으로 도운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게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들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씨가 고운 것도 아니었다. 그의 옆자리를 빛낼 수 있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몸까지 허약하니 성욕을 해소시켜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해일과 관련해서 도운은 항상 스스로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비하적인 말을 줄줄이 뱉어내려는 것을 저지시킨 건 해일이었다.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손을 들어 도운의 볼 위로 얹었다.

도운이 순간 움찔거렸으나, 해일의 엄지가 부드럽게 눈가를 쓸어오는 감촉에 긴장을 풀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일은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으로 도운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손끝이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간지러운 감촉에 도운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내가 널 힘들게 하는 건 아니고.”

그가 조용히 물어왔다.

“네가 하는 걱정이나 고민이… 나 때문에 하는 거라면, 내가 널 힘들게 하고 있는 거잖아.”

어쩐지 촉촉하게 젖은 것 같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널 놔줄 생각이 없어서 어쩌지.”

“…….”

“네가 너무 좋아서 놔줄 수가 없는데…….”

나른하게 젖어 허스키해진 목소리는 평소 해일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그에게 집중되는 듯한, 또 그 속에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그의 감정이 타고 넘어와 손끝 발끝까지 엉겨 붙는 느낌이었다.

“이런 나한테 서도운 씨가 질리면 어쩝니까.”

해일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이라도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길 것만 같은 미소였으나, 도운은 그 속에서 얕게 배어 나오는 이유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멋대로 상상한 감정에 동화된 탓인지, 도운은 이상하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순식간에 옆으로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쫓듯 해일이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래, 이젠 울어도 혼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손을 들어도 맞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도운은 이제 해일에게 그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해일의 마음을 끝없이 확인받으면서도 한구석에 불안함을 키우고 있는 스스로가 미련스러웠다.

“저 너무… 못된 것 같아요. 이사님께선 이렇게 잘 해주시는데…….”

“서도운 씨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해일이 속삭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새하얀 도운의 이마 위로 작게 키스했다.

그는 도운의 동그란 이마를 만지고 내려왔다. 젖은 속눈썹을 매만지고, 곧게 뻗은 콧대를 손끝으로 쓸었다. 좀처럼 보조개를 보여주지 않는 광대 위도, 아이처럼 말랑한 뺨도. 모두 기억하려 몇 번이나 눈에 담았다.

“이렇게 예쁜데 왜 몰랐을까.”

해일은 도운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위로 가볍게 버드키스를 하자 도운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오늘 정말 이상하십니다.”

갑작스레 흘러나온 칭찬의 말에 도운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그가 도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해일은 입꼬리를 당겨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도운은 눈알을 대록대록 굴리더니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널 왜 제대로 보지 않았지…….”

“안 취하셨죠, 지금. 저 부끄러우라고 일부러…….”

“도운아.”

도운이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자 해일은 그 손을 천천히 감싸 내렸다. 숨겨졌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를 해일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해. 오늘 정말 이상해. 도운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왜 난 아무것도 몰랐을까.”

“…….”

“응? 왜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도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뭘 몰랐다는 것일까.

해일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 강한 힘으로 작은 두 손을,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내 움직여 자신의 볼을 감싸게 만들었다. 손바닥 위로 거듭 입을 맞추고 입술을 꾹 눌렀다. 강한 소유욕의 표식을 남겼다.

그가 대체 뭘 몰랐기에…….

잠시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도운은 해일의 품을 살포시 파고들었다. 망설임 없는 손으로, 이제까지 중 가장 세게 그의 단단한 등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해일 또한 팔을 뻗어 도운을 자신의 가슴 안에 가뒀다. 숨이 막힐 정도로.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차단하는 것처럼.

뜨겁게 뛰는 심장이 맞붙자 서로의 박동이 섞여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서로의 향기를 맡으니 순식간에 뼛속까지 남김없이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어떤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도운이 눈을 떴을 땐 조금 늦은 아침이었다.

시폰으로 된 커튼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모두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잠들어 있는 도운의 얼굴 위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끔뻑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도운은 눈가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손끝에 닿는 눈이 꽤 부어 있었다. 어젯밤 울면서 잠들어서 그런가……. 멍하니 생각하던 그가 휙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없네.”

자신이 꼭 끌어안고 자던 해일은 이미 침대에서 빠져나간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감각이 아니었다. 도운은 쓰게 웃으며 이불을 걷었다. 벌써 10시 반을 가리키는 시곗바늘을 보며 혀를 차고 침실 밖으로 향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려 슬리퍼를 끌고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운이 고개를 빼고 살피자 막 운동을 끝내고 돌아온 듯한 해일의 모습이 보였다. 도운이 웃으며 종종 뛰듯 다가갔다.

“이제 일어났어요?”

해일을 끌어안자 바람 냄새와 함께 기분 좋은 체취가 느껴졌다. 도운은 그 품 안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자면 오히려 더 피곤할까 봐 깨웠는데, 영 일어나질 않아서. 잠시 운동 다녀왔습니다.”

“그러셨어요? 전 깨우신 줄도 모르고.”

“금방 씻고 나올 테니 잠깐 기다려요. 배 많이 고파요?”

씻고 나와 늦은 아침을 함께 먹자며 그가 다정히 물었다. 이제 막 일어난 참이라 허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도운이 대신 준비하겠다는 것을 해일은 극구 말리며 웃었다.

‘어제 일… 기억 못 하시는 건가?’

그는 어제 술에 무척 취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어젯밤 나눴던 대화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 해일은 어제 술을 마신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게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술 냄새도 나지 않았고, 운동까지 하고 돌아왔으니.

꽤나 진중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명확히 답을 얻지 못한 얘기도 있었고. 궁금증이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이걸 물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잠시 망설이던 도운은 반쯤은 얼버무릴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사님, 저… 어제…….”

“눈이 조금 부었네, 붕어처럼.”

그의 손끝이 도운의 눈꺼풀을 문질렀다. 윙크하듯 감긴 한쪽 눈이 귀여워 해일은 또 피식 웃고 말았다.

“다 기억해.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만취하지는 않았는데요.”

“그, 그냥 궁금해서.”

“이따 다 물어봐요. 우선 씻고.”

해일은 자고 일어나 머리가 삐죽 선 도운의 머리칼을 흩트리듯 털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도운은 제 머리를 쓱쓱 빗었다.

도운의 수저 위로 반찬을 올려주며 해일이 물었다.

“검사 결과는 어땠습니까.”

“다행히 투석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혈액검사를 받고 온 도운은 의사가 했던 말을 되짚으며 해일에게 전했다. 한때 정말 신장의 기능이 심하게 떨어져 자칫하면 투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받은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다행히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는지 투석은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도 수술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탓에 병원을 갈 때마다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젠 수술 부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전해 듣고 와서 더 떨리기도 했다.

“같이 가서 들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일이 있으셨잖아요.”

안 그래도 자신의 사적인 일로 시간을 쓰게 할 때마다 미안했는데, 회의까지 미루고 달려왔더라면 더 미안했을 것이다. 도운은 해일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졌다.

미소 짓던 도운이 밥을 한 술 떠먹고 슬쩍 해일의 눈치를 보았다. 해일은 왜 그러느냐는 듯 짧게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혹시 벌써 배가 부르다는 것일까. 도운은 입에 고작 세 숟갈만 들어가도 눈에 띄게 젓가락질이 느려지는 편이었다. 입도 짧고 소화기관도 좋지 못한 도운 때문에 해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혹시 어제 무슨 약속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지만 도운은 그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제 해일이 취한 틈을 타 물어보긴 했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해일은 잠시 도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리며 그의 팔이 움직였다. 도운의 젓가락질이 느려진 것도 사실이었기에 해일은 다시 한번 도운의 밥공기 위로 반찬을 작게 떼어 올렸다.

도운은 깊게 캐물을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고 반드시 답을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싫으면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참이었다.

“문 전무한테 갑자기 연락이 와서요. 회의 끝나고 급하게 약속을 잡다 보니 내가 도운 씨한테 연락하는 걸 잊었습니다. 미안해요.”

해일은 도운의 말간 눈동자를 바라보며 어제 늦었던 이유를 말해주었다. 물론 도운에 관한 서류를 받아 보고 뒤늦게 자신의 크나큰 오해를 깨달았다는 사실은 숨긴 채.

도운은 지금 멀쩡한 사람을 가장하고 있었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약한 몸이라는 걸 해일은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져 작은 손짓에도 이파리가 떨어져 나가는 여린 새싹 같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애써 웃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의 건강 상태도 밑바닥에서부터 간신히 끌어올린 것이다.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으며, 제대로 된 치료도 시작하지 못했는데 또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어 쓰러지거나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서 해일은 우선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아아… 그렇구나. 괜찮습니다.”

도운은 그 정도의 대답으로도 납득이 된 모양인지 왜 그리 심하게 취했냐는 등의 질문은 더 꺼내지 않았다.

“걱정했는데 별일 아니셨다니 다행이에요. 회의는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화제는 다른 곳으로 틀어졌다. 병원에 있는 도운을 데리러 가지도 못하고, 연락도 하지 않고 취해 돌아왔는데도 서운한 티 한 번 내지 않고 웃어주었다.

도운이 저 작은 머리로 이제껏 거짓말해 오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절로 그려졌다. 해일은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거운 감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테이블 밑 그의 손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이 세게 쥐어져 있었다.

해일은 영화관을 빌려 도운을 데리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나름의 데이트 분위기를 내 즐겼다. 그의 착잡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더 도운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 했던 것인데, 티가 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주말 내내 평소보다 살짝 가라앉아 있는 해일을 도운이 모르지 않았다. 함께 대화하며 즐거워하다가도, 아주 찰나에 비치는 어두운 그늘에 도운의 마음 한구석도 움찔거렸다. 해일과 관련해서는 심히 기민해지는 도운이 제 상태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계속 손끝을 뜯었다.

“이사님, 많이 피곤하십니까?”

저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데이트 같은 걸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운이 물었다.

“주말에 쉬셔야 하는데……. 이번 주말은 좀 꽉 차게 보낸 것 같아요. 저도 조금 피곤해서.”

도운은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대놓고 자신 때문에 억지로 나가는 거냐고 하면 분명 해일은 아니라고 할 것이기에 돌려 이야기한 것이다.

데이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해일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 사치처럼 느껴졌다. 제 주제에 편히 누리기에는 아까운 생활이었다.

“많이 피곤했어요?”

도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쯤은 간파한 해일은 되레 물었다. 도운을 온전히 이전처럼 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서 새기라도 했나 싶어 불안했다.

“엄청 많이는 아니지만.”

“오늘은 일찍 잡시다. 내일 출근이기도 하고.”

해일은 소파에서 일어나 스위치로 거실 큰 창의 커튼을 쳤다. 도운 또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침실로 향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잘 준비를 했고, 막 불을 끄고 누우려는 때 도운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제가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됐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싶더니. 해일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지만 도운은 갑자기 안마에 꽂혔는지 제 앞에 앉으라는 듯 시트 위를 팡팡 토닥였다. 하는 수 없이 해일이 자리했다.

도운이 꼭 쥔 주먹으로 해일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통통통, 해일의 단단한 근육 때문인지 손이 어깨 위에서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해일은 도운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의 반대로 고개를 꺾어주며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시원하네요.”

“잘하죠? 어머니 입원하셨을 때 매일 안마해 드려서 되게 잘합니다, 저.”

도운은 자그마한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서 톡톡 치기도 하고, 양어깨를 잡아 조물조물 주무르기도 했다. 해일이 느끼기에도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모친의 병간호를 하며 쌓은 기술이라는 것이 해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깨에 올라온 도운의 손을 붙잡으며 해일이 몸을 돌렸다.

“나도 해 주겠습니다.”

도운이 괜찮다며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 해일이 억지로 몸을 돌려 앉혔다. 어두운 가운데 가느다란 도운의 목이 눈에 띌 정도로 희었다. 해일은 어금니를 다물며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심하게 뭉쳤네요. 안마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서도운 씨였어.”

해일은 조만간 도운을 마사지 숍에 데려갈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편찮으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도운이 살짝 뒤를 돌아보려는 듯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다시 앞을 향했다.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암이셨는데, 너무 발견이 늦었습니다. 전이가 심해서 수술해도 회복을 장담할 수 없을 거라고 했었는데… 정말 수술 중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그 뒤로 한참 정적이 흘렀다. 해일도 더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 침묵 또한 도운의 말 일부라 생각해 묵묵히 듣고 있었다.

도운은 어느 순간 해일의 손을 잡아 내리며 뒤를 돌았다.

“어제 몰랐다고… 하셨던 거요.”

진짜 꺼내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한다는 듯 도운은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는 이사님이 아무것도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

“아무것도 모르셔도 좋고… 모르셨으면 좋겠고……. 저희한테 있었던 일이 그렇게 좋은 일들만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도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이미 다 묻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저도 모르게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해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 행동이 꼭 가슴속에 묻어놓았다는 것 같았다. 그간의 오해나 사고, 힘들었던 시절까지 모두. 도운은 그 모든 일을 가슴에 묻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띠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일은 다행으로 여길 수 없었다.

언제든 가슴속에서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심장을 찌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운을 다치게 하고 있을 것이다.

해일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고 도운은 해일의 손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러니까 이사님은 다른 것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에 대해 걱정하실 것도 없고,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고, 보상 같은 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이대로만…….”

길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천천히 흘러나온 말 속에 담긴 진심은 크고 깊었다. 감히 해일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또 도운에게 위로받는 자신이 빌어먹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전 이사님과 같이 잠들고 밤을 보내는 게 익숙해진 것만으로도 너무 설레고 행복해요.”

도운은 막상 말하려니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면서도 하고 싶었던 말은 전부 전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해일은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은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보상금으로 도운과 그의 가족이 받은 상처를 치료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이기심으로 도운을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것도 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해주고 싶어도, 너무나 사소한 것에 크게 기뻐하는 도운을 보며 더 가슴이 미어졌다. 제대로 된 행복은 아직 전해주지도 못했는데. 제 마음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떼어 보여준 것인데도 도운은 해일을 쉬이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또 사랑했다.

고작 함께 잠드는 일에도 이리 좋다고 말하는 그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슬퍼서… 해일은 온전히 웃어줄 수가 없었다.

“나도 설렙니다.”

설렘과 동시에 무거웠다.

“이런 감정을 처음 느껴.”

사랑해서 아프고, 상대의 모든 표정을 알고 싶고, 시선이 닿는 곳이 신경 쓰이고. 옆을 내어주고 싶고 또 그 옆을 차지하고 싶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해일은 처음이었기에 더 서툴렀다.

도운이 짊어지던 짐을 고스란히 제 어깨에 올렸다. 저 작은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 할 정도의, 숨통과 삶을 짓누르는 무게에 절로 인상이 써진다.

해일은 도운의 볼을 감싸고 도톰한 입술 위로 키스를 내렸다. 쪽쪽 소리를 내가며 입가와 코끝, 눈꺼풀 위에도 입을 맞추자 도운이 씨익 미소 지었다.

“수술 끝나고 회복하면 같이 여행 갑시다. 해외로.”

“좋아요.”

해일은 도운을 눕히고 이불을 끌어당겨 폭 덮어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한참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사르르 눈이 감기기 직전까지 서로에게 향한 눈동자는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떨어지지 않았다.

* * *

도운은 그다음 주부터 회사에 반지를 끼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해일이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지난밤 해일의 절절한 고백이 도운에겐 심히 마음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지를 끼고 다니면 그의 기분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사실로 도운을 불러내 한참 반지 낀 손을 만지작거렸다. 뿌듯해하는 것 같아 덩달아 도운 또한 기분이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끼고 다닐 걸 그랬다.

반지를 본 팀원들은 출처를 굳이 묻지 않았다. 이미 출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도운은 팀원들의 사생활 배려가 무척 고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반지 화려하다.”

그 정도의 칭찬이 오고 갔을 뿐이다. 도운은 머쓱해하며 허허 웃었다.

“다이아 엄청 크네요. 이렇게 큰 거 실제로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큐빅일걸요?”

“…에이, 설마요.”

팀원들은 이사님이 설마 큐빅 박힌 반지를 해줬겠냐는 듯이 표정을 지었지만 긴말하지 않고 금방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도운은 팀원들의 반응에 살짝 불안해졌다. 설마 진짜 다이아몬드인가? 나중에 진짜인지 해일에게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하루가 지나가 며칠이 흐른 뒤였다.

배달 온 소포를 수령하러 잠시 회사 로비로 내려온 도운은, 서류를 손에 꼭 쥔 채로 건물 밖으로 나섰다.

김 실장님께 받은 카드로 간식을 사러 어김없이 도넛 가게로 향했다. 점원은 이젠 단골이 된 도운에게 알은체하며 그가 즐겨 찾는 메뉴를 상자에 담아주었다.

“감사합니다.”

도운은 가게를 빠져나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것이었다.

해일이 군것질을 잘 못 하게 했다. 괜히 도넛 같은 걸 먹어 배를 채우면 정작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않고 건너뛰게 된다며 못 먹게 한 것이었다. 내심 서러웠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분고분 따랐는데, 오늘따라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고 코끝에 슈가 파우더 향이 느껴졌다. 너무 먹고 싶었다.

마침 잠깐 내려올 일도 있겠다, 해일에게 회의도 있겠다. 비서실에서 해일 몰래 도넛을 먹기에 최적의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일이 오기 전에 먹어치울 생각에 벌써 신이 났다.

“도운 씨!”

그때, 뒤에서 도운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크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무님.”

도운을 불러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문 전무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요? 땡땡이치러 나왔어요?”

“아, 아닙니다…….”

도운이 억울하다는 듯 ‘심부름…….’ 하고 중얼거리며 소포와 도넛 상자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문 전무는 입가를 가리며 큭큭 웃었다. 도운은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해일이랑 간만에 한잔하려는데 오는 길에 도운 씨가 보여서요. 해일이 없는 틈에 인사하려고.”

그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운에게 호감을 보였다. 해일과 도운의 마음이 이어진 것을 알기에 자신의 마음은 이미 접었지만, 그래도 도운을 보면 알게 모르게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있었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 문 전무는 한참 생각한 끝에 이 마음을 그 엇비슷한 것 같다고 정의 내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이라도 도운에게는 이상하게도 괜히 한번 말을 붙여보고 싶고, 챙겨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이사님 오후 일정 곧 끝나실 겁니다.”

도운은 손목시계를 살피며 말했다. 6시까지 15분 정도 남은 시간. 이제는 돌아가 뒷정리를 해야 했다.

“같이 들어가요. 연락은 조금 전에 귀국하면서 해서 아마 해일이도 나 지금쯤 오는 거 알 거예요.”

“외국에 다녀오셨습니까?”

“출장이요.”

괜히 같이 들어갔다가 또 해일의 차가운 눈총을 받지는 않을까 내심 아주 조금 걱정했는데.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해주는 듯한 말에 도운의 마음이 풀어졌다.

두 사람은 함께 건물 로비로 들어갔다. 문 전무를 안내하며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도운은 무척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요즘 이사님께서 일이 많으셔서, 과음하면 조금 피곤해하십니다.”

“그래요?”

“저번 주에도 전무님이랑 술자리 가지신 뒤로 숙취가 있으시다고…….”

그러니 너무 과음하지 말아달라고 돌려 부탁을 하려 했다. 하지만 문 전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저번 주? 언제요?”

“금요일이요.”

“금요일에 나 한국에 없었는데.”

어……. 도운이 순간 멍하게 문 전무를 바라보았다.

“저번 주부터 미국 가 있다가 오늘 들어온 거예요.”

“…그러셨습니까?”

그가 설명을 마치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위층에 도착했다. 띵 울리는 알림음에 도운의 말은 조금 묻혔다. 문 전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열리는 문 사이로 발을 뻗었고, 도운은 한 박자 늦게 그를 따랐다.

“아… 제가 다른 분과 착각한 모양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빨리 걸어 그를 앞지르며 중문을 열어주었다.

‘문 전무가 아니었다고?’

도운은 중문에서부터 이사실로 걷는 그 몇 발자국 사이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문 전무가 아니면 그날 해일과 그렇게 취할 정도로 늦게까지 술을 마신 이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가 분명히 문 전무라고 이야기했었다. 청영 내의 다른 경영진인가 생각해 보아도 문 씨 성을 가진 전무는 없었다. 그 엇비슷한 성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깊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는 상황에 도운은 순식간에 패닉에 이르렀다.

“AG 문 전무님께서 오셨습니다.”

도운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이사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침 회의가 일찍 마무리된 모양인지 해일의 허락이 떨어졌다. 도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문을 열었다.

“자꾸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것 좀 그만해.”

“섭섭한 소리 마. 너 아님 친구도 없는데.”

문 전무가 능청을 떨며 가운데 소파에 자리했다. 뻔뻔히 다리를 꼬는 문 전무를 보며 고개를 저은 해일이 이내 시선을 도운에게로 옮겼다.

“손에 그건 뭡니까?”

“아…….”

정신이 없어 도넛을 든 채로 이사실에 들어오고 말았다. 몰래 먹으려고 했는데 이제 와 숨길 수도 없고. 숨기려 한다 해도 몸이 잘 말을 듣지 않았다. 변명의 말 한마디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도넛?”

“…예.”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

먹고 싶어서 사 온 것이긴 한데, 지금은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오늘 저 녀석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아 버려서. 저녁 식사는 집에 준비해 놓으라고 해뒀습니다. 도넛은 지금 먹지 말고 밥부터 먹은 후에.”

그리 화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해일은 달콤한 간식거리를 손에 꾹 쥐고 있는 도운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는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고 맨 앞장에 서명한 뒤 파일을 닫았다.

“기사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아래서 차 타고 돌아가고.”

“…알겠습니다.”

도운은 멍하니 대답하며 해일이 건네는 파일을 받아 들었다. 등 뒤로 문 전무가 눈꼴사납다며 농담을 던져 왔으나 도운은 웃을 수도, 민망해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파일을 손에 쥐고 이사실을 나올 뿐이었다.

머지않아 준비를 마친 해일은 문 전무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팀원들도 하나둘씩 퇴근했고, 도운은 비서실에 혼자 남을 때까지 모니터만 바라보다 7시가 다 되어갈 즈음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겨 해일의 차가 주차되는 층으로 향하자 기사가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었다.

차가 조금 막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까지 오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도운의 마음속만 어지러운 상태였을 뿐이다.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현관에 도착하는 길까지 걷는 것이 이리도 사람을 울렁거리게 만들지 미처 몰랐다.

“안녕하세요.”

도운이 돌아오지 않아 가사 도우미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배송 온 요리들 식탁에 차려뒀는데, 다시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퇴근하셔도 될 것 같아요.”

도운이 목도리를 풀어 의자에 걸치며 말했다. 그가 호텔에서 요리도 배송시켰다는 것까지 모조리 잊고 있었다.

가사 도우미는 바로 퇴근해 집을 떠났고, 도운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 위로 짧게 시선을 던졌다.

“…….”

그리고 금방 거둬들인 뒤 자신의 발끝을, 아니 허공 그 어딘가에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고정했다.

해일이 자신에게 거짓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긴 했다. 그가 연락도 없이 그리 늦게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찬 등의 외부 일정이 생겼을 때 꼭 자신에게 먼저 소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급한 약속은 잘 잡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취한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모든 게 이상했다. 그의 눈치를 잘 살핀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쪽으로만 상상하고 있어서, 그 술자리에 대한 거짓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운은 두 손을 맞잡고는 손끝의 살점을 툭, 툭, 뜯기 시작했다. 그도 모자라 입가로 가져가 손톱도 물어뜯었다.

혹시… 여자를 만났나? 전에 얘기 나왔던 약혼 상대일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상대를 숨길 이유가 없잖아. 약혼 아니라고 했는데, 결국 다시 만나서. 그게 너무 미안해서 어제 날 그렇게 예뻐한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좋다고 했는데. 놓아주기 힘들 정도로 내가 좋다고…….

손 끄트머리에 핏방울이 비치기 시작했다. 따갑고 아플 법도 한데, 도운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해일의 의중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지, 도운은 숨쉬기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렸지만 가슴이 턱 막히는 통증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순간 어지러워 급히 벽을 짚었다. 멀쩡하던 배도 아픈 것 같았고, 머리도 깨질 듯한 두통이 쏟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에게 모순적인 감정 또한 들었다.

‘나는 여태 한 거짓말이 몇 개인데 이사님이 거짓말 한 번 했다고 그래. 서도운 너 웃기다. 정신 차려.’

도운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뭐라고 하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신이 거짓말을 했으니 그의 거짓말도 묵인해야 하는 것인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묵인하는 게 맞는 것 같으면서도… 너무… 너무 속상했다. 속상하다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운은 심히 서러워 울음이 샜다.

“읏… 흑…….”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게 한심해서 화가 났다. 옷소매로 세게 문질러 닦는데도 물줄기는 계속 흘렀다. 애써 진정하려 천장을 바라보고 심호흡해 봐도 쉽지 않았다.

“하아…….”

식탁 위의 음식에서 나는 냄새가 갑자기 역하게 느껴진다. 억지로 먹기 싫었고, 쳐다보는 것조차 싫었다.

도운은 잠시 발치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들어 올렸다. 볼을 적신 눈물을 몇 번이나 훔쳐내고 훌쩍이며 다시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 마당을 지나고, 대문을 나선 뒤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그는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올렸다. 해일과 함께 사는 집이 아닌, 도운 자신이 살던 바로 그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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