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대해 3 (21/29)

  2. 대해 3

해일은 그리 늦지 않게 집에 돌아왔다. 해일 자신도 늦은 시간까지 도운을 집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고, 지원 또한 긴 비행으로 피곤했는지 간단히 식사만 마치고 금방 헤어졌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일은 도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았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나 싶었다. 그는 조금 속도를 내 차를 몰았다. 이상하게 빨리 도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현관문을 열던 해일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평소와 달리 집 안의 불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혹시 도운이 그사이 잠들었나 싶어 서둘러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데, 현관에 도운의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도운을 찾았다.

“서도운 씨.”

집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잠시 멈칫한 해일이 빠른 걸음으로 집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서도운. …서도운!”

모든 방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열어보며 그를 불렀다. 잘 사용하지 않는 2층의 구석 방까지 올라가 찾아보았는데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해일의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패닉에 빠진 채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주방으로 향하자 식탁엔 자신이 미리 주문해 배송시켰던 음식이 고스란히 있었다. 숟가락 한 번 대지 않았는지 덮개를 씌운 채 그대로였다.

그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운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 회사에서 오는 길에 어디 다른 길로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처럼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거나 아니면 잠깐 편의점 같은 곳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거듭 전화를 걸어도 도운은 받질 않았다.

그때 식탁 의자에 걸려 있는 도운의 목도리를 발견해 다급히 주워 들었다. 아침에 자신이 직접 골라 매어줬던 것이었다. 집에 들렀다가 다시 나간 것이다.

그런데 어디를? 자신에게 말도 한마디 없이?

해일은 다시 전화를 걸며 뛰다 싶은 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불도 켜지 않고 들어가 곧장 컴퓨터를 켰다. 마당과 현관 쪽에 달아둔 CCTV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라도 알아내 빠르게 사람을 풀어 찾아야 했다.

오늘따라 로딩이 느린 것만 같은 컴퓨터에 답답해하며 해일이 재차 전화를 걸었을 때, 길고 긴 신호가 끝나고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었다.

―…네.

해일이 퍼뜩 정신을 차리듯 데스크를 짚고 숙였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순간 그에게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애써 눌러 참고, 해일은 침착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서도운 씨, 지금 어딥니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네. 어딥니까.”

하지만 해일은 순식간에 침착함을 잃고 도운의 말을 가로막듯 물었다.

―저… 집이요.

도운은 나른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것도 같았다. 해일은 도운이 사라져 미쳐 버릴 것 같은데, 그와 상반되는 듯한 도운의 반응에 속이 답답했다.

“집이라니. 지금 집에 서도운 씨가 안 보여서.”

―제 집이요. 제가 전에 살던 집.

“…….”

따져 물으려던 해일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전에 살던 집? 그 작고 허름하던 집을 말하는 것인가. 대체 왜……. 도운이 돌연 그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왜 거기에…….”

해일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는 그 집만 떠올려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그 공간을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대한 존재를 어느새인가 완전히 지우고 있었을 정도였다.

―당분간은 그냥… 여기서 지내려고요.

“내가 지금 데리러 가겠습니다.”

해일은 다급히 서재를 나왔다. 도운의 목도리도 챙기고 현관에 두었던 차 키도 다시 집어 들었다.

도운이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해일의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허름한 집을 다시 찾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과의 이 공간에서 편안히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운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오지 마세요.

“갑자기 왜 그럽니까. 혹시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여기도 제 집이라서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느냔 말이에요.”

해일이 답답한 마음에 몰아붙이듯 물었다. 하지만 도운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을 인내하던 해일이 참지 못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도운에게도 전해졌다. 도운이 다급히 말했다.

―오지 마십시오. 문 안 열어드릴 겁니다.

“상관없어요.”

―이사님.

해일은 더 말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문도 안 열어줄 것이라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도운은 자신의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정말 해일이 오는 것인가 바깥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설마 정말 오지는 않겠지. 제발 오지 않길 바라면서.

하지만 길 끝에서 해일의 차가 보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 바로 앞에 멈춰 서는 번쩍이는 차를 도운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서도운 씨!”

뒤돌아 들어가려는 도운을 해일이 급하게 차에서 내려 붙잡았다.

“…정말 오시면 어떡합니까.”

도운은 차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도무지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자 해일이 먼저 행동했다. 챙겨온 목도리를 도운의 목에 다시 매어준 것이다.

“추운데 이런 차림으로 나와 있으면 어떡해요. 감기 걸리게.”

겉옷도 입지 않은 차림이었다. 해일은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다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우선은 제 코트를 벗어 도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도운은 한숨을 쉬면서도 몸을 꼼꼼히 감싼 옷을 붙잡았다. 옷 사이로 삐죽 나온 작은 손가락 끝이 빨개져 있었다.

“왜 오셨습니까?”

좀처럼 시선을 들지 않던 도운이 짧게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운아, 왜 그래. 음식이 입에 안 맞았어요?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습니다.”

“내가 오늘 또 갑자기 약속을 잡아서 속상했습니까.”

도운이 이러는 원인을 알 길이 없어 해일은 답답하기만 했다. 대답 없이 가만히 있던 도운은 한참 만에, 누가 들어도 변명 같은 소리를 꺼냈다.

“그냥 저도…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나랑 같이 지내는 게 많이 불편했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해일도 알고 있었지만 도운에게 더 무언가를 캐묻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얘기를 했으면 좋았잖아요.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켜요.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

“불편했으면… 침실을 따로 마련해 주겠습니다. 서도운 씨가 편히 있도록 내가 주의할게요.”

그는 거의 애원하는 조로 말했다.

“아니면 근처에 따로 새집을 구할 테니까 거기서 지내는 건 어때요. 여기는 너무 멀고 낡아서 내가 널 마음 편히 여기서 지내게 둘 수가 없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도운은 이런 언쟁을 하는 것이 무척 소모적이고 피곤해 보였다.

“당분간만 지내려는 겁니다.”

실제로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자신의 집엔 한기만 가득했다. 난방을 켜도 바닥은 따뜻할지언정 공기는 좀처럼 훈훈해지지 않는 보온도 되지 않는 낡은 집. 몇 달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그런지 곳곳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도운은 천천히 집을 청소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속상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해일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해일의 거짓말을 묻어두기로 결심했지만, 그에 상처받는 자신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그 집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참 웃기다. 옛날에는 보일러를 켜는 것도 겁이 나 거의 끄고 살았었고, 추운 날에도 찬물로 씻는 일이 빈번했는데. 지금은 따끈하게 달군 방바닥을 청소하겠다고 뜨거운 물을 펑펑 잘만 쓰고 있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바닥에 깔고 누운 이불 또한,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얼마나 오래 있었다고. 너무 익숙해진 거야.’

해일과 생활하는 게 불편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넓고 안락한 집에, 편안한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것이다. 도운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그 익숙함이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일에게 의지하는 삶이 자신에게 언젠가 독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해일이 지금은 다정히 감싸주지만 자꾸 아프고 어리광이나 피우는 자신이 지겹다고 여겨질 수도 있고, 후에 그와 헤어지게 됐을 때는 심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하고 마음을 쓰는 것 자체가 도운에겐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당분간이 어느 정도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운아.”

“제가 연락을 미리 못 드린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도 제 집이니까 제가 와서 지내는 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이 집에서 어떻게 지내려고. 몇 달이나 비어 있었는데 관리도 안 된 집에서 어떻게 편히 지낸다는 말이에요?”

“원래 살던 곳이라서 별로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도운은 반 억지를 부렸다. 사실은 불편했다. 불편하다고 느끼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불편했다. 그리고 이를 해일이 몰랐으면 좋겠다.

해일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울화를 참아내듯 말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로 도운을 지나쳐 작은 철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도운이 깜짝 놀라 그 뒤를 따랐다.

“이사님!”

집 문이 열려 있었다. 해일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 빠른 눈으로 내부를 살폈다.

도운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멋대로 들어와 살피다니, 자신이 설마 남자라도 몰래 들였을까 싶어 이러는 것인가.

“이러지 마세요, 이사님.”

해일이 보는 도운의 집은 여전히 낡고 허름했다. 낮은 천장과 벽지엔 곰팡이도 슬어 있었고 수납할 공간이 충분치 않아 구석에 대충 올려 정리해 둔 짐들이 보였다. 전에 이 집에 왔을 때와 다르지 않게 여전히 형편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집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오고 싶을 정도였다니.

해일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과 살던 집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은 완전히 잊었을 것이라… 그의 말대로 묻어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도운이 아니라 해일이 억지로 묻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묻어둔 결과가 이제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일은 도운이 원하는 대로 과거 일을 평생 그렇게 잊어버릴 수만은 없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난…….”

하지만.

“난 서도운 씨를 혼자 두기 싫은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처절했다. 해일은 도운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그를 끌어안지 않은 채로 그렇게 도운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도운의 몸에 걸쳐져 있던 해일의 코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여기에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아요.”

도운의 귀 가까이 해일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해일은 정말 이곳에 도운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전에 여기 왔었을 당시가 절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척 서늘했고, 냉장고엔 제대로 된 음식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낡은 가계부만 떠올리면 해일은 누군가 뒷덜미라도 세게 때린 것처럼 두통이 심히 일었다.

[엄마 아빠 따라갈까.]

도운은 가계부 모퉁이에 저를 꼭 닮은 단정한 글씨로 그런 말을 써두었다. 해일은 단순히 충격을 받은 수준을 넘어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해일이 방심하면 언제든 도운이 그런 결단을 할 것만 같다는, 그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다시 한번 이기심을 발휘했다. 도운을 혼자 둬선 안 된다. 이전에도 며칠 이 집에 묵게 자유를 준 뒤로도 도운이 쓰러지지 않았던가. 이 집에 혼자 두었기 때문이다. 도운이 싫다고 해도 절대, 절대 품에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

“같이 갑시다.”

해일은 마침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운의 손목을 부술 것처럼 쥐었다. 뿌리를 내려 흙을 붙드는 나무처럼 단단하게 잡아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같이 돌아가요.”

“…….”

“아무것도 안 물을 테니까, 제발…….”

자신이 독단적으로 굴며 도운의 약한 마음을 구슬리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데려가야만 했다.

“…….”

도운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해일에게 붙잡힌 손을 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픔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흐려진 눈으로 계속 해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해일은 끝내 그 속에서 체념을 읽었다.

그가 서서히 손아귀에 힘을 뺐다. 가늘던 손목에 해일의 손자국이 붉게 남았다. 마침내 손이 자유로워졌지만 도운은 그 상태로 한참을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침묵을 지켰다.

서로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듯이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뗀 것은 도운이었다. 그는 해일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방에서 벗어두었던 겉옷을 다시 챙겨 입고 가방도 손에 쥐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자 해일이 뒤를 돌며 도운을 쳐다보았다.

“가겠습니다.”

도운은 소름 끼칠 정도로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이어 켜뒀던 난방도 끄고 거실의 불도 끄며 현관으로 다가왔다. 해일은 갑작스레 마음을 바꾼 도운에게 놀란 것도 잠시, 그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신발을 신고, 떨어진 코트를 해일의 품에 쥐여 준 뒤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도운아.”

해일은 도운의 뒤를 곧장 따라 나왔다. 도운은 열쇠로 문단속을 한 뒤 해일의 차 앞에 가서 섰다. 그가 문을 당겨 열기도 전 해일이 뒤로 다가와 대신 문을 열어주었고, 도운은 작게 숨을 내쉰 뒤 차에 조용히 올랐다. 그의 입가로 흩어지는 입김이 보였으나 해일은 애써 무시했다.

곧장 운전석으로 돌아와 자신도 몸을 올린 뒤 시동을 걸었다. 춥지 않도록 히터를 가장 높게 틀었고, 안전벨트를 매주러 팔을 뻗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도운이 그의 손길을 살짝 밀어내듯 막아 세웠다. 그리고 바로 벨트를 당겨 맸다. 해일은 차마 더 해줄 것이 없었다. 그저 몸을 바로 한 뒤 부드럽게 차를 몰아 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길, 도운은 머리를 창에 기대고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옆을 지나가는 주황색 가로등이나 가로수들, 두꺼운 옷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들에 진득이 시선을 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도운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다. 커다란 보름달이 구름에 반쯤 가린 채 그 사이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쩐지 달은 계속 쳐다볼 수가 있었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햇빛처럼 눈이 부신 것도 아니었으니.

도운은 창틀에 팔을 기댔다. 그 위로 턱을 괴며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일은 그런 도운에게 아무 말도 걸 수 없었다.

* * *

“어디 가십니까?”

해일이 침실의 불을 끈 뒤 조용히 나가려고 하자 반쯤 몸을 뉘었던 도운이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해일을 말로 붙잡았다.

“다른 방 준비될 때까진 서도운 씨가 침실 써요.”

도운을 손님방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 해일이 나오기로 했다. 그는 도운이 여기서 최대한 편안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운 전용 침실을 따로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준비가 될 때까지는 본인이 다른 곳에서 잘 생각이었다. 아니, 오늘은 불안한 마음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아무래도 서재에서 밤을 새우지 않을까 싶었다.

“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어떻게 여기서 혼자…….”

“깊게 생각할 것 없어요.”

해일이 다시 침대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도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 이기심으로 데려온 걸 잘 압니다. 그러니까 서도운 씨가 최대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뿐이고…….”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굿나잇 키스를 한 해일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소유욕이 이렇게나 더럽고 치졸할 것이라고는 본인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해일은 도운과 함께하는 매 순간 새로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무슨 일인지 묻지 않겠다고 했으니 걱정 말고 쉬어요. 하지만 언제라도, 뭐라도 얘기하고 싶어지면 말해요. …내가 도운 씨에게 화를 낼 일도, 실망할 일도, 시킬 일도 없을 겁니다.”

“제가.”

그가 씁쓸함을 지우지 못하고 다시 나가려는 때, 해일의 손을 붙든 것은 도운이었다.

“…그냥 변덕 부린 거예요. 몸이 아프다 보니까 괜히 스트레스가 쌓여서……. 투정 부려본 거예요.”

“…….”

“죄송해요.”

도운은 해일에게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말했다. 해일은 그 말이 도무지 사실처럼 들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같이 자는 게… 좋습니다. 어젯밤처럼 꽉 끌어안아 주시면…….”

달콤한 거짓말 같았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줄.

살며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제 몸을 끌어당기는 도운을 해일이 도저히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해일은 입술을 물며 침대로 올라갔다. 도운이 원하는 대로, 평소에 하던 대로. 그 작은 몸을 품 안에 담았다.

도운은 해일의 품속에서 몇 번을 더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심장 근처에 간지러운 숨결이 와 닿는 것이 그렇게 울걱할 수가 없었다. 해일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로 입을 맞추며 간질였다.

두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건조한 긴긴밤을 천천히 건너가고 있었다.

* * *

식사를 하던 도중 도운은 속이 얹힌 것처럼 몇 번 가슴을 툭툭 치더니 어느 순간 수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웁, 우윽…….”

도운은 입을 틀어막았다. 짧게 헛구역질하고는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해일이 급히 도운을 쫓았다.

“도운 씨, 괜찮아요?”

변기를 붙들고 채 소화되지도 않은 음식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마저도 별로 먹은 것이 없어 무척 소량이었다.

“윽… 욱…….”

더 이상 나오는 것도 없는데 계속 구역질이 치밀었다. 도운의 눈가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해일은 도운의 등을 부드럽게 쓸고 토닥여 주면서 고작 이런 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한동안은 괜찮았었다. 먹은 걸 게워내는 일도 없었고, 입이 짧긴 해도 모두 제대로 삼켜 소화했었다. 일반식을 먹여도 체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컨디션이 조금만 나빠져도 바로 먹은 음식들을 토해냈다.

그날이 기점이었다. 그날 밤 집에 데려온 이후로 도운은 겉으로만 멀쩡한 척,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변기를 붙잡고 있는 손끝은 작은 상처가 난 수준이 아니라 꼭 칼로 난도질이라도 한 듯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해일은 입술을 깨물다가도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하던 도운은 그제야 토기가 멈췄는지 천천히 고개를 세웠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식사 중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해일은 그런 도운을 천천히 일으켜 세면대 앞에 단단히 붙들어 세웠다.

“미안한 일 아닙니다. 미안하단 말 하지 말아요.”

“제가 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해일은 컵에 물을 받아 도운의 입을 헹구게 하고는 직접 칫솔을 들고 도운의 이를 닦아주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부끄러워하던 도운도 이내 포기한 듯 해일에게 조금 기대어 얌전히 그의 보살핌을 받았다.

해일은 도운을 다시 데리고 나와 따뜻한 물을 건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천천히 물을 들이켜는 도운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이렇게 토해내다 보면 영양이 부족할 것은 물론 식도도 성치 못할 것이다. 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일의 깊게 팬 미간을 신경 쓰던 도운은 컵을 내려놓고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 다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사님 괜찮으시면 식사 계속할까요?”

“억지로 먹을 필요 없습니다.”

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운의 컵을 치웠다. 그 뒷모습을 도운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해서 입맛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요즘 이렇게 게워내는 일이 잦아 해일도 덩달아 식사를 못 하는 게 미안하고 신경 쓰였다. 자신 때문에 해일의 입맛도 다 떨어질까 걱정되기도 하고, 도운은 고개를 저었다.

“저 배는 조금 고파서.”

“그럼 부드러운 음식으로 다시 차려 주겠습니다.”

“죽은 싫은데…….”

“수프는 괜찮겠어요?”

“네.”

죽을 자주 먹어 물릴 지경이었다. 도운은 해일이 금방 크림수프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배를 살살 쓸었다.

쿡쿡 찌르듯 아프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좀 괜찮아지려던 제 몸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해 가장 답답한 것은 도운이었다. 손도 망가지고, 장기도 망가지고. 온몸이 엉망이구나.

“억지로 먹지 말고 배부르면 남겨요.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고.”

“죄송합니다, 이사님. 감사해요.”

해일은 나무 수저로 수프를 살살 저어 식혀주면서 도운과 눈을 맞추며 작게 미소를 보였다. 수저를 받아 든 도운은 해일이 식혀준 윗부분부터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속이 좀 진정됐는지 다행히 이번엔 위가 조여들려거나 하는 느낌이 없었다.

“혹시 입에 안 맞는 반찬 있었습니까?”

“아뇨, 다 맛있었어요. 속이 좀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도운이 해일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해일은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잘 먹는지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사님도 어서 드세요.”

도운의 말에 해일은 수저만 잠깐 드는 시늉을 하고는 또 도운을 살폈고 그러느라 본인 식사는 거의 하지 못했다.

해일은 식사를 마친 뒤 잠시 마당으로 나가 의사와 통화를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구토를 했고, 먹으라는 약도 다 먹이고 있는데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의사에게 도운의 상태를 전했다.

증상을 듣고 있던 의사는 다시 구토를 시작한 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검사가 필요해 보인다고 소견을 말했다. 그들은 빠르게 검사 날짜를 잡은 뒤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사님.”

전화를 끊은 것과 동시에, 도운이 발코니 문을 살짝 밀어 열고 해일을 내다보았다.

“혹시… 어디 나가십니까?”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이 건너왔다. 해일은 도운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잠깐 통화한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그러자 도운이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해일과 더불어 도운 또한 해일이 어디론가 갈까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물어온 것이 벌써 몇 번이었다. 물론 본인은 전혀 자각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일도 도운의 의중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궁금해 묻는 것이라 여겼다.

“추운데 들어갑시다.”

해일은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며 도운을 번쩍 안아 올렸다. 한 손으로 문을 닫고는 도운을 거실 소파에 앉혔다.

“손 내봐요.”

그가 서랍에서 약상자를 꺼내 들고 돌아와 도운의 앞에 앉았다. 도운은 어쩐지 주먹을 쥐며 자신의 손끝을 숨겼다. 하지만 해일에게 통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팔뚝부터 팔꿈치를 지나 손목까지 부드럽게 쓸어주며 천천히 긴장을 풀게 하더니 이내 손을 가져가 펼쳤다.

“…….”

그리고 엉망이 된 손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핀셋으로 솜을 집어 소독약을 묻히고는 손가락 끝을 톡톡 문질렀다.

“아프면 얘기해요.”

아직 벌어진 상처에 소독약이 닿자 따가워 움찔거리긴 했지만 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치료해 주는 해일의 내리깐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일은 상처를 소독한 뒤 연고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그 또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손을 상처 내지 말라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괜히 전문가도 아닌 자신이 이 문제를 지적하고 나무랐다가 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도운은 손이 아프겠지만, 말없이 묵묵히 치료만 하는 해일의 가슴도 갈래갈래 찢겼다. 의사와 이 문제도 다시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연고 위에 밴드를 붙여주며 치료를 마무리하자 도운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일은 그 상처에 대해 더 대화를 끌고 나갈 수 없어 다른 화제를 꺼냈다.

“호칭을 다르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서로 부를 때 말이에요.”

도운의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호칭? 호칭을 어떻게 다르게 하자는 말인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길게 으음 소리를 내며 잠시 망설이듯 고민한 도운은 맹하게 말했다.

“혹시 승진하십니까?”

…곧 승진 철이긴 하다.

“아니요.”

해일이 혹여 승진한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인가 싶어 물었지만 그것도 아니라니 도운은 더더욱 미궁에 빠졌다.

“내가 도운 씨를 도운아, 하고 부르기도 하잖아요.”

해일은 도운을 종종 편하게 부르기도 했다. 도운은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해일에게 반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름을 부르자는 것일까? 해일 씨라고? 도운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혼자 놀랐다. 성대 밖으로 뛰쳐나갈 일이 절대 없을 단어였다.

잠시 도운의 반응을 기다려 주던 해일이 힌트를 주듯 물었다.

“어릴 적에 날 뭐라고 불렀습니까?”

“어…….”

형. 해일이 형.

도운은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주먹을 꼭 쥐고 말았다. 손끝을 물어뜯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반창고가 붙어 있어 그러지 못했고, 대신 목울대가 울리며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렸고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저는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제일… 편한 것 같습니다.”

도운은 다른 방법으로 해일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거듭 이야기했다.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지금이 편합니다. 굳이 다른 호칭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

“이사님도 괜히 저 때문에 억지로 싫은 걸 좋다고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해일이 형이라는 호칭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기억이 선연했다.

그게 설령 해일이 도운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그래서 오해가 풀린 지금은 괜찮다고 해도. 도운은 해일을 다시 그렇게 부르기 싫었다.

이상하게 해일을 ‘형’이라고 부르면 자신이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 달라며 해일에게 매달리고 기대어 자신의 짐을 모두 떠넘기는 것만 같았다. 그런 알 수 없는 죄스러움이 목을 조였다.

“싫지 않습니다.”

해일은 제 과오를 알기에 부드럽게 설득했다.

“싫지 않아. 네가 다시 형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물론 이전에도… 싫지 않았고.”

주먹을 쥔 채 미세하게 떨고 있는 도운의 손 위를 해일의 손이 덮었다. 손이 찼다. 손이 찼다. 조금 전 치료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해일이 침음했다. 과거 자신이 했던 행동과 말이 얼마나 도운에게 상처가 되었으면 단시간에 손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놀란 것일까.

“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게 싫어서… 너한테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서 도리어 너한테 괜한 화풀이를 한 거야.”

“…….”

“미안해. 거짓말을 한 것도, 널 몰아붙였던 것도. 다.”

이따위 말 몇 마디로 도운의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죄책감을 내려놓으려 한 말도 아니며 한 번의 사죄로 모든 잘못이 씻길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해일은 그저 도운이 그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뿐이었다.

“전… 괜찮…….”

괜찮다니. 해일이 건넨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맞는 건지 울멍울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해일은 그 말을 막아섰다.

“우리 이제 연인이 됐으니 더 가까운 사이라고 느낄 수 있는 호칭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겁니다.”

“…예.”

“천천히 해요. 언제든 좋으니까.”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주었다. 지금 당장 그렇게 불러주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었다. 언젠가 정말 진정으로 도운이 마음을 열게 된다면, 그렇게 되도록 자신이 더 노력을 한다면 절로 그렇게 불러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 * *

도운은 병원에 재검 예약을 잡아놓은 그 며칠 사이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해일은 하루가 갈수록 줄어드는 무게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는데 정작 도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벨트를 한 칸 더 당겨 매기만 했다. 명확하게 그날, 도운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던 바로 그날부터 증상이 악화되기 시작한 건데 해일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을 해봐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양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안 좋아졌다고 했다. 신장병 환자들이 밥맛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체중이 감소하면 큰일이라며 지적했다.

“보호자가 더 신경 써주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도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말은 꼭 의사가 해일을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왜 자꾸 해일에게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저러다 그가 짜증이라도 난다거나 자신에게 질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슬쩍 해일의 눈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의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운의 손을 살피며 더더욱 심각해졌다.

“칼로 난도질이라도 한 것 같네…….”

그 말에 도운이 슬쩍 의사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조금 물어뜯은 것 가지고…….

의사가 도운에게 심적으로 불안하거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지 물었으나, 도운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당사자를 옆에 세워둔 채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의사는 도운에게서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간호사를 불러 도운을 잠시 내보냈다.

“이렇게 손끝을 상처 내는 것도 일종의 강박 증세입니다. 저와 얘기하시는 것보다 전문의와 상담하는 게 빠를 것 같지만 제 소견으로는… 꽤 심각해 보입니다. 어서 치료에 들어가시는 게…….”

“알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일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오늘 바로 정신과 상담 받으실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정신과 진료까지 받게 된 도운은 얼떨떨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약을 받으러 가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속았다. 도운은 의사가 가볍게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해일의 옷자락을 잡으며 올려다보았다.

“저 멀쩡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도운 씨. 가볍게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급격히 감정이 격해진 도운이 목소리를 높이자 의사가 진정시키듯 말했다.

“환자분, 혹여 합병증이라도 오게 되면 이런 상처가 생기는 게 치명적일 수도 있어요.”

“앞으로 안 하겠습니다.”

“보호자분은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죠.”

의사의 권유에 잠시 도운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해일이 조용히 진료실을 나갔다. 그 또한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으나 도운의 앞에서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도운은 제 손끝을 감싸듯 서로 맞잡았다.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그런 도운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자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니 굳이 상처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의사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중, 도운은 작게 중얼거렸다.

“제 보호자 아니십니다.”

“네?”

“보호자 없어요. 아니, 저도 성인이니 제가 제 보호자예요.”

그가 말하고 싶었던 본론은 그제야 나왔다.

“진료 결과 같은 거 이사님께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도운은 제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해서 숨기려고 해도 평생 이런 환자만 보아오던 전문가 앞에서 완벽히 숨기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해일이 몰랐으면 좋겠다. 이미 이곳까지 그의 손에 이끌려온 것도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낸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 엉망이었는데.

또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 그의 옆에 기생할 것인가.

“…그럼요. 진료 과정은 환자분 이외 누구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운은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상담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의사는 도운에게 꼬치꼬치 캐묻거나 하지 않았고, 도운은 제가 할 수 있는 대답만 그리 길지 않게 대답했다. 그마저도 충분했는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처방해 준다고 했으나 무슨 약인지는 몰랐다.

도운은 진료 후 병실에서 링거를 맞았다. 세 시간이 조금 안 걸리는 시간이었는데 깜빡 낮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나고 나서는 옆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해일에게 미안해 얼굴이 붉어졌다.

“…….”

그렇게 낮잠을 자서인지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해일의 따뜻한 품 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면 졸리지 않은 이른 시간이어도 저절로 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러지 못했다.

도운은 결국 침실을 나왔다. 깊은 새벽,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천천히 집 안을 걸어 다니다 창밖을 구경하는 것뿐.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긴 복도 끝의 피아노 앞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면 항상 볼 수밖에 없는 곳이었지만 도운은 애써 시선도 두지 않았었다. 실수로라도 한 번 손대지 않도록 이 앞에선 항상 손짓 한 번도 조심스러웠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 눈이 가고, 손이 갔다. 그는 건반 뚜껑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도저히 이걸 열어 건반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지만, 의자를 당겨 그 위에 자리할 용기는 있었다.

정자세로 바르게 앉아 있던 도운은 이내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무릎을 세우고 팔로 끌어안은 뒤 그 위로 턱을 기댔다. 그러는 순간, 도운은 울음이 터졌다. 아주 고요히. 울먹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눈물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해일은 조금 전, 누워 있는 제 곁에 도운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단번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만히 빈 옆자리를 쓸어보니 아직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곧 평정을 되찾고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고 막 도운을 찾으려는 때에, 피아노 앞 웅크린 듯한 형상이 있었다.

발코니 창으로부터 들어온 기나긴 달빛은 도운의 작은 등을 비추었다.

해일은 걸음을 멈췄다. 도운에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겨…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이 피아노를 바라보는 도운에게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없었다.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도운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옅은 달빛과 그늘이 공존하며 언뜻 얼굴을 비추기도, 가리기도 했다. 그의 손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데, 밤의 환각인지 어둠 속 도운이 피아노를 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하아.”

도운은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소리 죽여 내쉬는 가느다란 숨이 잘게 떨릴 정도로. 기어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해일의 시선이 급히 좇았다. 손등으로 훔쳐내는 도운에 의해 어느 중간 사라졌으나, 머지않아 다른 줄기가 흉터를 남기듯 흘러내렸다.

온 세상이 잠에 빠져 있을 늦은 밤, 아무도 보지 못할 어둠 속.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울음을 쏟아내고 있는 저 작은 아이가… 정말 자신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했던 그 연인이 맞는지.

해일은 입가를 쓸듯 가렸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서, 제 마음과 사랑을 모조리 쏟아붓고 싶어서 품에 안은 것이었다. 홀로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하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

그는 누군가 서서히 자신의 숨통을 조여온다고 느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발끝부터 싸늘하게 식어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큰 충격. 어떻게든 손에 쥐고 있으려 했으나…….

해일은 이내 조심스레 한 발짝을 뗐다. 하지만 그 때 도운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것인지 다리를 바닥으로 내렸다. 잠시 동작을 멈춘 그사이에 아주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도운은 발끝을 끌며 사박사박 욕실로 이동했다. 해일은 욕실 불이 켜지고,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어… 이사님.”

막 욕실에서 나온 촉촉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 해일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혹시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아니에요. 뒤척이는데 옆에 안 보여서.”

“아……. 화장실 가고 싶어서… 잠깐 일어났습니다.”

도운이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해일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리 와요.”

“…….”

제 손을 얽어가며 여전히 욕실 문 앞에 서 있는 도운에게 해일이 말했다. 도운은 짧은 순간 움찔하더니 이내 해일에게 다가갔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 꼭 달려가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품에 폭 파고든 도운을 해일이 세게 끌어안았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도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해일은 속죄하지 않고 묻어둔 자의 최후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었다. 해일의 결심이 선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영업팀에서 지금 서류 올려 보낸다고 합니다.”

“받아다 도운 씨가 바로 분류해요. 박 대리는 편성 다 끝나면 나한테 전화하고. 나 외근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차장님.”

성 차장이 급히 가방을 챙겨 비서실을 떠났다. 연말이 성큼 다가온 회사는 한 해의 마무리를 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모든 직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도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비서실의 일원으로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젠 숨 좀 돌리네요.”

“그러게요.”

다행인 것은 가장 바쁜 시기는 조금 지났다는 것이었다. 비서실은 이제 이사의 결재를 바라는 서류들만 정리하면 올해의 큰일은 다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영업팀이요!”

넥타이를 휘날리며 직원 하나가 비서실로 뛰어 들어왔다. 도운은 대신 서류를 받아 들며 짧게 묵례했다. 그 영업팀 직원은 또 바쁜 일이 남아 있는지 급히 자리를 떴다. 검은색 파일을 한쪽 팔에 들려던 도운은, 순간 앗 하는 짧은 소리를 냈다.

“…….”

팔 안쪽, 접히는 부분. 긴소매를 입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짧은 소매 옷을 입어도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 날카로운 통증이 있었다.

도운은 서류를 박 대리에게 전하고 잠시 화장실로 들어왔다.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살살 접어 올린 뒤 팔 안쪽의 그 부분을 확인했다.

“벌어지진 않았네.”

가느다랗고 붉은 실이 붙어 있는 것처럼, 새하얀 안쪽 살에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상처가 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서너 줄이 그어져 있었다.

도운은 여상한 표정으로 주위 살을 가볍게 눌러보며 상처를 확인했다. 그 위를 파일이 짓눌러 통증만 있었을 뿐이다. 대충 아물기는 했는지 피는 나지 않았다.

혹여 피가 배어 나와 누군가 눈치라도 채면… 큰일이니까.

그는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다시 걷었던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렸다. 단추까지 잘 채우고 난 뒤 주름지지 않도록 소매 부분을 탁탁 털어 폈다. 그리고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가볍게 손을 씻었다.

손끝의 상처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꼭 그 대신이라는 듯, 팔뚝에는 새로운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운은 수도를 잠그고 가볍게 손을 털었다. 찬물에 얼어붙은 손끝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찬 기운에 정신까지 쭈뼛 차려졌다.

“대리님, 제가 커피 한잔 내려드릴까요?”

“부탁해요.”

밤을 달려 부산에서 돌아온 선배가 안쓰러웠던 도운은 커피 심부름을 자처했다. 냉큼 탕비실로 들어가 선물로 들어온 최고급 원두를 갈았다. 필터 속 갈린 원두 위로 조금씩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도운은 원두가 아닌 허공 어느 지점을 멍하니 응시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들킬 일이 없을 것이다. 날이 추워 계속 긴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하고, 또…….

‘어차피 섹스도 안 해주니까.’

도운은 곧 완성된 커피를 들고 나가 박 대리에게 전해주었다. 자신도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폭풍 속 짧은 휴식을 가졌다.

몇 시간 뒤, 오찬 모임에 나갔던 해일과 김 실장이 회사로 복귀했다.

도운은 타 부서에서 올라온 서류를 끌어안고 이사실로 들어갔다. 해일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있었다.

“이사님, 결재 요청 서류들입니다.”

“오늘에서야 양이 반으로 줄었군요.”

그는 재킷도 마저 벗어 걸어놓은 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도운이 서류를 세 종류로 분류해 책상에 놓아주는 걸 손을 뻗어 그도 도왔다.

“아 그리고 TY 주상훈 상무님께서 다음 주 금요일 저녁 만찬 요청을 주셨습니다.”

“저녁은 어려울 것 같은데. 오찬으로 돌리든가 아니면 다음 달로 미루죠.”

“알겠습니다.”

요즘 만찬 약속은 거의 취소하고 또 사적 모임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연말 연초는 그런 자리가 많아 수행 의전을 계획하느라 팀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아 신기하다는 소리를 박 대리가 했었다. 그걸 기억해 낸 도운 또한 정말 그러네, 하며 속으로 의아해했다.

메일을 보낼 내용을 대강 떠올리며 도운이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던 도중 해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에… 별다른 선약 없죠?”

“예?”

“곧 크리스마스잖아요.”

아……. 도운이 손을 멈추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크리스마스. 맞다. 한 해가 가기 전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가 고작 며칠을 앞두고 있었다.

월초에 회사 로비엔 커다란 트리도 생겼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걸려 있었는데, 도운은 그게 크리스마스 때문이라는 인식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일이 그 단어를 꺼내는 순간에서야 깨달았다.

“당연히 없겠죠.”

“네. 없습니다.”

자신이 만나면 누굴 만난다는 말인가. 도운의 짧은 인맥으로는 크리스마스라는 큰 행사 날 개인적으로 만날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사님은 혹시 약속 있으십니까?”

스케줄상으로는 그날 전후로 아무런 약속도 잡혀 있지 않았으나, 혹시나. 그가 전에 술을 마시고 돌아온 그 날처럼 다른 사람을 만날 일이 있을까 싶어 슬쩍 물었다.

“곧 만들 예정입니다.”

“어떤…….”

“서도운 씨 만날 약속이요.”

“저요?”

“네.”

마지막 서류의 분류를 끝낸 해일이 왼쪽 턱을 괴며 도운을 올려다보았다. 도운은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 ‘그러셨군요, 그러시구나.’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해일이 크리스마스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자신과 만날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도운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명목상의 애인은 자신이었으니. 도운은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잠깐 외출이라도 하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장이 펄떡대던 도운은 이렇게 확인을 받을 때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도운에게 생긴 또 다른 강박증이었다.

“우리도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가야지.”

해일은 해외로 가도 좋겠지만 도운의 몸 상태를 고려해 국내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숲속 중턱, 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몇 년 전 지어둔 별장이라고 한다.

“나도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따로 관리인이 있어서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지은 지 몇 년 안 되기도 했고요. 거기서 맛있는 요리도 해 먹고, 겨울 바다도 구경하고. 어때요?”

“저는 좋습니다.”

“다행이네요.”

해일은 데스크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뽑아 들며 도운에게 웃어주었다. 서류를 하나씩 가져와 검토하기 시작하는 해일에게 도운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이사실을 나왔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준비할까?’

조금 상기된 도운의 머릿속엔 뭉게뭉게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 * *

차로 두 시간을 넘게 달려온 별장은 정말 그림 속에서나 봤던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었다.

서울에 있는 주택보다 몇 배는 컸고, 따뜻해 보이는 짙은 나무색의 집은 그 지붕 위로 눈이 쌓여 있어 더 멋스러웠다. 산속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본관 옆으론 작은 통나무집도 있다고 해일이 덧붙였다. 아마 여기 머무는 이틀 동안 이 집 안을 다 구경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관리만 해주고 여기 사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크게 시선을 돌려가며 내부를 훑었다. 안쪽은 더 훌륭했다.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벽난로도 있네요.”

“별장엔 벽난로가 있어야 한다는 회장님의 고지식한 취향이에요. 인테리어에 참견을 좀 하셨거든요.”

“아…….”

도운이 천천히 걸어 다니며 거실을 구경했다. 해일이 그의 동선에 맞춰 커튼을 걷어주자 커다란 테라스 창밖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추운 겨울이 찾아와도 제 푸른 모습을 잃지 않은 침엽수림이 흰 눈을 얹은 채로 도운의 발아래 빼곡했다. 저 멀리는 드넓은 바다가 하늘인지 바다인지도 모르게 뒤섞여 반짝이고 있었다.

“우와…….”

도운은 창에 답삭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얼마나 붙어 있었는지 곧 몸을 떼니 창에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남았고, 동그란 입김도 그려져 있었다. 해일이 그걸 보고 큭큭 웃자 도운은 얼굴을 붉히며 옷소매로 슥 문질러 닦았다.

도운이 마저 집 안을 구경하는 사이 해일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훑었다. 미리 준비하라 일러둔 재료들이 모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나와 여전히 한편에 놓인 장식장 구경에 푹 빠진 도운에게 말했다.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죠.”

“알겠습니다.”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요.”

해일의 말에 도운은 대충 침실로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품에 꼭 안고 들어왔던 가방 안에서 편한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가방 지퍼를 잘 잠근 뒤에 눈에 띄지 않는 한구석으로 가방을 가져다 두었다. 그 위에는 오는 동안 입었던 옷을 올려두었다. 이 가방 밑바닥에 숨겨둔 무언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리퍼를 끌며 주방으로 가니 해일은 이미 음식 재료를 모두 꺼내 손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운이 급히 그에게 붙어 서며 자신도 팔을 걷어붙였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냥 쉬어요. 집 구경이나 더 하든가.”

“제가 요리는 잘 못해도 재료 다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해일이 한 번 밀어냈으나 기어코 도운은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두리번거리다 옆에 놓인 커다란 식칼을 집어 들며 말했다.

“당근 썰까요?”

그러자 해일이 재빨리 도운에게서 칼을 가져갔다. 꼭 장난스레 혼을 내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칼엔 손대지 말고. 다칠라.”

“걱정 마세요.”

“정 하고 싶으면 그냥 씻어만 줘요.”

해일의 단호한 제안에 도운은 입을 비죽거리다가도 당근을 가져갔다. 해일은 도운 대신 손을 뻗어 따뜻한 물을 틀어주었다. 혹여 차가운 물로 씻다 손이 다 상할까 걱정한 탓이었다.

여행 준비에서부터 지금까지 그가 애 돌보듯 자신을 대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짐을 싸는 것도 도운 대신 해일이 미리 다 해두었다. 옷부터 약까지 필요한 게 모두 완벽히 들어 있는 가방을 보며 그의 준비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운은 가방 구석에 겨우 준비한 선물을 욱여넣고는 자신의 짐은 자기가 들겠다며 기어코 제 어깨에 멨다.

도운이 채소를 하나씩 씻어 건네자 도마를 준비한 해일이 일정한 크기로 빠르게 썰기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꺼내온 고기도 한입 크기로 잘 자른 뒤 큰 냄비에 넣고 볶아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도운은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요리는 따로 배우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유학 갔을 때 주로 집에서 해 먹다 보니까 저절로 터득하게 되더군요.”

“미국 유학 다녀오셨다고 하셨죠.”

“네. 그땐 여기 있기엔 상황이 좀 어지러웠어서.”

그 말을 한 그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피식 웃고는 냄비에 물을 채웠다.

“지금 하기 좋은 얘긴 아닌가요.”

“전… 괜찮은데요. 유학하셨을 때 얘기 더 듣고 싶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여기 앉고.”

해일은 근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내밀었다.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은 도운은 해일이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도운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게 오랜만인지라 해일은 귀찮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묻는 말에 착실히 답을 해주었다.

도운은 그 대화로 해일에 관해 새로운 점을 알게 되었다. 마음 맞는 친구 몇 명과 한집에서 룸 쉐어로 함께 살았다는 것이나, 문 전무와는 유학길에 오르는 비행기에서부터 마주쳐 지금껏 연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수업을 빼먹고 배낭여행을 다니기도 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해했다. 의외인 부분이 많았다.

해일은 스튜를 끓이며 순식간에 스테이크를 구워 오븐에 넣었다. 그 뒤 닭고기를 큐브 모양으로 잘라 짧게 튀겨내 샐러드에 올렸고, 곁들여 매쉬드 포테이토와 사과를 썰어 넣은 코울슬로 또한 만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오히려 도운이 끼어들었다간 그에게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며 얌전히 앉아 기다리던 도운은 해일이 오븐에서 스테이크를 꺼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테이블 준비하겠습니다.”

서랍을 열자 번쩍거리는 은색 식기가 가득했다. 잠시 만지작거리며 한눈을 팔던 도운의 뒤로 해일이 다가와 끌어안았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고개를 숙여 도운의 볼과 귓가에 쪽쪽 입 맞춘 해일이 도운 대신 식기를 챙겼다.

“어서 앉아요. 식사합시다.”

“…네.”

도운은 빨개진 귓가를 만지작대며 맥 빠진 소리를 냈다. 온몸으로 열이 올랐다.

두 사람은 기분 좋은 식사를 마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참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번엔 도운의 속도 불편하지 않아 게워내는 일이 없었다.

해일은 도운에게 약을 챙겨 먹게 한 뒤 산책로를 걷자고 제안했다.

도운은 해일이 새로 사 온 새하얀 롱 패딩을 단단히 갖춰 입었다. 그가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한 선물 중 하나라며 건넨 것이었다. 무릎까지 덮는 긴 길이에 무척 포근하고 따뜻했다. 눈이 쌓인 숲속 산책로를 걷는 데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좋은 길이었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에 미리 눈을 치워둬서 미끄럽지도 않았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저 멀리까지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산책로 또한 해일의 소유라는 말에 도운이 놀란 표정을 하고 쳐다보았다. 목도리에 코까지 폭 파묻혔기 때문에 귀엽게 동그래진 눈알만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하늘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바다 근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해일은 오늘은 이만 쉬자며 도운을 욕실로 이끌었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고 나온 도운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먼저 씻고 나와 있던 해일이 도운을 발견하고는 다가와 그의 볼과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볼이 붉어져 있었다. 어릴 적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갈까요.”

여느 때와 같이 도운의 머리를 말려준 다음 자연스럽게 그를 위층으로 이끌었다.

계단을 올라가 보자 무척 큰 방에 넓은 좌식소파가 있었고, 그 앞 낮은 원형 테이블에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와인과 음식이 놓여 있었다. 바질 잎을 썰어 훈제 연어와 섞은 뒤 얇게 썬 바게트에 올린 카나페와, 절인 올리브를 곁들인 카프레제. 분명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우와, 이걸 언제 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체리 장식이 올라간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도운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케이크. 너무 예뻤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케이크였다. 그간 도운의 삶에서 무언가를 기념할 만한 일이 있다거나, 케이크를 살 사치를 부릴 만한 일이 없었기에. 케이크를 그리 갈망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케이크 한 판에서 단 한 조각만 마음 놓고 베어 먹어 달콤함을 음미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케이크, 직접 구우신 건 아니죠?”

“빵 구울 줄은 모릅니다.”

케이크까지 직접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 당연했으나 정말 혹시나 해 물었다. 도운이 살포시 웃으며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케이크 위에 쓰인 글씨도 잘 보였다.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 케이크. 미리 주문해서 받아온 겁니다.”

도운은 더 이상 감탄할 정신도 없었다. 그가 오늘 하루만 해도 도운에게 주는 선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떤 것 하나 도운의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감동한 채 소파에 자리하자 해일이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둥근 와인 잔에 도수가 낮고 달콤해 목 넘김이 좋은 와인을 얕게 따랐다.

“감사합니다.”

허공에서 가볍게 잔을 부딪치자 맑게 유리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도운은 잔 속에서 흔들리는 와인을 바라보다가 해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메리 크리스마스.”

도운이 용기를 내 먼저 건넨 인사가 잘게 떨리며 해일에게 닿았다. 어쩐 일인지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해일의 마음도 파도처럼 일렁였다.

“네. 메리 크리스마스.”

해일이 웃으며 화답했다. 도운은 그제야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도심지에서 벗어나 그와 단둘이 멀리 떠나온 것도 좋았고, 사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것도,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도 모두 좋았다.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도운을 깊은 우울에서 조금 끄집어내 주었다.

달콤한 와인 한 모금과 맛있는 간식 한 입. 도운은 활짝 웃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붉은 입술 또한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

도운을 다시 만난 뒤 처음 보는, 이제까지 중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보조개를 오랜만에 보네.”

해일은 손끝으로 도운의 광대 주변을 어루만졌다. 정말 즐겁고 행복할 때 도운은 이렇게 광대 위로 길게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웃었다. 그가 어릴 적은 매일같이 보아온 보조개였다. 그만큼 그들의 옛날은 하루하루가 행복했었다.

해일은 이젠 이 웃음을 보려면 수도 없이 노력해야 했다.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아야 했고, 도통 꺼내놓지 않는 생각을 깊이 유추해 원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모든 게 맞물린 순간 도운이 웃었다. 해일에게도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보조개요?”

“본 지가 오래돼서.”

“아…….”

도운이 머쓱해하며 제 볼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웃어 보였지만 조금 전과 같이 보조개가 파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해일은 굳이 그 점을 짚지 않았다. 그냥 함께 웃으며 도운의 입에 케이크를 한 입 떠 주었을 뿐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가 혀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도운은 한참 맛을 음미하다가 저도 덩달아 해일에게 케이크를 뜬 포크를 살짝 내밀었다. 조금 오버하는 건가 싶어 다시 가져오려던 때 해일이 먼저 상체를 숙여 받아먹었다.

“맛있네요.”

그의 진한 눈매가 정확히 도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도 낮은 조명이 켜진 방, 씩 웃은 해일의 얼굴에 집중하자 어쩐지 가슴이 이상했다. 자꾸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유를 모르겠다. 감동받아서? 아니면……. 언젠가 깨질 환상이라 슬퍼져서?

도운이 고개를 숙이며 괜히 포크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우물대는 사이 해일은 도운의 옆에 놓인 리모컨에 손을 뻗었다. 순간 훅 다가온 그의 온기와 체취에 도운은 얼어붙은 듯 몸을 굳혔다.

“천장 한 번 볼래요?”

해일이 버튼 하나를 누르자 작은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도운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올리자, 천장의 지붕이 서서히 걷어지며 밤하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별도 달도 다 볼 수 있습니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지붕을 걷으면 따뜻한 집 안에서도 하늘을 구경할 수 있도록.

“…….”

새까만 밤하늘에 빼곡하게 별이 박혀 있었다. 하늘에 난 강처럼 금가루가 흘러 반짝거렸다. 그 한가운데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달이 있었다.

도운은 홀린 듯 천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러한 듯한 착각에 눈앞이 황홀했다. 순식간에 도운의 시선과 정신 모두를 앗아갔다.

“…예뻐요.”

해일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팔을 괴고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도운을 감상했다.

눈과 같이 피부와 대비되는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 별을 담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과 속눈썹은 눈꺼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해일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길게 뻗어 끝이 동그란 콧대, 그 밑으로 난 입술 산. 체리처럼 붉은 아랫입술로 이어지는 그 가느다란 선은 몇 번을 보아도 감탄스러웠다. 이 작은 얼굴 안에 어떻게 저 이목구비를 전부 담았을지 모르겠다.

한참을 뜯어 살피던 그는 도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밤하늘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달을 유독 좋아하던 도운에게 공기 맑은 곳의 밤하늘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선물이 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큰 선물이에요.”

도운은 그제야 해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도운은 가슴 부근을 가볍게 쥐었다. 제 큰 감동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감사하다는 말로는 무척 부족했다.

지금껏 해일이 자신에게 해준 일은 산과 바다 같았는데, 그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

짧게 소리 낸 도운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급히 아래층에서 가방 속 상자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뭐예요?”

해일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도운이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준비한 선물이요. 별건 아니지만…….”

도운이 내민 상자를 받아 들었다. 검은색 상자에 흰색의 리본이 매여 있었다. 해일이 조심스레 리본을 잡아 풀어 상자를 열자 그 안엔 진한 회색의 머플러와 가죽 장갑이 들어 있었다.

“…….”

도운이 제게 주는 선물. 이런 걸 언제 준비한 것일까.

해일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 상자 속 머플러를 손끝으로 간신히 쓸어보기만 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산 거예요. 정말 별거 아니죠?”

해일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외로 도운의 속은 요동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잔잔한 바닷물과 같았다. 선물에 실망한대도 상관없었다.

그냥 덤덤히 마음속에 들어 있던 말을 꺼냈다.

“이사님이 제게 지금껏 해주신 것들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란 선물이지만, 그래도……. 이사님이 따뜻하게 겨울 보내셨으면 하는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

“이사님은 겨울… 좋아하셨잖아요.”

그 말은 일종의 금기가 깨진 것과 같았다. 조심스러웠던 그들의 공통된 과거. 혹여 상대에게 해를 입힐 칼날이 될까 아무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얼마 전 해일이 지나가듯 호칭에 대해 언급했을 때 도운은 완강히 거절했다. 그 금기는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처럼.

“…지금도 좋아하십니까?”

하지만 도운이 먼저 그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왔다. 어릴 적 추억 한 조각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것은 해일에게 도운이 준 머플러와 장갑보다도 더 선물처럼 느껴졌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네. 좋아합니다.”

그리고 해일은 여느 때보다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도운 씨한테 준비한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네? 어떤…….”

이미 차고 넘치게 받았는데 또 줄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도운이 의아해하는 사이 해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네모난 카드. 차마 곧바로 꺼내놓지 못하고 그 안에서 몇 번을 굴렸다.

새로 마련한 집의 카드 키였다.

도운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그 날의 충격을 아직 고스란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급격한 건강 악화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도운이 원하는 것이 바로 개인 공간이지 않을까 유추했다.

해일은 최선의 집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교통도 편리해야 했고, 동시에 조용한 곳이어야 했다.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개인 공간이 마련되고 경비도 삼엄한 곳.

마침내 찾은 곳은 한 고급 아파트 타운이었다. 층당 한 세대만 거주하는 넓은 공간이었고, 각 세대에 개인 정원도 달려 있었다. 주차장 또한 다른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해일이 사는 지금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즉, 도운 혼자 그곳에서 편히 살 수 있도록 개인 집을 마련해 줄 생각으로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운의 이야기를 들으니 해일은 또 욕심이 생겼다. 도운과 그곳에서 함께 살고 싶은 욕심이.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든 게 완벽히 준비된 마당에도 이기심을 발휘하고 싶어지다니 구제불능이었다. 스스로도 파렴치한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도무지 쉽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잠시 답을 기다리던 도운이 해일의 표정을 살폈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걸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데도 그의 의중은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해일은 끝내 자조적으로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운을 앞에 두고 더 이상 제 욕심만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한참 만에 주머니 속 카드키를 꺼냈다. 도운은 제게로 내밀어지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손을 내밀었다.

“아…….”

그런데 그 순간, 도운이 테이블 위의 잔을 실수로 치며 쏟고 말았다. 해일만 바라보고 있다가 제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해일이 급히 잔을 들어 세웠으나 이미 내용물이 모두 도운의 몸으로 쏟아진 뒤였다. 잠옷 상의는 피라도 흘린 것 같은 붉은 자국이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바닥에 깔린 러그 위로 뚝뚝 떨어졌다.

“괜찮아요?”

“죄, 죄송합니다.”

실수에 당황한 도운이 허둥댔다. 해일이 근처 티슈를 뽑아 몸을 닦아주려고 하자 도운은 그걸 받아 답싹 엎드려 바닥부터 문질러 닦았다. 그 미련한 행동을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해일은 다시 티슈를 뽑아 도운을 멈추게 하며 일으켜 세웠다.

“…닦는 거로는 안 되겠네.”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옷 위를 문질러 보아도 와인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금세 의기소침해진 제 연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러그는 세탁을 맡기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버리고 새로 사도 되는 소모품과 다름없었다. 죄송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달래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옷부터 갈아입혀야겠다는 생각에 붙박이장으로 다가갔다. 각 침실에 편히 입을 수 있는 면으로 된 셔츠가 마련되어 있었다. 해일은 그중 하나를 꺼내왔다.

“이 옷으로 갈아입어요.”

제 사이즈에 맞게 갖춰진 옷장이었으나 어차피 자면서 입을 옷이니 조금 커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잠옷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옷을 입혀주려 해일이 도운의 뒤로 다가가 셔츠를 펼쳐 들었을 때였다.

“……?”

해일이 순간 우뚝 멈춰 섰다. 해일에게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도운은 그가 펼쳐준 셔츠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단추를 하나씩 채우기 시작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사님? 윽……!”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 해일이 도운의 왼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셔츠 소매를 잡아 순식간에 어깨까지 밀어 올렸다.

“…서도운.”

그러자 도운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해일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쓸려 올라간 소매를 다시 급히 끌어 내렸고, 다시 만지지 못하도록 오른손으로 옷을 꾹 붙들었다.

“지금 팔에 그 상처… 뭡니까.”

해일은 직구를 던지듯 망설임 없이 물었다. 시선 둘 곳을 모르고 대록대록 굴리는 저 당황한 듯한 눈동자가 해일의 질문에 답을 주고 있었다.

달콤하던 공기는 찬물이 끼얹어진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해일은 팔에 난 붉은 자국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흔적이 맞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상처… 뭐냐고 물었어요.”

턱밑까지 차오르는 열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목에는 핏대가 서기 시작했고, 애써 가쁜 숨을 내리누르느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일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끝없이 진정하라고 중얼거렸으나 어느새 머리를 지배한 먹구름 같은 감정이 그마저도 어렵게 만들었다.

“그냥 긁힌 상처입니다.”

도운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긁힌 상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해일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

아주 잠깐, 유리잔이 깨지기라도 하며 긁힌 것인가 싶었지만 잔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렇다기엔 상처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개수뿐만이 아니라 상처가 난 모양 또한 단순 긁힘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꼭 예리한 무언가를 사용해 반복적으로 그은 듯한 모습이었다. 또한 어떤 상처는 이미 흐려져 흉터만 남았고, 어떤 상처는 붉은 기를 담고 있었다. 한 번에 걸쳐 만들어진 상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해일은 짧은 순간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엊그제 새로 만든 상처로 팔뚝의 가느다란 선은 총 여섯 개나 되었다.

“언제 생긴 상처입니까?”

“그냥 실수입니다.”

“아니. 언제 만든 상처예요?”

해일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음하며 제 이마를 짚었다. 순간 도운의 팔에 흐른 붉은 와인이 상처에서 터진 피처럼 보였다. 금방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하아……. 하…….”

실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손끝에… 상처가 사라졌었다.

병원에 갔고, 약을 제때 먹었고. 그래서…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다. 단시간에 효과를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혼자 멍청하게 그리 안심하고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했습니까. 왜…….”

해일의 목소리가 처절했다. 천천히 도운에게 팔을 뻗자 도운은 차마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해일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도운이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기 시작한 것은 병원에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손끝을 뜯어내는 행위가 자해라는 것을 의사의 입으로 확인받고 난 뒤, 해일이 그동안 도운을 위해 상처를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심적 안정을 위해 모든 걸 감내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도운의 자해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교묘해졌다. 도무지 보이는 곳에 자해할 수가 없어 숨길 수 있는 부위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은 서랍장 위에 장식된 만년필로 낸 상처였다. 날카로운 촉 끄트머리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제 팔뚝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진 것이었다.

‘아… 실수로 베인 거야.’

그는 당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듯 중얼거렸다. 그리 깊고 큰 상처도 아니었고, 꼭 종이에 베이면 생기는 것처럼 무척 엷고 피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자신이 인지하는 동안에도 날카로운 물건들로 팔뚝을 긁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어떤 상처는 금방 아물기도 했고, 어떤 상처는 조금 깊기도 했다.

도운은 막상 자해를 하고 나서는 해일에게 들키는 것이 무서워 급히 그 상처를 치료해 오고 있었으나, 흉터가 남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 딴엔 열심히 숨기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금방 들키고 말았다.

“…….”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그러했다. 해일은 애써 흔들리는 눈을 마주하며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 나은 줄 알았습니다.”

어리석었다. 낫기는커녕 효과를 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더 상처 입히고 말았다.

손끝을 뜯는 것으로 모자라 도구를 사용해 자해했다. 또한 그 흉터를 숨기기 위해, 손끝의 상처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시선이 잘 닿지 않는 팔 안쪽에 상처를 냈다. 실로 참담했다. 해일의 안에서 그를 지탱하던 무언가에 금이 가고 흔들리는 심정이었다.

해일은 또다시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은 여전히 도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무지, 그것이 해일의 죄이자 동시에 그가 받아야 할 벌이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

“왜 나한테… 아무것도 말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해일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어 도운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참 동안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해일은 도운이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차라리 제 탓을 하며 욕을 해도 좋으니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해일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지 못한 채 도운을 불렀다.

“…도운아.”

“이사님도.”

그 순간 도운이 해일의 말을 가로막듯 입을 열었다.

“이사님도 제게… 아무 말씀 안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운의 고개가 홱 들어 올려졌다. 마침내 마주한 두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한가득 차올라 있었다. 유리 조각이 되어 도운의 눈을 상처 낸 듯 그 주변이 붉게 충혈된 채였다.

“이사님도 저한테 전부 말씀해 주시지 않잖아요. 이사님도… 제게 거짓말하시지 않습니까!”

도운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기어코 부서지며 떨어졌고, 격해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도운을 보며 해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터진 큰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억울함에 소리치는 도운의 말 중 그가 거짓말했다는 대목에서 과부하가 걸린 듯 이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일의 손목을 털듯 떼어내며 거칠게 눈물을 훔쳐내는 도운의 행동에 멈춰 있던 해일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당황한 채로, 도운의 눈물을 정신없이 닦아주었다.

“도운 씨, 서도운 씨……. 나 좀 봐요. 응?”

“윽…….”

“그게, 그게 무슨 소립니까. 거짓말이라니요.”

해일이 물었으나 도운은 모두 체념해 버린 듯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게 괴로웠다. 자신은 어린애처럼 울고, 해일은 달래고. 또다시 그에게 빚을 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약해 보이기도 싫었고, 감정적으로 행동할 생각도 아니었는데.

한 번 임계점을 지나치고 나니 마음이 도무지 잠잠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불을 쏟아부은 듯 속이 더 들끓기만 했다. 여기서 그만해야 한다는 일말의 생각마저 불길에 잠식되고 말았다.

“문 전무님께 다 들었습니다. 취해서 돌아오신 그날 밤… 함께 계셨던 게 문 전무님이 아니셨다고요.”

울음을 집어먹고 이야기하느라 꼭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래서 스스로가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해일과 관련된 일은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왜 제게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그날 연락도 없이 늦으셔서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왜 거짓말까지 하셨습니까. 으윽, 그런데도 저는 이사님께, 흑, 비밀 하나 없이 모두 털어놔야 합니까? 으읏……. 저는 이사님한테 의지만 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제 치부까지 드러내면서요?”

도운이 다시 악을 썼다. 큰 소리를 내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방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려는 도운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눈물로 흐려진 얼굴을 손등으로 몇 번이나 훔쳤다. 하지만 이미 손이 흠뻑 젖어 무용지물이었다. 지금 제 모습이 얼마나 초라할지 상상이 되었다.

“왜 절 속이셨어요. 흐윽……. 다른 누굴 만나셨기에 거짓말까지 하셨습니까.”

꾹 다문 입술을 덜덜 떠는 도운을 보며 해일은 차마 눈물도 닦아주지 못했다. 이제야 도운이 가진 불안의 원인을 알고는 아차 싶었다.

최근 들어 도운이 해일의 행방을 자주 궁금해했었다. 전화 통화를 하고 있으면 혹시 약속이 생겼느냐고 묻고, 밤에 잠시 분주하게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디 나가는 것인지 불안한 듯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별생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을 해주었고, 그저 자신에 대한 도운의 관심도가 높아진 것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빗나간 추리였다. 도운은 해일이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걸 너무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조각난 퍼즐이 맞춰지듯 이제야 모든 흐름이 이해가 됐다. 문 전무가 회사로 찾아왔던 그날 도운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고 그렇게 바로 자신의 집으로 떠난 것이다. 집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짓말한 해일에게 화가 나서. 주머니 속 들어 있는 해일의 선물은 완전히 상대를 잘못 파악한 오답이었다.

“제가 아파서 할 맛이 떨어지십니까. 그래서… 전 안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이라도 만나셨습니까. 아님, 제가, 윽… 몸 팔고 다녔던 게 뒤늦게 싫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도운은 목 안을 꾹 눌러가며 숨을 골랐다. 해일이 무어라 변명의 말을 하기도 전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서러운 감정에 해일의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본인이 오래전, 그에 대한 마음을 애써 부정하며 상처 주던 그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을 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지금처럼 살이 많이 내린 도운에게 걱정의 말을 건네기 싫어서, 걱정하게 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면박을 주며 그 가녀린 몸을 거칠게 취했었다.

해일은 말문이 턱 막혔다. 목구멍에 커다란 공이라도 들어차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준 상처는 그가 차마 떠올리지도 못한 기억 저편에 수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도운 또한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섹스 한 번으로 악화될 몸이 아니었는데 해일이 도무지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으니까. 건강하지 못한 몸이 얼마나 싫은 것일까 싶어 그가 주는 음식들을 토하기 직전까지 밀어 넣었고 억지로 소화시켜 냈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는데. 그 모두 해일에겐 보이지 않을 미약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흑… 으윽…….”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도운은 엉엉 우는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모두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다른 사람 만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 그런 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미리 말씀이라도 하셨다면, 흐윽… 속상하긴 해도, 윽, 말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왜 제가 그걸 다 알도록 하십니까!”

숨이 모자라 헐떡이면서도 해일을 쳐다보며 할 말을 기어코 쏟아냈다.

평소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고, 꼴사납게 우느라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눈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난… 아무 잘못 없어.’

이제야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전부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고도, 어머니의 죽음도, 힘겹게 살아야만 했던 지난 삶도. 온전히 혼자 감내해야만 한다고 여겨 숨통까지 짓누르던 그 무게가 이제는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송곳을 주머니 속에 감춘다 해도 언젠가는 살을 짓누르며 존재를 드러낸다. 도운은 그것을 모르고 지난 일을 너무 쉽게 덮어둔 것이다. 제 허벅지를 찌르는 고통도 애써 모른 척했고, 그 반작용처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일마저 제게 거짓말을 한 이 상황에 도운은 도무지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자해 또한 무의식 속 충동의 발로였다. 그는 이젠 거리낄 게 없다. 치료 시기를 놓친 마음의 상처가 덧나 짓무르고 썩어나갔다.

“…….”

해일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움찔, 도운에게 뻗으려다가 멈칫하며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도운의 가쁜 숨소리만 안개처럼 퍼져 있을 뿐이었다.

대들고 소리치는 게 불쾌했나. 자존감이 깎인 도운은 본인이 화를 내면서도 제 주제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감을 가슴 한편에 두고 있었다. 정작 지르고 나니 저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해일을 보며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이렇게 된 이상 다 쏟아버리고 끝내고 싶었다.

“그날…….”

또다시 무어라 이야기하려던 도운은 침묵 끝에 입을 연 해일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술 마신 날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해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번엔 도운이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해일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술을 마셨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대체 왜……. 의문을 품고 되물으려는 순간.

“내가… 서도운 씨한테 어떤 상처를 줬는지 알아버려서.”

그날의 술자리엔 아무 상대도 없었다. 해일은 문 전무도, 다른 그 누구도 없이 혼자였다. 자신이 알게 된 참담한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고,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자기혐오를 주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했다간 제 과오를 타인에 의해 쉽게 위로받을까 봐.

“서도운 씨한테 첫 관계가 남자냐고 물었던 것… 기억합니까?”

“…….”

“그렇다고, 첫사랑이라고… 대답했었는데.”

그 또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는지 애써 목 아래로 숨을 눌러가며 이야기하느라 목울대가 몇 번이나 떨렸다.

해일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도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억이 났다.

“그 이후에… 내가 도운 씨의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후의 일까지, 모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따로 조사를 했었습니다. 내가 멋대로 도운 씨를 어떤 틀에 가둬 단정 지었었는데 그게 전부 틀렸다는 걸 알고, 너무, 괴로워서… 미안해서…….”

해일은 심장 부근을 아프다는 듯 쥐었다. 그의 흐려진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왜 난 아무것도 몰랐을까.’

해일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저를 끌어안고 반복하던 그 말이.

처절한 울음처럼 들려오던 그… 낮은 목소리가.

“이사님께선…….”

도운은 애써 울음을 그치려 했다. 하지만 주먹을 쥔 두 손은 여전히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제 제 수치마저 모두 아셨네요.”

참담함에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바닥에서 누군가 붙잡고 억지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온전히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제 거짓말도, 수치도… 모든 걸 아시는데, 저희가… 이런 상태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도운은 모두 버렸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공허하게 만들었다.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

“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확신이 안 섭니다.”

“도운아.”

“이사님 혼자 해결하고 결론 내버리시면… 저는 여기서 뭘 더 해야 합니까.”

바깥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가 까만 밤하늘을 물들이며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는가 싶더니, 바람이 일자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이 관계에서 제가 무슨 노력을… 해야 합니까.”

해일의 눈동자가 덩달아 흔들렸다. 올곧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도운과 하염없이 눈을 맞추면서도, 그 동공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연인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쥐어버리면 부서져 흩어질 것 같았다. 해일은 함부로 그를 붙잡을 수도, 손을 뻗을 수조차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이렇게……!”

“저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

“과거를 묻은 줄 알았는데… 저 자신을 묻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도운의 얼굴이 고통으로 구겨졌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책하는 게 싫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전부 서툰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이사님 눈치를 보게 되는데… 그게 너무 괴롭습니다.”

도운이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할 만큼. 그럴 만큼이나 도운을 괴롭게 했다. 해일은 자신의 과오를 다시금 확인했다.

“이사님은 이제 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으신데,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사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그냥 이렇게, 제 감정을 죽이고, 이사님만 바라보고 살면……. 하아. 모르겠어요. 우리… 이 관계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감정이 고조되며 또다시 도운의 숨이 가빠졌다. 애써 허공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어보지만 갈무리되지 않는다.

“제가 오해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확신이 안 섭니다. 저 스스로에게. …이사님도 제게 확신이 없으셔서 뒷조사도 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야, 그건…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오히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아니… 아니, 미안해요. 미안해요, 도운 씨. 내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런 짓 해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해일이 도운에게 손을 뻗었으나 도운은 거절하듯 시선을 피했다. 내밀어진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라도 한 듯 해일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이렇게 슬퍼하게 하려고 품은 마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며 그를 애써 붙잡은 것인데 제 품 속에서 슬퍼하기만 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아니… 해일은 잘 알고 있었다. 도운이 평범한 사람을 가장하며 상처를 숨겼을 때, 해일도 모른 척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이 따뜻하고 달콤하니 괜찮을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 지으면서.

“제가 이사님과 동등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우리 관계가 온전치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아무런 해소도 되지 않았고… 이러다간 정말 제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요.”

혼자 감내해 온 세월이 너무나도 길어 도운 또한 그 어둠 속으로 잠식되었고 끝내 도운의 자아에 종말을 맞이하게 했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턱, 턱, 그 소리가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해일이 고개를 저으며 결국 손을 뻗어 도운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해일은 도운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응어리진 가슴을 치는 행위조차 자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막을 방법을 몰랐다. 도운을 제 품에 안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놔주십시오.”

“…싫어요.”

“놔주세요, 이사님…….”

피어오르는 제 감정을 죽이며, 악몽처럼 다가오는 과거를 모두 잊으며 여기 남았다.

저를 미국으로 보내주려던 해일을 말려 스스로 이곳에 남았던 것이기에 도운은 해일의 곁에서 행복해야만 했고, 그를 위해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세뇌했다.

하지만 이젠 과분하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던 해일의 모든 호의가 거북함이 되어 속을 어지럽혔다.

이젠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도운아…….”

“죄송…해요.”

제멋대로 굴어서.

울먹이는 도운이 힘겨운 말을 애써 토하듯 뱉자 해일이 멈칫했다. 이 관계를 그만두자는 선언처럼 들렸다. 분명 그 의미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도운을 안았던 팔에 힘을 풀었다. 절대 놓고 싶지 않았던 도운을 서서히 놓아주는가 싶더니, 차마 온전히 놓지 못하고 그대로 도운의 손목을 붙들었다.

“내가… 서툴렀어요.”

입술만 달싹이던 해일이 마침내 소리를 냈다.

“…이사님…….”

그 순간 해일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처음으로 보는 그의 눈물이 가장 먼저 도운의 심장을 적셨다.

“미안해. …내가, 미숙했어요. 난 이런 방식밖에는 몰랐습니다. 윽……. 억지로, 네가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쥐여 주고, 내 옆에 두려고 했던 것들 모두… 이기적이라는 거 아는데, …알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잘못했어요.”

해일의 떨림이 손을 타고 도운에게로 전해졌다. 도운이 그의 우는 모습에 당황스러워할 새도 없이 해일은 제 솔직한 감정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랑이 뭔지… 몰랐어요. 사랑을 하는 게 처음이라, 윽… 나도 몰랐어요. 난 이런 방식밖에는…….”

해일의 눈에 실핏줄이 올라 새빨개졌다. 눈물이 줄기를 이뤄 볼을 타고 흘렀고, 그는 닦을 생각도, 아니 그럴 겨를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해일의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처럼 숨이 가쁘고 다급했다.

덩달아 도운도 감정이 마구 북받쳐 올랐다. 애써 내리누르려 했지만 마음이 어지러워 씨근덕거리는 숨만 뱉을 뿐이었다. 해일이 눈물을 흘리는 생소한 모습에 일렁이는 촛불처럼 마음이 타들어갔으나, 도운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번이 그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처럼 느껴졌다. 선택할 수 있는, 온전히 자신만 생각할 수 있는.

이렇게 생각을 확고히 하는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도운은 훌쩍이며 숨을 골랐다. 한 번 마음을 비우기 시작하니 안에 든 걸 남김없이 쏟아버리고 싶었다.

“죄송해요. 읏, 그런데… 돌아보니까 제가 없어요. 제 삶에 제가 없어요. 저도 수치를 알고… 아파할 줄도 아는데… 이사님 앞에선 모두 숨겨야 할 것 같고…….”

“내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도운 씨……. 앞으로… 고쳐 나가겠습니다. 이기적으로 내 생각 강요하지 않을게요. 뭐든 원하는 대로, 함께할 수 있도록, 내가 고치겠습니다. 내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해일이 떨리는 제 입술을 몇 번이나 물어가며 정신없이 말했다.

“날… 윽……. 날 옆에서… 지켜봐 주면 안 됩니까?”

“…….”

“제발…….”

“…….”

“날 놓지 말아요.”

심장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처참한 심정을 전했다. 그의 눈물에서 자라난 가시덤불이 도운의 가슴을 거칠게 파고들었으나 그뿐이었다. 아프다고 한들 앞으로 받을 고통보다는 덜할 것이다.

“이사님은 끝까지… 본인밖에 모르십니다.”

도운은 마침내 그의 손을 떼어내었다. 뿌리라도 내린 듯 도운을 거세게 붙잡던 팔이 힘을 잃은 듯 떨어져 나갔다.

“또 절 죽이고……. 이사님의 이기를 받아주길 원하십니까?”

“…….”

도운의 말에 해일은 허망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차 싶은 마음에 가슴이 멍해졌다. 고치겠다고 말하면서도 또 같은 짓을 반복하는 제 이기심에 황망해지고 말았다.

“구질구질하지만 저도… 저도 가진 거 없이 살다가, 이사님과 지내면서 너무… 좋았습니다. 넓은 집, 맛있는 음식들, 제가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생활들을 누리면서… 좋았습니다. 정말, 윽… 너무 편안해서…….”

“…….”

“편안해서 두려웠어요.”

도운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불안함이 항상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아무리 무언가를 손에 쥐어도 모래알처럼 빠져나갔고,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면 공허함에 심장이 텅텅 울렸다.

“이사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제가 잊고 살았습니다. 이사님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나 나약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마저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걸.”

“…도운아.”

“부모님을 잊고, 저 자신도 잊고, 그렇게 편히 그 품속에 살기에는……. 제가 무시한 과거가 너무… 깊습니다.”

결국 홀로 설 수 없으면 이 불안감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도운은 마구 도리질 치며 힘겹게 말을 이어갈수록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아지는 듯했다.

“절 지탱할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해일은 핏기가 가신 핼쑥한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 저 자신을 지탱할 것. 그건 외부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스스로일 수밖에 없다.

화마가 휩쓸고 간 가슴에 다시 기름을 뿌리는 듯 몇 번이나 도운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몸집을 불렸으나, 애써 참아 눌렀다. 해일은 손바닥에 제 손톱이 박힐 때까지 강하게 주먹을 쥐며, 질척하게 도운을 붙잡는 말들을 모두 목 안으로 삼키고… 울음이 묻은 말을 가느다랗게 내뱉을 뿐이었다.

“내가…….”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해일은 끝을 예감했다. 그건 도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공기가 서서히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창밖 거센 바람에 흔들리던 눈발도 어느새 가라앉아 보송한 눈송이를 이따금 내렸다.

“서로 조금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도운에게는 이제야 목표가 생겼다.

“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충분히 누리는 것.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혼자 생각해 보는 것.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해일 없이… 오롯이 홀로 서는 것.

“…….”

해일은 말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껏 가라앉아 허스키해진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저 한마디에서 도운은 느낄 수 있었다. 해일이 제 이기심을 내려놓고 도운의 뜻을 온전히 존중하려 한다는 것을.

도운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꽉 막혀 있었던 것 같았던 가슴이 이제는 후련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본 적 없었다. 이전까진 혼자 남는다는 불안감에 스스로 입을 막았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게 맞는 길이다. 도운은 홀가분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에 어딘가 모를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힘겨웠지만 애써 해일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 살짝 손을 뻗었을 때, 해일이 그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물어왔다.

“나랑…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해일은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도운이 대답할 때까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계속 그렇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도운이 무엇이냐고 묻듯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해일은 그제야 제 손을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일의 손가락이 헐렁한 셔츠 소매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도운은 시선을 내려 해일의 손이 팔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해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도운이 눈을 한 번 꾹 내리감았다.

해일은 도운의 머리칼에 살며시 입술을 누른 채 놀라지 않도록 느린 속도로 서서히 소매를 밀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운의 팔에 난 상처를 다시 확인했을 때.

“윽… 하아…….”

잦아들던 눈물이 다시금 흘렀다.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따스한 손이 상처 위를 감쌌다. 그리고 엄지로 그 위를 아프지 않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살 한가운데 난 이질적인 상처의 감촉. 제 이기심이 만들어낸 도운의 상처.

“아…….”

해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처럼 표정 지으며 한숨 같은 목소리로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무거운 심정에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가 뜨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울음 섞인 뜨거운 숨이 상처를 간지럽혔다.

도운 또한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꼭… 치료받아요.”

다시 고개를 든 해일이 꽤나 단호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겠습니다.”

“상처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네. 잘 알아들었어요.”

상처도, 몸도, 정신도 모두… 자신과 하던 치료는 계속해서 이어나가라는 것. 도운은 그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떤 약속을 하려는가 싶더니 제 몸 걱정이었다. 내년 초에 잡힌 수술을 그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헤어지자고 말하는 절 붙잡고 이런 얘길 하는 그에게 애틋함이 느껴졌다.

도운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일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해일은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숨길 줄을 몰랐다.

“당신이 다시 날 찾을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

“그러니까… 언제든지 좋으니까…….”

무섭도록 어둠을 집어삼키던 하늘은 제 가슴을 찌르는 별마저 잡아먹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짙은 어둠 속 별이 빛났다. 더 깊은 밤이 찾아올수록 제 존재를 과시하듯 반짝였다.

꼭 별이 쏟아져 내리듯 눈이 내렸다. 지붕 위로, 나무 위로, 두 사람이 걸었던 숲속 산책로 위로 폭신한 눈이 뒤덮였다.

크기가 다른 발자국은 어느새 흔적이 지워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불을 덮듯 조용히 잠을 재운다.

밤하늘이 해일처럼 일렁였다. 자정이 넘어가며 고요한 밤에 부서져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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