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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해 4 (22/29)

  3. 대해 4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도운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해일은 도운을 서울로 직접 데려가고 싶었지만 도운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대신 운전을 해줄 사람을 급히 별장으로 불렀고, 기사가 오는 동안 도운이 짐을 싸는 것을 조금 도왔다.

눈 내린 산길에도 기사는 그리 늦지 않게 도착했다. 해일은 도운 대신 그의 짐을 실어주었다. 괜찮다고 말리는 손길에도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에 도운은 차마 더 만류할 수가 없었다.

해일은 마지막까지 도운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어서 들어가시라고 말하는 도운의 입가로 흰 입김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는 두툼한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려 잠갔다. 그도 모자라 목도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매어주었다. 그새 도운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려앉은 것을 털어준 뒤에야 떨어지지 않는 손길을 거두고 그를 차에 태워 보낼 수 있었다.

“…….”

야속하게도 차창 속 도운은 고개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해일은 길을 나선 차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는데 말이다.

해일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온 뒤 침실 서랍에서 담배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가 재작년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두고 간 담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연스레 하나를 꺼내 들고 불을 붙였다. 가볍게 빨아들였다 숨을 내뱉으니 한숨처럼 연기가 흩어졌다.

자꾸만 그 상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도운의 팔뚝이 자신의 한 손아귀에 다 들어올 정도로 가늘었던 것도.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두려움에 덜덜 떨던 작은 어깨도. 맛있게 식사하던 모습도, 산책하던 것도, 목도리에 파묻혔던 조그마한 얼굴도. 끝없이 해일을 괴롭히듯 도운의 모든 것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해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두 개의 담배를 태웠다. 재떨이에 필터만 남아 구겨진 꽁초가 너무나도 처량했다.

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운과의 데이트로 나름의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던 별장은 이제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이 정적이 주는 서늘함이 해일의 뒷덜미를 아프게 에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운과 함께 있던 2층 공간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준비한 케이크와 음식들. 아까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에 오로지 도운만 없다는 것이 이질적이었다. 그는 침음하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고개를 살짝 젖히며 눈을 뜨자, 아까 도운에게 보여주었던 열린 지붕이 보였다.

유리창 위로 눈이 조금 쌓여 이젠 저 너머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곧 시설이 작동하면 깨끗해지겠지만, 해일은 어쩐지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주변에 떨어져 있던 리모컨을 눌러 지붕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아…….”

그가 짧게 탄식했다. 소파 위에 도운이 제게 준 선물 상자가 있었다. 해일은 허리를 숙여 주워 들었다. 머플러와 가죽장갑.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길 바란다며 건네는 도운의 수줍은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손을 뻗으면 허망하게 흩어져 사라질 것을 안다. 해일은 고개를 털며 상자를 챙겨 나왔다.

해일도 서울로 떠날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외투를 걸친 뒤 짐 가방도 챙겨 멨다. 도운이 준 선물은 한 손에 든 채, 별장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도운이 신기해하던 벽난로나 뚫어지게 구경하던 장식장도 두 눈에 담았다. 정확하게는 그 앞에 서 있던 도운을 곱씹은 것이다.

“…….”

테라스 창의 커튼을 치려 그 앞에 서자 유리창 위로 작은 얼룩 같은 것이 보였다. 도운의 손자국이었다. 도운이 바깥을 구경하며 짚었던 그 부분에 그의 작은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위로 손을 펼쳐 보였다. 제 한 손에 다 가려지고도 남을 작은 손. 하지만 피아노를 치던 아이답게 손가락이 곧고 긴 편이었다. 그는 차마 유리 위로 대 보지는 못했다. 이내 주먹을 쥐며 손을 거둬들였다.

시간을 갖자며 도운이 떠난 뒤에도 하염없이 도운 생각뿐이었다.

아마 당분간은, 아니…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해일은 계속 이 상태일 것이다.

시효가 없는 일.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평생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을 안아야만 했지만… 해일은 모두 감내하기로 했다. 제 고통은 도운이 받아온 것에 조금도 미치지 못할 테니.

“하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연인을 떠나보낸 이 순간만은 멀쩡한 척 평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심장에 엉겨 붙는 참담함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별장을 나와 차에 오르고도 해일은 쉽사리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핸들을 붙잡은 손 위로 제 머리를 기댄 채, 흐려진 표정을 밝은 달이 비추지 못하도록 가린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 * *

거의 불면의 상태로 몇 주를 보낸 해일은 수척해진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섰다. 출근을 위해 억지로 사람 행세를 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잠깐 머물렀던 별장을 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도운과 몇 개월씩 함께 생활하던 집을 보니 해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디에 시선을 두든 전부 도운이 보였다. 침실이든, 거실이든, 부엌이나 화장실이든. 그와 함께했던 흔적이 모두 남아 있었다.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간 도운은 여기 남은 물건들은 가져갈 필요도 느끼지 못했는지 주말 동안 한 번 들르거나 해일에게 연락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현실로 그러하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도운의 물건은 치우지 않았다. 그 집을 떠나 살지도 않았다. 혼자 그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으나 도운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 떠나 있을 수 없었다.

해일은 집에만 들어오면 나사 하나가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나마 회사에서 제 일을 하는 게 다행일 정도로, 그는 밤마다 술로 지새웠다. 어젯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울 속 초췌하고 푸석한 얼굴이 꼴사나웠다. 해일은 넥타이를 슥 당겨 매며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이사실로 올라가자 비서실 직원들이 바깥으로 나와 서 있었다. 인사를 받고, 간단하게 브리핑을 듣는 와중에도 일렬로 선 줄 가장 끝을 살폈다. 박 대리 옆에 있어야 할 도운은 당연히 없었다.

“…오후 회의에서 봅시다.”

해일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사실로 향하는 두 발이 무거웠다.

도운이 궁금했다.

잘 지내고 있을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불편한 곳은 없는지. 밥과 약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는 것인지. 도운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고 당장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럴 때 제대로 사진 한 번 같이 찍은 적이 없다는 게 그리 슬플 수가 없었다.

해일은 몇 번이나 차 키를 손에 쥐고 현관을 서성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숨이 막힐 때마다 도운의 집 근처로 찾아가려는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충동질하는 마음이었으나 오늘은 그 한계에 다다른 것이 빨랐다. 이제 출근한 참인데, 지금 바로 퇴근하고 도운의 동네로 차를 몰고 싶었다.

입술을 깨물며 코트를 벗어 걸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을 때, 제 데스크에 올라와 있는 우편 하나를 발견했다.

[서도운]

도운에게서 온 것이었다.

“……!”

해일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정확히 서도운이라고 적혀 있었고, 글씨체 또한 도운의 것이 맞았다.

그는 서류봉투의 끄트머리를 레터 나이프로 베어냈다. 안에 든 것은 세로로 긴 흰색 편지봉투와 작은 메모지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짧게 메모를 살핀 해일이 흰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사표가 들어 있었다.

지금껏 도운은 건강 악화와 수술을 이유로 병가 처리 되고 있었다. 해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혹여나 도운이 금방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돌아온다면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일찍 돌아오는 것도, 일을 계속하고 싶은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간 여러 일을 정리하느라 사표를 보내는 게 늦어졌고, 그래서 죄송하다는 듯이 짧은 쪽지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메모의 뒷장을 훑어보고 서류봉투 안 빠뜨린 것이 있나 살폈지만 더 이상의 전언은 없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딱 두 마디가 도운이 보낸 말 전부였다.

“…….”

그의 의도를 잘 알았다.

“이사님.”

김 실장이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오늘의 스케줄을 담은 태블릿이 글자로 빼곡했다. 그간 해일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해 연기했던 일들을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꽉 채워진 타임라인을 내보이며 김 실장이 해일의 표정을 살폈다.

“외부 일정이 두 건 잡혀 있어 오늘은 조금 분주히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회의는 회의록을 확인해 보시는 것으로 대체하실 수 있고, 착공식은 식순이…….”

김 실장이 현 상황에서 최대한 뺄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하는데 해일이 막아 세웠다.

“전부 이상 없이 참여할 테니 수정할 필요 없습니다.”

해일이 뻑뻑한 두 눈을 가볍게 문질렀다.

“나도 이제… 정신 차려야지.”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경고하듯 뱉은 말이었다.

“이거, 서도운 씨에게서 온 사표입니다. 처리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해일과 그가 내미는 봉투를 번갈아 보고는 곧장 받아 들었다. 그리고 별달리 묻는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웠다.

해일은 눈을 감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저 사표가 수리되면 이제 도운은 이 회사의 사람이 아니게 된다. 도운이 제 부하직원이 아니게 되는 것이고 저 또한 도운의 상사가 아닌 것이다.

자신과 그나마 연결되어 있던 관계 하나가 사라지는 일. 해일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도운은 확신이 생긴 것이다. 이 관계가 사라져도 괜찮다는, 그만의 확신.

해일은 그 확신에 매달리기로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것이 바로 확신에 매달리는 일이었다. 그가 서서히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해일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다. 도운이 원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전부 들어줄 것이다.

* * *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와요, 도운 씨.”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반갑게 도운을 맞이했다. 도운 또한 미소 지어 보이자 의사는 제 앞의 의자를 살짝 가리켰다.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크로스백을 벗어 옆에 내려둔 도운은 의사가 내미는 아이스티를 받아 한 번 홀짝였다.

“더워서 오는 길에 고생했겠어요.”

“그래도 병원 들어오니까 에어컨 덕에 시원해서 금방 괜찮아졌어요.”

“여름이 빨리 지나가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8월도 이제 막바지인데… 9월까지는 계속 더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장난스레 탄식하며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도운 씨, 지난 2주 동안 식사는 무리 없이 했어요?”

“음… 네.”

도운은 의사의 질문에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다사다난했던 2주를 돌아보았다.

“어젠 너무 피곤해서 저녁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쓰러져 자긴 했는데, 속이 불편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머리도… 안 아팠고.”

“가끔 하루 정도면 괜찮아요.”

안부를 묻듯 도운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 대답이 돌아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펜을 꺼내 차트에 간략히 기록하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상담 시작해 볼까요? 지난 상담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차근차근 얘기 나눠봐요.”

도운은 현재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 있었다.

그가 지나쳐 온 겨울과 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해일과의 크리스마스 이후, 도운은 어머니와 살던 자신의 집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첫날은 눈물에 빠져 살았다. 슬프거나, 절망적이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후련함에 가까웠지만 더 정확하게는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런 눈물. 한바탕 쏟아낸 다음에는 잠이 쏟아졌고, 그래서 도운은 지난 연말을 눈물과 잠으로 모조리 보내버렸다.

새해가 밝아오고 나서는 도착한 새해 인사 연락에 허겁지겁 답을 해주느라 바빴고, 그렇게 또 집에서 빨간 날을 전부 보낸 뒤에야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부동산이었다.

그는 새집을 알아보려 했다. 이 집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고 여태 살아왔는데 불편함쯤이야 그리 큰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여기선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집은 도운의 집착이 뭉쳐 있는 집합체였다. 이를 계속 끌어오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감당 못 할 집착을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것이다. 그걸 깨달았기에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섰다.

금전적 부분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자신이 그간 모은 월급과 청영에 갚았다 다시 돌아온 돈만 합쳐도 꽤 큰 액수였던 데다가, 해일이 제게 보상을 명목으로 보냈던 돈이 있었다.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 보상금을 모조리 쓸 생각은 없었다. 도운은 제 분수에 맞게 적당히 교통이 편리한 곳의 작은 신축 빌라를 찾아냈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계약했다. 전에 지내던 집보다 조금 더 넓었고 새 가구가 들어와 있는 빌트인 구조라 신경 쓸 것이 그리 많지 않아 좋았다.

계약 이후론 이사를 하느라 또 정신이 없었다. 새로 들어갈 집을 청소하고, 짐을 옮기고, 또 치우고 정리의 반복이었다. 그러는 동안 무리를 했는지 몸살에 걸려 며칠은 골골 앓아누워만 지냈다. 그래도 전보다 마음만은 훨씬 편안했다. 고작 3천 원 하는 약값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고,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컷 아파도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 아픈 와중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1월 한 달간은 그의 자유 시간이었다. 간혹 누군가가 보고 싶어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밤도 있었으나 그는 애써 털어버렸다. 상대도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예정되어 있던 수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 도운은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사직서를 써서 청영 이사실로 보냈다. 우연히 연락하게 된 박 대리님에게서 아직도 자신이 병가 처리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게 컨디션이 나빠 보인다는 해일에 관해서도 들었다.

일부러 뉴스도 보지 않고 청영 소식에 귀를 막았는데 결국엔 이렇게 해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생각보다 힘들어하는 모양이었다. 아닐 줄 알았는데. 자신 따위는 어쩌면, 금방 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는 얘기를 들으니 해일이 자신을 처절하게 붙잡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한텐… 치료받으라더니…….’

갈색 서류봉투에 제 이름과 청영의 주소를 적으며 도운이 중얼거렸다. 답답했다. 해일은 남 건강 챙길 때가 아니라, 본인 건강부터 신경 써야 했다.

도운은 서류봉투 속에 제 심정을 담은 편지라도 구구절절 써서 보낼까 했다. 이사님 건강 챙기시라고, 저는 곧 수술하고 회복할 것이라고. 하지만 관두었다. 자신이 제안한 일을 스스로 깨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보낼 수는 없어 짧은 쪽지를 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일도 부디 그걸 알아차려 주길 바랐다.

그 뒤로 도운은 입원해 이식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수술은 무척 성공적이었고, 도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한 상태로 퇴원할 수 있었다.

“어젠 외과 진료 있는 날이었죠?”

“네. 가벼운 검사라서 금방 끝나더라고요. 한… 20분 정도.”

“어제 우리 상담도 같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세미나 때문에 괜히 두 번씩 발걸음 하게 했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도운은 의사의 말에 부정하며 손을 내저었다. 병원까지 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날이 더워 이동할 때 지치긴 했지만 여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운은 신장 이식 수술 이후, 정신과 진료도 계속 함께 받아오고 있다.

해일이 치료받으라고 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도운 또한 제 상태를 깨달았다. 자해인 줄도 모르고 낸 상처를 보며 또다시 상처받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걸 막고 싶었다. 치료의 필요성을 깊게 느꼈다.

상담을 해주는 의사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도운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알았다. 그래서 도운은 그에게 속마음까지 모두 털어놓기도 했다. 부모님의 일과 해일을 좋아하는 제 마음에 대한 죄책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혼자 감췄던 응어리를 늘어놓으며 엉엉 운 날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후련했다.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른 기분이었다.

도운은 계속해서 회복해 나갔다. 어떠한 걸림돌도 없이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계획했던 대로 저 자신을 천천히 찾는 중이었다.

“…상담 주기를 늘려도 될 것 같은걸요.”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의사는 도운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주기를 늘린다는 것은 도운이 또다시 많이 회복했다는 의미였다.

“한 달에 한 번으로 조정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사흘에 한 번 보던 것이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그게 다시 격주로 늘었었다. 그런데 이젠 한 달에 한 번이라니. 제 상태가 좋아진 걸 스스로 체감하고 있던 도운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말요……?”

“많이 나았어요, 도운 씨. 정말 많이요.”

의사는 복용약도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며 차트에 알 수 없는 말들을 적어 내려갔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을 자주 못 보게 된다는 것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의사는 자길 안 만날수록 좋은 것이라며 도운을 토닥였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더 고생하셨어요.”

“그럼 다음엔 한 달 뒤에 봐요. 그땐 도운 씨의 마음이 더 편안해지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온화한 미소로 인사하며 진료를 마무리했다.

병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햇볕이 너무 세서 살갗이 따가울 정도였는데, 어느새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

도운은 병원 문 앞에서 가만히 팔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꽤 많이 오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비가 올 것이란 예보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렇게 순식간에 날씨가 바뀌어 비가 내리다니. 그는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그렇게 바깥을 바라보고 서 있던 도운은 병원 내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그렇게 물에 젖은 땅을 밟으며 길을 나섰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시간대여서 그런지 사람 없이 한적한 길은 홀로 우산을 들고 걷기 편했다. 이따금 제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를 빼고는 그렇게 큰 소음도 들려오지 않고 오로지 빗소리뿐이었다.

그러자 어쩐지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그는 잠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지난 8개월을 짧게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남들 다 일하느라 바쁠 시간에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편안한 삶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고요하고 잔잔함 속 도운은 제 나름의 속도에 맞춰 치열하게 살았다.

몸이 회복되고 난 뒤 배우고 싶었던 분야의 공부도 시작했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했으며, 날이 무척 좋은 날은 가끔 사람들을 구경하려 한강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짧게나마 어울려 놀기도 해봤다. 익숙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도운 자신이 생각하기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안녕하세요, 사장님.”

“일찍 왔네? 밖에 비 많이 오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젖은 헝겊으로 둥근 와인 잔을 닦고 있는 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도운은 우산꽂이에 우산을 접어 내려두며 넓은 홀을 지나쳐 들어갔다.

“오는 길에 좀 잦아드는 것 같긴 했어요. 곧 그칠 것 같던데요.”

“금요일 장산데 비가 오면 안 되지. 가서 가방 두고 옷 갈아입고 나와. 오늘 오백만 원짜리 와인 들여왔어.”

“아…….”

비싼 것에 놀랐다기보다 어쩐지 익숙한 금액에 도운은 잠시 멈칫하다 살짝 웃고 말았다.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젠 그 과거도 모두 괜찮은 모양이다.

“진짜 큰맘 먹고 산 거야. 구경시켜 줄게. 코르크 향부터 달라.”

“오백이나 하는 걸 살 사람이 있을까요?”

“여자한테 어마어마하게 잘 보이고 싶은 남자 한 명쯤은 있겠지. 원래 술장사는 남자들 허세 빌어먹어서 하는 거야.”

사장이 한쪽 눈썹을 가볍게 올렸다 내리며 말했다. 그의 장사 철학에 도운은 크게 웃음이 터졌고 사장도 덩달아 키득키득 웃었다.

도운은 안쪽 직원 준비실로 들어와 자신의 캐비닛에 가방을 넣었다. 준비된 검은 바지와 흰 셔츠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한 번 확인한 뒤 두 볼을 탁탁 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전에 일하던 와인 바에 다시 취직을 했다. 일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가벼운 잡일, 그리고 피아노 연주였다. 그게 8개월간 도운의 삶에서 가장 큰 변화였다.

피아노를 다시 쳐야겠다는 결심은 무척 사소한 일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도운이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을 때, 이젠 장기의 기능이 정상 범주로 들어왔고, 사고에서 다쳤던 다리나 손도 모두 완벽히 회복되었다는 말을 의사가 전했다.

그 때 도운은 멍하니 ‘피아노도 칠 수 있겠네.’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피아노의 꿈이었는데,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다니. 잊고 살았지만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깨달은 그 날은 약간의 일탈을 하며 술을 잔뜩 마셨고, 다음날 늦은 오후에 깨어나서는 곧장 이 와인 바로 달려왔다.

1년을 넘게 건반을 누르지 않았던 손가락인데 정말 하나도 굳지 않았다. 악보도 전보다 더 눈에 잘 들어왔고, 사장은 그간 뭘 하고 돌아왔기에 이렇게 날아갈 듯이 연주하냐며 물어올 정도였다.

도운 또한 그런 스스로가 신기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바뀔 수가 있구나. 그걸 깨달으니 무언가 행동하는 것에 더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렇게 다시 피아노를 친 것이 벌써 3개월에 접어든다.

“예약 리스트 변경 있나 확인해 봐.”

“네.”

도운은 리스트를 확인한 뒤 테이블을 세팅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을 시작했다.

10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 잠깐 내렸던 비는 완전히 그쳤고 그 덕에 열대야도 없는 시원한 여름밤이었다. 금요일이라는 환상적인 타이밍까지 곁들여 바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였다.

검은색 앞치마를 메고 설거지를 하던 도운은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

“어?”

도운이 예상치 못한 상대를 보고 놀라 가만히 굳어 서 있는 사이 열심히 칵테일을 만들던 사장이 화답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일행은 안 계신가요?”

“아… 어… 네.”

“지금 테이블 자리가 없어서, 바 괜찮으세요?”

사장이 손님을 바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도운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얼굴이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도운은 먼저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문 전무였다. 아는 얼굴인데 모른 척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미 얼굴을 봐버린 상황에서 숨을 수도 없었다. 아니 숨을 생각도 없었다. 언젠가는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요. 와, 여기서 다시 볼 줄은. 지금 너무 놀라서.”

문 전무가 횡설수설했다. 도운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그간 마주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그가 자주 오던 와인 바에서 일을 했으니 사실상 생각보다는 늦게 마주친 것이었다.

“퇴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다시 일해요?”

“네. 벌써 3개월 됐어요.”

“그래요? 와……. 요즘 일이 있어서 자주 못 왔더니… 너무 놀랐어요.”

그는 정말 많이 놀랐는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음, 해일이는 봤어요? 최근에.”

“아……. 아니요. 그냥…….”

도운은 말끝을 흐렸다. 잠깐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는 이 애매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 전무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신기한 일이긴 했다. 문 전무는 이렇게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해일은 한 번 마주치지도 못했다는 것이. 그와 자신의 생활 반경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도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기분에 잠식되지 않으려 했다.

“그럼 주문하실 때 다시 불러주세요. 앞에 손님이 많아서 조금 늦어질 수도 있지만… 제가 사비로 서비스 내어드릴게요.”

밀린 주문에 거의 모든 직원이 주방 일에 매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은 완성된 칵테일을 잔에 따르면서도 도운에게 오븐 속 요리를 꺼내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도운은 서둘러 주방 장갑을 끼고 노릇하게 구워진 가지 요리를 꺼낸 뒤에 따뜻한 접시로 옮겨 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도운을 살피느라 문 전무는 도운이 준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오늘 같은 날은 바텐더 하나 더 필요하겠어요, 사장님.”

“도운이한테 배워보라고 해도 영 소질이 없다고 못 하더라고요.”

“도운 씨가 만든 칵테일도 궁금한데.”

조용한 분위기의 바여서 그런지 바 테이블에 앉은 다른 손님들과 사장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문 전무에게도 잘 들렸다. 손님들과도 안면을 트고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신기했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도운은 거의 접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쪽엔 영 소질이 없다는 듯이 딱딱하게 굴었다.

지금 도운은 단골손님들과 가볍게 대화도 나누며 웃고 있었다.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옛날과는 달랐다. 사람이… 많이 밝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도운 씨.”

턱을 괴고 있던 문 전무가 도운을 불렀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덧붙였다.

“다시 만난 것도 반가운데 재회 축하주라도 한잔하면 안 되나?”

그는 도운이 대답할 새도 없이 사장을 불렀다. 그리고 기어코 바로 오늘 들여온 오백만 원 상당의 와인 샤또 페트뤼스를 구매해 사장과 도운에게도 한 잔씩 돌렸다. 이렇게 빨리 따게 될 줄은 몰랐다며 사장은 신이 났고, 도운은 사장의 장사 철학을 떠올려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요.”

“그럼 저희야 감사하죠.”

사장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운 또한 문 전무와 가볍게 잔을 맞댄 뒤 작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오랜만에 본 과거의 사람 때문인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내일은 도넛이나 먹으러 갈까.

* * *

―뭐 하냐?

“뭐 할 것 같은데.”

어두운 서재, 스탠드 라이트만 켜둔 채 서류를 살피고 있던 해일은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의 친구 문지원은 최근 이렇게 실없이 전화를 걸어 사람을 놀리는 데 맛이 들었다.

―일할 것 같아. 이 일 중독자야.

“알면서 왜 전화했어.”

해일은 피식 웃었다. 눈이 피로해졌는지 잠깐 눌러 감는 것에도 눈알이 뻑뻑하게 긁혔다. 그는 안경을 잠시 내려둔 채 한 손으로 양쪽 눈을 지그시 문질렀다.

문 전무의 말대로 해일은 워커홀릭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직원들이 눈치를 볼 정도로 일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그렇게 몸이 피곤할 정도로 일을 하지 않으면 자꾸 다른 생각을 하며… 도운의 생각을 하며 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안 바쁘면 나 좀 보지? 나 와인 한잔하고 있는데.

“오늘은 안 돼. 내일 출국이라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하고, 일도 마무리가 덜 됐어.”

―야. 남들 다 퇴근하고 잘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그럼 너도 들어가 잠이나 자라고 한마디 해주려는 때, 선수 치듯 문 전무가 말했다.

―여기 도운 씨 있어.

“…뭐?”

―오랜만에 만났다.

해일은 예상치도 못한 소리에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지금 둘이 같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소린가 싶어 놀라 묻자, 그건 아닌 듯 보였다.

도운이 일하고 있는 가게로 지원이 찾아갔다고 했다. 해일은 다시 몸에 힘을 조금 뺐다. 어쩐지 맥이 풀렸다.

―여기서 일하는 거 몰랐지? 응? 얼른 보러 와. 폐인처럼 살지 말고.

“됐어.”

사실 해일은 도운이 일하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알면 싫어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도운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생활 깊숙이 간섭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큼지막한 일들, 수술을 받았거나 병원에 다닌다거나. 이사를 하고 일을 구했다는 정도만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것도 몰랐더라면 아마 진작에 무너져 내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도운이 가슴에 사무쳤다.

도운이 있는 곳을 안다고 해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그러고 싶었지만 한 번 도운을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끌어안을 것 같아서였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찾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관계가 아니었다. 도운에게는 그저 우연히 마주친 상황일 뿐일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 관계를 잇게 되는 그 순간은 오롯이 도운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으니.

―못 만난 지 오래됐잖아.

“내가 찾아간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도운 씨 피아노 연주해, 여기서.

피아노.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해일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피아노를 친다고?”

―피아노 연주해 주는 바인데. 전에도 여기서 일했었거든. 아, 지금 앉았다. …들려?

수화기 너머로 작게 선율이 흘러왔다. 클래식을 연주하는지 해일에게도 익숙한 곡의 앞부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아랫입술을 깨물며 가슴속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내리누르고 있었다.

―잘 친다.

“…….”

해일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그만 전화를 끊어버렸다.

충동 조절. 그것은 자신이 아주 어릴 적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절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내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주었고, 외적으로는 타인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철저히 교육받았다. 해일은 그걸 잘 지켜왔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차 키를 챙겨 들었다. 현관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뛰듯 빨랐다.

도운만 엮이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 도운과 관련한 일이면 제 마음대로 된 적이 없다. 도운이 해일에게 그만큼이나 커다란 존재였다는 것을 그는 다시금 깨닫는다.

급히 차를 몰아 도운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가게로 찾아왔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 구석에 차를 세워두고는 천천히 걸어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운 색의 간판 위로 쓰여 있는 가게 이름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사람들로 인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해일이 문가로 다가가자 틈새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소리에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가 훤히 보였다. 홀 한가운데에, 검은색의 피아노를 두고 그 앞에 도운이 앉아 있었다.

피아노에 몸이 살짝 가리긴 했으나 모습을 볼 수는 있었다. 도운은 한눈에 보기에도 저와 함께 지낼 때보다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홀쭉하던 볼살이 하얗고 통통하게 올라붙었고, 붉게 물들어 생기 있어 보였다. 살짝 머금은 미소 또한 도운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연주하는 곡이 드뷔시의 달빛이라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이 타이밍에 해일은 가슴이 아릿했다.

건반을 누르며 몸을 작게 앞뒤로 흔드는 모습에 그는 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와 함께했던 지난 여름날, 애써 제 감정을 부정하려 해봐도 피아노 앞의 도운에게 정신이 홀려 빠져들었던 것처럼.

해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올랐다.

바에 등을 기대 도운의 연주를 구경하고 있던 문 전무는 문득 돌린 시선 끝에 해일이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해일은 눈치채지 못하고 도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곡의 연주가 끝나기 전, 다시 문을 열고 가게를 나갔다.

많이 변한 도운과 달리 여전히 이기적이었던 해일은 오늘의 일을 끝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 * *

봄과 여름이 빠르게 지나갔던 것처럼 짧은 가을이 지나 겨울도 성큼 다가왔다.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의 입가엔 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고, TV에선 올해의 낭만적인 첫눈이 내린다며 떠들어대기도 했다.

해일은 변화한 계절을 제대로 즐길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한 해를 보냈다. 청영 바이오에선 사활을 걸었던 신약이 FDA의 시판 허가를 받아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전자 또한 새 스마트폰 라인의 대성공으로 이례적인 붐을 일으켰다. 해일이 건드린 사업이 모두 좋은 결과를 내면서 청영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해일은 연말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일뿐이었다. 제 부하직원들은 일찍이 퇴근시켜 놓고는 이사실에 홀로 남아 서류를 검토하곤 했다. 날이 추워지니 더더욱, 도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불면에 시달리며 잠 못 드는 밤이면 도운의 따스한 품이 고팠다.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하는 수 없이 술을 마셨다. 차마 도운을 또 보러 갈 순 없으니, 제 몸을 운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해일은 도운과 달리 조금 살이 내렸다. 아무리 멀쩡한 척 살고 있어도 도운을 떠나보낸 공허함이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힘겨워했다. 일에 빠져 살고, 술을 달고 사니 그 얼굴엔 항상 피곤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늦게까지 남아 야근하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성화로 본가에서 오랜만에 함께 저녁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몇 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자식이 야속하다며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식사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형수님과 조카 아이들까지 미국에서 귀국해 모두 와 있다는 말에 껄끄러우면서도 차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직접 차를 몰고 본가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본가는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준비를 크게 하셨네요, 회장님.”

“너도 나이 들면 주책맞아져.”

사람은 몇 없는데 음식은 스무 명이 나눠 먹어도 남을 수준이었다. 아이들이 온다고 트리도 준비했다며 자랑을 해 보이시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된 손주들은 크리스마스트리 밑 선물 상자에도 큰 감흥이 없었다.

“네 형 자꾸 변호사를 부르던데. 보석 얘기를 꺼내는 것 같더라.”

“회장님.”

한창 식사가 진행되던 도중 해일의 어머니는 꺼내려던 용건이 이것이었다는 듯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해일은 단번에 식기를 내려놓았다.

“식사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식사 안 해도 형 얘기 안 하려고 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요.”

해일의 날카로운 반응에 그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형수와 조카들이 멈칫하며 눈치를 보는 듯했다. 해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가족 모임이 껄끄러웠다.

“내 배 아파서 낳았다고 나도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형수님이랑 조카들까지 앞세워서 제 동정심이라도 자극하려고 하셨습니까.”

정영일이 보석 허가 기준에 부합할 리 없다. 하지만 돈이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보석이 아니어도 방법은 있다.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가며 병원으로 빠져나오는 일도 빈번했다.

“이 이야기는 더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해일은 제 위치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이 집안에서, 이 청영 그룹에서 실세는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사장으로 승진을 앞둔 그의 의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 생긴다고 해도 제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정영일을 감옥에서 꺼내올 수 없을 것이다.

“형은 끝났고, 회장님은 남은 아이들이나 신경 쓰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는 차라리 잘됐다는 듯이 가족들 모두에게 경고했다. 어림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해도 제 마음이 그쪽으로 기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해일은 이번 기회에 제 입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해일은 괜히 얹힌 것 같은 기분에 더 식사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분위기 또한 가라앉아 여기서 다 같이 웃고 떠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 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에서 여러 개 꽂혀 있는 카드 중 하나를 가장 맏이인 조카의 접시 근처로 내려놓았다.

“크리스마스 선물.”

죄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마치 자신들이 더 죄인인 것처럼 고개 숙인 형수님과 아이들이 안쓰럽긴 했다. 따로 선물을 준비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해일은 긴말하지 않고 제 코트를 챙겨 자리를 빠져나왔다.

한 시간 만에 본가에서 나오게 된 해일은 곧장 청담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뒷문으로 들어가 주차한 그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담배를 태우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꽉 채워져 있던 담배 케이스엔 어느새 한 개비만 남아 있었다. 빈 담배 케이스를 채울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스케줄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막 입에 물고 불을 붙였을 즈음, 그의 손 위로 눈송이가 하나 떨어졌다. 손의 온기에 순식간에 녹아 물방울이 되었으나 또 다른 송이가 하나 더, 또 하나 더 떨어졌다. 그는 연기를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그 날과 같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벌써 1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이 거짓말인 것만 같았고 자신이 도운 없이 1년을 버텼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도운이 없는 사이 자신도 조금은 성장했을까. 스스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서 도운이 돌아와 칭찬을 해주든, 질타를 해주든 무슨 말이든 해주었으면 좋겠다.

“…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도운이 야속하기만 하다. 해일은 한숨처럼 흘러나가는 담배 연기를 눈으로 좇았다. 안개처럼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어쩐지 도운이 나타날 것 같다.

오늘도 제때 잠들기는 글렀군. 그가 생각했다. 이전에도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불면증과 더해지니 신경과민으로 더 두통이 심해졌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해소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신설한 문화재단의 준공식이 있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을 지원해 주고, 가난한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새 문화재단으로, 이는 도운의 영향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만약 도운이 제게 돌아온다면 이 문화재단을 선물해 주고 평생 아무런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며 살 수 있도록 해줄 텐데.

해일은 하루빨리 그 날이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또 도운이 보고 싶었다. 어서 들어가 위스키를 한잔하며 취해야겠다.

그가 주차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려 건물을 빙 돌아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저 멀리 대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기분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해일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시 조용해졌다. 제 착각인가 싶어 몸을 돌린 그는, 다시금 느껴지는 기척에 의아함을 느꼈다.

길고양이라도 돌아다니는 것인가.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대문 앞에서 계속 들려왔다.

그는 완전히 뒤를 돌았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따라 귓가를 거슬리게 했다. 왜일까.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문 근처로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씩 가까워지자 대문 틈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있었다. 작은 동물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꼭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설마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바라던 사람이 아닐까. 그는 그런 알 수 없는 예감으로 온몸에 전기가 내달렸다. 긴장으로 말단까지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문 앞에 선 순간.

작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해일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

해일은 문을 연 채로 몸이 굳어졌다. 도운이, 집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 이사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앉아 있던 도운의 고개가 홱 들렸다. 해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잠시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바로 도운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머쓱하다는 듯이 웃었다. 해일이 정문으로 들어갈 줄 알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집에 있었던 것인지 안에서 나와 꼴이 우습게 됐다.

“언제 오셨습니까. 오신 줄도 모르고 기다렸…….”

해일은 도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제 품에 도운을 가두고 팔에 힘을 주어 안았다. 익숙한 도운의 향기와 작은 몸, 온기가 착각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직접 만지기 전까진 환각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절 부르는 목소리는 환청인 줄 알았다. 도운이 없는 동안 몇 번이나 보고 들었던 착각들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정말 제가 바라던 도운이었다.

“…서도운.”

해일은 조심스레 도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네.”

“…도운아, 서도운.”

해일의 가슴에 얼굴을 폭 묻은 도운이 작게 대답하자 간지럽게 심장이 울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도운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렀다. 도운이 작게 웃자 해일의 전신으로 따뜻한 감정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두 팔로 도운의 몸을 으스러질 것처럼 조여 안았다.

“이사님. …담배 냄새 납니다.”

“아…….”

그리고 너무 몸이 조여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도운이 반쯤 장난을 담아 말하자 해일의 힘이 조금 풀어졌다.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그는 사과를 하며 다시 팔에 세게 힘을 주었다. 담배 냄새를 맡게 하는 것은 미안했지만 도저히……. 도운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꽉 옥죄어왔다. 도운의 등허리와 날개뼈를 정신없이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가 맞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 체온을 느꼈다. 한참을 끌어안으며 서로의 심장 소리를 나눴다.

“오랜만에 뵈어요.”

긴긴 포옹을 끝내게 한 건 도운의 인사였다. 오랜만에 본다는 말에 마침내 해일이 품에서 도운을 살며시 놓았다.

그제야 도운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자신이 입혀주었던 새하얀 패딩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도운은 그 날, 떠나는 날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추운데 왜 밖에서 기다렸어요.”

해일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추위로 빨개진 도운의 볼을 쓰다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운이 언제 올지 몰라 이 집을 떠나 산 적 없고, 비밀번호도 한 번 바꾸지 않았다.

도운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사님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었는데.”

“…….”

“저 돌아왔어요.”

그리고 보드라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의 광대 위로 길고 깊은 보조개가 패는 미소.

해일 또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도운의 두 뺨을 붙잡고 이마를 맞댔다. 고마워, 돌아와 줘서. 가슴속에 차오른 말을 채 뱉을 수도 없는 크나큰 감격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이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 * *

“…그래서 치료도 다 끝났고, 1년에 한 번씩만 검사받으면 된대요. 완전히 건강한 상태예요. 그리고 또…….”

두 사람은 함께 소파에 앉아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도운은 하고 싶었던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가 지난 1년간 겪어왔던 일들을 줄줄 늘어놓으면 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간혹 말을 보태는 식으로 긴 대화가 이어졌다. 해일은 계속해서 도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찬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손은 이제 따스해졌다.

“한강에 산책 나갔다가 놀러 온 대학생들이랑 친해져서, 같이 밥도 먹고 그랬어요. 청영 다니다가 퇴사했다고 하니까 질문이 막 쏟아지는데, 제가 원래는…….”

또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변화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해일도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놀라는 부분이 많았다. 달라진 도운이 낯설다기보단 너무 뿌듯하고, 기특했다. 해일이 없이도 도운은 제 삶을 저만의 속도로 잘 살아왔다.

“낙하산이라고 차마 말은 못 하고 얼버무렸지만요.”

도운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돌아온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문득 돌아보고 나니 모든 게 점점 마무리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도운은 최근 읽던 책의 시리즈를 모두 완독했다. 다니던 학원도 얼마 전 교재 한 권을 끝내면서 강의가 종료되었다. 자주 걷던 산책로 또한 연말까지 공사를 한다며 1월 1일부터 새로이 단장된 길로 찾아뵙겠다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갈 시점. 지난 월요일엔 정신과 상담마저 정식으로 종료되었다.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소견 덕이었다. 의사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고 말했지만, 도운은 그저 웃으며 허리만 꾸벅 숙이는 인사를 했을 뿐이다. 병원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의사와의 상담은 필요하지 않다.

꼭 생필품이 한 시기에 모두 떨어지는 것처럼 도운이 지난 1년간 해오던 활동들이 서서히 마무리되니 절로 자신에게 남았던 가장 큰 일, 마무리하지 않은 단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도운은 그때부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마음은 어떤지. 앞으로 해일과 지내며 또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부정하지는 않을 수 있는지. 지금까지는 애써 해일을 잊고 살아왔지만 그 며칠은 오로지 해일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그리고 문득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 그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각오가 되었다. 저 자신을 믿을 각오.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우울에 잡아먹히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할, 그리고 해일을 믿을 각오가 되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도운은 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사줬던 두툼한 점퍼와 목도리를 하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다. 정신없이 준비하다 문득 달력을 보니 자신이 떠나온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이런 좋은 날이 또 있을까. 도운은 작은 망설임조차 모두 버려버리고 바로 해일과 지내던 집으로 달려왔다.

“와인 바는 일주일 휴가 냈어요.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잘 했어요.”

해일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도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손이 제 머리칼을 쓸어오는 이 감각. 정말 오랜만이어서……, 도운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사님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사슴 같은 눈망울이 해일을 올려다보았다.

안 보고 싶었을 리가… 없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도운을 생각하느라 잠 못 이룰 정도로, 애써 잠든 꿈속에는 도운이 나올 정도로.

비서실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지 못했고, 바보처럼 그 빈자리를 보며 도운을 떠올리고 괴로워했다. 비서들이 그가 좋아하던 간식이라도 사 오는 날엔 하루 종일 달콤한 향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도운의 옷을 끌어안고 앓기도 하고, 그가 앉았던 피아노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 현관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도운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매일 환각을 보고 또 현실에 일깨워지며 그의 기대도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일상이 반복될지 몰라 두렵고 힘들었다. 도운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맴돌았다.

해일에게 지난 1년은 그랬다.

“…보고 싶었어요.”

해일이 힘겹게 대답했다.

“보고 싶었어요.”

“…….”

고통의 보상이라도 받듯, 그는 속으로 삼키던 말을 드디어 꺼내놓을 수 있었다.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

“매일, 매 순간 보고 싶었어.”

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너무나도 그리워서, 힘들게 잡은 이 손을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이, 제 손에 쥔 것을 놓아 버린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인데. 도운은 자신과 만나면서 당연하게 해왔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도운이 포기하는 그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해일은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운을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맞잡은 두 손이 절대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먼 길을 돌아 이어진 마음이 끊기지 않도록.

“아…….”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가까이 했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을 해일이 꾹 누르자 그 틈이 살짝 벌어지며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해일은 조심스레 아랫입술을 문지르다 조금 떼어내었다. 그리고 금세 다시 입술이 붙었다. 아주 조금 더 깊게. 서로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해일은 도운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야트막하게 피어오르는 간지러운 감각에 도운은 손을 움찔거렸다. 저도 덩달아 입술을 서툴게 어물거리며 해일의 아랫입술을 담았다.

“…….”

또다시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촉 소리가 났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도운은 멀어지는 해일을 붙잡듯 제 팔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작은 두 손이 해일의 어깨를 붙잡는가 싶더니, 목을 빼고 그의 입술 위로 가벼운 뽀뽀를 두어 번 날렸다.

“하…….”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두 사람은 급히 몸을 붙였다. 도운은 해일의 목에 팔을 감아 걸고 입술을 문질렀고, 해일은 고개를 틀어가며 도운의 입술을 간지럼 태웠다. 높은 콧대가 마구 문질러졌다. 맞붙었던 입술에 틈이 생길 때마다 더운 숨이 터졌다. 1년 만에 나누는 온기와 키스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성을 잃었다.

입술 사이로 해일이 혀를 밀어 넣었다. 한 손으론 도운의 등허리를 쓰다듬고, 다른 손으론 그의 부드러운 볼을 매만졌다. 치열을 문지르며 타액을 넘겼다. 과거 도운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입천장에 혀끝을 세워 살살 문지르자 어김없이 목에 감은 팔에 힘이 확 들어갔다. 그도 모자라 해일의 옷자락을 구길 듯이 꽉 쥐어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일은 힘을 조절하지 못해 도운을 소파에 눕힐 지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

입술을 떼자 도운은 숨이 모자랐는지 조금 버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해일이 도운의 등 뒤로 손을 대고 밀어 뒤로 기울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자제가 잘… 안 되네.”

그간의 공백, 그리고 마침내 진정으로 연결된 두 마음을 확인하느라 움직임이 격해졌다. 도운이 버겁다고 하면 언제든 멈출 생각이었지만, 지금 해일은 본인의 눈이 욕망으로 시뻘게진 줄도 모른 채 도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사님.”

도운은 절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내달리다가 이대로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침실로 가면 안 될까요?”

“…….”

의도를 담은 말에 해일은 다시 도운에게 달려들었다. 도운의 입술을 강하게 물어 그 틈새를 벌리고 들어갔다. 살며시 내미는 혀를 올가미처럼 잡아채 문질렀다. 순식간에 도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키스뿐이었는데 오싹오싹했고, 귓가가 이상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촉촉한 혀의 끄트머리를 서로 맞대고 꾹 누르기를 반복하며 해일은 도운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놀라 움찔한 것도 잠시, 도운은 해일의 허리에 제 다리를 꽉 감고 머리를 감싸며 계속해서 키스를 나눴다.

“아, 으응…….”

침대에 도운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더 깊게, 더 진하게 붙기 위해 입을 벌리며 갈망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검사하고 살피듯 모조리 훑었다. 도운의 볼을 문지르고, 예민한 귓불을 거침없이 쓸고, 머리카락을 넘기고 가볍게 쥐며 정신없이 얼굴을 매만졌다. 도운 또한 해일의 머리칼을 쓸고 쥐며 제게서 떨어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하아…….”

해일의 입술이 살며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도운의 턱 끝에 입을 맞추고, 그 가느다란 선을 그대로 타고 내려와 목덜미에도 진한 키스를 했다. 살짝 도드라진 목젖을 입 안에 담고 혀를 문질러 굴리자 목울대가 긴장으로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목과 어깨 사이의 살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흔적을 남기려는 듯 이로 긁고 또 그 위를 혀로 넓게 쓰는 행위에 절로 신음이 터졌다. 거칠어진 숨이 축축하게 젖은 몸에 닿아 너무 간지러웠다. 해일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위로 올라와 귓불을 살살 물었다.

해일은 귓바퀴를 입술로 더듬으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도운이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차례로 풀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드러나는 쇄골과 어깨, 가슴에 제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아아…….”

도운은 고개를 뒤로 젖혀가면서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전부 키스하겠다는 듯이 해일의 입술이 몸 구석구석까지 가닿았다. 그래서 아주 미칠 것 같았다. 동그란 어깨를 이로 살짝 물듯 긁는 행위가 이렇게나 흥분을 고조되게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단추를 모두 풀고 셔츠를 젖히자 도운의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해일은 거친 숨을 애써 누르듯 진정시키며 두 손으로 골반부터 옆구리를 살살 쓸어 올렸다.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야한 손길에 도운의 배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체를 보며 해일은 더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아, 이사님……!”

해일이 유두를 머금었을 땐 도운이 급히 해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따뜻하고 질척한 입 안으로 가슴이 빨려 들어가자 누가 뒤통수를 때리기라도 한 듯이 생소한 흥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으응… 으……!”

도운의 손이 해일의 어깨를 조금 밀듯이 힘을 주었지만 해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륜을 둥글게 혀로 쓸어 흥분만 고조시켰다. 어느새 꼿꼿하게 선 돌기에 입술을 댄 뒤 물결치는 것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두 입술로 번갈아 문질렀다. 그게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입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숨이 모자란 기분이었다. 도운은 소리를 참느라 목 안을 누르다 탁 터뜨리듯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해일은 도운을 올려다보았다. 가쁘게 숨을 내쉰 도운이 시선을 내리자 마주친 두 눈에 순식간에 배 속이 강한 성감으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해일이 혀를 빼고 뾰족하게 세운 채로 다홍색으로 물든 유두 끄트머리를 핥고 괴롭히고 있었다. 그 장면이, 그의 진한 눈빛이 너무나도 선정적이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버거워요?”

짐승이 그르렁대는 것 같은 물음이었다. 도운은 짧게 숨을 끊어가며 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더 빨아달라는 듯이 해일의 머리를 감싸 안자, 순식간에 입술이 가슴을 세게 빨았다.

“하아… 아아!”

타액으로 흔적을 남기며 입술이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축축하게 젖은 유두는 엄지가 꾹 누르며 괴롭혔고, 그의 혀는 마른 가슴에 닿아 다시 애무를 이어나갔다. 도운이 자지러지듯 몸을 떨었다. 오른쪽 가슴이 조금 더 예민하다는 걸 기억하는 해일은 입 안으로 주변 살까지 물어 담고 혀를 놀려 자극했다.

해일의 애무는 점점 아래를 향했다. 옆구리를 빨아들이며 붉은 자국을 남기고, 예민하게 들썩이는 배를 넓게 쓸었다. 그의 손끝이 붓질을 하듯 상체 여기저기를 침범했고, 입술이 배꼽 근처로 닿자 입에선 자제할 수 없는 신음이 새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으응, 으으… 읏…….”

상체가 자꾸만 들썩였다. 도운은 해일의 옷을 쥐었다가 손을 내려 시트를 쥐기를 반복했다.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제 가슴을, 온몸을 마구 긁고 싶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흥분에 휩싸인 몸 여기저기가 붉어졌다. 해일은 사랑스럽다는 듯 마구 도운의 입술을 문지르고 키스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일의 손이 조심스레 바지의 허리 부분을 잡았다. 네 손가락이 바지 틈새로 들어간 감각마저 짜릿해 성기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살짝 끌어내려 드러난 아랫배에 그가 혀를 세게 눌러 핥자 도운은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아……! 응, 이상해요. 읏……!”

예민한 감각이 모여 있는 곳, 그리고 수술 자국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해일은 같은 행동을 몇 번 더 반복했다. 수술의 흔적 위로 뜨거운 입맞춤을 하며 서서히 바지 버클을 풀어 내렸다.

“잠시… 잠시만요.”

도운이 헐떡였다. 해일은 바지를 완전히 벗겨 침대 아래로 던진 뒤에야 응? 하고 되물었다.

“아……!”

도운의 두 다리를 쥐어 제 어깨에 올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틀어 도운의 발끝부터 입을 맞추었다.

“하지 마세요……!”

도운은 해일이 발목을 꽉 쥐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가락을 구부리며 부끄럽다는 것을 표현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해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엽게 말린 발가락을 핥고 발목에 키스했다.

“아으…….”

점점 상체를 숙여 종아리 안쪽을 질척하게 빨며 내려와 허벅지까지 입술을 옮겼다. 그의 입술이 지나온 자리는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춥, 추웁 하며 민망한 소리가 나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말랑한 허벅지살을 입 안에 굴리고 자극하는 해일의 행동에 팔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아… 아아… 응…….”

이상해.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도운은 감전된 듯 저려오는 손을 어찌할 수가 없어 그저 시트만 쥐었다.

“도운아…….”

해일이 도운의 허벅지에 입술을 묻고 중얼거렸다. 나른한 한숨 같은 목소리. 아찔하게 눈이 감겼다. 도운은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젖혔다.

속옷 아래 도운의 성기는 이미 발기한 상태였다. 속옷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성기 끄트머리에서 프리컴이 새기 시작해 동그랗게 젖어들고 있었다. 해일도 그 상태를 모르지 않았다. 그곳에 닿기 전, 다른 부분을 아주 공들여 애무했다.

오른쪽 허벅지를 물던 그가 고개를 틀어 왼쪽을 향하면서, 일부러 입술로 속옷 위를 짧은 순간 스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왼쪽 허벅지를 콱 물자 허리가 크게 움찔거렸다. 허억……. 도운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도무지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을 수가 없다.

소리라도 들리지 않으면 좋겠건만, 게걸스럽게 속살을 빨아올리는 마찰음이 한순간도 멈추질 않았다.

“아, 아아, 안 돼……. 읏!”

해일은 속옷 위로 입술을 올렸다. 입을 벌려 속옷과 함께 도운의 성기를 입술로 물었다. 손으로 만지는 것도 아니고 입에……. 순식간에 타액에 젖은 속옷이 성기에 착 달라붙었고, 그 위를 뭉근하게 만지는 손길에 도운이 해일을 말리려 했다.

“으응……!!”

하지만 채 그러기도 전에 해일이 속옷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단번에 도운의 성기를 입 안에 담고 말았다.

도운의 허리가 크게 튀었다. 그 탓에 성기가 해일의 입 안을 찔렀다. 그는 버겁지도 않은 모양인지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귀두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안 돼, 하지 마세요……. 아으응… 이사님……!”

해일이 자신의 성기를 입에 넣은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서 이런 애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도운이 경악과 흥분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해일은 혀를 길게 빼 기둥을 핥고 귀두 밑 틈을 쓸었다. 다시 입 안 가득 담고 거세게 빨아올리자 도운에게서 높은 음역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지러지다 못해 발작할 것 같았다. 처음 받아보는 애무와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어쩐지 눈물이 흘렀다. 도운은 훌쩍이며 다리를 조였다. 그 탓에 제 허벅지 사이에 해일을 가두게 되고 말았다.

“흐아아… 아아……!”

해일은 계속해서 고개를 움직였다. 해일의 오돌토돌한 입천장을 긁고 들어가는 도운의 성기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도운의 음낭을 쥐고 굴리며 함께 자극했다. 해일을 말릴 정신도 성감에 타버려 어느새 재가 되고 말았다.

해일은 혀를 길게 빼서 귀두의 파인 틈을 쑤시듯 자극했다. 씁쓸한 맛이 입에서 느껴지는가 싶더니 곧,

“하아… 아아응……!”

도운이 전신을 부르르 경련하며 해일의 입 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아…….”

도운은 입을 벌린 채 뜨거운 숨을 뱉으며 정액을 길게 내보냈다.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해일은 도운이 전부 사정할 때까지 성기를 물고 있다가 그의 몸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입을 떼었다.

도운은 분명 사정을 마쳤음에도 아직 사정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안 그래도 모자란 숨에 울음이 섞여 더 가빠지기 시작했다.

해일은 티슈에 정액을 뱉어냈다. 사정의 여운을 길게 느끼는 도운이 몸을 웅크리듯 말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가가 그의 뺨에 도장을 찍듯 키스했다.

“죄송해요, 으읏…….”

“싫었어요……?”

해일이 도운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솜털이 난 둥근 이마에 다시 쪽, 입을 맞춰주자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도운이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이상해…요.”

“…….”

이 귀여운 연인을 어떻게 하면 모두 품을 수 있을까. 그의 온몸을 물고 핥으며 애무하고 성기까지 집어삼켰음에도 아직 부족했다. 해일은 오히려 더 갈증이 일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탓인지 몸을 더 깊게 탐하고 싶은 욕심이 먹구름처럼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그가 참지 못하고 도운의 쇄골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살갗이 예민해진 도운은 작은 입맞춤에도 시트를 부여잡으며 떨었다. 이렇게 자지러질 정도로 잘 느끼는 예쁜 몸을 그간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하고 괴롭혔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과오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성심성의껏 유두를 빨아들였다.

“하아… 아……. 응…….”

해일은 입을 떼지 않은 채로 제 셔츠를 벗었다. 근육이 잘 잡힌 상체가 순식간에 드러났다. 팔을 빼고 바닥으로 셔츠를 내던지는 동작에 근육들이 성을 내듯 꿈틀거렸다.

혀를 내밀어 돌기를 문지르다가 짧게 후 바람을 불면 도운이 어깨를 확 움츠렸다. 낯선 감각이 계속 이어졌다. 해일은 급히 바지 벨트를 풀어 내렸다. 전부 벗을 정신이 없어 속옷을 끌어 내려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내 보였다.

“아, 이사님… 으…….”

해일은 도운의 성기와 제 것을 한 손에 쥐고 위아래로 쓸기 시작했다. 팔뚝만 한 해일의 것이 핏줄을 세우며 도운의 성기에 문질러졌다. 다른 자극 없이 오로지 그 뜨거운 감각만으로도 다시 힘을 받아 일어서기 시작했다.

끝이 젖어 정액이 고여 있는 도운의 것이 야해 해일은 엄지로 그 위를 빠르게 문질렀다. 성기가 젖은 손아귀 안에서 점점 질척해져 갔다. 잠시 손을 뗄 때면 두 기둥 사이가 살짝 멀어지며 끈적한 프리컴이 실처럼 늘어졌다. 그 광경이 해일과 도운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는 급히 서랍에서 젤을 꺼냈다. 손에 한가득 부어 적신 뒤 바로 도운의 다리를 활짝 벌리며 중지와 약지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꽉 다물린 구멍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관계를 하지 않은 지 무척 오래되었다. 오랜만의 삽입에 도운은 긴장되어 엉덩이에 자꾸만 힘을 주었다. 하지만 생경한 감각으로 눈물 쏟게 만드는 애무보다 차라리 빠른 삽입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이전에 하던 섹스처럼, 뒤를 풀어 그의 두꺼운 기둥을 무자비하게 박아 넣는…….

“하읏, 읏, 우읏…….”

손가락 끝이 구멍을 벌릴 듯이 눌렀다. 하지만 긴장으로 꽉 다물린 구멍은 쉬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일이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쥐고 쓰다듬었다. 가볍게 흔들고 눌러주며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말캉한 엉덩잇살 위를 손톱으로 살짝 긁으니 간지러웠는지 도운이 움찔 떨더니 힘을 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일이 파고들었다.

중지 한 마디가 안에 들어갔다. 안쪽이 뻑뻑해 더 진입이 어려워 엉덩이 사이로도 젤을 넘치게 부었다. 다시 손을 빼서 몇 번 더 입구를 문질러 누른 뒤 서서히 밀어 넣었다. 이번엔 조금 더 깊게 삽입할 수 있었다.

“흐으으…….”

앞뒤로 천천히 문지르다가 그가 익숙해진 것 같다 싶을 때 약지를 함께 삽입했다. 다시금 엉덩이가 훅 조여들며 손가락을 조이다가 해일이 살짝 구부려 내벽을 누르자 애써 힘을 빼는 게 느껴졌다.

울먹임과 신음이 섞였다. 뜨겁게 달궈진 안쪽 점막이 이리저리 쓸리고 눌릴수록 숨이 더 가빠졌다.

“읏…….”

자주 관계를 가지던 때처럼 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전립선 부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어도 예민해진 몸이 더 몸을 조이기만 할 뿐 풀리는 게 아니었다. 그걸 도운 또한 느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웃, 흐윽…….”

“도운아.”

눈물을 흘리는 도운을 보고 해일이 손을 잡아 뺐다. 도운은 손등으로 눈물을 급히 훔쳐 냈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꼭 삽입할 필요는 없어요.”

해일이 도운을 천천히 달랬다. 마음 같아서는 도운을 더 깊게 품고 집어삼키듯 사랑하고 싶었으나, 그가 괴로워한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의 눈물을 혀로 닦아주며 해일이 다시 키스했다. 다 괜찮다며 도운을 안심시키려 했다.

“싫은 게 아니에요.”

“…….”

싫지 않다는 말에 도운을 한 번 더 사정이라도 시켜주어야 하나 해일이 생각한 찰나, 거의 속삭일 듯 작은 목소리로 도운이 중얼거렸다.

“빨리… 이어지고 싶어…….”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울먹이며 도운은 손을 뻗었다. 제 손끝에 해일의 성기가 닿자, 조금 놀란 듯 움찔거리며 잠깐 피했지만 다시금 그 두꺼운 기둥에 손을 올렸다. 그의 것은 데일 것처럼 뜨겁게 맥박치고 있었다.

“아… 서도운.”

해일은 갑자기 잡힌 성기에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성감이 몰려왔다. 꿈틀거리며 조금 더 크기를 키운 성기가 도운을 조금 더 겁먹게 만들었으나 해일은 이제 멈출 수 없었다.

“하아… 아프면 이야기해요.”

낮게 경고하듯 말한 그는 도운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오금에 손을 넣어 밀자 엉덩이는 절로 공중으로 떠올랐고, 해일은 그대로 상체를 숙여 보드라운 엉덩이 사이로 얼굴을 박았다.

“아, 으, 아……! 하악!”

구멍 위를 핥는 말캉한 감촉에 도운이 목을 빼고 울었다. 넓게 쓸었다가 뾰족이 찔러오는 미끌미끌한 살덩이. 제 착각이 아니라면 엉덩이 사이에 닿아 있는 것은 바로 해일의 혀였다. 그는 반쯤 돌아간 눈을 하고는 도운의 구멍을 게걸스럽게 빨았다.

“허으으, 흐으…….”

주름을 핥고, 그 틈새를 미끄러지듯이 파고들었다. 구멍 속으로 혀가 처박히면 그 주위는 해일의 입술이 문질러졌다. 그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뒤에 입술이 닿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행위 자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낯설었다.

츠읏 소리를 내며 뒤를 애무하는 그를 말리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단어 하나를 만들어내기도 역부족이었다. 도운은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헉헉거리는 신음을 간신히 흘릴 뿐이었다.

도운의 성기 끄트머리에서 실 같은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애무가 얼마나 자극적인지 그는 차마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전신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한참 얼굴을 파묻던 해일이 도운의 상태를 확인하며 고개를 들자 구멍이 빠끔 벌어졌다. 좁은 틈새로 붉은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해일은 더 깊게 생각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벌어진 구멍 사이로 젖은 제 손가락을 다시 밀어 넣었다.

“아아……!”

두 손가락은 안에서 가위질하듯 내벽을 벌렸다. 갈고리처럼 구부려 미끌미끌한 젤을 치덕치덕 바르고 점막을 자극해 가며 손가락의 개수를 하나 더 늘렸다. 그는 엉덩이와 허벅지를 길게 핥아가며 손을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엉덩이가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리며 녹은 젤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겠군. 해일은 바로 콘돔을 꺼냈다. 거칠게 포장을 뜯어 성기 위로 씌우는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급했다. 그 또한 거친 숨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도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늑대의 눈과 다름없었다.

해일이 도운의 허벅지를 당겨 안았다. 꺼덕이며 잔뜩 성을 내는 성기가 도운의 아래를 툭툭 건드렸고, 도운은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아, 아아…….”

매끈한 콘돔을 쓴 성기가 엉덩이 사이를 쿡 찔렀다. 그새 다물린 구멍 위를 몇 번 문지르는 감촉에 도운이 서서히 힘을 뺐다. 해일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으읏, 으……! 아으응!”

마침내 구멍이 서서히 벌어지며 두꺼운 귀두를 천천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고작 끄트머리뿐이었는데도 한계까지 벌어지는 아래가 너무 아팠다. 전신의 솜털이 쭈뼛 서고 고통이 비가 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는 기분이었다.

해일은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시 꾹 힘을 주어 안으로 조금 더 진입했다.

“하아, 하아아…….”

“괜찮아? 응?”

“으응, 네. 흐윽… 괜찮아요. 좋아요…….”

“아…….”

같은 행위를 몇 번 반복하자 길이 조금씩 열렸다. 고통과 큰 성기에 익숙해진 몸이 해일을 더 안으로, 안으로 품고 있었다.

반 정도 들어갔을 때, 도운은 아랫배를 감싸며 몸을 확 웅크렸다. 장기를 밀어내며 명치까지 파고든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행히 해일이 거기서 진입을 멈춰주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몸이 무리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다.

시트를 쥘 힘도 남지 않아 널브러진 도운의 팔을 해일이 끌어와 쥐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도운의 젖은 눈가에 입술을 내리며 조심스레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응… 아…….”

“하아…….”

내벽이 너무 조여와 해일의 허리가 징징 울렸다. 넣었을 땐 막혀 있는 듯한 내부를 뻑뻑하게 애써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이었고, 허리를 빼면 배 속 모든 것이 함께 쓸려 나올 것만 같았다.

“윽, 흐읏! 흐응… 아, 아앗……!”

간절히도 원하던 해일과의 결합이었다. 아래를 가득 채운 성기가 몸을 쪼갤 듯한 고통을 주었으나 그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가슴에 차오른 울컥대는 감정에 도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해일 못지않게 도운 또한 그가 보고 싶었다. 내면의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그것 하나만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해일과 진한 애정을 나누고, 깊이 사랑하고 싶었다.

“으응, 으흑……!”

“하, 윽…….”

해일은 바닥난 인내심으로 제 허리를 턱턱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픔에 신음하던 도운은 어느 순간 흥분에 찬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옆으로 흘러내렸다. 해일은 입술로 그 흔적을 좇았다.

부어오르기 시작한 전립선 부근을 귀두로 콱콱 누를 때마다 도운의 눈이 뒤집혔다. 해일은 각도를 달리해 가며 추삽질을 계속했다. 도운의 벌어진 다리를 마구 쓰다듬고, 정신없이 가슴을 빨았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허공에서 흰 다리가 발발 떨리고 흔들렸다.

해일은 제 허리에 도운의 다리를 감게 하고 상체를 숙였다. 빠르게 파고든 뒤 아주 느릿하게 내벽을 휘젓고 예민한 부분을 죽죽 긁으며 빠져나가는 성기에 도운은 흥분감에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아아, 아, 아응, 으… 아응, 아!”

“도운아… 하아, 윽…….”

“이사님, 읏, 으응……! 으읏, 아, 아……!”

도운이 위로 팔을 뻗었다. 해일의 목에 팔을 감싸 꽉 끌어안으며 두 사람은 다시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좋아요, 흐으… 좋아요, 이사님. 아… 아, 아!”

예민한 곳을 거듭 자극받은 도운은 자제를 모르고 소리를 높였다. 해일은 그의 몸 이곳저곳에 정신없이 입술을 대었다. 이마와 볼, 콧잔등, 가슴 위로 입술을 내리던 해일이 도운의 팔 안쪽에 제 볼을 문질렀다.

“읏, 으응!”

이젠 상처가 모두 사라진 팔을 보며 그 위로 입을 맞췄다. 몸이 녹진하게 풀린 도운은 해일에게 매달리며 울었다. 눈물을 후드득 떨구며 내벽을 찔러 올릴 때마다 허리를 비틀고 자지러졌다.

“하아, …사랑해.”

“응, 아아, 아… 아……!”

“사랑해…….”

“으읏, 흑, 흐윽…….”

정신없이 뒤흔들리던 도운은 해일의 진심 어린 마음을 들으며 먼저 사정에 이르렀다. 성기가 움찔거리며 배 위로 희뿌연 액체를 뱉어냈다. 해일은 손끝으로 정액을 부드럽게 문지르다 아랫배를 꾹 누르며 스퍼트를 올렸다. 그리고 따뜻한 도운의 몸 안에서 마침내 절정을 맞았다.

* * *

긴 후희를 느끼는 도운에 맞춰 해일은 정사가 끝난 뒤에도 도운의 전신을 쓰다듬고 애무했다. 처음엔 부끄러워하며 피하던 도운은 끈질기게 붙어오는 해일에 끝내 포기하고 제 몸을 맡겼다.

떨림이 잦아들었을 즈음 해일은 도운을 들쳐 안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함께 들어가 갑작스러운 섹스로 경직됐을 근육들을 천천히 이완시켰다.

해일의 품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도운은 제 유두를 건드려오는 손길에 눈을 힐끔 떴다.

“간지러워요.”

하지만 해일은 부위를 옮겨갔을 뿐 만지는 행위를 멈추진 않았다. 도운은 물 표면에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다가 나지막이 운을 떼었다.

“이사님도…….”

“네.”

“이사님도 제가 입으로 해드렸을 때… 그렇게 좋으셨나요?”

도운이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순수함이 그득한 눈동자를 보고 해일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이 해줬던 오럴이 무척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좋았어요? 또 해줘요?”

“지, 지금은 더 나올 것도 없습니다…….”

해일에게 재차 물리고 빨린 성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손아귀에서 쥐어 짜이며 종내엔 정액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묽은 것만 찔끔 흘렸다.

도운은 이것이 진짜 연인들 간의 섹스라는 것을 느꼈다. 사지가 절절 끓다 녹아내리는 듯한 흥분감은 실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기에, 생소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해일은 도운이 뭘 좋아하는지 이제 더 잘 알게 되어 앞으로 많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깃털 같은 날들이 남았으니. 그는 물방울이 맺힌 매끈한 도운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꽉 끌어안았다. 드러난 뒷덜미에 입술을 대고 이리저리 문지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동안 힘든 일은 없었습니까.”

“음…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전부 견뎌내고… 돌아왔어요.”

도운은 작지만 단호한 말씨로 말했다. 그는 정말 많이 성장했다. 해일의 예상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나 그를 놀라게 할 정도로.

“이사님은 없으셨습니까.”

“…많았어요.”

“어떤……?”

도운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해일은 도운의 뺨 위로 깊게 입술을 누른 뒤 대답했다.

“서도운 씨가 보고 싶어서 매일 힘들었어요.”

도운과 달리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해일의 말투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쩐지 좀 수척해지신 것 같습니다.”

“잘 있는지, 뭘 하고 지내는지, 아픈 곳은 없고 잘 챙겨먹는지……. 매일 네 생각에 잠을 못 잤어.”

도운이 팔을 살짝 뒤로 해 해일의 뺨을 어루만졌다. 해일은 도운의 손목을 붙들고 제 뺨을 비볐다.

지나온 네 모든 계절이 궁금해. 해일이 속으로 생각했다.

함께하지 못한 채 비워둔 기간이 아쉬웠으나, 도운을 다시 만나고 나니 알았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상처를 준 만큼 고통을 맛보고, 상처를 받은 만큼 회복할 시간이. 이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아마 평생 서로의 괴로움을 마음속에 떠안은 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보고 싶으셨으면… 한 번쯤은 보러 오셨어도 괜찮았을 텐데.”

“…….”

그 말에 해일은 딱 한 번, 도운을 찾아갔던 여름날 밤을 떠올렸다.

“한 번도 안 오셨습니까?”

“…음.”

해일이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이자 도운이 햇살처럼 살포시 웃었다.

“전 이사님 뵈러 갔었는데.”

“…뭐?”

“이사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회사 근처로 보러 갔었어요. 역시 아직 제가 더 이사님을 좋아하나 봐요.”

도운이 눈을 내리깔며 서운한 척 시늉했다. 조금 부어오르는 볼에 해일이 당황하며 도운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아니, 아닙니다. 실은…….”

그가 이실직고하려는데, 그 순간 도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도운은 그날 해일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아노 연주를 하던 도중 시선 끝에 어렴풋 해일이 보였다. 피아노와 사람들에 가렸지만, 일부분만 보고도 해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주했다. 그러자 해일도 머지않아 다시 가게를 떠났다. 도운은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시선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도운은 그것이면 되었다. 자신이 계속 자아를 찾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사님… 실은.”

조금 놀리려고 그런 것뿐인데 당황한 모습을 보니 도운은 기분이 좋았다. 사실대로 고하자 해일이 도운의 귓불을 깨물며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감각에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나 곧 승진해요.”

“네? 정말요?”

소식을 전하자 도운이 조금 놀라더니 곧 잘됐다며 기뻐했다.

“그래서… 이젠 정말 이사라고 부르긴 좀 애매한 상황이 됐네요.”

“아…….”

사장이라는 직함이 따로 생기지만 그가 원하는 호칭은 그런 게 아니었다. 도운 또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편하게 불러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나중에라도 도운 씨가 준비되면…….”

“…형.”

“…….”

“알겠어요, 형…….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요?”

해일은 잠시 머리가 굳어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운의 말뜻을 이해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도운은 정말 보통 각오를 하고 돌아온 게 아닌 모양이다.

품속 작은 연인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해일은 도운의 몸을 들어 올려 저와 마주 보게 돌려 제 허벅지에 앉혔다. 그리고 당황한 틈을 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또 해봐요.”

“완전 부끄러우니까 진짜 가끔만 부를래요…….”

도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자 해일은 그 위로 뽀뽀하며 간지러운 애정을 쏟아내었다.

해일과 도운은 모든 갈등이 해소된 바로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마음이 통해 심장이 연결된 두 사람은 오롯이 하나가 되었다. 이젠 그 누구도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믿음이었다.

해일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도운을 매일 사랑하여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이번엔 정말 도운을 놓칠 일 없을 것이라고.

“도운아.”

“…네.”

내 지난 과오를 용서하고 받아준 너의 넓은 마음만큼, 이젠 내가 널 담는 커다란 바다가 되길.

“네, …형.”

내 기쁨과, 슬픔의 주인…….

“사랑해.”

네가 편히 녹아들 넓은 바다가 되어 평생 내 안에서 항해할 수 있길.

대해大海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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