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너의 바다
햇살이 서서히 창가에 드리우는 아침.
도운은 제 눈꺼풀 위를 어루만지는 햇빛에도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응…….”
축축하게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몸을 뒤척여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고 어쩐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었다. 그의 몸을 무언가 단단히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운은 그냥 움직이기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
어중간한 잠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그는 꿈처럼 이어지는 생각에 서서히 잠겼다. 오늘 무슨 요일이더라. 출근하려면 멀었겠지. 휴가를 냈던가. 몸이 약간 뻐근한 것 같고. 왜 뻐근한지 모르겠다. …따뜻하다.
그러다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틀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파고든 것이 누군가의 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번쩍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해일이 제 눈앞에 있었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켜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눈을 뜨는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기에, 한순간 꿈인가 하고 착각까지 하고 말았다.
자신의 몸을 단단히 붙들어 끌어안은 것도 해일이었다. 꼭 정사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을 감싼 팔과 넓은 품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제야 도운은 어제 있었던 일을 모조리 떠올릴 수 있었다. 해일에게 다시 돌아와 그와 사랑을 나누던 깊은 밤. 오늘은 그저 평범한 날의 아침이 아니었다. 잠시 상황파악을 하던 도운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잠시 해일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깊은 눈매와 높게 선 콧대로 입체적인 얼굴 곳곳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나 다부진 턱선. 어쩐지 목울대도 자신보다 더 남자답다. 그렇게 탈의된 상체까지 찬찬히 훑고 내려온 도운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아…….”
해일이 어느새 새벽빛과 같은 눈동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도운의 전신을 휘감았다. 갑자기 세게 끌어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그의 단단한 품 안에 얼굴을 폭 박고 말았다. 상의를 입지 않은 몸에 볼을 비비고 있으려니 도운은 어쩐지 부끄러워했다. 지난밤 맨살을 맞대고 정을 나눈 사람답지 않게 얼굴로 약하게 열이 올랐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바보처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할 뻔하다가 간신히 알맞은 인사를 찾아 건넸다. 도운의 숨이 품 안을 간지럽게 했는지 해일이 낮게 웃으며 도운의 머리칼을 큰 손으로 쓰다듬었다.
“잘 못 잤는데. 조금 더 잡시다.”
“왜 못 주무셨어요.”
먼저 잠들어버린 제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그랬나, 도운이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언제 정사가 끝났는지, 언제 잠에 빠졌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데 제 몸은 깨끗한 상태로 잠옷까지 잘 갖춰 입고 있었다.
“벌써 9시가 넘어서…….”
흘긋거리며 저 너머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도운이 중얼거리자 해일이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팔로 허리를 감싸 하체까지 제 몸에 딱 붙인 채로 해일은 도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쉬는 날인데 어때. 그리고… 밤새 서도운 씨 구경하느라 내가 잠을 잘 못 잤습니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듣기 부끄러운 소리를 하는 탓에 귓가에 깃털이라도 내려앉은 듯이 간지러웠다.
“자는 사람을 왜 구경하십니까…….”
도운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해일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냥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난 도운이 감격스럽기도 했고, 다행이기도 했고. 너무 보고 싶었기에 이대로 자버리기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혹여 잠들었다가 도운이 품에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도운이 없는 동안 자주 경험한 환각이기에 조금 두려운 것도 있었다.
해일은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고는 입 맞춘 부분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이마에 난 솜털이 보드라웠다. 가장자리로 난 잔머리도 귀여워 절로 쓰다듬었다.
“예쁘니까 구경하지.”
해일은 다시 이마에 촉촉 입술을 대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제 감정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운의 심장이 터질 듯이 내달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꺼풀에도, 코끝에도, 동그란 볼 위에도 끝없이 입술을 내렸다.
“서도운 씨가 여기 있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요.”
도운을 품 안에 가두고도 안심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그는 도운의 몸 여기저기를 쓸어댔다. 조그마한 날개 뼈를 모양을 확인하듯 손끝으로 만지고 토닥이며 도운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도운은 잠시 품에 안겨 있다가, 먼저 고개를 들어 해일의 턱 끝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며 작게 물기 어린 소리가 나고, 해일이 도운을 내려다보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계속 이사님과 같이 있을 거예요.”
도운은 해일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팔을 올려 해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온기가 빈틈을 모르고 맞붙었다. 엉겨 붙은 심장 소리가 멈춤을 모르고 커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금 사랑을 속삭이며 야트막한 잠에 빠져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배가 고프다는 도운의 말에 해일은 곧장 음식을 배달시켜 점심이나 다름없는 늦은 아침을 끝마쳤다.
식사 후 도운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해일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지만 하는 행동은 매일 보던 연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도운은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른 어떤 때보다 이렇게 자신을 챙기는 해일을 보니 정말 다시 이어졌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젖은 곳 없이 꼼꼼히 말려준 해일이 도운에게 말했다. 간간이 손에 닿는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서 그런 건가 싶어 드라이어를 끄고 다시 이마에 손을 댔다. 손등으로 도운의 볼과 목덜미도 쓸었고, 팔뚝도 가볍게 쥐어보았다. 역시 미열이 느껴졌다. 해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가 뜨거운 물로 막 샤워하고 나와서 그런 걸 거예요.”
어젯밤 관계를 너무 무리해서 가졌나 싶어 당장 병원에 가자는 해일을 도운이 허둥대며 말렸다. 그럴 필요 없다고 손까지 내저어가며 막아서기에 해일은 하는 수 없이 상비약 하나를 먹이는 것으로 타협했는데.
정확히 한 시간 뒤. 도운은 펄펄 끓는 몸을 하고는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정말 말 안 듣지.”
해일이 잠시 씻으러 들어간 사이 도운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놓인 담요를 뒤집어쓰고 소파 구석에 기대어 있는데, 이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해일이 밭은 숨을 내쉬는 도운을 발견하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둘러업고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도운이 해일의 옷자락을 꾹 쥐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간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제 밖에서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해일이 얼음주머니와 물수건을 가지고 침실로 돌아왔다. 열이 올라 붉어진 뺨을 한 번 식히듯 수건으로 쓸어주고, 네모반듯하게 접어 이마에 올렸다. 그 위로 얼음주머니도 매달아 고정한 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도운의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그냥…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요.”
퇴근하고 곧장 집에 오겠거니 싶어 그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한 시간 정도 늦게 등장했지만, 밖에 오래 있어서 열이 오른 게 아니었다.
제멋대로 떠나온 해일에게 다시 다가간다는 긴장과 떨림, 그리고 아직도 변치 않은 마음을 확인한 것이 도운은 퍽 안심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병원에 갈 정도가 아니라 조금 쉬면 나을 것 같았다.
“저 원래 이렇게 약하지 않은데.”
신장이나 위장이나 건강을 회복한 지 오래였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아픈 적이 거의 없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병이 나서 꼴사나워 보일 것이 걱정되었다.
“오늘만 이런 거예요.”
“알겠으니까 편히 좀 누워요.”
자꾸만 휘적이는 도운의 두 팔을 잡아 이불 속으로 넣었다. 어깨까지 두툼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해일이 그 옆에 모로 누웠다. 팔을 괴고 도운을 바라보면서 도운의 가슴 위를 토닥여 주었다.
“한숨 자요. 푹 자야 금방 낫지.”
크리스마스인데. 이렇게 앓아누워 버리느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운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사님이 간호해 주시니까… 정말 좋아요. 저 너무 철없나요?”
눈을 꼭 감는다 싶더니 다시 반짝 떴다. 그러고 하는 말이 저 말이다. 해일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가 너무 어리광 부리는 걸까 봐.”
“어리광 부려요, 마음껏.”
해일에게 전적으로 의지해 지낼 때와는 달리 지금은 조금 어리광 부려도 제 자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도운은 덩달아 빙긋 웃더니 팔을 뻗어 해일을 끌어안았다. 그 탓에 머리에 올린 물수건이 옆으로 떨어졌다.
“이런.”
해일이 손을 뻗어 얼음주머니의 각도부터 다시 맞춰주는데, 도운은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형한테… 옮기면 어떡해요.”
“…차라리 옮겨요. 내가 대신 아프게.”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벌써 목소리가 갈라진 걸 보니 꽤 앓을 모양이다.
해일이 도운의 뜨끈한 몸을 꼭 끌어안더니 입술을 찾아들었다. 부드럽게 위아래 입술을 한 번씩 빨아들인 뒤, 혀를 내어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자 도운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해일은 이로 아랫입술을 물다가 자연스럽게 그 사이를 혀로 파고들었다. 입 안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해일은 치열을 훑고 도운의 혀를 찾아 얽었다. 미끄덩한 살덩이를 비비고 괴롭히자 숨이 부족한지 달뜬 신음을 흘렸다. 해일은 타액을 모조리 삼켜버린 뒤에야 도운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촉촉해진 입술이 음심을 자극했으나 애써 내리눌렀다.
도운은 약 기운 때문인지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해일은 그런 도운을 한참 토닥여 주었다. 식사 땐 죽을 끓여주고, 식은땀을 흘린 몸을 직접 닦아주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모양새는 조금 달랐지만, 둘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오로지 서로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서 다른 연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따뜻한 크리스마스였다.
* * *
―정확히 1분 뒤, 제야의 종이 울립니다!
격양된 리포터의 말에 그 뒤를 둘러싼 사람들이 크게 환호했다. TV 속 사람들은 춥지도 않은지 제야의 종소리를 직접 들으러 서울 한복판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벌써 1월 1일이라니.”
도운이 와인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집에서 간단하게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 제야의 종소리는 TV로 듣기로 하고, 해일이 빈티지 와인 한 병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거실에 자리한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들려오는 종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이번 새해는 함께 맞이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짧게 입을 맞춘 해일은 치즈 하나를 집어 도운의 입에 넣어주었다.
“저도 이제 스물여덟 살이네요. 1년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요.”
해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실은 작년 한 해만큼 느리게 흘러간 때도 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다르겠지. 도운을 다시 만난 지금부터는 또 너무 빠르게 흘러가 아쉬워할 것이다.
“올해는 뭘 하면서 지내면 좋을까요.”
“음, 제일 먼저… 말 놓기는 어때요.”
“네?”
“이젠 존댓말 안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해일이 도운의 귓불을 살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형이라고는 가끔 해주면서 왜 말은 안 놔요?”
간지러운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면서도 뜬금없는 소리에 답했다.
“이사님도 안 놓으시잖아요.”
“나도 놓을게.”
단번에 말을 놓고 반말해 오는 해일을 보며 도운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갑자기 말을 놓는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그런지 단번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도 입술 위로 해일의 키스가 몇 번이나 와 닿았다.
“어, 어떻게 그래요.”
“어릴 땐 잘만 했으면서 왜 그래.”
“그건! 너무 어렸을 때고요. 일곱 살이나 많은 형한테 어떻게…….”
“…….”
도운이 삐죽대며 와인 잔을 다시 쥐었다. 술을 조금 따르더니 두 손으로 둥근 부분을 잡고 TV를 바라보며 홀짝거렸다.
새삼 나이 차를 깨달은 해일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일곱 살……. 일곱 살이나 어린 제 연인. 그렇게나 차이가 났던가? 전혀 자각을 못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어린아이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았으나… 새삼 나이 차를 인지하니 놀라웠다.
“진짜 아기네.”
보송보송한 살결이나 새파랄 정도로 흰 눈만 봐도 다 자란 어른과 같다고 보기엔 어렵긴 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좀 있으면 서른인데요.”
무슨 콩깍지가 쓰인 건지 절 어린애로만 보는 해일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요? 어린 사람이 더 좋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못 가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해일은 비스듬히 앉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도운을 바라보았다. 가다니, 어딜. 도운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질투를 해오는 해일이 더 어린애 같다고 느끼며 도운은 웃었다.
해일이 그러한 것처럼 도운도 카나페 하나를 집어 들어 해일의 입가로 가져갔다. 여전히 도운을 응시한 채 얌전히 음식을 받아먹은 그가 도운의 손을 꼭 붙들었다.
“손가락이 비어 있으니까 내가 불안해.”
이전에 해일이 줬던 반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도운의 손에 반지가 없었다.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정말 버렸대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다시 새로 맞춰주면 되었으니까. 해일이 손등에 입을 맞추고 크림치즈가 묻은 손끝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읏…, 반지… 집에 두고 왔어요. 사실 잘 안 끼고 다녔거든요.”
“누가 너한테 눈독 들일까 봐 일부러 선물한 건데. 나 없는 동안 반지도 빼고 다녔어요?”
“그게, …그거 진짜 다이아몬드더라고요?”
도운이 해일에게서 제 손을 빼내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금은방 가서 물어봤는데. 전 큐빅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전에 분명 자신이 큐빅이라고 얘기했을 때 해일이 전혀 정정하지 않았었다. 어쩐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손에 쥐고 돌아다녀요, 저는 무서워서 도무지……. 그래서 그냥 집에 두고 다녔어요.”
“그랬습니까.”
도운의 항변에 해일이 제 와인 잔을 둥글게 돌렸다. 안에 얕게 따라진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리모컨으로 TV를 끄자 어두워진 거실엔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내 딴엔… 이렇게 재력 있는 애인 있다고 말하고 다니라고 준 건데.”
해일이 상체를 기울더니 도운의 눈가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빼앗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더 작은 거로 다시 사줄까?”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니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예뻐서……. 진짜 예뻐요, 많이.”
그저 조금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워낙에 크고 번쩍이는 탓에 어딜 가나 그 반지에 대해 묻는 것이 곤란하게만 느껴졌다. 해일과는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양심에 찔려 애인이 줬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다. 질문을 한 열 번쯤 받았을 때 도운은 그냥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기로 결심했다.
“아니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시계 사줄까? 자동차?”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가의 제품들에 도운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른 건 바라는 거 없고…….”
그리고 잠시 뜸 들이던 도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사님 담배 그만 피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해일이 도운을 가만히 응시했다. 도운은 제 손가락을 얽었다. 해일의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살피면서 말했다.
“건강에… 안 좋으니까……. 저도 이제 다 회복해서 건강해졌는데 이사님께서 몸이 상하시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요.”
해일의 흡연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건강의 문제가 1순위,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안한 감정 때문이었다. 비흡연자의 눈으로 봤을 땐 뭔가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나 담배를 피우는 것같이 느껴졌다. 실제로 해일도 도운의 사고 이후 금연하다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에 담배 냄새가 났었고.
그가 계속 담배를 피운다면 꼭 도운 자신이 그를 속상하게 한 건 아닌지 자꾸만 미안해졌다. 다시 만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생각 같았다.
그 말에 해일은 입을 크게 휘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제 몸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연인이, 걱정 어린 촉촉한 눈동자가, 어물어물 이유를 말해오는 입술이 전부 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오늘부터 끊을게요.”
애틋한 마음이 샘솟았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에 해일은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살면서 이런 기분이 든 적 없다. 도운 이외에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생겨본 적이 없다. 생소하면서도 강한 책임감이 동시에 밀려드는 이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이 어려웠다.
해일은 한 손으로 도운의 턱을 가볍게 쥐고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서로 문질러졌고, 이내 서로의 입술을 입에 담으며 가볍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도운은 사르르 눈을 감으며 해일의 팔을 붙잡았다. 그건 말리는 손짓이 아니었다. 이 행위에 더 깊게 빠져들고 싶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아…….”
금세 촉촉하게 젖어버린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일은 이로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조금 내려와 턱 끝에도 입을 맞췄다. 선을 따라 귓가까지 혀를 빼 핥으며 올라와 귓불을 입술로 물자 탄성이 터졌다.
해일은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목 안을 눌러가며 짧게 가라앉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내 도운의 몸을 감싸 안고는 확 당겨 제 허벅지 위로 순식간에 몸을 앉혔다.
“엇……!”
도운이 놀랄 새도 주지 않고 허벅지에서부터 골반까지 쓸어 올린 뒤 가볍게 쥐며 다시 키스했다. 이번엔 조금 더 깊었다. 혀가 제일 먼저 입술 틈을 파고들어 여린 살을 훑어나갔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고 자그마한 혀 밑까지 누르고 들어가자 도운의 몸이 오싹오싹 떨렸다.
하는 수 없이 해일에게 몸을 기대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힘을 주고 버티던 다리도 서서히 풀려 해일의 다리에 완전히 무게를 기대자 그 아래에서 욕망 어린 열기가 느껴졌다.
“하…….”
해일은 이미 발기한 상태였다. 허벅지 한쪽이 그의 커다래진 성기로 부풀어 있었고 도운의 엉덩이에 그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걸 해일이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도운의 허리에 올린 손에 더 힘을 주어 내려앉게 만든 뒤 가볍게 엉덩이를 돌리도록 만들었다. 도운의 말랑한 엉덩이가 해일의 허벅지와 성기를 마구 자극하고 말았다.
그 감촉에 덩달아 도운의 숨도 들떴다. 직접적인 삽입이 없었어도 이렇게 엉덩이에 와 닿는 감촉만으로 자꾸만 뒤가 움찔거렸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왜 이렇게 못 참겠지.”
해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끝이 갈라져 거칠어진 목소리에서 그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참을 필요… 없었다.
도운은 말 대신 자신이 먼저 해일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고개를 꺾어 그에게 누르듯 키스하고, 입술 사이를 서툴게 혀로 문질러 넣자 허리를 잡은 해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읏!”
해일은 급히 제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크게 문지르고 거칠게 빨아들이며 도운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해일의 손끝이 도운의 허벅지로 향했다. 옷 위로 문지르는 것임에도 살을 누르고 긁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긴 손가락이 중심부를 거칠게 파고들 듯 쓸면 몸이 절로 튀며 움찔거렸다. 그는 다른 손으로 도운의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자신에게서 멀어질 수 없도록 고정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깊은 늪에라도 빠진 듯 성감에 허우적댔다. 도운은 감은 눈을 더 힘주어 감으며 이 간지러운 감각을 해소하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큰 손이 엉덩이를 꽉 쥐어오는 감각에 척추에 전기가 내달렸다.
“…하아, 혀 내밀어봐.”
“으응, 아…….”
달뜬 얼굴로 도운이 혀를 삐죽 내밀자 해일이 정신없이 물고 빨았다. 혓바닥 위를 간지럽게 이로 긁는 것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도운은 입을 벌리고 더운 숨을 뱉으며 마구 신음했다.
해일의 손은 쉬지 않고 도운의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어깨부터 등허리를 훑고 내려오더니 상의를 살짝 들어 올려 그 틈을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배를 엄지로 살살 어루만지다 손톱을 세워 긁고 올라와 가슴을 쥐었다.
“으흐윽!”
벌써부터 예민하게 서 있는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당겼다. 혀를 빨리고 있는 탓에 신음이 줄줄 새는 기분이었다. 도운은 쪽쪽 소리가 끝없이 귓가를 울리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해일은 잠옷 단추를 위에서부터 서서히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혀를 놓아준 그의 입에 목덜미를 진하게 빨아들이며 자국을 남기고 내려왔다. 쇄골을 부술 듯이 이로 물고 입술을 비비며 그 또한 거친 숨을 숨기지 못했다.
“아……. 으읏…….”
단추가 다 풀린 옷을 젖혀 벗겼다. 동그란 어깨가 달빛을 받아 빛을 냈다. 해일은 제 혀로 그 위를 한참 문지르고 눌렀다. 예민한 부위도 아니었는데 미끄럽고 말캉한 것이 피부 내면을 자극하는 듯한 느낌에 도운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해일의 입술은 곧 도운의 가슴으로 향했다. 손으로 세게 살을 몰아 쥐자 유두가 톡 튀어나와 있어 그것을 입에 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해일은 혀끝으로 살살 문지르다 입 안 가득 담고 이로 긁는 것을 몇 차례나 반복했다.
“하아, 아! 아으응…….”
작은 돌기를 혀로 몇 번 굴리는 것만으로도 도운은 아래를 세우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고간에 다시 해일이 손을 대자 도운은 움찔거리며 다리를 조였다. 해일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유두를 빨고 아래를 더듬었다.
“잠, 잠시만… 으응… 바지…….”
유륜을 긁고 꽉 물어오는 감각에 허리를 휘며 고개를 젖혔다. 도운은 떨리는 손을 내려 제 바지춤을 붙들었다.
“이거 벗어야……. 아……!”
잠옷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데 해일이 더 빨랐다. 허리를 감싸 몸을 조금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아래로 손을 넣어 바지를 확 끌어 내렸다. 허리가 고무줄로 되어 있어 걸리는 것 없이 바로 허벅지까지 바지를 벗겼다. 덩달아 속옷 또한 벗겨 내려갔다. 순식간에 엉덩이와 성기가 찬 공기에 드러났다.
발기해 아랫배에 착 올라붙어 있는 것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해일은 손바닥으로 기둥을 감싸고 엄지로 귀두 부분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읏, 으…….”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세게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살이 오른 엉덩이가 손아귀 안에 꽉 차는 것이 묘한 흥분감을 불러일으켰다. 해일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도운의 가슴 여기저기 여린 살을 핥고 빨아들였다.
“벌써 흘리는 것 봐.”
그가 엄지를 떼자 손가락과 귀두 사이에 끈적한 액이 길게 늘어졌다.
“아……!”
해일은 세 손가락으로 귀두 위를 차례로 문지르며 손을 적셨다. 그리고 곧장 뒤로 가져갔다. 왼쪽 엉덩이를 세게 쥐며 살을 벌리고, 그 사이로 손가락을 문질러댔다.
“흐응, 아…….”
“힘 풀어요.”
구멍 위를 살살 문질러가며 미끄러운 액을 묻히는 동안 구멍은 몇 번이나 움찔거리며 조였다. 해일은 중지를 밀어 넣으려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도운의 볼 위로 잘게 키스하며 긴장을 풀도록 도와주었다.
힘주어 구멍을 누르자 손가락 한 마디가 파고들었다. 젤도 바르지 않은 상황이라 뻑뻑했지만 어쩐지 안으로 진입할수록 도운은 더 흥분되었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이물감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해일은 다시 손을 빼 다급히 서랍으로 뻗었다. 대충 안을 훑어 손에 집히는 튜브를 꺼내 들었다. 한두 번 사용했던 핸드크림이었다. 해일은 바로 뚜껑을 열고 손에 한가득 짰다. 엉덩이 사이에 치덕치덕 바른 뒤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읏! 하아……!”
좁은 안쪽을 벌리고 들어왔다. 부드럽게 풀어줄 모양인지 손가락 끝이 안쪽을 꾹꾹 누르고 쓸어내렸다. 곧이어 하나가 더 밀고 들어왔고 해일은 내벽을 넓히고 손을 잘게 흔들기를 반복하며 도운을 자극했다.
“흐으응, 으으, 으응……!”
서서히 도톰해지는 전립선 부근에 손끝을 대고 마구 흔들어대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성감이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뜨거워졌다. 도운은 해일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이를 아무리 세게 물어도 사이로 새는 신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으로 좁은 몸을 벌렸다. 해일은 일부러 도운이 느끼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쓸어내렸다. 거칠게 그 부분을 쑤시면 잠시 손가락을 물며 조여오다가도 이내 바르르 떨며 확 이완되었다.
“아… 서도운.”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쓸어주고, 목덜미를 진하게 빨며 추접한 소리를 냈다.
허벅지 중간에 걸린 속옷과 바지 때문에 살이 붉게 짓눌린 모습이 그렇게 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기 끄트머리에선 프리컴이 배어 나오다 못해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제 바지춤을 언제 이렇게 축축하게 다 적신 것인지 모르겠다.
해일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짐승처럼 거친 소리를 냈다. 그의 성기가 바지 밑에 갇혀 한계까지 발기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운의 뜨거운 몸을 파고들어 괴롭히고 싶었지만 거실엔 콘돔이 없었다.
“아으… 그냥…….”
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도운이 중얼거렸다.
“빨리…….”
하얀 크림을 아랫도리에 치덕치덕 묻히고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엉덩이를 살살 흔들어댔다. 제멋대로 뒤를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며 해일의 손가락을 성기라도 된 양 물고 삽입했다. 해일의 퓨즈가 끊어져 버린 것은 그때였다.
도운의 머리칼을 손에 세게 쥔 채 입을 맞췄다.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타액을 빨고 삼키며 아래에서 성기를 꺼냈다. 흉흉하게 선 기둥에 핏줄이 굵게 드러난 상태였다. 그는 왼손으로 기둥을 몇 번 추어올렸다.
“아…….”
어둠 속에서도 성기의 실루엣은 잘 보였다. 팔뚝만 한 것이 서서 꺼덕이며 도운의 성기와 살며시 닿아오고 있었다.
해일은 도운의 바지를 완전히 잡아 벗겼다. 순식간에 나체가 된 도운을 무릎으로 세운 뒤 제 성기로 엉덩이를 쿡쿡 찔러댔다.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미끄러운 크림을 귀두에 발랐다.
엉덩이 사이를 몇 번 미끄러지던 성기가 마침내 벌어진 둔덕 사이를 파고들었다. 질척하게 젖은 구멍에 뜨거운 성기가 닿자 도운이 화들짝 놀라며 신음했다.
“아, 아응… 잠시…….”
“후우…….”
“하아, 형, 형……!”
해일이 도운의 골반을 붙들고 힘주어 누르자 찌걱 소리가 나며 아래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귀두가 안으로 집어 삼켜졌다.
“흐으윽!”
그것만으로도 버거웠는지 도운이 몸을 후드득 떨었다. 제 몸의 무게 때문에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으며 성기를 급박하게 먹어 치우는 것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거… 이 자세, 너무……! 으응!”
“하아.”
“너무 깊게… 아아!”
도운은 이 자세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해일과 이런 자세로 관계를 가졌을 때 눈앞이 새하얘지던 감각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흔들리며 신음하던 기억. 그가 저 안쪽 깊은 곳을 부술 듯 쳐올리면 이내 섹스밖에 모르는 짐승처럼 매달리고 삽입을 조르게 된다.
“하아, 아, 이사님… 으응! 흐으!”
“힘 빼고…….”
도운이 두려움 때문인지 뒤를 세게 조이자 해일도 성감을 참아내듯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중얼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몸을 달래가며 기둥의 중간까지 밀어 넣자 안이 꽉 막힌 듯 진입이 어려웠다. 해일은 그쯤에서 그치고 서서히 허리를 쳐올렸다. 순간 깊은 안쪽을 찌르고 빠져나가는 성기에 도운이 허리를 크게 휘었다.
“아아!”
“윽…….”
“하아윽, 흐으…….”
단번에 배 속까지 찌르고 들어갔다. 참지 못하고 퍽퍽 쳐올리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던 도운이 제 배를 감싸고 바들바들 떨다가 이내,
“흐윽, 으으…….”
빠른 사정에 이르고 말았다. 절정에 다다르면서도 몸이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렸다. 뒤를 간헐적으로 조이며 해일의 배에 정액을 줄줄 내뱉은 도운이 앓는 소리를 내며 훌쩍였다.
“배가… 아응, 아파요.”
시뻘게진 눈으로 조임을 만끽하고 있던 해일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도운을 놓아주었다. 그의 등허리를 한 손으로 가뿐히 받치고는 소파에 길게 눕힌 뒤에 어깨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천천히 할게요.”
해일은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열고 들어가 배 속을 엉망으로 만들 때까지 무자비하게 삽입하고 싶었지만 애써 제 욕망을 억눌렀다. 사정한 채 힘을 잃은 도운의 성기를 살살 만져주고, 발딱 서 있는 유두를 입에 넣고 굴려주며 다시 흥분을 일깨웠다.
사정으로 인한 긴장이 서서히 풀어질 때쯤 해일은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번엔 아주 부드럽고 천천히. 도운이 자지러지는 곳을 귀두로 꾹 눌러가며 추삽질을 이었다.
해일은 도운을 엎드리게 한 뒤 엉덩이에 난 작은 점을 빨기도 하고, 힘이 빠져 늘어진 몸을 들어 올려 침실로 데려가 온몸을 녹진하게 핥았다. 그렇게 세 번의 사정으로 기나긴 정사를 마쳤고 어느새 드리운 깊은 밤의 장막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현관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에 주방에 있던 도운이 냉큼 달려 나왔다.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막 퇴근하고 돌아온 해일은 오늘 하루 일 때문에 쌓였던 피로가 도운의 맑은 미소에 단번에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음…….”
신발을 벗기도 전에 도운의 말랑한 두 볼을 붙잡고 입술 위로 도장을 찍듯 키스했다. 그도 모자랐는지 도운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는 혀를 살며시 밀어 넣었다. 잠깐 장단을 맞춰주려던 도운이 점점 깊어지는 키스에 상체를 뒤로 빼자 해일은 덩달아 몸을 숙여가며 입술을 괴롭혔다.
“하아!”
도운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괴로워하며 해일의 어깨를 탁탁 치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부은 입술을 도운이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정말…….”
살짝 흘겨보자 해일은 씩 웃으며 도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도 못 해요?”
“그럼 실컷 보시면 되잖아요…….”
보기만 하면 되지 현관에서부터 그리 깊은 입맞춤을 해오면 어떡하느냐고, 도운이 해일을 타박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도운을 따르며 큭큭 웃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아주머니가 갈비찜 해주셨어요.”
도운은 해일이 돌아올 타이밍에 맞추어 가사 도우미가 해두고 간 요리를 데워 상을 차렸다. 해일은 도운에게 집안일 할 필요 없다며 자신이 와서 차린다고 말렸는데도 도운은 도통 듣지 않았다. 새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저녁 식사를 차리는 것은 도운의 일처럼 되어 있었다.
새해 연휴가 지나고 나서 해일은 도운에게 함께 살기를 권했다. 도운과 헤어지기 전 미리 마련해 두었던 집으로 데려가 구경시킨 뒤에, 여기서 새 출발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에 도운은 얼굴을 붉히며 승낙했다.
하지만 집도 해일이 사고, 미리 들어차 있는 가구도 해일의 돈으로 산 것이었으며 생필품이나 옷 같은 것들도 모두 해일이 구매했다. 그게 미안했던 것인지 도운은 저녁 식사라도 자기가 차리고 싶어 했다. 와인 바도 그만둔 마당에 집에서 가만히 할 일도 없었다.
해일은 도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사 도우미를 고용했고, 저녁 식사도 미리 낮에 준비한 뒤 퇴근하라고 일러두었기에 도운은 그대로 상만 차리면 되었다. 직접 요리한 것은 아니지만 미리 준비했다는 점에서 꽤 뿌듯해하는 도운을 귀여워할 수 있어 행복한 저녁이었다.
“내일도 늦게 오시나요?”
식사를 하던 도중 도운이 해일에게 물었다. 최근 사장으로 특급 승진을 이룬 해일에게 쏟아진 일은 바다와 같았다. 일을 끝내도 끝낸 것 같지가 않게 또 다른 일이 주어졌다. 해일 자체가 누군가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하질 못하는 성격인 데다 직접 해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빠른 일이었기에 다른 기업의 총수들과는 다르게 항상 일이 많았다.
요즘은 특히 더 그랬다. 하지만 이제 슬슬 나아지려는 참이었다.
“내일은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겠군요.”
“그러십니까?”
“어디 좀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시간 괜찮아요?”
해일은 챙겨온 서류봉투 하나를 도운에게 내밀었다. 도운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그걸 받아 들고는 곧장 풀어 살펴보았다.
안에서 나온 파일은 그가 작년에 새로이 기획해 겨울에 준공을 한 새 문화재단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앞장부터 천천히 내용을 살피고 있는 도운에게 해일이 넌지시 말했다.
“구성원을 기획하고 있는데, 서도운 씨가 재단을 맡아줬으면 좋겠어요.”
“……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발언에 놀라 도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가 어떻게…….”
도운이 놀랄 것을 예상한 해일은 그저 마저 읽어보라는 듯이 손짓할 뿐이었다. 이 사업은 오롯이 도운만을 위해 진행된 것이었으니 해일은 제 뜻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문화재단의 이사장 직책에 반드시 도운을 올릴 작정이었다.
“저는, 저는 못 해요. 자격이 없어요.”
서류를 끝까지 확인한 도운이 파일을 덮었다. 옆자리에 가만히 내려두고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밥을 떠먹었다.
“이 재단, 서도운 씨 주려고 설립한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무슨 수로 이걸 운영하겠어요.”
“왜 못 합니까. 일이야 배우면 되는데. 비서 일 하던 것처럼 차근차근 하면 됩니다.”
두 사람은 밥을 먹는 내내 옥신각신했다. 갑자기 재단을 맡아 운영하라니 너무 커다란 일처럼 느껴져 함부로 수락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일의 고집을 도운이 꺾을 방법은 없었다.
“이름도 해운으로 지었는데 다른 사람 줄 수는 없잖아요.”
“우리 이름 한 자씩 따신 거예요?”
“네.”
“와…….”
조금 로맨틱하긴 했다.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을 당장 겪고 있는 도운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저녁 내내 이 일과 관련해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마침내 합의점을 찾았다. 우선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 운영토록 하고, 도운은 그 밑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기로 한 것이다. 2, 3년에 걸쳐 천천히 운영방법을 습득하고 역할을 이어받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도운이 음악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제가 재단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음.”
해일은 턱을 가볍게 쓸었다.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 일컬어지는 S대의 경영대학을 졸업해 놓고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해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어쩐지 결심에 차 입술을 꾹 물고 있는 도운을 보니 더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도운이 그렇다니 그런 것이겠지. 해일은 결국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대학원에 대한 결심을 단시간에 한 것은 아니었다. 도운은 작년부터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피아노와 관련한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음악을 제대로 공부한 것은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이젠 정말 본격적으로 깊이 있는 음악 공부를 해보고 싶기도 했다.
해일은 누구보다 도운이 피아노를 전공하길 바랐기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학원부터 빨리 알아봐야겠어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내가 알아봐 주겠습니다.”
해일이 도운을 끌어안고 뺨에 여러 번 키스했다. 기어코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 이끌어간 해일은 만족감에 웃었다.
“대학생 때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대학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모른 채 지나왔던 도운의 대학생 시절이 문득 궁금해졌다. 해일은 도운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깍지를 끼기를 반복하며 물었다.
“저는 그냥…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어요.”
“자세하게 얘기해 봐요.”
“전 정말 학원처럼 학교에 다녀서……. 평범하게 지내서 말씀드릴 게 없어요.”
“평범?”
“아… 평범은 아닌가.”
도운이 해일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사실 제가 휴학을 좀 빨리, 많이 한 편이라서 같이 다니는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냥 조용히 혼자 다니기만 했지. …그땐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할 때라서 동기들이랑 많이 못 어울렸어요. 조금 겉돌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도운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그 자주 있는 술자리도 한 번 참여할까 말까 했었고, 매년 열리는 축제도 가보지를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너무 아쉬웠다. 졸업하고 나니 또래와 친해지고 놀러 다니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기에 더 그랬다.
해일은 그게 제 탓이라고 여겼다. 섣부른 오해로 도운의 청춘을 멋대로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 죄는 어떻게 해서도 갚을 수가 없겠구나. 그는 다시금 도운에게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대학원 가면 친구 많이 사귈 수 있겠죠?”
벌써 대학원에 붙은 것처럼 도운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가게 되면 수업도 열심히 듣고 성적도 잘 받을 것이라고, 축제 구경도 해보겠다며 웃었다. 해일은 가까스로 얻은 도운의 이 미소를 잃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인사과 이준혁입니다.”
이름을 딱딱 끊어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정자세로 서 있었다. 제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청영의 우두머리 정해일 사장이라니.
“앉아요.”
“네!”
해일이 가볍게 소파에 손짓하자 준혁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앉았다. 긴장한 티를 숨길 수가 없었다. 해일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그와 단둘이 대면하게 되다니.
해일은 비서가 가지고 들어온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해일을 준혁이 곁눈질로 몰래 살폈다. 엄청 잘생겼다. 신문이나 뉴스에 간혹 나오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꼭 영화배우처럼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실물은 더했다. 카메라가 그의 외모를 감히 다 담지 못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몸에서 위압감이 절로 뿜어져 나왔다. 카리스마라고 해야 할지, 포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모를 기운이 사장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서 일하는 비서들은 진짜 힘들겠다.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던 찰나 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긴장했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긴장할 것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면담이라고 생각해요.”
해일은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 가벼운 질문부터 건네기 시작했다.
“이준혁 사원이… 입사한 게 언제였죠?”
“재작년 3월입니다.”
“아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몰랐다는 듯 대답했다.
“그 팀이 회식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분위기 따라가려면 꽤 힘들었겠어요.”
“아, 하하. 저도 입사 초기에는 거의 매주 술자리가 있어서 조금 버거웠는데, 이젠 제가 더 즐기게 되었습니다.”
질문 몇 번에 준혁의 긴장은 꽤 많이 풀어졌다.
사장실로 갑작스레 호출을 당했을 땐, 제 팀원들도 모두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한참을 어리둥절해했었다.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아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해일 사장이 생각만큼 그리 무섭지는 않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그저 인트라넷에 올라온 댓글 한 개였지만 말이다.
실제로 직접 만나 대화를 시작해 보니 강압적이거나 무섭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편안한 말투와 분위기에 준혁은 속으로 무척 다행이다 싶었다. 돌아가서 팀원들에게 베일에 싸인 사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생각에 조금 신이 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가 무슨 일로 자신을 호출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직원 개개인의 복지를 중히 여기는 그가 말단사원을 불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던데, 그 대상이 이번엔 자신인가 하는 생각만 짧게 했을 뿐이었다.
그저 차만 홀짝이고 있는 준혁에게 해일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이사실 비서팀에서 근무하던 서도운 사원과 대학 동기라면서요.”
“엇, 네. 그렇습니다.”
준혁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함께 청영에 입사해 같이 교육도 받으러 다니고 했었는데. 일이 바빠 잘 만나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불미스러운 사고가 났다는 것만 전해 들었다.
“입사 동기이기도 하고. 대학생 때 두 사람이 꽤 친했었나 봐요?”
도운의 대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 돌려 물었다. 꽤나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생소한 상황에 놓인 준혁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속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 중에서는 도운이랑 제가 좀 가까운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운이? 성도 붙이지 않고 부르는 이름에 해일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도운이가 동기 사이에서 인기가 좀, 아니… 아주 많았었거든요.”
인기가 많았다니. 도운이 제게 했던 말과는 정반대의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설마 도운을 잘 모르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자 준혁은 술술 말을 뱉었다.
“말수도 적고 조용한 편이긴 해서 겉도는 것도 같았지만 제가 좀 챙겼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워낙에 도운이를 좋아해서 겉돌게 두지를 않았어요.”
준혁은 볼을 긁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도운이 어딜 가나 꼭 한 명쯤은 그를 불러 세워 안부를 물었고, 술자리가 생길 때마다 도운에게도 함께하자고 권했다. 누군가 맛있는 간식거리를 가져오면 조금 떼어 구석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도운의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다들 도운을 챙기는 것에 맛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도운을 물고 빨던 게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 그랬습니까?”
준혁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안 해일은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무리 지어 놀지도 않았고, 약속마다 거절하고 빠져나가던 사람을 굳이 챙기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운이가, 음…….”
“…….”
“예뻐서요.”
사내자식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머쓱하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뒷덜미를 긁는데, 해일은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뻐?
“도운이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건지 뭔지, 하여튼 보면 챙겨주고 싶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준혁이 뒤이어 뭐라 이야기하는지 해일의 귓가에 잘 와 닿지도 않았다.
하긴 제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다른 사람 눈에 안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간과하고 있었다. 해일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찻잔을 들어 올려 굳어진 표정을 가리듯 한 모금 마셨지만 목이 타는 기분을 쉬이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도운이가 의외로.”
“그래요.”
해일이 준혁의 말허리를 끊으며 찻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두었다.
“잘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고, 이만 나가 봐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끝나버린 대화에 준혁도 덩달아 번쩍 일어났다.
조금 전과 해일의 분위기가 달라진 듯싶었다. 조금 허둥대다가 해일이 살짝 웃으며 문가로 턱짓하는 모습을 보고는 허리를 크게 숙이며 인사했다. 말실수라도 했나 되짚어볼 시간도 없이 사장실을 그대로 나오고 말았다.
덩치가 큰 준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문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해일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렸다.
“김 실장.”
―네.
“인사팀에 비서실 신입 공개채용 하겠다고 전해요. 최대한 빨리 진행하자는 얘기도 같이.”
―알겠습니다.
곧장 내선으로 김 실장에게 연락해 용건을 전한 해일이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내년으로 계획했던 일을 확 당겨 올해 하자는 이야기였다. 불만이 얼마나 속출할지는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만 퇴근해야 할 것 같았다.
* * *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해일은 현관에 신발이 있는 것을 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낮잠이라도 자는 것인가 싶어 침실에 들어갔는데도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제 가방과 겉옷을 내려두고는 도운을 찾아 방을 나섰다.
욕실에도 없고 부엌에도 없다면 그가 있을 곳은 한 곳뿐이었다. 피아노 방. 이 집에 완벽히 방음처리가 되어 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하나 만들어 주었는데, 도운이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면서 그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해일이 근처로 다가가 문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을 살폈다.
“…….”
아니나 다를까, 도운이 몸을 가볍게 앞뒤로 흔들며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주는 제대로 듣고 싶었기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그 기척을 느낀 도운이 홱 뒤를 돌았다.
“이사님!”
아직도 사장인 자신을 이사라고 부르며 도운이 해맑게 웃었다.
“오늘은 정말 일찍 오셨네요. 연습하느라 오신 줄 몰랐어요. 전화 주시지…….”
“아니에요. 연습하고 있을까 봐 일부러 전화 안 했습니다.”
절 배려하고 있다는 말에 도운은 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쩐지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에 그는 높은 소리를 내는 건반을 가볍게 눌러가며 짧게 음을 흘렸다.
“오늘 사원 면담을 하는데, 이준혁이라는 친구가 서도운 씨를 잘 알더군요.”
“이준혁이요? 아, 저도 잘 알아요. 대학 동기였어요.”
도운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손끝을 움직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제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선율이 방을 맴돌았다.
“그 친구가, 대학생 때 서도운 씨가 굉장한 인기인이었다고 하던데.”
“네? 이준혁이요?”
도운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나쁜 말 할 수는 없으니 그냥 한 소리겠죠.”
그러고는 엉덩이를 조금 옆으로 옮겨 피아노 의자에 자리를 만들더니, 그 위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앉아보세요. 학원에서 드뷔시 악보를 줬는데, 제가 오늘 마사지를 받고 왔더니 연주가 정말 잘 돼서.”
도운은 얼마 전부터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다. 이론 수업도 듣고, 따로 레슨도 받으며 하루하루 착실한 학생의 모습을 했다. 그러느라 요즘은 오전과 오후에 걸쳐 집을 비워두는 일이 잦았다. 간혹 손 마사지 치료까지 받고 오는 날엔 더욱이 신이 나서 연습에 몰입했다.
해일은 그걸 떠올리며 도운이 원하는 대로 그 옆에 앉아주었다. 악보를 펼쳐 올려놓으며 가볍게 음을 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자니 도운이 물었다.
“이사님 아직도 피아노 칠 줄 아세요?”
“글쎄요. 그만둔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럼 제가 다시 가르쳐 드릴까요? 달빛이요.”
그러더니 살풋 웃는 것이었다. 광대 위로 기다란 보조개가 쏙 패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여러 추억이 가득 담긴 곡이었다. 해일이 도운에게 처음 가르친 곡이기도 하고, 재회하고 난 뒤 부산에서 자신이 마음을 빼앗긴 계기가 되기도 한 곡. 그 외에도 도운과 얽힌 자잘한 일들이 참 많은 곡이었다.
해일은 눈을 감고 가만히 감상했다.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실력에 들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졌다. 한 겹씩 쌓이는 감수성에 곡이 풍부해졌고 어제보다 오늘 더 완벽했다.
“…….”
제 나날이 누구보다 평범했다고 말하던 도운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반대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에 허덕이며 힘겨워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하루가 아닌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또 감상하며…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는.
“도운 씨.”
“…네?”
마지막 마디를 치며 곡을 마무리한 도운을 해일이 나지막이 불렀다. 그리고 마주친 시선에 얼굴을 살며시 가까이 했다.
눈꺼풀 위로 가볍게 키스한 해일이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오늘도 멋진 곡이었어요.”
“감사합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완벽한 연주였다. 도운은 조금 부끄러운지 시선을 내리깔며 제 손을 가볍게 주물러 풀어주었다.
“이사님이 칭찬해 주실 때마다 되게… 행복해요.”
“…….”
해일은 그 말에 잠시 멈춰 도운을 바라보았다. 작은 칭찬 한마디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연인이 얼마나 애틋한지 모른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도운이 지금껏 제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도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나도 그래.”
해일이 손을 뻗어 도운의 손을 대신 주물러 주었다. 큰 손아귀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이 따뜻하고 보드라워 꼭 해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하다.
“너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그래.”
이젠 정말, 다를 것이다. 해일이 도운과 함께하는 매 순간 행복해하는 것처럼, 해일도 도운을 그렇게 만들 것이다. 항상 해일의 예상을 뛰어넘고, 또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도운을 제가 본받을 것이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반짝거렸다. 바닷물처럼 빛이 넘실거리며 연습실을 따뜻하게 채워 나갔다. 해일은 도운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욕심이 많으니…….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너의 평범한 삶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길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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